은혜 설교 모음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기까지’

하나님아들 2024. 12. 16. 22:36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기까지’

창22:1-18

 

 

창 22장은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 드린 이야기입니다. 번제는 제사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방법)이 번제,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이삭을 지시하신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시는데 이 번제를 아브라함은 5절에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번제는 경배이며 오늘날 예배입니다.

 

롬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열납)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

 

산제사는 영적예배이라고 하였으니, 22장 사건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린 예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3:23-24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곧 아브라함이 드린 예배입니다. 아버지께서 이와 같이 예배를 요구하시는 것은 복주시기 위함입니다.

복은 무엇인가?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약속하신 것이 복이요 약속으로 얻는 것이 복입니다. 즉 약속은 쌍방 간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하나님과 그 복을 받는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보증이 무엇이냐, 바로 예배입니다. 즉 예배를 통하여 약속하신 복을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요, 사람 또한 예배로 말미암아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번제를 요구하시는 것이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독자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약속에 대한 예배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같이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복 주시기 위해 창조하셨고 그 복을 주실 수 있는 예배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요 믿음이 좋은 사람이니 당연히 독자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독자이삭은 말 그대로 아브라함의 전부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목숨보다 귀하고 그 이상의 것이 독자 이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독자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씀에 단 한 마디의 반문이나 의심 없이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드릴 수 있었는가?

이것은 우리의 믿음과 신앙생활에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드렸던 믿음이 오늘 나에게도 있어야 아브라함의 약속(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복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그 후손들에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약속과 복을 받을 것이며,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시작, 뿌리)이라고 확언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아브라함과 같은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면 아브라함 안의 약속과 복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자는 아브라함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며 이는 곧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좇아서 가나안에 도착하고 단을 쌓는데 이는 제사 곧 예배입니다(창12:7-8). 그런데 이때 제사와 22장의 번제(제사)는 다릅니다. 즉 처음에 말한 제사는 아브람의 제사이고 22장의 제사는 아브라함의 제사입니다.

이는 아브람의 예배가 있고 아브라함의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으로 드리는 제사보다 아브라함으로 드리는 제사를 원하십니다. 아브람의 제사로는 약속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으로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제사이기에 2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제사를 열납하시고 그에게 약속을 성취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일2:24-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영원한 생명 곧 영생입니다.

이 약속은 창세전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엡1:3-6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하늘에 속한, 즉 하나님의 모든 것을 사람에게 복으로 주시길 기뻐하시고 창세전에 사람 창조의 계획을 세우십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이 무엇인가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복으로 주시기로 자신에게 먼저 스스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위해서 우리에게 보내신 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자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창세전의 구원은 사람을 예수 안에서 택하시고 예정하시고 자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람이 범죄한 후의 구원도 마찬가지 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도 약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영생을 복으로 주시기 위한 이 약속을 위하여 창세전이나 범죄한 후에나 보내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3:15-16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하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즉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생을 복으로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영생을 주셨는데 창세전에도 우리를 사랑하사 영생을 약속과 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요6: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고 가방만 들고 교회 다니는 것은 종교생활에 불과합니다. 영생을 가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영생을 가진 자가 믿는 자입니다. 교회를 수 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다닌다고 예수 잘 믿는 것 아닙니다. 교회에서 높은 직분을 갖고 열심히 충성 봉사 한다고 해서 신앙생활 잘 하는 것 아닙니다. 아무리 그리했을지라도 자신이 영생을 가진 자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면 진실로 진실로 믿는 자가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믿는 다고 하는 자는 아브람의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배는 믿는 자의 예배입니다.

 

롬6:22-23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믿음의 마지막 최종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열심히 신앙생활 한다고 했어도 그 마지막은 영생인데 그 마지막의 열매를 얻지 못한다면 그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영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은사하면 능력이나 특별한 사역들을 연상하는데 병고치고 귀신추방하고 예언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능력과 사역의 은사들이 필요하지만 아무리 큰 능력을 행하여 죽은 자를 수 없이 살린다고 한들 자신에게 영생이 없다면, 또한 능력과 사역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분명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무엇인가 롬8:32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고 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은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예수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병고치는 능력, 예언하는 능력,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많은 능력들을 사람들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들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고자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요5:39-40, 요6:1-27, 요일5:11-13).

 

요일5:11-13

 

폐일언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아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생의 약속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부지런히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고 외우고 공부합니다. 성경을 설교하고 듣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은 한 마디로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 없이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듣지만 그 안에서 영생을 찾지 못하고 세상의 도덕 윤리 정치 같은 것만 봅니다. 성경 안에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육적인 부귀와 명예와 같은 육신 문제 해결만 찾아 헤매 입니다.

신앙생활은 신앙으로 사는 삶을 말합니다. 신앙은 믿고 바라는 것인데 우리는 무엇을 믿고 바라고 삽니까. 우리가 믿고 바라는 것은 육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것을 믿고 바라는 것으로 산다면 이는 자연인 이방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마6:31-33). 우리가 믿고 바라는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인데 그 약속은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악속하신 것으로 사는 것이니 나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고 영생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인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요6:56-57)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모두 영생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삶,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삶은 모든 사람이 살아야 할 삶의 본이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삶이 우리 사람에게 약속하신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의 삶을 살 때 나타나는 것이 표적입니다(요3:1-). 예수님께 영생이 있었기에 즉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았기에 예수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 있는 신령한 것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표적입니다.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영생이 주님께 있었기에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복, 곧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창조의 목적은 약속을 우리에게 이루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과 모양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창1:26-28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심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복이 무엇인가?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복인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생명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에서 나오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신 복이 없으면 땅을 정복하거나 다스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복이 하나님의 약속인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영생이 있으니 그 영생의 복으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지 못하면 결코 땅을 정복하거나 다스리지 못합니다. 영생한 사람이 하늘(하나님)에 속한 모든 복을 누립니다(엡1:3). 그래서 사람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반증하여 뒷받침하는 것이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과 범죄한 후를 비교해 보세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람은 영생을 상실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 깨지고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냅니다.

 

창3:17이하

 

하나님 형상과 약속, 즉 영생을 상실해 버리니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영생으로 말미암아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을 받았던 사람이 영생을 상실하자 오히려 종신토록 땅을 갈고 수고하여야 그 소산으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영생을 지키지 못하고 영생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요삼1:2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창2:7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은 영으로 사는 자라는 뜻인데 이는 영생을 말합니다. ‘생기’ 즉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영생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존재입니다. 이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것으로 산다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것을 누리는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는 하나님의 약속과 복인 영생을 잃어버리게 한 것입니다. 실낙원이 이것입니다. 실락원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생령된 사람이 영생하는 곳입니다.

 

눅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입니다. 이 천국은 영생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천국,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가진 자라면 지금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천국은 나중에 죽어서 가는 것 아니요 영생은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천국이어야 하고 지금 영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 영생은 죽어서 얻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며 그렇게 알고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 신앙생활하고 있으니 큰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생,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약속을 회복시키기 위해 보내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1:21-23

 

요6:38-40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이와 같이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영생을 상실하게 되었는데(롬5:12),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약속의 영생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 영생 = 임마누엘이 하나입니다.

 이 영생의 약속을 회복하기 위하여 한 사람을 택하여 부르셨는데 그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창12:1-4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그 본토 친척 아비의 집에서 부르시고 지시하신 땅으로 가라고 하셨는데 그 땅은 육적으로는 가나안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흔히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육적인 의미의 약속이 아닌 영적인 약속의 땅을 말하는 것으로써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약은 모두가 역사적으로는 실제이지만 영적인 것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히8:5).

그러므로 우리는 육적인 사건 속에 숨겨진 하늘의 실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하신 집이나 가라고 지시하신 땅은 모형으로는 아비의 집이며 가나안이지만 실상은 죄로 말미암아 종 되었던 세상과 마귀에게서 떠나 천국, 즉 영생하는 하나님 나라로 가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임마누엘인데 임마누엘을 위하여 아브람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고 그 말씀은 약속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약속을 좇아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브람이 좇아간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이었지만 그 하나님의 약속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좇아간 것입니다. 즉 이제까지 살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도 이 약속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하신 것이 영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브람이 본토 아비 집에 있을 때 무자했습니다. 아브람의 이름의 뜻은 존귀한 아비 또는 높은 아비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래는 공주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의 이름을 보면 육적인 환경으로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던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가장 중요한 자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자한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이 약속을 좇아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지시하신 땅을 향하여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어떻게, 무엇으로 이해했는가?

아브람이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육적으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즉 아브람이 무자했을 때 큰 민족을 주시겠다고 한 것은 많은 후손을 주겠다는 약속이었는데 아브람은 이 큰 민족을 육적민족으로만 이해하고 나온 것입니다. 즉 약속의 실상, 참 약속이 무엇인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구약의 모형과 그림자가 아닌 복음 안에 있다고 하는 오늘 우리들도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실상, 참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신앙생활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5:39-40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영생인데 사람들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성경을 상고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영생인 줄 깨닫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얻고자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생이 아닌 다른 것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이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것은 이것 때문입니다. 이삭은 육적인 약속을 위한 후손이 아니라 영적인 약속을 위한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상실한 영생을 회복하기 위하여 주시고자 하는 후손이 이삭이며 영생을 얻을 큰 민족, 곧 하나님나라를 약속하신 것인데 이 사실을 2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요6장은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모든 능력의 사건들은 표적입니다. 즉 표적들을 통하여 하늘의 실상과 참을 깨닫게 하는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수 많은 사람들을 먹게 하신 것도 단순히 사람들의 육적인 배고픔만을 해결하기 위한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표적의 의미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14절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먹은 사람들이 예수를 성경이 예언한 구원자, 선지자라 하여 억지로 잡아 자신들의 왕을 삼으려 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자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로마의 속국으로 지배를 당하며 살고 있는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다윗의 왕국을 회복할 메시야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자신들의 육적 임금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육적으로 무자하니 자식을 주시고 큰 민족을 이루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육적으로만 이해하고 좇은 것입니다.

예수를 보내 주신 것은 영생을 얻게 하려 하여 보낸 것인데 사람들은 이 약속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육적인 것으로만 약속을 이해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좇아 임금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피하여 홀로 산으로 떠나 가셨고, 다음 날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육적인 약속만을 보고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무리들에게 주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시면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나를 찾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나를 찾으라고 하십니다(요6:22-27). 이 말씀을 사람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잠깐의 것, 썩고 쇠하여질 것을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아닌데(벧전1:3-4,9) 여전히 사람들은 떡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 아브람의 약속을 좇아 신앙생활하고 교회에 다닌다는 것입니다.

 

마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 있고 하나님의 사람이 구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구하는 것은 아브람이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아브라함의 약속을 구하여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것은 영생이니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영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구하면 영생으로 범사는 더하여 저절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형상과 생령으로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주신 복은 바로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영생, 즉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는 자연히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창2:7-8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생령)을 거기 두시고’

 

흙으로 지어진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생기가 불어 넣어지니 사람이 영으로 사는 자, 생령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사 거기에 살게 하셨는데 이 에덴동산이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사는 땅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임마누엘이며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것,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자신에게 영생이 있는 줄을 아는 자입니다(요일5:13). 즉 자신이 무엇으로 사는 자인가를 알고 그것으로 사는 자가 신앙생활하는 자요 하나님을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아브람처럼 육적인 것을 약속으로 알고 좇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구하는 것을 얻고자 주를  찾다가 그것이 없으니 시험 들고 주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자신들을 택하셨는지, 왜 자신들이 주님을 따르는지 몰랐기 때문에 주께서 붙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니 주를 버리고 모두 도망한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려내고 물 위를 걸으시며 오병이어로 수 천 수 만의 사람을 먹였던 능력의 주님이 힘없이 붙잡히자 그들은 두려웠던 것입니다. 더 이상의 능력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인줄 알았던 주님께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붙잡혀 고문을 당하고 끌려가는 모습에 사람들은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호산나를 외치며 자신들의 메시야 왕처럼 찬송하고 영접하였습니다(마21:8-). 그런데 병사들의 창과 칼에 아무런 힘도 능력도 쓰시지 못하고 붙잡혀 처참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고 그들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마27:39-44

‘자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희롱하여 가로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처럼 예수님을 모욕하고 희롱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 내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각색병과 불치병을 고치시던 것을 목격한 자들이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주님을 찾아 좇아 다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처럼 하루아침에 주님을 저버리고 주님을 희롱하는 자들이 되어 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떡을 먹고 육신이 배부른 까닭에 주님을 찾았던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독생자를 우리 사람에게 주셨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에 있는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는 약속을 아브람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아브람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브람에게 영생을 주겠다고 하면 아브람이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브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능력의 표적들은 영생을 보고 믿게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육적인 것만 보고 주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요14:7-11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영생)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동안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영생,임마누엘,천국)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표적)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예수님을 알면 아버지를 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빌립이나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빌립이 답답한 소리를 합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에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진정 무엇인지 아무리 설명해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실 때, 여기서 말씀하신 너는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이루시겠다고 하신 큰 민족은 육적 민족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벧전2:9).

하나님께서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사람은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람의 후손으로 신앙생활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름이 아닌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하시며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동일한 복을 주시는 것은 아브라함의 약속은 하나님의 약속이니 아브라함을 복 있는 자라고 축복하는 자는 곧 하나님의 약속을 축복하는 자이기에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을 저주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저주하는 것이기에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저주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하나님의 약속의 실상과 참을 깨닫지 못하고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 세월에 많은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는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깨달아가는 세월이었던 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