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의 테스트(창22:15-18)
15-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도입
지난주일은 저희 교회에겐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북한에서는 노동당 창당 65주년 기념행사가 열렸고 공교롭게도 바로 그 날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 씨가 자택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잘아시는 것처럼 황장엽씨는 전북한 노동당 비서로서 김일성의 오른팔었고 그 유명한 주체사상을 만들어낸 북한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2008년 제9회 서울평화상을 수상했고 지금도 미국에서 탈북자 지원과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수전 숄티(Suzanne Scholte) 여사는 북한의 민주화라는 공통관심 때문에 황장엽씨와 굉장히 가깝게 지냈다고 합니다. 숄티 여사는 황장엽씨를 만날 때마다 “선생님, 하나님을 믿으시고 모든 것을 맡기시면 죽음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면서 신앙을 가질 것을 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때마다 황장엽씨는 “나 하나 살아나서 뭘 합니까? 나같이 죄많은 사람이 무슨 낯으로 살아나길 바라겠소? 나도 수잔의 하나님을 좋아해요. 그러나 나 하나 구해달라고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어요.”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황장엽씨가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북한에서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는 경고로 황장엽씨 아들의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미국의 기자들이 북한에 남겨둔 가족들의 안전에 대해 질문했다고 합니다. 이 때 황장엽씨는 "나는 북한을 떠나올 때 가족들의 안위는 잊기로 했다. 내가 이 한 몸 잘살자고 북한을 떠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북한을 떠났다. 그때 나는 북한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거리에는 아사자들이 늘어났고, 가뭄과 흉작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김정일은 주민들의 어려움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북한 내에서 나의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북한은 변화가 필요했고, 그 변화는 내부에서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북한을 떠나기로 했다. 나는 북한을 떠나오면서 가족들은 잊었다. 내 마음의 그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황장엽씨가 마지막 순간 예수님을 믿고 가셨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분이 단순히 개인적인 안녕을 위해서 남한으로 망명한 것은 아니었다는 분명해 보입니다. 뉴스에 의하면 황장엽씨가 망명을 했을 때 김정일은 가족들 뿐 아니라 황장협씨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 2000명을 함께 숙청하라고 지시를 내렸다고 합니다. 왜 황장엽 이라는 분은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한국으로 망명을 했던것일까요? 황장엽씨는 생전에 “개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가정이고, 가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라입니다. 나라가 망하면 가정도 없고 개인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신이 망명한 이유는 전대미문의 독재에 시달리고 있는 2300만 북한동포를 구원하는 일이 나의 소임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헌신의 사전적 의미는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적 의미의 헌신은 하나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황장엽씨는 북한이라는 나라와 그 땅에서 굶어 죽어가는 수많은 북한 주민을 구하기 위해 자신 뿐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의 삶까지도 제물로 바치면서 위해 온전히 헌신을 했습니다.
여기서 매달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북한이라는 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헌신하는데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과연 무엇을 헌신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배에 참석함으로 하나님께 시간을 드립니다. 그리고 헌신예물도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정말로 우리가 드린 한시간이라는 시간과 헌신예물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한달에 한번 헌신예배를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의 예배를 참 기쁘게 받았다라고 말씀해주실까요?
오늘 본문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하시고 아브라함이 순종했던 내용의 후반부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내용이기에 후반부만을 함께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22장 1절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라고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삭을 바치는 헌신을 요구하신 목적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서1:12에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경에 나오는 시험은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어로 테스트(test)로서 우리의 실력을 측정할 때 보는 시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믿음의 수준을 보시기 위해서 이런 테스트를 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영어로 템테이션(temptation)으로서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은 아무도 죄를 짓도록 유혹하지는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시험은 당연히 아브라함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시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의 수준을 측정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런 테스트를 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나옵니다.
15-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큰 복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길 원하셨고 나아가 그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헌신을 요구하시는 이유도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 복을 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손이 크게 번성하길 원하시고, 우리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테스트에 통과하기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모든 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생명과 아들 이삭의 생명 중 하나를 포기할 수 선택권이 있었다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포기했을까요? 저는 아브라함이 당장에 아이 대신 자신의 생명을 포기했을거라 확신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은 자기의 생명과도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도 소중하고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그토록 소중한 존재임을 아셨기에 하나님은 바로 그 소중한 이삭의 생명을 포기하는 헌신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최종적인 시험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내려놓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큰 복을 받고 나아가 우리의 자손이 번창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길 정말로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면서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헌신의 테스트를 패스하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19장16절 이하에 보면 한 부자 청년에 예수님께 와서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십계명을 말씀해 주시면서 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청년은 그런 계명은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을 합니다.
누가복음 18장18절에 의하면 이 청년의 직업은 관원이었는데 요즘으로 하면 젊은 나이에 고위관직에 오른 성공한 젊은이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0장17절에 보면 이 청년은 예수님께 뛰려와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고 나옵니다. 세상적으로는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이었음에도 영생을 향한 열정과 간절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21을 보면 예수님은 이토록 간절히 영생얻기를 원하는 청년을 보시고는 사랑스럽게 여기시면서 이 청년이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마지막 테스트를 하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마19:22은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막10:22에선 심지어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라고 나오는데 이구절을 새번역 성경은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번역합니다.
결국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청년은 예수님이 요구하신 헌신의 테스트에 실패함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엄청난 축복의 약속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그 청년은 젊은 나이에 관원이 될만큼 성실하고, 또 어린시절부터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을만큼 종교생활에 열심히 있고, 또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을만큼 영생 얻기를 간절히 사모했음에도 예수님이 요구하신 헌신의 테스트에 성공하질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젊은 나이에 관원이 된 부자청년처럼 우리도 성실하게 맡은바 책임을 감당합니다. 또 부자청년처럼 우리도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무던히 노력합니다. 그리고 부자청년처럼 우리도 은혜받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열심히 달려가서 무릎을 꿇는 열정과 간절함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이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라는 헌신을 말씀하시면 우리도 부자청년처럼 근심하며 울상을 하고 돌아가곤 합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이렇게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서도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엄청난 약속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우리의 전재산을 팔아서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자청년에게 전재산을 요구하신 것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가장 소중했듯이 그 부자 청년에게는 물질이 가장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부자청년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셨듯이 헌신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아온 우리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저도 저희 학생부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몇몇 학생들은 시험 때만 되면 주일에 나오질 못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간절함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일에는 나오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시험성적이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근심합니다.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울상을 지으면서도 결국에는 보충수업을 하는 학원으로 갑니다.
제가 이 아이들을 볼 때마다 솔직히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이 아이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언젠가는 하나님의 헌신의 테스트에 통과해야 할텐데 주일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헌신의 시험에 합격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설령 아이들이 학교 시험을 잘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 한들 더 중요한 주님의 시험에는 통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학생들을 예로 들었지만 솔직히 어른들은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쥐고 계신분이 누구신지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누가 봐도 믿음이 너무 좋은 분인데도 자녀문제 만큼은 하나님께 맡기질 못하고 꽉 붙들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다. 또 어떤 분은 물질 문제는 절대로 포기못한다고 고집을 피우십니다. 또 어떤 분은 다른 것은 다 헌신해도 사업만큼은 안된다고 하십니다. 청년들은 직장이나 애인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다른 것은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다 순종할테니 제발 이것만은 가져가지 마시라고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포기하지 못하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께 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절대로 포기하지 못하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서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제자들에게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도 우리가 해야할 헌신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아시면서도 이상하게도 언제나 굉장히 당당하게 헌신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어려운 것을 하라고 하시면서도 언제나 당당하실 수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우리가 헌신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헌신하는 것의 몇 배로 축복하시고 더불어서 영생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마19:27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 라고 여쭤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모든 것을 다 내어드린 제자들은 장차 천국에준비된 엄청난 영광이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사람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게 될 거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미국 한인교회를 담임하시던 목사님께 들은 일화를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몇 십년 전 어느 농촌에 예수님을 아주 잘 믿는 집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서는 그 집안을 “예수 믿다 망한 집”으로 불렀습니다. 왜 이 집이 망했느냐하면 뭐든지 좋은 것만 있으면 교회에 갖다 바치니까 망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 집을 예수 믿다 망한 집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된 일인지 그런 집을 좀 축복을 해서 잘 살게 해주셔야 하는데 계속해서 망하게 하셨습니다. 이 집에 할머니가 너무 열심히 교회에 가서 기도하시고 좋은 것만 있으면 다 교회에 갖다 바치셨습니다. 그 시절에는 쌀밥 먹기도 힘든 시절이었는데 어디서 쌀이 한말 생겼습니다. 할머니는 냉큼 반쯤 덜어다가 목사님 갖다 드려야 된다고 하셔서 그걸 치마 속에다 싸셨습니다. 그리고 급하게 교회로 뛰어가다가 자동차에 치셨습니다.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셨습니다. 할머니가 흘린 피와 쌀이 길바닥에 뻘겋고 허옇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저것 봐. 저 집은 예수 믿다가 망한 집이야!” 라고 수근댔다고 합니다.
이 집 손자가 어린 시절 내내 마을 사람들한테 그런 말을 들으면서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를 따라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아버지는 좀 절제를 하셔야 하는데 할머니보다 더하셨답니다. 어느 시골 교회 목사님이 “저희 교회 건축을 해야 되는데 돈이 없습니다. 집사님이 좀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이 아버지란 분은 “그러죠. 제가 돈은 하나도 없지만 땅이 좀 있습니다. 이거 팔리면 드릴께요.” 하고는 그 시골에서 자기 집이 먹고 사는 기반인 밭을 뚝 잘라 팔아 가지고 교회를 지었습니다.
이 소문이 나니까 다른 교회 목사가 또 왔습니다. “그 교회 지어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희 교회도 좀 도와주세요.” 이 아버지가 “그래요? 그러지요” 하고는 나머지 밭도 싹 팔아서 이것으로 지으세요. 하셨답니다. 이렇게 교회 3개를 짓고 나니까 그 집에는 먹을 것 조차 남아있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이 집 손자가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학교를 가는데 먹을 것이 없어지니까 너무 배고프더랍니다. 엄마가 밥을 따뜻하게 차려 주셔야 되는데 그 대신 아침마다 짬짬이 “우리 집안은 정말 예수 믿어 다 망했다.”라고 말하곤 하셨답니다.
그래서 이 손자가 “망한 것 끝까지 망해보자.” 결심을 하고 교회 나가서 새벽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새벽기도를 3년 동안 열심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 기도한 제목은 한가지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먹을 것만 주시면 평생동안 하나님이 하라는 것 다 하겠습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먹을 것은 점점 더 없어졌다고 합니다.
결국 3년째 되던 날 이 손자가 ‘아, 하나님은 안 계신가 보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 집안이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헌신을 했는데 우리 조상부터 나까지 이렇게 망할 수는 없다. 안 믿는다!’ 그러고는 자기가 기도한 자리에다 가래침을 뱉고 교회를 나와 버렸다고 합니다.
이 손자는 그 다음부터 교회 안나갔답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아빠! 왜 우리는 교회를 안가?” “뭐라고?” “다른 집들 다 교회 다니잖아. 우린 교회 안나가?” ‘아! 교회! 그렇지, 내가 교회 다니던 사람이었지!’ 그리고는 교회를 나갔답니다. 그래서 몇 십 년 만에 교회를 탁 나와 앉았는데 그 시간부터 눈물이 막 쏟아지더랍니다. ‘이거, 창피하게 내가 왜 이래?’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 와서 설교 제목만 봐도 벌써 눈물이 막 쏟아지기 시작했답니다. 어느 날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을 만나자고 했답니다.
이 예수 믿다 망한 집 손자 분이 목사님께 자기 집안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목사님, 하나님은 안 계시다고 생각했는데 제 눈물은 뭐죠? 내가 마음이 좀 완악하고 지독한 데가 있어서 눈물을 안 흘리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벌써 목사님이 설교만 시작하시면 눈물이 쏟아지니 이게 뭐죠? 하나님이 정말 계십니까?”라고 하더랍니다.
목사님이 이 성도님의 사연을 다 들은 후에 “네, 그렇군요. 당신네 집은 예수 믿다 물질적으로 망했는데 이런 상담을 요청하셨으니 먼저 지금 당신의 물질적인 능력을 나한테 밝히십시오. 그래야 이야기가 됩니다. 목사한테 거짓말 하시면 안돼요.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해 보세요.”라고 하셨답니다.
이 목사님이 미국 LA에서 제일 큰 한인교회를 담임하시던 분이라 부자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목사님이 만난 사람 중에 그 사람만큼 돈 많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날 그 성도가 타고 온 자동차가 롤스로이스였습니다. 롤스로이스는 1대에 십수억씩 하는 세계에서 제일 비싼 고급 승용차입니다. 목사님은 “미안하지만 당신 호주머니에 돈 얼마나 있는지 한번 꺼내보십시요.”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 예수 믿다 망한 집 손자 지갑에는 50만 달러! 우리 돈으로 6억 가까이 되는 돈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분이 “아, 이거 오늘 마침 빌려준 돈을 받았어요.”라고 하더랍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이 분이 미국에서 성공을 해서 골프장을 몇 개나 가지고 있고 호텔이 있고, 빌딩도 가지고 있었답니다.
목사님은 그 분에게 “당신 집안은 조상들이 훌륭합니다. 그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그 고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는 모두 다 신앙의 위대한 순교자들입니다. 그렇게 동네 사람들한테 비난을 받으면서도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분들에게 주시지 않고 남기셨던 하나님의 복을 당신에게 다 주신 겁니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게 하신 겁니다. 당신 조상이 위대했던 것처럼, 당신도 당신 후손들에게 위대한 조상이 되십시오. 할머니가 하셨던 일, 아버지가 하셨던 일을 그대로 하십시오.”라고 했답니다. 결국 이 분이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순전히 자기 개인 돈으로 교회를 7개를 완공하고 8개를 또 건축 중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자녀가 이 분과 같은 축복을 받게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이 축복을 받게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먼저 헌신해야 합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무엇이라도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면 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물질이라도 드려야 하고, 건강이라도 드려야 하고, 남편이라도 드려야 하고, 자식이라도 드려야 하고,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셋째 아들을 낳아서 저희 식구가 다섯 명이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막내는 엄마 품에서 또 큰 놈 둘은 여기 저기 뒹굴면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이 아이들과 아내를 달라고 하시면 난 어떻게 해야하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제 결론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너무도 힘들겠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달라고 하시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고통스러운 헌신을 요구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계획해두신 엄청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보다도 더 소중한 것들을 내려놓으라는 고통스러운 헌신을 요구하십니까?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계획해두신 엄청난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헌신의 테스트를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 때로 우리가 하기 힘든 헌신을 요구하심으로 우리를 테스트 하십니다. 이 순간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엄청난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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