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공급의 성전
시편 123:1~4
서론
은혜시리즈 설교, 열한 번째의 시간입니다.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과 신자들의 관계는 태양과 식물의 관계입니다. 식물은 빛을 흡수하지 못하면 성장도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좋은 태양의 빛이 당도가 높은 1등 과일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받지 않고 신실한 신앙인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마리아는 은혜를 받았습니다(눅1:28). 은혜를 받았기에 성모(聖母)로 선택 받았고 은혜가 있었기에 성모로서의 어려운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가슴 속에 들어온 어린 생명과 같은 은혜입니다. 아직 태동도 할 수 없는 아기씨 생명이 임산부들을 지키며 몸가짐을 새롭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을 때 마리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과 싸우고 그 운명을 고스란히 안고 갈 자세가 되었습니다. 아기씨와 함께 들어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용기였고 순종입니다.
-노아는 은혜를 입었습니다(창6:8). 노아의 시대는 타락의 절정입니다. 그럼에도 노아는 믿음을 지켰고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었기에 경건을 유지했습니다.
노아에게 임한 은혜는 코팅된 은혜입니다. 아예 전신을 은혜로 코팅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당시에 그렇게 타락한 세상도 노아를 타락시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노아는 의인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대홍수에서 구원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노아도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죄를 이기도록 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은총을 크게 받은 자입니다(단9:23).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바벨론 포로로 국비 장학생들입니다. 장학생을 양성해서 유대정신을 말살하고 바벨론제국의 영원한 속국을 만들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친구들은 금(金)신상에도 절하지 않았고 하루 세 차례 기도일과(日課)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감당한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임한 은총은 중국 무협드라마에 나오는, 무림 고수들이 치는 결계(結界)와 같습니다. 결계는 밀교에서, 마군의 장난을 없애기 위하여 인명법(印明法. 사람의 이름을 붙인 법) 제정한 도량의 구역입니다. 결계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결계를 친 무림고수와 같은 실력이 낭니면 뚫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는 사자굴에서 결계를 쳐주시고 세 친구들에게는 불구덩이에서 결계를 치셨습니다. 그러니 굶주린 사자도 다니엘에게 접근하지 못했고 용광로와 같은 불구덩이도 세 친구들을 태우지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이들에게 은혜가 임하지 않았다면 마리아가… 노아가… 다니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있었기에 모두 믿음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은혜의 힘이 큰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믿음생활은 끝납니다. 우리 믿음도 언제나 은혜의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은혜에 맡겨야 합니다.
본문 123편에는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호소문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2절,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절,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지금 저들은 어떤 형편입니까?
3절,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유대인들의 삶 자체가 멸시의 역사였고 삶이 고단했습니다. 이런 때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어떤 심정으로?
2절,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종들에게 상전은 절대자입니다. 상전은 그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습니다. 여종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주인의 은혜를 받는 것은 여종들에게는 최고의 은총입니다. 그런 축복을 저들은 하나님에게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은혜에 올인하는 유대인의 모습을 봅니다. 은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절박한 심정을 보입니다,
(복음송)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성전에서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본 시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副題)가 붙어 있습니다. 왜 성전에 올라갑니까? 맨날 제사만 드리려고 갑니까? 기도만 하려고 올라갑니까? 은혜를 받기 위해 성전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 계시지만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인 법궤가 있습니다. 여기에 법궤를 덮은 뚜껑이 속죄소입니다. 두 그룹이 마주보며 날개를 펴서 덮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를 속죄소(贖罪所)라 부릅니다. 죄를 속하는 처소라는 의미인데, 하나님께서 이곳에 임재하셔서 인간의 죄를 가려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은혜의 처소입니다. 그래서 속죄소는 일명 ‘시은좌’(施恩座, mercy seat)로도 불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 중심의 믿음 같지만 그 속에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율법을 지키다 힘에 부치고 어기게 되면 결국에는 시은좌가 있는 하나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 안에서 율법이 해결해 주지 못한 마음의 평안을 얻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중심 사상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에 이스라엘은 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맹천수라는 집사가 쓴 <맹 집사 이야기>가 있습니다. 맹 집사는 시골교회를 섬기는 분이었는데 임집사가 갑자기 중풍으로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단짝이던 맹 집사가 드나들면서 교회 소식을 알려줍니다. 그의 소원이 예배당가서 예배드리는 것이라 하자 맹 집사는 기도했습니다.
"휠체어 한 대만 생기면 평생 밀고 다니면서 예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회 목사님이 예산을 세워서 사주었습니다. 맹 집사는 휠체어 봉사를 했습니다. 칭찬도 듣고 우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흥분과 감격은 순간이고 큰 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스팔트 중심으로 제작된 휠체어는 비포장도로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좀 빨리 죽지…"
그런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칭찬합니다.
"맹집사님은 천사야…"
그 소리를 듣는데 도무지 예배당 안으로 못 들어가겠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살인자인데, 어떻게 들어갈까?.... 용서하소서...'
그 때 주님으로부터 깨달음이 왔습니다.
'나는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구나 나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구나. 그 안에서 나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주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사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구나.'
그래요! 예배당 성전으로 들어가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은혜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성전의 기능이 약화되었다고 해도 은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은 성전,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제대로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등이 은혜 안에 붙어 있으라, 하는 것은 공동체 회중들 가운데, 그들 속에 있는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 안에 꼭 남아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공동체 예배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 안에서 자라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영상예배가 깔끔하고 설교가 좋아도 하나님의 예배는 현장입니다. 설교도 현장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당에서 얻을 수 있는 경건의 예배, 분위기를 어찌 집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책’ 성경책을 사랑하는 것처럼 ‘나의 사랑하는 예배당’ 성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의 개념보다는 건물로서의 성전을 사랑해야 합니다. 시장에 다녀오면서도 성전에 들리고 마트에 반찬 사러 가면서도 성전에 들리는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이 은혜를 계속 공급받는 비결입니다. 직장에 출근하면서도 퇴근하면서도 성전에 들러 기도하는 일상들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도 학교에 갈 때나 올 때도 성전에서 기도하고 오는 것을 일상(日常)으로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 가까이서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요즘은 교회를 따라 거주지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거주지를 따라 교회를 움직이니 교회관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모임 자체인 교회가 당연히 중요하지만 교회를 담아내고 있는 성전 개념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에 더 주목하게 되며 영적 분위기를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처소 성전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어떻게 처신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 여종으로…’
마리아도 자신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주의 여종이오니” 한없이 자신을 낮춥니다.
은혜는 하나님에게서 조건 없이, 공짜로 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겸손한 곳으로 은혜의 물은 흐릅니다. 성경에서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겸손한 고백을 했던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1:6)
이사야는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솔로몬은 “…왕이 되게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왕상3:7)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종들의 눈에 여종의 눈에 무슨 교만이 있습니까? 제발 목숨만 부지하게 해달라고… 제발 우리가족들을 거둬 달라고… 주인의 아량과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납작 엎드린 모습들이 연상됩니다.
그만큼 겸손의 삶은 상처를 각오해야 합니다. 상처 없는 은혜는 깊은 은혜가 아닙니다. 꽃도 꺾일 때 향이 나오고 바람에 부대낄 때 멀리 갑니다. 우리가 자아를 죽이고 한없이 낮아지고 겸손할 때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세 번이나 은혜를 부르짖습니다.
4절,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적당한 은혜 갖고는 안 됩니다. 영혼에 넘치는 멸시를 없애려면 은혜가 영혼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것도 계속적으로 채우고 또 채워야 합니다. 지금의 조소와 지금의 멸시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 많이 가득가득 계속 채워나가야 합니다.
춘천 소양강댐은 7년을 채웠습니다. 안동댐은 3년을 채웠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채우기 전에 이미 일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터집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엘리야입니다. 사역만 하고 은혜로 이어지지 못하니, 우울증 걸린 것입니다. 교회에서 앞장서서 일하는 분들은 더 부지런히 은혜를 채워야 합니다. 은혜가 새는 부분이 어느 쪽인가, 늘 살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 일을 하면서 실망하지 않고 시험에 들지 않게 될 것입니다.
결론
(코로나가 시작된 202년을 배경으로 한 설교)
코로나19의 20개월은 우리의 믿음을 가라앉게 했습니다. 여론조사 상으로는 코로나로 인해 믿음이 더욱 좋아졌다는 통계가 좀 나오는데 믿을 수 없는 통계입니다. 내 주변에서 어떤 목사이건 어떤 신자이건 코로나 이전보다 더 좋아진 믿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큐티를 하지 않던 분들이 집에서 큐티를 시작했다고 믿음이 더 좋아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은 착시(錯視)현상입니다. 무서운 영적 착시현상입니다.
어떻게 가라앉은 한국 교회, 늘빛교회를 다시 세울 수 있습니까? 주저앉은 교회를 띠울 수 있습니까? 대홍수가 노아의 방주를 산꼭대기까지 솟아오를 수 있게 했습니다. 여간한 홍수로는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할 수 없습니다. 배는 물이 있어야 뜨고 모래밭에 있는 배들은 밀물이 들어와야 뜹니다.
교회가 클수록 더 큰 은혜의 물이 들어와야 뜹니다. 그래야 큰 교회들이 성령이 주도하는 교회가 됩니다. 은혜가 말라버리면 조직이 움직이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면 종교기관이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직분이 크고 오랜 신앙경력이 있는 분들의 믿음의 배는 큽니다. 작은 돛단배는 작은 물에도 뜨지만 큰 배는 밀물로 가득 채워야 배가 드디어 뜹니다.
이제 은혜의 바다를 채우는 일들을 해야 합니다. 내게 은혜가 말라버렸음을 고백하면서 겸손하게 그 분 앞으로 나아가 3절,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간구하고 또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채워놓을 때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의 교회로 신앙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가 전달되는 은혜의 파이프를 점거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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