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솔로몬의 성전 건축

하나님아들 2024. 9. 7. 00:32

솔로몬의 성전 건축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흔히 교회에서 건축할 때, 본문 말씀을 인용하여 성전건축역사로 이름 짓고 헌금도 하고 각종 기도모임을 갖습니다. 제가 사는 곳 가까이에 있는 어떤 교회도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 부릅니다. ‘OO 강북성전 하지만 교회 건물은 성전이 아니라 예배당이라 불러야 정확합니다. 성전이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거룩한 곳이란 뜻입니다. 성소에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제단에 올라갈 때에 속옷을 입지 않아 하체가 드러나거나 지성소에 함부로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배당이 성전이라면 예배당에 화장실을 두고 볼 일을 보는 것은 아주 불경건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단상에 함부로 올라오는 분들은 죽임을 당할 수 있으니, 삼가 조심해야 겠지요.

성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보이는 모습으로 함께 하심을 보여주심을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고편입니다. 본래 요한복음 1:14절은 말씀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는데,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은혜와 진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공급하여 주십니다. 성전을 한 번 더 적용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들의 모임, 곧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의 성전 건축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모임이 어떻게 세워지며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내가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주목하기보다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 보시기에 가정과 교회를 아름답게 세울 수 있는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동역으로 세워졌습니다.(5) 5장은 성전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5장을 읽다가 아마 충격 받았을 것입니다. 두로왕 히람이 성전 건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두로는 지중해 해변에 있는 항구도시국가로서 무역을 통해 많은 돈을 벌은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로를 교만과 음란의 본거지처럼 생각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두로왕 히람이 평생동안 다윗을 사랑하고 목공과 석공같은 기술자들을 제공했습니다. 이스라엘 가운데에는 두로와 시돈 사람처럼 능숙하게 벌목하고 건축할 만한 기술자가 없었습니다.(6) 아무리 돈 많고 머리 좋은 솔로몬이라 할지라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두로왕 히람이 솔로몬 즉위식에 축하사절단을 보낸 것을 계기로 성전 건축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히람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보이지 않는 신의 한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위해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어 일하십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성전을 재건한 것도 그러했습니다. 페르시아왕 고레스가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후에 모든 민족은 자기 땅으로 돌아가라는 귀환 명령을 내림으로 성전 재건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경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된 것도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로 다 호적하라 호적명령을 내림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울은 초대교회를 무지막지하게 박해하던 죄인이었습니다. 암적인 존재처럼 여겨졌던 그가 변화되어 이방인 복음역사에 그리 큰 에너지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그러한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지는 현장을 보면 사람의 계산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수고가 모여 있습니다. 다윗왕은 오랜 시간 금,,,철을 준비하였고, 솔로몬은 이를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두로왕의 협조를 얻기 위해 밀 2만 고르(=)와 맑은 기름 20 고르를 매년 지불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벌목군 3만 명이 한 달에 만 명씩 번갈아 레바논에 가서 일했습니다. 15절을 보면 짐을 나르는 사람만 무려 7만명이었습니다. 레바논 북부산지에서 백향목을 잘라 뗏목으로 보내오면 욥바에서 건져 올려 예루살렘까지 운반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항구 욥바에서 해발 800m의 예루살렘까지는 56km의 가파르고 굴곡진 오르막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 대규모 채석장에 있었는데, 8만 명이 채석하였습니다. 이들을 감독하는 관리자가 3,300, 도합 183,300명이 일했습니다.

어떤 이는 나무를 자르고 어떤 이들은 나무 대신 돌을 캐고 어떤 이들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무거운 건축 재료를 끌며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실수하여 다치고 치명적인 상처를 당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끝까지 수고한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집이 예루살렘에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도 그러합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모든 사람들이 욕심과 정욕을 좇아 살아가는데,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면서 자기 시대의 징검다리가 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벨처럼 죽임을 당하고 어떤 이들은 에녹이나 노아처럼 세상과 구별되어 살았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 수많은 사사, 제사장, 선지자들이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실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게 된 것도 그러합니다. 오늘 우리의 의지와 수고만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초대교회 성도들이 목숨을 잃는 박해가운데에도 교회를 세우고 복음진리위에 서서 견디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우리가 있었을까요! 중세시대의 형식주의를 뛰어넘어 오직 성경으로 외치며 용감히 일어선 종교개혁자들이 없었더라면, 예수 믿는 신앙을 올바로 가질 수 있었을까요! 유교와 인습에 쩌 들은 조선에서 복음신앙을 세우고자 고난 받고 희생양이 되어준 신앙 선배들이 없었더라면, 가깝게는 믿음의 부모와 목자들의 수고가 없었더라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 또한 하나님의 집, 성전을 세우는 행렬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우리의 입술, 우리의 생각과 삶이 하나님의 집을 세워가는 좋은 재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집을 준비하는 좋은 재료입니다. 우리의 수고를 통해 다음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 들어오게 될 소망을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성전은 구원의 완성입니다.(6:1-6) 6: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둘째 달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애굽땅에서 나온 지 480년이라’, 480년이 되어서 출애굽의 목적이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을 출애굽의 완성처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마치 현실문제를 해결받은 그것으로 다 이루었다 자족해버린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저 잘 먹고 잘 살라고 가나안 족속의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데,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간다면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택함받은 자들이며, 복받은 자들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시며 그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높으심과 인간의 하찮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죄사함을 주시고 새 마음을 주십니다. 세상 너머에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믿음으로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이점에서 성전 건축은 출애굽 역사의 완성입니다.

본문을 보면 여호와를 위하여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옵니다.(5:3/5:5/6:1/6:2) 성전은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이스라엘의 안전 보장을 위해 건축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여호와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하여 지은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성전 벽에는 연접하여 3층으로 달라붙은 골방들을 보십시오. 골방들은 제사장들이 제물을 먹는 장소, 제물을 보관하는 장소, 옷을 갈아입는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이면서 아울러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4절에서 말씀합니다.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이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성소와 하나되어 성전이 되는 것처럼, 모퉁이돌 예수님과 하나되어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모인 그곳이 참된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구원받았어요? 구원의 확신이 있어요?’ 어떤 이단종파가 그런 질문으로 많은 신자들을 휘어잡고 스스로를 자유의 믿음을 가진 자처럼 포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초보의 도입니다. 마치 애굽에서 탈출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시작에 불과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의 삶은 죄사함 받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정도로 끝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인생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의 중심, 행동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시는 세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로, 성전은 화평의 집입니다.(6:7-13) 6:7절을 보십시오. 이 성전을 건축할 때에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건축을 해 본 사람이라면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변수가 생기는지를 압니다. 1부 센타 건물을 건축 감독할 때, 현장 소장과 설계건축한 건축사 사이의 작은 갈등을 조정하느라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그때 젊음이 꺾여 버렸다고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시대는 오늘날처럼 기계로 정확히 커팅하는 것도 아니며 손으로 일일이 수작업을 하던 시기였으니 얼마나 많은 오차가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현장에서 방망이나 도끼나 철 연장으로 미세 조정을 해야 건축 진행이 원활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 연장이나 소리 나는 도구들을 일체 쓰지 말도록 명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겠습니까! 산 아래 작업장에서 커팅해서 가져왔는데, 조금 튀어나왔으면 다시 산 아래로 가지고 가서 거기서 조정하고 다시 올라와야 했습니다.

방망이나 도끼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철은 전쟁을 상징하는 재료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성전에는 다투는 소리, 미움과 전쟁의 요소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입니다. 건축기술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역대상 22:8절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성전 건축을 막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어떠한 명분을 내세울지라도 다툼과 파괴는 하나님의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메시지입니다. 성전은 화목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의 화목, 죄인과 죄인의 화목을 위한 집입니다. 성전이 세워지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사람이 모일수록 원망의 소리, 다툼의 소리가 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은 자기 유익을 위해 따지고 자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내가 옳으냐 네가 틀리냐’, 시시비비를 가리기를 좋아하고 거기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다가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크나큰 죄악임을 깨닫고 애통하며 회개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6:5)

다투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못처럼 튀어나온 자기의입니다. 솔로몬과 백성들 또한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한 후에 할 만큼 했다는 마음을 가질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크고 웅장한 건물을 지은 후, 오히려 열정이 식고 냉랭해지는 교회들이 많다고 합니다. 외적으로 별다른 것이 없어 보일 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섬겼는데, 세상의 이목을 끌 정도로 큰 모습이 되고 나니,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이 끼여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전공사를 끝낸 그 시점에서 바로 솔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에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핵심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생활이라는 의미입니다. 입은 하나, 귀는 둘로 지어주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을 돕는 리더의 위치에 올라갈수록 자기 소리를 내기보다 말씀을 듣고 따르기에 힘써야 합니다. 찌르면 찔리고 아프면 기도하고 억울하면 하나님의 보상과 공의를 바라고 말씀을 붙드는 가정과 모임을 이루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리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2:19,20절은 말씀합니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을 당할 때에도, 엉터리같은 제자들의 약점과 허물이 드러날 때에도, 묵묵히 말씀을 붙들고 목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칼을 빼내어 그들 중 하나의 귀를 날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했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26:52)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히 붙잡혀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저항의 깃발을 들고 전쟁을 벌이며 억울한 죽음을 피하기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자기 살을 찢고 피를 흘림으로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모임이 화평을 누리고 화평을 지키기에 힘써야 합니다. 자기 소리를 내기보다 조용히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영이 임합니다. 저는 주일 오후 소감을 쓰며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자 힘쓰는 분들을 볼 때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그런 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모임에 남기신 신령한 돌이며, 그들을 기초로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는 신령한 모임으로 자라갈 소망을 붙들게 됩니다.

 

넷째,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게 합니다.(6:14-38) 여기에서는 성전 인테리어를 기록해 놓았습니다. 성전은 벽에서부터 천장까지 백향목을 입힌 후에 그 위에 금을 입혔습니다. 바닥은 잣나무로 깔고 다시 금을 입혔습니다. 그래서 황금의 집이라 불렸습니다. 지성소는 가로 세로 높이 10m, 정방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언약궤 위에서 날개를 펼치고 있는 가로 세로 5m의 두 그룹을 감람나무로 조각했으며, 역시 황금을 입혔습니다. 벽에는 그룹들과 종려나무와 활짝 핀 꽃 형상을 새겼습니다. 핀 꽃은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물론 모두가 금을 입혔습니다. 생각해봅시다. 태양빛이 창문을 통해 성전안을 비추었을 때, 그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당연히 상상이 안되지요? 고대세계에서 금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영광을 상징했습니다. 불순물이 전혀 없는 순결함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황금의 집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상징합니다.

겉모습은 돌이지만, 속은 찬란한 황금으로 되어있는 성전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계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평범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갈릴리 출신이라서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의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세상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가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지혜가 어떠하며, 예수님의 용기와 목자의 심정이 어떠합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끝까지 섬겨주신 사랑이 어떠합니까!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 다시 부활하사 영광에 오르신 예수님, 세상의 누가 이 예수님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1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계시록 1:17절을 보면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죽은 자처럼 엎드러질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3절에서 고백했습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세상의 수많은 대가 중에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만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이 땅에 속한 것, 이 땅에서 지혜롭게 사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고, 살아난 영혼을 영광스러운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의 세계는 세상의 어떤 철학이나 사상보다 고상하고 뛰어나고 영광스럽습니다. 우리는 본성을 따라 살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부지런히 예수님을 배움으로 우리 내면을 주님의 영으로 인테리어하고 우리 모임도 인테리어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속에 함께 하사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