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정신
갈라디아서 1장 6~10절
[은혜 설교 시리즈 설교 중에 종교개혁주일이 돌아와서.]
서론
아이스레벤 성당의 찬양대원이던 마르틴 루터 신부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504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변호사를 꿈꾸었던 루터, 들판을 걸어가던 친구가 눈앞에서 벼락에 맞아 즉사(卽死)하는 것을 보고 겁을 먹어 그 길로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된 마르틴 루터, 처음에는 교황청 가르침이 모두 옳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라틴어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교황청의 가르침이 성경에서 너무 많이 벗어났음을 알고 고민합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이후는 온갖 허위와 부패로 가득 찬 종교집단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던 차 교황청이 대성당을 짓다 공사비가 모자라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면죄부를 구매하면 본인은 물론 이미 죽은 자들의 죄까지 사함 받는다는 거짓 선전에 의분이 폭발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바로 오늘, 마르틴 루터는 자신이 교수로 있던 비텐베르그 대학정문에 95개 조항에 달하는 질문서, 요즘말로 대자보를 붙입니다. 당시 루터의 나이 34세입니다. 감히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교황청의 권위에 도전하다니... 대단한 청년 아닙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루터의 대자보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개혁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생겨난 것이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입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이탈자” “저항자” “분리자”입니다. 상당히 경멸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위대한 단어가 됩니다. 왜냐? 처음 안디옥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불렀습니다(행 11:2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당” “그리스도 도당”입니다. 좋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처럼 선한 무리들”이고 나쁜 뜻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를 따르는 수치스러운 무리들”입니다.
어떻게 보면 초대교회야말로 유대교 율법에서 이탈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였고 형식화된 유대성전에 저항해서 나온 분리자, 프로테스탄트들입니다. 결국 우리 개혁주의교회의 중심은 '저항'입니다. 무엇에 대한 저항입니까? 세 단어로 종교개혁의 저항정신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성경보다 높아지려는 교회 권위에 대한 저항정신입니다.
1천년 가까이 교황청은 라틴어 외에는 성경을 읽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더욱 평신도들에겐 성경 읽는 것을 금했습니다. 외형적으로는 성경의 거룩성, 경건성을 수호한다는 명분이지만 사실은 교황청은 성경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 있었기에 숨기고 싶은 것입니다.
교황청의 직분과 제도들은 이방종교, 특히 바벨론종교에서 흘러나온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교황제도, 성경에 없습니다.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한 사제들의 사죄권, 성경에 없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죄를 사해주신다 합니다. 교황청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 세상정치를 배후 조종하는 세상 정부 바티칸 , 성경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루터는 중세가톨릭의 종교분위기에서 자랐기에 교황청의 가르침이 전부인 줄을 알았습니다. 수도사가 되면서 그는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물론 라틴어성경입니다. 성경을 읽는 가운데 은혜를 받아 독일어로 번역하면 많은 동족들이 진리 안에서 생활할 수 있겠다는 선한 마음에서 조국어로 번역합니다. 교황청의 금기에 도전하게 된 것이지요.
성경을 번역하다보니, 교황청의 가르침은 짬뽕기독교-좋은 짬뽕이 아니라 국적도 없는 바벨론 종교의 기독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건 아니다! 성경대로 믿자!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앞에 교황청 역시 굴복해야 한다고 외치게 됩니다. 이것이 교황청에는 대항, 대적하는 것으로 보여서 “대항자” “저항자”라는 프로테스탄트라고 박해한 것입니다.
그건 옳은 이름이었습니다. 루터는 의도적은 아니었지만 저항자입니다. 그는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 교황의 권위를 앞세우는 교황청의 가르침에 저항한 것입니다. 그리고 외친 것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자! 성경에 있는 것은 믿고 성경에 없는 것은 버리자! 왜 기독교를 짬뽕으로 만드느냐, 교황도 성경의 권위에 모든 권위를 내려놓으라. 성경에 없는 것은 교황조차도 주장해서는 안 된다!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입니다.
로마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의 권위, 교황의 권위를 더 위에 놓습니다. 교황의 권위로 성경을 뺄 수도, 성경을 집어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2천년 가까이 무덤에서 잠을 자고 있던 성모(聖母) 마리아가 1950년 승천했다는 교리로 둔갑합니다. 교황이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도 이에 반발하지 못했습니다. 교황의 권위를 절대화했기 때문입니다.
개혁가들은 여기에 저항합니다. 교황도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다, 성경에 없는 것을 있다고 할 수 없고 성경에 있는 것을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다가 고문을 당하고 추방당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개혁주의교회 저항정신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종교개혁의 후손들로 살아가려면 오직 성경으로! 성경의 권위를 내 생애에 최고의 권위로 높이고 그 말씀에 굴복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있어야 합니다. 내게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외면해 버리고… 이런 성경관이 아니라 성경말씀대로 100% 살지는 못해도 말씀의 권위 앞에 철저히 복종하고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살아보려는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내 성공의 목표수단으로 삼지 말고 성공조차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면 내려놓겠다는 각오! 이것이 오직 성경으로! 라며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개혁가의 정신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인간의 행위로 구원 얻으려는 자력종교에 대한 저항정신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할 때 싸운 대상은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입니다. 이성주의는 인간이 세운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인데 가톨릭교회가 바로 이 바탕 위에 서 있었습니다. 신비주의는 성경에 기초하지 않고 개인의 신비체험에 집착해서 주관적인 신앙을 강조합니다. 가톨릭교회가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 교황의 권위를 높인다면 신비주의는 자기생각을 우위에 둡니다. 그래서 자기를 절대적인 잣대로 생각합니다. 같은 잘못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런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에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교황청과 맞서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오직 믿음으로! 를 외치고 나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는 결국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라는 구원관을 말합니다. 로마천주교의 선행을 통한 구원교리, 공덕주의 교리, 면죄부교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중보적 능력을 가진 많은 성자들을 만들어냈고 그 정점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두게 되었습니다. 로마천주교의 '마리아론'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인류의 공동대속자로 추앙하며 우리의 기도와 찬양의 대상으로 삼게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라는 구원관은 로마천주교의 마리아론이나 성자(聖者) 성인(聖仁) 숭상의 관행을 거부합니다. 개혁자들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행한 선언을 그의 자칭 계승자들이 지어낸 말보다 더 믿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를 사함 받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는 것입니다(롬 4:25). 이것을 믿는 것이 100% 구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구원자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행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바르게 살아가는 구원의 결과이지 행위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오직 믿음으로! 의 주장입니다.
오직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조건이자 방법이지만 유대인들은 가나안 종교와 합쳐지면서 율법을 통한 구원, 행위를 통한 자력(自力) 구원관을 만들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믿음을 통한 구원교리를 바르게 세워놓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만이 진리라 외쳤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잘못된 가르침들이 혼합되기 시작합니다. 유대교 개종자들을 중심으로 율법주의-예수님도 믿어야 하지만 율법을 함께 지켜야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가르침-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받았지만 구원이 완벽하게 보장받으려면 행위가 보태져야만 한다! 율법+복음, 행위+믿음이라는 혼합주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복음을 “다른 복음”이라 합니다. “다른 복음”은 거짓복음이요 짝퉁복음입니다.
지금도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라는 복음은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도전을 받지만 대화와 개방성, 다원주의적 관용이 미덕이 된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라는 구원관을 주장하면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비판을 받고 있고 교회는 이런 가르침을 놓아버리려 합니다. 그 대표적인 종교가 가톨릭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는 행위를 통한 구원관을 더 강화할 뿐만 아니라 그러다보니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다원주의사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저항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오해를 받더라도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구세주라는 사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항자-프로테스탄트입니다.
"오직 은혜로!" 비(非)은혜에 대한 저항정신입니다.
루터는 복음을 알기 전에는 두려움 가운데서 보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두려워했습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억지로 법률을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음악성이 뛰어났던 루터는 법률과는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무서워서 법률을 공부했습니다. 무서운 아버지는 그에게 무서운 하나님 ‘아버지’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언제나 두려워했습니다. 친구가 눈앞에서 낙뇌를 맞고 즉사(卽死)하는 것을 본 이후 그의 두려움은 더욱 강렬해집니다.
그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의 신분이 되었지만 항상 두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마음에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지 않을까, 음욕을 품게 되면 천벌(天罰)을 내리지 않을까, 마음에 평안함이 없이 두려움으로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복음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율법주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랑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두려움에 떨었다고 고백합니다.
루터는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범한 죄를 성찰(省察) 통회(痛悔) 고백(告白) 보속(補贖) 등의 고해(告解)를 했고 참회를 했습니다. 고행과 금욕생활을 계속했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행위를 통해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려 했지만 마음의 평안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교황청을 방문합니다. 교황청 순례를 통해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는 대성당의 계단을 올라가며 참회하며 고해합니다. 한 단계를 올라가서 죄를 고하고… 다시 한 단계를 올라가서 참회하고… 계단을 올라갈 때마다 무릎을 꿇고 참회 기도합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몇 대조의 조부로부터… 지금 내 죄까지… 그러다가 일설에 의하면 로마서의 가르침이 그에게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터는 로마서 1:17의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며 일어서며 소리를 쳤고 그제야 그를 억누르던 심령이 복음으로부터 오는 참된 죄사함과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온갖 비은혜들. 유대성전의 가르침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다보니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졌습니다. 내 힘으로 율법을 성취하고 구원을 이루려니 너무 힘들고 하나님은 감사와 감격보다는 무섭고 두려운 독재자 신(神)으로 둔갑을 했습니다.
로마가톨릭의 가르침 역시 중세교회 신자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죄사함을 위해 성지(聖地)를 방문해야 했고 로마대성당의 수백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고행종교를 만들었고 면죄부를 사기위해 비싼 값을 치렀습니다. 은혜의 종교가 아니라 자력(自力)의 종교를 만든 것입니다. 구약율법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구약율법의 중심은 한마디로 “불량품 사절!”입니다. 인간이든 제물이든, 어류(魚類)이든 구약율법의 중심은 한마디로 “불량품 사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불량품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용서하기 위해, 복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불량품도 좋다는 것입니다. 재생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철저히 자기를 버립니다. 구원을 받기위한 자기노력, 행위, 교회 일을 내 힘으로 하려는 인간적 수단을 놓아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병을 고치고 축복을 받기위한 수단으로서 은혜를 구했지 우리의 구원 전체를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고 은혜의 삶을 따라 사는 것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점점 정치화되고 인간화되고 교황청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수십만 명… 죽이는 대학살의 종교집단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가장 은혜가 없는 비은혜의 종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종교개혁가들은 비(非)은혜에 대한 저항으로 나온 것입니다. 성경은 은혜의 책이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정 종교개혁가의 후손들이라면 비은혜의 요소들을 벗어버리고 우리 가운데 항상 은혜의 요소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모든 것을 은혜로 해석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칭 의인이라고 하나 하나님께서 죄인으로 취급하는 사람과 자기를 죄인으로 여기나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우리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자세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며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게 합니다.
내가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도 억지로 끌고 나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움직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직 성경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라는 종교개혁의 핵심요소입니다.
결론
우리는 개혁주의이고 그 후손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지금은 개혁의 주체였던 우리가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배당 지상주의, 무속적인 신앙, 번영신학,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 절대주의가 사람들의 눈에는 마음껏 죄를 짓고 쉽게 회개하고 쉽게 용서를 받고… 그렇게 반복하는 희한한 종교로 보이고 그래서 기독교의 비싼 진리들이 값싼 진리처럼 보이고, 이런 종교는 인류에게 해가 된다면 반(反)기독교 내지는 무신론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다시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갑시다. 종교개혁을 맞아 우리 믿음을 성경적으로 바로 세우는 개혁주의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그러면 교회는 다시 인류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인류에게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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