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만 보이는 교회
마17 :1-8/하원식 목사
이번 주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하는데 부활주일을 앞둔 46일간을 사순절이라고 한다. 그 중에 주일이 6번 있고 평일이 40일이 되기 때문에 흔히 사순절(Lent) 이라고 한다. 이 사순절 기간을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는 절기로 지키는 것이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주일을 주님의 산상 변모주일로 지키고 있다. 오늘 읽어드린 말씀은 공관복음 안에 모두 있는 본문으로 마 17:1-8, 막9:2-8 그리고 눅 9:28-36이다.
요즘 우리들의 관심과 대화의 초점은 물가다. 그렇다면 이처럼 정신이 공허하고 황폐한 빈 가슴이 된 이 민족의 궁극적인 해결은 무엇인가? 오직 예수님만이 이 허전함을 메우고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실 수 있다. 오늘 본문 말씀 앞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는 말씀이 있었다‘ 제자들이 답하기를 어떤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라 합니다 더러는 엘리야 라고 합니다 어떤 이는 예레미야 라고도 합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말에는 언급을 하지 않으시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고 답했다 예수님은 그 답변에 만족해하시고 ”내가 이 반석 위에다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예수님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엿새 뒤의 일을 이어서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은 아홉 제자는 산아래 남겨 두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은 기도를 하셨다 예수님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은 졸고 있었는데 거기서 이상한 광경이 벌어졌다‘ 예수님의 모습이 평상시와 같지 않고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하얗게 변화하셨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예수님께서 산 위에 오르시자 세 명의 제자들 앞에서 갑자기 그 모습이 변화되셨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옷이 희어졌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빨래를 잘해도 그렇게 희게 될 수 없을 정도로 희게 변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라는 표현은 천상의 존재들을 표현할 때 사용하곤 했다. 한 예를 들어보면 막 16:5를 보면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바로 천사를 말한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저 천상의 모습으로 변화되셨다는 것을 말한다.
마태는 이 장면을 설명할 때 보다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옷이 변화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에 갑자기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저 천국에서처럼 그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말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것은 세 제자들에게 장차 저 천국에서 보게 될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9:1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낙심 중인 제자들에게 이 땅에서 장차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를 미리 보게 될 사람들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바로 이 변화산 사건은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사건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의 변형 사건를 통해서 세 명의 제자들에게 저 천국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비록 잠시지만 미리 보게 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한 눈에 보기에도 모세라고 생각되고 또 엘리야라고 생각되는 분이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그 광경은 너무 너무 황홀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다 "주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원하시면 내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이 얼마나 이기적인 발상인가 얼마나 철없는 말인가 ?
다른 성경에 보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했다 그 말이 끝나자 말자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하는 음성이 들렸다. 제자들은 정신이 나가서 엎드려 있었다 이때 예수님이 오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했다는 말씀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전해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아직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인 영광을 받으시기 전이므로 제자들은 모세나 엘리야를 어쩌면 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사라지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하는 말씀이 있었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와 교훈을 주는 말씀인 것이다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인가? 무엇이 더 중요한가? 누가 더 권위가 있나? 누가 먼저인가? 누구만 남았는가? 하는 질문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위대하게 생각하는 모세,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가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남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더 강조하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계시적인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크게 낙심하고 절망 중에 있는 제자들에게 십자가 뒤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십자가가 끝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이다. 저 천국을 바라보고 현재의 고난을 이기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과 구약의 대표자인 모세, 엘리야로 말씀하시는 광경이 있다, 모세와 엘리야, 율법과 선지자의 대표다. 구약의 하나님의 종들의 대표와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만나신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는 모두 이상한 최후를 가졌던 사람이다. 모세는 죽었으나 하나님이 그의 무덤을 공개하지 않으셨으며, 엘리야는 불 말과 불 병거로 데려가셨다.
성경학자 헨드릭스는 이 변화 산의 사건을 말하면서 제자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주기 위함이며 그리스도에게는 고난을 이기는 힘을 얻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신앙은 체험을 통해 점점 굳게 다져지는 것이다. 병든 사람이 열심히 기도하여 치료받은 다음에는 누구보다 더 큰 치료에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변화 산의 사건은 제자들에게 예수가 누구인가를 확신케 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들이 두려움에서 눈떴을 때 오직 예수 한 분 만 남아 있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의미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들 앞에 오직 예수만 보인 것은 인류 구원을 이루신 오직 예수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2) 그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인류의 목자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다.
(3) 인류는 오직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1. 무엇을 보고 있는가의 문제다.
지금 우리는 변화무쌍한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 어떤 변화가 다가올 것인가의 두려움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실상 제자들은 예수의 행적을 보았고 따랐지만 확실한 신앙의 방향을 잡고 있지는 않았다. 이때 보여준 변형의 사건은 오직 예수의 가치를 알게 한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보인 예수의 화려한 것은 신앙이 아니었다. 그 후에 보인 오직 예수만이 그들의 신앙이었다. 환난을 보면 두렵다. 화려함을 보면 황홀해진다.
1] 오직 예수만 눈에 보여야 한다.
어떤 마을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위해 폐쇄된 철교를 건너야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철교를 건너다가 어지럼증으로 강물에 빠지는 사건도 발생하곤 했다. 그런데 통통하고 배가 볼록 튀어나온 아이는 끄떡없이 철교를 잘 건너다녔다.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다른 아이들은 철교를 건너다가 밑을 내려다보면 어지러움증이 생겨 밑으로 빠지는데 배가 볼록한 이 아이는 밑을 내려다볼 수 없기 때문에 앞만 보고 똑바로 걸어가 빠지지 않았다. 파도를 보면 파도 속에 빠진다. 그러나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으면 파도 위를 걸을 수 있게 된다. 날 삼키려고 찾아오는 악한 사탄도 밟고 넘어갈 수 있고 시련의 파도도 밟고 넘을 수 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사랑의 주 만 보이는 도다. 라고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천국의 백성 된 성도의 삶이다.
본문은 하늘의 신비한 환상 속에서 깨어났던 제자들에게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고 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히12:2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왜인가? 이유는 누구든지 예수만 보이는 삶 속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 역시 오직 예수만 바라볼 때 물위로 걸을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는 역사를 체험했다. 지금 여러분의 눈은 누구에게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가? 만약에 예수님께 있다면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가까이 왔다.
2,] 무엇을 보고 있는가의 문제다.
어느 목사님의 장남이 국제인권변호사가 되는 꿈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아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다. 목사님이 가만히 보니까 아들의 꿈은 크지만, 그 꿈을 이루겠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해 겨울방학 때 서울대에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법대 강의실을 보게 하고, 모의 재판정에 가서 재판관 석에 앉히고 사진도 찍어주고, 방학중인데도 열심히 공부하는 도서관을 보여주었다. 목사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울대학교를 보여주기만 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보는 것으로 인해 아들놈의 가슴에 불이 되게 하소서!”그런데 목사님의 그 기도대로 그 이후부터 아들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꿈은 크지만 공부를 하지 않던 아들이 서울대를 다녀오고 부터 열심히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무엇을 가르쳐주고 이야기인가?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보는 것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시청각 교육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는 시청각 교육의 대가이셨다. 그냥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셨지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직접 보여주시면서 가르치셨다.
3] 무엇이 더 귀중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위치에서 얼마나 여유 있게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더 귀한 것은, 그 사람의 인생관이요 가치관이다. 마음이 크고 넓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나 조건에 치우치지 않는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2. 무엇이 더 귀중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태리가 낳은 유명한 화가요 조각가요 건축가요 과학자다. 그의 나이가 43세 되었을 때에 이태리 밀라노의 로드비코 공(公)이 예수님 최후의 만찬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온갖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서 최후의 만찬을 완성했다. 12제자가 세 사람씩 그룹을 지어 양쪽에 앉고 중앙에는 예수님이 손을 들어 오른 손에 잔을 들고 계시고 그 좌우에 여섯 명씩의 제자들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었다. 작품이 완성되면 절친한 친구를 불러서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림의 잘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이 어디 있는가 의견을 듣는 것이 화가의 관례였기 때문에 친구에게 그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을 본 친구가 깜짝 놀란다. 최대의 걸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는 특별히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있는 은컵이 너무 섬세해서 그 컵에서 눈을 뗄 수 없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붓을 들어 컵을 지워버렸다. “이 그림에서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떤 것도 시선을 끌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눈길을 끌어야 한다”고 하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지우고 말았다.
오늘 읽었던 성경에 보면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는 말씀이 있다. 오직 예수님만 보이면 된다. 예수님만 보고 알면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해결되도록 되어있다. 이 시간도 다른 것은 다 안보여도 예수님만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축록자불견산(逐鹿者不見山)이라는 말이 있다. 사슴을 쫓는 사냥꾼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다. 포수는 사슴에 초점을 맞추고 달려가야만 그 사슴을 잡을 수가 있다. 사슴을 쫓아가면서 경치가 좋다고 이산 저 산을 구경하다가는 사슴을 놓쳐버릴 수밖에 없다. 사슴을 쫓아가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사슴만 보여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본다고 하면 외롭지 않다. 오직 예수님만 본다고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가 있다. 예수님 안에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오직 예수님만 보고 예수님만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란다. 개인의 문제, 가정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문화적인 문제, 도덕적인 문제 우리에게 많이 있지만 그러나 오직 예수 한 분만 만나면 그 안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도록 되어져 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을 너무 많이 보고 있어요. 세례요한에게 보냄을 받은 한사람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갈대를 보려고 나갔더냐?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나갔더냐?”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 주변에 있는 많은 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정말 보아야할 예수님을 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시간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오직 주님만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오직 주님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오직 주님에게만 소망을 두어보세요. 모든 문제는 해결되도록 되어져 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던 베드로가 경험했던 행복, 만족, 놀라운 축복을 늘 경험하며 살아가자
3.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생각의 수준을 가져야 한다. 성경 속에 말씀을 읽으면 우리의 생각에 수준이 예수님 수준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은 세상의 소리 내 얕은 지식의 소리 내 얕은 식견과 경험의 소리를 듣지 마시기 바란다. 내 생각은 절망이요 불가능이요 포기 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불가능이 가능으로 포기가 소망으로 낙심이 오히려 기쁨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늘의 음성은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했다. 이는 온 인류가 들어야 할 말씀이요. 지금 우리가 들어야할 하늘의 소리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인류의 길이요 삶의 진리요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다. 제자들 앞에 우뚝 서 계신 오직 예수 그의 모습은 결코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제자들로 오직 예수 그분을 바라보는 순간 커다란 감동과 믿음에 서 있는 것이다. 이 변화 산의 변형이 가져다 준 의미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제자들에게 예수가 더 귀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더 귀중 하느냐 는 것은 오직 예수라는 믿음이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7절).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
우리가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의 말은 무익하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기 때문에 오직 말씀을 듣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늘 변화산 위에서 변화하신 영광의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는 말씀은 무엇인가? 오직 예수만이 죽음을 영광의 부활로 변화시키시는 구세주다. 오직 예수처럼 산아래 세상에 관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오직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아름답고 더 귀한 것이 있는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거기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 주님은 우리의 대속물이 되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참된 구원을 얻게 되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귀한 예배와, 귀한 예물과 헌신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신비한 은혜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감사다.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신비하고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날마다 체험하는 신실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①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 섬기고 예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사람이 영광을 받으면 안 된다. 모세는 1500년 전에 사람이다. 엘리야도 900년 전에 사람이다. 베드로는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섬겨야 하는데 예수님 옆에 사람을 바라보고 실족을 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가 좋사오니 예수님하고 옆에 두 사람을 위하여 내가 초막 세 채를 지을 테니 우리끼리만 여기서 삽시다”고 망발을 한 것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섬기고 오직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아무리 사람이 열심히 해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영광을 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님보다도 다른 것을 숭배하면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인 것이다. 예수님보다 사업을 예수님보다 남편과 자녀를 예수님보다 돈을 더욱 사랑하게 되면 그러다 어느 날 사람과 예수님 두 가지가 대립을 하게되어 선택을 하게 될 때에 결국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②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을 보면 좌절이 오고 시험이 오고 실망뿐이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출세만 바라보고 물질만 바라보면 낙심이 온다. 누구나 헛된 세상의 부귀영화를 바라보면서 살면 좌절이요 실패요 절망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 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왜 세상의 부귀 영화는 잠깐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게 잠시 잠깐이다. 세상에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결국은 모두가 사라진다. 부모도 사랑하는 아내도 사랑하는 남편도 세상의 부귀 영화도 명예와 권세도 결국은 하나씩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변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분이 있으니 세상에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도 결국은 모두가 사라진다. 부모도 사랑하는 아내도 사랑하는 남편도 세상의 부귀 영화도 명예와 권세도 모두 나이를 먹으면서 하나씩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우리와 함께 없어지지 않고 동행하시는 분이 있으니 오직 예수님뿐인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바라보면 안 된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 일 뿐이지 사람을 믿으면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못하고 절대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 일 뿐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바라기"는 언제나 태양만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처럼 성도는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사는 "주 바라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내 분수에 맞추어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오직 예수” 만을 바라고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③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오직 예수이시라는 사실이다.
노량진을 지나가던 한 학생이 곁에 있던 아저씨에게 “아저씨, 서울대를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라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학생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국, 영, 수를 중심으로,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열심히 공부하면 된단다.” 그러자 이 학생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아저씨, 그게 아니구요. 서울대 가려면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냐구요?” 이 학생은 서울대 가는 길을 물은 것인데, 그 아저씨는 어떻게 공부해야 서울대를 들어갈 수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요즘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시대’가 되었다. 가족 간에, 친구간에, 이웃 간에, 직장동료 간에, 성도간에 말은 많이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다. 여러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있으면 어떤가? 10분이 1시간처럼 느껴진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말은 많이 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대화는 잘 되지 않는다.
우리가 믿을 이는 예수밖에 없다.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영원한 진노에서 구원할 구주는 예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근래에 와서 현대주의 신학자들이 제기하는 종교혼합주의, 종교다원주의는 “구원은 달구경하는 것과 같아서 동쪽에서 올라가든, 서쪽으로 가든 산에 가서 달구경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모든 종교가 연합해서 하나가 되자고 하면서 공산주의까지도 포용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다.
행 4장에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요 14장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다.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 구원의 진리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도를 알지 못하고 영원히 살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목적은 내가 받아서 내가 혼자 누리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고 고난 받고 일하라고 주신 것이다. 빌 2:19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그런데 큰 영광을 미리 보여 주셨는데도 고난에 대한 생각보다는 영광보다 먼저 생각한 것은 오산이다.
십자가 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
오직 예수뿐인 것은 우리의 소망도 오직 예수뿐임을 암시한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의 유일한 소망도 하나님이었다. 시 39편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주님 뿐이요, 이 세상은 우리가 바랄 것이 없음을 누누이 강조한다. 우리는 자신을 냉철하게 검토해야 한다. 참으로 오직 예수뿐인가? 참으로 예수밖에 없는가?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닌가? 이 순간도 주님이 우리 마음문 밖에서 두드리신다. 마음 문 활짝 열고 영접하여 주님만 믿고 사랑하고 위해서 살아가자. 날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고통을 참으시고 지금도 날 위해 기도하시다가 얼마 후 재림하실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에게만 영광을 돌리자.
④ 최후의 소망도 오직 예수다.
변화산에 전개된 광경은 하늘의 광경이다. 계 1:16에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고 했다. 계 7장에 하늘의 성도들은 모두 흰옷을 입었다고 했다. 주님의 옷은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만큼 희게 할 수 없다고 했다. 모세와 엘리야도 하늘에 있는 인물들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 하늘의 영광을 지상에 붙들어두려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주님이 이 세 제자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신 의도가 무엇인가? 이들은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훈련시키는 세 용사다.
⑤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나 엘리야의 말을 들으라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사역을 모세의 손에 맡기지 않으시고, 엘리야의 손에도 맡기지 않으시고 오직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구원사역을 맡기셨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구원의 도리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그분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사회의 골치 덩이로 전락하고 마는데, 그 요인의 첫째는 진실성의 상실이요, 둘째는 신뢰의 상실이다.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여 힘이 없으면 사회를 이끌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관에 끌려 다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뜻을 이룰 수 없다. 오직 예수! 내 인생이 예수를 만나고 난 이후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다시 말해서 내 인생에 마지막 종말이 다가 올 때 내 인생에 남는 것이 오직 예수 만이어야 한다. 예수만 보여야 된다. 예수만 남는 인생 그 사람이 제일 잘 믿은 사람이다. 그 사람이 제일 복되게 산 사람이다. 내 인생 마지막 끝 날에 오직 내 인생의 모든 삶의 일정에 오직 예수님 남겨놓은 사람 예수 만 보이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잘 산 사람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길 주님이 원하신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만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도 집 생각, 아이들 생각, 사업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하는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란다.
존 맥아더 목사님이 제시한 다섯 가지 표지를 보면,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다. 예배는 교회 정체성에서 가장 본질이기 때문에 예배를 잃어버리면 병든 교회와 성도가 되고 만다. 둘째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선포하는 교회다. 중세시대는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창고에 숨겨놓고, 성직자가 독점했고, 라틴어 속에 가둬 놓았기 때문에 인류역사에서 가장 암흑기였다. 셋째는 건전한 기독교 교리 체계를 가진 교회다. 건전한 교리체계란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강조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하는 것을 말한다. 넷째는 개인적인 성결한 삶을 강조하는 교회다. 진리의 적용을 말하는 것으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가지고 진리를 말한다 하더라도 삶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허구(虛構)에 불과하다. 다섯째는 영적 지도자의 권위가 올바르게 행사되는 교회다. 영적 지도자는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성도들을 성숙하게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았기에 권위가 있다.
우리들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참빛 교회 성도들은 자기만이 복음의 즐거움과 신앙의 신비를 즐기려는 사람이 되지 말고, 아픔과 눈물이 있는 저 세상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복음을 들고 찾아 갈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한다. 지금도 산밑에는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는 아들의 죽음을 가지고 와서 고쳐 주기를 바라는 영혼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고발자나 방관자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
지나간 천수백년 동안 성도들은 은혜 받은 후 교회 밖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기보다, 교회 안에 머물며 서로 치고 받고 싸움질만 해댔다. 초대교회 이후 오랫동안 교회가 초막 짓는 일에만 매달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이 아니었다. 따라서 변화산 위에서 하늘의 영광을 체험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처럼, 하늘의 영광을 체험하시기 바란다. 영광을 체험하기 전에 세상에 들어가서는 어려움을 당할 것이다.
가장 먼저 하늘의 영광을 체험하고 그 다음에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삶의 현장인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사업장으로 가시기 바란다. 그래서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상처받은 자, 억눌린 자, 외로운 자, 차별 받고 소외당하는 자들에게 다가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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