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
차례
1. 세상에는 성경처럼 기록된 책이 없습니다
2.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성경 밖에서는 구원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3. 성경과 같이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세상에 없습니다.
4, 현존하는 책들 가운데 성경만큼 인류에게 놀라운 변화와 영향을 끼친 책은 없습니다.
5. 바르게 읽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큰 유익을 끼친 책은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6. 성경은 교리와 인간의 의무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재어 보는 유일한 원리입니다.
7.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진실한 종이 항상 사랑하고 따라 살기를 힘썼던 유일한 책입니다
8. 성경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위로 가운데 맞도록 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1. 세상에는 성경처럼 기록된 책이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책입니다(딤후 3:16). 그런 면에서 성경은 다른 모든 저작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각 저자들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친히 가르쳐 기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의 지각에 생각과 개념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런 생각과 개념을 바르게 기술하도록 지도하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여러분은 자신과 같이 미약하고 불완전한 사람이 스스로 배워 기술한 바를 읽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들을 때, 유한하고 오류투성이인 인간의 의견을 듣는 것 이 아닙니다. 만왕의 왕의 불변하는 생각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받아 적도록 택함 받은 사람이 자의로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벧후 1:21). 세상의 다른 모든 책은 아무리 선하고 유용하다해도 성경과 같이 완전하지 못합니다. 이런 책들은 보면 볼수록 결점과 오류를 발견할 뿐입니다. 성경만이 절대적으로 완전합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를 장황하게 나열하느라 지면을 허비하지는 않겠습니다. 성경 자체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된 책임을 가장 탁월하게 확증한다고 저는 감히 고백합니다. 성경의 자증 말고는 성경이 영감 받은 책임을 제대로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위대하고 영속적인 신비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지 않았다고 감히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말하는 합당한 이유를 제시해 보라고 하십시오. 이제 저는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며 누구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성경의 독특한 성격과 특징을 말해 보겠습니다. 제가 성경을 하나님이 책이라고 증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그런 부담도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하나님께서 친히 증명하십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이 각각 다른 문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성경의 영감을 반박하는 증거가 전혀 될 수 없습니다.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의 문체가 다릅니다. 바울 서신 또한 요한 서신과는 다른 문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이 저자들의 기록은 모두 각각 동등하게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입니다. 지역에 따라 색조나 명암이 모두 다르지만 바다는 하나입니다. 파랗게 보이는 부분이 있는가하면 녹색을 띄는 부분도 있습니다. 위치에 따라 깊이가 각기 다르고 바다 밑바닥을 이루는 성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다를 구성하는 물은 동일한 짠 바닷물입니다. 한 사람의 호흡이라도 어떤 악기를 들고 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소리를 냅니다. 플룻, 피리, 드럼펫은 각기 독특한 음색이 있습니다. 음색이야 어떻든 모두 한 사람의 호흡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행성들도 내는 빛이 각기 다릅니다. 화성, 토성, 목성이 모두 각기 독특한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이 행성들이 반사하는 빛은 모두 한 태양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성경은 모두 한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진리입니다. 그러나 각 책이 말하는 진리의 모양이 양태는 성령께서 기록하게 하신 사람에 따라 다양합니다. 성경 저자들마다 손글씨와 문체가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저자와 그들의 기록을 지도하고 영감한 하늘의 인도자는 한분입니다. 모든 책이 동일한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습니다. 성경 각 장과 절, 단어 하나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을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영감에 대한 의구심과 회의적인 생각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스스로 잠잠히 성경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어거스틴의 회심의 단초가 되었던 성경 읽기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집어 들고 읽어라!” 성경을 집어 들고 읽음으로 무수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어 누구도 풀 수없는 매듭-편집자)이 풀립니다! 난제와 반대들이 동트는 아침의 안개처럼 금세 사라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내 “성경은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손가락으로 기록한 책이 맞다! 하나님이 이 안에 계시는데 여태 그걸 모르다니!”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 장은 바로 이런 성경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을 “교훈하기 위해” 하나님이 이 책을 영감으로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지나갈 문제가 아닙니다(롬 3:2 15:4). 제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2.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성경 밖에서는 구원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니엘의 말이 날마다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학교가 안 세워진 곳이 없습니다. 도처에 대학들 있습니다. 오래된 대학은 기존의 이미지 벗고 새롭게 보이려고 애를 씁니다. 연일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세상이 창조된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책들이 가르쳐지고 읽히고 있습니다. 모두 좋은 일입니다. 이런 현상을 저는 환영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무지한 국민이 많을수록 위험하고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지한 국민은 압살롬, 케이틀린 와트 타일러, 잭 케이드와 같은 사람들의 현혹을 받아 악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이무리 교육을 잘 받는다고 해도,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모르면 지옥으로 내려가는 자기 영혼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잘 배운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언어들을 구사할 수도 있습니다. 천지에 관한 모든 고상하고 깊은 지식을 있을 수 있습니다.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큼 많은 책들을 읽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늘의 별과 공중의 새와 이 땅의 짐승과 바다의 새들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솔로몬처럼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왕상 4:33). 불과 공기, 땅, 바다의 모든 숨은 지식을 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경 진리를 모르고 죽는다면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 죽는 것입니다! 화학으로는 결코 죄책 아래 있는 양심을 잠잠하게 하지 못합니다. 수학으로는 깨어진 마음을 싸맬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학식과 학문으로도 죽음의 침상에 놓인 베개를 안락한 것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에게 소망을 쥐어 준 철학은 없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람을 평강으로 인도한 자연신학은 없었습니다. 이 땅에 속한 지식, 이 땅을 위한 지식으로는 이 땅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이런 지식은 사람으로 자기와 같은 다른 피조물보다 조금 더 낫거나 조금 못하다는 이유로 잠시 우쭐하게 하거나 안절부절 못하게 할지언정, 천국으로 날아오르는 날개를 달아 주지는 못합니다. 이런 지식이 가장 많은 사람이라도 종국에 성경을 알지 못하고서는 영원한 소유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뿐입니다. 이런 지식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죽은 후에는 모두 소용없는 지식입니다.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무지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얻습니다. 문맹이라도 구원을 얻습니다. 지리적인 지식이라고 해봐야 자신이 사는 교구에 대한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영국이나 파리나 뉴욕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어딘지 모를 정도로 무지할 수 있습니다. 천과 백만이 어떻게 다른지 모를 정도로 수리에 문외한 일 수 있습니다. 자국의 역사도 모를 정도로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레미스 여왕이나, 로마제국에 저항했던 영국 이케니족의 보아디케아 여왕이나 엘리자베스 여왕 등에 대해서도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국가의 재정을 재무부장관이 담당하는지 전군사령관이 담당하는지 아니면 켄터베리 대주교가 담당하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과학이나 과학적 발견에 대해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전쟁에서 화약을 써서 승리를 했는지, 사도가 인쇄기를 써서 성경을 찍어냈는지 태양이 지구 주변을 공전하는지 아닌지 전혀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이 성경의 진리를 듣고 마음으로 믿었다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만큼은 충분히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아브라함의 품에서 발견될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죽은 과학자는 영원한 멸망의 자리로 내려갈지라도 말입니다.
오늘날은 과학과 “실용지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시대입니다. 하지만 결국 필요하고 영원토록 유용한 지식은 성경을 아는 지식뿐입니다. 돈이 없어도, 많이 배우지 못했어도, 건강하지 못해도 친구가 없어도 천국에 이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누구라도 천국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탁월한 지성을 소유하고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도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모른다면 그의 영혼은 영원히 좌초된 상태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화로다! 화로다! 성경에 무지한 채로 죽은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뿐입니다.
이 장에서 바로 이 책, 성경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이 책은 여러분이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영혼의 구원이 걸린 문제입니다. 제가 묻는 말에 진지하게 대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3. 성경과 같이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세상에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성경만이 담고 있는 모든 위대한 일을 제대로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개요만 간추려 말해서는 성경의 보화를 다 펼쳐 보일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특정한 진리의 목록만 죽 나열해도 이 책을 가득 채우고도 남습니다. 그래도 성경의 부요함을 절반도 채 담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우리 영혼을 흡족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방식은 또 어떻습니까!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과, 우리를 대신해서 그분이 이루신 속죄와, 우리 죄로 인해 대가를 그분의 피로 모두 치르신 것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죄인의 괴수까지도 구원하고 용서하고 기꺼이 받으시는 것과 같은 진리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광대하고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합니다. 성경이 아니고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진리들이 아닙니까!
위대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성경의 진술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성경은 이 이야기를 복음서를 통해 네 번이나 반복해서 들려줍니다. 각기 다른 네 증인들이 그리스도의 이적과 사역, 그분의 말과 행동, 삶과 죽음, 능력과 사랑, 온유와 인내, 그분 삶의 방식, 역사, 생각, 마음 등을 증거합니다. 성경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알아들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한 사람들의 모범은 또 얼마나 격려가 되는지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많은 사람들 - 우리와 마찬가지로 염려와 난관이 끊이지 않고, 돌봐야 할 가족이 있으며, 유혹과 고난과 질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 이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로 드러납니다(히 6:12). 성경은 이런 사람들의 삶을 감추지 않습니다. 이들의 실수와 연약함, 갈등, 경험, 기도, 찬양, 유익한 삶, 행복한 죽음 등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이들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이 변함없이 은혜로우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언급하는 악인들의 예는 얼마나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킵니까! 우리와 마찬가지로 비추임을 받고 지식과 기회를 얻었지만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죄를 떠나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고집하고, 책망을 멸시하다가 급기야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진 영혼들에 대해 말씀합니다. 바로와 사울과 아합과 이세벨과 유다와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벌하신 하나님은 여전히 동일하실 뿐 아니라, 지옥도 여전히 그때와 변함없이 죄인들을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약속은 또 얼마나 소중합니까! “때에 맞는 말씀”이 없는 것이야말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급한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하신 약속들을 모두 기억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발하신 약속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는 성경의 소망은 얼마나 복됩니까! 성경은 평강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을 말씀합니다. 무덤 저편에서의 복락과 안식을 말씀합니다. 부활의 아침에 입을 영광스러운 몸을 말씀합니다. 심판 날에 온전히 신원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받을 영원한 상급을 말씀합니다. 이 모든 것은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이 반겨 맞을 복된 장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된 모든 말씀 하나하나가 진리인 바로 이 책에 말입니다.
사람의 성품에 대해 성경이 비쳐주는 빛은 정말 놀랍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며 삶의 모든 위치와 상황에서 어떻게 행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 만사와 인간 행위의 이면에 있는 가장 은밀한 원천과 동기를 통찰하게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히 4:12). 잠언과 전도서에서 배어 나오는 지혜는 얼마나 달콤하고 심오합니까! 오래전 “나를 토굴에 가두더라도 초 한 자루와 성경만 있다면 세상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두 말해 줄 수 있다”고 한 목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는 압니다.
성경이 아니고는 이런 것들을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이 없다면 마땅히 알아야 할 이런 일들에 대해 얼마나 우리가 무지한지조차 모를 것입니다. 사람들은 숨 귀는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날마다 비치는 햇빛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이런 것들이 없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또한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이런 진리가 계시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드리운 흑암이 어떤 것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한 권의 책이 담고 있는 보화의 가치를 온전히 분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 옛날 존 뉴턴(John Newton) 이 말한 것처럼 동인 책이 있고, 은인 책이 있고 금인 책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온 세상의 지혜를 모두 모아 만든 것과 같습니다.
이 장에서 우리가 다루는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책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이 보고(寶庫)를 여러분이 어떻게 누리고 있는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4, 현존하는 책들 가운데 성경만큼 인류에게 놀라운 변화와 영향을 끼친 책은 없습니다.
사도 시대 때 이 책이 가르치는 교훈으로 세상이 소동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구 한 귀퉁이에서 몇몇 유대인을 보내 사람이 보기에 전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일을 시작하게 하신 지 천팔백 년이 지났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미신과 잔인함과 정욕과 죄악들이 온 세상에 가득한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종교는 모두 거짓일 뿐 아니라 무익하며, 반드시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세상 선포하라고 그들을 보내셨습니다. 옛 습관과 풍습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도록 축구하라고 그들을 보내셨습니다. 사람을 가장 비천하게 만드는 우상숭배, 패역하고 역겨운 부도덕, 당시의 기득권자, 오래도록 이어 온 집단, 완고한 제사장, 조롱하는 철학자, 무지한 대중, 잔인한 황제, 로마제국의 모든 권력과 싸우라고 그들을 보내셨습닏. 돈키호테의 행동만큼이나 허황되게 보이고 도무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일을 하라고 이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어떻게 준비시키셨습니까? 육신적인 무기로 준비시킨 것이 아닙니다. 동의하라고 압박할 수 있는 세상적인 권세를 주시지도 않았고, 돈을 뿌려서 믿음을 사도록 세상적인 재력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이들의 마음에 부으시고 성경을 손에 쥐어 준 것 뿐입니다. 성경의 교리를 선포하고 설명해 주고, 이 교리로 촉구하라고 명하신 것뿐입니다. 1세기의 기독교 설교자들은 마호메트처럼 칼을 차고 군대를 대동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음란한 우상을 섬기는 힌두교 사제들처럼 육신적 쾌락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면허증을 가지고 백성을 꾀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성경이 전부인 거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흥왕하게 되었습니까? 몇 세대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들은 성경의 교리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모습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이교 신들을 섬기는 신전들이 텅텅 비게 되었습니다. 우상숭배를 고사시켰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가장 고상한 도덕적 관계가 자리하게 했습니다. 여성의 인격과 지위를 고양시켰습니다. 순수함과 품격의 기준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검투사의 싸움과 같은 잔인한 관습을 종식시켰습니다. 이들을 통해 사회가 맛보게 된 변화를 열거하면 끝이 없습니다. 핍박과 반대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승리가 이어졌습니다. 곳곳에 만연했던 악행들이 하나둘 씩 자취를 감췄습니다. 사람들의 기호와 상관없이, 이 모든 것이 이 새 믿음의 등장과 함께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새 믿음의 권세아래 굴복한 것입니다. 온 땅이 흔들렸습니다. 이들이 안전지대라고 만들어 놓은 부패한 도피처들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새 믿음이라고 하는 이 홍수의 수위가 높아짐에 따라 무너진 이들의 잔해 역시 그 허망한 기초에서 들려 떠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나무는 점점 무성하고 우람하게 자라갔습니다. 이 나무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려고 이들을 결박하던 구습의 사슬은 새끼줄과 같이 허망하게 끊기고 맙니다. 이 모든 일이 성경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라 말로 진정한 승전가가 아닙니까! 그에 비하면 알렉산더, 시저, 말버러, 나폴레옹, 웰링턴의 승리가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정도로 보나, 완전함으로 보나, 결과로 보나, 영속성으로 보나, 성경이 일군 승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이루는 승리에는 아무 것도 비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저 영광스러운 종교개혁 시대에 전 유럽을 뒤집어 놓은 책입니다. 오백 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의 역사를 읽으면 당시 기독교 신앙을 고백했던 교회에 드리운 어둠을 발견할 것입니다. 얼마나 칠흑같은 어둠인지 마치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기독교는 심하게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났다면 당시의 기독교가 정말 자신들이 전파했던 기독교인지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시대에 있었던 이교주의가 기독교란 이름으로 다시 발흥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음의 가르침에는 인간의 전통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고해, 성지순례, 면죄부, 유물숭배, 형상숭배, 성인숭배, 마리아숭배가 사람들이 고백하는 신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우상이었습니다. 사제들과 교회의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토록 끔찍한 흑암을 물리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독일의 개신교가 자리하게 된 것은 단순히 루터와 그 동료들의 설교 때문이 아닙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이 교회의 세력을 뒤집어엎는 지렛대 역할을 했습니다. 영국에서 교황주의가 패퇴한 것은 단순히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와 다른 영국의 종교개혁자들의 저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존 위클리프(John Wyeliffe)가 성경을 번역해 파종한 것이 이런 엄청난 결실을 가져온 것입니다. 영국 사람들의 마음이 교황에게서 점점 멀어진 것은 단순히 헨리 8세와 교황 간의 갈등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을 번역하고 이 성경을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왕실이 재가하여 누구나 원하는 대로 성경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국과 독일과 스위스에 개신교의 대의가 자리할 수 있었던 주된 원인은 성경이 배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종교개혁 1세대가 저무는 동시에 백성은 이전의 올무 아래로 다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음으로 대중의 마음이 참된 신앙의 원리가 누룩처럼 번져 갔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열렸습니다. 영적인 지각이 열렸습니다. 교황주의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를 확연히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순전한 복음의 탁월함이 그들 마음에 새로운 토대로 자리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교황이 발하는 출교의 위협조차 모두 부질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왕과 여왕들이 나서서 불과 칼로 개신교 신앙이 가는 길을 막아 보려고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많이 알아 버렸습니다. 빛을 본 것입니다. 기쁨의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진리의 맛을 본 것입니다. 흑암 가운데 잠자던 이들의 마음에 태양이 떠오른 것입니다.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벗겨진 것입니다. 이들 안에서 성경이 그 본연의 역사를 이루었고 이 역사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백성은 다시 이집트로 내려가기를 거부했습니다. 영적인 시계를 거꾸로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성경으로 인해 지적이고 도덕적인 혁명이 촉발 되었습니다. 성경이 불러온 진정한 혁명이었습니다. 베르토(ReneAubert de Verrot)가 기록한 혁명들이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프랑스와 영국이 경험한 세속 혁명은 성경을 통해 일구어진 혁명에 비할 것이 못됩니다. 어떤 혁명도 성경을 통해 이룬 것처럼 피를 흘리지 않고, 만족스럽고 영속적이 결과를 가져온 것은 없었습니다!
열방의 안녕이 이 책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 신앙을 인정하는 모든 나라의 안녕과 장래는 이 책을 아는 지식과 떼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존중하는가, 성경의 빛 가운데 행하는가, 도덕적인가, 참된 종교를 추구하는가, 선한 법을 입법하고 자유를 보장하는가 하는 것이 한 나라의 흥망을 결정합니다. 저와 함께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보면 이런 증거를 수도 없이 발견할 것입니다. 열왕들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봐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악들이 만연했습니까!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요시야 왕 때에 성전 한 귀퉁이에서 하나님의 율법책이 발견되었겠습니까?(왕하 22:8) 그것도 율법책을 찾으려고 찾은 게 아니라 성전을 수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인들은 어떠했는지 보십시오.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얼마나 끔찍합니까? 그들의 신앙은 또 어떻습니까! 하지만 자기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던 이들이었기에 이는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마 15:6). 중세의 교회를 보십시오. 이때에 교회에 만연했던 무지와 미신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성경의 빛이 없었기 때문에 흑암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문명사회에 세워진 많은 탁월한 명성 있는 기관들 가운데 성경에 빚을 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공공의 혜택과 유익을 위해 사람들이 받아들인 많은 선한 것들의 기원을 따라가 보면 결국 성경에까지 미치는 것이 정말 많습니다. 성경이 받아들여진 곳 어디나 그 영향이 계속되고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는 법들이 성경으로부터 왔습니다. 기독교 국가들에 널리 알려진 진리, 정직, 남편과 아내의 관계 등에 관한 도덕의 기준 역시 성경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이교도 사이에 큰 차이 -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크게 인정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 가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가장 자비로운 선물인 주일 역시 성경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구제와 자선 기관역시 성경의 영향으로 세워졌습니다. 성경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기 전까지만 해도 병자, 가난한 자, 나이든 자, 고아, 정신병자, 정신지체자, 시각장애자 등은 거의 사회에서 소외되고 무시되었습니다. 아테네나 로마의 역사를 샅샅이 살펴보십시오. 이런 약자들을 돕는 기관이나 법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지금 성경을 조롱하는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이 없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갔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조차 성경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믿지 않는 노동자는 우리나라의 시설 좋은 병원에 누워 치료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지금 누리는 모든 안락함이 자신이 그토록 멸시하는 성경 덕분이라는 사실을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없었다면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 없이 외롭고 쓸쓸하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두려울 정도로 자신들이 성경에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합니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성경을 통해 얼마나 많은 혜택을 입고 살아왔는지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책이 바로 지금 우리가 다루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성경을 어떻게 읽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승전을 거둔 제독에게 수여된 검,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의 군함, 메나이 해협을 잇는 강관교를 떠받치는 수압 등 엄청난 권세와 힘을 발휘하는 이 모든 것은 세간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다루는 이 책은 이런 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은 능력을 발휘하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주목 받아 마땅한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5. 바르게 읽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큰 유익을 끼친 책은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지혜를 가르친다고 하지 않습니다. 지리나 천문학을 설명하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수학이나 자연철학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성경을 잘 읽는다고 의사나 변하사나기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외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또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돈을 벌고 일을 하는 것 외에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또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몸의 건강과 외모 외에도 우리가 관심을 집중해야 할 다른 것이 있습니다. 자기 영혼의 유익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이 특별히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불멸하는 영혼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법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윌리엄 블랙스톤(William Blackstone)이나 에드워드 석돈(Sugden)을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천문학이나 지리를 알고 싶다면 윌리엄 허셀(William Hershel)이나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을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떻게 해야 자기 영혼이 구원받는지 알고자 한다면 먼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성경은 능히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합니다. 천국으로 난 길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 줍니다. 믿어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쳐줍니다. 행해야할 모든 것을 설명해 줍니다. 여러분이 누구인지 가르쳐 줍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죄인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거룩하신 분임을 보여 줍니다. 위대한 사죄와 화평과 은혜의 수여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스코틀랜드의 3인의 설교자로 불리는 로버트 블레어(Robert Blair), 새뮤얼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이 살던 시대에 한 영국인이 스코틀랜드를 방문해서 그들의 설교를 연이어 들었습니다. 첫 번째 설교자는 그에게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주었고, 두 번째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을, 세 번째 설교자는 하나님이 경륜을 보여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영광입니다.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적용하시는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결정적으로 돌아서게 하는 주된 도구입니다. 이런 강력한 변화는 보통 성경 말씀의 가르침이나 특정한 본문에 대한 가르침과 더불어 시작해 사람의 양심을 사로잡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은 수천년 동안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기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주정뱅이가 온전하게 되고, 방탕한 사람이 순전한 사람이 되고, 강도가 정직한 사람이 되고, 불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이 온순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이전 것들을 모두 버리게 했습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했습니다 세속적인 사람들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던 자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했습니다. 사람이 가진 열망이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하도록 했습니다. 항상 땅의 것을 생각하던 사람들로 하늘의 것을 생각하도록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살던 자들로 믿음을 따라 살도록 하였습니다. 성경은 세상 구석구석에서 이 모든 일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중단 없이 계속됩니다. 이 모든 일과 비교할 때 유약한 사람들이나 로마 가톨릭이 말하기를 기적들이 사실이라고 한들, 다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해마다 가져오는 놀라운 변화야말로 참된 기적입니다.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적용하시는 성경은 회심 이후에 신자가 믿음 안에서 견고하게 서 가는 방편입니다. 성경은 신자로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의로 교훈하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구비되게 합니다(시119:9, 요17:17, 딤후 3:16-17). 성령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이런 일들을 하십니다. 때로 들려 읽혀진 말씀을 통해, 때로는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기록된 말씀과 상관없이 역사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성경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삶의 모든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은 신자로 선한 주인, 선한 하인, 선한 신하, 선한 남편, 성한 아비, 선한 아들이 되게 합니다. 불평 없이 고난과 궁핍을 견디게 하고, 그런 때조차 “영혼의 평안”을 노래하도록 합니다. 성경은 신자로 다가오는 죽음을 직시하고, “내가 사망의 음침힌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안을 것은”이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합니다(시 23:4). 심판과 영원을 생각하고도 두려워하지 않게 합니다. 뒤로 물러나지 않고 핍박을 견디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부인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자유와 생명을 부인할 수 있게 합니다. 여러분, 기진하고 힘이 없습니까? 성경이 여러분의 영혼을 일깨웁니다. 여러분, 슬픕니까? 성경이 여러분에게 위로를 줍니다. 여러분,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까? 성경이 여러분을 돌아오게 합니다. 여러분, 연약합니까? 성경이 여러분을 강건하게 합니다. 여러분, 벗들과 어울립니까? 성경이 여러분을 악에서 떠나게 합니다. 여러분, 외롭습니까? 성경이 여러분과 더불어 대화합니다(잠 6:22). 이는 모든 신자에게 성경이 하는 일입니다. 큰 자는 물론 작은 자에게까지 예외가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물론 부자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이미 수천 년을 그렇게 역사했습니다. 지금도 날마다 그렇게 역사합니다.
성경이 있고 그 마음에 성령이 거하는 사람은 신령한 지혜로 준비된 사람입니다. 생명의 떡을 떼기 위해 사제에게 달려갈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데 오랜 전통도, 교부들의 저작도, 교회의 칙령도 필요 없습니다. 이미 그 앞에 진리의 샘이 열렸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렇습니다! 감옥에 혼자 갇혀 있거나 외딴 섬에 던져져서 교회나 목사나 성례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해도, 성경만 있으면 그는 틀림없는 인도자를 얻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성경을 바로 읽을 의지만 있다면 틀림없이 성경은 천국으로 난 길을 가르칠 것입니다. 성경만이 절대로 확실합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공회도 아닙니다. 목사도 아닙니다.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만이 무오합니다.
성경에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도통 남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너무 어렵고 심오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성경에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 옵니다.
물론 성경에는 난해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말씀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것을 이해할 만큼 우리의 지각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성의 능력을 넘어서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총명의 눈이 흐리지 않다면 설명하지 못할 내용도 없습니다.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지식의 초석과 토대가 아닙니까? 사람이 학문의 진보를 이루고 무엇을 알아가기 전에 먼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야야 할 많은 원리들이 있지 않습니까? 어린 자녀가 무엇을 배울 때, 이해하지 못해도 먼저 기본적으로 받으려야할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모들이 그렇게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오한 것들”을 발견할 것을 기대하고 말씀을 계속 읽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많은 내용들이 보다 명확히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게 기대하고 또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믿어야할 것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알게 될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중 많은 부분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오는 세상에서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어려운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성경 읽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묻습니다. 과연 성경에는 어려운 것만 있습니까? 쉽고 분명한 것은 없습니까? 쉽고 분명한 것도 많지 않습니까? 양심적으로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성경을 통틀어 중요한 사건과 원리들을 전혀 보지 못했단 말입니까? 랜즈앤드에서 템스 강 포구에 이르는 영국의 곶마다 세워진 등대들처럼 구원에 필요한 내용이 뚜렷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영국 해안을 따라 자리한 모든 교구와 마을과 수로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소연하면서 영국 해협 입구에 배를 대놓고 더 이상 항해하기를 거부하는 증기선 선장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리저드, 에디스톤, 스타트, 포틀랜드, 성 캐서린, 비치 헤드, 던지니스, 포어랜드에 자리한 등대들이 거리의 가로등마냥 강 포구까지 그를 인도하기 위해 불을 밝히고 있음에도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그를 게으른 겁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밤바다를 밝히는 등대가 이렇게 환한데 왜 계속해서 항해해 가지 않느냐고 묻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상태와 천국으로 이끄는 길과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정오의, 빛과 같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어려운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성경읽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 모든 반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고,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이 대는 핑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편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만 조금도 유익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똑같다고 반론을 제기합니다. 성경이 능력이 있는 책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힐난합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아주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아무런 유익이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는 성경을 바르게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는 거기에 합당한 방식이 있습니다. 범사가 그런 것처럼 성경읽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방식으로 읽는지에 따라 얻는 것이 다릅니다. 성경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성찬에 참여하여 떡과 포도주를 받는 것 자체가 유익을 주지 않듯이, 단순히 활자만 따라 읽어서는 성경으로부터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합니다. 성경은 간절한 기도와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가장 잘 만들어진 증기기관차라도 그것을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해시계를 가졌다 한를 그것을 그늘에 세울 만큼 무지하다면 아무리 좋은 시계를 가졌다고 해도 시간을 알 재간이 없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 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고 있다면, 성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읽고 있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성경을 읽지만 나아지는 것이 별로 없다고 말하며 성경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자신이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유익이 없다고 하면서 그것을 반대하는 근거로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나 베뢰아 사람들과 같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끈기 있게 성경을 읽어 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국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행 8:28, 17:11). 그렇습니다.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와 같은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이들은 모두 심판 날에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그날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성경의 샘으로 나아갔는데도 생명수 한 모금 취하지 못했다고 문제를 제기하는 영혼은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성경을 찾고 또 찾았지만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잠언 말씀은 성경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 2:3-5).
지금 우리는 이 위대한 책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이 성경을 어떻게 읽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콜레라가 창궐하는 때에 몸의 건강을 지켜 주는 확실한 처방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자기 영혼의 영원한 안녕을 위한 유일하고도 확실한 처방을 멸시하고 있다면 그런 여러분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6. 성경은 교리와 인간의 의무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재어 보는 유일한 원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타락한 우리의 지각이 얼마나 연약한지 아십니다. 회심한 이후에도 선악을 잘 분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아십니다. 사탄이 얼마나 간교하게 불의를 진리로 둔갑시키는지, 그럴듯한 주장으로 잘못된 것을 마치 옳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지도 잘 아십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큰 자비로 진리와 비진리, 옳고 그름에 대한 틀림없는 기준을 주셨고, 이 기준을 한 권의 책으로 보존하셨습니다. 성경으로 말입니다.
세상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기록된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살면 살수록 조언자와 상담자가 필요함을 전점 더 절감합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음과 행실에 관한 불변의 원리가 필요함을 절감합니다. 짐승처럼 살지 않는 한, 사람은 항상 난관에 봉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내가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에는 배우는 일과 관련된 어려움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류이 집은 진리의 집과 아주 가까이에 나란히 자리합니다.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 모양도 똑 같아서 착각할 위험이 큽니다. 책을 많이 읽거나 여행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서로 상반된 생각이 많음을 금세 알아차릴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조차 저마다 답을 달리하기도 합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로마 카토릭교도와 나폴레옹과 옥스퍼드 운동가, 몰몬교도와 스베덴보리 신봉자(Swedenborgian) 모두가 저마다 자신만이 진리를 가졌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속한 곳만이 안전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한테로 오라”고 하면서 저마다 팔을 끄집어 당깁니다. 정말 혼란스럽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교구라면 이런 문제에 좀 덜 시달릴 것 같습니까? 각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살아가기는 영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조차 신앙고백의 여러 조항들이 가진 중요성에 대해 심각한 견해차가 있습니다. 교회 정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례나 예배와 같은 형식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고, 복음 설교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에게 가면 답이 나올까요? 목사들도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저마다 가르치는 교리가 다릅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이럴 때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가지 대답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경을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받지도 믿어서도 안 됩니다. 이 책으로 모든 가르침을 재어 보아야 합니다. 그 가르침이 성경과 부합한지. 성경이 그 부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이 나라 신자들의 눈을 더 밝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들로 설교와 책과 생각과 목사들을 성경의 저울에 달아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성경에 얼마나 부합하지 재어 불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에 부합한 것이 아니면 그것이 누구로부터 온 것이든 - 교부든 종교개혁자든, 감독이든 대주교든, 사제든 부제든, 부주교든 주임사제든 -상관없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받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받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거부하고 받지 말아야 합니다. "교구목사“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신자들로 인해 초래될 일들이 두렵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아람 사람들처럼 성경에 대해 무지하게 되어 결국에 로마 가톨릭의 지배 아래로 떨어지게 될 까 두렵습니다(왕하 6:20). 영국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을 알고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땅의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목사의 가르침을 성경으로 판단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교구마다 가르치는 교리가 다른 상황에서 신자들은 반드시 스스로 성경을 읽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구에서 가르치는 교리들이 모두 맞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비추어 그 교리들이 과연 맞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참된 목사라면 자기가 섬기는 교인들이 성경을 가지고 자신의 가르침을 확인해 본다고 불평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교인들이 성경을 더 많이 읽을수록 그가 성경을 따라 가르친 바를 더 잘 알아듣기 때문에 좋아할 것입니다. 잘못된 목사들은 “교인들은 목사의 가르침을 사사로이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안수 받은 우리가 가르치는 대로 따라 오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목사라면 “성경을 연구하십시오. 그리고 제가 말한 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으면 제 말을 믿지 마십시오”라고 할 것입니다. 잘못된 목사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들으십시오”라고 하거나 “제 말을 들으십시오”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목사는 “하나님이 말씀을 들으십시오”라고 합니다.
세상은 배우는 일 만큼이나 배운 바를 실천하는데 있어서도 어려움이 많습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아는 바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기를 바르는 사람은 이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혼란스럽고 난감한 질문들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입니다. 자기 앞에 놓인 일련의 의무들에 대한 의심이 일고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알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사업이나 직장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자신이 소명의 소명을 이루어 가야 옳은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일이 되어 가는 상황을 보면 과연 저렇게 해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바르고 정직하게 되어 간다고 보기가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동료나 경쟁업체를 보면 모두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일 존경할 만한 업체라고 알려진 데서조차 이런 일들이 예삿일로 일어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문을 남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금하시는 일도 아닙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오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경마, 무도회, 오페라, 극장, 카드놀이와 같은 것으로 시간을 보내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곧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것들로 여가를 채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모두 잘못하는 것인가? 이런 것들이 정말 해로운 것들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자녀 교육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도덕적이고 신앙적으로 자라고, 영혼의 소중함을 아는 자녀로 자라게 하려고 애를 써 봅니다. 하지만 주변에 지각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은 아직 어리기 때문에 너무 심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이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합니다. 억지로 무엇을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동화극이나 아이들끼리 모이는 파티나 무도회에도 보내야 한다고 합니다. 젊잖은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지체 높은 부인들도 다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고도 여전히 신앙이 좋은 사람들로 존경을 받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니 잘못될 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모든 물음에 대한 답은 하나입니다. 성경을 자기 행실과 믿음의 유일한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의 주된 원리로 나침반을 삼고 삶이라고 하는 바다를 헤쳐 가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과 정신으로 모든 문제와 의문들을 꼼꼼히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하는가?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는가?”하고 물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말씀의 해시계에 맞추면 됩니다. 이웃의 시계에 내 시계를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 이 조언을 엄중하게 생각하고 날마다 이 원리를 따라가십시오. 그러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원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너무 엄격하고 까롭다는 비난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너무 심하다는 비아냥에 주눅 들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엄밀하고 거룩한 분이심을 잊지 마십시오. 실천이 불가능한 원리라느니, 세상을 너무 모른다느니, 하는 반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결국 모두가 성경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십시오. 이생을 다 마친 후 성경에 따라 심판 받고 정죄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자신을 성경대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해 주십시오.
믿음과 행실에 관한 이 강력한 규칙이 바로 우리가 지금 말하는 주제인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사방에 풍파가 일어 위험이 임박했음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구명정으로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제가 묻는 이 엄중한 물음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떠한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7.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진실한 종이 항상 사랑하고 따라 살기를 힘썼던 유일한 책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생물은 양식이 있어야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보존하고 살찌울 양식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새, 짐승, 물고기, 파충류, 곤충, 식물이 모두 그렇습니다. 영적인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죄로 인한 사망에서 일으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새 생명의 원리에 맞는 양식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바로 그 양식입니다.
세상 이 끝에서 저 끝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거듭난 사람치고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가 본능적으로 엄마의 젖을 찾고 또 그 젖을 먹고 자라듯이, “거듭난” 영혼 역시 말씀의 순전한 젖을 찾습니다. 그 젖을 먹어야 자랍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새 생명의 표지입니다. “주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시 1:2).
성경 읽기를 소홀이 하고 말씀 설교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형식이나 의식에는 열심을 낼지 모르겠습니다. 성례에 힘쓰고 날마다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보다 이런 것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회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영혼의 맥박과 체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성경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영혼의 심장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재주하시는 분명한 증거가 없다면 성령의 내주하심을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을 부인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욥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족장의 배경이나 나이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적어도 성경이 그것을 분명히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욥에 관한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욥 23:12).
말씀에 대한 사랑은 다윗에게서도 두드러졌습니다. 성경에 대한 그의 사랑은 시편 119편에서 절절히 배어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시 119:97).
사도 바울 역시 성경 말씀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와 그의 동역자들은 다름 아닌 “성경에 능한 자들”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와 전도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성경 말씀을 사랑한 분이셨습니다. 공적인 자리에서 성경을 낭독하셨을 뿐 아니라 늘 그 입술에서 는 성경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분은 틈나는 대로 성경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연구하라”고 충고하셨습니다. 마귀를 물리치실 때도 말씀은 그분의 병기였습니다. “말씀이 성취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 계시면서 마지막까지 하신 일은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하는 것이었습니다(눅 24:45). 성경에 대해서 자기 주인의 마음과 다른 마음을 가진 자가 어찌 진정한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교회사를 통틀어 사도 아래로 모든 성도가 보여준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성경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와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을 인도한 등불이었습니다. 왈도파(Vallenses)와 알비파(Abigenses)의 믿음이 좌초되지 않도록 그들의 항해를 이끌어 준 나침반이었습니다. 위글리프와 루터가 다시 퍼낸 오랜 된 우물이었습니다. 휴 라티머와 존 쥬웰(John Jewell)과 존 낙스(John Knox)를 승리로 이끌었던 검이었습니다. 리처드 백스터와 존 오웬을 비롯한 허다한 청교도들을 배불리 먹였던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존 웨슬리가 사용한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헨리 비커스테스(Henry Bickersteth)와 로버트 맥체인이 정금을 퍼 올린 광산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사람들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부분에서 만큼은 모두가 일치합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 각처의 선교지마다 회심한 이교도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가장먼저 드러나는 특징 또한 성경 말씀에 대한 사랑입니다. 추운 지역이든 무더운 지역이든, 야만인이든 문명인이든, 남태평양 군도든 아프리카든 인도든 할 것 없이 다 똑같습니다. 말씀 듣기를 즐겨합니다. 스스로 말씀을 읽고 싶어 못 견딥니다. 먼저 믿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진작 이 책을 자신들에게 보내 주지 않았는지 의아해 합니다. 사납고 잔인하기로 악명 높던 남아프리카 부족 추장이 선교사 로버트 모팻(Robert Moffat)을 통해 복음의 능력을 처음 경험하고 어떻게 변했습니까? 모팻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거의 하루 종일 거대한 바위 밑 그늘에서 한 장 한 장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넘기고 있는 그를 자주 볼 수 있었다.” 회심한 이 추장의 변화된 모습이 얼마나 가슴 뭉클합니까! 그것도 지구 저편 아프리카 한 구석에서 말입니다. 그 추장은 말했습니다. “성경은 결코 따분하게 읽는 묵은 옛날 책이 아니다.” 또 다른 나이 든 원주민은 다 늙은 사람이 글 읽기를 배워서 무엇하냐고 비아냥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죽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은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한 구절을 내가 스스로 읽을 수만 있어도 충분히 그럴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심한 모든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위대한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바로 성경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감독교도든 장로교도든, 침례교도든 독립교도든, 감리교도든 프리머스 형제단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곧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에는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지파가 달라도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만나를 배불리 먹었던 것처럼, 생명의 양식인 성경은 교단은 달라도 신령한 이스라엘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배불리 먹을 양식입니다. 그리스도의 양들이 해갈하기 위해 주변으로 모이는 생명의 샘입니다. 이 샘으로 나아온 양들 가운데 한 마리도 목이 마른채로 그냥 돌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오, 이 땅의 신자들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착념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경이, 아니 성경만이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실체로 자리할수록 신자들 간에 더 많은 일치점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성경처럼 영감 기록된 책은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사랑받는 책이 분명합니다. 이는 어느 교단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모든 교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송하는 책입니다. 이런 책을 쓴 존 번연이 얼마나 성경에 능했는지 아십니까? 말 그대로 그는 한 권의 책, 곧 성경의 사람이었습니다. 거의 성경만을 줄기차게 읽는 사람이었습니다.
천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격려가 됩니까!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하나님 백성은 항상 소수일 수밖에 없지만, 종국에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을”정도로 많은 무리를 이룰 것이라는 말씀이 엄청난 격려가 됩니다(계 7:9, 19:1). 이들은 모두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모일 것입니다.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모일 것입니다. 회개하고, 믿고, 기도와 경건과 겸손으로 살았던 사람들로 모일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각자의 옷을 어린양의 피로 빨아 눈과 같이 흰 옷을 입은 사람들로 모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공통점 외에도 한 가지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성경과 그 가르침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땅의 여정을 지나는 동안 성경은 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성경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기쁘게 회상하고 묵상하는 공통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이 따라 살고 사랑하는 이 책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도 진정한 성도처럼 말씀을 사랑하고 있는지, 자신도 과연 하나님의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아1:8).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8. 성경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위로 가운데 맞도록 하는 유일한 책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습니다. 죽음을 피해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예외 없이 건너야할 강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언젠가는 죽습니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 엄연한 실체를 외면하려고 하는 경향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사는 동안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무에 힘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또한 죽음을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알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또한 자신이 어떻게 죽어야 할지도 잘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닥치는 엄중한 현실입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계획과 기대를 순식간에 접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함께 살던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큰 고통으로 신음하며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죽음은 우리 몸을 무덤으로 데리고 내려갑니다. 썩어 구더기의 밥이 되게 합니다. 죽음은 심판과 영원으로 난 문입니다. 천국으로 난 문과 지옥으로 난 문을 열어젖힙니다. 죽음이 한번 들이닥친 후에는 변화의 기회가 없습니다. 회개를 위한 여지도 없습니다. 그래도 그 전에는 실수나 잘못을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침상에 누워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한번 넘어진 나무는 그대로 쓰러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관에 들어간 후에는 회심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둔 후에는 새롭게 태어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을 금세 맞이할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날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좀 더 나중에 죽든, 좀 더 일찍 죽든 모든 사람은 죽기 마련이고, 더구나 홀로 외롭게 죽음을 맞이해야합니다. 이는 심사숙고해야 할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신자들에게조차 엄중한 일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사망의 쏘는 것”은 없습니다(고전15:55). 그리스도께 속했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죽음마저도 특권이 되었습니다. 사나 죽으나 신자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이 땅에 살 때는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거하십니다. 죽어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곳으로 갑니다. 신자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1). 죽음을 통해서 많은 시련 -연약함 몸, 부패한 마음, 미혹하는 마귀, 미혹하고 핍박하는 세상 -에서 벗어납니다. 죽음은 신자를 많은 복락으로 누리는 곳으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수고를 그칩니다. 소망으로만 간직하던 기쁨의 부활이 이제 확실하게 미래의 사실로 변합니다. 구속된 거룩한 영혼들과 함께 합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신자에게조차 죽음은 엄중한 일입니다. 혈과 육은 본성적으로 죽음에 움츠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등지고 떠난다는 사실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문을 통해 나아가는 세상이 우리의 본향이기는 해도 여전히 미지의 세상입니다. 죽음이 신자들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고 심지어 벗과 같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대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죽음은 항상 엄중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사려 깊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죽음 맞이할지 잠잠히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담력을 가지고 이 엄중한 주제를 대면해야 합니다. 우리가 치달아 가는 이 마지막에 대해 몇 가지를 말하겠습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세상에 유익하다는 것들로는 죽음으로 내려가는 사람을 위로 할 수 없습니다. 캘리포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든 금으로 이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밝게 하지 못합니다. 많은 돈을 들여 탁월한 간병인과 약을 구할 수는 있어도 죽어가는 자의 양심과 마음과 영혼에 평화를 사 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종들도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육신의 필요를 정성껏 채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침상 밑에서 뜬 눈으로 밤을 함께 지새우면서 온 정성을 다해 간병할 수도 있습니다. 머리맡에 베개를 부드럽게 해주고 꺼져 가는 육신을 품에 안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까지 시중들지는 못합니다. 괴로운 마음의 고통을 멈추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목전에서 두려워 떠는 양심을 가려주지는 못합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죽음으로 내려가는 사람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화려한 무도장, 즐거운 춤 , 한밤의 향연, 엡섬 경마장의 흥분, 카드놀이, 오페라 극장의 특석, 극장 가수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같은 것은 죽음을 남의 일인 양 생각하던 때 주던 감흥을 더 이상 주지 못합니다. 흥미진진한 사냥 이야기와 아슬아슬했던 전장에서의 무용담도 조금도 재미가 없습니다. 큰 잔치자리와 레가타보트 경주와 진귀한 것들을 펼쳐 놓은 전시장에 초대를 받아도 아무 런 위안이 안 됩니다. 임종의 순간에 이런 것들은 모두 공허하고 허탄하며 자신을 위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양심의 귀를 거슬리는 소음으로만 들릴 뿐입니다. 건강할 때 즐기던 이 모든 것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 전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잔인하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마지막 원수인 사망이 해일과 같이 밀어닥치면 이런 것들은 그의 괴로운 양심과 마음을 손톱만큼도 막아 주지 못합니다. 이제 곧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할 것을 알고 두려워 떠는 사람의 양심을 이런 것들로는 진정이 안 됩니다.
책이나 신문 역시 죽음으로 내려가는 사람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합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나 토머스 매콜리(Thomas Macaulay)의 탁월한 글을 들려 줘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타임>지의 현란한 논설도 재미가 없습니다. <에딘버러>나 <쿼털리>의 기사들도 관심이 없습니다. 풍자만화나 만평, 신간 소설도 한 번도 들춰 보지 않은 채 곁에 그대로 쌓여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그의 이목을 끌던 시절은 갔습니다. 건강할 때는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만 죽음을 코앞에 둔 지금은 아무런 흥미가 없습니다.
임종을 맞은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은 성경입니다. 성경 구절, 성경의 내용을 담아내는 책만이 임종하는 사람에게 위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평소에 성경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는데도 임종시 머리맡에 성경만 갖다 놓으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성경을 머리맡에 놓아 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봐 왔습니다. 평소에 성경을 무시한 불신자가 임종시 머리맡에 놓은 성경 때문에 별안간 믿고 위리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말씀만이 죽음으로 내려가는 사람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이 아닌 다른 것에서 얻는 위로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죽음의 해일이 닥치면 허망하게 쓸려 버리고 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신분이나 계층을 막론하고 이는 사실입니다 왕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매한가지입니다. 죽음으로 내려가는 어느 누구도 성경이 아니고는 참된 위로를 얻지 못합니다. 전혀 얻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누구에게라도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등지는 사람은, 귀로 듣고 배우며 마음으로 받고 의지했던 성경 구절과 약속, 교리로부터만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ale지 않으면서 곧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성례를 받는 것은 로마 가톨릭의 종부성사만큼이나 무익합니다. 죽어 가는 가련한 죄인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받고 의지하지 않으면, 사제가 면죄를 선포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이교 마술사가 주문을 외는 것만큼이나 양심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평소에는 성경이 없이도 아무런 어려움 없이 편하게 사는 것 같아 보인다고 속으면 안 됩니다. 임종시에는 전혀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는 성경과 상관없는 사람들은 손톱만큼의 위로도 얻지 못합니다. “죽는 순간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책은 성경뿐이다”라고 했던 존 셀던(Jone Selden)의 고백은 참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한 것을 확인해 주는 증거와 실례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경을 멸시하던 사람들이 어떤 임종을 맞았는지 말해줄 수 있습니다. 불신자로 유명한 볼테르(Voltaire)와 페인(Paine)이 어떻게 비참함과 비통함과 분노와 낙담과 비통 가운데 죽음으로 내려갔는지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또 그런 임종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행복한 영향을 주었는지 말해 줄 수 있습니다.온 교회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목사인 세실(Cecil)은 말합니다. “어머니의 침상 맡에서 임종을 지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죽는 것이 두려우세요, 어머니?’라는 제 물음에 어머니는 ‘아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전혀 모르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불안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더니 ”하나님께서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에 들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사르지 못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시잖니!”(사 43:2).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로서 사람들의 임종을 지키면서 했던 경험 몇 가지를 말하고 이 주제를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많은 이들이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임종을 맞는 모양과 태도는 가지각색입니다. 아무 소리 내지 않고 씁쓸하고 침울하게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는 순간에조차 앞으로 자기에게 닥칠 일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무덤덤하게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래 병으로 시달리느라 지칠 대로 지쳐 죽기만을 기다리다가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 역시 하나님 앞에 갈 준비가 되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믿음의 반석에 굳건하게 터를 둔 증거도 없이 무턱대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고백하며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임에도, 죽을 때 큰 위로와 안전을 누리지는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말 그대로,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 그리스의 미쁘심을 영광스럽게 의지면서 죽음의 강을 건너는 불굴 씨(Standfast)처럼, 소망을 확신하면서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평소에 성경이 주는 평화를 누리지 못한 사람이 임종의 침상에서 참되고 견고하게 잠잠하고 합당한 평온 가운데 죽은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감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자신의 위로자요 동반자요 벗으로 삼고 동행하지도 않으면서 당당히 죽음으로 내려갈 수 있다고 떠벌리는 사람처럼 무모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영혼은 성경을 통해서만 위로를 얻습니다. 성경이 주는 위로를 붙들지 않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위해 붙들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임종을 맞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책은 성경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이 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있는지 여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멸망으로 치eke는 세상에서 저물어 가는 인생을 사는 한 사람으로서, 곧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과연 무엇으로 위로를 얻을 것인지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정직하게 대답해 보시시오. 여러분에게 성경은 어떤 책입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읽는다면, 어떻게 읽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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