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성부성자성령

삼일일체론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

하나님아들 2024. 5. 1. 17:16

삼일일체론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

삼위일체론을 다루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의 존재성과 더불어서 그분의 단일한 신격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삼위 하나님의 인격성 - 격위(格位) - 의 관계 이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 신격 안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독립된 세 격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신앙고백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이해하고서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니 삼위가 계시다!" 이것이 정통 기독교회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에서 발간하고 있는 학습. 세례 문답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제1편 학습문답 제2장 하나님은 누구십니까?에서 3항에 "하나님은 몇 분이십니까"라고 질문하고 있으며, 그 대답으로 "오직 한 분 뿐이시나 삼위가 계십니다" 라고 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질문과 답은 장로교회의 신앙 표준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장 3항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는 데 따른 것입니다.

"단일한 신격 안에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이 하나인 세 격위가 있으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으시고, 출생하지도 않으시고 발출하지도 않으시니,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출생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다."

개혁교회가 교리 표준의 하나로 삼고 있는 벨직 신앙고백서는 제8장에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나 세 인격에 있어서는 구별되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되신 하나님 말씀에 따라서, 본질에 있어서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동시에 그분은 곧 공유할 수 없는 바 인격적이시며 참되시며 진리되신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신 삼위(三位),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심을 믿는다. 성부는 원인과 근원이 되시고 모든 가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불가시적인 모든 것의 시작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자는 말씀과 지혜와 하나님의 형상이 되시는 분이시며, 성령은 영원한 능력과 힘이 되시며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인하는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구분에 의하여 나뉘어지는 분이 아니신데, 그 이유는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기의 인격성을 가지시고 그 특성에 의하여 구별되기는 하나, 이 세 인격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이천우

따라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가 아니신데,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부도 아니시며 성자도 아니심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구별된 인격은 나뉘어지거나 혼합되어 있는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성부나 성령은 육체를 입지 않으셨고 다만 성자만이 육체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다. 성부는 성자 없이는 계시지 않았고 또한 성령 없이 존재하지도 않으셨다. 이 삼위(三位)는 영원하심과 그 본질에 있어서 공유하시는 분이시다. 어떤 분이 처음이고 어떤 분이 나중이 되시는 그러한 분들이 아니시다. 왜냐하면 삼위는 진리와 능력 그리고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있어서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성경에서 알게 해 주고 있으며, 또한 기독교회의 시작과 함께 신앙고백 하여 온 것입니다. 단지 그 신앙고백이 채택되고 문서화해야 할 필요성을 갖게 된 데에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입니다. 우리는 사도신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가장 먼저 봅니다. 사실 이 사도신조는 가장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서인 사도신조는 5세기에 작성된 것입니다만 실은 훨씬 그 이전부터 신앙고백 되어져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여러 신조들이 작성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중에서 다음의 세 신조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보고자 합니다.


사도신조에서 본 삼위일체론

사도신조의 작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교회에서 세례 받고자 하는 분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확인하는 질문을 한 것이 후에 신조문으로 작성되어서 사용되었는데 로마신조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 로마신조를 근거로 해서 5세기에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조가 사도신조입니다.

"나는 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분은…오실 것이다. 나는 성령을 믿는다." 로,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언급하는 정도로 간단히 삼위일체론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니케아(니케아 콘스탄틴노플) 신조에서 본 삼위일체론

니케아 신조는 니케아 콘스탄틴노플 신조라고도 불립니다. 이 니케아 신조는 이단, 특별히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면서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는 초대기독교회의 정통신앙에 대한 진술입니다. 이 이단은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정통교회와 달리 생각했고, 니케아 공의회에서 논박 당했습니다(325A.D.). 그러나 이 니케아 신조가 채택된 것은 니케아 공의회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입니다(381A.D.) 이 공의회에서는 니케아 공의회의 여러 가지 결정들과 성령에 관한 폭넓은 고백을 넣어 니케아 신조를 작성하였습니다. 니케아 신조는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사용되었던 전형적인 것입니다. 비록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지만, 로마제국의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다 이 신경을 영예롭게 지지했습니다.
이 신조의 특징은 "하나님을 믿으며 또한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주이시며 수여자이신 성령을 믿는다"는 것을 고백한 후에 다시 한번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에 관한 신앙고백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시었고,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예배와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다른 중요한 차이점이 됩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동방교회에서 거부한 성령의 항목에 "그분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시었고"에서 "와 아들"(and the Son"=Filioque)이란 구절을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리우스의 이단성을 논박하면서 삼위일체론을 더욱 두각시켰으며 이로 인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삼위일체론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하게 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에서 본 삼위일체론

니케아 신조가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쟁은 계속됩니다. 이에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자가 있는데 아타나시우스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425년에 작성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타나시우스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이름이 붙여져 불려졌을 뿐입니다. 이 신조의 특징은 보편적인 신앙을 강조하면서 크게 두 단락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단락에서는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진술하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교리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보편적인 신앙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 신앙을 완전하고 손상됨 없이 지키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 받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보편적인 신앙이란 이런 것입니다.

1. 우리는 삼위로 한 분 하나님이시고 일체로 삼위이신 하나님,
2. 삼위가 혼합되거나 본성이 분리됨이 없는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3. 왜냐하면 성부가 한 위로 계시고, 성자가 다른 위로 계시고, 성령이 또 다른 위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4. 그러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시며,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영원히 공존합니다.
5. 성부께서 계심같이, 성자께서도 그렇게 계시고, 성령께서도 그렇게 계십니다.
6. 성부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자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7. 성부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8. 성부께서도 영원하시고. 성자께서도 영원하시고, 성령께서도 영원하십니다.
9. 그러나 세 영원하신 분이 아니고 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10. 또한 세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 아니시고 세 측량할 수 없는 분이 아니시고, 한 분 창조함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고, 한 분 측량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11. 동일한 방식으로, 성부께서도 전능하시고, 성자께서도 전능하시고, 성령께서도 전능하십니다.
12. 그러나 세 전능하신 분이 아니시고 한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13. 이와 같이 성부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자께서도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도 하나님이십니다.
14. 그러나 세 하나님이 아니시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15. 이와 같이 또한 성부께서도 주님이시고, 성자께서도 주님이시며, 성령께서도 주님이십니다.
16. 그러나 세 분의 주님이 아니시고 한 주님이십니다.
17. 왜냐하면 기독교의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각 위가 각기 하나님이시요, 주님이심을 고백하도록 하는 것과 같이,
18. 보편적인 신앙은 우리가 세 하나님이나 세 주님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19. 그래서 성부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거나 누군가로부터 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20.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었습니다.
21.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
22. 그러므로 한 성부이시지 세 성부가 아니시고 한 성자이시지 세 성자가 아니시고 한 성령이시지 세 성령이 아니십니다.
23. 그리고 이 삼위 안에 먼저 되시거나 나중 되신 분이 없으시고, 더 큰 자나 더 작은 자도 없으십니다.
24. 그러나 삼위는 세 위가 영원히 서로 공존하시고, 동등하십니다.
25. 그래서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모든 것 가운데서 일체 안에서 삼위이시고 삼위 안에서 일체이신 한 분 하나님께 예배해야만 합니다.
26. 따라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조에서 삼위일체론의 기술은 이렇게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이것을 간략히 종합해 보면, 크게 두 단원으로 나누어서 1-8항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기술하고 있고, 9-26항에서는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첫째,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삼위로 한 분 하나님이시고 일체로 삼위이신 하나님 한 분을 예배한다는 것인데, 삼위가 독립된 그래서 서로가 구분된다는 것이며, 그렇지만 혼합되거나 본성이 분리됨이 없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시며, 영광도 동일하며, 그 위엄도 영원히 공존합니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성부께서도 창조 받지 않으셨고 그렇듯이 성자와 성령께서도 동일하며, 또한 동일하게 측량하실 수 없는 분이시며 영원합니다. 그러나 세 하나님이 아니시고 한 하나님이십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각 위가 각기 하나님이시요, 주님이심을 고백하게 하는 것과 같이 보편적인 신앙은 우리가 세 하나님이나 세 주님으로 말하는 것을 금합니다. 그래서 성부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거나 누군가로부터 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할 것이 "성자께서는 오직 아버지에게서만 나시고,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만들어지지도 않으셨고, 창조되지도 않으셨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습니다."라는 표현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이에 이해를 갖기 위하여 먼저 유해무가 쓴 글인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의미'에서 니케아 회의 전후에 있었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견해와 함께 삼위일체의 의미를 말한 부분을 보고자 합니다.


『 …
니케아회의 이전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를 主로 고백할 때, 구약의 하나님의 단일성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논의의 중심에 있었고, 이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예수님을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심지어 정통적인 교부라 할지라도 이런 종속설의 흔적을 다 떨쳐버리지 못했다. 다만 니케아회의 이전에 이 종속설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으며, 만약 문제로 지적되었다면, 그들은 겸허하게 올바른 입장을 수용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정통과 이단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

유대인 개종자들 중에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자신들이 알고 지냈던 예수가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되었다는 입장을 표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는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하나님이요,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했던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선신(善神)이라는 주장을 펼쳤다(말시온). 초기 변증가들 중에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神聖)한 영이요 선재하던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인성과 결합했다는 성령 기독론을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교회가 확장되어 헬라교회가 정착되자 헬라 철학이 교회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면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Logos)을 헬라사상의 로고스론으로 해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제는 단일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로고스론을 이용하여서 하나님 안에 있는 다원성을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런 식의 다원론은 다시 단일성을 강조하는 君主論의 반격을 촉발하였다. 군주론은 성부의 단일성을 고수하려고 성자의 신성을 파생적으로 보거나 아니면 성부의 外現 방식으로 보았다. 전자는 2세기에 강했는데, 인간 예수 안에 비위격적인 신적 능력이 역사하여 그를 세례나 부활 시에 성자로 입양시켰다는 입장인데 이는 예수를 ‘半神半人’으로 만들었다(동력적 군주론). 후자는 200년경 유행했는데, 성부만이 독자적인 위격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외현 방식으로 보면서, 성부와 성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이 주장의 대표자는 사벨리우스인데, 그는 ‘성자-성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양태론적 군주론). 군주론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키려는 좋은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이 단일성을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개진했다. 이레네우스(140-202)도 단일성을 고수하되 양태론적 경향을 지녔다. 영원 전에 성부는 말씀과 지혜를 가졌고, 그들은 동등한 위격이라는 것이다. 성부의 위격에서 출발하여 성부의 위격이 동시에 말씀과 지혜(곧 성자와 성령)를 가지고 있다는 식이다. 이는 1-2세기 삼위일체론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구속사의 관점에서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는 좋은 길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두 교부가 새로운 기여를 한다. 서방의 터툴리안(160-220년 경)도 역시 성부 하나님의 단일성에서 출발했다. 성부는 말씀과 성령을 가지고 계시다가 창조를 위하여 발출하셨다. 이처럼 그는 신성의 단일성과 동시에 세 위격(personae)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세 위격에 공유된 ‘본질’을 도입했다. 세 위격이 한 본질 안에 동거하니, 신성은 삼위(trinitas)이시다. 구속사를 위하여 단일성이 세 위격의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세 위격은 동질이나, 동일하지는 않다. 이렇게 하여 그는 군주론과 노스틱 이단들을 잘 대처했다. 그럼에도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 종속시키는 흔적은 그에게도 남아 있다.

동방의 오리게네스(185-254)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강조했지만, 이보다는 위격의 구별성을 더 강조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다. 로고스와 성령의 신성은 파생적이다. 위격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는 ‘휘포스타시스’(uJpovstasi")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로써 성부와 성자는 위격적으로는 성부와 다르다는 구별성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그는 단일성을 표현하려고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연합되어 있다는 ‘호모우시오스’(oJmoouvsio")라는 말을 썼다. 그는 삼위일체론의 정립을 위한 용어를 창제한 인물이지만, 그의 설명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다. 즉 그는 로고스를 성부의 피조물로 보았다. 그러므로 신약과는 달리 성자께 기도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성자가 성부 밑에 있듯이, 성령도 성자 아래 있다는 위계적인 신론은 그가 신플라톤 사상을 원용하여 신론을 전개한 代價이다. 이 때문에 ‘호모우시오스’는 니케아회의 이전까지 사용이 금지당했었다. 그렇지만 오리게네스의 영향은 지대하다. 니케아 회의 전과 당시와 후에도 오리게네스의 삼위일체론의 해석이 논의를 지배하고 향방을 정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에 의하여 로고스 기독론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었다.


니케아 회의

아리우스(256-336)와 그의 스승 루시안( -312)도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잘못된 한 측면만 강조하는 우를 범했다. 아리우스의 관심은 하나님의 독특성과 초월이었다. 그는 한 하나님 곧 성부만을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신성의 단일성과 종속설을 철저하게 고수했다. 성부의 본질은 초월적이고 불변하므로, 타자에게 수여될 수가 없다. 성부 이외의 모든 타자들은 피조물이요, 무(無)에서 피조되었다. 성자가 성부에게서 출생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물리적 범주를 적용하는 것인데 이는 도무지 불가능하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말씀과 지혜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독립적인 위격들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말씀은 하나님의 피조물, 다만 완전한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 동등성이란 있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아주 간교한 이단일 뿐이다. 성자에게 신성이 이야기될 수 있다면 이는 비유적 의미이며, 본질적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전가되었을 뿐이다. 다른 편으로 아리우스도 위격이라는 말을 쓰고, 성자와 성령의 독특성도 가르쳤다. 그러나 그의 절대적인 군주론은 그리스도를 ‘반신’(半神)으로 만들었고, 성령도 참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리우스는 하나님이 아닌 그리스도는 결국 성부를 실제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부를 완전하게 계시할 수 없다는 망언을 하였다. 만약 하나님을 알려면, 성부 하나님 외에 그를 아는 다른 신을 상정하는 다신론을 도입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처한다. 이와 같이 그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잘못 주장한 결과는 엄청나게 클 수 밖에 없었다. 교회는 이런 주장을 방관할 수 없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아리우스 논쟁에는 필요 없는 사변이 지배한다고 판단하고 상호 사랑과 포용을 촉구했다. 여기에는 이런 논쟁으로 자신의 제국의 통일이 손상받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배려도 있었다. 그는 최초의 공의회를 자기의 궁정 니케아에 소집했다. 그리고 그는 고백의 본문에 ‘호모우시오스’를 삽입토록 했다. 이는 터툴리안이 쓴 성부와 성자는 한 본질이라는 라틴어의 헬라 역어이기도 하다. 니케아 고백은 시리아-팔레스틴 고백, 아마 예루살렘 고백을 기초로 삼았다. 아리우스와 두 친구만이 고백 서명을 거부했다. 이 고백은 논쟁의 핵심에 해당되는 기독론에서 예수는 피조되지 않았고, 출생되었고, 성부와 동등하다고 했다. 이로써 성부는 성부가 아닌 적이 있었다는 아리우스의 주장은 거부되었다.

니케아 신조는 철학적 신개념을 거부하는 공을 세웠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신약의 교훈을 무시하고 종속설적으로 그를 半神半人으로 만든 아리우스의 이단을 막는데는 성공했다. 사실 아리우스의 체계는 신플라톤적으로 채색된 위계적인 철학적 신론이었다. 니케아는 이에 맞서는 철학적 신개념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풀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의 고백은 ‘위격’과 같은 용어로 신앙을 개념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고백에는 필시 역리(逆理)가 있기 때문이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역리 말이다.

그러면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의 뜻은 무엇인가? 이 용어는 군주론에 대항하여 성부/성자의 數的 ‘구별’을 전제한 ‘동등성’을 뜻한다. 작성 당시에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니케아회의 이전과 이후 상당 기간동안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본질의 (수적) 동일성으로 이해(오해)되었다. 나아가 본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의 관계 또한 고려되지 않았고, 양태론의 오해를 받았다.
니케아의 영웅 아타나시우스(295-373)는 ‘호모우시오스’가 성자의 완전한 신성뿐 아니라 동시에 신성의 단일성까지도 표현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면서도 용어 사용에 대해서는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초기에는 성부와 성자의 단일성은 고려하지 않고 로고스의 신성만 강조했지만, 후기에는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위격들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성부의 신성과 성자의 신성은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성부와 성자는 구별된다는 것을 분명히 말했다. 그러므로, 아리우스派가 비난하듯이 그가 양태론에 빠진 것은 아니지만, 양 위격 간의 구별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는 ‘위격’이라는 용어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이 삼위일체론 자체가 아니라 구원론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 안에 피조된 반신반인(半神半人)적인 본질만 있다면, 그를 통한 구원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자께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셔야 우리를 ‘신품화’(divinisation)하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니케아회의 이후

아타나시우스가 남겨놓은 문제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에 의해 정리되었고, 이는 성령의 신성 문제 해명으로 연결되었다. 니케아 수용자들 중에도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불확실했고,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었던 마케도니우스(342-360)와 같은 성령否認派들까지 있었다. 그들에게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와 세상 가운데서 일하려고 창조한 도구요 능력일 뿐, 하나님은 아니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말했다. 다만 위격이라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았다.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은 오리게네스 전통을 따라 신성의 단일성이 아니라 구별되는 세 위격들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통적인 본성과 상호 구별되는 위격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본질’과 ‘고유성’을 각각 사용하였다. 바실리우스(329-379)는 고유성으로서 성부의 부성(父性), 성자의 자성(子性), 성령의 성력(聖力) 또는 성화(聖化)를 말하였다.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329-390)는 성부께는 태어나지 않음, 성자께는 태어남, 성령께는 발출이라는 고유성을 부여했다. 그는 삼위 안에서 일체가 경배를 받으며, 일체 안에서 삼위가 경배를 받는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신성과 군주권(君主權)을 성부에게만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는 군주론이 지닌 최대 약점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닛사의 그레고리(330-395)는 태어나지 않음, 독생하심, 성령의 발출은 ‘성자를 통하여’라고 제안했고, 성부는 성자나 성령과 무관하게 사역하시지 않기 때문에, 신성은 하나라고 했다. 이들은 계시에서 전개되는 행위의 단일성에서 본질의 단일성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신성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을 확보했다. 나아가 그들은 ‘호모우시오스’를 ‘호모이우시오스’로 해석하는 것을 정통적이라 선언했다. ‘호모우시오스’를 단일성으로만 이해하다 보니 사벨리우스派적(양태론적)인 오해의 소지가 많았는데, 이런 식의 선언으로 그런 오해도 제거될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회의(381)는 성령의 ‘호모우시오스’를 문자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성령께서는 성부로부터 나와서 성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신다는 식으로 성령의 신성을 고백했다. 1년 뒤의 또 다른 회의는 ‘호모우시오스’를 성령께도 돌려드렸다.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도입함으로 교회는 아리우스 이단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바실리우스는 아리우스가 성경의 모든 말들을 자기 식으로 변형했기 때문에 ‘호모우시오스’가 효과적으로 방어선(防禦線)을 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회는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벗겨버리거나 본질을 정의한 것이 아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진짜로 오셨고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 교회에 임재하신다는 성경적 교훈을 고수하려고 했다.

어거스틴(354-430)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단일성을 증거했다. 그는 세명의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본질과 위격들의 구별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았다. 즉 그들은 본질을 인간이라는 종개념(種槪念)으로 보고서 각 위격은 구체적 인간 곧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등으로 비교했다. 이 비교는 단일성보다는 구별을 너무 부각시켰다. 이에 근거하여 아리안파들은 캅바도키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이 다신론이라고 공격했다. 어거스틴은 삼위란 삼신(三神)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삼위로 계시지만 단일성은 해소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속성들은 본질에 부가적이지 않고, 본질과 속성들 간에는 아무런 거리가 없이 본질은 곧 속성들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속성과 절대적 존재는 한 분에게만 해당된다. 세 위격들이 아니라 한 하나님께 한 본성, 한 신성과 영광이 돌려지며, 뜻과 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성부께만, 또는 오직 성자나 오직 성령께만 돌려지는 사역이란 없다.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과 삼위는 한 원리를 제시한다. 가령 성육신에도 성부 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이 공히 능동적 기여를 하셨다고 설명한다. 삼위의 외적 사역들은 불가분리인고로 삼위는 항상 함께 사역하신다. 어거스틴은 ‘위격’도 새롭게 해석한다. 이 말은 라틴어로 번역할 때, ‘본질’로 번역되어야만 했다. 동방신학에서는 ‘가면’을 뜻하는 이 말을 ‘persona’로 번역하는 것도 만족스럽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사용하지만, 의도하는 바를 바로 표현하지는 못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는 이 용어를 관계(relatio)로 번역했다. 이 점에서 그는 아타나시우스와 나찌안주스의 그레고리의 입장을 따르며, 이는 서방 전통도 되었다. 삼‘위’란 그 자체로는 무엇이 아니라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분들이다. 모든 속성들은 ‘일체’에 귀속되지만, 관계로서의 위격은 하나님의 내적 생명이나 피조계와 연관되어 의미를 지닌다. 삼위는 거룩하다, 선하다, 영원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삼위는 성부이다라고 해서는 안된다. 또 삼위를 성자이라 할 수는 없는데, 子性을 다른 위격에다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성부,성자,성령 간에 본체론적이나 또는 질적, 양적인 여하한 구분을 적용하지 않았다. 도리어 영원한 관계성을 도입했다. 나아가 이 관계성은 본질에 부가적인 우연이 아니다. 부가적 우연은 신성의 가변성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한 하나님이 오직 성부이거나 오직 성자이거나 오직 성령이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성부, 성자, 성령이셨고, 또 그러하실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삼신론(三神論)의 위험을 극복했다. 용어의 제한성이 있으나 그는 삼위 고백에서 침묵만이 능사가 아님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었다.
아타나시우스 신조(Athanasium)는 삼위의 한 하나님과 단일성 가운데 삼위 하나님을 경배하며, 위격들을 혼돈하지 않고 본체를 분리하지 않는 고백을 언명한다. 성부의 위격과 성자의 위격 그리고 성령의 위격이 각각 다르나 성부,성자와 성령의 신성은 하나이다. 영광과 위엄도 동일하며, 영원하다. 삼위는 공히 피조되지 않았고, 공히 불가해하며, 공히 영원한데, 한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나, 삼신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다. 각각 주님이시나, 세 주님들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주님만이 계신다. 성부는 출생되지 않았고, 성자는 피조되지 않고 출생되었고, 성령은 피조되지도 출생되지도 않았으나 발출하신다. 세 성부들이 아니라 한 성부만 계시고, 세 성자들이 아니라 한 성자가 계시고, 세 성령이 아니라 한 성령만이 계신다. 삼위 간에는 전과 후가 없으며, 크고 작음도 없다. 함께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다메섹 요한(670-750)은 요한복음 10:38, 14:9,11, 17:21을 근거로 하여 삼위일체론에 공재(共在;또는 共座) 개념을 도입했다. 이 말은 위격들의 대면적 공재와 상호 침투를 표현한다. “삼위 하나님은 상호 간에 서로 뒤섞이지 않는 침투를 공유한다. ... 성자는 성부와 성령 안에 계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계시며, 성부는 성자와 성령 안에 계시나, 뒤섞임이나 용해나 혼합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한다.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며,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 수여적이다.

칼빈(1509-1564)은 먼저 삼위께서 참되신 한 하나님이시요, 이 삼위를 떠나서 하나님은 결코 알려질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 분을 바로 삼위로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성자,성령께 공히 적용되며, 위격이란 비공유적 속성이며, 상호 연관 중에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별을 말한다. 위격은 상관적인 이름이고, 본질은 절대적인 이름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자의 이름은 명목적인 이름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서 시작하여 삼위일체론을 언급한다. 하나님 내에서의 위격 구분은 성자께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계시됨으로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각 위격에서 全 신성을 이해한다. 그는 요한복음 14:10을 인용하면서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고 다메섹 요한式의 공재를 말한다. 각 위는 본질의 상이성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공유적 속성을 통한 상호 관계성으로 구별되며 동시에 그 관계성을 통하여 단일성을 이룬다. 그는 에베소서 4:5과 마태복음 28:19의 세례의 단일성을 근거로 하여, 삼위께서 함께 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하나님이시다. 이 측면에서는 자기 원인자이다. 그러나 성부와의 관계에서는 성자이다. 이 측면에서는 성부가 성자의 원인자이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순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 위격들 간에는 어떤 경륜적 질서가 있고, 성부는 시작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는 한 위격의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全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쓴다. 그러나 성부가 신성의 원인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와 성령께 추호의 약탈도 없이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된다. 성자와 성부의 신성은 공유적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결코 성부의 위격은 (본체론적) 원인이 아니다. 성부만이 ‘절대적으로’ 원인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삼위로 이해되는 단일하고 단순한 본질로 이해한다.” 이렇게 본질의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항상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주’, 또는 ‘영’이란 성부께만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의 각 위격이 불려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이 보장된다.


삼위일체론의 의미

고대 교회에서 신학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근대학문의 한 분과로서 신학과는 전혀 다른 독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신학은 그 어원에서 ‘神’과 ‘말’의 관계를 뜻한다. ‘..를 하나님이라 말함’이 신학함이었다. 이방적이고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부르고,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하는 것이 신학‘함’이었다. 고대 헬라교부들은 성경의 저자들, 특히 성자의 신성을 잘 가르친 사도요한을 신학자라 불렀다. 신학은 성자와 성령님을 하나님이라 선언함으로써 삼위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 부르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송영이었다. 신학‘함’은 교회의 삶 자체, 특히 설교와 세례와 예배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도의 삶도 이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닮아 가는 ‘신품화’였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이에 대한 이론적인 반성인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었다. 즉, 하나님의 단일성 아래서 계시의 삼위 하나님은 진정으로 또 다시 한번 더 바로 그분 자신이라는 해석이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문자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 교의의 전형이다. 침묵이 아니라 말함이며 말함이 아니라 방어막을 치는 것이 이 해석의 의도이었다. 계시의 하나님이 원래 삼위이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에도 삼위 하나님으로 알려진다. 삼위 하나님은 비공유적 속성들을 통하여 완전한 방식으로 한 본질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한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신학의 원래적 의미와 활동이 회복되어야 한다. 따라서 최근 신학의 삼위일체론 부흥과 고대 헬라신학에 대한 높은 관심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기독교신앙은 삼위일체 신앙에 내포되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데, 그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는 분이시다. 구원역사에 삼위로 계시되셨기에 우리가 삼위로 고백하지만, 원래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비록 삼위일체론이 바로 이 신앙의 핵심을 인간의 논리와 언어를 사용하여서 정리하였지만, 삼위일체론은 딱딱한 사변이 아니라, 송영이며 신앙의 본질이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며, 삼위 하나님을 사도신경으로 매주 고백하고, 삼위 하나님이 주인이신 설교를 들으며, 예배의 말미에 삼위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데도, 삼위일체론이 어렵다고 인식되며,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실천적인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삼위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계시하는 신약의 본문 뿐만 아니라, 암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구약의 본문도 이제는 삼위론적으로 설교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 세례 교육을 삼위론적으로 시행하며, 사도신경의 삼위일체론적 구조와 의미를 다시 음미하며, 예배 말미의 축복 선언은 삼위 하나님의 동행 약속임을 매번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삼위를 향한 송영을 찬송가에 많이 싣는 것도 고려해볼 만하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누리는 교제이며, 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우리의 역사가 포섭된다.

삼위일체론은 부정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설교, 선교, 교육, 예배와 기도 등 교회의 본래적 사역에서 자연스럽게 확립되었다. 이것은 공교회적 유산이다. 성장하고 부흥한 한국교회는 삼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송영에서 공교회적인 유산을 잘 전수받아서, 삼위 하나님과 진정으로 교제하고 사귀는 성숙한 교회와 교인들이 되어서, 다음 세대에게도 이 신앙의 핵심을 잘 전수할 때, 공교회적인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다. 』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봄

삼위일체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 유해무가 쓴 다른 글인 '칼빈의 삼위일체론'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 삼위일체론은 신학 교과서에만 있는 지식인가? 비록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사실상 ‘단일신론’을 따르고 있다. 비록 매주일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송영을 돌려드리면서 예배를 마치지만, 설령 삼위일체론이 거짓으로 판명되어진다 하여도 기독교 경건 서적의 대부분 바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삼위일체론이 창조론, 기독론, 은혜론 교리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경건과는 거의 분리되어 있다. 가령 삼위일체론이 없어도 기독론에 결정적인 변화를 끼치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현대 기독론 연구는 대부분 주석적이지만, 삼위일체론이나 성령론적으로 통합되어진 연구는 흔치 않다. 성령 안에서 성자의 이름으로 성부께 기도를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드리며,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도, 성도들의 머리에는 ‘단일신론’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신앙 현실을 주목하면서 우리는 신앙의 대선배인 칼빈의 교훈을 살피려고 한다. 칼빈(1509-1564) 신학의 구조는 한 마디로 삼위일체론적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신학의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사실은 그가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자’라 할 수 있다. 신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신학의 유일한 주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 점에서 칼빈은 신학 정의에 충실하였다. 우리는 그의 신학을 공부함으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더 잘 알기를 원한다. 성경의 주인공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요, 설교의 주인공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리 한국교회의 모든 설교자들이 성경의 내용이 삼위 하나님이기 때문에 신학과 설교의 내용도 삼위 하나님으로 꽉 채우는 지혜를 얻기를 바라면서 본고를 시작한다.


신학: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표현으로 칼빈은 신앙을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신앙은 이곳 저곳이나 잡다한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 다닐 것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을 주목해야 한다(I,xiii,16). 그는 신앙을 설명할 때는 종종 요한복음 17:3을 인용한다. 즉 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인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신앙은 이처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III,ii,3). 그리스도의 광채가 우리 위에 비취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완전히 은폐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다. 볼 수 없는 성부를 우리는 오직 보이는 성자의 형상에서 찾아야 한다. 타락 후 신지식(神智識)은 중보자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그리스도를 찾게 된다(III,i,1). 칼빈은 이처럼 삼위 하나님의 사역을 통하여 신앙을 해명한다. 사실 신앙은 바로 이 삼위 하나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신앙을 지식으로 정의한 것은 성경적인 탁견(卓見)이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진리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베푸신 자비에 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인데, 성부와 성자의 양 사역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생각에 계시되고 우리 마음에 인쳐졌다.”(III,ii,7; I,vii,5 참고) 그가 신앙을 성령의 사역으로도 계속 설명하는 것을 고려하면, 삼위 하나님에 관한 바른 지식 곧 신앙이 신학이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라는 칼빈의 입장에 서서, 그의 삼위일체론을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의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시되, 당신이 삼위이심을 계시하셨다. 이 삼위 하나님을 붙잡지 않으면,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 뇌리에 번쩍이면서 참 하나님을 놓치고 말 것이다. 그러면서 칼빈은 계속 성자와 성령의 ‘위격’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나서 ‘일체’에 집중한다. 즉 우리 한글 표현대로, 그는 먼저 삼위에 대하여 말하고 그리고 일체를 다룬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지닌다. 먼저 내용상 이것은 삼위일체론의 역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흔히들 서방교회의 전통은 하나님의 본성(일체)에서 출발하고, 동방은 삼위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칼빈은 동방의 전통에 서 있는 셈이다. 이 점은 아래에서 계속 논의될 것이다.

둘째로 용어 자체에 대한 칼빈의 유연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신학 논쟁이나 교회 연합의 시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 하겠다. 한편으로 칼빈은 ‘위’라는 말이 성경에 나온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일체’라는 말은 없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요, 성자는 성부가 아니고 성령은 성자가 아니며 비공유적 속성으로 서로 구별된다는 신앙에 이견이 없다면, 위나 일체라는 말은 매장되어도 좋다는 포용적인 자세를 취한다. 물론 성경은 우리 사고와 용어 표현의 확실한 규범이다. 그러면 교회는 왜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용어를 도입하였는가? 아리우스(Arius, 280-336)를 대항하여 교회는 ‘동등’이라는 말을 도입하였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성부께) 동등’이라는 용어를 제시하니까, 그는 그리스도가 피조물이요 시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즉 이 용어가 아니었다면 아리우스의 이단성은 폭로되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 215년경)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한 하나님의 속성에 불과하며, 삼위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때 선인들은 삼위는 한 하나님 안에서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칼빈은 힐라리(Hilary, )를 옹호한다. 즉 제롬(Jerome, 340-420)은 하나님에게 3 본질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라 하였다. 그런데 힐라리에게서는 이런 표현이 일백번 쯤은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악의없는 평범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칼빈은 위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기 보다는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이 3분이라는 것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지 않으려고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언어의 제한성에 기인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한다.

용어에 대한 자유를 천명한 뒤에, 칼빈은 인격을 정의한다. “인격은 비공유적 속성(proprietas incommunicabilis)으로써 상호 관계 하에 구별되는 하나님의 본질 안에 있는 실재(subsistentia)이다.”‘위’를 대개 관계로 설명하지만, 칼빈은 아주 의도적으로 ‘실재’라는 말로 위를 정의한다. 물론 관계성에서 구별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구별되지만, 실재하는 구별이라는 뜻이다. 본질은 단일성을, 위는 단일성 안에 있는 구별을 말한다. 본질의 단일성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경륜이라는 터툴리안(Tertullian, 160-220년경)의 말에도 동의한다.


성자와 성령 하나님의 신성.

칼빈은 성경의 자료들을 증거하면서, 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와 ‘동등’하다는 식으로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한다. 지금까지는 삼위일체론의 여러 용어들에 관한 도입이라 할 수 있고, 7절부터 비로소 칼빈은 삼위일체론 자체를 다룬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하신 말씀이 곧 하나님이다. 말씀은 성부와 함께 처음부터 계셨고, 만유의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려고 입을 여실 때에, 말씀이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은 하나님의 본질에 변화를 초래하는 모독이다. 성자가 말씀하신 ‘창세 전에 성부와 함께 가졌던 영광’(요 17:5)은 성자가 성부와 영원 전에 이미 함께 계셨다는 것을 증거한다.

또 구약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하는 본질적인 이름인 야웨가 신약에서는 ‘주’로 번역되면서, 그리스도께 사용되었다는 점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한다(9-11).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났고(딤전 3:16), 교회를 피로 사셨는데(행 20:28), 이것은 이등 신이 아니라, 바로 성자의 신성을 증거한다. 나아가 예수께서 죄를 용서하심에서 오직 창조주에게만 해당되는 권세가 있었다. 이 권세에서 신성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예수를 믿고, 기도를 받으실 분으로 설명한다. 신앙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성부와 성자에 공통적인 구원 능력을 경험한다. 천부께서 주시는 모든 은사들은 성자의 중보로 주어지지만, 이 권세에 대한 참여로 성자가 바로 이 은사들의 주인이시기도 하다.

성령님에 대해서도 유사한 증거를 전개한다. 성령께 돌려지는 것들은 피조물의 속성은 아니다. 성령은 만물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며 생명을 준다. 성령은 중생과 불멸성의 주인이시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한다. 그는 칭의, 성화와 능력과 모든 선한 것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은 위격적으로 하나님 안에 실재한다(14-15).



하나님의 단일성과 삼위되심.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증거하고 난 뒤에, 하나님은 한분이심을 증거한다. 이를 위하여 특히 그는 에베소서 4:5과 마태복음 28:19의 세례명령을 주석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 신앙과 종교에 가입한다.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계시며, 삼위로 한 하나님이 알려진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삼위이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이는 세례 받을 수 없다.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 증거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성자와 성령의 구별이 강조되어야 한다. 칼빈은 신학자 그레고리(Gregory the Theologian, 330-389년)의 말을 기꺼이 인용한다. “나는 한 분을, 삼위의 휘광으로 재빨리 휘감기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고, 삼위를 구별할 때는 즉시로 한 분에게로 옮겨진다.”그러면서 그는 삼위만을 혼란스럽게 생각하고 일체로 복귀하지 않는 잘못을 경고한다.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은 공허한 칭호가 아닌 ‘실재적인 구별’(vera distinctio)이며, 구별은 결코 구분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이 구별은 성육신을 기점으로 삼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나온다고 하여 성부와 성령을 구별하였고, ‘다른’ 보혜사라 하여서 자신과 성령을 구별하셨다.

칼빈은 위격의 구별을 인간사(人間事)에서 빌려오는 신학 전통을 따르지 않고 성경에 표현된 대로 설명한다. 성부에게는 사역의 시작과 만유의 근원이심이, 성자에게는 지혜와 모사, 그리고 만유의 집행이, 성령께는 사역의 능력과 효과가 돌려진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지혜와 능력과 나누어질 수 없다. 물론 영원에 선후(先後)가 없지만, 성부가 먼저, 그리고 성자,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라는 순서를 설정하는 것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그리고 나서 칼빈은 중요한 요소를 하나 지적한다. 성부, 성자, 성령의 위는 구별되지만, 각 위에서 각 위의 특징, 말하자면 불공유적 속성으로 신성의 전부가 이해되어진다는 것이다. 성부는 전적으로 성자 안에 계시고, 성자는 전적으로 성부 안에 계신다(요 14:10). 각 위는 본질의 구분이 원인이 되어 서로 분리될 수가 없다. 구별이란 상호 관계를 나타낼 뿐이지, 본질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발생 가능한 어떤 혼동을 시정하려고 한다. 성부와 관련되지 않고 성자를 부르면, 그는 스스로의 원인자이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가지는 관계에 치중하면, 성부는 성자의 원인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와의 관계에서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하나님이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한 본질을 이해하며, 동시에 그 본질 안에서 삼위를 파악한다. 그러므로 구체적인 언급 없이 하나님이 나오면, 성부 뿐 아니라 성자와 성령도 지칭된다. 그런데 각 위들의 특징들에는 어떤 질서가 수반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적용될 때도 있다. 이런 식으로 본질의 단일성이 유지되며, 성자와 성령의 신성에 아무 손상도 없이 정당한 순서도 유지된다. 각 위를 언급할 때마다 신성의 단일성에로 복귀하는 것은 항상 필연적이다. 하나님이라는 단순한 이름은 관계를 지칭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자기와의 관계에서 이러하고 저러하다고 말할 수 없다. 즉 관계성은 항상 본질이 아니라 위격의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단일성과 위격들의 구별에 대한 오해 논박

칼빈은 신앙을 파괴하는 사탄의 책락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이들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훼손하거나 위격들의 구별을 무시한다. 그는 아리우스로 대표되는 본체론적인 종속설과 사벨리우스가 대변인인 양태론을 동시에 거부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호기심으로 미로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께 당신의 지식을 위임한다. 하나님의 본질은 단순하고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께 공히 적용된다. 그러나 각 위격에만 고유한 특징으로 위격들 간에는 구별이 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하나님 안에는 3 구분이 있다 하여 단일성과 충돌되는 주장을 한다. 반면에 그는 위격이란 실질적인 실재가 아니라고 한다.

나아가 칼빈은 어떤 자들(Gentilis 등)이 성부는 신성의 원천(fons et principium deitatis)이며 성자와 성령의 신성 수여자(essentiator)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고 논박한다. 칼빈은 다시 그리스도가 야웨임을 상기시키면서, 만약에 모든 신성이 오직 성부에게만 있다면, 신성은 분리 가능하거나 아니면 신성은 성자에게서 다시 탈취될 수 있다는 말이라면서, 이런 주장의 헛점을 논박한다. 즉 신성은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나타날 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하여 졌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중보자의 인격과 사역을 지고서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켜야 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또 ‘영’이라는 이름은 성령 뿐 아니라 성부와 성자에게도 해당된다. 야웨와 마찬가지로 성령은 전체 신성에 해당되는 표현이다.

성부는 하나님이 아니라면 성부일 수가 없다. 성자도 하나님이 아니라면 성자일 수 없다. 그러므로 신성은 그 자체로서 존재한다. 성자가 하나님이기에 위격과는 관계 없이 그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가 성자이기에 그는 성부로부터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본질에는 시작(principium)이 없다. 이 경우 성부와 성자는 함께 원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격에는 원천이 있다. 성부와 하나님이 무조건 동의어라면, 성부는 신성 수여자(deificator)가 될 것이요, 성자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성부는 본질의 수여가 아니라 ‘질서상’(ratione ordinis) 신성의 신성의 원천(principium deitatis)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하신 말씀이나 그의 위상은 항상 그가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사역하셨음을 고려해야 한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다’(요 16:7)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비하여 본질상 이등 신(二等 神)에 해당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늘 영광을 입으시고 신자들을 성부와의 교제로 불러모으시는 사역을 지칭한다. 때로는 ‘성부’라는 이름 아래에 자신의 신성도 포함시켜 말씀하시기도 한다. 즉 이런 발언들은 모두 구원 역사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이라 불리는 분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며, 그리스도도 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시다. 또 터툴리안이 하나님의 말씀은 경륜적으로 존재한다는 발언을 하였으나, 이는 본질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위격에 관한 언급일 뿐이다. “하나님은 본질에서는 단일하시나 이 단일성은 경륜의 신비를 통하여 삼위로 나타나셨다. 세 분이 계시나 정도의 문제이지 위상이 아니며, 형식의 문제이지 본질의 문제가 아니며, 현현의 문제이지 능력의 문제는 아니다.”성부는 누구에게서도 기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신성의 원천이라 부른다. 원천이 성부에게서 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단일성이 인식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특히 성부에게 돌린다. 성부의 원천이심은 어떠한 존재론적 우위와는 무관하다.

칼빈은 삼위일체론 전부를 신실하게 다 설명하고 난 뒤에, 호기심과 사변의 추구가 아니라 '교회 건덕'(建德, ecclesiae aedificatio)에 대한 열정을 언급하면서 마친다. 이런 실천적인 지식은 어떠한 허망한 사변보다도 더 확실하고 견고하다.


칼빈 신학의 삼위일체론적 구조

칼빈은 이렇게 잘 정리한 삼위일체론을 '기독교강요'의 뼈대로 삼았다. 물론 더 정확하고 바르게 표현하려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분의 사역이 이 저작의 구조로 드러나게 하였다. 그는 세례 명령에 기초하여 형성된 사도신경을 그의 신학의 틀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은 80장으로 구성되었고, 기본 뼈대는 4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는 3 구분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으니, 사도신경에 근거한 엄격한 삼위일체론적 구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칼빈은 초판(1536)에서부터 사도신경을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교회로 4분하여 해설하였다. 이것이 3판(1543년)에서는 4장으로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고립된 사도신경의 해설에 불과했다. 1559년 판에 칼빈이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언급한 구조 변경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이전의 노고를 탓하지 않으나, 작품이 지금 제시된 순서대로 배열될 때까지 만족할 수 없었다.” 즉, 고대교회의 교의인 삼위일체론이 중세의 신학 전통과 마찬가지로 개혁교리 곁에 있는 또 다른 신앙 항목으로 고립되어 있는 한, 종교개혁은 완성될 수 없었다. 이 관계를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개혁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이 ‘새로운 교리’의 고안일 따름이라는 로마교의 공박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신론과 기독론이 객관적 교의가 되고, 이신칭의는 ‘주관적’ 구원론이 될 수 밖에 없는 위험이 있었다. 바로 이 문제를 칼빈은 이렇게 풀었다: 새로운 고백은 옛 신앙에서 나왔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요 신뢰인 이 믿음이 성령의 일차적인 사역이다. 성령은 성부의 말씀인 성자를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이 생긴다. 이로써 삼위 교리가 설교에서 구체화된다. 만약 이런 성령론이 개신교회의 발견이라면, 개신교회의 믿음론(신앙론)에 고대 교회의 삼위론과 기독론 교의가 초석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개신교회의 교의라는 이신칭의와 선택론 역시 고대 교회의 삼위론과 기독론 없이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이를 그는 기독교강요가 ‘사도신경 해설’(Expositio Symboli)의 형태를 취하게 함으로써 단번에 풀어버렸다. 외견상 이는 사도신경의 해설에 불과하나, 사도신경의 뼈대로 삼위 하나님을 그 사역에서 고백하는 형태를 취했고, 이신칭의의 교리는 새로운 교리가 아니라 옛 신앙의 새로운 이해에 해당될 뿐임을 밝히 보였다.

이처럼 기독교강요 전면에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른 삼위일체론이 깔려있다. 설교와 주석에 기초한 개혁파의 교회적 신학이 중세의 사변을 뛰어 넘고서 고대 교회의 교의와 악수를 한 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강요가 사도신경의 구체적 항목들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흠 잡을 필요는 없다. 이렇게 하여 칼빈은 신론을 삼위일체론으로 취급하였고(제1권), 그렇게 함으로 삼위일체론이 교의학 전체 구조에서 고립되는 구습을 극복하였다.


삼위일체론의 신학자 칼빈

칼빈은 서방의 일반적 전통, 즉 하나님의 본성이라는 ‘一’의 관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三’의 문제로 나아가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바로 성경의 증거를 따라서 먼저 정리한다. 그는 성경에 경륜적으로 나타난 삼위 하나님의 사역들을 살피면서, 삼위들의 단일성을 증거한다. 또 그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수많은 비성경적인 변증을 가하는 전통을 벗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삼위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호기심이나 사변이 아니라 구원론적이고 실천적인 지식을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는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성부와 동등’이라는 관점에서 증거한다. 이것은 교회사적으로 볼 때 성자의 신성을 증거한 유일한 방식이었다. 이 점에서 종속설적인 흔적이 묻혀있을 수 있다. 그러면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는 젠틸(Gentile)식으로 성부를 ‘신성의 수여자’로 보는 입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성부가 ‘신성의 원천’이라는 것은 신성의 본질이 아니라 질서의 측면에서만 가능하다(I,xiii,26). 성경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와 동시에 성자와 성령도 지칭한다. 그렇지만 위격들 간에는 어떤 경륜적 질서가 있고, 성부는 원천이요 원인자이시니까,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특히 성부에게 해당될 경우가 많다. 칼빈은 고대교회의 전통을 따라서, 성부는 한 위격의 이름일 수도 있고, 동시에 전 신성을 대표하는 이름으로도 쓰임을 말한다. 그러나 성부가 신성의 원천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성자와 성령께 추호의 약탈도 없이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된다. 성자와 성부의 신성은 공유적 신성에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결코 성부의 위격은 (본체론적) 원천은 아니다. 성부만이 ‘절대적으로’ 원천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리우스가 주장한 이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할 때, 하나님이라는 이름 하에 삼위로 이해되는 단일하고 단순한 본질을 말한다.”(I,xiii,20) 그러므로 본질의 단일성에 도달하는 것은 항상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주’, 또는 ‘영’이란 성부께만 적용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의 각 위격이 불려지며, 이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이 보장된다(I,xiii,19,20,24).

그러므로 칼빈은 실재(subsistentia)와 본질(essentia)을 구분한다. 실재는 관계성 속의 존재이고, 본질은 자체로서의 존재이다. 실재는 다른 위격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단순한 구별적 관계일 수는 없고, ‘실재’로 존재한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실재는 유명론적인 칭호이지 않고, 실재한다.

이점에서 칼빈이 동방의 전통 중에서 위를 ‘존재 방식’으로 보는 입장을 탈피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즉 그는 성부를 신성의 촛점으로 보지만, 성부의 위격을 신성의 통일체로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의 충만은 성부에게만 집중되어 있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께 공히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공재 사상이다.

칼빈은 삼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하여 도입되는 인간적인 유비들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키프리안(Cyprian)이 말한 감독제도의 동등성을 예로 든다. “감독 제도는 하나이며, 개개 감독에 의해 전체적으로 그 각 부분이 유지된다”는 말 중의 “전체적으로”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설명한다. 즉 본질은 성부와 성자께 전적이고 ‘전체적으로’(in solidum) 공통적이다(I,xiii,23). 즉 삼위는 비공유적 속성에는 동참하지 않지만, 신성에는 동참한다. 그리고 비공유적인 속성들은 삼위를 서로 분리시키지 않고 실재하는 상호 관계로 서로 연합시킨다. 공재에 관한 이해가 위를 개별적인 단자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오해를 불식시킨다.

이런 공재 이해에 근거하여서 성부의 주권(μοναρχια)를 말할 수 있다. 성부가 성부인 것은 성자와 성령과의 실재적인 관계 속에서 가능하다. 물론 성부가 하나님이기에 그는 성부일 수 있다. 성부를 ‘신성 수여자’로 오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말은 삼위의 공재에 의한 협동 사역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수 있다. 신성은 성부, 성자, 성령께 공통적이다. 그럼에도 성부의 신성을 말하는 것은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일 뿐이다. 본질은 나눌 수 없다.

우리는 칼빈의 삼위일체론이 아주 성경적이며, 균형을 잃지 않으면서도 교회사에도 찾기 힘든 삼위일체론임을 밝혔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신앙이며 경건이며 이것이 또한 신학이기 때문에, 호기심이나 사변이 아니라 실천적인 지식을 그는 추구하였다. 성경과 설교의 주인은 삼위 하나님이시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을 향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성경에서 당신을 삼위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계시 의도를 잘 파악하고, 설교 또한 삼위 하나님을 잘 소개하는 설교가 정착되어야 되겠다.』


이상의 삼위일체 교리가 보다 교회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용어로 사용되어지고 그 설명이 표현되어진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승구는 사도신경 강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강론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이해를 설명하고자 하였습니다.

『 하나님이 한 분이심은 신약에서도 명백히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입니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후 6:15-16). 다른 모든 것보다도 이 선언 속에 하나님이 홀로 한 분이신 분으로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이 잘 드러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가장 현저하게 계시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 한 분이신 하나님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 분이 있다고 하면 그에게 하나의 인격(person)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한 인격이 한 사람, 즉 한 분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계시의 빛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와는 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그 한 신성이 세 위격(three persons, three hypostasis)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본질(ousia, essentia)은 하나이지만, 이 본질이 구현되어 있는 위격(person)은 셋이시라는 것입니다. 칼빈이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위격들의 삼위일체가 있다"(in the one essence of God there is a trinity of persons)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님의 독특한 존재를 계시하시자 사람들은 난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하나님으로 섬겨 왔고 예수께서 아버지라 부르신 그 분과 자신을 그의 독특하신 아들로 드러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의 관계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난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관계는 과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일까요?

교회가 처음 이 난제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교회 안에는 이에 대해서 두 가지 대립되는 잘못된 이해가 발생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이제 세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삼신론적 이단). 그러나 이는 앞서 살펴본 구약과 신약의 명확한 증거, 즉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와 명백히 상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있을 수 없는 견해이고 아주 명확한 형태의 삼신론을 교회 안에서 찾기는 좀 힘듭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이에 근접하는 오해로, 성부 하나님만을 온전하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성자와 성령은 좀 못한 하나님, 제 2의 하나님이나, 제 3의 하나님으로 말하는 이들은 많았습니다. 이런 이해도 성경의 진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교회에서 이단적인 생각으로 정죄된 것입니다. 이런 오해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들자면 그것은 아리우스(Arius)와 그를 추종하던 이들(Arians)의 생각입니다. 아리우스는 성자는 영원에서 창조된 최초의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근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원에서는 성자가 "있지 않던 때가 있었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보다는 좀 못한 하나님, 선을 선택하여 불변성을 얻고 신성에 이른 존재이고,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영에를 받으시기에는 합당하나 우리의 경배의 대상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7 성령의 지위는 더 격하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런 생각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따로 계시되, 성부만이 온전하신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부차적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로 성부, 성자, 성령의 동등하심과 심지어 하나이심을 강조하다가 잘못된 사상도 있습니다. 소위 역동적 군주론(dynamic monarchianism)은 예수님을 그저 사람으로 보고, 성령을 신적인 영향력으로만 보았고, 양태론(modalism)으로 알려진 이단은 성부, 성자, 성령이란 한 하나님께서 각기 다른 시기에 자신을 드러내신 세 가지 양태(three modes of manifestation)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가 성자이고, 그가 성령인데, 그것은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시하신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자의 수난이 곧 성부의 수난이 되고 (성부수난설, patripassianism), 결국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뚜렷이 구별되어 계시되어 있다는 것과, 또 때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 동시에 나타나신 사건들 (예수님의 수세, 변화산 사건 등)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는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 두 가지 오해는 아주 명확한 형태로 나타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비록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지니더라도 그런 경향에로 나아가는 모든 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터툴리안(Tertullian)도 성자를 성부에게 종속시키는 듯이 말을 한 일이 있고, 오리겐(Origen)은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고, 성령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표현하여 소위 종속론(subordinationism)의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들은 과거의 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들이 우리 주변에 있을 수 있기에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성부에 비해서 성자와 성령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자의 인간되심에 충실한다고 하면서 그의 신성을 무시하거나 이를 완전히 감취어진 것으로 여기는 현대의 경향이나, 성령을 향해서 명령하듯이 말을 하는 풍조나 성령의 인격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언사와 행동이 위에서 말한 첫번째 오해와 연관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을 설명하면서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세 양태와 관련해서 설명하는 것(예를 들어서, 물질의 삼태(三態)에 따라서 물이 수증기, 물, 얼음으로 될 수 있으나 다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든지,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지위와 관계로 [아버지, 남편, 교사 등] 설명하든지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두 번째 오해와 관련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오직 한 하나님이 계신데, 그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과도 유비되지 않으시는 아주 독특한 존재 방식을 가지셔서 그 한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three persons)로 존재하신다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은 그 존재와 영광과 권세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어서 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는 각 위간에는 종속적인 면이 없고, 위격적 엄위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 분들에 계시하실 때 아버지, 아들의 용어를 써서 계시하시므로 우리는 그 계시를 따라서 성부(아버지 하나님), 성자(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고, 또 이 용어들이 지시하는 관계성과 성경의 표현에 근거해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하나님을 낳으시고(generate),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서 낳아지시며(is generated),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도(filioque) 나오신다(proceed, spiratio, 요 15: 26)는 표현을 써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를 우리가 인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점진적으로 계시하신 것에 근거해서 신약에서야 비로소 온전히 인식할 수 있지만, 이 삼위의 관계는 구약에도 있던 것이고 때때로 비록 그림자적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런 시사가 있는 계시도 있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삼위일체의 관계는 사실상 하나님이 계시면서 계속해서 있어 온 관계입니다. 이렇게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을 우리는 때때로 본체론적 삼위일체, 존재론적 삼위일체라고 하며, 그 하나님이 자신을 역사적 경륜 가운데서 드러내신 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본체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이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을 경륜과 계시 가운데서 드러내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삼위일체적 존재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게 섬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



기독교의 신관인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진 신관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이는 교회사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용어가 사용되고 정립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면서 보다 자세한 가르침이 있어오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의미가 보다 풍성히 알려졌습니다. 삼위일체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이 세 인격이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시면서 일체라고 하는 독특한 신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가 되신다는 신관은 구약과 신약 많은 곳에서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구약 역사 때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세상 만물의 생명을 내시는 창조자이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 후 그들의 구속사와 관련하여서는 성부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역이 두드러지는 것과 함께 성령 하나님의 사역도 나타났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선지자로 부름을 받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일을 하셨으며, 예언하게 하시고 또한 성경으로 기록하게 영감하셨습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존재시키는 데 있어서 필요할 경우는 한 개인이나 국가를 움직이게도 하셨습니다. 또한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들어오시는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성령 하나님의 준비 속에서 그 모습을 세상에 나타내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존재성은 오순절의 강림하심으로 온 세상에 충만히 나타내셨습니다.



삼위일체 신관의 역사성과 관련하여 재차 확인하여 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가진 신관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이 비록 구약과 신약의 증거를 교리로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기독교의 역사에서 확증시키고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신앙으로 확립되기까지는 난관을 거치는 과정인 역사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초기 교회 시대가 가진 신관은 하나님의 유일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보고, 성령님에게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보는 것에서 하나님만이 참 신이신 유일성을 보았지,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터툴리안이 처음으로 '삼위일체'란 말을 사용하며 교리화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개념이 성자가 성부에게 부당하게 종속되어 있는 불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리겐에 의해서는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며, 성령은 성자에게도 종속된다는 개념으로 가르쳐졌습니다. 교회가 삼위일체의 교리를 공식화하기 시작한 때는 제4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니케아 회의에서 성자를 성부와 일체되는 것으로 선언하였고(325.A.D),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A.D)에서 추가적으로 성령의 신성을 주장하며 삼위의 상관 관계를 공식적으로 언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 교리는 사람들에게 자칫 '종속론'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자는 성부에게서 출생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다"는 표현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대작(大作)인 '삼위일체에 대하여'에서 이를 전적으로 배제하고 있습니다만, 표현 자체가 그런 뉘앙스를 띠고 있기 때문에 항상 오해를 가질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표현되어지고 있는 '출생'(나셨다)이나 '발출'(나오셨다)은 우리 인간이 아버지가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에게서 나온 자식은 그 조상인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과 같은 이해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에 있어서 상관 관계는 어느 분이 먼저 계시고 어느 분이 나중에 나셨고 또한 나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표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성을 설명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그 실천인 구속사의 질서를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엡 1:3-14).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의 구원의 성업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신 작정을 실천하시는 것으로 아들을 육신을 입게 하여 출생시키셨고, 아들이 이루신 구속을 각 사람에게 적용시키고 완성시켜 나가시기 위해서 그 아들과 함께 성령을 보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은 그 신격이 하나이신 데서 나오신 표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 동일 본체시오 동일 본성이시오 동일 능력이시오 동일 영원성이십니다.

종교 개혁이 있은 후인 개혁교회는 그동안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에 대한 투쟁 속에서 정통 기독교회의 중요 교리로 채택한 신조와 함께 여러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에서, 예컨대 벨직 신앙고백서, 돌트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등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관을 뚜렷하게 가져왔습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단일한 신격(신성) 안에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세 인격이 계시는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말미암지 않고 나시지도 않으셨고 나오시지도 않으신다. 성자는 영원히 성부에게서 나셨으며, 성령은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왼다"(제2장 하나님과 삼위일체 3항)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종교개혁 이후 시대에 다양한 주장으로 표출되었습니다. 종속론을 비롯해서 영원한 신인이 성자 안에서 육신이 되셨고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셨다는 형체론, 유일하신 하나님이 사역 시기에 따라서 구약 시대에서는 여호와로 신약 시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교회 시대에서는 성령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양태론,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신데 그 신격의 본질이 같다고 하는 삼신론은 그 대표적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주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합니다. 이런 주장은 교회사에서 이단 시비를 불러 왔습니다. 그렇지만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주장도 그 이해를 완전히 명확하게 가질 만큼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설명이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신비로 돌려 우리의 주관적 판단으로 하나님의 존재성을 규명하는 것을 주의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커다란 코끼리의 신체 일부를 손으로 만져보고 "코끼리는 이렇게 생겼다"고 극히 한 부분만 설명하는 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오늘날에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많은 신자들에게 많이 가르쳐지고 또한 가장 많이 확산되어 있는 삼위일체론은 양태론과 함께 삼신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 삼신론이 적지 않은 지지를 얻고 있는 듯 합니다. 차영배는 그의 저서인 '개혁교의학'에서 지금까지의 한국 교회가 가졌던 삼위일체에 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수정하여 표현하며 언급하고 있습니다. " '본체는 하나님이나 삼위로 계신다'는 말이 아니고 '삼위가 계시는데 그 본질이 하나이다' 본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가 영원히 실존하시니 곧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로서의 하나님, 혹은 성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마치 본체는 하나님인데 성부로서, 혹은 성자로서, 혹은 성령으로서 나타나는 하나님인 것처럼 생각하면 이것은 양태론의 이단에 가까운 생각이 되고 만다. 성부로서가 아니라 바로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자로서가 아니라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령으로서가 아니라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언급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매우 잘 표현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그럴 경우 단일한 신격 안에 세 인격이 계시다고 하는 정통 기독교회의 삼위일체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삼위의 구별된 본질에서 시작하여 그 본질이 서로 동일한 것으로서 하나라고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각각 삼위의 독립된 개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 독립된 삼위의 개체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곧 신격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지닌 독립적인 개체는 그 신격성 또한 개체라고 하는 견해를 갖고서 삼위 하나님의 신격의 본질은 동일하다고 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만일 이러한 의미에서 가진 견해가 아니라면 이는 전적으로 필자가 저자/차영배의 글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저자의 글을 의도적으로 훼손할 뜻이 아니었음을 밝힙니다). 그래서 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설 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을 뵙게 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조심스럽게가 아니라 이제는 아주 설득력 있게 주장되어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전통적으로 개혁교회가 가진 것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에서의 '삼위'를 하나님의 인격성을 지닌 구별되고 독립적인 개체(실존)의 구분으로 보고 '일체'를 단일한 신격으로 봄으로써 단일한 신격 안에서 세 분의 인격성이 구별되며 또한 독립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분명한 삼신론입니다. 그것은 동일한 본질의 신격을 말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신격은 인격과 마찬가지로 구별되고 독립적인 것으로서의 성질이기 때문에 단일한 신격에 의한 유일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일한 신격을 세 분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의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셨습니다. 여기서 구분되어지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삼위'는 세 인격성의 구분을 뜻하고 있어서 삼위 하나님이 각기 독립적이고도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인 인격성을 지닌 실존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이 실존은 하나님의 신적 본질의 기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성자이신 하나님의 기원은 성부에게서, 성령이신 하나님의 기원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시작된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루이스 벌콥은 말하기를, "신적 본질의 생성(발생)이라기 보다는 인격적(위적) 실체의 생성(발생)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칼빈이 말한 주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신성에 있어서 한 분이시고, 인격에 있어서 삼위이시고, 관계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이해는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계시와 구속 사역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단지 삼위 하나님의 인격성이나 존재성만을 갖고 논한다고 하면, "단일한 신격 안에 본체와 능력과 영원성이 하나인 삼위가 계시니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이나,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데, 그 하나님의 신격은 동일하다"는 논리로 끝없는 충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데 당신의 영원한 작정의 실천으로 이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주시고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구별된 독립적인 인격성으로 그 존재성을 나타내시고 일하시는데, 그 본질은 하나이니 단일한 신격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의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진술됩니다.

첫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도다"(왕상 8:60).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고전 8:5-6).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신 것은, 그분은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불변하신데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자존자이시며 자신 안에서 스스로 모든 생명과 영광과 선하심과 축복 등을 가지시고 자신 안에서 그리고 자신에게 충족하게 행하시는 충족자이시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만물의 통치자이신 점에서 다른 신(우상)과 구별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신격에 삼위(세 격위)가 계시는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아버지뿐 아니라 아들과 성령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고 말하여서 아버지의 아들의 관계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성령을 "하나님의 영"(롬 8:9)이라고 말하여 성령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나타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기원할 때 삼위 하나님의 특성을 가지고 하였습니다(고후 13:13). 이는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가 삼위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론적인 근거 속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제자 삼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8:19).

하나님의 삼위는 하나님의 구속사에 따른 자기 계시에서 그 상관 관계가 잘 나타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일하신 구속사의 특징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 성자 하나님의 실행, 성령 하나님의 적용이라는 이 세 가지 사실로 설명됩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와 섭리에서 부각되시며 구원을 작정하시고, 또한 그 구원의 실행을 위하여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을 실행하기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는 대속주가 되게 하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내주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을 적용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의하여 영단번으로 받은 구원을 인치시고 보증하시며 완성시켜 가십니다.

셋째, "삼위의 각 고유성은 구별되나 그 본질은 같으시고 권능과 영광은 동등하시다"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각 인격성은 고유한 것이며 독립적인 것입니다. 성부의 고유성은 성자를 낳으심이며, 성자의 고유성은 성자로부터 나심이며, 성령의 고유성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오심에 있으면서 그 각각의 고유성은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삼위 하나님은 그 본질이 같으시고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시기 때문입니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의 삼위일체 계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 복수로 표현되어지거나 등장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여 온 우주에 충만하신 분께서 그 자신의 존재성을 아들과 성령과 함께 그 모습을 나타내시어 일하시는 것에서 하나님과 그분의 인격과 생명과 능력과 영광을 보이셨음을 알 때 이해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원리에서 볼 때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실 일을 작정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거룩한 일을 성령에 의하여 완성시켜 나가실 일도 작정하신 것의 실천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특성을 드러내셨으며, 때가 되시자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 의해서 보냄을 받은 것이기에 자신을 보내신 분의 거룩한 뜻에 순종으로 나가는 태도를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보내신 자의 인격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26)에서 하나님께서 복수로 등장하여 창조 사역에 참여하셨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앞두고 중보자의 기도를 하실 때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장)에서 알 수 있듯이 아들은 자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알고서 철저히 자신을 순종으로 드려 가는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이분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 라고 말씀하여서 예수님을 통해서 곧 그분을 보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들과 또한 성령님이 일하신 데서 보이신 인격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본래적 상태를 말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빌 2:6)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과 그 인격을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며, 이적을 행하시는 것에서 나타내어 주셨습니다(마 4:23).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우리를 향한 거룩한 뜻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 완성하시고 그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서 영원히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에서 계속될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이 당신의 본체론적(존재론적) 관계에서와 구속 사역과 관련된 것이라고 할 때, 구속 사역의 완성 이후의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당신의 나라의 주이신 하나님 한 분과 그의 백성이 함께 영생하는 신세계로 영원 무궁할 것이라는 생각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뵙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신의 특성은 유일성이요 그 존재성 또한 유일성입니다. 신세계로서의 하나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존재성을 계속해서 삼위일체 교리에 의한 단일한 신격 안에서 갖는 유일성으로 가져야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은 삼위일체 교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한 자기 계시의 용어로서 가장 최적의 것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되는데 특별히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있으며, 이는 창세 전에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신적작정)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당신의 나라를 어떻게 건설해 가실 것인지를 작정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와 그들에게 있었던 일, 곧 천사의 창조와 사단의 출현, 그리고 인간 세계의 창조와 타락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의 실천으로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언급한 대로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계시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여서 복수를 쓰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복수로 표현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이란 단수를 쓰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창세 전에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룰 일을 작정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택하신 진리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속이란 방식을 동원해서 우리를 하늘에 있든지 땅에 있든지 사방에서 모아 영원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아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심으로써 실천하시고 성취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부터 맡은 사명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기에 순종으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 나간 구속의 완성을 이룰 사역을 위해 성령을 보내는 일을 아버지 안에서 또한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오심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함께 자신이 해 나가야 할 일에 대한 성격을 뚜렷이 인식한데서 되어진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가지신 영원한 작정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자기 계시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 계시는 단지 삼위일체로서 일하실 하나님에 대한 자신을 알리는 그런 차원이 아닌 분명하게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하신 대로 각각 맡은 사역을 수행하실 것이기에 그 구별된 삼위 하나님이, 곧 하나님의 구별된 인격이 뚜렷하게 그의 사역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영원한 작정의 실천으로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독특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성부가 하나님이시고, 성자가 하나님이시고, 성령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삼신론이 아니고 유일신론입니다. 그렇다고 단일신론도 아닌 유일신론입니다. 그 한 분 하나님께서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대한 영원한 작정을 가지셨으며, 그 작정과 그것을 실천해 나가시는 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분명히 보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과 권세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어서 한 하나님으로 계시는 것이라는 이해 속에서 그에 대한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딤후 6:15-16)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홀로 한 분이심을 강조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의 영원 전에 하나님을 보는 모습이 그러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보는 모습 또한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라고 말씀하여 '신'(神)이신 하나님 자신을 '영'(靈)으로써 말하고 있는 의미를 이해하고 있을 때, 그래서 하나님은 과연 분리되거나 나누일 수 없으며, 해서 또한 여럿 일 수 없는 분이심을 알 때 하나님을 수의 개념인 세 분으로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