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는 일반 종교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교리로서 오직 기독교에만 존재하는 매우 특별한 교리이다.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는 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비논리적, 비과학적, 비상식적, 등등으로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앞에서 정리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적 차원에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다음과 같이 믿고 수납해야 한다.
첫째-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인식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시기를 간구한다.
둘째-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완전무결의 능력으로 존재하신다는 차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당연한 것으로 믿고 수납한다.
셋째-신학<하나님의 말씀-성경>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포하였음을 명심하여 아멘으로 믿고 수납한다.
넷째-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으면 이해될 때까지 기다린다.
가. 1. 삼위일체 교리의 역사.
(1) 1) 최초의 주장.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용어이다. 그러나 성경은 한분 하나님을 선포하면서 또한 세분 하나님을 선포한다. 때문에 신학자들은 한분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세분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실유를 신학적으로 정립해야 했다. 삼위일체라는 말의 그리스어인 “트리아스”<τριας-trias>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안디옥의 “테오필로스<Theophilos-안디옥의 6 대 주교 AD 160~190경 재임> 였다,
그러나 라틴어의 삼위일체라는 <트리니타스-trinitas>를 신학적 용어로 처음 사용 한 것은 터툴리아누스 <Tertullianus-AD 150/160~220/222-서방교회북아프리카의 신학자>였다.
(2) 2) 교회회의의 결정.
터툴리안이 최초로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그 교리를 형식화하였으나 그 내용은 불충분하였다. 그는 성자가 성부에게 종속되어진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터툴리안 이후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가 정립되기까지에는 오랜 시간과 수많은 역사적 논증들이 제기되었다. 삼위일체 교리는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 논증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함께 논증되었고 따라서 기독론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립되었다.
(1) 니케아<Nicea>회의<AD 325-The council of Nicea>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론 논쟁의 가열화 속에서 드디어 니케아 교회회의가 열리게 되었고, 니케아 교회회의는 삼위일체 교리를 공식화하였다. 아리우스가 주장하였던 성부 성자 성령의 종속설이 거부되어지고, 성부 성자 성령의 등급설도 거부되어졌으며 성부 성자 성령은 본질상 동등하다는 것이 선포되어졌다.
(2)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회의
<AD 381-Thecouncil of Constantinople>
니케아 교회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아리우스 주의자들이 계속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종속설과 성부 성자 성령의 등급설을 주장함에 따라 콘스탄티노플 회의가 열렸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니케아 교회회의 결정을 재확인하였고 성령의 신성을 확립하였으며 성령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선포하였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의 인격적 상호 관계가 정립되어졌다. 이와 같은 교회회의의 결론이 동방에서는 다메섹의 “요한”의 저서를 통하여 기록되어졌고, 서방에서는 “어거스틴”의 대작인 <삼위일체에 대하여>를 통하여 기록되어졌다.
나. 2.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位>.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때에 세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세분 하나님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位>가 삼위<三位>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서 위<位>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인격<人格>적 존재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位>>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질 때에 그것은 신분, 위치, 위상, 등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인격<人格>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어 질 때에 그것은 성품, 품위, 품격, 등등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나 그, 용어들이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질 때에 그것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때에 있어서 <위> 와 <인격>은 하나님의 본질<본체>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위 와 인격 이라는 용어가 하나님에게 적용되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만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실 수 없고 세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셔야 하는 절대적 필요성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만 한분 하나님으로서만 존재 하신다면 위 나 인격 등등의 용어가 하나님께 적용될 필요가 없고 따라서 하나님의 실유를 신학적으로 정립 할 때에 본질, 본체, 속성, 등등의 용어로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한분 하나님이 세분 하나님으로 존재해야 하는 절대적 필연성을 요구한다.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을 세분 하나님으로 정립해야 하는 형이상학적 이유에 의하여 <위> 와 <인격> 이라는 용어가 하나님께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위 와 인격 은 한분 하나님을 세분 하나님으로 선포하는 신학적 용어이다. 성경에는 삼위 일체 라는 용어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위> 나 <인격> 의 용어도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종들의 지혜와 그들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된다.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받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 <신학자>들은 한분 하나님을 세분 하나님으로 나누거나 구분하는 비 진리를 범하지 않고 한분 하나님을 세분 하나님으로 정립하면서도 한분 하나님과 세분 하나님이 피차에 전혀 타격을 주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정립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는 <위> 와 <인격> 이라는 용어를 형이상학적으로 다듬어 하나님께 적용하는 놀라운 역사를 통하여 정립되어졌던 것이다.
다. 3.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오류.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멋지게 정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간적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는바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1) 종속론.
종속론이란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께 종속되어진다는 것으로서 삼위일체 교리를 처음 구체화시킨 터툴리아누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터툴리안의 종속론은 세밀하거나 구체적이지 않았다. 종속론을 구체화시킨 것은 오리겐<Origenus-AD 185~254>이었다. 오리겐은 터툴리안의 주장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본질에 있어서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종속된다고 주장하였다. 오리겐의 이와 같은 주장은 성부와 성자의 필연적인 신성의 가치를 떨어뜨렸을 뿐만 아니라,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 매우 나쁜 영향을 제공하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Arius-A.D.250-336>가 성자는 성부 하나님의 최초 피조물이며 성령은 성자의 최초 피조물로서 성자와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고 그로 인하여 커다란 물의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종속론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가 동등하거나 동일한 것이 아니라 성자는 성부에게 종속되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된다는 교리를 말한다. 이, 종속론에 의하면 성자는 성부와 동격이 아니며 성령은 성부나 성자보다 낮다. 종속론은 다음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본체론적 종속론.
성자가 성부에게 본질상에 있어서 실제적으로 종속되어 있고 성령이 또한 본질상에 있어 실제적으로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성자는 본질적으로 성부로부터 나왔고 성령은 본질적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유출되었기 때문에 본질적인 종속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2) 사역적 종속론.
삼위일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는 동등 하지만 사역론 적인 차원에서는 성자는 성부의 지시와 명령에 종속되어 있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지시와 명령에 순종하도록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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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속론은 본체론적 종속론과 사역적 종속론에 관계없이 모두 다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에서 퇴출시키는 망령된 주장들이다. 그 무엇에게든 <비록 성부 하나님에게라 할지라도> 종속되는 하나님은 신분적 차원에 속성적 차원에서 하나님이실 수 없는 것이다.
(2) 2) 일위신론<一位神論>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三位>를 거부하고, 성부 하나님의 일 위<一位>만을 주장하는 자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사벨리우스”<Sabellius>에 의하여 제기되어 확산되어졌는데 그로 인하여 두 가지의 변형된 삼위일체론이 등장하였다.
(1) 동력적<動力的-Dynamic> 일위 신론.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만 보았고, 성령의 실체를 부인하여 신적 감화로만 인식하였다. 예수는 성부 하나님의 신적 작용에 의하여 나타난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고 성령은 실체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신적 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2) 형태적<形態的-Modalistic> 일위 신론.
양태론<樣態論>적 유일신론으로도 불리는 이 논증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단지 신격에 의하여 연속적으로 표시되어지는 세 가지 형식의 현현으로 보았다. 즉 한 분 하나님이 섭리적 필요성에 의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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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이르러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 다음과 같이 가르쳐지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남자가 부모에게는 아들이 되고 부인에게는 남편이 되고 자녀들에게는 아버지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한분 하나님이 섭리적 차원에서 어떤 경우에는 성부 하나님이 되시고 어떤 경우에는 성자 하나님이 되시며 어떤 경우에는 성령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하나님은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시라 <일위의 하나님>이시다. <양태론적 삼위일체론> 또는 <형태론적 삼위일체론>은 본래 <동력적-動力的-Dynamic- 일위신론> 또는 <형태적-形態的-Modalistic-일위신론>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일위신론<一位神論> 하나님 교리이다. 따라서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편안하게 이해하려는 방법론이 아니라 결국은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3) 3) 침투론.
침투론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 되었는데 그들은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변형시켜 침투론을 만들었다. 침투론 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세분 하나님과 한분 하나님의 독립적 존재하심을 거부한다. 저들은 세분 하나님이 한분 하나님이 되고 한분 하나님이 세분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요14:9-10-고후5:19> 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한분 하나님 안에 두 분 하나님이 침투하여 존재함으로 세분 하나님이 한분 하나님이 된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즉,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 안에 침투해서 존재하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 안에 침투해서 존재하고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 안에 침투해서 존재하여 세분 하나님이 한분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학 사상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만약에 그들의 주장대로 <한분 하나님이 세분 하나님으로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또한 그 세분 하나님은 셋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분 하나님으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전혀 완전한 무<無>의 상태에서 전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오직 <자존 원리에 의하여> <자존하신 하나님>의 존재하심 이란 절대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제한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을 믿는다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것, 어떤 경우에도 불가능하다거나 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불경스러운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셨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에 의한 자존하심이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신학적으로 정립함에 있어서 세분 하나님의 존재하심이 숫자적인 3신적 존재로 오해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위<位>라는 용어를 형이상학적으로 적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정립한 것이다. 저들은 이와 같은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독립적 존재하심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침투>적 원리를 적용하여 하나님께 더욱 불경을 범하였다.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성은 그 어떤 것의 연합이나 혼합이나 침투 따위를 용납 할 수 없다. 그것이야 말로 절대 불가능한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침투를 허용하는 하나님은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서 하나님이 아니며 또한 침투하는 하나님은 침투한 하나님이나 침투당한 하나님이나 다함께 불완전한 하나님이 된다. 한편 침투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국 연합 내지는 혼합이 되는 것으로서 <연합된 하나님> 또는 <혼합된 하나님>이 됨으로 역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침투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동질성을 파괴한다. 두 하나님이 한 하나님 안에 침투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처음에는 셋으로 존재 하였었는데 <그리하여 본질상 하나의 동질이 아니었는데> 침투하여 <또는 침투되어>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본질적 동일성을 획득하였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아버지 안에 내가> <내안에 아버지께서>라는 <안에>서의 원리를 잘못 해석하여 마치 하나님 안에 또 다른 하나님이 침투하여 존재<공존>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하게 삼위 하나님의 독립적 실재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안에>서의 존재원리는 실유의 실재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을 말하는 것이다. <안에>서의 원리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 <너희가 내안에-내가 너희 안에>의 원리도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실존재적으로 공존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하나님과 실존재적인 공존을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추방시키는 이단적 교리가 되는 것이다.
라. 4.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각론.
(1) 1) 제1위 하나님<성부 하나님>
(1) 성부 하나님의 존재하심.
성부 하나님은 완전 무근거<無根據>로부터 자존<自存>하셨다. 성부 하나님의 자존하심은 성부 하나님의 완전무결한 능력과 절대적 주권에 대한 자증<自證>이다. 무근거로부터의 자존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며 따라서 자존에 대한 선포도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자존을 선포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뿐이시었다.
(2) 성부 하나님 명칭의 의의<意義>
아버지라는 명칭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1위에 적용되어지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관계를 정립하는 기본적인 골격이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본래적인 부격<父格-fatherhood>으로서 그가 누구를 통하여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것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근거가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1위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제 2위의 아버지이다. 다른 이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아버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는 보다 차원 높고도 확실한 형이상학적인 명분이 있다.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상대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보다 더 아름답고 유익한 존재는 없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상대에게 있어서 최고 최상 최대 최선의 존재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것이 되며, 또한 아들을 위한 모든 것이 되는 존재이다.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 이외에 더 이상의 존재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를 정립함에 있어서 아버지라는 명칭을 제 1위에 부여하사 성부 하나님이라 칭하신 것이다.
한편,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1위는 모든 것<그것이 무엇이든지에 관계없이 참으로 모든 것>의 기획자요, 모든 것의 예정자요, 모든 것의 결정자이시다. 이러하신 제 1위의 하나님께는 다양한 그리고 수많은 직분적 명칭이 적용되어져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불구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적용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여기에서 참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순전하심을 뵙게 된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성자 하나님께만 적용되어지는 명칭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어지는 영원하신 명칭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직분에 합당하게 존재하심보다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 존재하시기를 기뻐하셨음이 분명하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버지라는 명칭으로 우리에게 오셨음을 더욱 감사해야한다.
(3) 성부 하나님의 위치.
① 주권주 하나님.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은 성부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성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오해하여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는 전혀 주권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류다. 성부 하나님의 주권은 곧, 성자 하나님의 주권이며 성령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성부 하나님의 주권으로 정립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1위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② 소유주 하나님.
현존하는 모든 것은 성부 하나님의 소유다. 성부 하나님은 완전한 무<無>에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현존하는 모든 것의 소유주이시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 성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오해하여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는 전혀 소유권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류다. 성부 하나님의 소유권은 곧, 성자 하나님의 소유권이며 성령 하나님의 소유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을 성부 하나님의 소유권으로 정립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1위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③ 구속주<救贖主> 구세주<救世主>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영원히 사면<赦免>하신 구속주<救贖主>이시며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면하여 주시고 세상을 구원하여 주신 구세주<救世主>이시다. 신학을 모르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救贖主> 구세주<救世主>로 알고 있는데 그것은 오류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주<救贖主> 구세주<救世主>가 아니라 대속주<代贖主>이시다. 구속주, 구세주는 죄를 용서하는 사면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법적, 행정적, 사면권을 가지신 분이시다. 따라서 사면권을 가지신 하나님은 모든 것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성부 하나님>이시다. 인류의 죄, 이 세상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면<赦免>할 수 있는 권한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주권을 소유하신 성부 하나님에게 있다. 구속주와 대속주는 전혀 다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속주와 대속주를 분별하지 않고 함께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거나 심지어는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④ 섭리주 하나님.
우주 만물에 대한 섭리는 성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섭리에 따라 진행된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섭리주 하나님이시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섭리가 성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오해하여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전혀 섭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면 오류다. 성부 하나님의 섭리는 곧, 성자 하나님의 섭리이며 성령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섭리를 성부 하나님의 섭리로 정립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1위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성부 하나님은 섭리주 하나님으로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이시다.
A. 기획주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시작과 진행과 결과를 기획하신 기획주 하나님이시다. 우주 만물의 질서정연한 역사가 규명되지 않은 우연적 원인과 수십억 또는 수천 억년의 진화와 발전에 의한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주장은 너무나 무책임한 것이다. 정교한 우주 만물의 존재함과 질서정연한 배열과 운행, 그리고 그들의 진행 역사를 통하여 발생하고 결과 되는 모든 것들은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의 목적적 섭리에 의하여 기획된 필연적인 역사인 것이다.
B. 제작주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적 섭리에 따라 기획한 모든 것을 또한 제작하신 하나님이시다. 우주 만물의 존재함과 질서정연한 배열과 운행과 진행역사는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의 제작이 아니고는 절대불가하다. 현대과학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무수한 시간과 노력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근거로 할 때에 우주만물의 존재함과 질서정연한 배열과 운행과 진행 역사에 어떤 하자가 없다는 것은 그것이 완전무결하신 하나님에 의하여 제작되었음을 분명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C. 연출주 하나님.
우주 만물의 역사적 진행은 곧 성부 하나님의 섭리역사이다. 성부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모든 진행 과정을 연출하신다. 우주 만물의 역사적 진행이 다사다난<多事多難>하면서도 언제나 그 결과들이 장엄하고 위대한 것은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기독교 역사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대 전제하에 하나님에 의하여 연출되기 때문이다. 역사란 때로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난해<難解>와 돌연<突然>적 변화 속에서 예측불허<豫測不許>의 결과를 이루지만 그것은 이미 섭리주 하나님의 기획, 제작, 연출에 의하여 예정된 결과이다.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역사는 도도히 흐르는 물결>로서 결코 <거스릴 수 없는 불가항력>이라고 말하면서도 <역사는 항상 되풀이 된다>고 정의하였다.
D. 감독주 하나님.
섭리주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총괄하여 감독하시는 감독주이시다.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최고의 작품이다. 우주 만물의 역사는 종교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수많은 조물주들과 주관자들에 의하여 제 영역이 분리 운영되는 것이 아니며 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 영역이 각각 독립적인 역사를 진행하는 것도 아니다. 우주 만물은 제 영역들이 때로는 마찰하고 충돌하고 투쟁하면서 각각 독립적인 역사를 고집스럽게 진행하지만 결국은 섭리주 하나님의 주관적 감독 하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종합적인 역사이다.
E. 주연주 하나님.
모든 역사현장들은 곧 하나님 섭리 역사의 무대이다. 대자연은 하나님 섭리 역사무대의 소품들이고 장치들이며 모든 역사의 시간과 공간들은 하나님 섭리역사 무대의 막<幕>이고 장<章>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 섭리역사 무대의 조연들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하나님 섭리역사 무대의 오직 유일한 주연주<主演主>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 섭리 역사의 최고 주연으로서 창조, 섭리, 심판의 역사를 주도하시며 따라서 모든 역사는 최고의 주연주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진행된다. 우주 역사의 시공간에 출현하고 퇴장하는 모든 존재들은 주연주<主演主>이신 하나님의 역사 진행을 보좌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등용되는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과 기뻐하심>을 이루는 종합적인 결과를 위하여 맡은바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F. 관람주 하나님.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하나님을 위하여 기획되고 제작되고 진행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관람하시는 가장 존귀하신 최고의 관람주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관람하시면서 만족하시고 기뻐하신다.
⑤ 받으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모든 피조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것들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A. 예배 받으시는 하나님.
B. 찬양 받으시는 하나님.
C. 기도 받으시는 하나님.
D. 감사 받으시는 하나님.
E.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초기 신약 기독교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도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드리는 관례가 있었으나 그것이 비 진리라는 신학원리가 정립된 이후부터는 사라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학원리를 오해하여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받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류다. 우리가 성부 하나님께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드리면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동시에 그것을 받으신다. 이와 같은 원리를 신학적으로 정립하여 <영광동등>이라고 한다.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성부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1위이신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학 원리를 오해하여 성부 하나님께서 대표로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받으신다고 하면 오류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 원리에 의하여 성부 하나님께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드리는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 원리에 의하여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동시에 그것을 받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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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신학 원리를 모르는 자들이 예수 그리도, 또는 <예수님>에게 기도를 하거나 <성령 하나님>께 기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중보자>로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근거<길>이며 성령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시다.
⑥ 응답하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피조들이 드리는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에 일일이 응답하신다. 성부 하나님은 피조들이 드리는 예배,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받으시면서 기뻐하시고 그들의 형편을 일일이, 상세하게 돌아보시며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각종의 강복과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베푸신다.
⑦ 부여하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임명하시고 그들에게 각각의 사명을 부여하시며 그들이 맡은 바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각각의 은사와 능력을 부여하신다.
⑧ 거두시는 하나님.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이 부여받은 사명을 하나님의 섭리대로 온전하게 준행하지 않을 때에 부여한 사명과 은사와 능력 일체를 거두신다.
(2) 2) 제2위 하나님 <성자 하나님>
(1) 성자 하나님의 존재하심.
하나님의 자존하심은 성부 하나님께만 존재하는 단독적 역사이다. 하나님은 자존자이시며 자존자는 오직 홀로이셔야 한다. 자존자가 둘 이상이 된다면 자존자의 의미가 없으며, 하나님의 절대성이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의 단독적인 생성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다.
성자의 존재하심은 <자존하심>이 아니라 성부로부터의 생성이다. 성부가 성자를 낳았다는 성경의 증거<시2:7-행13:33>는 이와 같은 성부와 성자의 생성에 관한 분명한 증거이다.
성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신 자존자이시다. 그리고 자존하신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이외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다. 물론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차원에서만 말하려면 얼마든지 자존자의 위상을 가지실 수 있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와 같은 논리는 비과학적이며 비논리적이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셋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절대적 속성상 당연히 하나이어야 하기 때문에 자존자가 셋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자 하나님이 자존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는 성자 하나님의 칭호를 가질 수 없다. 자존자는 자존자이기 때문에 누구와의 관계에서 항상 자존자로서의 위치에 있어야 함으로 아들의 위치에 설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성령하나님이 자존자의 위치에 서게 되면 그는 성령 하나님의 칭호를 가질 수 없다. 같은 이유에서 성부 하나님의 영이 될 수 없으며, 성자 하나님의 영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시작부터 성립이 될 수 없게 된다. 성경은 이와 같은 점을 분명히 하여 성부 하나님을 오직 유일한 자존자로 선포하고,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낳으신 것으로 선포하며,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부터 발생되어진 것임을 선포함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론적 신학적 정립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로부터 생성되어 졌다고 하여 그것을 유출 이라고 표현해서는 안 되며 또한 성자가 성부에 의하여 출생되었다고 하거나 또는 창조 되었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생성되어 진 것은 인간의 출생하고는 그 <격>이 다르다. 성부와 성자는 하나님으로서 피차에 실제적으로 낳는다거나 또는 유출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서를 신학적으로 정립함에 있어서 그러한 용어로 정립하는 것 일뿐 그것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또한 실제적으로 이루어 질 수도 없고 이루어 저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한편 성부와 성자의 <존재하심>에는 전혀 시차가 없다. 동시 선재인 것이다. 또한 성자가 성부로부터 생성되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자는 성부에게 전혀 종속되어지지 아니한다.
(2) 성자 하나님 명칭의 의의<意義>.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제 1위의 아들이다. 다른 이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에는 보다 차원 높고도 확실한 형이상학적인 명분이 있다.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상대에게 아들이라는 존재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없다. 아들이란 존재는 상대에게 있어서 최고, 최상, 최대, 최선의 존재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 되며 또한 아들은 아버지를 위한 모든 것이 되는 존재이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아들보다 더 이상의 존재는 없는 것이다. 성경은 특히 성자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라고 선포한다<요1-14; 요일1:1-3>. 성경이 증거 하는 <로고스>라는 특별한 용어가 성자에게 적용되는 것은 첫째 성부와 성자와의 밀접한 관계를 증거 하기 위함이며 둘째 성자와 세상과의 관계를 증거 하기 위함이다. 철학은 <로고스>를 하나의 언어적 차원에서 다루지만 성경이 적용하는 <로고스>는 언어와 발언자의 관계를 동시에 나타내는 것으로서 로고스는 하나의 인격적 실체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 적용되는 것이다
(3) 성자 하나님의 위치.
① 대속주<代贖主>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영원히 대속<代贖>하신 대속주<代贖主>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여 예수 <대속죄 제물-代贖罪祭物>과 그리스도 <중보주-仲保主>로 강림하시어 <救贖主> 십자가의 대속죄제를 드림으로 인류의 죄를 영원히 대속<代贖>하셨다.
대속주는 성부 하나님의 사면권을 대신하여 행사하신 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받을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신 분을 말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에 <중보자>가 되신 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죄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죄제의 공로에 근거>하여 성부 하나님께 죄사함 받은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내 죄를 사하여 주셨다.> <예수가 나를 구원해 주셨다.> 등등의 표현은 더욱 잘못된 것이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이었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자신들의 <구원-救援-구속-救贖-죄사함-용서함> 등등을 말할 때에 부르는 주<主-구속주-救贖主>님은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대속주-代贖主>를 말할 때 부르는 <주님-메시야-중보자>는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단독적으로 명칭 될 때에도 동일하게 <우리 구주-그리스도-메시야-중보자>가 되신다. 그러나 <예수>는 단독적으로 명칭 될 때에는 다만 <제물>일 뿐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될 때에 비로소 <우리 구주-예수 그리스도-메시야-중보자>가 된다.
그러나 구속주와 대속주를 구분한다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공로를 다만 조금이라도 소홀히 여기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으로서 대속죄제를 드리셨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들의 영원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② 중보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회복시키신 오직 유일하신 중보주<仲保主>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중보주 하나님으로서의 성자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성자 하나님 명칭을 적용하지 않고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명칭을 적용한다. 그것은 성자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 성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보하셨기 때문이다.
③ 완성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발생한 모든 문제를 회복하고 해결하고 완성하신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손상된 성부 하나님의 공의를 회복하셨고 성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회복하셨으며 중단된 성부 하나님의 섭리를 회복하셨다. 그러나 이때에도 중보주 하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 원리에서 성자 하나님 명칭을 적용하지 않고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명칭을 적용한다. 그것은 성자 하나님께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을 회복하고 해결하고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④ 통치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만왕의 왕으로서 교회를 비롯한 우주 만물을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통치하신다.
⑤ 재림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면 인류 세계에 다시 오시어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성자 하나님의 재림은 초림 때와는 전혀 다르다. 성자 하나님의 초림은 유대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 마굿간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시었으나 재림주로 오실 때에는 만왕의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세와 위엄을 갖추시고 천군 천사의 호위를 받으시며 재림하신다. 재림주의 강림하심은 인류 역사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그리고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장엄함과 거룩함의 재림이 된다.
⑥ 심판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의 재림은 곧 심판주로서의 강림이다. 성자 하나님은 심판주로 강림하시어 현존하는 모든 세계를 심판하시고 종료하신다.
3) 제3위 하나님 <성령 하나님>
(1) 성령 하나님의 존재하심.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의 출생과 동일하다. 영원 전에 성부와 성자와 동시 선재 하신 것이다. 그러나 성령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다음과 같이 정립된다.
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송 되어진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생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송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파송되어 졌다고 할 때에 그로 인하여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 의하여 실제로 보냄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파송에 대한 표현은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존재의 질서를 신학적으로 정립하는 표현이지 성령이 실제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리고 그 어떤 존재로부터도 간섭 당하거나 저촉 받을 수 없는 특별성을 필연적, 절대적으로 소유한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나 성자에 비하여 어떤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성부와 성자에 비하여 어떤 열등함이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언제나 동등한, 그리고 동일한 원리로 존재 하는 것이다.
② 생성의 원리에 의하여 성자는 파송의 역사에 동참하시지만 성령은 그와 같은 역사의 동참이 없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이다.
③ 논리적인 순서에 있어서 생성은 파송보다 앞서 있다.
그러나 생성과 파송 사이에는 전혀 시차 가 없으며 <동시선재>이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종속되어질 수도 없다.
④ 성자의 생성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파송에도 신적 본질 전체의 전달 <교제>이 있다.
따라서 성령은 성부 성자와 모든 것에서 절대적으로 동등하다.
⑤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파송 되어진다는 교리는 <요 15:26; 롬 8:9; 갈 4:6> 등에 기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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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송<派送-spiration>에 대한 신학적 정립.
파송은 삼위일체 중의 제 1위와 제 2위가 신적 실유 안에서 성령의 인격적 실체의 근거가 되어 제 3위로 하여금 분할이나 격리 또는 변화 없이 신적 본질 전체를 소유케 하시는 그들의 영원적이고 필연적인 역사이다. 성령의 파송은 성부나 성자로부터의 나뉨이 아니며 따라서 실제적인 보냄이 아니다. 성령은 하나님<성부, 또는 성자>의 <영>으로서 곧, 하나님 자신<본체, 본질>이시다. 따라서 성령의 파송은 성령의 개별적인 역사하심이 아니라 곧, 하나님 자신의 역사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2) 성령 하나님 명칭의 의의<意義>.
<요 4:24>에서 하나님은 <영-Spirit>이시라고 선포되고 있지만 영이라는 명칭은 보다 특별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에게 적용되어진다. <영>의 히브리어 어원은 <루아흐-ꖙוּר>이고 헬라어 어원은 <프뉴마_πνεύμα>인데 이 두 말은 라틴어 <스피리투스-spiritus>와 같이 <숨을 쉬다>는 뜻을 가진 어근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들은 또한 <호흡-창 2:7; 6:17; 겔 37:5,6]이나 <바람-창 8:1; 왕상 19:11; 요 3:8>으로 역술 될 수 있다. 구약성경은 <영>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어떤 수식어 없이 사용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영>이나 <주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성령>이라는 용어는 단지<시 51:11; 사 6:10,11>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는 이 용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의 명칭으로 선포되어지고 있다. 두드러진 사실은 구약성경이 하나님을 반복하여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시71:22; 89:18; 사 10:20; 41:14; 43:3; 48:17>로 부르고 있는 반면에 신약성경은 드물기는 하지만 대개 <거룩하신>이라는 형용사를 하나님에게 적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적용은 대부분 성령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다.
하나님에게는 아버지와 아들 이외에 더 다른 관계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 이외의 더 무엇은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누가 된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가 성령 하나님이신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3위는 실제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영이시며, 또한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당연하면서도 필연적이며, 그 명칭 이외에 다른 명칭이 불필요한 것이다.
(3) 성령 하나님의 위치와 사역.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성자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모든 것을 실제적, 현재적으로 적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부 하나님의 섭리 역사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진행된다. 성령 하나님의 위치와 사역은 매우 광범위하므로 별도의 장<제10장>을 통하여 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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