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난당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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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가 생텍쥐베리(SaintExupery,1900-1944)의 작품 중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대륙을 횡단하던 여객기가 기관 고장과 연료 부족으로 광활한 사막에 불시착하였다. 모든 승객들은 얼마 안 가서 태양의 열기가 이글거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식량과 음료수가 떨어져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구조를 청하기 위해 몇 사람씩 조를 짜서 사방으로 찾아나서기로 하였다.
몇 마일씩을 여러 방향으로 찾아보았지만 헛수고뿐이었다. 몇 날이 훌쩍 지났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은 좀더 대담한 방법을 취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어느날 그들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행기의 잔해에 불을 질러 조난 지점으로 되돌아올 표적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각기 헤어져 다행히 인가를 발견하면 살고, 발견하지 못하면
사막에서 죽기로 합의를 보았다. 이런 결심을 한 후 필사적으로 삶을 위해 도전을 하였을 때 마침내 부락을 발견하고 일행모두가 살게 되었다.
과거와 연결되어 있는 줄을 과감히 끊어버릴때 도리어 새로운 삶의 지평이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과거의 죄책에서 벗어난다. 그리하여 새로운 삶을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이라는 것을 어제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과거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과거가 오늘의 삶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어렵고 비참했던 일이나 실수했던 일을 늘 마음에 지니고,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런 꼴이 아니었을텐데'하며 후회와 자책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과감하게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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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험한 과거
많은 사람이 모인 어느 잔칫집에서 집주인이 열심히 부엌에서 돕고 있는 한 부인에게 미안한 듯 “뭘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세요.쉬면서 하세요”라고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 부인에게 쏠렸다.“저 분은 언제 어디서나 말없이 돕는 분인 걸요”하고 누가 말했을 때는 모두 그녀를 존경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유달리 우쭐대며 주목받기 원하는 부인이 큭 하고 비웃었다.“그 여자,과거가 있는 여자예요” 모두 눈빛이 변했다.“과거? 무슨 과거?”라는 질문부터,“알게 뭐야 처녀 때 애기를 난 거야?”“사기를 쳤는지 누가 알아” 사설이 자자해졌다.식사 후 한 부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부인에게 물어보았다.
“아주머니에게 과거가 있다고 저 분이 그러는데 정말인가요”“네” “뭔데요?” “과거에 저는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답니다”“그게 과거라는 건가요?”“네,그보다 더 위험하고 잘못된 과거라는 것도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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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린 여덟 남매의 어머니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와 말했다.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벌써 여러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 남자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갔을 때 아이들은 오랜 영양실조로 얼굴이 뼈만 남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슬픔이나 불행 같은 표정은 없었다. 단지 배고픔의 깊은 고통만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집의 어머니에게 쌀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쌀을 두 몫으로 나누더니 절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녀가 돌아 왔을 때 내가 물었다.
"어딜 갔다 오셨습니까 ?"
그녀는 간단히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웃 집에요. 그 집도 배가 고프거든요!"
나는 그녀가 쌀을 나누어 준 것에 대하여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가난한 사람은 실제로 더 많이 나눌 줄 아니까. 하지만 내가 놀란 것은 그녀가 이웃집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개 우리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마더 테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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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푸는 기쁨
어떤 사람이 환한 얼굴을 하고 있어 주위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 얼마 전 중증장애인 단체에 가서 자원봉사를 하고 왔다가 너무 피곤해 그대 로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일어나니 저도 모르는 기쁨이 솟아나지 뭡니까.
참 신기한 일이었습니다.남을 도왔더니 제가 살아났습니다.이 기쁨을 그동 안 잊고 살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윌리엄 제임스의 말.『감사를 아는 사 람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산다.더 중요한 것은 이런 철학을 가지고 사 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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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지혜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옛날에 나이 많은 모든 사람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추장이 있었습니다. 추장의 말에 따르면 노인들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추장의 명령에 반감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장의 힘이 막강했기 때문에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추장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사람이 없는 황량한 가축 방목장에 숨겼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추장은 커다란 뱀 한 마리가 목을 휘감고 있었던 까닭에 숨이 막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추장은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으나 어느 누구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뱀을 다룬 경험이 있는 노인들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았으며 젊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뱀을 떼어놓을 수 있을 지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부모를 가축 방목장에 숨겼던 그 젊은이는 얼른 부모에게로 달려가 휘감은 뱀에게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젊은이의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우선 쥐 한 마리를 잡아서 그 쥐를 추장의 방에 넣어라 네가 쥐를 풀어놓으면 어떻게 될지 알게 될 것이다!"
젊은이는 아버지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자 뱀은 방 안에 들어 온 쥐를 보자마자 쥐를 쫓아가기 위해 추장의 목에서 스르르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힘이 센 젊은이들이 뱀을 손도끼로 휘감아 밖으로 꺼내와 쳐 죽였습니다.
추장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에 이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누구냐고 젊은이에게 물었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의 부모님이 살아계시며 그 방법을 알려주신 분도 바로 늙은 부모님이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 추장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고 노인을 죽이라는 명령을 후회하고, 오히려 공경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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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의 신호
노년기를 아름답게 맞으려면 '화'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화는 영어로 'anger'라고 표기한다. 이것은 위험이라는 단어 'danger'에서 'd'를 뺀 말이다. 화를 내는 것은 곧 위험의 신호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과 상대에게도 고통을 준다.
노년기에 혼자서 불만 불평 비난의 말을 중얼거리는 것은 위험하다. 노년기는 인생이라는 경기의 후반전일 뿐이다. 아직 경기는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90세 때 베드로대성당의 벽화를 그렸다.베르디는 85세때 '아베마리아'를 작곡했다. 시인 괴테는 대작 '파우스트'를 60세에 시작해 83세에 완성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70세부터 빛을 발했다. 노년기를 아름답게 보내기 위한 두 가지 지혜가 있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많이 하라. 정신 연령을 15세쯤 낮추어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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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엔 '늦음'이 없다
27세에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70세가 되도록 일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해리 리버맨. 하던 일을 그만 두고 노인학교에 다니며 소일하던 리버맨은 어느 날 한 젊은이로부터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그림을 그려 보세요"라는 말을 듣고 붓을 잡았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 늦었어"라고 말했지만 그는 "이제 시작이야"라며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가 처음으로 전시회를 가졌을 때 평론가들은 "미국의 샤갈"이라고 극찬했다. 그가 22회째 전시회를 끝냈을 때 그의 나이 1백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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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게 늙으려면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크게 일으킨 찰스 키터링은 80세가 넘어서도 새로운 기계를 발명하는 등 매사에 적극적인 생활을 했다. 83회 생일 때 그의 아들이 말했다. "아버지, 이제는 연구를 중단하고 좀 쉬시지요" 그러자 키터링은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흉하게 늙는다. 나는 항상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생활한다."고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노년을 걱정한다. 건강하고 우아하게 늙고 싶은 것이 한결같은 바람이다. 노년기를 우아하게 보내려면 다음 세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첫째, 영혼의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둘째, 무슨 일에나 함부로 참견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셋째,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남을 헐뜯는 일을 삼가야 한다. 사람을 흉하게 늙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독약이 있다. 그것은 불평, 의심, 절망, 경쟁, 공포다. 반면에 우아하게 늙어 가도록 만드는 다섯 가지 묘약이 있다. 그것은 사랑, 여유, 용서, 아량, 부드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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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열매
어떤 노인이 정원에다 어린 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때 그곳을 지나던 나그네가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장께서는 언제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리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70년쯤 후면 열리겠지요'하고 노인이 대답하자. 나그네는 또 '노인장께서는 그때까지 살아 계실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아니오, 그때까지 살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게 아니라오.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집 과수원에는 많은 과일이 열려 있었소.그것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의 부친께서 나를 위해 심어 놓으신 것이었지, 나도 아버님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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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게임의 법칙
지나간 일에 매여 근심하느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야구계의 원로인 코니 매크에게
이미 진 게임 때문에 고민해본 적이 있느냐고
누군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예, 나도 전에는 종종 그랬어요.
그러나 그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란 걸 알았습니다.
이미 흘러가버린 개울물로는 물방아를 찧을 수 없으니까요.”
정말 그렇습니다.
흘러간 일에 대해 걱정한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전혀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지나간 일은 그저 우리에게
삶의 지혜가 되는 경험을 남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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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의 노인이 되어서
70세가 된 노인도 축구를 할 수가 있습니다.
늙어서 축구한다고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몸에 좋으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를 할 것입니다.
나이 70에도 축구를 배우면 배운만큼 기량이 늡니다.
패스도 슛도 공격도 수비도 다 배우면 배운 만큼 실력이 늡니다.
그러나 나이 70에는 축구를 아무리 열심히해도 선수가 될 수가 없습니다.
노인과 유치원생들과는 축구를 할 수 있지만, 노인과 젊은 사람들과는 축구를 할 수가 없습니다.
노인이 축구를 아무리 잘해도 노인은 노인인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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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밥을 켜 보셨나요?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축하객인 한 사람이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중에 나무를 톱으로 켜본 사람은
손을 들어보십시오"
거의 모두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톱밥을 켜본 사람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톱밥은 이미 켜졌기 때문에 켤 수 없습니다,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로 걱정하는 것은
톱밥을 켜려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과거의 일로
괴로워하거나 용기를 잃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톱밥을 켜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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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가도 없어지는 역사
어느 페르시아의 임금은 신하들에게 사람들이 우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확하게 역사를 기록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수십명의 학자들이 모여 10년 동안 연구해서 그 자료를 수레에 실어 왕 앞 에 가져 갔더니 왕은 책을 쌓아 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이니 좀 더 간편하고 읽기 쉽게 써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연구를 거듭하다가 늙은 학자들은 모두 죽고 제일 어린 학자 한 사람이 모든 역사를 한 권의 책에다 축소해서 왕에게 가져 갔습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왕은 임종이 다가와 그 책을 읽을 수가 없어 억울해 했습니다. 그때 그 학자는 왕에게 역사는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짤막한 그 책의 결론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역사의 결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있다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산다는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흔히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말합니다. 나는 가지만 나의 업적은 영원히 남는다고도 합니다. 또한 에너지의 불멸성에 의거해서 인간 에너지였던 나는 없어지지만 우주 에너지의 어디엔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나는 죽어 가지만 나의 후손 속에, 내 사상 속에, 나의 무덤 속에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나를 기억해 줄 그 사람들도 없어질 것입니다. 나는 있으나마나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기만해서는 안 됩니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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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나가는 생활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에 보면 장망성에서 뛰어 나온 후에 악마가 앞에서 대결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크리스챤은 다시 뒤로 돌아서고 싶어합니다. 갑옷이나 철갑이나 흉배나 창은 앞을 향해서 앞에 있는 적과 싸우라고 있는 것이지 뒤에 있는 적에게 대찬 것이 아닙니다. 뒤는 무방비 상태입니다. 존 번연이 재미있는 묘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앞에 있는데 다시 옛날 생활로 되돌아가면 뒤에는 아무 방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앞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앞의 적을 위해서만 무장해 주었지 뒤로 돌아가기 위해서 무장해 준 것이 아닙니다. 뒤돌아 서면 죽습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앞을 향하여 갈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회의도 생기고 어려움도 생깁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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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 왜곡
도산 안창호가 옥중에서 심문 받을 때 검사와 주고받은 얘기.
“그대는 석방이 된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인가?” “그렇다.나는 밥을 먹을 때도,잠을 잘 때도,그리고 이 몸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할 것이다” “그대는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대한의 독립은 반드시 된다고 믿는다” “왜 그렇게 믿는가?” “대한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독립될 것이요,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독립이 될 것이요,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은 독립될 것이다”
도산은 또한 “나는 진정으로 일본이 망하는 것을 원치 않고 좋은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이웃인 대한을 유린하는 것은 결코 일본의 이익이 아니다.원한 품은 2천만을 억지로 국민 중에 포함시키려는 것보다 우정 있는 2천만을 이웃 국민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득일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진리 탐구와 그것을 따르는 삶이 교육의 궁극적 목표이다.그런데 지금 일본은 왜곡과 허위로 포장한 역사 교과서로 자기네 자녀들을 가르치려 하고 있다.그리고 그것을 애국으로 미화하고 있다.거짓을 일삼고 정당화하려는 저들의 장래가 훤히 들여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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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각본
역사의 각본은 다 쓰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가가 쓴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자나 사회학자가 쓴 것이 아닙니다. 경제학자나 군사·정치 평론가가 쓴 것이 아닙니다. 인간 역사의 비밀한 열쇠는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역사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 개인의 운명도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것입니다. 그 분이 창조했습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그의 허락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습니다. 이 역사는 잠정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국가의 역사, 개인의 역사도 모두 하나님의 자본에 의해서 그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은 역사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모략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의 이성으로 얼마든지 반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계나 노예가 아니라고 하면서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창조자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십니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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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사의 별들
국립 묘지에 가면 무명 용사들의 묘비가 있다. 교회사에도 밀알처럼 묻혀 버린 씨앗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숨겨질 수 없는 뭇 별들도 있다. 그분들은 죽어서 더욱 빛나는 우리 모두의 사표들이다. 주님을 열애하다 평생을 나환자 위해 바치고, 6.25 때도 양들을 지키다 순교하신,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아들 삼았던 사랑의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 일제 귀신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 무명옷 한복만 입고 예수를 민족 속에 화육시킨 한국의 간디 조만식 장로님, 칼빈주의 신앙 진리의 파수꾼 박형룡 목사님, 성경 속에서 금방 뛰어나온 것 같은 P목사님, 흙과 일과 실천과 생활 속에 예수를 사는 농군왕 K 장로님, 말년에는 전도 할머니로 알려졌던 이화의 상징 김활란 박사님, 애국 삼일 여성의 상징 박현숙 장로님, 교부 같은 영원한 청교도 H목사ㅣㅁ, 맨발의 거지 성자 이현필 선생, 상록수의 테레사 최용신 여사, 부흥사의 상징 이성봉 목사님, 사회 정의와 양심의 상징 김재준 목사님... 하나씩 별들이 역사의 밤에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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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의 말년 (과도한 애착,고집)
축음기 영사기 전구등 무려 1천3백건이 넘는 발명품을 내놓은 에디슨(1847~1931)도 생애의 말년에는 특유의 외고집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몸은 머리를 여기 저기 옮겨주는데만 필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70세가 넘어서도 잠자는 시간이 하루 4시간에서 5시간으로 늘었을 뿐 여전히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자신의 축음기 회사에 과도한 애착을 느낀 나머지 라디오방송이나 전직식 레코드 플레이어의 시장성을 무시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다. 에디슨은 "사람들은 라디오국이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에 곧 싫증내고 우리 회사의 축음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할 것"이라고 우겼다.
세 아들이 아버지를 설득하다 끝내 고집을 꺽지 않자 몰래 전기식 페코드 플레이어 제조에 나셨다가 에디슨의 격분을 사기도 했다. 70대 후반이 돼서야 에디슨은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축음기 생산을 그만두고 라디오 제조에 나셨으나 2년 후 2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공장문을 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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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가 되자 에디슨은 이번에는 고무 제조에 호기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미국내에 자생하는 식물들에서 고무성분을 추출하는 일이었다. 에디슨의 부인은 회고하기를 "그는 고무 생각만 하고 고무 이야기만 하고 고무 꿈을 꾸었다"고 했으며 "미국은 5년내에 고무생산국이 된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고무는 천연 고무에 비해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무엇보다도 질이 형편없었다. 무엇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 없이 노년을 보내던 에디슨은 결국 1931년 10월 18일 향년 84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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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허물과 죄
플로리다 주에 가서 디즈니월드를 방문한 사람이라면 어린이에게 꿈을 준 월트 디즈니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에 대해 신화적이고 아름다운 자서전들이 많이 쓰 여졌으나, 최근에 마크 엘리엇이라는 사람이 그에 관한 새로운 전기를 썼습니다. 그 내용은
"평생을 FBI의 비밀요원으로 지냈고, 유대인에 대한 각별한 편견을 갖고 반유대주의 운동
을 벌였으며, 철저한 알코올 중독자로서 밤을 지새우면서 괴로워했던 사람"이라는 것이었습
니다. 그는 이런 다른 얼굴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선
을 행하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말씀하며 "다 죄 아래 있다"고 선언합니
다. 하나님의 선언과 진단, 이 창조주와 심판자의 진단 앞에서 누가 예외라고 말할 수 있겠
습니까?
"자신의 죄악성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 내 안에 있는
연약성과 아직도 존재하는 부패성을 알기에 끊임없이 성령의 지배 앞에 자신을 복종시키기
위한 훈련 속에 살아가는 사람." 제가 만약 참으로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
람일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의인, 위인, 성자의 세 단어를 믿지
않는다. 이 땅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사람들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죄인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
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몇 달 전 일본의 한 월간지가 42년 전에 있었던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의 과거사를 공개
하여 그를 곤경에 빠트린 적이 있었다. 그 월간지는 모리 총리가 20세 때 윤락가에서 매춘
단속에 검거됐었다고 폭로했던 것이다. 당시 도쿄 사창가에 대한 경찰의 일제 단속으로 약
20명의 유락업자와 고객들이 검거됐는데 와세다대학 1년 생이던 모리 요시로도 들어 있었
고 얼마 후 그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는 것이다. 그 월간지는 당시 단속에 관여했던 전직
경찰 간부의 증언을 소개하고 모리 총리가 매춘방지법을 위반한 범죄경력을 지닌 전과자라
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모리 총리는 동 월간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또 월간지 측
은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경찰 조회를 주장했다. 그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42년 전의 전과'라는 표현을 보고 그런 식으로 과거를 뒤져낸다고 할 때 과
거의 허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이며 시인 윤동주의 표현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도 없게 살아온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지난
날의 허물들을 지워버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든 전과를 그분의 컴퓨터에서
지울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에스겔1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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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흐름을 변화시킨 생수의 강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는 실제로 세계 도처의 수많은 인간들 속에 살고 계신다. 그는 인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지도자이다. 비관적 사고가 될 수 이는 모든 이유를 가지셨으면서도 낙천적인 사고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과중한 세금과 정치적 자유가 없는 억압당하는 무리에 속한 자이셨다.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세상적인 권세와 영향력 있는 친구들도 없으셨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비천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생 동안 다른 사람 들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종말에는 하나님도 그를 버리신 것처럼 생각되었 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해 버릴 만한 모든 이유를 가지고 계셨으면서도 역사의 흐름을 변화시키신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7: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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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 가는 징후
늙음이 자랑이 되고 대접을 받는다면 사람들은
그렇게 열심히 얼굴에 면도질를 하지 않을 것이다
옛날 드라마나 사극을 보라!
신하란 신하는 다 턱부리 수염에서 온같 털을 숭숭이
기르고 나타나는 것을 다 연륜과 덕망
그리고 대접이 있기에 늙음을 숨기기는 고사하고
오히러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어떤가?
늙어가는 것은 육체 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도 청춘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나이가 새파래도 애늙이가 되어서
다른 사람 밥맛을 떨어트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나이와 상관 없이 늙는 증거로 본다
1) 서운해지고 외로움이 많아지면 늙어 가는 증거다
2) 새로운 정보나 꺼리가 없서서 대화가 빈곤해 지는 것
3) 말을 할때 과거를 자꾸 말하고 그때가 좋았다는 사람은
나이와 상관없이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4) 자신에게 잘해주면 그가 누구든지 좋게만 보인다
(헤롯의 선물도 사양하지 않는다)
5) 자다가 잠을 깨면 다시 잠이오지 않고 여러가지 상념에 잠을 설친다
6) 주변 사람이나 자식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아 지고 인정을 받으면
되게 흥분되고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생각된다
7) 자기의 말이 절대로 옳은 것같아서 반대하는 사람이나 안듣는 사람은
원수처럼 생각이 된다
8) 좋은 일이나 나뿐일도 자기에게 물어 보지 않으면 아예 협조하지 않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간다고 하신 것인가 보다
(마18: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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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와 질병
일반적인 통설에 의하면 정년 퇴직한 후의 중년 남성들의 평균 수명은 고작 30개월에 불과하다. 또한 일터를 떠난 직후의 사람들에게는 육체적인 질병이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는 사례보고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순다섯이라는 나이에 도달하여 별안간 나타나는 생리적인 과정의 결과가 아니다. 대부분의 의사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견해에 의하면,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이 모든 삶의 중심부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스스로 의식한 결과라는 것이다.
골프를 치고 정원을 가꾸는 일 정도로는 도저히 자신의 소속 의식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제는 더 이상 쓸모 없는 존재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부터 자신이 늙어 버렸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육체적인 질병의 대부분은 이러한 의식과 더불어 발생한다. 스스로가 자신을 늙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늙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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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갈수 없다
미국 작가 토머스 월프의 「다시는 갈 수 없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도시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납니다. 젊은이는 도시에서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합니다. 그리고 다시 찾은 고향. 그러나 너무나 변한 고향은 예전의 「품안」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실망한 채 고향을 떠나면서 중얼거립니다.
『뒤로 가는 길은 사라졌다. 길이 있다면 앞으로 가는 길 뿐이다』
그렇습니다. 과거에 매여 미래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가.
우리에겐 앞으로 가는 길 뿐입니다.
오늘도 과거는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하여 진취적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
(빌3: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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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상처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본문: 로마서 8장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로마서 8장 11절은 두 번이나 성령을 '살리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미래의 부활을 주시는 성령님, 즉 죽은 성도의 몸을 살리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타당한 해석은 현재 살아있는 성도의 영혼과 육신을 더욱 활력 있게 만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살린다'라는 단어가 꼭 죽은 몸의 소생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에서 '살린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자녀를 낳게 될 수 있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성경에서 '살린다'라는 단어는 약하고 병든 몸에 활력이 넘치고, 원기가 회복되고,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살린다라는 말은 1) 육체와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2) 강하게 하고 3) 활력이 넘치게 한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는 뜻입니다. 즉 성령님은 우리의 육신을 정화시키고, 강하게 하고, 활력이 넘치게 합니다. 육신의 삶을 생기 있게 만드는 진정한 원천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삶의 힘의 원천은 신경의 힘이나 근육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음식, 공기, 세포조직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약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이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는 있지만 육신적 삶에 생기를 주는 진정한 원천은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삶에 생기는 주는 진정한 원천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초자연적 생기입니다. 육신적 삶의 원천이 성령이 사실을 알려주는 성경의 예가 있습니다.
바로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의 예가 그것입니다. 그의 힘은 그의 근육과 뼈 혹은 몸무게와 덩치에서 나온 힘이 아니었습니다. 삼손의 힘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힘이었습니다.
성령이 삼손에게 임했을 때, 그는 놀라운 힘을 얻고, 수많은 적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삼손을 떠났을 때, 그는 어린아이처럼 약해졌고 결국 적에 의해 눈멀고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없는 육신은 불씨만 남기고 꺼져버린 벽난로와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옆에 가도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씨만 남은 꺼져버린 벽난로에 휘발유를 뿌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불이 타올라 얼마나 실내가 따뜻해집니까? 우리의 육체가 꺼져버린 잿더미 같을지라도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진리는 단순한 진리이지만 아주 놀라운 비밀을 간직한 진리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내적 치유'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 내적 치유는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현대 심리학의 연구에 논리적인 근거를 두고, 신앙상담에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적 치유학에서는 과거의 상처가 사람들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사람들을 우울한 사람, 자신감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막히기 때문에 그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우울한 사람,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과 상담할 때 과거에 상처받았던 일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현재의 모습과 연관시키며, 심지어는 모태에서 받은 상처까지 얘기하며 현재를 진단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담을 들은 사람은 마치 어떤 새로운 진리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아! 내가 그래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구나!"
그런 깨달음과 함께 자기가 원래부터 나쁜 피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고 위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내적 치유 상담의 긍정적인 효과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성격이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현재의 고쳐야 할 성격 문제를 실제적으로 고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잘못된 성격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하면서 과거의 상처로 인한 영향력을 귀신으로 역사로 생각하고 축사(逐邪)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열심히 내적 치유 기도를 했는데 사실상 성격이 달라지지 않고 원래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현재를 치유해야 하는데 과거를 치유한다고 하니 과연 옳은 방향일까요?
어떤 성격에 대해 과거의 원인을 찾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타당할지 몰라도 그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사단의 양심'을 지나치게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항상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과거의 잘못과 상처를 떠올리게 되고, 그런 식으로 과거의 상처를 지나치게 떠올리면 오히려 해결은 더 어렵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행동, 증상을 과거의 상처나 기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이론, 즉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정신결정론>이 이론적으로 맞는 이론일지는 몰라도
그 이론을 너무 좋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이론을 따르기에는 우리의 현재의 삶과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의 삶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 없는 사람은 과거가 현재를 붙잡고 압박할 수 있지만 성령이 내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상처는 흩어지는 미망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라는 발목에 붙잡혀서 찬란한 미래, 보증된 미래의 영상이 희미해집니까? 그러므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급선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충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살리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 나의 삶에 살리는 영이신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과거의 상처가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에 내 외모 때문에 정말 위축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다른 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외모는 부족해도 즐겁게 살아야지요. 웃고 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던데요." 성령 충만한 삶은 현재의 삶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상처에 집중하며 살지 마십시오. 성령 충만한 은혜로 현재를 활기차게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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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반성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신 5:6).
한 배에 열 명의 사람들이 탔는데 그들은 각각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한참 항해를 하던 중에 큰 일이 발생했다. 배 밑바닥에 구멍이 났는지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고 열 명중에 세 사람만 없으면 그런 대로 무게를 지탱해 육지까지 갈 수가 있었다. 과연 어떤 나라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진하여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서로 눈치만을 보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요?
갑자기 영국 사람이 일어나서 "대영제국의 명예와 신사도를 발휘하여 내가 먼저 뛰어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다음으로 미국 사람이 "저도 카우보이 정신을 지켜 여러분들을 위해 희생하겠습니다"라며 뛰어내렸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만 남았는데, 그때 한국 사람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하더니 발을 들어 옆에 앉아 있는 일본 사람을 걷어차 물 속으로 빠뜨렸다. 참으로 재미있지만 의미 있는 우스갯소리이다.
한국이 일제통치 하에 있으면서 받았던 말할 수 없는 민족의 서러움 때문인지 아직도 한일 관계를 보면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잘못을 탓하기 이전에 먼저 어떻게 해서 나라를 잃게 되었는지 깊은 역사적 반성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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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의 순수로 돌아갑시다
올 한해는 무척 가뭄이 심했습니다. 몇 십년 만에 맞는 가뭄이라고 합니다. 농촌지역에서 생활하는 저로서는 가뭄이 더욱 처절하게 느껴진 해였습니다. 그 가뭄의 한복판이던 5월쯤 태백지역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 방문지인 태백에서 본 도심은 여느 도시와 같은 화려함보다는 탄광촌이 있었던 연고인지 잿빛 거리였고 조용한 분위기였습니다.이곳을 지나다 의외로 흥미를 끈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신비한 연못,황지못이 바로 그곳입니다. 가로공원과 같은 300여평의 공간에 수원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온갖 대지가 타들어가는 가뭄의 시절에 공원 한쪽에서 수정처럼 흘러나오는 생수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습니다.
특히 공원 중앙에는 ‘낙동강 발원지,예서부터 3000리 낙동강’이라는 비석이 서 있었습니다.옥구슬처럼 흘러내리는 맑고 투명한 생명수는 신발 벗고 바지 걷어붙이고 당장 뛰어들어 시원하게 경험하고 싶었습니다.그 투명하고 순수한 생수는 굽이굽이 사연을 안고 3000리 길을 흘러갑니다.그러나 시작은 그리도 순수한 맑은 물,뱃속까지 시원함을 선사할 그 순수의 결정체가 3000리를 흘러가는 동안 인간의 손길로 인해 오염되고 산업의 공해로 타락하여 낙동강의 하구언에선 식수로서의 가치가 의심되고 적조현상으로 어민에게 엄청난 손실을 주었습니다.
황지못을 보면서 문득 초대교회를 생각해봅니다. 처음의 교회는 원색적인 복음 앞에 성실한,순수한 교회였습니다. 사도들에게 맡겨졌고 믿음의 선진들에 의해 인도되었던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들은 돈은 없었지만 능력이 있었습니다. 건물은 볼품없었지만 주님께 온전히 헌신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회적 지위는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삶의 자리는 고통이었지만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순수했고 주님께로의 헌신, 사람에게 희생하는 역사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2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회는 제도의 격식으로 본질이 무너진, 교회가 교회로서의 능력을 상실한 것 같음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싶습니다.이 악한 세대의 도도한 물결에 마치 생명 없는 통나무처럼 현대교회가 떠밀려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은 지나친 과장일까요?
이 난세에 우리가 사랑하고 추구해야 될 이상이 있다면 바로 회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의 거룩한 영성으로,찌들린 현실세계에 타협 대신 순수한 영향력으로 주님의 교회 위에 주의 기름 부으심이 거룩하게 임하기를 기대합니다.믿건대, 하나님의 방법은 그분의 비밀인 교회에 있습니다.그분은 이 교회를 위해 죽으셨고,이 교회를 여전히 주권적으로 붙들고 계시며,장차 이 땅을 결산함의 방법 또한 교회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기도합니다. 소원하기는 조국의 교회여! 일어나라,그리고 자기에게 맡겨진 영적 ‘섹터’를 믿음으로 책임지고 그 나라의 의를 구하며 회복과 성취를 이루기 위하여 분연히 필요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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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과거 일
라테란 성당 문으로 보물을 가득 담은 자루들이 옮겨질 때 교황 이노센트 4세와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먼저 교황이 웃으면서 말했다.
"여보게나, 이젠 교회가 '금과 은 없어도'란 말을 하는 것도 다 과거 일이야."
그러자 아퀴나스가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전하, 그리고 교회가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수 있는 때도 다 지났습니다."
그렇다. 교회가 안정과 편안함과 피흘림 없는 봉사의 영역 안에만 머물러 있을 때 교회는 메마르고 황폐한 땅을 개척할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반면 교회가 헌신적이 되면 교회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게 된다. 역사상 헌신적인 일들은 지금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자신을 송두리째 바치고 피를 흘리면서까지 타인을 위해 봉사하던 사람들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산이다.(행3:6, 렘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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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박사의 역사교육
'역사의 연구’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
그는 런던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늘 이렇게 강조했다.“역사의 주인이 돼라.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돼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겠는가? 토인비 박사의 대답은 이러했다.
인류 역사를 연구해보면 시대마다 역사를 빛낸 인물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의 삶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려서 희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 시대의 역사를 빛내고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희생해서 제물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가 맺힌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토인비는 역사적으로 적용한 셈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 시대의 주인공이 되어 역사를 창조해나가기 원한다면 우리에게도 우리 자신을 순교의 제물로 드리겠다는 희생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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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옛 모습입니까
신약시대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란 이름은 ‘크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베냐민 지파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기원전 1년에 태어났습니다. 다소에서 대학을 나오고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을 배워 율법에 능통한 사람이 됐습니다. 사울은 로마의 시민권도 날 때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서 젊은 나이에 중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초대교회 때 세운 일곱 집사 중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유대인들에게 돌을 맞았을 때 증인들이 옷을 벗어 청년 사울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붙들어오는데 앞장선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을 향해 달렸습니다.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사울을 비췄습니다.“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주여 뉘시오니까?”“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후 사울의 삶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예수쟁이 사냥꾼’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됐습니다.
신약성경 고린도후서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누구든지 주님의 빛이 임하면 새사람이 됩니다.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에배소서 4장에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의로운 진리를 따라 사는 거룩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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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전보
풍랑이는 바다에 배 한 척이 파선했습니다.
모두 물에 잠기는 판에 한 사나이만이 극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 사람은 구조되자 제일 먼저 자기의 집으로 전보를 쳤습니다.
"나는 살았다!"
그 후 사나이는 전보다 더욱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일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시 좌절과 절망으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서랍에서 자신이 보냈던 전보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살았다!"
그때 죽음의 검은 그림자가 너울거리던 난파선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모든 어려움은 난파선에서의 두려움과 절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음을 사나이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나이는 다시 새 힘을 얻었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벽에다 붙여둔 전보를 읽었습니다.
오늘 겪는 이 어려운 일보다 더 힘겨웠던 과거의 일은
없었는지, 그때 어떻게 이겨냈는지 떠올려보고 힘을 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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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심판
아프리카를 개척한 영국의 대표적인 탐험가는 세실 로드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다. 로드는 아프리카 원주민 수십만 명을 학살하고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벌어들임으로써 '애국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리빙스턴은 노예제도와 영국의 침략정책을 강력히 반대해 '반역자'라는 말을 들었다. 오늘날 로드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빙스턴은 영국 국립묘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돼 국내 관광객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역사가 두 사람을 심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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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뤄 가는 3원리(原理)
찰스 베어드라는 역사학자는 역사의 연구결과 세 가지 결론을 얻었다. 즉 개인이나 권력자나 탐욕을 갖게 되면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심판의 맷돌은 천천히 도는 것 같아도 "미세한 불의"까지 반드시 갈아내고 모든 악을 선으로부터 갈아낸다는 사실이다. 또 한 벌이 꽃에서 꿀을 강탈해 가지만 그 '강탈' 때문에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역사나 인류도 '벌 같은 존재'에 의해 '강탈'당할 때가 있지만 오히려 역사는 번영하고 인류는 문명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의 심판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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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를 돌아보지 말라
눅 9:61-62
인생을 살아갈 때, 평생동안 잘 사는 길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실패하지 않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믿음이 잘 믿는 믿음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믿고 있는지를, 잘못 믿고 있는지를 구별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반석과 같이 변하지 않는 견고함입니다. 변하지 않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요, 변하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안에 쓰여지는 모든 기구들에 반드시 금을 입히도록 하셨습니다. 법궤도 금을 입혀야 합니다. 법궤 위의 스랍도, 향단도, 떡상도, 촛대도 모두 금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성전 안의 금이 뜻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본받아 금과 같이 변하지 않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변하지 않는 금 같은 신앙을 가지려면 특별히 세가지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첫째, 기도생활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뒤를 돌아보면 안됩니다. 기도는 내 영혼에 성령의 새로운 은혜로 새 옷을 갈아 입혀주고 새 힘을 가져다주는 축복입니다. 다니엘은 어려울 때에 기도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의 종으로 붙들려 갈 때도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공한 뒤에도 기도합니다. 가난할 때는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돈벌고 성공하면 기도에 소홀해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난할 때와는 달리 축복을 받으면 내 몸 하나를
넘어 가정과 자녀, 이웃을 생각해야 하고 기도에 더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여유가 생기고 형통해집니다.
둘째, 믿음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세상을 돌아보면 안됩니다. 옛날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충성된 교인일지라도 시험에 들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분야에서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은 늘 자신을 겸손하게 다스립니다. 또한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끝까지 남습니다.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고 꾸준히 달려가는 사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며 기도함으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교회봉사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한번 주어진 일은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몇 년 전 영국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에 왔을 때, 친히 식수(植樹)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퀸 트리(Queen Tree)'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작년에 말라죽었습니다. 꾸준히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0년을 바라보고 심어서 길렀으면 그 나무는 국보급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보다 그것을 계속 꾸준하게 가꾸고 관리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유명한 골프 선수인 타이거 우즈도 목표를 멀리 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멀리 바라보아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변함없이 내 자리를 지키는 사람을 주님께서 들어 쓰십니다.
일본에 갔을 때 아주 유명한 한 식당을 갔습니다. 그 식당은 게요리 하나만으로 4대에 걸쳐 100년간 운영해오고 있었습니다. 대대로 걸쳐 맛과 친절을 관리하고 운영하여 성공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나중이 창대하도록 멀리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터를 가지고 든든하게 관리하여 하늘의 복과 땅의 복을 다 누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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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인
세상이 분요할때마다 묻게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은 누구의 세상인가?’하는 것입니다. 어떤이는 이 세상이 사람의 세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인본주의의 생각은 세상의 모든 가치를 상대화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어떤이는 이 세상을 사단의 세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기독교적 비관주의는 우리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도피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생각을 주님은 비웃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그분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잠시 세움을 받은 소위 지도자들이 자꾸 반 그리스도적이고, 반 신률적인 정책으로 세상의 참된 주인 되신이의 뜻을 거스리고, 주인의 법의 속박을 벗어 나고자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뿐 아니라, 세상 도처에 세움받은 모든 지도자들의 행태이기도 합니다.
어느날 역사의 한 기점에서 역사의 주인은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세상이라고 선언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 아들로 세상의 주인 행세하던 사단의 계략을 꺾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 임금과 철학이 상상할 수 없던 죄악을 이기신 그분의 지혜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로 역사의 주인되게 하시고 그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입맞추라고. 그를 사랑하라고.
* 기도: 역사의 주인되신 주님이시여,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희망을 잃고 방황할때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주옵소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님,우리는 당신만이 역사의 유일한 희망임을 믿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로 당신만을 경배하게 하시고 당신만을 따르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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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변화시키는 힘
이 세상에서 사람의 마음처럼 신비한 것은 없습니다. 마음은 한없이 넓어질 수도 있고, 한없이 좁아질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잘 관리하면 육신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습니다. 또한 마음을 잘 관리하면 그 가운데 인생을 치료하고, 가정을 치료하고, 나라를 치료하는 길이 있습니다. 사실상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보이고 행복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는 많은 문제가 산적해있습니다. 결국 그 문제는 우리 마음의 문제일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너무 마음이 메말라있고 병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감사와 격려보다는 불평과 비난이 점차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일이 잘 풀리면 마음이 금방 높아집니다. 그러다가 일이 안 되면 마음이 금방 무너집니다. 승자의 겸허한 아량과 패자의 깨끗한 승복을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사회생활에서 손끝의 노력으로 자기 존재를 알리기보다 혀끝의 노력으로 자기 존재를 알리려는 분들도 점차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좋은 나라, 좋은 사회가 어찌 이루어지겠습니까?
로마가 무너진 원인은 마음과 인격이 먼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토인비가 말했습니다. 아무리 모든 분야가 발전해도 마음 분야와 인격 분야가 무너지면 그 사회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지키는 일은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일입니다. 흔히 말하는 초 일류국가는 마음의 정비에서 시작되고, 믿는 사람들이 말하는 영적인 장자국가도 마음의 정비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편협한 마음으로는 결코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남을 쉽게 비판하고 남을 욕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중에서 제대로 행복하게 사는 분은 거의 찾기 힘듭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정의로운 마음과 시기하는 마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신을 높여 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마음이 우리의 삶의 질을 결정하고 마음의 우리의 행복을 결정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많이 개혁했고 많은 것을 정비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정비는 바로 마음의 정비일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우리가 매일 수염을 깎듯이 우리 마음을 다듬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정비는 필생 과제라는 말입니다. 마음의 정비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공보다 성공 관리가 어렵고, 성공 관리보다 마음 관리가 어렵습니다. 어려운 만큼 마음 관리를 잘 하면 우리가 속한 사회는 진정한 개혁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마음의 변화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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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빌립보서 3장 1 절- 16 절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냥꾼이 나뭇가지에 있는 새를 쏘아 총알에 맞은 새가 땅에 떨어졌 습니다. 그런데 새는 죽은 것이 아니라 상처만 조금 났을 뿐 살았습니다. 사냥꾼이 새를 들어올 렸더니 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만일 저를 새장에 가두어 두시면 아저씨의 비밀을 다 이야기할 거예요. 아저씨가 비밀로 하고 싶은 일들을 아저씨 친구들이 다 알게 되면 큰 일이 아 니에요? 그 대신 저를 놓아주시면 아저씨가 성공할 수 있는 지혜 세 가지를 가르쳐 드릴께요. 사냥꾼은 그 말이 신기해서 성공의 비결을 알려줄 것을 조건으로 하여 놓아주기로 약속했습니 다. 그러자 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첫째, 남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지 마세요. 한번 살펴 보고 우선 시험해보세요. 둘째, 능력 이상의 일을 하려 하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실패할 뿐 아 니라 다른 사람에게 놀림감이 될 수 있으니까요. 셋째, 실수를 했을 때 그걸 가지고 너무 슬퍼 하고 괴로워하지 마세요. 내일이 있으니까요. 이 성공의 비결을 들은 사냥꾼은 약속한 그대로 새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때 새는 날개에 힘을 주어 날아올라 맞은편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사냥꾼에게 말 했습니다. 아저씨는 바보예요. 저를 놓아주는 실수를 저질렀어요. 저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하나 를 가지고 있거든요. 아마 이것만 있으면 아저씨는 억만 장자가 되고도 남을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사냥꾼은 새가 앉아 있는 나무로 달려가서 그 가지를 향해 기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는 처음에는 제일 낮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었는데 사냥꾼이 가까이 오면 그 다음 윗가지, 그 다음 윗가지로 올라갔습니다. 사냥꾼은 새가 올라가면 같이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나무 끝까지 거의 올라가서 새를 잡으려고 팔을 벌리다가 가지가 부러져서 나무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습니 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새는 사냥꾼을 향해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바보예요. 제가 세 가지 지혜 를 가르쳐 주었는데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 그르치고 말았어요.
첫째, 남이 하는 말을 그대 로 다 믿지 말라고 했었어요. 제게 다이아몬드가 하나 있다고 했지요? 그 말을 왜 그대로 믿지 요?둘째, 능력 이상의 일을 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왜 잡을 수 없는 저를 잡으려고 나무 위를 기어오르세요? 셋째, 돌이킬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생각지도 말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저를 놓아준 다음에 다시 저를 잡아 가두려고 했지요? 참으로 지혜로운 새와 바보 같은 사냥꾼 의 이야기입니다. 새가 사냥꾼에게 준 이 지혜들을 우리도 명심해야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공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 던 비결이 무엇인가 보여줍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나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 12∼14절). 바울은 인생 일생을 경주자가 경주하는 일에 비유해서 생각했습니다. 승리하는 경주 를 하려면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하여 온 몸을 기울여 달려가야 합니다.
몸은 미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눈은 그 목표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 고 했습니다. 뒤를 돌아볼 때 우리는 우리가 잘못 내린 결정, 심하게 한 말, 우리가 범한 죄, 실수 같은 것 들을 떠올립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죄의식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는 과거 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거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가슴에 슬픔을 안겨 주고, 우리의 나아가는 앞길에 어려움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과거에서 완 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성공한 것이 든 실패한 것이든,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과거에는 지워 버리고 싶지 않은 행복한 시간들도 많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인에게는 과거가 있고 또 모든 죄인에게는 미래가 있다 는 의미 있는 말이 있습니다. 뒤를 돌아볼 때 우리는 많은 것을 후회하 게 됩니다. 심한 병에 걸린 사람은 왜 내가 좀 더 일찍 의사한테 가보지 않았을까? 고 후회합니 다. 상대방이 멀리 떠나고 말았을 때 왜 내가 같이 있을 때 그이에게 좀 더 신경을 쓰지 못했을 까? 왜 필요하지도 않은 그런 심한 말을 해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까? 왜 내가 그런 짓을 했을까? 이와 같은 자책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부부가 함께 살다가 사별할 때는 특히 그렇습니다. 남은 한 사람은 뒤를 돌아보며 후회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후회하는 일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후회는 우리에게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잘못과 실수를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 마음속에 동요가 생깁니다. 과거에 대한 생각은 현재의 모든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기 쉽습니다. 자책과 수치감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게 하는 후회는 할 수도 있습니다. 후회는 우리로 하여금 잘못을 고백하고 회개하게 합니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고백이란 것은 우리 영혼에는 이롭지만 평판에는 해로운 것 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고 백합니다. 또 하나님께만 해야 할 고백이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고백을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그 상대나 혹은 믿을 수 있는 상담자에게 고백할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고백에는 보상이 따라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이 돈을 손해 보게 했으면 여러 번에 걸쳐서라도 그것을 갚아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변상이 불가능할 때 도 있을 것입니다. 가령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을 해서 인격에 손해를 준 경우 이를 지워 버리기 어렵고 다시 되풀이한다는 것도 도움이 되기보다는 아픔만 더해 줄 따름입니다. 기회가 왔을 때 해주지 못한 것은 다시 그 기회가 오지 않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후회는 스스로 해야 하고후회하는 것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그때에 마음의 평화가 임하게 됩 니다 지나간 과거를 뉘우칠 때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완전을 향해 애원합니다.
우리가 뉘우치 는 그 내용으로부터 돌아서고 싶어합니다. 단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 은 흡수될 수가 없다. 뉘우치면서 동시에 죄를 지으려는 생각은 가질 수 없고 허락되지 않는 모 순이다.참된 후회는 좋은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고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은 우리가 잘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표시입니다.
참된 후회는 우 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 악의 충동을 죽여 버립니다. 과거의 잘못을 후회하는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닙니다. 후회할 수 있다는 것은 소망이 있는 일입니다. 윌리암 L. 설리반이란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는 부러진 날개로도 가장 빨리 집으로 날 아갈 수 있는 위대한 비결이 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한 구금 상태에 있는 것이지만 회개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자유의 가능성이 있고, 무엇보다도 새 인생을 시작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회개 다음에 오는 용서입니다. 용서에는 삼면성이 있 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로부터의 용서가 있고, 그 다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용서가 있습니 다.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용서가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 과 용서 는 동의 어입니다. 헬라어에는 사랑이란 말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에로스와 필리오 그리고 아가페입니 다. 에로스는 육체적인 면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필리오는 인간관계의 사랑, 존경과 우애를 뜻 합니다. 그런데 아가페는 자격이 없는 곳에 베푸는 사랑 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볼 때 아가페 는 용서 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우리의 죄를 아예 지워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습니다.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용서 는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용서는 잊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수없이 많 은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 잊어버리자 는 것만 가지고는 용서가 될 수 없습니다.
용서는 무관심 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어떤 행동을 하든지 상관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악에 대한 관용이 아닙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관대히 넘기며 세상에 완벽한 사람 이 어디 있나? 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대부분의 경우 용서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받을 자 격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아마 죽는 날까지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용서는 어떤 느낌도 아닙니다. 그러면 용서가 무엇입니까?
용서는 상대방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우리가 당한 아픔보다 더 큰 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상대방이 사람이 다시는 그런 일을 다시 하지 않을 것으로 믿습니다. 용서는 단서가 붙지 않습니다. 내일 용서한다, 이러한 조건이 구비되면 용서 한다 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무조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 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시 130:3∼4). 그렇습니다. 참된 용서는 단 한 곳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는 사람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역대하 7장 1 4절에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치겠다 했습니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살펴봅시다. 첫째로, 스스로 겸비해야 합니다. 오만은 용서의 길을 막습니다. 겸손에는 자신의 있는 그대 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겸손입니 다. 둘째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용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을 같이 얘기하고 싶다는 뜻의 전달입니다. 우리 자신도 스 스로를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얼굴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자연히 하나님을 피하여 숨으려 합니다. 그리고 사악한 길에서 떠날 때 하 나님께서 우리의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상처를 낫게 해주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 약속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보다 도 중요한 것은 용서를 받아 주는 것입니다. 어느 부부가 어쩌다가 언쟁이 벌이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흥분해 서 아내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말까지 하게 되어 아내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게 되었습니다. 흥분이 가라앉은 후 남편이 가만히 생각해보니 너무 큰 잘못을 저지른 사실을 알아채고 아내에 게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여보,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당신한테 너무 심한 말을 했어요. 내 정신이 아니었던가 봐요. 내가 정말 못할 일을 당신께 저질렀어요. 여보,내가 정말 잘못했어요. 날 용서해줘요. 진심이오.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소. 죄송하오. 그 남편의 사과를 듣고 있던 아 내가 조용히 진실되게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때는 내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몰라요. 그냥 죽 고 싶을 정도였어요.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잘못을 알고 용서를 구하니 제가 당신을 용서해요. 믿어도 돼요. 정말이에요. 그 일이 있은 후 잘못을 저질렀던 남편은 며칠 동안 그 아내에게 여러 가지 사과의 뜻을 보였 습니다. 밖에서 들어올 땐 전에 하지 않던 버릇인데, 조그만 선물을 사 오고, 범사에 지나친 호 의를 베풀며,여느 때보다 더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마침내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이렇게 안하셔도 되어요. 제가 정말 용서했다니까요. 용서를 받았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지 못해 그럽니다. 추억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지만 슬픈 추억도 있습니다. 그만 기억하고 그만 생각해야 할 일 들이 있습니다.
저는 상담을 원해서 찾아오는 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해서 나중에 후회하실 말씀은 아예 제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논의할 필요가 없는 주제들도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 께로부터 용서받았는데 다시 더듬어 찾아내어 괴로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일은 없습니까? 하나님 편에서는 지워 버리고 잊은 지 오래인데, 우리편에서 다시 찾아내어 상심하고 좌절하지 마십시 다. 실수한 것 가지고 너무 슬퍼하고 괴로워 마세요. 내일이 있으니까요.
사도 바울의 말씀에는 참으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나는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 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 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실패한 과거는 잊어야 합니다. 좌절할까 두렵습니다.
성공 한 과거도 잊어야 합니다. 교만해질까 두렵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온전히 잊어버리고 앞을 향 해 나아가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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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엣 것은 잊고 앞을 향해
빌립보서 3장 7 절- 16 절
문자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1989년 그리고 1980년대를 보내는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면 서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생각하는 가 운데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봉독하신 말씀 중에 빌립 보서 3편 13-14절을 다시 읽습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 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우리가 성공적이고 승리적인 생활을 하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전진하는 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은 지난날의 실수, 지난날의 잘못, 지난날의 죄 악, 지난날의 실패를 잊지 못하고 거기에 붙들려 있는데 있습니다. 어떤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날 폭풍우가 심해서 과수원 한 복판에 수천 알이 달려 있던 사과나무 하나가 그만 뿌리째 뽑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과 수원 주인의 친구가 왔다가 그것을 보고 주인을 향해서 아니, 이렇게 많은 사과가 달려 있는 좋은 나무가 그만 뿌리째 뽑혀 버렸으니 . 이 말을 들은 주인이 예, 어젯밤 그만 폭풍에 이렇게 나무가 쓰러졌습니다. 친구말이 그러면 이 나무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주인은 예, 이 나무에 보시다시피 훌륭하게 익은 사과들이 많이 있는데 지금 다 딸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 뿌리째 뽑힌 나무는 불살라 버리겠습니다. 여기 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생활의 철학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 가는 동안에 여러 번 우리 삶이 뿌리째 뽑혀서 쓰러진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었 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실패 가운데서도 남은 것이 있고 거둔 열매가 있고, 태 울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실패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진리를 실패한 사람은 알게 됩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도 저는 수없이 많은 분을 만나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하나님께 보내고 땅 위에서 슬퍼하는 사람, 사업의 실패로 말미암아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 어려운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 이렇게 삶의 뿌리가 뽑혀 있는 것과 같은 우리의 삶의 체험 속에서 우리가 거두어 들일 수 있는 열매가 담겨져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과수원 주인의 말은 성공적인 삶의 중요한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사과를 따고 난 뒤에 쓰러져 버린 나무는 불태워 버리는 게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과거에 체험 해서 유익이 되는 것은 거두어 들인 다음 이제는 썩어질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에 우리는 이미 여러 가지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우리가 얻은 것은 다 따고 나무는 태워 버리셔야 합니다. 인생 행 로는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이미 우리의 지난날에 생긴 것이지 지금 생겨나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어제 지은 죄에 매여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시편 103편 12절에 분명히 말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 기셨다. 고 했습니다.하나님은 우리가 범한 죄를 용서하신 다음에는 기억을 하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뿌리 뽑혀 말라 버리고만 나무를 부둥켜 안고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의 지난날의 잘못이 아무리 큰 죄라고 할지라도 거기서 우리 가 거둘 열매, 값진 교훈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과거의 후회 스런 일 역시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날을 되돌아 볼 때 내가 만일 이렇게 했 다면 좋았을걸. 내가 그 일은 저렇게 했었으면 됐을 터인데 하는 말을 저절로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지난날의 실수는 몰라서 그랬습 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날의 실수를 통해서 열매를 거둘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 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배우고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기회는 또 올 것입니다. 그러 므로 뿌리가 뽑혀 쓰러져 소망이 없게 된 나무는 과감하게 태워버려야 합니다. 지나간 과거는 우리의 삶의 이정표이지 앞으로의 갈 길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목표는 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운전을 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마는 차를 운전하게 되면 자연히 백밀 러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을 백밀러를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또 가끔 보아서 뒤에서 오는 차가 접근해서 충돌하지 않을까 조심해야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백밀러만 보고 운전하게 되면 길 아래로 떨어지든지 다른 차와의 충돌을 면할 수가 없 을 것입니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종종 잠깐, 잠깐 뒷거울을 보는 것은 도움이 됩니 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앞을 잘 보고 나가야 운전을 바로 할 수가 있습니다.우리 가 어제 한 일이 죄라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오늘 갈 길이 있습니다. 또 가야만 할 길 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이 있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과거의 나무를 태워 버리려야 합니다. 지나간 과거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많습니다. 아랍 속담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대에게 잘못 한 일의 생각이 떠오르거든 모래 위에 적어 두시오. 그러나 그대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대리석 위에 이를 조각하시오.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분노, 적개심, 복수심 같은 것을 갖고 있으면 있을수록 나에게 손해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두 없애 버리고 마음 속에 감사와 기쁨 같은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심령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들로 마음 속을 가득히 채우게 되시 기를 바랍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다시는 예수님과 이야기 하지 못하리 라는 죄책감에 빠져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너무 가슴 아픕니다.
차라리 예수님 앞에 나는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는 말, 장담을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몇번씩이나 장담했던, 큰 소리쳤던 베드로가 어린 여자 앞에서 세번씩이나 부인했을 때 그의 좌절감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우리도 사실 이와 비슷한 체험을 많이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 후 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함께 조반을 드시고 나서 베드로를 따로 세워 놓 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예 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십자가 지기 전에 나를 모른다 하지 않겠다고, 부인하 지 않겠다고 그렇게 장담했는데, 어떻게 됐느냐? 고 묻는다면 베드로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걸로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대화는 끊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약점을 꼬집는 분이 아니십니다.실수는 했지만 그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 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감격한 가운데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 다. 라고 대답했습니다.그 순간 이 두 분 사이에는 더 이상 과거를 따질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되있었습니다. 이제 새로 일어나 가야 할 시기가 왔다는 사실을 두 분이 알고 있 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를 향하여 말씀했습니다. 네 양을 먹이 라. 이것은 내일을 바라보며 꾸준히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오 직 앞을 향하여 전진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열매를 거두고 나무를 불태워 버려야 합니 다.
사실 오늘도 내일이 되면 어제로 변하고 맙니다. 우리가 어제의 일에 집착하지 아니 하고 내일 일을 근심하지 아니하며 오직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충실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이 땅 위에 사 는 동안 절대로 내일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일은 언제나 내일이지 내일을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오늘에 삽니다.시편 118편 2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 리로다. 우리는 오늘을 기뻐하고 오늘을 의미 있게, 오늘을 보람되게 하셔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어느 동네 이발소에 내일은 이발 무료 라고 큰 종이에다가 세 일 광고를 출입문에 내붙였습니다.어느 청년이 이발을 하러 갔다가 그 광고를 보고 아, 내일은 이발무료니까 이왕 하루 더 참았다가 내일 공짜로 이발해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 고 하루 더 기다렸다가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기분 좋게 잘했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고 이발사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고 난 후 뭐 공짜니까 그냥 나오려고 하는데 이발사가 청년을 불렀습니다. 청년 이발료를 내셔야죠
. 그래서 이 청년이 아니, 저는 오늘은 이발료가 무료라는 광고를 보고 와서 이발을 했는데요. 그러자 이 이발사가 그 래요. 나가 보시지요. 언제부터 이발료가 무료인지 보십시다. 언제부터 이발 무료요? 내일, 언제나 내일은 내일이지 오늘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분명히 소유하고 있는 날 은 오직 오늘입니다. 우리는 이 날 즐거움과 기쁨을 얻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분명히 소유하고 있는 날은 오직 오늘입니다. 우리는 이 날 즐거움과 기쁨을 얻 고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제의 회한에 묻혀 내일을 근심하며 보낸 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물론 때로는 과거를 되새기며 미래를 꿈꿀 때가 있습니다. 늘 그러면서 살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간에 여기서 삶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시간에 성실한 자세로 임하게 되면 엄청난 능 력을 얻을 수가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교회에서 결혼식이 있을 때마다 사진사들이 많 이 오셔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봅니다.
그 사진은 매우 중요합니다. 한번 찍은 사진은 몇 세대를 거쳐 내려가면서 보관되어 좋은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카메라를 가지고 사진 찍고, 옆에서 비디오 카메라로 강한 빛을 비추며 사진을 찍는데, 어떨 때는 주례 할 때 혼선을 가져올 정도로 사진사들이 왔다갔다 하고, 이거 대단히 미안합니다만은 사진 찍는 분들은 사진 찍는데 정신이 없어서 경우를 따지지 않습니까? 그저 주례 앞이 고, 신부 앞이고 왔다갔다 하면서 생각 없이 찍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하 는 것은 새로 부부가 되는 남녀가 하나님의 제상 앞에 서서 식을 올리는 처음 그 순간, 그 시간은 사진 찍는 것 이상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진은 기록에 남 기는 것뿐이지 그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보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내일을 생각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체험이 얼 마나 소중한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충실해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제 때문에 근심하고 내일 때문에 염려하느라고 오늘을 잃어버린 사람 들이 많습니다. 오늘을 산다는 삶의 태도가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편협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순간에 중요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하루 한순간이 대단치 않은 것으로 보일지는 모르지만 이 순간을 두배로 늘려나가다 보 면 한달, 일년 후에는 엄청난 숫자가 되는 것입니다. 돌을 다루는 석수가 대리석을 쪼 개는 모습을 여러분은 보신 적 있으십니까? 큰 바위 같은 대리석을 쪼개기 위해서 한가 운데 정을 놓고 쇠방망이로 치기 시작합니다. 열번, 스무번, 쉰번, 백번, 백오십번, 이 백번 계속 쳐도 돌은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백 한번만에 칠 때 쩍하고 갈라 집니다. 이 이백 한번 째의 망치질. 그것 자체가 돌을 깬 것은 아닙니다. 이 이백 번의 망치질, 이미 그 전에 이백 번의 망치질이 소위 누적 효과를 내서 그 단단한 돌이 이백 한번째 칠 때 갈라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하루 한순간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 리가 하는 일이 전혀 아무런 진전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같은 생활의 반복일는지 모릅 니다. 어떤 때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처럼 되어 버리는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 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로 포기하지 아니하고 계속 꾸준하게 우리의 하는 일을 추 진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에게 승리와 성공을 얻게 될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한번의 노력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전의 모 든 노력이 누적되어 그 효과를 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시며 함께 해 주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놀라움 과 감격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며 하나님의 충만하신 능력이 힘이 되어 주고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원하시는 바가 있으시면 내일로, 다음 주일로 아니 내년으로 미루지 마시고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제일 위험한 상태는 지금의 모습, 현재에 있는 곳에서 만족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 태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를 못하고 어떠한 꿈도 가지지 못합니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나 버린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모닥불이나 피워 놓고 방을 세든 것으로 만 족했다면 오늘날의 이 밝은 전기불을 발명하지 못했을 방을 세든 것으로 만족했다면 오 늘날의 이 밝은 전기불을 발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을 타고 다니는 것으로 교통수 단을 만족하게 여겼다면 오늘날 어떤 자동차나 기차나 비행기나 기선을 만들어내지 못 했을 것입니다.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만들어 입는 것으로 만족했다면 오늘처럼 아름답 고 편한 옷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현재에 대한 불만이 앞으로 나아가고 전 진하는 요소가 됩니다.
반면에 지금의 상태에 지나치게 불만을 가지거나 자신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역시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욕하고 멸시해 보아야 이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상태에서 남을 비방하고 남에게 책 임을 전가하려는 것은 더욱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의 실정이 이 지경이니 우리가 생각 하는 것은 할 수 없다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책을 펴 보세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 람, 신체 불구자가 여러 가지 신체 결함을 가지고 위대한 일을 이룩한 사람들의 이름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은 환경과 조건이 좋아 서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여러 가지 악조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악 조건을 극복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 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했습니다.
여 러분 혹시 백미터를 경주하는 선수들의 몸가짐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가하게 산책면 서 여기저기 감상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내 몸이 비록 백미터 앞에 가 있지 못하지만 내 눈은 이미 백미터 앞에 가 있습니다. 그리고 몸은 꼬꾸라질 정도로 앞에 나가 있습니다. 아마 그냥 놓아두면 꼬꾸라질 것입니다.그러나 사력을 다해서 팔과 다 리를 움직일 때 쏜살 같이 백미터를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백미터를 달리는 사 람들 중에서 내 뒤에 몇 사람이나 떨어졌나 돌아보면서 달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 겨를이 없습니다. 앞만 향해 나가야 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릴 뿐더러 앞에 있 는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자세를 취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바쳐 추구할 만한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문제 로 인한 근심 같은 것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가오는 새해를 아니 이제부 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행복한 사람은 뒤를 돌아다보며 부 정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앞을 바라보며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 은 남의 장점만을 보기 원합니다. 사복음서를 다 읽어 보아도 예수님이 남을 비방한 적 이 한번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죄를 미워하셨습니다. 그러나 항상 긍정적인 자세 를 가지고 사셨습니다.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여 몰두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기웃거리지 아니합니다. 상관하지 아니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될 때 시기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항상 남에게 줌으로 기뻐하고, 받음으로 즐거 움을 얻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삶이 불행 가운데 살기에 너무나 짧다고 생각합 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불행하게 하려는 문제까지도 하나님은 결국 소원으로 바꾸 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언제나 감사와 감격과 행복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지난 한 해를 보내면서 옛 것은 온전히 잊어버리게 되 시기를 바랍니다. 옛 것은 흘려 보내고 새 것을 받아들이십시다.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억울하게 하고, 괴롭혔던 근심도 묵은 해로 보내고 형제간의 다툼도 저 멀리 멀 리 흘려 보내십시다.
우리의 교만과 거짓도 다 뒤로 흘려 보내고 온 겨레가 한마음으로 다가오는 새해를 맞이하십시다. 우리를 괴롭히던 질병, 실패와 절망도 다 흘려 보내고 우리 앞에 펼쳐지는 평화와 행복을 맞이 하십시다.
뒤 것은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힘있게 좇아가서 승리를 거둘수 있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조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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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의 비극
신명기 31:24-28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 청년은 자신의 지난날 과오 때문에 늘 괴로워하였고, 또다른 청년은 도덕적으로 큰 죄를 짓지 않았기에 누구 앞에서나 떳떳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 두 청년은 어느날 랍비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함께 나아갔습니다. 랍비는 둘의 이야기를 다 듣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에게 지금 나가서 큰 돌 3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떳떳하게 생각하는 청년에게는 작은 돌 수십 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습니다.두 청년이 각자 돌들을 가져오자,랍비는 들고 왔던 그 돌들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 오라고 지시했습니다.
큰 돌을 들고 왔던 청년은 쉽게 제자리에 갖다 놓았지만, 수십 개의 작은 돌들을 주워온 청년은 원래 놓였던 자리를 다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 본 랍비는 말했습니다. “인간이 짓는 죄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돌을 가져 온 형제는 한때 자신이 지은 죄를 기억하고 늘 양심의 가책을 안고 겸허하게 견디며 살아왔습니다.그러나 작은 돌을 가져온 형제는 비록 하찮은 것 같지만 자신이 지은 작은 죄들을 모두 잊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리고는 뉘우침도 없이 작은 죄들을 지어가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에 익숙해 버린 것입니다”
우린 과거를 잊어버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거라고 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불리한 과거라는 점입니다. 반대로 남이 내 돈을 떼어먹은 일이나, 기필코 갚아야 할 복수는 잊지 않고 가슴 깊숙이 담아둡니다. 자기가 당한 피해는 응분의 대가가 있지 않는 한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범한 죄나 다른 사람에게 행한 아픔 따위는 잊어버린 채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토록 당신의 존재와 능력과 약속에 대한 확증을 보이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못하고 거역하며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 마음의 굳은살을 도려내 버립시다.굳어버린 마음,뻣뻣해진 내 양심과 자존심을 하나님께 풀어놓읍시다. 하나님은 내 과거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스스로의 가책과 죄책감에서 자유케 하십니다. 그러나 자유와 방종을 구분해야 합니다.자칫 하나님의 용서에 익숙해져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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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험한 과거
많은 사람이 모인 어느 잔칫집에서 집주인이 열심히 부엌에서 돕고 있는 한 부인에게 미안한 듯 “뭘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일하세요. 쉬면서 하세요”라고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그 부인에게 쏠렸다. “저 분은 언제 어디서나 말없이 돕는 분인 걸요”하고 누가 말했을 때는 모두 그녀를 존경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유달리 우쭐대며 주목받기 원하는 부인이 큭 하고 비웃었다. “그 여자,과거가 있는 여자예요” 모두 눈빛이 변했다. “과거? 무슨 과거?”라는 질문부터, “알게 뭐야 처녀 때 애기를 난 거야?”“사기를 쳤는지 누가 알아” 사설이 자자해졌다. 식사 후 한 부인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부인에게 물어보았다.
“아주머니에게 과거가 있다고 저 분이 그러는데 정말인가요”“네” “뭔데요?” “과거에 저는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답니다”“그게 과거라는 건가요?”“네, 그보다 더 위험하고 잘못된 과거라는 것도 있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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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역사의식
출애굽기 17;14∼16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시 44:1)
첫번째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에 젖어있던 사람들입니다. 수동적이며 패배적인 노예근성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로 뭉쳐서 전투에서 승리한 이 경험이 자신감을 가지게 했을 것입니다. 마치 2002 한·일월드컵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첫 승을 기록했을 때의 감격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식이 아주 철저한 분이십니다. 애굽 사람들에게 열번째 재앙을 내리면서 유월절을 제정하셨고 자손대대로 이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면서 항아리에 담아 또 대대로 보존하라고 하셨습니다. 목적은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후손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을 후대에 전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책에 기록하라!” 기독교는 기록의 종교입니다. 성경이란 단어는 단순히 ‘책’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기독교의 신앙 전승에서 기록된 문서의 역할은 중심적입니다. 좀더 넓게 본다면 언어의 기능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언어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말렉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이 아말렉을 천하에서 완전히 없애버려서 기억에도 남지 않게 할 것임’을 분명하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여호수아에게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이때 이미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점찍어두셨습니다. 아말렉에 대한 입장은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서 다음 지도자가 분명히 기억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받은 은혜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요? 글로 쓸 수 있습니다. 아침에 말씀묵상을 하면서 또는 저녁에 하루를 성찰하면서 짧게라도 글을 쓴다면 신앙 성장에 큰 도움이 됩니다. 말로 간증할 수 있습니다. 은혜 받은 사건에 연관된 사진이나 기념되는 물건을 보관하고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역사적인 사료가 되는 것입니다. 기념장학회를 만든다든지 교회 건축 또는 선교사 파송을 위해 헌금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전하는 것은 내게도 복이요,전달받는 사람에게도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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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과거
여자의 과거는 정말이지 좀 심하게 말하면
때려죽인대도 불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주변에서 그런 문제 때문에
결혼 생활 내내 고통을 당하며
살고있는 여성을 몇 명 알고 있다.
비단 결혼 생활뿐 아니라, 연애 중일 때도
과거 남자와의 진한 사연을 털어놓았다가는
그것이 굴레가 되어 오래오래 장애 요인이 되리라.
여름 바닷가 같은데서 무드에 마음이 약해져
진실 게임하자는 남자의 꾐에
절대 넘어가지 말기를...
여성들은 과거 문제에 대해서는
시치미 딱 떼고 앙큼을 떨 일이다.
그게 서로에게 좋다.
- 이숙영의 《남자들이 열광하는 여자》중에서 -
* 여자의 과거는 여자가 말해서도 안되지만 남자가 물어서는 더 안됩니다. 진실 규명도 힘들 뿐더러 괜한 분란과 파탄의 불씨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의 과거는 대체로 아름답고 슬픈 상처이기 쉽습니다. 그 상처를 말끔히 씻어내어 새로이 신부(新婦)로 태어나게 하는 씻김굿이 곧 결혼이며, 결혼은 그녀의 과거를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의 미래를 보고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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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과거를 잊자
우리의 생활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다. 때로는 쌀이 떨어지고 교통비 조차 없는 비참한 지경에 빠
질 때도 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고통스런 하루하루가 이어질 수도 있다.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일은 필연적인 운명과도 같다. 어떤 경우가 닥치더라도 실망을 뿌리치고 실현 가능한 일에 도전 해야만 한다. 그것은 나이와는 상관 없으며, 목표가 있는 사람은 사막에서도 물을 구할 수가 있다.
직장에서 해고되었다든지 사업에서 실패했을 때 당신은 실의에 빠져 자리에 누워 버릴 수도 있다. 초조감, 자책감으로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자살을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때는 무슨 일을 해도 잘되지 않는다. 형편이 좋았을 때는 간이라도 빼줄 듯하던 사람들이 당신을 외면할 것이며, 지나가던 개도 당신을 향해 짖는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당신은 이런 모든 악조건을 감내해야만 한다.
지금 당신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 뿐이다. 삶의 울타리 안에 있는 당신은 스스로 활기찬 정열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자신을 책망하고 미워해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우선 당신은 실패한 과거를 잊어야만 한다. 깨끗하게 말이다. 이제 무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어쩌면 실패의 기억조차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실패는 결코 성공으로 변신하지 않는다. 그 실패의 기억이 당신의 억울한 심정을 위로하지도 않는다. 아무것도 달라질 것이 없다. 그것을 되새기고 안타까워하면 할수록 상처만 덧날 뿐이다.
모든 것을 잊어 버린 텅 빈 백지 위에 ' 희망 '이란 두 글자를 적어 넣어라. 희망은 당신에게 트인 세계를 보게 해준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사람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데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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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안에 계신 하나님
역사는 누가 이끌고 가는가? 역사의 실타래는 복잡해도 실마리는 하나임이 분명하다. 지난 2월 모스크바에 다녀왔다. 지구상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였던 러시아에 간다는 것은 처음부터 흥분되고 기대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느낀 소감은 솔직히 혼란되고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무신론적이고 반기독교적이었던 나라가 어떻게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기독교 선교지가 되었는가? 러시아 백성을 피로 물들인 붉은 광장 레닌의 묘소 앞을 성경을 끼고 지나가는 선교사를 보았을 때,고르바초프가 끔찍히도 사랑했던 라이사 여사의 무덤 앞에서 기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을 보았을 때 이 질문은 절정에 달했다.
누가 이토록 강력하던 나라를 무너뜨렸는가? 누가 독재자의 나라를 해방시켜 선교사의 입국이 자유롭고 교회가 여기저기 세워지는 나라로 만들었는가? 1989년 한 해만 해도 당시 소련의 지배를 받던 동독 폴란드 헝가리 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유고 몽골 등이 일시에 해방을 얻었다. 그것도 폭력과 싸움없는 평화로운 과정을 통해 독립과 자유를 맞이했다. 그때 세계 최고를 자랑하던 소련의 군대는 무엇을 했는가? 왜 그들은 동맹국들의 이탈을 막지 못했는가? 역사가 토인비의 이야기가 맞다. 그는 주저 ‘역사의 연구’에서 “모든 역사는 그 껍질을 벗기고 보면 결국 영적인 것이다”고 말했다.
언뜻 보면 역사는 지배하는 사람의 소유물같이 보인다. 제도나 군대나 이데올로기가 그 통치의 힘같이 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본질에 있어 영적이다. 소련 공산주의가 무너진 이유는 그 역사가 영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성경의 기본 진리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휴머니즘에 대한 지나친 낙관주의속에 독버섯처럼 숨어 있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만히 두어도 스스로 발전하는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없이 사는 인간은 결국 그 존재의 근원인 영적 기반이 흔들려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없는 역사는 결국 변하든 망하든 둘 중 하나의 선택앞에 선다. 하나님 없는 역사는 탄식과 허무의 역사이다(롬8:22).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을 역사도 없고 드러나지 않을 과거도 없다(히4:13).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오늘도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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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낙은 사라지고
영국 왕 이나가 웨섹스에서 37년을 다스렸을 때 왕비 에텔버가는 권좌를 물려주고 말년을 참회하면서 보내라고 남편을 설득했다. 왕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다. 그러나 막상 실행에 옮기려고보니 혹시 나중에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문득 걱정이 되었다. 왕이 흔들리는 모습을 본 왕비는 마지막으로 실질적인 교훈을 써보기로 했다. 왕의 별장에서 보기 드문 세련되고 성대한 대연회가 열렸다. 다음날 아침에 국왕 내외가 길을 나섰는데 말을 타고 가던 중 왕비가 남편에게 왔던 곳으로 돌아가자고 졸랐다. 성으로 돌아간 왕은 뒤통수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곳은 인적도 끊기고 적막이 감돌 뿐 아니라 파괴되고 더럽혀져 있었던 것이다. 성은 폐허처럼 오물로 뒤범벅되어 있었고, 간밤에 몸을 뉘인 침대는 돼지가 냄새를 풍기며 차지하고 있었다. 실은 왕비가 별장 관리인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려 이렇게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에텔버가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 어제 우리가 누리던 낙이 지금은 어디 있지요? 모든 것이 사라졌고, 그런 낙에 취해 있던 사람들도 함께 다 가버렸어요. 그래서 간곡히 부탁드리는데, 이 육체가 결국 어떻게 비참한 지경에 떨어질는지를 생각하세요, 남들보다 훨씬 좋은 음식만 가려먹은 우리가 남들보다 훨씬 더 비참한 부패에 떨어지지 않겠어요?” 교회사 속에 숨겨진 450가지 일화 / 버논 제이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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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과거를 잊자
한 소년이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을 했다. 소년의 부모는 자녀교육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어머니는 무뚝뚝했고 아버지는 퉁명스러웠다. 왜소한 체 격의 이 소년은 '비전 없는 아이'로 불렸다. 그의 부모는 아무런 생각 없이 소 년을 사관학교에 입학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소년에겐 두 가지 인생철학이 있었다. "좋지 않은 과거는 깨끗하게 잊어버리자. 오늘 내게 맡겨진 일은 반드시 오늘 해내고야 만다." 소년은 남북전쟁 때 남다른 책임감과 용맹성을 발휘 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밝은 성격은 그의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많이 모일 수 있게 했다.
소년은 장성해 육군대장을 지냈다. 그리고 미국의 18대 대통령 으로 당선됐다. 그의 이름은 유리세스 그랜트. 만약 그가 고통스런 과거에 연 연했다면 열등감과 증오의 늪에 빠져 방황했을 것이다.
'책임감'과 '암울한 기억에 대한 망각'이 약점 많은 한 소년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인도 선교사로 유명한 윌리엄 캐리도 본래 구두수선공이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당신은 옛날에 구두를 만드는 사람에 불과했다"고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그는 "아닙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지 못하고 겨우 수선하던 사람이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 살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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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운 과거는 지나갔다
인간의 기억 창고는 희한하기만 하다. 기뻤던 일에 대한 기억은 쉽게 희미해지지만 슬펐던 일에 대한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일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타인으로부터 섭섭한 일을 당했던 일은 마음속에 쓴 뿌리가 되어 잘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한한 기억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슬픈 과거에 매여서 살며 현재와 미래를 망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서러웠던 과거는 어제로 이미 지나갔다. 그러므로 서러운 과거에 매여 ‘이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으로 현재를 무참하게 짓밟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의 과거에 충실해야 하기도 하지만 현재에 더욱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의 서러움이 현재의 의욕을 상실하도록 만들지 말자!
또한 과거의 슬픔이 내일에 대한 설레이는 기대를 무너뜨리도록 만들지 말자! 왜 동양 문명이 서양 문명보다 뒤진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은 동양 문명이 서양 문명보다 슬픈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슬픈 일이 기록된 페이지에 자꾸만 시선을 고정시키지 말자! 하루에 할당된 일조차 수월하게 감당하기 힘들어하는 우리의 튼튼하지 못한 어깨에 과거의 일조차 지게 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가 되는 것이다. 서러운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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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을 보는 눈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의사 에게서 이런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려면 당신의 시력이 손상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 습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십시오.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아니면 두 눈이 멀쩡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심사숙고한 후 대답했습니다. “저는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 다.
” 우리는 과거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문은 이미 닫혀 있지만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려 있습니 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계속 얽매여 있다면 앞으로 도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과거에 지 배받지 않으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 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그 들은 몇 번 노력하다 실패한 후에는 다시 시도하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 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조차도 기꺼이 좋은 결과를 낳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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