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에 나타난 보상 개념
I. 서론 : 죽음 이후의 보상
죽음 이후 현재 삶의 가치에 상응하는 어떤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신념 혹은 희망은 모든 시대와 문화를 관통하는 보편적 현상이다. 물론, 이러한 신념은 현재의 삶에서 완전한 정의를 맛볼 수 없다는 근원적 불만과 관계가 있다. 현대인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친 근대 철학자 칸트는 진정한 정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후에 현재의 불공평함을 공평하게 만들 수 있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소위 “요청으로서의 신”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런 생각은 고대 철학자 플라톤의 저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한 대화를 기록한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죽음 이후 자신의 “주인들”로 만나게 될 신들은 “전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믿으며,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바와 같이 죽은 후 선한 사람들에게는 악한 사람들에게보다 훨씬 더 나은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다”라는 사실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63b-c)
플라톤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이런 희망은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라는 신념과 결부되어 있다. 인간은 이 세상의 삶뿐만 아니라 저 세상을 위해서도 영혼을 보살펴야 한다. 영혼은 없어지지 않으므로 “악으로부터의 탈출, 곧 구원을 얻으려면 최대한 선하고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107-8) 물론, 여기에는 사후의 심판에 관한 이론도 있고, 연옥 교리와 흡사한 이론이 등장하기도 한다. (113d) 죽은 후 자기의 다이몬에 이끌려 경건하게 산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누어지고, 그 중간쯤의 생활을 한 사람들은 아케론강으로 가 거기 준비된 배를 타고 스틱스라는 호수에 이른다. 거기서 “남에게 행한 죄악의 책벌을 받아 속죄를 하고 나서, 선행을 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된다”라는 것이다. 물론, 도저히 속죄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들은 탄식의 강이라 불리는 타르타로스로 던져져 다시는 올라올 수 없게 된다. 반면 “철학으로 자신을 순화시킨” 사람들은 전혀 육체가 없는 미래를 살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의 거처보다 훨씬 더 좋은 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113-115a) 이런 생각은 소크라테스나 그의 대화를 기록한 플라톤에게도 “예로부터 전해오는” 오랜 전승이었다. 물론 동양적 문맥에서도 이런 생각은 널리 퍼져 있다. 그러니까 인과응보의 원리와 그 결과물인 사후 심판과 보상 사상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매우 보편적인 현상인 셈이다.
많은 이에게 보상 혹은 상급 개념은 주석적, 신학적 주제라기보다는 목회적 차원의 주제에 가깝다. 이런 측면에서 상급/보상 개념의 문제성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보상 개념의 애매함이다. 보상은 종말론적 구원의 다른 표현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수고에 따라 보상이 주어진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과 달리, 보상이란 우리 수고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부가적” 선물인가? 그렇다면 다양한 종류 혹은 등급의 보상들이 존재하는 것인가? 우리 교회의 현실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분명한 대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나친 단순화겠지만, 이 점에 있어 오늘 한국교회의 신학은 구원파적 논리와 유사한 피상적 “은혜 구원론”과 조악한 “행위 보상론”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린 양상을 보인다. “오직 은혜로만”의 논리가 무슨 마취제처럼 주사되는 듯하다가, 금방 “열심히 봉사하면 큰 상급을 받는다”라는 인과 응보적 보상 논리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두 논리가 상반된다는 사실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교회에서 발견되는 이런 역설은 성경의 진술들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는 성경에 호소하는 많은 가르침이 사실 성경을 아전인수 격으로 왜곡한 결과가 아닌지, 그리고 이런 왜곡 배후에는 성경 이전의 문화적 전제들이 작용하는 것이 아닌지 물을 수 있다.
또한, 교회의 문맥에서 보상 혹은 상급 개념에 대한 논의가 간단치 않은 것은, 보상 개념 바탕에 “행위에 의한 심판”이라는 원칙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위심판 사상은 사후 보상 개념 자체가 요구하는 근본적인 전제다. 구원과 멸망은 이런 사후 보상의 가장 극적인 형태에 해당한다. 이야기가 복잡한 것은 사후 보상과는 정반대의 논리를 가진 또 다른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곧, 은혜 구원의 논리다. 따라서 보상/상급 개념에 대한 논의는 불가불 그 기반인 행위심판의 원칙과 은혜 구원의 논리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물음과 연결된다. 개신교 내에서 야고보서를 둘러싼 불편한 기류가 말해주듯이,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신학적 어려움이 신학적 편향성의 핑계일 수는 없다. 바울서신에서조차 보상 및 행위심판 사상이 빈번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사상의 흐름을 “기독교인” 바울의 은혜 사상 속에 미처 녹아들지 못한 “유대교적” 잔재로 치부할 수는 없다. 혹은 목회 현장에서 흔히 그렇듯, 하나의 신학적 논리로 통합되지 못한 은혜 원칙과 행위심판의 원칙을 나란히 두고, 상황적 필요에 따라 편리하게 골라 쓰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열증적” 관행을 승인할 수도 없다. 우리는 보상 및 이와 관련된 개념들이 은혜로 요약되는 바울 신학의 체계 속에서 어떻게 융화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물론, 이는 신학적으로 거대한 공사다.
본 연구는 그런 거대한 공사의 작은 일부에 해당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 서신 속에서 보상 개념과 관련이 되는 구절들을 살피면서 이것이 구체적인 문맥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더 나아가 바울의 복음이라는 큰 틀 속에서 보상 사상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가늠해 보려고 한다. 물론, 하나의 논문으로 “보상”이라는 큰 주제를 다 담을 수 없다. 또한, 주석적 작업만으로 모든 의문이나 애매함을 전부 해소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작은 예비적 연구가 성경적 상급 개념 정립을 위한 지속적 노력에 하나의 작은 도움 돌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II. 데살로니가전서-“거룩함”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보상 개념은 바울 복음이라는 큰 체계의 일부로 기능한다. 따라서 보상 개념 자체를 다루기 이전, 그 개념의 태반이 되는 바울의 신학적, 목회적 틀, 혹은 바울의 근원적 관심이 무엇이었는지 간략히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바울의 초기 서신 중 하나인 데살로니가전서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바울 사상의 핵심을 이신칭의로 요약하는 이가 많지만, 데살로니가 서신에는 이 교리가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용어는 없어도 사상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이런 주장 역시 칭의 개념을 그 나름으로 달리 정의한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보다 더 생산적인 작업은 데살로니가 서신들에서도 칭의 교리가 나타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데살로니가 서신의 문맥 내에서 바울이 현재와 미래에 관해 말하는 바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밝히는 것이다.
바울의 목회적 기도가 보여주듯, 교회를 향한 바울의 일관된 관심은 성도들이 그들을 “그의 나라와 영광에로 부르시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다. (2:12) 여기서 “부르심”이라는 개념은 구원을 인간적 체험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보다 큰 영역으로 옮겨놓는다. 나의 구원은 또한 하나님의 소환이며, 그 소환 속에는 분명한 목적이 자리한다. 바울은 이 부르심의 목적 혹은 의무를 “거룩함”으로 요약한다. 성도들을 부르시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은 바로 성도들의 “거룩함”이다. (4:3) 이런 의미에서, “나라와 영광”을 약속하는 구원의 부르심은 동시에 그 구원에 이르도록 현재를 거룩하게 살라는 부르심이기도 하다. (4:7) 마찬가지로 “거룩함”과 상반되는 삶, 곧 그 부르심에 합당하지 않은 삶은 “부정함”이며, 이는 구원 아닌 하나님의 진노로 귀결된다. 다음 두 구절을 함께 놓고 보면 바울의 생각은 매우 명확해 보인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함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4:7)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5:9; 1:9)
바울서신이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처럼, 성도들의 거룩함은 복음의 말씀으로 매개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가능해진다. (1:5, 9-10; 롬 8:4; 15:18) 거룩함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는 것은 신자들이 성령을 통해 거룩함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4:8) 물론, 그 마지막은 진노다. 그래서 거룩함에 대한 바울의 권면은 긴박성을 띤다.
이런 거룩함을 보다 구체적으로 논하는 문맥에서 바울은 심판자 하나님을 소개한다.
이 일에 [곧, 음란과 관련된 문제]에 분수를 넘어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4:6)
바울의 논리는 선명하다. 우리는 형제를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 신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시 94:1) 개역개정에서 “신원하다”로 번역된 e;kdikoj는 “원수를 갚는다”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 묘사에 종종 활용된다. 하나님의 위임을 받아 악을 “처벌하는” (로마) 정부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도 쓰인다. (롬 13:4) 단어의 형태는 다소 다르지만, 보다 시사적인 구절은 살후 1:8이다. 환난 중 성도들의 인내는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의 표시”가 된다. (5절)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은 성도들을 박해하는 이들에게 환난으로 갚아주시며, 현재 박해를 견디며 인내하는 성도들에게는 이 박해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시는 데서 드러난다. 물론 이는 “주 예수”의 재림 때에 실현될 것이다. 이때 주님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게 “복수하실” 것이다. (8절) 바울의 생각 속에서 심판자 하나님, 원수 갚는 자로서의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부정함을 통해 진노에로 이르는 길과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두 가지 길 앞에서 성도들 역시 “원수 갚는 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 “이 모든 일에”라는 첨언은 이 점을 더욱 강조한다. 이런 하나님 앞에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성도들은 “불의를 기뻐하며” “진리를 순종치 않는” 모든 사람과 “결별해야” 한다(3:6). “우리가 미리 말하고 증언하였다”는 강력한 도입구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는 바울이 공동체 형성 초기부터 이방 신자들에게 가르친 복음의 핵심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구원에 이르는 실천적 길이요, 부르심에 대한 “합당한” 응답인 거룩함을 예수의 재림 때까지 유지하는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반복되고 있는 바울의 기도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의 관심사가 바로 여기에 있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3:13)
평강의 하나님이 또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5:23)
보상 개념과는 직접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전후에 나타나는 “거룩함”에 대한 요구를 살펴본 것은 바울의 구원론적 사고가 피상적 은혜 구원론과는 구별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데살로니가전서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처럼 논쟁적 상황이 벌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기록된 편지이다. 말하자면 바울이 “평소” 이방인들에게 어떤 복음을 전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 그런데 이 서신을 관통하는 핵심적 관심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이며, 또 그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으로서의 “거룩함”이다. 이 점을 놓치면 우리는 바울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 하나를 잃어버리는 셈이다.
III. “나의 면류관” : 바울과 이방 성도들
보상 개념과 관련된 본문들을 다루어 보기로 하자. 우선 보상 개념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관된 은유 중 하나인 면류관 관련 구절들을 살펴보자. 바울은 그의 서신 두 곳에서 자신이 섬기는 성도들을 “나/우리의 면류관”이라 부른다. 살전 2:19~20과 빌 4:1이다. 달리기 이미지와 함께 등장하는 딤후 4:6~8은 다음 단락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겠다.
1.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20절
이 구절은 교회 설립 당시를 회고하는 큰 단락이 끝나고(1:6- 2:16), 바울 일행이 떠난 이후 보다 최근의 상황을 기술하는 새로운 단락(2:17-3:13)의 시작이다. 특히, 17~20절에서는 성도들을 향한 애정과 목회적 열정이 거듭된 방문 실패(17-18절) 및 예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대(19-20절)의 맥락 속에서 차분하면서도 절실하게 드러난다. 특히,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생각하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자신의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 혹은 “영광”이라 부른다. 바로 앞 단락과 “ga;r”로 연결되는 이 진술은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시 방문하고 싶어 하는 바람의 근거를 제시한다. 바울이 그렇게 간절히 성도들을 만나 이들의 믿음을 확인하고 또 그 믿음의 부족함을 채워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 바울의 “자랑의 면류관”이기 때문이다.
“자랑의 면류관”은 분명 “자랑할 만한 면류관”이라는 의미다. (빌 2:16) 세속적 의미의 자랑과는 달리(롬 3:27; 고전 1:26-31; 5:6; 엡 2:8), 여기서 자랑은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 그 수고를 인정받는다는 의미에서의 자랑이다. (고후 1:14; 갈 6:4; 빌 1:26; 2:16) “면류관”은 당시 인기를 끌던 운동경기에서부터 빌려온 모티브이다. 이 단어는 원래 4년마다 열렸던 올림픽 경기나 2년마다 열렸던 고린도의 “이스티미안”(Isthimian) 경기 등에서 승리한 사람에게 수여하던 승리의 관을 가리킨다.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날에 자신의 모습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드디어 승리의 관을 받아 쓴 선수와 같은 것으로 묘사한다.
여기서 “면류관”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자신이다. 이 표현을 액면 그대로 읽으면 사도적 수고의 결과로 일구어진 데살로니가 교회 자체가 바울의 “보상”, 곧 “면류관”이 된다.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얻은 결과로 다른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얻어진 성도들 자체가 바울의 면류관인 셈이다. 하지만 이는 너무 기계적 해석인 것 같다.
첫째, 현재는 분명 고무적이지만, 데살로니가 신자들이 시험에 빠져 바울의 사역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은 여전히 생생하다. (3:5) 그렇다면 이는 이미 확보한 면류관(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다시금 잃어버리는 셈이 된다. 물론, 이는 최후 승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라는 면류관 개념과 이 개념이 적용되는 종말론적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다. 면류관은 땀 흘려 거둔 “승리” 자체가 아니라 그 승리에 대해 주어지는 별도의 “상”이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땀 흘려 거둔 승리요, “면류관”은 그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상이다. 바울의 염려는 이미 얻은 면류관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온 자신의 달음질이 헛수고가 될 그리하여 끝내 바라던 면류관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다. (2:1; 3:5)
둘째, “면류관”과 더불어 나란히 등장하는 다른 개념들 역시 이런 해석을 어렵게 만든다. 교인들은 바울의 “소망”, “기쁨” 혹은 “영광”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도들 자신이 성취된 소망의 내용이거나 그가 기대하던 영광일 수는 없다. (2:6) 오히려 성도들이 바울의 기쁨 혹은 그가 고대하던 종말론적 소망과 영광의 “근거”가 되리라는 생각이 자연스럽다. (3:9) 그렇다면 “자랑의 면류관” 역시 마찬가지다. 즉, 현재 성도들의 견실한 상태가 예수의 재림 시 바울이 면류관을 얻을 “근거”이다. 물론, 바울이 성도들을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의 모범적 신앙에 대한 바울의 자신감을 반영한다. (1:3-8)
바울의 개종자들이 면류관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그는 이 사도적 소명을 달리기에 비유한다. 여기서 승리하면 면류관을 얻고, 패배하면 면류관을 놓친다. 그러니까 주님 재림 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거룩함에 흠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면(3:13; 5:23) 바울은 자신의 달리기에서 “승리한” 것이고, 따라서 “면류관”을 얻는다. 그러나 성도들이 믿음을 잃어 그의 사역이 “수포로 돌아가면”(2:1; 3:5; cf. 갈 2:2; 4:11), 그는 패배자가 되어 기대하던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들은 건강한 신앙을 잘 유지하고 있다. (1:3) 이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울의 사역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사도적 소명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성도들의 모범적인 믿음은 바로 그 신실한 섬김의 열매다. 따라서 하나님은 승리한 바울에게 자랑스러운 면류관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면류관”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직접 설명은 없지만, 문맥에서 유추해 볼 수 있는 사항이 몇 가지 있다. 첫째, 면류관은 종말론적 상을 가리킨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면류관의 근거가 되는 것은 “그의 강림”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이다. (2:19) 곧, 바울은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면류관”을 생각하고 있다. 둘째, 여기서 면류관은 소망, 영광 등의 단어들과 나란히 쓰이고 있다. “구원의 소망”이라는 표현에서 보듯(5:8; 살후 2:16) 소망이란 종말론적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리킨다. (1:3; 4:13) 영광 역시 마찬가지다. “나라와 영광”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종말론적 구원을 묘사하는 그림의 하나다. (2:13; cf. 살후 1:9, 12; 롬 2:7-10; 8:17-18, 21, 24; 딤후 2:10) 따라서 현재의 문맥은 시종일관 종말론적 구원의 언어들로 채워져 있다. 그렇다면 “면류관” 역시 자연스레 미래 종말론적 구원의 한 이미지가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구원과 별개의 차별적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의 구원 그 자체를 그가 받을 면류관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구원 이외의 다른 “상급”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의 복음”을 들었을 때 느낀 안도감과 그들을 방문하여 그들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고자 했던 간절함의 또 다른 측면을 본다. (2:17-18; 3:10) 성도들의 “흠 없는 거룩함”은 성도들 자신뿐만 아니라 이들을 섬기는 바울 자신의 종말론적 구원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자랑스러운 면류관”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안도감 속에는 성도들 뿐 아니라 사도 자신의 구원에 관한 관심 역시 포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8)
2. 빌립보서 4장 1절
빌립보서 4장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등장한다. 1절에서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도 성도들 자체를 바울의 “면류관”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면류관은 승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승리에 대한 사후적 포상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면류관은 이를 획득하기 위한 힘겨운 훈련과 달음질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면류관”은 바로 앞 3장에서 길게 서술한 바울의 “달음질”과 쉽게 연결된다. 물론 운동경기라는 그림 언어는 3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미 환난 중에 이루어지는 자신의 사역과 빌립보 성도의 인내를 “싸움/경주”라고 부른 적이 있다. (1:30) 물론, 바울의 달리기는 성도들을 위한 사도적 섬김이다. 사도적 사명이라는 힘겨운 과정을 거쳐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상을 얻을 것이다. 물론 그의 승리는 섬김의 대상인 빌립보 성도들의 견실함이 증명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빌립보 성도들은 바울이 승리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근거다. 이미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본 것처럼, 성도들의 삶의 질은 사도 바울 사역의 질과 직결된다. 따라서 이들이 거룩한 공동체로 인정되는 지 여부는 바울의 사역이 성공인지 실패인지의 여부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재 이들의 모범적인 모습은 미래의 “면류관”에 대한 자신감의 근거가 됨과 동시에 현재적인 기쁨의 이유이기도 하다.
빌 2:14-16 역시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신명기 32장의 어조를 반영하는 이 구절에서 바울은 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신 32:5)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아갈 것을 권면하면서, 그렇게 하여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라”고 부탁한다. “달음질”과 “수고”는 모두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지칭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낱말들이다. 그리스도의 날에 빌립보의 성도들이 거룩함에 흠이 없는 자녀들로 인정될 때, 바울의 사도적 수고는 “헛되지 않은” 것임이 확인될 것이고(갈 2:2; 3:4; 4:11; 살전 3:5),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울의 자랑거리, 곧 “자랑”의 근거가 될 것이다. 바울의 달음질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곧 그가 사도적 달음질에서 승리하였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는 바라던 “면류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논의에서 본 것처럼 여기서 “면류관” 역시 영생의 소망과 다르지 않다.
목회적 관점에서 우리는 보상의 구체적 내용이 궁금하지만, 사실 바울의 일차적 관심사는 보상 자체를 상세히 논의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방 성도들을 자기 “면류관”이라 부를까? 성도들이 바울의 면류관, 곧 면류관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바울 자신의 운명이 이방 성도들의 삶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운명을 성도들의 운명과 하나로 묶고, 자신의 운명을 성도들의 손에 달린 것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나의 면류관”은 바울과 성도들 간의 유대를 표현하는 가장 극적인 표현의 하나다. 사실 신앙의 이력이 깊지 않은 이방 성도들로서는 복음의 전달자요, 모범인 사도와의 강한 유대만큼 힘이 되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들 이방 성도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깊은 헌신을 보여줄 수 있었고, 또한 이것은 이들을 향한 깊은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을 자기 면류관이라 부르는 것은, 사도와 성도들 간의 운명적 유대를 재확인함으로써 환난 속에 있어 자칫 시험에 빠지기 쉬운 성도들을 격려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였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나 빌립보서 모두 성도들의 견고한 믿음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문맥에서 이런 표현들이 등장한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바울 편에서 보자면 이런 인식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도로서의 사명이 곧 자신의 종말론적 운명과 결부된 것임을 인식하는 것, 곧 자신의 책임에 대한 진지한 고백이기도 할 것이다.
이다. 후원을 사양하고 스스로 일을 하며 값없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후원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도록 정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한 걸음 더 넘어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랑”과 “보상”이 사실상 기능적인 동의어에 해당한다.20) 하지만 그렇다고 두 개념이 기계적 동의어는 아니다. 값없이 전하는 행위가 자랑거리라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보상의 경우 이야기가 다르다.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는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행위다. 그런데 이 “보상”이 값없이 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하자. 그렇다면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또한, 비록 가상적이긴 하지만, 복음 전파 행위가 “자발적인” 경우에도 “보상을 가질” 수 있다(17절). 그렇다면 이 경우의 보상은 무엇인가?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자면,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행위 자체가 보상”이라 말해야 하겠지만, 이 역시 터무니없는 말에 불과하다. 바울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이해하자면 바울이 말하는 “보상”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행동과 구별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IV. 바울의 사도적 “달음질”과 “보상”
앞에서 우리는 바울이 성도들을 자기의 “면류관”으로 지칭하는 구절들을 살펴보았다. 이와 연관하여 이 단락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려가는 달리기”로 묘사하는 구절들을 살펴보자. 사실 보상 개념은 고린도전서 3장에 먼저 나오지만, 이미 살펴본 “면류관” 이미지가 함께 등장하는 고린도전서 9장을 먼저 살피고 관련된 다른 구절들을 살피기로 하자.
1. 바울의 보상(9: 16-18)
전체적으로 9장은 바울 자신의 사역 방침에 관한 논의다. 한편으로 이는 재정적 독립 및 율법에 대한 자유로운 태도 등 자신의 독특한 사역 방침에 대한 변증적 기능을 갖는다. (9:3) 그러나 8장에서 11장 1절에 이르는 넓은 문맥을 고려하면, 고린도의 성도들을 위한 교훈적 기능 역시 분명하다. 곧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는 자신을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하면서, 우상 제물과 관련하여 드러난 고린도 교인들의 자기중심적 태도를 지적하고 합당한 행동 방식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것이다. (11:1) 4~19절은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재정후원에 대한 사도적 권리를 포기한 사실을, 20~23절은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포기한 사실을 언급한다. 그리고 24~27절에서는 운동경기라는 그림 언어로 교훈적 논의를 요약하며 마무리한다.
보상(misqo,j) 개념 자체는 16절에 등장한다. 바울의 첫 논점은 간단하다. 그가 재정 독립 원칙을 지키는 것은 후원받을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는 다양한 근거를 들어 재정적 후원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확인한다. (4-14절) 하지만 그는 이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범사에 참았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는” 의도에서다. (12절) 바울은 이를 자신의 “자랑거리”로 내세운다. 그 누구도 바울의 이 “자랑”(to. kau,chma)을 평가절하할 수 없다. (15절)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바울의 그런 방침이 자랑거리가 되는가?
16~18절은 이 불가피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야 자랑할 일도, 보상을 받을 일도 아니다. 이는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임무를 받아 “강제로” 하는 것이지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다. (16-17절) 그렇다면 무엇이 바울의 자랑거리란 말인가? 18절에서 이 질문은 표면으로 나선다. “그런즉 내 보상이 무엇이냐?”(18a) 바울의 답은 이렇다. “내가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복음을 전할 때 나의 사도적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8b)
여기서 17절의 두 조건절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두 번째 조건절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는 16절을 볼 때 분명 사실과 부합하는 조건이다. 문제는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 하고 이어지는 첫 조건절이다. eiv+직설법의 형태는 가능한 사실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16절의 진술을 고려하면 하나의 수사적 가정, 곧 사실과 다른 상황을 설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자의로 복음을 전한다면 보상을 받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바울의 경우 이 원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회피하면 화를 받는 신적 강제력 아래 복음을 전한다. 따라서 “보상”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18절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나의 보상은 무엇인가?” 한 가지 해석은 “상 받을 것이 없다”라는 17절의 결론을 이 질문의 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보상이 없다는 것이 바로 나의 보상이다”. 이런 해석을 따르면 18절은 “보상” 개념을 역설적인 “보상 없음”의 개념으로 새로 정의하는 셈이 된다. “사도적 권리를 사용하지 않고 값없이 복음을 전한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나의 보상이다.” “나의 보상 =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라는 바울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런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는 적지 않은 무리가 따른다.
첫째, 가령 많은 주석가는 재정후원 혹은 이에 대한 권리를 보상과 같은 평면에 놓는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사도적 권리(evxousi,a)는 “보상”(misqo,j)과 분명히 구분된다. 재정후원의 원칙은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보장된 당연한 권리이고, 보상은 무엇인가를 자의로 행했을 때 주어지는 “반대급부”이다. 복음을 전하는 책임에는 이를 위한 권리가 수반되지만, 보상은 별개의 문제다.
둘째, 이런 역설적인 해석이 효력이 있으려면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행위가 어떤 의미에서 “보상”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점은 전혀 분명치 않다. “값없이 전하는 것이 나의 보상”이 바울의 최종 입장이라면, 그런 분명한 결론을 내린 뒤에(17절) 새삼 “그렇다면 나의 보상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되묻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셋째, 피(Fee)는 보상을 “보상 없음”의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바울이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입장임을 지적한다(17절; 4:1). 그러나 사명을 맡았다고 보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강제로 해야 하는 복음 전파 자체야 보상받을 일이 못 되지만, 의무를 넘어서는 희생에는 보상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3장 8절과 14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맡은 종들이라도 각자 자기의 노력을 따라 “자기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 말한다. 사명 수행 자체가 아니라 그 사명을 수행하는 방식에 따라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바울이 일종의 역설적 논법을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넷째, 역설적인 보상 이해는 논의의 흐름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든다. 16절에서 바울은 복음 전하는 행위 자체는 하나님이 “강제로” 시킨 일이므로 자랑할 근거가 못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15절에서 바울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자신의 “자랑”에 관해 말한다. 그 근거는 자신이 복음을 “값없이” 전했다는 것이다. 후원을 사양하고 스스로 일을 하며 값없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후원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도록 정하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한 걸음 더 넘어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랑”과 “보상”이 사실상 기능적인 동의어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개념이 기계적 동의어는 아니다. 값없이 전하는 행위가 자랑거리라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도 자연스럽다. 하지만, 보상의 경우 이야기가 다르다.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는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행위다. 그런데 이 “보상”이 값없이 전하는 행위를 가리킨다고 하자. 그렇다면 보상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또한, 비록 가상적이긴 하지만, 복음 전파 행위가 “자발적인” 경우에도 “보상을 가질” 수 있다. (17절) 그렇다면 이 경우의 보상은 무엇인가? 동일한 논리를 적용하자면, “자발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행위 자체가 보상”이라 말해야 하겠지만, 이 역시 터무니없는 말에 불과하다. 바울의 논리를 자연스럽게 이해하자면 바울이 말하는 “보상”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행동과 구별되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다섯째, 보상은 언제나 어떤 수고나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에 대한 사후적 반대급부를 의미한다. 바울의 언어 속에서 보상은 신자들의 수고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을 가리킨다. (3:8, 14) 바울 자신이 선택한 태도 자체를 가리켜 하나님이 주시는 “보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보상이 “보상의 근거”라는 뜻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하다면, 보상은 결코 우리의 수고나 행동 자체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더 분명한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중에서 어디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할 것인가?
이런 여러 근거에서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보상은 자신의 선교 방침 자체가 아니며, 오히려 자신의 희생적 섬김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실 부가적 반대급부를 의미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희생적 섬김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보상을 내리실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기대한 이 “보상”이란 무엇일까? 현 문맥에서도 이 보상의 내용은 명시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문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9장에서 바울의 논의는 사도적 권리 포기에 관한 대목(16-18절), 자신의 자유 포기에 관한 대목(19-23절) 그리고 운동경기에 관한 그림 언어를 활용한 결론(24-27절)으로 구분된다. 이 세 단락은 일관된 논리를 보여준다.
16~18절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여 “보상”을 얻는다는 생각이, 19~23절은 복음을 위해 자유를 포기함으로써 “복음에 동참하고자” 한다는 생각이고 마지막으로 24~27절에는 모든 일에 절제하여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고자 한다는 생각이 표현되어 있다. 곧, 각 단락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 자기를 포기하고 타인을 유익하게 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그렇다면 “보상”이나(18절), “복음에 동참함”이나(23절) “썩지 않을 면류관”이나(25절) “버림을 당하지 않는 것”(27절) 등의 표현은 모두 동일한 소망을 피력하는 다양한 표현들이라 볼 수 있다. “복음에 동참한다”라는 것은 복음 사역에 동참한다는 것이 아니라(빌 1:7),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 자체, 곧 복음이 약속하는 구원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27절의 “버림 받는다”라는 말은 종말론적 심판에서 면류관을 얻을 “자격이 없다”라는 판단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래 논의를 보라) 그렇다면 바울이 18절에서 말하고 있는 “보상” 역시 자신의 종말론적 구원이라고 조심스럽게 결론 내릴 수 있을 것이다.
2. 썩지 않을 면류관(고전 9장 24~27절)
24~27절은 9장의 논의를 이어받으면서 그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이 단락은 운동경기의 그림 언어를 활용한다. 24절 상반절은 누구나 다 아는 경기 원칙이다. 운동장에서 달리는 선수들은 많다. 그렇지만 상(to. brabei/on)을 획득하는 사람은 하나다. 이 단순한 진술은 제한된 상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 그리고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거치는 힘겨운 훈련의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지는 적용은 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경기장에서의 경기와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달리되 “상을 얻을 수 있도록” 그렇게 달려야 한다. (딤후 2:5, “규칙대로”) 25절은 이 권고의 의미를 보다 명시적으로 기술한다. 바울이 말하는 상은 모든 선수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참가상” 같은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실제 올림픽 경주에서처럼 한 사람만 월계관을 쓴다는 의미도 아니다. 이 그림 언어의 강조점은 하나다. 곧 경기장에서 겨루는 자는 누구나 더 나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한다”(evgkrateu,etai)는 사실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스타디움에서의 경기나 영적 경기나 마찬가지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땀 흘려 얻는 “상”의 종류가 다를 뿐이다.
스타디움에서 달리는 선수들은 결국 썩고 말 것들, 곧 올리브(올림픽), 소나무 (이스티미안 게임), 혹은 파슬리로 만든 관을 목표로 삼는다. 반면 우리는 썩지 않을 관을 바라본다. 하지만 원리는 동일하다. 상을 얻으려면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는 표현은 이 구절이 지금까지 계속된 논의의 연장임을 알게 해 준다. 재정 지원 문제에 있어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고 “모든 일에 참았다.” (12절) 또 그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하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19절) 그가 이 “모든 것”을 행한 것은 복음을 위한 것이었고, 이를 통해 그는 스스로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자 하였다. (23절)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행하고, 모든 일에 절제하며,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는 바울의 모습은 자기 지식으로 형제를 실족하게 하거나 다른 성도를 정죄하는 일에 몰두하는 성도들에게 따끔한 훈계가 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바울이 말하는 썩지 않을 “관”(ste,fanoj)이 무엇이었나를 묻게 된다. 여기서도 바울은 이 관의 구체적 내용을 묻지는 않는다. 하지만 “썩지 않을” 것이라는 표현은 그 관의 성격을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규정해 준다. 바울의 언어에서 “썩지 않는다”는 개념은 대부분 종말론적 소망, 보다 구체적으로는 영생의 소망을 가리킨다. 자연 썩음은 영생 혹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및 부활 등과 상반되는 운명을 가리킨다. (갈 6:6-7; 롬 2:6-11; 고전 15:50, 53-54; cf. 벧전 1:4-5) 그렇다면 이 “썩지 않는” “관”이란 종말론적 구원과 구별되는 어떤 부가적 “상”이 아니라, 성도들의 유일한 소망의 대상인 종말론적 구원 혹은 영생의 소망 자체라 말할 수 있다. 바울의 언어에서 “달리기”는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현재적인 삶을 묘사한다. 우리가 기다리는 소망은 뒷짐 지고 한가로이 기다리는 그런 소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애써 자신을 다스리고 땀 흘리며 달려가야 할 육상경기와 같다. 말하자면, “관”은 바닥에 앉아 놀고 있는 이들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달려가서 “쟁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영생의 소망이 이와 같다는 것이다.
26~27절에서 바울은 이 그림 언어를 자신의 사역에 적용한다. 두 번 반복된 부정 진술에 이어(26절), 긍정 진술이 나오고(27절a), 그다음 목적이 제시된다. (27절b, mh, pwj) Ou[twj tre,cw는 “이렇게 달음질하라”라는 앞의 권고를 생각나게 한다. 흥미롭게도 여기서는 달리기 비유에 권투 혹은 격투기 이미지가 더해진다. 앞에서 강조했던 사항, 곧 절제의 필요성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다. 물론, 두 그림 언어는 사실상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바울의 달리기는 방향 없이 아무렇게나 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의 달리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권투 경기의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바울의 싸움은 목표물도 없이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는 것이 아니다. 그의 펀치는 분명한 목표물을 겨냥한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격투기 그림을 비튼다. 다른 경기에서처럼 바울이 “때려서 상처 내는”(u`pwpia,zw) 대상은 자기 앞의 적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몸, 곧 자기 자신이다. 바울은 자기의 몸을 때려 “종으로 삼으로” 한다. (19절) 그리고 그가 이 싸움을 싸우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잘 전하고서 정작 자신은 상을 얻을 자격이 없는 자로 버림을 받지(avdo,kimoj) 않기 위해서다. (NIV)
두 그림 언어의 병행 관계를 고려하면, 상 받을 자격 있는 자로 인정되는 것과 달음질하여 상을 쟁취하는 것은 같은 결과를 가리킨다. 앞에서 우리는 “썩지 않을 상”은 곧 종말론적 구원 혹은 영생 자체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자격이 없어 버림받는다”라는 개념 역시 비슷하다. 이 점에서 가장 시사적인 것은 고후 13:5~7이다. 여기서 바울은 교인들을 향해 그들이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를 시험해 보라고 도전한다.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자격이 없어 버림받은 자들”(avdo,kimoi)이다. (3:5)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자격이 없어 버림받은 자가 아님을 성도들이 알아주기 바란다. (3:6) 문맥에서 분명해지듯, 여기서 “자격이 없어 버림받는다”라는 것은 “믿음 안에 있다” 혹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중에 계신다”라는 것과 상반되는 상황을 가리킨다. 물론, 이는 종말론적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다. (히 6:8) 결국 바울이 말하는 바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해 놓고 자기 자신은 구원에 합당하지 않는 것으로 버림받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는 것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복음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려고 한다는 말과 같다. (23절) 이런 “상”을 얻기 위해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또한 “모든 일에 절제하며” 사도로서의 경주에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 역시 이런 바울의 모습을 본받아 자기를 기쁘게 하며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삶을 버리고 모든 일에 있어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
3.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빌립보서 3:12~14)
육상경기 모티브는 빌립보서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서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하나의 경주로 제시하고 이를 성도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한다. 여타 구절에서와는 달리 “달린다”는 동사 대신 “추구한다” 혹은 “뒤쫓아 간다”라는 동사가 쓰인 점, “목표를 향하여”라는 명시적 첨가구 그리고 몸을 앞으로 구푸려 달리는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단어의 삽입 등으로 인해 달리기의 목표지향적 성격이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난다. 이와 더불어 “아직” 목표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명시적 선언, 그래서 “뒤에 있는 것은 잊고” 오로지 앞만 바라보고 달린다는 고백은 바울의 의도를 더없이 분명하게 표현한다.
바울은 자신이 고대하는 상을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으로 부른다. (14절) 그렇다면 이 “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 여기서도 상의 내용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될 뿐, 실제 그 내용이 논의의 주재는 아니다. 하지만 역시 문맥에서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하다. 3장 전체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했던 자신의 삶을 기술한다. 이 목표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를 얻음”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됨”으로 표현된다. 이는 또 “그리스도의 믿음에서 나는 의로움”을 얻는 것으로, 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묘사된다. 바울이 서로 상이한 개념들을 두서없이 뒤섞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모두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결과를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목표를 바라보며 “뒤쫓아 가는” 것이나(12절)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 “뒤쫓아 가는” 것(13~14절) 역시 같은 달음질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바울이 3장에서 활용하고 있는 다양한 표현을 포괄적으로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잠시 후 20절에서 바울은 또 하늘로부터 구원자 예수를 기다린다고 말한다. (살전 1:10) 이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키실” 것이다. (21절; 살전 1:10) 이 몸의 변화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는다”라는 고린도전서의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15:49), 10~11절에서 언급한 부활의 소망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종말론적 구원에 참여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3:20) 그러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그의 몸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될 그 구원의 상을 바라보며 사도적 경주를 계속한다. 바울은 바로 이 “상”을 “위하여” 바울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다.
4. 의의 면류관(디모데후서 4:7~8)
마지막으로 같은 달음질 이미지를 활용하는 딤후 4:7~8을 살펴보자. 여기서 운동경기의 그림 자체는 고린도전서 9장에서 보는 것과 동일하다. “싸움/경주”라는 일반적인 표현은 금방 “달음질”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용어로 바뀐다. 물론 이 싸움은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한 일반적인 경기가 아니라 “선한” 싸움, 곧 “믿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재미있게도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승리자로 그린다. (3번 반복된 완료시제, 7절) 경기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바울은 끝까지 사도로서 하나님께 대해 신의를 지켰다. 이제 남은 것은 승리자에게 약속된 “면류관”을 받는 일이다. 이 상은 “그날”,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주어진다. 물론 바울 뿐만 아니라 주의 오심을 “사모해 왔던” 모든 이에게 공히 주어질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받을 이 면류관을 “의의 면류관”이라 부른다.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이나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처럼 면류관이 소유격 명사와 결합된 유사 구절들을 일견하면, 여기서 “의로움”은 면류관 자체의 내용, 곧 “의로움이라는 면류관”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이 심판 때에 내려질 칭의의 판결은 아닐 것이다. (갈 5:5) 첫째, 마태복음과 마찬가지로, 목회서신에서도 “의로움”은 통상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은사로서의 의가 아니라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의 하나이다. (딤전 6:11; 딤후 2:22; 3:16; 4:8; 딛 3:5) 둘째, 칭의의 미래적 개념이 선명히 드러나는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와는 달리, 목회서신에서는 종말론적 칭의 개념을 설정하기 어렵다. 특이하게 그리스도께서 의롭게 되신 사실이 언급되거나(딤전 3:16), 성도의 칭의 역시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된다. (딛 3:7) 그렇다면 여기서 “의”는 심판 때의 칭의 선고보다는 생명과 평화 등과 같이 구원의 상태로서의 의로움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바울은 “종말론적 구원”을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첫째, 잠시 후 바울은 자기를 모든 악한 일들에서 건지실 뿐 아니라 “천국에 이르도록 안전히 인도하실”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다. (4:18) 이 소망은 죽음을 예감하며 하나님이 주실 면류관을 기다리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둘째, 그 면류관은 바울에게뿐만 아니라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공히 주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은 어떤 특정한 종류의 상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주어질 종말론적 구원 자체를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또한, 이 면류관은 지금 “나를 위해 예비되어 있다.” 이 면류관은 “그날”, 곧 예수의 재림 때에 주께서 나에게 “주실”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삶을 하나의 달음질로 간주하고, 그 달음질에서 승리하여 “면류관”을 상으로 받고자 한다는 생각을 보여주는 구절들을 살펴보았다. 문맥을 통해 그 상이 종말론적 구원과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지만, 사실 바울의 일차적 관심은 상 자체를 해명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면류관”을 얻기 위한 “싸움” 혹은 “달음질”을 말하는 이유는 승리를 위해 힘겨운 훈련과 절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현재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신자의 삶이 육상경기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기다림이 결과가 보장된 무위의 기다림이 아니라 힘겨운 투쟁과 절제를 요구하는 역동적 기다림, 곧 소망을 바라보며 “인내해야”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운동경기에서처럼, 상이란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법이라는 엄연한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갖는 이런 역동적 성격을 부각해 준다. 물론 우리는 구원의 이런 역동적 성격을 소위 “행위 구원”적 논리로 비약할 수 없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서 순종의 필연성이 생겨난다. 이 점은 다음에 살펴볼 구절들에서 더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V. 주님을 섬기는 종들의 보상(고린도전서 3~4장)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을 비롯한 사역자들의 위상에 관한 논의 중에 보상 개념을 언급한다. 1절에서 바울은 교회 내의 시기와 분쟁이 영적 태도와는 어긋나는 육체적 태도요,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 이런 현상은 고린도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임을 드러낸다. 고린도 교회 내의 이런 분쟁은 지도자들의 역할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관련이 있다. (3:4, 1:10) 따라서 바울은 이들 사역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새롭게 가르침으로써 지도자들을 빌미 삼은 분쟁이 얼마나 비 복음적인가를 보여주려 한다.
우선 5~9절은 지도자의 위상을 분명히 정립한다. 분명 아볼로나 바울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다. (9절) 하지만 성도들은 이 역할의 중요성을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동역자란 실상 주님께서 부여하신 각자의 역할대로 주인을 돕는 종들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바울은 “심었고”, 뒤를 이어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6절) 모두 나름 귀중하지만, 결국 보조적 역할에 불과하다. 사실 결정적인 것은 생명을 자라게 하는 것인데, 이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배타적 역할이다. 따라서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다. (7절) 하나님과 비교할 때 아무 중요성이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종이라는 점에서 이 둘은 하나이다. (8절 a)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기신 임무를 수행하는 자로서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을 뿐이다. (8절 b) 바울이나 아볼로에게는 독자적 권위가 없다. 이들은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 아래 복종하여 섬기는 자들에 불과하다. 이런 종들을 내세워 분열을 조장하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4:6)
10절 이후 바울은 9절에 언급된 “건물” 이미지를 발전시킨다. 바울 자신은 “심는 자” 혹은 “지혜로운 건축자”로 교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라는 튼튼한 기초를 닦아 놓았다. 그다음 아볼로처럼 “물주는 자”들이 와서 그 기초 위에 건물을 올릴 것이다. 물론, 이들은 어떻게 세울지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날”에 심판의 불이 각 사람이 세운 것을 태워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13절, 참조 살후 1장) 자기 사역이 불의 시험을 견디면 “상을 얻고”, 그 시험을 견디지 못하면 “손해를 볼” 것이다. (15 a) 그렇지만 사역자 자신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불 가운데를 통과한 것과 같을” 것이다. (15 b)
보상을 논의할 때 중요한 것으로 자주 언급되는 이 구절은 해석이 간단치 않다. “제미오데세타이”(zhmiwqhvsetai)는 “손해를 본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처벌받는다”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심판의 문맥에서 처벌이란 사실상 정죄와 같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천하를 “얻고”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zhmiwqh'/) 것을 말하는 문맥에서 쓰이고 있다. (마 16:26) 또한, 종말에 관한 여러 비유에서 보이는 것처럼(마 25장), 칭찬과 상을 잃는다는 것은 곧 영원히 버림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본다면 “손해를 본다” 혹은 “처벌받는다”라는 표현에 대한 가장 손쉬운 해석은 구원을 얻는 데 실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15절) 그렇다면 이는 구원은 얻었지만, 그 외의 다른 어떤 보상도 얻지 못한다는 말인가? 이것이 가장 손쉬운 해석이지만, 여기에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다. 도대체 “불을 통과한 것 같은” 구원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불 시험을 견뎌낸 사람들의 구원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인가? (벧전 4:12) 그렇다면 시험을 견딘 사람들이 받는 “보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또한, 이어지는 16~17절의 엄중한 경고 역시 고려해야 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17 a, 수 7:25) 17절의 ‘누구든지’는 분명 12절의 ‘누구든지’와 연결된다. 그런데 여기서 “멸망”의 대상은 그 사람의 ‘공력’이 아니라 ‘그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는 종말론적 멸망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전을 “잘못 세운” 사람은 구원을 받아도 성전을 “파괴하는” 사람은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의미일 수도 없다. 고린도전서 9장 논의에서 본 것처럼, 원칙적으로 “자격 없는” 자로 확인되어 버림을 받을 가능성에는 바울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일견 이 구절이 보상이 있는 구원과 보상이 없는 “초라한” 구원을 구분하는 듯하지만, 이는 바울의 통상적 사고방식과 어울리지 않는다. 앞에서 본 것처럼, 바울에게 있어 “보상”은 대개 “종말론적 구원 자체”를 가리키며, 구원과 구별되는 별도의 보상 개념을 달리 확인할 도리는 없다. 아마도 우리는 이 구절의 근본적인 애매함을 그대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바울 스스로는 우리가 느끼는 이런 어려움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중요한 것은 보상 개념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교회 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상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보상 개념을 소개하는 바울의 의도는 분명하다. 모든 사역자는 심판의 불을 통과할 것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어떻게 세울지 조심해야 한다”라는 사실을 경고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보면, “공력은 불타도 자신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은 무조건적 구원을 보장하는 반가운 구절로 다가올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문맥 속에서 바울의 의도는 그와 정반대이다. 여기서 이 진술의 의도는 “설사 공력이 불타도 구원을 잃지는 않는다”라는 위로가 아니라, “설령 구원을 얻더라도 마치 불 가운데를 통과한 것과 같을 것”이라는 경고, 설령 구원을 얻더라도 심히 부끄러운 구원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는 엄중한 경고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그래도 구원은 얻는구나”하는 결론을 내리고 싶다면, 17~18절의 엄중한 경고 역시 다시 음미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4장에서도 바울은 기본적으로 같은 생각을 이어간다. (1~5절) 바울이나 아볼로는 모두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곧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서 맡은바 사역을 수행하는 자들이다. (4:1) 이들에게 기대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책무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4:2)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이들은 그들의 신실함 여부에 따라 주님의 법정에서 심판받을 것이다. (4:4) 따라서 사람들은 주님이 오시기까지 이들 사역자에 관한 판단은 삼가야 한다. 주님이 오시면 그때야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에파이노스)이 있을 것이다. (4:5)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역시 마지막 심판과 관계되는 개념이다. (롬 2:29, 고후 10:18, 벧전 1:7)
현 문맥에서 바울이 보상 개념을 활용하는 의도는 분명하다. 사역자들은 각자 수고에 따라 하나님께 “보상”과 “칭찬”을 받는다. 이들은 자기의 권위로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다. 그들은 유일한 주권자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으며, 자신의 사역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진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서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긴 역할에 따라 교회를 섬긴다. 물론, 이들의 수고는 심판의 불로 시험받을 것이다. 수고가 값진 것으로 남으면 그만큼 상을 주실 것이고, 무가치한 것으로 드러나면 벌을 받을 것이다. 비록 이것이 구원 자체의 상실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집을 세우는 이들은 어떻게 세울지 주의해야 한다. 지금처럼 분열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움직여서는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다. (3:17-18)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보상 개념의 중요한 한 면을 본다. 보상 개념, 더 나아가 ‘상주시는 하나님’(히 11:6) 개념은 하나님의 권위 아래 움직이는 사역자들, 혹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수고하도록” 부르시며, 또 우리의 수고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리신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주고받는” 계약적 관계에 있다거나 스스로 보상을 “획득한다”라는 발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사명-수고-보상/심판이라는 성경적 개념의 틀은 자신의 주권대로 사명을 부여하고 또 수고한 대로 보답/보응하시는 주권자 하나님과 이 주권 아래서 종으로 섬기는 성도들의 관계를 표현한다. 여기서 우리가 “수고한 만큼” 받는 것은 결국 우리 힘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수고와 보상이 하나의 필연으로 묘사되는 것 자체가 공평하신 하나님 혹은 공의의 심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를 행위 구원의 논리와 연결하는 “주인과 종”이라는 근본을 망각했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수고에 대해 구원/영생의 은혜로 갚아주신다. 죄의 “필연적 결과”는 죽음일 수밖에 없지만, 거룩한 삶의 마지막은 영생이라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로마서 6장의 결론은 이런 생각을 매우 잘 표현해 준다. (롬 6:23)
VI. 주께로부터 오는 “유업의 상”(골로새서 3:23~25)
보상 논의를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다룰 구절이 있다. 바로 골 3:23~25이다. 문맥상 이 구절은 종들을 향한 권면의 일부로서, 인간적인 주인에게 하듯 일하지 말고 마치 주님께 하듯 성의를 다하라고 명령한다. 이런 태도가 요구되는 것은, 인간적 상전이 아니라 바로 “주께로부터” “유업의 보상/보응”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 혹은 근거를 제시하는 eivdo,tej) 성도들은 바로 이 주님의 종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올바른 삶에 대한 보상은 “유산”으로 간단히 정의된다. 전승사적으로 유산이라는 성경적 개념은 본래 가나안 땅을 주리라는 아브라함 약속에 근거한다. 초기 유대교와 초대교회에 이 개념은 종말론적인 땅(마 5:5), 곧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천국(마 5:3, 10; 25:34; 갈 5:19-21; 고전 6:9-10; 15:50; 엡 5:5), “세상(롬 4:14), 혹은 영생(막 10:17; 마 25:46)에 대한 상속의 소망으로 발전되었다. 물론, 이는, 공관복음의 부자 관원 이야기에서 보듯, 종말론적 구원을 얻는 것과 같은 뜻이다. (행 20:32; 벧전 1:4!) 비록 사회적 주종 관계에 얽매여 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보다 더 근본적인 현실은 종이나 주인 모두 유일하신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인간적 주인을 섬기는 일은 하늘에 계신 주인을 섬기는 삶 속으로 편입된다. 물론, 주인들 역시 자기들의 상전이 하늘에 있다는 더 큰 현실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주께서는 이런 섬김에 대한 보상으로 약속하신 “유산”, 곧 영생/구원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인과 종이라는 지상적 관계 속에서도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한다. (3:1)
이 구절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유산이라는 보상의 기대뿐 아니라, 그 반대 곧 유산을 얻을 자격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경우에 대한 경고가 뒤따른다는 사실이다. 인간관계의 지평을 넘어 “주 그리스도를 섬긴다”라는 기독교적 삶의 정황 속에는 유산에 대한 소망뿐만 아니라 “불의를 행한 자는 그 행한 불의에 대한 보응을 받을 것”이라는 경고도 포함된다. 24~25절에 사용된 동사들의 중립적 성격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경우에도 보상이 있다. 하지만 이때의 보상은 부정적인 의미의 보상, 곧 불의에 대한 처벌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부정적 결과의 가능성은 앞서 2장 18절에 이미 언급되었다. 바울은 “아무도 너희가 상 받을 자격이 없도록 만들지 못하게 하라”라고 권고한다. 여기 사용된 단어 katabrabeu,w는 “상을 빼앗다” 혹은 “상 받을 자격이 없다고 판정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고 헛된 가르침에 휩쓸리는 이들은 결국 약속된 상을 받지 못할 것임을 암시하는 경고이다.
이런 권면은 “주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는다”라는 원칙에 의해 지탱된다. (3:25b) 여기서 우리는 보상 개념의 바탕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곧, 심판주 하나님의 공평함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대한 이런 신념은 성경적 전통에서 자라난 것으로(신 10:17; 대하 19:7; 시 61:12; 욥 34:19), 신약 성서 기자들에게서도 빈번하게 확인되는 원칙이며(행 10:34-35; 약 2:1; 벧전 1:17), 바울 역시 여러 번 이 원칙을 천명한 바 있다. (롬 2:11; 갈 2:6; 6:7-8; 엡 6:8-9; 살전 4:6; 살후 1:5-10) 마지막 심판과 관련하여 이 신념은 곧 “모든 사람이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명제가 된다. (고후 5:10; 롬 2:6; 14:10-12) 하나님은 어떤 신비로운 이중적 기준을 적용하며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기준의 “의로운 심판”에 직면한다.
우리 행위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필연적 결과가 따른다는 진리는 종종 “심은 대로 거둔다”라는 농사의 그림을 통해 제시된다. 곧,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진리다. 불신자들과의 관계에서 이 진리는 환란을 인내한 신자들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위로가 된다. (살후 1장) 하지만 보다 많은 경우 이 원칙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이스라엘 혹은 교회에 적용된다. 이때 이 진술의 효과는 은혜와 믿음을 오해하여 생기는 무책임한 삶을 지적하고, 현재 성도들의 삶이 어떤 것이든 그에 따른 필연적 보응을 받을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곧,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지는 자로서(accountable to God) 각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철저한 책임을 져야 한다. (responsible for one’s behavior, 갈 6:4) 갈라디아서 6:7~9절은 이 원리를 매우 선명하게 진술한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세상, 곧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은 심는 대로 거두는 세상이다. 여기서 우리의 삶은 성령의 밭에다 심는 행위이거나 육체의 밭에다 심는 행위 둘 중 하나다. 육체를 따른 사람은 멸망을 수확할 것이고, 성령을 따른 사람은 영생을 수확할 것이다. 현재 우리의 선택은 하나님의 공정하신 통치 아래 장래의 멸망과 영생을 선택하는 행위가 된다. 이는 구원/영생의 문제에 있어서조차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스스로 세우신 원칙을 거스르시지 않는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경고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자가당착이 빈번한 현실임을 반증하지만, 그렇다고 원칙이 양보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는 로마서 2장 6-11절의 선언 역시 결코 모호하지 않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런 성경의 확언을 행위 구원의 관점과 연결하는 것은 구원 자체를 인간 중심적 개념으로 왜곡했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구원은 내가 얻어 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 구원이란 하나님의 “부르심”, 곧 분명한 뜻과 목적을 염두에 둔 일종의 “소환”이다. 물론 이 소환의 최종 목표는 “나라와 영광”이라고 표현되는 종말론적 구원이다. 하지만 이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하는 긴 삶의 “과정”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삶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육체를 따라” 살기를 포기하고 새로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순종을 통해 구체화 된다. (갈 6:8-9; 롬 6장; 8:1- 17) 에베소서 첫 부분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처럼, 태초 이전부터 작정 된 하나님의 계획은 구원의 최종 결과뿐만 아니라 이런 과정 전부를 포괄한다.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신 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분명한 목적을 갖는 것이며(1:4), 우리가 새로운 창조의 은총을 입도록 “미리 준비하신” 것 역시 우리를 선한 일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2:10) 또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그리스도를 현실화하는 것이기에, 이 새로운 삶은 곧 그리스도 사건의 목적이기도 하다. (5:25-17) “그가 우리 대신하여 자신을 주신 것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딛 2:14) 이것이 보상 개념이 가르치는 교훈의 하나다. 곧 우리는 이런 분명한 계획을 갖고 구원의 과정을 실현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부르심 아래 있으며, 부름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주권자 하나님께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따낸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과정 자체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책임 있는 소환”을 포함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을 밝히는 수단의 하나로 보상 개념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VII. 결론적 논의
지금까지 우리는 보상 개념과 관계된 몇몇 대표적 구절들을 주석해 보았다. 결론 삼아, 지금까지 논의에서 드러난 생각 중 몇 가지를 정리해 보자.
첫째, 주석적 관점에서 보자면, 보상 개념 자체에 관한 바울의 진술에 어느 정도 모호함이 있다. 대개의 경우 보상은 종말론적 구원에 상응하지만, 고린도전서 3장에서처럼 보상이 구원 자체와 구별되는 듯한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물론 바울서신 내에 구원과 구별되는 보상을 말하는 명시적 진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애매함이 아쉬울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 이는 바울이 보상 개념을 엄밀히 정의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 자체가 보상 개념에 접근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이 될 수 있다. 바울의 일차적 관심은 이 개념을 신학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의도는 이 보상 개념 및 그 개념인 행위심판 사상을 활용하여 보다 현실적이며 목회적인 목표, 곧 거룩한 공동체 형성에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곧 보상 개념 자체는 다소 모호하지만, 이 개념을 소개하는 바울의 의도는 분명하다. 우리도 바울의 의도에 더욱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무분별한 보상 개념에 집착하는 실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바울서신의 맥락 속에서 보상 개념은 주님이신 하나님과 이 주인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사역자/성도의 관계를 강조한다. 이 관계에서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나오고, 이 책임은 약속하신 보상을 얻기 위한 노력 곧 절제와 인내를 요구한다. 이처럼 보상 개념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실존의 초월적 지평을 분명히 하고, 이 초월적 지평 속에서 우리의 삶은 순종이라는 역동적 인내가 된다. 이처럼 기독교적 실존의 책임성을 부각하기 위해 바울은 보상 개념을 활용한다.
셋째, 결국 비슷한 생각이지만, 보상 개념은 치우침이 없이 각 사람을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보상 개념은 우리가 자기중심적 선택 사상이 야기할 수 있는 교만한 착각을 버리고, 공평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태도로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은혜란 애초에 인간의 계산을 넘어가는 것이기에, 곧잘 “값싼” 것으로 오해될 소지가 크다. 이런 치명적 오만과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바울은 공정한 심판자 하나님을 자주 언급하며, 이를 위해 자주 보상 개념을 활용한다. 특히 보상 개념이 긍정적 보상뿐 아니라 부정적인 심판과 처벌의 맥락에서도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은 통속적 상급 개념에 대한 중요한 교정책이 된다.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중심, 곧 그 중심의 열매인 행위를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이것은 바울 역시 그대로 믿고 선포한 신학적 확신이었다. (“내 복음,” 롬 2:16) 보상 개념은 우리의 생각을 끊임없이 이런 하나님께로 이끈다. 그리고 이분은 우리를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이다. 만약 우리가 이해하는 복음, 특히 은혜와 믿음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이런 “풍성함”을 놓치는 것이라면, 이는 우리의 하나님 이해에 무언가 근본적인 결함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보상과 관련한 바울의 가르침은 피상적으로 이해되어온 (혹은 오해되어 온) 바울의 구원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이 바울 복음의 한 차원이라면, 우리의 구원관 역시 이런 하나님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라야 한다. 혹자는 이를 “순수한” 복음의 왜곡이라 느낄지 모르지만, 오히려 이는 우리의 오만과 욕심에 가려진 복음의 “걸림돌”을 다시 드러내는 작업에 가깝다. 특별히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신학적 작업을 넘어서는 보다 근본적인 회개의 한 몸짓으로 다가올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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