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성만찬 연구

하나님아들 2024. 1. 20. 23:26

 

성만찬 연구

 

목 차

 

. 서 론 .................................................... 1

A. 연구동기와 목적 ............................................ 1

B.연구방법과 범위 ........................................... 3

 

.성만찬에 대한 성서와 신학적 고찰 .............................. 4

A. 성만찬의 성서적 근거 ....................................... 5

1. 성만찬의 성서적 중요성 ................................. 5

2. 성만찬의 역사적 기원 ................................... 8

3. 성만찬의 성서적 의미 ...................................3

B.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견해 ................................. 16

1. 가톨릭의 견해 ......................................... 16

2.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 21

 

. 성만찬 예전의 실천 ......................................... 30

A. 성만찬의 현대교회의 견해 ................................. 31

1. 감사의 예전으로서의 성만찬 ............................ 31

2. 그리스도와 연합으로서의 성만찬 ......................... 33

3. 회상으로서의 성만찬 ................................... 34

4. 그리스도의 희생제로서의 성만찬 ........................ 36

5.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성만찬 ............................ 37

B. 한국 개신교 공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갱신 ............... 39

1. 개신교 공예배의 문제점 ................................ 39

2. 공예배에 있어서 설교와 성만찬의 균형 회복 ............ 54

3. 성만찬 예전 갱신의 모델 .............................. 59

 

. 공예배와 예전복 ............................................. 75

A. 예전복의 의미와 기능 .................................... 75

B.예전복의 성서적 고찰 ..................................... 77

1. 구약시대의 예전복 ..................................... 78

2. 신약시대의 예전복 ..................................... 84

C. 현대사회에서의 예전복 .................................... 85

1. 성만찬과 예전복 ........................................ 85

2. 예전복의 필요성 ........................................ 88

D. 개신교회의 공예배에 따른 예전복 모델의 제시 ............... 89

1. 가운 (Gown) ........................................... 90

2. 영대 (Stole) .......................................... 91

 

. 결 론 ................................................... 93

 

참 고 문 헌 ............................................... 96

 

- -

. 서 론

 

A. 연구동기와 목적

 

세계교회의 예배갱신 운동은 그리스도교의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

고 보전해 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다.(박근원, 오늘의 예배론(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2),

P. 따라서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 지고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우주적 주권과

권위를 가진 이가 없으므로 피조물은 그에게만 최고의 가치를 인정하며 돌려야 한다.

그것이 곧 예배이다. ) Paul W.Hoon, The Integrity of Worship (Nashiville:Abingdon

Press, 1971), p.91.

 

한편 공예배는 신자들의 개인적 삶의 집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

름받은 성도의 공동체 즉 교회적인 예배를 말한다. ) 김수확, 개혁파 예배학

(서울:보문출판사, 1982), p.76.

따라서 공예배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성도들이 주의 날에 모여 그리스도의 몸

을 이루고 성경 말씀과 성만찬을 먹으며 기도하는 일과 찬미하는 일을

하며, 신앙고백을 통하여 구속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헌신하

며 섬기기로 결단하는 교회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 백천기,

공예배의식 갱신에 관한 연구(예배학박사학위논문,미국훌러신학대학원, 1984), p.7.

 

그런데 한국 개신교 예배는 초기 한국교회에 복음을 전한 경건주

의적이고 복음주의적인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의식(Liturgy) 없는 메마

른 예배를 드림으로써 귀중한 기독교 유산인 성만찬 의식을 경시해 왔

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신앙 공동체 의식도 고취되지 못한채 오직

설교 중심의 예배로만 치우쳐 온 까닭으로 예배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

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와같은 점에서 개신교의 예배현장이 설

교자의 설교에 예배의 성패를 걸고 있다는 사실과 말씀으로 성장된 성

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전의 의미와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는 데서

심각성을 느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예배에 따른 예전복에 대한 관심은 더 더욱 없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주로 착용하는 검정색 가운(Black Gown)은 예배

의식에서 으례히 착용하는 것으로 생각할 뿐,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예

복으로써 상징하는 의미가 전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의 임

무와 기능을 상징하는 예전복은 성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예배의미 표

현의 상징적 가치가 있으며 목회자 자신에게나 예배에 참여하는 성도

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그러므로 개신교 예배의 성만찬 의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의

미를 살려서 오늘의 한국교회에 있어서 바람직한 성만찬이 예배속에

이루어져야 하며, 예전복 역시 예전복의 원칙이 없는 개신교회에 성서

적 모델인 예전복이 정착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신교 공예배에 있어서의 성만찬의 위상 확립과

예전복의 필요성을 연구하고자 하는 동기를 얻었다. 또한 그러한 의

미와 가치를 살펴 실제 예배에 적용하는 갱신 방안을 제시하고자 함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B.연구방법과 범위

 

본 논문의 연구방법은 지금까지 발표된 논문과 전문서적들을 참고

하여 이론적인 기초를 서술하고자 한다.

장에서는 연구동기와 목적, 그리고 방법과 범위를 서술하

, 장에서는 성만찬에 대한 성서적 근거와 가톨릭과 개혁자들

의 신학적 견해를 고찰하며, 장에서는 성만찬에 대한 현대교회

의 견해를 살펴보고 성만찬 예전 갱신 모델을 제시하려고 한다.

장에서는 예배갱신에 따른 예전복의 의미와 성서적 근거를 살펴보

고 예전복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마지막 제 장에

서는 결론을 맺고 본 논문의 연구에서 발견된 문제를 제언하고자 한

.

 

- -

. 성만찬에 대한 성서와

신학적 고찰

 

 

기독교의 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은 초대 사도들로 시작된 기독교

예배 원형에 속한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예배와 유대인의 회당예배에 참예 하였었다.

1) 이장식, 예배와 성찬의식 , 기독교 사상 , 1979.12. p.64.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나누신 자리에서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을 떡과 포도주로서 상징적으로 예고하시고 새 언약 또

는 계약을 셰우셨다. 2) Ibid.

그리고 이 성찬식을 행하라고 부탁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탁과 명령을 살려서 사도들이 교회를 시작하여

예배하러 모였을 때마다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고 주님의 고난을 기억

하였다. 따라서 성만찬은 교회가 형성될 때부터 예배의 요소로써 말

씀 선포와 함께 예배 안에 존재하였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구원

을 확신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같이 떡을 떼면서 순수한 교제를 나눔

으로써 성만찬의 교훈과 의미를 회상하였고 기쁨과 찬미의 모임을 가

졌다(2:46,47). 성만찬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장 기본적

인 요소였고 3) 김동수, 예배학개론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7), p.184.

그리스도와의 일체를 경험하는 거룩한 의식이었다.

러므로 성만찬 의식을 뺀 기독교의 예배는 불완전한 것이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성만찬에 대한 성서와 신학적 고찰

을 하려고 한다.

 

A. 성만찬의 성서적 근거

 

1. 성만찬의 성서적 중요성

 

기독교 공예배는 말씀과 함께 드리는 성만찬 예전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고 세례를 받고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침을 받은 사람은 누

구나 이 성만찬 식탁에 의무적이면서도 특권적인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4) 정장복, 예배학 개론 (서울:종로서적, 1986), P.180.

이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동체인 교회는 지금까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개신교의 상황을 관찰해 보면 성만찬의 본래의 보편

적이며 성서적인 의미가 많이 상실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많

은 교회가 이 성만찬을 기념의식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고 있다.

5) 도널드 G. 블러쉬, 목회와 신학 , 오성춘, 최건호 역

(서울: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출판국, 1992), p.52.

 

성만찬은 언제나 교회의 거룩한 예배행위이며, 또한 그 생활의 한

부분이다. 예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래 오늘에 이르도록 교회의

기나긴 역사 가운데 참된 신자들은 이 성례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

의 은혜를 통한 최고 행위로 생각하였고, 자신들을 완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응답으로 생각하였다.

6) Robert G. Rayburn, 예배학 , 김달생, 강귀봉 역 (서울:성광문화사, 1988), p.302.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으며 초대 기독교

공예배의 성서적 원형은 설교와 성만찬을 행하는 것이었다.

쿨만(Oscar Cullman)은 이러한 성만찬을 새 계약의 재 다짐 또

는 그리스도를 다시 뵙고 경험하는 예전

7) Oscar Cullman, Essays on the Lord's Supper (Richmond:John Knox Press, 1972), p.19.

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성만찬의 중요성을 인식한 초대교회 신자들은 세례를 받은

즉시 성만찬에의 참여를 허락받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생활을 계속하였

. 8) 정장복, op. cit., p.180.

초대교회의 성만찬은 깊은 감격과 생명력을 지닌 예전으로써

공예배에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의 예전의 주제는 십자가 위

에서 희생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하신 예수 그리스

도였고, 이 예전에 참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총과의 만남이라는 생동적 신

앙을 갖게한 것이다. 9) Ibid., p.181.

뿐만 아니라 이 현장에서 하나님 자신이 인간

에게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며, 또한 그의 원하시는 대로 새롭게 소생

한 무리들은 그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의 사건을 이 예전속에서

이루게 됨으로써 이 성례전을 가리켜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행위(the

central act)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10) Ibid.

 

또한 성만찬은 하나님께서 현재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진정한 형

태와 기준, 그리고 원천은 하나님의 아들이 겪은 수난과 승리라는 것

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기 때문에 성만찬은 예언의 말씀에 대한 이해

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완전한 행

위로써,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모든

세례 받은 자들은 성만찬 가운데서 죄 사함을 보증받으며(26:28),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는다(6:51-58).

이상과 같이 예수께서 자신들의 존재와 삶의 근거를 발견한 새 사

람들을 위해 제정하신 11) J.J.Von Allmen, 주의 만찬 , 박근원 역 (서울:양서각, 1986),

p.29.

이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역사 속에 중심적

위치를 지켜왔다. 때때로 지나친 해석에 의하여 수난을 당하기도 하

였으나 기독교 예배 중심으로써 그 소중한 의미는 지금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자들은 교회는 말씀과 성례전이 바르게

선포되고 집례되어지는 곳이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이 신앙

적 전통으로 우리에게도 전수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성례전이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볼 때 과연 우리는 초대교회가 추구하고 경험했

던 그 감격을 소유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성만찬의 예전은 나를 기념하라 는 언어적인 뜻 이상

의 신학적인 의미 부여에 무관심한 것을 느낄 수 있으며, 더우기 현장

에서 성례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

이 어느 정도인지 조차 알 수 없는 지극히 형식적 순서로써 끝마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12) 정장복, op. cit., pp.181-182.

바로 여기에서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 집례

자와 참여자 모두가 성례전에 대한 신학적 의미의 발굴을 서둘러야 할

필요성을 갖게하는 것이다. 13) ibid., p.182.

교회는 단순히 말씀만 듣고 살아가는

공동체로 끝나지 않고 주님이 제정하신 성례전 가운데서 경험하고 깨

달은 신앙으로 예수님과 연결된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14) Ibid.

따라서 말씀과 성례전이 이상적으로 살아 집례되어지는 교회로서의 바른

출발을 위해 성만찬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2. 성만찬의 역사적 기원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성례전의 하나로써 교

회의 새로운 유월절 식사, 즉 새 계약의 식사이다. 이는 그리스도께

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아남네시스(anamnesis:

) 로서, 어린양의 잔치(19:9)에 대한 예상으로 베푸신 것이다.

15)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 직제위원회, 세례성만찬사역

(서울:한신대학출판부, 1982), p.32.

 

죽음을 눈 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한 다락방에 모아 놓으시고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다. 그것은 유

월절 축제의 만찬이었다. 16) I.Howard Marshall, Last Supper and Lord's Supper

(Michigan:William B.Eerdmans Pub. Co., 1980), p.58.

성만찬의 기원은 이 만찬이 있었던 저녁

식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전통적인 견해이다. 17) 정장복, op. cit., p.182.

이것은 저녁에 있었고 밤까지 계속되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 마

지막 식사 곧 유월절을 지키는 관습적인 한 행위를 위하여 함께 식탁에

앉았다. 예수님은 떡을 취하여 제자들에게 주시고, 다음에 포도주 한 잔

을 가지사 이것을 마시라고 명하시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 만찬은 찬송

한 장을 부르면서 마쳤는데 이 찬송은 114편 또는 115편에서 118편까지의 시편

중에서 한 부분 곧 유월절 식사를 마치는 그 찬송이었을 것이다.

18) A.J.Higgins, The Lord's Supper in the New Testament

(London:SCM Press, 1960), pp.13-21.

 

신약은 주님의 만찬에 관한 기사를 갖고 있는데, 이것들은 대단히

중요하다. 즉 이것들은 마태복음 2617-30, 마가복음 1423

-26, 누가복음 2214-23절 및 고린도전서 1117-34절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식사에 관한 기사는 사도행전 242

-46, 20:7-11, 고린도전서 517, 103-4, 요한복

615절에 기록되어 있고 그 외에도 많이 있다.

19) Franklin M.Segler, 예배학원론 , 정진황 역 (서울:요단출판사, 1984), p.168.

신약에서 그 저녁 식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주의 만찬 (고전 11:20), 주의 잔 과

주의 상 (고전 10:21), 축복의 잔 과 우리가 떼는 떡 , 떡을 뗌

(2:42), 그리스도의 피에……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 (고전

10:16)과 같이 다양하다. 20) Ibid.

 

알프레드 엘더샤임(Alfred Eldersheim)은 최초의 이 성만찬 사건

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말하고 있다.

그 장소는 마가 요한의 가정으로 추측되는 큰 다락방이었다.

그 시간은 초저녁 또는 밤이었다. 그 만찬에서 유월절과 관계

가 있었던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언급이 있었다. 그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은 예수와 12제자에 한하였다. 그 식탁에서 사용되었던

성물(elements)은 빵과 포도주였다. 예수님은 그 만찬을 예배하는

정신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어 받아 먹게 한 후 다시 포도주가 든 잔을 그들에게 주어

마시게 하였다. 예수님은 그 빵과 잔의 의미를 설명했고, 하나의

예전으로써 주님의 재림시까지 반복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들은

만찬 이후에 시편송을 함께 불렀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식사를

끝낸 후 모두 감람산으로 나갔고 그곳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제

자들과 별도의 장소에서 기도를 드렸다. 21) Alfred Eldersheim,

The Life and Time of Jesus Messiah

(Grand Rapids:Wm B.Eerdmans Publishing Co, 1956), pp.490-512.

 

이상과 같은 사실은 마가를 비롯하여 복음서의 기자들 모두가 일

치된 견해로, 이것과 함께 지속되어 온 성만찬의 전통은 일반적으로

유월절 만찬을 성만찬의 근원으로 이의없이 받아들여 왔다.

22) The Interpreter's Bible, Vol.(New York:Abingdon press,

1951), p.73.

 

그러나 최근에 유대인들의 관습과 성만찬을 비교 연구한 발표들이

나와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데, 그것은 키디쉬(kiddush)라고 불리

우는 유대인들의 랍비와 제자들이 전통적으로 가졌던 식탁에 관한 연

구이다. 23) 정장복, op. cit., p.183.

이 키디쉬는 일반적으로 선비인 랍비와 그의 제자들이 안

식일이나 특별한 명절을 종교적 차원에서 준비하기 위하여 식탁을 함

께 하면서 모였던 것이다. 이때 이들은 간단한 식사로서 빵을 먹었으

며 포도주에 물을 섞어서 서로 돌려 가면서 마셨고, 그 후에 기도를

하였다. 24) William D.Maxwell, A History of Christian Worship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82), p.5.

이러한 모임은 주로 메시아를 기다리는 무리들에게 경건한

생활의 지속을 위하여 행하여진 것이었다.

이와같은 키디쉬의 행사가 예수와 제자들의 3년간 생활 속에서도

계속 행하여졌을 것이라는 추측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

근거로서는 성만찬을 가리켜 최후의 만찬 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금껏 키디쉬를 행하여 온 것중의 최후 의 것이라는데서

최후의 만찬 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주장이다. 25) Ibid., p.6.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요한복음서의 관련 기사에서 근

거를 두고 있다. 요한에 의하면 예수의 처형은 유월절 준비의 날 혹

은 유월절 전날 즉 니산(Nissan)14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19:14), 유월절 식사가 있는 유월절 예비일에 이미 예수는 처형되고

있으니 이로써 최후의 만찬 은 유월절 식사가 아니라 유월절 24시간

전에 있었던 유대 종교의 공동 식사인 카버락(Chab rak)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26) Dom G.Dix, The Shape of the Liturgy (London:Dacre

Press,1945), pp.50-70.

그 근거로는 첫째 그 식탁에는 주인이나 또는 지

도자가 있었다는 것, 둘째 빵을 들어 쪼개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예가 있었으며, 세째 식탁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떼어 먹도록 하

는 관습이 있었고, 네째 잔을 들어 축사하고 함께 드는 관습이 있었다

는 점이다. 27) Ibid., p.52.

 

이러한 견해들에 대하여 지금으로써는 어느 것을 확정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그러나 비록 그것이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다 하더라

도 최소한 확실한 것은 예수와 제자들의 심정 속에는 유월절에 대한

생각이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28)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vol.(NewYork:Abingdon Press, 1962), p.74.

중요한 것은 주님이 어떤 형태의 식

탁을 이용했든지 간에 분명히 새로운 성례전으로써 성만찬을 제정하셨

다는 사실이며 그 식탁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단순한 식사만을 나눈

것이 아니었고 그것은 하나의 성례전으로 제정된 최후의 만찬이었다는

것이다. 29) 정장복, op. cit., p.185.

 

이 성례전 행위의 과정은 다음의 일곱 단계로 세분하여 살필 수

있다.

먼저 주님이 빵을 취하셨고 축사하셨고 그것을 쪼개었

으며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

라 하셨고 그 후에 잔을 드셨으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

30) Ibid.

고 하셨다.

이상과 같은 7 단계의 성만찬 제정이 곧 개신교 성만찬의 최초 모

델이며 또 가장 근원적인 형태이다. 31) Ibid., p.186.

결국 성만찬은 눈에 보이는 표

징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

하는 성례전적 식사이며, 이 사랑은 예수께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제

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인 것이다(13:1). 그러므로 이 예전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행하는 것이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참된 임무라 하겠다.

 

3. 성만찬의 성서적 의미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사의 성례전이다. 모든 기독교인들

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 이 구원의 은사를 받는다. 성만

찬에서, 즉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과의 영적 교류를 베푸신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행위하시사 그

리스도의 몸에 생명을 주시고 각 신도들을 새롭게 하신다.

32)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 직제위원회, op. cit., p.32.

그러므로 성만찬은 모든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방편으로

, 사람이 그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깊은 의미가 담긴 예전인 것이다. 33) 정장복, op. cit., p.156.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제정하셨으며 이는 곧 사도적 전

통의 핵심이며 또한 사도적 전통의 본질을 규명해 주고 있다. 이는

결코 진정한 예배 에 앞서 예비적으로 거행되는 이따금 한번씩 하는

행사쯤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34) Thomas C. Oden, 목회 신학 ,

이기춘 역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6), p.182.

 

이런 점에서 성만찬의 성서적 의미를 알아 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성만찬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

념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35) 김소영, 예배와 생활 (서울:대한기독교서회

, 1984), p.104.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더불어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배설하시고는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 고 말씀하셨고, 또 식후에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

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성

만찬은 예수의 살과 피 즉 죽음을 기념한다는 듯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바울도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4)고 하였다.

이상의 말씀을 보아 성만찬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

에 대한 가시적 의미를 나타내며 회상을 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에 대한 회상의 성만찬인 것이다. 36) Andrew W. Blackwood,

The Fine Art of Public Worship (New York:Abingdon Press, 1954), p.205.

 

둘째로, 성만찬은 단순히 하나의 기념만이 아니고 이것은 또한 그

리스도와의 현재적인 거룩한 영교(Holy Communion), 혹은 동참의 뜻을

가지고 있다. 37) 김소영, op. cit,. p.104.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6절 에서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 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성만찬은 단순히 기념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

여하는 행위이며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영적 친교의 식사에 참여하는 자에게 평화를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

신다. 38)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8), p.214.

그러므로 떡과 포도주의 가시적인 요소를 통해 성만찬의 참

여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만나고, 접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째로, 성만찬은 소망의 선포라는 뜻이 있다. 39) 김소영, op. cit,. p.105.

성만찬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한다 (고전 11:26)는 말씀과

같이 모든 참여자가 주님의 재림의 소망으로 참여한다는 뜻이다. 40) Ibid.

 

하나님의 전 백성이 앞으로 장차 오게 될 왕국에서 주님의 식탁에 둘

러 앉아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떡과 잔을 받을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

을 고대하면서 소망으로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이다. 41) Ibid.

그러므로 성만찬은 이 소망을 밝게 하며 그 사실을 위하여 늘 새롭게

증거하는 사명을 가진 것이다.

이와같은 이런 의미를 갖고 있는 성만찬은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

로써 처음부터 중요시 되어 왔다. 초대교회에서는 매주일의 예배 때

마다 행하여져, 주님의 명령을 따라 가졌던 성만찬 속에서 늘 새로운

신앙의 활력소를 찾았다는 점이다. 42) 정장복, op. cit,. p.43.

 

결국 성만찬은 신령한 영적인 은혜와 영적인 본체를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시각,촉각,미각) 물질의 상징적 매개체

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며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을 말한다.

43) J.J.Von Allmen, 예배학원론 , 정용섭 외 3인 공역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 1980), p.68.

따라서 성찬예식은 말로써 하는 설교나 글로써 표현되는 설교의 내용을 우

리가 얻을 수 있게 해주며 이렇게 되기 위하여 우리의 지성과 정서가

함께 운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찬의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

육신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교훈의 총체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44) 백천기, 공예배 의식 갱신에 관한 연구 (예배학박사학위논

, 미국훌러신학대학원, 1983), p.95.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에 나타난 성만찬의 의미는 때에 따라

굴절되고 왜곡되어 때로는 성만찬에 대한 지나친 열심때문에, 때로는

그것에 대한 강한 반동 때문에 성만찬은 교회의 중심인 제자리를 잃고

있었다. 이것은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고통이며, 한국교회 역

시 하나의 커다란 짐으로써 이 문제를 안고 있다 하겠다. 이제 교회

의 공예배의 역사 속에서 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견해가 어떻게 나타나

있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B.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견해

 

1. 가톨릭의 견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5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세례받은 교인들이 매

주마다 집례 되어지는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었으나, 9세기에 이르러

서는 평균 1년에 한번정도밖에는 성만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 이

유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희생(sacrifice)을 지

나치게 강조하였기 때문이었다.

45) 박근원, 공중예배에 있어서 성찬식의 위치 , 기독교신학총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5), p.713.

 

예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초대 사도시대로부터 시작된 성만찬의

본질이 로마 가톨릭교회로 가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초대교회 성

만찬은 말씀의 예배와 성찬의 예배가 공존하였지만

46) 박은규, 성찬의 재발견 , 기독교세계 , 681(서울:기독교세계사, 1984.9), p.33.

가톨릭교회의 성만찬은 말씀의 예배가 퇴보하고 지나친 의식만이 강조된

성찬 예배만이 집례되어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말았다. 가톨릭은 수백년동안 말씀보다 성찬의 전통을 지켜왔다. 그러나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에 깊게 자리잡은 것은 사제가 집례하는 성만찬의 떡

과 포도주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의 교리이다.

성찬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9세기 초에 정식으로 제안

되고, 12세기에 정의를 받아 화체의 교리로 지명되고, 13세기의 제 4

차 라테란 회의(Laterian Council)에서 정식으로 채용되었으며, 16

기 트랜트 회의에서 최종범식(最終範式)의 작성을 보았던 것이다.

47) 박형용, 조직신학 (서울:한국기독교교육위원회, 1977),p.331.

 

성찬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는 중세기 로마교회의 성례전을 완성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에 잘 나타난다. 로마교회의 7가지 성례전 중

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례와 성찬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물질 속

에 그리스도께서 현재 임하신다는 화체설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성찬

이 반복될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매번 반복되는 것이다.

성찬을 성례전적 의()의 개념보다는 희생의 반복의 개념과 사상으로

보았다. 48) Bernard Leeming, Principles of Sacramental Theology

(London, 1956), p.88.

 

화체설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독창적 교리가 아니라, 9세기 수도사

라베르투스의 주의 몸과 피에 관하여 란 논문에 제시되었다. 그 논

문에서 그는 하시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사제의 축사를 통하여 기적을 일어나게 하신다. 성별된 성찬의 물질

이 진정으로 역사적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 것이다. 성찬의 물질

의 색과 모양과 맛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그대로 있지만,

기적적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몸과 피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화체의

기적은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내면적으로 화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물의 색과 모양, 맛은 그대로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는 것은 내면적 신비가 된다. 육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성찬의 성물은

영적으로 받지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이 성찬의 성물을 받을 때 그리

스도를 영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하는 자만이 그리스도의 실재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있다 49) J.L.Neve, 기독교 교회사 , 서남동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5), p.285.

고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찬의 물질적 요소인 떡과 포도주는 제정어의

암송에 의하여 물질 그대로 있지만 성찬의 물질의 실체는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떡과 포도주 안에 임재하신다고 가르쳤다. 이로써

성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것이다. 사제가 이것은 내 몸이

... ,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니... 라는 제정어를 외

울 때 성물은 내적으로 변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며, 이 변화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객관적으로 나타내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같은 이론은 초대교회에 없었던 것으로써 중세기 스콜라 철학의

이론에 그 사상적 근거를 둔다. 즉 사물의 외부적 우유성(偶有性,

accidents)과 내적 본질(substance)을 구별하는 사상을 빌린 것이

. 50) 이장식, op. cit., p.60.

 

성찬에 관한 이와같은 가톨릭의 견해는 중세기의 예배를 신비종교

와 이방종교의 어떤 풍습을 첨가하여 구약의 제사제도로 되돌려 놓았

. 또 감각에 호소하므로 많은 미신이 생기게 되었고,

51) F.M.Segler, op. cit., p.52.

그리하여 성만찬은 미신적인 관념의 성례전으로 퇴색하고 그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케 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배는 성례전 중심이었고 성직자 중심이었

. 52) Ibid.

예배에서 사제는 성물에 대하여 이것은 내 몸이라, 이것은 내

피라 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하고 그 성물을 높이 들어 회중에게 보였

. 이 때가 예배의 절정이었고 종을 울려서 회중이 그것을 바라보게

했다. 만약 예배에서 그것을 보지 못하였으면 예배를 못드린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회중은 잘 보이지 않으면 그것을 더 높이 들라고 소

리쳤다. 그래서 높이 들렸던 성물을 쳐다보았던 신자는 안심하고 집

으로 돌아갔으며, 그 성물을 보지 못하였던 신자는 다음 예배에 다시

참석해야만 했다. 53) 이장식, op. cit., p.59.

이처럼 회중들은 성만찬을 집례하는 사제를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

야 했고, 그들의 참여는 부활절 예배에서만 허락되었다.

그것도 포도주는 허락이 안 되었고 떡만 허락이 되었던 것이다.

54) F.M.Segler, op. cit., p.55.

 

사실상 중세교회 예배에서 회중은 참여자가 아닌 방관자였다.

55) Ibid., p.52.

 

예배는 신부와 소수의 성가대에 의하여 라틴어로 거행되었기 때문에

회중은 그것을 알 수 없었고, 이와같은 라틴어 사용은 회중들 사이에

미신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56) 김득용, 현대교회 예배학 신강

(서울:총신대학 출판부,1985), p.75.

 

회중은 다만 예배의 클라이막스에 울리는 종소리를 듣고 성물을 봄

으로써 예배를 드린 것으로 생각하였다. 집례자는 작은 소리로 회중

이 모르는 말을 중얼거리듯 말하였고 회중들은 자신들이 함께 예배에

참여한다는 생각이 없이 사제의 행동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57) 이장식, op. cit., p.62.

 

또한 성서는 라틴어로 쓰여져 있어서 회중들이 이해할 수가 없었으며,

그나마 라틴어로 쓰여졌던 성서도 개방되지 않고 사제들만 볼 수 있었

기 때문에 교회의 예배는 회중들과의 삶과 거리가 먼 것이었다.

58) 김득용, op. cit., p.75.

또한 중세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교리화했고, 그와같은 희생을

성만찬을 통해 지나치게 강조했기 때문에 성만찬이 희생제사가 되어

버렸다. 이와같은 희생제사도 성직자가 신자 전체를 대신해서 드리게

됨으로써, 성직자가 진정한 대사제이셨던 그리스도를 대신하게 되어

그리스도는 예배로 부터 아주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59) 박근원, op.cit., p.712.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성만찬은 화체설과

더불어 예배에 있어 극적인 신비의 현상으로 집례되었기 때문에 많은

폐단을 가져왔다. 그리고 매주일 예배에서 빠짐없이 집례되어 졌으나

불행하게도 사제의 행위에 머물렀고, 그리스도의 희생을 지나치게 강

조하게 되어 상대적으로 설교가 경시되어졌다.

 

2. 종교개혁자들의 견해

 

종교개혁의 초창기에 있어서 나타난 성만찬은 중세기 가톨릭교회

의 말씀과 성만찬의 불균형을 회복하고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었다. 그들은 말씀이 신앙과 예배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의식과 형식주의 예배에서 말씀 중심의 예배로 복귀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결코 성만찬을 경시

한 것은 아니었다.

개혁자들에게 성만찬은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의 개혁이 아무리 거세게 일어나는 현장에서도 성

만찬에 대한 신학적 내용은 초대교회의 그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60) 정장복, op.cit., p.194.

 

그러나 개혁의 주역들은 성만찬론을 자신들의 특유한 입장과 신학에

따라 재조명하면서 최우선적인 신학적 과제로 삼게 되었다. 그 이유

는 예전을 통하여 구속의 그리스도를 언제나 새롭게 만날 수 있으며,

한 인간과 주님과의 생동력있는 역사적 연접(historical link)을 이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61) Oscar Cullman, 원시기독교 예배 , 이선희 역 (서울:대한

기독교서회, 1984), p.17.

이와 같은 맥락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성만찬의 견해를 다음에 살펴보기로 한다.

 

루 터

루터(Martin Luther)는 말씀은 주님이 제정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전달해 주는 방편이 되는 성례전을 절충해 주는 것이므로 말씀이 없는

성례전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62)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1),p.143.

루터는 1530년에 저술한 그의 논문 교회의 바벨론 포로

(The Babylonish Captivity of the Church)에서 로마교회의 성례전 제

도와 신학적 과오를 지적하면서 로마교회가 범한 세가지 잘못을 논박

하였다. 첫째는 평신도에게 떡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는 주지 않은 것

이고, 둘째는 마술적인 화체설의 과오이며, 세째는 성례전을 희생의

반복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거 가톨

릭의 전통을 모두 개혁하고자 한 것은 아니고, 다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개정하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성찬을 받기 전에 시행

한 부분 중 불을 켜 놓는 것, 제복의 사용, 향을 피우는 것은 그대로 존속

시켰으며 이에 반해 성찬 예배에서 성별의 기도는 변화시켰으며, 화체론을

수정하여 공재론을 수립하였다. 루터는 초대교회에서 사용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었고, 처음에는 매일 성찬식을 거행하라고 권했지만 매주일 시행하

라고 권장하였다. 63)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 1988),p.122.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성찬 물질이 있는 곳에 현실로 임재한다

는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주장한다. 즉 주님의 몸이 성찬 물

질의 안에, 밑에, 함께 (in, under, along with) 계신다고 했는데,

14세기에 있었던 오캄의 유명론에서 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루터는 믿는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그

리스도를 접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며,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의 임재를 믿었고, 공간 속에 연장된 몸 (body extended in apace)

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64) 박형용, 루터와 칼빈의 성례관 비교

, 1968:로고스, .20 (서울:크리스챤 헤럴드사), pp.52-53.

 

루터는 이것이 내 몸이다 라는 주님의 제정어에서 ...이다 를

윤리적,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희생의 반복과 화체교리를

거절했다. 루터의 성찬에 대한 견해는 여러번 변화가 있었다. 첫째

1519년 성찬에 관한 교설 을 쓴 때이고, 둘째는 1520-1529년 교

회의 바벨론 포로 를 쓴 때(쯔빙글리와 말부룩 회담을 하기까지)이고,

세째는 말부룩 회담 이후이다. 65) 전경연, 루터신학의 제 문제

, 복음총서 11 (서울:기독교서회, 1974), p.76.

 

첫째, 성찬에 관한 교설 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떡과 포도주

아래 두고, 성물인 떡과 포도주는 도장(siggel)으로 그 아래 참된 그

리스도의 몸과 피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성례는 본체의 표징이라고

했다. 66) Ibid.

 

둘째, 교회의 바벨론 포로 에서는 로마교회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성찬의 결정적 요소는 신앙이라고 했다. 성찬은 약속이며, 성찬의 은

혜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앙에 의

해서라고 했다. 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둘째가 우리의 신앙이며, 세째가 사랑이라고 했다. 67) Ibid., p.78.

 

세째, 말부룩 회담이후에 성찬에 관한 루터의 견해는 공재설로 형

성되었다. 또한 그는 쯔빙글리의 견해에 반박했는데, 떡과 포도주

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표상한다는 것과 이것은 내 몸이다 를

이것은 내 영적 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에 반박했다.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기 때문에 평신도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서도 피를 흘리셨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루터는 성만찬에서 평신도를 제외시키는 행

위는 사악한 행위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권한은 천사에게도 없고 교황

이나 공의회의 권한에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68) 지원용, 루터의

사상:신학과 교육 (서울:컨콜디아사,1982), p.141.

 

이처럼 루터는 평신도들의 성만찬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평신도들의 권리는 교황이나 공의회의 사제가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쯔빙글리

쯔빙글리(Zwingli)의 성만찬에 대한 견해는 성만찬에 사용되는 빵

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단순한 기념을 위한 표시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행동을 회상케 할 뿐이라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루

터와는 달리 에라무스의 인문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아 신학적인 접근

방식을 달리하게 되었다. 특별히 쯔빙글리는 어떠한 교리도 이성에

모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루터는 신학에서 이성의 역할을 거

의 인정하지 않았다. 69) Tony Lane,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 사상사

, 김응국역(서울:나침판사, 1984), p.275.

이런 차이는 특별히 성만찬에서 예수 그리스

도의 현존에 대한 그들의 태도에서 역력히 나타났다.

쯔빙글리는 화란의 코넬리우스 호엔의 영향을 받아 1524년에 루터

의 공재설을 거부하고 떡과 포도주는 단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70) Ibid., pp.278-279.

이런 두 주장의 견해 차이는 사실상 교회

역사상 여러번 대두되었던 실재론적 개념과 순리주의(Spiritualism)

개념 사이의 대립을 재생시킨 것이었다. 71) J.L.Neve. op.cit., p.383.

 

쯔빙글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예배에 임재하시며 그의 몸

과 피, 곧 그의 인성은 하늘 아버지 우편에 제한 되어 계시고 성만찬

은 십자가상의 구속적 사역을 회고하는 감사의 기념 일 뿐이라고 하

여 기념설(Memorialism)을 주장 72) Tony Lane, op. cit., p.279.

하였는데, 이와같은 쯔빙글리의 성만찬론은 성만찬의 물질이 예수 그

리스도의 인성, 곧 가시적인 육으로 화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는 승천

해 계시는 그리스도를 인성의 몸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터와 쯔빙글리의 차이점은 그들의 정신적 태도의 표현으로써,

이것은 나의 몸이다 라는 예수의 말을 휴머니스트들은 이것은 나의

몸을 의미한다 는 것으로 해석하려고 했다. 73) Ingeberg C. Henel,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송기득 역 (서울:한국 신학 연구소, 1986), p.326.

그러나 루터는 이 말을 글자 그대로 이해했다. 즉 그리스도의 몸은

실제로 빵속에 현존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영은 신체적인 것에 의해

서가 아니라, 오직 영에 의해서만이 만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74) Ibid., p.327.

 

결과적으로 쯔빙글리는 성만찬을 단지 기념적 행위로써 그리스도

의 희생의 기념과 신앙 공동체 의식의 근거로써 단순화시켜 버리는 결

과를 낳게하고 말았다. 75) 정장복, op. cit., p.198.

그래서 그는 성만찬을 예배의 중요한 부분

으로 보지 않고 기념적 행사로 간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지금껏 예배 가운데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가 언

제나 공존했던 것을 분리시키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심지어는 성만찬

을 연 2회로 함이 좋다는 견해를 펴 성만찬 예배의 경시 현상을 개신

교에 유산으로 물려주고 말았던 것이다. 76) Ibid.

 

 

칼 빈

칼빈(J. Calivn)은 루터의 공재설이나 쯔빙글리의 단순 기념설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신령한 몸이 빵과 포

도주와 성례전적 연합을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77) 이장식, 기독교 사상사

, 2(서울:대한기독교서회,1978), p.266.

즉 성령과 말씀 안에서만이 성물은 그것이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된다는

루터와 쯔빙글리의 중간적 견해를 취한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실

지로 임재하신다고 믿었으나 이것을 믿는 사람들의 감수성

(receptivity)과 관련시켰다. 78) F.M.Segler, op. cit., p.59.

그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와 그

경험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바로 참여자의 신앙이 요구되며 거기에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오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79) 정장복, op. cit., p.199.

그러므로 물과 떡과 포도주는 말씀안에서 약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징표요, 영상이요, 상징이며, 80) Wilhelm Niesel, 칼빈의 신학

, 이종성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3), p.210.

이와같은 징표와 영상과 상징의 약속이 받는 자의 신앙에 의하여 경험되어

진다는 주장이다. 물질적 요소인 떡과 포도주는 단순히 표상과 상징에 불과하며,

그리스도는 떡의 물질에 부가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쯔빙

글리의 기념설과 동일한 견해를 가지지만 성령의 힘에 의해 성례는 일

어남으로 신앙으로 받아들일 뿐이다 81) 박형용, op. cit., p.55.

라고 한 주장은 쯔빙글리의 기념설과 다른 것이다.

칼빈은 성만찬은 외형적인 표시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의 증거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입증이다

82)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an Religion (Phil-adelo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Book, , ⅩⅣ, p.13.

라는 말을 하고 있다. 여기서 성물(the elements)의 신비성과 거기에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 사건을 단순히 집례에서 찾으려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여기서 성물이라는 눈에 보이는 표시만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므로 그 약속을 선포하고 , 해석하고,

용시켜 주는 말씀의 증거가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

고 있다. 83) 정정복, op. cit., p.198.

그때 이 성물과 거기에 대한 말씀을 경청한 무리들이 성

령의 사역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동시적으로 이룩하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성례전을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 이란 어거스틴의 사상을 받

아들여 세례나 성찬이 성령으로 우리의 사죄와 은총의 수락을 입증하

는 표징이요 인장이라고 했다. 그는 성령을 성례전의 지배인이라고

했다. 성례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오직 성례전을 통하

, 성례전과 함께 은혜가 온다고 했다. 그것은 성령이 성례전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며, 성령이 같이하지 않는 한 성례전은 바르게 집행

되는 것이 아니므로, 성령은 성례전 안에 있는 교사라고 했다. 또 성

례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 신앙을 봉헌하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고백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84) 박형용, op. cit., p.56.

 

이러한 주장은 그의 제네바교회 신앙 문답서 에 자세하게 나타나

고 있는 바,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징표로서 우리에게 영적인 모든

일을 계시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외부적인 증명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여러 약속을 우리 마음에 한층 더 강하게 각인하여 우리가 그 약속을

보다 더 확실하게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85) 이장식, 기독교

신조사 , 1(서울:컨콜디아사, 1982),p.193.

라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빵과 포도주라는 성물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먼저

주님이 세우신 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라는 당연성을 표하고, 둘째로

우리는 육체로 덮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적이고 천상적인 모든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상징을 사용할 필요가 있음

86) Ibid., p.194.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와 그 경험을

바르게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형성된 언약에 대한 선

이해가 요구된다고 했다. 이러한 선 이해는 바로 참여자의 신앙을 재

확인 시키는 것이며 거기에 말씀의 수용이 가능하게 되고 성령의 역사

속에 영적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87) 정장복, op. cit., p.199.

 

 

. 성만찬 예전의 실천

 

금세기 중엽부터 태동한 세계교회 예배갱신 운동의 초점은 공예배

의 성서적 원형을 회복하려는데 있었다. 공예배에서 본의 아니게 경

시되어 온 성만찬의 바른 위치를 되찾아 온전한 그리스도교 예배의 모

습을 되찾으려는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노력이 교회사상 그 어느 때 보

다도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 James F.White, Christian

Worship in Transition (New York:Abingdon Press, 1976), p.32.

세계교회의 운동으로 다른 교회의 전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또

성서와 예전분야의 학문적 연구로서 오늘날의 교회에 있어서의 공예배가

성서적인 근거에서 멀어지고 있고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의지에서도 빗나간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 박근원, 한국교회 성숙론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6),p.77.

 

그래서 요즈음 대부분의 교회에서 성만찬이 1년에 두번 내지 네번 정

도만 집행되고 있는 것이 잘못 된 예배의 관습임을 깨닫고 매주일 예

배에서, 아니면 적어도 월 1회 정도는 성만찬이 예배에 포함되어야 함

을 예배갱신 운동에서 강조되고 있다. ) Ibid.

성만찬이 경시되는 한국교

회의 예배에서 성만찬이 보다 중요시 되는 공예배로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성만찬의 위치를 바로 이해하는 예배의 신학이 받아들여 지고

그 신학이 예배의 현장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말씀 안에 살아

계신 주님을 경험하고, 상만찬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나 우리의

삶 전체에서 주님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성만찬이 현대교회의 예배갱신에 어떤 의미

를 던져주는지 그 견해를 살펴보고, 한국교회가 공예배 갱신을 이루기

위한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점을 찾아, 공예배의 갱신 모델을 제시

하려고 한다.

 

A. 성만찬의 현대교회의 견해

 

오늘날 세계교회의 예배갱신의 운동은 본래적인 전통교회의 예배

를 새롭게 표현해 가려는 노력이요 시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만찬

의 전통적 의미의 현대적 재구성이 중심적 과제가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성만찬에 대한 견해도 다음과 같이 재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1. 감사의 예전으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은 어떤 신학적 의미보다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베푸신 하

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대하는 감격을 필요로 한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주신 구속의 사랑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부터 성만찬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

고 경험하는 데에 기독교는 최우선적인 신학적 관심을 두어왔던 것이

. ) 정장복, 예배학 개론 (서울:종로서적, 1986), p.201.

초대교회에서는 성물을 드리는 봉헌에서부터 이런 신앙적 행위

가 시작되었으며, 2세기 중반의 순교자 저스틴은 주님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죄로 물들었던 자신들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려주신 은총

앞에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을 명령한 바 있다.

) F.Stagg, Dialogue With Trypho , The Anti-Nicene Fathers

10 vols.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75), Vol.., p.215.

또 이러한 사상은 칼빈에 와서도 주님의 만찬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하나

님의 은사 )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

T.McNeil (Philadelphia:The Wstminster press, 1967), .XVii. p.7.

라는 표현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성만찬은 죄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

과 다시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게 해 주시는 모든 은총에 대하여 드리

는 감사의 제사이며, 그리고 공동체적 측면에서 성만찬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의 연합, 창조주에 대한 봉헌,

아가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과 정의와 평화에 대하여 드리

는 거대한 감사제인 것이다. )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서울:대한

기독교출판사, 1988),p.215.

 

성서를 보면 시편은 찬양의 제사와 감사로 가득차 있다. 시편 99

편은 찬양의 제사의 내용이다. 시편 115편은 유월절 식사 예식의 부

분이 있다. 예수는 성만찬에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것을 노래했다.

사도 베드로에 따르면 우리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

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노래하게 하신 왕같은

제사장 (벧전 2:9)이 되었다.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저자는

이 길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묘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13:15, 16, 참고 시 50:14, 2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이며 같

은 것으로서의 예식과 실제적 봉사인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은 찬양의

제사이며 관용의 제사로서 여기에 묘사된다. 결국 예수가 유월절 식

사의 과정으로 첫번째 성만찬을 거행했던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

를 위한 감사 기도요, 찬양의 제사인 것이다. 교회는 항상 이러한 방

법 안에서 그것을 이해했었다. 왜냐하면 가장 오래된 예식문들이 성

만찬 기도의 처음에 창조와 구속의 놀라운 업적을 위한 엄숙한 감사

기도나 축복으로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카리스트

(Eucharist)가 찬양의 제사이며 감사하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모든 교회들은 그들의 성만찬 기도를 감사 기도와 찬양의 제사 모형

안에서 시작한다. ) Max Thurian, Ecumenical Pespectives on Baptism,

Eucharistand Ministry (Geneva:World Council of Churches, 1983), p.93.

 

 

2. 그리스도와 연합으로서의 성만찬

 

세례를 포함한 성례전 전체는 사실상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져오

는 새로운 계약이 성립되고 반복되는 예전이다. 이러한 신학은 칼빈

에게 아주 중요한 교리의 한 부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인

(Seal)을 치고 계약을 확인해 가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마다 그와 하

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불가분리의 관계가 맺어져야 한다고 강

조했다. ) 정장복, op. cit., p.201.

바로 이런 사상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56)라는 주님의 말씀에 근

거한 것이다.

성만찬의 제정은 주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신 성찬의식에 있으나

그 실제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속에 임재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나

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

이는 불가능하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의 현재적인 거룩한 영교,

은 동참의 뜻을 가진다 ) 김소영, 예배와 생활 (서울:대한기독교서회

, 1984), p.104. 고 앞에서 말한바 있다. 바울은 성만찬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이라고 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영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영적 친교의 식사에 참여

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평화와 그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선상에서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지며, 그 이

름을 일컬으며, 그 능력으로의 부름을 받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의미는

어떤 면에서 가톨릭의 화체설보다 더욱 깊은 뜻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

는 중요한 내용이라 하겠다. ) 박은규, op. cit., p.214.

 

 

3. 회상으로서의 성만찬

 

주님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바로 전에 성만찬을 제정하시고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 11:24) 하여 계속 시행할

것을 분부하셨다. 이것은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십자

가의 수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희생을 회상하고 그 부활의 승

리와 귀하신 교훈을 되새기는 성례전으로서의 성만찬을 강조하는 것이

. 주님의 구속 사건에 대한 철저한 회상을 요구하는 예전적인 의미

는 성만찬이 떡과 잔을 나누는 의식으로써 계속되어지기를 바라는 기

념적 회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정장복, op. cit., p.202.

떡과 잔을 통한 예수 그리스

도의 희생이 회상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의 삶

을 통해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부활의 영광이 나타나지는 표적으로

써 기념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만찬은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살

과 피로서 생명력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속에서 날마다 회상과 기념

의 사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맥 튜리안(M.Thurian)에 의하면 이 회상은 유대 민족이 이집트로

부터의 해방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현재적 역사를 재경험하는 유월절

식탁과 같은 성격의 성만찬이 되어야 한다 ) M.Thurian, op. cit., p.91.

고 한다. 회상이란 원래 히브리 민족의 사상에서 단순한 기념적 의미

만을 갖지 않고 과거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를 현재 속으로 이끌어 오

는 것을 뜻하였다. ) Scott McCormick, The Lord's Supper (Philadelphia:The

Westminster Press, 1966), p.78.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오늘의 단순한 기념적 행위로서의 성만찬 거행에

진지하고 섬세한 신학적 의미를 부여해야 하겠다.

 

4. 그리스도의 희생제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의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memorial)

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서 예배가 거행될 때 하나님의 역

사하심이 현재적으로 이루어진다(present efficacy)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이루신 모든 구속적 기념가운데 임재하셔서 친

히 교제를 나누시고 구속의 일을 행하신다. ) 정장복, 리마예식서 ,

1990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핸드북 (서울:흥성사, 1989), p.45.

주님께서 성만찬 제정시에 하나의 빵을 쪼개어 나누어 주시면서 하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 (22:19)는 말씀과, 잔을

부어 주시면서 하신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14:24)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

기 위하여 단번에 드리는 희생제물이 되셨음을 뜻하는 것이다.

) Y.Brilioth, Eucharistic Faith and Practice Evangelicaland

Catholic (London:C.P.C.K., 1953),p.43.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선포하는 가장 소중한 예전

으로서 성례전을 가져 왔었다. ) Oscar Cullman, Early Christian

Worship (Philadelphia:The Westminster Press, 1953), pp.28-29.

여기서 참여자는 더 이상의 죽음을 통한 희생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그 대신 자신들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12:1)로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성례전을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전

11:26). 이렇게 함으로써 성만찬은 주님의 희생을 직접 보고, 그 살

을 받으며, 그 피를 마시는 엄숙한 예전으로써 기독교 역사에 계속 유

지되어 오게 되었다. ) 정장복, 예배학 개론 , p.203.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단순한 기념적인 의미만을 지닌 생명력이 없

는 성만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신교의 성만찬이 다시 생명력을 회

복하고 진실된 그리스도의 희생을 부활의 영광으로 기념하는 표적이 되

게 하기 위해서는 예배 가운데 말씀 선포와 함께 성만찬이 그 원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말씀은 성찬과 함께 선포되어질 때 그 말씀의 실

제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실제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예배에 말씀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실제로 성만찬 가운데 경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스롤리(J.H.Srawley)같은 학자도 초대교회에서의 성만찬은 무엇보

다도 주님의 살과 피의 희생을 경험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재현하는데

그 주안점을 두었다고 한다. ) J.H.Srawley, The History of the Liturgy

(Cambrige:University Press, 1947), p.129.

 

이러한 맥락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과 죽으심을 선포하는 예전으로서의 성만찬은 오늘도 계속 되어져

야 하며, 또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희생에 대한 찬미의 제사의 의

) Y.Brillioth, op. cit., pp.42-48 passim.

가 이 성만찬 예전에서 표현되어져야 할 것이다.

 

5.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성만찬

 

성만찬의 본질 중 중요한 부분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그

자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

다는 점이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

수한 공동체가 형성되어 진다는 것이 이 성만찬의 특징 중의 하나이

. ) Y.Brilioth, op. cit., p.27.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 공동체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

의 확대는 바로 이런 운동성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며, 땅 끝을 향하여

확대되어 가는 그리스도의 몸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표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 어디서나 성례

전을 행하는 사람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이 성만찬 안에서

경험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22) 정장복, 예배학 개론 , p.204.

성만찬의 성례전이 십자가 위에

서 수난으로 끝나는 그리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부활하셔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만찬의 현장에 임재하시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

가 있는 것이며, 이를 경험하는 신앙이 있을 때 성만찬이 그리스도인

의 공동체의 모체로서의 일치된 온전한 형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성만찬은 언제나 공동체의 모체인 그리스도의 하나

인 몸을 가능케하는 나눔의 제전임과 동시에 전체를 하나의 신령한 모

체로 묶는 결합의 예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만찬 가운데 항상 구속

적인 나눔의 모체로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몸과, 부활하셔서 첫 열매

되신 새 형상의 결합의 모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성만찬이 오늘의 교회 안에 각각의 형

태를 이루고 있으나 그 중심은 한 하나님을 섬기는 초대교회의 전통적

핵심을 간직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에 따라 그 해

석을 달리하므로 성만찬의 예전적 공예배와 말씀의 비예전적 예배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근래에 와서 신,구교 각 교회가 예배 갱신을 시도하려는 신학적

관심이 증대하면서 공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의 한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의식이라는 큰 의

미와 가치가 있다. 또한 이와같은 신학적 작업과 공동의 노력이 성만

찬을 본질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정의하고 함께 수용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한 것이다. 성만찬은 공예배의 행위를 통해서 살아나고 표현되어

진다. 그리고 성만찬의 의미는 거듭되는 의식에만 부여된 것이 아니

라 그리스도인의 삶속에 구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며,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모체에 그 의미의 핵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B. 한국 개신교 공예배에 있어서 성만찬의 갱신

 

1. 개신교 공예배의 문제점

 

선교 2세기를 바라보는 한국교회는 오래지 않은 선교의 역사를 거

치면서 초창기 선교사들의 선교 정책과 그들의 신학적인 배경 그리고

한국민족의 종교 심성등으로 기독교 공예배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

이로 인해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설교 중심적인 공예배

한국 개신교 공예배는 설교 중심적 예배로 정착하였다.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의 예배 형식과 복음이해, 그리고 신앙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으로 심어진 공예배 스타일인데 ) 새문안 역사 편찬 위원회,

새문안교회 70년사 (서울:새문안교회, 1958), p.55.

특별한 발전없이 그대로 정착된 것이다. 발전이 있었다면 공예배에

있어서 설교 중심적으로 이끌어 가는 예배로 발전한 것이다.

) 박찬환 외 3, 어떤 예배를 드릴 것인가 , 기독교 사상 (1979.2), p.35.

설교 중심의 공예배라는 의미는 성만찬을 제외하고 모든 순서는

설교의 보조 역할을 하도록 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정용섭교수는

한국 개신교 공예배를 논하면서 대부분의 교회가 설교에서 감명을 주고

은혜를 받게 하려는 데서 무리가 많이 생긴다

) 정용섭, 예배와 의식 , 세계와 선교 , 54(서울:한국신학대학, 1973), p.38.

고 평한 바 있다. 그러기에 개신교의 성도들은 단지 교회에 가는 존재

(Church-Goer), 또는 설교를 들어보는 존재 (Sermon-Hearer)로 머물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개신교의 예배는 말씀 중심을 우선적으로 주장해 온

것은 사실이다. 특별히 모국어로 듣게 된 하나님 말씀의 선포와 해석

과 적용이라는 설교의 사역은 개신교 특유의 사건으로써 종교개혁의

으뜸가는 요소였음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

서 유의해야 할 것은 설교의 사역이 예배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배 가운데서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로서 최고의 가치성을 말

하는 것이지 결코 예배가 그 말씀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

. 그렇기 때문에 설교를 듣기 위하여 예배에 참석한다는 말도 타당

성이 있는 말이 되지 못한다.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고 감

사하며 봉헌하려는 피조물의 응답적인 당연한 행위이다. 이 행위의

실천자들과 만남을 허락하시고 찾아 주시는 과정이 바로 성경과 설교

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에 예배의

성패를 걸고 있다는 자체가 하나의 모순을 담고 있는 표현이다. 그러

나 우리는 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일 때마다 설교만을 위한 모임으로 형

태를 갖추어 왔고, 목사는 예배의 집례자의 위치를 망각하고 설교자로

서만의 준비에 급급해 온 실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정장복, 예배학 개론 , pp.71-72.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제정하신 성만찬에 대한 관심

과 신학이 결여되어 성만찬은 예배의 부속물이나 중요성이 없는 것으

로 간주하고 오로지 설교에만 최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또한 성

례전 없는 설교 중심의 예배를 일년 내내 계속하면서 그것이 예배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성례전은 일년에 봄, 가을로 두번만 치르

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양 착각을 하고 있다. 나아가 성례전 없는

예배가 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표면적으로도 불완전한 예배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p.214.

 

이와같이 한국교회의 예배가 예전을 소홀히 하고 설교에 지나치게

편중하게 된 원인중의 하나는 복음이 전래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듯이,

선교사들의 예배가 예전을 소홀히 하는 설교중심의 예배였었다고 하는

점이다. 탈의식적이면서도 오직 말씀 중심의 복음주의적인 특성에

정착 ). 정장복, 예배학개론 , p.48.

되어 있었던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전하여 준 예배 내용은 예

전을 소홀히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말씀 예배와 성례전 예배가 올바른 균형을 이

룰 때 비로소 완전해 진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한국교회의 설

교중심의 예배는 하루속히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성만찬 격하의 공예배

한국 개신교의 공예배가 설교중심예배인 것은 성만찬 격하를 뜻하

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가 루터나 칼빈도 매주 설교와 성만찬 예배

를 원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많은 개혁 신앙의 대부분의

신조에서는 말씀의 선포 다음에는 언제나 성례전의 올바른 집례가 행

해지는 곳이 교회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가들의 절대

수가 매주일의 성례전 거행을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그 존

엄을 높이 인정하면서 성례전을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현장이라는 것에

가장 우선적인 해석을 주고 있었다. 또한 야웨의 공동체요 그리스도

의 지체로서의 당연한 의무이기에 이 예전을 통하여 공동체의 재확인

을 거듭할 것을 촉구했었다. 그러기에 성례전은 매주 말씀의 예배와

병존해야 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회 공예배는 성만찬이 격하된대로 정착되어 있

.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의 예배와 성만찬의 밀접한 관계 즉 일원적

인 관계를 알아야 한다. 이 관계는 초대 사도들의 교회의 전통에 속

한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제자들과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서 회당의 예배, 곧 구약성서를 중심한 설교와 찬송이 주가 된 말씀의

예배(Synaxis)에 참예하였었다. 이 말씀의 예배는 성질상 오늘 우리

들의 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와 같은 것이었다. 회당의 말씀의 예

배는 제사행위가 없는 것이었는데 제사는 예루살렘 중앙 성전에서만

있었다. ) 이장식, 예배와 성찬의식 , 기독교 사상 1979.2, p.64.

 

그런데 성만찬의 기원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 그의 제자들을 모으시고 유월절의 명절을 지켰던 저녁 식탁에서 비

롯되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최후 만찬을 나누신 자리에서 자기의

십자가의 죽음을 떡과 포도주로써 상징적으로 예고하시고 새 언약 또

는 계약을 세우셨다. 그리고 이 성찬식을 행하라고 부탁하셨다.

러므로 예수님의 부탁과 명령을 살려서 사도들이 교회를 시작하여 예

배하러 모였을 때마다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고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

였다.

이제 그들은 예배드릴 때 구약을 읽고 설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

지 못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

며 이 모든 것에 붙어있는 의미의 종합적인 표현이 되는 성만찬 의식

을 집회 때마다 집행하였었다. 즉 그때 성만찬 의식을 빼놓으면 기독

교인의 예배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속

죄와 구원에 대한 새 언약이며 보증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의 대표적인 사

건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며, 그것의 상징적 의식인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가 유대교의 예배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되었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예배가 성만찬을 제외시킨다면 그것은 유대교 회

당의 예배와 유사한 것이 된다. 즉 기독교 예배의 특이성이 없게 된

다는 말이다. ) 이장식, op. cit., pp.64-65.

 

이에 비추어 오늘의 한국교회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 가운데서 성

만찬이 차지하는 위치를 살펴볼 때, 과연 우리는 초대교회가 추구하고

경험했던 그 감격을 소유하고 있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스

럽게도 여기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일년에 한 두번으로 끝나는 성만찬의 회수에서 그렇고,

내용에서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성만찬의 성

례전은 나를 기념하라 는 언어적인 뜻 이상의 신학적인 의미부여에

무관심한 것을 느낄 수 있다. 더우기 그 현장에서 성례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개신교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

지 알 수 없는 지극히 형식적 순서로써 끝마쳐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 정장복, 예배학 개론 , pp.181-182.

 

 

이교문화적 요소를 벗어나지 못한 공예배

한국 민족은 중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끼어, 국제 파동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휩쓸리게 되었고 이 땅위에서 잘 살아 보려는 생각보다

내세를 동경하며 그 심정을 종교적인데 두고 살았다. ) 기독교사상

강좌 편찬 위원회, 기독교사상 강좌 , 3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3)

, pp.181-182.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심성은 그 바탕에 기본적으로 강한 종교성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적 심성 위에 세워진 한국의 전통 문화는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철저히 이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4300년의 샤머니즘, 2000년의 불교, 1500년의 유교라고 하는 오랜 역

사를 가진 이교적 신앙 풍토속에서 살아 온 한국인의 의식 속에는 이

교적 요소가 깊이 뿌리 박혀 있다. )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 p.35.

 

이와같이 한국은 마치 세계 종교의 실험실과도 같다 )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7),p.13.

고 할만큼 한국의 종교는 다양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의 선사시대는 원시종

교인 샤머니즘의 독무대였으며, 신라와 고구려 시대에는 불교가 주종

을 이루었고, 이조시대에 오면서는 유교가 민족을 지배하였다. 그러

나 이조가 멸망하면서 오늘날 한국의 지배적 종교로는 기독교가 새로

이 등장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한민족의 정신세계 속

에 샤머니즘이나 불교, 유교들이 한차례 거쳐간 이후에 기독교가 전래

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복음은 자연히 그들의 종교심성에 영향을 받

지 않을 수 없었다.

유동식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한국민족의 사상에는 다양한 사회 문

화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관해 오고 있는 기초이념 즉 사상적 전통

성이 흐르고 있는데, 이 기초사상이 한국에 들어온 각종종교 - 유교,

불교, 기독교 -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한민족의 기초사상을 유동식 교수는 한

삶 이라는 세 요소로 말하고 있다. 곧 한 멋진 삶 은 옛부터 우

리 한민족이 몸에 지니고 살았던 이념이요, 삶의 목표였다고 한다.

) 유동식, 한국 신학의 광맥 (서울:전망사, 1982), p.20.

 

그러므로 기독교가 들어오기전 한국사상이란 한국의 기초사상과 외래

종교인 유교나 불교를 매개로 전개된 사상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 Ibid., p.14.

 

결국 이러한 사상들이 한국인의 종교 심성에 크게 영향을 끼치면

서 기독교가 들어왔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탈피하

지 못하므로 기독교 신앙생활에 커다란 이질적 요소로 나타나는 것이

.

 

a) 샤머니즘(Shamanism)의 영향

먼저 샤머니즘의 영향부터 살펴 보기로 한다. 샤머니즘이 기독교

에 대해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여러면에서 살펴볼 수가 있

으나 예배에 끼친 그 대표적인 것은 기복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교 풍토속에 들어온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 을 현세적

인 복, 동양적인 오복(五福)으로 받아 들였다. 제의나 영에 대한 중

재를 일체 무당에게 일임하고 그 옆에서 구경만 해 온 샤머니즘적인

신앙생태는 그대로 한국 기독교 안에 흡수되어 일체의 예배의식과 기

도를 목사에게 일임하고 그 옆에서 구경만 하고 앉아있는 것으로 나타

난다.

또한 무교는 자신과 신령과의 수직적 관계만 있을 뿐 횡적, 사회

적 관계에 관심이 적어 개인의 이기에만 집착한다. ) 김기현, 한국교회의

예배와 생활 (서울:양서각, 1984), p.66.

그 결과 신앙공동체 형성의식이 결여를 보이고 있고, 무교의 비합리적 주술과

가무의 위력을 강조한 것에 영향을 입어 기독교에 권위주의적 심성이 조장되

었다. ) 문상희, 종교란 무엇인가 (왜관:분도출판사, 1982), p.182.

또 샤머니즘의 특색은 엑스타시(ecstasy) 현상에 있다. ) 민병소, 한국 기독교와

샤머니즘의 이해 , 풀빛 목회 1982.3, p.30.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주의 속에 나타나 입신, 방언, 기적의 체험이 있

어야 은혜받은 것으로 간주하는 폐단을 낳았다.

이렇게 한국 기독교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왔사오니

만복근원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옵소서 라는 공공연한 기도 속

에 현세적인 제재기복의 사상이 맡바닥에 깔려 있어 공예배는 물론 가

정 심방 기도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 p.224.

이것은 샤머니즘의 바탕에 우리 한국 기독교 예배가 정착한 것임을 말하여 주고 있다.

 

b) 불교문화의 영향

불교가 개신교 예배에 끼친 영향이라고 하면 부정적이고 도피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의 기본교리는 고(), 무상(無常), 무아

(無我), 극기(克己)등이다. 이는 부정적인 현실관과 현실 도피적인

생태를 낳았다. 이런 풍토속에 들어와 허무주의와 현실 도피적인데서

구원해 내야할 기독교가 오히려 기독교적인 허무주의와 내세주의적인

신앙생태를 만들어 온 것은 커다란 아이러니였다. ) Ibid., p.249.

 

이 영향으로 기독교에 체념사상이 스며들어 있고, 불교가 세상과

사회보다 개인을 중시하므로 사회에 무관심한 은둔적 기독교 사상을

조장하였다. 또한 한국의 종교 혼합주의는 불교속에 일관하여 온 하

나의 특성이므로 이에 영향받아 한국교회 성도들이 기독교를 신봉하면

서도 미신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생활하는 것이다. ) 김기현, op. cit., p.79.

또한 불교의 자기 소업(所業)에 따라 받아지는 인과응보의 사상이 한국교회 속

에 깊이 침투되어 있음을 설교의 경향에서 볼 수 있다. ) 이장식,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 (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5), p.87.

그래서 신자들이 죄에 대한 자유와 해방의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는 죄

에 대한 인과응보의 강박관념 속에 사로 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것은 이런 이교적 생리가 한국 민족의 심성에 흐르고 있는 연유도 있

지만 한국 기독교 자체에도 원인이 있었다. 즉 가톨릭이나 프로테스

탄트가 다같이 참 하나님을 가르쳐 주지 못했고, 그리스도적 신관도

구원관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한국교회는 예수믿고 천당갑시다 라는

전도표어와 부흥회 교과서로서 오래동안 사용되어 온 천로역정 이 이

런 신앙생태에 부채질을 해왔다. )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 p.249.

예배 때 부르는 찬송도 때로는 타

계주의 적인 찬송가나 이른 바 부흥성가의 노래로 채워지기도 한다.

게다가 교인들은 장송곡을 부르듯이 구슬프고 느리게 부른다.

) 한완상,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 기독교사상 1972.2,p.20.

이렇게 불교적인 영향이 한국 개신교의 예배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c) 유교문화의 영향

유교의 특색은 주종관계의 계급질서와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사상

이다. 이러한 사상은 자연 권위주의적인 사상을 낳게 되었다.

) 김재준, 한국 재래종교와 그리스도 , 기독교사상강좌 ,3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3), p.138.

또 하나는 배타주의적인 당파성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유학(儒學)

성리학(性理學)에서 크게 발전을 본 듯 하였으나 그것이 당쟁과 결부

되자 이()니 기()니 하는 것은 당쟁과 사리를 위한 공론으로 떨어

지고 말았다. 여기에서 유교는 편협하고 고루한 정신만을 기르게 되

었으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설이면 그 자체의 가치야 어떻든 간에

그것을 모두 이단 사설이라 하여 배격하기에 급급했다.

)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 p.86.

 

또한 한국 유교는 그 중추를 이루었던 주자학(朱子學)이 그 성리

학으로 말미암아 한국인에게 무신론적인 기반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간

과할 수 없다. 아직도 한국교회에 그리스도교 신관(神觀)이 확립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리고 교회예배의 기도마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기 보다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멀리있는 신에게 드리는 독백이나 시처럼 수사적이

고 서정적인 것도 하나님의 존재를 진지하게 생각할리가 없는 ) Ibid., p.93.

성리학으로 꽃을 피운 한국 유교의 뿌리 깊은 생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

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교인들은 한식이나 추

석이 주일이 되어보라. 보수적이라고 자처하는 교회나 열광적인 신앙

을 특징으로 하는 교회에서도 낮예배 시간에는 빈 자리가 생긴다.

상들의 무덤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윤성범박사는 기독교와 한국사상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국교회는 앞으로 그리스도교회로서의 본연의 전통과 권위를 다시 찾아

야만 되겠다. 우리는 여전히 유교의 전통주의에 사로 잡혀서 그리스

도의 자유를 소유하고 있지 못한 감이 나타나곤 한다 ) 윤성범,

기독교와 한국사상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4),p.239. 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교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는 주종관

계의 권위의식과 삼강오륜의 체면주의와 이()와 기()의 당쟁과 사

리로 당파성과 공리주의와 성리학의 무신론 등의 영향이 공예배에 깊

이 뿌리 박고 있는 것이다. )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 p.250.

이리하여 예배에도 체면때문에 참여하

는 수가 많고 자기와 맞지 않으면 함께 예배하면서도 마음은 서로 나

누어져 있기도 한다. 이 모든 이교적 요인을 하루 속히 갱신해야 한

.

 

예배 신학의 부재

예배신학이란 예배를 예배되게 하고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예

배의 근거를 밝혀주는 것이다. ) 정성구, 실천신학개론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81),p.150.

그런데 한국교회 예배는 예배신학의

결여로 인하여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예배에서 벗어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예배학을 가르쳐오지 못한 신학교육의 책임도 있지만,

예배 인도자나 회중들이 예배의 신학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기 때

문이다. )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 p.26.

 

이러한 예배신학의 결여는 교회의 성장과 양적부흥을 추구하게 되

었고 결국 대중들의 편의와 취향에 맞는 실용적인 방법으로 예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했다. ) 정성구, 예배신학을 수립하자 ,

신학사상 1987., p.4.

그리하여 한국교회는 이제 예배를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의 수양이나 수신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다분히 있게 되었다.

)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 p.226.

 

이러한 예배신학의 부재로 오는 현상들은 부지기수이다. 예배가

순수하게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에 대한 감사와 경배라기 보다는 복받

기 위해 드리는 경향이 많고, ) 김기현, op. cit., p.61.

따라서 회중들은 일체의 예배의식과

기도등을 목사에게 맡기고 구경만하는 관람객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목사의 손은 복덕 방망이가 되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또 교인들의 예

배행렬은 예배가 끝날 때까지 꼬리를 물고 들어오고, 설교중심의 예배

이기 때문에 설교전의 순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설교가

끝나자마자 일어나 가버리는 조퇴신자도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되도

록이면 뒷자리에 앉으려 하고, 찬송은 앞자리로 옮겨앉는 신호로 사용

하는 교회도 많다. )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 pp.251-252.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예배신학의 수립이라고 하겠다. 신학이 없는 예배는 감상주의적이고

빈약하며 이교적인 예배로 흐르기가 일쑤이고, 예배가 없는 신학은 냉

냉하고 죽은 것이다. 예배와 신학이 합쳐질 때, 그리스도교 신앙에

강한 모티브가 되고 충실한 크리스챤 생활의 동력이 된다. 그리스도

교 예배의 근거는 실용주의적이 아니고 신학적이다. 그리스도교 예배

는 전도집회도 아니고 복받기 위한 예배도 아니다. 예배는 그 자체안

에 목적이 있고 다른 무엇을 위한 방편이 아닌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효과를 위해 예배를 시도한다면 그 행동은 이미 예배가 아니고

그 결과는 다른 무엇을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드리는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하며 예배는 이 계시에 대한 응답이

. ) 정용섭,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학 , 기독교사상 1978.10,

p.131.

 

크리스챤으로서 예배의 현장에 임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와 있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는지를 반드시

알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할 때, 그 예배자는 맹종하는 신앙인이 되

기 쉽고 또 그런 자세 속에서는 깊은 의미의 만남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배자는 예배에 관한 신학적인 이해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배자들이 예배에 관하여 이해하고 있는 신

학적인 관심에 따라서 예배의 성격과 그 생동력이 좌우될 수 있기 때

문이다. ) 정장복, 예배학개론 , p.12.

 

한국교회에 예배 신학이 정립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배를 집례하는

목회자들이 자기 위치를 정립하고 자신이 집례하는 예전에 관한 올바

른 이해가 있어야 한다. ) 정장복, 한국교회 예배. 예전형태 백년 ,

기독교사상 1984.12, p.73.

지글러 교수도 예배의 실제 경험은 예배

자 자신, 성령님의 힘, 그리고 예배의 순서와 그 인도에 마련되는 인

간의 지도력에 있다 ) F.M.Segler, 예배학 원론 , 정진황 역 (서울:요단출판사,

1979), p.227.

고 강조하였다. 두번째는 회중들의 예배에 대

한 올바른 신학적인 이해이다. 왕같은 제사장들 로서 회중은 공예배

에 중요한 책임을 가진다 ) Ibid., p.235.

고 볼 때, 결코 예배는 목회자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평신도들이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올바른 신학적 정립을 갖기 위해서는 예배에 대한 평신도 교육이 필연

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린그린 교수도 예배 교육에 대해서 예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향한 깊은 신앙이 자라고, 교육을 통해서 그리스도

교 신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교회생활의 모든 면이 강화될 수

있다 ) A.J.Lindgren, 교회개발론 , 박근원 역 (서울:대한기독교

출판사, 1977), p.90.

고 강조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예배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면 평신

도들에게 예배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교육이 절실히 요청된다. 예배

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인 교육이 선행될 때, 회중들은 보다 더 능동적

인 자세로 하나님 앞에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그들의 삶도 생명

력이 넘치는 구체적인 예배행위가 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제 한국교회는 성례전없는 예배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직시하고 예배 집례자들과 성례전에 대한 성서

, 역사적인 올바른 이해를 정립하여 성례전 없는 불완전한 예배에서

과감히 벗어나 그리스도 예배의 두 기둥인 설교와 성만찬의 신학적인

균형을 이루어 올바른 공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2. 공예배에 있어서 설교와 성만찬의 균형 회복

 

기독교 초기 다락방 예배는 구약의 성례전적인 성전예배와 설교

중심의 회당예배의 두 핵심의 요소를 보완했던 다양성있는 예배였으며

이것이 기독교 예배의 원형이었다. 이와같이 설교와 성만찬의 두 핵

심이 균형을 이룰 때 기독교 예배가 성립되는 것인데, 이것이 깨어질

경우에는 구약성경의 성례전적 예배 아니면 설교 중심적 회당예배,

어느 하나로 전락하기 때문에 이 둘의 균형을 이루는 예배로 갱신해

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시급히 그리스도의 교회 본연의 전통과 권위

를 찾아야 한다. 교회가 무엇인지, 어떤 교회가 기독교 예배의 본래

의 모습인지를 바로 찾아서 그리스도의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야 한

. 교회의 예배는 먼저 제일의적 및 원초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는 하나님의 행동이고, 그 다음에 비로소 제이의적으로 그 기원에 따

라서 사람의 행동이다. 그 행동에 있어서 시람이 해야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봉사( )뿐이다. 그런데 이 봉사가 하나님의

봉사 즉 예배가 되게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그 예배에 고유한 방편을 예비해 두심으로, 이 방편들을 통하여 은총

을 베푸시는데 이 방편이 바로 말씀과 성례전인 것이다.

) 정용섭,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학 , p.131.

 

그러나 한국 개신교의 공예배는 축제의 성격도 없고, 성만찬 안에

서 각 날을 현재적으로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도 없이 설교 위주로 되

어있다. 교회의 설교와 예배와 교회력에 같은 관점을 주지 못하기 때

문에 교회의 예배가 설교 중심의 부흥회나 전도 집회가 되어 있는 것

이다. )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 p.50.

설교 중심의 예배는 주님이 제정하신 일을 외면하는 것이며

초대 기독교에서 물려 준 예배의 절대 핵심 요소인 성만찬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배를 통하여 전달되는 진리는 다섯가지 감각(청각,

시각, 후각, 촉각, 미각)에 의하여 전달되는데, 설교에만 의존하고 있

는 예배는 청각 적인 영역으로만 제한되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 J.J.von Allmen, 예배학 원론 , 정용섭외 3인 공역 (서울:대한기독교

출판사, 1980), p.88.

 

예배는 듣기만 하든가 보기만 하는 의식이 아니다. 어디까지

나 행동 에 참여하는 것이다. 즉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으로 이루어

졌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성례전 없이 설교중심으

로 진행되는 예배를 기독교 예배인 줄로 알고 일년동안 계속 드려왔

. 그리고 성례전은 특별한 절기를 이용하여 일년에 한번이나 두번

만 치르면 그것으로 의무를 다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의 정신이나 원리에 따라 성서의 권리를 으뜸으로 치며,

말씀의 선포와 교훈이 은혜를 받는 가장 유력한 길임을 부인할 수 없

. ) 이장식, 예배와 성찬의식 , p.66.

그러나 한 시간의 예배의 성패 즉 은혜를 받고 못받는 것이 설

교에만 달렸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생각이라 하겠다. 다시말

해 성례전 없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표면적으로 불완전한 예배를 드리

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국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설교가 예배의 중심부에 군림하게 됨으

로써, 다른 예배요소들은 설교의 보조 역할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목회자는 설교가 제일 큰 몫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통해 실력을 드러내

고자 한다. ) 한완상,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 (서울:대한기독교

출판사,1982), p.144.

또한 한국교회의 설교는 복음의 온전성과 구원의 전체

성을 주제로 삼기보다는 종교적 이기주의나 부분적 구원을 더 소리높

여 외치고 있다. 대체로 율법주의적 옷을 입고 있는 설교, 기복적,

무속성의 옷을 입고 있는 설교가 오늘의 한국교회의 설교 양상인 것이

. ) 한완상,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 기독교사상 , 1979.2,

p.21.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초대교회의 예배는 말씀과 성만찬

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것은 하나의 예배의 두 순서였을 뿐이지

결코 두 예배의 결합이 아니었다. 성만찬 없이 진행되는 예배에 대한

시사는 전체 고대교회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예배에 있어서

말씀과 성만찬은 함께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구현하는 것이었고 사람들

은 거기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기쁨을 경험하

며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갱신되며 함양되는 것이다. ) J.J.von Allman,

op. cit., p.153.

 

이런 점에 있어서 폰. 알멘(Von Allmen)은 왜 예배에 있어서 성만

찬이 꼭 필요한 것인가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

도에 의하여 제정되었고 명령되어졌기 때문이며, 복음서가 결국은

머리말이 덧붙여진 수난사이듯이 설교도 성만찬에 이르러 완성되기 때

문이며, 성만찬은 사람으로 하여금 설교를 듣고 말도록 내버려두

지 아니하고 세상과의 분계선을 넘어 복음적 삶으로 뛰어들게 하고 헌

신의 결단을 촉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Ibid., pp.157-160.

또한 그는 바르트

(K.Barth)가 설교가 성만찬의 틀에서 벗어나 성만찬 없는 설교가 될

때 전혀 다른 성격과 내용이 될 수 밖에 없으므로 예배는 매주일 설교

와 성례전을 포함해야 한다 ) Ibid., P.61.

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우리에겐 주님

의 만찬을 예배 가운데로 재통합시키는 일이 없이, 혹은 예배를 주의

만찬 가운데로 재통합시키는 일이 없이 우리의 예배를 계속할 권리가

없다고 하였다. ) Ibid., P.278.

브릴리오드(Brilioth) 역시 말하기를 성만찬이 없

는 예배는 기독교 예배의 고전적인 형식을 잃은 것이다. 일반 기도는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잃게 되고, 기독교 예배는 성스러움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 종종 설교자 자신의 주관적 의견을 표현하기 쉬운

설교자의 말이 성례전의 객관적인 말씀의 자리를 대신하기 쉽다 ,

) Yngve Brilioth, Eucharistic Faith and Practice Evangli-cal and

Catholic (London:S.P.C.K, 1953), P.274.

 

또한 성만찬의 가장 큰 본질중의 한 요소가 이탈되며, 예배의 균형이

깨어지고 성만찬을 희생제사로 보는 편협한 개념이 강조된다 고 말했

. ) Ibid., p.279.

 

그러므로 이제 한국교회는 그 어떠한 이유에서도 성만찬을 생략해

버릴 근거와 타당성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결코 설교를 중심한

예배는 설교가 항상 모든 청중에게 동일한 감화를 줄 수 있다는 보장

이 없으며 또한 설교가 진리의 설득뿐만 아니라 청중의 정서를 감동시

키는데 어려움이 있다. 선포자의 설교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것은 결

국은 성만찬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진리와 은혜의 효과 이외의 것이

,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 즉 성찬 의식의 효과는 기독교 설교의

내용의 집약이며 종합이라 하겠다. 이것은 복음적인 것이다. 이런

효과를 성만찬은 우리에게 실감있게 하며 가장 순수하고 승화된 종교

적 정서를 우리에게 준다. 설교 못지 않게 심금을 울리는 힘이 성만

찬에도 있다. 거기는 감격과 감사와 사랑과 위로와 치유와 사죄와 소

망과 헌신의 결단이 자연히 생기고 형제의 사랑과 친교와 일체감이 절

로 생기는 것이다. ) 이장식, 예배와 성찬의식 , pp.66-72.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 탈피하여 성만찬의 의

식을 예배의식 안에 회복시켜서 되도록 자주 거행하여 예배를 완성시

켜야 할 것이다. 성만찬 의식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 행위이며 이러한

성찬식이 다시한번 모든 기독교인들을 위한 예배의 정규적이고 규범적

인 형태가 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William Skudlarek, 예배에

있어서 설교 , 차호원 역(서울:소망사, 1985), p.102.

 

 

3. 성만찬 예전 갱신의 모델

 

현재 성만찬을 공예배의 중심으로 확실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개신교 예배를 위하여 성만찬을 포함한 공예배의 갱신 모델을 제시하

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만찬이 초대교회에서부

터 내려오는 공예배의 부분이라는 것은 모든 교회가 인정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한국 개신교 공예배가 성만찬에 관심을 가지고 새롭게

갱신되어 지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측면에서 공예배의 이상적 모델들

이 개발되어야 한다고 본다.

공예배 의식의 이상적인 모델을 작성하는 그 원리는 첫째, 성경에

근거하여야 하고, 둘째로는 예배학적인 이론에 의하여 작성하여야 한

.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모여 예배하는 교회는 흩어져 세상으로

파송되어 나가는 것을 전제로 하여 작성되어진다. ) 백천기,

공예배 의식 갱신에 관한 연구 (예배학박사학위논문, 미국훌러신학대학원

, 1984), p.174.

이와같은 근거로 하여 작성되어지는 공예배 요소에는 절대요소와 부가요소로

구분된다. 절대요소는 성경에 있는 요소로써 공예배에서 빠지면 안되는 요소이

. 부가요소는 절대요소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의 요소로써, 이는

기독교 역사에서 시대에 따라 가감된 요소이기도 하다. 이 부가요소

는 경우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 Ibid.,

 

이상과 같은 요소에 의하여 다음에 제시하고자 하는 성만찬 예전

갱신의 모델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명동교회가 5년여 동안을 공예배

의식의 원형을 성경에서 찾아 제시한 모델로써, 1992104일자 의

식 순서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참고적으로 절대요소 순서 앞에 *

의 표시를 하려고 한다. 또한 절대요소에는 명동교회의 담임교역자인

백천기 목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근거로, 간단하게 요약하여 설명하고

자 한다. ) Ibid., pp.177-194.

 

 

개회의 예배

예배위원입장 ------------------ 오르간 --------------- 예배위원

 

 

입 례 송 ----------------- 시편찬양 ---------------- 다같이

(찬양하라, 감사하라, 기뻐하라, 예배하라)

* 예배에로의 부름 ---------------------------------------- 인도자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인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 람

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히 하도록 성경구절을 낭독하는 순서이

. 시편외에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하여

내게 오라 (55:1,29:12,11:28-30)고 인간을 부르신

말씀을 다양하게 사용하여야 한다.

* 성령임재의기도 ------------------------------------- 예배위원중

이 기도는 예배 드리는 동안에 하나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계

셔주시기를 다같이 기원하는 간구이다.

* 경배찬송 -------------- 일어서서 ------------------ 다같이

기독교 예배의 기본요소로써 찬송을 공예배 중에 여러번 반복하

는 것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역

사적 예배의 큰 유산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찬송을 반복하여

불렀으며(5:19), 사도 바울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

께 찬양하라 (3:16)고 권유하고 있다.

참회에로의 부름 ---------------------------------------- 인도자

* 참회의 기도 ------------------------------------------ 회중각자

사도들에 의해 제시된 예배요소로써(8:22) 하나님의 거룩한

존전에 서 있는 죄인으로서 자기 부족한 점을 용서받고 거룩하

신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는 순서이다.

* 용서를 구하는 기도 ------------------------------------- 인도자

회중의 각자 참회기도를 마감하면서 인도자가 짧은 기도를 한

. 공예배에서의 공중기도는 각자 참회한 성도들의 용서를 위

해 다시 한번 중보의 기도를 하는(42:7-10) 것이다.

* 주기도문영창 ---------------- 548 ------------------- 다같이

* 사죄의 확언 -------------------------------------------- 인도자

이는 사도들에 의하여 제창된 예배요소로써(3:24-26,

1:13-14, 10:17-18, 2:14), 예배하는 회중에게 사죄의 확

신을 주어 사죄의 기쁨을 갖게하는 순서이다.

* 영광송 ------------------------------------------------- 찬양대

사도들에 의하여 제시된(1:6, 1:6, 14:7, 16:27,

4:20) 영광송은 모든 허물을 사해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의 위대하신 사랑과 자비하심을 향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 내

용은 죄 용서받은 기쁨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영광을 돌리는 회중들의 감사와 기쁨의 표현이다.

 

말씀의 예배

* 구약성서봉독 --------------------------------------- 예배위원중

기독교 초기 예배 때마다 성경을 낭독하였는데 구약 예언자의

글과 모세의 글을 먼저 낭독했다(고후 3:14-15). 공예배 때

구약성서 낭독의 중요한 순서는 사도들의 전승을 이어 1세기에

교부들에 의하여 정식 채택되었었다. ) R. 압바, 기독교예배의 원리와 실제

, 허경삼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1), p.27.

 

* 서신교독 ------------------------------------------ 목사와 회중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들에게 편지할 때 사도의 서신들이 교회

공예배에서 낭독될 것을 권장하였다(4:16, 살전 5:27).

한 사도 요한은 이 글을 읽고 듣는 자가 복되도다 라고 하였다

(1:3). 교부 폴리갑은 사도서신을 공중예배에서 읽도록 권

장하였으며 이 서신 교독은 공예배에서 중요한 순서가 되었다.

목사:내가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우리 주 그리

스도 예수께 나는 감사합니다.

회중:주께서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하셔서 당신을 섬기는

직분을 나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목사:내가 전에는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자였

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믿지 않았을 때에 모르고 한

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자비롭게 대해 주셨습니

.

회중:이렇게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총을 차고 넘치게 베푸셨

목사: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 가지는 믿음과 사랑을 나에

게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회중: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

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이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사실입

니다.

목사:나는 죄인들 중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

님께서는 이와같은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회중: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앞으로 당신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나를 본 보기로 보여 주시려고

목사:먼저 나에게 한량없는 관용을 베푸신 것입니다. 영원한

왕이시며 오직 한 분 뿐이시고

회중:눈으로 볼 수 없는 불멸의 하나님께서 영원무궁토록 영예

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다같이:아멘

* 찬양 --------------------------------------------------- 성가대

찬양 순서는 공중에배에서 말씀과 함께 이어지는 중요한 순서

, 사도에 의하여 권장되었다(고전 14:26). 이 순서는 예수님

께서 친히 말씀하신 복음서를 봉독할 때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

들이게 하는 우리 왕되신 주님의 말씀에 대한 찬양의 성격이 있

.

* 복음서봉독 --------------------------------------- 예배위원중

복음서를 봉독할 때에는 전 회중이 다 함께 일어서서 경청하는

것이 상례이다(고전 7:10, 9:14, 11:23, 20:35). 주님의

친히 하신 말씀이거나 그에게 관계된 사실을 증거하는 순서이

므로 교회는 언제나 중요하게 읽혀야 한다. 그리고 기쁨과 경

외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 설교 ------------------------------------------------- 설교목사

설교는 원래 회당예배의 한 요소였는데 성경봉독과는 대조적인

요소였다(13:15,20:17). 이 요소는 다락방 예배에서도 중요

하게 행하여졌었다(2:42). 설교는 사도들의 기본적 활동이

었는데 교회를 이룩하게 된 것도 그들의 설교를 통해서였다(

16:20). 하나님은 인간에게 성령으로 그의 말씀을 통하여 말씀

하신다. 그러므로 설교는 교회생활의 심장부요 예배의 중심부

에 그 위치를 두어야 한다.

* 신앙고백 ------------------ 사도신경 ------------------- 다같이

이 순서는 설교후 설교 말씀에 회중이 응답하는 신앙고백 순서

이다.

봉헌의 말씀 -------------------------------------------- 인도자

여호와께 믿음있는 자들아 그의 거룩한 이름을 들어 감사기도

드리자(30:4). 감사 예물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자.

이름에 어울리는 영광을 야훼께 돌려라(96:8). 십일조를 드

릴 때에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0).

* 응답의찬송과봉헌 --------------------------------------- 다같이

응답의 찬송은 어떤 의미에서 아멘 의 뜻을 가지고 있다.

찬송은 공동체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신앙 결단으로 부르는 순서

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찬송가는 설교 주제나 내용과 관련된

것을 채택하여야 한다. 아울러 봉헌은 영원히 성별시킨다는 사

실을 묘사하는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과 준비된

성만찬 예물을 거룩히 성별시켜 드리는(12:1) 신앙적 마음으

로 드리는 순서이다.

* 봉헌기도 ----------------------------------------------- 인도자

이때의 기도는 드리는 예물과 관련된 내용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과 은총에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와 예물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

름답고 기뻐 받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딤전 2:1-3, 왕상

8:12-61).

교회소식 ----------------------------------------------- 인도자

 

성만찬의 예배

성찬찬송 ----------------- 2841,4----------------- 다같이

초대와 응답 -------------------------------------- 인도자와회중

목사:교우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주님의 거룩한 식탁에 초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참여하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떡

과 포도주를 사랑으로 나눕시다.

회중:주의 거룩하신 성령께서 이 식탁에 함께 하여 주심을 믿나

이다.

목사:하나님은 그의 영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모세와 예언자들이 증언하

였고, 동정녀 마리아를 감동케 하셨으며, 요단강에서 예수

님 위에 강림하셨고, 오순절날 사도들에게 역사하셨습다.

회중:주의 거룩하신 성령께서 지금도 이 식탁에 함께 하여 주심

을 믿나이다.

목사: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연약함, 근심, 걱정, 이 모든 것을

성령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주님은 약속의 예언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게 된다고 말입니

. 성령의 신비한 능력이 이 성만찬에 같이 하심을 믿으

십시오.

회중:주의 거룩한 성령의 능력을 찬양하나이다.

목사: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이 임재하신 이 성만찬 식탁에 나

오십시오. 성령의 감동 감화하심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체험하십시오. 이 성만찬 식탁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

의 사역을 믿으십시오.

회중:주의 거룩하신 성령의 능력을 찬양하나이다.

삼성송(SANCTUS) ---------------------------------------- 다같이

 

 

* 성찬제정의 말씀 ----------------------------------- 목사와 회중

성만찬은 주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행하라 하신 명령임을 다시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주의 말씀을 직접 받아 그에 응답하여

행동하게 하는 순서이다.

목사: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말씀을 성취하게 하옵

소서.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떡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자 마셔

. 이것은 죄의 용서를 위해서 너희를 위해 흘린 내 피

로 맺은 새로운 언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하셨으니(고전 11:23-25), 신앙의 신비가

크고 또 놀랍습니다.

회중:마라나타! 오 주여 오시옵소서.

* 평화의 인사 -------------------------------------- 목사와 회중

이 순서는 교회의 전통적으로 중요한 공예배의 요소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배의 절정에서 거룩한 입마춤으로 형제와 인

(살전 5:26, 16:16, 고전 16:20, 고후 13:12)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신성한 유대관계에서 행

하여졌던 것이다.

목사:주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

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

(14:27).

회중:주님의 평화를 우리에게 주옵소서.

목사: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회중:목사님에게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목사:이제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화해와 평화의 증표로 옆의 교

우 들과 샬롬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

회중: 샬롬 (옆의 교우와 목인사)

* 성령임재의 기원 ---------------------------------------- 인도자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거룩하시며 주의 영광은 측량할 길이 없

나이다. 주께서 일찍부터 세상 가운데 보내셨던 성령을 지금

또 다시 이 거룩한 성만찬 상에 보내 주시어 이 식탁이 성별되

게 하시옵소서. 이 떡과 이 잔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보배

스러운 몸과 피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

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

키리에(Kyrie) 기도송 ----------------------------------- 다같이

 

 

분병과 분잔례 ------------------------------------------- 목 사

목사:우리가 먹는 이 떡은 여러분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의 몸이

.

회중:아멘.

목사:우리가 마시는 이 포도주는 여러분을 위해 주신 그리스도

의 피입니다.

회중:아멘.

하나님의 어린양 ---------------------------------------- 다같이

 

* 성만찬에의 참여 ---- 사랑의 나눔 을 계속 부르며 ---- 세례교인

성찬순서는 인도자가 먼저 시작하는 순서로 한다. 성찬분배 방

법은 여러가지가 있젯으나 예수님과 제자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22:17-20) 성찬을 나누었던 성경을 근거러 하여 회중이 성

찬대 앞으로 나와서 차례대로 직접 성찬기에서 가져다 먹는 방

법이 성경적이라 하겠다.

이제 세례를 받으신 성도께서는 신앙을 표현하는 태도로 앞으

로 나와서 성만찬을 받읍시다. 그리고 아직 세례받지 못하신

교우께서는 빨리 세례를 받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합시

.

사랑의 나눔

 

감사의 기도 -------------------------------------------- 인도자

구원의 주 하나님! 이 성만찬에 참여하므로 다시 감사드리나이

. 이 성만찬을 통하여 성령을 보내시고 우리를 생명과 기쁨

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에 사랑과 화해로 가득차게

하심을 감사하나이다. 주여, 옛날 바벨탑을 쌓아 올리던 사람

들이 언어의 분열로 혼란 가운데 빠졌으나 오순절 성령받은 초

대교회 신자들은 한 마음과 하나의 뜻으로 뭉쳐 살았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이 성만찬에 참여한 우리들도 한 마음 한

뜻되어 주의 뜻을 이루어 가게 하옵소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

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주의 예언의 말씀이 오늘 이 성만찬을 나

눈 우리들을 통하여 성취되게 하옵소서. 생명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니다. 아멘.

오르간 반주 -------------------------------------------- 반주자

 

파송의 예배

* 송영 ---------------- 일어서서 1 ------------------ 다같이

이 순서는 예배 마감 송영으로, 회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

을 찬양하며 세상에 나아가서 사는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며(15:10-11) 봉사의 삶이 되어지도록(딤전

1:17) 거룩한 삶의 걸심을 하나님께 응답하는 순서이다.

* 파송의 말씀 -------------------------------------------- 인도자

이 순서는 흩어지는 교회를 이루는 순서이다. 이제부터 세상에

나아가(6:7-13) 예배에서 받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신앙의 실

천을 다짐하는 순서이다(딤전 6:11-16, 5:12-19).

목사:이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역군으

로써 담대히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회중:우리의 맡은 바 선교와 봉사의 사명을 다하도록 주 성령이

시여 우리와 함께 하시옵소서.

* 축도 --------------------------------------------------- 인도자

이 순서는 구약시대로부터 시작되어 온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6:24-26). 신약시대에 와서는 이 축복의 선언이 더

구체적으로 이행된다(고후 13:13). 이들은 기독교 예배에 정

착되어 오랜 시간을 지켜온 순서이다.

 

이상에서 제시된 예전의 모델은 예배속에서 설교와 성만찬이 균형

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예배의 진행되어지는 순서가

인도자와 회중간의 교독의 형식으로 되어있어 회중들이 보다 더 적극

적인 자세로 예배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인도자인 목사와도 한층 친밀

감을 갖게 해 준다. 또한 현재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의 진행이 집례

자의 일방적인 전달이며, 그로인해 회중들이 자칫 예배에 대한 관심과

분위기가 산만해지기 쉬운데 반하여, 집례자와 회중이 서로 반응하며

일관된 예배의 진행은 보다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도

이 예전의 모델은, 현재 한국교회가 예배에서 경시되어져 있는 성만찬

을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데 좋은 모델이 되어진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본 예전의 모델은 매주일 성만찬이 실행되는 것을 전제

로 작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매주일 성만찬을 통하여 예배적 효과가

지속되고 발전되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교회가 연대

의식을 높이고 결속력을 가져오게 함으로 한몸인 교회에 속하도록 한

. 이와같은 노력으로 매주일 성만찬이 거행되는데 어려운 사항들은

해소되리라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만찬은 예배속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며 그것이 바로 온전한 예배가 되어져서 주님께서 제

정하신 성만찬의 본질이 오늘의 예배에서도 실현되어 지는 것이다.

 

- -

. 공예배와 예전복

 

이제까지 한국 개신교의 성만찬의 공예배에 따른 문제점과 갱신에

의한 올바른 공예배의 실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근간에 설교와 성

만찬의 균형에 많은 관심과 또 실행하려는 의지를 보이는 교회와 지도

자들이 곳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기독

교가 소수의 복음전파자들로 인하여 오늘날의 기독교 인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비록 소수의 교회 지도자들일지라도 그들의 외로운

실천운동을 통하여 머지 않아 우리의 교회는 진정한 공예배가 확산되

어 설교와 성만찬이 균형을 이룬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꼭 첨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가 있다. 예전

복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교회력과 예전복의 관계 및 성

만찬 집례시의 예전복 착용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는 예전복의 의미와 기능에 대해서 알아보고,

예전복의 성서적 고찰과 의미를 살펴본 후 공예배에 따른 예전복의

모델을 제시하고자 한다.

 

A. 예전복의 의미와 기능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예전복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인간

과의 교제를 하는데 돕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예배에서의 예전복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의 경건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예배의식의 신

성함을 상징해 준다. ) William BentonHelen Hemingway Benton,

Publisher, TheNew Encyclopaedia Britannica, vol. 17, (Chicago:1943-1973),

pp.902-903. 이하 인용시 William Benton 로 표기한다.

또한 목회자의 종교적 직무를 나타내며 하나

님과 세속세계와의 중보적 관계를 뜻하여 주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제사장이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속죄하는 직분

으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제사장의 예복은 제사복으로써 착용하였

, 로마교회시대부터 착용하기 시작한 예전복은 예복 하나하나에 종

교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직제나 교회력의 절기의 의

미를 색채로 나타내 준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는 예배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한

. ) 배동섭, 새예배학 (서울:중앙문화사, 1983), p.248.

 

그러나 개신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모든 의식적 요소

들이 제거당하게 되었고 교회력에 의한 제반 행사가 폐지되었으며 목

사는 가운(Gown)을 입고 예배를 집행하였다. ) 김동수, 예배학개론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7), pp.228-229.

그러나 다른 복장으로 예배를 주관하였을지라도 그것이 예배의식복으로

사용된 것이면 아무리 복장의 종류가 달라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예전복으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의 예배에서 목사의 예전복은 일반적인 의식복이 그러하듯

이 그 의식이 갖는 의미를 표현해 주는 역할을 한다. 즉 예복을 통해

서 신앙과 교회의 권위를 나타내는 기능을 하며, 의식복의 상징과 색

채를 통해 기쁨, 슬픔등을 나타내므로 예배 참여자로 하여금 심리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키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정리해

보면 첫째로 목회자가 예배의식을 수행할 목적으로 예전복을 착용했을

때 자연인이 아닌 목회의 공직자로써, 직무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심

리적 영향을 받으며 성직자로써 인간과 하나님과의 중보적 역할과 기

능의 수행을 표현해 준다. 둘째로 목회자의 예복은 교회의 질서를 나

타내 주기도 한다. 즉 목사와 평신도의 신분을 구분할 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종교적 지위나 서열을 구분하여 주는 역할을 한다.

) Marilyn J.Horn / Lois M.Gure, The Second Skin, (Boston:Moughton

Mifflin Co, 1981), p.33.

세째로 목회자의 예복은 그 예복을 착용하므로 지위, 학력, 빈부등이 가리

워지고 평등을 나타내주어 신자로 하여금 평화의 마음이 되게 하고 신

자 자신도 예배에 더욱 참되게 임할 수 있도록 심리적 전달의 기능을

갖는다. 네째로 목회자의 예복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예배의 상

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예배의 언어와 같은 표현을 하게된다.

) William Benton , op. cit., vol.15, p.634.

 

이와같은 기능을 가진 예전복은 예배의식에서 다른 예배요소인 설

, 성만찬, 찬송 및 다른 상징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예배의식에 중

요한 역할을 한다.

 

B.예전복의 성서적 고찰

 

1. 구약시대의 예전복

 

구약성서에 나타난 제사장복은 하나님이 정한 제복으로 백성을 대

신하여 입었으며 제복을 착용하지 않으면 죽게되는 생명의 옷으로 매

우 중요시 하였다. ) 출애굽기 28:2-43.

제사장은 성별의식 즉 목욕과 기름바름과 착복

의식과 희생제사를 통해 제사장직에 임명됨에 따라 이때부터 구체적인

제사장의 예전복이 지정된 것을 출애굽기에 보면 알 수 있다. ) 출애굽기

29:5-9, 29-30.

제사장은 위임을 받을 때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매우 값지고 아름다운 예복을 착용해야 했다.

일 이 법을 어길 때는 죽음의 징벌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28:40-43).

이와같은 제사장의 예복은 특별한 정신적 의미가 있으며 제사장의

특권과 책임을 나타내며 제사의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

는 것으로 ) 류형기, 성서주해 (서울:대한기독교 감리회총리편,

1965), p.320.

제사장의 예복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제사장은 또한 그 역할과 제사직의 직위에 따라 예복을 다르게 착

용했다. 이러한 제사장의 예복을 가장 세밀하게 보여주는 성서의 기

록은 출애굽기 28, 29, 39장이다. 이 중에 출애굽기 281절에

5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로 나를 섬기는 제

사장직분을 행하게 하되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찌니…… 그들의 지을 옷은 이러하니 곧 흉패와 에봇과 겉

옷과 반포속옷과 관과 띠라…….

여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제사장이 입을 예복까지 상세하게 지

시하였다. 즉 제사장의 직무가 거룩하므로 이에따라 예복도 깨끗하고

순수하고 값비싼 재료를 가지고 가장 지혜있는 자의 우수한 기술에 의

해 옷을 만들도록 하였다.

대제사장의 예복은 아주 독특하여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속옷

과 관과 띠 그리고 고의를 착용했고 머리에는 여호와께 성결 이라 쓴

정금패를 달았다(28:4-39, 39:1-31, 8:7-9). 대제사장이 바로

대제사장중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표상이었던고로 대제사장의 예복

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을 상징하였다. 대제사장의 아들들은 제사장

이 되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된 우리도 제사장이라 일컬

어지므로 제사장의 예복은 성도들의 특성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예복과 의식을 따르는 제사장 직분은 하나의 방편이 아니라 성

막에서의 예배, 바로 그 생활이었다. ) Charles W.Slemming,

이것이 예복이다 , 기브리엘 출판위원

회 역 (서울:가브리엘 출판사, 1985), pp.33-34.

 

대제사장의 예복은 짜임새나 재료나 솜씨에 있어서, 이 모든 예복

들의 질은 그 종류중에서 최상의 것들이었다. 즉 정교한 베실, 순금,

보석, 값비싼 관유등을 사용하여 교묘한 솜씨와 지혜로운 마음으로 예

복을 만들었다. 이런 사실은 그것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특성을 상징

하고 있기 때문이며, 바로 최고의 질이 아니면 우리 인간의 본보기인

그 분을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Ibid., p.34.

 

일반 제사장의 예복은 겉옷과 속옷과 흰색 고운 베실로 짠 관과

청색, 홍색, 자색실로 수 놓은 띠기 있다(28:40, 29:8-9,

39:27-29, 8:13).

이와같은 제사장들의 예복은 다음과 같다.

 

에봇 (Ephod)

대제사장이 흉패밑에 입는 옷으로, 출애굽기 286절에서 14절에

보면 에봇은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옷감을

짜서 만든 것으로 이스라엘 예복중에 가장 오랜 것이다. ) 류형기, op. cit., p.321.

에봇은 소매가 없는 짧은 겉옷으로 대체로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것이 보통이었

고 같은 재료로 된 띠를 허리에 둘렀고 12부족의 이름을 새긴 보석 호

마노가 달린 견대로 결합시키도록 되었다. 에봇에는 흉패를 달도록

되어 있으며 예복으로 매우 화려하고 값진 것이었다.

이 에봇에 12부족의 이름을 새긴 보석을 견대에 붙였다는 것은 대

제사장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종교적인 책임을 지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며 대제사장되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모형을 상징한다.

) 이순애, 한국기독교 성직자 예전복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숙명여자대학교, 1985), p.10.

 

그러므로 하나님은 대제사장이 입은 에봇의 견대에 붙은 이름을 보시

고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복을 내린다(5:19, 13:31).

와같이 에봇은 대제사장의 필수적인 예복이었다.

일반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때에 겉에 장식이 없는 세마포로 된 에

봇을 착용했다. 이 에봇은 사무엘이 입었고(삼상 2:18, 14:3), 다윗

도 법궤앞에서 입었다(삼상 6:14, 삼하 9:14-15). 그러나 B.C.587

바벨론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그리고 바벨론으로부터 귀환

후에는 에봇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없다.

) 정인찬, 성서대백과 7, (서울:기독지혜사, 1981, p.447.

 

 

흉패 (가슴받이:Hoshen)

대제사장의 에봇 앞가슴에 달려 있는 것으로 대제사장의 장신구

중에 가장 중요하다. 흉패는 에봇과 같은 재료 즉 청색, 자색, 홍색

실과 베실로 길이가 두뼘, 폭이 한뼘으로 에봇 짜는 법으로 짜서 사방

한뼘이 되도록 두겹으로 하여 여기에 12보석을 장식하였다. 12보석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겼으며 첫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며 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이며 세째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며

네째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을 금테에 물려 장식하였다.

흉패는 호쉔 (Hoshen) 이란 말로 아름다움 또는 주머니 란 뜻

도 되는데 판결 흉패로 우림과 둠밈 (Urim and Thummim)을 넣어 신탁

(神託)에 사용하였다. 우림 은 빛 이란 뜻이고 둠밈 은 완전 을

의미하는데 ) 류형기, op. cit., p.321.

우림과 둠밈의 사용은 제사장의 특권이었으며 원래 유죄

와 무죄를 판결하는데 쓰는 두개의 조약돌이었다(삼상 14:41-42,

26:60). ) 정인찬, op. cit., 4, p.867.

 

흉패의 12보석은 대제사장의 중보역할의 상징이 되었고, 바벨론

포로후에는 우림과 둠밈이 쓰이지 않았다(2:63). 이상과 같이 흉

패는 시비를 가리는 우림과 둠밈의 주머니 역할을 해 왔던 것 같다.

 

겉옷 (M il)

대제사장이 에봇에 받쳐입는 청색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속

옷이 보이며 소매가 없고 머리 들어갈 구멍만 내고 갑옷 깃같이 깃을

짜서 찢어지지 않게 하고 옷의 가장자리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석류

무늬를 수놓고 주위에 금방울을 석류수와 교대로 하여 달았다. 이는

대제사장이 겉옷을 입고 성소에 들어갔을 때 금방울 소리를 통하여 죽

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역할을 하였다(28:31-35).

 

반포속옷 (자수속옷:Cetoneth)

수놓은 바둑무늬의 세마포옷으로 제사장들의 예복중에 겉옷 밑에

입는 옷으로 길이가 발까지 닿았고 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오며 바느질

한 띠로 허리를 묶었다(28:39).

 

(Abn t)

의복과 같은 재료 즉 가는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아

만든다(28:39).

 

고의 (袴衣)

제사장들은 성소에 들어갈 때나 제단에 가까이 가서 하나님을 섬

길 때 넓적다리까지 내려오는 바지로 하체를 가렸다. 이 고의는 베실

로 꼬아 만들었으며 반드시 입어야만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였다(

28:43).

 

()

대제사장들이 쓴 관은 마이터(Mitre) 관이라고 하는데 고대 동방

임금이 썼던 것과 같은 것이며 아마포로 만들어졌다.

) 메튜헨리, 성서주석씨리즈 출애굽기, 황장욱 역 (서울:기독교문사, 1979)

, p.424. 일반제사장과는 달리 대제사장은 관에 정금패를 달았다(28:36).

 

정금패

여호와께 성결 이라고 새긴 패는 대제사장의 신분을 말해주며 이

말의 뜻은 대제사장이 여호와께 성결히 바친 바 되었다는 뜻이다.

것은 그를 하나님이 세우신 바 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종이

된 사실을 의미한다(28:36-37).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제사장의 예복은 많은 규제와 지시를

받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제사장들은 직무의 수행을 위해서는 반

드시 입어야 했으며 그렇지 않으면 생명을 잃었다. 이것은 예복이 그

리스도의 의를 상징하므로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지 않고는 하나님 앞

에 설 수 없음을 의미한다. ) Ibid., p.425.

 

 

2. 신약시대의 예전복

 

구약시대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장들의 제사의식이 예수 그리

스도의 제사장적 역할로 인해 구약시대와 같은 대제사장제도가 필요없

게 됨으로 제사장들의 예복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

스도가 성전예배에 참석한 것으로 보아(2;22) 성전 안에서의 예전

복을 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교회내에서 각각 직무가 구별된 것은 초대교회부터였으며,

) 김미사, 사제복의 변천과정과 예전복에 관한 사적고찰

(성심여자대학교 논문 제 5, 1973), p.242.

구약시대와 같은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그것은 초기 기독교가 로마의 박해

로 인하여 의식을 갖출 여건이 되지 못하였던 것으로 사려된다. ) Ibid.

 

그러나 초대교회의 성화나 모자이크를 자세히 보면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그 당시 유대인의 복장인 그리스, 로마인의 튜닉(Tunic)

토가(Toga)를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William Benton, Publisher, Encyclopaedia Bitannica, vol.23,

(Chicago:1963), p.109.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입었던 의복은 속옷은 바느질을 아

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키톤(Chiton)이고(19:23-24),

) 정인찬, op. cit., 6, p.343.

겉옷은 홍포 라고 하는 왕이나 장군이 입는 것과 같은 외투나 옷위에 두

르는 망토 히마티온(Himation) 이었다(27, 18:2).

) 이상근, 신약주해 (경북:경북인쇄소, 1966), p.387.

이 옷은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속죄의 제물이 되는 구약의 제사장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옷으로써 성례복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딤후 4:13)를 보면 다른 사도들도

그 당시 유대인의 평상복을 입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볼 때에 초기 기독교는 유대인 제사장과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으므

로 신약시대에는 평상복으로 예전복의 의미를 나타냈었다고 볼 수 있

.

 

C. 현대사회에서의 예전복

 

1. 성만찬과 예전복

 

지금까지 세계교회 안에서 널리 애용된 성만찬 예복을 든다면 알

(alb), 체스유블(chasuble), 영대(stole), 검정색 가운(black gown-

한국에서 이용되는 가운) 등이 있다.

 

 

알브 (Alb)

알브는 흰색의 예복으로 어깨부터 무릎 혹은 발목까지 내려오며

소매는 팔에 맞도록 좁게 되어 있는 옷이다. alb라는 말은 라틴어

albus(흰색)에서 왔는데 그 흰색은 그리스도의 순결과 빛을 표상한다.

11세기까지 모든 예배를 위한 성직자의 예복으로 사용되었고, 써플리

(surplice-백의)가 비성만찬 예배를 위해 사용된 후부터 알브는 아

침기도, 저녁기도를 제외한 모든 예배의 예복으로 애용되었다. 성직

자들은 가장 간단한 예복을 입는 경우 알브 위에 허리띠와 영대

(stole)를 사용했고, 성만찬 예식의 경우 알브 위에 체스유블

(chasuble)을 입었다.

 

체스유블 (Chasuble:제의복)

체스유블은 주요의식을 위해 입는 옷이므로 제의복으로 칭해진다.

이 예복은 성찬식이나 그외 주요 의식을 행할 때 성직자가 알브와 영

대위에 입는 판초나 망또 모양의 예복이다. 체스유블의 특징은 소매

없이 판초 모양으로 넓게 만들어졌다는데 있다. 여기서 넓은 것은 하

나님의 포옹을 상징한다. 즉 체스유블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거룩한 만찬의 충만함을 표징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 예복은 주

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입었던 왕의 옷을 상징한기도 한다.

스유블은 그 자체가 깊은 뜻을 표상해 주므로 그위에 장식물이 부착되

지 않았고, 다만 절기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여 사용되었다.

 

영대 (Stole)

영대는 그리스도의 복종의 멍에 를 상징한다. 안수받은 성직자

는 알브나 써플리스(surplice) 위에 영대를 둘렀다. 영대는 안수의

표상이므로 평신도가 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영대를 사용하는 성직

자는 그 날 혹은 교회력의 색깔에 맞추어야 한다. 세례시 사용되는

영대는 한쪽은 흰색, 다른 한쪽은 보라색으로 되어 있다.

 

검정색 가운 (Black Gown)

가운은 본래 16세기에 교수, 법관, 관리, 성직자들이 입던 학위복

및 외출복이었다. 루터와 칼빈은 로마시대의 예복의 가치와 강조점을

부인하면서 엄숙한 검정색 가운을 채택하였다. 유럽에서는 지난 200

년간 캐석(cassock:처음에는 성직자들의 평상복. 이것은 다만 예복을

입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입는 의상)과 가운을 병합한 예복을 개발하였

고 허리띠와 칼라를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원래 검정색 가운은 성

만찬에 입던 옷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예배와 성만찬의 구분없

이 주로 검정색 가운이 사용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전통적으로 사용된 성만찬 예복을 살펴보았다. 그러

면 한국 개신교회가 채택할 만한 성만찬 예복은 어떤 것일까? 종교개

혁 당시 성직자의 예복 사용에 관한 심한 논쟁이 일어났었다. 제네바

개혁자들은 가톨릭교회의 예복이 표현한 가치와 강조점을 부인하고 검

정색 가운을 채택하였다. 한국 개신교회도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에 따

라 검은 가운을 그대로 사용해 왔다. 여기서 우리는 검정색 가운이

한국 개신교회의 예복으로 적합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먼저

제기되는 것은 색상의 문제이다. 검정색은 성직자의 평상복으로 적합

할지 모르나 예배를 위한 예복, 특히 성만찬을 위한 예복의 색상으로

는 적합치 않다. 그보다는 흰색이 적합하다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흰색이 어떤 색보다 심오한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검정색은 애도,

슬픔, 엄숙함을 나타내지만 흰색은 그리스도의 순결, 기쁨, ,

리 를 표상하고 진리, 완전, 성결, 영광 을 표징한다. 표징은 대화

가 단절된 곳에서 언어의 역할을 대신한다. 표징이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될 때, 암시와 설명이 없이도 그 나타내는 바가 뚜렷하게 된다.

) Peter Paul Kaspar, 전례와 표징 , 허인 역 (성바오로 출판사, 1989), p.9.

 

그러므로 예복의 표징과 상징적 의미는 중요할 수 밖에 없다.

 

2. 예전복의 필요성

 

역사적으로 볼 때, 구약시대는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가 되었을 때

제사의식을 행할 수 없었고, 초대교회 사도들의 시대에도 로마의 대박

해로 어려웠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어 안정된 예배를

드리면서 예전복이 생기게 되었다.

한국교회도 구한말의 쇄국정책, 일본의 탄압, 6.25 전쟁으로 의식

수행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우리나라가 모든 면에서 안정되자 기

독교 예배의식도 안정이 되었다. 근래에 의식을 중시하는 교회에서는

오히려 간소화되는 경향이고, 미국 자유교회의 영향을 받은 교회로

부흥과 전도에 열중하며 의식을 경시했던 개신교회는 의식을 회복하려

는 경향이다.

이러한 시점에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 예전복은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성서적으로 보면 구약시대의 제사장은 일반 백성과 구별하

여 반드시 예복을 입고 제사장 직분을 행하였다. 신약시대에는 구약

시대와 같은 예복은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성의는 곧 그

리스도의 희생제사 예복으로서 의미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예복의 기능과 역할면에서 보면 특히 예전복을 착용하므로

목회자는 자기자신의 직무이행을 더욱 성실히 하게 되며, 예배의식에

성실하게 임할 수 있어 예배의식을 보다 숭고하고 경건하게 하여 준

.

세째, 예전복의 적절한 상징이나 색채는 예배에서 언어와 같은 역

할을 하여 예배에 임하는 자에게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더욱 심화하

는데 도움이 된다. 이 때에 지나친 상징물의 부착은 하지 말아야 한

.

따라서 과거의 의식적인 교회에서 착용한 것과 같은 복잡한 예전

복이 아닌 간소한 예전복을 착용하여야 한다. 특히 예전복 기준이 없

는 개신교회는 신앙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시대적인 면에서 현대인의

예전의식에 적합한 예전복의 기준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

 

D. 개신교회의 공예배에 따른 예전복 모델의 제시

 

예전복은 성경에서 지시하고 있으므로(3:7, 28:1-5, 29:30,

대하 20:2, 22:12, 1:10) 공예배시 예전복은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고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규정하고 있다. ) 교회예규 및

행정규정제정위원회, (서울:기독교대한성결교회,1992), p.45.

특히 성찬 집례자는

반드시 예전복을 착용하고 집례해야 하며 영대는 붉은색 영대를 걸쳐

야 한다 ) Ibid.

고 하였다. 그러나 많은 개신교회가 아직도 공예배에 따른

예전복의 기준이 없어 공예배의 예복이 일관성이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전복에 관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현재 목회자들의 보편화된 가운(gown)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고

영대(stole)를 교회력의 절기색을 적용하여 착용토록 제시한다.

 

1. 가운 (Gown)

 

가운의 모양은 제네바가운(Geneva Gown) 그대로 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그 이유로는 칼빈으로부터 입어왔던 전통성을 그대로 유지하

는 것이 좋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보편화 되어있

고 속에 입는 복장이 대부분 양복이므로 이상적이다. 또한 가운은 품

이 여유가 있고 앞트임이고 소매통이 풍성하므로 활동에 불편함이 없

고 입고 벗기에 편리하다.

가운의 색은 검정색과 흰색으로, 검정색은 103월에, 흰색은 4

9월에 착용한다. 일반예식에서도 흑백이 주로 예복의 정장으로

신성하게 하며 심리적으로도 안정감과 정결함을 갖게 한다. 또 흰색

은 하절기에 시원함을, 검정색은 동절기에 따뜻함을 전달한다. 그러

나 경우에 따라서 절기별로 교체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2. 영대 (Stole)

 

영대의 크기와 모양은 2.5m 의 길이에 910cm 의 넓이로 한다.

이것은 목사의 직책과 멍에를 상징하며 교회력의 절기를 상징하는 색

깔을 사용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로 구성된 교회력의 절기를 시

각적으로 볼 수 있게하여 신자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도록 한다. 목회

자가 교회 밖의 장소에서 의식을 인도할 경우에는 가운을 생략하고 영

대만 양복 위에 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가장 실천하기 쉬운 예복은 이상에서 제안한 가운

(Gown)에 영대(Stole)를 착용하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개신교회는

범교단적으로 규정을 내려 공예배의식에 통일된 예전복을 착용하여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예전복의 형태는 본 논문에서 연구하기에는 벅찬 일이므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1992년도 총회 예식위원회에서 제정한 목사의 예

전복의 모델을 소개하기로 한다. (그림생략)

 

 

참고로 교회력의 절기를 상징하는 색깔은 다음과 같으며 이에 따

라 예전복의 영대도 절기 색깔에 따라 착용하는 것이 상례이다.

+-------------------------------------+--------+

| 교회력의 절기 | 색깔 |

+-------------------------------------+--------+

| 강림절, 사순절 | 자색 |

+-------------------------------------+--------+

| 성탄절, 현현절, 부활절 | 흰색 |

+-------------------------------------+--------+

| 성령강람절 | 적색 |

+-------------------------------------+--------+

| 사순절 이전주일, 성령강림후 주일 | 녹색 |

+-------------------------------------+--------+

| 장례식 | 검정색 |

+-------------------------------------+--------+

 

- -

. 결 론

 

본 논문의 연구에서는, 예배의 절정은 설교로써 선포되고 성만찬

으로 행동화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과, 설교는 복음의 선포행위

로 그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 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성만찬은 희

망의 축제 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회상하면서 그의 구원과 해방의 미

래가 성취되고 바로 이런 희망을 표현하는 축제로써 선포되어야 하며,

이 성만찬을 매개하는 그리스도의 친교를 통하여 하나님은 감사와 찬

, 즐거움과 기쁨 속에서 찬미된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또한 한국 개신교는 복음이 전래되는 과정에서 경건주의적이고 복

음주의적인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그 결과로써 성례전 의식

(Liturgy)이 결핍되고, 희망의 축제와 기쁨이 없는 예배를 드리게 되

었으며 오직 말씀중심의 예배만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예배에서 설교만을 강조하게 됨으로써 성례전이 격하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하여 본 논문의 연구에서는 설교에

못지 않게 하나님께서 선행하는 구원의 은총을 우리에게 계시하고 언

약하시는 사랑의 성례전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구원의 은총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케 하는 성례전인 것을 강조하게 된 것이

.

또한 성례전은 기독교 예배의 귀중한 유산으로써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절정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찬송가와 신조로 고백

된 복음의 표증이며 인증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예배하러 모였을

때마다 이 예식을 거행하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회상하였다는 것

과 이들에게 있어서 성만찬 의식은 집회 때마다 행하여져 예수 그리스

도의 교훈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종합적인 의미로 표현하

였음을 성서에서 고찰하였으며, 초기 기독교인들은 성만찬 예배와 말

씀의 예배를 균형있게 드려왔던 것을 재확인 하였다. 이러한 예배의

전통이 중세기에 와서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부 위치에 놓여지는 굴절

된 현상이 있었으나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예배에 있어 말씀의 권위

를 회복하기에 이르렀으며 설교와 함께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전통을

회복하게 된 것을 교회 역사에서 살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개혁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그 후의 대부분의

개신교 예배에서는 성만찬을 경시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성만찬의 의

미와 중요성이 사라져 가고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과 은혜의 상징적인

체험을 알지 못하게 된 것과 성만찬 의식의 의미와 가치를 상실한 채

일년에 한 두번 정도의 행사로서 무의미하게 그치고 만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음을 고찰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교 예배는 말씀 예배와 성만찬 예배의 올바른 균형

을 이룰 때 비로소 완전해지며 이런 의미에서 한국 개신교 공예배는

무엇보다도 설교와 성만찬의 균형이 회복되어져야 한다는 점을 본 논

문에서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성만찬은 오늘의 예배 현장에서 자주 시행되어져야

할 것이며 그 의미와 가치도 함께 인식되어져야 한다. 예배의 현장이

매주일 성만찬을 실천하기에 어려운 실정이라면 한달에 한번이라도 꼭

실행할 것을 제언하는 바이다. 그리하여 말씀의 예배와 성만찬 예배

가 균형을 이룰 때, 성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과 기쁨

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한편 예전복에 관한 연구에서 예전복의 기준이 없는 한국 개신교

회는 공예배에 적합한 예전복의 기준을 제정하여 공예배와 절기에 따

라 착용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예배의 경건한 분위기가 형성되며

예배의식의 신성함을 상징해 줄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개신

교의 일관성 없는 예전복은 하루 속히 범 교단적으로 통일된 모델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하며 한국 개신교를 대표하는 몇몇 교단들만이라

도 뜻을 모아 통일된 예전복을 제작하여 모든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통

일성있게 예전복을 착용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에 참고가 되게

하기 위하여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1992년도 교회예규 및 행정규정제

정위원회에서 결의한 예전복의 모델을 본 논문에 소개한 바 있다.

러나 그것도 완성된 예전복 모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많은 연구를

거듭하여 한국교회에 맞는 예전복이 나오도록 후속적 연구가 더욱 필

요함을 제언하면서 본 논문을 마감한다.

 

- -

참 고 문 헌

 

 

- 외 국 서 적 -

 

Hoon, Paul W. The Integrity of Worship. Nashville:Abingdon

Press, 1971.

Rayburn, Robert G. 예배학 . 김달생, 강귀봉 역. 서울:성광문화사,

1988.

Cullman, Oscar. Essays on the Lord's Supper. Richard:John Knox

press, 1972.

Von Allen, J. J. 주의만찬 . 박근원 역. 서울:양서각, 1986.

Marshall, I. Howard. Last Supper and Lord's Supper. 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 Co., 1980.

Higgins, A. J. The Lord's Supper in the New Testament. London:SCM

press, 1960.

Segler, Franklin M. 예배학원론 . 정진황 역. 서울:요단출판사,

1984.

Eldersheim, Alfred. The Life and Time of Jesus Messiah. Grand

Rapids: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56.

Maxwell, William D. A History of Christian Worship. Grand

Rapids:Baker Book House, 1982.

Dix, Dom G. The Shape of the Liturgy. London:Dacre Press, 1945.

Oden, Thomas C. 목회신학 . 이기춘 역. 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6.

Blackwood, Andrew W. The Fine Art of Public Worship. New York:

Abingdon press, 1954.

Leeming, Bernard. Principles of Sacramental Theology. London,

1956.

Neve, J. L. 기독교교회사 . 서남동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5.

Cullman, Oscar. 원시기독교예배 . 이선희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4.

Lane, Tony.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 사상사 . 김응국 역.

:나침판사, 1984.

Henel, Ingeberg C.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 송기득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6.

Niesel, Wilhelm. 칼빈의 신학 . 이종성 역.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3.

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7.

White,James F. Christian Worship in Transition. New York:Abingdon

press, 1976.

Stagg, F. Dialogue with Trypho . The Ante-Nicene Fathers 10

Vols.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5.

Thuriam, Max. Ecumenical Pespectives on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Geneva:World Council of Churches, 1983.

McCormick, Scott. The Lord's Supper.Philadelphia:The Westminister

Press, 1966.

Brilioth, Y. Eucharistic Faith and Practive Evangelical and

Catholic. London:S.P.C.K., 1953.

Cullman, Oscar. Early Christian Worship. Philadelphia:The

Westminster press, 1953.

Srawley, J. The History of the Liturgy. Cambrige:University

Press, 1947.

Lindgren, A. J. 교회개발론 . 박근원 역.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77.

Skudlarek, William. 예배에 있어서 설교 . 차호원 역. 서울:소망사,

1985.

압바, R. 기독교예배의 원리와 실제 . 허경삼 역. 서울:대한기독교서

, 1981.

Benton, William. Benton, Helen Hemingway. Publisher, The New

Encyclopedia Britannica, Vol. 17. Chicago, 1943-1973.

Horn, Marilyn J./ Gure, Lois M. The Second Skin. Boston:Moughton

Mifflin Co., 1981.

Slemming, Charles W. 이것이 예복이다 . 가브리엘 출판위원회 역.

서울:가브리엘출판사, 1985.

메튜헨리, 성서주석씨리즈 3 출애굽기. 황장욱 역. 서울:기독교문

, 1979.

블러쉬, 도널드 G. 목회와 신학 . 오성춘, 최건호 역. 서울:대한예수

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92.

The Interpreter's Bible, Vol. II. New York:Abingdon Press, 1951.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Vol. III. New York:

Abingdon press, 1962.

Benton, William. Publisher. Encyclopedia Bitannica, Vol. 23.

Chicago, 1963.

Kaspar, Peter Paul. 전례와 표징 . 허인 역. 서울:성바오로출판사,

1989.

 

 

- 국 내 서 적 -

 

박근원. 오늘의 예배론 .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2.

김수확. 개혁파 예배학 . 서울:보문출판사, 1982.

백천기. 공예배의식 갱신에 관한 연구 예배학박사학위논문, 미국훌

러신학대학원, 1984.

이장식. 예배와 성찬의식 . 기독교사상 , 1979.12.

김동수. 예배학 개론 .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7.

정장복. 예배학개론 . 서울:종로서적, 1986.

세계교회협의회 신앙과 직제 위원회. 세례, 성만찬 사역 . 서울:한신

대학출판부, 1982.

김소영. 예배와 생활 .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4.

박은규. 예배의 재발견 .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8.

박근원. 공중예배에 있어서 성찬식의 위치 . 기독교신학총론 I.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7.

김득용. 현대교회 예배학 신강 .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85.

정용섭. 교회갱신의 신학 .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91.

박형용. 루터와 칼빈의 성례관 비교 . 로고스, V.20. 서울:크리스챤

헤럴드사, 1968.

전경연. 루터신학의 제문제 . 복음총서 11. 서울:기독교서회, 1974.

지원용. 루터와 사상:신학과 교육 . 서울:컨콜디아사, 1982.

이장식. 기독교사상사 . 2.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8.

. 기독교 신조사 제1. 서울:컨콜디아사, 1982.

박근원. 한국교회 성숙론 .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6.

정장복. 리마예식서 . 1990년 교회력에 따른 예배와 설교핸드북 .

서울:흥성사, 1989.

새문안 역사편찬위원회. 새문안교회 70년사 . 서울:새문안교회,1958.

박찬환 외 3. 어떤 예배를 드릴 것인가 . 기독교사상 . 1979. 2.

정용섭. 예배와 의식 . 세계와 선교 54. 서울:한국신학대학,

1973.

기독교사상강좌 편찬위원회. 기독교사상강좌 제3. 서울:대한기독

교서회, 1963.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 .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77.

. 한국신학의 광맥 . 서울:전망사, 1982.

김기현. 한국교회의 예배와 생활 . 서울:양서각, 1984.

문상희. 종교란 무엇인가 . 왜관:분도출판사, 1982.

민병소. 한국기독교와 샤머니즘의 이해 . 풀빛목회 . 1982. 3.

이장식.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5.

한완상. 무엇을 위한 예배인가 . 기독교사상 . 1972.2.

김재준. 한국재래 종교와 그리스도 . 기독교사상 강좌 제3.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3.

윤성범. 기독교와 한국사상 . 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64.

정성구. 실천신학개론 . 서울:총신대학출판부, 1981.

정용섭. 그리스도교 예배의 신학 . 기독교사상 . 1987. .

정장복. 한국교회 예배 예전형태 백년 . 기독교사상 . 1984. 12.

한완상. 한국교회 이대로 좋은가 .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배동섭. 새예배학 . 서울:중앙문화사, 1983.

류형기. 성서주해 I . 서울:대한기독교감리회 총21, 1965.

이순애. 한국 기독교 성직자 예전복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논문,

숙명여자대학교, 1985.

정인찬. 성서대백과 6,7. 서울:기독지혜사, 1981.

김미사. 사제복의 변천과정과 예전복에 관한 사적 고찰 성심여자대

학교논문 제5, 1973.

이상근. 신약주해 I . 경북:경북인쇄소, 1966.

교회예규 및 행정규제제정위원회. 사업보고 . 서울:기독교대한성결교

,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