碩 士 學 位 論 文
개화기 기독교학교가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
지도교수 권 인 혁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역 사 교 육 전 공 조 효 섭 2007년 2월
개화기 기독교학교가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 지도교수 권 인 혁 이 논문을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2006년 12월 일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제출자 조 효 섭
조효섭의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2006년 12월 일 심사위원장 ___________________
인 심 사 위 원 ___________________
인 심 사 위 원 ___________________인
- i - < 국문 초록>1)>> 개화기 기독교학교가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 조 효 섭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지도교수 권 인 혁 한국 교육사(敎育史) 가운데 개화기 신교육(新敎育)이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높다. 개화기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이행하는 시발점이었을 뿐 아니라 교육 도 구교육(舊敎育)에서 신교육(新敎育)으로 발전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이 개화기 이후 근대 교육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 교학교(基督敎學校, Christian Mission School)가 차지하는 공헌도는 매우 크다. 당시 한국사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 기독교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기독교학교가 한국의 시대적 정치․경제․사회 속에서 교육이념, 교육내용, 교육방법 등을 통하여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피고 한국의 근대교육에 공헌한 점을 구명하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또한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고찰하고자 하였 다. 첫째,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선교사들의 입국과 더불어 설립되어져 가는 초기 기 독교학교의 설립과정을 살펴보았다. 둘째, 개화기에 설립된 기독교학교의 교육활동을 교육목표, 교육내용으로 나뉘어 분석하였다. 셋째, 개화기 기독교학교가 신교육 도입 및 한국 근대교육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 ※ 본 논문은 2007년 2월 제주대학교 교육대학원 위원회에 제출된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임. - ii - 쳤는가를 고찰하였다. 선교사들이 갖고 있었던 신교육 사상에 의해 기독교학교의 교육목적, 교육내용, 교 육방법은 이전의 전통적인 교육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한국의 순미(純美)한 고유문화 를 바탕으로 한 정신사상 위에 근대문명에 관한 지식을 주고 과학적인 생활을 하게 하여 실력있는 문화인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실천하며, 교회와 국가를 위하여 봉사 할 수 있는 정신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교육목적은 그들이 설립한 각 학교의 교과과정에 분명히 드러 나 있다. 즉, 한국적인 전통을 무시하지 않았고, 성경․영어․물리․화학 등의 서양 의 근대적인 교과목으로 편성되었는데, 이 점은 당시 한국의 개화 또는 근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또한 인간이면 누구나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 실을 깨우쳐 주었으며, 양반이나 서민의 자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차별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교육의 기회균등 사상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기독교학교는 신문화수용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이를 보급하고 발전시켰다. 특히 성경과 찬송가의 번역, 음악과 체육 교육의 활성화, 의료를 통한 사회개혁은 서 양의 문물제도를 소개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교육의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다. 또한 고난받는 국가와 민족을 구원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학교가 전개 한 사업이 민족교육이었다. 즉 국가와 민족이 열강의 침략의 대상으로 전락한 때에, 기독교학교는 교과교육, 교과외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길러주었던 것 이다. 이와 같이 본 연구는 기독교학교가 한국의 근대교육 발전에 공헌한 긍정적인 면에 관심을 두고 고찰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학교가 그들의 교육활동을 통하여 한국 사회에 준 부정적인 영향에 관한 연구는 다른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두었다.
- iii - 목 차 Ⅰ. 서 론 ····················································································································1 1. 연구의 목적과 연구사 검토 ···········································································1 2. 연구내용과 방법 ·······························································································3 Ⅱ. 기독교학교의 성립 ···························································································5 1. 시대적 배경 ·······································································································5 2. 선교사의 입국 ···································································································7 3. 기독교학교의 설립 ·························································································10 Ⅲ. 기독교학교의 교육활동 ················································································29 1. 교육목표 ···········································································································29 2. 교육내용 ···········································································································35 Ⅳ.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 ··················································································43 1. 신교육의 도입과 활성화 ·············································································43 2. 교육의 기회균등(機會均等) 실현 ······························································48 3. 신문화(新文化)의 수용과 보급 ··································································53 4. 민족의식의 함양과 고취 ·············································································59 Ⅴ. 결론 ·······················································································································65 참고 문헌 ··················································································································69 Abstract ······················································································································73 - iv - 표 목 차 <표 1> 민족선각자들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 ····································22 <표 2> 기독교계 사립학교 ··········································································33 <표 3> 교파 ․ 국적별 학교수 ··································································36 <표 4> 배재학당의 교육내용 일람표 ························································46 <표 5> 이화학당의 교육내용 일람표 ························································47 <표 6> 경신학교의 교육내용 일람표 ························································48 <표 7> 정신여학교의 교육내용 일람표 ····················································48 <표 8> 배재학당 교양과정 교과목 ····························································59
- 1 - Ⅰ. 서 론 1. 연구의 목적과 연구사 검토 교육이란 “한 사회의 공동목적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일련의 실제적 활동”1)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은 그 형태가 다양하게 분화된다 하여도 일정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교육은 인간의 활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개혁의 원천적인 힘은 사회구성원의 교육 내지는 교화에 바탕을 두고 있 다. 때문에 진정한 사회개혁은 교육을 통하여 사람들의 기존 의식을 바꾸게 할 때에 만 이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 교육사(敎育史) 가운데 개화기 신교육(新敎育)이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높다. 개화기는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이행하는 시발점이었을 뿐 아니라 교육도 구교육(舊敎育)에서 신교육(新敎育)으로 발전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이 개화기 이후 근대화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학교교육에 관해 논의할 때, 서양 여러 나라의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교육기 관을 논외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근대 교육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선교사 들이 세운 기독교학교(基督敎學校, Christian Mission School)가 차지하는 공헌도가 대단히 높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주요한 교육기관이 개화기 때에 성립한 기 독교학교라는 점에서 볼 때, 그러한 교육기관이 한국의 개화 또는 근대화에 어떠한 형태로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사실을 배제할 수는 없다. 교육기관은 그것을 설립한 개인의 철학적 이념이나 설립목적에 따라 제각기 특색 있는 교육활동을 전개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것은 국가․사회가 지향하는 교육이념 이나 교육목적에 부합한 교육활동이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따 라서 어떠한 형태의 교육기관이든지 국가․사회가 지향하는 교육이념이나 교육목적 1) D. J. D. Commer 著, 성기산 譯, 교육철학 , 집문당, 1982, 112쪽. - 2 - 의 범주 안에서 교육활동이 전개되어야 하며, 또 실제로 그와 같이 영위 되어온 사 실을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교육사를 일별할 때 명확히 알 수 있는 것 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개화기에 선교사들이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선교라고 하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동 시에, 당시 한국사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 교육활동을 전개 하였던 것이 기독교학교였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독교학교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과 그것이 한국의 정치․경제․ 사회․문화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근대화 내지는 발전을 위하여 어떻게 공헌했으 며, 국가와 민족이 비운의 상황에 직면한 때에 그들 학교가 어떻게 대처했는가에 관 한 문제를 가지고 논의를 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개화기의 근대교육에 있어서 기독교학교와 관련한 연구 를 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저술들은 대체로 각 교단의 기독교교육의 역사를 서술하 였거나 각 교단의 교회교육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또 근대의 한국 기독교학교 교 육을 다루고 있는 저술들 중에는 다양한 영역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으나, 그 내용면 에서는 매우 개괄적이어서 상세하고 구체적인 기독교학교 교육의 역사적 흐름을 파 악하는 데는 미흡한 점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근대 한국의 기독교교육의 역사와 관련된 몇 편의 논문들의 특징을 분류하 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기독교학교의 교육에 관한 연구이고2), 다른 하나는 문제사적 측면에서 고찰한 연구이다. 3) 이러한 연구들은 특정 주제를 선 정하여 보다 미시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한 연구물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논문들은 특정 주제에 관한 기독교학교 교육의 활동을 잘 알 수 있는 반면, 근대 기 2) 박치성, 한국민족운동에 나타난 기독교학교의 역할 , 단국대학교 논문집 제14집, 1980. 김준홍, 구한말 개신교 교육과 민족운동 ,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 한규원, 구한말 기독교학교의 성립과 공헌 , 우석대 논문집 제3집, 1991. 정재학, 개화기 기독교학교가 근대의식 형성에 미친 영향 , 한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 3) 남궁용권, 한국 개화기의 사회교육활동에 관한 연구 , 중앙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4. 김무석, 기독교의 전래가 한국 근대화에 미친 영향 , 계명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5. 김경훈, 한국 개화기의 여성사회교육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김용덕, 기독교가 한국 개화기의 신교육 발전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 ,관동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2. - 3 - 독교학교의 활동을 좀 더 거시적인 맥락에서 파악하려는 데는 미흡한 점이 있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미시적인 접근 방법을 사용한 연구 자료들을 바탕으 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개화기 기독교학교의 교육활동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기독교학교가 한국의 시대적 정치․경제․사회 속에서 교육이념, 교육내용, 교육방법 등을 통하여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살피고 한국의 근대교육에 공헌한 점을 구명하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전적으로 기독교학교가 한국사회에 긍정적인 공헌만 했다는 편협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선교하는 과정 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또한 오직 기독교학교 만이 아니 라 관․공립학교(官․公立學校)나 한국인이 세운 사립학교 역시 그 교육에 의하여 한국 사회에 준 공헌도는 기독교학교와 마찬가지로 대등한 위치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개화기 학교 가운데 기독교학교에 중점을 두고 이들 학교가 당시 교육활동을 통하여 한국의 근대교육에 어떻게 기여하였는가에 관하여 고찰하려는 것이다. 2. 연구내용과 방법 1) 연구범위 한국의 근대화 또는 개화기의 시작이 언제부터인가에 관한 논의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보는 관점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그 연구의 시대 적 배경을 개화기에 두고 있으며, 또한 연구 주제를 기독교학교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1885년을 개화기의 시발점으로 설정하였으며, 그 마지막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국권이 완전히 상실 당하게 되는 1910년으로 설정하였다. 이 연구의 대상인 기독교학교란 개화기에 외국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근본적인 목 - 4 - 적인 기독교선교를 위하여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한 학교를 의미하며 동시에 한 국인이 기독교정신에 바탕을 두고 설립운영한 학교도 기독교학교의 범주에 포함시켰 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설립된 기독교학교가 수 백 개에 이르고 있어, 그 중에서 가장 초기에 설립된 대표적인 학교 들을 중심으로 연구 하였다. 2) 연구내용과 방법 본 연구는 한국 근대교육의 시금석을 마련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기독교학교 가 그들의 교육활동을 통하여 한국 국민에게 제공한 근대교육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의 구성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선교사들의 입국과 더불어 설립되어져 가는 초기 기독교학교의 설립 과정을 고찰한다. 둘째, 개화기에 설립된 기독교학교의 교육활동을 교육목표, 교육내용으로 나뉘어 고찰한다. 셋째, 개화기 기독교학교가 신교육 도입 및 한국 근대교육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 쳤는가를 고찰한다. 본 연구의 방법은 개화기 시대의 문헌 즉 신문, 잡지, 교회 회보, 학교사(學校史), 선행 학위논문 등을 종합 정리한 문헌 연구이다. - 5 - Ⅱ. 기독교학교의 성립 1. 시대적 배경 개화기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은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천주교의 만연에 대한 두 려움, 양화(洋貨)의 범람에 대한 위험, 서구문물과의 접촉을 의식적으로 방어하기 위 한 대원군의 쇄국정책 단행과 이에 대해 무력적인 방법에 의해서라도 조선과 통상관 계를 맺으려 한 서양 여러 나라와의 충돌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개화기 이전에는 당시 집정하고 있던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조 선은 눈이 어두워 급격히 변하여 가고 있던 국제 정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편, 따 라서 근대화를 그만큼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일파가 등장하게 되자 개국론(開國論)이 대두되어, 결국 쇄국정책을 철폐하고 나라의 문호를 여러 나라에 개방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은 1875년, 강화도에서 고의로 운양호사건을 유발시키고, 그 이듬해에 조선정부로 하여금 소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강제로 맺도록 하 여 나라를 일본에 개방하는 조치를 취하게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82년에는 미국․영국․독일과, 1884년에는 이탈리아․러시아와, 1886년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맺고, 이 결과 국력이 허약한 조선은 이후 세계 열강의 제국주의 쟁탈전을 위한 각 축장이 되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조선에 대하여 가장 큰 야욕을 가지고 침략의 마 수를 뻗치고 있던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조선은 문호를 개방하면서 전통적인 문물제도를 개혁하고 근대화를 추진한 다는 명목으로 외국에 사절을 파견하여 그들 나라의 선진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배워 오도록 하였다. 특히 일본에는 1876년과 1880년 두 번에 걸쳐 수신사(修信使)를 파견 하였으며,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여 군사․교육․공장 등을 시 찰하게 하였다. 같은 해 중국에는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여 중국의 근대적인 문물 제도를 시찰하도록 하였다. 또한 미국에는 1882년 4월,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 - 6 - 商條約)에 따라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부관 홍영식, 서광범 등을 파견하였 다. 이들이 외국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온 결과를 기초로 하여 조선 정부는 낡은 제도를 버리고 새로운 제도로 개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개화 정책의 전개 과정에서 발생한 임오군란은 오히려 일본이 이에 대해 조선에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군란 관계자의 처벌을 요구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였 는데, 이러한 일본을 견제하려는 청나라의 서구 열강과의 통상조약 체결의 권고를 수용한 조선이 각국과의 통상을 차례로 체결하면서 개화의 문이 더 크게 열리는 계 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이와 같이 심한 반발을 받으면서도 국제 정세에 대한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개화사상은 양반 관리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 후 김옥균을 중심으로 한 개화 세력에 의한 갑신정변의 발발 등 각종 사태가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가운데, 특히 일본과 청이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전쟁을 일으켰는데 여기에서 승리한 나라가 일본이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의 정 치적 진출이 저지된 일본은 경제적인 침투를 꾀하고, 청나라도 조선과 수륙무역장정 (水陸貿易章程) 체결을 통해 경제 진출을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에서도 일본의 경제적 침투는 다른 어느 나라에 비해서 조선 농민들의 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고, 근대 문물의 수용에 따른 경비와 대외 관계에서 오는 비용지출, 궁중의 예산낭비 등 으로 인한 국가 재정의 궁핍을 충당하기 위해 농민들의 수세 부담은 증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교도들에게 가세한 농민들은 정부나 양반의 동학에 대한 탄 압과 농민에 대한 부당한 경제적 수취를 중지할 것, 신분상의 모든 차별 대우를 폐 지할 것, 일본의 침략에 내통하는 자를 엄징할 것 등의 폐정(弊政)개혁 12개조를 주 장하는 동학농민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5) 이 개혁안은 국가 내적으로는 양반 중심의 사회체제에 대해 그리고 외적으로는 외국의 자본주의 침략에 대항하여 항거한 봉기 라고 할 수 있다. 동학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농민운동으로서, 전근 대적인 사회체제에 대한 밑으로부터의 혁명운동이었으며, 또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 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띤 운동으로서 갑오개혁을 통해 근대 사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 4) 이기백, 한국사신론 , 일조각, 1990, 8쪽. 5) 변태섭, 한국사통론 , 삼영사, 1986, 402~403쪽. - 7 - 동학혁명을 진압한다는 미명 아래 청․일 두 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이것은 무력 충돌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고, 종국으로는 전쟁으로까지 비화되고 말 았던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노골적으로 조선에 대하여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조선의 문물제도를 근대적인 제도로 개혁한다는 이름으로 당시 조선정부 에 압력을 가하여 소위 갑오개혁이라고 하는 개혁을 단행하여 각종 문물제도를 일본 식으로 고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은 일본의 침략적 성격과 결부되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 고 오히려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일본은 조선 간섭을 강화하면서, 러시아 의 세력에 의존하려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궁중의 세력과 친러파를 축출하려 했 다. 그 음모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이었다. 결국, 외세의 압력과 내부 분열로 말미암아 국가의 운명은 점점 기울어져 갔으며, 그 틈을 이용한 일제는 조선 정부에 대하여 1905년 11월에 소위 제2차 한일협약(韓 日協約)을 강제로 체결하게 하여, 한국은 사실상 이 때부터 국권을 상실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직접 일제에 무력으로 대항하였으며, 뜻 있는 사람들은 나라를 건지는 길은 교육에 있다 는 것을 절감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젊은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켜주는 등 각종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1910년에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멸망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따라서 한국은 자주적으로 근대 화를 추진해야 할 단계에서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오점을 남기게 되어, 한국의 근대 화는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지배한 40년이라는 기간만큼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2. 선교사의 입국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시기는 개신교에 비해 천주교가 훨씬 앞섰다. 그러나 어 느 시대나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그 시대나 민족 가운데 전통적으로 깊게 뿌리박고 있는 사상이나 종교에 새로운 것이 등장하여 전통적인 것에 도전한다면, 그것은 당 6) 변태섭, 한국사통론 , 삼영사, 1986, 24쪽. - 8 - 연히 배척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동서고금으로 공통적인 역사적 현상이었다. 따 라서 천주교가 한국사회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 다. 즉, 신유박해(1801년, 순조원년)와 기해박해(1839년, 헌종 5년)라고 하는 두 차례 의 커다란 박해를 비롯하여, 천주교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잇따르게 되는 역사가 계 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사회의 지배층에서 서학(西學), 또는 서양 오 랑캐가 숭배하는 종교라고 멸시한 천주교는 조선 전 지역에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천주교가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오면서 그 뿌리를 내린 결과 때문에 개신교는 개화기 한국사회에 비교적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한국 최초로 개신교 선교사 로서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이는 독일인 선교사 구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이었다. 그는 황해도 장산곶과 군산만에 들어와 약 1개월 간 체류하면서 한문성서 와 그리스도 교리서 를 전달함으로써 개신교 전파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7) 그리고 1865년(고종 2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목사 가 백령도와 대동강에서 한문성서 를 전달하면서 기독교가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을 다져 놓았다. 토마스 목사는 1866년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호 사건 때 순교 당하였다. 또한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목사, 로즈(John Ross) 목사, 맥킨타이어 (John Maclntyre) 목사 등이 조선에 기독교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입국을 시도했 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탄압이 극심한 때였으므로, 조선 땅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지방이나 조선의 해안 근처까지 왔다가 돌아가고 말았다. 이와 같이 한국에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개척자 구실을 한 선구자들의 노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 이후에 공식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선교사들 에게 복음을 전파하는데 주춧돌을 놓아주었던 것이다. 8) 조선은 일본과 맺은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 (朝日修好條規)를 필두로 하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 하였다. 또한 다른 외국과의 통상조약이 수립되면서 기독교 선교사들도 한국에 들어 올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내한에 기여한 인물로는 이수정과 민영익을 들 수 있다. 이수 7) 곽안전, 한국교회사 , 대한기독교서회, 1973, 13~14쪽. 8) 한규원, 한국 기독교학교의 민족교육 연구 , 국학자료원, 2003, 21~22쪽. - 9 - 정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선교사 파견을 건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교회 지 도자들에게 한국 선교의 당위성을 인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9) 또 민영익은 조 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체결된 이후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되었을 때 만난 가우처(J. F. Goucher) 박사에게 한국 선교의 당위성을 인식시켜주었다.10) 그 결과 1884년 7월 3일 한국에 파견된 일본 주재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 (Robert S. Maclay) 목사는 약 2개월간 서울에 머물면서 김옥균을 통하여 국왕을 알 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육․의료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윤허를 받고 돌아감으로서 한국 선교의 길을 열어 놓았다. 한편 맥클레이 목사의 보고를 통하여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인식한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는 초대 한국 선교사로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와 스크랜튼(M. F. Scranton)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는 알렌과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를 한 국 선교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9월에 최초의 의료 선교사로서 미국 북장로교 소속 알렌(H. N. Allen)이 입국하였다. 당시 한국의 정세가 선교사라는 공식명칭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의사의 자격으로 들어 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알렌은 갑 신정변 당시 개화당으로부터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 줌으로써 기독교는 국가 로부터 박해를 받아오던 초기의 천주교와는 달리 우호적인 입장에서 선교활동을 시 작할 수 있었다. 한국에 정식으로 선교사의 자격으로 입국한 사람들은 미국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미국 북감리교의 아펜젤러와 스크랜튼 등이었다. 이들은 한국에 입국한 목적인 선교 사업을 비롯하여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을 전개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해 갔다. 이들 선교사들의 뒤를 이어 캐나다,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도 선교사를 한국에 파 견함으로써, 1910년까지 대부분의 교파가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주로 서 울, 평양, 대구, 선천 등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 의 신기원을 이루어 나갔다. 그 결과 1910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던 선교사 만도 무려 277명에 이르렀다. 11) 9) 김양선, 한국기독교회사 , 한국문화사대계(12) ,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72, 571~753쪽. 10) 손인수, 한국개화교육연구 , 일지사, 1981, 85쪽. - 10 - 그런데 선교사들이 기독교 선교의 처녀지인 한국에서, 선교의 수단으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이었다. 특히 당시 한국은 전근대적인 사회 형태에 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근대적인 교육이나 의료사업은 불모지(不毛地)의 상태 그 대로였다. 따라서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볼 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합 할 뿐만 아니라, 한국 국민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가장 적절한 사업이었던 것이다. 그 러므로 선교사들은 그들의 발길이 닿아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는 곳에는 거의 예외 없이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3. 기독교학교의 설립 개화기 기독교학교가 어떻게 설립되었고, 그 교육의 내용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고찰은 개화기의 근대교육이 어떻게 태동, 발전되어 갔으며, 그 속에서 기독교학교는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살펴 볼 때에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 근대교육의 태동 근대교육 태동의 주체는 1876년 개항 이래 본격적으로 들어온 외국의 선교사들과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민족의 국권을 회복시키려고 했던 민족의 선각자와 그 당시 정 부의 노력이 있었다. 정부에 의해서는 관학으로, 민족의 선각자들에 의해서는 민족사 학으로, 그리고 외국의 선교사들에 의해서는 기독교학교로 나타나게 되었다. 개항과 더불어 밀려들기 시작한 서양의 신문화, 신문명은 위정자들에게 신학문과 근대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시켜주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일본, 청나라, 미국 등지에 유학생과 사절단 등을 파견하여 견문을 넓히도록 배려함과 동시에 근대교육 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동문학(同文學), 육영공원(育英公院) 등과 같은 신교육기관 을 설치하였다. 동문학은 일명 통변학교라고 부르며 통변을 양성할 목적을 가지고 주로 영어를 가르쳤다. 주로 영어를 가르쳤기에 영어학교라도 하기도 하였다. 이 통 11) 손인수, 한국개화교육연구 , 일지사, 1981, 19쪽. - 11 - 변학교는 정부의 외교 고문으로 있던 독일인 뮐렌도프(P. G. von Moellendorf)가 통 역관 양성을 목적으로 통상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설립하였는데 영국인 헬리팩스(T. E. Halifax)가 이 학교에서 주무교사로 있으면서 영어를 가르쳤다. 또한 육영공원은 미대사로 미국에 갔던 민영익의 건의와 제의에 따라 설립된 학교 이다. 민영익의 건의를 받은 고종은 미국 정부에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을 교사의 추천을 의뢰하고 그 결과 유니온 신학교 학생인 길모어(G. W. Gilmore), 벙커(D. A. Bunker), 헐버트(H. B. Hulbert) 세 사람을 추천 받아 개교하게 되었다. 이 학교의 설치 목적은 영어를 교수함에 있었고, 학생들은 모두 국왕이 추천한 귀족자제들이었 다. 12)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자주 독립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주권재민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 1884년 발생한 갑신정변이었다. 갑신정변은 비록 삼일천하로 끝나 실 패함으로써 주도자들의 개화의지는 꺾였지만, 일반 민중들도 사회개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상적․사회적 배경을 형성시키기에는 충분한 대사건이었다. 이후 개화교육 은 박영효가 1896년 개화에 관한 상소 를 올리고, 유길준이 서유견문 에서 개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부터 급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3) 또한 이 당시 독립협 회는 기관지인 독립신문 을 통하여 근대교육의 당위성을 널리 홍보하였다. 이와 같이 개화운동은 곧 근대교육운동으로 인식됨으로써 민족선각자들을 중심으 로 근대교육의 터전이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이후에 설립된 학교를 관립학교와 민간 인 사학으로 나누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관립학교의 설립 우리나라가 정부차원에서 근대교육제도가 마련되기는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학제 가 마련되면서부터였다. 종래 학사를 관리해 오던 예조를 폐지하고 교육문제를 전담 하기 위하여 학무아문에 학부를 두는 동시에 과거제를 폐지하였다. 물론 앞에서 언 급했듯이 그 이전부터 정부에서는 통상아문의 부속 기관으로 영어를 가르치던 통변 12) 신용하, 한국근대사와 사회변동 , 문학과 지성, 1974, 53~54쪽 13) 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 일조각, 1969, 33쪽. - 12 - 학교를 1883년에, 육영공원을 1886년에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시도했으나, 육영공원은 아직 완전한 의미에서 개화된 현대식 학교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전통과 특권을 갖는 고관의 귀족자제들은 아직도 보수성이 강하여 구교육의 전통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반 평민은 그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이 육영공원의 교육이 갖는 큰 결점 중의 하나이고 일부 양반 자제만을 대상으로 한 교육 기관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양반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 등으로 인해 부진 을 면치 못하다가 그 자체가 가지는 제약성 때문에 1894년에 폐교되고 말았다.14) 육영공원의 실패를 경험한 정부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근대교육을 실시하고 있던 기독교 학교의 나름대로의 교육적인 성장을 확인하면서 비로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근대교육을 널리 보급할 것을 결정하였고, 과거제가 폐지됨에 따라 이제까지 등용의 길이 막혀 있었던 중인 들이 근대교육에 의해서 관계(官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셈이다. 정부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부터 1905년 을사조약에 체결되기까지 약 10년간에 걸 쳐 형식상으로나마 구교육 제도를 청산하고 비로소 근대교육 제도를 수립하게 되었 다. 이 학교 제도에 의하여 정부에서는 1895년에 한성사범학교를 비롯하여 외국어 학교, 법관 양성소, 1899년에는 경성의학교, 1900년에는 한성고등학교(오늘날의 경기 고등학교의 전신), 1904년에 농상공학교, 1908년에는 한성고등여학교 등 여러 관립학 교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정부에서 설립한 관학의 거의 대부분은 일본의 것을 모방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침략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1905년 을사조약으 로 조선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대처해야 하는 역사 적 배경으로 신문화의 수용과 근대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자각은 확산되었지만, 그것 을 실천하는 데는 다음과 같은 어려움이 있었다. 첫째로, 근대교육의 추진에 필요한 유능한 인재가 부족했고, 둘째로, 국가의 재정 보조의 뒷받침이 부족했고, 셋째로, 그 당시 개화를 주장하는 인사들 대부분의 교육 적 배경이 유학이었기 때문에 의욕은 있으되, 그들 자신이 개화 정책을 실천하기 위 해 필요한 전문 지식이나 기술 또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14) 안상원, 한국기독교성장 100년 , 이화여자대학교, 1986, 50쪽. - 13 - (2) 민족계 사립학교의 설립 민족계 사학의 경우, 그 효시는 1883년 덕원 주민들에 의해 세워진 원산학사이다. 하지만 제도, 학제, 규모 등은 아직도 서당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갑오 개혁 이후 설립된 관립학교들이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부진을 면치 못하 고 있는 가운데 민간 지식인이나 선각자들에 의해 사립학교가 다수 설립되어 비교적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1895년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외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와 외국어 교육의 필요 성을 절감하고 흥화학교를 설립하였고, 서울의 사회유지들이 한성의숙을 세웠다. 1896년에는 민영기가 서울에서 중교의숙을 세웠고, 또한 낙영의숙, 정선여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사립학교 설립이 본격화되는 것은 독립협회 운동 등 개화 지식인들의 활동에 의해 개화사상이 대중 속에 침투되기 시작한 1898년 경 으로부터 보인다. 개 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흥화학교를 설립한 민영환, 우산학교를 설립한 박제순 등 정부 고관 뿐 아니라, 각지의 관찰사, 부윤 및 군수 등 지방 행정 관, 나아가서는 개화를 적대시하는 유생 가운데서도 사립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사 람들이 나타났다. 안창호는 1899년 그의 고향인 평남 강서지방에 점진학교를 세웠으니, 이는 획기적 으로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였다. 1902년에는 우산학교(뒤에 의법학교)가 설립되었고, 1904년에는 전덕기가 청년학원을 설립, 그 후 안창호등이 조직한 신민회 의 기관학교로서 독립사상 고취에 공헌하다가 1914년에 폐교되었다.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중고등학교)이 엄주익에 의해서 설립되었는데, 그는 1904 년 일본을 시찰 중 우리나라가 무엇보다도 시급히 착수할 것은 교육이라는 것을 절 감한 나머지 양정의숙을 창설하였다. 15) 1905년에는 이용익이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이념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보성학교(현 고려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사립학교는 개화 사상의 영향 아래 설립되었던 만큼 신문명과 신학문을 전달하는 데에 역점을 두었다. 따라서 그 교육목적은 기본적으로 관립학교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사립학교는 관립학교보다 실용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 15) 한기언, 한국교육사 , 박영사, 1963, 268쪽. - 14 - 립학교에서는 일반 교양 과목 성격의 근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수학 등의 교과 이 외에 일어․영어 등 외국어를 가르쳤고, 정치학․경제학․법학․행정학 등의 실용성 있는 사회과학 과목을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측량․법률․부기․철도․공업․제조 등 전문과를 설치하여 운영함으로써 직업교육 기관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용적 성격의 사립학교 설립은, 물론 개화 지식인의 형성과 개화 의식의 침투를 반영한 것이지만 미약하나마 자본주의 경제의 전개와도 결부되어 있었던 것 으로 보인다. 당시 광산, 철도, 은행, 전신 등의 각종 이권이 차츰 외국 열강의 손으 로 넘어가는 가운데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근대적인 ‘민족자본’이 형성되어 갑오개혁 이후 다양한 형태의 기업 활동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경제의 일정 한 발전은 필연적으로 그것에 적합한 인재 양성을 요구한다. 홍화학교 양지석송과, 낙영학교 공업전수과, 광신 상업학교 등의 설립에는 이러한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광신 상업학교는 상인들이 설립한 학교이다. 근대적 학문과 과학기술을 가르침으로써 부국자강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 였던 민족계 사립학교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 교육운동이라 는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게 되었다. 조국의 식민지화라는 일대 위기에 직면하여 한 국 근대교육은 이제까지의 부국강병, 자주독립이 아닌, 국권회복을 지상의 목표로 설 정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일본의 지시대로 따를 수밖에 없어서 구국교육운동은 관․ 공립학교와 사립학교에 의해 통일적으로 전개되지 못하고 애국 계몽 운동가들에 의 해 조직된 학회, 교육회를 중심으로 각지에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형태로 수행되었다.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교육 계몽운동에서 교육이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실현하 는 원천으로 인식되었듯이 구국 교육운동에서도 교육은 국권을 회복하는 원천으로 인식되었다. 박은식은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에서 교육을 일으켜 민중의 지혜를 발달 시키는 것이 국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임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의 국세가 다 기울었다고 폄론하는 자 있으나 교육 하나만 흥왕하게 되면 겨우 이 어지고 있는 국맥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며 땅에 떨어진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 한국인 을 타인의 노예로 만들고 국가의 사상을 알지 못하도록 할 것이라면 모르겠거니와 국가 독립의 영광을 회복하고 국민이 자유의 권리를 잃지 않으려면 오로지 교육을 널리 하여 민지를 발달케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교육의 힘은 실로 크다. 쇠퇴한 국운을 만회하고 - 15 - 빈사한 인민을 소생케 하는 것이 교육이다. 16) 구국 교육운동은 전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어 전국 각지에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는 데 그 수는 불과 2, 3년 사이에 3, 4천에 이르렀다. 당시의 사립학교 설립 운영에는 선각적 지식인이나 애국적 자산가 뿐 아니라 농민, 노동자, 상공업자, 하급 관리 등 일반 대중이 광범위하게 참여하였다. 이러한 사립학교들은 교육 구국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했던 대표적인 사립학교로, 이승훈이 1907년에 설립한 오산학교와 안창호등이 1908년에 설립한 대성학교를 들 수 있다. 오산학교의 설립 목적은 신민회의 이념을 실천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간부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1907년 12월 24일 이승훈은 개 교식에서 7명의 입학생에게 “총을 들고 칼을 차는 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중의 눈을 뜨게 하는 일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고 있기에 이들을 각성시키는 일이 제일 급무이다”17)라고 함으로써 민족정 신의 배양이 학교 설립의 기본 정신임을 명확하게 밝혔다. 안창호가 윤치호, 이종호 등과 함께 1908년 9월 평양에 설립했던 대성학교는 “민족주의를 고취하여 장래의 항 일 투쟁 투사를 양성하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교육목적 아래 근대 적인 교과와 함께 ‘상무적’ 체조나 애국 창가 등이 중시되었는데 전체적으로는 ‘민족 성의 개조’를 목적으로 한 정신교육에 최대 역점이 두어졌다.18)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신념에서 선각자들은 교육기관으로 학회를 만들었으니 서 북학회, 호남학회, 기호학회, 교남교육회, 대동학회, 여자교육회, 태국학회, 대한환학 회, 대한동인회, 대한학회, 관동학회, 보인학회, 국민교육회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비 공식적 교육기관으로서 국권회복과 민족정신을 촉구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당시 경기, 충청도 인사로 모인 기호흥학회는 지․덕․체력의 연마와 실무역행(實 務力行)의 교육으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1908년 6월에 기호학교를 서울 에 설립하였으며 그 후 유길준이 설립한 융회학교와 합동하여 교명을 중앙학교(현 16) 대한매일신보 , 1906. 1. 6. 논설 “務望興學 一”. 17) 김기석, 남강 이승훈 , 세운문화사, 1970, 90쪽. 18) 윤건차, 한국 근대 교육의 사상과 운동 , 청사, 1987, 114~115쪽. - 16 - 중앙중고등학교)라 하였다.19) 서우학회는 1907년 교사양성의 시급함을 느끼고 서우사범학교 속성사범과 야학교 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서북학회는 1907년 7월에 강화석을 설립자로 하여 학부대신 의 인가를 받아 서북협성학교를 세웠다. 일제의 국권침탈로 서북학회가 강제해산 당 하자 이 학교는 오성학교로 교명을 고쳐 부르다가 1914년 4월에 폐교되었다. 대동학회는 1908년에 법률교육을 목적으로 대동전수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대조동 인회에서는 1907년에 개최된 정기총회에서 동인학교를 창설했고, 보인학회에서는 1908년에 보인학교를 세웠다. 20) 1906년 민영세는 사재를 던져 세문의숙을 설립하였 다. 처음 학교명은 광성의숙이라 하였는데 고종황제가 세문의숙으로 액명하였다. 동 년 7월에 남궁억이 강원도 양양에서 현산학교를, 9월에는 이용익이 보성중학교(현 보성중고등학교)를, 그리고 12월에는 중동학교가 세워졌다. 이밖에 1907년에는 이봉래의 봉명학교, 유일선의 청리사, 이종호의 경성중학교, 의 주의 양실학원, 김구가 책임자로 있던 양산소학교, 1908년에는 장지영에 의하여 조의 학교가 창설되었다. 1909년에는 김흥호의 발기로 양산학교 자리에 중학교를 설치했 고, 1910년에는 만주에 신환학교(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사립 여학교를 보면 1906년에 광선궁과 영친왕궁에서 토지 2백만평을 내려 줌으로써 엄준원이 진명여학교를 설립했고, 초대 교장으로 이정숙 여사가 취임되었 다. 동년에 황실의 후원으로 숙명여학교(초기교명은 명신여학교)가 세워졌다. 21) 그리 고 1908년에는 조동식이 야학으로 동원여자의숙을 시작하였는데 다음해에 김인화 여 사가 창설한 동덕여자의숙과 병합하였으니 이것이 현 동덕여자중고등학교의 모체이 다. 이렇게 보면 민족계 사학의 건립은 침체된 국운 속에서 국권회복과 구국운동을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보자는 겨레얼의 표현인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근대 민족계 사학은 첫째로 국권 회복을 위한 민족운 동 지도자를 양성하였고, 둘째로 애국교과에 의해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셋째로 교육 실천을 통해서 항일 운동을 전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5년부터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까지 설립된 주요 민족계 사립학교는 다음과 19) 오천석, 한국신교육사 , 현대교육총서출판사, 1964, 62쪽. 20) 손인수, 한국근대교육사 , 연세대출판부, 1971, 125~126쪽. 21) 오천석, 앞의 책, 191~192쪽. - 17 - 연 대 학 교 명 설 립 자 소 재 지 1895 흥화학교 민영환 서울 1895 낙영의숙(뒤 을미의숙) 사회유지 서울 1896 중교의숙 민영기 서울 1899 점진학교 안창호 강서 1901 낙연의숙 서광세 서울 1902 우산학교 양제섭 서울 1904 청산학원 김덕기 서울 1905 양정의숙 엄주익 서울 1905 광성실업학교 전소론파 (前小論派) 서울 1905 한성법학교 사회유지 서울 1905 보성학교(뒤 보성전문학교) 이용익 서울 1906 세문의숙 민영세 서울 1906 진명여학교 엄책기 서울 1906 숙명여학교 엄책기 서울 1906 보성중학교 이용익 서울 1906 중동학교 신규식 서울 1906 현산학교 남궁억 양양 1906 양귀의숙 여자교육회 서울 1906 화야의숙 이철호 포천 1907 신학원 여자교육회 서울 1907 동인학교 대한동인회 서울 1907 대성학교 안창호 평양 1907 강명의숙 이승훈 정주 1907 오산학교 이승훈 정주 1907 봉명학교 이봉래 서울 같다. <표 1> 민족선각자들에 의해 설립된 사립학교22) 22) 손인수, 한국인과 교육사상 , 교단사, 1969, 206~208쪽. - 18 - 연 대 학 교 명 설 립 자 소 재 지 1907 오성학교(뒤 광신상업학교) 서북학회 서울 1907 정리회 유일선 서울 1907 경성중학교 이종호 경성 1907 양실학원 사회유지 의주 1907 양산소학교 김구 안악 1907 장훈학교 사회유지 서울 1908 기호학교(뒤 중앙학교) 기호환학회 서울 1908 동덕여자의숙 이재극 서울 1908 대동전수학교 대동학회 서울 1908 보인학교 보인학회 서울 1908 조의학교(뒤 동성상업학교) 장지영 서울 1909 육희학교 유길준 서울 1909 양산중학교 김홍호 안악 <표 1>에 나타나 있는 각종 사립학교들은 비교적 명문학교였다고 짐작될 뿐, 그 정확한 수는 상세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사립학교령이 공 포된 1908년 이후 전국의 국립․공립․사립학교는 모두 54여 개 교에 학생 수가 20,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1909년에 제출된 사립학교 설립청원서만 해도 무려 2,056건에 이르렀다. 그러나 1910년 국권피탈시 정식으로 인가받은 사립학교 수는 2,250여 개 교로 나타나 있으나 학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받지 못한 사립학교 수는 700여 개교로 나타나 있다.23) 2) 기독교학교의 설립 기독교는 어느 국가나 지역을 대상으로 하든, 선교의 방편으로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믿는다. 왜냐하면 더 많은 기독교신자를 집중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과 또한 복음이란 나이가 어린 사람일수록 그것을 쉽 23) 정영희, 개화기 종교계의 교육운동 연구 , 혜안, 1999, 47쪽. - 19 - 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더구나 한국과 같이 아직 봉건적인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근대화가 진전되지 못한 나라에서는,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여 어린 학생들을 지적으로 깨우쳐주는 일은 절실한 문제였다. 아울러 기독교를 통하여 영적 으로 구원해 주어야 한다는 문제는 선교사들의 관점에서 볼 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한국에서 선교사들에 의하여 근대식 학교가 성립되어 가는 과정은, 그것이 곧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국가․사회가 어떻게 근대적인 국가․사회 체제로 전환․발전되어 가고 있는가를 설명해 주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한국에 각급학교를 설립함으로써 학교제도의 근대화에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미 국 선교사들이었다. 1894년 미국 장로교회 선교사이며 의사인 알렌(H. N. Allen)이 의사의 자격으로 입국하여 갑신정변 때 큰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 준 공로로 조정의 두터운 신임과 함께 민영익으로부터도 물질적 보답을 받았다. 그러나 알렌은 이러한 물질적 보수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기 사업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미국 공사관을 통해 外部(외무부)에 청해 국립병원의 설립을 제의하였다. 그 제의 내용은 만일 조선정부에서 병원 건물과 약값만 부담하면 자기는 의사로 봉사할 것이요, 자기 생활비는 미국에 있는 자선사업기관에서 지원해 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홍영식의 구가(舊家)를 알렌에게 맡기어 병원을 설립하게 하고 겸하여 약품비도 부담하게 되었으므로 1885년 4월 10일에 광혜원이란 이름으로 국립병원이 개설되었다. 24)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병원의 시작으로, 여기서는 의료뿐 아니라 일 종의 의학실습 교육으로 학생을 뽑아서 서양의학도 학습하게 하여, 1908년에 7명의 제1회 졸업생을 내었으니 이것이 바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모체며, 지금의 연세 대학교의 근원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기독교학교는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1885년 에 설립한 배재학당이다. 아펜젤러는 1885년 7월 27일에 서울에 들어와 8월3일에 이 겸라와 고영필 두 남학생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25) 이것이 배재학당 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7일에는 이종운, 오인학 두 사람을 정부에서 보 24) 백낙준, 한국의 현실과 이상 , 동아출판사, 1963, 360쪽. 25) 배재중고등학교, 배재팔십년사 , 배재중고등학교, 1965, 99~100쪽. - 20 - 내어 가르치게 되었고26), 이듬해인 1886년 10월 6일에는 20명의 재적생을 갖는 학 교27)로 발전하였다. 이 학교는 그 교육사업의 공적을 나라로부터 인정받게 되었으며, 따라서 1887년 2월 21일에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은 배재학당(培 材學堂)이라고 하는 인재를 배양하는 뜻의 학교 이름을 지어주는 동시에, 그 당시 명 필이었던 정학교로 하여금 쓰게 한 액자를 하사하였다. 28) 당시로서는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오늘날과 같이 일정한 제도적․법적 절차를 밟 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유스럽게 어디에서든 선교사들이 학생을 모아 놓고 가 르치기 시작하면, 그것이 곧 학교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배재학당 은 선교사에 의하여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학교라고 하는 점에 큰 의의가 없는 학교이었다. 설립자인 아펜젤러는 1887년 2월에 왕으로부터 학교의 이름을 하사 받고 이날의 감격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오늘 우리 선교학교는 국왕으로부터 이름을 하사 받았다. 그 이름은 ‘培材學堂’이며 ‘유 능한 인재를 양육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정부의 승인을 의 미하는 것이고,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국인 앞에서 떳떳이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29) 이와 같이 아펜젤러는 국왕으로부터 학당 이름과 액자를 하사 받은 것을 사실상 학교 설립에 관한 나라의 인가로 생각하였으며, 마치 공립학교와 같은 지위에 오르 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사실 배재학당은 설립 초기부터 그 졸업생이 정부의 관리 로 취직할 정도로 나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화학당 역시 미국 선교사 가 설립한 학교이었다. 즉 배재학당과 같은 교파인 미국 감리교선교회 소속의 스크 랜튼 여사(Mrs. Mary Scranton)가 1886년 5월에 단 한명의 학생을 데리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이화학당의 출발점이었다. 최초의 학생에 대하여 스크랜튼은 다음과 같 26) 배재중고등학교, 배재팔십년사 , 배재중고등학교, 1965, 100쪽. 27)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 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136쪽. 28) 배재중고등학교, 배재팔십년사 , 배재중고등학교, 1965, 110쪽. 29) 아펜젤러일기 , 1887년 2월 21일자 - 21 - 이 말하고 있다. 우리 학교 수업은 이 새로 지은 학교 건물로 옮겨오기 전 여섯 달 전에 스크랜튼 의사 사택에서 시작되었다. 학생 하나를 데리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학생이라는 사람은 정부관 리의 첩이었는데, 그의 남편은 자기의 첩이 영어를 배워서 언제인가는 왕비의 통역관이 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석 달 정도밖에 우리와 함께 있지 않았다. 30) 당시는 남자에게 제공하는 근대식 학교교육이 겨우 태동하는 시기이었는데도 불구 하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여성을 위한 근대식 학교교육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역사 적으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리 개화기라 할지라도, 이 시기 는 아직 수천 년 동안 내려온 남존여비의 봉건사상이 지배하던 때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아무리 선교사일지라도 여성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하였다는 것 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으로 볼 때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에게는 교육 을 제공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팽배하던 때에, 그리고 남자와 여자 가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란 해괴한 현상으로 여기던 때에, 여자들을 위한 교육을 시작했다는 것은 참으로 혁신적이고 과단성 있는 일이었다. 31) 그러하기 때문에 설립 초기에 이화학당에 오는 학생들은 대부분이 거지의 딸이거 나, 그렇지 않으면 가난한 하층민의 여자아이들이었다. 그것마저도 부모가 학생을 자 진하여 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스크랜튼 여사가 학생을 모집하기 위하여 찾아 나서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이 얼마나 학생을 얻기가 힘들었던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스크랜튼 여사의 말을 보면 그러한 고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얼마동안은 음식도 넉넉히 먹고 좋은 옷도 입을 수 있어서 나쁘지 않을 것이지만 나중 에는 미국으로 데려갈 것이요, 그렇게 된다면 그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을 누가 알 것이냐 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여아가 결코 나라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문서로써 보증하 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이 그 어머니의 염려를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몇 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여아는 안심하게 되었다. 32) 30) M. F. Scranton, "Women's Work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Vol. Ⅲ, Jan. 1896, 3쪽. 31) 곽안전, 한국교회사 , 대한기독교서회, 1973, 45~46쪽. - 22 - 위의 내용은 서양 사람들이 여자 아이들을 서양으로 데려가기 위한 수단으로 처음 에는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배고프고 헐벗은 아이들을 먹여주고 입혀주어 그들의 부모로 하여금 호감을 갖게 하다가, 급기야는 서양으로 데려갈 것이라는 한국인의 의구심을 나타내주고 있는 글이다. 사실 이와 같은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한국의 여자들, 특히 처녀들은 중국이나 일본으 로 강제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팔려간 역사적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역 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일단 서양 사람들에게 자기의 딸을 내어 맡긴다는 것은, 그것이 곧 빼앗기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여자 아이들을 가르쳐주되, 다른 나라로 데려가지 않는다는 것 을 보증하는 문서를 그들의 부모에게 써주는 일도 있었다. 다음은 스크랜튼 여사가 여자 아이들을 맡는 대신 부모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써 준 서약서이다. 33) 스크랜튼 부인이 박씨에게 미국인 야소교 선교사 스크랜튼은 한국인 박씨와 다음과 같이 계약하고 이 계약을 위반 하는 때는 어떠한 요구든지 받기로 함 나는 당신의 딸 복순이를 맡아 기르며 공부시키되 당신의 허락 없이는 西方은 물론 朝鮮 안에서라도 단 십 리라도 데리고 나가지 않기로 서약함 1886년 월 일 스 크 랜 튼 위와 같은 서약서를 오히려 학생을 맡은 선교사가 부모에게 써줌으로서, 부모들은 선교사들이 소외당하고 있는 여자들에게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안심하고 여자 아이들을 선교사에게 맡길 수 있었다. 한국의 여성교육을 위한 스크랜튼 여사의 노력은 왕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으 며,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는 1887년에 학교이름을 이화학당 (梨花學堂)이 32) M. F. Scranton, “Women's Work in Korea”, The korean repository, Vol. Ⅲ, Jan. 1896, 4쪽. 33)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팔십년사 , 이화여자대학교, 1967, 44쪽. - 23 - 라고 지어주었다. 당시 황실(皇室)을 상징하는 꽃이 배꽃(梨花)이었는데, 이 배꽃은 여성의 올바른 태도와 순결한 것과 명랑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34) 같은 해인 1886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 최초의 고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언더우드학당 을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나중에 학교 이 름을 경신학교 (儆新學校)로 개칭하였는데, 이 학교를 설립하게 된 경위를 길모어 (George W. Gilmore)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언더우드가 접촉하게 된 일부의 남자 아이들이 처해 있는 실정으로 보아서 그는 고아원 의 설립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계획을 한국 사람을 통하여 알게 된 왕 <고종> 은 이것을 허락하였다. (중략) 처음에 들어온 아이들은 모두 남자 아이들이었고 얼마 지나 지 않아서 이 기관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가르치게 된 아이들의 수효가 마흔 명이 넘었 다. 35) 당시 조선의 사회적 현실은 가난한 자들과 고아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조선 땅에서 실천하는 가장 시급한 문 제가, 가난하고 천대받고 오갈 데 없는 자들에게 현실세계에서 구원의 손길을 뻗치 는 것이라고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선교의 한 방편으로 고아들의 구제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 고아원인 언더우드학당 을 설립한 것이었다. 언더우드가 1890년 9월에 피어슨(Arther T. Pierson, 1837~ 1911)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이 학당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 고아원에는 약 25명의 남자 아이들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방을 치우기도 하 고 자기가 먹을 음식을 마련하면서 학교의 운영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벽 세 시 반에 일어나서 몸을 잘 가꾸고 방을 정돈한 다음 여덟 시 까지 한문을 공부하고, 외국어교사들과 함께 아침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아침밥을 먹습니다. (중략) 아침 식사 후에는 영어공부를 하고 또한 성경공부를 합니다. 이런 수업시간 사이에 휴식 시간을 넣었고, 오후에는 놀이와 복습, 그리고 한문공부를 하는데, 한문공부는 조선 사람들 34) 곽안전, 한국교회사 , 대한기독교서회, 1973, 46쪽. 35) G. W. Gilmore, Korea from its capital, Philadelphia : The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982, 295쪽 - 24 - 의 교육에 반드시 필요한 과목입니다. 36) 위와 같은 글로 미루어 볼 때, 이 학당은 단순히 고아들을 수용하여 그들에게 의 식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선교사들이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신 앙과 그것의 수단인 교육을 제공하였던 것으로 알 수 있다. 그 후 이 학당은 1891년 예수교학당, 1893년 민노아학당, 1905년 경신학교 등으로 학교 이름을 바꾸면서 신문 화를 수용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경신학교가 비록 처음에는 고아원 형태로 출발하였으나, 다른 기독교학교와 마찬가지로 근대교육을 통하여 한 국 사회의 근대화에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1886년 서울 정동에 있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앤니 엘러스(Miss Annie Ellers) 는 국립병원 광혜원의 간호원으로 내한하여 1887년에 언더우드의 예수교학당의 부대 사업으로 여자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정동에 있는 엘러스 선교사의 집에 서 학생 1명으로 시작하였다. 분주하게 지내면서도 갈 곳 없이 해매는 소녀를 자기 숙소로 데려다가 양육하다가, 그녀는 한국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1887년부 터 자기가 양육하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에 5명으로 늘어 난 아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의복까지 입혀주고 글과 생활을 가르쳤다. 이때에 사람들은 이 학교를 ‘정동여학당’이라고 불렀는데37) 이곳이 바로 정신여학교의 전신 이다. 38) 1명의 학생이 제1회 졸업생이 되고, 2회 5명, 3회 7명, 4회, 25명 등 5년간에 모두 52명의 졸업생이 나왔다. 지금으로 보아서는 그 수효가 너무도 적은 것 같이 여겨질 지도 모르나 당시의 실정에 비추어 보아서는 대단한 성과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1895년에 교사(校舍)를 현재의 학교가 있는 연지동에 옮기고 연동여학교라 칭하였 다. 1903년에는 연동여자중학교라고 개칭하고, 1909년에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사 립 정신여학교로 개칭하였다. 39) 36) L. G.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Reprinted by Yonsei University Press, 1970, 131쪽. 37) 이호운, 韓國敎會初期史 , 대한기독교서회, 1970, 270쪽. 38)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정신75년사 , 정신여자중고등학교, 1962, 57쪽. 39) 김양선, 한국기독교사연구 , 기독교문사, 1971, 67쪽. - 25 - 연 대 교 명(校名) 교 파 소 재 지 1885 광혜원(연세대 의대 전신) 서울 1885 배재학당 감리회 서울 1886 이화학당 감리회 서울 1886 경신학교 장로회 서울 1887 정신여학교 장로회 서울 1894 광성학교 감리회 평양 1894 숭덕학교 감리회 평양 1894 정의여학교 감리회 평양 1895 일신여학교 감리회 동래 1896 정진여학교 감리회 평양 1896 공옥학교 감리회 서울 1897 숭실학교 장로회 평양 1897 신군학교 감리회 서울 1897 영화여학교 감리회 평양 1898 배화여학교 감리회 서울 1898 맹아학교 감리회 인천 1898 명신학교 장로회 서울 1898년 미국 남감리회의 여선교사인 캠벨은 배화여학교를 설립하여 학력과 신앙적 인 자격자를 배양하여 교회와 학교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동시에 중등교육을 실시하 였다. 40) 학생모집은 거리에서 방황하는 고아를 데려왔고 학습도구에 한해서는 무상 공급해 주었다. 이상의 학교 이외에도 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된 근대학교가 많이 있었는데, 1885 년 광혜원과 배재학당의 설립 이후 1909년 한일합방 직전까지 이르는 동안 설립된 주요 기독교학교는 다음과 같다. <표 2> 기독교계 사립학교41) 40) 배화80년사편찬위원회, 배화80년사 , 배화학원, 1979, 71쪽. 41) 손인수, 한국근대교육사 , 연세대출판부, 1971, 76~77쪽. - 26 - 연 대 교 명(校名) 교 파 소 재 지 1900 평양신학교 장로회 평양 1903 숭의여학교 장로회 목포 1903 수씨여학교(원산여학교) 감리회 원산 1903 정명여학교 장로회 목포 1904 덕명학교 감리회 원산 1904 호수돈여학교 감리회 개성 1904 진성여학교 장로회 원산 1904 의창학교 감리회 해주 1905 영명학교 감리회 공주 1906 계성학교 장로회 대구 1906 신성학교 장로회 선천 1906 보성여학교 장로회 선천 1906 의명학교 안식교 순안 1906 한영서원 감리회 개성 1906 미리흠학교 감리회 개성 1907 약현학교 천주교 서울 1907 수피아여학교 감리회 광주 1907 신명여학교 장로회 대구 1907 기전여학교 장로회 전주 1908 신흥학교 장로회 전주 1908 창신학교 장로회 마산 1909 의정학교 감리회 인천 - 27 - 당시 개개의 기독교학교들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초등학교와 중등학교로 구분하기 는 어렵다. 대부분의 기독교학교들이 한 학교 내에 초등과와 중등과, 심지어는 대학 까지를 포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선교사들이 직접 운영한 서울이나 평양 등지의 기독교학교들은 대개 중등학교의 성격이 강했다. 지방교회가 운영하는 교회 부속학교는 초등학교의 성격이 강했다. 각 기독교학교는 그 학교가 어디에 중점을 두었는지에 따라서 초등학교와 중등학 교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중등학교의 초등과는 중등교육을 위한 예비교육을 위해 설 치되었고, 지방 초등학교의 중등과는 서울의 중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초등과 졸업 생의 계속교육을 위해 설치되었던 것이다. 42) 이와 같이 기독교 선교사들은 기독교 선교만이 아니라 배재학당을 비롯한 이화학 당, 경신학교 등의 설립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많은 근대학교를 설립하여 한국인 들에게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복음 전파를 몸소 체험하였던 예수의 정신을 근간으로 사립학교 건립에 적극성을 보였다. 즉 마태복음에서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태복음 9장 35절) 라고 계시한 정신에 따라 한국인을 대상 으로 적극적인 의료활동과 근대교육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을 전후하여 “우리의 살 길은 오직 교육뿐”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팽배해지는 속에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함으로써 교육열의 고조와 함께 기독교계의 근대학교가 더욱 많이 설립되었다. 한국인을 불행에서 구하고 계몽시킨다는 목적에서 출발한 이들 선교사의 활동은 서구의 근대문화와 근대문명을 전래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 결과 전국 각지 에 많은 기독교 근대학교가 설립되었다. 1910년 2월 현재 기독교계 각 종파에서 설 립한 각종 학교만도 무려 796개 교에 이르렀다. 당시 설립한 근대학교를 각 종파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42) 박준남, 구한말 기독교계 학교에 관한 연구 ,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0년, 7쪽. - 28 - 학 교 수 한 국 인 미 국 인 영 국 인 프 랑 스 인 계 장로교 62 412 27 501 감리교 2 156 158 성공회(영) 1 3 4 천주교 21 25 46 안식교회 2 2 각파합동 1 1 불교 5 5 종파미상 81 3 84 계 172 574 30 25 801 <표 3> 교파․국적별 학교수43) 43) 손인수, 한국근대교육사 , 연세대출판부, 1971, 76~77쪽. - 29 - Ⅲ. 기독교학교의 교육활동 1. 교육목표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 선교사들은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고충을 극복하는 어려 움을 겪으면서 선교사업의 일환으로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때문에 선교 사들이 설립한 기독교학교의 교육목적은 어디까지나 그 교육을 통하여 많은 한국인 으로 하여금 단시일 안에 기독교신자가 되도록 하는 것에 있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왜냐 하면 그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전개한 궁극적인 목적이 기독 교를 전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교교육이란 하나의 국가나 민족의 역사적 상황과 전연 상관없이 영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교육은 그것이 개인과 집단에 직접․간접으로 작용하 는 현상이기 때문에, 개인은 물론 국가․사회의 현실과, 또한 미래에 지향해야 할 방 향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영위되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당시 한국의 역사 적 현실을 외면한 채, 오직 기독교를 믿는 신앙인을 양성한다는 순수한 목적만을 달 성하기 위하여 학교교육을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학교의 교육방침은 선교사들 중심의 무비판적인 서구화나 서양인의 생활풍 습을 강요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Koreans better Koreans only) 44) 만드는 것에 두었다. 특히 배재학당의 교육목적은 설립자인 아펜젤러가 제정한 학당훈(學堂訓)인 “욕위 대자 당위인역”(慾爲大者 當爲人役)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크게 되려는 사람은 마 땅히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았다. 따라서 배재학당의 교육이념은 아펜젤러가 말한 것처럼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우리 학교의 일꾼을 기르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44) 동래학원80년지편찬위원회, 東萊學園八十年誌 , 동래학원, 1975, 19쪽. - 30 - 받은 사람을 내보내려는 것이다. 45) 기독교의 진리를 실천하며, 교회와 국가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정신을 갖춘 인 재를 육성하는 것이 배재학당의 교육목적이었다. 이것은 고종(高宗)이 학교이름을 ‘배양인재’에서 나온 배재학당 이라고 지어 준 것만 보아도, “새 시대에 맞는 인재 를 널리 기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배재학당의 교육목적이 당시의 한국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 즉 실용 적인 인재를 양성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교육활동을 전개함으로서, 정부에서조차 그것을 인정하고 배재학당에 위탁생을 보내기도 하였다. 즉 해마다 200명의 위탁생 을 배재학당에 보내기로 하는 동시에, 학생들의 월사금과 학생 50명에 부교사 1명에 대한 봉급도 지불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46) 이렇게 나라에서조차 선교사가 세운 기독 교학교인 이 학교에 대한 학당 이름을 지어주고, 정부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관리를 양성하기 위하여 위탁생까지 보내어 교육을 받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학교 가 단순히 학생들에게 기독교를 믿는 신앙과 기독교 정신만을 갖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측면에도 중점을 두었던 학 교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한편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학교인 이화학당의 교육목적은 이 학교를 설립한 스크 랜튼 여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의 목표는 이 여아들로 하여금 우리 외국 사람의 생활 양식, 의복제도, 생활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다만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으 로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가지게 되기를 바란다. 나아 가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통하여 완전무결한 한국인을 만들고자 희망하는 바이 다. 47) 스크랜튼 여사가 이화학당의 교육목적으로 삼은 것은 한국 여성으로서 갖추어야 45) 배재중고등학교, 배재팔십년사 , 배재중고등학교, 1965, 139쪽. 46) 이광린, 개화기 관서지방과 기독교 , 숭전대학교논문집 제5집 1974, 443쪽. 47) L. G.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Reprinted by Yonsei University Press, 1970, 128쪽. - 31 - 할 지식과 교양을 폭넓게 길러주는 것과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 면, 한국인 여성으로서의 위치를 바로 깨닫고 한국인, 나아가서는 여성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인간으로 양성하는 것에 교육목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교육목적은 2대 학당장인 로드 와일러(Louisa C. Rothweiler)의 아래와 같은 말에서 도 확인할 수 있다. 참된 가정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력자가 되고 우리 학교의 교사가 되며 기숙 학교의 조수가 되고 의료사업을 하는데 필요한 간호원이나 조수가 되게 하려는데 있다. (중략) 그들은 음식을 만들며 의복을 만들고 자기 자신과 집을 깨끗이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모두 한국식으로 해야 한다. (중략) 우리는 더 나은 한국인을 만들려는 것이 요, 외국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48) 이화학당은 교육을 통하여 여자들에게 개성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에 목적 을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통적으로 여자들은 규방에서 집안 일이나 돌보고 살 림살이만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서, 능력에 따라 교사․간호사 등을 양 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육을 받은 이로서의 가치나 능력을 충분히 발휘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철저한 한국인 여성으로서의 삶에 적합한 교육에 중점을 두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었다. 물론 선교사들이 철저하게 더 나은 한국인의 양성이라는 측면에 교육의 목적을 두 고 있었던 것은, 현실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 면, 당시의 한국의 국가적․사회적인 상황은 봉건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인 동시에 서 양인에 대하여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때였는데, 무조건 서양의 문물제도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해 준다든지, 그들이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는 예수그리스도만 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학생들로 하여금 “그들의 친구와 동족 가운데서 십자가의 증거자가 되며 철저한 기독교교육을 통하여 더 나은 한국인 여성을 양성”49)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48)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팔십년사 , 이화여자대학교, 1967, 89쪽. 49) 한기언, 한국교육사상사 , 서울대학교출판부, 1969, 109쪽. - 32 - 이러한 기독교학교의 교육목적은 고아원으로 출발한 경신학교에도 그대로 적용되 었으며, 정신여학교도 이와 같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경신학교는 “자기 동족들에게 진리를 간증하게 될 전도자와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었으며, 학생 들이 나아가서는 그들이 받은 교육이념을 적절히 활용”50)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 는 것에 교육의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정신여학교의 교육목적은 “하나님을 믿자. 바르게 살자. 이웃을 사랑하자.” 라고 하여 기독교정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러니까 학교를 설립한 사람은 외국 의 선교사이었지만, 교육목적은 어디까지나 한국인을 한국인의 풍속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동시에, 한국인 기독교인으로 만들고자 원할 뿐이며, 결코 미국형의 숙녀를 만들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신여학교의 제3대 교장인 도티 (Susan A. Dorty)가 재임하던 때의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도까지 자기의 일을 자신이 스스로 하고 있으며, 한국식으로 음식 을 만들고 옷을 만드는 일을 배우고 있다. 그들은 영어를 배우지 않고 다만 한국과 국문 을 배우며, 무엇보다도 성경과 기독교인의 생활을 배우고 있다. 외국식 교육을 함으로써 이들을 한국식 가정에 맞지 않는 교육을 한다는 것은 큰 과오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목적 은 그들을 기독교적 한국인으로 만드는 데 있고 미국 여성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51) 사실 선교사들이 미국형의 숙녀가 아닌 한국형의 숙녀, 거기에 기독교적인 한국인 여성을 만들려고 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즉 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철저한 내외법에 따라 여자들은 그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교 육목적을 표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교육목적은 당시의 사 회적 사정으로 볼 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평양의 숭의여학교의 교육목적은 “신앙을 겸비한 인물의 배양”에 있었다. 다시 말 하면 의를 숭상하는 여성으로서 “그리스도 정신에 입각하여 완숙한 인간상을 형성한 다”52)는 것이 숭의여학교의 교육목적이었다. 그리고 숭실학교는 “한국의 국가․사회 50) 고춘섭 편, 儆新八十年略史 , 경신중고등학교, 1966, 35쪽. 51) L. G.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Reprinted by Yonsei University Press, 1970, 123쪽. - 33 - 와 교회를 위하여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일꾼을 양성하는 것”53)에 교육목적을 두었다. 또한 홀(William james Hall)이 세운 광성학교의 교육목적은 ‘광성’이라는 말 이 의미하듯이 “참되고 아름답고 순수한 개성을 고조”54) 시키는 것에 있었다. 즉 “일 상생활에 착하고 완전한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와 자기가 속한 나라와 사회에 대하 여 유익한 봉사와 향상하는 생활을 이룩하도록 힘쓰는”55) 인물을 양성하는 것이었 다. 전주의 기전여학교의 교육목적은 “여성의 교육을 통하여 남녀 평등사상을 고취시 켜 안방에 갇혀 있는 여성을 바깥 사회로 끌어내는 것”56)에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는 한국에서 필요로 하는 여성과 교회의 전도사업에 필요한 여성을 양성하는 것이었 다. 대구의 신명여학교는 “기독교 정신 밑에 한국인 여자로 하여금 신교육을 체득하 게 하고 일반 사회에 기독교인으로서의 선구자가 되게 하는 것”57)이었으며, 동래의 일신여학교는 이 학교의 설립자인 멘지스(Isabella B, Menzies)의 말대로 “교육이야 말로 종교의 전초작업”58)이라고 보아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 였다. 1905년 10월에 출발한 공주의 명선여학당은 설립자인 앨리스(Alice, sharp. J. Hammond)가 다음과 같은 말을 강조함으로서, 이 학교의 설립이념이나 목적이 무엇 인지 알 수 있다. 한국 여성의 전통적인 미덕과 품성 위에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인생관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인류문화의 공통 수준까지 올라가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바로 우리 명선여학당의 설 립이념이다. 59) 52) 숭의여자전문대학, 崇義八十年史 , 숭의여자전문대학, 1983, 85쪽. 53) 손인수, 한국근대교육사 , 연세대출판부, 1971, 38쪽. 54) 광성90년사편찬위원회, 光成九十年史 , 광성중고등학교, 1984, 120쪽. 55) 앞의 책, 120쪽. 56) 기전80년사편찬위원회, 기전80년사 , 기전여자중고등학교, 1982, 135쪽. 57) 신명오십년사편찬위원회, 信明五十年史 , 신명오십년사편찬위원회, 1984, 120쪽. 58) 동래학원80년지편찬위원회, 東萊學園八十年誌 , 동래학원, 1975, 18쪽. 59) 영명80년사편찬위원회, 永明八十年誌 , 영명중고등학교, 1985, 95쪽. - 34 - 이러한 교육이념에 따라 이 학당은 “① 신앙에 터를 두고 자아의 발견으로 생활을 정화하자 ② 생명을 존중하고 개화에 힘쓰자 ③ 국가와 사회에 공헌하는 사상을 갖 자 ④ 고결한 성품과 가정의 융화로 생활 습속을 바로 잡자 ⑤ 배우고 또 배워서 지 식을 넓혀 인류에 공헌하자 ⑥ 인류 공존의 의의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자 국가와 민 족의식을 굳게 하자”60) 등을 교육목표로 삼고 교육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1906년에 윌리암즈(Frank Earl Cranton Williams)가 설립한 공주의 영명학 교도 “전도․개화․민주주의”61)를 건학 이념으로 삼고 “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 인을 기른다 ②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몸바치는 애국자를 기른다 ③ 풍부한 지식과 교양을 가진 교양인을 기른다 ④ 자립으로 현실을 개척할 수 있는 기능인을 기른 다”62)는 교육목표를 세웠다. 이것은 이 나라의 순미한 고유 문화를 바탕으로 한 정 신사상 위에 근대 문화의 의식을 심어 주고, 과학공부를 하게 하여 실력 있는 문화 인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실현하며, 교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 려는 것이었다.63) 이상과 같이 기독교학교의 교육목적은 학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데, 이것은 그 밑바탕에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이념이 깔려 있는 동시에, 설립자들의 개인적인 교육이념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기독교학교의 교육목적을 종합해 볼 때, 아래와 같은 공통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종교, 즉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신앙심을 갖게 하여 한국인으로 하여금 영적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데 있었다. 둘째, 기독교적 품성을 구비한 인격자와 기독교적 이상에 일치하는 인간을 양성하 는 데 목적이 있었다. 셋째, 한국 교회가 교회로써 자립적인 위치에 오른 단계에서 스스로 한국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 즉 교역자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넷째, 현실 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에 잘 적응하여, 그것을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 는 능력과 자주적이며, 독립정신이 투철한 한국인을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60) 영명80년사편찬위원회, 永明八十年誌 , 영명중고등학교, 1985, 96쪽. 61) 앞의 책, 112~113쪽. 62) 앞의 책, 113~114쪽. 63) 앞의 책, 114쪽. - 35 - 다섯째, 당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 는데 목적이 있었다. 위에서 열거한 목적을 요약하면, 모든 기독교학교의 공통된 교육목적은 신앙인으 로서, 교양인으로서의 인격을 갖춘 봉사자를 양성하는 것과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 는 것에 있었다. 그러므로 1910년 이전은 물론 이후 일제에 의하여 강점당한 식민지 지배하에서 기독교학교와 이들 학교의 졸업자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민 족적인 지도자가 많았던 사실은 초기 기독교학교의 교육을 이해하는 데 좋은 본보기 가 된다. 2. 교육내용 학교는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일정한 교육목표를 설정해 놓 고, 그러한 교육목표를 달성하기에 적합한 교육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당시 한국교육은 크게 두 가지 문제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한 가지는 국 가․사회의 개화, 즉 근대화의 문제이었고, 또 한 가지는 민족의 자주성을 확립해야 하는 문제이었다. 기독교학교는 이 두 가지 문제에 적절히 대처함으로써, 한국의 근 대교육과 민족교육에서 선구자로서의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이후에 설립하는 관․공 립학교와 민간인 사립학교의 교육에 모범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기독교학교는 “기독교적 민족교육과 기독교적 국가 여망의 인재 양성”64)에 직접 기여하였던 것이 다. 1) 기독교학교의 교과 교육내용 학교교육에서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교과활동은 학생들에게 지식을 습득시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들의 의식이나 태도를 형성하는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 친다. 그러므로 개화기 기독교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과목을 검토한다는 것 은 기독교학교의 교육을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64) 차석기, 한국 민족주의 교육의 연구 , 진명문화사, 1976, 177~178쪽. 교 과 목 교 육 방 법 성경, 영어, 한문, 지리, 수학, 물리, 화학, 공작, 체육, 위생, 생리(1886) ↓ 실기교육, 음악교육, 미술교육, 특별활동 도입, 학칙 제정 (1890) ↓ 역사과목 편성(1903) 생리학 시간에 쇠머리 표본을 사용 (1893) 화학 실험 실시(1893) - 36 - 개화기 기독교학교의 교과과정은 한국 근대교육의 선구자답게 전통교육기관에서 볼 수 없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학교간의 교육내용은 일정하지 않았다. 각 학교간의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학교 최초의 학교인 배재학당의 초창기 교과목은 성경․한문․영어․지리․ 수학․생물․공작(工作)․체육 등이었다. 그리고 1903년 이후에는 세계역사․한국역 사․일본역사․중국역사 등 역사과목을 비중 있게 편성하였다. 또한 1908년에는 국 어․미술․교련을 넣어 편성하였으며, 역사는 한국사․동양사․세계사로 지리는 한 국지리․동양지리․세계지리로 구분하여 가르쳤다. 65) <표 4> 배재학당의 교육내용 일람표66) 이화학당은 초창기에는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으며, 1889년에는 국어․생리학을, 1891년에는 성악과 올겐을 편성하여 가르쳤다. 그리고 1892년에는 반절․한문․수 학․지리․역사․과학․체조를, 1896년에는 가사(家事)를 추가하였다.67) 한편, 1908년 중등과는 성경․한문․대수(代數)․기하․삼각․천문학․지리학․교 육학․물리․화학․영문학․만국지리․고등생리․경제․역사를 가르쳤다. 그 가운데 역사는 만국역사․근세사․상고사․영국사․미국사 등으로 구분하여 가르쳤다.68) 65) 배재중고등학교, 배재팔십년사 , 배재중고등학교, 1965, 139쪽. 66) 培材八十年史를 중심으로 발췌하여 작성함 67)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팔십년사 , 이화여자대학교, 1967, 65쪽. 68) 황성신문 , 제2880호, 1908. 9. 17. 교 과 목 교 육 방 법 성경, 한문, 영어, 습자(1890) ↓ 체조, 작문, 문법, 독서, 철자법. 산수, 역사, 받아쓰기, 번역, 필기, 지리 (1891) 실기교육 중시 직업교육 실시 자율성 강조 교 과 목 교 육 방 법 성경, 영어, (1886) ↓ 국어, 생리학 추가 (1890) ↓ 반절, 한문, 수학, 지리, 역사, 과학, 체조 추가 (1892) ↓ 가사(재봉, 자수)(1896) 학생 서클 활동을 통한 자율성 강조 - 37 - <표 5> 이화학당의 교육내용 일람표69) 경신학교는 1900년대에 성경 ․교회사․국어․한문․영어․산술․대수․화학․물 리․천문학․박물(博物)․지리․한국사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1908년 중등과의 교과 목은 성경․사서․동서양역사․만국지리․지문학․중등생리․중등물리․중등화학․ 국가학․부기․교육사․작문․분수지기하초등(分數至幾何初等), 도화․영일어(英日 語)․체조 등이었다. <표 6> 경신학교의 교육내용 일람표70) 정신여학교는 1903년까지 성경․한문․역사․지리․산술․습자(習字)․체조․음 악․가사․침공(針工)․과학․물리․생물․습자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1909년까지 69) 이화90년사편찬위원회, 梨花九十年史 , 이화여자고등학교, 1975, 41쪽. 70) 고춘섭 편, 儆新八十年略史 , 경신중고등학교, 1966, 29~30쪽. - 38 - 교 과 목 교 육 방 법 성경, 한문, 언문, 산수(1887) ↓ 성경, 한문, 역사, 지리, 산수, 미술, 습자, 체조, 음악, 가사, 침공, 생리 (1890) 한국적 전통의 강조 성경․한문․가사․침공(針工)․수예․음악․제조․지지(地誌)․역사․습자․이과․ 어학(영어)․수학․동물․식물․생리․미술․작문 등이었다. <표 7> 정신여학교의 교육내용 일람표71) 평양의 숭의여학교에서는 성경․한문․역사․산학신편(算學新編 ; 산수)․지리․역 사․생리․동물․식물 등을 가르쳤다. 72) 그리고 대구의 계성학교에서는 성경․한 문․물리․화학․지지․상업․어학․수학․역사․생리․박물․경제․지문(地文)․동 물․식물․도화․체조․음악․작문․습자 등 상당히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73) 한편, 전주의 기전여학교의 교과목은 성경․국문․독본․수신(修身)․한문․습자․ 수공․편물(編物)․체조․이과(동물학․식물학)․생리학․지리․여자독본․산술 등이 었으며 영어와 일어는 1908년 이후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74) 또한 공주 명선여학당의 교과목은 성경 읽기․쓰기, 국문의 작문과 편지 쓰기․산 술․음악(성가)․미술․영어였다. 75) 그리고 영명학당으로 문을 연 이 학교는 학생들 에게 1학년에서 성경․수신․한문․창가․체조․영어를 가르쳤고 2학년에서는 1학년 교과목에 국사․실업․지리․대수․도화를 더 하였으며, 3학년에서는 만국역사를 더 하여 가르쳤다. 76) 71)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정신75년사 , 정신여자고등학교, 1962, 83~86쪽. 72) 숭의여자전문대학, 崇義八十年史 , 숭의여자전문대학, 1983, 87쪽. 73) 계성오십년사편찬위원회, 계성오십년사 , 계성오십년사편찬위원회, 1956, 16쪽. 74) 기전80년사편찬위원회, 기전80년사 , 기전여자중고등학교, 1982, 137쪽. 75) 영명80년사편찬위원회, 永明八十年誌 , 영명중고등학교, 1985, 97쪽. 76) 앞의 책, 117쪽. - 39 - 이상에서 고찰하였듯이 개화기 기독교학교의 교육내용에 나타난 특징은 다음과 같 이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전통적인 교육기관에서 가르치던 교육내용에서 탈피하여 서구식의 근대적인 교육내용이 중심을 이루었다. 둘째, 전통적인 교육기관에서 무시되어 온 국학(國學)에 관한 과목, 즉 국어․한국 역사․한국지리 등이 학교교육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셋째, 역시 전통적인 교육기관에서 전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던 예체능 교과인 음악․미술의 정조과목(情操科目)과 신체단련을 위한 체육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넷째, 이과 또는 동물․식물․물리․화학․생리․박물 등 과학과목을 가르치기 시 작하였다. 다섯째, 대부분의 학교가 상당히 다양하고 세분화된 과목을 가르쳤는데 그 과목은 학교마다 서로 다른 것이었다. 여섯째, 1908년 소위 사립학교령 (私立學校令)이 발표된 이후에는 일어를 교과목 에 포함시키기 시작하였다. 일곱째, 여학교에서는 여자들에게 실생활에 필요한 실업과목을 가르쳤다. 2) 기독교학교의 교과외 교육(敎科外 敎育) 내용 학교교육에서 교과외 교육활동도 교과활동 이상으로 학생들의 인격․행동․태도․ 의식 등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는 영역이다. 기독교학교의 교과외 활동은 아주 다양하였으며, 특히 이러한 교과외 교육활동이 국가적으로 당면한 위기의 상황에서 학생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고취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1) 실업교육 선교사들은 기독교의 근본사상 중의 하나인 근로와 실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직 업을 신이 주신 선물로 보아 각 학교에서 실업교육을 실시하여 학생들에게 자조정신 (自助情神)을 길러주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기독교학교에서는 설립 초기부터 공업 - 40 - 부 또는 자조부(自助部)를 설치하여 실업교육을 실시하였다. 배재학당의 공업부는 1887년에 지어진 학교건물의 지하실에서 시작되었다. 붓과 짚신을 만드는 일을 시작으로 캠퍼스 관리, 학교 건물 청소, 불 지피는 일, 문서사업 등의 작업을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1890년에는 배재학당 내에 삼문인쇄소가 설치되었고, 1895년에는 제본소가 설치되어77) 이후 배재학당의 실업교육은 삼문인쇄 소와 제본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아펜젤러가 가지고 있었던 공업교육에 대한 구상은 학생의 생계를 돕고 노동의 신성함을 가르치는 것과 더불어 공업부를 통해서 숙련된 기술자 를 교사로 삼아 학생들에게 서구의 발전된 기술을 가르치려고 하였던 것이다. 숭실학당의 자조부 역시 학생들의 생계를 돕고, 학생들에게 노동의 귀중함을 일깨 워 주는 한편, 기술을 배워 후일 직업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유용하게 이용하도록 하고자 설치되었다. 78) 자조부를 시작한 첫해에 학생들은 주로 정원 가꾸기, 건축노 동, 제본 등의 작업을 하였으나, 1900년에는 족답식 인쇄기 한대를 설치하면서 인쇄 를 주요 작업으로 하게 되었다. 인쇄부를 개설함으로써 자조부의 사업은 그 영역이 다양해지고 넓어졌다. 이후 미국의 목재상인인 데이비스(Sammuel S. Davis)의 기부 금으로 학교 구내에 공장이 건립되었고 전에 설치 운영되던 자조부와 인쇄부는 여기 에 흡수 통합되었다. 79) 이처럼 선교사들은 각 학교에 공업부 또는 자조부를 설치하여 그곳에서의 작업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노동의 신성함을 가르치고, 생계를 보조하며, 나아가서 후일 학생 들에게 직업선택에 유용한 기술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2) 체육활동 전통적으로 체육활동을 소홀히 하던 한국교육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 선 교사에 의한 운동경기의 보급이었다. 그 결과 학교 교육과정에 체육이 포함되기 시 77) L. G.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 Reprinted by Yonsei University Press, 1970, 233쪽. 78) 숭전대학교80년사편찬위원회, 숭전대학교80년사 , 숭전대학교80년사편찬위원회, 1982. 96쪽. 79) 앞의 책, 98~99쪽. - 41 - 작했다. 더구나 일제의 침략과정에서 체육활동은 그 자체가 민족의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었으며,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젊은이들의 민족정신을 발휘하는 활동이었다. 체육 은 서양식 운동경기로서 기계체조(철봉)․정구․축구․야구․농구 등이 대표적인 것 으로 다른 학교나 외국인 운동선수와 시합을 하기도 했다. 80) 운동회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는 과정에서 민족정신을 발휘하는 중요한 활동이었 다. 운동회를 개최하는 양상을 보면, 각 학교가 단독으로 운동회를 개최하는 것, 관․공․사립학교가 연합하여 개최하는 것, 관․공립학교가 연합하여 개최하는 것, 사립학교가 연합하여 개최하는 것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일제가 연합운동회를 열어준 것은 학생들의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민족의 문제를 외면한 채 운동회 그 자체에 감정을 발산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것에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각 학교끼리 대항을 하다보면 결국은 민족의 문제는 외면하리라는 것이 일제의 숨은 의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는 빗나갔다. 학생들은 운동회를 국권회복을 위하여 필요한 정 신적인 의지와 기상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았다. 따라서 일제는 그들의 의도가 빗나 간 것을 감지하고 연합운동회, 특히 ‘관․공․사립연합운동회’를 재정을 핑계삼아 폐 지했던 것이다. 사립학교들은 일제의 이러한 조처에 대하여 굽히지 않고 ‘사립학교연합운동회’를 개최함으로서, 은연중에 일제에 대항하였던 것이다. (3) 학생회 활동 기독교학교에서 이루어진 교과외 교육활동 중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활동은 학생 회 활동이었다. 학생회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단체가 배재학당의 학생회인 협성회(協成會)였다. 협성회는 1896년에 조직되었는데, 서재필의 지도하에 회의진행 법의 교수(敎授)와 시국토론을 목적으로 하고 학생․시민․관리도 입회하여 그 회원 은 학생회원 200명 등 600여명에 달하였다. 81) 이들 회원 중에는 독립협회에 가담하 80) 이만열, 한국기독교문화 운동사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237쪽 81) 배재중고등학교, 배재팔십년사 , 배재중고등학교, 1965, 196쪽. - 42 - 여 정치․언론․종교․문화․의료활동에 참가하였다. 이와 같이 협성회는 학생들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여기에 참가함으로써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협성회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학생언론활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협 성회보’를 발행하여82)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국제정세 등 다방면에 걸친 내용을 망라하여 게재해, 이 내용을 읽는 독자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협 성회는 배재학당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독자층으로 의식하고 발행하였다. 83) 협성회는 나라의 개화와 국민의 민족정신 배양을 위하여 전국에 학교를 설립할 것 을 주장하였다. 특히 여자교육을 위한 학교를 설립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병폐인 남녀차별의 구습을 타파하려고 노력하였다. 84) 또한 협성회는 상업과 농업이 국가 발전을 위한 기초라고 생각했다. 85) 이와 같이 협성회는 신문 발간을 통하여 국민의 개화 및 신교육, 애국심, 대외관계 에서 주체성을 확립할 것을 강조했으며 토론회를 통하여 민족정신의 배양에도 기여 하였다. 82) 독립신문 , 1899년 5월 24일. 83) 독립신문 , 1898년 1월 18일. 84) 독립신문 , 1898년 6월 28일. 85) 독립신문 , 1898년 4월 27일. - 43 - Ⅳ.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 개화기 기독교학교가 한국의 근대교육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고찰은 그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무관하지 않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학교의 교육사적 의미 는 개화기의 핵심적인 과제라 할 수 있는 개화와 구국운동에서 이끌어질 수 밖에 없 다. 즉 개화와 관련되는 것이 신교육과 신문화이고, 구국운동과 관련되는 것이 민족 주의 교육이다. 1. 신교육의 도입과 활성화 기독교학교는 한국에 신교육을 도입하고 보급하는 일에 기여하였다. 여기에서 신 교육이란 서양식의 학교제도를 가지고 서양식의 교육내용을 가르치는 학교교육을 의 미한다. 신교육의 도입과 보급은 당시 한국사회의 근대화라는 문제와도 관련 있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자연스럽게 서양식 근대교육은 쉽게 한국사회에 자리잡을 수 있 었다. 19세기 후반 기독교(개신교) 전래와 더불어 기독교학교의 설립은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사고와 그에 뿌리를 둔 신교육과 신사상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 고 이러한 신교육 사상에 의해 우리나라의 교육목적, 교과과정, 교육방법 등은 이전 의 교육과 판이하게 다른 가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1) 교육목적과 교과과정의 변화 한국 전통사회의 교육제도는 양반자제를 교육하고,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와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전통사회의 교육은 전반적으로 통치 이데올 로기와 결부되어 있었다.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신라를 비롯하여 고려, 조선은 - 44 - 왕권을 강화하고 광범위한 통치기반을 조성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전통 교육에서는 충․효를 핵으로 하는 유교적 윤리에 순응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르려고 한 것이다. 이처럼 한국 전통사회의 교육은 유교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초기의 교육 기관인 성균관, 사학, 향교, 서원, 그리고 서당에서는 주로 유학 서적과 역사서 적을 가르쳤다. 그리고 중국의 경서와 역사, 문학 등에 관한 서적을 이해하려면 한문 을 익혀야 했다. 성균관의 학생들은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독서를 하였고, 사서․오경과 제사 등의 책을 읽었는데 제술은 의(疑)와 의(義)․논(論)․부(賦)․표(表)․송(頌)․명(銘)․잠 (箴)․책(策)․기(記) 등이었고, 서법은 해서를 주로 하였다. 86) 사학에서는 소학을 가르쳤다. 소학은 유교 사회의 도덕규범 중에서 기본적이고 필 수적인 내용을 초록한 유학교육의 입문서였기 때문에 조선조에서는 이것을 학문을 시작하면서 죽는 날까지 읽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학당에서는 이 밖에도 효경․ 사서와 오경․문공가례집․제사 등을 배웠으며, 문선 그리고 역대 여러 문인의 시 등을 공부하였다. 87) 향교에서는 소학과 사서․오경을 가르쳤으며, 서원에서는 소학․대학․논어․맹 자․중용․시경․주역․예기․춘추․가례․근사록 등을 가르쳤다. 원생들은 이러한 서적을 근거로 하여 이기와 심성을 공부했다. 88) 또한 서당에서는 일반적으로 천자문과 동문선습 등을 가르쳤으며, 재능이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사서․오경을 읽도록 하였다. 더운 여름에는 될 수 있는 대로 머리를 쓰지 않고 흥취를 돋우는 시를 읽거나, 짓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고, 봄과 가을에는 사기와 고문 같은 것을 읽혔고, 겨울에는 경서를 읽게 하였다. 89) 이와 같이 전통적인 교육에서는 그 내용이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실제 생활에 직접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은 결여되어 있었고 또 교육을 유교의 근본 적인 목적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개인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이나 출세를 위한 도구 86) 이만규, 조선교육사 , 기획출판 기름, 1988, 137쪽. 87) 손인수, 한국 근대 민족 교육의 이념 연구 , 문음사, 1983, 55~57쪽. 88) 앞의 책, 320쪽. 89) 앞의 책, 334쪽. - 45 - 로 삼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어떻게 공헌 할 것인가를 생 각하는 것은 부수적인 문제였으므로, 결국 그것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밝혀주고 이끌어 가는 데 기여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개화기 선교사들이 설립했던 배재, 이화, 경신, 정신 등의 기독교학교는 그 교육 과정 운영에서 이전의 교육과는 다른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었다 첫째, 교육의 목적을 사회적 영리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완성이 라는 교육적인 기능에 두었다. 둘째, 교육을 단순히 학과 공부로 끝나는 것으로 보지 않고 학생의 생활 전체를 교육이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선교사들은 교육을 종래와 같이 입신출세(立身出世)를 위한 도구나 가 문 또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삼던 편협한 이기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한국 의 순미(純美)한 고유문화를 바탕으로 한 정신사상 위에 근대문명에 관한 지식을 주 고 과학적인 생활을 하게 하여 실력있는 문화인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실천하며, 교회와 국가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정신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 적이라고 보았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교육목적은 그들이 설립한 각 학교의 교과과정에 분명히 드러 나 있다. 즉 네 학교(배재, 이화, 경신, 정신) 교육과정에 모두 한문이나 맹자 등의 동양적 윤리를 강조하는 과목이 포함되어 있어서 한국적인 전통을 무시하지 않았고, 성경․영어․물리․화학 등의 서양의 근대적인 교과목으로 편성되었는데, 이 점은 당시 한국의 개화 또는 근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특히 교과과정에 물리․화학․생리 등과 같은 과학 과목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킨다 는 것은 음악․미술․체육 등의 교과목의 편성과 마찬가지로 학교 교육에서 획기적 인 교과과정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과학을 가르침으로써 학생들에게 문제 를 과학적․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태도를 함양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 다. 그리고 과학적 기술의 발달을 가져올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함으로써, 근대화를 성 취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의 변화는 관․공립학교나 민간인 사립학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 46 - 과 정 학기․학년 교과목 예비과정 1학기 2학기 영어독본 1권, 한문,언문 영어독본 2권, 철자, 한문 교양과정 1학년 2학년 3학년 영어 : 기초문법, 산수초보, 독본 3․4권, 철자, 쓰기, 노래, 한문, 언문 영문법, 산수(10진법), 일반과학, 독본5권, 철자, 번역, 쓰기, 노래, 한문, 언문 영문법, 영작문, 산수, 한문, 언문, 일반과 학, 지식의 계통, 어원학, 미술, 노래부르기 그러므로 개화기 기독교학교는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과과정에서 모든 학교교육을 선 도하였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표 8> 배재학당 교양과정 교과목90) 2) 교육방법의 변화 조선 후기까지 배움과 가르침의 내용은 약간의 변천이 있었지만 논어․효경․예기 등 유교 경전을 배우는 것이 중심이었다. 이를 통해 한문을 읽고 쓰는 능력을 터득 하였고, 유교적인 가치관을 습득하였다. 선생이 경전을 해석하면서 강의를 하면 학생 들은 이를 듣고 이해하고 암기하는 방식으로 공부하였다. 토론이나 대화보다는 선생 의 강의가 중심이었고 철저한 암기를 전제로 하는 공부였다. 91) 그러나 기독교학교는 종래의 반복․암기․문답위주의 전통적인 교육방법에서 벗어 나 현대적인 교육방법을 도입했다. 질문법, 토의법, 극화, 신체운동에 의한 단련 방법 90) 김기석, 유방란, 한국근대교육의 태동 , 교육과학사, 1999, 98쪽. 91) 국사편찬위원회,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풍경 , 두산동아, 2005, 8쪽. - 47 - 등을 도입하고 시청각 교구를 이용해서 가르쳤다. 시청각교육은 근대 지식의 확대에 크게 공헌했다. 길모어(G. W. Gilmore)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지리와 역사의 공부에 필요한 것은 지도와 괘도와 화학의 실험기구이며, 작은 망원경 이외 기타 실험기구가 요청된다. (중략) 그리고 소규모의 천문대는 학생들의 흥미를 일으 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92) 또한 그때까지의 유교교육이 성리학 서적 위주의 교육이었던 데 반해서, 선교사들 이 설립한 기독교학교에서는 예능교과와 체육교육을 통해서 전인교육을 하려고 노력 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한글로 근대 지식을 가르쳤다. 선교사들이 당시에 멸시 받던 한글을 전용한 이유는 소외된 백성들을 깨우쳐서 성서를 읽히고, 찬송가를 부르게 하는 데 있었다. 기독교학교에서 한글로 된 교과서를 편찬하여 가르친 결과로 독서 인구가 확대되고, 대중이 폭 넓게 근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교육방법의 다른 측면인 생활지도 방법을 살펴볼 때, 유교적인 교육방법에 있어 생활지도는 공자묘에 참배, 사우(師友)간의 예의 숭상, 단체규율을 학교생활에서 지 키게 했다. 그런데 그 당시 기독교학교에서 채택했던 생활지도 방법을 보면 여러 가 지 면에서 새롭고 조직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배재학당의 경우, 효과적이고 조직적인 운영을 위하여 학칙을 제정하였 는데 그 중에서 생활지도와 관련된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학 칙93) 1. 수업료는 매월 3냥이며 다달이 낸다. 2. 학자금이 없는 이는 일거리를 주고 제 힘으로 벌어서 쓰게 한다. 3. 등교시간은 오전 08:15~11:30분 까지며, 오후는 01:00~04:00까지 하되, 나오고 92) G. W. Gilmore, Korea from its capital, Philadelphia : The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982, 320쪽. 93) 배재중고등학교, 배재팔십년사 , 배재중고등학교, 1965, 78쪽. - 48 - 물러갈 때에는 문란하게 느리거나 뛰고 떠들지 못한다. 4. 학교에 나올 때나, 수업을 할 때나, 쉴 때는 반드시 종을 울린다. ( 중 략 ) 20. 때가 지면 제 방에서 공부하고 밤 10시 이후에는 등불을 끈다. 21. 아침식사는 8시에 마치고 점심은 11:45분에 마치고 저녁은 6시에 마친다. 22. 자기 방을 매일 아침식사 전에 쓸고 닦고 거처를 깨끗이 한다. 이러한 배재학당의 학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 한국의 고유한 미풍을 시대에 맞게 변용하고 있다. 둘째, 학자금이 없는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자기 힘으로 벌어서 쓰게 한 것은 학생들에게 자립과 자생의 정신을 일깨우는 방법이었다. 셋째, 기숙사 생활을 통해서 단체생활에 익숙하게 하고 협동심을 일깨우며 질서의 식을 함양하게 했다. 2. 교육의 기회균등(機會均等) 실현 기독교학교는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민족에 게 인간이란 존엄한 존재이며 평등하게 태어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으며, 따 라서 사회적인 면에서든 성별에 관계없이 교육의 기회균등 사상을 심어주었다. 94) 선교사들은 한국인에 대한 교육의 기회균등을 구체적으로 세 가지 측면에서 실천 에 옮겨놓았다. 1) 민주주의와 평등사상의 교육 한국 전통사회의 교육은, 한 마디로 말해서, 유교적 교육관이 지배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교적 사회에서는 관존민비, 사농공상 등 신분차별과 남녀 성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는 엄격한 차별윤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 94) 이정빈, 한국기독교의 역할 , 계명 , 제1집, 계명대학, 1967, 133쪽. - 49 - 리나라 전통적 교육제도는 전반적으로 국가가 관장하기는 했으나 양반 중심적, 남성 중심적 인재양성 기관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다. 그래서 평민이나 천민, 그리고 여성에게는 교육의 기회가 거의 없었고, 전 국민을 교육의 대상으로 하는 국민교육제도와는 무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들어와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자유와 평등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 교육을 함으로써 비로소 봉건사회의 신분질서 윤리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자유, 평등사상을 심어주었고,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 게 했다. 95) 그리고 점차 우리 국민은 전통적 문벌의 타파, 봉건사회 질서 타파, 남녀 평등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교육에서는 그 대상이 양반층 자제에 국한되어 있을 뿐 상민이 나 천민, 그리고 여자들은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으나, 선교사들은 만민 평등이라는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누구나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따라서 양반계층의 자제와 상민계층의 자제가 한 자리에 모여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1895년에 ‘교육입국 조서’를 내려 국민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평 등교육 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제도로의 개혁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1904년까지는 교 육관계 법령들이 제정, 공포되어 신학제(新學制)에 따른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2) 여성교육의 중요성 강조 주자사상(朱子思想)에 의하여 봉건적인 인습(因襲)에 젖어 있어서, 여자에 대한 교 육을 기피하여 왔던 조선사회의 관념에서 볼 때, 선교사들이 여성을 위한 학교를 세 운 일은 일대 혁명이 아닐 수 없었다. 유교적 전통체제의 사회 속에서 부녀교육(婦 女敎育)이란 상상도 못했다. 여성은 남성의 구속물로 노동의 자원이 되는 가정과 남 자의 후사를 낳는 도구로서의 여성일 뿐, 여성의 인권이란 아랑곳없는 것이 당시의 여성관이었다. 칠거지악(七去之惡),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 등 유교에 근거 한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엄격한 윤리도덕으로 여성의 자유를 얽어놓았다. 95) 김득황, 한국현대화와 그리스도교 , 기독교사상강좌 , 제3권, 1963, 240~245쪽. - 50 - 이에 대해서 ‘조선 여성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남아의 경우는 10 세가 되어 밖의 스승에게 나아가 밖에서 기숙하며 서시를 배우고, 13 세가 되면 음악과 시․춤을 배우며 20 세에 관례(冠禮)하면서 비로소 예를 배우며 30 세 에 아내를 두어 비로서 남자 일을 다스리며 학식을 널리 배운다. (중략) 여아의 경우는 10세가 되면 나가 다니지 아니하며 교사의 가르침을 유순히 따르며, 방 적과 양잠을 하고 명주 등 비단을 짜서 여자의 일을 배워 의복을 장만하고 제사를 보살피 는 것을 가르친다. 96) 이처럼 남․여는 그 성장과정부터가 판이하게 달라서 가옥구조에 이르기까지 내실 과 외실을 구분하고 남자는 안의 일을 말하지 아니하고 여자는 밖의 일을 말하지 아 니하는 가운데 내외법 등으로 여성의 활동을 규방에 한정시키고, 여성을 남성에게 예속시켰다. 97) 이와 같은 봉건적 윤리 아래서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을 필두로 1895년 정신여학 교, 부산 동래의 일신여학교, 1896년 평양의 숭현여학교, 1897년 인천의 영화여학교, 1898년 서울 배화여학교, 1903년 평양의 숭의여학교, 목포의 정명여학교, 1905년 군 산의 영명여학교 등이 세워져 한국초기 여성교육을 담당하였다. 따라서 개화기에 설립된 기독교계 학교는 남학교에 못지 않게 여학교가 많이 설립 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선교사들이 한국의 여자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적인 면에서 천 대를 받아 온 사실과, 여자에게는 전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봉건적인 사회 였음을 깨닫고, 그들에게도 교육을 제공해주어 지적으로 깨우쳐주고, 나아가서는 여 성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켜줌으로써 남녀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것에 있었다. 그러나 설립초기에는 남학교와는 달리 여학교에서는 학생을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여학교에서 학생을 구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98) 첫째, 백성의 대다수가 유교의 교의(敎義)에 따라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과 96) 박용옥, 조선여성사 , 한국일보사, 1976, 35~36쪽. 97) 박노희, 구한말 근대여학교 성립과정에 나타난 교육이념에 관한 일연구 ,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0, 7~10쪽. 98) 손인수, 한말 신교육의 수용과 그 갈등사항에 대하여 , 교육논집 , 제3집,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1971, 56쪽. - 51 - 미국의 신교육(新敎育)을 사실상 이해하기 어려웠다. 둘째, 오랫동안의 쇄국주의로 말미암아 당시에는 서양 사람을 경멸하는 풍조가 있 었다. 이에 노란 머리에 파란 눈의 서양인, 소위 양이(洋夷)에게 그들의 딸을 맡긴다 는 것은 개화에 앞서 수치로 여겼다. 셋째, 유교사회의 내외법에 따라 여성이 가정에만 유폐되는 내적 생활을 오히려 규수(閨秀)의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바깥 사회에 자유로이 나다니는 여성을 천시하였 다. 이러한 곤란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는 사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은 그들 의 발이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남학교와 여학교를 가리지 않고, 학교를 설립하여 한 국의 젊은이들에게 지적으로 깨우쳐주는 동시에 기독교를 믿는 신앙인을 만들기에 온갖 노력을 다 하였다. 이와 같이 여성에게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여성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인격적 존재로 인식했다는 뜻이요, 여성해방의 첩경을 걷게 되는 동기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기독교 선교사들은 여러 가지 신고(辛苦)와 박해를 무릅쓰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여 한국 여성교육의 개척자적 역할을 하였고, 천대받던 여권을 회복하였으며, 자유로운 활동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학교의 여성교 육은 한국 여성교육의 효시였으며, 여자를 위한 교육을 실시하여 민주주의와 남녀평 등사상을 실천으로 가르친 것이 기독교학교 교육의 결과이다. 3) 특수교육 실시 기독교학교가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으로, 사회로부터 소외당하고 무관심의 대상이었던 신체적으로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미친 점을 간과 할 수 없다. 특수 아동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 활동은 1894년 평양에서 감리교 선교사 로제타 홀(Rossetta S. Hall)에 의해 시작되었다. 홀은 처음에 기독교 신자의 딸인 시각장애 자 소녀(이름 :오봉래)를 가르쳤는데, 3년 후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 맹아 학교에서 - 52 - 점자교육을 받은 후 다시 내한하여 뉴욕의 점자를 토대로 한글맞춤법에 따라 ‘평양 식 점자’를 창안하여 성서의 기도문, 십계명 일부와 초등독본, 구약의 역사와 지리, 음악을 점자로 번역 편찬하여 가르쳤다. 99) 또한 그녀는 클로크(CLocke)의 재정적 도 움으로 평양의 정진학교 안에 맹아소녀를 위한 특별학급을 개설하였으며, 1909년에 는 농아부(聾啞剖)를 두어 이것을 맹아학교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1904년에는 평양에 서 장로교 선교사 모펫(Samuel A. Moffett)의 부인에 의해 남자 맹인학교가 설립되 었다.100) 이어 교회나 일반학교 안에도 맹아학급이 설치되었다. 교과목은 점자로 된 성경․지리․음악․지리․산술 등이었고, 실기 과목으로는 안마와 편물을 가르쳤 다. 101) 또한 지체 부자유 학생을 위한 교육은 1897년 서울에 세워진 불구 아동을 위한 집 에서 페리(Miss Jean Perry)를 중심으로 9명의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1년에는 이곳에 23명의 장애아동이 수용되었으며, 선교사들은 이들에게 한글과 한문․창가․산술․지리․재종․기타 기초 지식을 가르쳤다.102) 이와 같이 농맹아와 지체 부자유 학생을 위한 특수 교육은 일반 사회에서 소외된 장애자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한 계발하고 자주, 자립하여 건전한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는 점에 서 기독교학교의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더구나 당시의 국가적 형편으로 보아 전혀 불가능하다시피 한 특수교육에, 선교사들이 손을 댈 수 있었던 사실은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철저한 그리스도의 희생정신과 봉사정신에 바탕을 둔 신념이 적용한 결 과였던 것이다. 이처럼 선교사들에 의하여 보편화되기 시작한 기독교학교의 신교육은 국가나 사회 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던 여성과 장애자들에게까지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인간이면 누구나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 것이며, 양반이나 서민의 자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차별 없이 교육 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교육의 기회균등 사상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 99) 한규원, 개화기 한국기독교 민족주의 연구 , 국학자료원, 1997, 56쪽. 100) 이만열, 한국기독교 문화운동사 , 문음사, 1987, 280쪽. 101) 민경배,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99쪽. 102) 앞의 책, 99쪽 - 53 - 져오게 되었다. 3. 신문화(新文化)의 수용과 보급 개화기에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그들이 설립한 기독교학교를 통하여 개화운 동의 사명을 가지고, 종교와 함께 과학과 상품을 가지고 들어와 서구의 근대문화를 이 땅에 도입하는 데 선구적 역할을 함으로써 실력 있는 문화인으로 성장하도록 하 고 민족문화를 각성케 하여 우리 민족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103) 개화기 이전까지의 조선사회는 지나치게 사대주의사상(事大主義思想)에 집착한 나 머지, 중국의 문물제도나 정신문화는 가장 우수한 것인 반면, 서양의 문물제도나 정 신문화는 낮은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인이 서양인을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양 오랑캐로 보던 시각은 그들의 문화까지도 낮은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학교는 그러한 사고방식이나 태도에 사로잡혀 있던 한국인에게, 서양의 문물 제도나 정신문화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전환점을 가져오게 하였다. 즉 서양문화도 우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으며, 더욱이 그것을 통하여 자신 을 발견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이 설립한 기독교학교의 교육, 의료, 학술적인 활동은 서양의 문물제 도를 소개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교육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 성서와 찬송가 번역 기독교가 전래되면서부터 성서가 번역되고 전파되기 시작했다. 성서의 번역은 근 대적인 문화운동과 관련이 있었다. 개화기 기독교학교는 필수과목으로 성경을 가르 쳤는데 기독교 선교사들은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 한글 성서본의 보급과 더불어 국문의 표기, 체계, 어문의 구조, 문체 등의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근대 소설이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국역성서는 한글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성서 103) 조지훈, 한국문화사서설 , 탐구당, 1970, 106쪽. - 54 - 를 한글로 번역한 것은 언문일치운동의 출발점이었으며 근대적인 문학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04) 당시에 제작된 우리말 성서들은 전근대적인 정체성을 일소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성서의 보급을 통해서 자유, 평등, 박애, 민주주의 등과 같은 근대사상이 소개되었다. 이처럼 성서번역이 개화기의 우리나라의 전근대적요소인 침체성을 불식하는데 끼 친 영향력을 두 가지 면에서 고찰할 수 있겠다. 하나는 성서 자체가 지니고 있는 그 사상적 내용, 즉 자유, 평등, 박애, 민주주의와 같은 외래사상의 직접적인 이입으로서 이것을 정신적인 영향이라고 하면, 또 하나는 성서가 역어로서 평이한 언문일치의 한글을 채용함으로써 조선 오백 년 동안 정처없이 표류를 거듭해 온 우리나라 문자 생활과 언어생활에 일대혁신을 감행하여 한글에 의한 언문일치운동의 기치를 높이 쳐들어 그 기수적 역할을 다했다는 외형적 영향이다. 105) 성서번역은 이와 같은 정신적 영향과 외형적 영향으로 한국의 신문화(新文化)수용 에 기여했다. 이것은 종교개혁 당시 루터(Luther)의 독일어 성서번역이 이후 독일문 학에 영향을 미친 것과 같이 한국에서도 모국어운동으로 전개되어 한국문학사에 공 헌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찬송가집이 책으로 나온 것은 1892년에 당시의 선교사 존스 (G. H. Jones)와 루스벨러(L. C. Rothweiler) 공역(共譯)으로 된 찬미가 가 그 효시 이다. 찬미가 에 들어 있는 찬송가의 수는 전부 27편의 번역 찬송가였으며, 당시 한 국에서 불려지는 찬송가 전부가 수집된 것이다. 찬송가는 창가운동과 근대 문학운동 의 모체가 되었다. 또한 찬송가는 한국에 서양 음악을 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찬송 가의 보급과 더불어 애국가운동, 창가운동, 근대 문학운동 그리고 대중음악운동이 일 어났다.106)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의 교가는 찬송가조였다. 이 학교 출신자들은 독립가와 창가 운동에 참여했다. 이처럼 기독교 찬송가는 사상적으로나 음율적으로 근대 음악에 많 은 영향을 주었다. 104) 김승철, 한국 근대 번역 문학사 연구 , 을지문화사, 1975, 16쪽. 105) 앞의 책, 67쪽. 106) 이유선, 한국 양악 80년사 , 중앙대학교 출판국, 1968, 94~96쪽. - 55 - 2) 음악과 체육교육의 활성화 한국에서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것과 같은 서양음악, 즉 당시로서는 창가(唱歌)라 고 한 이것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였으며,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한국 땅에 기독교를 전파할 때에 서양음악도 함께 소개하였던 것이다. 그 서양음악이라는 것이 곧 찬송가이었으며, 한국국민이 이것을 모방하여 창가를 지어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 이다. 실제로 서양음악이 들어와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885년 감리교 선교사 아 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성경과 함께 찬송가를 가지고 들어와서 이 나라 백성에게 복음을 전파할 때에 그들이 가지고 온 찬송가도 함께 가르치면서부터이었 다. 107) 1885년에 개교한 배재학당에서는 1887년부터 음악수업을 시행하였다. 당시 음악을 담당한 교사는 아펜젤러(H. G. Appenzeller)였으며, 그가 순직한 1902년 이후에는 번 커(Bunker)가 음악교육을 맡았다. 이 무렵에 이화학당에서는 영어로 된 찬송가를 가 르쳤다.108) 1895년에는 정신여학교에서도 음악을 가르쳤으며, 평양의 숭실학교는 서 북지방 음악활동의 중심지였다. 이 학교에서는 김인식, 김영환, 현재명, 박태준, 김세 형 등의 음악가를 배출하였다. 관립학교들은 1909년에 제정된 보통학교령 시행규칙이 개정․공포될 때까지 음악 교육을 실시하지 못했다. 관립고등학교에서는 음악교육을 실시하려고 하였지만 음악 교사가 없어서 음악교육을 할 수 없었으며109), 일반 사립 고등학교들도 음악교육을 하기 어려웠다. 이에 반해서 기독교학교들은 선교사와 한국인 음악교사가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용이하게 음악교육을 할 수 있었다. 이화학당에서는 창가와 오르간, 피아노, 등을 가 르쳤다. 1909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합창단인 이화합창단이 YMCA 강당에서 헨델 의 할렐루야를 합창하기도 했다. 기독교학교가 음악교육을 실시했던 이유는 선교의 일환으로 찬송가를 가르치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학교의 음악교육은 단지 선 107) 조용만외 2인. 일제하의 문화운동사 , 민중서관, 1970, 64쪽. 108) 이화여자중고등학교, 이화구십년사 , 이화여자중고등학교, 1975, 38쪽. 109) 민원득, 개화기의 음악교육 , 이화여자대학교 80주년 기념 논문집, 예능편 , 이화여자대학교, 1965, 21~22쪽 - 56 - 교뿐만 아니라 서양음악의 소개, 나아가 창가운동과 애국가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 게 되었고, 창가의 내용 속에 담겨진 애국정신은 민족의식의 고취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었다. 개화기에는 오늘날의 체육이라는 용어 대신 체조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 리고 체조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학교를 설립하고 근 대식 교육을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였다. 개화기 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 어오면서 가지고 온 것 가운데 하나가 서양식 운동경기였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 어와서 보급한 운동은 기계체조․철봉․정구․축구․야구․농구 등이었다. 그들은 선교활동과 병행하여 그들이 가지고 온 서양식 운동경기를 보급하였으며, 따라서 전 통적으로 체육활동을 소홀히 여기던 학교교육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근대교육에서 전인으로 발달시키기 위하여 필수가 되는 것이 지 식과 도덕뿐만 아니라 체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 므로 각급 학교 교과과정에 체육(체조)을 정규교과로 포함시키는 전환점을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학교교육에서 체육교육 또는 체육활동이 보편화되었으며, 이것은 젊 은이들의 체력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민족적으로 패기 있는 기상을 가르 치는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더구나 일제가 침략해오는 과정에서 체육활동은 그것 자체가 민족의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것이었으며,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활동으 로까지 승화되었던 것이다. 배재학당과 황성 기독교청년회는 이러한 운동을 보급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 으며, 다른 학교나 외국인 운동선수들과 시합을 하였다. 1906년에 체질을 강건하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조직된 체육단체인110)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는 체육 간사 이태순을 상해로 보내 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 후 각 학교는 학교별 또는 학교연합 으로 운동회를 개최하였다. 운동회의 영향으로 1907년에서 1909년까지 한성의 관립학교와 사립학교는 연합하 여 매년 봄과 가을에 운동회를 개최했다. 그 후 오성학교, 보성학교, 배재학당, 중앙 학교 등 9개 학교가 1910년 삼선평에서 연합운동회를 개최하였다. 평양의 대성학교 110) 황성신문 , 1906년 4월 18일, 1906년 5월 30일. - 57 - 에서도 같은 해 5월에 운동회를 열었으며111) 같은 해 5월에는 한성의 14개 기독교학 교 재학생 천 여명이 참가하는 연합운동회가 열렸다. 이화학당에서는 매년 5월에 실 시하는 메이데이(May Day)행사에 운동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각지에서 학교별 또 는 학교연합으로 운동회가 활발하게 개최된 이유는 그것이 민족의 울분을 토로하는 수단이었다는 데 있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교육에서는 학교교육 내용에 신체를 단련하기 위한 교과를 포함 시키지 않고 지식위주의 교육, 유교경전 중심의 지적인 교육이 중심을 이루었었다. 그러므로 개화기에 전통적인 교육에서 근대적인 교육으로 전환되면서, 이제까지 관 심조차 두지 않았던 체조를 교과과정에 포함시켰다는 것은 한국의 교육사에서 볼 때, 하나의 획을 긋는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3) 의료를 통한 사회개혁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곧바로 기독교 복음을 직접 전파할 수 있는 상황 이 아니었기 때문에 간접적인 선교인 교육과 의료활동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 다. 그러므로 그들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의료선교이었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맥클레이가 한국에서 기독교를 선교할 수 있는지의 여 부를 타진하기 위하여 1884년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종으로부터 허락받 은 것은 병원사업과 학교사업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사업은 의외에도 한국국민 이 당하고 있던 육체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욕구와 배우고 싶어 하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여건 속에서 이 땅에 들어 온 것 이 서양의학이었다. 선교사 겸 의사였던 알렌(H. N. Allen)은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고 혜택을 주 기위하여 현대 의학을 가르칠 학교와 병원이 필요함을 느끼고 1885년에 현 연세대학 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모체가 된 광혜원을 개설하였다. 그 창립정신은 “미신과 체념의 도탄으로부터 민생을 구출하여 믿음과 소망을 주는 동시에 현대의학과 기술을 가르쳐 이 나라의 제반 문물제도를 혁신하고, 과학화하고 111) 황성신문 , 1910년 5월 17일, - 58 - 현대화 하려는 데서 출발한 것”이다.112) 이곳에서는 처음부터 의료뿐 아니라 일종의 의학실습 교육으로 학생을 뽑아서 서양의학도 학습하게 하였다. 알렌은 이 병원에서 매일같이 100명 정도의 환자를 치료해 주었는데, 환자는 거지, 문둥병자에서부터 왕족과 양반 등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었다.113) 그리고 이 병원에 오는 사람들의 질병도 가지각색이었다. 각종 질병으로 1년 동안 치료를 받은 사람들 은 모두 20,529명이나 되었다. 114)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당시의 백성이 얼마나 많은 질병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광혜원으로부터 시작한 의료사업은 그 이후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 다 병원이 설립되어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해 줌으로써 육체적인 고통으 로부터 해방시켜 주게 되었다. 선교사들이 선교의 한 방편으로 한국에서 전개한 의료사업은 다음과 같은 사회개 혁에 공헌을 하게 되었다. 115) 첫째, 몽매한 전근대적인 미신의 폐습과 그 무의(巫醫)의 폐해를 근절하게 되었다. 즉 귀신이 병을 일으킨다는 관념때문에 발생하는 불행한 결과로부터 이 민족을 구출 한 것이 기독교학교에서 전개한 의료선교의 큰 공헌이었다. 둘째, 의료선거가 위로는 고종으로부터 아래로는 천한 하류층의 사람들을 함께 시 료함으로써 계층간 소외의식을 제거하는데 큰 작용을 하였다. 셋째, 의료활동을 통하여 심원한 기독교의 인간애를 실현하였으며, 그 영향을 끼친 일이었다. 넷째, 근대의 과학적 의학 지식의 보급과 새로운 시대로의 문호 개방이었다. 다섯째, 의료사업에 여성이 참여함으로써 여성도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 을 조성하였다. 여섯째, 의료선교 사업을 통하여 기독교나 그 문명의 세계에 대한 한국의 접촉과 교류의 통로가 개방되었다. 112) 손인수, 한국근대교육사 , 연세대출판부, 1971, 37쪽. 113) 전택부, 한국교회발전사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115쪽. 114) 앞의 책, 115쪽 115) 민경배, 한국기독교사회운동사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95쪽. - 59 - 4. 민족의식의 함양과 고취 개화기의 우리나라 교육의 특징 중 하나는 신교육 도입과 민족주의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민족주의 교육이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토대로 민족 문화 유 산을 다음 세대에 계승시키고 발전시키는 교육이라고 볼 때, 우리나라 근대 민족주 의 교육의 가장 큰 특징은 저항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데 있다. 당시의 기독교학 교와 교회는 애국심과 자주독립 의식을 심어줌으로써 구국운동에 일익을 담당했다. 선교사가 입국하여 의료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을 때, 우리나라는 대내외적으로 격 동기였다. 나라가 날로 쇠퇴하여 가고 있는 가운데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해 오는 과 정에서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절실한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에, 기독교 학교는 이것에 부응하기 위하여 민족교육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1) 성경과 설교를 통한 민족의식 교육 성경은 기독교학교의 교과과정에서 가장 중심 된 자리를 차지하는 과목이며, 이것 은 기독교학교의 설립목적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것이다. 또한 성경은 선교사들이 기독교학교를 설립하였을 때, 가장 먼저 가르치기 시작한 과목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성경이 신앙심을 배양하는 과목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가르치는 시간이 한국인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배양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선교의 수단으로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였으며, 그것 은 “기독교의 창조신을 하나님으로 결정한 것과 한국어 문장의 순화와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116) 시키는 데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직접 가르쳐줌으로써, 신앙과 함께 성경에 대한 지식을 길러주었는데, 그것은 민족의식을 배양하는 것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117) 선천(宣川)의 신성학교에서는 교장 맥큔(George S. MeCune, 1872~1941) 116) 김용복, 한국교회와 우리민족의 과제 , 기독교사상편집부 편, 한국역사와 기독교 , 대한기독교서 회, 1983, 145쪽. - 60 - 이 직접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성경을 가르치는 시간이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훈화 제목으로 택하여 정의로 무장한 약자가 강대한 적보다 더 강하다는 것”118)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 던 모세가 이집트에서 모진 압박을 받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는 과정을 기록한 출애굽기를 성경시간이나 예배시간, 또는 훈화시간에 자주 들려주기도 하였 다. 그런가하면 “평양 등지의 기독교학교에서는 성경시간에 베드로전서 3장 13절에서 16절까지의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와 , 로마서 9장 3절 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등을 낭독”119) 함으로써, 풍전등화와 같은 나라의 운명으로 모두 실망에 쌓인 한국민족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어 넣어 주 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다른 어느 시간보다도 성경시간을 통하여 학교를 졸업한 뒤에 민족의 지도자로써 활약 할 수 있는 정신적 기틀을 닦았을 것은 자명한 일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신앙심을 키워주고 영적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는 성경말씀이 민족적인 비운에 직면한 한국적인 상황에서 기독교학교의 수업시간이나 예배시간으로 옮겨왔 을 때는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고취시켜주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2) 창가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 창가는 개화기에 잠시 유행하였던 문학 장르의 한 가지로서, 대개 7 5조 등의 정 형에, 애국 독립 정신 등을 담아 서양식 곡을 붙여 노래하던 것으로서, 당시 한국에 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찬송가 형태의 창 가이었던 것이다. 또 교회에서 부르던 찬송가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전파되어 창가 를 지어 부르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기독교학교가 창가를 정규 교과과정에 편성하는 것은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초창기부터 창가를 가르친 것만은 틀림없다. 117) 한규원, 한국기독교학교의 민족교육 연구 , 국학자료원, 2003, 155쪽. 118) 손인수, 한국여성교육사 ,, 연세대학교출판부, 1987, 262쪽. 119) 손인수, 한국근대교육사 , 연세대학교출판부, 1971, 81쪽. - 61 - 배재학당은 1886년 말부터 교과과정에 창가를 넣었으며120), 이화학당은 1891년부 터 성악과 올겐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21) 그리고 이들 학교는 존스(George H. Jones)가 1896년에 편찬한 찬송가 를 음악 시간에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한 숭실학 교는 1901년 이전에 이미 창가와 음악이론을 나누어 가르쳤으며122), 공주의 명선여 학당은 초창기에 “성가를 통하여 음악공부를 하였으며”123) 이 때 사용한 것이 찬미 가 이었다. 1906년에 문을 연 영명학당은 1906년 설립 당시부터 창가를 교과과정에 편성하였다.124) 한국의 창가는 한말의 풍운과 망국의 비통한 운명 속에서 싹튼 종교적 성향과 민 족주의의 표현으로서, 개화기 한국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 그러므로 이 당시의 창가 는 개화기의 벅찬 민족의 고동이며, 망국을 슬퍼하는 겨레의 통곡이며, 자주독립을 외치는 민족의 함성이었다. 그리하여 창가는 기독교학교에서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교육내용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으며, 그것은 곧 자주독립과 충군애국을 노래하는 창가운동으로 발현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1896년 11월 21일에 독립협회가 주관하여 서대문에 있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정초식 행사를 열었는데. 이 행사에 애국가를 부르는 순 서를 넣어 당시 배재학당 학생들은 조선가 독립가 진보가를 부르고 다른 학교 학생 들은 애국가를 불렀던 것이다. 125) 한편 나라가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서 학생들은 나라를 염려하면서 창가를 지어 불렀는데, 그것은 자주독립국가라고 하는 것으로 집약되었다. 평양 대성학교의 안창 호는 ‘대한청년학도가’를 지어 교사와 학생들로 하여금 부르도록 하였다. 120) 배재중고등학교, 배재사 , 배재중고등학교, 1955. 60쪽 121)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팔십년사 , 이화여자대학교, 1967, 65쪽. 122) 숭전대학교80년사편찬위원회, 숭전대학교80년사 , 숭전대학교80년사편찬위원회, 1982. 83쪽 123) 영명80년사편찬위원회, 永明八十年誌 , 영명중고등학교, 1985, 97쪽. 124) 앞의 책, 117쪽 125) 독립신문 , 1권 99호, 1896. 11. 21. - 62 - 대한청년학도가126) 1. 대한청년 학도들아 동포형제 사랑하고 우리들의 일편단심 독립하기 맹약하세 화려하다 금수강산 사랑홉다 우리동포 자나깨나 잊지말고 기리보전 합시다. (후 렴) 학도야 학도야 우리 주의는 도덕을 배우고 학문을 넗혀서 삼천리 강산 이 좋은 강토를 우리 학생들이 보전합시다. 2. 우리들은 땀을흘려 문명부강 하게하고 우리들은 피를흘려 자유독립 하여보세 두려움을 당할때에 어려움을 만날때에 우리들의 용감한마음 일호라도 변치말고 위 노래는 안창호가 대성학교 학생들의 가슴속에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투철한 애 국심을 불어 넣어 주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즉 애국심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의 자 주독립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학교의 창가운동은 대부분의 학교가 그 설립 초기부터 음악을 비 록 창가라고 하는 명칭일지라도 정규 교과과정에 편성하여 가르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이 나라의 위기 상황과 연결되어 창가의 내용이 주로 나라의 자주독립 과 충군애국을 노래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3) 교과를 통한 민족교육 실시 126) 도산기념사업회편, 安島山全書 ,中 언론․자료편 , 범양사출판부, 1990, 46~47쪽. - 63 - (1) 국어교육 한 나라의 민족성이나 민족의식의 여하를 가늠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그 나라의 국 어를 얼마나 잘 갈고 닦느냐 하는 것에 있다. 왜냐하면, 국어는 하나의 국가와 민족 으로 하여금 공통의 사고, 행동양식, 문화, 전통 등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절대 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래의 한국의 지배층이나 양반계급은 한문을 숭상하고, 국문을 암클이나 언문이라고 하여 여자나 상민이 배우는 글이라고 천시하는 동시에 학교 교육에서 소홀히 취급함으로써 급기야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국력이 쇠약하게 되는 요인의 하나로까지 작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개화기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놀란 사실은 한국은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민족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한자를 숭상하고 그것만을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개화기 기독교 선교사들은 한국국민에게 자기 나라 글 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것을 널리 보급하 기 위하여 앞장섰던 것이다. 국어를 가장 먼저 가르친 학교는 이화학당이었다. 이화학당에서는 1889년부터 국 어를 가르쳤는데, 구체적으로 읽기․쓰기․작문․편지 쓰기 등으로 구분하여 가르쳤 다. 127) 그리고 경신학교는 1900년대에 들어와서128), 한영학원은 설립 당시부터 국어 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29) 또한 배화학당은 1900년 이전에 국어를 가르치기 시작 하였으며130), 배재학당은 다른 학교와 비교할 때, 상당히 늦은 1908년에 와서야 국어 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31) 공주의 명선여학당은 1905년 설립초기부터 국어의 작문․ 편지 쓰기를 가르쳤다. 학교마다 과목명칭은 국어․국문․어학․작문․한글․소학독본 등으로 가기 다르 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국어계통의 교과목이 학생들의 민족정신을 배양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한국민족은 비로소 자 127) 이화여자대학교, 이화팔십년사 , 이화여자대학교, 1967, 65쪽. 128) 고춘섭 편, 儆新八十年略史 , 경신중고등학교, 1966, 36쪽. 129) 학교법인 송도학원, 송도학원 80년사 송도학원 , 54쪽. 130) 김세한, 배화60년사 , 배화여자중고등학교, 1958, 82쪽. 131) 배재중고등학교, 배재80년사 , 배재중고등학교, 1965. 335쪽. - 64 - 신들이 우수한 문자를 가진 훌륭한 민족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동시에, 이것을 통하 여 민족적으로 각성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2) 역사교육 한 나라의 민족정신을 잘 드러내어 주는 것이 그 나라의 언어․문자와 함께 역사 가 여기에 해당된다. 더구나 국운의 쇠퇴와 외세의 침략이라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당한 때에 국민에게 민족정신을 길러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때의 역사는 국어와 마찬가지로 학생뿐만 아니라 한국국민 전체의 민족정신고취를 위하여 필수불가결한 과목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학교에서 초창기부터 중요한 과목으로 생각하고 가르친 것이 역사였 다. 개화기에 기독교학교에서 가르친 역사는 상당히 광범위한 것이었다. 단순히 한국 의 역사만이 아닌 세계의 역사까지도 가르쳤다. 한 나라의 건국사나 망국사(亡國史) 를 가르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를 위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영웅들의 전기 를 가르침으로써 그것을 배우는 학생들로 하여금 민족적인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 배재학당은 1903년 이후에 한국역사․세계역사․일본역사․중국역사를 가르쳤으며 1908년 이후에는 한국역사․동양역사․세계역사를 가르쳤으며132), 이화학당의 중등 과에서는 1908년 이후 만국역사․근세사․상고사․영국사․미국사 등을 가르쳤으며, 초등과에서는 한국지리․한국사를 가르쳤다.133) 진남포의 기독삼숭학교에서는 세계 사를, 134)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皇城基督敎靑年會學館)은 동국역사․세계사를 편성하 여 가르쳤다. 135) 이외에도 경신학교, 정신여학교, 배화학당에서도 역사를 가르쳤다. 이와 같이 기독교학교에서는 초창기부터 역사를 중요한 과목으로 인식하고 가르쳤 는데, 한국의 역사는 물론 세계의 역사까지도 포함하여 가르쳤다. 역사과목은 그것이 자기 나라의 역사이든 다른 나라의 역사이든 상관없이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배양 시켜주고 고취시켜주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32) 배재중고등학교, 배재80년사 , 배재중고등학교, 1965, 296쪽. 133) 이화여자중고등학교, 이화90년사 , 1975, 59쪽. 134) 대한매일신보 , 6권 902호 1908. 9. 10. 135) 대한매일신보 , 6권 877호 1908. 8. 5. - 65 - Ⅴ. 결 론 본 연구는 개화기에 기독교학교가 한국의 근대교육 발전에 어떤 과정과 내용과 특 징을 나타내며 영향을 미쳤는가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개화기 기독교학교가 한국 교 육의 발달에 어떻게 선도적 역할을 하였는지, 그 배경과 실상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규명함으로써 한국 교육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유용한 지혜를 얻고자 하 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첫째, 개화기 기독교 학교가 성립하는 과정에서 선교사의 역할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인가 둘째, 기독교학교가 전개한 구체적인 교과교육활동의 내용은 무엇인가 셋째, 기독교학교가 개화기 한국의 교육근대화에 공헌한 내용은 무엇인가 1876년에 개항한 이후 한국은 여러 열강들과 수교하게 되었고, 급속한 사회변화를 겪게 되었다. 안으로는 봉건사회를 개혁하는 일과 밖으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대 처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즉 개화와 자주라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개화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관심을 가지고 전개한 사업이 교육사업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전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선교사들은 선교의 간접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학교를 설립하여 그 목적을 달성하여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사업은 직접 적인 방법이상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차원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첫째, 학교교육을 받는 대상은 어린아이들, 즉 아무리 나이가 많다 해도 20대를 넘 지 않은 젊은이들이기 때문에 교육을 통하여 신앙심을 길러 줄 때 쉽게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었다. 둘째, 학교교육은 한꺼번에 많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짧은 기간 동안 에 많은 학생들에게 신앙심을 길러 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요인은 기독교학교가 전개한 신교육에 곧바로 적용될 수 있었다. 선교 - 66 - 사들이 갖고 있었던 신교육 사상에 의해 기독교학교의 교육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 은 이전의 전통적인 교육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들은 교육을 종 래와 같이 입신출세(立身出世)를 위한 도구나 가문 또는 개인의 영달을 위한 수단으 로 삼던 편협한 이기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한국의 순미(純美)한 고유문화를 바탕으 로 한 정신사상 위에 근대문명에 관한 지식을 주고 과학적인 생활을 하게 하여 실력 있는 문화인으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실천하며, 교회와 국가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 는 정신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교육목적은 그들이 설립한 각 학교의 교과과정에 분명히 드러 나 있다. 즉 네 학교(배재, 이화, 경신, 정신) 교육과정에 모두 한문이나 맹자 등의 동양적 윤리를 강조하는 과목이 포함되어 있어서 한국적인 전통을 무시하지 않았고, 성경․영어․물리․화학 등의 서양의 근대적인 교과목으로 편성되었는데, 이 점은 당시 한국의 개화 또는 근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특히 교과과정에 물리․화학․생리 등과 같은 과학 과목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킨다 는 것은 음악․미술․체육 등의 교과목의 편성과 마찬가지로 학교 교육에서 획기적 인 교과과정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과학을 가르침으로써 학생들에게 문제 를 과학적․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태도를 함양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 다. 그리고 과학적 기술의 발달을 가져올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함으로써, 근대화를 성 취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에 의하여 보편화되기 시작한 기독교학교의 신교육은 국가나 사회 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던 여성과 장애자들에게까지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까지 확대되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인간이면 누구나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준 것이며, 양반이나 서민의 자녀를 불문하고 누구나 차별 없이 교육 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교육의 기회균등 사상을 심어주는 결과를 가 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의 변화는 관․공립학교나 민간인 사립학교에 큰 영 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개화기 기독교학교는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과과정에서 모든 학교교육을 선도하였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기독교학교는 신문화수용에도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이를 보급하고 발전시 켰다. 개화기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그들이 설립한 기독교학교를 통하여 개화 - 67 - 운동의 사명을 가지고, 종교와 함께 과학과 상품을 가지고 들어와 서구의 근대문화 를 이 땅에 도입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기독교학교의 교육, 의료, 학술적인 활동 중, 특히 성경과 찬송가의 번역, 음악과 체육교육의 활성화, 의 료를 통한 사회개혁은 서양의 문물제도를 소개하여 한국으로 하여금 교육의 근대화 를 추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고난받는 국가와 민족을 구원해주기 위한 수단으로 기독교 및 기독교학교가 전개 한 사업이 민족교육이었다. 즉 국가와 민족이 열강의 침략의 대상으로 전락한 때에, 기독교학교는 교과교육, 교과외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길러주었던 것 이다. 교과교육은 국어․역사․지리․수신․체육․음악․성경 등으로써, 심지어는 성경 과목조차도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해 주는 시간으로 삼았던 것이다. 국어를 비 롯한 위의 교과들은 그 내용이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켜주는 내용으로 구성 되어 있었다. 이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는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 이다. 교과외 교육활동은 당시 배재학당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학생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하고 ‘협성회회보’를 발간하여 언론활동을 전개하는가 하 면 토론회 활동과 연설회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그 주제는 당시 국가와 민족 이 당면한 문제와 관련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교육활동은 배재학당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도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한 과외활동으로써의 체육활동, 특히 운동회는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직면한 때 에 학생들에게 활발한 기상을 길러주고, 나아가 국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길러주는 기회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운동회를 민족적 울분을 터뜨리는 기회로 삼 았다. 운동회는 ‘관․공․사립연합운동회’, ‘사립학교연합운동회’, 또는 각 개별 학교 의 운동회 등 서울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활발히 개최되었다. 일제는 이러한 운동회 가 자신들에 대항하여 민족운동을 일으키는 기회로 삼는 것을 감지하고, 이 운동회 조차도 개최하지 못하도록 탄압하였던 것이다. 한편 실업교육 역시 주요한 민족교육의 하나였다. 선교사들이 선교 활동을 하면서 한국사회에 남긴 공헌 중의 하나는 한국국민에게 실업이나 근로의 중요성을 깨우쳐 - 68 - 주는 동시에, 실제로 학생들에게 실업 교육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장차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길러주는 것과도 연결되었다. 그러 한 것의 구체적인 예가 자조부(自助部) 등을 설치하여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 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들로 하여금 실업이 부국강병을 이루 는 길이요,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자주독립을 성취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해 주었다. 사실 인간이 관여하는 모든 사회현상-정치․경제․사회․문화․예술․과학․종교 -은 언제나 이중성 또는 양면성을 띠기 마련이다. 왜냐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그 자 체의 속성이 이중성, 양면성을 내포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화기 한국의 기독교 학교의 교육활동도 이러한 두 가지 관점에서 동시에 바라보아야 한 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 가운데, 본 연구는 기독교학교가 한국의 근대교육 발전에 공 헌한 긍정적인 면에 관심을 두고 고찰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학교가 그들의 교육 활동을 통하여 한국 사회에 준 부정적인 영향에 관한 연구는 다른 사람의 몫으로 남 겨 두었다. - 69 - 참고문헌 1. 자료 그리스도 신문 대한매일신보 독립신문 황성신문 협성회회보 경신중고등학교, 경신 80년약사 , 서울 : 경신중고등학교, 1966. 배재중고등학교, 배재사 , 서울 : 배재중고등학교, 1955. 배재중고등학교, 배재 80년사 , 서울 : 배재중고등학교, 1965. 배화여자중고등학교, 배화 70년사 , 서울: 배화여자중고등학교, 1965. 송도학원, 송도학원 80년사 , 인천 : 송도학원, 1989. 신명여자중고등학교, 신명 50년사 , 서울 : 신명여자중고등학교, 1960. 이화여자대학교, 이화 80년사 , 서울 : 이화여자대학교, 1968. 이화여자중고등학교, 이화 90년사 , 서울 : 이화여자대학교, 1975.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정신 75년사 , 서울 : 정신여자중고등학교, 1962. 2. 단행본 강윤호, 개화기의 교과용 도서 , 서울 : 교육출판사, 1984. 곽안전, 한국교회사 ,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3. 김기석, 남강 이승훈 , 서울 : 세운문화사, 1970. 김승철, 한국 근대 번역 문학사 연구 , 서울 : 을지문화사, 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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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 specifically intended to look into the historical background of the enlightenment period and the establishment of early mission schools by foreign missionaries, to analyze the education of those mission schools in terms of objective and content, and to discuss how those schools affected the introduction of new education and the development of Korean early modern education. Owing to the thoughts of missionaries about new education, education provided * This thesis is submitted to the Graduate School Board in Cheju National University in February 2007 in partial fulfillment of the requirements for a master's degree in education. - 74 - by mission schools was a far cry from traditional education in terms of object, content and method. They didn't take Korean heritage lightly at all, but their curriculum was made up of modern Western courses like the Bible study, English, physics and chemistry. That had something to do with the civilization or modernization of the nation, and mission schools made the thought of equal educational opportunity take root by informing people of their right to learn and providing them with that chance without discrimination. Mission schools were enthusiastically receptive to new culture. They played a critical role in spreading and developing new culture, introducing Western civilization and eventually stepping up modern education. Moreover, those schools instilled the national spirits in students by offering academic, extracurricular and vocational education. Thus, it's attempted in this study so far to shed light on the contribution of missions schools to the development of early modern education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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