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 성찬 세례

성만찬(주의 만찬) 연구

하나님아들 2023. 12. 10. 14:17

성만찬(주의 만찬) 연구              

 

1. 성 만찬의 역사적인 배경

 

성만찬은 언제 제정 하였는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유월절 식사 때였는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새롭게 제정하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서 학자들 사이에 찬반의 논란이 제기되어 왔으나 새로운 증거가 제시되기 될 때까지 유월절은 예수님께서 베푸셨던 성만찬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데 대하여서 학자들 사이에 대체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수용하는 편이다.(주의 만찬 쟌자크 폰 알멘 지음 박근원 옮김 양서각출판사)
이는 신약성경 마 26:17. 막 14:12. 눅 22:8 등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시기전에 제자들과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서 (마가)다락방에서 유월절 식사를 하면서 떡과 잔을 가지고 “이는 내 몸과 내피라”고 한 것을 보면 1)성만찬은 유월절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2)유월절은 흠 없는 어린양 이였고 요 1장 29절에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 한 것이 일맥상통하며 3)유월절의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백성들을 해방시킨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구속받은 사건은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과 類似性(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유월절은 유대인들만이 참여할 수 있는 민족적인 사건이고, 성만찬은 모든 성도(인종)들이 다 참여할 수 있는 사건이다. 다만 유월절과 성만찬의 차이점을 찾아본다면 유월절은 년 중 1회 거행하지만 성만찬은 년 중에 수회를 거행한다는 점이 다르고 유월절은 흠 없는 어린양(짐승)이 피를 흘린 것에 비하여서 성만찬은 하나님의 독생 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 흘린 사건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성 만찬의 중요성과 의미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례전이 본질적인 구원의 방편 혹은 은혜의 방편으로 생각을 하고 세례, 견진, 성찬, 고해, 사제서품, 결혼, 종유 식 등 일곱 가지 성례전을 거행하는 방면에 개신교회에서는 말씀이 성례전보다 더 중요한 구원의 방편이라고 주장하면서 성례전을 세례와 성만찬 두 가지만을 인정하고 있다.
일찍이 초대교회에서는 성례전을 비밀이라고 불렀고 동방교회에서도 祭儀나 교리 속에 숨어있는 신비스러운 종교적인 내용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뜻과 구원의 계획을 말한다.(기독교 조직신학 연대출판 김규진 저)
그럼으로 1)성찬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우리들에게 나타나서 시(視)각이나 청(聽)각이나 嗅(후)각이나 觸(촉)각을 통하여 역사한다. 2)하나님의 말씀은 전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그의 사상이나 감정이 드러나므로 진리를 왜곡시킬 수도 있지만 성찬은 단순하고 고정된 행위를 통한 객관성을 가진다. 3)성만찬은 개인을 위한 것으로서 각 사람의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요구한다. 4)성만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한 지체라고 하는 일체감과 단결심과 연대감을 갖게 한다. 5)성만찬은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로 결합 시켜준다. 6)성만찬은 그리스도안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 무식을 떠나서 모두가 평등 하다고 하는 평등의식을 갖게 한다. 7)성만찬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8)성만찬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 흘리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처럼 나도 할 알의 밀처럼 썩어져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다는 다짐과 결심을 하게 한다. 9)성만찬은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을 생각하면서 영원한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한다. 10)성만찬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만찬을 거행할 때마다 내가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며 그분의 뜻대로 지금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회상하게 한다. 11)성만찬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떡)을 떼어서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었듯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면서 그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게 한다. 12)성만찬은 아무런 조건도 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멀리 떠났던 죄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지금도 아낌없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깨닫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만찬은 예배의 핵심 중에 핵심이요 예배사간에 빠져서는 안 될 아주 중요한 순서 중에 하나이다.
보통 개혁교회에서는 천주교회나 성공회나 그리스도의 교회와 달리 예배를 드릴 때 찬송과 기도와 헌금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행위로 하고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는 행위로 끝나는데 성만찬을 예배시간에 첨가하면 성만찬은 하나님과 인간이 상호 교제하면서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 성도들의 자기 삶을 돌이켜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제부터는 열심히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심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여 준다.

3. 성만찬 떡과 잔에 대한 많은 학자들의 다양한 견


성만찬의 떡과 잔에 대하여서 많은 학자들 사이에 논란을 가져온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제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 아니면 비유로 받아 들려야 할 것인지 혹은 영적이나 상징으로 이해를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을 할 것인가 하는 해석학적인 문제인 것이다.
특히 마 26:26-28. 막 14:22-24. 눅 22:19. 요 6:53-58에 예수님께서 “이는 내 몸과 피”라고 한 말씀을 어떻게 받아드리느냐 하는 문제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드려야 한다는 것과 마 13:34에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에 근거하여 비유나 상징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예수님의 피는 자신의 혈관 속에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나의 피니라.”고 한 말씀은 비유나 상징으로 한 말씀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도 나는 “문이다.” “포도나무다” “선한 목자”등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을 보면 비유로 한 말씀이며 레 17:11 기독교인들이나 유대인들은 피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는 등 많은 논란을 가져왔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어거 스 틴은 상징(떡과 포도주 및 물)과 내용(성례전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을 구분함으로 상징과 내용은 동일하지 않다고 하였다. 성례전의식 그 자체는 하나님구원의 은혜를 소유하지 않고 있으나 성례전을 집행하는 사제의 말씀을 통하여 물질과 의식은 성례전의 내용인 은혜와 결합된다고 말하면서 시프리 안과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는 상징 및 영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반면 안디옥의 이그 나티우스와 요한네스 다마스 체누스는 효력 및 실재적 견해를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안디옥의 이그 나티우스는 성찬을 “불멸을 주는 약”이라고 보았으며 특히 요한네스 다마스 체누스는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말한 최초의 신학자이기도 하다.
중세신학에도 전반적으로 성례전을 효력 및 실재론을 주장하는 파샤 시우스 라드 벨 투스와 랑 프랑이라는 대변자들이 있었고 라트 람 누스와 베렝 카는 성찬은 하나님은혜의 활동에 대한 상징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다가 카톨 릭 교회로부터 정죄 받고 말았다.

1) 화체설


카톨릭 교회는 처음부터 교리적으로 확정된 성찬 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기나긴 세월동안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확정된 성찬교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인 동시에 사제를 통하여 교회가 하나님께 바쳐지는 희생제물로서 트렌트 공회(1545-1563)에 의하면 성찬인 미사는 십자가의 희생제물을 통하여 일어난 구원의 표상이요 희생이라고 하였다.
이는 단 한번에 일어난 골고다의 희생제물이 충분하지 못하거나 보충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서 충분하지만 골고다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진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교회에 내어주며 미사를 통하여서 하나님께 다시 봉헌된다는 것이다.
이때 성만찬에 사용되는 재료에 대하여서 1215년 제 4차 라테랑 공회는 사제가 성찬예식을 집례 하면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선언하면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실제 변한다는 화체설을 선언함으로서 실재론을 교리 화 시켰다.
제 4차 라테란 회의는 또한 “신도들의 교회는 세계적으로 하나의 교회이다. 이교회 밖에는 누구도 구원이 없다. 이 교회 안에서 사제와 희생물이 그리스도 그 자신과 동일하며 그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제단의 성례 안에 실제로 포함되어 있으며 신적능력에 의한 그 빵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본질이 변화된다. 이렇게 됨으로서 우리의 연합 신비는 이룩되며 그가 우리에게 받으셨던 그 몸을 우리가 받게 된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사도들과 그의 계승자들에게 주신 교회열쇠의 대권에 일치한 안수 받은 사제들 외에는 아무도 성체성사의 효력을 낼 수 없다.”고 결정하였으며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무리들은 예배나 기도회 그리고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분리시키면서 저주하기 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성만찬이 끝난 후에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계속해서 존속 되므로 특별히 거룩한 장소에 본존 되어야 하며 또한 찬미의 대상이 되므로 들판이나 길거리에서 운반될 때에 찬양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평신도가 만약 거룩한 그리스도의 피를 마시다가 땅에 흘릴 경우 그리스도의 피를 땅에 쏫는 것이므로 포도주 잔은 함부로 받을 수 없도록 한 것은 카톨 릭 교회가 결정한 교리는 아니고 다만 평신도들로 하여금 경건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산물이며 그리스도의 피가 땅에 짓밟힐 경우 신성모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떡과 잔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은 형태가 아니고 본질적으로 변하는데 이는 아리스토 델레스의 구분에 근거한 것이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구분을 처음으로 채택 하여 오늘날 카톨 릭 교회의 공식적인 신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성만찬의 희생은 십자가의 처형과 똑같은 의미의 희생이라고 하였다.

2) 공재설


루터는 구교가 지켜온 예전에 대한 급격한 변화보다는 오히려 수정을 가한 채 보급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화체설과 별로 큰 차이는 없으나 화체설에서 주장하는 성물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견해만을 반대하면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육안으로 파악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떡과 포도주안에 실제로 임재 한다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에는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가 존재하는 것으로서 사제가 선포하는 성만찬 제정에 “이것은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다.”는 사제의 말씀이 성찬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말씀이 없다면 떡과 포도주는 단 순한 물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으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되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말씀이 외적인 물질에 첨가할 때 바로 그것이 성례전이 되는 것이다.”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근거로 하여 성찬은 사제가 베푸는 행위나 신자가 참여하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은사로서 성도들은 그것을 받기만 할뿐이라면서 루터는 共在設(공재 설)을 주장하였다.
루터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희생과 수난은 십자가 위에서 이룩한 단일회적인 사건으로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계시는데 이는 하늘의 특정한 공간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광이 어디서나 계심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는 곳에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며 그것을 찾는 자가 어디에 있든지 그곳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므로 그리스도의 말씀이 떡과 포도주에 첨가될 때 그 안에도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것이다. 그럼으로 입으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비록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성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도 그리스도께서는 함께 계신다고 하였다.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결합되어 있었던 것처럼 성찬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면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영적인 보화를 함께 나누며 이기심을 버리고 공동유익을 추구하며 형제애를 실현하므로 사제만 잔을 받고 평신도는 잔을 받지 못하는 제도는 잘못 되었다고 반대하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서 희생되셨다고 주장하였다.

3) 기념 및 상징설


츠빙글리는 성만찬을 상징적인 행위로서 첫째로는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이루신 구원을 상징하는 표식인 동시에 회상하는 행위고 둘째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자신과 세상을 향한 신앙고백의 표시와 인식 표시로서 신앙을 견고케 한다고 하였고. 셋째는 믿음의 공동체 일원으로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케 하며. 넷째 순종의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럼으로 성례전은 믿음을 세우거나 강화할 수가 없고 성례전의 주체는 하나님이라기보다는 다만 믿음을 전제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나의 몸이다”라고 한말은 “이것은 나의 몸을 뜻 한다”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상징에 불과하며 성찬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을 기념하는 의식이요 공동체의 고백 행위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츠빙글리의 이러한 주장은 오늘날 개혁교회의 큰 영향을 미쳤으며, 사제들에 의하여서 행하여 온 성례전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개선과 함께 성례전에 신비한 요소를 제거함으로 대다수 성도들이 부담 없는 성례전으로 받아드리게 되었다.
이 기념 및 상징설은 고전 11장 17절부터 34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 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지금껏 개혁자들의 지대한 관심의 대상 이였던 성만찬의 떡과 잔에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임재 하시는가에 대한 문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겼으며, 성만찬은 단지 그리스도의 희생의 기념과 신앙공동체 의식의 근거로 단순화 시켜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츠빙글리는 성만찬을 예배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지를 않고 기념 적 행사로 간주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성만찬과 예배가 항상 병존하였던 것을 분리시켜버렸으며 심지어는 연 2회 정도로 성만찬을 하여도 좋다는 성만찬 경시현상을 개신교에 유산으로 남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4) 영적임재설


칼빈은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단순한 기념 설에 대하여서 좀더 구체 적 이고 실제적인 신학견해를 나타내주는 것으로서 성례전은 성령아래에 있는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한 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례전에 참여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성도들에게 믿음이 있어야 하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례전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육신은 하늘로 올라가셨으며 하나님 오른편이라는 장소에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육신은 어디에서나 있을 수 없으며 수많은 교회의 제단위에 놓여있는 떡과 포도주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더욱 말할 수가 없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위하여 장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육신적 현재능력을 하늘로부터 우리 안에 보내므로 츠빙글리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견해는 옳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서 내려와 수많은 제단에 편재하며 신자들의 입속으로 들어간다는 루터의 주장도 옳지 않다. 다만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성만찬은 외형적인 표시로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은혜의 증거이며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의 입증이기도 하므로 성만찬 예식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서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동시에 이룩하는 감격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라는 성물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첫째 먼저 주님이 세우신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 우리는 육체로 덮여 있기 때문에 영적이고 천상적인 모든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상징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학자들마다 성만찬에 대한 견해가 다른 관계로 지금 가톨릭교회와 성공회 그리고 그리스도의교회를 제외하고는 충실하게 성만찬을 거행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초대교회의 예배형태를 보면 성만찬이 예배의 중심적인 순서였으나 종교개혁이라는 과격한 개혁의지는 예배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성만찬이 없는 말씀중심의 예배를 시도하면서 제네바의회에 영향을 미쳐서 성만찬을 년 4회 정도 거행하므로 개혁교회의 전통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4. 성만찬의 재료


먼저 장성우 목사가 연구한 성만찬 떡과 재료에 대한 고찰이란 글을 그대로 인용하여 보면 개신교는 성만찬 떡을 사용함에 있어 성서적 근거도 없이 자의로 필요에 따라서 다양하게 성만찬 떡을 준비하므로 성례전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특히 어떤 사람들은 성만찬에서 어떤 떡을 사용하든지 재료는 상관이 없고 그 의미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기독교가 초대 교회로 부터 유래된 전통과 계승되는 의식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성서적으로 성만찬에서 어떤 떡이 사용되었는가를 연구할 필요성을 가진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아무런 검증도 없이 제과점에서 판매하는 카스테라를 성만찬 떡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앙의 토착화를 위하여서 우리나라의 제례음식인 시루떡과 막걸리를 성만찬의 떡과 잔으로 사용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내 놓을 정도로 교단이나 교회가 임의대로 성만찬 떡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성만찬 떡에 대한 연구는 올바른 성만찬을 집례 하는데 아주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에서 지금 사용하고 있는 성만찬 떡을 레위기의 소제 물로 사용하였던 떡을 전승한 것인가? 아니면 유월절에 사용한 무교병을 전승할 것인가? 혹은 최후만찬의 떡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신약교회의 고유한 떡인가? 하는 문제를 접하게 된다.
특별히 사 복음서를 읽어보면 대체로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의 연장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을 유월절 전날 예루살렘 큰 다락방(눅22:12,13)에서 유월절 만찬의 모든 양식을 갖춘 가운데 떡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무교병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1)구약성경 레위기 2장에 나오는 소제 물을 보면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말고 기름을 섞어 조각으로 나누고 그 위에 기름을 부을 찌니 이는 소제니라. 네가 솥에 삶은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와 기름을 섞어 만들지니라. 너는 이것들로 만든 소제 물을 여호와께 가져다가 제사장에 줄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단으로 가져다가 그 소제 물중에서 기념할 것을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를 찌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소제물의 남은 것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 찌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 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 찌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 찌니라.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 찌니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단에 올리지 말 찌며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 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 찌니라"(레2:4-13)고 하였다.

2)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행한 근거로 추상하는 유월절은 출애굽기 12장 1-20절. 신명기 16장 1-8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유월절(Pesah)은 '고르지 못하다' '위로 뛰어넘다' '목숨을 부지하게 하다'라는 의미로서, 해가 떨어질 때 거행되었으며 이 식사의 음식은 굽는 방식으로 사막에서 유목민들에게 적합한 누룩 없는 떡을 사용하였다. 이는 더운 나라에서 떡을 잘 보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월절에 누룩 없는 떡을 먹었는데 유목민들이 보리 추수 때 옛날 추수했던 것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누룩이 없는 새로운 낟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곤 하였다고 한다.

3). 떡에 나타난 특징


구약의 떡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생각하였는데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무 수고를 하지 않아도 하늘로부터 떡(만나)을 내려 주셨기 때문(출16:4, 느9:15)이다. 특히 유월절에 먹는 누룩 없는 떡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온 역사를 회상하는 것으로서 '고난의 떡'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신16:3). 그리고 누룩을 넣어 만든 떡은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무엇을 '창설'한다는 뜻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부패방지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4). 떡 만들기


떡의 성분은 구약성서에 보면 보통 밀가루나 보릿가루로 만들었는데, 밀가루가 보릿가루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부자들만 밀가루로 만든 떡을 먹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보릿가루로 떡을 만들어 먹었다(삿7:13,왕하4:42).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떡의 양을 늘리기 위하여서 가루에 다른 곡식을 섞기도 하였는데 에스겔은 유배의 상징으로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겔4:9)로 떡을 만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도 하였다.

5). 떡 반죽의 준비


떡 반죽은 밀가루 또는 보릿가루를 물과 섞어 만드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유목생활을 하던 시대에 떡을 반죽하기 전에 누룩을 섞지 않았으며 현대에 와서도 대부분의 베두인족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을 먹고 있다.
그러나 가나안땅에 정착한 후에는 유월절 전날 조그마한 반죽덩어리를 마련했다가 물과 함께 가루를 섞어서 반죽을 하는 관례가 있었다(마13:33, 눅13:21).

6). 떡을 굽는 법


성서에 떡을 굽는 방법은 세 가지로서 가장 간단한 방법은 평평하고 큼지막한 돌 위에 불을 피워 놓고 그 돌을 달군 후 재를 모두 치우고 뜨거운 돌바닥에 반죽을 늘어놓은 다음 그 위를 재로 완전히 덮는 방법으로 떡을 만들었다. 이 방법으로 엘리야는 "숯불에 구운 떡"(왕상19:6)을 먹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좀 더 발전한 방법은 번철(마하 밧(mahabat))에다가 굽는 방법이 있으며(레2:5,6:21. 대상23:29) 또한 냄비(마르헤셋(marheset))에 구울 수도 있고(레2:7, 7:9). 우묵한 구덩이에 불을 피워 놓고 번철위에 반죽을 올려놓은 다음 떡을 구웠는데 이것을 하비팀(habitim,진설하는 떡, 대상9:31)이라고 하였다.
떡 굽는 방법 중에 가장 일반적인 것은 역시 화덕에 굽는 방법이다. 오늘날도 아랍 지역에서는 비슷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7). 여러 가지 떡 모양


대부분 떡은 접시 모양으로서 지름이 45cm정도 된다. 떡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우가(uga)는 '둥굴게 되다'라는 뜻의 어근에서 비롯된다. 기드온의 한 병사는 '보리로 만든 떡 한 덩어리'(삿7:13)가 미디안진으로 굴러 들어오는 꿈을 꾼 적이 있다. 히브리어로는 떡은 할라(halla)로서 '구멍을 내다'는 말로서 떡을 굽기 전에 또는 구운 후에 구멍을 뚫어 만들었다. 그리고 심장 모양의 떡도 있고 오늘날의 떡 모양도 볼 수 있다. 게셀에서는 길고 두껍게 구워낸 떡 조각도 발견되고 직업적으로 떡 굽는 자가 만들어낸 여러 가지의 떡 모양도 있는데 이집트 파피루스는 30여 가지의 떡 모양을 언급하고 있다.

8). 떡의 용도


떡은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는 중요한 생계수단으로서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맞으러 나온 기록이 있고(창14:18) 모든 사람들의 주식으로 떡을 먹었다.(삼상16:20 .룻2:14)

9) 소제 물로서의 떡


구약에서 떡은 소제 물 뿐 아니라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의식용 제물로서 널리 사용했으며 바벨론과 메소포다미아 지방의식에서도 매우 흔히 사용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제사 풍속에도 떡을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으며 히브리인들은 제단에 고운 가루를 드리면서 여러 가지 모양의 떡을 만들어서 바쳤다.

그것은 모두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효 병' 이거나 '기름을 바른 무효전병(무효 전 병,레2:4)이어야 하였으며 또한 번철이나 냄비에 구워낸 것이어야 했다(레2:5,7). 유의해야 할 것은 발효시켜서는 절대 안 되며 소금으로 간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레2:11,13).

10) 신약에 나타난 떡의 재료


떡은 일용할 양식으로서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떡이라고 말씀하였고 자신은 만 백성의 떡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하늘의 양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만나는 참 떡의 예표로서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도 참 생명이 되는 양식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서 누구나 영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 떡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요6:53-56).
떡은 생명의 표징으로서 예수님의 육체적 고난의 표시이며 긍휼의 표다. 이것을 나누어 먹는 것은 화목의 표가 되며 한 식탁에 앉아서 같이 먹는 것으로 서로 화해의 표가 되는 것이다.
떡은 무교병 즉, 누룩 없는 떡이다(마26:17-26, 고전5:7). 이는 성만찬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유월절의 공물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출12:3-10). 그리고 잔은 포도즙으로 발효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 14장 22-25절에는 유월절 예식에 사용한 유월절 양과 쓴 나물에 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최후의 만찬 기록이 유월절 의식과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어떻게 떡을 만들어 주의 만찬에 사용하고 있는가? 천주교에서는 미사 거행을 위한 떡은 밀가루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전체 교회의 전통이고 누룩 없는 떡으로 한다는 것이 라틴 교회의 전통이다. 사제는 제병을 여러 조각으로 떼어 나눌 수 있고 그 크기는 신자들이 먹을 수 있을 만큼 만들어야 한다. 떡을 떼어 나누는 행위는 사도시대에 그 자체가 성만찬을 지칭한 것으로 한 떡을 떼어 나누어 먹는 것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현재는 입에 넣어 녹도록 얇고 둥글게 만들어 신부가 입에 넣으면 녹게 되어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성체의 재료는 떡과 포도주라고 하면서 그 양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떡 재료는 밀알로 된 것이어야 하며 다른 곡식으로 된 떡이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였는데 이는 첫째 그리스도께서 밀로 된 떡을 축성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죽음의 기념으로서 땅에 떨어진 밀알로 비유되었기 때문이며 셋째는 가장 영양분이 많은 밀떡으로 원료로 삼았고 넷째는 재료에 있어서는 누룩이 든 떡이나 들지 않은 떡이나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하였으나 라틴교회에서는 누룩이 들지 않은 떡을 선택한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성체성사를 누룩이 들지 않은 떡을 먹는 축제 첫날에 세우셨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모든 부패와 거리가 먼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 위해서는 이 떡이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다.
동방교회(미국교회는 예외)는 성만찬에서 관습적으로 유교병을 사용하는 반면 서방의 카톨릭 교회 에서는 무교병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관습차이는 서서히 형성된 것으로서 1054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에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영국 국교회에서는 1549년 영국성공회 기도서에서 무교병의 계속 사용을 지시했으나 1552년의 성공회 기도서에서는 명령은 아니었지만 유교 병을 허용했고. 엘리자베스여왕은 금지령을 내려 다시 무교병의 사용을 시행하려 했으나 1661년에 개정된 기도서는 실제로 1552년의 전례 법규를 개정 없이 그대로 두었다. 하지만 추밀원 사법위원회는 전례 법규상에는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떡을 사용하라고 지시된 것이라는 판결을 두 번씩 내렸다. 성공회의 여러 부분들에서의 개정안들은 양자 중에 어느 것을 사용해도 좋다는 것을 명문화하였고 유교 병은 일반적으로 비국교도들에 의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대다수 개신교에서는 아무 것도 들어가지 않은 밀가루에 기름을 바르고 후라이팬에 구워서 만드는데 일부 교회에서 편리성을 위하여서 토스트를 사서 하는 경우가 있으나 최후의 만찬에서 전승된 떡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어느 교역자는 성만찬 떡 재료에 대하여서 레위기 2장에 근거하여 3가지 방법 중에서 굽는 무교병을 사용하고 있는데 레위기 2장 4-7절에는 첫째로 화덕에 굽는 방법(4절) 둘째로 번철에 부치는 방법(5,6절) 셋째로 솥에 삶는 방법(7절)중 후라이팬 위에 기름을 섞어서 소금을 치고(13절)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무교병은 고난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출13:6-10) 카스테라 류의 무교병이 아니라 딱딱한 무교병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면서 히브리민족의 주식은 밀가루 였기 때문에 밀가루로 성만찬 재료를 삼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만찬 떡에 소금을 치는 것이 성서적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은 레위기 2장 13절에 "네 모든 소제 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 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 찌니라" 했으므로 소금을 넣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한다.
특히 고린도 전서 5장 7,8절은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은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한 사도바울의 주장은 유월절 준비를 위한 본질적인 율법을 윤리적 원칙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약 적으로 변형시킨 독창적인 의식이므로 구약의 율법적인 재료 관에 지나치게 억매여서 내적인 의미를 평가절하 하지 말아야 한다고 장성우 목사는 기록을 하고 있다.
본 필자도 요 1장 29절과 36절에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고 계 5장 12절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말로서 구약성경에 속죄 물로 사용되었던 어린양이나 유월절 절기에 사용되었던 어린양등으로 묘사한 것을 보 면 마땅히 이물질(오염되지 않은)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밀가루 빵(떡)을 성만찬의 떡으로 사용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하여 애굽에서 구원한 사건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한 사건은 유사성이 있으며 유월절 절기에 쓴 나물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식후에 마셨던 잔에 대하여서도 포도주를 사용할 것이냐 아니면 포도즙이나 혹은 포도주스를 사용해도 좋은가 하는 다양견해는 혼란을 가져올만한 요소를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 잔은 위생상 각각 따로 사용해야 옳은가 아니면 하나로 된 큰 잔을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또한 우리를 혼란 속에 빠뜨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나 논란할 가치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 상 다양한 이러한 견해 때문에 교파와 교단이 생겨났으며 수세기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그때의 떡과 잔을 우리가 지금 입수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 가? 그러나 각 나라마다 문화가 다르고 삶의 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얼음으로 가득 찬 에스키모 인들이 사는 곳에서는 물과 생선을 떡과 포도주 잔 대신 사용해도 좋은가하는 문제는 설명하기가 정말 곤란하다.
그리스도의 교회 최윤권 목사가 편집한 그리스도의 교회 기본교리 개요에 보면 누룩 없는 떡과 포도즙이라고 그 재료에 대하여서 언급하였고 복음주의 조직신학 하권에 보면 포도즙에 1: 물 1-20까지 희석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윌리엄 바클레이가 지은 성만찬이란 책에 보면 포도주 3:물 2의 비율로 유월절 포도주 잔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통적인 떡과 포도즙을 사용할 수가 없을 경우에는 상징체계를 유지하는 대용품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다양성을 강조하여 이상 야롯 한 대용품을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한 덩어리의 떡과 하나의 잔에 대하여서는 필수적인가하는 문제는 약간의 자유가 허용 된다. 사도바울이 고전 10장 17절에 “한 떡”이란 반드시 전체적인 떡을 지시하지 않는다고 신학자들은 말하면서 하나의 잔도 위생상 개별적으로 사용해도 상징체계를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24년(2002년)간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회한 필자로서는 누룩 없는 순수한 밀가루 반죽을 편의상 후라이팬에 구운 하나의 떡을 준비하는 자가 미리 칼로 자르지 않고 성만찬을 집례 하는 목사가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기 전에 성도들의 숫자만큼 쪼개어 뗀 후에 성만찬을 보조하는 제직(장로 권사 집사)들에 의하여서 나누어주며 포도즙은 포도열매를 포도열매 1:설탕1의 비율로 가을철에 항아리에 담아서 오래 동안 숙성시킨 후에 부드러운 보자기로 짠 포도즙을 사용하고 있으며 너무 포도즙이 너무 탁하고 독할 경우 물 일정량을 부은 후 희석하여 사용하고 있다.

5. 성만찬 집례 자와 참여 할 수 있는 자


성경은 누가 성만찬을 집례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서 특별한 언급이 없으나 2세기 말엽에 성직자만이 성례전을 집행할 수가 있다는 것으로 보편화 되었으나 도덕적으로 자격이 없는 사제는 성례전을 집행할 때 효력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서 어거스틴은 성례전의 효력은 사제의 도덕적인 자격에 의하여서 좌우되지 않고 그 자체로서 객관적인 효력을 나타낸다고 말한바가 있다.
복음서나 바울서신에서 성만찬을 누가 집례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 어떠한 자격이나 규정은 하지 않았으나 성만찬은 교회에 의하여서 집전되어야 한다는 데 이의가 없었으며 예배의식을 감독하고 수행하기 위하여서는 교회로부터 선택을 받고 권한을 부여받은 지도자들인 성직자가 성례전을 집전하는데 수임을 받은 것으로 본다고 하였으며 성만찬을 받을 수 있는 자격에 대하여서도 역시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은 발견할 수 없지만 고전 11장 27절-29절에 보면 연령제한은 없으나 그리스도의 몸을 분별할 정도로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고전 5장 1절부터 나온 말씀을 보면 사회적으로나 교회적으로도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죄에 대하여서“물리치라”고 한 것을 보면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서는 성만찬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추측할수 있으나 이러한 문제도 결국은 개인에게 그 책임이 있음으로 스스로 회개하도록 개인에게 맡겨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신앙이 전혀 없는 불신자에 대하여서 카톨 릭 교회와 루터교회는 화체설과 공재설로 떡과 포도주를 통하여서 객관적으로 성만찬이 그 효력을 갖기 때문에 신앙이 없는 사람이나 자격이 없는 사람도 참여를 인정하고 있는 반면 개혁교회에서는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고 단순히 떡 한 조각과 포도주 한 모금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이 없으며 윤리나 도덕적인 기준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성찬에 참여할 수가 없다는 것에 대하여서 일부에서는 세리와 죄인들과도 식사를 함께 하면서 그들을 영접한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볼 때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를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마 22장 1절에 보면 하인을 보내어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잔치에 청하라고 명령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아무런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도 예복을 입어야 하듯이 성만찬을 집례 하는 자나 참여하는 성도들의 올바른 마음가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합당치 않게 주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범하는 모독죄를 지으므로 분별이 없이 성찬에 참여할 때 스스로 심판을 자초한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6. 성만찬의 횟수


어떤 신학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였지만 마태 마가 복음서를 근거로 하여 반복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누가복음서나 고린도 전서에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반 복령이 있었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행 20장 7절 보면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고 모였다고 하였고 많은 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주일날 예배 시에 성만찬을 거행하는 것은 사도바울이 다메섹으로부터 전통을 받았거나 43-45년경에 안디옥 교회로부터 받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특히 안식일에 대하여서 매우 엄격한 유대인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안식일을 포기하고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 에 예배를 시작한 것은 예수님께서 안식 후 사망의 권세와 마귀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이날은 축제의 날이요 성령께서 오순 절 날 강림하신 의미 깊은 날이기 때문에 행 2장 42절에 보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하였고 고전 11장 26절에 보면 바울은 주께서 “오실 때 까지”성찬식을 거행하면서 그 뜻을 전하라고 하였다.
이러한 관계로 죤 웨슬레는 “나도 장로들에게 주님의 만찬을 매주일 거행할 것을 권한다.”고 하였고 죤 칼빈은 “누구에 의하여서 이 관습이 결정이 되었든지 간에 성찬식을 일년에 한번 거행하는 습관은 마귀의 가장 악한계략이다. 그럼으로 적어도 매주 한번씩 거행하도록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 외에도 챠 레스 스퍼 죤은 3개월에 한번씩 일년에 네 번씩 성찬식을 지키던 것에서 매주일 지키도록 변경된 지 20년이 지났지만 오늘날처럼 주님의 만찬이 엄숙함과 은혜로움에 깊은 인상을 받을 때가 없었다고 하였고 토레이 박사도 ”개인적으로 내가 주님의 만찬에 매주일 참여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였다.”
조동호 목사가 쓴 성만찬 예배란 책 187페이지를 보면 1)주후 30년경에 예루살렘교회는 솔로몬 행가에 모여서 말씀중심의 예배를 드렸고 가정에서 모여 성만찬을 행하였다(행 2:46. 5:12. 42) 2)주후 57년경 드로아 교회는 안식 후 첫날 떡을 떼려고 모였다(행 20:7) 3)주후 56년경 고린도 교회는 자주 성만찬을 먹기 위하여서 모였으나 고전 11장에서 보면 주의 만찬에 질서가 없기 때문에 33절에 보면 먹으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라”고 하였으며 4)고전 16장 2절에 매주 첫날 연보를 하라고 한 것을 보면 매주일 첫날에 성찬식을 거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교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1세기 말엽 로마교회 감독 클레멘스는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 40장과 44장에 감독의 임무를 성만찬을 집례 하는 자로 언급하면서 고유의 임무라고 하였고 이그 나 시우스도 주후 107년경에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 8장에서 감독의 고유한 임무가 성만찬 집례라고 동일한 주장을 하였으며 주후 100년경에 디 다케 14장 1절에 “먼저 여러분의 과실을 회개함으로 여러분의 봉헌 물을 정결케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자신의 날에는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감사 하십이요”하고 권면을 한 것을 보면 초대교회는 애찬과 성만찬이 분리되기 전에 모두가 다 매 주일날 성만찬을 거행하였다는 것이다.
순교자 져스 틴의 글에서도 첫 번째 변증서 65-67장에 2세기 중반 교회들이 주일날 모여서 성서를 봉독하고 집례 자들로부터 설교를 듣고 모두 일어서서 기도를 한 후에 집례 자에 의하여서 빵과 물로 희석된 포도주의 봉헌과 성별의 기도와 분병 례와 헌금과 구제가 이루어졌다고 전하고 있다.

7. 결언


이렇게 성만찬 이해와 갈등은 세례냐 침례냐 하는 문제와 함께 역사적으로 동 서방 교회의 분열의 초점이 되었으며 16세기 종교개혁도 결국은 성만찬 논쟁이 중심이 될 정도로 성만찬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2년 페루 리마에서 합의한 세계교회의 공동체 예식 문은 성만찬을 다섯 가지로 크게 분류하여 설명하였는데 1)성만찬은 인류의 구속을 이루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의 예배이다. 2)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화목제 물 되심과 십자가의 정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예식이다. 3)성만찬은 성령의 임재를 비치는 제사이다. 4)성만찬은 예배를 통하여서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연대하고 수평적으로 이웃과 연대하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피조물들과 연대하는 교제의 시간이다. 大神 對人 對物 관계에서 교제와 친교를 통해 서로 연대하고 인간에게 필요한 신뢰를 쌓기 위하여 만련 된 화해와 나눔의 사간이다. 5)성만찬은 하나님의 나라의 축복과 은총을 미리 맛보는 종말론적 식사이다. 라고 채택하였다.
성만찬은 구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켜오면서 말씀에 복종하였던 것처럼 초대교회부터 매주일 예배시간마다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을 위하여서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고난을 받으신 그 은혜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시행하여 오던 중요한 예식이 오랜 세월동안 많은 신학자들에 의하여서 재해석됨으로 오늘날 불행스럽게도 성만찬이 빠진 불완전한 예배를 드리면서 매주일 강단이 말씀(개신교 설교) 만 있고 행함(천주교 성찬)이 없는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는 갈수록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보편적으로 보면 성도들이 교회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 보는 예배 구경하는 예배로 전락하여 예배를 드린 후에 성도들이 오늘 목사님 설교는 참 잘했다 혹은 못했다는 식으로 평가하면서 신앙생활의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목회자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비록 매주일 거행함으로 형식적이라든지 습관화가 되어서 혹은 많은 시간이 소요가 된다는 등 성만찬을 회피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설교중심의 예배에서 성만찬을 포함한 예배로 마땅히 전환되어져야 한다.
필자도 오래 동안 목회를 하면서 매주일 설교준비 하기가 항상 바쁘고 많은 목화 자들도 설교준비에 대하여서 부담감을 느끼고 있으며 목회의 성공과 실패는 설교에 있다고 많은 중진 목회자들이 강조하기도 한다.
롬 10:14에 바울사도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으며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없이 귀한 생명의 말씀을 어찌 들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이 땅에 생명과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삶을 닮아가는 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교회 선구자였던 알렉산더 캠벨은 1)떡과 잔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성례전이 가져올 수 있는 마술적요소와 중재자의 권위를 배제하고 참여자의 신앙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형식적인 참여에 머물러온 교회의 좋은 반성이 된다. 2)캠벨은 성찬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회상 또는 기념으로 해석한다. 이 화상은 시간적 공간적 차이를 벗어나 그리스도인들은 2000년 전에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고난에 영적으로 참여하여 그와 사귐을 갖는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날마다 새롭게 하는 원동력이요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한 실천적 참여를 요청한다. 3)캠벨은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말을 인용하면서 “최초의 제자들은 사도들로부터 주의 만찬을 먹기 위하여 한 장소로 모이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은 그의 부활을 기념하여 안식 후 첫날을 선택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들과 동일한 신앙 동일한 의망을 가지고 있다. 그럼으로 우리는 들이 했던 것처럼 그를 사랑하고 명예롭게 하고 순종해야 한다.”고 하였다.
성경을 교회와 삶의 유일한 표준으로 삼고 성경이 말하는 곳에서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 침묵해야한다는 환원의 원칙아래 그는 뛰어난 학자였지만 성경을 뛰어 넘어서지 않고 있는 그의 신앙을 참고하면서 오늘도 하나님의 뜻과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성만찬 연구 주의 만찬 쟌 자크 폰 알멘 지음 박근원 옮김 1986년 양서각 출판
현대와 신학 18집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1994년 발행
성만찬 예배 조동호 지음 은혜출판사 1995년 발행
복음주의 조직신학 밀라드 J 에릭슨 지음 신경수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0년 중판 발행
기독교 조직신학 김규진 저 연세대학교 출판 1995년 12판 발행
성만찬 떡 재료고찰 장성우 목사
그리스도의 교회 기본교리 개요 최윤권 편저 환원사 1975년 발행
기독교 교리 배도은 저 백무길 역 1972년 참빛사 발행
예배의 재발견 박은규 저 대한 기독교 출판 1993년 4판 발행
복음과 교회 9집 그리스도 신학대학교 출판부 1997년 발행
천주교회 신앙생활 안내서 천주교 청주교구청 2001년 발행
성만찬 윌리어 바클레이 지음 이희숙 옮김 종로서적 1992년 발행
성찬례 아돌프 아담지음 최창덕 신부 옮김 분도출판사 1996년 발행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