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일곱교회와 종말교회- 종말시대의 교회론 -

하나님아들 2023. 4. 11. 17:46

일곱교회와 종말교회

- 종말시대의 교회론 -

이재현목사

 

※ 본고는 「가나안비즈니스미니스트리」(대표문명준박사)가 주최하는 정기세미나에서 발제한 원고이다(2020.4.2).

서 론

 

소아시아Asia Minor 일곱교회는 현재 교회의 형태를 알게 하는 중요한 계시이다. 종말에 재림하실 예수그리스도를 맞이할 합당한 교회인지, 적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예기豫期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일곱교회는 더욱 지켜야할 신앙적 자산과 배격해야할 요소들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일곱교회는 교회시대 모든 개교회에 해당한다. 기록 당시는 서신을 받은 소아시아 지역의 일곱교회들에 주신 견책 칭찬 권고이다. 그러나 성경으로 편찬되면서, 범위는 전 세계의 교회로 확대되었다. 어느 시대에 존재하는 교회이건 일곱교회에 해당되지 않는 교회는 없다. 일곱교회는 현대교회 모형이자 축소판이며, 특히 재림 직전 7년환난을 당한 종말교회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종말시대의 교회론”인 것이다.

 

예수님은 사도 요한에게 ‘장차 될 일’에 관한 종말 계시를 본격적으로 보여 주시기에 앞서 일곱교회를 통해 교회의 형편을 보여 주고 있다(1:19). 그러므로 이곳에서 언급된 상황과 격려와 책망은 중대한 의미를 주고 있다. 현재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며, 또한 전 3년 반에 이르기까지, 교회시대 땅위에 존속할 지상교회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일곱교회를 통해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듣고 준비하여, 촛대교회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존재이유를 아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배도의 길을 걷는 사악한 음녀교회로 전락하게 된다.

 

촛대교회는 ‘일곱 금 촛대’에서 정립된 용어이다(1:12).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다(1:20). 본고에서 촛대교회라고 했을 때는 의미를 더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를 지칭한다. 그 이유는 이 촛대 사이 즉 이 교회 사이에 예수님이 계시고 거니시기 때문이다(1:13;2:1). 예수님의 관심은 이 세상에서 교회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교회를 통해 일하신다(엡3:10-11;5:23). 그러므로 예수님이 교회들을 향한 명령을 복종할 때 참된 교회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촛대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회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소아시아 교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무려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 계신다(2:5;2:16,21,22;3:3,19). 다음에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지키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 또한 일곱 번이나 강조하여 말씀하셨다(2:7,11,17,29;3:6,13,22). 마지막 때에 회개하고 성령이 교회들에게 전하시는 종말 계시를 따르지 않고 다른 계시와 복음을 쫓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된다(고후11:4;갈1:8). 이에서 떠나고 돌아서서 촛대교회가 되어야 한다(살후3:6;딤후3:5).

 

음녀교회는 종교다원주의를 상징하는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에서 근거한다(17:1). 이 사상을 상징하는 ‘음행의 포도주’에 ‘땅에 사는 자들이 취하였다’고 하였다(17:2).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인 진리를 따르지 않고, 모든 종교의 구원을 주장하는 종교혼합주의에 빠져버린 것이다.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고 하였다(17:15). 이 세력은 전 세계교회에 미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 결과 ‘만국이 무너졌다’는 말씀은 음행이 심판의 주된 이유임을 알 수 있다(18:3). 성경은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기 전에 먼저 ‘배교’가 있을 것을 경종하셨다(살후2:3). WCC 제13차 부산총회 이후 거대한 배교의 해일이 한국교회에 몰려오고 있다.

 

종말시대의 교회론은 촛대교회와 음녀교회로 귀결된다. 추수 때 불신자와 신자를 비유하는 곡식과 가라지가 아니라, 타작 때 성도들 비유하는 알곡과 쭉정이기 때문이다(마3:12,13:25). 지금은 추수의 시기이면서, 타작의 시기이다. 중간이 있을 수 없다. 빛 되신 성령이 임재하지 아니한 교회는 등불이 꺼진 교회로 어둠의 세상에 속한 음녀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배교 세력을 형성하여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가 된다(17:1). 음녀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경종하셨다(2:5). 예수님이 계시지 않겠다는 것이며 역사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시대 교회는 음녀교회에 물들지 말고 촛대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본고는 일곱교회 가운데 칭찬만 받고 책망이 없는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교회, 책망만 있고 칭찬이 없는 사데와 라오디게아교회, 칭찬, 책망, 권면이 함께 있는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로 구분하였다. 본고는 설교문이다. 내용은 일곱교회를 독자의 교회와 비교하도록 하기 위해 강해 형식을 취했다. 마지막 시대 목양과 신앙하는 이들에게 종말시대 교회의 표상을 찾을 수 있기를 축복한다.1)

 

 

본 론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하나님말씀 : 요한계시록 2:8-11,3:7-13

“8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9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10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1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8-11). “7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7-13)

 

 

일곱교회 가운데 오늘 우리가 봉독한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칭찬, 책망, 권면이 있거나, 아예 칭찬은 없고 책망만 있는 교회가 있는데요. 서머나와 빌라델비아는 책망이 없고 칭찬만 있습니다. 이 두 교회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종말교회의 표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탄의 회당 - 자칭 유대인

 

이 두 교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요. 먼저 ‘사탄의 회당’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요한계시록 2장 9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빌라델비아 교회에 요한계시록 3장 9절에 말씀합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사탄의 회당’에 대하여,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은 유대인이지만 자칭이라는 것은 ‘스스로 그렇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실제는 유대인이 아니면서 유대인 행세를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정체가 바로 ‘사탄의 회당’이라는 ‘사탄에 속한 모임’을 말합니다. 유대인은 전통적으로 선민選民의 의미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라는 자부가 대단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약 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과는 무관한 사탄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 사탄의 회당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성도가 아니면서 성도인척하고, 하나님의 선택 받은 무리라고 자처하며, 오늘날 그리고 종말에 교회를 신앙적으로 핍박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은 두로 왕 엣바알의 딸로 아합은 그녀와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시집을 올 때 고향의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등을 북이스라엘 땅에 이주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아합 왕부터, 모든 국민들이 우상을 섬기도록 했으며, 천지에 이방 신전으로 가득 차게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장 2절에 보면 종말에 이세벨이 다시 등장하여, 교회에 나타나 진리를 버리고 거짓을 따르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죽은 이세벨이 부활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여자에 관하여 요한계시록 17장 1절에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가 바로 그녀를 예언한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많은 사람들이 배교에 빠지고, 종국에는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할 자입니다(계8:11;17:2;18:3). 그녀가 주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것을 마시고 취하게 되면 음녀교회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계17:4). 종교다원주의 등으로 침투해오는 이세벨을 막아 미혹 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일곱교회 가운데 두아디라 교회 같은 경우에는 이세벨을 용납한 죄악을 범했습니다. 그들의 활동을 용인하고 방조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한 형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20절에 종말에 다시 등장할 이세벨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한다고 했습니다. 목회자들을 유혹에 빠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행음이란 영적 간음으로 신앙의 지조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진리에서 이탈하고 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 들에게 됩니다. 그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2:20). 목회자들 가운데 배교에 빠질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여자가 바로 이세벨 음녀입니다.

 

사탄의 회당이란 이와 같이 마지막 시대에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로 영적으로 음행하고, 배교하게 하여, 진리를 따르는 성도들을 박해한 자들입니다. 이들을 본문 요한계시록 3장 9절에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사탄의 회당’라고 예수님은 단죄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이 사탄의 회당에 빠진 자들을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리아 교회에 침투한 사탄의 회당들이 ‘네 발 앞에 절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사탄의 회당으로서, 이세벨 음녀의 음행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이세벨의 음녀에 빠진자들 사탄의 회당에 있는 자들을 건져 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 4절에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고 하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의 경종을 듣고, 사탄의 모임에 있던 자들이 그곳에서 빠져 나오게 된 것입니다.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의 진리 사수와 증거를 통해 사탄의 회장에서 빠져 나온 자들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를 지키고 사랑하는지, 사탄의 회당에 빠졌던 자들이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받은 교회는 이러한 진리 사수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 교회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악에 빠진 자들을 건져내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 신앙생활하는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에서 떠나지 않는 믿음을 축복합니다. 요한계시록 14장 4절에 종말의 사명에 대하여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가 바로 앞서 설명한 이세벨 음녀입니다. 그녀가 신앙의 순결을 빼앗은 종들은 이세벨과 함께 거대한 바벨론 종교 세력을 형성하여 많은 성도들로 짐승표 육백육십육을 받게 합니다. 요한계시록 17장 1절에 이들을 ‘큰 음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부터 성도들까지 절대 이사벨의 음행 우상숭배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도 믿고 다른 것을 믿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저와 여러분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주신 분입니다. 이 절대적 진리를 무너뜨리거나 타협하려고 하는 세력들과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다 사탄의 모임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들은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종말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 배반하지 않았다

 

이 두 교회에 두 번째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요한계시록 2장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 환난은 종말에 교회가 당할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주님의 칭찬 만 받은 교회라고 환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꽃길만 걷습니까? 아닙니다. 성도에게도 가시덤불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박해를 입을 기간은 ‘십 일 동안’이라고 하였습니다. ‘십 일’이라는 것은 열흘의 기간을 뜻하기보다, 환난을 당할 기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을 이여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환난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9장 1-12절에 ‘첫째 화’라고 말씀합니다. 종말의 기간인 7년 환난 가운데 전 3년 반 교회가 당할 핍박입니다. 이 때 음녀교회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고 하였습니다(계17:6). ‘장차 받을 고난’이라고 했습니다(10). 이 장차란 종말에 이 땅위에 임할 사건의 기간입니다. 7장 14절에서는 ‘큰 환난’이라고 하였습니다. 12장 13절에는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 사건으로 나옵니다. 9장 3절에 무저갱에서 올라온 ‘황충이’ 악한 영이 들어간 거짓 형제들로부터, 믿음에서 떠나도록 핍박과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고후11:4;갈2:4). 이들 가운데는 부모나 형제들 중에도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 10-12절에 말씀합니다(참고/눅21:17-19).

 

상징적으로 ‘십 일 동안’이라는 이 기간은 9장 5절에 ‘다섯 달 동안’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 시기는 7년환난 중 전 3년 반 끝에서 역으로 5개월입니다(참고/9:12-13,11:3,12-14). 괴롭힘을 당하지만 ‘죽이지는 못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9:5). 반드시 믿음으로 이겨야하는 기간입니다.

 

이 고난에 대하여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요한계시록 3장 8절에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고난 가운데도 빌라델비아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내 말을 지키며’라고 요한계시록 3장 8절에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은 외표 이전에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같이 마태복음 10장 32-33절을 읽겠습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서머나교회와 발라델비아 교회의 고난을 연결해 보면, 십 일이라고 상징된 고난의 때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것은 다른 길이 아니라, ‘내 말을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마태복음 7장 21-23절에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주여 주여 이름을 부르고,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해해도,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 40절에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 그렇게 쉬운 것이 어디 있어요. 예수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거 다 우리가 하는 것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이렇게 질문해 볼게요. 내가 어떤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 여러분 스스로 무엇이라고 말하세요. “내가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해서 이래” 이런 말 한번 쯤 해보셨을 거예요. 요한복음 9장 31절에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바로 믿는 것만큼 실상은 어려운 것이 없는 거예요. 방법이 없습니다. 부단이 무릎을 꿇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 바로 믿는 시작이라 할 수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도는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버리지 않는 다는 말이에요. 지금부터 부단히 무릎을 꿇는 성도들은 종말에 어떤 고난 앞에서도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 명심하십니다. 고난을 ‘십 일’로 상징한 것과 같이 고난은 정한 시간이 있습니다. 지금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은 정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부단이 무릎을 꿇는 자는 끝까지 예수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버리지 않습니다. 아멘!

 

그러면 예수 이름을 버리지 않으면, 어떤 은총을 주십니까? 요한계시록 3장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 즉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어 끝까지 예수를 배반하지 않으면, 예수를 버리지 않으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할 것이 이라고 하였습니다.

 

3주 전 주일 3부 성경공부 시간에 말씀을 가감하는자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말씀을 가감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더하는 자는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계22:18). 재앙을 더한다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재앙을 모두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더하니 심판도 더하게 됩니다. 종국은 ‘둘째사망 불 못’인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였습니다(계20:14).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더하는 이단들에게는 하나님말씀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말씀을 자기 멋대로 더하니, 그에 따른 심판도 더하게 됩니다. 더한다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재앙을 남김없이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어 끝까지, 예수를 배반하지 않으면, 예수를 버리지 않으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할 것이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험의 때에 대하여 예수님은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 3장 10절과 똑같은 말씀을 누가복음 21장 34-36절에 하셨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이것은 종말의 7년 환난 중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후 3년 반 동안의 대환난 당하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계 인구 삼분의 일이 죽음을 당하는 유브라데 전쟁과 적그리스도의 우상을 세워 경배하게 하고, 표를 받게 하며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이는 권세를 가진 적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는 ‘천이백육십 일 동안 양육하기 위하여 예비하신 곳’에서 보호받게 하십니다(계12:6).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지구를 완멸하는 심판에서는 공중 휴거로 건져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마24:31;살전4:17). 그리고 ‘둘째 사망의 해’ 지옥 형벌을 받지 않게 한다고 본문 요한계시록 2장 11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고난은 정한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부단이 무릎을 꿇는 자는 끝까지 예수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버리지 않습니다. 핍박 중에도 주의 이름을 끝까지 시인하는 자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시인해주시는 놀라운 상급을 받게 됩니다(마10:32). 요한계시록 3장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대환난의 때에서 보호하심을 받고 지구의 최후에서도 건짐을 받는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과 네 면류관

 

이 두 교회에 세 번째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있는데요. 면류관입니다. 사탄의 회당 이세벨의 음행에 빠지지 않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바로 면류관입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10). 그러나 이것은 환난으로 끝날 것이 아니요. 상급으로 이어질 것임을 ‘내가 생명의 관을 내게 주리라’고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말씀합니다.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빌라델비아 교회에는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요한계시록 3장 11절에 말씀합니다.

 

이렇게 면류관을 받은 서마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보면서 우리는 이들 교회들이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졌기에 면류관을 받았을까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나 큰 능력을 가지고 면류관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다같이 요한계시록 3장 8절을 봅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이 말씀에 ‘작은 능력’이라고 말씀합니다. 면류관을 받은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은 것만이 아닙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작은 능력’은 특별한 은사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 능력을 말합니다.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동일하게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충성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면류관은 오늘도 충성의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 은사가 강력한 것인가 미비한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는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기준으로 강력하고 미비하고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받은 은사로 하나님께 충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2장 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3장 11절에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델리바 교회가가진 것은 무엇입니까? 8절에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충성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언제부터인가 충성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신앙적으로 충성을 저해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많은데 내가 섬기는 교회는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입니다.

 

“예수님과 바라바”는 제하로 나누었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눅23:18-25). 무리들을 따라 결정한 것인가? 오직 예수님만 보고 결정할 것인가? 그 중 한 단락이 무리들과 주일성수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에서 무리들은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일제히 소리 질렀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으로 적용할 때, 많은 사람들이 벌떼같이 모여드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큰 교회에 다니는 성도님들을 무리들로 모욕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만 명의 성도가 예배하는 교회는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도 가운데 내가 포함되어야하고, 나도 그 교회를 섬겨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지정해주신 교회가 있습니다.

 

신명기 12장 13-14절에 ‘13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14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곳에서 번제를 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은 교회입니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라는 것은 예배를 말씀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교회가 있지만,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 하나님께서는 내가 섬길 교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내가 주일성수할 교회를 지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릴 뿐만 아니라,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교회에서 충성할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에 따른 복을 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섬기는 교회가 분명해야 하고, 그 교회에서 주일을 성수하며, 하나님의 명에 따라, 헌신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섬길 교회를 지정해 주셨고, 그 교회에서 충성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시는 것입니다.

 

중간 정리

 

1.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 모두 사탄의 회당이 침입했습니다. 이들은 자칭 유대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무리라고 자처하며 교회를 신앙적으로 핍박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공격합니까? 이세벨의 음행을 통해 교회의 순결을 잃게 합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리아 교회는 오히려 이세벨의 음녀에 빠진 자들을 사탄의 회당에 있는 자들을 건져 내었습니다. 진리 사수와 증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받은 교회는 이러한 진리 사수와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 교회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부터 성도들까지 절대 이사벨의 음행 우상숭배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섬겨서는 안 됩니다. 이 말은 하나님도 믿고 다른 것을 믿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저와 여러분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주신 분입니다. 이 절대적 진리를 무너뜨리거나 타협하려고 하는 세력들과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다 사탄의 모임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오히려 이끄는 사명을 감당하는 종말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2.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환난 가운데도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할 수 있는 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간단한 것이지만 쉬인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바로 믿는 길은 부단이 무릎을 꿇는 것밖에 없습니다. 예수 바로 믿는 시작이라 할 수 있어요. 무릎을 꿇는 자는 끝까지 예수를 배반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버리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종말의 7년 환난 중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후 3년 반 동안의 대환난 당하지 않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계 인구 삼분의 일이 죽음을 당하는 유브라데 전쟁과 우상을 세워 경배하게 하고 표를 받게 하며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죽이는 권세를 가진 적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는 예비처에서 보호받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지구를 완멸하는 심판에서는 공중 휴거로 건져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둘째 사망,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모든 시험을 면케 해주시는 것입니다.

 

3.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사탄의 회당 이세벨의 음행에 빠지지 않고,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성도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바로 면류관입니다. 면류관을 받은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은 것만이 아닙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작은 능력’은 특별한 은사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 능력을 말합니다. 모든 성도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동일하게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충성을 통해 나타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섬길 교회를 지정해 주셨고, 그 교회에서 충성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에게 면류관을 씌워 주시는 것입니다.

 

 

종말교회의 표상

서머나교회

서머나교회는 빌라델비아교회와 함께 책망이 없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하셨습니다(계2:9). 주린 배를 움켜쥐며,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자를 알고 계십니다.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목하는 자는 인간이 기준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종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종들과 그를 통해 양육된 성도들이 ‘십 일 동안 환난’으로 상징된 교회시대 끝에 당할 대대적인 영적 핍박에서도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의 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계2:10). 오늘도 이름도 빛도 없이 주를 섬기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 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사역자는 누구 앞에 부요한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엡6:13).

 

예수님이 ‘네가 부요한 자’라는 말씀에는 ‘환난과 궁핍’을 알고 계신 것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즉 환난과 궁핍에서 신앙을 지킨 자가 진정으로 부요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 환난과 궁핍을 딛고 일어서는 단련이 필요한 것은 장차 교회에 임할 시험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교회인 중에는 사소한 일들을 명분삼아 신앙에서 이탈합니다. 상처를 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세상에서 배회합니다. 그러면서도 믿음생활을 한다면서 정작 교회에 등록은 하지 않습니다. 공동체를 떠납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환난과 궁핍을 감내할 수 없는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안위를 쫓다보니 영적으로는 가난한 자가 됩니다. 마지막 시대 교회가 통과해야 할 핍박에서 음녀교회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촛대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 환난과 궁핍 중에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승화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관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음녀교회는 자신에게 부요함을 추구합니다. 촛대교회는 하나님에게 부요함을 헌신합니다.

 

빌라데빌아교회

빌라델비아교회는 서머나교회와 같이 칭찬만 받은 모범의 교회입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계3:8). 이 교회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나타났습니다(계3:7). 메시아의 계보요 왕위의 권능인 ‘다윗의 열쇠’를 배반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다(11). 그 날에 받을 영광을 이 패역한 시대에서 살지만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는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13). 또한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하셨다(12). 하나님의 언약과 상급이 확실함을 보여주시기 위해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 등장하셨습니다(7). 또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8).

 

빌라델비아는 ‘형제애’라는 뜻입니다. 요한일서 4장 20-21절에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그에게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애를 뜻하는 빌라델비아는 전도 선교와 연결해야 합니다. 미국의 수도가 워싱턴이지만, 원래 연방정부 수도는 필라델피아입니다. 빌레델비아와 같은 단어입니다. 미국은 초강대국입니다. 지난 100여 년간 부동의 세계 제일 국가입니다. 그리고 하나 미국은 세계 최대 선교사 파송국가입니다. 하나님이 미국에 막대한 부를 허락하신 것은 그 물질로 세계 선교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열이 주셨기 때문에 막을 자가 지금까지 없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세계 최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열어 주신 복을 받으려면 선교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일 제3회 개혁주의 종말적 전 천년설 공개세미나를 개최합니다. 많은 목사님과 성도님들을 모시고 이 시대에 주신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역도 선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주신 선교로 믿고 감당할 때 성도 여러분에게 열어 주실 것입니다. 물질과 형통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면 막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열린 문인 축복의 문이요(마14:19,15:36), 구원의 문이요(요3:17), 예비처의 문이요(계12:6,14;마25:10), 천국의 문입니다(계22:17). 이 문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 이름 배반하지 않은 우리 교회에 예수의 축복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닫을 자가 없습니다. 이다. 이런 소망으로 끝까지 인내하는 종말에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최종정리

 

우리 청아비전교회는 진리를 사수하고 증거하는 교회입니다. 이세벨의 음행, 사탄의 회당에 미혹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건져내는 사명을 감당하는 종말의 교회입니다. 칭찬만 받는 교회에도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정한 기간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예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길은 지금부터 부단히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에게 모든 시험의 때를 면케 해주십니다. 그리고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큰 능력을 가진 자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성하는 자가 면류관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 앞에 부유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선교 등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에 우선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열어 주십니다. 아무도 닫을 자가 없도록 하늘의 복을 열어 주십니다. 이 복을 모든 받는 청아비전교회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데와 라오디게아

하나님말씀 : 요한계시록 3:1-6,14-22.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3:1-6,14-22)

 

 

일곱교회 가운데 오늘 우리가 봉독한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들은 칭찬, 책망, 권면이 있거나, 아예 책망은 없고 칭찬만 있는 교회가 있는데요. 사데와 라오디게아는 칭찬이 없고 책망만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서머나와 빌레델비아 교회와 같이 주님의 칭찬을 받아야 하는 우리 교회는 책망만 있는 사데와 라오디게아와 같은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주님이 거하시고 역사하시는 촛대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악증惡症

 

사데와 라오디게아 이 두 교회에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 첫 번째는 악증입니다. 악할 ‘악’惡, 증세 ‘증’證, 못된 짓,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향하여 2절 후반에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는 15절에 앞부분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교회의 이러한 악증은 칭찬 받을 일이 하나도 없고, 책망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6절에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자신도 잊고 깨닫지 못하고 숨겨진 행위까지도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이사야 1장 12절에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에 해당합니다. 사데 교회는 외형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 2, 3장에 등장하는 일곱교회는 모두 교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인데 주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고 하였는데요.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은 미지근하다는 뜻입니다. 3장 15-16절에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신앙에 ‘토하여 버리라’, 예수님의 비위를 건드림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교회에 이러한 악증을 성전의 마당만 밟는 외형적인 믿음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선 우리들은 겸허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외형적인 믿음과 미지근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전심의 믿음으로 중심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으로 예배하는 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4장 23-24절을 읽겠습니다. “23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찾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아버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요.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만유의 주재자이십니다. 이 두 사이가 하나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만 아니요. 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영이십니다. 로마서 8장 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인간의 영에 임재하십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지만, 성령께서 하나님과 교통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는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하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찾으시는데, 하나님은 영이시니 우리가 영으로 누구의 인도로 성령의 인도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예배자로서 항상 성령의 인도함을 구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할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성령의 인도함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간의 정욕을 버려버리고 산제사로 정결한 제물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되게 해달라고 성령의 인도를 기도해합니다. 강단을 통해 전해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바로 듣도록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로 예배하는 자

두 번째로 외형적인 믿음과 미지근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전심의 믿음으로 중심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과 진리’ ‘진리’로 예배하라고 하십니다. 진리는 두 개 일 수 없습니다. 진리는 하나입니다. 요즘 새벽 강단에 사도행전의 말씀을 이어 로마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복음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말씀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씀한 로마서 1장 1절을 이어, 2절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인 아들 예수를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어떤 분입니까? 다같이 로마서 1장 3-4절을 읽겠습니다. “3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이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분이 누구세요.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로 계획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만왕의 왕으로 세우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인간의 구원 계획과 실행과 완성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어느 누구도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세우신 하나님의 마스터플랜Master Plan에 개입이나 변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라는 말씀, 진리란, 절대자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을 고백하고 드리는 자가,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 예배를 하나님은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데와 라오디게아 이 두 교회의 악증은 성전의 마당만 밟는 외형적인 믿음입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전심의 믿음으로, 중심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실패자는 인생의 실패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을 교통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를 간절히 구하며,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진리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세우신 마스터플랜은 누구도 개입이나 변개할 수 없습니다. 이 절대자 하나님을 신뢰하며 드리는 예배가 진리의 예배입니다.

 

자만自滿

 

사데와 라오디게아 이 두 교회에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 두 번째는 ‘자만’自慢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데 교회를 향하여 1절 후반에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는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사데 교회는 자신들이 살아있는 교회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너희들의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의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너희들의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진단과 다르게 이 두 교회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착각을 한데는 자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만의 또 다른 표현이 자만이지 않습니까? 자만은 자기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사데 교회의 자만

예수님은 살아있다고 하나 죽은 자라고 한 사데 교회에게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고 3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자만에서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그 깨어나는 방법에 대하여, 2절에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깨어’라는 것은 그 행위를 돌이키라는 뜻입니다.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는 것은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죽은 교회 생활에도 영적 생명을 다시 소생시킬 수 있는 그루터기가 있는 것입니다. 가지와 몸통이 다 잘려 나갔어도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어떤 처지에도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신 것은 그루터기는 아직도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움이 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말입니다. 이를 발판으로 딛고 다시 세워 나가야 합니다.

 

딛고 다시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받았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3절에 말씀합니다.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자라 가라’고 베드로후서 3장 18절에 말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히브리서 12장 5절에 말씀합니다. 딛고 다시 세워나가려면, 이처럼 잃어버린 은혜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해야 한다고 3절에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리킵니다. 생명의 양식을 잃어버리면 실상은 죽은 자가 됩니다. 말씀이 꿀보다 더 달 때를 생각하고 회복해야 합니다(시119:103). 여러분 모두에게 말씀으로 치유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체험이 오늘 이 시간 임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며 간직하고 순종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이 100배의 결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눅8:15). 이렇게 지난날의 살아 있는 교회 생활로 돌이켜야 합니다. 또 ‘지켜 회개하라’고 3절에 말씀합니다. ‘지켜’와 ‘회개’는 같은 말입니다. 지킨다는 것은 회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행함을 일컫습니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에오’μετανοεω인데 돌아서거나 길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곧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받은 은혜도 지키고 들은 말씀도 행함으로 생활 속에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만

예수님이 누가복음 17장 27절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는 말씀과 같이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적으로 성공과 물질적인 풍요로 노아의 시대와 같이 시집자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며 즐겼습니다. 오늘 날 많은 대형 교회가운데는 솔로몬의 성전보다 더 화려하고 멋진 예배당을 꾸밀 수 있게 되었습니다. 풍성한 재정으로 많은 일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이상 할 일이 무엇인가’라며 자만이 싹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17절에 이들에게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고 책망하신 후, 18절에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은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한 그들에게 먼저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셨습니다(18). 그러나 교회 생활에서 ‘연단’을 회피한 이들이 대환난에 들어서야 자신의 영적으로 가난한 처지를 알게 되고, 참된 신앙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내가 받아야 할 ‘연단’이라면 감당해야 합니다. 연단이라고 무겁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 연단 가운데도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연단 가운데 있을 때 혼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들 때, 찬송가 337장을 목소리 높여 부르세요.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주님이 내 근심 모두 맡으세요. 연단 때 한탄하지 말고 주님을 부르세요.

 

그리고 주님은 자만한 라오디게아에게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18). ‘흰옷’은 세마포를 뜻하는 것으로 지금부터 7년 환난 중 전 3년 반 동안, 종말의 사명자인 두 증인 예언 사역을 통해 무장된 성도들이 입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7장 9절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섰다고 말씀합니다. 자만하지 않는 자들을 ‘흰 옷을 입은 큰 무리’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후 3년 반 짐승의 통치에서 예비처의 보호함을 받게 됩니다(계7:13-14).

 

또한 주님은 자만한 라오디게아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18). 영안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밝지만 영적인 것에는 맹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대환난에 가서 자신들이 벌거벗은 모습과 곤고하고 가련한 모습을 바라보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맹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치료할 것은 세상 재물에 소경된 사람들에게 주시는 신령한 안약입니다. 다같이 요한복음 9장 39-4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본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여주어야 보는 것이요. 오히려 세상적으로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 맹인이고, 세상적으로 우둔한 것은 자를 하나님은 보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바싹하다고 번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보아야 번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딛고 다시 세워질 기회가 왔는데도,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고 3절에 말씀합니다.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날에 이르면 죄의 값을 받고 지옥의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중간정리

 

예수님은 죽은지 모르고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데 교회의 자만에 대하여 ‘일깨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그루터기는 남아 있으니 이를 발판으로 딛고 다시 세워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은혜 - ‘어떻게 받았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말씀 -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치유된 체험이 지금도 임함을 믿고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행함 - ‘지켜 회개’하록 하였습니다. 회개의 결과가 지키는 것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받은 은혜도 지키고 들은 말씀도 행함으로 생활 속에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데 교회의 자만에 대해, 은혜를 잊지 말고, 말씀 치유를 사모하고, 행함,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만에 대하여, 연단 -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연단’을 피하다간 대환난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명심하십니다. 내가 연단에 있을 때 혼자가 아니라 주님을 찾으세요, 주님이 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흰옷 -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18). ‘흰옷’은 세마포를 의미 합니다. 자만하지 않은 자가 입은 것입니다. 대환난에서 건져주심에 흰 옷 입은 큰 무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에 속해야 합니다. 영안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보이는 것을 밝히 보고 세상적으로 바싹하다고 번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보아야 번영할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만에 대하여 연단을 감당하고 연단을 감당할 때 주님을 찾으면 주님이 함께 맡아 주심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흰 옷을 입은 자로 대환난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영안, 하나님이 보게 하는 것을 보라고 하십니다. 사데 교회의 자만에 대하여 은혜, 말씀, 행함.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만에 대하여 연단, 흰옷, 영안을 심령에 각인해야 합니다.

 

진주眞珠

 

사데와 라오디게아 이 두 교회에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 세 번째는 ‘진주’입니다. 우리가 진주라 할 때 조개의 살 속에 생기는 아름다운 결정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상징적 의미가 있지요.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은 조개의 체내에 침입한 모래알 따위의 이물질 때문입니다. 그렇기 조개로서는 이 진주를 만들어 내는 것이 너무나도 큰 고통입니다. 이런 상징적 의미와 함께 희소성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진흙 속에서 진주 또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진주라는 말을 합니다.

 

주님의 죽은 교회라고 한 사데 교회에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라고 4절에 말씀합니다. 주님의 비위를 건드려 토해 버리겠다고 한 라오다게아 교회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20절에 말씀합니다. 주님의 문들 두드린다는 것은 듣고 열 자가 남아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거룩한 사자

사데 교회와 같이 죽은 교회에도 분명한 것은 거룩한 사자使者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몇 명으로 상징된 소수이지만, 주의 빛을 들고 일어서 어둠을 밝혀줄 이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볼 때, 부름 받은 사람은 확신을 갖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맞다’라고 했을 때 ‘아니다’고 말함으로 길吉한 것을 전하지 않는 흉凶선지자라는 오명을 들은 미가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왕상22:18). 아그랍바왕과 버니게 그리고 베스도총독과 수많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굴하지 않고 쇠사슬에 묶인 두 손을 높이 들고,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재판장을 오히려 압도한 죄 없는 죄인 바울이 그랬습니다(행25:29). 이와 같이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고 예수님과 동행하게 될 것이라고 3장 4절에 말씀합니다. 또한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5절에 이어 말씀합니다.

 

문을 연 자

주님의 비위를 건드려 토해낸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문을 두 두드리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내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19절에 말씀하신 후, 20절에 문을 두드리신다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0장 3-4절에 “3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6절에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을 행해서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이 비유를 통해 더 밝히 알게 되지 않습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20절에 말씀합니다. 주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는 복을 21절에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죽은 교회라고 하신 사데 교회에서도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진주가 있듯이 우리는 이 세상의 진주가 되어야 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어 가는 카멜레온 같이 모두가 변신해도, 우리는 거짓은 거짓이요. 진리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진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비위를 건드린 라오디게아 교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문을 두드릴 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자가 진주인 것입니다. 강단에 선 목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선포된 설교를 통해 성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조개가 자기 안에 들어온 모래알을 품을 때, 우아하고 아름다운 광택이 나는 진주가 만들어 집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모래알이라는 것이 아니에요. 비유에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는 로마서 7장 24절의 말씀과 같이, 어떨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내 자아와 몸부림치며 싸워야하는 시간도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빚어지는 진주라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세상의 어둠 속에 진주가 되어야 합니다.

 

종말교회의 표상

 

사데교회Sardis,헬,스파르다Σάρδεις:실상은 죽은 교회

사데교회는 라오디게아교회와 함께 칭찬이 없는 교회입니다. 이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고 하셨습니다(계3:1). 영적 흑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도둑 같이 이르리니’라고 하셨습니다(계3:3). 그러나 이 절망 가운데도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 몇 명’이 있습니다(계3:4). 예수님께서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눅12:32). 바로 내가 그 몇 명이 되어 마지막의 사명을 감당할 때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라오디아교회와 함께 영적인 암흑으로 음녀교회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안에도 거룩한 사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몇 명으로 상징된 소수이지만 주의 빛을 들고 일어서 어둠을 밝혀줄 이가 있는 것입니다. 촛대교회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교회Laodicea,헬,라오디케이아Δαοδικείᾳ: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교회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해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고 지적하시면서,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계3:15). 예수님께서 그들을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계3:16). 용인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하였지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고 하였습니다(계3:17). 예수님이 회복의 길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계3:18). 칭찬만 있었던 서머나교회가 가졌던 ‘환난과 궁핍’의 연단에서도 신앙을 지킨 가운데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계2:9).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고 하셨습니다(계3:18).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준비된 신앙입니다(마25:4).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계3:18).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이 어리석게 보이나’라고 했습니다(고전2:14).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게 보이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고전2:10).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 했습니다(고전2:13).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최종 정리

 

1.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는 ‘악증’, 못된 짓으로 주님께 받은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았습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고 하나 죽은 자로 외형적 믿음, 라오디게아는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신앙이었습니다. 이에 돌이켜 전심의 믿음으로 중심의 신앙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을 교통하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함을 간절히 구하며 예배드리는 영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진리,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세우신 마스터 플랜은 누구도 개입하거나 변개할 수 없습니다. 이 절대자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진리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외형적인 믿음, 미지근한 신앙이 전심으로 믿음, 중심의 신앙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 시작입니다.

 

2. 예수님은 죽은지 모르고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데 교회의 ‘자만’에 대하여 ‘일깨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그루터기는 남아 있으니 이를 발판으로 딛고 다시 세워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은혜 - ‘어떻게 받았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잃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씀 -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치유된 체험이 지금도 임함을 믿고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행함 - ‘지켜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회개의 결과가 지키는 것입니다.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받은 은혜도 지키고 들은 말씀도 행함으로 생활 속에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데 교회의 자만에 대해 은혜를 잊지 말고, 말씀 치유를 사모하고, 행함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만에 대하여, 연단 -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였습니다. ‘연단’을 피하다간 대환난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명심하십니다. 내가 연단에 있을 때 혼자가 아니라 주님을 찾으세요, 주님이 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흰옷 -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셨다(18). ‘흰옷’은 세마포를 의미 합니다. 자만하지 않은 자가 입은 것입니다. 대환난에서 건져주심에 흰 옷 입은 큰 무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에 속해야 합니다. 영안 -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적으로 보이는 것을 밝히 보고, 세상적으로 바싹하다고 번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게 하시는 것을 보아야 번영할 수 있습니다. 사데 교회의 자만에 대하여 은혜, 말씀, 행함.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만에 대하여 연단, 흰옷, 영안을 심령에 각인해야 합니다.

 

3. 주님이 죽은 교회라고 하신 사데 교회에서도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진주’가 있듯이 우리는 이 세상의 진주가 되어야 합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어 가는 카멜레온 같이 모두가 변신해도, 우리는 거짓은 거짓이요. 진리는 진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진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비위를 건드린 라오디게아 교회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문을 두드릴 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자가 진주인 것입니다. 강단에 선 목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선포된 설교를 통해 성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도 내 자아와 몸부림치며 싸워야하는 시간도 있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빚어지는 진주라는 것을 명심해야합니다. 그래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세상의 어둠 속에 진주가 되어야 합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고 하나 죽은 자로 외형적 믿음, 라오디게아는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신앙이었습니다. 이에 돌이켜 전심으로 믿음, 중심의 신앙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는 것이 시작입니다. 사데 교회의 자만에 대해 은혜를 잊지 말고, 말씀 치유를 사모하고, 행함 지켜 행하라고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자만에 대하여 연단을 감당하고, 연단을 감당할 때, 주님을 찾으면 주님이 함께 맡아 주심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래야 흰 옷을 입은 자로 대환난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영안 하나님이 보게 하는 것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할 때 세상의 불의로 변해도 변하지 않는 진주요. 세상의 어둠 속에 진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우리 공동체 가족들과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영혼들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베소・버가모・두아디라

하나님말씀 : 요한계시록 2:1-7,12-29

“1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12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13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18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19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20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1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22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3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24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5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26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7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8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9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1-7,12-29)

 

 

우리는 지난 두 주간 일곱교회 가운데 책망은 없고, 주님으로부터 칭찬만을 들은 서머나와 빌레델비아 교회 그리고 칭찬은 없고 주님으로부터 책망만을 받은 사데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관한 말씀을 나눴습니다. 금주는 그 외 세 교회인 에베소․버가모․두아디라 교회에게 주님께서 명하신 견책 칭찬 권고를 통해 온전한 종말교회의 표상을 찾고 행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작몽昨夢

 

에베소․버가모․두아디라 이 세 교회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작몽’昨夢입니다. 어제 ‘작’昨, 꿈 ‘몽’夢, “어젯밤에 꾼 꿈”이란 뜻입니다. 지나간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에베소․버가모․두아디라 이 세 교회는 지난 날 주님의 인정을 받는 큰 일을 행했습니다.

 

에베소 교회 작몽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는 2장 2-3절에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칭찬 하셨습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았다고 했습니다(2). 에베소 교회 ‘행위’는 주님의 인정함을 받았습니다. 행위란 신앙적인 결실로 곧 순종을 뜻합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에는 ‘수고’도 있었습니다. 이 말은 교회를 위한 헌신과 봉사를 뜻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인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인내는 소망을 기다리는 일에 필수적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2). 악한 자는 범죄하고도 회개 할 줄 모르는 자들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13절에 이들을 ‘내쫓으라’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용납해 주고 용서해 주어야 할 대상은 죄를 회개하여 돌이킨 자들입니다. 이를 잘 분별해야 거룩과 순결할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의 거짓된 것을 드러냈다’고 하였습니다(2).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금하였습니다. 이들은 성도들에게 쑥물을 먹여 영혼을 죽게 합니다. 여기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 진리에 굳게 서야 합니다. 저들에게는 관대가 적용되어서는 안되고 결연히 맞서 싸워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3). 가장 아름다운 성도의 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같은 일에 인정을 받았고 또 칭찬까지 들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에베소교회에 대하여 큰 칭찬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의 열매였었습니다. 4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주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말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악한 자를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거짓된 정체를 밝혀”내 교회를 지켜냈던 것이 과거에 그러했던 지난 일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의 작몽입니다.

 

버가모 교회 작몽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는 2장 13절에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버가모교회는 ‘내 충성된 증인’이라 칭한 ‘안디바’가 소개되고 있습니다(13). 전승에 의하면 로마는 황제를 신으로 섬기는 것을 거부한 안디바를 기름이 끊는 가마에 집어넣었고, 이를 지켜본 성도들에게 믿음을 저버리도록 강요했지만, 죽을지언정 배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최상의 순교적인 신앙은 예수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인류의 마지막 적그리스도에 의한 교회 박해가 최절정에 이르게 될 때 짐승에게 경배하느냐, 예수 이름을 굳게 지킬 것인가 기로에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4장 9절에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1-22절에 한 가족들 간에도 서로 죽이는데 내어 주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고도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핍박 중에서 끝까지 승리한 비결은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은데 있다고 본문 13절에 말씀합니다. 예수 이름에 자신의 소망을 두는 생활을 말합니다. 예수 이름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삶을 뜻합니다. 이렇게 행한 자들에게 주님은 가장 큰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 안에 이제는 ‘발람’(14)과 ‘니골라 당’(15)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생겨났습니다. 본문 14-15절에 “14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15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고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발람은 구약 니골라당은 신약적인 면에서 나타내신 말씀인데,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람’은 유브라데 강가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로, 메소보다미아에서 유명했던 거짓 선지자요. 술사(점술가)이었습니다(민22:5;신22:5;벧후2:15-16). 그는 십볼의 아들인 모압 왕 발락에게 고용이 됩니다(민22:4). 발락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자기 땅을 지나가게 되자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막강한 세력으로 주변 나라들을 정복하고 가나안으로 행진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술사 발람을 고용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하였습니다. 발람은 발락의 사주를 받고 세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저주를 바꾸어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만드셨습니다(민 22-24장). 하지만 발람은 집요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혹하여, 이스라엘이 음행을 동반한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게 함으로써, 결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 형벌을 받게 하였습니다(민25장,31:16;계2:14-15). 이러한 발람을 신약성경에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과 타협하게 만들어 결국 타락시키는 거짓 교사의 표본이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이단자의 상징적인 이름이요, 또 사악한 우상 숭배자로 지목하고 있습니다(벧후2:15;유1:11;계 2:14). 이렇게 ‘발람’하면 탐심 때문에 참 신앙을 저버린 인물로 그와 같은 비신앙적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니골라 당’Nicolaitans은 버가모와 에베소 교회에 침투한 이단의 일파입니다. 초대교회 집사 니골라가 변절하여 창시한 이단으로 보는 분들도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니골라당은 한번 하나님을 믿은 뒤에는 무슨 행동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며, 도덕폐기론과 무율법주의를 주장했습니다. 즉, 율법의 때는 지나갔으므로 지킬 필요가 없고, 육신은 악이요, 영만이 선하므로 육신으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특히 신자는 은혜로 보호받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해 받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가르쳤던 자들입니다(계2:14-15, 20). 인간의 구원을 영적인 면만 중요시하고 육적인 것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구원은 육체도 받는 것입니다. 전인적인 구원입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요(고전3:16). 예수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빌3:21). 그러나 니골라당에게 몸은 죄를 범해도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교육을 받은 많은 성도들이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백성들이 의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롬6:15). 이제는 몸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신 것입니다(고전6:20).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주장을 펼쳐 성도들을 범죄하게 하였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입니다. 순교자의 죽음을 보고 신앙을 져버리도록 강요했지만, 성도들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한 교회가 발람과 니골라 당의 가르침에 빠진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의 세속화는 급속히 전염됩니다. 이는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가 아닙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유1:4). 이들 ‘거짓 선생들이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벧후2:1). 버가모교회의 작몽입니다.

두아디라 교회 작몽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는 2장 19절에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고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대사회적인 봉사를 위해 복지 ‘사업’ 등을 많이 전개했습니다. 거기에 ‘사랑’도 ‘믿음’도 있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찬사를 받았습니다. ‘섬김’을 위해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 두 번 하고 만 것이 아닙니다. ‘인내’ 또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본 받을 만한 일은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고 한 것입니다(19). 겨자씨와 같은 신앙이었습니다(눅13:19). 예수님으로부터 두아디라 교회가 받은 이러한 칭찬은 오늘날 우리들이 본 받아야 할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차차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변질되었습니까? 2장 20절에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예전에 그렇게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와 나중 행위가 처음 보다 많았었던” 교회에 가장 우려스러운 일이 나타났습니다.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2).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의 아내입니다. 이 여인은 두아디라 땅 두로 왕 엣바알의 딸로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시집을 올 때 고향의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등을 이주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아합 왕부터 모든 국민들이 우상을 섬기도록 했으며, 천지에 이방 신전으로 가득 차게 했습니다. 그런데 종말에 이세벨이 다시 교회에 나타나 진리를 버리고 거짓을 따르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가 바로 그를 예언한 것입니다(계17:1). 이 여자는 음행의 포도주를 마시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할 자입니다(계8:11;17:2;18:3). 그녀가 주는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한 것을 마시고 취하게 되면, 음녀교회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계17:4). 종교다원주의 등으로 침투해오는 이세벨을 막아, 미혹 받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을 용납한 죄악을 범했습니다. 그들의 활동을 용인하고 방조해 주었다는 뜻입니다. 한 형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동성애, 성소자라를 용인하고, 차별금지법을 옹호하고, 종교 통합을 아루르는 WCC, 신앙직제, 시복식, 종교인평화회의, 로마 가톨릭과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회와 인사 중에는 사회적으로도 칭송을 받는 곳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지도자들 중에는 인격과 성품이 중출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의 동일 구원론을 주장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7장 15절에 이들의 정체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하였습니다.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한다고 했습니다(20). 목회자들을 유혹에 빠지게 한다는 말입니다. 행음이란 영적 간음으로 신앙의 지조를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종국은 진리에서 이탈하고 적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 들에게 됩니다. 그들에게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20). 짐승의 표를 받고 얻게 되는 매매의 혜택을 뜻합니다(계13:17). 종말 교회가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예수님의 칭찬 들을 만한 열매를 많이 맺어도, 이세벨을 용납한다면 한낱 물거품이 되고, 오리려 책망을 듣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두아디라의 작몽입니다.

 

중간 정리

 

에베소교회는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았지만, 그것은 예전에 가졌던 과거의 열매들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작몽입니다.

 

버가모교회는 주님이 ‘내 충성된 증인’이라 칭한 순교자 ‘안디바’를 배출했습니다. 그의 순교의 자리를 지켜 보던 성도들에게 대적자들은 믿음을 저버리도록 강요했지만, 죽을지언정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최상의 순교적인 신앙은 예수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에 비신앙을 조장하는 발람과 이단 분파인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버가모교회의 작몽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게 주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어느 교회보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그리고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죄를 범했습니다.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구약의 이세벨은 오늘날 거짓 기독교 단체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 곳이 아닙니다. 이들은 한 형제일 수 없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작몽입니다. 에베소의 작몽 첫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버가모의 작몽 비신앙과 이단의 교훈을 따른 것입니다. 두아디라의 작몽 기독교의 가면을 쓴 이리들을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회복

 

에베소․버가모․두아디라 이 세 교회에 두 번째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회복’回復입니다. 에베소․버가모․두아디라 교회가 예전에 훌륭한 신앙이었다가 이제 패역한 자들이 되었다고, 주님은 바로 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회개하면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회복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2장 5절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찾아야 합니다(4). 과거 가지고 있었던 ‘처음사랑’은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버린 후 소중한 결실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처음 사랑’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막12:3). 이 사랑은 예수님께 이 세상에 오신 후, 예수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요21:15). 또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19:19). 성도의 생명은 사랑에 있습니다. 이 가운데 잃어버린 처음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처음에 예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그 뜨거운 사랑에 희생도 마다하지 않던 그 사랑이 사라진 것입니다. 성도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도 예수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그 수많은 아름다운 열매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뜨거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희생하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종말의 신앙에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에 빠져야 합니다. 그 십자가 사랑이 나를 지배할 때 처음 사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이 내 생애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존귀한 사랑의 힘이 나를 통해 나타날 때, 신앙의 값진 열매들을 맺게 됩니다. 처음 사랑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아는 지식 가운데서 솟아나는 것입니다(엡3:18). 빌립보서 3장 8절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하는 원동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대속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비밀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보화를 캐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 됩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이런 노력을 등한히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그 처음 사랑에서 피어난 모든 열매가 사라져 버리게 된 것입니다. 본문 1절에 예수님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로 나타나셨습니다(1). 자신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의 목자장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명하셨습니다(5). 떨어진 원인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 원인을 발견하는 일이 회개의 첫째 조건입니다. 회개는 그 죄에 대한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고백의 내용이야말로 죄를 범하게 된 원인인 것입니다. 다음에 ‘회개하라’고 했습니다(5). 찾아냈으면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회개라는 말은 죄의 길에서 돌이켜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난날의 믿음 생활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회복될 때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7절에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회복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2장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17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른 악의 열매를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진리의 복음이 아닌 것을 따랐던 데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순종하여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렇게 회복된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17). 만나는 하늘의 떡으로 영원한 생명을 상징합니다(요6:32-35). 그리고 흰 돌은 ‘온 세계에 가득한 돌’로 재림 이후 이 땅에 조성될 천년왕국에 대한 언약입니다(단2:35). 이 돌에 ‘새 이름’이 기록했다고 했습니다(17). 천년왕국에서 불려 질 우리의 새로운 이름인 것입니다. 주님을 재림을 맞이한다면, 그 분과 함께 에덴의 회복인 천년왕국에서 지복을 누리다가, 영원한 나라 천국에 입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속된 언약을 받는 청아비전교회 성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회복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2장 21절에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라는 것은 두아디라 교회에도 분명히 회개 할 기회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24절에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도 이세벨의 교훈을 끝까지 거부하는 진실한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원래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지 않은 자들이요. 또한 미혹을 받았다가 회개하고 회복된 자들입니다. 이들을 향해 24절에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사탄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진리의 말씀만을 끝까지 붙잡고 견고한 믿음으로 주신 사명을 완수해야 합니다. 이들에게 25절에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회복된 자들에게 26절에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27절에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철장’ 쇠막대기입니다. 어떤 악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종말의 예언사역을 감당할 종들을 배출할 교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12:5,13:3). 28절에는 ‘새벽 별을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빛을 비추는 교회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자들을 대한 심판

 

그러나 이렇게 회개하여 회복의 기회를 주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에베소 교회에게는 5절에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였습니다(5), 촛대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네 촛대를 옮긴다는 것은 주님이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본문 1절에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거하지 않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버가모 교회에는 16절에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싸우는 자가 어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분문 12절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는 심판 날의 검을 말합니다(계19:15).

 

회개하지 않으면 두아디리아 교회에는 21-22절에 심판 세 가지를 경종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22절에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세벨입니다. ‘침상’은 죽음의 침상으로 ‘둘째 사망’ 지옥을 말합니다(사57:2;겔32:25;계17:16). 둘째는 22절에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라고 하였습니다. ‘큰 환난’은 7년 환난 가운데 후 3년 반의 대환난 기간을 말합니다. 셋째는 23절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자녀’란 음녀화 된 교회를 말합니다. 이들은 7년 환난 중 전 3년 반 기간 황충이 떼를 이루어 진리를 따르는 흰옷 입은 성도들을 핍박하게 됩니다. 23절에 그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23). 이 또한 영벌의 ‘둘째사망’을 의미합니다(계20:14;21:8).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에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중간 정리

 

그러므로 우리는 이 엄정한 말씀 앞에서 회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교회의 회복, 잃어버린 처음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의 사랑이 넘쳐나야 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시는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의 회복, 비신앙과 이단에 따랐던 것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와 관계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일한 데 빠진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갈수록 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와 함께 영화로운 나라에 입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두아디라아 교회의 회복, 이세벨의 교훈을 끝까지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상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미혹되었더라도 지금 은혜의 시대 회개하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절대 사탄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 교회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그리고 철장을 가진 종말의 사명자를 배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교회의 표상

 

에베소교회Ephesus,헬,에페소스Έφεσος: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

에베소교회에 예수님은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로 나타나셨습니다(계2:1). 앞서는 ‘일곱 촛대 사이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계1:13). 주님의 관심은 이 세상 속에서 교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피 값으로 산 것이기 때문입니다(행20:28). 그러나 교회가 보혈의 은혜, 대속의 은총, 구원의 감격, 십자가의 사랑, ‘처음 사랑’을 버렸습니다(계2:4).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에게 명령한다.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2:5).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계2:5).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어두운 교회입니다. 처음 사랑을 찾은 교회를 통해 예수님은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음녀교회의 출발이 처음 사랑을 버린 것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경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촛대를 옮기신 유럽교회는 오래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지난 2백 여 년 간 촛대교회 사명을 감당했던 미국에 엄청난 사건이 나타났습니다. 2015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합법화 판결했습니다.2) 존 파이퍼John S Piper,1946 목사3)는 “로마서 1장 24-27절은 동성애를 죄라고 명백하게 설명하면서 동성애 승인과 제도화에 반대하고 있다. 오늘 미국 연방대법원이 이 말씀과 똑같이 행했습니다. 동성애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이를 행한 자를 옳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4) 미국교회에서 촛대가 옮겨진 증거입니다. 음녀교회 영역이 넓혀질 수밖에 없습니다. 파이퍼는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고 애통한 심정을 밝혔습니다(시119:136). 심판의 바로미터인 동성애 합법화와 차별 금지범이 우리에게도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자신을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말했습니다(눅23:28). 가깝게는 AD 70년 로마 티투스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초토화된 일을 그리고 종국에는 적그리스도의 핍박에 관한 말씀입니다. 촛대교회는 이를 보고 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들에서 돌이키고 처음 사랑 십자가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들에서 돌이키는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먹게 하시는 것입니다.

 

버거모교회Pergamum,헬,페르가몬Πέργαμος: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은 교회

버가모교회는 ‘충성된 증인 안디바’로 대변되는 순교의 신앙으로 죽음의 순간에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계2:13). 예수님으로부터 최고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발람’과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라 행음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계2:14-15). 이렇게 교회를 타락시키는 자들은 다수가 아닙니다.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경건하지 아니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합니다(유1:4). 동성애, 차별금지법, WCC, 신앙직제, 종교인평화대회, 로마 가톨릭 등에 참여하는 인사들은 수적으로 볼 때 아직까지는 소수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음행이 한국교회에 누룩같이 퍼지게 하고 있습니다(막8:15). 이자들에게 예수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로 나타나셨습니다(계2:12).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하셨습니다(계2:16). 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예리한 검’으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과 일맥입니다(계19:15). 그 시간까지 회개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 이후 이 땅에 조성될 천년왕국의 삶을 상징하는 ‘돌 위에 새 이름’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계2:17).

 

현재도 전 세계에서 한 해 동안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 때문에 살해를 당하는 수가 7,000명에 달합니다.5) 한국교회는 어떠하니까?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1840-1866 선교사 이래 가장 최근에는 배형규목사가 아프카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의해 순교 당했습니다(1866.9.2.-2007.7.2.5). 예수님 보혈이 이 땅에 구원을 주시고 순교자들의 피가 부흥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변절하지 않는 이 정절이 혈관에 흐르는 곳이 촛대교회입니다. 그러나 소수로 시작된 불의가 예수님의 보혈과 순교의 피에서 음행하는 음녀교회로 변질 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은 영생입니다. 이 영생은 보혈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순교의 피를 통해 확장되고 있습니다. 순교의 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절대 비신앙과 이단의 사상을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촛대교회가 해야 할 증거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 날 좌우의 날선 검의 예리한 심판으로 나뉘게 됩니다. 촛대교회는 그 때 휴거와 이후 예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의 삶을 소망해야 합니다. 재림은 순교자의 피에 대한 보응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영화로운 나라에 입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두아디라교회Thyatira,헬,뒤아테이로스θυατείροις:이세벨을 용납한 교회(계2:18-29)

두아디라교회는 종말교회가 경각해야 할 너무나도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행한 예수님의 칭찬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2:19). 한국개신교가 국가 사회복지기금의 70%나 담당하고 있습니다. 타 종교를 압도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선행이 ‘이세벨을 용납’하여 ‘행음’함으로 책망으로 바꿔 버렸습니다(계2:20). 더욱이 음행에 취해버린 이들은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계2:21). 마지막시대 어느 교회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 대사회적인 섬김으로 칭송을 받는 교회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만을 증거하는 교회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서 신앙을 지킨 자들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철장’을 가지고 다스리게 하신다고 했습니다(계2:26-27). 종말의 예언사역을 감당할 두 증인 144000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종들을 배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계12:5).

 

최종정리

 

에베소의 작몽, 행위와 수고와 인내 등을 칭찬 받았지만, 지금은 첫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의 사랑이 넘쳐나야 합니다. 회개하고 회복되어, 그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시는 것입니다. 버가모의 작몽 순교자까지 배출했던 교회이었지만, 지금은 발람과 니골라당의 비신앙과 이단의 교훈을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아닐지라도 주변에 이에 빠진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을 이끌어 회개하고 회복되게 하여, 우리와 함께 영화로운 나라에 입성해야 합니다. 두아디라의 작몽, 그 어느 교회보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 그리고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는 칭찬을 받았지만, 지금 가장 우려스러운 이세벨을 용납했습니다. 기독교의 가면을 쓴 이리들을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의 정체를 바로 알고 끝까지 거부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회복되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그리고 종말의 사명자를 배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총정리

 

1. 서머나와 빌라델비아에 주신 종말의 표상. ① 사탄의 회당(배교) 공격 받지만, 진리를 사수 배교에 빠진 자들을 건져내야 한다. ② 고난을 두려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절대로 예수를 배반하지 말아야 한다. ③ 예비된 면류관을 받게 된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충성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교회를 떠나서는 안된다. 주님은 서머나를 ‘부요한 자’라고 하셨다. 그들의 ‘환난과 궁핍’을 알고 계신다. 그 가운데에서도 변절하지 않는 자가 진정으로 부요한 자이다. 빌라델비아는 지상명령을 따라 유일한 구원자 예수님을 증거(선교)할 때, 하나님이 열어 주심을 보여준다. 그 분이 열면 막을 자가 없다.

2. 사데와 라오디게아에 주신 종말의 표상. ① ‘악증’惡症. 외형적인 믿음, 미지근한 신앙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코로나 19를 통해 참된 예배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게 된다. ②‘자만’自慢.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사데는 은혜, 말씀, 행함. 뜨겁지도 차지도 아니한 라오디게아는 연단, 흰옷, 영안을 심령에 각인해야 한다. ③ ‘진주’眞珠. 사데에는 ‘거룩한 사자’, 라오디게아 ‘문을 여는 자’가 있었다. 이러한 자를 위해서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 ‘너희는 그들(세상)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고 하였다(고후6:17). 그래야 대환난에 떨어지지 않는 자가 될 수 있다.

 

3. 에베소․버가모․두아디라에 주신 종말의 표상. ① ‘작몽’昨夢. 에베소 처음 사랑을 버렸다. 버가모 순교자(안디바)교회에 비신앙(발람)과 이단(니골라당)의 가르침에 빠졌다. 두아디라 기독교의 가면을 쓴 이리(이세벨)를 분멸하지 못했다. ② ‘회복’回復. 에베소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의 사랑, 버가모 철저한 회개, 두아디라 음녀(이세벨)의 교훈 끝까지 거부해야 한다. 지금 은혜의 시대 회개하고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시대가 지나면 용서받을 수 없다. 에베소. 음녀교회 출발이 처음 사랑을 저버린 것에서 비롯되었다. 십자가 사랑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버가모. 예수님 보혈이 이 땅에 구원을 주시고, 순교자들의 피가 부흥의 밀알이 되었다. 죽음 앞에서도 변절하지 않는 순교자가 촛대교회이다. 두아디라. 종말의 사명자 ‘두 증인’6)을 배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7)

 

 

결론

 

지금까지 일곱교회와 종말교회외 관계를 통해 종말시대의 교회론을 설교문 형식으로 기술하였다. 종말 시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 가를 예수님의 칭찬, 경책, 권고를 통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종말교회를 촛대교회와 음녀교회로 구분하여 이 둘의 치열한 영적 전쟁에서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교회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이제 맺으면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촛대교회와 음녀교회 둘 중 하나이지 중간이 없다는 것이다. 서론에서 강조한 바를 다시 재차 강조하는 이유는 마지막시대이기 때문이다. 추수와 타작의 비유는 이를 너무나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곡식’과 ‘가라지’ 그리고 ‘알곡’과 ‘쭉정이’가 그 말씀이다(마3:12,13:25). 이 두 구절을 같은 비유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알곡이 곡식이고 쭉정이가 가라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아예 씨가 다르다. 벼와 피와 같다. 이것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비유이다. 그러나 알곡과 쭉정이는 씨가 같다. 정미를 해보니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있는 것도 있다. 이것은 성도간의 비유이다. 똑같은 신앙을 가진 줄 알았는데 거짓 믿음을 가진 자가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곡식과 가라지는 추수 때에 갈라지고 알곡과 쭉정이는 곡식 단을 별도로 타작할 때 나뉜다. 즉 추수보다 더 마지막이 타작인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추수는 탈곡까지 마쳐야 끝난다.8)

 

지금은 영적으로 볼 때 추수의 시기이면서 타작의 시대이다. 믿지 않는 자에게 고난을 받아 하나님을 떠나는 것보다, 믿는 자간의 시험으로 교회를 떠나는 것이 더 많다. 타작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무섭게 때리고 부숴야 된다. 이와 같은 시련과 고통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의 교회 모습이다.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는 것이다. 알곡은 끝까지 남아 생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살아있는 그대로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잘 믿지 못하고 신앙을 지키지 못한 쭉정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이를 일곱교회와 종말교회의 관계에서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쭉정이가 처할 곳인 ‘꺼지지 않는 불’과 가라지가 거두어져 ‘풀무 불’에 던져지게 되는 것은 같은 지옥을 상징한다(마3:12,13:42). 이러한 엄중한 결과를 놓고 보면서 이 마지막시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종말교회의 두 모습인 촛대교회와 음녀교회는 곡식과 가라지가 아니다. 곡식 가운데 알곡과 쭉정이다. 둘 중에 하나이지 중간이 없다. 성도를 공격하는 ‘사탄의 회당’배교, ‘이세벨’음녀, ‘발람’비신앙, ‘니골라당’이단은 모두 교회 안에서 등장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인하여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끌려’가기에 앞서, ‘공회에 넘겨주겠고 회당에서 매질’할 것이라고 하셨다. 성도가 성도를 핍박하는 것이다. 곡식 가운데 쭉정이가 알곡을 핍박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서 밝힌바와 같이 추수의 때 그 중에서도 타작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둘 구분의 확연하게 드러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막13:9;눅21:12).

 

배교의 미혹에 빠지면 유일한 구원자 예수를 제하거나 외에 더하는 음녀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예비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후3년 반의 대환난에서 핵전쟁과 짐승 통치라는 전대미문의 환난을 겪어야 한다(마24:21). 그러므로 모든 교회는 시대를 초월하여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여야 한다.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은 종말의 징조이다. 인간의 대책을 세울 수 없다. 종말의 징조이면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해야 한다. 재림 예수께서 모든 혼돈과 혼란과 혼동을 해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아담의 범죄로 이루지 못한 “땅을 정복하라”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신랑 예수님을 맞이할 소망을 갖고 신부로 준비하며 살아가야 한다(살전5:23). 이것이 종말시대의 교회론이다.

 

 

脚註>

 

1) 본고에 대한 심구는 이재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일곱교회와 종말교회의 관계」,pp63-80,2018.8.1.PBI.를 보라.

 

2) 2015년 6월 26일

 

3) 베들레헴침례교회 담임자와 베들레헴신학대학교의 명예총장으로 미국의 저명한 목회자이다.

4) “존 파이퍼 목사 ‘동성결혼 합법화, 죄를 제도화한 것’”. 국제부기자. 2015.6.30. http://www.christiantoday.

 

5)국제오픈도어선교회(Open Doors International)가 ‘2017년도 세계 기독교 박해 순위(WWL·World Watch List)’를 발표했다(2017.1.12.). 2015.11-2016.10까지 70개국 이상에서 1207명의 기독교인이 신앙과 관련돼 사망했으며, 1329개 교회가 공격을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사망자 수는 2년 전의 7106명보다 급감했는데 이는 분쟁 지역 통계를 제외했기 때문이라고 선교회는 전했다. 여기엔 북한 시리아 이라크처럼 정확한 기록을 알 수 없는 나라들은 제외됐다. 따라서 실제 사망자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2014.11.1.-2015.10.31.까지는 60개국 이상에서 7000여명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 때문에 살해를 당했다. 이는 전년도와 비교해 3000명 이상 증가한 수치이다.).

 

6) 하나님은 구약시대 ‘여호와 증인’(사43:10), 신약시대 ‘예수증인’(행1:8)을 세우셨다. 종말시대에는 ‘두 증인’(계11:3)을 세우신다. ‘두 증인’은 초림과 재림의 ‘영원한 복음’을 전할 마지막 사명자들이다(계14:6).

 

7) 이상과 같은 일곱교회의 해석을 일반 주해를 통해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차이는 내용이 아니라 적용시기이다. 교회시대에만 국한할 것인가? 종말시대의 관점을 갖는가이다.

 

8) 개역 개정은 알곡과 곡식에 대하여 영어성경(NASB)으로 볼 때 밀을 뜻하는 ‘Wheat’로 동일하게 번역하고 있다. 알곡과 곡식을 같은 존재로 본 것이다. 원문에서도 ‘시투’(σιτον)로 같다. 그러나 쭉정이에 대하여 겉껍질, 왕겨를 뜻하는 ‘Chaff’로 번역하고 있는 반면, 가라지에 대해서는 잡초를 뜻하는 ‘Tares’로 번역하고 있다. 원문에서도 쭉정이는 쓸모없는 곡식을 뜻하는 ‘아퀴론’(ἄΧρον), 가라지는 독보리라는 뜻의 헬라어 ‘지자니온’ζιζάνιον과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그러면 알곡과 곡식 그리고 쭉정이와 가라지는 왜 구분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곡식과 가라지는 추수에 나뉜다(마13:24). 그러나 추수가 끝이 아니다. 곡식은 다시 타작을 해야 한다. 추수 때 곡식인줄 알았더니 곡식도 탈곡 후에 알곡과 쭉정이로 나뉜 것이다(마3:12). 알곡은 큰 의미로 곡식에 포함되지만 곡식에는 알곡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