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영!! 혼!! 육!!

어거스틴의 인식론 양명수

하나님아들 2023. 2. 1. 23:12

「어거스틴의 인식론」

양명수 지음

 

들어가는 말

 

사랑하라 그리고 본대로 하라

Dilige, et quod vis face.

 

첫째, 어거스틴의 인식론 전체를 검토한다. 우선 인식 체계를 ‘느끼다’(sentire)-‘알다’(cogitare)-‘깊이 알다’(intelligere)의 세 단계로 나누고 앎(cogitare)을 칸트가 말하는 오성에 의한 경험인식(Erfahrungserkenntnis)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둘째, 어거스틴이 신앙의 우위, 의지의 형이상학(Willensmetaphtsik)을 형성하게 되는 관점에서 인식 과정을 고찰하였다.

셋째, 그의 인식론에 나타난 이성과 신앙의 통일을 찾아 보았다. 이를 위해서 조명설과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 ‘하나님을 봄’(visio Dei) 등을 신앙과 이성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하였다. 특히 신비주의의 논란이 있는 ‘하나님을 봄’(visio Dei)을 인식의 완성으로 보고, 그것이 정상적인 지적 추구 작업의 결실임을 어거스틴의 문헌을 토대로 입증해 보았다.

 

제1부 어거스틴 인식론의 구조

Ⅰ. 회의주의의 극복

1. ‘속’의 원리

 

밖으로 나가지 말고 네 자신 속으로 들어가라

Noli foras ire, in te ipsu redi.

 

‘속’의 원리야말로 어거스틴이 지닌 독특한 인식론 원리이고, 어거스틴을 진정한 서양 철학의 아버지로 만든 원인이다.

“내면성이 없었다면 어거스틴은 종합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거스틴의 내면성의 원리는 그 이후 서구 기독교 세계에 있어서 진리추구의 거룩한 유산이 되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참이란 불멸하고, 불변하고, 영원한(immortalis, incommutablis, aeternus) 것이었다. 어거스틴이 플라톤에게서 받은 가장 큰 영향도 “진리는 물질이 아님”(nullum corpus esse deum)이다.

그는 사람을 존재론에서 얼과 몸뚱이로 나눈다. “인간은 얼과 몸뚱이로 구성되어 있는 실체이다” 인식론에서는 얼을 속 사람(homo interior)으로, 몸뚱이를 겉 사람(homo exteior)으로 나눈다. 속사람은 깊이 아는 세계(mundus sensibilis)와 관계한다고 보고 둘을 분명히 구별하였다. “속 사람에게는 지성이 주어져 있고 바깥 사람에게는 감각이 주어져 있다는 데에 대해 아무도 의심치 않는다” 얼과 몸뚱이, 속 사람과 겉 사람, 깊이 아는 세계와 겉핥기로 아는 세계의 안팎 구조가 그의 인식론 전체에 깔려 있는 것이다. 결국 ‘속’의 원리란 이러한 존재구조 속에서 인식의 눈을 밖에서 안으로 돌리는 것이다. 한마디로 ‘속’의 원리가 주는 의미는 진리 인식에는 자아 인식(Selbsterkenntnis)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의 확실성은 영혼의 자기 인식에서 발생되며, 사유의 출구를 자아 즉 얼에서 찾게 된 것이다.

넋은 감각의 장소로 외부와 관계를 맺는다. 얼은 영혼의 가장 높은 부분으로 이성이 있고 알고, 깊이 아는 일을 한다.

(1) 인식 주체의 속 싶음(내면성)

모든 아는 행위의 주체는 사람 속의 얼과 넋에 있다. 그래서 인식은 re-cordari, 곧 ‘속으로 들어가는 것’(Er-in-nern)이다.

(2) 인식 객체의 속 깊음

느낌과 구별되는 깊은 앎의 대상은 영원한 바탕, 지혜, 하나님의 말씀, 참된 참이다. 이것들은 모두 느낌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 속에 미리 주어진 것이다.

어거스틴은 참됨과 참(veritas)을 구별한다. “참됨과 참은...서로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정숙과 정숙함은 다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참과 참되다고 하는 것은 구별된다고 나는 믿는다....정숙함으로부터 정숙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정숙으로부터 정숙함이 생긴다. 그렇듯이 어떤 것이 참되다면, 그 참된 것은 참으로부터 나온다.” 참된 것 하나하나는 모두 참에서 나온다. 참이 없으면 참된 것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내면성으로 말미암아 어거스틴의 형이상학을 아리스토텔레스와 대비하여 “속 경험의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2. 사유의 출구 - 확실한 자기 존재 - p 30.

 

알려고 하는 너는 네가 있음을 아는가?

Tu qui vis nosse, scis esse te?

 

3. 감각에 대한 평가

 

감각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잘못은 없다.

Miserabilius fallitur, qui nunquam putat eis sensibus esse credendum.

 

먼저 어거스틴은 감각이 지식이 될 수 없음을 명백히 하였다. 느낌은 앎이 아니다.“ 감각은 끊임없이 변하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 행위이므로 포착될 수 없는 것이고, 심오한 진리 탐구를 위한 바탕을 마련해 줄 수 없다.

사실 어거스틴은 존재 계층을 있음(esse), 삶(vivere), 앎(nosse)으로 나누고 있는데, 앎이 가장 높은 위치이고, 감각은 삶에 속하는 것으로, 지식의 단계에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을 모든 느낌과 감각을 가리키는 말로 ‘봄’(visio)을 즐겨 썼다. “보여지는 사물의 형상과 감각과의 구별은 힘들며, 건전한 이성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감각기관에 투영된 사물의 영상이 바로 봄이다”

감각은 지식이 아니지만, 지식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 영혼의 능동적인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사물의 영상에 앎의 바탕이 규칙을 적용하였을 때, 지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감각은 지식의 재료가 되는 셈이다.

그는 사람의 모든 의식 활동과 경험을 정당히 평가해서 감각적인 삶과 생각하는 삶, 영과 육의 분리를 극복하고 인격의 전체성에 도달했다. “영혼과 육은 모두 인간의 구성 부분이다. 이들이 합쳐져야,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의미를 지닌다. 육이라고 해서 동물적인 것은 아니며 그 모두가 각각 살아있는 인간이다.”

결론적으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감각은 객관적인 세상을 알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감각 능력을 믿었다. 그는 코레인이 평한대로 “플라톤의 정신에 서서, 그러나 신선한 관점과 자료를 가지고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던 경험의 종합을 시도함으로써 인간과 우주에 대해 고전주의보다 전체적이고 명확한 이해를 한 사람인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Ⅱ. 인식론-존재론-가치론

 

존재자체, 그것이 당신의 이름이니이다.

Ipsum esse...hoc est nomen tuum!

 

1. 인식론과 존재론

신 사유에서도 그의 인식론에 존재론이 보인다. 하나님은 ‘참 있음’ 또는 ‘최고의 존재이며 최고의 삶’이다. ‘하나님에게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성서에 있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를 설명하며 하나님을 존재자체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앎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그 안에서, 그로부터, 그를 통해 앎으로 비추는 앎의 빛이다. 그는 모든 것을 앎으로 비춘다. 하나님의 영역은 모든 곳이되, 감각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앎의 빛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앎의 빛이므로 우리에게 인식될 수 있고, 인식의 최종 목표이다. 동시에 그 분은 존재 충만의 목표이다.

 

2. 가치론과 인식론

윤리의 근거는 곧 인식과 존재의 근거이다. 그가 윤리의 근거를 말할 때 쓰는 ‘영원한 법칙’이라는 낱말은 인식과 존재의 근거인 ‘영원한 근거’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자연법칙과 생각을 규제하는 사고의 법치과 윤리적 당위를 규제하는 의지 법칙은 모두 동일한 영원한 근거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제2부 인식론에서 이성의 자리

이성이야말로 사람이 크고 뛰어난 존재임을 잘 보여준다. 감각을 생산하는 넋은 동물에게도 있는 것이지만, 앎 즉 지식을 산출하는 이성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사람을 ‘이성 있는 영혼’이라고 부른다. 흔히 어거스틴의 신비주의라고 일컫는 ‘하나님을 봄’에서도 이성은 살아 움직이고 있다.

 

Ⅰ. 이성의 뜻

 

지식이라는 앎은 모두 이성으로 아는 것이다.

Omina quae ad scientiam cognoscimus, ratione cognoscimus

 

1. 활동 또는 능력인 이성(ad-spectus vel vis animi)

영혼이 인식 대상을 바라 보는 행위(aspicere)를 ratio라 한다.

aspicere는 ad-aspicere로서 사람 얼이 인식 대상과 관계를 맺는 활동이다. 이를 통하여 얼은 진리를 보게 된다(videre)

이성은 인식 주체의 근본 능력으로서의 추리력을 말하기도 한다. 이성은 내적이고 은밀한 힘이로서, 내적 감각을 판단하여 지식을 생산한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아는 모든 것은 이성으로 안다. 그는 이성을 열등한 이성과 우월한 이성으로 나눈다. 이것은 이성에 두 부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이성에 두 기능이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결국 이성은 외부 세계와 영원한 진리의 세계를 매개하는 사람에게 고유한 능력으로서, 외부 세계의 감각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지식을 생산하기도 하고, 가장 깊은 내면자로부터의 끌림을 받아, 깨달음이나 지혜를 생산하여 마침내는 진리를 보게 되는 인식 주체이다.

이성과 구별되어야 할 것으로 추리가 있다. 추리는 이성의 추구 활동이다.

 

2. 진리 자체인 이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영원한 이성, 혹은 영원한 근거라고 표현한다. 창조주의 영원한 이성은 피조물의 이성을 비추고, 피조물은 이성을 통해 진리 자체인 영원한 이성을 볼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이성은 사람에게 이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여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근본 사유와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람의 근본 사유, 즉 이성이다.

 

3. 진리의 관조인 이성(contemplatio veri)

추구하는 ratio는 마침내 봄(visio)에 이른다. 즉 진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때의 진리를 ‘봄’을 ratio라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ratio는 관조에 이르는 정신 활동이다. 대상과 관계를 맺는 ad-spectus와 그 결과인 visio는 구별되어야 한다. 감각 인식에서나, 진리 인식에서나 인식을 가리켜 봄이라고 표현하는 데, 특히 진리의 visio를 가리켜 관조라고 한다.

 

Ⅱ. 지식(Scientia), 열등한 이성의 산물

 

지혜도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et illa quae sapirntia est scientia nuncupari.

 

1. 지식의 정의

notitia 또는 cognitio는 지식이라는 뜻의 connaissance(불), Erkenntnis(독)로 번역되는데, 우리는 이를 ‘앎’이라 하자. 우리나라의 ‘앎’은 ‘알다’는 동사가 명사화된 것으로서, ‘알다’ 즉 ‘인식하다’는 ‘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지식’을 모두 포함하는 좋은 말이기 때문이다. 앎은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에 의해 발생한다.

감각의 세계는 육적이며, 보이는 세계요, 육적인 봄을 통해서 인식되어지는 것인 반면, 예지의 세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요, 정신의 봄에 의해 인식되어지는 세계이다.

인식 대상에 따라 앎도 두 가지로 구별되어, 전자에 대한 인식을 지식, 후자에 대한 인식을 지혜(sapientia)라고 한다.

이성의 기능 구분에 의하면 지식은 ‘열등한 이성’이 감각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산출한 ‘추리적 앎’이요, 지혜는 ‘우월한 이성’이 예지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여 산출한 ‘직관적 앎’이다.

그에게 있어서 영원한 앎으로 이끄는 지혜가 육적인 감각에 의해 경험되어지는 것들로 이끄는 지식보다 우월하게 생각되어졌다. 그리고 지식은 ‘자연 이성에 의한 감각적 앎’이다.

지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여기에는 영혼의 두 활동, 감각 행위와 사고 행위가 개입된다. 즉 경험에 의해 수집된 자료를 이성이 개념에 따라 판단할 때 형성되는 것이다.

 

2. 감각의 능동성

감각은 감각 주체와 객체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감각 대상이 없으면 감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감각이 형성되려면 영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감각 기관에 대상이 형성될 때, 영은 그것의 모상을 형성하여 내적 감각을 통해 형성된 내적 감각을 감각이라 하며, 그 행위를 감각 행위라 한다.

인간을 정신적 존재로 봄으로써, 안-밖, 영-육의 구조에서 언제나 안아 밖보다, 영이 육보다 우월하게 되었다.

내적인식은 물론이고, 외적 인식도 그 주체는 영혼이다. 결국 그는 앎의 근거를 내부에 둔다.

 

3. 생각(cogitatio)

감각은 지식이 될 수는 없지만, 인간은 이 감각을 바탕으로 지식을 만들어 낼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첨 감각을 바탕으로 지식을 생산해 내는 이성의 활동을 생각 또는 사고라 한다.

1) 생각은 인간의 사유 활동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지기도 한다. 인간의 사유활동이라 함은 생각과 깨달음이 되는데, 넓은 의미에서 생각이라 하면 깨달음을 포함한 인간이 사유활동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2) 좁은 의미에서 생각이라 하면 지식을 산출한는 이성 활동이다. 이것은 계층으로 볼 때 감각과 깨달음의 사이에 있는 것으로, 양쪽을 매개하는 구실을 한다.

‘기억, ’내적인 봄‘, ’의지‘의 세 요소 중 ’기억‘이란 기억 안에 보존된 감각의 모상을 뜻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삼위일체에서 기억을 앎을 가능하게 하는 자의식으로 분석하고 있다.

cogitare는 감각의 모상(phantasia)에 ‘영원한 기준’을 적용하는 이성의 활동으로서 하나님의 조명, 이성, 감각에 의해 이루어진다.

 

Ⅲ. 지혜, ‘우월한 이성’의 산물

 

지혜는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앎이다.

Sapientia set rerum humanarum divinarumque scientia.

 

1. 지혜의 정의

지혜는 깨달음 또는 예지의 세계에 대한 앎이다. “보통 지혜는 영원한 앎에 속하고 지식은 감각에 의해 경험되는 것들에 속한다고 구분한다.” 그래서 지혜는 높은 이성에 의한 직관적 앎이다. 지혜를 이와 같이 정의한다면, 지혜는 자연 이성에도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다.

지혜는 ‘예지의 세계에 대한 앎’이란 뜻과 함께 예지의 세계에 대한 앎을 획득하고 난 후, 그것을 중심으로 생겨나는 인식 영역 전체의 ‘새로운 앎’의 체계까지도 시사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한다. “지혜는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앎이다.”

 

2. 조명설

조명설이란 인간의 앎은 인간의 내부에서 하나님의 조명에 의해 가능하다는 인식론의 한 형태이다.

우리는 조명설을 “현재 주어지는 이데아를 이성이 봄으로 앎이 이루어진다는 이론“이라고 정의한다. ‘현재 주어지는’은 조명설의 특징을 인식 객체의 측면에서 본 것이고 ‘보는’은 조명설의 특징을 인식 주체의 측면에서 본 것이다.

그는 “우리의 이성으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는, 이 빛이 능동 이성이다.”라고 함으로써, 어거스틴의 조명설은 인간 영혼이 능동 이성임을 말한다고 보았다.

또한 ‘봄’은 인간 이성이 주체적으로 ‘앎을 이룸’을 가리킨다. 그는 자주 (내면의 깨달음의 눈을 가지고 그것들을 볼 수 있다.)라는 표현을 쓴다. 사실 그는 모든 앎은 인식하는 자와 인식되는 것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생각하는 활동에서 뿐 아니라. 이데아를 보는 깨달음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혼 안에서 발생하는 봄은 .... ‘깨닫는 자’와 ‘깨달아 지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진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데아는 선천주의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성의 능동 행위에 의해 현재 얻어내는 것이다.

인격적인 만남이란 더 이상 이성만이 아닌, 인격 총체의 참여를 요구한다. 인식의 문제는 의지의 문제요, 사랑의 문제요, 윤리의 문제가 된다. 자연상태에서도 하나님의 조명이 있으나, 의지의 전환없이, 자연 이성은 희미한 진리 밖에는 볼 수 없다.

앎의 문제는 사랑이 문제된다. 인식에 의지가 문제된다. 이렇게 볼 때, 어거스틴의 조명설은 인식론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제3부 앎과 믿음

Ⅰ. 믿음: 진리 인식의 안내자

1. 의식, 무의식, 인식 행위 분석

 

나는 인식하고 의지하면서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존재하고 의지함을 알고 존재와 앎을 의지한다.

Sum sciens: et volens: et scio esse me, et velle: et voli esse et scire

 

어거스틴의 인식론이 의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인간 영혼과 인식 행위에 대한 분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하며, 존재함을 알며, 그 존재와 앎을 사랑한다.

 

그는 인간의식을 형상학적으로 분석하여 ‘우리는 존재한다’, ‘우리는 안다’, ‘우리는 사랑한다’의 세 근본 명제로부터 존재와 앎과 사랑의 세 요소를 발견한다. 존재와 앎과 의지가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다. 이 셋은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할 수 없다.

하나님은 존재의 원인이요, 앎의 근원이요, 행위의 법규로서, 이 셋은 서로 삼위일체를 형성하고 있다. 인간의 존재는 존재의 원인으로부터 온 것이요, 인간의 앎은 앎의 근원으로부터 온 것이며, 인간의 의지는 행위법규로부터 온 것이다.

 

  우리가 정신 내면의 기억(그것을 통해 정신은 스스로를 기억한다)과 내면의 앎 (그것을 통해 정신 은 스스로를  안다)과  내면의 의지(그것을 통해 정신은 스스로 사랑한다)에 눈을 돌릴 때, 이 셋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 있었고, 또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듯 모를 듯하다. 그런데 이러한 삼위일체 의 모상은 사실, 오직 기억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억하다’와 ‘알다’와 ‘사랑하다’라는 정신 활동은 내면의 기억과 내면의 앎과 내면의 의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시각은 보여지는 ‘대상’과 보려는 ‘의도’와 그 결과인 ‘봄’으로 구성된다. 감각으로부터 기억속에 저장된 모상으로부터 생각이 이루어지는데, dogitarer에도 의지가 개입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어거스틴은 인식 작용을 삼위일체로 분석하여 인식이 있으려면 반드시 의지의 개입이 있어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인식과 의지

 

우리는 의지 말고 아무 것도 아니다.

Imo omnes nihil aliud 벼므 voluntas sunt.

 

어거스틴이 scientia에서 sapientia에로의 전환을 선언한 것은 인식에 있어서의 의지의 역할을 부각시킨 것이다. 모든 인식은 감각, 생각, 깨달음을 막론하고 animi, intentio, voluntas등의 의지와 이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인식이 이처럼 이성과 의지의 연합으로 이루어지지만, 이성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는 자연적인 빛이며, 중립적인 것이어서, 그것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은 의지이다. 그렇다면 인식의 문제는 곧 의지의 문제이다.

인식의 문제가 곧 의지의 문제로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원죄에 있다. 죄의 시초는 교만이다. “잘못은 사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나오는 것이다” “욕심은 바깥에서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우리 흠이다”. 교만이란 무엇인가?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지어진 인간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고, 의지의 왜곡인 것이다. 무지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 교만이 치유되지 않는 한 자연 이성은 진리를 소유할 수 없다. 자연 이성의 에로스는 하나님으로 향하게 하나, 의지의 왜곡으로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아가페 없이 에로스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왜곡된 의지가 아가페에 의해 교정되어야 한다. 교만이 아닌 겸허가, 탐욕이 아닌 사랑이 요청된다.

까리타스는 그가 플라톤의 에로스와 초대 기독교의 아가페를 종합한 새로운 사랑의 개념이다. 의지가 깨끗해졌을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무엇이 진리를 보는가? 지성이 본다. 그러나 지성이 진리를 보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깨끗해진 삶이요, 올바른 사랑이니 곧 의지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깨끗해진 지성 즉 의지가 치유된 지성이 진리를 보게 된다.

어거스틴의 진리는 인격이신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전적타자로서, 인격을 넘어서 계시는 초월자이시지만, 그 초월성은 밖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안의 안’을 가리키는 것으로, 영원히 내면에 거하는 인격내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의 진리는 사랑을 통해 알게 되며 당신이라고 불리운다.

학자들은 원죄가 교만이라는 데에 일치하는 것 같다. 교만은 의지의 왜곡이다. 이처럼 인간의 타락의 여지를 의지의 영역에 두었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의 영역이 의지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식의 빛으로, 그 빛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를 볼 수 있게 도우시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 개입은 없다.

진리 인식은 인간의 자유요, 바꾸어 말하면 책임 영역이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추구하도록 권면하되, 앎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알도록 도우신다. 그러나 앎을 떠먹여주지는 않는다.

진리 인식은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정도의 문제다. 자연 이성의 상태에서도 희미하게나마 진리에 대한 앎이 있다. 이를 틸리히는 의식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가르침, 개현, 조명은 언제나 인간의 ‘감지’, ‘인식 행위’, ‘관조에 의한 앎’과 상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인간의 노력만큼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내적 인식의 정도는 하나님의 조명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속 눈의 수용 능력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조명은 인간의 빛이신 말씀에의 참여이다. 진리 인식은 참여로 이루어지는 인식이다. 실존 전체의 진리 참여는 곧 앎 뿐만이 아닌 존재와 의지의 참여를 말한다. 앎의 참여가 인식이라면 존재와 의지의 참여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를 행함을 말하는 것이고, 곧 사랑을 말한다. 그의 명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람을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 때문에 선한 의지가 성서에서는 까리따스라고 불리운다.

 

3. credo ut intelligam

 

분명히 믿음이 앎의 시작이다.

Certe rnim fides utcumque inchoat cognitionrm.

 

행함과 의지와 사랑, 이런 것들은 어거스틴의 경험에 의하면 모두 신앙의 문제였다. 신앙이란 진리를 행하는 것이요, 자기에 대한 사랑에서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는 의지의 전환이다. 그러므로 앎에 있어서 의지의 우선성은 곧 신앙의 우선선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는 말한다. “Crede ut intelligas”(알려면 믿으라)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첫째, 믿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그는 그리스의 지성 몽유증세에 반대한다. 그는 이성 만능에 반대하여 신앙을 제시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살고 신앙으로 걷는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수록 그 만큼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알려진 자는 먼저 믿어야 한다. 신앙이 먼저 오고 앎은 그 뒤에 온다. 물론 신앙이 있기 전에 먼저 이성이 있다. 진정한 앎이 있으려면 신앙이 선행되어야 한다. 신앙이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신앙의 도움을 받아야 이성은 본래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앎은 신앙의 삯이다. 신앙은 노력이며 앎은 그에 대한 상급이다. 신앙을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삯은 믿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믿으라. 그래서 앎을 획득하라. 믿음이 앎에 선행되어야 한다. 앎은 믿음의 업 적이다. 선지자가 명백히 말했다. “믿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믿음은 언제나 앎의 시작이다. 그러므로 알기위해 믿으며, 믿기위해 아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추상적인 보편자가 아닌, 구체적 개별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야말로 이성을 깨끗하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진정한 앎의 시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개자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통해서만 인간의 로고스 물음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실존적이고, 전인격적인 것으로 의지의 변화를 의미했다.

그는 요 6:29을 통해서 신앙의 본질 말한다. 믿음은 credere ei 가 아닌 credere in eum이다. 즉 신앙이 인격의 만남임을 밝히고 있다.

둘째, crede ut intelligas는 ‘믿음의 종국은 앎이다’는 차원에서 이해되야 한다. 믿음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궁극 목표는 믿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요 아는 것이다.

“내 말을 믿기 위해서는 말씀을 이해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먼저 믿으라.” 신앙은 이성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다. 믿음으로 인해 이성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은 보기 위한 조건이며 궁극 목표는 믿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삶에 거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비육적이며 변치않은 것에 대한 앎을 소유하고 관조에 다다르기 위해서이다.

 

Ⅱ. 인식의 완성: 하나님을 봄(visio dei)

 

지금은 믿지만 그때가 되면 알겠나이다.

Hoc nunc credimus, tunc etiam cognoscemus.

 

visio dei는 하나님을 직관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본질을 직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유사성만이 현현된다고 말한다.

의지 전환이 수반될 때 visio dei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visio dei는 자연상태에서 불가능했던 것이 의지의 전환으로 말미암아 교정된 이성이 신을 직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인식 계층을 셋으로 나누고 있다. 육의 봄, 넋의 봄, 깨달아 봄인데, visio intelligibilis란 시, 공을 초월한 세계를 보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정신 자체와 선, 애, 기쁨, 평화 등과 하나님 자신을 듣고 있다. 하나님이 정상적인 인식 질서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

visio dei가 신비주의임을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버틀러는 어거스틴이 기독교 신비주의를 말하고 있다고 보고 그 근거를 다음 다섯 가지로 들고 있다.

1) 하나님이 contemplatio의 상대가 되고 있다.

2) 신비적 연합(The mystic union)

3) 열광적 연합

4) 체험의 일시성

5) 체험의 결과 신앙 진리를 명백히 깨닫게 됨.

어거스틴의 신비주의는 언제나 이성과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 신비주의이다.

결론적으로 visio dei는 존재 충만과 함께 일어나는 인식의 완성으로서 지성과 의지가 있는 모든 인간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다.

 

Ⅲ. 맺는 말: 의지의 우선성과 이성에 대한 평가

 

당신 안에 쉴 때 우리는 복되고 우리 마응은 평안을 얻나이다.

Fecisti nos ad et inquietum est 책 nostrum, donec requiescat in te.

 

1. 의지의 우선성

본질은 힘에 우선한다. 그러므로 행동은 언제나 존재에서 나온다. 이처럼 의지에 대한 존재의 우위라는 도식 속에서 의욕은 언제나 앎의 결과다.

그는 오히랴 모든 의지가 앎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인식 행위 즉 감각과 사고와 깨달음에 의지가 필수 요소임을 분석해 냈다.

의지의 우위가 인식의 전 영역에 해당된다는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고찰될 수 있다. 첫째, 전인격적 전환으로서의 신앙은 자연 이성을 교정하여, 실존 이성을 본질 이성에 다가가게 한다. 이렇게 하여 교정된 이성은 우리에게 ‘세상과 나’에 대한 전혀 새로운 앎을 가져다 준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앎’ 이다.

 

2. 이성에 대한 평가

진리로 향한 사유 과정에서 주체는 언제나 이성이었다. 이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일하지는 않아 ‘동등한 형상’은 아니지만 유사성을 지닌 ‘유사한 형상’이다. 유사한 형상인 이성은 언제나 하나님께 참여하는 성향과 과제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성의 역할은 타락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철저히 분해되었다 할지라도, 일그러진 채 모호한 모습으로 혹은 명백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형상은 언제나 존재한다.” 타락 이후의 실존 이성은 그 깊이를 잃고, 왜곡된 채로 모호성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 기본 구조를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다.

신앙은 이성을 넘어서지만 반이성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아는 사람은 믿는다” 이렇게 볼 때, 이성과 진리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다. 앎은 신앙안에서 완성되지만 신앙은 앎이 되어야 한다.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으며, 믿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앎을 추구하는 믿음은 믿음을 추구하는 앎과 분리되어 생각되어질 수 없다.

존재와 삶의 일치, 삶과 앎의 일치, 앎과 축복의 일치! 하나님에 대한 이 진술은 곧 어거스틴의 꿈이었다.

  ‘본질과 실존의 일치’(non aliud essentia, aliud existentia).

  ‘앎과 행함의 일치’(non aliud notitia, aliud actio).

  ‘앎과 축복의 일치’(non aliud notitia, aliud beatum).

 

평가

이상으로 어거스틴의 인식론을 정리해 보았다. 그런데 몇가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첫째, 어거스틴이 말하는 자기 안에서 진리를 찾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과연 자기 내면안에서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 아님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매개체란 의미인지 잘 알수 없다. 만약 사람의 마음이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면 신학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둘째, 그는 진리 인식의 주체를 하나님이 아닌 인간에 두는 것처럼 진술한다.

"하나님은 인식의 빛으로, 그 빛 속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진리를 볼 수 있게 도우시는 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직접 개입은 없다.

진리 인식은 인간의 자유요, 바꾸어 말하면 책임 영역이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추구하도록 권면하되, 앎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알도록 도우신다. 그러나 앎을 떠먹여주지는 않는다."

진리를 인식하는데 하나님은 진리를 도우시기만 하고 직적 개입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진리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린다. 또한 진리 인식이 인간의 자유고 말씀이 우리에게 앎은 주지 못한다는 것은 진리 인식의 주체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과연 어거스틴이 정말로 진리 인식의 주체를 인간에게 두는 것인지 아님 진리 인식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진술한 것인지 분명치 않기에 수용하기 어렵다. 또한 이러한 진술은 그가 은총의 박사로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강조한 것과 대치되는 것이 되므로 면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셋째, 그는 하나님이 정상적인 인식 질서 속에 들어있는 것이다고 표현한다. 하나님은 인절대 인격이신데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크나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문자그댈대로 수용한다면 범신론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의 정확한 이해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하겠다. 

넷째, 그는 타락 이후의 이성의 기능에 대해서 꽤 긍정적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성의 역할은 타락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철저히 분해되었다 할지라도, 일그러진 채 모호한 모습으로 혹은 명백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형상은 언제나 존재한다.” 필자가 볼때 위의 진술에서 본 타락 이후에 이성은 전통신학이 말하는 것과 다르게 한층 긍정적인 조망을 하는 것 같다. 전통신학은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이 알아보기 힘들정도로 파괴된 것으로 진술한다. 즉 남아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아주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다. 그런데 의문은 그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타락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유독 이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전망을 말하고 있는 것은 과연 전통신학과 합치하고 있는 것인가?하는 문제에 대해서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넷째, 그를 왜 인식론에서 말씀을 통한 조명하심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 것일까? 언급을 아예 않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 강조하고 있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강조가 되지 않는 부분이 그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인식이 과연 기독교 신비주의라고 명명하여 부정적인 신비주의와 구분을 하기에 미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서는 인식에 관한 체계를 꽤 명쾌하게 진술하고 있다고 본다. 후련하게 다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철학과 비교하면서 인식에 관한 기본적인 이론적 체계를 세울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하나님을 믿고 안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의 작용에서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 한줄기 빛을 던져주어서 좋았다. 단 어거스틴에 있어서 철학은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였는가 하는 문제는 좀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며 평가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