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논문 소논문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신앙론 유정우

하나님아들 2022. 9. 24. 15:30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신앙론

 

                                  유정우

                           <평택대학교 신학과>

 

               Ⅰ. 서     론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은 이 문답서가 작성되었던 지명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문답서는 우르시누스 (Ursinus)의 라틴어 초안과 올레비아누스(Olevianus)의 독일어 초안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그래서 두 초안의 특징이 모두 포함되었다. 전자의 문답식 명확성과 간결성 그리고 후자의 감정적 따스함과 유연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각자가 지닌 역량 이상의 요리문답이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요리문답을 작성할 때 어느 정도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또 칼빈, 라스키, 불링거의 요리 문답서를 자유로이 참작했다.1) 이 요리문답은 칼빈 신학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프레드릭 선제후는 1562년 12월 이 요리 문답서를 수정하고 승인받기 위해 목사들과 교수들의 총회에 이 작업을 위임했다. 그리하여 1563년 초에 "팔레티네이트 선제후의 지역에 교회와 학교에서 가르칠 요리문답, 또는 기독교 교훈집 "이란 이름으로 독일어로 출판되었다.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청소년들의 종교 교육을 위한 목적과 교회의 신앙을 고백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이 요리문답은 요리문답이라는 점에서 볼때 걸작이다. 이 요리문답을 능가하는 요리문답은 아직 없다. 한가지 결점이라면 대답들이 어린아이들이 이해하고 암기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길다는 점이다. 이 요리문답은 성숙한 장년을 염두에 두고 작성했다.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특징은 제 1문에 전체 내용과 중심 사상과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 내용이 심오하고 위로가 되며 문체가 아름다워 암기하면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이다. 이 요리문답 안에는 기독교가 계율을 부과하거나, 지적인 사색을 요구하거나, 외적 의식 체계만을 갖춘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종교이며,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는 종교라는 점이 복음적이고 실제적이며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다.4)

제21문의 복음적 신앙의 정의는 이 보다 더 좋은 정의를 찾기 어려울 만한 것이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속에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모든 진리를 받아들이는 확고한 지식일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복음으로말미암아 내 안에서 역사하시사, 다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오직 은혜로,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값없이 죄 용서와 영원한 칭의와 구원을 허락하여 주심을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이다."5)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머리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마음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요리문답은 믿음으로 가득 차있다. 그 사상들은 성경적이고 정통적이며 성경적 증거들로 입증을 받고 있다. 어조는 교훈적이며 헌신적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단지 한권의 책에 머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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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개혁교회와 함께 계속 살아 움직일 것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21문과 22문에는 신앙에 대해 묻고 있다. 제 21문에는 "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 그리고 제 22문에는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를 묻고 있다. 이 글은 요리문답 제 21문과 제 22문에 국한하여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주석에 의거해 신앙론을 이해하려 한다.

     

               Ⅱ.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1)저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우르시누스(Ursinus)와 올레비아누스(Olevianus)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독일의 팔레티네이트 (the Palatinate )지방의 영주(領主) 프레드릭 3세의 주도아래 이 두 저작자들에 의해 작성되었다. 이들은 종교개혁의 제 2세대에 속하는 독일인들로서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고수하다가 추방되었다. 우르시누스는 고전(古典), 철학, 신학에서 매우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적인 취미와 보기 드문 교수적 자질, 그리고 뜨거운 경건미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열정적 모습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1문과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복된 확신은 세상을 다 준다 하여도 바꿀 수가 없다."고 한 그의 말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온순한 탐구가 였다. 그의 주된 저작으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외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해설서 (Corpus doctrinae orthodoxae )와 루터파의 일치 신조의 공격에 맞서 내놓은 개혁교회 신조의 변호서가 있다.6) 

우르시누스는 메랑히톤(Melanchthon)에게 7년동안이나 배웠고, 불링거(Bullinger)와 순교자 피터(Peter Martyer), 제네바의 칼빈(Calvin)과 베자(Beza)를 알았고, 학문적인 교류도 빈번히 가졌다. 그러던 중 1560년 하이델베르그에 신학교수로 오게 되었다. 올레비아누스는 파리, 부르쥬, 오를레앙에서 고전어들을 배웠고 제네바와 취리에서 신학을 배웠다. 그 역시 우르시누스처럼 스위스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에게 수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복음주의를 전파하였다고 투옥되었다가 1560년 프레드릭 3세에 의해 하이델베르그 대학 신학부로 초빙되었다.

본 요리문답이 루터교와 개혁주의 신학을 공통 유산으로 한다고 보이지만, 위의 두 저작자의 교육과정이 개혁주의의 전통에 더 많이 노출되었다는 사실로 보아 개혁교회적 신학 노선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7)

             

     2) 성격과 목적

 

하이델베르그 대학은 루터신학, 멜랑히톤신학, 칼빈신학, 나아가서 쯔빙글리신학이 공존하면서 신학논쟁을 하는 분위기였다.이런 상황 속에서 프레드릭 3세는 여러 반대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칼빈등) 신학노선을 택한 최초의 독일 영주였다. 이 영주는 팔레티네이트 지방의 종교적 통일이라는 정치적 의도 이전에 본인 스스로가 이 개혁 전통을 사랑하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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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본 신앙고백서는 루터 신학적 요소를 어느정도 지니면서 다분히 개혁주의 노선을 표방한다. 실제로 두 저작자는 칼빈, 라스키, 및 불링거의 요리문답을 사용하였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두가지 목적을 갖는다. 그 하나는 교회의 신앙고백이요, 다른 하나는 기독교 교육이다. 이 요리문답은 개혁교회의 요리문답들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모든 신앙고백들 중에서 가장 보편적이요,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독일 교회는 이 요리문답을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 요리문답은 칼빈적인 신학을 온건하게 받아들였다. 예컨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이중 예정론에 입각한 유기된 자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요리문답의 정신은 제 1항목에 나타난 바 종교개혁의 복음 선포에 의해서 특징지워졌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의 진수는 복음이라는 것이다.9)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사도 신경을 교리적 해석의 기본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 요리문답은 종교개혁 사건 직후에 작성된 16세기의 신앙과 신학의 소산이었다.

 

     3) 내용 및 분석

 

이 요리문답은 로마서의 순서에 따라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Ⅰ.인간의 죄와 비참 (문 3-11, 롬 1:18-3:20 )

    Ⅱ.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문 12-85, 롬 3:21-11:36 )

    Ⅲ. 구속받은 자의 삶 (문 86- 129, 롬12:-16: )10)

첫째부분의 처음 두 물음은 서론이다. 둘째 부분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제목아래 사도 신경을 취급한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가장 중시한다. 셋째 부분에서는 구원얻은 성도의 삶에서 꼭 필요한 기도에 대해서 말한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서 주옥같은 내용은 신앙의 정의(문답 21 ), 섭리( 문답 27과 28 ),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리스도인은 무엇인가 ?(문답 31과 32 ), 그리스도의 승천(문답 49) 및 이신칭의(문답 60)등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독일 개혁주의 교회가 주로 사용하고 복음의 경험을 강조한다.11)

이상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신앙론은 하이델 베르그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르시누스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주석서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을 밝혀둔다.    

 

               Ⅲ.우르시누스의 신앙에 대한 정의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21문항에는 "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 묻고 있다. 그 물음에 대답은 "참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을 내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확실한 지식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복음을 통하여 내 안에 창조하시는 전심적 (全心的)인 신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근거하여 죄용서와 영원한 의와 구원을 은혜로 말미암아 허락하셨으니, 이것이 복음입니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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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확실한 지식"이란 표현과 "전심적인 신뢰"라는 표현인데 이것은 개혁교회적인 신앙에 대한 정의이다. 이 정의는 칼빈의 신앙의 정의와도 일치한다.12)

신앙의 정의를 설명하는 우르시누스의 정의에서도 "일반적인 정의에 의하면 신앙은 사실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며 결론에 대한 지식이다."라고 한다. 그 사실과 결론에 대한 지식이 신앙이다. 그 사실과 결론은 진실한 증인의 증거에 동의하고 믿지 않을 수 없는 대상 곧 그 대상이 하나님, 천사 또는 사람이거나 경험에 대한 사실과 결론에 대한 지식이다.13)

그런데 우르시누스는 신앙을 일반적으로 둘로 나누면서 하나는 신적인 일(divine affairs)을 믿는 신앙과 인간적인 일(human affairs)을 믿는 신앙으로 이해하고 무엇이 신적인 일에 대한 신앙이며 신학적 신앙인지 질문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신앙에 대한 정의는 어느정도 더 정확하게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한 신앙의 여러 형태를 그 정의에 포함시켜야 한다.14)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면 신앙은 성경에서 이루어진 하나님,하나님의 뜻, 하신일, 그리고 은혜에 대한 계시에 대한 확실한 지식 또는 그 지식에 대한 동의이다. 그러한 지식으로 우리는 거룩한 증거에 신뢰한다.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한다. 하나님은 율법과 복음으로 자신에 대해 선언하고 설명한다. 이 율법과 복음으로 교회에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다.15)

때로는 신앙이 교회의 교리로 간주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알려주는 것을 신앙으로 간주한다. 사실 이것은 신앙에 필수적이다.이것은 기독교 신앙, 또는 사도적 신앙이라고 할때 처럼 필수적이다. 신앙은 옛날 약속의 성취에 대해 사용되기도 하고, 약속 자체로 사용되기도 한다. "믿음이 오기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

이상에서 신앙의 정의를 살펴보았다. 신앙은 지식이다. 기독교 신조는 인식에 토대를 둔다. 신조가 외워지는 곳에 다시 인식이 생길 것이다. 바로 이해된 신앙은 깨달음이다. 신앙은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앙은 신뢰이다. 우리는 신조를 " 크레도" ( Credo ) " 내가 믿습니다" 에서 " 내가 ........을 믿습니다." ....을 ( an)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 "크레도"는 이 "을",곧 신앙의 대상을 설명하고 그것에 의하여 우리의 주체적 신앙이 성립하는 것이다. 신앙은 신뢰이다. 그의 약속과 지시를 따르며 의지하는 신뢰이다.

다음의 신앙의 종류를 이해하는 것도 신앙의 정의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Ⅳ.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종류

 

성경은 4가지 종류의 신앙을 말한다. 그 4가지 신앙은 다름 아닌 역사적 신앙, 일시적 신앙, 기적의 신앙, 의롭게 하는 신앙 (또는 구원하는 신앙 )이 그것이다. 우르시누스는 이 신앙의 차이를 정확히 정의 내리므로 신앙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하려고 한다. 그러면 그가 설명하고 정의 내리는 신앙을 차례로 다음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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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역사적 신앙

   

이 역사적 신앙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 신앙이다. 다시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믿는 신앙이다. 아울러 더 자세하게 설명하면 이 신앙은 거룩하게 전해지고 계시된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고 믿는다. 이 신앙은 하나님이 하였고, 지금 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후에 할 것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한 것을 단순히 아는 지식이기 때문에 역사적이라고 한다.16)

이 신앙은 진리를 순전히 지성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도덕적 영적 목적이 없다. 도덕적이며 영적 진리를 제외한 역사적 사실이나 사건만을 포괄한다거나 오직 역사적 증거에 이 신앙이 의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신앙은 동시대적 사실이나 사건들과도 관련되기 때문이다(요 3:2 ). 이 신앙은 인격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어떤 역사를 받아들이듯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신앙은 전통, 교육, 여론, 성경의 숭고한 도덕성에 대한 통찰등의 결과요, 성령의 일반 사역에 수반되는 것이다. 성경적이지만 심령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신앙이다(마7:26,행 26:27,28,약 2:19 ). 이는 인간적 신앙이요 신적인 신앙은 아니다.17)       

성경은 이 신앙에 대해서 말한다. "내가 산을 움직일 믿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 말씀은 의롭게 하는 믿음을 제외하고 다른 종류의 믿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귀신도 믿고 떠느니라", "시몬이 또한 믿었다" 곧 그는 베드로의 교리가 진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구원하는 믿음을 갖지 않았다(고전 13:2,약 2:19,행8:13).

이러한 우르시누수의 설명을 보면 역사적인 믿음은 믿음의 한 종류이지만 의롭게 하는 믿음이 아님을 분명히하여 구별함으로 신앙에 대한 이해를 더 분명하게 하고 있다.

   

     2. 일시적 신앙

   

이 신앙은 교리들에 대한 승인이다.18) 이 승인은 신앙고백과 기쁨을 동반하는 교회의 교리들에 대한 승인이다. 그러나 진정한 또 영속적인 기쁨을 동반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동안 지속되고 환난이 오면 사라지고 마는 기쁨을 동반하는 교회의 교리들에 대한 승인이다. 또는 예언자들과 사도들에 의해 전해진 교리에 대해 승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교리를 고백한다. 그 교리로 영광을 돌린다. 그리고 그 교리를 알게되어 잠시 기뻐한다. 그러나 그 교리 자체의 약속의 적용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동기들 때문이다. 이 정의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돌짝 밭에 떨어진 씨와 같은 자인데 그는 말씀을 듣고 받았들였으나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잠시 견디다가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죄를 범하게 된다(마 13:20,21 ). 이 기쁨의 원인이 개인에 따라 다르다. 그들은 모두 일시적이다. 그들의 신앙은 사라지고 만다. 그 동기가 여러 가지이다. 복음이 새롭다든지, 그 복음이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든지 위선자들은 복음을 듣고 기뻐한다. 그런가 하면 그 복음이 그들의 전통 때문에 그들에게 부과된 부담에서 그들을 구해 준다. 이를 테면 기독교인의 자유, 칭의 교리가 구해 주는 것 같다. 그들은 죄를 고백하고 또 부나 명예나 영광의 상과 유익을 바란다. 그러나 십자가의 도를 요구 받으면 자신들에게 믿음이 뿌리를 내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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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일시적인 신앙은 위선자의 신앙이다. 위선자는 참된 신자 만큼 기뻐하지 못한다.

이 일시적인 신앙은 그 신앙이 동반하는 기쁨에서만 역사적 신앙과 다르다. 역사적 신앙은 단순한 지식 이상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일시적인 신앙은 이 지식과 연결된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들인다. 역사적으로 마귀도 믿고 떤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갖는 지식으로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식이 없어지기를 원한다. 물론 그들은 이 교리를 다루는 자가 되는 것을 고백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이 참되다고 알고 있다해도 그러나 그것을 아주 괴롭게 반대하고 미워한다. 인간에게 역사적 신앙은 고백과 때대로 연결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들이 미워하는 종교나 진리를 고백하기 때문이다. 교리가 옳다고 아는 사람도 여전히 그것을 반대하기도 한다.

사실 마귀도 그리스도를 고백한다. 그러므로 마귀는 교리를 미워한다고 할 수 없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마귀는 그 교리를 발전시키고 증진시키는 욕망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을 거짓과 혼동하도록 의심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마귀에게 침묵하기를 명한다. 바울이 행 16:18에서 한 것처럼 그렇다.19)

이상에서 우리는 역사적 신앙과 일시적인 신앙의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차이점의 이해는 신앙을 바로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3.기적의 신앙

   

세번째 신앙의 종류로 우르시누스는 기적의 신앙 또는 기적을 일으키는, 또는 기적을 기대하는 신앙을 말하고 있다. 이 신앙은 어떤 특별한 일에 영향을 미치는 특별한 선물이다. 하나님의 계시로 특별한 사건을 예고하는 특별한 선물이다. 아니면 계시에 의해서 또는 미래의 기적적인 일에 관계한 약속에 의한 확고한 설득이다. 성공하기를 바라고 그가 예고하는 기적적인 것이다. 어떤 약속이나 계시가 기적과 관계되지 않으면 이 신앙은 하나님의 일반적 말씀에서 이끌어 낼 수 없다. 사도는 이런 종류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 "내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을 갖었다해도 " (고전 13:2 ). 그러나 이 선언은 의롭게 하는 신앙을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적의 신앙에 특별한 참고로 말해진다.20)

이것은 특별한 종류의 신앙이란 것이 입증된다. 그리스도의 선언은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로다."(마 17:20 ) 많은 거룩한 사람은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아브라함이나 다윗같은 사람은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산을 옮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류의 신앙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갖고 있는 의롭게 하는 믿음과 구별되는 믿음이다. 우르시누스는 성경에서 이점에 대해 증거한다. 스게와의 아들(행 19:14)처럼 축귀하는 사람은 귀신을 쫓아 내려고 애썼다. 그 때 그들은 그것을 이루는 능력이나 은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후에 엄한 벌을 받았다. 마귀가 그들에게 덮치고 그들을 이기고 상처를 입혔다.

시몬 마구스는 믿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선물을 돈주고 사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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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는 역사적인 것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 그러나 마귀는 기적을 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주를 제외하고 누구도 자연의 일을 변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도가 했던 것처럼 유다는 가르쳤고 기적을 행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적 신앙을 가졌고 기적의 신앙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의롭게 하는 신앙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는 마귀니라" (요 6:70).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말할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그때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마 7:22 ).

신앙의 다른 종류들 곧 역사적, 일시적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하고 우리에게 믿게 요구하는 모든 것들에 미친다. 그러나 기적에 대한 신앙은 어떤 일과 특별한 사건들을 단순히 언급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른 종류의 신앙이다.

 

     4. 의롭게 하는 믿음

   

마지막으로 의롭게 하는 신앙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의롭게 하는 신앙은 교리 문답에 정의된 것으로 옳다. 그 정의에 따르면 구원하는 신앙의 일반적 본질은 지식과 확신하는 신뢰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완전하게 알려진 교리를 믿는 어떠한 신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행하기 전에 믿는 것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은 적합하다. 여기서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의 맹목적 신앙의 불합리성을 이해할 수 있다. 구원하는 신앙의 뚜렸한 성격이나 차이는 신뢰와 적용이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값없이 주시는 용서를 자신에게 적용하는 적용이다. 이 신앙의 성격이나 특성은 이 유익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의롭게 하는 신앙의 충분한 원인 (efficient cause )은 성령이다. 그리고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은 복음이다. 그 복음안에 성례전의 유익이 또한 포함된다. 이 신앙의 주제(subject)는 인간의 의지(意志)와 마음이다.21)

그러므로 의롭게 하는 믿음은 다른 믿음들과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그 믿음만이 그 믿음으로 우리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를 적용하므로 확신하는 신뢰이다. 이 믿음은 칭의의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인정되고 전가되는 것을 믿을 때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여겨진다. 이 때 신뢰는 그 신뢰로 의지하고 기뻐하는 것, 그리고 선한 결과를 가져오는 마음과 의지(意志)의 움직임 또는 실천이다. 독일어로는 그말이 "맡기다"(vertrauen ) 곧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22) 

 와  곧 전자는 믿음(belief)을 의미하고 후자는 믿는다(to believe)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세속 작가들 가운데까지 신뢰를 증진하는 것, 아니면 무엇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23)

의롭게 하는 믿음은 역사적인 믿음과 다르다. 그것은 언제나 역사적인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믿음은 우리의 칭의를 위해서 충분하지 않다. 같은 것을 다른 두가지 신앙에 대해서 적용할 수 있다. 의롭게 하는 신앙은 그 신앙으로만 우리가 의를 얻고 성도의 기업의 칭호를 얻는다는 점에서 다른 모든 신앙과 다르다.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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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의가 전가되고 믿음으로 기업이 된다면 그때 이 신앙은 4가지 종류의 신앙의 하나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신앙은 역사적 신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신앙이라면 귀신들도 의롭게 여겨질 수도 있고 약속의 상속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롭게 하는 신앙은 일시적인 신앙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이 신앙을 배격하기 때문이다. 의롭게 하는 신앙은 기적을 믿는 신앙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유다도 상속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를 얻고 성도들 가운데 기업이 되는 것은 오직 의롭게 하는 신앙으로만이다. 이 믿음은 성경이 단순하게 그리고 적당하게 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신앙은 선택에서 독특하다. 그러나 의롭게 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믿거나 그 신앙을 가진 자가 아니고는 아무도 참으로 그 신앙을 알고 있지 않다. 마치 그것은 꿀을 맛보지 않은자가 꿀의 맛이나 성질을 여러가지로 설명해도 실제로는 그 맛과 성질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스스로 경험하거나 참으로 믿는자는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다.24)

의롭게 하는 믿음을 가진 자는 성경이 포함하는 것은 무엇이나 참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이런 것들을 확고히 수용하고 믿도록 느낀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참된 것이라면 그것들을 동의해야만 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혜의 약속, 죄의 값없는 용서, 의와 영생,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요 3:36 )말씀한 것처럼 자신에게 적용하고 수용하고 이해한다. 신뢰를 함으로 그는 현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신뢰하고 기뻐하며 이것으로부터 그는 미래의 선에 관계해서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내게 큰 축복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나를 영생으로 보존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불변하시고 그의 은사는 후회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익의 관점에서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그 마음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을 함께 가져 온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싶은 진지한 마음과 의지(意志)를 갖을 것이다.그는 그에게 하나님이 보내는 것은 무엇이나 참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는 믿음을 가진 자는 세상과 악을 이긴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그 자신이 이 모든 것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믿는다.25) 이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이다.

 

               Ⅴ.믿음의 동기와 결과

 

     1.믿음의 동기

 

기적의 믿음은 물론이고 역사적인 믿음과 일시적인 믿음의 첫째가 되고 충분한 동기는 성령이다. 성령은 그 영향과 작용으로 여러가지 다른 믿음을 만들어 낸다. 의롭게 하는 믿음에 관한 한 그것은 다르다. 그 믿음은 성령이 특별한 역사로 만들어 낸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엡2:8).

마귀는 역사적 믿음을 갖는다. 그러므로 성령은 마귀 안에서 역사한다. 마귀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은 실재로 성령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본대로 그것은 일반적인 역사에 의해서이지 성령의 특별한 역사에 의해서가 아니다. 특별한 역사는 선택된 자들에게서 구원의 믿음을 역사하고 그들에게서만 역사한다. 마귀나 위선자도 성령으로 그들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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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만들어 내는 어떤 지식을 갖을 수 있다. 그러나 선택된 자들의 경우에서처럼 그들을 중생하게 하고 의롭게 하는 믿음은 역사하지 않고 이 선물의 증인으로 그를 찬양하고 인정하는 역사는 없다.26)

일반적으로 믿음의 도구적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신구약에서 이해된다. 그 성경 안에는 그 말씀외에 많은 신적인 역사와 기적이 포함할 수 있다. 의롭게 하는 믿음의 주된 그리고 독특한 도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은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니라"(롬1:16,10:17). 그러므로 의롭게 하는 믿음은 복음 전파 없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을 역사하는 믿음의 동기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특별한 약속과 계시를 요구한다. 의롭게 하는 공식적인 믿음의 동기는 구원하는 믿음에 독특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하는 모든 것을 확실히 아는 지식이다. 그리고 마음에서 역사한 신뢰를 확신한 신뢰이다. 구원하는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은혜의 약속이다. 그 믿음이 인간안에 존재하는 주제는 이해와 의지(意志)와 마음이다. 최종적 동기의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또는 그의 의와 선, 긍휼하심의 나타나심이고 둘째는 우리의 구원이다.27)

 

     2. 믿음의 결과

 

의롭게 하는 믿음의 결과들은  1)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칭의이다. 2)양심의 평강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니 하나님과 평화하자"(롬 5:1 ) 3)회심, 중생 그리고 우주적 순종이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이 깨끗해졌으니"(행15:9). 믿음의 영향에 속하는 결과들은 일시적이지만 영적 은사의 증가이고 믿음으로 이 선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28)

그러므로 의롭게 하는 믿음의 첫번 결과는 우리의 칭의이다. 이 다음에 믿음을 따라오는 여러가지 다른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러한 은혜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믿고 믿음과 마찬가지로 은혜의 동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기의 동기인데 결과의 동기로서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우리의 칭의의 마지막 동기라면 믿음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칭의를 따라 오게 하는 것들의 동기이다. "너희 믿음이 너를 온전케 했다."(눅8:48) 한마디로 믿음의 결과는 칭의이다. 이 삶에서 시작된 중생은 다가오는 삶에서 완전해질 것이다(롬3:28,10:10,행10:10,행13:39).

 

               Ⅵ. 믿음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

 

의롭게 하는 믿음은 선택된 자들에게 독특하고 그들에게만 독특하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모든 선택된 자에게 주어지고 오직 그들에게만 주어지며 믿음의 성향으로 볼때 유아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그를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영생으로 작정된 자는 믿나니 ", "그가 예정한 자를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사야가 말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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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그들은 주님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믿지 않지 않는가?"(요 6:44,마 13:11,행3:48,롬 8:30,10:16,엡 2:8,살후 3:2).29)

기적의 믿음과 일시적 믿음은 오직 눈으로 볼 수 있는 교회의 교인들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믿음은 위선자들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는가? 귀신도 쫓아내지 않았는가?"(마 7:22 ). 원시 교회에서 가졌던 기적의 믿음은 오늘날 교회에서 사라졌다. 왜냐하면 복음의 교리가 기적에 의해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30)

역사적 믿음은 교회로부터 온 사람들이나 마귀에 의해서 소유될 수도 있다.31)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  역사적 믿음은 선행이다. 마귀는 이 믿음을 갖는다. 그러므로 마귀들은 선행을 갖는다.    우리는 주요한 전제에 대답한다. 역사적 믿음은 선행이라고 할 수 있다. 신뢰가 합해진다면 역사적 믿음은 선행이다. 이 믿음은 성령의 영향이다. 선행으로 볼 때 그 자체는 선행이지만 그것은 우연히 악하게 되고 버림 받은자는 참되다고 알려진 것들 그 자체를 받아들이거나 적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볼때 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귀도 떤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적용하지 않는다. 곧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온 것, 긍휼, 은헤를 아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지 않는다.32) 

또 문제가 되는 것은 유아들도 선택된 자에게 포함된다. 그러나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선택된 모든 사람은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하여 답한다. 장년들처럼 유아들은 실재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능력이나 조건에 따라 그들 안에 성령이 역사하는 믿음으로 향하거나 능력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는다. 왜냐하면 성령이 유아에게 약속했는데 그들에게는 실재로 성령이 역사하지 못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하는 믿음이 모든 선택괸 자에게 인정된다고 한 것이 여전히 진리이다.33)

우리는 계속해서 믿음은 모든 선택된 자에게 필요하다. 믿음 뿐만 아니라 믿음의 고백할 나이에 이른 사람에게 믿음의 고백이 필요하다.

 

               Ⅶ. 맺는 말

 

이상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21문 "참 믿음이란 무엇인가?"와 제22문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란 항목을 그 요리문답의 저자 우르시누스의 신앙에 대한 정의와 그의 신앙에 대한 주석을 중심으로 신앙론을 살펴보았다.

본 요리문답은 루터교와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이 요리문답의 저자의 교육과정이 개혁주의 전통에 더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요리문답은 개혁주의 신학전통을 특징으로 한다. 이점에서 먼저 요리문답의 구조상 "사도신조"의 내용을 계속해서 다루기 전 단계의 신앙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제 23문이 바로 사도신조를 다루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신앙의 우리가 믿어야할 내용의 전체를 다룬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믿음을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포함하고 그말씀에 충분히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내린 신앙의 정의에 동의하게 된다.

우르시누스의 신앙의 정의는 개혁교회의 전통적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구원하는 신앙의 일반적 본질은 지식과 확신하는 신뢰이다. 그러므로 신앙을 행하기 전에 신앙에 대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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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을 얻는 것은 옳다. 여기서 정통적 신앙은 교황주의의 불합리성과 맹목성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신앙의 종류를 4가지로 나누면서 참 신앙을 "의롭게하는 신앙"으로 보고 있다. 이 의롭게 하는 믿음이 구원하는 믿음이고 다른 믿음과 구별되는 참 믿음으로 이해한다. 이 믿음은 칭의의 믿음이다. 우르시누스는 기적의 믿음, 역사적 믿음, 일시적 믿음, 모두 믿음의 동기는 성령이라고 본다. 믿음의 종류는 성령의 영향과 작용의 차이로 본다. 그러나 의롭게 하는 믿음은 성령이 특별한 역사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이 계시하는 모든 것을 확실히 아는 지식이고 마음에서 역사한 신뢰를 확신한 신뢰이다. 의롭게 하는 신앙의 대상은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은혜의 약속이다.

 

 

 

 

 

 

 

 

 

 

 

 

 


1)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The History of Creeds, Vol. Ⅰ, Baker Book House, p. 535.  

2) Ibid.

3) Ibid., p. 540.

4) Ibid., p. 541.

5) Ibid., p. 542.

6) Philip Schaff, The Creeds of Christendom With a History and Critical Notes, vol. Ⅰ, Baker House,  p. 534.

7) 이형기편저, 「신앙고백서」, 서울: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 1991, p. 109-110.

8) Ibid., p. 110.

9) Ibid., p. 111.

10) Ibid., p. 112.

11) 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은 영국, 스코틀랜드, 그리고 미국 계통의 장로교에 의해서 사용되어오며 보다 주지적이고 추상적이다.

12) Inst. Ⅲ, 2. 7.

13) Ursinus, Commentary on The Heidelberg Catechism, Presbyterian and Reformed, p. 108.

14) Ibid.

15) Ibid.

16) Ibid.

17) 루이스 벌코프, 「조직신학 하권」, 권수경역,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2. p. 752.

18) op. cit., p. 109.

19) Ibid.

20) Ibid., p. 110.

21) Ibid.

22) Ibid., p. 111.

23) Phocilides 에서 읽는 것처럼 "백성들을 믿지 말라, 대중은 기만적이다." 그리고 Demosthenes 에서 "너는 너 자신을 신뢰하라"등등.

24) Ibid.

25) Ibid.

26) Ibid., p. 112.

27) Ibid., p. 113.

28) Ibid.

29) Ibid.

30) Ibid.

31) Ibid., p. 114.

32) Ibid.

33)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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