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의 신학적 해석학
임 영 금
(호남신학대학 교수)
▣ 차 례 ▣ 1. 서론 - 폴 틸리히의 신학적 위치 2. 폴 틸리히의 신학과 상징 1) 상징의 의미 2) 상징의 특징 3) 상징과 신화 4) 종교적 상징의 본질 5) 종교적 상징의 진리 3. 상징의 해석 1) 종교적 상징의 회복 2) 비문자화 3) 비문자화와 비신화화 4) 상관관계의 방법 4. 맺는 말 |
1. 서론 - 폴 틸리히의 신학적 위치
지성인을 위한 사도로 자처했던 폴 틸리히(Paul Tillich 1886- 1965)는 독일 루터파 목사였다. 동시대에 활동한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와 함께 현대 신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20세기 조직신학의 양대산맥으로 불리운다. 바르트는 전후에도 독일에서 학문활동을 계속했으나 틸리히는 그의 종교사회주의 운동 때문에 히틀러에 의하여 1933년 미국으로 추방당한후 계속 미국적 상황에서 그의 독특한 신학사상을 전개하였다.
바르트가 교회를 위한 신학자로 그 학문의 목적이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었다면, 틸리히는 지성인을 위한 사도로서 그리고 세속사회를 위하여 기독교의 복음을 복음의 진리를 간직한 우리시대의 언어로 재해석하려는 것이 그의 평생의 신학의 목표였다. 그래서 그의 신학을 변증신학, 철학적 신학, 또는 신학적 철학, 중재의 신학, 문화의 신학, 대화의 신학으로 부르기도 한다.
틸리히가 의미하는 기독교의 복음은 정통신학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아니다. 그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 언어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언어-상징의 재해석이란 우리시대에 그 의미가 상실했거나, 문자적 직역주의로 왜곡되어 우상화된 상징을, 원래의 초월적 의미를 간직한 우리시대의 동시대적 언어로 재해석하자는 데 있다. 그는 이러한 언어를 자아초월적 실재론적 언어, 또는 자아초월적 성례전적 언어라고 부른다. 이것은 상징적 언어를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그 현대적 해석학적 과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 해석학을 그는 불트만(Rudolf Bultmann)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와 구별되는 비문자화(deliteralization)라고 부른다. 신학은 해석학이지만, 특별히 그가 이처럼 상징의 재해석을 그의 평생의 조직신학의 과제로 삼은 것은 1909년 목사 후보생으로 실습을 할 때와, 1913년 보조목사로 시무할 때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그는 교인들이 기독교의 상징적 언어를 반복할 뿐 이해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전 신학적 목표는 전후 회의하는 지성인들과 세속인들이 이해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는 “종교적 상징을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징의 재해석-비문자화가 그의 신학의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방법이 그의 유명한 “상관관계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적 해석학은 바르트처럼 “성서안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려는 교회적 사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에서 성장한 종교적 상징의 의미를 회복시키려는 변증신학이다. 그의 이러한 종교적 언어의 재해석은 종교와 사회, 신학과 철학, 기독교와 세계종교에 대한 대화와 이해를 촉구하는 문화의 신학, 대화의 신학으로 발전되며, 그의 대화의 신학은 카톨릭 신학자인 칼 라너(Karl Rahner)와 함께 “종교 포괄적 다원주의”의 한 학문적 전거가 되고 있다.
이러한 틸리히의 신학적 해석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본 논문에서는 먼저 틸리히의 종교적 언어-상징의 의미,특징,본질,진리성과 신화를 논구하고, 그 재해석인 비문자화와 그 방법론인 상관관계의 방법을 그의 주요 저서들인 The Protestant Era, Systematic theology 3 vols, Dynamics of Faith, Theology of Culture, What is Religion? Ultimate Concern,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2. 폴 틸리히의 신학과 상징
폴 틸리히는 종교는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 또는 무조건적 의미를 향한 영의 방향성이며, 문화는 유한한 형태를 향한 영의 방향성으로 이해한다. 양자의 결합이 종교에는 상징으로 표현된다.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은 상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상징적 언어만이 궁극자(the Ultimate)를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속하는 유한한 실재는 그 실재를 무한히 초월하는 궁극자를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유한한 실재가 궁극자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신성모독이요 우상숭배가 된다. 상징은 유한한 실재이나, 그가 표현하는 궁극적 근거로부터 존재의 능력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 근거에 참여한다. 이러한 상징의 개념은 현대 종교학과 분석 심리학의 이론을 수용한 것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종교적 언어는 상징 이외에는 다른 표현이 없다. 이러한 그의 상징론은 일부 현대 신학자들이 상징을 비실재적인 것으로 여기거나, 신화를 원시적 세계상으로 여기는 불트만의 비신화론과는 첨예한 대립을 보인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성서적 신화는 다만 상징에 지나지 않으나, 틸리히에게 있어서는 모든 종교적 언어(상징과 신화)는 상징이외의 다른 표현은 없다. 그러나 상징자체도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데는 부적절하다. 상징 역시 표현이 불가능한 곳에서 항상 필요한 부적절한 표현의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이 상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악마적 왜곡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이성의 권위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가 상징의 재해석의 필요를 그의 평생의 과제로 삼게 된 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첫째, 1909년 목사 후보생으로 실습을 나갔을 때와, 1913년 보조목사로 시무할때 받은 충격과 이차 대전이후 지성인의 상황 때문이었다.
전후에서 1963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는 바르트였다. 그러나 그의 신학은 회의하는 지성인들과 점점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와는 거리가 있었다. 이들을 위한 신학자들이 불트만과 틸리히이다. 불트만은 하이데거 철학의 실존적 분석에 의한 현존재의 자기이해를 근거로 신약성서를 비신화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틸리히는 성서적 언어인 상징과 신화는 제거될 수 없으며 이들을 지성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재해석, 문자적이고 불합리한 해석이 아니라 자아-초월적 신비를 간직한 새로운 성례전적 언어로 재해석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틸리히 신학의 주요목적은 기독교와 세속사회를 중재하고,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동시대적인 언어로 성서적 상징을 (문자적 해석이나 영해가 아닌) 재해석하며, 현대인들의 자기이해를 전이해로 하는 합리적 해석이 아니라 기독교의 초월성과 신비와 동시대성을 간직하려고 하는 해석학적 시도이다. 이것을 J. P. Newport는 다음의 네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성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는 1963년 미국 Santa Barbara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 세미나에서 “나의 중심과제는 질문하는 자들과 함께 있다”고 하였다.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역시 종교를 멸시하는 문화인들에게 종교적 차원인 문화적 삶의 상실된 차원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서 불필요한 걸림돌을 제거하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깊이를 탐구함으로서 그들의 질문에 궁극적인 답변을 주기 위함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틸리히는 비신화화가 아니라 비문자화를 추구한다. 그 결과 하나님은 존재-자체로, 죄는 소외로, 은혜는 용납으로 해석된다.
둘째, 이 변증적 목적을 위하여 참신한 신학적 체계(system)를 전개시킨다. 지성인들은 일관성이 없을 때 등을 돌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체에서 전제를, 그리고 전체에서 개체를 설명할 수 있는 해석학적 순환이 필요하다.
셋째,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의 위험한 오해에서 지키는 것이다. 성서해석의 문자적 해석은 이성의 오용이다. 그의 저서 신앙의 역동성(Dynamics of Faith)은 성서적 신앙의 문자적 왜곡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이다. 신앙이 지식이 되거나(지성주의), 행함이 되거나(도덕주의), 감성이(감성주의)될 때는 왜곡된다.
이러한 잘못된 문자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실존적이고 상징적인 해석이 필요하다. 문자주의는 지성인들을 외면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해석자 자신이 자신의 이성을 궁극적 권위로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은 정신적 분열, 또는 광신, 그리고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타인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상징의 해석은 합리적 표준을 적용해야 하지만, 억지로 꿰어맞추는 문자적 직역주의나, 오직 합리적이기만 한 비신화화가 아닌 그 자신의 독특한 “비문자화”를 추구한다.
넷째,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위하여 존재론적 또는 철학적 근거를 정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존재론은 인류사에 나타난 보편적인 인간의 실존적 곤궁(predicament)의 분석이다. 이것은 그의 신학적 해석학-비문자화-을 수행하기 위한 방법인 상관관계 방법의 양극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틸리히 신학의 근본적인 의도는 성서적 상징의 초월적인 의미를 간직한 합리적이고 동시대적인 언어를 인간 곤궁에 대한 실존적 분석이 제기하는 질문과 성서적 답변을 상호 관련시킴으로서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1) 상징의 의미
틸리히에 의하면 “참으로 궁극적인 것은” 유한한 실재를 무한히 초월하며, 어떤 유한한 실재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이 궁극의 특징이요, 신앙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관심된 상태”인 신앙은 상징말고는 다른 언어가 없다. 신앙적 언어와 종교적 의식은 상징이다. 그 증거로 출애굽기 33장 18-23절에 의하면 모세는 하나님에 대하여 상징적 지식 이상을 넘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그가 얼굴을 직접 보게되면 죽게된다고 하였다. 모세는 다만 하나님이 걷는 것과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 구절은 놀랍게도 반-시적이고, 반-은유적인 표현으로서 모든 종교적 언어가 상징적이어야 할 필요를 설명한다.
종교의 대상은 “무조건자”에 대한 것으로 무조건자의 존재 여부에 관한 질문은 이미 무조건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을 전제로 하며, 무조건자의 확실성이 모든 의심이 생겨나는 근거가 되는 확실성이고 무조건자 자체는 의심될 수 없다. 이렇듯이 무조건자에 대한 표현은 모세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반-은유적인 상징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상징은 사물의 본성으로는 적당한 표현이 불가능하나 항상 “필요한 표현의 부적당한 형태”이다.
이와같이 모든 종교적 술어는 상징이다. 그러나 종교적 개념의 상징적 특징이 결코 그들의 실재를 박탈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적인 것에서 무조건적인 것에로 이 실재를 고양시킨다. 즉 이러한 종교적 상징은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데 일상적 경험의 자료를 사용하지만 그 일상적 의미는 긍정되고 동시에 부정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모든 종교적 상징은 그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그 초월적 의미 가운데에서 그 자신을 확인한다. 상징은 이러한 참여를 통하여 상징된 것의 능력과 의미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하여 그의 속성, 행위, 현시 등을 말할 때는 상징적 특징을 지니며, 이러한 상징적 언어를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의미하는 바를 상실하게 되며, 그의 황홀적이고 초월적인 특징이 위협받게 된다.
상징은 시대가 변한다 해도 그 본래적 의미하는 바를 간직해야 한다. 모든 종교의 근원적 상징은 인간의 갈등과 그 해결의 구조를 표현하는 것으로 만일 그 본래적 의미가 사라지게 되면 종교개혁이 되거나 전혀 새로운 종교가 된다. 다시말하면 상징이 본래적 의미를 간직하지 못할 경우 그 구속적 능력을 상실하고 상징 그 자체가 궁극적 관심의 영역으로 고양된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이러한 종교적 상징은 야스퍼스(Jaspers)가 말한 바와 같이 암호와 같아서 그 본래적 의미회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그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의미가 상실되는 시대적 순응이 아니라, 상징의 본래적 의미가 오늘의 언어로 새롭게 표현되어 들려지고 경청되어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는 적용이어야 한다.
2) 상징의 특징
그러나 오늘날 상징의 의미에 대한 혼란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틸리히는 그가 사용하는 상징이라고 하는 용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첫째, 상징은 기호와 공통점이 있다. 양자는 다같이 자신을 초월하여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기호와 상징의 혼란이 야기된다. 기호는 교통신호등에서 볼수 있는 바와 같이 서로 관계없는 것들이 인습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호는 편의상 대체시킬 수 있으나 상징은 대체시킬 수 없다.
둘째, 상징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에 참여한다. 그러나 기호는 그들이 지시하는 것의 실재나 능력에 절대 참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상징은 비록 그들이 상징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와 능력에 참여한다. 이것이 상징과 기호의 근본적이 차이이다. 알파벧은 기호일 뿐 표현하는 실재에 참여하지 못하나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는 그 상징하는 것의 능력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국기에 대한 공격은 그것이 지칭하는 집단의 위엄에 대한 공격을 의미한다.
셋째, 상징은 닫혀진 실재의 단계(levels of reality)를 표현한다. 이 표현의 기능은 이중의 의미이다. 즉 상징을 통하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는 실재의 측면을 열어보여주며, 또 우리의 내적 실재의 측면을 열어보여준다. 그러므로 모든 상징은 양 끝을 가진다. 한 쪽은 무한자를, 다른 한 쪽은 유한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인간을 위하여 신을, 신을 위하여 인간을 열어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상징은 하나님과 인간을 부자관계로, 부자의 인간관계는 신-인 관계의 모형으로 신성화된다.
넷째, 상징은 접근할 수 없는 실재의 차원과 요소를 열어 보일 뿐만 아니라, 실재의 차원과 요소에 상응하는 우리 영혼의 차원과 요소를 열어보여준다. 즉 우리 자신의 존재의 감추어진 깊이를 열어 보여준다.
다섯째, 상징은 의도적으로 만들 수 없다. 기호는 의도적으로 만들 수 있으나, 위대한 종교의 원형적 상징은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에서 성장하는 것으로 우리 존재의 무의식적 차원에 의하여 용납되어야만 작용할 수 있다. 정치적 종교적 상징과 마찬가지로, 특별히 사회적 기능들을 가진 상징들도 그들이 나타나는 집단의 집단적 무의식에 의하여 창조되거나 용납된 것들이다.
여섯째, 상징은 조작할 수 없다. 살아있는 존재와 마찬가지로, 상징은 성장하고 죽는다. 상황이 성숙할 때 상징들은 성장하나, 상황이 변하면 소멸된다. 상징은 사람들이 원한다고 성장하는 것도 아니며, 과학적 또는 실천적 비판 때문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은 그들이 맨처음 표현되었던 집단의 응답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징들은 인간의 문화창조성의 여러 영역의 집단 무의식에서 성장하는 것으로 정치적, 예술적, 역사적 영역을 포함하지만 무엇보다도 종교적 영역이 지배적이다.
3) 상징과 신화
신앙의 상징들은 고립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은 “신들의 이야기”속에 결합되어 있다. 이것이 희랍어로 mythos, 즉 myth의 의미이다. 희랍신화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 신적인 형상과 행위로 상징화된 것이다. 신화는 신과 인간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 속에 결합된 신앙의 상징이다.
신화는 항상 신앙의 모든 행위속에 들어있다. 왜냐하면 신앙의 언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신화 역시 공격받고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은 신들의 이야기 속에 표현된 신화의 본성 때문이다. 신화에 대한 비판은 먼저 신성의 분리를 거부하며 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다신론적 신화를 거부한다고 하여 신화에 대한 비판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유일신론도 또한 신화의 비판아래 놓이게 된다. 여기에서 불트만이 말한 비신화화가 필요하다. 이 용어는 구약과 신약의 성서 이야기와 상징들 속에서 신화적 요소를 추방하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한다. 실락원, 아담의 타락, 대홍수, 출애굽, 동정녀 탄생, 많은 기적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재림과 심판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작용을 말하는 이야기들이나, 그 성격상 신화적인 것으로 여겨져서 비신화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부정적인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비신화화가 상징을 상징으로, 신화를 신화로 인지해야할 필요성을 가리킨다면 용납되어야 하고 지지되어야 하지만, 만일 비신화화의 의도가 상징과 신화를 불합리한 것으로 보고 제거해야 활 것을 의미한다면, 이러한 비신화화는 비판되고 거부되어야 한다. 이러한 비신화화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상징과 신화는 항상 현존하는 인간의식의 형태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화를 다른 신화로 대체시킬 수 있으나, 신화를 인간의 영적인 삶으로 부터 제거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신화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을 나타내는 상징들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틸리히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신화는 이해된 신화, 또는 “깨어진 신화(broken myth)”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 전제가 제1계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궁극자를 궁극적인 것으로 긍정하는 것이며,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성서에 있는 모든 신화적 요소, 교리, 그리고 예배 의식은 신화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징적 형태를 간직해야지 다른 과학적 대체물로 교체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앙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신화에 대한 근본적 비판은 원시적인 신화적 의식이 신화를 신화로 해석하는 태도를 거부한다는 사실에 기인된다. 그것은 깨어진 신화는 그 진리성을 박탈당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깨어지지 않은 신화적 세계에 안주하는 사람들은 안전감과 확신을 느낀다. 신화를 해석함으로서 불확실성의요소를 도입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이러한 저항은 권위주의적 체계가 지지하는 것이다. 그들의 지배에 대한 도전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를 틸리히는 “문자주의(literalism)”라고 부른다. 그가 의미하는 문자주의란 상징과 신화를 직접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과 역사에서 선택한 재료가 그 고유한 의미로 사용된다. 자신을 초월하여 어떤 다른 것을 지칭하는 상징의 특징이 무시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메시야의 동정녀 탄생은 생물학적 용어로, 부활과 승천은 물리적 사건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은 지구와 우주의 재난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자적 직역주의는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궁극성을 박탈하며, 유한하고 조건적인 단계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신앙의 상징을 문자적 직역으로 해석하게 되면 신앙은 우상숭배가 된다. 신앙의 상징적 특징을 의식하게 되면 신앙은 하나님께 합당한 명예를 돌리는 것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직역주의에는 두 단계가 있다. 하나는 자연적 단계이고 다른 하나는 의도적인 단계이다. 전자는 그 정당한 시기가 있으나 후자는 의식적인 것으로서 직역주의에 대한 인간의 질문을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것이다. 억압의 도구는 항상 교회나 성서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거룩한 속성을 지닌 인정된 권위이다. 비판적 신학의 적은 바로 이러한 의식적 직역주의이다.
그러면 신화가 온갖 종류의 궁극적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가? 틸리히는 신화 역시 상징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궁극적 관심을 나타내는 언어의 버려진 관용구로 이해한다.
그리스도교는 다른 모든 종교처럼 신화적 언어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깨어진 신화이다. 그러나 신화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4) 종교적 상징의 본질
지금까지 인간의 궁극적 관심의 상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하는 틸리히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왜 그런가? 왜 직접 표현할 수 없는가? 틸리히는 궁극적 관심이 되는 모든 것이 신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모든 궁극적 관심은 신적 속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참된 궁극성은 유한한 실재를 무한히 초월한다. 그러므로 모든 유한한 실재는 그것을 직접 그리고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까지 초월하신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면 오용이나 신성모독이 된다.
우리에게 궁극적이 되는 것은 무엇이나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이라 부르든지, 아니든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신앙은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적절히 표현할 수 없다. 다만 상징의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궁극적으로 관심된 상태인 신앙은 상징이외에는 다른 언어가 없다.
이러한 궁극적 실재의 깊이는 “거룩의 차원(the dimension of the Holy)”이다. 곧 종교적 상징은 거룩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룩에 참여하지만 그 자체가 거룩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에 처한 모든 것이 거룩에 대한 상징이 된다. 세상 모든 것이 “존재의 궁극적 근거”에 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종교적 상징으로 쓰여지면 그것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강력하고, 인간의식을 지배하게 되고, 무의식 이상의 것이 되어 종교사에서 모든 종교적 상징의 특징이 되는 엄청난 집착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상징도 삶의 모든 것처럼 애매성의 법칙하에 있다. 애매성이란 상징이 “창조적이며 동시에 파괴적”이라는 의미이다. 초월자를 가리키는 상징이 스스로 궁극자가 되려는 경향이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우상”이 된다. 모든 우상은 거룩의 상징이 절대화되어 거룩자체와 동일시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종교의 성례전적 활동, 성물, 성서, 거룩한 교리, 거룩한 의식이 악마화되고 우상이 될 수 있는 이유이다.
모든 종교적 상징에는 두 가지 근본적 단계가 있다. 초월적 단계와 내재적 단계이다. 초월적 단계에 속한 근본적 상징은 하나님 자신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상징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말할 때 두가지 것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 자체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비상징적 진술이다. 하나님 자체는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 존재-자체(Being-Itself), 존재의 근거(Ground of Being), 존재의 능력(Power of Being)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상징적 진술이다. 그러나 이 궁극자와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상징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격이냐 아니냐의 모든 논의, 지고의 존재로서 하나님이 다른 존재와 유사하냐 아니냐의 모든 논의는 만일 우리가 무의식적인 어떤 것을 확실히 의식하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서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궁극자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상징화 시켜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다만 “궁극적 존재” 이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친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지극한 표현인 인격의 상징으로 그와 만난다. 그러나 그에 관하여 상징적으로 말함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무한히 초월하는 것과, 하나님께 당신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에게 기도할 수 있는 우리의 인격됨에 적절한 것을 간직하게 된다. 이 두가지 요소는 간직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무조건자의 요소만 간직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계가 불가능하고, 만일 우리가 나-너의 관계의 요소만 간직한다면(오늘날 말하는 것처럼)우리는 신성을 상실하게 된다. 즉 주체와 객체를 초월하고 모든 다른 양극성을 초월하는 무조건자의 요소를 상실하게 된다.
초월적 단계의 두번째 요점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한 것이다. 그가 사랑, 자비, 전능, 전지, 편재, 권능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 자신의 경험적 재료에서 취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문자적 의미로 하나님께 적용시킬 수 없다. 만일 문자적 적용을 하게 되면, 무한한 불합리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 때문에 종교가 파괴되기도 한다. 이러한 속성의 상징적 특성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성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은 불합리하게 된다.
초월적 단계의 세번째 요점은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표현들이다. “그가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가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 “그가 세상을 완성하신다”등등, 이 모든 시간적, 인과적, 또 다른 표현들은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들이다. 이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불합리가 된다. 그러나 만일 상징적으로 해석하게 되면 심오한 표현이 된다. 즉 궁극적인 그리스도교의 표현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경험이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동시대인들에게 우리가 상징적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그들이 우리로 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럴 경우 불합리와 미신이 되기 때문이다.
상징의 내재적 단계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신성이 출현하는 단계이다. 맨 처음 나타나는 것이 신성의 성육신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신적인 존재가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른 존재로 변형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특징만은 아니다. 신성의 화육은 모든 시대의 이방인들도 공유하는 상징이다.
내재적 단계에서 초월자에 대한 관계는 성육신 개념과 관련시켜 말해야 한다. 처음에는 원시종교에서 볼 수 있는 마나(mana)신앙과 정령 신앙의 요소로 초월성과 내재성이 동일성으로 나타나는 단계이다.
내재적 단계의 두번째 요소는 성례전적 요소이다. 여기에서 성례전이라함은 어떤 실재가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상황하에서 거룩의 담지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만찬과 그 재료는 상징적이다.
내재적 단계의 세번째 요소는 여러가지가 있다. 교회건물이라든가, 촛불, 성수, 십자가 등은 처음에는 기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상징이 된 것들로 기호-상징(sign-symbols)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종교적 상징의 진리성
종교적 상징의 진리성에 관하여 틸리히는 세가지로 말한다. 부정적 진술과 긍정적 진술, 그리고 절대적 진술이다.
부정적 진술이라함은 상징은 모든 경험적 비판, 즉 자연과학에 의한 비판이나, 역사탐구에 의한 비판에 의하여 상징을 없앨 수 없다는 의미이다. 상징은 다만 그들이 창조된 상황이 사라지게 되면 소멸될 수 있다.
종교적 상징의 진리성은 물리학적 심리학적 역사학적인 경험적 주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종교적 상징의 경험적 진리성은 계시의 상관관계를 적절히 표현할 경우에 진리이다. 종교적 상징이 참이냐 아니냐의 판단은 그 계시적 표현이 참이냐 아니냐 하는 판단과 동일하다. 이것이 종교적 상징의 이중적 의미이다. 즉 종교적 상징이 최종 계시와의 상호관계를 적절히 표현할 때에 진리이다. 종교적 상징은 이 상관관계가 사라지면 소멸한다. 이것은 계시적 상황이 변화할 때 일어난다. 종교사를 통하여 볼 때 그렇게 하여 소멸된 죽은 상징들이 가득하다. 신학은 종교적 상징을 긍정하거나 부인할 수 있는 능력을 갖지 못한다. 다만 신학의 과제는 신학적 원칙과 방법에 따라서 종교적 상징을 해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개신교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상징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사라진 상징이다. 개신교의 하나님에 대한 특별하고,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상황이 매개하는 능력을 필요 없게 한 것이다. 이 상징을 사라지게 한 또 다른 이유는 처녀성을 찬양하는 금욕적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지속되는 한 이 상징은 재정립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 엄청난 상징적 능력 때문에 보존되고 있으며 단계별로 삼위일체에 점점 더 접근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발전된다면 성모 마리아는 로마 카톨릭에 있어서는 예수와 동일한 공동 구원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종교 역시 삶의 애매성의 법칙 아래 있어서 모든 종교적 상징은 우상숭배적인 것이 될 수 있고, 악마화 될 수 있으며, 그 자신이 궁극적 타당성에까지 고양될 수 있으며, 모든 종교적 교리나 제의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가 그 상징에 있어서 참으로 우월한 진리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상징,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신적 현존의 충만함을 구현한 사람이 그 스스로 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과 병존하는 다른 신이 되지 않기 위하여 그 자신을 희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그에게 고백한 “그리스도”라는 상징을 용납한 것이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당하고 죽임당할 상황에서 그 칭호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과 관련된 우상숭배적 경향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상징의 진리성의 절대적 진술이다. 그리고 모든 다른 상징을 판단하는 표준이 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상징”이며 모든 우상숭배적 경향을 부인하는 상징이다. 이것은 동시에 다른 모든 종교와 그리스도교의 교회가 복종해야 할 표준이며 모든 유한성의 절대화를 거부하는 틸리히의 유명한 개신교 원칙이다.
3. 상징의 해석
1) 종교적 상징의 회복
오늘날 상징의 표현력은 어떠한가? 틸리히는 종교적 상징 일반의 힘이 상실되었다고 본다. “하나님이 존재하느냐?”고 묻는 물음 자체가 신에 관한 상징이 무의미해졌음을 의미한다. “죄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오늘날 특별한 관습적 도덕성에 모순되는 것처럼 왜곡되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 있어서 죄는 모든 실재를 지배하는 마성적 능력이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상징을 표현하고 전파하고 해석할 수 있을까? 틸리히의 전 신학적 과제가 바로 이러한 종교적 상징을 세속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동시대적 언어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비록 상징의 표현력이 상실되었다 하더라도 상징을 새로 바꾸거나 만들어 낼 수 없다. 틸리히는 과거의 위대한 그리스도교적 상징을 재해석하여 그 의미를 회복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창조, 타락, 화해, 구원, 하나님의 왕국, 삼위일체등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상징들이다.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상징속에 살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그리스도교의 상징들이 다시금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재해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틸리히는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 과제를 수행하고자 한다.
오늘날 의미를 상실한 상징의 의미를 회복시키기 위하여서는 첫째, 그 상징의 의미를 해석해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살아 있고 참된 상징은 이러한 해석자 없이 직접 이해된다
둘째, 상징을 파괴하고자 하는 저항 운동이 없어야 한다. 상징에 대한 저항은 그 우상숭배적 사용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이것이 고대교회의 성상파괴운동의 이유이다. 종교개혁 역시 이러한 성상파괴운동의 한 물결이다. 이 모든 저항은 유대 유일신교적 편견에 기인한다.
셋째, 상징이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양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들이 단지 그 의미의 회복에 그치지 않고, 현대인의 동시대적 표현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만일 상징에 의미있는 표현이 주어지면 과거의 위대한 상징의 의미를 회복시키고 재해석하는 일이 가능하다. 그 재해석의 시도가 바로 틸리히의 비문자화이며, 그 실천적 방법이 상관관계의 방법이고, 그 전체적 실행이 그의 조직신학이다.
2) 비문자화
틸리히는 1963년 산타 바바라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 학생들과의 세미나에서 그의 전 신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의 전 신학적 과제는 정확히 종교적 상징을 세속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도록 재해석하는 데에 있습니다. 나는 과거의 위대한 상징들의 의미를 회복시키는 일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제는 신학적 원칙과 방법에 따라서 해석해야 합니다.”
틸리히의 위의 두가지 진술은 그의 신학적 해석학에 대하여 몇가지 중요한 사항을 의미한다. 첫째, 틸리히의 신학의 대상은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 즉 credo ut intelligam을 추구하는 신앙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회의하고 질문하는 세속인들, 지성인을 위한 신학이라는 점이다.
둘째,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 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종교적 상징이라고 하는 주장이다.
셋째, 그의 신학적 해석은 그냥 해석이 아니라 동시대적인 재해석이라고 하는 점이다. 이것은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라는 의미이다.
넷째, 그의 해석을 위한 원칙과 방법이 있다고 하는 의미이다.
틸리히의 조직신학에는 놀랍게도 독립된 성서론이 없다. 이것은 그가 성서를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에 대한 상징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 상징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와 동일시하는 직역적 해석이 오늘날 성서 언어의 말할 수 없는 왜곡을 가져온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는 문자적으로 직역되어서는 (해석) 안되고 재해석되어야 한다. 틸리히가 의미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동시대적인 것으로 그 궁극적 능력이 우리 현재의 실재를 뚫고 들어오게 하는 실재이다. 오늘날 개신교는 이러한 동시대성과 자아초월적 능력이 결합된 설교의 방법을 발견해야 하는 긴급한 과제가 있다. 왜냐하면 성서적인 교회의 용어가 우리의 역사적 상황과 유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대성이 결여될 때,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에 현시된 영원한 진리의 표준이 인간의 실존적 질문에 대한 답변임을 중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서적 언어만 반복하는 오만한 사제는 청취자가 듣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계시는 나의 구체적 상황에서만 내게 계시가 된다.
틸리히에 의하면 우리시대의 적절한 언어는 완전히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언어로서 실재의 초월적 의미를 비추어주는 언어, 즉 자아초월적 실재론의 언어이다. 이 근거에서만 개신교는 새로운 성례전적 언어를 창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대중으로 하여금 기독교가 교리적이고 의식적인 도덕법칙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과 실존 일반의 의미와 근거인 궁극적 관심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해 줄 수 있다.
틸리히는 이러한 재해석은 기독교 진리의 “적응(adaptation)”과 “순응(accommodation)”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본다.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 “악마적 절대주의”에 빠져 그 호소력을 상실하고, 진리를 희생시키며, 다만 순응만 할 경우 “공허한 상대주의”에 빠져 세속주의에 넘어가게 된다. 비문자화는 진리의 내용을 그 의미를 파괴시키지 아니하고 보존하며, 동시대적 언어로 상징을 해석함으로서 양극을 조화시킨다. 비문자화는 상징을 해석하는 방법이지 새로운 상징을 만들려는 시도는 아니다.
이러한 재해석은 “역사적 운명”이며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새존재의 능력”과 결합된 신적 창조성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일어난다. 새존재는 자유하시는 성령의 능력이며, 새존재가 나타나는 모든 형태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3) 비문자화와 비신화화
틸리히의 이러한 비문자화와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 -1976)의 실존론적 해석인 비신화화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들의 공통점은 먼저 이들은 다같이 성서 언어의 전통적 해석을 문자적 직역주의로 보며, 성서 해석의 현대적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둘째, 틸리히는 성서의 언어를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상징이라고 이해하는 반면에, 불트만은 성서는 케리그마가 담겨 있는 신화로 이해한다. 불트만은 신화속에 내재하는 케리그마를 드러내기 위하여 신화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화를 해석하고, 설명하고, 요해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불트만은 성서의 이야기가 불확실하게 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이해조차 불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전승된 신앙고백의 재창조를 위한 해석학적 과제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성서의 신화의 본래적 의미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공하는데 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이 세상안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 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 해석될 것이 아니라 인간학적으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양자는 다같이 전통적 해석이 아닌 재해석을 주장한다. 정통신학이나 바르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청이나 순종, 또는 본문속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신학은 아니다.
셋째, 그 재해석을 위한 출발점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내적 실존의 분석에서 시작한다. 불트만은 모든 이해는 전이해를 전제하며 그 대답은 일정한 방향을 통해 결정되므로 본래적 실존적 이해는 실존론적 물음에서 기인되므로 이러한 이해가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표상들을 반드시 발견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 실존의 이해에 적절한 관계와 표상들은 하이데거의 실존분석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불트만에 의하면 해석학적 전이해를 위한 현존재의 역사내적 실존의 자기 이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실존론적 분석을 사용하여 존재적 내용적 실존적 현존재 이해에 도달한다.
그러나 틸리히는 세계종교의 경전들, 인류의 모든 역사, 종교사, 문학, 미술, 음악, 분석 심리학, 신학, 철학등의 실존적 분석을 통하여, 인간의 실존적 고뇌, 곤경(predicament)과 그것에 관한 질문이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모든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특히 신화는 이러한 실존주의적 요소가 가득차 있다고 본다. 이 신화에는 인간의 곤경이 인간의 참상, 죄, 죽음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양자는 다같이 실존적 분석을 사용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매우 다르다.
넷째, 이들은 다같이 이차대전 이후의 회의하는 지성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동시대적인 언어로 해석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차이가 있다.
첫째, 틸리히는 성서의 언어는 인류가 소중히 간직해야 할 종교적 상징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 상징은 해석자가 임의적으로 비판할 수 없는 (불트만처럼)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표현하는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서 생겨난 종교의 원형적 상징이다. 이러한 위대한 상징들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하여 재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불트만은 신약성서의 신화는 원시적 세계상을 반영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신화론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며 지성의 희생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신약성서는 그 선교의 주제인 구원을 제시할 때 신화적 세계상을 전제하고 있다. 그 신화적 세계상은 세계를 천당, 중앙, 지옥의 삼층 구조로 표현하고 있으며 선교의 언어 역시 신화적이다. 이들은 유대적 묵시문화적 신화론과 영지주의의 구원신화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을 그대로 주장하는 한 현대인에게 케리그마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신학은 케리그마를 그 신화적 윤곽으로부터 벗겨 내는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그 과제로 해야 한다. 신화적 세계관은 단순히 과학이 발달되기 전의 우주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화의 본래적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는데 있지 않고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의 자기 이해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신화는 우주론적으로가 아니라, 마땅히 인간학적으로, 또는 보다 나은 말로 실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은 곧 신약성서가 인간에게 진실한 실존적 결단을 요청하는 자기이해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하이데거의 인간존재에 대한 이해와 동일하다고 본다.
불트만의 이러한 비신화론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보통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며 죽음을 무력화하는 구원을 의미한다. 따라서 부활은 그리스도를 믿도록 강요할 수 있는 기적적 증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사랑 뿐만 아니라 그의 부활에도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둘째, 이러한 재해석의 결과 불트만의 비신화화는 현대인의 자기이해에 복음이 순응되므로, 성서적 언어의 신비성과 그 초월성이 간과되고 있으나, 틸리히의 비문자화는 그리스도교적 상징의 신비와 초월성을 간직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틸리히는 언제나 자신을 경계 선상에(on the Boundary) 서있는 신학자라고 불렀다.
셋째, 이러한 재해석의 결과가 후대의 신학에 미치는 결과는 무엇인가? 불트만의 실존론적 해석학은 철학적 해석학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인리히 오토(Heinrich Otto)의 실존론적 나머지라는 사상을 통하여 심화 확장 계승되었다. 오토는 다시 불트만의 현실적 신앙과 라너의 익명적 신앙의 행위, 그리고 부버의 인격주의를 연결시킴으로서 대화의 신학에로 나아가고 있다.
틸리히에 의하면 교회는 “성령의 드러난 공동체(the Spiritual Community in its manifestation)”이며, 예수의 핵심적 현시 이전의 성령의 현존에 의한 종교집단이나 단체, 다시 말하면 기독교 인본주의, 이스라엘 백성, 이슬람, 고대 종교와 그 신화, 희랍철학, 아시아와 유럽의 신비주의, 청년동맹, 친교집단, 교육적 예술적 운동들, 영적현존이 느껴지는 현자들을 “잠재적 성령의 공동체(the Spiritual Community in its latent)”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의 개방성은 현재까지 종교와 문화, 기독교와 세계, 기독교와 세계종교와의 직접적 대화를 시도하는 대화의 신학, 문화의 신학으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면 이제 틸리히의 자아초월적 성례전적 언어를 발견하려는 비문자화를 수행하는 그 방법은 무엇인가?
4) 상관관계의 방법
틸리히의 신학적 해석학을 수행하기 위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이 그의 유명한 상관관계 방법이다. 이것을 존재론적 분석을 통하여 야기되는 실존적 질문과 성서에 제시되는 신앙의 상징을 상호 관련시킴으로서 그 답변을 발견하고자 하는 신학적 방법이다. 다시말하면 인간의 곤경에 대한 실존적 질문은 계시적 답변을 요청한다. 신학자(해석자)는 이 실존적 곤경에 대한 질문이 위로부터 주어지는 계시적 답변과 일치 또는 상응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적 곤경을 그 자신의 존재론적 분석을 통하여 계시적 답변을 향한 요청으로 제시하고, 해석자는 이미 주어진 종교적 상징을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동시대적이면서, 그 초월적 신비가 보존되는 자아초월적 실재론의 언어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해석자의 과제는 인류역사에 보편적인 실존적 곤경과 그 갈등의 구조를 발견하는 일이 첫째요, 그 다음으로 그와 상호관련되는 계시적 답변을 동시대적 언어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제시하는 일이다. 인류와 문화사에 나타난 인간의 실존적 곤경, 즉 인간의 시간적 공간적 존재로서의 고난, 인간의 유한성과 불안, 육체적 정신적인 질환, 죄와 사망, 과오와 우매함의 문제등이 제기하는 갈등의 구조에 대한 계시적 답변이 이미 성서적 상징으로 주어져 있다. 해석자는 이 갈등의 구조를 분석함으로 현대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곤경과 갈등과 그 갈등에서 제기되는 질문을 먼저 의식하도록 해야한다. 이처럼 질문을 이끌어내고, 이러한 질문이 그들 자신의 질문임을 깨달을 때에, 질문과 질문에 비추어 주어진 답변의 동시대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틸리히는 인간의 이러한 실존적 질문은 신의 답변을 이끌어낼 수는 없으며, 질문의 구조속에 답변이 이미 들어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 인간은 질문이지 답변은 아니라고 하는 것, 답변은 전적으로 신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틸리히는 자신의 방법의 독특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상관관계의 방법은 초자연적 방법을 거부한다. 이것은 그의 교육적 관점과 일치하는 것으로, 인간은 물어 본 적이 없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부터 시작하는 신학적 방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둘째, 자연적 또는 인본주의적 방법을 거부한다. 이것은 인간 실존에서 답변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모든 자유주의 신학과 불트만의 비신화화와 자신의 신학을 구별시키는 요소이다.
셋째, 이원론적 방법을 거부한다. 이것은 초자연적 구조를 자연적 구조 위에 세우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계시에 의한 존재유비를 인정하는 카톨릭 신학에 대한 그의 비판이다.
틸리히는 자신의 신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유지시키는 것은 그의 신학의 체계적 일관성, 즉 해석학적 순환에 있다고 본다. 부분에서 전체를, 그리고 전체에서 부분을 감지할 수 있어야만 종교를 무시하는 현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틸리히 신학의 합리성은 바로 이 방법의 합리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도출해 낸 틸리히의 비문자화된 대표적인 성서의 상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고백하는 하나님은 존재-자체 또는 존재의 근거, 모든 비존재를 극복하는 존재의 능력이며, 이 하나님은 모든 유신론을 초월하는 하나님(God above God), 철학자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시기도 한 분이시다. 타락은 본질에서 실존에로의 변이를 의미하며, 그 타락의 결과인 죄는 소외(estrangement)이다. 소외는 삼중적이다. 하나님, 자신, 이웃으로부터의 소외이다. 그리고 이 소외는 불신앙(unbelief), 정욕(concupiscence), 오만(hubris)으로 나타난다. 이 실존적 소외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새존재에 대한 요청”이다. 이 새존재를 향한 요청은 모든 시대, 모든 종교에 나타난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새존재의 현시는 아니다. 다만-아직은 아님-으로 새존재의 요청의 보편성을 암시할 뿐이다. 이 점에서 틸리히는 종교 통일적 다원주의와는 구별된다.
그리스도인 예수는 바로 실존적 소외속에서 하나님과의 결합을 유지한 새존재의 실현, 새존재의 구원의 능력이며, 십자가를 지심으로 최종계시가 되었고 궁극적인 새존재(the new Being)의 담지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는 그 십자가를 통하여 새존재의 능력을 현시한다. 틸리히는 어느 한곳의 구원능력의 현시는 모든 것(비인간계)에도 구원능력의 현시를 암시한다고 말함으로서 인간 이외의 영역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부활은 심리학적인 내적 사건이다. 부활을 통하여 극복된 것은 육체의 재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옛존재가 사라지고 새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제자들의 황홀적 경험속에서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모습과 새존재의 실재가 확고히 결합되었다. 그는 새존재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에나 현존하는 성령의 현존의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방법으로 인간 나사렛 예수의 구체적인 개인의 생명이 “일시성”을 초월하여 성령으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현존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부활은 예수가 그리스도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동일한 방식으로 구원은 치유이며, 속죄는 “새존재의 능력에 참여하는 것”, 곧 중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존재의 구원하는 능력에 사로잡힘이며, 새존재를 용납하는 것, 즉 자신이 “용납되었음을 용납하는 것(칭의)”이며, 새존재에 의하여 변화됨으로 “성자의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것(성화)”을 의미한다. 성령은 새존재의 “현실성”이며, 그리스도는 옛날의 사건이 아니라 전 역사 속에서 준비되고 그 후 계속되는 역사속에서 그리스도 즉 자신을 실현하는 새존재의 능력이 되신다.
그러나 모든 삶은 애매성의 구조하에 있다. 애매하지 않은 삶의 상징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왕국,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의 영은 “성령의 현존”이며, 하나님의 왕국은 그 사회적 상징과 종말론적 기대로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 중에 모든 것이 되시는 삶의 영원한 성취이다. 영원한 생명은 위의 두 가지 상징을 다 포함하는 상징이다.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는 쉘링이 말한 “본질화(essentialization)”이다. 영원한 축복은 모든 부정의 부정(negation of negative)이며, 새하늘과 새 땅이 성취된 하나님의 왕국의 축복의 보편성을 지시한다. 마지막 육체의 부활이라함은 무력한 영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 즉 성령으로 변화된 전체적 인간의 인격체를 표현한다. 전 인격이 영원한 인격에 참여한다. 육체의 부활에 대한 강조는 “개별적 인격이 영원한 삶에서 제외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부활은 다른 실재의 창조가 아니라 죽음에서 일어나는 “옛 실재의 변형”이다.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영원한 삶은 궁극적 성취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위해 모든 것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틸리히는 “종말론적 범재신론(eschatological pan-en-the ism)”이라 부른다.
4.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폴 틸리히의 신학적 해석학은 궁극적 관심의 언어인 종교적 상징을 전통적인 문자적, 비유적, 심리적, 도덕적, 영적해석과 구별되는 상징의 재해석, 비문자화를 의도한다는 것과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한 방법론적인 상관관계의 방법과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재해석된 용어들을 일별하여 보았다.
불트만의 해석학인 “비신화화”를 염두에 두고 늘 비교하면서 틸리히의 사상을 전개한 것은 현대 해석학의 주요 물결 중의 하나가 딜타이-불트만-가다머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이들과 틸리히의 해석학의 구별성을 부각시켜 보려는 저자의 의도였다.
바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모든 신학은 “나그네의 신학”이며 기다리는 신학이므로, 비판의 여지가 없는 신학은 없다 할 것이다. 특별히 틸리히에 대한 비판은 그 자신이 경계선상에 있다고 늘 말한바와같이 양쪽, 즉 신학과 철학, 그리스도교와 세상으로부터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 못지않게 그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떤 신학의 긍정성 여부는 그 신학이 당대의 영향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살아 있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틸리히의 신학은 아직도 문화의 신학, 중재의 신학, 그리고 다른 종교에 대한 이해와 대화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대화의 신학으로, 그리고 현대신학 그 자체로서 활동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칼 라너와 합께 종교포괄적 다원주의의 한 전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해석학적 관점에서 지적해야 할 문제점은 첫째, 불트만의 비신화화와 마찬가지로 실존론적 협소화로 인한 “해석학적 나머지(hermeneutischer Rest)”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둘째, 그의 자아-초월적 성례전적 언어가 또 다른 해석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가?하는 점이다. 그가 말한대로 영원한 생명을 “신적 생명에로의 본질화”라고 한다. 본질화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 신학적 해석의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세속 한가운데에서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상징을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동시대적인 언어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교의 구원과 치유의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그의 진지한 노력은 신학하는 모든 사람들이 따라가야 할 자세일 것이다. 특별히 젊은 지성인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한국 교회의 상황을 생각할 때에 우리시대를 위한 지성인의 사도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에머리히 코레트.「해석학」. 신귀현 역. 서울: 종로서적, 1991.
리차드 E. 팔머.「해석학이란 무엇인가」. 이한우 역, 서울:문 예출판사, 1995.
한국해석학회.「해석학은 무엇인가」. 서울: 지평문화사, 1995.
전경련.「해석학과 성서언어」. 서울: 종로서적, 1975.
김광식.「토착화와 해석학」.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7.
김경재.「해석학과 종교신학」.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4.
R. 불트만.「성서의 실존론적 이해」(Neues Testament und Mythologie). 유동식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0.
Walter Schmithals. Die Theologie Rudolf Bultmann.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변선환 역,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3.
Tillich, Paul. The Protestant Era. Chicago : Univ. of Chicago Press, 1948.
----------. Systematic Theology vol I. Chicago : Univ. of Chicago Press, 1951.
----------. Systematic Theology vol II. London : James Nisbet & Co., 1957.
----------. Systematic Theology vol III. Chicago : Univ. of Chicago Press, 1963.
----------. Dynamics of Faith, New York : Harper & Row, 1957.
----------. Theology of Culture. ed. by R.C.Kimball. Oxford : Oxford Univ. Press, 1959.
----------. What is Religion? trans. by J.L.Adams. New York : Harper & Row, 1973.
----------.「문화와 종교」. 이계준 역 . 서울 : 전망사, 1984.
Brown, D. Mackenzie. Ultimate Concern-Tillich in Dialogue, New York : Harper & Row, 1965.
Pauck. Wilhelm & Marion. Paul Tillich-His Life & Thought, New York : Harper & Row, 1976.
New Port, John P. Paul Tillich. ed. by B. E. Patterson, Texas : Word Books, 1984.
Ramm, Bernard. A Handbook of Contemporary Theology, Michigan : W. B. Eerdmans Publishing Co., 1977.
황승룡,「폴 틸리히의 그리스도론」.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 사, 1988.
임영금.「칼 바르트와 폴 틸리히의 하나님론 비교연구」, 목원 대학 대학원 : 미간행 박사학위 논문, 1992.
'신학논문 소논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과 한국종교와의 만남 김경재 (0) | 2022.09.24 |
---|---|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신앙론 유정우 (0) | 2022.09.24 |
요한계시록 17:8-14 연구-짐승의 비밀해석 연구- (0) | 2022.08.06 |
성령충만의 실제성에 관한 연구 (0) | 2022.03.07 |
칼빈의 신학원리로서 성경의 사용: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0) | 2022.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