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목회의 근원과 방법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touched)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ministered).
<마태 8:14-5>
예수님이 유대 땅 위에서 하신 일은 '가르치고, 복음을 선포하며, 사람들을 고쳐주신 것'이었다 (마 9:35). 그러하기에 아픈 이를 고쳐주고 병든 이를 낫게 하는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치유는 기독교의 원래적인 역사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치유는 교회에서 뒷문으로 행해지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일상적 예배보다는 특수한 신유집회나 부흥집회에서, 주일 낮 예배 보다는 새벽기도회나 특별기도회 때에, 본 예배당보다는 기도실이나 목양실에서 이뤄지는 것이 되었다. 말하자면 치유사역이 '앞문' 사역에서 '뒷문' 사역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사실, 기독교의 도리나 실제 신앙생활에서 치유가 차지하는 위치가 이렇게 뒷문으로나 통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교회사적인 면으로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신실성이나 과학성을 따지기 이전에, 종교와 신앙은 애초부터 질병의 치료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었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 목표인 구원이라는 말(sozo)이 기실은 병들었던 사람이 나음을 받는 것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예이다. 예를 들면, 마태 9장 21-22장에서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sozo)하였다." 여기서 'sozo'는 구원받았다는 뜻도 있으되 동시에 병이 나았다는 뜻도 함께 의미한다. 비슷한 예로, 마가 5:34, 누가 8:48, 17:19, 18:42 등을 들 수 있다. 물리적으로 신체적으로 혹은 어떤 독특한 난경으로부터 구출해내는 것이 구원의 원래 의미이고 보면, 질환으로부터 구출받는 것이 주요한 신앙적 도리와 실천의 요소였음은 당연한 듯이 보인다.
그 뿐인가. 원래 병고침을 가리키는 헬라어 'therapeia'가 '섬김'(therapon)이라는 뜻의 단어와 어원을 공유한다는 것도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우리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 섬기기 위한 것이었고, 그 섬김이 곧 치유라는 이적으로 나타난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어떤 면에서 누구를 치료한다는 것(cure, therpeia)은 그를 잘 돌본다는 것(care, wait upon)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생활이 늘 이웃을 돌보는 데에 전심하였다면, 그는 곧 병든 이를 치료하는 일에 전력하였을 것임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원하건 원치 않건, 기독교는 치료의 역사와 직간접으로 밀접한 연관을 맺어오고 있었고, 또 우리 신앙의 도리와 신앙의 내용이 질환과 그 치료의 다이나믹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은 수도 없이 많은 치유의 예를 구약과 신약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다. 구약의 출애굽기 15:26은 하나님 당신이 곧 "치료하는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으며, 이사야 예언서는 저 유명한 고난받는 메시야에 대한 노래에서 (53:5)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표현으로서 치유가 구약성서 신앙의 핵심적인 이미지임을 잘 그려주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치료하신다는 측면에서 치유가 구원의 중심적 메타포가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군들이 일상적인 치유를 통하여 그 능력을 드러내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엘리사가 수넴여인의 아들을 고치고 (왕하 4장),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의 질병을 고친 것 (왕하 5장)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우리 예수님의 공생애가 전도와 교육과 치유로 이뤄졌음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전통은 그대로 사도들의 삶에로 이어져서 우리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 앞에서 치유의 이적을 베풀고, 사도 바울이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그가 몸에 지닌 물건들조차 치유의 이적을 일으켰던 보고를 받게 된다 (행 19장). 동시에 이미 초대교회에 병을 고치는 치유가 하나의 은사로 자리잡고 (고전 12:9) 그것이 일종의 교회의 성직 (minor office)으로 혹은 교회지도자의 중요한 기능으로서, 이를테면 병든 사람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함으로 치유를 하는 형식 (약 5:14-5)으로 이뤄졌던 것을 본다.
역사학자들은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내 치유가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을 보통 4세기 즉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부터 공인된 시점으로 본다. 특히 당시에 성행하던 마술이나 통속 치료방식을 교회는 거부하였다. 예를 들어,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한 여인에게 '부적'을 사용하여 어린아이를 치료하기보다는 차라리 어린 아이가 죽어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조언하는 것이 문헌상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런 것들 대신에 기독교적인 의식이나 풍속, 그 중에서도 성인들의 유물이나 유적이 치유의 주요한 도구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적을 통한 치유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고되고 있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의 『신의 도성』22권 8장에도 바로 이런 기적적 치유에 대한 실례가 10여건이나 언급되고 있다. 동방의 교부 바실리우스가 일반의학을 통한 교회의 치료를 권장하였고 기독교 최초의 병원이라 할 수 있는 '바실레이아스'라는 이름의 기관을 설립한 것도 이 무렵이요, 교부 제롬의 친구였던 파비올라 (Fabiola)가 로마에 구호소 및 병원을 설치한 것도 바로 이 시기에 해당한다.
이런 교회의 치유 전통이 중세기에 들어와 수도원을 중심으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치유하는 형태의 사회 및 대민 봉사의 형태로 자리잡게 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모두에서 일어난 사실이었다. 또한 이 시기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말하자면 지역 사회의 얼마되지 않는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유식자로서 또한 의학에 상식을 지닌 의사로서 의료적인 행위에 나섰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하여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의사와 성직자들 간에 치료행위를 놓고 긴장관계가 형성된 것도 여러군데에서 보고 되고 있다. 동시에 중세 후반 의사들로 구성된 의료인 길드가 형성될 때 교회는 그 권한을 부여하고 인증을 하는 일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었다.
특히 십자군운동과 더불어 성지를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런 순례자들을 돕고 치료하는 수도회나 수녀회들이 세워지면서 보다 신앙과 영성을 지니고, 또한 보다 세분화된 봉사의 치료가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병든 이들을 치료하는 'hospital'과, 치료가 불가능한 병에 걸려 가난하고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거주하던 'hospice'가 생겨난 것도 바로 이런 중세시대의 배경으로 하여 이뤄졌다.
이렇게 교회가 사람들의 영혼만이 아니라 육신의 치유까지 담당하여 '앞문' 의 사역을 해나가다가, 은연 중 그것을 '뒷문'의 사역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근대의 과학문명 및 계몽주의 사상과 직결되었다. 시대적으로는 종교개혁과 그에 따른 교회재산들의 세속화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적인 문물이 서서히 서구 기독교사회 속에 퍼져 나가면서 사람들에 대한 치료행위는 세속권력의 감독하에 놓이게 되었고, 따라서 치료는 전문 의료기관이 세속 통치의 관할 하에서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런 근대문명의 전개 속에서 교회와 기독교는 그동안 수행하여 오던 치유를 병원과 근대의학에게 넘겨주고, 대신에 보다 전통적이고 고유한 기독교의 치유영역인 영혼의 병, 즉 죄와 슬픔과 고통을 치유하는 신앙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근대교회의 경건운동과 부흥운동, 그리고 성령운동 및 소종파운동 (cult)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 이후 신세계의 발흥과 더불어 각 교파(denominations)들이 난립하고 그 교파들마다 특색있는 신앙형태와 영혼의 치유의 모습을 보이게 된 것 또한 이런 거대한 시대적 조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영혼의 병과 육신의 질병 사이의 연관관계 속에서 기도나 성령의 역사를 통한 질병의 치유를 주장하는 오순절 계통의 신유운동과 「크리스챤 사이언스」「몰몬교」「제 7일 말일성도교회」등의 치유운동 등이 전개된 것은 말하자면 현대의학에 대한 전통신앙의 치유의 가능성들을 여러각도에서 재활 내지는 회복을 하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 신유 운동이나 부흥 운동이 그 명분이나 주장이 어떠하든 간에 기존하는 전통적 교회와 그 사역에서 '앞문'에서 되어지는 일이기보다는 '뒷문'에서 행해지는 사역 쪽이었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이런 치유의 역사나 주장이 매일 정규적인 예배나 선교에서보다도 특별한 집회나 특별한 장소에서 이뤄지는 특수한 사역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치유가 최근 들어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치유가 교회의 뒷문 사역에서 앞문 사역으로 전환하였다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목회상담이나 심리치료운동을 통하여 치유의 의미가 보다 적극적인 면으로 전환하였다는 것만도 아니다. 사실, 현대목회상담운동의 치유는 전통적인 치유가 악령이나 질환으로부터의 치유만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의 변혁이나 인격의 변화 같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의 치유를 내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이 치유의 의미가 보다 적극적이고 또 폭넓어지고 있다. 우선 우리는 하워드 클라인벨 박사의 "전인건강" (wholeness)이라는 모토를 통하여 치유의 다원적인 모습을 보아왔다. 그것은 육신적인 치유나, 심리적인 치유, 그리고 사회적인 치유, 나아가 영적인 치유의 측면 모두를 포괄하는 온전한 치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최근 클라인벨 박사는 "환경치유" (ecotherapy)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지구환경의 치유와 우주와 자연의 치유까지를 망라하는 개념을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사람만이 치유 받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환경 그리고 우주까지 치유되는 측면을 건강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전적인 치유 개념은 단순히 질병으로부터의 해방된다거나, 저하된 신체 정신 기능을 회복하여 온전히 작동하는 몸과 맘을 갖는다는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이 치유 개념은 그런 소극적인 의미의 치유를 넘어,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내용을 갖는 것이다. 즉 치유된 몸이란 내 몸만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몸이 되는 것이요, 치유된 맘이란 다른 상처받은 맘까지 돌보고 북돋와주는 능력과 사랑을 갖는다는 뜻을 함축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치유는 보다 적극적인 '활인'의 뜻, 즉 사람을 살리되 그로 하여금 온전한 인간으로 남을 위하여 봉사하고, 자연과 세계를 위해서까지 자신을 투여하는 인간형으로 변화하게끔 도와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에모리대학교의 찰스 거킨 교수는 '해석학적인 치유'를 말하고 있는데, 이 책이 최근 『살아있는 인간문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인간이 해석을 하는 존재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의미를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매맞는 아이는 자신이 맞을 짓을 했다고 의미를 부여하면서까지라도 왜 부모가 자기를 때리는지를 이해하려 든다. 그만큰 의미 발견으로서의 해석행위는 인생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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