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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각성과 영적 생활

하나님아들 2022. 1. 12. 15:24
영적 각성과 영적 생활

* 출   처|  김상복 목사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보게 된다
인간 에녹은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는 간증을 남기고 누구나 경험하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갔다. 인간은 여러가지의 삶을 사는데 육적인 삶을 살기도 하고 또 심리적인 지적인 정신적인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와 함께 영적인 삶을 산다. 이것은 인간이 영적인 세계를 발견해서 영적인 것이 계발되기 시작하면 엄청난 영적 생활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에녹같은 사람은 영적인 세계를 발견했기 때문에 죽지도 않고 하늘로 들려갔다. 영의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 육의 세계 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경험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물론 아무나 다 들려가는 건 아니다. 그러나 영의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의 영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그냥 그대로 들려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마저도 영적인 삶 속에 있다. 그것은 그저 한 사람의 얘기만이 아니라 엘리야가 그런 경험을 하고 또 말세가 되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죽음을 경험하지 아니하고 주님 오실 때 그대로 들려올라간다.
이것은 영적인 삶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육의 삶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이 있다. 또 노아도 동일한 간증을 남겼는데 즉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는 간증을 남겼다. 그 결과 세계의 인간과 또 호흡이 있는 생명체가 다 멸망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가족이 되었다. 전세계가 다 죽어도 영적인 삶이 있는 사람은 안죽고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영적인 사람의 가능성은 엄청나다. 도저히 육의 사람으로서 육신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가 그 앞에 있다.
모세도 영의 세계를 알게 된 사람인데 40일 동안 하나님을 만나고 산에서 내려오니까 깊은 영적인 체험이 있었으므로 얼굴에서 광채가 나타나는 것을 경험했다.
또 엘리야는 예수님과 비슷한 기적을 행했다. 아마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서 엘리야만큼
많은 기적을 행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육에 속한 사람이나 육정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데 이 엘리야는 불검을 든 하나님의 천사가 눈에 보였다. 천사를 보지 못한 하인은 영적인 삶이 원만하지 않고 영적으로 강하게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산상보훈에 있는 것처럼 영적인 사람은 마음이 깨끗해지고 하나님을 볼 것이다. 참 하나님이 멀리 느껴지지 아니하고 영의 세계가 멀리 느껴지지 아니하고 천사들의 세계가 멀리 느껴지지 아니하고 바로 눈으로 보듯이 경험하면서 사는 이런 엄청난 가능성이 영적인 사람들에게 있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경우에는 이 사람들이 얼마나 영적인 사람들이고 영적인 삶이 계발됐던지 풀무불 속에 집어넣었는데도 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네번째 분으로 그들과 같이 있어서 이 세사람과 대화하고 그 불 속에서 서로 거닐었다. 보통 인간의 세계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세계가 영적인 사람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과 같이 아주 영적으로 극히 계발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하고 올 수 있도록 하셨다. 이런 세계도 영적인 사람에게는 있었다.
사도 요한도 마찬가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사도 요한같은 분은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보고 너무 황홀해서 거꾸러진 그런 경험을 하기도 했다.(요일 1)
우리와 똑같은 혈, 육을 가진 사람들이요 비슷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영의 세계가 극단적으로 계발됐을 때 이런 경험을 한 것이다. 역사에서 사라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기에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차원의 영의 세계를 경험했을까 영의 세계를 아는 사람은 역사적으로 봐도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육신의 세계만 발달됐다. 이런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으로 인생을 끝낸다. 쉽게 말하면 동물적인 삶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사람 가운데 얼마의 사람들은 지적인 정서적인 또는 문화적인 계발을 통해서 문화적 또는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다. 미술관에 가서 그 조각을 보면서 즐기기도 하고 그림도 그리면서 베토벤의 심포니 등을 들으면서 황홀해 하기도 하고 이 육신의 세계만이 아니라 또하나 지성적인 세계를 가지고 산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육과 혼의 세계와 더불어 영의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육이나 혼처럼 제한된 영역 정도가 아니고 엄청나게 넓고 또 다른 차원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살고 있다. 이것은 결국 영적인 생활이다.
우리가 영적인 세계라 할 때는 성령의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 사람들의 삶을 말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에 대해서 민감하면서 성령의 운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일은 대단히 감사한 일이다. 너무도 이성과 지성세계만 추구하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역사적으로 증명하려 들고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들었다. 그런 세계에서 이제는 좀더 영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운동이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한가지 우리가 특별히 조심해야 되는 것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이 뭔지 왜 성령님이 오셨는지 성령님은 누가 보냈으며 그분이 이 땅에 와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면 이 영적인 운동 특히 성령운동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운동이 곧 성령운동이다
요한복음 14장 16절부터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때 보혜사라는 단어는 변호사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내 바로 옆에서 나와 함께 하고 싶지만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한 곳에 한번 밖에 있을 수가 없으므로예수님과 똑같은 하나님인데 육체를 가지지 않은 영이신 분이 오신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겠다”고 했다.
15장부터 보혜사가 하실 일이 무엇인지 나타난다. 보혜사가 하는 일은 한가지다. 그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성령이 움직여도 예수님이 나타나고 누워도 예수가 나타나고 말씀을 해도 예수님이 나타나고 기침을 해도 예수님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다.
또 계속해서 16장 13절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라고 했다. 성령은 성령으로 말하는게 아니다. 성령께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말하는 분이 아니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한다. 14절을 보면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 대신에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할 것이고 자기의 영광을 선포하거나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거나 자기 자신을 드러내거나 하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성령 운동이다. 자신을 자랑하고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위하고 자기 이름을 내놓고 자기를 찬송하고 자기만 영광을 받는 그런 것은 성령이 하는 일이 아니란 말이
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면 성령 운동은 곧 예수 그리스도 운동이요 자나깨나 먹으나 굶으나 십자가에 달리나 핍박을 받으나 무엇을 하든지 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 이것이 참된 성령운동이다. 모일 때마다. 성령 성령 성령만 자주 이야기하면 그것은 20C의 성령운동일 수도 있고 미국의 성령운동일 수도 있고 한국의 성령운동일 수도 있고 어떤 교파의 성령운동일 순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운동은 아니다.

영적 각성이란 무엇인가? 영적 각성이란 것은 예수 오직 예수를 깨닫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켜 주실려고 하시는가 성령을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께 물어보면 된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고 영적인 생활을 하려면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영혼 속에 모셔야 한다. 예수하고 개인적인 직접적으로 경험적으로 상관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생활을 아무리 말해도 영적인 것에 해당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곧 성령께서 그 시간에 그 마음 속에 임재하셔서 그 순간부터 성령이 내주하고 계신다. 이제 영적 생활을 할 준비가 돼 있다.
또 12절 13절을 보면 이런 사람들은예수를 주님으로 모셨을 뿐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 안에 내주하실 뿐 아니라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사는 사람들이다. 어느 박사의 가르침을 받아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어느 유명한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가르쳐주는 그 은혜 그 진리를 깨달아 사는 사람들이다.
때때로 목회자들이 도움이 된다. 그들이 설교를 잘하고 잘 가르치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그분을 참 좋아한다. 그러나 목사가 가르쳐준 것을 깨닫는 것보다 우리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내 가슴 속에 하나님의 영이 살아계셔서 내가 성령으로 감동하여 쓴 이 말씀으로 그 말씀 속에 있는 성령님과 내 가슴 속
에 있는 성령님이 하나가 돼서 그 진리를 깨닫게 됐을 때 그 진리가 더 큰 것이다. 거기에 영적인 성장이 있다. 때로 목회자들은 신학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머리만 발달했고 하나님의 영적인 상태나 그들의 가슴이 발달돼지 않아서 오히려 딱딱하기만 하고 우리의 영혼을 움직이지 못하는 위험성도 있다. 머리만 쓰니까 하나님의 영은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의 가르침을 받아 살지 않기 때문이다.
또 15절에 보면 영적인 진리를 배우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14절에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면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이해할 수 없고 또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누가 영적인 사람인가
다음은 참 영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하는 문제이다. 참 영적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자다. 사고방식과 가슴이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자 즉 다시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닮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으로 영적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사람들이다.
조금 다르게 말해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영성 영적인 모습이란게 어떤 것인가 생각해 보자.
첫째로 참된 영성이란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수양을 하거나 자기가 자기 자신을 개혁을 해서 자기를 바꿔논 상태가 아니다. 때때로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많은 수양을 할 수 있다. 특히 불교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많은 수양을 하는가 참된 영성이란 것은 나의 종교적인 노력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3장 23절을 보면 율법의 행위로냐 고 묻는다. 대답은 아니다. 이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나의 삶이 변화가 있고 영적인 삶이 있는 것이지 나의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흑인을 백인으로 만들 수 없는 것처럼 표범이 그 반점이 있는 것을 없앨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가슴 속에는 악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인간이 스스로 참된 영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한다.(렘 13:23) 자기 스스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참된 영적인 삶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율법의 체계도 아니다. 빌립보서 3장 9절에 보면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한다. 처음도 믿음이요 중간도 믿음이요 마지막에도 믿음이다. 오직 예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하나 이 속에 참된 영적인 삶이 들어있다.
이사야서 64장 6절에도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
고 들어간다”고 했다. 참 내가 원치 않는데도 내 가슴 속에 죄라고 하는 엄청난 바람이 불면 나도 모르게 끌려간다. 우리 인간 속에는 아무리 수양을 해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그 영적인 삶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이 하나도 없다.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찾는 자도 없다. 우리 속에 어떠한 영적인 삶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나의 노력이나 나의 수고나 나의 공로나 나의 수양으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노력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저 “주여 주님의 성령이시여 내 마음에 역사하옵소서 내 가슴에 역사하옵소서 내 머리에 역사하옵소서 내 눈길에 역사하시고 내 손길에 역사하시고 내 발에 역사하시고 내 몸에 역사하옵소서” 할 때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그때만이 하나님의 영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속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이다. 여기에 참된 영적인 삶이 있다.
셋째로 참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일련의 좋은 영적인 습관도 아니다.(딛3:4-5) 기도 성경읽는것 교회봉사하는 것 전도하는 것 이와같은 좋은 영적인 습관들은 영성이 생김으로 나타나는 결과에 불과하다. 그래서 QT, 영성훈련, 제자훈련 등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지만 이런 것을 훈련시킴으로써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영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가슴에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들이라는 말이다. 영을 계발하기 위해서 QT하고 성경을 읽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이 좋아서 해야한다. 마치 내가 좀더 잘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좋아서 해야한다. 그분이 좋아서 만나기를 원하고 그분이 좋아서 얘기하고 그분이 나와 함께 계셔서 같이 의논하는 것이지 마치 판에 박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모습 그것만 가지고 영적인 삶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참된 영성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
리스도를 마음 속에 모시고 그분을 나의 구주로 모신 사람이다. 이것은 영적인 삶의 전제조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구주로 우선 영접하지 않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신앙적인 훈련을 해도 영적인 삶을 사는 기독교인은 될 수가 없다. 많은 경우에 성화의 과정을 보고 기독교라고 오해하기도 하고 구원과 혼동하기도 한다. 즉 신앙적인 생활 그 자체를 놓고 기독교 또는 신앙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영적인 삶을 사는 기독교인은 성령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을 때에만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과 옳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 뿐만 아니라 그 성령님이 나의 성령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해주신 분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준 분이요 나의 눈을 뜨게 한 분이요 나의 귀를 뜨게 하신 분이며 나로 하여금 마음의 움직임을 주셔서 내 마음문을 열고 영적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받아들이게 한 분이다. 그래서 내 안에 우리 주님께서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살아계시고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들에게 영적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셋째는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 자신의 삶과 인격이 재현되는 책임은 전적으로 성령님에게 있다. 로마서 8장 2절에 보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해방시킨다고 했다. 성령께서 움직이기 시작하실 때에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영광에서 영광으로 변화돼 가는 것이다.(고후 3:18)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도 너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내가 해산하는 고통을 한다고 한다. 참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는 처음도 예수 그리스도요 둘째도 예수 그리스도요 마지막도 예수 그리스도이다. 참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전체적인 목적이다.

결론적으로 참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 인격과 우리 생활환경 속에서 다시 한번 육신을 입고 사시는 모습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가정과 직장에서 동네와 교회에서 한번 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재현시킴으로 그분의 사고방식 그분의 느낌 그분이 좋아하는 것 그분이 하고 싶어하는 것 그분이 원하는 것 철저하게 아버지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모습 등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때 이것이 바로 참된 영적인 생활이다. 참된 성령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참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그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예수님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의 모습이 무엇인지 예수가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예수가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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