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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경의 근거

하나님아들 2012. 10. 17. 16:00
- 게시물제목 : 신약 성경의 정경적 권위의 근거 150 - 조회
- 작성자이름 :   2004/04/03 - 등록

신약 성경의 정경적 권위의 근거

- 신약정경 문제에 대한 신학적 고찰 -



I. 서론



성경은 역사적/문학적 문헌으로서 다루어 질 수도 있지만, 교회가 그것을 신적인 권위를 가진 책(정경)으로서 받아들인 사실로 인해 규범적 문헌으로 (교회와 교회의 학자들에 의해) 다루어 질 수 있다. 규범적 문헌으로 성경을 다룬다는 것은 성경이 교회에 무슨 삶의 양식을 명령하는가를 듣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교회에 의하여 권위있게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은 성경의 실정법적 권위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는 단지 교회의 정경수납에서 오는가? 즉, 정경적 권위는 교회가 만든 것인가? 아니면, 성경의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즉, 교회는 무슨 근거로 성경을 권위있는 책(정경)으로 받아 들였는가? 이 글은 이러한 성경의 권위의 근거와 그 관련문제들을 신약성경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II. 신약성경의 권위의 근거



A. 정경적 권위의 근거: 예수



신약의 권위는 예수의 권위에 의존한다. 이 예수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만드셨고, 교회는 예수를 교회의 주로, 메시야로 고백했다. 즉, 교회는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이 권위는 예수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롬 1:4).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자기주장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선언으로 오해되어 (마태 26:65-6; 마가 14:64-5)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했다. 돌로 치는 대신, 하필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 십자가 형을 택한 것은 예수를 모세의 법(신 21:23)에 의해 저주받은 자라고 선언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1)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율법을 이용한 저주 선언의 의도를 좌절시키고, 오히려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자기주장이 정당하다는 신적 선언을 가져온다.

그런데, 부활은 과연 역사 속에 일어난 사실인가? 예수는 메시야라는 신앙의 발생은 부활의 역사성을 그 원인으로서 요청한다. 부활은 왜 갑자기 예수는 메시야라는 신앙이 발생했는지 설명해 준다. 신앙이 허구로 부활신화를 만들었다는 설명은, 여전히 신앙이 어떻게 발생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짐을 지고 있다. 더구나 사도들이 자신이 만든 허구를 믿고 전하며 순교를 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또한, 부활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현대과학의 한계는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수천개의 신약성경사본들은 원본이 언젠가 있었다는 것을 요청하듯이, 수 많은 초대교인들 가슴에 생기고 2천년 동안 전해 내려온 예수는 메시야라는 신앙은 그 발생원인을 요청한다.



B. 정경성의 기준들



예수의 권위는 예수에 대한 전통들을 전수한 많은 자료들을 정경화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거의 모든 교회들이 현재 우리가 가진 27권의 성경을 권위있는 전통을 담은 저작(정경)으로 판단했다. 교회는 어떤 기준으로 정경을 다른 저작들로부터 구별했는가? 우리의 27권 정경의 정당성은 그 정경식별기준들의 정당성에 의존한다.



  1. 사도성



2-3 세기의 교회는 사도성을 정경성의 기준으로 사용했다.2) 사도들의 권위는 예수에 의해 공인된 권위이므로 이 기준은 정당하다. 그리고, 사도성이 사도 자신의 저작권이 아니라 사도적 전통을 의미한다면, 대부분의 신약성경은 이 기준에 합당하게 선택된 것이다.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의 사도성은 전통적으로 수납되어 왔으며,3) 마가복음은 (Eusebius가 전하는 Papias의 증언에 의하면) 사도 베드로에게로 소급되어 졌고,4) 누가복음은 사도 바울에게로 돌려졌다.5) 야고보서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보이신 (고전 15:7), 예수의 형제 야고보(갈 1:19)에게 돌려졌으며,6) 유다서는 야고보의 형제 유다에게 돌려졌다.7) 바울의 서신들은 사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는데, 이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바울에게 위탁하신 사도적 사명 때문이다 (행 9:3-6, 15, 갈 1:1).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에게 의심없이 돌려져 왔다.8)

"무라토리안 캐논"은 "베드로 묵시록"을 정경으로 언급하지만, 이 저작의 비사도성은 명백하여 결국 정경으로 받아들이지지 않게 되었다.9)



  2. 고대성 (사도성 판별 외적 기준)



고대성은 사도성 판별을 위하여 도움을 주는 기준이다. 어떤 저작이 사도나 그 측근의 것이라면, 이것은 그들의 시대에 속하여야 할 것이다.10) 바로 이 기준에 의해 후기 저작 "헤르마스의 목자"는 사도적 저작으로 받아들여 지지 않게 되었다.11)



  3. 정통성 (사도성 판별 내적 기준)



정통성이란 사도적 신앙, 즉 사도적 저작 속에 진술되어 있고 사도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 속에 전해 내려온 신앙을 뜻한다.12) "베드로 복음," "베드로 행전" 등은 일부 비정통적인 내용으로 인해 정경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13)



  4. 전통성 (고대성 지원 기준)



교회가 어떤 저작을 전통적으로 고대로부터 사용해 왔는지 여부도 정경성의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이 기준은 고대성에 대한 부차적 증거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생겨난 저작은 그 저작 연대를 모를 경우에 그것이 만일 고대로부터 있었다면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다라는 논리로 거부될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 복음"은 이 기준에도 맞지 않아 정경으로 편입될 수 없었다.14)



  5. 역사성 (정통성 제한 기준)



"바울 행전"은 이단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지만, 비역사적임으로 인해 거절되었다.15) 이 책의 저자는 심지어 그의 장로로서의 직책을 박탈당하였다.16) 모든 역사적인 책이 정경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지만, 비역사적인 책이 정경으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다.



  6. 결론: 사도성



위의 정경성의 기준들은 참된 몌시야 예수의 전통을 보존하는 저작들이 정경으로 수납되게 작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신약정경은 진짜 예수를 제대로 반영하는 글모음으로 신뢰될 수 있다. 신약성경은 예수와 기독교 전통에 대한 가장 신뢰할 만하고 가장 오래된 기록을 우리에게 제공한다.17) 신약성경보다 더 나은 예수에 대한 증언은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다. 정경형성사는 수많은 사이비 저작으로 부터 참된 예수 전통을 보존한 역사로서, 이것이 고대교회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후대의 혼란을 막은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요한 2서, 요한 3서, 요한계시록은 위의 기준에 의해 정경으로 수납되기가 힘들지만 정경형성사 속에서 대부분의 교회가 정경으로 수납하였다. 이 저작들은 사도 바울, 사도 베드로, 그리고 사도 요한의 이름으로 정경 속으로 들어왔는데, 사도성이 문헌의 기원보다는 사도적 권위을 담은 전통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이 저작들은 고대교회에 의해 사도적 전통을 담은 것으로 파악되어 사도들에게 돌려졌고, 따라서 정경으로 수납될 수 있었다.



III. 교회와 정경



1. 우선성과 우월성



교회는 한동안 정경없이 구전을 가지고 존재해 왔다. 그 후에 구전의 보존이 어려워지면서, 신약성경이 교회에 의하여 정경으로 수납되었다. 그렇다면 교회의 권위가 신약성경의 권위보다 높은가? 아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도적 가르침에 의하여 형성되었고, 신약성경은 이러한 사도적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가 성경을 정경으로 수납했다는 사실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 밑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정경을 형성시킨 고대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를 구별해야 한다. R.P.C. Hanson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Between the years 100 and 150 the Church was in a position to know what were authentic and original records of Christianity and what were not; but as the years went on the Church inevitably found itself no longer in this position.18)



당시의 교회는 사도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고, 그 전통으로 정경을 구별해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신약성경외에 사도적 전통을 따로 가지고 있지 않다.



2. 정경은 열려있는가?



사도후기 시대는 사도적일 수 없다. 따라서 정경적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오늘날 쓰여지는 어떤 저작도 정경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사도적 전통이 담긴 저작(cf. 1 Cor 5:9)이 발굴된다면 그것은 정경으로 수납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대교회가 그 저작의 진정성과 정경성에 대하여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신약으로 부터 어떤 책들을 비정경화할 수도 있는가? 현대의 교회가 엄밀한 정경성의 기준을 다시 세우고 학문적으로 다시 정경을 정비할 수 있겠는가? 이것도 원칙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비정경화는 정경화 못지않는 권위가 필요한데 현대의 교회들에게는 그러한 권위가 없다. 또한 현대 교회들이 이러한 결정에 있어서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IV. 신학과 정경



1. 정경 속의 정경?



신학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로 성경 전체를 통일성 있게 설명하기를 원하고 이 주제에 맞는 것을 정경 속의 정경, 즉 정경 중에서도 참으로 권위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신학적 측면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아무리 그것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다양한 주제들의 파악을 방해하고 교회의 연합을 파괴한다.19) 한 가지 주제에 대한 배타적 강조는 우리를 분파주의 내지는 이단으로 만들 우려가 있다.20) 보편교회는 우리가 신약전체를 총체적으로 고려할 때 기대될 수 있다.21) 신약성경의 다양성이 교회연합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으로부터의 이단적인 취사선택이 교회의 통합을 파괴한다.22) 더구나, 한 주제의 배타적 고집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교회가 자기 개혁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



2. 정경과 해석



신약성경의 정경화는 신약해석에 있어서 통일성을 그 다양성보다 강조하게 만들게 된다.23) 그러나 이 통일성의 파악은 다양성을 희생하면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또한 전체의 파악은 부분의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므로 각권의 연구를 그 역사적인 맥락에서 할 필요가 있다.24)

신약전체의 통일성에 대한 파악만을 정통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신약 각권에 담긴 신학 모두가 정통인가? 만일 우리가 통일성만을 정통이라고 부르면, 이것은 통일성을 서로 다르게 파악한 교회들이 서로 자기만이 정통이라고 우기며 상대를 이단시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신약의 어느 다양성 중의 하나만을 정통이라고 부를 경우 이것은 다른 측면을 강조하는 교회를 정죄하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테두리 안에서 기원한 신학이라면 모두 정통으로 부르는 것이 분파주의나 독선적 자칭정통주의를 막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V. 복음서의 다중성, 신약성경의 다양성 그리고 교회의 연합



복음서의 다중성은 성경의 권위 문제에 대한 걸림돌이 되어왔다. 만일 서로 차이를 보이는 모든 복음서들이 절대적 권위를 주장한다면, 이는 결국 모두가 상대적인 것을 드러내고 말 것이다. 결국 복음서들은 최종적인 권위를 예수께로 양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다중 복음서는 기독교가 정경수납의 과정에서 책이 아니라 예수가 최종 권위임을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한 복음서에로의 제한은 실제와 실제에 대한 (한 가지 시각에서의) 인식을 혼동하게 한다.25) 그러나, 우리는 어떤 한 복음서도 그 자체로 이미 정경의 일부임을 또한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떤 한 복음서에 대한 강조도 다른 복음서를 강조하는 다른 교회들을 정죄하지 않는 한 역시 정통으로 용납되어야 한다. 복음서의 다양성은 신약정경의 테두리 내에서의 다양성이다. 그것은 정경의 테두리 내에서의 용납 가능한 정통성 있는 다양성이다. 그리고 이 정경적 다양성은 다양한 많은 교회들을 모두 정통으로 인정되게 한다.26)

정경의 권위로 교회를 개혁한 개혁교회도 정경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상실한다면 다음 시대에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개혁할 힘을 잃게 된다. 실제로, 개혁자들이 사용한 '오직 성경'의 구호는 '오직 성경의 한 부분'으로 오해되고, 이것은 '오직 교회의 한 부분만'으로 오용되어, 개혁교회는 계속적인 개혁 대신 계속적인 분열을 실현했다.27) '한 번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자들의 가르침은 그 제자들에 의해 '한 번 분열된 교회는 계속 분열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뒤틀리게 실천되고 말았다. 정경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 내가 이해한 성경이 성경 전부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겸손한 자각, 최종 권위는 예수께 있다는 깨달음은 우리를 자신이 속한 교단과 교파만을 정통이라 부르며 정당화하는 독단에서 벗어나 다른 교단과 교파를 동일한 신약성경을 받아들인 보편교회의 구성원으로 존중하도록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혁교회내의 집안 싸움과 분열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VI. 결론



신약성경의 권위는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 의존한다. 그러므로, 신약의 권위는 교회 위에 있다. 교회는 늘 신약을 통하여 예수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점을 고치는 노력을 해야하며, 정경이 요구하는 삶을 향해 매진해야 한다. 신약은 교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법이다. 이 법을 주야로 묵상하며, 이 법에 따라 가정과 교회를 운영하고 나아가 사회에서도 이 법에 따라 살고자 하는 자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법이 지배하는 나라를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그리스도의 나라라고 부른다. 이 나라는 장차 올 새 하늘과 새 땅의 질서를 미리 예표하는 예언자적인 기능을 지금 이 땅에서 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는 옛 질서와 가치관을 버리고 (즉 회개하고, 새 법을 받아 들이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1. Cf. Seyoon Kim, The Origin of Paul's Gospel, Tubingen: J.C.B. Mohr 1981, pp.258-59, 274.

2. F.F. Bruce, The Canon of Scripture, Glasgow: Chapter House 1988, p.257f.

3. Bruce, 257; cf. Eusebius, Historia Ecclesiastica, iii.38.16; and Irenaeus, Contra Haereses, iii.1.

4. Eusebius, iii.39.15.

5. Irenaeus, iii.1.1; Eusebius, iii.4.7; Muratorian Canon, lines 3-6.

6. Bruce, 258.

7. Bruce, 258f.

8. Bruce, 259.

9. Bruce, 261.

10. Bruce, 259.

11. Muratorian Canon, lines 73-80.

12. Bruce, 260.

13. Eusebius, vi.12.2-6; Bruce, 261.

14. Eusebius, vi.12.3.

15. C.F.D. Moule, The Birth of the New Testament, London: Adam and Charles Black 1962, p.190.

16. Tertullian, De Baptismo, 17.

17. C.M. Tuckett, Reading the New Testament, London: SPCK 1987, p.14f.

18. R.P.C. Hanson, Tradition in the Early Church, London: SCM 234f.

19. R. Gnuse, The Authority of the Bible, New York: Paulist Press 1985, p.93.

20. Gnuse, 93.

21. H. Kung, "Der Fruhkatholizismus im NT als kontroverstheologisches Problem," in Das Neue Testament als Kanon, ed. E. Kasemann,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0, p.198.

22. Kung, 188.

23. Bruce, 290.

24. Bruce, 296.

25. R. Wall & E.E. Lemcio, The New Testament as Canon, Sheffield: JSOT Press 1992, p.31.

26. J.D.G. Dunn, Unity and Diversity in the New Testament, London: SCM 1977, pp.376f.

27. Kung, 199.

출처 : 사이버신학교
글쓴이 : 늘새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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