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신학
안명준교수의 현대신학 강의안 1
安明俊 敎授 (M.Div., Th.M., Th.M., Ph.D.)
머리말
이 강의안은 기본적인 신학의 지식을 가진 신학생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현대 신학자들의 신학사상과 그들이 시도한 신학 방법과 성경 해석 방법을 중심으로 쓰여졌다. 1997년 3월부터 6월까지 기독신학교에서 강의했던 것을 중심으로 가급적 쉽고 간결하게 구성되었다.
현대의 모든 신학자들을 짧은 강의와 지면에 자세하게 다룬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심적인 인물들을 선택하여 그 범위를 줄였고 그들의 신학사상을 세밀하게 전체를 다룬다는 것 또한 힘들기 때문에 신학생들에게 맞는 수준의 내용들을 선택하여 제한적으로 다루었다.
신학자들의 주장을 가급적 그들 자신들의 진술들을 가지고 다루었고, 그 내용을 인용했고, 그들의 사상을 다른 학자들의 견해와 더불어서 객관적으로 표현하였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입장을 신학적인 영향과 공헌에서 보았고,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현대 신학자들을 비평도 하였다.
이글을 읽는 분들이 이 강의안을 통하여 많은 즐거움 속에서 현대 신학자들의 고민과 그들의 연구 방법, 성경 해석 방법, 철학과 신학의 관계, 신학과 삶의 현장과의 관계, 그리고 현실의 삶과 이상이라는 긴장 속에서 조그마한 힘을 얻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安明俊 1998년 2월 개봉동에서
서론
기독교 신학의 흐름
초대교회에도 오늘날과 같은 조직화된 기독교의 신학이 실재로 존재했는가? 여기에 대한 답을 하자면 쉽게 아니요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름대로 신학의 형태를 가진 인정된 가르침과 모양은 있었다. 지금 형성된 신학의 조직체계나 내용들과는 동일하지 않지만 신학이라고 볼수 있는 그 당시의 사상과 형태가 존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별히 초대 교회의 신학은 사도적 교부들과 변증자들의 문헌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중심 교리와 신학방법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의 신학적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주이며, 구약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기독교의 참된 주체성을 변호하는데 있었다.
초대 교부들의 시대에는 교회의 형태가 오늘날처럼 나타나고, 거기에 따른 교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단적인 교리와의 논쟁을 통하여 건전한 성경적인 전통들이 체계화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당시의 교부들은 당시에 있던 철학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진술하고 모양을 가다듬었다. 예를들면 클레멘트와 오리겐은 필로를 통하여 플라톤의 이원론 사상을 신학의 방법과 성경해석에 도입했고, 어거스틴은 신 플라톤 철학을, 터툴리안는 스토아 철학을 이용하여 기독교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이때로 부터 본격적으로 헬라의 철학과 라틴 사상이 기독교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중세기는 교회의 조직화와 교권화, 세속에 대한 지배 과정으로 역시 가장 성공한 도시의 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였다. 가장 영향력있는 로마시를 중심으로한 구교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신학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의 시녀로 삼고 성경의 참된 가르침에 멀어져 갔다. 로마 교회의 신학이란 교황의 권위에 의한 강권의 신학으로 그 핵심은 성례전(sacramentum)에 나타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개념을 도입하여 은혜의 주입사상(gratia infusa)과 화체설(transubstantiatio)등의 중요한 로마카톨릭 신학을 만들어냈다. 지나친 철학의 의존은 성경 해석을 흐리게하고 신학을 올바르게 발전시키지 못한것을 보여준다. 하르낙이 주장한 견해는 - 헬라의 형이상학에 물들은 로마카톨릭 교회가 예수의 단순한 교훈을 왜곡시키고 부패시켰다 -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부패한 로마 카톨릭 신학을 개혁하려는 시도가 루터와 쯔빙글리 그리고 부쩌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개혁자들은 교황의 권위에 대항하여 오직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오직 구원을 위하여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 칼빈은 2세대의 개혁자로서 선배들의 개혁사상을 완성하여 후대에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성경 해석에 있어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트렌트 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사용하는데 성경 해석의 권리는 개인에게 있지 않고 추기경이나 감독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권위있는자가 반드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개혁자들은 성경의 명료성을(the clarity of Scripture) 강조하였다. 예를들면 기독교의 구원진리에 관해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누구에게나 이해하는데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 성경의 명료성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새로운 성경해석 원리를 사용하도록 했다. 성경 해석의 대가로서 칼빈은 성경의 명료성은 자신의 신학적 성경해석 방법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칼빈은 자신의 독창적인 성경해석 방법으로 간결성과 용이성(brevitas et facilitas)의 방법을 사용하여 독자들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개신교의 성만찬 해석에 관한 논쟁 있어서 루터와 쯔빙글리가 말버그 회의(Marburg Colloquy, 1529)에서 갈라짐으로써 루터파는 공재설을, 쯔빙글리는 기념설을, 앞서 두견해의 중간에 위치한 칼빈은 영적 임재설을 주장함으로서 일치를 보지 못하고 마음의 상처가 깊어져 가고 있었다. 지역과 나라, 언어와 문화를 따라 루터파, 칼빈파, 재세례파로 구분되어 각자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이 기간을 특히 정통신학의 기간으로 부른다. 개혁자들의 후예들은 초기에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기독교 교리의 순수성을 밝히려고 노력했으나 차츰 자신들이 속한 교파의 울타리를 치고 경계심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소위 말하는 정통신학과 정통교회는 단순한 성경의 진리를 파수하고 전파하기 보다는 자신들이 만든 교리를 스콜라 신학으로 만들기 시작하여 실제 성도들의 삶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바로 이때 죽은 정통에 반기를 들었던 운동이 슈페너를 중심으로한 경건주의였다. 이 운동은 딱딱한 교리보다는 실제적인 기독교의 삶을 강조하고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정통주의와 경건주의 모두는 장점이 있었지만 한쪽면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기독교의 진리와 본질을 현실의 문제와 적절하게 조화를 균형있게 보여주지 못했다.
르네상스의 열기는 식지 않고 인간의 중요성을 모든면에서 인식시켜 주었다. 데까르트 부터 시작하여 칸트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영향으로 지성인들은 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에 최고의 심판권을 부여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성경은 인간의 이성과 체험 의하여 즉 인간의 인식 한계 안에서 역사적이며 비평적으로 비판을 받게되었다. 자유주의 신학과 현대신학의 뿌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중심적인 방법이란 기존의 정통적인 신학 방법을 파괴하고 인간의 이성, 감정, 체험이 중심이 되어서 어떤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주관적으로 신학을 전개시키는 신학이다. 사실상 19세기는 자유주의 신학이 활개를 치고 기존의 정통신학을 유명무실했었다. 기라성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영향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20세기가 마감하는 현대까지 살아있다.
이런 막강했던 자유주의 신학을 정통주의에서는 막을 힘이 별로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칼 바르트의 출현으로 맹수와 같이 기독교의 신학을 휩쓸고 다녔던 자유주의 신학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리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기독교의 신학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기존의 정통신학으로 들어오기에는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불트만과 폴 틸리히 이후에 현대신학은 급진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걷잡을 수 없는 신학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심지어 사신신학까지 가게 되었다. 최근 신학계에는 어떤 돌풍은 없는 듯하다. 지난 200년간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었기 때문인지 신학을 사회와 인간, 그리고 문화와 환경에 조화시키려 조용한 분위기가 이는것 같다. 하지만 포스트모던니즘이 영향으로 현대신학을 붕괴시키고 다시 새로운 21세기의 신학의 출현을 예상해야 할 것이다.
현대신학의 정의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도시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운동은 인류역사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왔다. 문예부흥은 고대 헬라와 로마의 인간 중심적인 연구를 부활시킴으로서 인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강력하게 주었다. 이 운동은 종교적으로 에라스무스나 부데와 같든 기독교 인문주의자들을 통하여 종교 개혁자들에게 신학적 방법론에 큰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는 후에 기독교를 비판하는 입장으로 변하면서 인간의 이성을 최고의 권위로 만들게 되었다. 바로 이런 맥락속에서 현대신학의 뿌리는 거슬러 연결되어 있다. 현대 신학은 시대적인 유산으로 17세기에 싹이 나고 19세기에 영양분을 많이 섭취하여 다 성숙한 강한 나무처럼 현재까지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는 시대적인 특징을 가진 오늘날의 신학을 가리킨다. 왜 현대(modern, contemporary)라는 말이 신학이란 말 앞에 붙였는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현대에 상황에 독특한 스타일과 특성을 가진 까닭에 학자들이 말하기 때문이다. 또 현대 신학이란 현재에 주도적인 신학을 말한다. 부분적인 신학이 아닌 전체 신학계에 알려지고 시행되는 신학으로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는 신학을 말한다. 현대라는 말과 관련하여 현대주의란 후기 칸트주의 신학을 특징짓는 말로서 경멸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말은 16세기 이후로 고대보다는 현시대를 보다 높이 존중하는 경향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19세기에 개신교도들은 이말을 종교적으로 사용하였고, 현대의 반기독교적인 경향과 자유주의 신학의 급진주의를 또한 가리킨다. 현대신학의 이런 배경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광의의 의미에서 현대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란 말과 교환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현대신학은 기독교의 전통적인 개념인 계시, 신앙, 교리등을 근대의 자연과학과 철학의 방법에서 이용한 역사적- 비평적인 방법을 통하여 새롭게 재해석하려는 것이 주목적이다. 이것은 인문주의자들이 헬라의 고전을 언어학적, 문법적, 역사적인 방법으로 해석했던 것과 그 패턴이 유사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현대신학은 일반적으로 말하여 스위스의 조그마한 마을 자판벨에 있는 칼 바르트의 서재에서 1919년에 출생한 것으로 본다. 물론 이 연도는 바르트의 세계적인 명저 로마서 강해(The Epistle to the Romans, Der Romerbrief)의 출판을 말하는 해이다. 물론 바르트 이전에 현대적인 사상을 가진 신학이 있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신학을 지금의 현대신학과 분명하게 구분하여 그 명칭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이 신학의 아버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슐라이에르마허이다. 그 이후에 리출, 헤르만, 하르낙, 바우어, 스트라우스, 슈바이처등이 있다. 이들의 영향을 통하여 현대신학자들이 태동되었다. 개혁주의 신학에서 냉철하게 볼때 이들은 정통라인에서 벗어났지만 특히 슐라이에르마허와 바르트 그리고 불트만등은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거대한 신학자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1. 자유주의 신학
복잡한 현대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첫 단계로서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현대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다른 변신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형성되었지를 그 사상적 배경을 살펴 보려고 한다.
1. 자유주의 신학이란?
자유주의 신학이란 용어는 영어로 liberal theology 이고 독일어로 liberal
theologie 이며 화란어는 liberaal godgeleerdheid 이다. 이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학자는 젬러(Semler, 1725-1781)이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인 교의학에서 해방하여 자유롭게 역사 비평적인 입장에서 성경 연구을 시도하기 때문에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자유주의라는 말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고 확대하는 사상과 운동을 말하는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후에 정치적, 종교적 자유를 표방하면서 발생하여 구속없는 상태를 말한다.
체계적인 자유주의 신학의 본격적인 태동은 슐라이에마허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를 가리켜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전통적인 교리적 신학을 비판하고 신학 연구에 있어서 개인의 주관적이고 심리적, 체험적인 방법을 도입하였다. 헤겔은 자유주의 신학을 출발시키는데 철학적 방법을 제공하였고, 지금까지 헤겔철학은 신학 연구방법에 사용되고 있다. 이 신학은 리츨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하르낙, 헤르만, 카텐부쉬, 루프스, 그리고 트뤌취와 같은 많은 제자들 배출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리츨학파를 만들었다.
한국의 자유주의 신학은 초기에 송창근, 김재준, 정경옥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바르트를 찬동하기 때문에 초대 한국 정통주의에서는 그들을 자유주의자라고 불렀다.
2.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배경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자유주의 신학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3가지의 중요한 운동들을 인정한다. 이 셋은 경건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이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승리를 통하여 성경과 신학 연구에 있어서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자유주의 신학에 제공하였고, 경건주의와 낭만주의는 신학을 주관주의화 하는데, 또 윤리적이며 감정적인 측면으로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이 세가지 조류는 상호 영향을 주고 그 결과로 각자의 영역을 발전시켰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필연적으로 이 세가지 사상적 조류를 이해해야 한다.
1) 경건주의
자유주의 신학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건주의를 역사적, 신학적 관점에서 조명하려고 한다. 특히 어떤점이 자유주의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독일의 경건주의자들의 사상을 통하여 그 배경을 알아보려고 한다.
1. 배경
독일 루터교회는 종교개혁의 생명력있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크리스챤 라이프의 형식주의에 빠지게 된다. 교리적, 정치적 상황에서 일치신조(the Formula of
Concord, 1577년)를 만든 루터파는 칼빈주의자들을 비밀 칼빈주의자(Crypto-Calvinism)라는 신교 차별정책을 시도하여 독일 땅에서 축출하면서, 자신들의 교리의 독선으로 점점 차갑게 변해버렸다. 개혁파 신학자들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사용하여 신학이 학자적이며 현학적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이런 학문적인 사상을 신교의 스콜라적 정통주의(Protestant Scholastic Orthodoxy)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들을 가르켜 죽은 정통주의(dead orthodoxy)라고 비판이 생긴 정도였다. 이런 조류에 반기를 들고 나온 운동이 바로 경건주의 운동이다. 경건주의는 딱딱한 신교의 스콜라주의 반대하여 크리스챤들의 생활의 정서를 중요시하고, 신자들이 각자가 사회에서 선행과 거룩한 삶을 강조하고, 세상적인 것을 멀리하는 금욕주의적 형태를 갖는 청교도적 개혁운동이다. 개인의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의 창시자 케에르케고르도 개인을 강조하고 진리에 대한 실존적 개입을 강조하였지만 경건주의에는 관심을 갖지않았다.
경건이라는 용어는 라틴어로 pietas로 경건, 헌신, 종교적인 것으로 번역된다. 종교의 주관적 내면으로서, 특히 감정적, 정서적 생활과 같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이 경건을 신학의 근본개념으로 삼았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교단의 기초가 되는 경건은 특정한 감정, 또는 특정한 직접적인 자기의식이다."라고 하였다.
2. 인물과 사상
경건주의의 아버지는 필립 야곱 스펜너(Philip Jacob Spener, 1635-1705)로서 기독교 역사에 하나에 큰 공헌을 하였다. 1665년 스트라부르그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에 프랑크루르트에서 부목사로 봉사하면서 당시의 교회의 타락 상태를 파악하고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기회를 갖게된다. 그는 1675년 3월 24일 프랑크프르트에서 출판한 대표적인 책 Pia Desideria <경건한 욕망>에서 국가와 교회와 평신도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리고 교회의 올바른 상태에 위하여 6가지의 개혁을 제시한다.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밀씀이 성도들의 삶속에서 광범위 하게 사용되어야 함을 말한다.
Thought should be given to a more extensive use of the Word of God among us. We know that by nature we have no good in us. If there is to be any good in us, it must be brought about by God. To this end the Word of God is the powerful means, since faith must be enkindled through the Gospel, and the law provides the rules for good works and many wonderful impulses to attain them. The more at home the Word of God is among us, the more we shall bring about faith and its fruits.
여기서 그는 루터교 신학의 중심주제인 복음과 율법이라는 신학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들의 삶의 정황속에서 사용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루터가 강조한 성경 연구에 영향을 받고 신자에게 성경을 읽도록 회복시킨 것이 종교개혁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임을 루터의 글을(Luther's Works, 34, 283-5) 가지도 확신한다 (Ibid., pp. 92-3).
두번째로 스펜너는 루터의 영적 만인제사장 사상을 세우고 부지런히 실행할 것을 제안한다.
This second proposal is the establishment and diligent exercise of the spiritual priesthood. . . . Every Christian is bound not only to offer himself and what he has, his prayer, thanksgiving, good works, alms, etc., but also industriously to study in the Word of the Lord, with the grace that is given him to teach others, especially those under his own roof, to chastise, exhort, convert, and edify them, to observe their llife, pray for all, and insofar as possible be concerned about their salvation.(Ibid., p. 94).
스펜너는 목회자만이 아닌 모든 평신도 크리스챤들이 제사장의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특별히 다른 이웃에게 실천하도록 말한다.
세번째로 그는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의 신앙을 아는 것으로 충분치 않고 실천을 몸에 읶힐 것을 말한다. 특히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다.
It is by no means enough to have knowledge of the Christian faith, for Christianity consists rather of practice. Our dear savior repeatedly enjoined love as the real mark of his disciples. . . . Love is the whole life of the man who has faith and who through his faith is saved, and his fulfillment of the laws of God consists of love (Ibid., pp. 95-6)..
그가 말한 믿음은 죽은 믿음이(dead faith, fides mortua) 아닌 실제 중새의 체험을 주는 생명력으로 본다.
네번째로 그는 불신자와 이단과 종교적인 논쟁에서 처신해야할 방법을 제안한다 .
We must beware how we conduct ourselves in religious controversies with unbelievers and heretics. . . . We owe it to the erring, first of all, to pray earnestly that the good God may enlighten them with the same light with which he blessed us, may lead them to the truth, may prepare their hearts for it or, having counteracted their dangerous errors, may reinforce what true knowledge of salvation in Christ they still have left in order that they may be saved as a brand plucked from the fire (Ibid., p. 97)..
기도와 사랑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모범과 선행을 보이고 논쟁을 피하도록 권면한다.
다섯번째로 그는 신학교육의 개혁을 주장하면서, 신학교수들이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영성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The professors should therefore exercise good discipline among those who eat at their table and not permit mischief for the sake of gain."(Ibid., p. 104).
여섯번째로 설교는 기독교 교회에 도움이 되게 하라고 제안한다. 또 신자들의 내적 경건의 향상을 위해서 하라고 한다.
Our whole Christian religion consists of the inner man or the new man, whose soul is faith and whose expressions are the fruits of life, and all sermons should be aimed at this. On the one hand, the precious benefactions of God, which are directed toward this inner man, should be presented in such a way that faith, and hence the inner man, may ever be strengthened more and more. (Ibid., p. 116).
스펜너는 당시의 부패상을 말씀과 기도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그 교회를 새롭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했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IMF 시대를 맞이하여 좀더 성숙하고 사회를 향하여 기독교윤리를 실천하고, 봉사적 정신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복음을 전파할 때가 되었다.
스펜너를 뒤이어 경건주의는 프랑케의(August Hermann Francke, 1663-86) 사역으로 그 전성기를 맞이한다. 라이프니쯔 대학에서 그는 성경 연구회를(collegium philobiblicum) 조직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이 운동을 확장시켜 나갔다. 그는 지칠줄 모르는 정력가요 조직에 천재였다고 알려진다. 또한 교회를 위한 충성심도 뛰어났었다. 그의 강의는 신교의 스콜라적인 신학을 가르치지 않고 해석과 실험을 강조하고 교실과 교회를 연결하여 가르쳤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위해 몸소 실천했다. 1695년에 <누더기 학교>란 빈민 아동 학원을 세웠는데 후에 정규학교로 발전되었다. 그는 고마원, 진료소, 인쇄소를 돈없이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운영하였다. 경건주의 운동가들은 프랑케그 이외에 요한 벵겔(Johann Bengel, 1687-1752), 고트프리 아놀드(Gottfried Arnold, 1666-1714), 그리고 유명한 모라비아 교의 창시자 친젠도르프(Nicola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가 있다.
3. 경건주의의 특징
첫째는 그들을 기존 정통 교회의 형식이나 교리보다는 개인의 내적 변화를 강조한다. 개인의 죄와 회개의 체험과 같은 개인적인 신앙의 내적 본질을 강조한다.
둘째로 그들은 크리스챤의 지식 보다는 거룩한 삶을 실천하도록 강조한다. 교리보다는 삶을 강조하는 경향이 심하다. 루터의 칭의론으로 부터 정통교리를 무시한 잘못된 성화론에 강조를 두었다. 따라서 이런 목표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연히 윤리적인 요구와 금욕를 강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이런 요구가 실천되는 곳이 바로 교회안에 작은교회(ecclesiola in ecclesia)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세번째로 경건주의는 루터의 영향으로 개인이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도록 요구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순히 교리의 근거뿐만이 아니라 영적 생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네번째로 경건주의는 그 내면의 속성상 기존 종교에 대한 저항정신이 들어있다. 스펜너가 그의 책 <경건의 열망>의 앞부분에서 정부, 교회를 비판하면서 나타나 있다. 후에 이런 성격은 영국의 청교도와 대륙적인 경건주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긍정적으로는 부정과 부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되었지만, 기존의 종교와 종종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4. 비판
경건주의 운동이 교리와 지적인 신앙을 무시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참된 아이덴티를 상실하게 되어 윤리실천 운동으로 전락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올바른 믿을에 근거하여 세워져 있다. 바른 기독교의 역사적 지식과 사도적이며 정통적인 바른 교리를 고의적으로 멀리하는 것은 뼈대가 없는 약한 종교로 전락된다.
지나친 금욕주의는 기독교를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멈추게 하며, 기독교를 신비주의 종교로 만든다. 따라서 경건주의가 지나치게 금욕주의 강조한다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세상의 문명과 문화에서 도태되어 땅을 정복하라는 문화적 사명을 이룰 수 없게 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지만 체험 일관주의는 아니다. 또한 반드시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반드시 해야 거듭난 크리스챤으로 간주하는 것도 아니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 자체도 영적 신비이다. 경건주의는 자신들의 공동체 규율을 강조함으로서 다른 형제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선에 빠지고 자신들과 같은 경건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신앙의 우월의식을 갖게 했다.
경건주의는 무엇보다도 신학적으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 루터는 이신칭의라는 교리를 제창함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법정적으로(simul iustus et peccator,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말했다. 그런데 경건주의 운동은 하나님과 인간의 새로운 실존적 관계(new existential relationship)에서 본질에 관심을 갖는 새로운 존재(new being)로 전이하였다. 그들은 이신칭의 교리의 지나친 법정적 객관주의가 개인의 새로운 탄생과 새로운 생명을 강조한 신약의 교훈을 약화시킨다고 간주하였고 아마도 이런 의식이 그들로 하여금 신교의 정통교리의 대명사격이 이신칭의와 같은 교리를 멀리하고 인간의 내적인 변화와 새로운 변화된 인간의 내면적인 본질을 강조하게 되었다. 즉 경건주의들은 각자 개인들의 영혼구원과 내적 신앙의 성장을 강조하는 약점을 갖게 되었다.
5.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준 요소들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을 개인의 자율성과 제약없는 개인의 성경 연구방법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바로 경건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기존 종교의 교리에서 벗어난 개인의 성경 연구와 개인 영혼에 촛점을 맟추었던 점에서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즉 누구든지 개인이 자신의 방법을 가지고 자유롬게 신학을 다룰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신학을 주관주의로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다.
경건주의는 인간의 감정과 인간 체험을 강조하게 하였다. 즉 인간이 자신의 정서와 체험을 이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경건주의의 이 특징에 양향을 받고 종교를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신학으로 만들었다.
경건주의는 기존의 교회라는 공동체와 무관한 신학을 형성케한다. 정통교리를 무시하고 자유로운 새로운 방법을 창출하게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이란 정통주의를 탈피하고 새로운 신학방법을 사용하여 신학을 재해석하는 시도인데 이런 해방과 새로운 창조는 자유주의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경건주의는 딱딱한 신학이나 냉냉한 교리를 벗어버리고, 크리스챤의 윤리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이런 조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신학의 본질을 상실하고 듀크하임같은 종교사회학자가 주장하는 기능주의적 종교관에 기초한 인간의 윤리와, 사회 윤리를 강조하게 만들었다.
2) 계몽주의(Aufklarung)
르네상스 이후 권위와 초자연을 무시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하는 조류가 바로 계몽주의이다. 테오도르 그린은 계몽운동은 17 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에 번성한 현대 유럽의 거대한 영적운동들 가운데 하나를 구성한다고 말했다. 이 운동은 바르트의 말처럼 인간이 전능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신념을 토대로 구축된 체제이다. 계몽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이 형성되는데 있어서 신학적 방법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 목적이 되었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계몽주의의 배경과 원리를 알고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피고자 한다.
1. 배경
계몽주의의 뿌리는 17세기 영국의 이신론 (理神論, 자연신교, deism)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휴머니즘(Renaissance humanism)과 소시니안니즘(Socinianism)에서 발견된다.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교리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와 이성을 강조함으로써, 계시를 비판하고 인간 이성의 활동을 최대화 했다.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계몽주의란 반종교적(다시 말하면 현세적), 반형이상학적(달리 말하면 과학적) 사고방식을 자연인식 뿐만 아니라 사회인식에 까지 확장시키고 이와같은 사고 방식을 보급(즉 계몽하다)하는 이성주의 운동이다.
2. 계몽주의의 원리
Paul Tillich는 계몽주의 원리로서 칸트의 자율성, 발전, 자연, 그리고 조화를 말한다. 그랜즈와 오슨은 틸리히의 연구에 이성을 첨가하여 다음과 같이 계몽주의 원리를 진술한다.
첫번째는 이성(reason)의 원리이다. 이 시대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크게 강조하였다. 그런데 계몽주의적 해석은 실제 인간에 부여된 그 자체 이상으로 이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성의 원리가 모든 우주의 근본적인 질서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으로 언급되었다.
두번째는 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자연(nature)의 원리이다. 이 운동은 자연의 원리는 사물이 바로 그 본질에 근거하거나 혹 거기로 부터 발생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계몽주의는 우주란 자연의 법칙이 내재하는 질서있는 영역으로 보았다. 자연과 자연법칙은 지적탐구의 표어였다. 따라서 인간의 지적노력의 목표는 이성에 의해 발견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세번째는 자율성(autonomy)의 원리이다. 자율적인 인간은 진리와 행동의 심판자로서 외부의 권위를 내쫒았다. 교회, 성경, 그리고 교회 교리의 가르침에 단순히 호소하는 것이 더이상 믿음과 행위에 순종하도록 하는데 충분하지 못했다. 개인이 권위에 대한 그런 외부 요구를 시험하게 되었다. 칸트는 자율성의 원리와 계몽주의에서의 그 원리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Enlightenment is man's release from his self-incurred tutelage(자신을 잡고 있는 보호자). Tutelage is man's inability to make use of his understanding without direction from another. Self-incurred is this tutelage when its cause lies not in lack of rerason but in lack of resolution and courage to use it without direction from another. . . . "Have courage to use your own reason" - that is the motto of enlightenment.
네번째는 조화(harmony)를 말한다. 이 원리는 이성의 시대에 간주되어온 자연과 우주의 법칙과 질서의 개념위에 세워졌다. 우주는 그 전체가 질서가 있다고 말한다. 세계의 본질적 조화란 진리가 하나의 조화된 전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성의 사용이 인간의 삶을 우주의 자연 질서에 조화시킨다고 말한다. 다섯번째로 발전의 원리를 말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다. 즉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3. 비판
계몽주의의 잘못을 간단하게 비판하려고 한다. 계몽주의는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성경의 권위를 의문시하고, 기독교의 초자연적 진리를 인간의 이성에 굴복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으로 현재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서 영적인 진리와 초자연적인 사건을 부정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오늘날도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지구촌에서 수없이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어떤 사건과 사실은 시간이 지난후 학문이 발달한 후에 증명이 되기도 한다. 성경이 사건들이 인간의 실험에 의해서 오류가 있었다고 증명된 기록된 것은 아직것 없다. 굳이 믿음의 문제를 가지고 말하지 않아도 성경의 객관적 사건을 쉽게 이성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거절하는 것은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 자세가 정당하지 못하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인간 이성의 절대적 우월권을 조심해야 하며, 중생한 크리스챤은 이성을 잘 활용하여 계시의 초자연성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시에 이성을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하고 무시해서도 안되며 적절한 사용이 중요하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데 물론 좋은점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자율성은 한계가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영원하고 심오한 성경의 권위를 무조건 거부하고 인간을 사건과 역사의 중심 주체로 본다면 인간은 무한한 자유뿐만 아니라, 엄청난 책임을 가진 존재로 살아야 한다. 예를들면인간이 이 지구의 주인이며 주체라면, 인간이 지구를 만들었어야 했으며 지금도 지구를 움직이는데 책임을 지고 있어야 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존재로서 그의 피조물로서 만물의 영장이다. 피조물이라는 의식없이 인간이 모든 존재의 주인으로서 행세하는 인간중심적 자율주의는 인간이 세상의 모든것을 다 할수 있다는 헛된 환상에 불과하다.
계몽주의는 지나치게 신학을 철학과 자연과학에 종속시키려고 했다. 물론 신학의 방법론은 철학과 세상의 학문에서 많은 도음을 받고 발전해 왔다. 하지만 신학의 독특한 속성을 무시하고 세상의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과 동일하게 취급하여 비판한다면 잘못이다. 세상의 학문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타락이후에 일반은총의 영역은 인간에게 이 문제를 적절하게 제공해 주지 못하였다. 따라서 신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 성경자체가 말한 믿음의 유추와 같은 성경의 방법을 중요하게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고 정당하다. 과거에 스콜라 신학이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지나치게 사용하였지만 그 반대로 상황이 변화는 것은 더욱더 큰 잘못이다. 계몽주의와 그 영향으로 형성된 자유주의 신학이 철학에 종속화된 것은 결정적인 오류였다.
4. 계몽주의가 자유주의 신학에 끼친 영향들
이 영향을 알기위해 버너드 램의 견해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첫번째로 계몽주의가 자유주의 신학에 미친 영향은 역사주의(Historicism)이다. 과학적
역사의 규범(historiography, 사료편집)을 계몽주의 기간 동안에 역사적 정확성과 객관성을 위한 최고의 표준으로 두게 되었다. 이것은 성경의 역사적 자료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게 했다.
두번째로 과학(Scientism)을 성경위에 두었다. 과학이 성경의 사건과 충돌할 때 과학을 선택하도록 만들었다.
세번째는 비평주의(Criticism)이다. 데까르트의 영향을 받아 성경의 역사성과 사건들에 대하여 의심을 갖고 비판을 가하였다. 후에 고등비평이 여기에서 발생한다.
네번째로 합리주의 였다. 이신론은 신학안에 선구자로서 이성(Rationalism)이 모든 진리의 시금석이라는 말을 하였다.
다섯번째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에 대하여 절대 종교라고 주장하지 말며, 종교 문제에 있어서 관용(Tolerationism)의 우선권을 강조한다.
여섯번째로 낙관주의를 강조한다. 계몽주의 정신은 더 이상 원죄의 어두운 교리를 믿지 않는다. 인간이 심리학과 사회학을 더욱더 알게되고 과학의 발전을 통하여 인간은 상승적으로 진보한다는 낙관주의 (Optimism)를 주장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류문명에 희망과 낙관적 발전을 믿었지만 세게 1차 대전으로 이런 생각이 환상임을 알려줬고 칼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이 장미빛 낙관주의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일곱번째는 칸트주의(Kantianism)이다. 종교를 인간 이성의 한계에 묶어두고, 종교를 윤리화 시켰다. 후에 리츨과 하르낙과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중심을 윤리에 두었다.
여덟번째로 신학은 인간의 복지를 증진시키도록, 신학적 진리른 일반적으로 인정된 이성적 원리에 조화되도록 했다. 신학을 인간학을 전락시켰다. 아홉번째로 역사와 신앙을 분리시켰다. 예를들면 레싱은 종교의 참가치는 역사성에 좌우되지 않고 사랑을 통하여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유무에 달렸다고 말한다.
3) 낭만주의
자유주의 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사조로서 낭만주의가 있다. 낭만주의는 시대적 사상적 저항의 표출로서 발생하였다. 낭만주의를 싫어했던 칼 바르트조차 우리 모두 낭만주의자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반계몽주의적 낭만주의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1. 배경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걸쳐 유럽을 휩쓴 문예사조이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 프랑스 혁명, 자유주의의 정신이 발달하고, 진보, 번영, 문명 개화의 사상이 고조되고 질풍노도(疾風怒濤, Sturm und Drang, Storm and Stress)의 바람이 불어 감정을 억제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이성의 우위를 주장하는 고전주의는 결국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타락하게 한다하여 이에 반대하고, 미(美)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성 혹은 상식의 지배로 비정서적, 지성의 시대의 후유증으로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우주관을 거부하고, 정서를 중요시하고, 자아의 감정을 해방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결국 낭만주의는 계몽주의 냉냉한 이성 지상주의에 반동한 것으로 볼 수있다. 루소(J. J. Rousseau), 슐레에겔(A. Schlegel), 졸거(K. W. F. Solger), 괴에테(Goethe, 젋은 베르테르의 슬품)등이 주도했다. 심지어 니체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2. 특징
첫째로 낭만주의는 자아의식에 근거한 주관성을 강조한다. 피히테는 자의식이란 자의식 이외의 어떤것에 의해서도 한정될 수 없다는 것과 만사는 자아의 활동에 의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두번째로 세상과 인간 생활에서 감정적이며 미적인 요소들(the emotional and the aesthetic elements)를 강조하였다. 감정은 심지어 종교까지도 연구의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세번째는 신비주의와 범신론의 경향을 가지고 있다. 현실의 구현이 합리적인 사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 직접적인 체험, 정신계몽을 통해 이루어 진다고 믿었다.
네번째로 낭만주의 자들은 진리를 이성과 논리에 의하여 얻지않고 사색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희귀하고 기쁜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 주어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섯째로 계몽주의는 철학적인 중요한 전제인 유한자와 무한자의 관계를(the relation of the infinite to the finite) 깨트렸다. 니콜라스의 쿠사Nicholas of Cusa)는 유한과 무한의 부합(conincidentia oppositorum, the coincidence of opposites)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무한이 유한안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유한은 무한안에서 잠재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즉 신과 인간의 균형이 없어지게 되었다. 즉 신은 인간안에 있고 인간은 신안에 존재론적으로 있다는 주장이다.
3. 비판
지나친 주관주의로 인해 독선적으로 빠져 객관적인 전체를 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현실의 문제를 떠난 이상의 세계로 회피하는 경향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무책임성이 현실에 남게된다. 세상은 항상 미와 정서로 구성되어 있지않고 고통과 사건, 경쟁과 분배등 인간의 여러 욕구의 문제점을 다양하게 갖고 있다.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에 죄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이런 근본적이며 영적인 문제를 낭만주의가 결코 해결할 수 없다. 낭만주의는 인간의 지, 정, 의의 구성요소 가운데 정서를 지나치게 강조해서 균형을 상실한 결과, 지적이며 논리적이며, 현실의 문제을 해결하려는 의지의 결단이 부족하다. 철학적인 전제에 있어서 낭만주의는 과격한 이론를 사용하였다. 유한과 무한을 같은 수평선에서 부합시켰기 때문이다. 쯔빙글리와 칼빈의 사상을 이은 개혁주의는 유한과 무한을 철저하게 구분한다. 즉 유한은 무한을 포함(붙잡을)할 수 없다(Finitum non capax infiniti, The finite cannot contain the infinite) 라고 주장한다.
4. 자유주의 신학에 끼친 영향
낭만주의가 자유주의 신학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역시 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미적직관과 감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낭만주의적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우주의 미적직관을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참여한 직관으로서 미적직관은 미(art)를 계시적인 것으로(revelatory) 중요하게 간주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계시라는 말은 성경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데 그에게 있어서 미는 성경과 같은 계시로서 신을 만나는 수단이 된다는 된다. 참된 종교로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특별계시인 성경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예배하는 것이다. 그가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으로 정의하고, 종교를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정의를 내린것은 종교를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고 인간의 직관을 사용함으로서 계시와 초자연의 영역을 제거시켰다. 즉 그는 계시 의존적인 신학방법을 벗어버리고 인류학적인 신학의 방법론을 시도한 것이다.
3. 자유주의 신학의 출현
자유주의(liberalism)란 이성과 자유를 강조한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으로 대표되는 정신적 자극에 의해서 19 세기에 출현하였다. 따라서 인간의 자율성이 최대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하는 기회와 과제를 제공해 준다는 의식이 널리 인정되었다. 자유주의의 태동과 더불어 개인주의가 점점 퍼치기 시작하여 신학자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이때 슐라이에르마허가 계몽주의의 영향 으로 종교를 멸시하는 풍조가 있었는데 그 이런 현재적 경향을 공격하고 종교는 형이상학도 아니요 도덕도 아니며 또 그것들에 종속되지도 않는 종교의 독특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주장하였다. 이런 시도는 당시 아주 창시적인 것이었다. 비록 자유주의로 흘렀지만 종교에 대해 뭔가 자기 나름대로 철학을 갖고 세상의 사조에 대해 반기를 들고 독창적인 방법을 창출한 점을 대단한 것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를 직관과 감정의 영역으로 설명하면서 새롭게 자유주의 신학의 완전한 논리체계로 만들었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전통적인 신학 방법론을 버리고 인간의 이성, 직관, 감정, 기타 체험을 이용하여 성경과 신학을 자유롭게 역사비평에 근거하여 재해석하는 신학이다. 앞에서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이 신학이 경건주의,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라는 사조들을 그 기반으로 형성되었음을 살펴 보았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슐라이에르마허가 자유신학를 전개할 때 3 가지의 조류에 큰 영향을 받았슴을 우리는 알았다.
4.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역사적 흐름
자유주의 신학은 사상적 배경으로 볼때 경건주의, 계몽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감정과 이성과 자유의 사용을 제공받았다. 그러면 이런 개념들을 가지고 어떻게 자유주의 신학이 시작하여 발전했는지를 알아 보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과 관계되는 신학자와 철학자를 모두 다루기는 지면상 힘들기 때문에 중심적인 인물을 선정하여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역사적 흐름를 설명하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적인 인물로 슐라이에르마허, 역사철학적이며 동시에 종교철학적인 면에서 헤겔, 그리고 비판 철학에 있어서 칸트가 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이 세사람을 중심으로 그 논리와 신학적 철학적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세사람 이후에 나타나는 학자들은 모두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그들의 영향권에 들어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역시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로서 감정과 직관을 신학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그는 자유주의의 신학적인 방법론을 최초로 정립시킨 사람이었다. 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그 이후의 대부분의 유럽신학자들은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자가 없다. 심지어 바르트도 그의 로마서 강해에서 강하게 비판했지만 그 자신의 말처럼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없다고 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해서는 2 장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칸트는 흄의 회의론적 지식론을 가지고 플라톤이 이데아 세계와 감각세계를 구분한 것처럼 현상계와 예지계( 혹은 본체계, 오성으로 인식되는 세계)를 구분하였다. 이성의 한계에서 종교의 가능성을 논하여서 실제로 초자연의 세계를 거절한 것이다. 단지 종교의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주제들을 도덕의 영역으로 격하시켰다. 칸트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윤리를 강조하게 되었다. 리츨과 그의 학파들이 대표적으로 이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감정을 신학의 중심에, 헤겔이 정신에 역점을 두었듯이, 리츨은 윤리에 그의 신학의 중심을 두었다. 리츨이 신앙의 중심주제로 윤리적 가치를 인정하게 된것은 예수와 - 인간이 따를 위대한 윤리의 모범자 - 함께 발전하고 성숙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를 도덕적으로 보기 때문 이었다. 이것은 종교를 단지 도덕활동으로 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칸트에서 나타나는 현재적이며 세속적 왕국에 불과하다. 한편 리츨은 죄론에 있어서도 윤리적인 관점이 확연하게 나타난다. 그는 죄를 의지가 약한것이 아니라 무지인데, 도덕적 양육과 교육에 의해서 교정될 수 있다고 믿었다.
헤겔은 대표적인 관념론자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감정을 강조한 반면에 헤겔은 관념론자였기 때문에 이성의 관념을 확대하여 정신의 모든 측면들과 동일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둘은 같은 대학에서 별로 좋지않는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신학을 다루는데 있어서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최근의 헤겔의 철학적 동기가 신학적이라고 발표되었다. 즉 그의 전체 철학체계가 원래는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이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던 그의 초기의 노력에서 직접 발전되었다.(Ibid p. 337). 헤겔의 철학은 가장 포괄적인 체계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의 문제의식은 절대적 진리의 주장들이 어떻게 역사와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것 이었다. 따라서 그는 생각하기를 역사 전체를 하나의 합리적인 체계로 나타내 보여줄 수 있는 시각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그의 변증법이 창출되었다. "헤겔에 의하면 상대의 세계는 자기에 대한 존재하는 세계이며, 모순을 지닌 채 운동과 생성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생성은 이 자기 모순을 지양하고 보다 높은 단계에 이르러 자기 안전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은 무한한 진행은아니고 일체의 상대적 단계가 경과함에 따라 절대 정신이 개현된다고 본다. 절대자는 정적 실체자일 수 없고 일체의 상대를 그 안에 포괄하고 있는 살아 있는 주체이다. 이 운동은 이성과 실체에 통하고, 그 이성의 법은 변증법이다." 헤겔의 변증법을 성경과 기독교의 본질에 적용한 사람들은 스트라우스와 바우어 였다. 이들은 역사적 예수와 이상적 예수의 관계를 변증법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5.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의 지식과 그 신학자들의 특별한 철학에 따라서 기독교를 다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신학은 한 시대의 철학과 사상의 산물로서 몇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신학의 기초와 방법을 성경에 두지않고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이나 경험에 둔다. 즉 경건주의가 강조한 개인주의적 성경연구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신학 방법을 벗어버리고 인간의 자율성을 활용하여 성경과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이성, 감정, 그리고 경험을 가지고 자유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이다. 슐라이에르마허가 감정을 신학의 본질로 삼은 것처럼, 리츨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경험을 신학의 방법으로 택하였다. 즉 신학을 하나님 중심에서 보지않고 인간의 경험에서 시작하는 신학을 주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 중심적인 신학방법이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이다. 인간이 신학의 주체이며 신학의 요구들을 스스로 이룰수 있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 이런점은 어거스틴과 대조적으로 주장했던 펠라기우스의 견해인 선택할 수 있는 힘(possibilitas utriusque patris)과 비슷하다.
둘째로 유한자과 무한자의 관계성(relation of the infinite to the finite)을 파괴시킴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의 초월을 강조하기 보다는 내재적인 신학으로 빠져들었다. 헤겔에서도 범신론적 사상이 나타나지만 슐라이에르마허에서는 하나님의 내재적인 사상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초월하신 무한자을 느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종교를 한 인간이 자기의 한계를 넘어 무한자(the infinite)와 교제하는 것으로 말한다(true religion is sense and taste for the Infinite). 이점에 있어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이성의 한계를 넘지않고 윤리로 빠지는 칸트 보다도 더 종교적이라고 볼 수있다. 이 내재주의는 칼 바르트에 의해 철저하게 공격을 당하고 바르트 강한 초월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그는 헤겔을 비판한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빌려 하나님과 인간의 영원한 질적 차이(the infinite qualitative distinction between God and Man, eternity and time, heaven and earth)를 주장하게 된다.
세째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낙관주의를 가르친다. 이 사상 역시 펠라기우스적이다. 인간은 선이 충분하게 있기 때문에 영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사회와 세상을 복된 낙원으로 만든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런 환상은 세계 일차대전과 이차대전을 통하여 그 꿈이 깨졌고, 그 결과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를 태동시켰다.
네째로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윤리적, 실제적 요소를 강조한다. 칸트의 영향으로 초자연적인 주제를 벗어 버리고, 도덕의 실천화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고 한다. 따라서 신학이 영적이고 내세적인 진리를 사장시키고 오직 이성의 한계안에서 종교를 윤리화 시켰다. 이런 영향은 라우센부쉬와 같은 사회복음주의 운동을 태동시켰다. 최근에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사상적 이론을 제공하는 개기가 되었다.
다섯째로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역사적 에수에 많은 연구를 했다. 참된 성경의 역사성을 통한 역사적 예수의 연구가 아니라, 역사와 분리된 신앙의
'신 신학 자유주의 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성종교 (0) | 2022.01.15 |
---|---|
자유주의 (0) | 2022.01.15 |
목창균의 「현대신학논쟁」요약 (0) | 2021.09.13 |
현대신학의 위기와 그 근황 (0) | 2021.09.13 |
현대신학강의: 福音主義와 정치신학 (0) | 2021.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