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이성종교
(중략)
3. 이신론의 팽창과 소멸
이신론은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사상이었다. 그것은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나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피조물 위에 초월해 계시다고 믿었다. 그리고 자연은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운행되고 그 법칙은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성은 모든 것을 감지하고 주관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 세계를 자연법 아래 두어 운행되게 하셨다고 믿으니 자연히 기적은 인정될 수 없었다. 그러자니 기적으로 가득 찬 성경의 내용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나님의 계시, 예언, 섭리 그리고 신인으로서의 그리스도등등의 내용도 처치 곤란한 것이었다. 자연신론자들에게는 예수가 단지 도덕을 가르친 선생으로밖에 이해될 수 없었다.
당연히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타락 같은 교리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최상의 것으로서 그 안에 ‘모든 덕과 경건’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인간은 잘못을 회개하고 도덕률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 죽음 뒤에는 선악에 대한 상벌이 있어야 공평한 것이라 했다. 그러니 몸은 죽어도 영혼은 계속 살아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신론자들에게 모든 종교는 근본이 같은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레씽은“세 반지”라는 글에서 이 입장을 설파했다. 어느 부자가 신비한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반지를 가진 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 부자가 죽을 때 세 아들은 각자 아버지로부터 그 반지를 받게 되었다. 세 아들은 각각 자기만 그 반지가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그들 모두가 다 반지를 가졌음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나단이란 지혜자에게 진짜 반지를 가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나단은 말했다. “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스스로가 자기 반지가 진짜임을 증명하라. 먼 훗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가 진짜 반지를 가진 자다.”이 세 아들은 곧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신론자들에게 교리는 간단한 것이었다.
영국의 이신론(자연신교) 운동의 창시자인 췌베리의 허버트(Herbert of Cherbury, 1583-1648)는‘진리에 관하여’(De veritate)(1642)에서 5가지 보편적 종교원리를 내세웠다. 그것은 ① 신이 존재한다. ② 우리는 그를 예배할 의무가 있다. ③ 덕을 실천하는 것이 참 예배이다. ④ 우리는 죄를 뉘우쳐야 한다. ⑤ 사후에 상벌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다섯 조항에 자연신론의 근본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계시의 도움 없이 이성의 능력으로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보편적 종교 원리들이라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자연신론의 가르침은 곧 윤리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행할 때 기뻐하신다는 것이 저들의 가르침이었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3)는‘인간의 이해’와 ‘기독교의 합리성’에서 위와 같은 교리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계시의 고유한 역할을 주장하였다.
① 그는 무엇보다 먼저 전통(tradition)의 권위를 배격했다.
② 그는 종교에 있어서 이성(reason)의 역할을 재확인했고, 이성의 권위를 높였다.
③ 그는 하나님의 존재가 논증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고 했다.
④ 그러면서도 그는 계시를 부인하지 않았다. 물론 계시도 이성에 의해 이해되어진다고 했다.
⑤ 그의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적 확신이었다.
신앙의 내용을 인간의 이성만이 발견, 이해, 해석할 수 있다. 신앙은 이성 위에 세운 집이라고 했다.
⑥ 그는 기독교 진리의 단순성을 강조했다.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한 분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며 개선된 생활을 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내용이야말로 얼마나 단순하고 합리적인가!라고 했다. 그래서 존 로크는‘상식의 사도’라고까지 불리었다.
⑦ 그는 도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는 믿음은 회개와 아울러 선한 생활이 병행해야 한다. 신앙에는 행위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톨란드(John Toland, 1670-1722)는 1696년 ‘신비하지 않은 기독교’에서 ‘합리적’(Reasonable)이란 말을 ‘신비하지 않은’(Not Mysterious)으로 대치하면서 기독교에서 신비적이라고 간주되는 것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매튜 틴달(Matthew Tindal, 1655-1733)은‘창조만큼 오래된 기독교’에서 기독교는 창조질서와 함께 시작된 즉 자연질서와 조화되는 종교임을 주장했다. 기독교=자연종교=참종교라고 했다.
이러한 이성의 종교는 그 힘을 한없이 뽐낼 것 같았다. 하지만 얼마가지 못하여 그 힘을 잃게 되고 다른 이성의 가르침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이성의 종교는 그 스스로 가진 모순때문에 숭배자들에 의해서 무너지고 만다. 영국의 버틀러, 데이비드 흄이나 대륙의 장 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서 이성의 종교는 비판을 받고 사상계는 다른 단계로 발전해 나갔다.
이신론은 자신 스스로 단순하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지성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감정적이거나 심미적인 요소가 없었다. 너무도 메마르고 차가운 분위기만을 제공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성의 종교는 통일된 주장을 펴지 못했다. 무슨 공통된 의식의 예배나 함께 고백할 신앙도 없었다.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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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연신교에 대한 반발
1) 윌리암 로
윌리암 로(William Law, 1686-1761)는 그의 저서「이성의 경우」에서 틴달의「창조만큼 오래된 기독교」의 주장을 반박했다. 틴달이 영적 교만은 가장 악독한 교만이라고 지적한 것에 대하여 반박하며 로는 이성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악독한 교만이라고 지적했다. 이성의 능력은 죄로 말미암아 제한되어졌다. 이성은 죄의 결과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한다. 이성은 죄의 세력을 꺾지 못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시키지 못한다. 이성을 초월하는 것(예언, 이적)을 믿는 것은 이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로는 이성의 기능을 완전히 부인하지 않으면서 계시와 이성의 조화를 유지하려고 했다.
2) 죠지 버클리
죠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는 첫째, 하나님의 존재를 복잡한 논증에 의해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 18세기 자연신교의 입장을 강력히 반박했다. 유신론증에 근거한 신앙은 무신론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으며, 신앙이란
논리적 작업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둘째, 자연종교와 계시종교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이성과 자연종교는 그것으로서의 정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각기 자기의 정당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자연종교와 계시종교의 근원은 다같이 하나님이다. 자연종교에 대한 참된 신앙은 필연적으로 계시종교를 받아들이게 한다. 자연종교는 계시종교에 의해 완성된다.
셋째, 계시종교를 변호했다. 유용성에 근거해서 계시종교는 우리에게 빛, 기쁨, 평화, 믿음, 소망, 사랑을 공급해주며 선행과 학문과 문명을 격려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운동력을 자연종교는 제공하지 못한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개연성에 근거하여 계시와 영감이 비록 신비롭게 보일지 모르나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계시의 형태와 방법은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도 그 내용은 만족한 해답을 제공한다. 계시비판의 대부분의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개연의 논증은 신앙의 충분한 근거가 된다. 즉 버클리는 도덕적 증거와 자연적 논증에 근거하여 계시종교를 변호했다.
3) 조셉 버틀러
조셉 버틀러(Bishop Joseph Butler, 1692-1752)의 저서「종교의 유비」는 자연신교 논쟁을 종식시킨 저술이었다.
첫째, 이성의 기능과 위치를 인정했다. 이성은‘우리 속에 켜놓은 주님의 촛불’이라고 했다.
둘째, 이성의 기능의 제한성을 지적했다. 이성이 보여줄 수 없는 많은 진리들이 있다. 이성은 완전한 지식의 체계를 제공하고 증거하지 못한다. 이성은 기껏해야 개연적 결론을 제공한다.
셋째, 계시의 도움이 필요하다. 인간의 지식은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도움이 필요하다. 특별계시가 주어졌다는 자체가 자연의 빛의 불충족성을 드러내고 있다.
넷째, 계시는 이성 및 자연종교와 모순되지 않고 일치한다. 자연의 빛과 계시의 및 사이에는 큰 유사성이 있다. 자연종교는 기독교의 기초가 되고 계시는 기독교를 완성한다.
다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의 요소들 가운데는 인간의 제한된 이해로서는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독특한 요소들이있다.
조셉 버틀러의 위와 같은 주장은 계시의 의미와 중요성은 강조했으나 계시의 절대성, 초월성, 특수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다. 자연종교가 해결하지 못하는 모호한 문제들을 계시 종교가 해결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이점을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것은 그의 약점이었다. 그는 단지 계시종교에 대해 가해지는 반대가 자연종교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또한 계시의 진리성의 근거를 계시 내용의 개연성에 두었다. 더 나아가 종교적 신념을 논증에 의해 얻어진 견해로 보고 전인격적 확신이나 신앙의 행위로 이해하지 않았다.
4) 데이빗 흄
데이빗 흄(David Hume, 1711-1776)은 자연신교와 합리주의의 오만함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경험론적 회의주의 철학자였다. 그에 이르러 합리주의는 몰락하고 새 시대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흄은 자연신교와 아울러 정통신학을 동시
에 공격했다. 그의 저서 중에는「인간성에 대한 연구」, 「종교의 자연적 역사」,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등이 있다.
첫째, 자연신교는 이성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과장하여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이성은 행동을 낳지도 못하고 방지하지도 못하며 욕정을 다스리지도 못한다. 이성은 결국 노예에 불과하다. 이성의 기능은 제한되어 있다.
둘째, 경험이 유일한 근원이요 자료이다. 경험을 통해서만 존재여부를 파악하며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흄은 경험과 아울러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도덕적 특성은 이성에서 비롯하지 않고 감정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셋째, 엄격한 칼빈주의를 공격했다. 유신론의 배타적 주장은 오만하고 위험한 주장이라고 했다. 그는 이적의 실재를 부인했고, 특별계시를 배제했다.
넷째, 결국 그는 종교에 대해서 하나의 중립적 관찰자의 자세를 취했다. 어떤 종교의 입장을 신종하는 것으로부터 초연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흄은 무신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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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칸트의 계몽주의
이러한 상황에서 관념론과 경험론의 양쪽을 쥐고서 철학을 정립한 이가 그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였다.
칸트는 1724년 4월 22일 동프로이센의 수도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리투아니아의 칼리닌그라드)에서 마구(馬具) 제조업을 경영하는 부친과 경건주의의 신
앙이 깊은 모친 사이에서 출생했다. 1740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 입학하여 신학·철학 등을 공부하였으며 1747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고향 근처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공부를 계속했다. 1755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형이상학·논리학 담당 강사가 되었고, 이어 1770년에 정교수가 된 뒤 96년 노령으로 은퇴할 때까지 5기에 걸쳐 학부장으로 재직했다. 그 동안 형이상학·논리학·윤리학·자연지리학·인간학을 비롯한 여러 학과에 걸쳐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많은 저서를 썼다.
칸트는 인간이 스스로 대답을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시할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짐을 지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순수 이성 비판’에서 이러한 갈등에 대한 해답으로“신앙이 있을 자리를 주기 위해서 지식을 거부해야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한다. 현상의 세계에서 사람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사유적 세계에서는 자유를 누린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신앙과 이성을 분리시켰던 것에 반하여 신앙을 경험적 지식과 구분시켰다. 신앙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그가 보는 신앙의 의미는 전통적인 것과 좀 다른 것이었다. 칸트는 신앙의 이성적인 형태가 있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지식과 신앙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지만 서로 똑같이 필요한 이성의 다른 면들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새로운 가설에서 시작한다. 이성은 수동적으로 외부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받기만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은 능동적인 것이다. 그 안에 스스로의 기능이 있어서 마음으로 들어오는 자료들을 묶어 분석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모든 경험은 이러한 이성의 작용에 의해서 지식으로 축적이 된다. 여기서 앞에 말한 데카르트와 베이컨이 만나는 것이다.
경험의 범주에 따라서 지식은 얻어진다. 그런데 인간 이해의 한계 때문에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경험의 범주 밖에 있는 대상을 상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성은 그러한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 속에는 신앙의 대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즉 하나님, 천사, 마귀, 영혼 등을 어찌 이성으로 있다 없다 말할 수 있으랴!
과거에는 이성주의자들이 제멋대로 이러한 영적인 개념들을 다루고 이론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러한 대상들은 이신론자들의 소위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저히 증명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한 존재들은 인간 이성의 범주 밖에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기독교의 교리가 타락했는지 미신인지 간단히 판단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그는 확실한 명제를 세웠다. “순수한 이성의 한계로는 이성의 범주 밖에 있는 대상이 있다 없다 말할수 없다.”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종교를 말해 보자. 순수한 이성은 초월적인 존재를 알 수 없지만 실천적인 이성은 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도덕률이 그것이다. 배우지 않아도 양심은 도덕을 외치고 있지 않은가.
그가 볼 때 도덕심은 신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성의 한 기능이었다. 이성에는 분석하고 이해하는 기능만 있는 게 아니라 선한 것을 원하는 기능이 있음은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실천 이성이었다. 여기에 그는 종교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성의 한계 안의 종교는 단순한 윤리가 되고 말았으니 결국 이신론자들의 교리를 반복한 셈이 되고 말았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교회사는 현대로 들어간다. 인간의 이성이 자유를 얻어 마음대로 갈수 있게 된 시대가 된 것이다. 칸트의“감히 알려고 하라.”는 명제는 이성의 활동을 최대한으로 키우게 하였다. 인류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서 힘차게 발돋움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간 이성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계시와 은총의 차원은 움츠러들 뿐이었다.
이신론자들은 현대의 성경에 대한 고등 비평 체계를 만들어 내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이신론으로 부터 얻은 유익도 있다. 신교(信敎)의 자유가 등장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이 이신론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성적인 종교 사상들은 거리낌 없이 주장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이신론자들이 학문 연구를 자극한 것은 본문 비평과 주석 분야에서 유익한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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