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인간의 이성에 대한 자부심과 신뢰는 19세기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것은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여러 가지 이름과 형태로 나타난 이 전통 전체를 자유주의라고 부르지만, 좀더 세분한다면 특히 19세기 후반부의 사상을 그렇게 부른다. 역사와 과학의 새로운 학설이 그 시발점이었다. 자신만만한 이성은 자신의 힘으로 건설할 이상향을 바로 앞에 보고 있었다.
1. 슐라이에르마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 1768-1834)는 독일 실레지아의 목사 가문에서 출생하여 어렸을 때부터 경건주의의 감화를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소년 슐라이
에르마허를 모라비아파 학교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 했고, 후에는 형제단 신학교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 했다. 그는 경건주의적 교육에 반발을 나타냈는데 후에 자신을 묘사하면서‘보다 높은 수준의 모라비안 교도일 뿐’이라고 했다.
그 후 할레대학에서 칸트와 희랍 철학을 연구하며 칸트의 영향을 받았고, 베를린에 돌아와서는 자선 병원의 목사로 일하며 낭만주의 작가들(루소, 괴테, 쉴러 등)과 사귀면서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베를린 대학에서 교수하던 때인 1799년「종교에 대하여」(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를 출판하여 그의 신학 원리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서 종교의 본질은 신학적인 체계도 형이상학적인 사색도 아니며(정통 신학 및 합리주의에 대한 반박), 예술도 윤리도 아니며(낭만주의 또는 칸트에 대한 반박), 또한 이 둘(형이상학과 윤리)을 합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즉, 종교의 본질은 지식의 기능에서도 또는 행위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종교는 좀더 깊고 독특하고 특수한 그 무엇인바, 직관(intuition) 또는 감정(feeling)에 속한다고 했다. 감정이란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인식인데 그것은 일반적 지식이나 행위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 경험의 독특한 요소라고 했다. 즉, 참 종교는 무한자를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무한자를 느끼고 맛보는 것이라고 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1821년과 1822년에「기독교 신앙」(The Christian Faith)을 저술했는데 그는 여기서 종교와 신학에 대한 개념을 더욱 정확히 진술했다. 이 저서는 신학의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고 자유주 신학의 성격을 규정했는데, 칼빈의「기독교 강요」와 맞먹을 정도의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중요한 책이 되었다.
1) 신학의 특징
슐라이에르마허는 그의 조직신학 저서명을「신론」이라고 하지 않고「신앙론」이라고 했는데, 그 저서명이 그의 신학의 특징을 어느 정도 나타내고 있다. 즉 그는 신학을 교회와 신자들에게 실제로 주어진 기독교 신앙을 기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서 신학은‘크리스챤의 종교적 감정의 서술’또는‘기독교 교회의 경험적 신앙의 서술’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신자의 하나님 체험 또는 신자의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서술하는 모든 속성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특수한 것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절대 의지의 감정이 하나님과 어떻게 특수하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가리키는 것뿐이다.”
2) 신관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 신(神)은 신현(theophany)에 의해 객관적으로 알려진 개념의 신이 아니다. 신관에 있어 중요성은 우리에게 있고 신에게 있지 않다. 우리가 절대의지의 감정을 가질 때 신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즉, 슐라이에르마허의 신은 인격적 존재라기보다는 모든 현상 뒤에 작용하는 지배적인 힘이고, 모든 사물의 기초이며 하나의 영성이다. 절대 의존의 감정 상태에서는 신에대한 개념이 확실하고 완전하지만, 그 경험을 언어로 표현하기는 적절하지 않다. 신을 언어로 표현할 때 신은 이미 의인화된다.
3) 계시관
신을 의지하는 절대 의존의 감정은‘내면적 의식으로 그대로 머물지 않고 외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데…그래서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면적인 것을 드러내는 계시가된다.’슐라이에르마허가 계시(revelation)를‘종교적 공동체의 기원’또는‘종교적 공동체의 기초’라고 말하고 ‘신적 전달 및 선포’라고 정의하며
계시의 주관적 해석을 부인하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계시의 주관적 특성을 강조했다. 강조점이 인간적 측면에서의 전달 또는 선포에 주어지고 신에게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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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슐라이에르마허(2)
4) 죄 및 은혜관
슐라이에르마허는 그의 저서에서 죄와 은혜의 관계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종교적 자기 의식의 문제를 취급했다. 죄와 은혜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죄 의식은 은혜 의식보다 선행하는 것으로서 은혜 의식의 전제가 되고 죄의식은 구원의 불가피성을 인색케 하고 구원을 기다린다.
죄 의식은 신 의식과 관련되어 있는 바 죄란 자유로운 신 의식발전을 방해하므로 인간이 신 의식을 획득하지 못하게 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죄와 육신을 구별했는데 육신은 죄가 아니지만 죄의 배아라고 보았다. 신 의식이 발달되지 못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인데 그는 육신을 야생적이며 무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육신에 반대되는 개념인 영은 본래적 완전 인간에 속해 있는 것으로 사람의 신 의식을 점차적으로 깨우치는 일을 한다. 그러나 육은 영의 발전과 영의 지향을 가로막아서 영의 하는 일을 못하도록 방해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본래적 완전성이 상실되었다고 했는데 이를 원죄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인간의 본래적 완전성이란 인간의 완전한 신 의식을 말하는데 원죄로 말미암아 신 의식의 발전 가능성 내지 본래적 완전성이 파괴되었다고 보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기독교인들의 죄 의식을 원죄와 자범죄로 나누었는데, 원죄란 개인 행위 이전에 받아진 죄의 상태인데 자범죄의 근거가 된다고 했다. 자범죄는 원죄가 나타난 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원죄는 개체 인간의 실존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죄성으로서 선행의 완전 불능을 초래했고, 이 상태는 오직 구원의 영향력에 의해서만 벗어날 수 있다. 거듭난 자의 모든 범죄는 영적 생활을 저지하지 않지만 거듭나지 못한 자의 죄는 신 의식을 파괴한다. 세상의 악도 죄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는데, 사회악은 죄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고 자연악은 죄와 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했다.
인간은 죄악의 공동 생활과 대립되어 작용하는 신적 공동생활의 영향을 받아 축복을 받게 되는데 죄는 하나님을 배반한것이고 은혜는 구속자의 행위와 전달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공동 생활에서 무죄한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전달받아 구원을 얻게 된다.
인간의‘완전한 죄 의식’은 완전하고 무죄한 구원자의 절대적 영력에 의해서만 가능케 된다. 이는 구원자가 완전한 신 의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초 인간의 천성은 본래 선하고 거룩한 것으로 스스로 완전하게 발전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능성은 죄로 인해 상실되었는데 그리스도가 그것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자연 인간의 본래적 완전은 그리스도에게서만 찾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구원자가 전달해주는 완전성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 의식이란 보편적인 신 의식이 아니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의 신 의식이고, 유일신론적인 신 의식이 아닌 구속자와의 공동체를 통해 발전되는 신 의식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은 그가 신자들을 그의 신 의식 안으로 인도함으로 이루어지는데 그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삼중 직무를 수행한다.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는 그 자신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원계시를 나타내어 가르치며 영생을 전달하는 그의 사명과 성부와의 독특한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무는 그가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고 대속의 죽음을 죽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힘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는 지금 성부 앞에서 신자들을 대변하는데 이로 인해서 신자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성취되고 기도가 상달된다. 그리스도의 왕적 직무는 크리스챤의 공동체적 삶의 모든 필요가 항상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왕국은 은혜의 왕국이므로 기독교는 정치 종교가 될 수 없고 신정 정치도 용납될 수 없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영적 주권을 행사한다. 그러므
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전적으로 타당하다.
5) 교회의 신학으로서의 신학의 발전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 객관적으로 고정된 신학은 있을수 없다. 신학은 종교적 의식의 요구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내적 확실성 이상의 어떤 정당성도 내세울 수 없다. 우리의 종교의식이 장소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리고 신학이란 이와 같이 항상 변하고 항상 발전하는 종교 의식의 자료들을 모아서 분석하고 체계화하는 것이므로 신학은 항상 발전하고 변한다. “17세기의 교과서는 더 이상 그 목적에 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신학을 순화하고 완전케 하는 것이 교의신학의 과업 중의 하나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의 목적이 교회를 발전시키고 지도하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신학의 공동체적 특성을 강조했다.
6) 결론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을 논함에 있어서 객관적인 요소들을 전혀 무시하지는 않았으나(예: ‘계시’, ‘그리스도’, ‘공동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관적 및 인간적인 요소들을 더욱 강조했다. 그는 신학을 내적 종교 의식(또는 체험)에 긴밀히 연결시키고, 객관적이고 형식적인 교리보다 내적 종교 의식을 높이며, 그래서 신학을 규범적인 것(normative)으로 보기보다는 서술적인 것(descriptive)으로 취급하므로, 신학이 딱딱한 스콜라주의적 체계가 되는 것을 방지했고 생생한 종교 원리로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 즉 그에게 있어서 객관적이고 규범적인 권위는 종교적이고, 주관적이고, 역동적이고, 실존적이고, 신비적인 인간정신으로 대치되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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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헤겔
1) 신과 인간의 종합
헤겔(G. F. Hegel, 1770-1831)은 데카르트나 파스칼과는 반대로 신앙과 이성과의 균열대신 하나의 조화를 추구했다. 즉 그는 철학적 신과 성경적 신과의 조화를 추구했다. 따라서 헤겔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생겼다. 합리주의나 칸트의 신인 분리로부터 무한과 유한의 통일, 신과 인간의 통일 및 삶의 통일과 마음의 통일과 심지어 신의 통일에로의 전환점이 이루어졌다. 신을 멀리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며 인간과 세계와는 상관이 없는 하나의 타자로 보는 이원론적 유신론(자연신론)이 헤겔에게서 분명히 거부되었다.
신을 세계와의 불가분적 관계의 관점에서 보는 헤겔의 신관은 분명히 스피노자의 범신론의 영향을 받았다. 스피노자의 신은 우주와 분리해서 존재하는 신이 아니었다. 신은 세계 안에, 세계는 신 안에 있었다. 자연은 신이 스스로 존재하는 특수한 방식이었고, 인간의 의식은 신이 스스로 사유하는 특수한 방식이었다. 그러면 헤겔을 범신론자라고 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신이라고 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범신론자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이 경험적 세계를 신화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신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을 모든 것이 신 안에서 밀접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는 넓은 의미에서의‘범재신론’(pan-en-theism)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에 있어서 타자로서의 신은 만유를 포함하는 범재신에게 정복되었다. 그래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서술함에 있어서 인격적 관계의 범주들이 거의 제거되고 말았다.
2) 신과 세계 및 역사와의 종합(신의 세속성과 역사성)
헤겔에 있어서 신은 절대 영이고, 자연이나 역사나 인간의 사상 등 모든 실재는 절대 영의 자기 표현 현상이다. 헤겔은 역사 안에서의 절대 영의 활동 현상을 진화론적이고 변증법적인 발전 과정으로 이해했는데, 절대 영이 자기를 버리는 부정의 과정과 자기를 취하는 긍정의 과정과 아울러 부정과 긍정을 초월하는 보다 높을 종합으로 상승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절대 영의 변증법적 활동을 통해 인간은 절대 영 안에서 자신을 의식하게 되고 절대 영은 인간 안에서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고 했다. 즉 헤겔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신’의 개념과‘신 안에 존재하는 세계’의 개념을 내세우며, 신과 세상과의 불가분적 상관 관계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세계가 곧 신은 아니지만 세계가 발전과정에 있는 신이라고는 할 수 있다. 이 신은 발전과정에 있는 세계에 즉 역사 안에 자신을 밖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세계를 자기 자신에게로 즉 자신의 무한과 신성에게로 이끈다. 이 모든 것은 만유를 포함하는 전능한 순환운동 가운데서 일어난다. 즉 신에게서 나아가서 신에게로 돌아온다. 헤겔은 이것을 표현하여 신의 외출과 신의 귀환이라고 했다.
헤겔은 결국 신을 물질적 세계나 정신적 세계와 분리해서 이해하는 데카르트나 자연신론의 이원론적 신 개념을 거부했다. 신은 문자적 의미에서 세계‘위’저 하늘에 존재하며 세계와 인간을 다스리는 전능한 통치자가 아니다. 신은 또한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세계‘밖에’존재하며 세계와 상관하지 않는 객관적 타자도 아니다. 신은 세계 안에, 세계는 신 안에 있다. 신은 유한한 것 안에 존재하는 무한자요 편재한 것 안에 존재하는 초월자요 상대적인 것 안에 존재하는 절대자다. 신은 절대자로서 세계나 인간과 관계를 맺는다. 신은 상대적인 것을 포용하고 창조하며 상대적인 것과의 관계를 가능케 하고 실현시킨다. 그러므로 신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영으로서 세계를 유지하고 지탱하고 동반하며 세계와 인간의 깊이와 중심과 높이가 된다. 세속적인 동시에 비 세속적이며 가까이 존재하는 동시에 멀리 존재하는 이 신은 인간과 항상 함께 하고 인간을 품으면서 인간의 모든 삶과 움직임 모든 실패와 타락을 유지하고 지탱한다. 즉 헤겔은 신을 유한 안에 깊숙이 존재하는 무한으로 그리고 세계와 인간과 역사 안에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와 모든 존재의 소멸될 수 없는 근거로 이해했다.
헤겔은 이와 같이 절대자를 역사 안으로 그리고 역사를 절대자 안으로 끌어들여 연결시키므로‘신의 역사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헤겔에게 있어서 신의 비 역사성은 있을 수 없으며, 변화무쌍한 물리적 세계와 상관이 없는 부동하고 불변하는 희랍의 형이상학적 신은 있을 수 없다. 또한 헤겔에 있어서 신의 초 역사성도 있을 수 없다. 성숙과 발전의 미래가 주어지지 않는 고정 불변하는 정적 신은 있을 수 없다. 초역사적 영역에 존재하다가 갑자기 이적적인 방법으로 역사 안에 들어와 역사를 간섭하는 신은 있을 수 없다. 헤겔의 신은 역사 안에서 항상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살아있는 신이다. 영원히 완전한 신이지만 역사화 될 가능성을 자유롭게 포착하는 신이다. 역사의 기초를 놓고 역사를 지탱하고 완성시키는 영원한 신이며 따라서 역사의 근원적 원인이 되며 모든 역사적 실재의 근원적 의미가 되는 신이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 활동하는 영원한 신은 역사의 근원과 중심과 미래이며 알파와 오메가이다.
우리는 여기 헤겔에서 신학이 초월주의, 합리주의 및 실존주의를 지나 역사주의로 넘어서는 기초가 마련된 것을 보게 된다. 현대신학이 모든 관심을 인간과 세계와 역사에두는 철학적 기초를 이미 헤겔이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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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포이어바흐
포이어바흐(Ludwing Andreas Feuerbach 1804-1872)는 독일의 헤겔 좌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요, 종교비평가로 형법학자였던 P.J.A.포이어바흐의 4남으로 바이에른의 란츠후트에서 출생하여 계몽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는 일찍부터 종교에 관심을 품어, 하이델베르크와 베를린에서 신학을 배웠는데, 헤겔의 영향을 받아 1825년 에를랑겐 대학 철학부로 옮겼다. 29년 동 대학의 시간 강사가 되었는데, 그리스도교를 이기적이고 비인간적인 종교라고 비판하여 학교 당국의 반감을 사, 32년 실직하였다. 복직을 단념하고 36년 이후부터는 브루크베르크에서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자연과학의 연구에도 힘썼다. 철학사의 연구에서 출발하였는데, A. 루게가 주재하는 할레 연보에 ‘헤겔 철학비판’(1839) 등 독자적인 사상을 발표하게 되면서 명성을 쌓아, 41년에는 대표작‘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간행하여,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48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종교론을 강의하였으며, 60년에 아내의 도기공장이 파산하여 레헨베르크로 이주하였으며, 만년에는 빈궁 속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헤겔의 역사주의적 및 세속주의적 신 개념은 그의 좌파의 대변자인 포이어바흐에 의해 자연 및 인간 중심적, 무신론적 신 개념으로 발전했다. 포이어바흐는 19세 때부터 신학공부를 시작했으나 신학에 흥미를 잃고 철학을 공부하면
서 헤겔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게 됐다. 신학이 아니라 철학이다. 믿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이렇게 선언한 포이어바흐는 헤겔이 간 길 이상을 걸었다. 그는 헤겔의
절대 관념론에 반대하여 보다 실제론적이고 보다 물질주의적인 인식론을 내세웠다.
포이어바흐에 있어서 모든 철학의 출발점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인간의 첫째 대상은 인간이다.’인간의 관심의 대상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실제적인 존재인 인간이었다. 여기 포이어바흐의 인간은 자연이나 감각적 삶에서 유리된 단순한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의지와 감정과 사랑이 겸비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전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며, 공동체와 유리된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속한 우주적 존재로서의 인간이었다. 포이어바흐에 있어서 실제적 인간은 이제 종교의 시작과 끝이 되었다.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무한자를 인식한다고 할 때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무한성을 인식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무한자를 인식함에 있어서 인식의 주체는 그 자신의 성품의 무한성을 인식의 대상으로 삼는다.’즉 인간은 자신으로부터 그의 인간성을 끄집어 내세운 후 그것이 마치 자기밖에 존재하는, 자기와 분리된 하나의 자율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을 신이라고 부르고 그것을 경배한다.
결국 포이어바흐의 신은 인간의 돌출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자는 그 자신의 성품에 불과하다. 자기에게 미치는 대상의 능력은 자기 자신의 성품의 능력에 불과하다. ’신은 인간이 돌출시켜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성품들인 사랑, 지혜, 공의 등은 실제로는 인간의 성품들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신은 인간 자신이다(Homo nomini Deusest). 결국 신이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형상대로 신을 창조한 것이다. 인간은 위대한 창조자요 신은 훌륭한 피조물이다.
포이어바흐는 이상과 같은 그의 무신론적 인본주의를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정당화하면서 기독교 시대는 이제 돌이킬 수 없게 지나갔고 우리는 지금 ‘기독교 몰락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다. 결국 그는 큉이 지적한대로 ‘현대 무신론의 교부’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여기 포이어바흐에서 현대 정치신학에서 발견하는 ‘탈 기독교 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비종교화된 ‘성숙한’ 인간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새로 나타나기 시작한 ‘노동자 신’ 또는 ‘민중 신’의 모습이 이미 분명하게 형성되어졌음을 보게 된다. 성경과 전통적 기독교 신학이 묘사한 신의 모습은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인조적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치부하는 인본주의적 자율성의 사상적 기초를 이미 포이어바흐가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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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르크스
1) 사회 정치적 무신론
헤겔의 좌파에 속하면서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사회정치적 무신론을 주창한 사람이 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 였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기독교인으로 교육을 받은 후 무신론자로 그의 생애를 마쳤다.
마르크스는 1818 년 5월 프로이센령 라인주의 트리어에서 부유한 유태계 독인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주의적 사상의 소유자였다. 트리어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본 대학, 이어 베를린 대학에 진학하여 법학, 역사학, 철학, 특히 당시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헤겔 철학을 배웠다. 1841년 그가 23세 때 마르크스는 베를린에서 부르노 바우어가 이끄는 ‘베를린의 청년 헤겔파’에 속하여 역사, 철학, 문학을 공부하며 무신론으로 기울어졌다. 1842년 바우어가 그의 과격한 신학적 입장 때문에 교수에서 해직되고 그의 사상의 출판이 금지되자 ‘베를린의 청년 헤겔파’는 이제 종교적 비판에서 사회 정치적 비판으로 그 관심을 옮겼다. 포이어바흐의 인본주의적 무신론으로부터
마르크스의 정치적 무신론이 태동된 것이었다. 마르크스 자신도 프러시아 정부의 압박을 받아 1843년 독일을 떠나 파리에 가서 생활하는데 그는 거기서 사회주의적 혁명사상에 접하면서 무신론적 사회주의자와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로
등장했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그의 무신론은 그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설립하는 데 이념적 기초를 제공해 주었다.
2) 변증법적 물질주의
마르크스가 헤겔의 영향을 받아 세계 역사를 변증법적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게 되었으나 그는 결국 헤겔의 사상체계의 중심을 이루는 변증법적 관념론을 거절하고 포이어바흐의 변증법적 물질주의를 택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를 따라 인간을 의식의 존재로 보기 전에 육체적 및 물질적 존재로 보았다. 그의 세계는 추상적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세계였다. 따라서 그는 종교의 출발점을 인간과 현세의 실제적 사건들로 삼았고, 신을 인간이 만들어 낸 돌출물로 보았다.
3) 인간의 역사성
마르크스는 한 걸음 나아가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을 한층 더 심화시켰다. 포이어바흐도 인간의 역사성과 사회성과 실제성을 중요시하기는 했지만 마르크스는 이를 한층 더 심화시켰다. 포이어바흐가 인간을 인류 전체에 속한 우주적 존재로 보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역사적 존재로 분석하지 않은데 비해, 마르크스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역사적 발전의 틀 안에서 그리고 특수한 역사적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이해하려고 했다.
포이어바흐가 인간을 공동체적 및 사회적 존재로 보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사회학적 콘텍스트의 관점에서 분석하지 않은 데 비해, 마르크스는 인간을 사회학적 처지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포이어바흐가 계몽과 새로운 인식을 통한 인간해방과 사회개조를 주창하면서도 철두철미하게 실제적인 비판 내지 혁명 활동을 격려하지 않은데 비해, 마르크스는 인간해방을 위한 실제적인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회 개조가 밑으로부터 사회를 개조시키는 혁명운동의 결과로 성취된다고 분석하고 노동계급이 실제적 정치투쟁에 가담할것을 요구했다. 착취 받는 무산계급이 착취하는 유산계급을 향해 정치적 계급투쟁과 사회주의적 혁명운동을 일으키는 길만이 인간해방과 사회 구조를 가져오는 길이라고 했다.
4)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사회, 경제, 정치적 인본주의
마르크스는 그의 초기 작품에서 헤겔과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인도주의적 이상을 많이 언급했으나, 그의 후기 작품 특히 그의‘자본론’에서는 사회, 경제, 정치적 이상을 보다 많이 언급했다. 후기 작품에서도 인도주의적 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는 모든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모순이 제거되고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그대로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인도주의적 사회야말로 마르크스가 제시한 노동계급의 철폐와 사유재산의 철폐와 독재적 지배계급의 철폐로 이루어지는 혁명의 목표이며 계급 없는 공산주의 사회의 이상이었다. 그것은 정부도 종교도 사라져 버린 사회이며 사회 민주주의적 인도주의가 성취
된 사회이다. 우리는 여기 마르크스에서 현대 정치신학이 그 궁극적 관심을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그를 규정하는 근본 요인이며 그를 해석하는 근본 틀로서의 역사적(사회, 경제, 정치적) 구조에 두는 사회, 경제, 정치사적 가치 기준이 이미 마련된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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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리츨
19세기 독일 신학자들 중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 1822-1889)은 1822년 베를린에서 루터교회 감독의 아들로 태어나서 본, 할레, 하이델베르크, 튜빙겐 대학에서 수학했다. 1852년부터 본 대학의 교수로, 1864년부터는 괴팅겐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1889년에 죽었다.
1) 사변적 합리주의 거부
리츨은 초기에는 헤겔과 튜빙겐 학파의 영향을 받아 헤겔을 추종했으나, 그는 차츰 칸트와 슐라이어마허 그리고 로쯔(Rudolf Lotze) 등의 영향을 받아 헤겔과 그의 사변적 합리주의를 거부했다. 저는 전통적인 유신논증이 제일원인 또는 절대자를 추론하는데 그칠 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했다.
리츨은 형이상학을 신학에서 추방했으나 나름대로의 그의 인식론을 형성했다. 활동하지 않고 쉬고 있는‘물 자체’(things-inthemselves)는 인식될 수 없으나, 물 자체가 우리에게 행동하고 우리가 그것에 응답할 때 그것은 인식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세상에서 유리된 신이 전통적 유신논증에 의해 증명될 수는 없으나, 신이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인격적 영향을 미칠 때 인식될 수
있다고 했다. 따라서 참된 계시와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나 느낌이나 인식이 없이 신 자신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헛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독교 신앙은 논증에 대한 지적 동의가 아니고 인격에 대한 인격의 응답이다. 신앙에는 지성보다 의지가 더 큰 역할을 한다. 과학자나 철학자가 사물에 대해 ‘사실적 판단’을 내리는 데 비해 종교인은 사물에 대해‘가치적
판단’을 내린다고 했다.
리츨은 칸트와 함께 사변적 합리주의를 거부하고 실천적 윤리를 종교의 중심으로 삼았다. 사변적인 관심은 부적당하다고 했다. 영적 실재는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경험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슐라이어마허와 마찬가지로 자연신학과 아울러 계시 신학을 거부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크리스천의 체험으로부터 끄집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슐라이어마허가 그 체험을‘절대의존의 감정’에서 발견했던 반면 리츨은 그 체험을‘윤리의 영역’에서 발견하려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을 사유의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행동 가운데서 그를 분별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사역도 생애와 윤리적 인격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리츨은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체험에 근거한 일종의 ‘인격적 유신론’(a personal theism)을 내세웠다. 사실 리츨의 신의 개념이 전적으로‘실천적’(practical)이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그가 신을 인간의 종교적‘가치판단’(value-judgement)과 관련하여 묘사한 것은 그의 신 개념이 실천적으로 기울어진 것을 말해준다고 하였다. 그는 가치 판단을 선에 대한 종교적 진술로 이해했는데 신은 선을 의미한다고 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타당성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생한 체험이라고 썼다.
2) 역사적 예수
리츨은 경건주의나 종교적 감정주의에 대해 관심이나 동정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신비적 계시와 체험은 신앙의 기초나 윤리적 지표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신앙의 확실한 기초는 ‘역사적 예수’의 사역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종교적 인식을 신학의 자료로 삼은 데 비해 리츨은 역사적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를 신학의 자료로 삼았다. 예수의 독특한 신 의식만이 우리의 유일한 표준이요 모델이 된다고 했다. 기독교의 계시는 근본적으로 역사적 계시인데, 그와 같은 역사적 증언이 신약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했다. 신약을 통해 전해진 예수의 역사적 사건만이 무너뜨릴 수 없는 객관적인 사건이며 신자들의 유일한 권위라고 했다.
예수의 역사성을 강조했던 리츨은 결국 복음서의 저술 연대를 1세기로 잡았고 대부분의 바울 서신이 바울의 저술임을 받아들였다. 신약의 성경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증언들을 제공해준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단순히 역사 연구의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판단 이라고 했다. 즉 예수가 한 사람에게 나타나서 그를 붙잡고 그를 자유롭게 할 때 역사적 사건들은 그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된다고 설명했다.
3) 하나님의 왕국
리츨은 복음의 본질을 두 개의 초점을 가진 타원으로 보았다. 한 초점은 칭의(justification)와 구속(redemption)과 화해(reconciliation)이며 또 다른 초점은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다.
칭의와 구속과 화해는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을 묘사한다. 이것은 인간을 자연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을 지배하고 죄를 이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인종과 모든 종족이 도덕적 공동체와 형제 사랑 가운데서 연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둘째 초점은 하나님의 왕국이 된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이 왕국을 세우는 데 있었고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쳤다. 화해의 목적은 왕국건설에 있다고 했다. 이 두 개념 사이에는 갈등이 없다. 칭의 또는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윤리적인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리츨에 있어서 하나님의 왕국은 종말론적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이었다. 즉 역사 안에서 점진적으로 건설되어 가는 왕국이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었고 공동체적인 것이었다. 교회는 기도와 예배로 연합된 왕국의 멤버들로 구성된다. 리츨에 있어서 교회는 무릎을 꿇는 왕국이었고, 왕국은 일하기 위해서 걸어가는 교회였다. 리츨이 신비주의를 거부한 이유는 신비주의가 개인주의를 강조한 나머지 왕국의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과업을 부인했기 때문이었다.
리츨은 기독교의 윤리적인 목적인 하나님 왕국의 건설을,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문화적 이념의 성취와 동일시했다. 즉 리츨은 기독교의 이념과 문화적 이념을 동일시하는 문화 신학(culture protestantism)을 제창했고 후에 발전된 ‘사회 복음주의’를 태동시켰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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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르낙과 기독교의 본질
1) 저자 소개
19세기말의 가장 위대한 개신교 역사가로 불리는 하르낙(Adolfvon Harnack, 1851-1930)은 독일 도르팟트에서 실천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에를랑겐, 도르팟트, 라이프찌히에서 수학한 후 1874년부터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879년부터는 기센대학에서 1886년부터는 마르부르크대학에서, 1889년부터 1921년까지는 베를린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그가 남긴 최대의 업적 중의 하나는 1886년부터 저술한 3권의 교리사(history of dogma)였다. 그는 여기서 기독교의 신조들(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칼케돈 신
조 등)이 형성된 배경과 발전 과정을 역사 비평학적 관점에서 서술했으며, 기독교 교리 형성 과정에서 기독교가 조우한 두 가지 사상 중 그 첫째 사상인 그노스틱주의는 기독교가 거부했으나 그 둘째 사상인 헬레니즘은 그대로 받아들였는데, 그 결과 기독교가 헬레니즘화 내지 지성화되었다고 비판했다. 20세기 초 하르낙의 명성을 온 유럽과 세계에 떨치게 한 사건은 1889년 겨울 베를린대학에서 ‘기독교의 본질’이란 제목으로 행한 16번의 강의 내용이 책으로 출판된 일이었다. 1900년 라이프찌히 역은 하르낙의 책을 운송하는 화물차로 붐볐으며, 1927년에는 독일어로 14판이 출판되었고, 14개 국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2) 저술의 목적
하르낙이 자유주의 신학의 고전적 대표작이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본질’(What is Christianity, 1899-1900) 을 저술하게 된 목적은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긴박한 질문에 대한 역사가로서의 해답을 제시하려는 데 있었다. 그가 사용한 역사적 연구 자료는 공관복음서였는데, 복음서 가운데 예수가 가르친 복음과 예수에 관한 복음과를 날카롭게 구분했다.
3) 복음의 본질
하르낙은 이 저서에서 복음의 본질을 분석하고 드러내려고 시도했다. 즉, 기독교의 다양한 역사적인 형태인 신조나 제도나 심지어 성경뒤에 숨어 있는 영원히 타당한 알맹이를 끄집어내려고 시도했다. 늘 변화하는 형태 뒤에 참으로 고전적이고 언제나 타당하고 아주 단순한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교의 신학의 진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교회의 제도 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사도 바울의 진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에게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분의 모습을 공관복음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의 모습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복음서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복음서 안에는 틀이 있다. 즉, 이적에 대한 기사와 귀신이나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용된 틀에 불과하다고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끝이 가까운 것도 아니다. 복음의 본질은 독립되어 있고 이런 것들과 관련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가르침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선지자와 같이 말씀했지만 선지자와 같지는 않았다. 그의 말씀은 평화와 기쁨과 확신을 자아냈다.…그는 하나님의 임재를 항상 의식하면서 살았고, 자기의 양식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으로 삼았다.”(제 3강의 초두)
4) 예수의 가르침
하르낙은 그의 셋째 및 넷째 강의에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했다. “우리가 예수의 가르침을 개관할 때 세 가지 주제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각기 전체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도 전체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도래이고, 둘째는 하나님 아버지와 인간 영혼에 대한 무한한 가치이고, 셋째는 보다 높은 의와 사랑의 계명이다. 예수의 메시지가 그렇게도 위대하고 그렇게도 강력한 것은 그의 메시지가 그렇게도 단순하면서도 그렇게도 풍부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제 3강의)
하르낙은 복음서 안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두 가지 상이한 견해가 있음을 지적했다.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외적 통치로 보는 견해와 이미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내적 통치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했다. 하르낙은 다시 주장하기를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인 전자의 입장을 거부하고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에게 도래하여 그의 영혼 속에 들어가 그를 붙잡음으로 인한다. 실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개인들의 가슴속에 이루어지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그것은 능력 가운데 계신 하나님 자신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견해에서 볼 때 외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와 관련되는 모든 극적인 요소들은 사라지고 만다. 미래에 대한 모든 외적인 소망도 사라지고 만다.”(제 3강의 마지막 부분).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일상생활의 산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의 선물’로 나타난다. 그것은 ‘순수한 종교적 축복’이며,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험’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전 존재 속에 침투하여 그것을 지배한다. 겸손한 자에게 임하여 새롭고 기쁜 삶을 부여하는 이 왕국이 없이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밝히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을 예수 자신이 발견했고, 그의 제자들이 발견했다.”(제 4강의 중간 부분).
예수가 복음의 본질을 설명한 또 하나의 방법은 하나님을 모든 인류의 아버지로 선언하고 아버지로서 그가 그의 자녀들을 한없이 귀하게 여긴다고 강조한 점이다. 모든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게는 한없이 귀하다. “실로 예수의 모든 메시지를 둘로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것과 인간의 영혼이 너무 귀해서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르낙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 된 사실과 인간 영혼의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① 주기도와 ②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말씀과 ③ “참새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질 수 없다”는 말씀과 ④ “온 천하를 얻고도 네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는 말씀의 뜻을 풀이했다.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그의 섭리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의 개념들 속에 복음의 전부가 표현되었다.”(제 4강의 중간 부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그의 모든 자녀들은 형제 사랑의 윤리적 삶을 실천해야만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의 윤리는 ① 외부적 종교의식이나 선행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② 사람의 내적 성향과 동기에서 우러나오는 ‘보다 높은 의’인 ③ 사랑과 ④ 겸손의 삶이었다. 이것이 예수가 가르친 복음적 삶이었다. “보다 높은 의와 사랑의 새 계명의 메시지를 이 네 가지 의미로 표현하므로 예수는 윤리적 삶의 영역을 그 이전에 아무도 정의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으로 정의했다. 팔복은 그의 윤리와 종교를 포함하는바 양자는 뿌리에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외적이고 특수한 요소들에서 벗어나 있었다.”(제 4강의 끝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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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복음의 문제들
하르낙은 예수가 가르친 복음의 근본 요소들을 정의한 후 제5강의부터 제8강의에서 복음과 관련된 6가지 문제들을 기술했다.
첫째, 복음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세상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금욕주의는 복음 안에 설 자리가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복음이 세상을 부인하는 메시지라는 견해를 거부해야 한다. 예수는 우리가 싸워야 할 세 가지 원수들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것들을 피하라고 하지 않고 싸워 없애라고 했다. 이 세 원수들은 맘몬과 염려와 이기심이다.”(제5강의 중간) 예수가 요구한 것은 금욕적 도피가 아니라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의 사랑이었다.
둘째, 복음과 가난한 자와의 관계에 대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하르낙은 교회사에 나타난 예수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제시했다. 즉, 예수를 위대한 사회 개혁자로 보는 견해와 예수는 사회적 또는 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고 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가난한 자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시편과 후기 유대 문학에서‘가난’이란 말은 그들의 마음이 열려져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사용되었다. 예수도 이와 같은 말의 용도를 발견했고 그것을 그대로 채택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서에서‘가난한 자들’이란 표현을 대할 때 그 말을 경제적 의미로 사용하면 안 된다.”(제5강의 끝 부분) 따라서 하르낙은 예수가 사회 개혁의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예수는 사회 개혁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때로 가난한 자들이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가난의 형편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제6강의 중간부분)고 했다.
셋째, 복음과 법과의 관계에 대해서 하르낙은 복음이 근본적으로 정치 질서와 같은 세속적 질문을 다루지 않았다고 했다. “합법적 정부에 대한 예수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면, 그는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었고,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지도 않았다.”(제6강의 끝 부분)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권리 추구를 포기할 수 있어야만 했고, 정의가 무력의 도움으로 실현되지 않고 선에 대한 복종으로 실현되는 나라를 형성하는 데 협력해야 했다.”(제6강의 끝 부분) “복음은 내적 사람을 향하여 호소한다.…복음이 세우는 나라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교황이 세상을 지배하려는 신정 정치와 모순될 뿐 아니라, 종교가 이 세상 일을 직접 또는 공적으로 간섭하는 것을 금한다. 복음이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즉, 삶의 진정한 관심사는 항상 같다는 것이다. 오직 한 관계, 한 이념이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의 나라의 시민이 되고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그리고 우리는 싸우고 투쟁하자. 억눌린 자에게 공의를 부여하고 세상의 형편을 이웃에게 가장 좋도록 만들자. 그러나 복음이 직접 도움을 주리라고 기대하지는 말자.”(제7강의 처음 부분)고 하였다.
넷째, 복음과 노동과의 관계에 대한 문명의 문제에 대해서 하르낙은 같은 입장을 취했다. 노동과 문명의 발전이 귀하고 가치 있는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최고의 이상이 되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것은 영혼에 참 만족을 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르낙은 끝으로 복음과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기독론의 문제와 복음과 교리와의 관계에 대한 신조의 문제를 취급했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세상에 전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자신을 그렇게 부른 것이었다고 했다(제7강의 후반부). 하르낙은 예수가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느냐는 문제는 신비에 속하며 심리학이나 역사적 연구도 이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고 했다. 하르낙은 복음이 교리의 체계나 우주에 관한 철학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복음은 영생을 가져다주는 기쁜 소식이요 바른 삶을 가르치는 교훈이다. “기독론적 신조를 복음 앞에 놓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멀리 떠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살기 시작한 사람만이 그리스도에 대해 바로 생각할 수 있고 바로 가르칠 수 있다.”(제8강의 후반부)고 했다.
6) 복음과 교회사
하르낙은 그의 저서의 후반부인 제9강의부터 제16강의에서 교회사에 나타난 복음의 이해와 발전 과정을 취급했다. 즉 사도 시대와 가톨릭주의 시대와 개신교주의 시대에서 복음이 어떻게 이해되고 발전되었는가를 시대별로 고찰했다. 사도 시대의 기독교의 특징은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님으로 인정한 것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산 교제를 체험한 것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 가운데서 순결과 형제애의 거룩한 삶을 산 것이었다고 지적했다(제9강의). 사도 시대에 바울은 기독교를 유대주의와 율법의 종교에서 구출하여 이방인을 위한 세계적 종교로 만들었다. 이와 같이 바울이 유대주의적 요소들과 제한점들을 제거했지만 동시에 복음에 새로운 요소들과 제한점들을 부여했다. 즉, 교회에 새로운 형태의 예배를 수립하고 기독론을 강조하고 교회 안에 구약을 유지하도록 함으로 복음의 본래적 순수성과 능력을 변질시키게 되었다(제10강의)고 했다. 하르낙은 기독교의 가장 큰 변화가 2세기에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즉, 2세기의 기독교가 자연 종교, 정치, 종교 및 이원론적 그노스틱주의와 싸워 승리했으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신앙을 지성화하고 교리와 예배와 생활이 고정된 형태를 취하므로 가톨릭주의로 변화되었다고 지적했다(제11강의). 희랍 가톨릭주의는 희랍 자연 종교의 연속에 불과했으며, 기독교의 옷을 입은 희랍의 산물이었다. 그것의 특징은 동방 교회와 그 특성들을 공유하는 가톨릭주의와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라틴 정신을 이어받은 것과 어거스틴의 종교적 정열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종교적 정열은 교회주의에 의해 패배를 당하므로, 로마 가톨릭주의는 결국 로마 제국을 계승하는 데 그치게 되었는데, 이는 복음을 전적으로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제14강의)고 했다. 종교 개혁은 교회사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운동이었다. 종교가 종교의 본질적인 요소에로 되돌아갔다는 점에서 그것은 참으로 종교 개혁이었다. 말씀과 신앙의 요소가 강조되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가 선포되었다. 교회의 외적 권위와 성례주의가 거부되었고 교회는 이제 신앙의 영적 공동체가 되었다(제15강의). 종교 개혁이 복음을 회복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종교 개혁이 범한 오류도 없지 않았다. 국가 교회를 세운 일, 신앙과 감정을 지나치게 강조한 점, 수도원 정신을 폐지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하르낙은 개신교가 종교 개혁의 정신을 붙잡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복음의 단순성과 순수성을 붙잡아야 한다고 했다. 신학만으로는 부족하다. 복음 안에 나타난 크리스찬의 신실성과 자유를 유지해야 한다. 하르낙은 끝으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의 종교라고 강조했다(제16강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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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윈의 진화론
역사 비평학 못지않게 신앙에 피해를 준 것이 바로 진화론이다. 19세기 후반 신학의 주요 주제는 과학과 신학의 갈등이었다. 그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앞서 본 성경에 대한 역사 비평학과 다윈에 의해서 주창된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1859년 출판된‘종의 기원’으로 시작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존엄성은 사라진다. 다윈 이전의 과학 세계는 뉴톤이었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기계적인 형태였다. 과학자들은 자연의 질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는 자연 신학에 잘 적응이 되었다. 그리하여 낭만주의 시대까지 과학은 신학의 적이 아니라 창조물이었다. 이 신학과 자연 과학의 조화는 낭만주의에서 극치를 이루었다. “창조주 없이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과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이러한 과학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이나 섭리는 단지 질서와 비슷한 단어일 뿐이었다. 하나님은 수학자였다. 그래서 너무도 절묘한 질서와 조화로서 세상을 만드셨다. 생물들도 그 모양이나 종류가 너무나 조화를 잘 이루고있었다. 창조주는 자연의 법칙대로, 멋진 디자인으로 그들이 생겨나도록 한 것이다. 아니 어찌 보면 창조주는 곧 자연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이제 자연 선택의 이론에 의해서 이러한 섭리론은 흔들리게 된다. 다윈은 자연 선택이 섭리의 개념보다 진화단계에 더 적합한 이론을 제공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의 기원’의 부제를 ‘자연 선택이나 생존의 투쟁에서 적응하는 종을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모든 생물은 자연과의 투쟁에서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을 뿐 아니라 더 잘 적응하도록 변화되어 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삶의 투쟁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생물은 사라져 버린다. 단지 적응이 되는 종류들만 남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적응하기 위해서 생물들은 투쟁을 하게 되고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새로운 종류의 진화가 나타난다. 많이 사용되고 소용이 있는 기관은 발전하고 쓸모없는 기관은 퇴화한다. 이리하여 전보다 발전된 종류가 나타나고 여기서 새로운 종의 기원이 시작된다.
그리하여 가장 하급의 생물에서 고등한 생물로 수십만 년의 세월을 두고 서서히 진화해 가는 것이다. 생물들 가운데 가장 진화한 것이 유인원이다. 그 중에 원숭이는 어느 날 일어설 수 있게 되었고 차츰 허리를 펴고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손을 사용하여 무엇인가 연장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은 고등동물로 스스로를 만들어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이 할 일은 무엇인가? 없다. 생물이 적응하는 것은 스스로의 힘이다. 그러면 성경에 쓰여진 창조의 기사들은 어찌된 것인가? 당연히 진화론과 반대 입장에 서게된다. 그렇다면 성경이나 진화론의 내용 중 하나는 사실이 아닌 것이 된다. 만약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내용은 거절해야 한다. 그러면 창세기만 거절할 것인가 아니면 성경 전체를 그렇게 할 것인가?
이뿐만 아니라 다윈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이야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윈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되었다고 1871년 출판된 ‘인간의 가계’라는 책에서 분명히 밝혔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타락과 구원도 모두 허튼 소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논리 안에서는 전통적인 신앙이 어떤 형태로든 바뀌어야만 하게 되었고, 성경적인 인간관은 설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굉장한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학자들도 다윈의 의견에 비판을 가했다. 이에 대하여 헉슬리라는 다윈 옹호자는 외쳤다. “내가 되풀이 선언하건대 어떤 사람이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두었다고 창피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오히려 종교적인 편견으로 이끄는 인간을 조상으로 둔 것이 더 수치스럽다고.
하지만 신앙인들은 다윈이 표현하는 인간의 모습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영혼이란 것이 어디있는가? 두 가지는 분명하였다. 그 하나는 과학이 영혼에 관해서 아무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혼은 과학의 영역 밖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혼은 아담이건 그의 후손이건 특별한 피조물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생물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창조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든 피조물 중에 특별한 것이었다. 어느 피조물에 하나님의 형상이 찍혀져 있는가! 또한 어느 피조물에 인간 같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의 차원이 있는가! 이것을 무시하고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근본적으로 같은 물질적인 차원에 놓고 다룬다면 그 결과는 너무도 자명한 것이었다. 곧 다음 세기에 나타나는 인간의 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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