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노아의 때
(창6:1-13)오늘 아침 창세기와 더불어 생각할 것은 누가복음 17장 26절 이하의 몇 절 말씀입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눅17:26-30).
주님께서 노아의 때, 롯의 때의 일을 드셔서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하신 말씀에 대해서 몇 가지 상고하고자 합니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행한 일들
그러면 노아의 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주께서 구체적인 예로 드신 것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다는 것입니다. 롯의 경우에도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내려와서 다망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때에 다른 여러가지 사건도 많았겠지만 주께서는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갔다는 것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할 일인데 그것을 해서 큰 죄악을 범했다는 말인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먹도록 만드셨으므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쉴 수 없습니다. 매일 먹고 마셔야 합니다. 시집 가고 장가 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바 거룩한 제도요 은혜요 축복이지, 그것을 어느 시기에는 해서는 안된다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상의 항다반의 일을 열거하시면서 노아의 때에도 그랬고 롯의 때에도 그랬다고 하셨습니다. 롯의 때에 덧붙여진 것은 사고 팔고 집을 지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과 같은 산업 구조의 사회에서나 그 때의 사회에서 사고 팔고 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입니다. 또 심는다는 것도 나무를 심든지 채소를 심든지 혹은 곡식을 심든지, 다 씨를 뿌리고 심고 함으로써 다시 거두어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을 짓는다는 것은 살기 위해서 필요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바 사람으로서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활동을 모두 했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또 하나도 해서는 안될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께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패괴하고 악하더니 홍수가 임해서 다 멸했다.” 하시거나, “롯 시대에 사람들이 심히 괴악해서 큰 죄인들이더니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내려서 망했다.” 하시면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시지 않고, 그들의 평상 생활을 지적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위험함
주께서는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하리라.” 하셨는데, 그러면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는 사람은 먹거나 마시지 않고 금식하며 굶고 있어야 하고, 시집 가고 장가 가는 일도 딱 중단하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야 할 것인가? 실제로 과거 일본의 어떤 교단이 그렇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서, ‘예수님 오시는 날에 우리가 먹고 마시고 할 것이 아니다.’고 생각하고 밥을 조금씩 싸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러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 교단의 큰 지도자가 전교인을 데리고 하꼬네 근방에 있는 어떤 높은 산으로 올라가 예수님이 오실 것으로 계산된 날까지 산꼭대기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오신다는 그 날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오신다는 날 전까지야 모두 다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 앞에 찬송하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주를 영접해서 상 받고자 했으며 “착하다. 제일 먼저 와서 나를 맞이했구나.”하시는 음성을 듣고자 했지만, 막상 오신다는 날 아침부터 마음이 잔뜩 긴장해져 가지고 기다려 보았으나 아니 오셨습니다. 새 옷을 입고 하루 종일 앉아서 간절히 고대했으나 저녁이 되도록 아니 오셨습니다. “웬일인가?” 하고 하늘을 쳐다보았지만 하늘은 맑기만 할 뿐 아무 징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하, 아무래도 우리가 계산을 잘못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루나 이틀을 더 기다려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은 고사하고 한달이 지나도 아니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이 날짜 계산이 음력으로 되어야 하는데 양력으로 잘못 계산되었다고 해서 산을 내려왔다가 음력으로 따져서 다시 올라갔지만, 음력으로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지금까지 안오시고 말았으며 그들도 아직 오시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만, 이것 때문에 그 교단이 갈라지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주께서 하신 말씀을 잘못 해석하든지 성경 말씀을 그릇되게 관련하면 항상 이러한 -이와 똑같은 일은 않는다 할지라도 - 위험 가운데 빠져 들기가 쉽습니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홍수가 나던 그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다 멸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그 날의 한 2,3일 전까지만 그렇게 해야했고 그 다음부터는 기다려야 했는가? 그러나 분명히 주께서는 그런 의사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 오실 지 알 수 없으니까 주의해서 항상 경성하라는 말씀을 하셨지 며칟날에 오실터이니까 그날 전 2,3일 동안은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느 날 오실는지 누가 예료할 길이 없으니 오시는 그 날까지는 먹고 마시고 또 시집가고 장가가기로 날을 받아 놓았으면, 다 혼인 예식도 행하고 하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 나라에서도 “주께서 나타나시는 그 ‘날’과 그 ‘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마 25:13)는 말을 인용해서 “그것은 그 ‘날’과 그 ‘시’에 대한 것이지 그 ‘달’에 대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해’에 대해서는 말을 안하셨으니까 우리가 ‘해’쯤은 예상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을 예상해서 천구백 몇년쯤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여러분은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회때 인기를 끌던 제목이었습니다. 그것이 다른 교파가 아닌 장로교 안에서 하던 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런 것을 비난하여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왜 그러한 과거를 갖게 되었느냐는 것을 생각하고자 함입니다. 그러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할 때 그 가르치는 바를 순수하게 바로 받아들이려 않고, 이상한 선입관을 가지고 말씀을 거기에다 끌어 붙이려는 경향에서 생깁니다.
☞인류 역사 이래 항상 있어 온 생존의 기본적인 활동
“노아의 때”라고 하면, 사람들은 “에익, 그 때 사람들은 다 악했으니까 망해야지.”하고 얼른 생각하기 쉽지만 - 그리고 사실 이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아의 시대에 홍수가 있어서 다 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 예수께서 지목하시고 지적하신 ‘노아의 날의 특성’은 다만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간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무슨 특성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든지 다 있는 이야기입니다. 노아의 날 뿐 아니라 인류가 있어 온 이래 지금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셔야 하고 시집가고 장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무슨 어떤 한 시대의 특성은 아닙니다.
그러면 특성이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그랬다고 했으니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말로 해석을 해 본들 며칠은 고사하고 몇년에 오실지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몇 년 후에 오실는지 알 수 없으니 몇년동안은 딱 금하자 한다면 가령 과년한 처녀들은 몇년후에 오실듯하니까 시집가지 말고 그냥 기다리는 것이 편하겠다고 하다가 예수님이 한 세대 혹은 한 백년이고 오시는 일이 없다면 - 과거 백여년 전부터 그런 짓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 공연히 처녀만 시집 못 가고 묵혀 늙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날 까지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말도 충분히 무슨 특별한 변고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날까지”라는 말을 주께서는 왜 쓰셨는가? 그러나 그 말도 역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 항다반의 생활을 홍수가 임하는 그 날까지 계속하다가 멸망을 했다는 그 뜻으로 쓰신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 항다반의 일을 하는 것이 죄악이라는 말도 아니고 그런 것을 그 날까지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규정할 길도 없습니다. 그 날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일상 항다반의 일을 중단한다면 가령 사흘만 굶고 앉았어도 나중에는 물건이 모두 허깨비로 보일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하고 앉아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
그런고로, 주께서는 여기서 항상 항다반의 일 자체를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다만 항상 항다반적인 일을 했을 뿐 그 이상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을 우리가 간취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사람들의 악함을 지적하시고 사람들이 육체에 속한 까닭에 주의 신이 항구하게 그들을 기다리시지 않고 분명히 120년이라고 하는 어떤 데드라인을 정해서 그 시기가 지나면 거룩한 심판을 내리실 것을 이미 보이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에녹같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사 앞으로 올 심판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증시하고 예언케 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핑계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일상 항다반으로 하는 일 이외에는 앞으로 올 홍수에 대한 대비나 또는 “죄 때문에 홍수가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는데 대해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에 어떤 다른 특성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가 홍수로 인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 외에는 특별히 홍수에 대해 대책을 세워서 행한 일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아무 준비가 없었습니다.
☞롯 시대의 특성
롯의 경우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누가 강력하게 예언하고 회개하라고 외쳤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의인 롯이 사람들의 패괴한 일을 보고 그의 마음을 상하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5-8). 이것이 롯의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롯이 그 속에 들어가 살면서 적극적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악을 지적하고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말씀을 바로 전한 기록은 없습니다. 롯은 거기서 혼인을 해 살았지만 그이 아내도 그의 감화를 받지 못한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롯을 구원하실 때 롯의 아내도 롯에 의하여 성을 나가기는 했지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어기고 뒤를 돌아보아 그 자리에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함께 망하고 말았습니다.
두 딸만 데리고 겨우 피신을 했지만 그는 두 딸에 의해서 암몬 자손, 모압 자손이라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을 대대로 괴롭히는 원수를 낳은 것밖에 별로 특징 있는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롯의 경우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롯을 인하여 소돔.고모라를 위하여 도고 한 사실입니다. 그 때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계시하신 것은, 의인 50인이 있으면 어떻겠습니까로 시작해서 45인, 30인, 20인, 급기야 10인까지 내려갔어도 의인 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장차 올 멸망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롯 시대의 특성입니다.
☞노아 시대의 특성
그러면 노아 시대의 특성은 무엇이냐 할 때 그들이 일상 항다반의 일을 하면서도 장차 올 심판에 대하여는 에녹이나 노아나 아무의 증거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증거가 없는 도시는 없는 대로 망했고 증거가 있는 도시는 있는 까닭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증거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핑계할 수 없는 거룩한 계시를 내리셨습니다. 인류에게 내리 신바 자연 법칙과 일반 계시가 그것인데 이것에 의해서라도 소돔,고모라는 대단히 괴악하고 패역한 도시로서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소돔 이전의 옛 세상, 노아 시대의 세상을 보면, 에녹뿐 아니라 노아 자신도 장차 사람들이 받을 심판에 대해서 전파했습니다. 노아는 전파했을 뿐아니라 스스로 홍수에 대비해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집 안에서 조그마하게 방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짐승들과 그의 가족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로 만들었습니다. 산에서 큰 나무를 베어 가지를 쳐서 수운하기는 힘드니까 그냥 그 자리에서 축조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볼 때, 오히려 노아를 미친 사람으로 몰았을지언정, 노아가 행하는 일에서 증거를 찾으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지 홍수에 대비하지 않았다는 점만이 아닙니다. 이 문제를 창세기 6장을 읽어가면서 생각하십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 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13).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후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창 6:17)고 하셨습니다.
☞가인 계통과 셋 계통으로 갈라짐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는 죄없이 아름답게 지으셨지만, 사람이 범죄해서 타락함으로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난 이후 많은 자식을 낳았지만 그 대표적인 자식이 가인과 아벨인데, 가인이 일어나서 의로운 아벨을 때려 죽였습니다. 가인이 의로운 아벨을 때려 죽인 중요한 이유는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가인이 분노하여 안색이 변할 때 경고하셨지만 그는 그 경고의 계시를 무시하고 반역한 까닭에 그렇게 하고 말았습니다. 제일 결정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 곧 책망에 대해서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에서 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아벨을 더 가까이 해서 그의 제사는 받고 내 제사는 안 받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아벨의 종교와 자기의 종교와는 쌍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벨을 때려 죽였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종교적인 거대한 핍박이요 무서운 사실이었습니다. 이 살인 사건이 일어난 이래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셔서 가인적인 반항과 함께 소위 카인주의라는 하나의 사상적 조류가 생겼고, 이 조류가 그 후의 역사를 꾸며 나갔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벨을 대신해서 셋이라는 아들을 내보내신 고로 그를 통해서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창4:26). 이것은 단순히 ‘여호와’라는 그 이름을 불렀다는 것보다는 “여호와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즉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의 한 타 입을 만들어 냈다는 말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거기에 살았지만 이러한 두 개의 조류가 사람들 속에 흘러 내려갔습니다. 물론 가인 계통의 후손이 다 카인주의의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고, 셋 계통의 후손이 반드시 셋주의, 즉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간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서로 연혼도 하고, 혹은 가인의 후손 가운데에서 셋적인 거룩한 종교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도 있겠고, 셋 계통 가운데 카인주의를 좋다고 받아들인 사람들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개의 거대한 문화적인 조류가 한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 서로 상충할 때는 카인주의가 더 강력한 세력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은, “만일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 아니라 누구라도 내가 폭력을 가지고 해보겠다.”하는 가인적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가인의 계통에서는 라멕이라는 자식이 태어나서 그때 벌써 자기의 폭력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누가 자기에게 적대할 때는 칠십칠배라도 보복을 하겠다고 까지 했고, 그의 자손 중에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들었습니다(창 4:16-24).
☞하나님의 아들들(셋 계통)의 타락
노아가 살던 세상은 이러한 풍조가 역사적으로 내려온 사회이고, 점점 더 퍼져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면 땅 위에서 거기에 지지 않고 강력하게 일어나서 끝까지 싸우며 나갔어야 할 하나님의 자식들은 무엇을 했느냐? 그때에 땅 위에는 사람이 번성해서 딸들을 낳았는데 아름다운 딸들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첫째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혼인의 기본적인 목적이 자기들의 심미감의 만족과 예술적 욕구의 만족 또는 자기 행복의 추구였습니다. 이 사회는 그런 멸망받을 사회의 징상을 차츰 드러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혼인을 내신 본래의 목적대로가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들을 삼았습니다. 그래서 낳은 것이 네피림입니다. 네피림이라는 말은 아주 거대한 인물을 의미하는데, 이 말은 ‘떨어진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나팔에서 나왔습니다. 왜 이 떨어진다는 의미의 네피림이라는 말이 나왔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이 여러가지로 추상하고 있는데, 하도 기운이 장재하고 키가 커서 그에게서 무엇이 항상 떨어져 내려오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한번 분노해서 주먹을 휘두르며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번개가 떨어지듯이 위에서 무엇이 떨어지는것 같다고 해서 그렇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은 “이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 사람이 아니냐?”고 해서 네피림이라고 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됐든지 거대하고 큰 체력을 가진 거한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으니 “그 자식들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 말씀을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의 역군들이 되었느니라.”가 아니라, “그 자식들이 용사라 고대의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였습니다. 수렵 시대의 용사라면, 사냥 잘하고 기운이 세고 사람들을 잘 다스려 누를 만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요컨데 그 개인이 장수가 되어야 하고 거대한 폭력을 행할 수 있는 체력가가 되어야 합니다.
옛날에 큰 인물이라고 하면, 전쟁을 할 때 자기의 전군을 대표하여 나가 싸울 만큼 힘이 세고 싸움도 잘 하는 사람입니다. 그때 그 시대상으로는 지모보다는 오히려 체력이 우수하고 거대한 인물이어서 첫째로 보기에 사람을 압도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해서 낳은 자식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이 합해서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이런 사람만 낳는다는 것은 아니고, 당시에는 이런 사람들이 나왔다는 역사의 기록을 지금 얘기해 가는 것입니다.
요컨데 역사적인 불가부득한 현실하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함으로써 그런 자식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시집 가고 장가 간다.”는 말씀을 유표히 하실 때는, 벌써 그 사실을 마음 가운데 두신 것입니다. “그때에 네피림들과 아낙 자손들, 즉 거인들이 있었다. 그들을 누가 낳았느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제 심미감의 만족을 위해서, 제 향락을 위해서 뜻대로 아내를 삼아 낳은 자식들이다. 그들이 가진 특성은 체력이고, 힘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누르는 것이다. 정의를 가지고 행사하는 것이 아니다.”
☞강포하고 패괴한 사회는 하나님께서 멸절시키심
그러면 노아 시대의 죄악의 특성은 무엇이고, 롯 시대의 죄악의 특성은 무엇인가? 아주 강렬하게 두드러진 그 특성의 일면들은, 노아 시대에는 강포와 패괴, 즉 정의를 짓밟아 버린다는 것이요, 롯 시대에는 괴상한 음란한 풍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아주 중요한 특성으로서 사회의 거대한 죄악입니다. 어떤 사회에 강포가 휩쓸고 있을 때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반적인 왕국, 곧 권능의 왕국의 성격조차도 무시되는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회를 멸절시켜 버리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그 권능의 왕국의 거룩한 도구로 쓰시고자 존재케 하셨는데, 강포가 휩쓸고 있을 때는 사람의 이 기본적인 존재의 의의에 패리 하는 까닭에 멸절시켜 버리십니다.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사회나 민족이나 국가의 정의가 땅에 떨어질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느부갓네살이 교만하고 그러한 거대한 원칙에 대해서 알지못하고 있을 때 다니엘이 추고하기를 “그러한 교만을 행하면 안된다. 하나님이 이 세사의 대주재시요 주권자이신 동시에 누구에게든지 뜻대로 주시고자 하시는 자에게 주군을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 왕도 먼저 정의를 행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며 자비를 베풀라,”(단 4:24-27)고 했습니다. 벨사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이야기를 했습니다(단 5:17-28). 그런고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하나님의 권능의 왕국에서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하에 사는 사람들이 비록 개인적으로는 많은 도덕적인 악을 벗할지라도 그들이 사회를 형성하고 사는데는 정의와 자비를 반드시 유지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든지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자비가 없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회를 징벌하시되 무서운 형벌을 보내십니다. 공의가 떨어지고 자비가 없는 그 첫째의 중요한 징상은 강포입니다. 노아 시대의 성격은 강포였습니다. 이 강포는 힘센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내가 정의라는 것을 짓밟은들 누가 감히 나한테 항거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폭력을 가지고 정당한 능력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그런 힘, 가령 체력이 있는 것은 정당한것이나, 그것을 폭력으로 전화시킬 때는 거기에 강포가 생깁니다. 이렇게 사방에 주먹과 폭력을 가지고 날뛰는 사람들이 많은 그런 사회를 형성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포가 땅을 패괴케 하는구나.”하시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는 분명히 이러한 것들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자기들이 아내를 삼을 때는 그 아름다운 것을 보고 연연불망해서 아내를 삼았지만 자식을 낳고 보니 강포한 자식, 폭력을 행사하는 자식이 되었습니다. 작게는 혼자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치고 정의를 짓밟아 버리며 자기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체력과 폭력으로 늑탈하고 착취하는 것이고, 크게는 조직과 떼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착취하고 늑탈하고 강탈해 가는 불한당짓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 그릇된 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릇된 것에 대해서 그저 마음이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슬퍼했다는 말입니다.
가령 전도도 제대로 못하고 자기 하나 겨우 구원받은 롯도 소돔. 고모라에 거하면서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벧후 2:8)고 했습니다. 그가 천사를 보호하려고 하니까 소돔 사람들이 “이 놈이 나그네로 와 있으면서 우리 위에 주권자 노릇을 하려고 하느냐?”(창19:9)하면서 우-하니 달려들어 강포한 행동을 했다고 했는데, 이러한 악행에 심령이 상해 간 것입니다. 만일 강포한 사회를 보고도 마음 가운데 상함이 없고 “괜찮다. 그냥 지낼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심정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강포한 세대와 세계를 볼 때, 곧 공의가 땅에 떨어진 것을 볼 때 마음 가운데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가 다니면서 운 것은 나라가 망할 것을 미리 안 때문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옳은 말을 해도 소위 종교가 라는 사람들이 일어나 자기들이 진짜 예언자라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속이고(렘 5:30-31, 29:8-9, 20-32), 오히려 예레미야를 잡아다 왕궁의 시위대 뒤뜰에 가두는 강포와 패괴를 행했기 때문입니다(렘 37: 11-21). 권력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포학한 짓을 행한 것입니다. 이러한 강포가 땅에 가득하게 충만해 있어서 더 볼 것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반신국적 요소도 생존의 기본 방법에 의해 유지됨
강포한 세력이라도 먹고 마셔야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는 그것 하나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야 할 중요한 재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께서는, “저들이 먹고 마시고 힘을 길러서 저희들 마음대로 시집가고 장가 가서 낳은 자식들이 강포한 자식들이 아니었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 시대의 특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강포한 사람이라도 사흘만 굶으면 기운이 없어 허덕거립니다. 그러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먹고 마신다고 할 때 과연 그들은 먹을 수 있는 무슨 가치있는 일을 했느냐 하면 오직 강포한 짓을 하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먹고 마셨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은 그 사회의 성격이 어떻든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최초의 수단입니다.
그 사회가 패괴하면 패괴한 대로 먹고 마셔야 유지하는 것이고, 음란하면 음란한 대로, 강포하면 강포한대로 먹고 마시면서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노아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심으로 그 시대의 성격을 유지했고, 시집가고 장가 감으로 계속적으로 그 성격을 북돋우어 나갔으며, 홍수가 오는 그날까지 그러더니 망하지 않았느냐? 인자의 임하는 날에도 그러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시대 성격의 그릇된 것과 반신국적인 요소에 대해서 아무도 주의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유지해 가면서 그대로 먹고 마시고 시집 가고 장가 가는 항다반의 일을 계속 함으로 사회를 유지하고 역사를 지속하지 않았느냐?”하시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 가는 것은 항다반의 일이지만 그것은 생존의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그대로 유지하여 나감으로 역사는 유지됩니다. 즉, 역사의 성경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서 노아 시대의 역사, 곧 그 시대상, 그 성격, 그 죄악, 그 대 반신국적인 요소 등 이 모든 것이 계속 유지되었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중간에 끊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께서는 전부를 멸절시키고 마셨습니다.
☞“의인 열 명”의 의미
하나님께서 사람을 내신 까닭에 그 생존을 위한 일반적인 방법은 하나님께서 유지시키시지만, 무가치한 존재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 표시로서는 멸절이라는 심판을 하십니다. 그런고로, 강포와 불의가 땅에 가득할 때 마음 가운데 그것을 슬퍼하고 괴로와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당연히 가져야 할 심정이요, 정서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께서 이 땅에 강포와 불공의와 패괴가 가득한 것을 보실 때 슬퍼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께서는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대신 도고 했듯이 “주여, 내가 대언 자로서 기도합니다. 거기에 의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속한 자가 있지 않습니까? 열 명만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보시고 아직은 두어 두시옵소서.”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이 땅에 의인 열 명이 있으면 이 땅을 유지하시지만 그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역사의 성격을 변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강포한 세계는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다만 강포한 세계와 더불어 싸워가면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의 수가 끊이지 않고 계승해서 있을 때에는 그 존귀한 존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땅을 유지하십니다. 그것이 “열”이라는 만수를 의미합니다. 반드시 하나, 둘, 셋, 넷을 세어서 된 열이 아니라 한단위로서 적어도 하나의 사회를 형성할 만한 만수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역사 위에 구현할 만한 만수의 사회 세력은 있어야 합니다. 만수의 사회 세력이 없을 때, 즉 하나나 둘만 있어서 그들이 사회 세력을 형성할 만한 요소가 못될 때는 그들만 건져내시고 싹 쓸어버리십니다.
그런고로 의인이 단 하나도 없어서 쓸어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소돔 고모라에 롯이 있었어도 그것으로써 거룩한 교회의 증적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이 교회 노릇을 못하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도 거룩한 교회에 속하지 못했고, 그의 딸들도 사실상 교회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롯 때문에 딸들을 건져내셨습니다. 노아는 어떠했는가? 물론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는 나중에 가나안을 낳은 함도 있습니다만, -그래서 그의 자손들은 “흑인종이다. 저주 받았다.”하는 식으로 옳지 않은 해석도하지만-하나님이 “셈의 하나님”(창 9:26)이라고 불릴 만큼 노아의 자녀들은 그의 교회 안에서 거룩한 요소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가정, 거룩한 교회의 전형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시고서 배필을 주셨는데, 동지를 주시지 않고 어린아이의 원조자를 주신 것도 아니며 또 자기와 똑같은 다른 남자를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와 꼭 짝이 될 여인을 주셨다는 것은 거기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나라, 그 거룩한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고도적이고 승화된 신성한 사랑의 한 전형이 드러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룩한 교회의 전형으로서, 교회의 한 축소형으로서의 중요성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혼인으로 말미암아 조직된 거룩한 가정은, 그것이 나중에 구체적인 사회로서의 교회로 조직되는 역사적인 발전이 있기 전에는 그 가정 자체가 교회였습니다.
아담 하나가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아내가 생긴 다음에는 그 가정이 교회였고, 그 후 가족이 생긴 다음에는 가족이 교회고 존재했으며, 민족이 형성됐을 때는 이스라엘이 교회로 존재했고, 이제는 전세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를 불러내니까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처음부터 끝까지 가정의 요소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교회를 한 식구라고 생각합니다. 한 식구라고 하면 한 가정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소급해서 보면, 아담은 하와와 더불어 사랑하는 짝을 이루어 서로 연인으로서 하나의 가정을 이룰 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을 하와에게 전달하는 예언자로서 거기에 존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사람은 교회에서는 목사입니다. 그런고로 아담은 하와와 이룬 교회에 있어서 목사 노릇을 또 했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 앞에 그 가족 전체에 대한 책임자입니다. 아담 하나가 잘못하면 전체가 다 같이 환란을 받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그는 선지자로서, 제사장으로서, 집안의 머리로서 다스렸습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라는 거룩한 그의 직무의 행사가 구현되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은 어디에 나타나있느냐 하면 그 세 직분을 합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메지테스, 중보자로 서있다 하는 점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라고 할 때는 하나님과 하와 한 사람사이에 아담이 서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와가 뱀의 꼬임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을 들어보면 분명히 그는 아담에게서 잘못배운 것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아담이 책임을 다 져야 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담과 더불어 그것에 대해서 같이 해석한 아무 흔적이 없습니다. 뱀이 꾈 때 그 묻는 말에 대해서 대답한 것을 하나하나 분석해 보면, 하와는 조금이라도 하나님께서 내신 본의에 합당하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전부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여 자기 중심의 종교를 만들어 버린 것이 나타납니다.
이 첫교회의 타락에서부터 아담과 하와는 마지막에 거대한 흑암의 운명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흑암의 운명으로 떨어졌다는 것은 무서운 심판의 현실 가운데 빠져들어 갔다는 것입니다. 곤고와 쇠사슬에 매이게 됐다는 말입니다.왜 그랬는가? 그 교회가 정상적인 위치에서 말씀이 거룩한 뜻을 바로 전달하고 바로 창달시키며 바로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담 교회의 실책입니다. 그것이 전승되어서 나중에 인류 사회에는 가인의 계통과 셋의 계통이 주욱 흘러 내려왔습니다.
☞구원받은 백성, 패역한 시대 사조에서 격절하고 나와야 함
그러나 노아는 자신이 자기의 가정에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그 가정과 더불어 같이 구원을 받고 나갔습니다. 노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를 중심으로 한 거룩한 교회가 거기에 그대로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의 식구 여덟 사람이 거기서는 그대로 거룩한 교회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패괴가 가득한 그 땅이 노아의 여덟 사람의 수를 가지고는 달리 어떻게 보존될 도리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는 까닭에 땅은 멸하고 노아를 중심으로 한 그 교회만 보존시키신 것입니다. 어쨌든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보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 자기네가 보존되기 위해서 가만히만 있으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이 그 시대의 그릇된 사상에 사람들이 물들어 가지 못하도록 자꾸 막아내야 합니다. 노아의 식구들 가운데는 그 시대의 강포와 패괴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자.”하니까 두말할 것 없이 따라갔고, 아무 징조도 없는 맑은 날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큰 나무를 베어 방주를 지으라고 하니까 열심히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고 장기간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자식들이 노아에게 “아버지는 공연한 짓을 하시려고 그러세요. 하지 마세요.”하면서 막거나 방해하거나, 아버지가 미쳤다고 하면서 끌고 내려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 같이 협력해서 방주를 짓는 결과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 방주로 인하여 다 같이 살아났습니다.
노아가 경청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비소하지 아니하고 그 뜻에 대해 거스르지 않고 따라 나갔습니다. 이것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아 시대의 강포한 현실 앞에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백성은 그 시대 사조에 물들거나 그 패역과 패괴와 강포를 그냥 뒤따라가지 않고 거기에서 격절하고 나왔음을 나타냅니다.
☞경건한 자, 언제나 핍박받음
어느 시대에서든지 불의와 강포가 가득한 사회는 참으로 경건하게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을 핍박합니다. 핍박한다고 해서 사람을 데려다 놓고 야단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불의와 강포를 가지고 그냥 우겨대니까 자연히 마음이 괴롭고 슬퍼지고 고통스러운 사회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에 대해서 주께서는 눈 감아 버리시지 않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시 94:1-2). 시인들은 다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시인들은 다 이렇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원수를 아니 갚는 것이 아니다. 불의의 세력이 창궐해서 누르더라도 그대로 두어두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한번은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주만을 의지하고 나가거라.“하시면서 여호와는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진 노아 시대의"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는 것은 그가 조금도 죄가 없다는 그런 말이 아니라,그 세대의 다른 사람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만하면 내가 너를 의롭다고 하겠다.“고 할 만한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노아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즉,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서 당시의 사회와 악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결국은 보수하시고 나를 막아 주시고 우리를 보존하사, 비록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하지만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유지하게 하신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종국에도 노아 시대와 같아짐
우리 주께서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께서 차츰차츰 가까이 오시는 인류 역사의 종국도 노아 시대와 같이 되어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앞으로의 역사의 성격은 역시 심판을 받을 그 강포와 패괴가 현저하게 대두해 갈 것이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계가 다 똑같은 보조를 취하는 것은 아니나 여기저기서 차츰차츰 그런 것이 나타날 것입니다. 빨리 부패하는 부분은 더 빨리 그렇게 되는 것이고, 거기에 의롭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많아 그들이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는 좀 천천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인자의 날, 그날이 오기 직전에는 이런 패괴가 강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오시기 전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배교의 최대의 상징으로서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강포한 세력을 발휘해서 우상을 만들고 기식을 불어넣어 산 것같이 하여 “누구든지 거기에 절해라. 절하지 않는 자는 몇이 되든 다 죽인다.”고 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강포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에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입니다. 그는, 만일 자기 의견과 주장에 사람들이 반역할 때에는 얼마가 되든지 자기의 권력과 세력과 폭력을 가지고 다 도말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기 전 이런 일을 도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노아의 교회와 같은 그런 거룩한 성격을 갖지 못하고 패괴해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나가는 음란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음란이란 여호와를 섬기다가 반역하고 배교하여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신 31:16; 겔 23:35,49). 그날이 이르기 전에 그 죄악의 사람이 나타나기 전에 배도 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살후 2:3). 이렇게 역사의 성격은 굴러 내려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땅의 인류 일반 사회에 있어서는 그로 말미암아서 또한 강포와 음란과 패괴가 가득 할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거룩한 교회는 롯과 같이 악행을 보고 슬퍼할 수 있고, 슬퍼할 뿐 아니라 주께 호소를 하고 그 호소하는 소리를 주께서 들으시게 해야 합니다.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 함이었더라”(창 6:11-12).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함으로 그 끝날이 주 앞에 이르렀으니 오직 하나님의 백성이 주께 호소하고, 마치 의인 아벨의 피가 주께 호소하듯이, 주님이 신원 하시기를 바라면서 주께서 또한 나를 보호하시고 지키시기를 늘 바라고 나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더라고 한 것과 같이 우리 주께서 오시는 역사의 종국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법칙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서 그 법에 따라서 거룩한 교회의 성격을 바로 형성하고 거룩한 가정의 성격을 바로 형성하여 이 세대가 패괴하고 악할지라도 거기에 물들거나 추종하거나 그런 사상에 감염되지 아니하고 바르게 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땅에 패괴가 가득하고 강포가 심해서 공의가 거기에 없고 항상 싸우려 하고 항상 자기의 이익을 위해 서는 어떤 악한 짓이라도 불구하고 또 항상 세력이나 권력이나 혹은 어떠한 능력이라도 그것을 앞에 내세워 얻을 수 있는 최대 한도를 도득하려고 하는 악한 사회상이 바로 노아 시대의 멸망의 현실이었고 이와 같은 것이 역사의 종국에 다시 현저하고 강력하게 대두할 것임을 가르쳐 주셔서 저희가 이제 주 앞에서 그것을 다시 상고했사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나 혼인을 하는 일도 그런 사회나 시대의 성격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어떤 성격이었든지 유지하기 위해서 또한 역사적으로 전승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으로 존재할 뿐 그런 그릇된 성격을 시정하는 바 없이 그것을 계속 전승하는 재료나 자본으로서의 먹고 마시는 일과 혼인을 계속해 나가는 그 시대상에 대하여 저희들이 오늘날도 주께서 경고하시는 바를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는 그러면 생활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바로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고, 불의하고 악한 세대에서 저희를 건져 내시며 주께서 저희에게 주시려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고 정신을 차려서 주님이 주시는 큰 보호와 은혜와 또한 신원 하심과 보수하심을 저희가 기대하면서 주님께 전부를 맡기고 불쌍히 여기심과 지켜주심을 바라고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주님이여,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무슨 세력이든 인간적인 세력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최대한의 자기 행복을 도득하기 위해서 어떤 불공의라도 자행하고자 하는, 그리고 그러한 것을 유능한 것으로 취급하는 사회상 앞에서 항상 저희들은 주님의 자식으로 약하고 힘없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나, 주님의 은혜로써 불쌍히 여기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살아가는 것뿐이로소이다. 주님, 저희를 끝까지 보존하시옵소서. 긍휼히 여기사 아무 힘이 없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만을 믿고 나아가는 저희들에게 아버님의 크신 능력으로 온전히 두르시고 함께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출처: http://www.moksa.net/main.php?&oxid=8&key=note&val
'성경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성경인물 068] 공의의 선지자 아모스 / Amos (0) | 2012.11.25 |
---|---|
[스크랩] 북이스라엘의 9왕조 (0) | 2012.10.02 |
[스크랩] 성경의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0) | 2012.09.06 |
[스크랩] 성경인물 (2) 아담의 세 아들 가인과 아벨과 셋 (창 4:1-26 ) (0) | 2012.09.06 |
[스크랩] 아담과 하와 (0) | 2012.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