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교회사관 - 최덕성 교수
역사연구에는 역사 사실(事實)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함께 사관(史觀)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역사는 역사가의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특정 사건이 역사가 되기도 하고 되지 않는 것과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사관에 달렸다. 사관에 따라 선과 악, 의와 불의, 정(正)과 사(邪)의 자리가 뒤바뀌기도 한다. 교회사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눈, 어떤 기준을 가지고 보는가에 사건의 중요성이 결정되고 해석이 달라진다. 교회사 연구에 건전하고도 타당한 사관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는 한국교회사와 세계교회사 해석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기독교의 역사를 "신앙고백교회사관"으로 해석하고 평가한다. 그가 저술한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 『참회고백과 역사의식』, 『종교개혁전야』, 그리고 근간 예정인 『신사참배거부운동』, 『신사참배거부운동신학』, 『한국교회 역사왜곡』, KOREAN CHRISTIANITY, 『쌍두마차시대』은 모두 신앙고백교회사관으로 서술되었다. 그가 말하는 "신앙고백교회사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가 쓴 아래의 논문이 밝히고 있다.(편집자 주)
신앙고백교회사관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역사신학)
역사연구에는 역사 사실(事實)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함께 사관(史觀)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역사는 사가의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특정 사건이 역사가 되기도 하고 되지 않는 것과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사관에 달렸다. 사관에 따라 선과 악, 의와 불의, 정(正)과 사(邪)의 자리가 뒤바뀌기도 한다. 교회사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눈, 어떤 기준을 가지고 보는가에 사건의 중요성이 결정되고 해석이 달라진다. 교회사 연구에 건전하고도 타당한 사관이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필자는 “신앙고백교회사관”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일련의 역사관점을 가지고 교회사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전통적 개혁주의 신념체계에 일치하는 교회사관이라고 생각하는 이 역사관은 실증주의적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도 진리성을 기준으로 하여 기독교 신앙공동체의 역사를 평가하고 기술한다.1 특정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고 고백했으며 하나님께서 요구한 것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에 주목한다. 성경을 교회사 평가의 기준으로 삼아 연구하는 동시에 교회가 처한 다양한 역사적 국면들을 전 포괄적으로 관찰하고 그 교회와 신자들이 보여준 신앙고백적 실천에 초점을 둔다. 말과 글과 행동으로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로 고백한 신앙고백 행위들을 주시한다. 그 시대의 교회가 얼마나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충실했는가를 살핀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을 이해하자면 기존 교회사관의 제 유형들과 문제점들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신앙고백교회사관과 궤(軌)를 같이 하는 종교개혁시대의 고백주의 교회사 편찬 방법의 특징과 약점, 그리고 실증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객관적 역사연구가 과연 실현 가능하며 역사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선이해가 요청된다.
1. 한국교회사관의 흐름
한국교회사관의 효시(嚆矢)는 연세대학교의 백낙준 교수가 도입한 선교사관(宣敎史觀)이다. 미국 예일대학교의 라토우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교수가 표방한 사관으로, 선교사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복음이 어떻게 확산되고 어떤 형태의 선교가 이루어졌는가에 주목한다.2 교회가 바야흐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하고 노회, 대회, 연회, 총회가 어떻게 조직되고 무엇을 결정했으며 어떤 일을 했는가에 초점을 둔다. 복음전파, 교회조직, 세례, 성찬 등의 활동에 주목한다. 19세기의 선교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이 사관은 피선교지 신자들의 시각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반면에 은연중에 서양 기독교 세계의 정복주의 관점을 반영한다. 그래서 아시아의 역사를 선교사관으로 기술하면 유럽/북미교회사의 “마지막 장”이 되고 만다.
연세대학교의 민경배 교수는 백낙준의 선교사관을 거부하면서 민족교회사관이라는 것을 제시한다.3 복음이 민족이라는 토양에 어떻게 뿌리를 내렸으며 민족이 그 복음의 도전에 어떻게 대처했는가에 주목하고 민족교회의 확립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한다. 이 사관은 선교사관의 문제점과 서양기독교의 팽창주의적 관점을 탈피하는데 다소 기여하지만,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복음을 민족이라는 범위 안에 제한시킨다. 복음보다 민족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결(缺)하고 있다. 민족교회에 대한 강조는 타민족 교회와의 단절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보편성에 저촉될 뿐만 아니라 “민족교회”라고 하는 개념도 모호하다. 이 사관은 여러모로 일본 동지사대학교 교회사학부가 지향해 온 일본민족주의교회사관의 복사판으로 보인다. 민경배는 이 대학의 도히 아키오(土肥昭夫) 교수의 지도를 받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이러한 일본민족교회사관이 일본교회의 발전을 저해하고 복음을 일본화 시킨 주범이라고 비판한다. 복음이 일본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가 일본 민족주의에 의해 변화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고 본다.4
숙명여자대학교의 이만열 교수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중심의 학파는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에 입각하여 문헌고증적으로 연구하고 있다.5 이만열은 민경배의 민족교회사관을 지향하지 않으면서도 민족, 민족주의라고 하는 동일한 우산 아래서 기독교사를 연구한다.6 민족주의 시각은 민족의 고유성을 부각하는 반면에 교회의 보편적 특징을 간과하며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을 결(缺)하기 쉽다. 이 학파는 객관성과 문헌고증을 강조한다. 19세기에 유행하던 실증주의 역사연구방법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실증주의는 오늘날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로 간주되고 있다. 실증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환영할 만하지만 실증주의적 역사연구가 실제로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신대학교의 주재용 교수는 민중교회사관으로 한국교회사를 기술한다.7 민족교회사관이 민중부재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고난의 역사 속에서 민족에 의해 싹이 튼 한국기독교의 역사에 초점을 모은다. 민중 저항운동적 상황을 강조하고 소외계층, 수난계층의 역사에 관심을 둔다. 그러나 이 사관은 한국교회를 존재하게 한 전통적 복음에 대한 이해와 교회관을 간과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던 오합지졸의 “오클로스”를 신앙공동체의 역사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이유로 이 사관은 교회사 평가의 주객(主客)을 전도(顚倒)시키는 현상을 보인다.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이덕주 교수가 주창하는 토착교회사관은8 한국교회사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면서 기독교의 복음이 한국이라는 민족 상황에서 어떻게 수용, 해석, 적용되었으며, 그 결과로 토착교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주목한다. 기독교 복음이 한국이라는 토양에 닻을 내리는 순간부터 토착화(indigenization) 과정을 거쳤다고 본다. 이 사관은 교회의 역사를 복음의 선교 역사로 본다는 점에서 선교사관과 일치하는 듯하다. 그러나 민족이라고 하는 상황에 초점을 둔다는 점에서 오히려 민족교회사관과 일치한다. 민족교회사관과 선교사관을 전도(顚倒)시켜 두 가지 특징들을 모두 유지하려고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민족교회사관의 범주에 머물고 있다.
총신대학교의 박용규 교수는 교회사 연구를 사상사관(思想史觀)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9 복음의 주체는 하나님이며 복음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세계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며, 복음의 일차적 목표는 개인구원이며, 영적인 유기체인 교회는 성서를 손에 쥐고 있으므로 교회사는 사상사여야 한다고 본다. 신학사상을 축으로 교회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본다. 이 사관은 텍스트가 콘텍스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신앙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은 신학사상에만 제한되지 않으며 교회가 기구, 제도, 활동, 심리, 정치, 문화, 민족, 사회, 수량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포괄적인 교회사연구의 사관으로 적합해 보이지 않다. 교회의 선교, 수난, 예배, 기독교인의 생활은 교회사가가 다루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김영재 교수는 한국교회의 전통과 한국인의 교회가 그리스도를 믿고 높이며 고백하는 신학을 고려한 교회사 연구를 언급한다.10 그가 말하는 것은 종교개혁 시대의 고백주의 역사편찬 방법과 유사하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제시하지는 않기 때문에 자세히 파악하기 어렵다.
2. 세계교회사 편찬 사관의 흐름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회사학자들은 “교회”라고 하는 기구나 제도의 발전과정을 교회사의 핵심 주제로 삼는다. 교황과 감독이 무엇을 결정하고 어떤 것을 행했는가 따위에 주목한다. 교회 안에 일어난 대소사를 다루지만 궁극적 관심은 로마교구의 사도좌(使徒座)와 그것의 권위확보에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교회사 정의는 다채롭다. 독일 신학자 에벨링(Gehard Ebeling)은 교회사를 “성경해석의 역사”로 본다. 그가 말하는 성경해석은 일차적으로 예배시간에 선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사건이고 교회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이 모두 다 이 말씀 사건에 포함되므로 말씀선포를 중심으로 예배와 성만찬 또 신학사상과 교리 그리고 교직제도가 동심원을 그리듯이 발전해 나갔고, 이 발전의 역사가 쌓여서 교회사가 형성된 것으로 이해한다.11
그러나 유럽교회의 역사는 에벨링의 이론과 다르게 진행되어 왔다. 서양역사에서 말씀 사건에 상응하는 신학과 바람직한 교회발전은 찾기 어렵다. 신앙공동체를 왕성하게 하던 말씀 중심의 교회 확장은 콘스탄틴시대(4세기)에 시들해졌고, 교회는 점차 제도화되었다. 유럽 기독교의 역사는 대부분 사도시대의 교회 모습, 곧 말씀사건 중심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더욱이 동심원적 교회사 이해는 유럽바깥 지역의 교회사가들의 눈에는 유럽중심 세계관에서 나온 일방통행적 발상으로 비쳐질 수 있다. 유럽의 기독교가 다른 대륙으로 전파되어서 곳곳에 유럽 개념의 교회가 세워 지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일 수 있다.
한편, 보른캄(Heinrich Bornkamm)은 교회사를 “세계 복음화의 역사”로, 미국 예일대학교의 라토우레트(Kenneth Latourette)는 “선교의 역사”로 규정한다. 칼빈신학의 영향을 받은 생봉은 “지상신국의 역사”로, 루터의 교회관에 영향을 받은 슈미트는 “세계 안에서 항구적으로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감화로 진리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정의한다. 판넨베르크(W. Pannenberg)는 기독교사를 종교사로 이해한다.12
미국에서는 사회학적 관점으로 교회사를 연구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 기독교를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보며 교회를 사회기구(social organ)로 이해한다. 시카고학파는 1920년대부터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교리가 동시대의 정황과 무관하게 혹은 독립적으로 해명될 수 없다는 가정을 가지고 신학 외적 요인들, 곧 사회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한다.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는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분열조차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상황이 더 큰 요인으로 작용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13 순교도 신앙적 동기만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동경”(libido moriendi)이라는 당대의 사회적 확신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노예제도, 여성의 위치, 가난과 부의 문제 등을 사회과학의 방법을 따라 동시대의 사회 안목으로 조망하고 분석한다.
유럽에서는 현재 기존의 교회사 서술이 각 지역이나 교파의 전통, 교리, 신조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 맴돌았다고 하는 자성과 함께 서로 간의 특징을 인정하고 상호 존중하는 교회사 서술이 강조되고 있다. 윈프리드 젤러(Winfried Zeller)는 1949년에 세계교회사를 보편성(Universalitat)과 유일성(Originalitat)이라고 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중심으로 기술할 것을 강조했다. 세계적 분포도를 가진 교회의 역사를 각 지역의 특성을 부각시키면서 균형 있게 기술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걸맞게 제3세계의 교회사학자들은 교회사를 서양인의 관점으로 기술하는 것을 배격하고 수평적 교회사, 각 지역 교회의 독특성과 유일성을 인정하면서도 세계교회와 일치하는 보편성을 가진 역사서술을 강조한다.14
이러한 맥락에서 저술된 것이 어른스트 벤쯔(Ernst Benz)의 『에큐메니즘의 관점에서 본 교회사』(Kirchengeschichte in O¨kumenischer Sicht)(1981)이다. 서로 다른 전통과 역사적 배경을 가진 상태에 있는 교회들의 역사를 하나로 묶어내는 것에 초점을 둔다. 교회사 서술이 하나이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가진 교회를 포괄적으로 그려내는 작업이어야 한다고 한다.15
다양성, 특수성, 유일성을 강조하는 근대의 교회사 편찬 움직임은 에큐메니즘(Ecumenism) 정신에 입각한 교회사 연구로 변천했고 상대주의적 관점을 가진 역사연구로 방향전환을 했다. 1970년대 후반에 루카스 피셔(Lucas Vischer)는 “근세 이래로 변화된 기독교 세계의 현실은 오랫동안 각 교회들이 저마다 전통으로 간직해 오던 것을 신중히 재고하도록 하므로 이제부터는 다 함께 각자 자기 것을 절대화시켜서 지켜오던 신조(Konfession)와 자기 것으로 지켜오던 것들을 허물어 버리고 세계 보편적 교회공동체(universale Gemeinschaft)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여러 대륙의 교회사가들이 함께 모여서 다양한 전통을 대변하는 교회사 연구 작업을 하고, 하나의 보편성을 담아내는 세계교회사를 구상해야 한다고 한다.16
다양한 전통을 가진 교회들의 역사를 하나로 통합시켜 기술하고 상이한 관점을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시도는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교회사 편찬을 도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탈기독교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신앙해 온 진리나 교리를 걸림돌로 여기며, 상대주의 시각으로 역사를 파악한다. 교회의 기구적 일치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는 이러한 시도는 결국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회사 편찬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 그 결과로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교회의 공동 교회사 집필이 가능해졌다. 1988년에는 스위스 베른대학에서 양 편의 교회사가들이 모여 연구를 시작하여 『스위스에큐메니칼교회사』17를 저술, 출간했다. 개신교와 로마가톨릭교회가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상대편의 전통과 교리를 존중한다는 원칙으로 기술한 책이다. 그러나 진리성 원칙과는 거리가 먼 교회사를 만들어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대주의 시각에 기초한 교회사관은 전통적 기독교의 진리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의 중추적 교리의 가치조차 상대화시킨다. 이러한 시각은 포스트모더니즘과 종교다원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조만 간에 종교다원주의 시각으로 기술된 교회사가 등장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18 불교교회사(Buddhist Church History)와 이슬람교회사(Islam Church History)와 기독교회사(Christian Church History)를 통합한 “세계교회사” 혹은 “에큐메니컬교회사”가 등장할 수도 있다.
전통적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중추적 기독교 진리를 고백하지 않거나 포기한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다. 문선명의 통일교회가 “교회”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진정한 교회가 아닌 것과 같다. 성경을 신행의 최종적 표준으로 삼는 복음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전통은 이 점에서 일치한다. 외형적 기구만을 교회로 보지 않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사물을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교회사 해석과 재구성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사관과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시대적 조건과 삶과 사회 환경의 지배를 반영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다양할 수 있다. 교회사는 실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연구될 수 있다. 역사주의사관, 경제사관, 정치사관, 문화사관, 이상사관, 사회사관, 수량(數量)사관, 심리사관, 언어사관, 민족사관, 민중사관, 이야기사관(narrative history)으로 접근할 수 있다. 상이한 눈으로 수행하는 역사평가는 상호보완적이고 호혜적(互惠的)일 수 있다. 선교사관이 드러내지 못하는 것을 민족교회사관이 밝힐 수 있고, 민족주의 교회사관이 간과한 것을 사상사관이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관들이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사를 공산주의 사관, 칼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으로 연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 나라의 모 교회사 교수는 불교의 순환사관(循環史觀)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역사를 다룬 글을 쓴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가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회의 역사는 보편적인 세계역사의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사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데는 그것에 적합한 사관이 있게 마련이다.
3. 고백주의 교회사 편찬
진리성의 관점으로 교회사를 평가하는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종교개혁 시대에 유행하던 고백주의 교회사 편찬과 궤를 같이 하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후자가 지녔던 호교성(護敎性)을 배제하고 현대 역사연구 방법론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사실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비평적으로 파악하는 노력에 심혈을 기울인다.
초기 기독교회사 편찬은 사건을 시대별로 혹은 사건별로 소개하는 형태로 수행되어 왔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확산되었으며 그것이 프랑크 민족과 앵글로 색슨 민족에게 어떻게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중세기에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신학적 관점이 교회사 연구를 지배했다. 교황의 시각으로 기술한 교회사를 정사(正史)로 여겼다. 기존 시각과 견해를 달리하는 교회사 연구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적 신앙과 종교개혁 신학의 정당성을 성경에 입각하여 호소하면서 당시의 로마가톨릭교회가 성경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밝혔다. 개혁교회가 사도들의 교회에서 연원(淵源)한 신앙과 고백을 갖고 있으며 교회개혁운동이 사도적 신앙운동이라는 것을 논증했다. 개신교 신학의 정통성과 개신교의 역사성을 입증한 것이다. 성경과 교부신학에 호소하면서 신앙과 교리와 신학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고백주의 눈으로 역사를 파악했다.
이러한 역사 편찬 방법은 호교적 특징을 지녔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사 연구가 모두 호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인문주의 영향 아래서 역사본문 혹은 문헌에 대한 비평적 접근을 시도한 자들도 있었다.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6-1457)가 “콘스탄틴의 증여”라고 하는 문서의 위증성을 밝혀낸 것과 동일한 방법에 따라 교회사를 편찬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의 역사편찬에 이의를 제기했다.19 일차자료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들을 조심스럽게 평가했다.
교회사가 신학의 독립된 한 분과로 간주된 것은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집대성하고 『옥스버그신앙고백서』를 만든 멜랑톤(Melanchton, 1497-1560) 시대부터였다. 프로테스탄트와 로마가톨릭 사이의 신학적 논쟁이 역사해석에 영향을 미치자 개신교도들은 성경의 관점에서 멀리 떨어진 로마가톨릭교회의 역사해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교회사의 중요성을 각성했다.
존 폭스(John Foxe, 1516-1587)의 『순교자 열전』20은 프로테스탄트 고백주의 관점으로 편찬된 대표적 작품이다. 교황이 성경적 신앙을 가진 신자들을 어떻게 탄압했는가를 열거한다. 영국의 메리여왕 치하에서 박해를 당한 개신교인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 다수 집단의 시각이나 거대한 조직체계를 가진 로마가톨릭교회보다 성경적 관점을 가진 반교황적 인물들과 진리의 증인들을 부각시킨다.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역사관점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독일 비텐베르크대학의 마티아스 플라치우스(Matthias Flacius, 1520-1575)는 『진리의 증인들 목록』21을 통해 수세기 동안 교황의 지배 아래서 끊임없이 진리의 증인이 있어왔다는 것을 밝혔다. 교황이 지배하는 거짓교회 아래에도 신앙고백적으로 올바른, 참 교회가 존재했으며 이 교회들이야말로 참된 진리의 증인이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탈리아의 왈도파, 영국의 존 위클리프, 보헤미아의 얀 후스 등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이 오히려 진정한 진리의 증인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다수집단의 시각이나 조직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플라치우스는 여러 명의 루터교 학자들의 도움을 얻어 불후의 명작 『막데부르크 세기사』(Magdeburg Centuries, 1559-1574)22를 집필했다. 총 1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교회가 출발하여 자신들이 경험한 종교개혁시대까지의 역사를 기술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제도, 의식, 사건을 열거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시각을 변호한 방대한 분량이다. 플라치우스는 교황이 적그리스도이며 성경적 진리를 왜곡한 자라는 것을 증명했다. 종교개혁교회를 고대교회와 관련시키면서 교회개혁운동이 새로운 종파 운동이 아니라 사도적 교회가 견지했던 본래의 복음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라는 것을 밝혔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레네우스, 암브로스, 어거스틴 등과 같은 교부들과 일치한다는 것을 논했다.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John Knox, 1505-1572)는 플라치우스의 교회사 편찬과 동일한 방법으로 『스코틀랜드종교개혁사』23를 저술했다. 하나님께서 스코틀랜드교회를 어떻게 교황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역사를 힘의 논리로 파악하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시각을 거부하면서 교회사를 진리성에 입각하여 기술했다. 기존 시각에 도전하는 낙스의 새로운 역사편찬 방법에 대해 로마가톨릭 교회사가들은 그러한 역사해석이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편파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진정 어느 것이 주관적이고 어느 것이 편파적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주관적이다,” “편파적이다”는 말은 어느 한 집단의 시각이나 평가기준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 판단기준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 무렵에 저술된 로마가톨릭교회 권의 교회사도 고백주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시이저 바로니우스(Cesare Baronio, 1538-1607)가 저술한 『교회의 연대기』24는 플라치우스의 교회사 편찬에 도전하려는 의도로 저술된 것이다. 바티칸 도서관 관장인 그는 기독교회의 출범에서 천하를 지배하는 듯했던 인노센트 3세의 통치(1198)까지를 12권의 책으로 편찬했다. 30년에 걸쳐 자료를 모으고, 19년에 걸쳐 저술을 완료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정통성과 합법성을 변호하면서 그 교회가 복음자체와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책은 플라치우스의 교회사 편찬보다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종교개혁시대 직후의 교회사가들은 역사를 새롭게 등장한 경건주의 운동에 발맞추어 기술했다. 독일 경건주의 운동은 신자들을 교리의 속박에서 해방시킨다는 기치를 들었다. 정통교리에서 탈출하는 것을 추구하고 교회의 외형적 체제, 성경, 정통신학의 상대적 가치만 인정했다. 반면에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것에 무게를 두었다. 제도와 교리에서 해방된 시각은 경건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고백주의를 만들어냈다.
경건주의자 슈페너는 1701년 1월 1일에 행한 설교에서 지난 17세기 동안의 교회사를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제1기 300년까지, 제2기 600년까지, 제3기 900년까지, 제4기 1200년까지, 제5기 1500년까지, 제6기 1500년부터로 구분했다. 아놀드(Gottfried Arnold)의 『비당파적 교회사와 이단사』(Unparteiische Kirchen und Ketzerhistorie, 1699-1700)는 경건주의 시각으로 쓴 최초의 본격적 교회사이다. 아놀드가 루터파, 개혁파, 로마가톨릭교회 등을 구분하기는 했으나 신앙고백으로 중립을 견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편파적이지 않은 역사기술, 중립적인 교회사 연구를 한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경건주의 시각에 대한 호교적 역사해석을 넘어서지 못했다.
고백주의 교회사 편찬의 약점은 객관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자신이 신봉하는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에서 자기에게 유리한 근거와 이념을 찾아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호교적이다. 호교적이라고 하여 반드시 그릇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 신앙고백, 교리, 신학을 변호하고 그러한 눈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준하는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18세기에 대두된 계몽주의는 낭만주의 시대정신에 걸맞게 역사 사건의 시대적 정황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사료에 대한 비평적 분석과 학문적이고 과학적인 역사연구에 힘썼다. 이성에 대한 강조와 과학방법론을 통해 진보를 추구했던 시대의 교회사 편찬답게 인간 중심적이고 낙관주의적인 특성을 지녔다. 역사관점을 수직시각에서 수평시각으로 전환시켰다. 그 결과로 그 시대의 역사연구는 사회와 문화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스하임(Johann L. Mosheim, 1694-1755)은 이러한 눈으로 역사를 기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25 그는 교회를 인간집단으로 이해하면서 그 안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 중심으로 하여 교회사를 일종의 문화사로 엮었다.26
4. 객관적 역사연구는 가능한가?
실증주의는 19세기에 유행하던 역사방법이다. 역사가는 중립적 자세로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은 독자가 하도록 하며 역사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므로, 사관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실증주의 오리엔테이션을 가진 역사가에게 고백주의 교회사 편찬이나 성경을 판단기준으로 삼는 신앙고백교회사관은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다. 역사연구가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과연 인문과학에서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객관적” 연구가 가능하며, 사관이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항상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와 문화의 정황과 관련을 갖고 있으며 그것의 영향을 받는다. 무오(無誤)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상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초역사적이고 초인간적인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합리적으로 절대적인 어떤 것이나 명제적으로 무오한 지식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별계시와 같은 신적인 차원은 예외적이지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완전한 지식을 갖기 어렵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적인 형태의 기록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것을 역사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成肉) 사건을 역사 사실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이 인간이 된 사건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말과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에, 곧 역사가가 그 사건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지적인 형태로 해석하여 전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역사 사실로 간주하고 신앙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들은 대부분 그 자체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해서 역사가가 그것을 중요한 사건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역사로 인식되지 않는다. 역사 지식은 역사가의 해석과 평가를 통해 알려진다. 역사가의 판단에 따라 어떤 사건이 역사가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 특정 역사가가 중요한 것으로 판단하여 상세히 기록한 것을 다른 역사가는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고 가볍게 다루든지 전혀 언급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역사가는 자기의 현재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자기가 이해한 것을 역사로 기술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가는 자기의 관점을 가지고 사물을 파악한다. 자기의 가치관, 입장, 관점에 부합하게, 자기가 속한 집단에 유리한 방향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실을 손안에 넣으려 한다.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가는 자신의 경험, 선호도, 취향, 입지, 사회적 환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옛날 일을 평가하고 재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역사가의 관점과 주관성이 개입된다. 시대적, 문화적, 사회적 조건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된다. 그 결과로 동일한 역사 사건이라도 역사가의 관점과 전제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특정 역사가가 옳다고 판단하는 것을 다른 역사가는 그릇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학란(東學亂)으로 일컬어져 오던 사건은 오늘날 동학혁명(東學革命)으로 일컬어진다. 광주폭동이 오늘날에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기술된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위대한 종교개혁가, 영웅적인 인물, 인류 문화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은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하나님의 사람, 신앙의 용장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를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 교회의 질서를 더럽힌 파계승, 수녀와 결혼하기 위해 수도사 신분을 버린 파렴치한 자, 이단자로 평가한다. 전자는 프로테스탄트의 시각으로, 후자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시각으로 판단한 결과이다. 이처럼 역사평가는 역사가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는가에 달려 있다.
전술했듯이 19세기에 풍미했던 실증주의 역사연구는 객관성,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면서 역사를 생물이나 화학과 같은 하나의 자연과학처럼 이해한다. 역사 사실들(historical facts)을 확인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여 결론은 독자가 내리게 했다. 역사의 의미가 역사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고 생각하여 역사가는 중립적 관찰자로서 “객관적” 사실을 독자에게 알려줄 뿐이라고 했다.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역사해석과 기술에 개입시키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자연과학자가 자연을 연구하듯이 역사 사실을 실증적으로 연구해야 하고, 그러한 연구가 가능한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실증적으로 기술하는 노력은 환영할 만하다. 역사적 사실과 사물을 객관적으로 편견 없이 중립적인 자세로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은 역사가의 기본이다. 그러나 역사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그러한 역사연구가 실제로 가능한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실증주의에 기초하여 역사연구에 임하는 자들은 객관성과 아울러 사료(史料)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사료를 객관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것에 기초한 객관적이고도 중립적인 역사연구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사료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관찰자, 보고자의 주관적 프리즘(prism)을 거쳐 생산된 것이다.
역사는 중립적인 실체가 아니다. 역사 사실(historical facts)은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형태로, 검증 혹은 실험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문 밖에서, 실험실 창고 안에서 우리의 검증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사람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시간은 한쪽으로만 흘러가고 있다. 타임머신을 타고 사건이 일어난 시점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한 과거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말하면 역사 사실은 “있는 그대로” 검토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현재의 창문을 통해서만 다가오고 제한된 이성의 창문을 통해 펼쳐진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인간의 지식이 수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형성된다는 점을 발견하여 근대 역사 이해에 대한 일대 변혁을 가져 왔다. 철학계의 흐름을 존재론적 질문에서 인식론적 질문으로 바꾸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은 사물이 전달하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수납한 결과가 아니라 선험적 오성(understanding)과 범주들(categories)이 무형의 인지덩어리를 분석해 낸 결과이다. 인간 오성과 범주로 구성된 인식기능이 우리가 지식이라고 일컫는 것의 내용을 결정한다. 인간이 역사 사실에 순수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지식은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역사는 역사가의 오성과 범주가 과거에 일어난 사실들(facts)을 능동적으로 이해한 결과이다. 학자는 자기가 처한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조건과 환경에서 선이해, 전제, 가치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사실에 접근한다.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자기의 관점으로 사건을 해석하고 무게를 달고 재구성한다.
한편, 칸트의 영향 아래서 오늘날의 상당수의 지식인, 역사가, 신학자들은 주관주의(subjectivism)라고 하는 늪에 빠졌다. 진리는 주관적 해석활동의 산물이며 인문과학의 활동은 제한된 이상어의 사변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주관주의는 상대주의(relativism)라는 아들을 낳았다. 진보주의계 역사 연구가들과 신학자들은 역사의 상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 주관주의에 빠졌다. 역사연구는 주관적 해석활동의 산물이며 역사라는 것은 인간이 객관적 지식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 결과, 칸트 이후로 지식인들은 객관적 지식 추구의 열의를 상실한 채 맥없이 역사와 신학연구에 임하고 있다. 칸트의 영향은 진보주의계 신학자들이 신앙과 합리적 지식 사이에 공통적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기독교 신앙과 그것의 역사적 토대를 의심한다. 역사에 대한 객관적 접근을 불신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 성육신, 동정녀 탄생, 초자연적 기적 등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케리그마(Kerygma)를 통한 성령의 현재적 활동의 열매이며, 역사 사실에 대한 합리적 지식의 결과가 아닌 것으로 이해한다. 객관적 사실보다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한다.
주관주의, 상대주의 역사 이해를 가진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초자연적 사건들을 신화로 간주한다. 유대교와 초대교회의 맹신적 종교심이 무의식적 신화작업 과정을 거치면서 성경을 만들어 냈다고 본다. 성경은 무의식적 신화화 작업을 통해 만들어지고 재구성된 역사이므로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 작업을 통해 신화의 허상을 벗겨내야 한다고 본다. 기독교의 본질이 사랑을 핵심으로 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곧 도덕훈에 있으며 사도신경에 나타나는 신앙의 내용들은 바울이 헬라화 작업을 통해 만들어낸 신화에 불과하다고 본다.
5. 신앙고백교회사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중심의 한국기독교사학파는 객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역사를 문헌고증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 연구소의 연구원 김승태 목사는 일제말기의 신사참배거부운동을 “교회분립운동,” “반교회운동,” “교회 밖에서의 운동”27으로 해석한다. 성경과 개혁신학과 진리성의 관점에서 보면 그 운동은 교회의 속성(사도성, 거룩성, 보편성, 단일성)에 충실한 교회운동이었고, 개혁교회론에 충실한 신앙공동체였으며,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었던 교회운동이었다. 김승태의 역사왜곡은 신학적, 교회론적 함의를 지닌 사건을 문헌고증적으로만 접근한 데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28
민족교회사관을 가진 민경배 교수는 전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광복 직후에 과거사를 참회고백과 자숙으로 청산하고자 하는 출옥성도들의 제안에 대해 각자가 하나님과 직접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의 말에는 반박 못할 정연한 논리와 신학이 있었다”29고 예찬한다. 출옥성도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무시하고 윤리적 정결과 신앙적 영광을 더 앞세운다고 비난한다. “자책과 통회의 요청은 심판의 인상이 짙었고, 그것은 자기의 무한한 의와 결백을 전제하면서 신의(神意) 대행을 자처했던 이단심문의 중세기를 상기케 했다”30고 하고, 또 “은총의 객관성의 모체인 교회의 힘에 윤리적 정결과 신앙적 영광을 앞세웠다고 하는 모순을 가졌다…. 그 당사자의 심령에 겸손과 공동체 의식이 없고, 은총의 편만과 교회의 신비, 약한 세정에 함께 목메우는 참여의 사랑이 없을 때, 영광의 수난이 자랑의 정죄의 자리가 되었던 것이다”31고 한다. 신학적 함의를 지닌 사건을 친일전력자들이 주관적 시각으로 판단한 결과로 생긴 역사왜곡이다.
호남교회사가 김수진·주명준은 광복 후에 출옥성도들이 우상숭배 전력을 가진 목회자들을 “정죄”했다고 한다. 순천노회 수난사건 관련 “목회자들은 재건파나 고려파처럼, 신사참배를 하고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목회자들을 정죄하지 않고 오직 교회 재건과 순천노회 재건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32고 한다. 순천노회 교역자들이 그만큼 성숙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33고 한다. 이러한 역사왜곡도 신학적으로 간파해야 할 사건을 “당파적”시각을 가지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러한 역사왜곡은 “객관적” 역사연구라는 이름으로 수행된 것들이다. 역사가의 선이해와 그릇된 평가기준이 가져온 결과이다. 역사평가의 기준이 불분명하거나 그릇된 기준을 가지고 접근하면 악(惡)과 선(善)의 자리가 뒤바뀐다. 진리를 비진리라고 하고 비진리를 진리라고 하며, 흑을 백이라고 하고 백을 흑이라고 평가하는 지경에 이른다.
역사는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중립적으로 초연성(超然性)을 가지고 제3자의 관점에서 냉철히 공평하게 기술하는 것은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전술한 것처럼 엄격한 의미의 객관적 혹은 중립적 역사연구는 불가능하며 사관과 무관한 역사연구는 존재할 수 없다.
역사가의 선이해, 철학,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 등 여러 가지 조건들은 역사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역사 사실(historical fact)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역사가의 주관적 인식기관, 프리즘을 거쳐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성 추구를 포기하고 맥없이 역사연구에 임하거나 주관주의, 상대주의의 포로가 될 필요는 없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기록한 책이라고 믿는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 사실이면 그것은 객관적 역사평가와 건전하고 타당한 판단의 기준일 수 있다. 인본주의 관점, 힘의 논리, 당파적 시각을 배제할 수 있다. 교회의 본질을 고려하면서 하나님께서 계시한 성경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역사를 해석하면 일련의 “객관성”(mild objectivity)을 가질 수 있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이러한 신념을 기본으로 한다. 객관성은 인간인식 능력을 초월하는 신적인 계시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교회는 성경을 토대로 하는 규범공동체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시종일관 신학적, 신앙고백적 함의(含意)를 가지고 있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교회―하나님의 백성이 말과 글과 행동으로 혹은 머리, 가슴, 손, 발로 고백한 신앙 이야기에 초점을 둔다. 진리성을 중심으로 파악한다. 진리성 중심의 역사평가는 진리의 보고(寶庫)인 성경을 기준으로 역사를 파악하고 평가한다. 성경이 신앙과 행위의 최종 표준인 동시에 교회사 평가의 기준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가장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어야 할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본분이다.34 신앙고백교회사관은 하나님의 백성 혹은 특정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고 고백했으며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에 주목한다.
우리가 말하는 “신앙고백”은 교회가 채택한 신앙고백문, 교리, 신학에 제한되지 않는다. 손과 발과 행동으로 고백한 것들을 포함한다. 한국교회가 새벽기도회를 하고, 여전도회 회원들이 성미(誠米) 주머니를 들고 교회를 향해가고, 갈급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금요일 밤 철야기도회를 찾는 것은 모두 한국교회 나름의 신앙고백적 표현이다. 신앙고백은 신앙고백서나 신앙고백문서에 제한되지 않는다. 교회의 다양한 역사적 국면들, 민족, 사회, 문화, 공해, 핵무기, 전쟁, 인권, 도시화, 산업화, 사회참여 등 인간 사회의 전 영역(엡1:22)을 포함한다.
신앙고백적인 것이라고 하여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기독교 신앙에 충실한 실천이 있는가 하면 정통 신앙을 포기하고 불의와 야합하고 배교하는 신앙고백도 있다. 고대교회의 이단자들은 그릇된 신념과 사상을 자신들의 신앙고백으로 천명했다. 한국교회가 일제말기에 배교하고 우상숭배를 행하고 전향성명서-개종고백문을 발표하는 등 백귀난행을 저지른 것은 일종의 배교적 신앙고백 행동이다.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가 군사정권 시대에 권력자 편에 서서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은 미진한 신앙고백적 반응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와 섭리와 하나님의 나라에 주목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존재보다는 그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했는가에 역점을 둔다. 역사를 하나님의 활동무대로 본다. 성경은 창세기 첫 장에서부터 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하나님의 창조적 활동을 수록하고 있다. 성경이 완성되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의 교회사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가운데서 일한 것에 대한 기록이다. 하나님의 행적기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사랑했으며 자기 백성이 어떻게 그의 사랑에 반응했는가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섭리하며 죄인을 사랑하여 독자를 대속제물로 내어주기까지 한 그 사랑과 그 은혜 베품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 곧 교회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초점을 모은다.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 나라의 각도로 파악한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수행해야 하며 특정 교회가 교회의 본질과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는가에 주목한다. 교회마다 교회관이 다르다. 자유주의, 정통주의, 신정통주의, 복음주의가 주장하는 교회관이 다르다. 감독주의를 따르는 로마가톨릭교회와 성공회와 감리교회, 장로회 정치를 따르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회중정치를 하는 침례교회와 회중교회는 각각 서로 다른 교회관을 갖고 있다. 퀘이커교도, 형제단, 무교회파도 독자적인 교회관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론적 교회사관”35은 통사(統史)의 사관으로 적합하지 않다.
반면에 신앙고백교회사관은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접근하지만 성경과 진리성과 신앙고백적 활동을 초점을 맞추어 역사를 파악하여 교회론적 교회사관이 가진 한계를 극복한다. 상이한 교회관를 가진 교회들의 역사를 아우르면서 포괄적으로 다룬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성령의 역사(役事)에 주목한다. 성령께서 신앙공동체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또 교회사가를 지도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성령은 지난 수세기 동안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왔다. 지금도 신앙공동체의 발전과 쇄신을 지도하고 있다. 교회가 영적으로 죽은 상태가 되었을 때 성령은 그 안의 남겨진 사람들 가운데 역사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할 때 일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앙을 보존하도록 그들에게 부흥을 가져다주었다(사1:9; 렘33:9ff.). 중세교회가 우상숭배를 행하고 타락하자 성령은 종교개혁자들을 사용하여 교회를 개혁시켰다. 일제말기에는 배교하는 한국교회 안에 남겨진 소수의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을 통해 복음 역사의 물줄기를 잇게 했다.
성령사역은 기독교회나 신자들에게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은 사회 활동 가운데서도 역사한다. 비기독교인의 사고와 활동만이 아니라 복음에 대적하는 자들 안에서도 활동하여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깨닫도록 자극하게 한다. 하나님은 세속사를 통해서도 역사한다. 성사(聖史)와 속사(俗史)는 엄격하게 구분될 수 없다.
성령은 개인적, 은사적으로 일하기도 하고, 집단적, 우주적으로도 역사한다. 신자들에게 신앙을 심고 새 생명을 탄생시키고 복음 증거의 힘을 제공한다. 복음전파 사역을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은사와 능력을 부여한다. 교회사를 편찬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기독교인 역사가에게 임재하며, 건전한 판단을 내리도록 한다. 그러므로 교회사 연구는 역사방법을 터득한 자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가진 삶 가운데서 수행할 때 가장 바람직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이스라엘의 시인이 신앙의 눈으로 “광야교회사”를 파악한 것과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그 역사에 개재(介在)하는 하나님을 주목하며, 교회의 역사에서 전율(戰慄)을 느낀다.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의 손길을 본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오른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삼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의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중략)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시편 44:1-8)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이 퇴색되어 갈 때마다 역사를 가르치고 그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억하라고 외쳤다. 이러한 역사교육은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주 과업이다. “내 백성이여…,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중략). 이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시78:1-8). 뉴욕 부르클린에서 집단촌을 형성하고 사는 현대 유태인들의 정신성은 홍해를 기적으로 건너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살던 모세 시대의 유태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신앙역사에 대한 민족차원의 교육이 세대 차이를 철폐시킨 것이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역사연구의 기본 단계와 절차를 간과하지 않는다. 비평적인 접근과 “객관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성의 시대,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발달된 역사학 결과를 수용한다. 인간 삶의 다양한 국면들을 통시적으로 파악한다. 교회의 공문서, 공의회 문헌, 신앙고백문, 예배문헌, 헌법, 성명서, 교부와 감독과 목사들의 편지, 신자들의 개인 저작물들, 이단자들의 문헌, 신학논쟁 자료, 역사가들의 해석, 묘비, 비문, 구전, 증언 등 이른바 “객관적” 자료와 사실(史實)을 중요하게 여긴다. 현장을 탐사하고 자료를 수집하여 그것의 순수성, 통일성, 의도, 가치를 파악한다. 사건이 발생한 삶의 정황(Sit im Leben) 속에 뛰어들어 그것을 동시대적 관점으로 접근한다. 전체의 조망 하에서 부분을 파악하고,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추정한다. 통합성, 상상력, 직관을 사용하기도 하고 가정을 세워 사건을 유추하여 상관성을 밝힌다. 보편적 개념을 찾아내고 그것을 지적인 형태로 기술한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각 지역의 교회가 처한 독특한 상황, 특성, 기질, 전통 등 특수성(particularity)을 중요하게 여긴다. 유럽/미국교회의 눈으로 세계교회사와 한국교회사를 파악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서양신학과 서양교리의 눈으로 교회의 신앙고백을 분석하는 것을 경계한다. 사회상황, 정치상황, 민족상황을 총괄한다. 동·서양인이 수평적인 차원에서 대화하며, 상호존중의 태도로 접근한다. 특수성을 역사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것을 배격한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사건, 사상, 신앙의 흐름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유기적으로 상호 관련지어 포괄적으로 평가한다. 특정 시대의 교회의 독창적 움직임과 사상의 변화를 사회, 문화, 정치, 자연, 환경, 정신, 지식, 가치, 감수성, 강박관념, 헌신, 영혼의 갈망, 제도의 관련성 속에서 고찰한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 곧 하나님께 대해 믿고 고백한 것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관계, 곧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이웃사랑, 문화적 사회적 책임 등에 주목한다. 교회나 신자가 과연 어느 정도로 주 하나님을 사랑했는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했는가, 과연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했는가에 주목한다.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두 가지 계명”(마22:37-40)을 어느 정도로 어떻게 실천했는가에 주목한다.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지평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십자가 형태의 교회사관이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인간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애정을 가지고 역사연구에 임한다.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업이므로 사랑, 수용성, 존중, 관용, 겸손, 절제, 매사에 동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행한다. 선입견, 반감, 증오, 냉소적인 자세, 배타성을 경계한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다운 눈과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사건을 바라본다. “알려지지 않은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이 함부로 취급당하거나 비판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인간의 과거는 우애나 친교를 통하여 인지되어야 한다”고 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신중하게 고려한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성경이라는 규범이 있기 때문이다. 나치치하의 독일고백교회는 “바르멘신학선언”(1934)이라는 신앙고백 문서를 만들고 나치정권과 기존의 독일교회에 항거했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독일교회사를 기술할 때 독일고백교회가 독일교회보다 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충실했다고 판단한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배교, 야합, 우상숭배, 민족배신, 백귀난행을 일삼던 껍데기뿐이며, 신사참배거부운동 중심의 저항교회가 진리성에 더 부합하는 교회였다고 평가한다. 평가의 옳고 그름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맺음말: 신앙고백교회사관의 모델
역사가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거나 해석학적 조건을 초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역사는 독립적 지식영역이 아니다. 사람은 자기의 창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역사연구에는 역사가의 관점이 불가피하게 개입된다. 사관에 따라 특정 사건이 역사로 채택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한다.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교회사는 여러 가지 관점으로 연구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관점이 타당성과 호소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인본주의 역사관점은 교회사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공할 수 없다. 역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는 역사 사건 그 자체에서 얻을 수 없다. 인간의 죄와 패역(悖逆)이 하나님께 어느 정도로 모독적인가 하는 것은 인간이나 인간이 만든 것이나 인간이 일으킨 사건이 그 답을 줄 수 없다. 일반 역사가는 왜 하나님이 교회 성장의 암적 존재인 이단을 허용했는가에 대해서도 답할 수 없다. 성령 하나님이 교회를 항상 지도한다면 왜 이단이 등장했는가 하는데 대한 답을 제공할 수도 없다. 그러나 성경은 “저희가 나간 것은 저희가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요일2:19)고 한다. 장로 요한은 하나님께서 이단을 허용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비기독교인 역사가는 광활한 하늘과 궁창이 만들어지고 존재하는 까닭,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늘과 행성들이 기능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19:1)고 해석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한결같이 신학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의 존재와 역사와 그것들의 의미는 다만 하나님이 주신 특별계시의 빛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된 역사과학만이 인간역사에 대한 타당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죄인을 구원하며 의를 이루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섭리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평가할 때 하나님의 시간 창조, 만물 창조, 인간의 타락과 구원, 그리고 종말사건으로 이어지는 구원역사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신앙고백교회사관은 하나님의 말씀―성경을 교회사 해석, 평가, 편찬의 기준으로 삼는다. 교회사는 신학(theological science)이며 교회사가는 신학자이다. 교회사 해석은 신학자―교회사가의 몫이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역사연구를 실증주의적으로 접근하는 노력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성경을 역사평가의 기준으로 삼아 특정 신앙공동체와 신자들이 하나님께 대해 무엇을 믿고 고백했으며, 하나님께서 요구한 것, 곧 하나님이 부여한 본분(本分)에 대해 어떠한 신앙고백적 반응을 보였는가에 주목한다. 그 시대의 교회가 얼마나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충실했는가를 살핀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의 타당성과 효용성(validity)은 성경과 직결되어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담은 진리의 말씀인 것이 사실이면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역사를 해석하고 기술하는 것은 성경 그 자체에 준하는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최종적 권위로 여기는 개혁주의 신앙과 신념체계와 일치한다.
“신앙고백사관”과 “신앙고백교회사관”은 차이가 있다. 전자는 교회의 교리, 사상, 신앙고백문헌을 다루는 데에 초점이 있으며, 후자는 전자의 제 요소들을 포함하면서 신앙공동체의 전 역사를 성경과 진리성의 관점에서, 그 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어떻게 믿고 고백했으며 하나님께서 요구한 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충실했는가에 주목한다.
『사도행전』은 신앙고백교회사관으로 기술된 교회사 전형(典型)이다. 그리스도의 도성인신,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하나님의 나라 등 신앙고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성령충만, 복음에 대한 확신, 하나님 나라의 희망, 사랑의 열기를 담아내고 있다. 설교와 복음전도 활동을 통한 교리, 복음, 사역을 다룬다.36 현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화, 사회, 민족, 환경, 인권, 평등 등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당시의 교회는 복음확장, 교회건설, 말씀전파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어쨌든 초대교회와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믿고 하나님께서 그 시대의 교회에 요구한 과제들을 어떻게 수행했는가를 다룬다.
1최덕성의『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0)은 신앙고백교회사관으로 기술된 대표적인 책이다. 『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 『참회고백과 역사의식』, 『종교개혁전야』, 그리고 조만간에 출간할 예정인 『신사참배거부운동』, 『신사참배거부운동신학』, 『한국교회역사왜곡』, Korean Christianity, 『쌍두마차시대』도 이 사관에 따라 저술했다.
2백낙준, 『한국개신교사: 1832-1910』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3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9).
4최덕성, 『일본기독교의 양심선언』(서울: 본문과현장사이, 2000), 125-194.
5이만열, 『한국기독교수용사 연구』 (서울: 두레시대, 1998); 『한국교회사 특강』 (서울: 성경읽기사, 1987); 『한국기독교와 민족통일운동: 한국기독교사연구』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6단제 신채호, 백암 박은식, 위당 정인보, 호암 문일평이 시도한 사관을 교회사 연구에 도입한다. 박은식은 역사가 존재하는 곳에 국혼(國魂)이 존재한다고 했다. 박은식, 『한국통사』, 이장희 역 (서울: 박영사, 1974) 결론을 보라.
7한국기독교장로회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주재용), 『한국기독교100년사』 (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1992); 주재용, “한국기독교백년사: 민중사관의 입장에서의 분석과 비판,” 『신학연구』 21 (1979. 12.).
8이덕주, “최근 한국교회사 연구 흐름: 사관과 방법론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간행, 『한국교회사, 어떻게 볼 것인가?』 (학술심포지엄 자료, 2000. 10. 5.) p. 35-49.
9박용규, 『한국장로교사사상사』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1992), 378-379. 부록으로 실린 “한국교회사 사관 정립에 관한 소고”에서 설명하고 있다.
10김영재, 『한국교회사』 (서울: 개혁주의신학협회, 1992).
11Gehard Ebeling, Word Gottes und Tradition, Studien zu einer Hermeneutik der Konfessionen 2. Aufl. (KiKonf 7, 1960), 9-27; W. Werbeck, Bibliographie G. Ebeling (in E. Jungel, Verifikationen. Festschrift fur G. Ebeling zum 70, Geburtstag, 1982), 523-542.
12W. Pannenberg, Grudfragen Systematischer Theologie, 3 Aufl., (GAufs, 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79).
13Richard Niebuhr, 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 『교회분열의 사회적 배경』, 노치준 역 (서울: 종로서적, 1989), 3-24.
14W. Zeller, Kirchengeschichte als Theologisches Problem (1949), in Ders., Theologie und Fro¨mmigkeit, GAugs.1, Hg. B. Jaspert (MThSt 8, 1971), 1-8.
15F. W. Kantzenbach, Ernst Benz. “Die allgemeine Kirchengeschichte und das Programm ‘Kirchengeschichte in o¨kumenischer Sicht’” (in R. Flasche/ E. Geldbach(Hg.) in Momoriam Ernst Benz, Religione, Geschichte, o¨kumene (Leiden, 1981), 45-48.
16Lucas Vischer, “Kircheneschichte in o¨kumenischer Perspektive. Ein Memoradum,” in Theologische Zeitschrift 38 (jg. Heft 5, 1982), 263-271.
17O¨kumenische Kirchengeschichte der Schweiz (Freiburg: Basel, 1994).
18종교다원주의의 이단성, 배교성, 적그리스성에 대해서는, 김경재, 『이름없는 하느님: 유일신 신앙에 대한 김경재 교수의 본격비판』 (서울: 삼인, 2002)을 보라.
19Lorenzo Valla, 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Weimar: H. Blaus Nachfolger, 1976). 이상규, “고백주의적 교회사 편찬,” 『목회와 신학』 (1996. 12.), 178-183을 참고하라.
20John Foxe, Acts and Monuments (London: John Dayne, 1570).
21Matthias Flacius, Catalogus Testium Vertatis, in Wilhelm Eisengrein, Catalogus testium veritatis locupletissimus (Dilingae: Excudebat Sebaldvs Mayer, 1565).
22Matthias Flacius, Historia Ecclesiastica (old title: Magdeburg Centuries) (Basukeae: Typis & expensis Ludovici Regis, 1624).
23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Scotland, 1644 (London: Adam and Charles Black, 1898).
24Annales Ecclesiastici, 1588-1605 (Cologne: Sumptius vidu A. Hierat, 1640).
25Historia Michaelis Serveti (Helmstadii: Stanno Bucholtziano, 1727).
26미국 유니온신학교의 필립 샤프(Philip Schaff) 박사는 교회사의 역사(history of church history)를 기술한 책에서 교회사 편찬의 시대별 특징들을 잘 소개하고 있다. [Phillip Schaff, History of the Apostolic Church with a General Introduction to Church History (New York: 1854), 55, 63, 69-72; id. The Principle of Protestantism: What is Church History (New York: Garland Publication Company, 1987)를 참고하라. 이 책의 초판은 1845년에 출간(Chambersburg, PA: Publication Office of the German Reformed Church, 1845)되었다. 고신대학교의 이상규는 교회사 편찬의 역사를 소개하는 글 “고백주의적 교회사 편찬,” 『목회와 신학』 (1996. 12.), 178-183; “교회사 연구와 편찬에 관한 사적 고찰: 종교개혁기와 계몽주의 시대(16-18C)를 중심으로,” 『역사신학 논총』 3 (2001), 277-294을 발표한 바 있다.
27김승태, “1940년대 일제의 종교탄압과 한국교회의 대응의 한 유형: 전남순천노회 박해사건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의 역사적 반성』 (서울: 다산글방, 1994), 112-113. 최덕성,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 재평가’에 대한 김승태의 반론을 읽고,”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0호 (2004 봄), 239-241.
28최덕성, “문헌고증적 교회사연구의 한계: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 재평가에 대한 김승태의 반론을 읽고,” 『한국교회의 역사왜곡』(잠정제목)에 수록할 예정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의 『한국기독교와 역사』에 게재를 요청했다.
29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개정판,) 454.
30민경배, “한국교회 25년사: 1945-1970,” 『한국기독교연감 1972』 (서울: 한국교회협의회, 1972), 22.
31민경배, “한국교회 25년사: 1945-1970,” 22.
32김수진·주명준, 『일제의 종교탄압과 한국교회의 저항: 순천노회 수난사건을 중심으로』 (서울: 쿰란출판사, 1996), 162. 장로교 통합측 교단 총회의 이 사건에 대한 연구위원회의 보고서를 책으로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의 문제점과 김승태의 논문에 대한 비평적 분석은 졸고 “순천노회 교역자 수난사건 재평가,” 『한국기독교와 역사』 10 (1999), 171-203를 보라.
33김수진·주명준, 163.
34“What human being is to believe concerning God and what duty God requires of man/women.”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소교리문답』 제3문답을 참조하라.
35최덕성, “민족교회사관은 조종을 울릴 것인가?”(고려신학대학원 개교기념일 발표논문, 2000. 3. 9.)에서 천명했다.
36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기도, 환상, 기적, 치유, 성령의 임재 등 영적 사건을 다룬다. (2) 우상숭배, 이방족속에 대한 선교, 전도인 파송, 복음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 선교보고, 헌금, 개척교회, 회개, 개종 등 선교활동을 소개한다. (3) 박해, 피신, 수난, 투옥, 순교 등 교회의 대 사회 관계를 다룬다. (4) 교회조직, 집사선발, 정치권력, 예루살렘공회, 교회갈등 등 교회의 외형적 요소와 특징들을 알려준다. (5) 물건통용, 민족, 구제, 치유 등 대 사회문제를 보여준다. (6) 소동, 고발, 상소, 재판, 변론, 압송 등 교회관련 이야기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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