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한국교회사 - 선교지 분할
19세기 말까지 한국에서는 개신교만 8개 이상의 교단이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들 선교사들은 호주 선교부가 부산을 중심으로 선교 거점을 확보한 경우 외에는 대부분 서울에 먼저 들어왔다. 외국의 공관들이 서울에 있었고 선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서울에 먼저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효율적인 선교를 위해서는 각 교단 선교부끼리의 선교지 조정등이 필요하게 되었다. 서울이나 대도시에서는 선교부들이 중첩적으로 포진하여 불편한 관계가 조성되었고, 다른 곳에서는 복음의 소식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교 지역을 분할해야 한다는 의견은 아펜젤러의 제안에 의해 1888년에 이미 미 북감리회와 미 북장로회 사이에 거론되었는데, 본격적으로 계약이 이뤄진 것은 1892년이다. 1892년 1월 처음으로 장로교 선교지 분할 위원회가 결성되어 남장로교가 한국선교를 시작했을 때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사이에 선교지 분할 협정이 체결되었고, 그해 5월 하순 감리교 대표들과 2,3차례 협의를 거쳐 6월 11일 장·감 대표들 사이에 처음으로 다음과 같은 선교지 분할 협정 초안이 작성되었다.
① 일반적으로 소도시들과 그 주변 지역들에 대한 공통적 점유는 우리의 각 선교회에 유익한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5,000명이 넘는 항구 도시와 읍들은 공통으로 점유되어야 한다.
② 5,000명 미만의 읍에 그 지역을 담당하는 선교사에 의해 하나의 선교구가 설치될 때 그곳은 해당 선교회에 의해 점유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다른 선교회가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권장할 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역의 공백 기간이 6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그곳은 다른 선교회의 선교가 가능한 개방된 선교지로 간주된다.
③ 사역을 시작하거나 확장시키고 싶어 하는 선교회는 모든 선교지에 신속히 세력을 미치기 위해 점유되지 않은 지역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는 바이다.
④ 우리는 각 교회의 신도들이 다른 교단으로 옮길 고유한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한 교회에 교인 혹은 후보자로 이름을 등록한 사람은 그 교회 담당자의 이명서가 없이는 다른 교회로 영입될 수 없다.
⑤ 여러 교회의 권징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호 존중하기로 가결한다.
⑥ 섬기고 있는 당사자의 이명서가 없을 경우 다른 선교회는 모든 사역 분야의 조사, 학생, 교사, 조력자들을 영입해서는 안된다.
⑦ 일반적으로 서적들은 무료로 주지 않고 팔아야 하며 가격이 균일해야 한다.
장로교 선교회는 감리교 대표들과 선교지 분할 협정을 논의하기 위해 1893년 1월 23일 선교지분할위원회 위원으로 기포드(D. L. Gifford), 스왈른(W. L. Swallen), 무어(S. F. Moore)를 임명하였고, 그 해 한국에 파송된 전체 장로교 선교회와 감리교 선교회는 한국 내에서의 불필요한 선교 경쟁을 피하고 선교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교계예양이라는 선교지 분할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감리교 포스터(R. S. Foster) 감독이 한국에 왔을 때 이 협정에 찬성하지 않아 공식적으로 발효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안은 추후의 선교 사업에 골격 노릇을 하였다. 마땅한 다른 규범이 제시되지 않은 가운데서도 잠정적인 협정은 있어야 했기 때문에 장·감은 오랫동안 이 협정을 존중하고 하나의 관례처럼 실천했던 것이다.
선교지 분할 협정에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 온 것은 장로교 선교회였다. 그 후 장로교 선교회는 감리교와의 선교지 분할 협정을 타결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고, 1897년 한국 선교 현장을 방문한 스피어 박사는 선교지 분할을 이루기 위해 애써 노력하였으나 감리교 선교회의 소극적인 자세로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비록 협정이 조인되지는 않았지만 그 후 장·감 선교회는 오랫동안 교계예양을 존중했다.
그러다 1905년 장·감연합공회가 결성되면서 선교지 분할 협정은 더욱 활발해져 1905년에 평안북도 지역에서 북감리교와 북장로교가 선교지 분할 협정을 통해 영변 지역을 북감리교 선교회에 이양하고, 북감리교는 안주 지역을 북장로교 선교회에 이양했다. 그러다 한국이 일련의 대부흥운동을 지나면서 선교지 마찰을 피하기 위해 효율적인 선교를 추진할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1909년 9월 16일, 17일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인 지역 분할 협정위
원회에서 장·감이 역사적인 선교지 분할 협정을 공식적으로 조인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한국 침략으로 인한 위기의식은 장·감연합운동을 더욱 촉진시켰다. 1909년에 채택된 선교지 분할 협정은 전혀 새로운 협정이 아니라 1893년 이후 장·감이 상호 지켜 온 분할 정책을 구체적으로 인준한 것이었다.
이 선교지 분할 협정은 재정의 낭비, 선교 시 마찰을 극복해 선교의 효율을 가져다 주었다는 면에서 상당히 의의가 있다.
반면 몇 가지 폐단을 가져왔는데, 그 하나는 한 선교지에 한 신학만을 오랫동안 심어 주어서 그 신학이 그 지역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1930년대 진보주의자들이 등장해 보수주의에 도전했던 일이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진보적인 캐나다 선교회가 담당했던 함경도 지역 출신들이었다. 북장로교 선교회 담당 지역이었던 평안도와 경상북도, 남장로교 선교회가 담당했던 전라도 그리고 호주 장로교가 담당했던 부산 지역 등은 모두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이렇듯이 한 신학사상을 오랫동안 가르쳐 오면서 그 신학이 그 지역을 지배하는 현상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고, 지역마다 다른 신앙적 특성으로 나타나 지역적 골을 깊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또 하나는 한국인이 어느 교파의 기독교인이 되느냐는 신자 자신의 자유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교지 분할의 산물로써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는 폐단을 안고 있다. 공동 구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 지역에 한 선교회만 독점적으로 전도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자들은 선교지 분할에 의해 결정되어진 대로 감리교인이 되거나 장로교인이 되었으며, 같은 장로교라도 청교도적인 장로교인이 되거나 다소 자유스러운 장로교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선교지 분할에 의해 서로 선교지역을 주고받는 바람에 몇 천 명의 감리교인이 하루아침에 장로교인이 되었고, 같은 수의 장로교인이 감리교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이 협정은 4개의 장로교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 사이에 이루어져 다른 군소 교단(침례교, 성결교, 구세군 등)에 대한 배려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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