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역사
1. 서론
오랜 기간동안 나라도 없이 살던 이스라엘이 현 미국과 강대국에서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며, 실력가로 군림하고 있는 현 시대를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이란 어떤 민족이며, 그들의 신앙적 배경- 그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 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작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민족, 그리고 그들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하심을 바탕으로 하여 본 자료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스라엘 역사의 근원 자료는 구약성경에서 주로 발견된다. 이런 많은 자료가 담겨 있기에 이스라엘 역사는 그 주변 나라들 보다 더 자세하게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 당시 위대한 나라들 보다 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연구가 그들 이야기를 상당히 자세하게 채운다 해도 이스라엘 조상의 배경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외국 땅에서의 형성시대, 약속의 땅에서의 각 지파의 시작, 이 지파들이 한 개의 왕국으로 연합된 일, 왕국 형태로 나타난 하나님의 징계, 또한 계속적인 경험을 겪으면서 포로로부터 돌아오는 많은 백성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앞으로의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대부분의 자료를 구약 성경에서 기초하여 찾으려고 하는 바이다. 위의 서론은 바로 구약 성경을 그 자료로 하는 것에 대한 배경적 서술이다. 구약 성경의 주목적이 역사를 기록하는데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 대한풍부한 자료는 제공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목적이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악된 인간에 관심을 갖고 그의 구원 섭리를 예비하신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므로 역사에 있어서 빠진 부분도 있으나 다른 자료들과 일반적 배경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
이스라엘 민족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과정에 의해 한 민족이 되었는가 ? 그들의 하나님 야훼는 누구이며, 어떻게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는가 ? 이러한 질문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질물들에 앞서, 이스라엘이 살아온 근동 지방의 다양한 역사와 변화를 먼저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한 작은 나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계 3대 대륙인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연락하는 교략적 위치에 놓여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고대 근동의 여러 나라들과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관계를 맺어 왔다. 상대적으로 약세에 처해 있던 이스라엘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아 왔으며, 그들로부터 종교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인류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문명과 경제적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페르시아와 이집트의 문명의 만남, 즉 동서의 만남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 이스라엘은 ‘기름진 초승달’의 서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야와 사막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동쪽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 줄기를 타고 초승달 모양을 이루고, 북서쪽으로 발달한 기름진 평야는 이스라엘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그 끝을 이루고 있으며, 이집트로부터 북쪽으로 이어지는 사막과 만나게 된다. 족장 이전의 팔레스타인의 환경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사실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역사는 아브라함 이주 이후의 역사로부터 취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동안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로 인하여 족장 이전의 모습에 관하여 대강의 모습을 구성할 수 있다.
기원전 2000년전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역사는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패턴의 대변혁기 였다. 이집트는 신 왕조의 시작과 함께 막강한 힘을 뻗어 나갔으며 , 북쪽의 히타이트 역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에서 여러 차례 지배를 받아오면서, 이들의 이주는 아모리인의 이주로 큰 변화를 맞게된다. 이들의 이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조교의 발전을 이루며 살게 된 계기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에돔, 모압, 암몬, 블레셋 등의 세력들이 함께 팔레스타인에 머물러 살게 되면서, 가나안 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들의 문화는 주로 도시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고, 때로는 도시 국가간의 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중앙 집권 형태의 구조를 가진 제국들과 맞서 나갔다. 구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최초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사인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한다. 창 12:1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된 아브라함의 순종이 이스라엘 문명사의 전환점이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팔레스타인의 원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다른 지역에서 살던 한 유목민의 이주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디 아브라함의 고향은 메소포타미아의 한 도시 우리였다. 당시 이 도시는 메소포타미아의 최고의 도시로서, 그는 ‘기름진 초승달’지역을 지나 가나안이라 일컬어지는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그가 지나간 하란 역시 매우 번창했던 도시였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를 떠나 가나안에 입주한 시기를 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올브라이트, 넬손 그릭, 롤랑 드보등은 이때의 시기를 기원전 2000-1500년 즉, 중기 청동기 시대로 잡았으며, 이러한 주장은 유프라데스의 마리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코프만, 고든, 아리스펠트등은 가나안 정복과 정착 시기와 비슷한 기원전 14세기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창세기 15장16절을 들고 있다. 그런데 대표적인 시대 착오적인 성경의 기록은 족장들의 기록에 ‘약대’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낙타를 길들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2세기였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연대는 일반적인 연대나 족보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살던 시대의 삶의 상황과 형태는 반문화적 형태를 띠고 있었음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유리하는 아람인’으로 여기저기 이주하면서 살았다. 족장 가운데에는 부분적으로 농업을 하기도 하였다. 유목 문화의 특징으로는 계절에 따라서 이주하는 생활, 가축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직 사회의 구성, 지파간의 권리 보호를 위한 계약 제도 형성, 피의 복수법, 손님에 대한 대접과 상속법들이 있었다. 유목민들은 대체로 광활한 광야에서 살면서 종교적인 것이거나 혹은 정치적인 것이거나 그 어떤 속박도 용납하지 않는 자유로운 자들이었다. 요약하면, 먼저 족장들은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으며, 도시 문명 지대의 영향권밖에 머물면서 모시 문명을 건설하지 않았고, 천막을 치고 이주하는 생활 구조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몇몇 무덤들이 발견한 것을 제외하면 고고학적인 증거를 거의 발견할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아브라함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소위 족장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족장들은 단지 고독한 개인이 아니라, 꽤 규모가 큰 씨족들의 추장들이었다. 이시기의 팔레스타인은 수없이 많은 유목민 씨족들로 뒤섞여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이들 가운데 한 집단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역사와 삶을 대체로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모두12명의 아들을 두고 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의 각 지파의 조상이 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12지파의 역사로 전개되고 있으며, 각 지파간의 협력과 갈등의 역사이기도 하다. 한편, 요셉의 생애는 그가 살던 시대의 배경을 무대로 하여 문학적으로 잘 구성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을 다 종합하면, 기원전 20-18세기에 기름진 초승달 지역의 북부 문명 지역 한으로 수많은 이주민들이 들어왔으며, 그들은 작거나 큰 조직 사회를 형성하였다. 특히 , 족장 중심의 성경 기록은 이 시대의 여러 민족들의 이주와 더불어 이해 될 수 있으며, 이들은 각각 개별적인 민족 혹은 부족으로서 존재해 오던 것이 하나의 계보로 결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대체로 반유목민들의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족장들을 각각 씨족의 수호신을 숭배하고 있었으며, 토착적인 종교 제의가 행해졌다. 족장들의 초기 유산은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과 신앙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쳐 왔으며, 그런 점에서 족장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을 자신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상 타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경 전승에 따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흐름이 요셉의 이집트에로의 이주 기사를 기점으로 , 팔레스타인의 족장 전승의 기록이 이집트 이후의 모세 전승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혈속들은 모두 70인이었다. 이들의 숫자가 기아급수적으로 늘어났고, 가나안 정복 시대와 사사 시대까지 이스라엘의 기원과 민족의 형성 시대로 정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적어도 200년간 투쟁을 하게됐고, 가나안에서의 시간들을 B.C. 1000년까지로 구분할 수 있다.
3. 제1차 성전 시대 ( 1024-586 B.C.E.)
고대 이스라엘의 군주제는 4세기 동안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부족간의 동맹체제보다 두배나 긴 기간이었다. 사울과 다윗, 솔로몬에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71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때가지와 남 유다 586년의 바빌로니아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까지 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주제를 실시하였다. 대략적으로 보았을 때 사울은 1012-1004 B.C.E.로서, 주요 업적은 산악 지대에서 블레셋을 몰아 내는 일이었다. 다윗과 솔로몬은 1004-965 B.C.E의 다윗과 솔로몬의 965-926 B.C.E.까지로 보는데, 이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부와 지혜, 그리고 명예의 상징이었다. 성경이 전하고 있는 로몬 시대의 평화와 번영, 안정과 화려한 생활,그리고 그이 지혜는 다분히 과장적이라고 하더라도 신빙성이 높은 것들이다. 솔로몬이 죽고 난 후, 다윗에 의해 세워진 국가 체제는 무너져 내리고, 기원전 926년 고대 이스라엘은 르호보암의 남 유다와 여로보암의 북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말았다. 남유다는 영토가 작고 가난했지만 동질적인 주민이 어울려 살았고, 지리적으로 비교적 주변과 격리되었기 때문에 확고한 왕조 전통을 바탕으로 정돈되어 왔다. 한편, 북이스라엘은 영토가 넓고 비옥했으며, 그리고 옛 지파 동맹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주민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외세의 외세의 영향을 받기 쉬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왕조의 전통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많았다. 이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은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미가등이었는데, 이 두 왕국을 오가면서 예언 활동을 하였으며, 정치, 군사, 경제등 각 분야에 걸친 남북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하나의 민족, 하나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지속시킬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 관계는 기원전 721년 , 북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먼저 멸망당하고 그의 영토에 편입되면서 깨어졌으며, 이 때 북왕국의 많은 피난민들이 남쪽 유다로 몰려들면서 예루살렝의 인구는 급증하였다.
4. 제 2차 성전시대 ( 538 B.C.E. - 70 C.E. )
근동 지방의 국제 정세의 변화와 이에 따른 이스라엘의 멸망은 민족의 강제적 이동과 추방,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의 이민 등으로 인하여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게 되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삶의 터전을 잃고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를 거쳐,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지배를 겪으면서 과거의 전통과 새로운 사조들과의 충돌 및 갈등을 통하여 다양하고 복잡한 사상을 낳게 되며, 이것은 곧 이스라엘의 새로운 종교 전통으로 연결되어 발전하게 된다. 흔히 ‘신구약 중간사’라고 일컬어지는 이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포로생활을 본토로 귀향하게 되는 과정과, 그로 인하여 발생한 사회 구조 및 사상 체계의 변화, 그리고 헬라, 로마로 이어지는 새로운 지배체재와 헬레니즘과의 충돌로 인하여 발생한 문화적 변화, 나아가 예루살렘의 멸망 등 약 600여 년간의 과정에서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아울러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예수 공동체의 본질과 특성을 그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더불어 고찰하게 됨으로써 , 초기 기독교의 역사적 배경과 신학적 본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원전 721년 ,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후, 남유다는 여러왕들의 개혁과 발전 의지를 통하여 독립을 계속 유지해 왔으나 589년 1월 예루살렘의 포위와 함께 선전이 파괴되고, 유배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고레스의 칙령으로 538년 이스라엘은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하여 되돌아오게 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와의 개혁운동을 이 시대를 주류하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336년에서 323년의 등장으로 동방과 서방의 만남과 헬레니즘이 이스라엘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마카비 전쟁167-164 B.C.E으로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하게 된다.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헬레니즘의 수용과 거로 요약할 수 있다. 이제부터 모든 유대교는 하나의 유대교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헬라적 유대교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어야한다. 이 시기의 유대인들은 ‘두 언어’와 ‘두문화’사이에서 살았기 때문에, 같은 공동체 내에서도 각각 다른 생각과 사상을 형성하며 살아가데 되었다. 기원전 500년경에 로마시를 중심으로 한 라틴족의 도시가 세워졌는데, 로마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헤롯이 유대나라를 다르시게 되었고, 헤롯의 통치기간은 37-4 B.C.E.까지이다. 이제, 예수의 탄생으로 가보도록 하자. 예수가 사시던 시대의 특성은 한 마디로 ‘다양성’의 시대였다. 유대 사외의 어느 하나도 통일성을 갖춘 것이 없었다. 특별히 종교 사상들의 경우, 긴박하고 변화가 많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체계적인 사상이 형성되기 보다는 변화에 다른 각 종파간의 이해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고 해석되었다. 유대민족간의 메시야 사상의 간절함이 메시야의 극적인 탄생을 부인하게 만들었고, 이에 의해 초기 기독교회의 핍박 역시 가세하게 된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적대적 , 대리적 긴장은 예수께 있다기 보다는 두 집단간의 역사적 긴장관계가 시작되면서 각각의 정체성을 정당화 하기 위한 신학화가 이룩되어 갔으며, 그 결과 두 집단간의 분리가 다 이루어졌다.
5. 미쉬나, 탈무드 시대 ( 70-640 C.E. )
제 2차 성전의 멸망은 유다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대전환점이었다. 정치적 독립의 상실로 인하여 더 이상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뿐 만 아니라 , 대부분의 백성을 흩어지게 했다.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있는 동안, 예루살렘의 랍비였던 요하난 벤 자카이는 중도파 바리새인들과 함께 성을 빠져 나가 야브네로 갔다. 야브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55km, 지중해변으로부터는 5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야브네 세대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요하난 벤 자카이였다. 바리새인들의 지도자였던 그는 이 곳에 학당을 세우고, 종교적 기초를 놓음으로써 유대교의 생활을 계속 이어 가려 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만 행한 많은 관습과 행위들을 과감히 고쳐 나감으로써 생존의 뼈대를 세워 나갔다. 이 시기의 야부네에서의 활동은 새로운 질서의 형성으로부터 차츰 규법화로 이동하여 갔다. 제 2차 성전 시대의 사회 안에 퍼져 있던 다양한 사상들과 활동은 성전 멸망 이후 전적인 변화를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산헤드린은 헬라어 시네드리온에서 온 용어이다. 본래는 ‘함께 앉다’이다. 이것은 일종의 지방 자치 행정 기구였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 행정 기구는 예루살렘에 둔 대산헤드린의 중앙 권위를 인정하도록 설계하였다. 야브네에 설치한 산헤드린의 주요 활동은 헬라 로마 세계의 혼합된 문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반 백성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유대교의 삶의 표준을 안내해 주는 것이었다. 성전 멸망 이전의 유대 사회의 대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왕과 대제사장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왕조가 사라지게 되고, 다윗왕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물려받을 반한 왕가가 존재하지 않게 되자, 미래의 희망을 이룩할 현실적인 민족적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역할을 하던 것이 ‘나시’이다. 제 1차 유대반란이 진압된 후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로마의 주피터 신전이 건설되었으며, 일상적인 종교적 생활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제 2차 유대인의 반란이 132-135 C.E. 에 일어났으나 , 이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유대인들에는 보다 강력한 제재가 있게 되었고, 이들의 계속적인 정치적 혼란은 4-5세까지 이르게 된다.
6 .팔레스타인의 새 주인들
유태국을 멸망으로 이끈 가장 큰 재앙은 의심할 여지 없이,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과 그 성의 파괴에 있다. 이 일이 있기 2년 전, 캐샤레이의 이방인들은 2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했고, 수천명을 노에로 팔았다. 다마스커스의 주민들은 불과 하루 동안에 만명의 유태인의 목을 잘랐으며, 예루살렘성 포위 당시에만 해도 11만 6천이나 되는 유태인의 시체가 성 밖으로 내던져졌다. 함락 후 거의 10만명의 망명인들이 체포되어 노예로 팔렸다. 요세푸스는 백만명 이사의 유태인들이 포위 당시와 그 여파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고 추산한다. A.D 115년경에 사이렌, 이집트, 싸이프러스와 메소포타미아의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하여 일어났다. 서방 세계가 콘스탄틴 대제의 통치를 시작으로 차츰 기독교화해 나가는 동안, 유대인들의 지위는 제한되기 시작하였다. 곳곳에서 에수의 사역과 관련된 장소를 ‘성지’로 규정해 나가면서, 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비잔틴 세계에서 몰려 오는 많은 성지 순례자들을 맞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또 많은 주요 신학적 교리가 확정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팔레스틴에 기독교인의 인구가 급증하면서 광신적인 기독교인들의 유대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유스틴 황제가 즉위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즉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유대인의 권리와 재산 보호의 법적근거를 제거해 버렸으며, 유대교에 대한 지위를 하락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일어난 많은 신학적 논쟁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팔레스틴에서는 사마리아인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혁신적인 조치 중의 하나는 유대법을 국가법과 동등한 규정으로 적요시켜 나가고, 기독교 내의 각종 제도를 유대교의 그것들로부터 분리시켜 나간 것이었다. 나아가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유대교적인 전통과 관점으로부터 떠나 기독교적인 성경 해석 방식에 의해 해석해 나갔다. 이러한 비잔틴 시대의 유대인들은 다른 어떤 제국의 통치기간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페르시아가 팔레스타인에 이르렀을 때, 유다의 남은 자들은 페르시아와 연합하여 기독교인들과 맞서 싸웠다. 유대인들은 갈릴리로부터 가아샤랴, 룻다를 거쳐 614년 5월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을 정복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페르시아의 친유대 정책은 3년이 채 못 되어, 617년에 역전되어 친기독교, 반유대인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처형 되고, 유대인의 지위는 예전처럼 돌아갔다. 교회는 유대인을 이집트와 주변 사막으로 추방하였으며, 이에 반대하고 나선 유대인들을 처형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박해와 더블어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시키는 공적인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 사이에 갈등은 640년에 팔레스틴의 새 주인으로 떠오른 아랍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유대인들은 이제 수 세기 동안 새로운 ‘악한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모슬렘의 등장은 유대인 기독교와의 갈등이나 증오심과는 다른 성격을 나타낸다. 유대교와의 기독교의 갈등이 유대교 율법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독교의 교리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 비하여, 유대교와 모슬렘의 만남과 갈등은 유일신 사상을 지지하는 두 법전 사이의 긴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아라비아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살면서 이 지역의 이웃 문화에 상당한 접촉이 있어 왔다. 특히, 아랍인들과 인종적, 언어적으로 친족이었다. 그런 점에서 모슬렘의 경전인 『코란』은 유대교의 많은 전통과 관습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무하마드가 하나님의 ‘마지막 예언자’로 이해되면서, 그리고 그들의 신이 ‘유일신 알라’로 신봉되면서, 이러한 신앙을 인정 할 수 없는 유대인들은 ‘이단’일 뿐만 아니라 이교도였다. ‘움마’에 속하지 않는 자에게는 칼과 순교를 ‘움마’에 속한 자에게는 완전한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었다. 이들은 모든 이슬람 제국에 퍼져 나갔으며, 특히 이들은 10세기의 예루살렘에서 금욕적이고 개인적이며 합리저긴 종파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시온의 통곡자들’, 또는 ‘장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이 또 한 차례 모슬렘의 손에 넘어간 것은, 터키 지역에서 이집트로 온 ‘종들’의 후예인 마멜룩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13세기 초의 일이다. 본래 마멜룩은 이집트의 군대에서 종사하던 노예들로서, 알말리크 알사나이 무하마드가 이끄는 그들은 지배자들을 전복시키고, 남부 러시아 및 발칸 반도 주변의 새로운 노예를 규합하여 강력한 군사 봉건 제도의 정권을 이룩한 자들이었다. 1301년,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중되어, 카이로에있는 모든 교회의 회당이 문을 닫게 되었다. 정부는 기독교인에게 파란 터번을, 유대인에게는 노란 터번을, 그리고 사마리아인에게는 붉은 터번을 각각 쓰게 하였다. 이 시기의 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는 그 힘이 쇠잔하여 예루살렘을 비롯한 악고, 욥바 등의 경우 거의 그 이름조차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집트와 시리아의 수도에는 아직까지 대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남아 있었으나 주변 지역은 쇠퇴하였다.
7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아슈케나지의 문화적인 뿌리는 남부 이탈리아와 북부 프랑스였다. 12세기 야콥 메이르 탐은 아슈케나지의 문화를 일으켜 나갔다. 특히, 이 지역의 유대인들은 전통적이고 근존적이며, 엄격한 유댜 사상과 관습 등을 지켜 나갔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다양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들은 외적인 영향보다는 내적인 전통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에게는 있어서 연구의 주된 관심사는 할라카적인 원리를 찾으려는 것이었기보다는 성경의 주석적인 활동이었다. 아슈케나지의 이와 같은 노력과 전통은 유대교의 학문적 전통의 뿌리가 되었다. 1516세기 서유럽의 유대인들이 동부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이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지로 옮겨 갔다. 그들은 히브리 어와 독일어를 합성하여 자신들이 고안해 낸 이디시어를 사용했으며, 이 언어를 사용하여 많은 제의시등을 창작했다. 17세기 스페인의 유대인 학살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동부 유럽으로 이주해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아슈케나아지의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1648년의 폴란드 대학살 및 18세기 러시아의 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오스레일리아, 남아프리카, 미국 등지로 흩어져 분산 되어 갔다. 유대인의 스페인 진출은 솔로몬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다만 기원후 711년 모슬람의 팔레스타인 정복 때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 곳까지 이른 것으로 여겨진다. 정치적, 언어저거으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과 교류가 있었던 증거가 있다.1148년, 알모하드의 박해 이후, 스페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집중되면서 유대 공동체에는 적지 않은 압력과 박해가 가해졌다. 1391년 박해 때에 많은 유대인들이 추방되거나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또 1492년에 유대인 추방령이 포고되면서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북 아프리카, 이탈리아, 터키 등지로 떠 나야 했으며, 이 칙령은 공식적으로 1968년까지 유효했다. 적어도 중세 유럽인의 디아스포라 역사에서 세파르디의 인구가 아슈케나지와 비교할 때 약 1/10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할은 활발하고 주요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문화와 잘 조화를 이루면서 유대인의 새로운 전통을 많이 창출해 냈다. 스페인 어 혹은 히브리 어와 스페인 어를 조화시켜 만든 라디노 어로 된 성경 주석, 시 드라마, 법전 및 신비주의 카발라 등 많은 문학작품을 양산 했다. 유대인들은 유랑자의 신부으로 생존을 위해서 경제활동을 활발히 해 나갔다. 특히 기독교 세계 내에서의 유대인의 경제활동은 유대인들의 재력을 바탕으로 한 지위 확보를 주력했는데, 봉건 영토 내의 먼 지역에 여행하여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거나 들여옴으로써, 지역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상업을 통하여 많은 돈을 번 유대인들은 이 돈을 일반인들에게 대여해 줌으로써 이자를 받고, 금융 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번 돈으로 금과 은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상업 활동이 순환적으로 계속되면서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제국 내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남녀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이 많았으며, 모슬렘의 스페인에서도 유대인들은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중세 유대인의 지위는 항상 세속 정부의 인가에 의해서만 그 역할을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지도자들은 항상 그들의 자치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유대인의 종교적 지위를 위협하는 입장과 유대인의 경제적,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려는 황제의 노력이 상호 교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요한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이 유대인의 경제력과 그들의 대부 행위였다. 돈이 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돈능 빌려 주게 함으로써 면죄부가 되도록 해 준 경우도 있었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실제적인 법적 차별은 없었으나, 관습과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서 유대인은 언제나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었다. 많은 박해 속에서, 유대인들은 힘들고 위험한 곳으로부터 새롭고 안전한 삶의 거처를 찾아 떠나야 했다. 이들은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 세계로, 기독교 세계에서 또다른 기도교 세계로, 서쪽으로부터 동부나 북부로 이주해 갔으며, 주로 도시로부터 소도시나 시골로, 유럽의 주요 국가로부터 변방의 국가로 이동하였다. 서부유럽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은 동부나 북부 유럽으로 이주해 나갔으며, 주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 등지로 옮겨 갔다. 특히, 스페인의 카톨릭 지도자들은 1391년부터 149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스페인 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모두 추방하였으며, 이들은 또다시 고향을 잃은 자들처럼 처참하게 쫓겨가야 했다. 추방된 유대인들은 주로 한 곳에 보다 큰 집단적인 정착을 실시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에게 있어서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정착 운동을 벌여 나갔다. 나아가, 이 식에 쫓겨난 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로의 복귀를 서둘렀다. 순례단과 함께 팔레스틴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들가운데 은행가나 상인들이 많이 있어서, 팔레스틴의 경제적 이익과 부합되어 이주가 용이하기도 하였다.
8.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
이신론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의 교육받은 계층은 계층은 유대인들의 그들의 종교나 신앙을 버리거나 변경하지 않고도 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통합의 길이 있다고 주장했다.돔은 『유대인의 시민혁명』에서, 유대인들의 동등한 시민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격려했다. 나아가, 그들의 예배의 자유, 회당을 열 수 있는 권리 및 하교에서 과학이나 예술에 종사하는 일도 허락하도록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훈련의 부족을 보충하는 것은 그들이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받은 후에 실시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기독교나 국가에 대한 증오심이 표출될 가능성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임을 경고하였다. 다라서, 그는 영향력 있는 정부 밑에서 새로운 교육을 통한 개량 방법이 창안,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였다. 유럽에 있던 유대교의 외적상태와 정신적 변화는 그들의 신앙과 사상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주었다. 즉, 계몽주의와 더불어 정통 유대교의 새로운 교육 제도와의 만남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바알 셈 토브와 하시딤 운동이 그예인데 이들의 가르침의 핵심은 열정, 백열 상태와 초월적인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들은 ‘초월’, ‘영원’, ‘위’등의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하시딤 운동은 메시아에 대한 대망 사상을 약화시키지는 않으나, 이를 현재적, 내제적 개념으로 해석했다.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한 시대의 유대인에 대한 나쁜 감정일 뿐인가? 아니면, 오랜 역사적 과정에서 발전된 하난의 체계적 개념이간? 이러한 질문은 반유대주의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질문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반유대주의가 하나의 실제로 이해되기에는 너무나 추상적이며, 조작된허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궤적인 양상을 나타난다는데 있다. 반유대주의는 구약시대의 이집트에서 그들을 괴롭혔던 파라오의 행동과, 수산궁 하만이 모르드개와 그의 백성을 향한 대학살의 음모, 마카비 전쟁으로 통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갈등, 원인이 불명료한 수없는 많은 미움과 박해 사건들이 성경안에도 기록되어 있다. 반유대주의는 종교적으로 유일신 사상을 원칙으로 다신교를 숭배하는 열국들과 종교적, 정치적 타협을 거부하는것, 독특한 종교관습으로 안식일을 지키며, 까다로운 음식법에 따라 살면서 결코 동화되지 않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성격은 지배계층인 유럽인들에게 항상 눈에 거슬리는 혐오감의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성격은 종종 ‘선민’이라는 용어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중세유럽 사회에서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속한 사회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유대인들기리만 모여 살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주변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살아 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물론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한 변명이 없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눈에 비친 유대인의 모습은 적어도 그러하였다. 기독교 세계에서 반유대주의는 예수를 박해한 유대인들 스스로 짊어지게된 ‘피값’이라는 의식이 팽배하게 지배하면서 얻어지게 되었다. 이는 기독교의 자기 동일성 확보를 위한 유대인 혹은 유대교에 대한 신학적 거부로서 설명된다. 따라서, 그들이 당한 모든 역사에서의 고통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이라는 신학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박해하는 일에 대한 도덕적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들의 신학적인 근거나. 근세현대에 오면서 이러한 여러 유형들의 반유대주의 사상들은 유대인들의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제한함으로써 보다 정치화되어 갔다. 특히, 유럽 사회에서의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비인간화에 대한 생물학적 인종 차별로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치적 반유대주의는 늘 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한 정치적 수단 또는 목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현대 반유대주의는 초기 반유대인 운동과는 구별된다. 초기의 반유대인 운동이 주로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 및 전통에 대한 이방 세계 혹은 기독교 세계의 증오로부터 시작되었다면, 현대의 그것은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온 이러한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의식이 정치적, 조직적 박해의 형태로 나타난다. 유대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반유대적인 감정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이념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드러나는 현상은 잠재 의식적 수준을 넘어서는 매우 정치적인 것에서 그 특징이 다르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유럽인들의 눈에 비친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신앙과 생활 방식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 반유대주의는 급기야 유대 정신의 파괴를 선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독일에서는 유대인의 인종적 열등함을 강조하면서 인종 차별주의자와 연합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대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의 역할이나 영향에 대해 투쟁하려는 목적을 가진 유럽인들의 조직 및 정치적 정당의 확산이라 특징지을 수 있다. 이는 유럽 사회가 지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유대 문제’를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9.현대이스라엘의 건설과 중동평화
‘시온주의’란 용어는 19세기 말 나단 번바움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는 1890년 4월 1일자 잡지에서, 시온주의를 ‘에레츠 이스라엘을 향한, 과도기에 설치한 민족적, 정치적 시온주의자 정당’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시온주의’를 정치적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그 후 시온주의의 아버지인 헤르츨은 『유대 국가』에서 이 개념을 재천명하였다. 현대 시온주의의 아버지인 헤르츨은 1860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1891년 10월, 파리에 있는 출판사에 고용된 그는, 정치, 문화 운동의 중심지인 그 곳에서 수년간 근무하였고, 그는 그 시대의 많은 새로운 정신을 배웠다. 1893년, 그는 교황의 알현을 신청하면서, 만일 교황이 반유대주의 추방을 위해 힘써 준다면 많은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겠다는 제안을 준비할 정도였다. 그는 이 일을 포기하고 큰 꿈을 꾸며 유토피아를 그려 보았다. 그는 당시 유대인 박애주의자였던 바론 히르시를 만나제휴를 건의 하고, 그는 36세가 되던 1896년 2월에 『유대 국가』를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과 함께 정치적 시온주의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의 이상적인 유대 국가 건설을 꿈꾸며 이미 실질적인 기본 구상을 하고 있다. 그의 시온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단연코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첫 과제는 지구 한 모퉁이에 우리의 상당한 요구를 충족시킬 만한 영토를 차지하여 국제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독립 국가로서의 주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도덕적이고 합법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운동일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이 오랫동안 열망해 오던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반유대주의라고 불리는 박해는 총체적 경험은 유대인들에게 유토피아의 꿈보다는 현실의 고통에서 이해되는 해방이 더 크고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재정도 없이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곧 유대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의 환상은 분명히 지극히 낙관주의이며, 계몽사상으로 믂여진 발전적인 이상 사회를 그리고 있다. 또, 그의 이러한 환상은 사회주의 운동의 중요성이 무시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꿈은 정확히 그의 예언대로 50년 만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그에 대한 모든 비판을 멈추게 한다. 영국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은 벨푸어 선언 직후에도 변화가 거의 없었다. 팔레스타인 내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앏어였으며, 공식 언어로 히브리어가 첨가 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로 여겨졌다. 또 팔레스틴에로의 이민은 여전히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1918년, 시온주의의 공식 대표가 팔레스틴에 도착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정착촌, 보건소, 교육 기관, 도로, 항만, 등이 세워지기 시작 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이전의 11개의 정착촌은 1918년 여름가지 모두 29개로 늘어 났다. 이제 팔레스틴은 에레츠 이스라엘로 불렀고, 청색과 흰색의 깃발, 공휴일로 안식일과 종교 절기가 정해지기도 하였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착지에 있는 젊은이들은 군사적인 힘을 갖추기로 하여 1918년 2월에 1100여 명의 지원자로 구성하고, 이집트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대규모 이민이 시작되면서, 전쟁당시 미국에 있었던 시온주의 지도자인 벤구리온과 벤츠비가 들어왔다. 벤구리온은 당시 ‘시온의 노동자들’과 ‘청년 노동’으로 나누어져 있던 노동 캠프를 하나로 연합하여 ‘노동 연합’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당시의 경제적 사정은 매우 어려웠으며, 영국 군정의 대표들과 시온주의 지도자들의 사이에 종종 충돌이 노출되기도 하였다. 특히, 아랍인들의 공격은 유대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밸프어 선언이 곧 국가 건설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유대 기구는 먼저 영국이 통제하는 팔레스틴 발전 기구를 만들어 개발한 후, 나중에 국가 연합이 관리하는 형태를 제안했고, 바이츠만은 영국이 영국인의 국가인 것처럼 팔레스틴에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보다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으로 이주해 와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팔레스틴은 영국이 위임 통치를 하는 형태로 최종 결정 되었다. 1920년 4월 산레모에서 열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화합에서, 영국이 오스만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아 통치하도록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유대인들에게 보다 유리한 결정 이었르나, 아랍 팔레스틴들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셈이었다. 영국 정부는 첫 팔레스틴 지방 장관으로, 친유대파 조지가 지명한 사무엘을 판견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그들의 국가 건설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진 셈이었다. 영국의 팔레스틴 위임 정부는 1920년 11월 2일에 공식적으로 일을 시작 하였다. 위임 정부는 ‘유대 인족 국가’건설을 위한 밸프어 선언을 수행하기 위해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방 장관인 사무엘은 이러한 일을 수행할 분명한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밸푸어 선언을 수행하는 것을 꺼려하며, 아랍인들의 요구를 들어 주도록 장려하는 군사 고문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팔레스틴에로의 이민을 사실상 방해하였으며, 영국의 기금에 도움을 청하는 대신, 시온주의 기구가 보다 많은 발전 기금을 확보하도록 요청하였다. 여러 정치 단체나 민족주의 기구들에 속한 아랍인들은 영국 정책과 유대인 이민에 반대하는 시위를 일으켰으며, 이러한 일은 영국 총독부의 군사 행정가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아랍인들은 예루살렘, 특히 구도시에서 많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으며, 이 일에 맞서 유대 젊은 자위 청년단들을 조직하여 싸우던 야보스키는 영국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15년간의 형을 받고 복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921년 여름, 사무엘은 활동 보고서에서, 아랍인들의 관심과 유대인들의 민족적 야망이 연합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팔레스틴에 이룩하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야망은 현재의 거주자들의 권리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여기서 말하는 ‘거주자의 권리’란, 유대 국가 건설을 반대하는 모든 아랍인의 권리를 말한다. 이 정책이 나오면서 전 아랍인들의 반대 투쟁은 더욱 격렬해져 갔다. 이 결정은 예루살렘에서 아랍 민족주의를 이끌어 오면 후세이니를 더욱 자극 하는 셈이 되었다. 이들의 투쟁 목표는 첫째, 아랍 민족 독립을 위한 열망, 둘째, 유대 국가 건설에 대한 증오와 우려였다. 아랍 지도자들은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당을 매매하는 일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이 처럼 시온주의자들과 영국 정부 사이의 긴장은 국가 건설을 위한 과정에 중대한 장애를 가져왔으며, 이에 대한 시온주의자들의 정책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영국 정부로 하여금 팔레스틴에 두 민족의 생존권 보존을 위한 계획을 갖도록 해 중다. 즉, 지중해안, 갈릴리, 이스라엘 골짜기, 예루살렘, 베들레헴, 욥바를 포함한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에브라임 산지, 유대 산지 및 네게브 지역에 아랍 국가를 건설하는 계획이 세워진다. 이 계획이 세워지면서 영국 정부는 아랍 국가 건설로 예정되 지역의 땅을 유대인에게 매매하는 일을 금지시켰으며, 1938년 3월에는 유대인 이민을 연 8000명으로 제한하기로 결정하였다. 유대 시온주의자들은 영국 정부의 이러한 제안을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서 ‘아랍의 유대인으로 남는 것’이 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10.유대인 대학살.
1929년의 세계는 대공황이라는 바람에 휩사였다. 1933년 1월 30일, 정부를 이양받아 독일 수상이 된 이틀러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반대자들을 모조리 숙청하였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계획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20세기의 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한 마디로, 독일 내의 유대인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었다. 즉, 이들의 스로건은 ‘유대인을 처단하자’는 것이었다. 나치 정부는 유대인 지도자, 법률사 등을 체포하였으며, 유대인이 저술한 책을 불살랐고, 유대인의 상점과 공공 건물에 방화를 하였다. 1935년 6월에 독일 의학 협회에서는 의학 잡지에 『유대인과 결핵균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유대인을 숨겨 주는 모든 이들에게 결핵 감염의 위험성을 경고하기까지 했다. 1939년 11월과 12월에는 모든 유대인들은 도시의 특정 구역인 게토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첫 게토는 1940년 2월 로지에 세워졌으며, 1940년 11월 바르샤바 게토가 세워졌다. 1941년 10월에는 게토 밖에서 발견된 유대인은 모두 사형에 처해질 것을 선언하였다. 게토에서의 통치 독일에게 있어서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우선 유대인들을 감독하고, 앞으로 멸종시키기 위해 한곳으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얼마 동안 경제적 착취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대규모의 게토에서 군사 물자를 만들기도 하였고, 작은 곳에서는 도로 건설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이 제공되었을 뿐, 인간적인 삶의 모습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1940년, 폴란드에 설치된 여러 게토에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 활동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며, 예배와 교육 등 종교 행위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음악과 연극 활동을 하였고, 카페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얼마간의 활동마저 1941년 중반에 와서는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게토 안에서의 기아와 질병, 전염병의 만연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갔으며, 생존을 위한 초인적인 노력도 허사가 되었다.
11.현대 이스라엘 독립과 그 과정.
제 2 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팔레스타인의 모든 유대인들은 밴구리온이 제 21 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제안한, “히틀러와 싸우자”는 연설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히트러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유대 군사력을 위한 조직을 제안하였으며, 또 전쟁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으나, 영국 정부는 이들이 팔레스틴에 남아 줄 것을 엄격히 요구하였다. 1942년 4월, 바이츠만은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의 빌트모아에서 가진 유대 지도자들과의 화합에서, ‘시온주의 운동의 정치적 활동’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이를 후에 ‘빌트모아 계획’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선언의 내용은 ①팔레스틴으로 향한 대규모의 유대인 이민의 문을 열것. ②이민을 포함한 국가 발전을 위한 모든 관련 업무를 유대기구로 통합할 것. ③팔레스틴에 유대 독립 국가 설립을 요구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빌트모아 계획서는 1942년 11월 ,시온주의 대표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영국 처칠의 연립 내각은 유대 국가 건설을 지원 할 것과 팔레스타인에서 다수의 유대인이 정착하는 문제에 지지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1945년 7월 노동당이 재집권하였으나, 여전히 이민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대 기구는 즉각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 설립을 요청하였으나, 외무 장관 베빈은 그 해 11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를 위한 영국의 이중 의무’를 거듭 천명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선언은 팔레스타인이 유대인 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님을 의하고 있으며, 유대인 난민들에게 유럽에서 다시 재건설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츠만은 10월, 런던에 건너가 베빈 장관을 냉대 속에 만나 이 문제를 논의 했으나, 그는 정부의 이같은 백서는 유효하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한편, 베빈 장관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토의할 영미 심의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여, 1946년 1월 7일에 워싱턴에서 영국과 미국의 동수(同數) 위원회가 설치 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유대인들의 토지 거래 금지법을 무효화시켰으며, 영국의 위임 통치권을 UN이 인수하는 것도 제안하였다. 이로부터 차차 대 독립을 위한 진보가 이룩되기 시작하였다.1946년 4월, 두 척의 배가 불법 이민자를 싣고 이탈리아의 항구 라스페치아를 떠나려고 하자, 영국은 압력을 가하여 이 배를 억류하였다. 그 배 안에 있던 전 유대인들은 석방될 때까지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 사건이 유대인의 승리로 끝나자 더 많은 이민자가 이주를 희망하였으나, 영국은 계속하여 이민을 방해하고 금하였다. 또 불법 입국자를 잡아 텔아비브에 수감하였다. 1945년부터 독립할 때까지 약 7,000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불법으로 이민해 왔으며, 이들가운데 약 5000명은 체포되어 사이프러스 섬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이들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 올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UN이 관할해야 한다는, UN이 제안한 위임 토치권에 관한 안이 영국에 의해 거부되자,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이 수립되었다. ‘모리스-그래디 안’이라 불리는 이 계획서에 의하면, 팔레스타인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유대인(17%), 아랍인(40%), 그리고 두 영국 지역으로 분할한다는 것이다. 또, 영토 전체의 관할은 영국이 담당하고, 유대 및 아랍지역은 자치로하는 안(案)이었다. 같은 해 5월에 시작된 안보 이사회에서 소련의 대표 그로미코는 ‘자기 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들의 정신을 지지한다.“고 발언하였다. 여기서 이사회는 UNSCOP를 발족하여 11개 국가를 선출 하였다. 급기야 1947년 11월 29일, UN안보 이사회는 팔레스타인을 두 국가로 분할하여 독립시킨다는 역사적인 결정을 33:13으로 가결하였다. 영국은 1948년 2월 1일에는 유대인 이민을 항구를 열고, 같은 해 8월 1일에 모든 군대를 철수시켰다. UN안보리가 열리는 동안, 아랍인들은 분할 계획을 전면 반대하고 나섰다. UN안보리의 결정 직후부터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자동차와 건물에 공격을 시작하였고, 주변 아랍 국가에서 소위 ‘해방군’에 들어와 이를 지원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묵과하였다. 유대인들도 이에 맞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마을 입구 초소를 경비를 강화하였다. 1948년 3월, 아랍인들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면서 예루살렘과 네게브, 서부 갈릴리의 통로가 차단되었다. 이 때까지 약 1,200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하고, 체코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선적하여 싣고 들어왔다. 이 무기를 사용하여 4월 초‘나흐숀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길을 다시 열였다. 그러는 동안 키브츠 미시마르 히멕은 아랍 ‘해방군’들에 의해 공격당했다. 1948년 4월 중순과 5월 중순 사이에 ‘하가나’는 하이파, 티베리아, 사팟 등을 정복하고, 5월 13일에는 텔아비브 위성도시인 욥바를 점령하였다. 예루살렘에서는 4월 13일에 스코프 산으로 가는 의사와 간호사가 탄 버스가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가다가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아 전원 살해된 사고가 발생했다. UN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전쟁을 막는데 성공하지 못하자, 1948년 4월 16일, 안보 이사회를 소집하여 이 상황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 이 때, UN은 UN의 결정을 곧 수행할 것을 토의하였으나, 영국이 UN 대표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나서는 바람에 아무런 새로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폐회되었다. 1948년 5월 14일 오후 4시, 텔아비브 박물관에서 ‘하티크바’라는 제목의 국가가 불려진 후, 벤구리온이 독립 헌장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이 선언은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건국의 지도자들이 알파벳 순서대로 서명 하였다. 이스라엘 국가의 정부는 임시 국민 의회에 의해 곧 비준되었다. 독립 선언 직후 미국과 소련 정부로부터 이스라엘 국가는 사실상 인정되었다. 그날 자정 1 시간 남겨 둔 시간에 영국 식민지 대표는 하이파 항을 떠났고, 다음 일요일에는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으로 하임 바이츠만이 선출되었다. 아랍군의 공격으로 전쟁은 발발하고 이러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UN은 중재자로 스웨덴 사람인 버나도트를 파견하여 휴전을 제안 하였다. 그는 1947년 11월 29일 UN의 결의를 지켜 줄 것을 이스라엘에 요구하였다. 이 안은 얼마 후 아랍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아랍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침략하였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에 더 많은 영토를 내주게 되었다. 휴전이 끝나던 7월 9일부터 10일 동안에 이스라엘은 나사렛을 점령했고, 갈릴리와 룻다와 람레를 점령 하였다. 결론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의 꿈인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은 시온주의 창시 자인 헤르츨의 예언대로 50년 만에 세워졌다. 이렇게 하여 한 예언가의 꿈은 이룩되었으며, 유럽에서의 수없는 박해와 대량 학살 가운데서도 살아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땅과 주권을 가진 새로운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국가 건설의 꿈은 많은 이들의 피흘림의 결과였으며, 아직도 산적해 있는 많은 과제들을 두고 있는 이스라엘은 어떠한 미래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12.이스라엘의 정책과 중동 전쟁.
신생 이스라엘을 지탱해 주고 있는 두 요소가 있다면, 첫째가 대량 이민이고, 둘째가 아랍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전이다. 전자가 이스라엘의 성격을 ‘다원 사회’로 규정하는 요소라면, 후자는 이스라엘의 ‘안보 의식’을 보다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이스라엘은 약 100여개 국가로부터 이민해 온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은 각각 역사적, 종교적, 정서적 뿌리는 함께 하고 있지만, 언어와 삶의 양식 및 습관은 달리하고 있는 공동체이다. 새 이민자들은 대체로 ‘아슈케나잠’과 ‘세파르딤’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 지금가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아랍 국가로부터의 끊임 없는 도전과 생존의 위협 속에서, 이들은 개인의 생존권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생존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관심은 ‘공동체의 생존과 통합’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흩어짐’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다시 ‘모음’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신학적 사상이 구약 시대부터 있었다. 이 사상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이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2000년 동안의 디아스포라의 삶이 히틀러의 대량학살로 끝나면서 더욱 간절한 희망으로 부각되었다. 그들의 꿈인 ‘팔레스타인에로의 자유로운 귀향’이 보장되면서 이 일은 계속 수행되었으며, 이스라엘 정부는 1950년에 제정된 ‘귀향법’이 여전히 발효 중이고, ‘이민부’를 두어 이 일을 전담하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이민 정책은 다산 정책과 함게 인구 증가의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최근 소련 몰락 이후 약 400,000명의 새 이민자와 이디오피아 등에서 대량 이민을 추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1951년 봄에 시리아와의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으며, 산발적인 공격을 해 왔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격퇴하였다. 1956년 7월 26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아스왈 댐 건설로 인한 재정 확보를 명목으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이 운하를 봉쇄하여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을 통제하는 한편, 이스라엘 상선을 강제로 나포하기도 하였다. 계속되는 이집트와 산발적인 충돌은 1956년 10월 29일, 시나이 캠페인으로 번져 제 2 차 중동 전쟁이 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100시간 만에 공수 부대와 탱크를 앞세우고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에 이르렀다. 많은 무기와 6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당시의 국방상은 벤구리온이었고 참모 총장은 샤론이었다. 11월 3일, UN안보리는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하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하여, 영국 및 프랑스 연합군을 파견하여 이집트를 공격, 11월 7일에 휴전을 성립시켰다. 소련과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점령지 반환을 위해 압력을 가했으며, 기름 공급 협정을 취소하였다. 이스라엘은 1957년 11월 7일,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와 협정하여 시나이 반도를 포함한 가자 지구를 이집트에 되돌려 주었다. 이스라엘은 독립 후, 1949년 5월 11일 UN 총회에서 UN회원국이 되었다. 1949년 12월 9일, 카톨릭과 아랍이 주측을 이루어 예루살렘을 국제 도시화하자는 새로운 제안이 나왔으나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하고 수도로 재확인 하자, 많은 나라가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등 압력을 가해 왔다. 또, 가장 어려운 문제는 블록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변 아랍 국가에게 많은 무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나라는 영국이었다. 1950년 5월, 이스라엘은 소위 중동 국가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국경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강대국들의 무기 공급에 반대하는 선언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3국 선언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강대국들과 외교적 관게를 정상화시켜 나갔다. 냉전 체제에서 중국과 미국, 소련, 동부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대사급 외교 관계의 길을 열어 놓았다. 1961년, 아랍 연합 공화국이해산된 후 시리아는 계속적으로 국경분재을 일으켜 오다가, 1963년 이스라엘이 추진하고 있던 물 공급 계획을 거부하고 나섰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시리아는 여러 차례 산발적인 공격을 이스라엘의 갈릴리 지역에 해 왔다. 1967년 4월 7일, 이스라엘은 기습으로 시리아의 수도 마다스쿠스를 공격하여 시리아가 보유하고 있던 미그 6대를 파괴하였다. 소련은 즉각 이집트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며, 5월 14일, 이집트의 참모 총장 무하마드 파우지가 다마스쿠스르르방문하고 돌아왔다. 5월 15일, 이집트의 2개 보병 사단이 시나이 배치되었고, 시나이 반도에 주둔학 UN군에게 이스라엘의 국경 지대에서 물러나 줄 것을 명령하였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만이 무기 원조를 위해 협력했다. 미국은 외교적 해결을 요구하는 입장이었고, 이러한 외교적 노력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랍국가들은 차차 군사적 압력을 가해 왔다. 1967년 6월 5일 새벽 7시 46분, 이스라엘 전투기는 이집트 국경을 기습적으로 넘어 카이로 공군 기지에 배치, 출동 준비가 완료된 수백 대의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및 이라크 전투기를 요격했다. 이로써 제 3차 중동 전쟁은 시작되었다. 지상전 역시 시나이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싸워 나갔으며, 기갑 부대의 활동이 눈부셨다. 이집트나 시리아의 신예 소련제 탱크에 비해 이스라엘의 탱크는 열등하였으나 군사들은 월등히 앞서 싸웠다. 이집트에 전투는 3일 만에 수에즈 운하 및 가자에 이르는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전쟁이 발발 되자, 이스라엘의 수상 에시콜은 UN을 통하여 요르단에게 평화적 유지를 제의했으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이를 거절하고 예루살렘 유대인 지역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맞선 이스라엘은 6월 7일, 예루살렘의 구도시를 탈환하고, 그 다음 날에는 요단강까지 점령 하였다. 전쟁의 숭리는 이스라엘 군대의 기동성과 현대적인 군사 작전의 결과이며, 또 아랍 군대의 약함 때문으로 요약된다. 나세르가 6월 9일에 사임을 전격 발표하자 수많은 지지 군중들의 데모가있었으며, 결국 사임 발표를 취소하는 정치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아랍 국가의 군사적, 정치적 실폐가 패배를 자초한 셈이다. UN은 1967년 11월 안보리에서 UN 결의 242조를 통하여 중재를 시도하였다. 이 결정은 “이스라엘은 6일 전쟁 이전의 군사 분계선으로 철수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철수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이집트의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아랍 국가들에게 ‘이스라엘의 아랍 점령 반환’을 선동하며 압력을 가하였다. 이집트와 시리아느 전쟁 패배로 당한 그들의 정치적 궁지를 어떻게든 빠져 나와야 했다. 드디어 1973년 10월 6일, 대속죄일에 기습적인 이스라엘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제 4 차 중동 전쟁이었다. 24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이들의 전력의 절반을 파괴하였고, 다음 날에는 기선을 제압하고 공격을 하여 밀어붙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수상은 골다 메이어였으며, 국방상은 모세 다얀 이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아랍국들은 더 이상 무력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음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집트와 요르단은 1973년 12월 21일에 열린 제네바 회담에 참석하였으며, UN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비무장 지대에 1250명의 UN감시군을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3․4차 중동 전쟁을 통해 외교적 손해를 많이 입게 되었다. 그 동안 관계를 맺어 온 많은 나라들과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1948년에 선포된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에서는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에 의해 직시된 자유, 정의, 평화에 기초한다. 모든 국민은 종교, 인종, 성에 의한 차별을 받지 않으며, 사회적, 정치적 동등권을 가진다. 종교, 양심, 언어, 교육, 문화의 자유를 보장하며, 모든 지역의 성지를 보장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의회 민주주의 제도를 기초로 하는 입법.행정.사법부가 있다. 삼권의 분립을 기초로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지향하도록 되어 있다. 행정부는 입법 부인 크네세트의 신임에 의해 설치되며, 사법부는 법률에 의해 독립성을 보장받았다. 120명의 크네세트 의원은 매 4년마다 실시되는 비밀, 비례제에 의한 총선거에서 선출되며, 국민은 정당에 투표한다. 투표 결과 과반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행정부 구성의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종교 정당을 비롯한 각 이념과 계층을 대변하는 수십 개의 정당들이 군림하며, 다수당인 노동당과 보수당인 리쿠드가 정권을 교환해 가며 상호 견제와 경쟁을 통하여 정치 발전을 꾀하고 있다. 의회가 선출하는 임기는 5년의 대통령은 국가의 상징이며, 정당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히브리어의 ‘나시’는 고대 이스라엘의 최고 의회였던 산헤드린의 수반을 일컽는 용어였다. 대통령은 법관, 이스라엘 은행장 및 외교관의 임명을 당당하면서,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고, 2회에 걸쳐 연임 될 수 있다. 내각의 수반인 수상은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며, 25명의 각료를 임명하는등 의회 정치의모든 책임을 지고 있다. 수상과 국회 의원들의 임기는 4년이다. 법원은 독립되어 있으며, 9명으로 구성된 대법원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이 밖에도 종교법원이 있다. 종교적인 사안이 되는 유대인의 결혼, 이혼 및 개종에 관한 재판을 시행한다. 이스라엘은 불문율을 기초하고 있으며, 1950년에 제정된 귀향법등의 특별법이 있다. 이스라엘은 지방 자치 제도가 잘 발달되어 있으며, 48개의 시의회와 143개의 지방 의회가 있으며, 53개의 지역 의회가 있다. 시장과 지역 의회 단체장은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되며, 읍과 지방 의회 의원은 크네세트의 국회 의원의 수에 비레하여 임명한다. 이스라엘은 1993년 1인당 GNP는 약 13,000 달러로 세계 20대 선진 국가에 해당된다. 5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각은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 총생산은 그리 많은 편이 못 되며, 국가 보안이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농업을 비록한 첨단 과학 기술은 국제 무대에서 그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지난 25년간 이스라엘은 연 10% 정도의 높은 경제 성장율을 보여 주었다. 이는 네 차례의 전쟁, 대규모의 이민 등 내외적 변화 속에서 이룩한 성과라는 점에서 ‘경제 기적’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1984년을 비롯한 몇해 동안의 높은 인플레이션은 이스라엘 경제를 위축시키기도 하였다. 외채도 1991년 말 약 240억 달러 가량이나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경제는 부족한 천연 자원과 제한된 경작지, 보잘것 없는 내수등의 악조건 때문에 일찍부터 고급 노동력과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하는 산업의 수출에 읜하고 있다. 특히 E․C 공동체에 판매하고 있는 많은 농산물은 외화 획득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나아가 무기 산업을 비롯한 첨단 과학 기술, 의료 정밀 기계, 통신 과학, 정밀 화학, 컴퓨터, 다이아몬드 산업 관광 산업 및 사해 생산물 등 비교적 부가가치 높은 산업에 주력을 하고 있다. 국내적으로 선진국형으로 잘 발달된 사회보장제도는 기본 임금제, 노동 시간 및 세제등을 통하여 소득의 균형을 이루고 있어, 매우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유대인은 단일 민족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수천 년 동안 흩어져 산 민족답게 그들은 세계 약 130여개 국가로부터 이민을 온 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만도 현재 약 80여개나 된다. 이들은 각각 다른 전통과 문화, 가각 다른 정치 이념과 언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국가를 건설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동서 유럽, 아메리카 및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이민을 온 자들을 아슈케나짐이라 부르며, 이들은 재부분 고대 히브리어와 독일어를 혼합하여 만든 『이디싱 어』라고 불리는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나치 독일로부터의 박해를 건너온 생존자들이다. 현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가운데 대부분은 바로 아쉬케나짐이며, 정치, 교육을 비롯한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스페인과 포루트칼을 비롯하여 지중해, 중동 및 아프리카 지역에서 살다가 15세기에 추방되어 이스라엘로 이민을 와사는 자들은 세파르딤이라고부른다. 이들은 이슬람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자들로서, 음악, 의복, 음식 등 전통적인 유대 문화와 더불어 아랍 문화와 전통의 영향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다. 독립 이후 이민자들과 구별하여 본토에서 태어난 인구가 차차 증가하는데, 이들을 가리켜 히브리 『어로 사브라』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본디 ‘차바로’라 불리는 선인장을 일컫는 말로, 겉에서는 가시가 돋아 접근이 어려우나 속은 달콤한 맛을 지닌 선인장의 특성이 곧 사브라의 특징이라는 상징을 담고 있다. 나아가, 이스라엘 영토 내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아랍인들은 소수 부족인 드루즈족이나 베두인족들과 함께 소수 민족으로 취급되고 있다. 현재 이스라엘의 인구는 약 500만 명으로, 이 가운데는 유대인 410만 명, 비유대인 100만 명이며, 점령 지역 내의 아랍-팔레스타인은 약 150만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의 90%는 도시에 집중되어 있으며, 최근 많은 이민자들로 인해 인구는 게속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인구 54만 명의 수도 예루사렘을 비롯하여 텔아비브, 하이파, 브엘세바,페타크티크바 등은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들이다. 전체 인구의 약 10% 가량은 시골 지역에 살고 있는데, 주로 키브츠나 모샤브를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나 차차 산업의 구조를 바꾸어 나가면서 매우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어, 도시 거주자들보다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 400여 년의 문화 유산을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은 다양한 전통 문화와 더불어 현대 문화의 특성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전통적인 종교 문화는 이스라엘의 보수적인 종교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잘 보존되어 있으며, 동시에 매우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현대인들의 새로운 문화 창출 또한 첨단을 이루고 있어, 두 문화의 보존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종교 절기를 통한 전통 문화의 유지 및 보존은 여러 민속 공연 행사를 통하여 전수되고 있으며, 이스라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비롯한 8개의 오케스트라는 수준 높은 고전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현대 히브리어의 부활은 이스라엘의 각 분야의 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들의 문학적 주제는 그들의 특수한 고난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유대인의 자기 정체성과 신앙, 그리고 유대인의 관습 및 고통 등을 보편화시켜 나감으로써, 일류의 일반적 공감대를 얻어 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이스라엘의 80여 개의 각 분야의 박물관은 년 1000만 명의 관람객을 가지고 있으며,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의 사해 사본은 그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은 국보이다. 또, 텔아비브 대학 내의 디아스포라 박물관 역시 2000년 동안의 디아스포라의 삶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역사 연구에 큰 몫을 한다.
그 밖에도 음악, 연극, 영화, 미술 , 조각, 춤 등 다양한 창작 및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매년 실시되는 이스랑엘 대축제는 세계의 여러 나라의 예술을 접하며, 자신들의 예술 활동의 향상을 도모하는 축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스라엘 사회는 다양한 언어와 이념만큼이나 종교적 특성도 다양하다. 성경 시대 이래 유대인들은 유일신 신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유대교라 함은 곧 종교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민족적인 개념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경의 기본 규범인 『토라』와 이를 제도화한 할라카를 중심으로 매우 엄격한 규율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특히 정통파 유대인들은 유대교의 오랜 전통을 가장 엄격하게 게승한 자들로서, 안식을 비롯한 각종 절기 등을 일상 생활에서 엄격하게 지켜나가고 있다. 이들은 복장이나 외모로부터 일반 유대인들과 구별되고 있으며, 늘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다니고, 결혼한 부인들의 경우 머리를 삭발한다. 이들의 자녀들조차 종교인 학교에서 공부하며, 일상적인 교과목 든 배제한 채 오직 율법과 미쉬나, 탈무드만을 교육받고 있다. 이들은 국방, 납세의 의무로부터도 제외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비종교적인 현대인들로서,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과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서 산다. 이들은 세속적인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이방인들과 거의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에 익숙해져 있으며, 서구적인 생활방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다. 아들은 정통파 유대인들과의 갈등이 많으며, 경우에 따라서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여 종종 상호간의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정통파 유대인들과 세속적인 유대인 사이의 종교적 습관을 지닌 사람으로서 전통적인 유대인이있다. 이들은 지나치게 종교적이지 않으면서도 세속적이지 않은 사람들로서 일상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밖에 소수의 기독교인, 아랍 회교도, 사마리아 등 소수 종교 및 종파의 사람들이 분포되어 잇다. 이스라엘 전체 인구를 종교별로 보면, 유대교(82%), 회교(14%), 기독교(2%), 그리고 기타(1%) 정도이다. 그야말로 이스라엘은 종교의 전시장이라 일컬어질 만큼 다양한 종교와 종파를 이루고 있다. 유대교의 회당은 안식일에, 기독교의 교회와 성당에서는 일요일에, 그리고 회교의 사원에서는 금요일에 각각 예배를 드리고 있다. 시온주의의 목표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독립이었다.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여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하여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의 고유한 인도적 권리에 속한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독립은 시온주의의 완성인가/ 이스라엘 독립 이후의 시온주의의 의미는 무엇인가/ 시온주의 운동은 끝났는가? 1968년, 에루살렘에서 열린 제 27 차 시온주의 총회에서는 시온주의의 프로그램으로 다음과 같은 5개 항을 결의 하였다. ①유대 민족을 통합하고, 이스라엘을 유대인의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 ②흩어진 모든 나라들로부터 유대인을 역사적인 조국으로 불러모은다. ③유대 국가를 예언자들의 최고의 가치였던 정의와 평화 위에 굳게 세워 나간다. ④모든 유대인에게 히브리어, 유대 문화, 유대 정신을 교육시킴으로써, 유대 민족의 자기 동일성과 특성을 보존해 나간다. ⑤유대인의 권리를 보호한다.
이와 같은 결의를 보면 시온주의 운동의 미래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의 독립이 시온주의의 끝이 아니라, 이 운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상을 제시함으로써 영속적인 변형 또는 재정립 되어 가고 있슴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결의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시온주의 운동의 방향을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구심화와 흩어진 유대인의 모음이다. 첫재 요소인 ‘이스라엘의 구심화’는 이스라엘 모든 유대인의 구심점으로 삼는 다는 것이다. 유대인과 유대교의 운명을 이스라엘의 운명으로 일치시켜 보자는 것이다. 더 이상 이스라엘 없는 유대인은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모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여겨야 하며,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의 문화, 종교, 교육, 학문 등의 모든 분야에 걸쳐 중심적 위치에 두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시온주의를 유대인의 생활 속에 재통합하자는 의도의 해석이다. 두번재 요소인, ‘모음’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모여야 한다는 것으로, 디아스포라 속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단지 ‘시온을 사랑하는 자’일뿐 시온주의자는 아니라는 논리이다. 그러나 위의입장에 대해 거부하는 ‘이상 공동체’는,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각각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유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이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게 되는 역사적 근거로 ①이스라엘 안보, ②창조적인 활동력을 제시한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이스라엘의 안보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것과, 나아가 이스라엘에 문화적, 종교적 활력을 넣을 수 있는 점을 들어 이스라엘의 이민을 거부한다.
디아스포라의 삶이 이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과 마찬가지의 동등한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며, 이것이 곧 다원 문화 환경에 알맞는 주장이라고 설득한다. 그러면 이스라엘과 디아스포라의 균형 있는 발전을 괴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온주의의 완성은 바로 이 두 공동체가 상호 보완할 때 이룩되는 것이다. 이 두 관계는 경쟁적 관계나 택일의 관계라기보다는 상호 보완적이어야 할 것이다. 시온주의의 위기는 오히려 외부적 도전에 의해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내적 갈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임을 재삼 고려해야 할 것이다.
13.중동 평화
국제 문제가 복잡하지 않은 것이 없겠느나, 으뜸 가는 것이 있다면 단연코 중동 문제일 것이다.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라고도 불릴 만큼 그 분쟁의 역사나 정도가 깊고 크다. 20세기 후반에도 이 지역에서는 여섯 차례 이상의 큰 국제 전쟁이 일어났다. 최근에 일어난 걸프 전쟁도 이에 속한다. 이 지역에서의 분쟁은 다른 지역의 분쟁과 그 역사와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실질적인 분쟁의 원인은 영토 분쟁임에 틀림이 없으나, 지정학적으로 이 지역은 3개 대륙의 교량으로서 고대로부터 주도권 쟁탈의 사움터였다. 떠, 세계 3 대 유일신 종교가 시작된 곳으로서, 그들 간의 깊은 신앙적 차이와 더불어 역사의 골도 상당히 깊다. 성도 에루살렘의 경우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또, 이들은 본디 유목 민족들로서, 이들이 형성해 온 문화와 오랜 전통 가운데 ‘피의 복수법’이 널리 행해 지는 이유로 인하여, 서로 간에 그칠 줄 모르는 보복과 재보복이 되풀이되어 오고 있다. 현대 사회는 지구 모퉁이의 한 분쟁이 그 지역에만 영향을 기치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현상이다. 따라서, 세계는 한 가족으로서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위하여 서로 간의 이해와 폭넓은 관심이 요청된다. 1969년 2월, PLO가 창설되면서 의장에 아라파트가 취임하였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랍-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은 6일 전쟁 이후 요르단 영내에 거주하면서 게릴라 활동을 해 왔는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요르단에 자주 침입, 격전이 지속되자,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1970년 9월 17일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다.이에 반발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검은 9월단’은 요르단의 타르 수상을 카이로에서 암살하였다. 또, 1972년 5월 30일, 팔레스타인 게릴라는 일본 적군파를 시켜 텔아비브 공항을 공격하여 승객 다수를 사상하게 하였다.이를 계기로 요르단은 1972년 팔레스타인의 본부를 요르단에서 추방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요르단 주변 아랍국가들로부터 심각한 비난을 받으며 아랍 연맹에서 축출당하였다. 그 해 9월 5일,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촌을 급습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자, 이스라엘 선수들은 즉시 귀국하였다. 이어 ‘검은 9월단’은 미국 낙슨 대통령과 이스라엘 골다 메이어 수상의 회담에 반대하여, 1973년 3월 1일에 수단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해서 미국 대사를 포함한 3명의 외교관을 살해했다. 요르단에서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긴 PLO는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계속적인 테러를 자행해 오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수시로 레바논의 PLO 본부를 공격하여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그 후 PLO는 아프리카의 튀니지로 그 본부를 옮겼다. 한편, 1987년 12월에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인티파다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어린이와 부녀자를 앞세워 반이스라엘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 나왔고, 이를 진압하기 위한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은 아랍-팔레스타인들에게 발포하여, 현재까지 약 1,000여 명이 사살되고, 20,0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15,000여 명이 감금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박해가 세계에 알려지고,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국제 여론이 일자, 1988년 ‘팔레스타인 민족 평의회’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선언하고 아라파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다음 해 제네바에서 열린 UN 총회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회원국 절대 다수의 지지를 얻어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독립 국가’로 인정되어, 몇몇 국가에 대사관을 상설하고 ‘영토와 주권 없는 나라’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최소한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을 회복하여 자치 정부 혹은 독립 국가를 이루는 것이 당면한 과제이다
14.현대 아랍 무제의 근본적 원인과 전망.
1946년, 유대 철학자 마틴 부버는, 시온주의자들의 정책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과 지역 협정에 그 기초를 두지 않고 국제 협정에 의해 ‘정복’할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는 해석을 받게 된다면, 시온주의에 대한 아랍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할 뿐 아니라, 아랍인측으로 보았을 경우 유대인과 아랍인 양 민족의 상호 이해를 위한 모든 노력은 의심을 받게 되어, 아랍인은 이러한 노력이 진정한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고들 상상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한 유다 마그네스도 말한다. “유대 국가의 실현이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력에 의하는 것 외에는 불가능하다.... 아랍인들에게 유대 국가 소리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유대 국가는 그 정의에 있어서, 유대인이 그 유대 국가 내에 거주하는 타 민족을 통치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야보틴스키 역시 이전부터 이러한 분쟁의 가능성을 에견하였다. “자국을 스스로 내놓을 국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도 그렇지. 힘으로 강점당하지 않는 한 주권을 포기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결국 시온주의자들로부터 파문당하여 추방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처음부터 시온주의자들의 독립 정책은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배태하고 있었으며, 그 책임 역시 그들에게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47년 11월의 UN결정은 결정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영구 분쟁의 불씨를 낳고 말았다. 이들 열강들은 영국의 밸푸어 선언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비유대인들의 권리와 지위가 손상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입장이었고, 도 루스벨트나 트루먼 대통령도 “아랍과 유대, 두 민족에게 충분히 자문을 얻은 다음이 아니면 팔레스타인에 관한 어떤 결정도 내맂 않을 것이며, 도 아랍측 이익에 반대되는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겠다.” 확약하였던 바가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 양자 간의 이해의 차이를 줄일 만한 어더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두 민족 간의 상호 불신과 테러는 상황의 개선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PLO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이스라엘을 보는 기본 입장은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갈등의 본질은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의 두 이데올로기가 대립하고 있는 것이지, 두 인종이 대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반유대주의 정책의 희생자들인 난민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느냐 아니면 ‘영원한 유대 민족 국가의 부활’로 보느냐에 따라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질 것을 나타낸다. 왜냐 하면,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이나 다른 제국들의 자본가들과 전혀 무관 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들의 이상을 위해 이들과 부분적으로 결탁하였음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결코 그들의 조종을 받은 자들로 규정될 수는 없다. 그들은 이런 자기들의 오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귀향’이라는 굼과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비어 있는 땅’을 찾아온 것이며, 그 곳은 그 시대에 영국의 식민지였을 뿐이다. 문제는 1897년, 헤르츨이 선언한 “팔레스타인에 공법으로 보장되는 유대 민족을 위한 고향을 세운다.”는 입장이 , 1917년 밸프어 선언의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다.”는 선언과 상호 대립된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엑 있어서 이스라엘의 독립은 약 2,000여 년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씻는 명예 회복이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방랑과 수난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이다. 국가 없던 이스라엘의 흩어진 백성들의 생존권이 보호되어야 하듯이, 역시 팔레스타인에 나라 없이 살던 원주민들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그들도 인간이며,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가정과 국가를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1961년 1월,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에서 개최된 공개 토론회에서 행한 역사가 토인비의 견해는 옳다. “1947년, 유대인이 아랍인에 대해 취한 태도는, 나치스에 의한 600만 명의 유대인 대학살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일은 예전에는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일이다. 1991년 1월 15일 자정을 기해 시작된 걸프 전쟁은 중동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 주었다. 먼저, 걸프 전쟁은 중동의 아랍 국가들의 분열을 가져다 주었다. 이라크의 침략에 대한 입장이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양분되었으며, 특히 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아랍 제국의 군사력은 전후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축으로 바뀌었으며, 아랍 연맹의 방향이 각 아랍 국가의 국제적 이해 관계에 따라 분열된 셈이다. 특히, 시리아의 국제적 지위, 전후 미국과의관계 변화를 대단히 중요한 중동의 변화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걸프전 당시 PLO의 아라파트 의장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면서 심각한 재정난과 정치적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판단은 팔레스타인의 전적인 지지를 얻어 왔던 아라파트의 정치력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에 소련에 붕괴로 말미암아 민족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실상 설득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지위가 변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중동에서의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동 진출의 교두보로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걸프전으로 말미암아 다중 외교를 선택한 미국은 이스라엘의 국내 문제와 관련하여 외교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스라엘이 걸프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이스라엘로 건너온 이민자들의 정착을 위해 지원하기로 한 300억 달러의 지급을 이스라엘 내의 아랍 팔레스타인의 법적 지위 문제를 지적하면서 중단한 사실이다. 여기에 또, 전쟁 참가 당사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로 날아든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은 이스라엘 국민들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군사적 힘의 우위를 통하여 자국의 안보가 유지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교훈적으로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걸프전 이후 이러한 국제 관계의 변화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인식 전환을 계기로, 미국과 프랑스가 중재하여 제 1 차 중동 평화 회담이 1991년 11월, 에스파니아의 마드리드에서 열려, 6일 전쟁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 이후 워싱턴 등지에서의 여러 차례의 회담은 서로의 입장의 차이로 인하여 결렬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최근에 ‘팔레스타인의 구향 권리법’이 제안되었는데, 미국이 이에 찬성하고 있어서 이스라엘은 긴장을 하고 있다. 한편, 1992년 6월 24일에 치러진 이스라엘 총선거에서 보수 집권당인 리쿠드가 패배하여 물러나면서, 소수 정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출범한 노동당은 평화 협상에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노동당의 당수인 라빈과 외무부 장관인 시몬 페레스는 점령지 내의 아랍-팔레스타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꾸준히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1992년 9월 2일, 국민들에게 점령지 포기를 강력히 호소하면서, ‘성서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의 영토 전부를 장악하겠다는 희망을 버리라.’고 촉구하였다. 라빈 총리는 이 날 연설을 통하여 ‘대 이스라엘 건설에 관한 종교적 환상을 떨쳐 버려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고, 이스라엘은 중동 평화 회담에서 아랍측과 타협책을 강구해 나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는‘국력이란 영통의 크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신념과 사회, 경제, 국방 체제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능력 여하에 달린 것’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9개월 내에 점령지 내의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에 관해 합의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노동당의 신 사고는 단순히 중동 평화 정착뿐 아니라, 나아가 평화 정착 후 아랍 세계의 기름과 이스라엘의 고도 산업 기술의 결합을 통한 중동 경제의 블록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 보다 미래 지향적인 사고이다. 페레스는 말하기를, ‘우리가 꿈꾸어야 할 것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단순한 정치적 평화가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한 아랍의 기름과 이스라엘의 고도의 기술이 연합한 세계 경제의 중심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역설해 왔다. 이스라엘 내의 많은 극우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페레스는 냉전 종식이 중동 지역에 가져다 준 환경 변화 속에서, 불신과 편견에서 벗어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중동의 새로운 평화 정착이야말로 양 대립 당사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신념 아래, 과거의 “팔레스타인과는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는다.”는 정책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팔레스타인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다. 오스로에서의 구준한 비밀 접촉 결과, 1993년 9월 13일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는 워싱턴에서,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역사적인 중동 평화안에 서명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미결인 채로 남아 있는 수많은 문제들 때문에 이 평화안이 팔레스타인에 곧바로 안정된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수백년간 게속되어 온 이 지역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희망적인 역사적 사거이 아닐 수 없다.
◎ 참고문헌 ◎
☞ 최창모,「 이스라엘 史」 , (서울: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3)
☞ 레온 우드, 김의원, 「 이스라엘의 역사」 , (서울: 기독교 문서선교회,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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