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보혈의 기본개념과성령의 능력
1. 신약에서 보여지는 예수님의 피를 뿌림
초대교회 교부인 이레니우스는 교회에 새로운 사람들이 오면 그들에게 최소한 한 차례는 축귀를 했다고 한다. 귀신을 다 쫓고나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했다는 것이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초대교회에서는 회심자들의 세례준비 과정에 사단과 귀신들에 관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으며 세례 지원자는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통과했고 따라서 세례의식 자체가 충성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의 표현이었다는 증거가 있다.
세례 의식이 시작되면 세례 지원자는 세례탕에 들어가서 자신이 죄와 사단의 노예였다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는 뜻에서 무릎을 꿇고 서쪽(해가 지는 곳으로 어둠과 귀신들의 지역으로 상징됨) 방향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나서 마귀가 거기 있는 양 “사단아 나는 너를 거부한다. 이제 너를 섬기지 않고 너의 모든 일을 포기한다.”라고 담대하게 선포했다. 성 암브로스는 마귀를 거부한다는 뜻으로 또 그리스도 안에서 의심할 수 없는 권세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서 마귀의 얼굴에 침을 뱉게 했다고 전해진다.1)
< 1) 티모시 워너 저, 영적 전투(죠이선교회) P.136에서 재인용, F. Van der Meer, Augustine the Bishop(New York : Harper and Row, 1965) 365쪽; E.C. Whittaker, The Baptismal Liturgy(London:SPCK,1981), 17,36,37쪽 / 티모시 워너(Timothy M. Warner)박사는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선교사로 일했고 포트웨인 성경대학 학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1980년부터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여 선교학 박사 및 목회학 박사학위 과정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전도 및 선교학부에서 가르침. 테일러 대학에서 종교학 학사(A.B.) 뉴욕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M.Div.) 뉴욕대학에서 종교교육학 석사(M.A.) 인디애나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Ed..D)를 받았다. 1992년 8월 은퇴후 닐 앤더슨과 Freedom in Christ Ministries에서 Power Encounter사역을 하면서 특히 영적 전쟁과 정령주의(Animism)을 강의하고 있다. >
그것이 귀신을 내어쫓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러한 침을 뱉는 것은 효력있는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 교회의 전통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새신자에게 귀신을 내어쫓겠다고 하면 반응이 대단할 것이다. 그것은 분별력있게 해야 하고 그 사람이 그 내용을 알뿐 더러 동의하고 요구할 때에 가능한 일이다.
오늘날은 대부분 교회들은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한 영으로 인하여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경우라고 확신될 때에만 그렇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경우임에도 어떤 교회에서는 전혀 처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나 사역자에게 그러할 기능이 없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학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귀신이 드러남에도 그 귀신을 처리하지 않고 다른 대책으로 넘어가기만 한다면 그는 악한 영의 세력에서 자유할 수 없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면 말이다.2)
< 2) 회개를 할 때에도 사람들은 악한 영에게서 해방을 받고 자유를 얻는다. 악한 영과 귀신이라는 용어는 교차적으로 사용해도 된다. 귀신이 어감이 안 좋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매스컴과 세상에서 주입받은 귀신의 이미지 때문이다. 그러나 귀신이나 악한 영이나 교회에서는 한 존재를 다르게 부르는 두 가지 명사인데 더럽고 추하고 사람을 괴롭히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악한 영이라 해서 악한 이라는 말이 그 영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더러운 영’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이 가장 좋다고 본다.
참고로 (1) 더러운 귀신이라는 어구는 신약성경에서 22번 나온다.(한글개역판과 개역개정판) 원어는 ‘더러운 영(tw'n pneumavtwn tw'n ajkaqavrtwn:)이다. (2) 더 악한(포네로스, ponhrov", wicked) 귀신이라는 말은 신약에 두 번 나온다. 사실 같은 이야기에서 나온다. 이때의 ’더 악한‘이란 기존에 그를 괴롭히던 귀신보다 ’더 지독한‘의 의미인 것이다. ( 누가복음 11: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우리가 회개를 한 후 철저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그 죄를 벗어나서 온전해진다. >
계속 인용한 글을 본다.
“그리고 나서 세례자들은 부활하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동쪽을 향하여 ‘그리스도여, 이제부터는 당신을 섬기는 삶을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충성을 다짐하였다. 또한 세 가지 핵심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안수하고 기름붓는 것이 이 의식에 포함되었다.
세 가지 진리는 1) 귀신의 능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과 2)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깨끗케 되는 것 3)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이 중 2)와 3) 두 가지는 오늘날도 여전히 세례의 핵심 진리로 강조한다. 그러나 세례의식에서 귀신을 거부하는 과정이 배제된 것은 귀신들의 활동에 대한 인식이 결핍된 서구적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과 세례 의식이 정령숭배나 많은 민속종교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고 있는 회심자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는 쉽게 볼 수 있다.”3)
3) 티모시 워너 저, 영적 전투(죠이선교회) P.137,
우리가 초대교회의 문헌들을 조사해본다면 예수님의 피를 뿌리는 것의 좀 더 구체적인 실행들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평가를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한 과거 전통을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의 피를 뿌리는 것이 당연히 초대교회의 신앙의 기본임을 알아야할 것이다. 이는 가장 기본적인 문헌은 바로 사도들이 기록한 성경이다. 구체적인 행위는 언급이 안되어 있으나 그 적용과 효력은 분명히 언급한다. 그것이 다음의 성경들이다.
로마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
에베소서
골로새서
히브리서 등은 이 예수님의 피를 뿌림이 가장 기본적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냥 예수님의 피이지 왜 동사 뿌림을 넣어서 말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이유는 이 책에서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기본적인 설명은 다음이다.
단순히 예수님의 피만을 말한다는 것은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그의 영적인 상태가 그러한 능력이 함께 하지 않는 경우) 그저 예수님의 피를 외치기만 해도 능력이 나타난다고 많은 사역자들이 말한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는 있다. 결국 그 사람이 예수님의 피에 대한 어떤 개념을 가지고 말을 하느냐에 따라 달린 것이다. 전혀 그 배경지식, 즉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면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흘리신 피이며 또한 십자가에서 마귀를 멸하신 것을 (made him powerless and made him nothing 그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힘없는 존재로 만드심) 알고 이러한 사실을 믿고 말한다면 그의 믿음에 따라 예수님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고 말한다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가. 동사와의 결합
‘하나님’하고 외치는 것과 ‘하나님 도우소서’. 혹은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은 다르다. 보다 더 구체적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하고 외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구하소서 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마음에 믿고 외친다면 하나님은 역사하시므로 같은 결과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라고 외치는 것과 ’예수님 임하소서’ 혹은 ‘예수님 구하소서‘와도 다르다. 우리가 구체적인 행동을 위하여서는 구체적인 동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믿습니다. 라는 것은 동사이다.
믿음을 가져라 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기도한다. 도 기도하다 라는 동사가 있다.
성경을 읽다 도 동사가 있다.
예수님의 피도 그저 존재함이 아니라 적용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위하여 우리가 뿌린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고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뿌린다는 단어는 성경에 많이 나온다.
성경을 보면서 왜 예수님의 피를 뿌리는 것이 타당한 것일까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다음의 성경에서는 피뿌리는 것에 대하여 나타난다. 물론 아주 많은 구절중의 소수라는 것을 알자. 성경은 짜면 피가 나온다는 피의 책이다.
1. 출애굽기 24장
출애굽기
24: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24: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24:9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24:10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
24:11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
- 예수님의 피는 바로 이 구약의 체결, 곧 제사제도에 따라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로 드려진 희생제물로서의 예수님의 피인 것이다. 적용대상인 백성에게 짐승의 피를 뿌렸을 때에 온전하지 않은 짐승의 피임에도 불구하고 74명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았다. 놀라운 사실이다. 예수님의 피는 완전하므로 하나님을 보게 하는데 효과적인 것이다. 즉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열리는 것이다. 천국이 열리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이다.
2. 로마서
로마서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이 두 구절에서 예수님의 피만 존재함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에게 뿌려짐으로서 회개하는 우리가 죄로부터 정결하게 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피만 존재함이 아니라 피가 적용되는 것인데 이는 역시 제사제도에 따라 뿌려지는 것이다. 이 구절들에 이미 뿌린다 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물로 세수를 하고 와라 라고 한다면 물이 얼굴에 닿아야 세수를 하는 것이다. 물의 적용은 물이 얼굴에 닿는 것이다. 물 구경만 한다고 세수를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3. 에베소서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 말씀들도 로마서와 동일한 개념과 적용이다.
4. 골로새서
골로새서 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5. 요한일서
요한일서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피의 정결하게 하시는 역사는 우리로 성령을 받을 준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6. 베드로전서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 베드로는 구체적으로 뿌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흐란티죠의 명사형인 흐란티스모스를 쓰고 있다. 이는 영어로 sprinkle이라는 의미이다. 잔디밭에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의 동사형이다.
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 이것도 피의 적용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피로 씻음으로서 지독한 죄, 스스로 회개할 수 없는 죄에서 정결하게 되고 자유함을 얻어 변화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깊은 회개를 하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단어가 1:18에 있는데 이는 성령으로 잡아주심을 말씀한다. 성경에서 구속은 능력으로 곧 성령의 능력으로 잡아주심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에 죄를 안 짓고 승리하는 삶이 된다.
7.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저 피로서 값을 지불한 것인가? 피를 대신하여 흘리심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피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있으므로 그 생명을 흘리심으로 대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는 대신 살아난 것이다. 이것도 우리에게 적용되려면 믿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뿌려져야 구체적인 실현이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5: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 우리가 어린양의 피에 씻어 희게 된 자가 환란에서 탈출할 수 있다. 피를 뿌려서 씻는 것이다. 피에 부어도 마찬가지이다. 4)
<4) 이 구절은 휴거를 말한다. 휴거는 요한계시록에 두 군데에서 말하고 있다. 7;14절과 14:14절이다. 전자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본 휴거이고 후자는 이방인의 입장에서 보는 휴거이다. 요한계시록은 환란을 유대인의 입장에서와 이방인의 입장에서 두 가지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면 요한계시록이 열린다. >
요한계시록 12:11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 우리의 두 가지 무기는 보혈과 말씀이고 말씀과 성령이다.(고후 6:14)
이 부분은 좀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피의 적용대상이 두 가지이다.
1) 우리 자신에게 적용 곧 뿌림으로 우리가 정결하게 되고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보호받음. 이것은 영적 군사로서의 기본 준비이다.
2) 마귀를 제외한 장소나 사람, 물건 등에 뿌림으로서 그곳을 정결하게 함으로서 더러움을 제거하여 하나님이 임하여 계심으로 마귀의 존재와 세력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군사의 전쟁하는 모습이고 제사장의 사역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피를 뿌릴 때에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 사람을 사로잡아주시고 (이것은 기도보다 강력하다. 성령의 임재하심을 보장한다.) 그를 구속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그를 성령이 사로잡아 주시며 죄와 사단의 세력에서 해방하여 주시는 것이다.
8. 히브리서
히브리서처럼 예수님의 피와 적용, 그리고 제사제도의 오늘날의 적용, 그리고 그 관계와 해석을 명확히 가르쳐주는 서신은 없다.
이 모든 구절들은 이 책에서 수시로 해석이 되고 설명이 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보혈로 나타나는 역사에 대하여 이해하게 될 것이다. 놀라운 진리가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 말고 깊은 진리가 있다.
나. 성경은 우리의 신앙의 절대적 기준이다.
종종 많은 이들이 자기들이 못 들어본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므로 이단적이 아닐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18세기 유럽에 부흥이 있을 때에도 뿌려진 것이고 강조되었다.
그러므로 모르던 것이 아니다. 그 적용도 그 당시는 보다 더 구체적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한 여자 부흥사는 실제로 예수님의 피를 뿌리는 행동을 하였다고 한다. 5) < 5) 맥스웰 화이트, 보혈의 능력, 은성 >
또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기 이전에 가졌던 사상과 새로운 사상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발견하면 그는 하나님을 보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보다 더 깊은 진리의 지식을 갖게 된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올바로 건축된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은 영원히 우리의 믿음의 기준이요 대상이다.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이 올바른 믿음인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구절들이 추상적인 개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럴 수 없다.
성경의 모든 진술(statement)은 우리의 표준이지 우리가 깔고 앉아있거나 발로 차고 다니는 돌멩이가 아니다. 성경은 보화요 보물이요 진리이다. 내가 이해해야만 진리이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보화가 아니야 라는 자세는 참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악이다. 어떤 이는 성경을 깔고 앉아서 다른 말을 한다. 세상 이야기를 그 위에 올려놓는다. 자기의 의견을 올려놓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악이다.
성경대로 우리의 사상을 수시로 교정해야(correct) 한다. 신학도 교정해야 한다. 인간의 주장으로 신학을 고집하고 성경을 거부한다면 그는 말씀과 하나님을 버리는 자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전제로 한다.
성경이 우리 신앙의 절대적 기준이라 함은 우리의 신앙이 완벽할 수 없는데 올바르게 해석된 성경을 따라 언제든지 우리를 맞추어가겠다는 겸손과 현실직시를 하는 자세인 것이다. 이것이 올바르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이 축복에 축복을 더하실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보자기에 쌓여내려온 짐승들을 안 먹는다고 세 번이나 고집을 부린다. 고집부림이 과거에 대한 충성인가? 아니면 한 번에 낼름 받아먹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가? 우리의 과거의 신앙에 대한 충성보다 하나님에게 충성함이 옳은 것이다. 즉각적 순종이 올바른 것이다.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던 베드로에게 조차 그의 내부, 그의 사상, 지성에서 변화될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깊이있게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다.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 지성까지 변화가 되어야 한다. 믿으려는 의지만으로 신앙의 전부라 하되 그 내용은 세상의 사상일 때에 그것은 믿음이긴 하나 죽은 믿음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을 때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다.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 우리에게는 말씀이 풍성하고 충만하게 거해야 한다. 그 결과는 곧 성령충만인데 지혜가 충만하고 마음에 기쁨이 넘치며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러러 보고 순종하는 자세가 올바른 것이다. 우리가 이해를 못한다고 초대교회의 신앙과 성경에 기록된 신앙을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 비하여 분명히 순수하고 능력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러한 신앙생활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록하여 후대에 사는 우리들의 신앙의 모범으로 삼고 따라가라고 하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오늘 이 시대를 살면서 우리의 배워온 신앙의 형식과 방법론에 의존한다. 잠재의식에서 그러한 신앙의 형식과 방법론을 편안하게 생각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신경도 이제 분석해보고 이것이 카톨릭적인 성향이 짙어서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교회들도 생겨났다.6)
< 6) 사실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구절로 성령을 다 말할 수 없다. 그 능력있는 사역이 있음을 믿어야 그러한 것을 기대할 것이다. 사도신경은 사실 후대에 정리된 것이지 베드로와 사도들이 고백한 것은 아니다. 사실 사도들의 신앙은 어떠한가?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3: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4: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우리가 이 구절을 볼 때에 사도 베드로가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며 단지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신앙고백을 끝냈을 것이고 추측하는 것은 소위 억측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성령을 믿사오며 라고만 고백하는 이들은 성령의 능력의 사역이 부족한 경향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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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침례교의 교회들은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다. 장로교인 사랑의 교회도 그렇게 한다. 일부에서는 사도신경을 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을 하기도 한다.
또한 교회에서 쓰는 용어들도 그 내용이나 이런 것을 보고 쓰지 않거나 변경해야 한다는 용어정리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진리로 돌아가야 하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지 우리가 받아내려온 전통(tradition)이 성경위에 있어서는 안된다. 비록 우리의 신앙이 정통성(authenticity)이 있는 올바른 신앙일지라도, 거기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요지부동의 자세를 취하여서는 된다.
예수님의 피를 뿌린다는 것도 이와 같다. 새로운 전통이나 방법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초대교회에 있었던 방법론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성경에서 증거하는 방법이요 모세의 구약체결에서부터 나타난 방법이다. 사실 그렇다면 아벨의 제사에서도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대로 성경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신앙에서 떨어진다. 그것은 필연적 결과이다. 현재 이 세상에 어떤 이론이 난무(亂舞)할지라도7)
< 7) 난무(亂舞) : 정신없이 춤을 춤. 그러므로 분별력을 상실하게 유도한다. 혼미해지면 분별력이 없어진다. 존재하는 모든 것, 내 눈앞에서 흔들리는 모든 것을 다 진리라고 볼 수 없다. 오직 성경에서 나온 대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이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붙드시지 않는다.8)
8) 시편 73:22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73:23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선택하고 항상 주님과 함께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우리의 삶에 실현함으로서 우리는 천국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성경의 진정성,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고한 이론을 갖추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많이 나타남으로서 혼란스러우니 무조건 잘라버리는 것도 비성경적인 자세이다. 그것은 게으름이 포함된 안전주의이고 독재적인 자세이다. 성경을 자신만 읽고 자신만 공부하고 자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도 소수만의 예수님이신 것은 아닌데 마치 자신만 그러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 이러한 성령의 은사를 부정하는 이유중 하나인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본인도 성령의 은사와 악령의 역사를 분명히 구별하면서 이 순간까지 온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예수님의 피를 뿌림을 말하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이 책에서는 이것을 기본적으로 설명하고 그 적용을 말하고 있다. 본인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25년 동안 몰랐던 것이다. 몰랐다고 아무 것도 아닌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다. 그래도 성령충만도 받았고 은사도 체험하고 말씀을 공부하고 전도하고 헌신하고 주님을 따라 살아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을 적용하는 것을 알자 본인의 신앙스타일이 변화되었다는 것이며 더욱 더 삼위일체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다고 믿는다.
출처: https://raptureinjesusblood.tistory.com/entry/예수님의-보혈의-기본-개념?category=259236 [말씀과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역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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