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피를 뿌림은
성령이 나타나심을 의지하는 것이다.
<차례>
1.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행하시고 구원이 나타나는 것이다.....2
2. 예수님의 오심은 죄만 사하심이 아니다. ....3
3. 도대체 예수님이 행하시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5
4. 예수님을 뿌림은 구속사역을 적용하는 것이다... 5
5. 히브리서 9장의 의미 : 제사장의 사역을 하라 ..6
6. 올바른 제사장의 사역.......10
7. 믿는 자와 예수님의피를 뿌리는 일의 관계 .....11
8. 거짓 선지자는 자신의 영으로 행한다...... 14
9. 우리 육신의 처리하고 성령의 충만속에서 살아감..... 17
10. 하나님은 언제나 새롭게 일하신다......19
1.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행하시고 구원이 나타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제사를 드림으로서 하나님이 그 제사와 제물을 받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시고 성전에 임하시고 구원을 베푸셨다. (출애굽기 24장, 역대하 7장)
역대하
7: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7:2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7:3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있는 것을 보고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이 구원이나 구원의 능력만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 나타나셔서 / 임하셔서 행하실 때에 구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구원과 구원의 능력이 분리시키시지 않으신다. 그동안 멀리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만 계신 하나님의 개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령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신앙의 오류중 하나라면 구원받은 자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것을 구분하여 생각한다. 이것은 가짜이다. 성령을 제대로 안다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성령이 임하심은 성부 성자 하나님이 임하심이다. 성령만 따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시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자.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이 말씀은 제자중에 성령충만한 자들에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믿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그 날을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는 자는 이러하다는 말씀이다. 성령을 받았다면 이러한 삶이 되는 것이다. 성령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과 함께 교제하는 것이다.
2. 예수님의 오심은 죄만 사하심이 아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나서 임마누엘하시는 즉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면서 행하시기에 우리에게 늘 구원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다름아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과 함께 성부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다. 이 엄청난 사실을 유대인들은 모르고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하지 않고 선지자중 하나로 본다.참된 기독교는 예수님을 창시자나 선지자나 교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 것이다. 이 사실을 벗어나면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고 초보자에 불과하다. 이 사실을 모르면 아직 믿는 자라 할 수 없다. 믿는다고 다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그의 신앙을 인정해주셔야 올바로 믿는 자이다. 세상 종교는 다른 신들이 죽어있으므로 그 신에게 인정받는다는 개념이 없다. 믿고 싶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믿으면 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님이 살아계시고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정하셔야 올바른 믿음인 것이다. 이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살아계신 절대자를 만나느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여기서부터 모든 신앙행위가 달라진다.우리는 위의 21절만 보고 구원을 주시면 신앙은 내가 모든 것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릇된 방법이다. 세상 종교의 방법이다. 사실은 하나님이 믿는 자와 함께 하셔서 모든 인생에서 그를 인도하시는 것,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서교제하는 것, 그 하나님이 엄청나게 큰 분이라는 것,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진실로 참된 신앙의 기초이다.사람이 자기의 힘과 생각과 추측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가 아니다. 사도 바울도 바울되기 이전 하나님을 만남이 없이 자기가 알던 종교적 전통속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다.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이 사울을 만나주시자 그는 이름도 바울로 바꾸고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뀐다. 우리는 믿던 중에 만났다 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과 하나님을 올바로 만나서 올바로 믿게 되었다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교회를 나간다고 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성령님이시다.
사도행전에서도 사도들은 주님이 나타나시기를 기도하였다.
사도행전
4: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4:30 (당신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이 구절에 당신의 곧 하나님의 손을 내밀어 병을 고쳐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 원어에는 그렇다. 모든 능력과 권세는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늘보좌에 앉아계신다고 손이 짧아서 이 땅에 있는 사람을 만져주실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사야가 말했다.
이사야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귀가 둔하신 것도 아니다.하나님의 손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사실을 믿고 병을 고쳐주시기를 기도할 것이다. 사람에게 고쳐달라고 떼쓸 필요없다. 그것은 안될 일이다.이 사실을 모르고 사람이 자기가 병을 고친다고 어떤 사람이 돌아다닌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3. 도대체 예수님이 행하시지 못할 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실 것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를 고려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병을 고치라고 하시지 않는다.하나님이 행하시려고 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는 언약의 피이므로 예수님의 피를 뿌리면 하나님은 언약대로 행하신다.그런데 왜 자기를 괴롭히는가? 평생을 괴롭혀도 자기가 병을 고칠 수 없다. 평생 노력해도 능력이 나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이 행하시도록 환경과 조건을 구비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회개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하므로 자기중심적, 자기를 신앙의 주체로 생각한다. 이것은 틀린 것이다. 신앙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드러내시고 가르쳐주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열어서 제가 볼 것을 보고 믿을 것을 믿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라. 그러는 믿음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이 행하시되 성령으로 행하시면서 일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바른 이해인 것이다.
4. 예수님을 뿌림은 구속사역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뿌림은 예수님의 제사 곧 그 인간을 위한 구속사역을 의지하고 현실화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구속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피를 적극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이 말씀 다음에 나오는 것이 히브리서 10:19-22절이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10: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이 두 말씀은 예수님의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와 그 적용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십자가의 적용이요 예수님의 피를 뿌림이다. 예수님의 한 영원한 제사가 바로 예수님의 피를 뿌림으로서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십자가가 살아나고 우리는 죽는 것이다.
“구속의 현실화”라고 하는 것은 성령이 나타나서 능력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12장에 보면 성령의 나타나심과 행하심 두 가지가 있는데 나타나시면 구속하심이 시작된다. 나를 구속하셔서 그 결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을 때마다 날마다 사건마다 몸의 아픈 부분마다 뿌리면 성령이 임하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우리의 죄는 상상외로 많고 우리의 육신이 나타남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고 성령을 방해한다. 우리의 육신은 죽는 것만이 답이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 히브리서 9장의 의미 : 제사장의 사역을 하라
예수님의 피를 자신에게 뿌림은 제사장의 사역인데 제사장이 먼저 스스로 씻고 주님의 뜻대로 사역하도록 자신을 준비함이다. 몸과 마음이 예수님의 피로 씻은 자만이 제사장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히브리서 10장 23절과 요한일서 1장 9절이 증거한다. 즉 죄와 불의, 불의까지 처리하여야 성령이 임하시는 제사장이 된다. 사람이 죄를 처리하더라도 불의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곧 그는 성령을 소멸할 죄를 짓게 된다. 죄의 근원을 처리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를 뿌리면 십자가에서 우리의 육신 곧 불의가 처리된다. 구약에서도 제사장들은 율법만, 곧 하나님의 말씀만 묵상하고 섬기는 예를 하러 간 것이 아니다. 그들은 먼저 자신을 짐승의 피로 씻었다.
특히 대제사장은 그가 사역을 하기 이전에 속죄제를 드렸는데 제물은 바로 소 한 마리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속할 때의 제물과 같다. 물로 씻고 피로 씻고 정결한 세마포 옷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참된 제사장이 된다. 말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가르쳐서 사람들이 사상을 무장하고 주님을 섬기게 하는 일을 하는 것만이 제사장의 일이 아니다. 그 이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 임하시게 하는 자가 바로 제사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예대로 법대로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섬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사장이 거룩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로 되는 것이다. 이를 히브리서의 저자는 직시한다.히브리서 9장은 이를 자세히 설명한다. 결국은 히브리서가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개혁된 방법
히브리서
9: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개혁이 되었다. 참된 개혁주의는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혁함이 아니라 구약의 예법에서 성령이 임하시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신약의 예법으로 개혁하는 것이다.
신약의 개혁은
(1) 사람 전 존재의 개혁이다. 영까지 새롭게 되고 마음이새롭게 되고 육신도 새롭게 되며 중독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늘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
(2)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의 개혁이고 전 존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법을 개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성공하는 개혁이고 결국 성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성전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몸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일어난다. 즉 우리의 영과 마음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대화한다. 이것이 신비주의적이 아니라 성경대로이다.
(3)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방법의 개혁이며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씻은 자를 기뻐하시고 만나주신다. 대화하시고 음성을 들려주시고 성령으로 가르쳐 주신다.
(4)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의 개혁이다.
(5) 그 개혁의 핵심에 예수님의 피가 있고 예수님의 피로 개혁된 것이고 십자가가 개혁이 일어난 장소이다.
(6) 언약대로 성령의 약속대로 성령의 임하심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면 목회자는 말씀은 가르치지만 그 이상의 영적인 변화는 가져올 수 없다.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따라가는 것이 제사장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다. 그분의 사역의 결과로 인간 제사장이 사역하는 것이다.
즉 그분은 자기의 피로 제물을 삼아 속죄를 이루셨고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으므로 단번에 효력있게 막힘없이 성소에 들어가셨다. 성소에 들어가셨다 함은 하나님의 성전의 성소에 들어감인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령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약의 피인 예수님의 피를 뿌리면 성령안에 들어간다. 즉 하나님이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참된 신앙의 시작이다. 사람이 성령을 받기 전까지 하나님은 참아주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바로 성령안에서의 삶이다.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존재의 모든 죄와 더러움에서 해방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확장하는 복음의 제사장 직을 하게 하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여 주시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이다.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란 첫 언약이 있었음, 체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은 죄라는 것이다. 즉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하나님의 율법 곧 말씀도 있었고 짐승의 피도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여 죄를 지었는데 이는 인간의 타락한 육신 곧 불의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번에는 이것도 처리하시는 방법으로 하셨는데 곧 십자가에서 우리의 타락한 육신을 처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뿌리면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것이다.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처럼 부르심을 입은 자는 또한 구속당하는 것이다.
구속의 내용이 영원한 기업을 주심이 포함되어 있다. 기업이란 유업인데 바로 상속받을 자가 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얻을 자는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불신자, 세상의 사람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함으로서 전혀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 곧 영원한 생명, 영원한 천국에 거함 등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대로 혹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가 되는 길에 빠진 것이다.즉 성령이 아니라 자기의 영, 자기의 희망사항, 자기의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구분해야 한다. 예수님의 피로 씻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한다고 하면 이는 거짓 선지자이다.
회개하고 성령이 역사하셔야 하는데 온전한 회개는 바로 예수님의 피로 되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는 도구에 예수님의 피가 있는 것이다.
새 언약안에서의 기업을 얻음
이러한 내용이 새 언약이고 예수님은 이 언약을 체결하시되 그의 피로 체결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를 뿌림은 바로 그 언약의 내용을 시행하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과 정성을 떠나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게 하는 바로 그 내용이다. 우리처럼 부르심을 입은 자는 또한 구속당하는 것이다. 구속의 내용이 영원한 기업을 주심이 포함되어 있다. 기업은 성령을 주심과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이 포함된 것이다. 성령이 주시는 모든 것이 우리가 받을 복이고 우리는 이 복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풍성한 삶이 되고 이것이 예수님의 우리를 향하신 목적이신 것이다.
6. 올바른 제사장의 사역
그러므로 제사장이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대로 혹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짓 선지자가 되는 길에 빠진 것이다. 자신안에서 성령이 역사하심을 알고서 행해야 한다. 이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이에 비하여 인간의 영성이란 헛된 말이다. 영성이란 타락한 육신 안에 거하는 자가 별 것없다. 타락한 그 모습이다. 그러므로 영성을 가지고 사역한다는 말은 옳은 말이 아니다. 영성이란 성령이 임하여 계실 때에 그 사람의 영의 상태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하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유용한 것이다.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성이라는 말에 속아 넘어간다.
제사장은 인간의 생각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죽고 오직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를 사로잡으실 때에 주시는 명령대로 행하는 자이다. 온전한 굴복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적 제사장은 성경대로 하고 성경이 인정하는 바를 하고 성경이 인정하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그는 이 새 언약속에 먼저 거하면서 예수님의 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회개하고 성령을 받게 해야 한다. 그것이 새 언약속으로 사람을 이끄는 것이다. 소경은 이러한 일을 할 수 없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없다. 먼저 성령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성령안에 거하는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 오늘날 신학교에서 여러 가지 과목을 가르치고 교회에서도 많은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실천적 실제적인 성령론이다. 성령은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진리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행하신다. 그러므로 올바로 성령에 대하여 알고 우리가 적응하자고 한다면 결국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며 이렇게 하면서 우리는 성령충만한 삶으로 변화된다.
오늘날 올바른 복음의 제사장의 삶은 바로 이 성령안으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다. 그때에 성령은 그 사람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하신다. 이것이 다음 말씀대로이다.
로마서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7. 믿는 자와 예수님의 피를 뿌리는 일의 관계
예수님의 피를 뿌림은 축복과 언약으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덮은 자를 절대로 징계하시지 않고 성령을 부어주신다. 다른 방법으로는 안된다. 말씀이 있지만 말씀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성령이 임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의피는 성령이 임하시게 하는 바로 그 조건이다. 이는 예수님의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언약을 의지함이다. 우리의 실재와 본질과 죄와 사상이 있어도 언약의 피가 우리를 덮어야 한다. 그때에 하나님은 불의한 우리를 용서하시고 진노하시지 않고 만나주신다. 만약 우리의 본성, 마음, 성실, 최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이렇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아주셔도 실제로 그 상태는 불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믿는 자는 의인이 되지만 이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믿음으로 얻는 의 곧 우리가 얻은 의에 대하여 분명히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로마서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브라함도 행위 곧 그 사람의 상태로서 의로운 자가 아니었다. 죄도 있을 수 있고 이는 타락한 육신과 연약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것이다.
(1) 사람은 누구나 그 자체로 행위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없다. 그런데 구원은 의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가지를 새로이 정하셨다.
(2) 곧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보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자를 의인으로 인정해주신다는 것이다.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3) 믿음이 의인됨의 조건이었다.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 그리하여 이 믿는 자를 의인으로 인정하시고 결국 만나주시되 먼저 하신 일은 그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로 이 일을 하신 것이다.
4:9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4:10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4:1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 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5) 아브라함은 우리 믿는 자의 조상이다.
(6) 현실을 보자면 믿는 자라 해서 그렇다고 그가 실제로 죄를 완전히 이긴 자는 이 땅에 없다.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지만 성령이 그를 붙들어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죄를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육신이 죽지 않는다면 그는 육신의 살아남과 유혹과 반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반역하게 된다. 이제 믿는 자는 성령의 의롭게 만들어주심을 따라서 의로운 상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가 되어야 한다.
(7)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회개하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만나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기도를 하려고 해서 실패하는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회개는 언제나 기도 시작 전에 해야 하는데 안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모르는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8)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죄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이것을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으로 의인되었으니 의인이니까 회개할 것이 없다고 가르치는 이단이 있는데 이들은 로마서 4장을 잘 모르는 자들이고 아브라함이 어찌하여 우리들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9) 거듭남의 순간에 영이 거듭나는데 이후에라도 회개를 할 때에 성령을 받는 것이다. 혹은 회개하면서 거듭나기도 한다. 이것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요약하자면 성령을 받고 거듭나서 영이 거듭나기 전후로 회개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칙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자는 회개의 경험이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만 의인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고넬료는 의인이어서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듣고 마음에 믿자마자 성령을 받는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 부활 후 40일의 가르치심과 열흘의 기도를 통하여 성령을 오순절날 받았다. 오순절날의 성령부어주심은 그 때가 되어서 이기도 하지만 간구하거나 개인적인 죄를 회개한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10)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예수님을 믿고나서 최초로 예수님의 피를 배우고 그 피로 씻는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능력으로 마음이 새로워지며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체험한다. 그리고 의롭게 여김받는 믿음 이후에 의로운 행위를 그가 함으로서 그는 실제적으로 의인이 받는 복을 받는다.
믿음으로 의인되는 것은 신약에 믿는 자에게 다 적용된 법칙이다. 그러나 구약에는 일부 하나님께 가까운 사람들이 알고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스스로를 인정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회개할 때에 성령을 확실히 받고 성령의 역사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승리의 삶의 원칙이다.
8. 거짓 선지자는 자신의 영으로 행한다.
사람이 자기의 모습, 자기의 생각으로 충만한 것은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이유이다. 우리는 늘 마음에서 예수님의 생각, 말씀이 살아있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 한다고 속을 수 있다. 거짓 선지자가 된다. 그러므로 선하다고 생각되는 나의 속생각을 분별해야 한다
요한일서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많은 거짓 선지자는
(1) 이미 이러한 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말씀을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예측하고 말하거나 말씀하시지 않았음에도 말씀한 것이라고 전달한다.
(3) 이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나타날 때에 그 죄가 드러난다. 참고로 예레 미야 28장의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결말을 참고해야 한다.
(4) 그 하는 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는 결국 거짓 선지자이다. 하나님은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시지 않는 법이 없는데 거짓 선지자는 말뿐이다. 말뿐인 사역자는 거짓 선지자라 할 수 있다.
4: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하나님께 속한 영은 예수님의 육체로 오심, 그리고 그 결과인 예수님의 피를 인정하는 영이다. 이 말씀은 곧 우리의 영이냐 하나님의 성령인가를 구분하는 것이다. 내가 나의 영으로 사역하면 거짓이 된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 나는 느껴지지 않고 순종하면 그것은 올바른 것이다. 그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자신의 증거가 있어야한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라는 분명함이 없이 일하는 것은 자신의 영과 힘으로 하는 것이며 결국 힘들게 된다.
그러므로 왜 능력이 안 나타나는가?
왜 힘이 빠지고 왜 힘이 드는가?
자기의 힘으로 하기 때문이다. 결실이 없다면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께 굴복하는 삶을 훈련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동역자로 세우신다 하더라도 온전히 내가 굴복하여 나를 다 드린 후에 되는 것이지 나를 인정하셔서 나 없이는 하나님의 일이 안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이 사람의 교만은 하늘을 찌를 듯한 교만인 것이다. 게다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홀로 모든 일을 행하신다. 사람없이도 일을 하신다.
그런데 왜 사람을 쓰시는가? 우리에게 기업으로 상을 주시려 하심이다.내가 예수님이 이루시지 못한 사역을 완수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쓰시는 것이 아니다. 구속사역을 완성하지 못하였다 라고 말하는 분명한 이단이 있다. 그러나 올바로 믿는 자들중에도 “예수님이 나 아니면 오늘날 주님의 사역이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농담으로 말하는 자들도 있다. 이는 자기의 영으로 말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미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교만한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 선지자이며 동시에 지도자가 아닌 사람이다. 그의 자세와 생각이 이미 하나님 앞에서 분명한 죄라는 것과 그것을 깨닫고 버리며, 철저히 자신을 고운 밀가루처럼 헌신하기 전까지 하나님은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실 수 없다. 그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위험한 말은 다음이다. “내가 사역할 때에 성령이 역사한다.”라고 자부하는 말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처음으로 경험한 사람의 말이고 미숙한 말이다. 성령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지 인간 사역자를 따라다니면서 역사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의 자세, 그 마음이 성령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실 때에 우리의 영도 역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에 사람이 자기를 인정하면 마음도 높아지는데 이는 교만이고 이때에 성령의 역사가 소멸된다. 이는 본인이 감지를 해야하는데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계속 진행해하면 그것은 자신을 거짓 선지자로 훈련하는 것이다. 결국 그의 몸과 마음과 삶이 곤궁에 빠지게 된다. 자신은 성령의 역사라 계속 믿지만 여기서 성령의 역사인지 사단의 역사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이 분별의 방법이 바로 예수님의 피인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에는 이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방법이 나타난다. 즉 예언이 임할 때에 옆 사람에게 임하면 잠잠하라는 것입니다. 계속 말하면 거짓 선지자가 됩니다. 자기의 영으로 말하고 사역하는 자는 결국 떨어집니다.
성령의 거룩하심과 풍성하심으로, 생명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해도 나에게서 거룩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풍성해도 내가 스스로 풍성함을 다른 이에게 주지 못합니다. 내가 생명을 소유해도 내가 생명을 스스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려면 기도를 충분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를 뿌려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뿌릴 때에 어떤 목적을 바라지 말고 뿌려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고 성령이 나에게 나타나실 때에 나의 모든 것을 올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의 육신이 처리되고 성령이 역사하심을 체험하면서 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기의 생각을 따라가는 것은 정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예수님의 피를 뿌림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순간마다 의지하고 성령을 의지하는 것이다. 말로만 마음으로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피를 의지함은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기대할 때에 성령이 임하신다.
누가복음
3:7 요한이 세례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9: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9: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9: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은 돌들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이 부족해도 쓰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도 정결하므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사역자는 정결과 거룩을 목숨과 바꾸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므로 연약하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는 것은 우리의 연약을 강하게 하시는 방법이다.
예수님의 피를 뿌릴 때에 가장 먼저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은 회개와 나의 불의의 처리됨, 즉 내 육신이 죽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가 못박혀 죽을 때에 성령이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두 가지를 먼저 확실히 확인해야 한다.
9. 우리 육신의 처리하고 성령의 충만속에서 살아감
그러면 나의 육신이 처리되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에 나의 육신이 처리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는 평안과 기쁨이 있어야 한다. 평안과 기쁨을 가지고 말을 할 때에 죄가 되지 않고 성령이 역사하신다. 평안과 기쁨이 없이 말하는 것은 자신과 사단에게 속는 것이다. 평안과 기쁨이 없이 설교하고 상담하고 옆 사람은 내가 더러워지고 옆 사람이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회의(會議, discussion)는 하나님 사역을 없애고 인간의 것으로 충만하게 하는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나와 성령은 다르다 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수 십 년간 성령 안에서 사역을 하였다 하여도 성령 하나님과 나는 본질상 다르다. 수 십 년간 사역을 하였으니 내 말은 곧 하나님의 말이라 말한다면 그는 교만의 죄에 빠져 눈이 멀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 거룩한 성령을 체험하지 못하고 거룩함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느끼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성령이 내가 임하셔서 나는 거룩한 상태가 되지만, 나에게서 거룩이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주께 받았을 때에 거룩한 생각이지 내가 거룩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성령이 임하셔도 여전히 육신의 타락함을 가진 자이며 성령이 나를 죽이시기에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변화되어 거룩해진다고 생각하므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성령사역을 하는 자가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사람에게 말할 때에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자신과 타인을 얽어매는 불필요한 말이 된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방해입니다. 성령은 나와 다르다. 성령이 나와 같을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착각이고 문제의 원인이다.
성령이 나타나시면 나와 다르다. 일단은 성령이 나에게 임하시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예수님의 피 곧 언약의 피를 뿌려야 한다. 이때에 우리는 정결하게 되고 또한 회개를 하게 된다. 육체도 정결하게 된다. 마음도 회개함으로 정결하게 된다. 그때에 언약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
육신은 속이기는 어제도 임하셨고 오늘도 임하시는데 성령의 임하심은 같을거야. 라고 속입니다.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단이 없어도 우리의 타락한 육신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거부하는 면이 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기도학교 입학안내를 쓴 카메론 톰슨은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뵙기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성령받는 일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의 풍성한 삶, 생명이 넘치는 비결은 하나님의 생명을, 곧 생명수를 성령을 날마다 새롭게 받는 것이다. 어제 받은 성령으로 일하자 라는 말은 자신의 불의를 인정하지 않는 악한 말이다.
요한복음
7:37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7: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은 우리의 배에서 생수 곧 성령이 흘러날 것을 계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 목마른 자는 성령으로, 생명으로 충만하게 되어야 한다.
10. 하나님은 언제나 새롭게 일하신다.
하나님은 새롭게 일하신다. 어제만 새로우신 것이 아니라 오늘도 어제와 다른 새로움으로 일하신다.바리새인이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을 알고 있으니 우리의 판단이 옳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이시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실패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일하시고 그들이 뵙던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셨는데 그것을 보는 눈이 없었다. 최고로 노력해도 죄를 지은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노력하는 인간이 아니라 성령을 받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같은데 각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틀리는 것이다. 성령을 받았는데도 쭈그러집니다. 성령을 받았음에도 그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는 방법론은 배우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따라간 것이다.
출처: https://raptureinjesusblood.tistory.com/9 [말씀과 예수님의 피와 성령의 역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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