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제에 대한 성경적 연구의 의미를 중심하여-
강진구
화목제에 대한 성경적 연구
- 의 의미를 중심하여-
목차
1장. 서론
A.문제의 제기
B.연구방법
2장. 구약제사의 일반적 고찰
A.시내산 이전의 제사
1)족장시대 이전
2)족장시대
B.시내산 이후의 제사
1)번제
2)소제
3)화목제
4)속죄제
5)속건제
3장.화목제사에 대한 연구
A.성경적 의미
1)석의적 연구
2)어원적 연구
3)제사의 성격
4)제사의식과 의의
B.제사의 일반적 이해와 화목제
1)제사제도의 시작과 제사장
2)제사장의위임과 화목제
3)고대 근동의 제사제도와 차이점
C.성경적 제사의 근거
1)제사와 계시
2)제사의 방법
D.신학적 접근
1)영적 의미
2)화목제의 특성
제4장.화목제의 신약적 이해
A.구속
1)인간의 창조와 하나님과의
2)사탄- 의 파괴자
3)예수 그리스도- 의 회복자
B. 과 예배
1)초대교회의 예배와 제사
2)예배와 제사의 개혁
3)감사의 예배와 화목제
4)성도의 교제와
제5장. 현대교회와 화목제
A.예배와 선포
1)샬롬의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
2)평화의 왕 예수
B. 의 선포와 교회성장
1)모든자들을 위한 샬롬
제6장. 결론
참고도서
Ⅰ. 서 론
A.문제제기
한국교회가 구미선교사들의 수고로 복음을 받아들인지 어언 2세기가 되어가고 있다. 한국교회의 짧은 기독교역사 가운데도 교회의 성장과 부흥은 구미교회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숫적 부흥에도 불구하고 질적인 성장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1) 이러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 연구자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데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복음과 율법은 성경에서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중요한 하나님의 성품의 두 축임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는 항상 양극단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서로 다르게 이해되어 온 것이 한국교회의 풍토였다. 복음을 강조하며 삶이 실종되고 율법적인 면을 강조하며 복음이 사라지고 마는 가운데 이원론적인 신앙형태가 교회안에 만연하게 된데에 그 원인이 있지 않 나 한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구약의 화목제사 제도를 살펴봄으로서 구약안에서의 완성된 복음을 찾아 보려고 한다. 물론 신약에서 확연히 드러나기 전까지 계시의 역사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긴 하지만 화목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와 가까이 그리고 함께 하기를 원하셨는지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자는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화목제사가 다른 이방인들의 제사와 어떻게 다르며 또 구약의 여러 제사제도와는 어떤 상
관과 차이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연구의 주된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 본 연구자는 구약성경의 화목제에 대한 용례를 살펴보되 특히 화목제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샬롬' 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의 발전과 변화 그리고 신약에 이르러 이것이 기독론적으로 어떻께 드러나게 되는지 살펴보기 위하여 구약과 신약을 병행해서 살펴보고 끝으로 화목제에 대한 신 구약학자들의 연구사를 비교 분석해 봄으로서 본 연구를 진행시켜 나갈 것이다.
B. 연구 방법
본 논문은 화목제사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접근함에 있어서 19세기말 Geerhardus Vos에 의해 체계화한 개혁주의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의 원리를 따른다. 이 신학은 성경 계시를 역사적인 과정으로 보며, 제시역사의 다양성 속에 존재하는 성경 계시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경의 통일성이 역사적인 과정속에서 부분들의 유기적인 통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2)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원리에 의하면, 구약과 신학은 함께 은혜계약에 속하는 구원방침 계시로서 구약은 은혜의 약속에 대한 계약이고, 신약은 그 성취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서로 연속성과 통일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신약은 구약의 성취로 이해한다.3) 구약제사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의미로 J.
Ridderbos는 말하기를, "구약도 피로써 확실히 성립되었지만 그리스도는 완전한 제물로 나타나셨다."고 하셨다.4) H. Barivck는 말하기를5), "구약시대에는 진리가 벌써 있었고, 아주 감추어썬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그림자와 예표와 상징과 모형으로 제시되어 왔다. 그것은 이제 충만과 빛으로 나타났는데 곧 그리스도께서 그 계약의 중보자시오, 머리시오, 속 내용이신 사실로 나타난다."라고 하였다.6)
본 논문의 연구 방법은 전적으로 문헌연구에 의존한다.
본 논문에서는 구약제사의 일반적 고찰을 통하여 구약제사의 일반적 관점을 시내산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생각해보고 그 다음 홧고제의 일반적인 의미와 신약적인 의미를 더 깊이 연구해나가는 방법으로 진행하려고 한다. 이것은 성서신학적 원리로 탐구하게 된다. 이는 결국 신약의 기독론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과 예배에 관한 신학적 의미를 찾고 오늘에의 적용을 시도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화목제의 신학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연구한다는 데 이 논문의 의의를 가진다.
Ⅱ.구약제사의 일반적 고찰
1.시내산 이전의 제사
인간의 타락 후 인간과 하나님의 교제는 단절되었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신 하나님은 단절된 교제를 회복하는 길을 제시해 주셨다. 우리는 제의 속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제의 안에서 맺어지고,재확인되고 새롭게 되었던 곳이다
1)족장시대 이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의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이러한 제의는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한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특별한 존재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하나님과의 교제에 두셨기 때문이다.7)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중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의존할 때에만 그 존재의 바른의미를 찾게도니다. 그런데 첫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 된 것이다.
거룩한 제의의 기원은 명백히 선언된 것은 아니지만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직후에 계시 되었다.8) 성경은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 한분만 섬겼고, 동물제사를 드렸음을 말해주고
있다.9) 하나님께서는 죄는 오직 제물의 피를 흘림으로서만이 사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창3:21). 즉 대속의 제물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거 가인은 땅의 소산불로 하나님께 드렸으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의 선택하심으로(창4:1-7) 빌소 제사의 방법과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10)아벨의 피있는 제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졌고(히11:4) 노아(8:20), 야곱(창31:54) 그리고 출애굽 전까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벙을 알았고 실천했다.(출10:25)
2)족장시대
조장시대의 제의는 주로 하나님께서 족장과 그 가정에 대해서 언약을 세운 개인제단과 가정제단이었다.11)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족장들의 가정이었다. 그리고 히브리 족장들은 예언자, 제사장 왕으로 불리었다.12) 즉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았으며 그리고 작은 단위의 씨족국가 형태의 왕이었다. 여기에서 족장은 제사장으로 제사를 주관하고 집행하였다.
족장들의 제의는 사람들이 말하듯이 극히 단순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모든 셈족 사이에서 그렇듯이 그 제의의 중심은 짐승제물이었다. 그러나 이 제헌은 어느 곳에서나 조직적 제관없이 씨족의 직장 자신의 손으로 거행되었으며 결코 어떤 지방색을 띤 제의가 아니라 부조전래(父祖傳來)의 씨족신 제의였던 것이다.13)
족장들의 제의의 주요특징 중 하나는 신과 계인적 관계, 곧 '계약'을 맺는 관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각 경우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요구와 약속을 했다. 또한 족장들의 제의의 특징은 씨족 또는 가족간의 강한 연대의식이다.14)
족장시대에 있어서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제의의 제단에는 희생의 제물이 제의 의식의 중심이었는데 다음 성경 구절에서 제사의 방법등을 알 수 있다.
"야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3년된 암소와 3년된 암 염소와 3년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창 15:9∼10). 또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드릴 때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야훼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창 22:5∼10).
이상에서 보는대로 족장시대에는 족장자신이 제사장이 되어 거룩한 장소에서 흙이나 돌로 단을 쌓고 희생제물을 드림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여기에 응답하시어 언약을 세웠던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초보적이고, 개인적이며, 가족적이지만 인격적인 하나님께서 인간과 교제하시기를 원하셨고, 인간은 이에 제사로서 응답하였다.
2.시내산 이후의 제사
레위기 1-5장에 기록된 구약의 제사는 다섯가지가 있는데 이를 일컬어 소위 5대 제사라고 한다. 그러나 레위기 7장 37절에 의하면 제사들은 여섯가지인데, 즉 "번제와 소제와 속죄제와 속전제와 위윔제와 화목제의 규례"라고 했다. 물론 위임제사는 단회적이기 때문에 5대 제사와 구별이 된다. 그렇지만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제사이므로 본 논문에서는 위임제를 포함하여 여섯가지 제사의 특징과 그 교훈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1) 번제( , The Burnt Offering, 레 1:3∼17)
레위기에서 번제를 가장 먼저 먼저 언급하는 것은 이 제사가 가장 흔한 제사이며, 아침 저녘으로 드려지고 성일에는 보다 자주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15) 번제는 다섯 종류의 제사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제사이다.16)
(1)어원적 용어
"번제"란 말의 히브리어 (올라)는 "올라간다"는 뜻으로, 온전히 헌신함을 의미하기에 적합한 명칭이다. 이 밀은 번제의 마지막 순서로서 단 위에서 제물을 "불사른다"는 말 (히크티르)와는 완연히 구별된다. 단 위에서 불사르는 것은 멸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 제물을 태워서 더욱 고상하게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17) 이와같은 동사의 개념은 번제가 헌신(Consecration)을 비유함으로 보여준다. 실상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므로 그 인격이 성화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제자의 특수용어라고 할 수 있는 "향기로운 냄새"란 말( )도 이와같은 헌신의 결과를 잘 진술한다. 이 제사는 전적인 헌신은 의미하기 때문에 "전체" 혹은 "온전한" 제사를 뜻하는 명칭( )으로도 표현된다.
(2)제사의 성격
번제는 완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제물을 전부 태우는데에 그 특징이 있다. 번제는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드리는 자유의지적인 제자이다. 그런데 그것은 동일한 조직적인 방법으로 드렸다. 첫째로, 신하가 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경우처럼 일반적인 경의, 그리고 자기헌신과 감사의 관념을 표현한다. 끝으로는 화해를 나타낸다.18)
다음과 같은 때에는 반드시 번제를 드려야 했다. 즉 제사장들의 위임제(레8:18), 제사장들의 헌신을 위한 제사(레 9:12), 여인들의 산후 결레를 위한 때(12:6∼8), 또는 문둥병 환자를 정결테 하는 경우(레
14:19), 유출병이 깨끗해진 후(레 15:14∼15, 30)와 나실인의 서원이 끝날 때 (민 6:11∼14)에는 반드시 속죄제와 더불어 번제를 드려야 했다.
(3)제사 의식과 의의
번제에는 '늘 드리는 번제'(常燔祭)ㅘ 개인적으로 드리는 일반번제의 두 종류가 있다.19)전자는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제사장을 통하여 매일 아침 끊임없이 드려야 하는 제사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번제는 때를따라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a.일반번제(레 1:1∼17)
개인적으로 드리는 번제물은 소의 번제, 양(염소)의 번제, 새의 번제가 있는데 소와 양과 염소는 흠없는 수컷이어야 하고 새는 집비둘기의 새끼이어야 한다.20)
성소 밖에는 번제를 드리기 위해 큰 단이 있었다(출 27:1∼8). 사람이 번제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회막 문에 섰을 때, 제사장은 안수하고 드리는 자의 모든 죄를 고백한다. 이렇게 해서 그 제물을 불태우는 때 죄도 같이 도말시켜 주신다. 이때 안수란 제물드리는 자와 제물과의 연합과 일체를 의미하는 죄의 전가를 의미한다(레 16:21). 즉 안수하는 것이 제물을 바치는 자의 죄를 상징적으로 동물에게 전가하는 것을 뜻하며, 안수를 통해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이 그 제물을 바치는 자를 대신해서 죽는다는 것을 상징함으로써 자신을 바
치고 있는 것이다.21)
제물은 전부 각을 뜨고 쪼개어 화제로 드리는데, 남김이 없이 네 각과 머리와 기름과 내장과 정갱이를 각각 쪼개어서 깨끗이 씻고 전부를 제단위에 바쳐놓고 불살라야 한다. "이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였다.
b.계속되는 번제(常燔祭, 민 28:1∼8, 출 29:38∼42)
일반 이스라엘 자녀들과는 별도로 제사장은 아침 저녘으로늘 번제를 드려야 했다. 그리고 번제단에는 언제나 불을 보존해야 되었다.22) 상번제의 제물은 오직 흠없는 수양이어야 하며(민 28:3, 4) 또 일년된 어린 것이어야 한다(출 29:38). 그 이유는 양은 소나 염소나 비둘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특징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양은 온유, 겸손뿐만 아니라 순결과 인내와 순종을 나타나는 동물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제물로서는 완전히 나타내는 것이었다.23)
번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그 의의가 크다. 제물을 불살라 드릴 때 그것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고 하였다(레 1:9, 13, 17). 또한 번제를 통해 제물드리는 자의 죄를 용서 받게 된다(레 1:4). 속건죄가 특수한 죄를 용서받기 우하여 드리는 제사라면, 번제는 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죄의 용서를 뜻한다.24) 더 나아가서 번제는 죄의 용서 이상, 복종이나 감사의 행동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전적
인 헌신을 뜻한다.25) Keil은 번제가 "여호와께 완전한 복종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길을 걷겠다."는 약속의 제사라 하며,26) De Vaux는 "예물에 의해 존경을 표시하는 것" 이라한다.27)
2) 소제,( The Cereal Offering, 레2:1-16)28)
상번제 후에는 항상 소제를 드린다(민28:3-5). 번제와 소제가 전선지서(the former Prophets)에서 빈번히 언급된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 소제가 번제후 곧 설명되어 지는 것은 자연스런운 것이다.
(1)어원적 어의
"소제"란 히브리어로 민하( )이다. 그 뜻은 "선물"의 의미이다. 이말은 비종교적인 측면에서 소군주가 대군주에게 충섬심의 표시로 드리는 조공을 가리킨다.(수22:23, 29, 삿13:19, 23, 왕상8:64, 왕하16:13, 15 참조) 이런 세속적인 의미의 말이 종교적인 의미로 바뀌어 사용된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dksle. 소제도 믿음의 사람이 그의 창조주 하나님께 드리는 일종의 조공이다.29) 조약이 체결된 때, 정복당한 ㅂㄱ성은 그 정복한 왕에게 조고을 바치는 것이 상례이다. 이스라엘은 역시 하나님께 소제를 드림으로써 그들의 충섬을 표시한다. 이 뜻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드린다는 말에서 음미된다(레2:2,9).
(2)제사의 성격
소제란 육신의 소산물을 하나미앞에 헌납하는 제사이다. 즉 짐승의 희생을 수반하지 않고 주로 토지의 소산으로 구성되어 노동의 열매를 뜻하는 유일한 제사이다(레2:1-16, 16:14-23).
(3)제사의식과 의의30)
소제는 소출의 "첫 이삭"(레2:14)이나 고운 가루로 만든 무교병(레2:1, 4)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이다. 꿀과 누룩을 사용할 수 없으며, 항상 개인이 드린 소제물은 고운 가루이며 그 전체를 다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한 웅큼만을 취하여 소제로 드리고(레7:9), 나머지는 제사장들에게 배분되어 회막에서의 양식으로 사용되었ㄷ(레6:16). 이 소제는 번제와 같이 드려졌는데 그 때는 반드시 포도주의 전제를 같이 드려야 했다.(출40:41, 레23:13, 민6:15, 17, 15:1-10, 28:31, 29:11, 10:19등).
레위기 2장 14절은 소제를 드리는 적당한 때가 첫열매를 가져올 추수기라 한다. 이때 드리는 소제는 계약을 미쁘시게 이행핫며 자비를 베풀어 약속의 따을 주신 하나님께 추수의 첫 소산을 드리는 감사예배로서의 (신26:1-10)의의를 가진다. 소제에 누룩과 꿀을 사용하지 말고 기름과 유향과 소금을 쳐서 화제로 ㄱ들리라고 했는데, 이는 누룩과 꿀은 썩게하는 경향이 있으나 기름은 성령을 , 향은 기도를 , 소금은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순결성을 상징하는 깊은 뜻이 있다. Wenham은 The Book of Leviticus에서 "언약의 소금"이란 구절을 통해 소금을 계약의 상징으로 이해했는데(민18:9, 대하 13:5참조), 소금
은 옛날에 불과 같이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희랍사람이나 아랍사람들은 그들이 계약을 맺을 때 함께 소금을 먹었는데 그리하여 소금을 제물에 치는 것은 제사드리는 자가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소제는 예배하는 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랄 수 있다.31)
소제를 번제후에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번제를 통해 죄를 용서해 줄 때, 그 제사드리는 자는 그 답레로 소제를 통해 그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게 된다. 또한 소제는 감사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율법에 복종하고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언약의 소금이 소제에 필요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게 할 뿐 아니라, 그 맛을 지속시키는데 절대 필요한 생활 필수품이다. 따라서 이소금은 고대로부터 계약을 체결하고 그 체결한 계약을 확증할 때 계약 당사자들이 그것을 먹음으로써 계약의 지속성과 변개치 않을 것임을 표시했던 우정과 친교, 그리고 불변성의 상징물이었다.32) 이러한 견지(見地)에서 살펴볼 때 하나님께서 당신께 바칠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명령한 이유는 명확하다. 즉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은 언약이 진실되고 불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감사와 기쁨 중에그 언약을 믿고 바라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소금이 갖는 속성에 반영시켜 그 백성들에게 확증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영원히 변치 않는 확실한 언약을 가리켜 '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이라고 불렀다(민 18:19; 대하 13:5). 아울러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소제물에 소금을 치는 인간의 행위는 그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에 대해 믿음과 감사를 나타내는 신앙 고백적 행위였다. 그러므로 후일 그리스도께서도 이 '소금의 원리'로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을 삼으셨던 것이다(마 5:13; 막 9:50). 한편 후대에 이르러 이처럼 제물에 소용되는 소금은 제단에 불을 지필 장작나무와 더불어 공동 부담으로 마련되어(스 7:20-22), 성전 뜰 소금의방에 항상 비치해 두고 있었다.33)
또 소제물에는 원칙적으로 누룩(leaven)이 들어갈 수 없었지만, 예외적으로 곡식의 첫 열매를 예물로 드릴 경우에는 누룩을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누룩이 들은 유교병은 제사장들의 양식으로는 쓰여질수 있었어도 제단에서 불살라 여호와께 드려 질 수는 없었다. 제단에서 여호와께 드려질 수 있는 기념물(2:2)은 누룩이나 꿀이 들어 있지 않은 소제물로서, 소금과 기름 그리고 예물에 따라서는 유향까지 첨가된 소제물만이 연기나는 화제(火祭)로서 여호와께 불살라질 수 있었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일반적 원리를 소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기름(油)은 성령이나 성령의 사역을, 향(香)은 성도의 기도나 아름다운 생활 자세를, 누룩酵)은 죄와 부패를, 꿀(蜂)은 세상 기쁨과 연락을, 소금(鹽)은 불변과 정결을, 그리고 떡(餠)은 하나님의 말씀을 각기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3)화목제( , The Peace offering, 레 3:1-17)
화목제 (和睦祭-Peace offering)는 엄밀히 말하자면 친교를 위한 희생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제물을 드리는 목적이 의식적인 취식행위(제물을 먹는 일) 가운데서 하나님과 그 예물을 드린사람 사이에 친교가 있도록 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레 7:15∼18, 19:5, 8) 화목제를 드리는 동물은 암컷이나 수컷 모두가 가능한데 다른 모든 제물에서와 같이 흠이 없는 것이어야만 했다. (레 3:2, 8.13) 그 고기의 특정한 부분들은 다른 모든 제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위에 놓고 태웠다. (레 3:3, 5∼9∼11, 14∼16) 그 제물의 고기 가운데 가슴부위와 넓적다리 부위는 제사장의 몸으로서 그들이 먹도록 되어 있었다. (출 29:27-28, 레 31-36)
화목제에는 곡식과 기름이 제물로서 함께 드려졌다. (레 7:12-14, 민15:8-10)
화목제에는 특별한 제약없이 자원하여 드릴 수 있었고, 또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시행하기 위해 드리는 경우도 있었다. (레 7:16; 22:21)
또한 화목제는 제사장을 위임할 때 (레 9:4, 18, 22), 절기에(레 23:19), 나실인의 서원을 끝마칠 때에 (민 6:14, 17),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 있을 때 (수 8:31, 삿 20:4, 삼상 11:15, 왕상 8:63-64, 겔 43:27)에 드려졌다. 곧 감사와 자원할 때 소원을 가지고 드리는 제사들은 모두 화복제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레 7:11-18, 시 54:6-7)
구약에서는 이러한 화목제의 용례가 어떻게 쓰였는가를 살펴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대체적인 용례를 살펴 보면, 32:6. 화목제를 드리고 앓아서 먹고 마시며, 레 22:21. 소나 양으로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레 23:19. 일년된 어린 수양들은 화목제 희생으로 드릴 것이요, 민 15:8. 화목제를 수송아지로 예비하여 여호와께께 드릴때에는, 민 29:39. 서원제나 낙헌제 외에 번제, 소제, 전제, 화목제를 드릴 것이니라. 신 27: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수 8:31. 우리가 여호와께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앞에 드렸으며, 수 22:27. 우리 화목제로 섬기는 것을 우리와 너희.............., 삿 20:26.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삿 21:4. 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라. 삼상 11:15.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삼하 6:17. 예비한 자리에 두며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왕상 8:64.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의 기름을 다 용납할 수 없음이라. 대상 16:1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앞에 드리니라. 대하 31:2 행하게 하되 곧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대하 33:16 화목제와 감사제를 그 달에 드리고 유다를 명하여, 잠 7:14 내가 화목제를 드려서 시원한 것을 오늘날 갚았도다. 암 5:22 살진 희생이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 이상과 같은 구약의 용례에 따라 화목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갈라진 관계를 회복시키고 새롭게 친교의 장을 여는 구약의 중요한 제사 제도이다.
화목제에 대한 더깊은 연구는 다음장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것임으로 그 때에 집중적으로 살펴 보도록 하겠다.
4)속죄제.( , The Sin Offering, 레 4:1-5:13)
속죄제는 네 번째 소개되었지만 제사의 순서는 그 성격상 제일 우선적이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구별은 매우 모호하며 분명치 않은데가 있지만 속죄제는 하나님께 대한 죄, 특별히 그의 계명에 분명히 나타난 것(레4:2, 13, 22, 27)에, 또는 성물(삼상6:3)에 대하여 범한 죄를 사함받기 위함이었다.34)
(1)어원적 어의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하타트( )인데 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하타( )의 여성 명사 단수인데 그 미래형은 "과녁을 잘못 맞추다"는 뜻이며, 히필형은 "실족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피엘형은 "어떤 것을 잃음으로 고통당하다" "속죄제로 제사드리는 것과 죄에서 정결함과 자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과 같이 속죄제의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명령과 법규의 과녁을 벗어난 죄에서 청결과 자유를 얻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35)
(2)제사의 성격
속죄제는 부지중에 혹은 실술 지은 죄를 용서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레4:13, 22, 27). 그러므로 이 제사는 앞에 설명했던 번제나 화목제와는 달리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드려야 할 제사이다.36) 속죄제는 속건제와는 달리 범죄한 일을 배상할 수 없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린 제사이다. 예로서 부정한 들짐승의 죽은 시체를 만졌을 때, 혹은 무심 중에 악을 행할 것을 맹새했을 경우, 증언의 거부와 같은 특정한 죄에 대해서도 속죄제가 요구되었다(레 5:1-13).
(3)제자의식과 의의
속죄제는 번제와 같이 집단적인 속죄를 위한 것과 개인적인 것이 있다. 집단적인 것은 매절기를 맞을 때마다 드렸고, 개인적인 것은 필요한 때에 따라 드렸다.
속죄제의 제물은 몇 개의 등차가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에는 가장 값비싼 숫송아지어야 했고(레 4:3), 이스라엘 언 회증의 경우도 그와 같았다(레 4:22, 23). 평민의 경우에는 흠없는 암염소 또는 어린 암 양이었다(레 4:27, 28, 31). 만일에 평민으로 어린 암양을 살만한 능력이 없다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들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로, 다른 하나는 속죄제로 드리도록 했다(레 5:7). 이러한 제물의 등차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37) 그러나 힘이 거기에도 미치지 목할 경우에는 고운 가루 에바의 십분의 일을 속죄제물로 허락했다. 그것은 피없는 제물을 피있게 하여 드리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피흘림을 통하여 속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가난함을 인하여 죄사함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충족한 것이었다(사 52:3, 사 55:1 참조).
속죄제물로는 크거나 작거나 막론하고 흠이 없는 것이어야 했다.
흠없는 숫 송아지(레 4:3), 흠없는 숫 염소(레 4:23), 흠없는 암 염소(레 4:28), 흠없는 암 양(레 4:32) 이라고 했다. 이ㅓ럼 흠없는 것이야함을 강조한 까닭은 이 제물들이 장차 허물과 죄가 없으신 영원한 죄물되실 메시야를 암시하기 때문이다(히 9:14).
속죄사와 방법으로는 "그 숫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 바깥 재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위로 사르라" (레 4:11, 12)고 했다.
구약에서 진 밖이라고함은 저주받은 자가 버려지는 곳으로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수난의 죽음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38)
또 레위기 4:17에 보면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피를 찍어 여호와 앞장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라고 했는데 여기 일곱 번은 제물의 피로 그 속죄제를 드리는 자의 피를 완전히 또 영원히 속죄할 것을 의미한다. 7이란 수는 완전수이다.39)
5) 속건제( , The Treepass Offering, 레 5:14∼26)
속건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거룩한 백성을 삼고자 함에
있으며, 보편적으로 속건제는 인간이 인간에게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라 한다.40) 속건제는 제 2의 속건제라고 할 수 있다. 속건제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악 때문에 드리는 것이라면 속건제는 하나님의 권위와 권리침해와 같은 잘못 때문에 드리는 것이다.41)
(1)어원적 용어
속건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아삼)이다. 이 말은 죄(Sin)기 아니고 범죄(guilt), 범법(tersspass), 손해(damage)등을 의미한다.42) 이 것들은 생활질서를 파괴하는 반사회적, 반문화적, 반규범적 행위이다. 이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신앙생활의 질서를 침해하는 반신앙적, 반진리적, 반율법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속건제는 신앙인의 양심과 행위와 생활속에서 어긋난 모든 무제를 규제하고,바로치료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43)
(2)제사의 성격
속건제는 하나님이 백성으로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마땅히 바로 행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타인에게 덕을 세워야 할 것이나, 그렇지 못할 때 그 범죄를 사유하는 제사이다. 그 범죄는 범죄자에게 치명적이거나 또는 그 범죄의 대가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아 영원히 패망하거나 혹은 하나님에게 단절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하심 같이 거룩해야할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함과 의로움을
떠나 부정과 불결함을 입었을 때 그것에서 성결함을 가지는 하나님의 방법이다.44)
속건제가 속죄제와 다른 점은 집단적인 경우가 아니라 언제나 개인적인 것이었다. 긋것이 개인적으로 범죄했던지, 종교적이거나 물질적이건, 신령한 면이나 몸으로 범죄했을 경우 그기에 따를는 보상과 변상 그리고 성별하여 성결케 하는 젯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앞에서와 자신의 신앙 양심상 정당하게 치르는 법이다.
(3)제사의식과 성물
속건제는 범죄의 성질에 따라서 그 제물과 제사가 다르다. 이 제사에 해당하는 범죄들이 다양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제물과 제사도 다종, 다양한 것이다.
예를 들면 여호와의 성물에 그릇 범죄하였을 때에는 수양을 드리되 범죄한 본물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돌릴 것이며(레 5:14-16), 또 여호와께 성실치 못하여 범죄하였을 때에는 흠없는 수양으로 드리고, 범죄 물건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드린다(레 6:1-7). 그 다음 질병을 당한 겨웅로서, 문둥병 환자와 그 집이 그 병에서 나아 성결케 하고자 할 때 정한 산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가지고 제사장은 정결케 하는 법대로 흠없는 어린 수양둘과 일년된 흠없는 어린양 하나와 또 가운가루 에바 십분의 삼과 기름 한 록을 취하여 드리게 했다(레14장). 유출병과 설정자의 경우에는 집비둘기 세끼둘을
취하여 제사드리게 했다(레14:1-15:2).
나실인으로서 성별된 몸을 더렵혔을 때, 집비둘기 두 마리와 산비둘기 두 마리를 가지고 회막에 나아가 일년도니 수양을 가져다가 속건제로 드린다(레6:12). 기타 여러 가지 범법 행위에 따르는 수야을 드리고, 몸으로 범죄하였을 때 그 죄 값을 갚되 오분의 일 더하여 본주에게 돌릴 것이요, 속죄의 수양으로 제사드리라 했다(밈5:5).
그런데 속건제를 드릴 때는 먼저 죄를 자복하는 회객 있어야 했으며 이로써 속건제를 받게 되었다. 먼저 제사에 앞서 귀한 것은 범죄에 대한 자백과 회개이다(레 5:5-6).
6)위임제( , The Consecrations, 레 7:37, 8:22-36)
5대 제사와 더불어 위임제가 있는데(레7:37), 그것은 제사의 종류라기 보다는 제사장을 세우는 위임식의 제사(레8:22,28)를 의미하므로 다음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제3장.화목제사에 대한 연구
A.성경적 의미
1)석의적 연구
레위기 3장1절의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에서 여기 "화목제"란 말 (네바흐 쉘라밈) 으로서, "평안제"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감사제를 가리킨다(시
107:22). 레위기 3장은 주제가 화목제에 관한 규례 및 그 제물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장인데, 화목제 희생을 위한 화목제로 하나님께 바쳐질 희생 제물로는 제물 드리는 자의 생활 형편에 따라 다음 세 가지 짐승이 가능했다. 즉 그것은 1)흠 없는 수소나 암소(1-5절) 2)흠 없는 수양이나 암양(6-11절) 3)흠 없는 수염소나 암염소(12-17절) 등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화목제의 경우, 번제의 경우와는 달리 희생 제물로서 비둘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아마 이것은 화목제의 독특한 특징인 제사 후 공동식사에 있어. 비둘기는 여럿이 함께 나누어 먹을 음식량으로서 그 고기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희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바흐'는 '죽이다", '도살하다'란 뜻을 가진 '자바흐'란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써, 곧 죽임 당하여 제물이 될 짐승을 가리킨다.45) 또 번제나 속건제 등 대부분의 제사가 제사 예물로서 반드시 수컷만을 요구하였던 반면, 특별히 화목제 제물의 경우에는 암수컷에 전혀 구별을 두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화목제의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와 교통, 그리고 인간 사이의 상호 친밀한 교제를 도모하는데 있는 만큼 거기에는 남녀의 차별이나 구별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즉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補血)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은혜와 교통을 나누는 데에는 남녀는 물론 노소(老少)나 빈부(貧富), 그리고 귀천(貴賤)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굽제사의 경우, 암컷은 철저히 금지시킨다고 한다.46)
안수 행위는 제물을 가져온 자가 자신의 양손을 양뿔 사이에 얹고 힘껏 내리 누르는 행위를 가리킨다. Matthew Henry나 KeIl, Lange등이 이렇게 해석한다.47) 안수가 갖는 2대 의미는 연합(聯合)과 전가(轉嫁)이다.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라고 했는데, 초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 흘리는 모든 짐승을 잡을 때 결코 자신의 장막에서 잡을수 없었다. 반드시 성막 안으로 끌고가 회막문 앞 번제단 곁(북편)에서 잡아야 했다(1:11 그림도표 참조).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이 규례는 단지 제물용(祭物用) 짐승에게만 국한되었고(신12:20,21), 식용(食用) 짐승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팔레스틴 도처에 흩어져 살아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성막을 중심으로 운집하여 살고 있는 광야 시대와 같이 식용까지도 모두 성막으로 끌고 가서 잡도륵 하기는 너무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피를 ...뿌릴 것이며라고 언급된 것도 화목제가 하나님과의 화해와 교제. 그리고 인간상호간의 기쁨을 나타내는 축제의 제사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제단 사면에 뿌려지는 희생 제물의 피 때문이었다. 곧 대속과 속죄를 상징하는 피가 제단에 뿌려짐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모든 죄악과 진노의 휘장이 찢어지고,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모든 불신과 증오의 담벽이 허물어지게 되는것이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구약시대 이 흠 없는 희생 제물과 피는 장차 우리 인간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 따라서 평강과 친교와 화해를 나타내는 화목제에 이처럼 희생의 피가 반드시
뒤따랐음은 바로 이러한 구속사적 이유 때문이었다.
레3:4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는 말씀은 화목제 희생 예물 중 반드시 여호와의 몫으로 구분되어 화제(火祭)로 여호와께 불살라 드려져야 할 부분은 네 부분으로서 다음과 같다. 1) 첫번째 부분은 내장(entrails,창자)에 덮인 기름 부분으로 위(胃)에서 장(臟)까지내장을 전체적으로 싸고있는 큰 꺼풀(the large net ) 부위이며. 2) 둘째부분은 내장에붙어있는 모든 기름 부위이고, 3) 셋째 부분은 두 콩팥(kidneys)과 허리(loins)주변에붙어있는 모든 기름 부위이며, 4) 그리고 넷째 부분은 간(liver)위를 덮고 있는 꺼풀 부위이다.48) 이것은 희생 제물의 속부분(inwards)으로서 가장 기름지고 좋은 부위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우리가 깨닫는 바는, 인간이 하나님께 바쳐야만 하는 부분은 우리의 속 심령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가장 귀하고 진실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요4:24; 롬 1 : 9). 레3:5에서는 아론의 자손만이 언급되는데, 구약 시대에는 오직 이들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제사장들만이 제단 위에 불을 피울 수 있었고 또한 희생 제물의 피를 뿌릴 수 있었다(Lange). 따라서 예물 드리는 자는 단지 제물을 성막으로 끌고와 제물 위에 안수한 후 잡아 그것을 제사장에게 건네줌으로써 그 예물이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준비할 뿐이었다.
또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라고 하였는데, 화목제의 희생 예물인 여러 부위의 기름과 콩팥은 반드시 번제물 위에서 불 살라져야 했다. 그런데 여기 번제물은 특별히 헌신할 때 드려지는 특별 번제물(1:3-7)이 아니라, 매일의 순종과 헌신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
들이 매일 조석(朝夕)으로 여호와께 드렸던, 상번제물(常燔祭物)을 가리킨다(민28:3-8). 따라서 번제물은 항상 번제단 위에서 불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번제물 위에 화목 제물을 올려 자신께 향기로운 예물로 드리도록 명한 것이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근거 위에 비로소 '화평' 의식이틀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49)
그리고 흠 없는 것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 언급되고 있다. 모든 제사 예물에 누차 강조되고 있는 이 말은 단순히 예물을 정성껏 고르라는 뜻 이외에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 먼저 이 말은 거룩하시고 완전 무결하신 하나님께 흠있는 제물은 그 속성상 절대 합당치 않다는 뜻이며, 나아가 이 말은 장차 모든 희생 제물의 실체(實體)로서 죄인들의 죄를 위해 죽임 당하실 대속 양,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이 한점 흠 없다는 사실을 뜻하고 있는 말이다(히7 :4).
번제의 경우와 같이 화목제에 있어서도 짐승을 회막문 앞 여호와 앞으로 끌고 나오는 것, 예물 드리는 자가 안수하고 도살하는 것, 그리고 제사장이 꾀를 단 사면에 뿌리는것 등 제사 드리는 방법은 같다(1 : 3-4). 다만 화목제가 번제와 달리 차이가 나는 것은 희생제물의 고기를 처리하는 문제이다. 즉 번제의 경우는 희생 제물의 가죽을 제외하고, 모든 고기부분을 온전히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야 하는 반면, 화목제의 경우에는 기름 부분과 콩팥 부분만을 불사르고 나머지 가슴 부분과 우편 다리 부분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려졌으며, 그리고 그나머지 모든 부분은 제물을 가져온 자와 그의 가족들이 가난한 자 및
레위인들과 더불어 성막뜰에서 교제를 나누며 먹었다. 이처럼 구약의 5대 제사 중 헌제자(獻祭者)가 자신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는 화목제이다.
레3:9에서 "미려골"이라는 언급이 있는데 이는 항문 뒤쪽에 있는 꽁무니뼈(backbone)로서, 곧 척추로 이어지는 기름진 꼬리뼈 말한다. 고대 근동에는 넓고 굵은 기름진 꼬리를 가진 양들이 많이 있었는데. 흔히 그 무게가 6kg 이상이나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힌 꺼풀을 콩팥과 함께 여호와께 드리는 식물로 불사라 들야 했다. 일반적으로 여호와께 드려지는 제물을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의 식물'(21:6,7), '여호와의 식물'(28:2) 등으로 부르고 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을 의인화시킨 수사법인데,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순종과 제물의 뿌려진 피를 보고서 그 제사 제물을 기쁘게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은 번제의 경우,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는 표현과 맥을 같이 한다.
12절에서는 소(1-5절)나 양(6-11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만 염소를 제물로 삼아 화목제로 드릴 수 있었는데 드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먼저 제물 드리는 자는 암수를 막론하고 흠없는 것으로서 화목제 예물을 정성껏 골라 그짐승을 이끌고 회막문앞 여호와 앞으로 나온다. 2) 예물 드리는 자는 짐승을 잡기 전 자신의 손을 제물의 머리 위에 얹고 힘껏 안수한다. 3)안수 후 이물 드리는 자는 그 제물을 번제단 곁 북편 뜰에서 잡는다. 4) 제사장은 그 잡은 제물의 피를 취
하여 번제단 사면에 뿌린다. 5) 마지막으로 제사장은 화목 제물로 지정된 여러 기름 부위와 콩팥 부위를 취하여 번제단 위 번제물 위에 올려 화제로 여호와께 드린다. 이를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라고 했는데, 이는 곧 회막문 앞 번제단 곁을 가리킨다. 그곳을 '여호와 앞'이라고 부른 이유는 회막은 여호와께서 임재해 계시는 지상 처소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13절에서 단으로 업급되어 있는데 곧 짐승을 잡아 바치는 곳이란 뜻이다. 보통 이 단은 놋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놋단(출39:39) , 혹은 제물이 거기서 불태워졌기 때문에 번제단(4 : 7)이라고도 불리워진다. 광야 시대 이 단의 크기는 가로 2.28cm, 세로 2.28cm, 높이 1.37cm 가량으로서 회막 내 성물(聖物) 중에서 가장 큰 기구였다. 후대에 이르러 이 단은 가로9.1m, 세로 9.1m, 높이 4.56m 가량의 크기로 커졌는데(대하 4:1). 이것은 솔로몬 성전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어원적 연구
"화목제"란 말의 히브리어 (네바흐 쉘라밈)은 다시말해 화평의 제사란 의미이다. 이 말은 "감사제(thanks-offering)" 혹은 "구원제(saving-offering)"라 불리운다. ’ 은 완전한 축복과 능력을 뜻하는 말로써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구원, 혹은 완전함을 얻는 것을 말한다. 화목제의 목적은 변함없는 구원을 감사하며 드리는 것이다. 때때로 구원을 소망하는 자가 이 화목제를 드린다. 그러므로 탄원의 제사(supplicatory offering)와 감사제를 표현하여 불운을 당했
을 때나, 혹은 하나님의 도움을 기원하는 날에 드려진다.50) 그러므로 화목제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호칭될 수 있으나, 그 중심의 뜻은 구원만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를 의미한다.51)
3)제사의 성격
화목제는 앞서 언급한 소제와는 두가지 점에서 다르다.52) 첫째 화목제는 감사드리는 자가 필요한 때 드리는 선택적인 제사이다. 둘째, 제물 일부를 먹을 수 있다. 화목제는 제물의 이부를 불사른 후 일부를 제사장이 먹고, 일부는 제사드리는 자에게 먹도록 돌려 보내진다. 그러므로 화목제는 하나의 축제 형시긔 제사였다. 화목제는 피를 뿌려 드리는 제사이며 번제나 소재와 같이 불태워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를 나타내는 제사이다(레 3:5, 16참조, 레 1:9, 2:2 등).
화목제를 드리는 이유에 따라 서원(to fufill avow), 자원제사(ㅁ freewill offering), 감사제사(thanke-giving offering)로 구분된다(레 7:12, 16, 시 96:12, 13).
4)제사의식과 의의
화목제의 제물로 쓰였던 동물은 번제와 같이 흠이 없는 소, 양, 염소 등이다. 번제와는 달리 수컷과 암컷이 다 사용되었으나 새는 드려지지 않았다.
레위기 3:2에 보면 제사드리는 자가 제물을 여호와께 가져와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한 후 잡아서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라고 했다. 여기에 특히 피를 뿌린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레 3:2, 18, 13). 피를 뿌리는 제물소와 양과 염소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나타내는 그림자이다.53)이 제물의 피와 하나님과의 화평은 밀착되어 있다.
화목제를 잡아 피를 뿌리기 전에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잡을 것이며"(레 3:2)라고 했는데, 여기서 안수는 곧 기도를 의미한다. 특별히 제사상이 안수할 때는 그 화목제를 드리는 사람의 죄를 고백하면서 안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피뿌림이 있기전에 회개함에 있어야 했다. 모든 죄를 회개할 때 그 피를 뿌려 사하고 그 후에 하나님과 깊은 은혜의 교통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54)번제 때에 제물 전체를 불사르는 것과 달리, 화목제사에서는 ①내장에 덮힌 기름 ②내장에 붙은 기름 ③두 콩밭과 그 위의 기름 ④간에 덮힌 기름 ⑤제물이 양인 경우에는 "기름진 꼬리"를 화제로서 불테웠다(레 3:3∼9). 한마디로 기름만을 태운 것이다. 본래 기름은 생명이니하나님께 속했다고 했다. 그래서 기름만을 태우고55) 제물의 가죽과 가슴과 우편 뒷다리는 제사장에게 돌렸다(레 7:8, 31 이하).
화목제를 집단적으로 드리는 경우에는 특별히 오순절과 같은 즐거운 절기와 또는 집단적인 경사가 있을 때였다(레 23:19, 삼상 11:15, 삼하 6:17). 그리고 화목재물을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즐거워하며 '자녀와 노비와 레위인들과 함께' 먹으며 기뻐하였다(신 12:6, 7, 11, 12, 18). 이것은 화목제가 하나님과의 화평은
물론 구원받은 성도들 사이의 화목을 위한 교제임을 가리킨다.
화목제를 드릴때에는 세가지 예물을 드리는 순서가 있다. 즉, ①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일 ②서원의 예물을 드리는 일(서원제) ③자원의 예물을 드리는 일(자원제)이다(레 7:15, 16). 이것들은 문자 그대로 감사와 즐거움과 서원을 제물로 표현하는 제사이다. 오늘의 예배에도 이러한 정신을 언제나 반영해야 할 것이다.
B.제사의 일반적 이해와 화목제
출애굽기 29장에서 최초로 제사제도와 제사장이 언급된다. 제사장 직분을 위임하여 제사제도를 정착시킬 것이 언급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모세가 지니고 있던 3대 권한(종교, 사법, 행정권) 중 제사장직(종교권)을 아론과 그 아들에게 위임하라는 지시이다(28:1).
1)제사제도의 시작과 제사장
젊은 수소 하나와 ... 수양 둘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제사장직올 위임하기에 앞서 그들을 성별케 하는 데 필요한 제사, 제물로 쓰라는 것이다. 이중 수소는 속죄제를 위한 것이며 수양 둘은 각각 번제와 화목제를 위한 것이다. 여기서 화목제와 다른 제사와의 관계서을 찾게된다. 흠 없는 것으로 드려져야 했는데 원뜻은 '완전한'이다. 이는 단순한 정성을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완전하시기 때문에 이러한 제물을 요구하신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제물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실 어린양 예수의 완전하심을
상징한다(히 4:15)고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가서 이스라엘은 이러한 깊은 영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흠 있는' 제물을 드리는 등 외형적 형식으로 치우쳐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말 1:7, 8).
출 29:2에서무교병가 기름썩인 무교 과자와 기음 바른 무교전병을 모두 고운 밀가루로 만들어라고 언급되어 있다. 이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각각 '케이크'(cake)와 '웨이퍼'(wafer)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들을 누룩을 넣지 않고서 만든 까닭은 무교병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누룩은 부패와 죄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12: 8). 그리고 이것들에 기름을 섞거나 바른 것은 하나님께 성별해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제단이나 제물, 제사장과 왕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성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28:41). 한편 이러한 무교병과 무교 과자, 무교 전병은 하나님께 소제(素祭)를 드리는 데 사용되었다. 제사장의 위임을 위해서는 속죄제용 젊은 수소 한 마리와 번제용과 화목제용 수양 두마리를 필요로 했다. 이것을 회막 문으로 데려다가라고 했는데 여기서 '데려다가'에 해당하는 원어는 '카라브'로 '가까이 데려간다', '근처로 데려간다'는 뜻이다. 따라서 본문은 '회막문 근처로(가까이로) 데려다가'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회막 안, 즉 성소에 들어가지 않고 그 입구에서 위임식이 거행되는 이유는 아직 제사장의 성직에 임명되지 않은 자들이 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소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56)
아론의 후손들, 제사장의 직분은 그들에게만 맡겨 제사장 직분에
대한 아론 가문의 '배타적' 권리를 영원한 규례로 명시한 것이다. 이같이 아론 가문만이 제사장 직분을 고유하게 맡은 것은 불규칙적이고 개인적인 제사를 방지하며 또한 훈련된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올바른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는 아론 가문이 아닌 사람들이 임의로 제사장직을 맡았고(삿 17, 18장), 다윗 시대에는 두 가문에서 제사장이 나오기도 하다가(사독과 아비아달, 삼하 8:17;15:24-29;19:11), 바벨론 포로 이후에 가서야 아론 가문의 제사장 세습제가 완전히 정착되었다. 따라서 그 기간 동안에는 옳바르지 못한 제사가 많았고 때로는 왕이 제사장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삼상13:9, 10; 왕상 3:4;대하 26:10-20).
이때에도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는 것은 사람과 제물을 동일시하여, 그 제물에게 사람의 죄를 전가시킨다는 의미를지닌다(레1:4;4:4;8:15;민 8:10, 12). 이외에도 성경에는 안수의 예가 자주 있는데 이를 살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신성 모독자를 돌로 칠 때(레 24:14) : 이 때는 신성 모독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들음으로써 손상된 자신의 인격과, 자신들에게 임할 심판을 전가시킨다는 의미이다. (2) 병을 고칠 때(막 6:5:행 28:8) : 치유의 능력을 안수를 통해 병자에게 옮긴다는 의미를 지닌다 (3) 성령을 받게 할 때(행 8:18) : 이때의 안수는 성령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된다는 의미이다. (4) 직분을 위임할 때(행6:6;13:3; 딤전 4:14) : 안수하는 사람이 자신의 권위와 직분, 능력 등을 타인에게 전수함을 뜻한다 이처럼 성경 가운데는 안수가 자주 나타나며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그 효용성을 잘 이해하며 신중히 시행해야 할 것이지, 결코 안수를 인위
적인 목적으로 남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안수는 그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단계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히 6:2).
이 때에도 모든 기름과 ... 꺼풀과 두 콩팥은 여호와께 태워 드렸는데 짐승의 여러 부위 중 이것만 단 위에서 태우는 까닭은, 이것은 희생 제물의 속부분으로서 가장 기름지고 좋은 부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특히 내장은 짐승의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으로 그 생명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의 속죄제는 특히 대제사장을 위한 것인데 이처럼 성직의 위임식에서 죄의 회개가 선행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이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 역할을 담당할 대제사장 역시 죄인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한 아론의 반차를 쫓는 대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는 불완전하고 일시적임을 지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사를 가르친 것이다.57) 속죄 제물과는 달리(13절) 번제 제물은 내장 뿐 아니라, 그 고기와 머리, 다리 부분까지 단 위에서 모두 태워야 했다(18절). 그 까닭은 그것이 인간의 죄를 짊어진 속죄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는 자원 제물이기 때문이었다(18 절). 이것을 번제로 드려야 했는데, 번제는 '계단', '올라감', 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데 그것은 이 말이 '오르다', '올라가다'라는 동사 '알라'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58) 즉 연기가 위로 '올라간다'는 의미
로부터 번제를 나타내는 말로 쓰인 것이다. 한편 번제는 제물 전체를 태우는 제사로 하나님께 '완전히 드린다'는 의미를 지닌다. 제사장의 위임식에서 속죄제에 이어 이러한 번제를 드리는 것은 회개에 따른 완전한 헌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레아흐 니흐 호아흐)가 되었다. '레아흐'는'향내', 냄새'라는 뜻으로 '바람불다', '숨쉬다'는 뜻의 '루아흐'에서 유래했으며, '니흐호아흐'는 본래의 의미가 '편안한', '즐거운'이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즐거운 향기', '편안한 향기'가 된다. 즉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어 죄로 인한 진노가 멈추고, 이제 안정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이다. 한편 '루아흐'는 명사로 쓰일 때 '바람'이라는 뜻과 함께 '영'이라는 뜻도 가진다. 따라서 '향기로운 냄새'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즐거운 영적인 제사가 된다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사실 짐승을 태우는 냄새가 실제적으로 향기로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편에서 피제사로 드리는 인간의 기꺼운 순종을 향기로운(즐거운) 냄새(영적 제사)로 받으시는 것을 뜻한다 하겠다.
출29:20에서 오른 귓부리... 오른손 엄지... 오른발 엄지에 피를 바를 것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화목 제물로 잡은 수양의 피를 제사장의 이러한 신체 부위에 바르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의 전적 순종과 헌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손과 발의 엄지 가락을 잃으면 그는 힘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삿 1:6). 따라서 손과 발, 특히 그중에서도 오른손과 오른발의 엄지는 힘을 나타내며 여기에 피를 바른 것은 이것으로 열심히 봉사해야 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귀는 대체적으로 '예
속'을 의미하는 신체 부위이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에서는 어떤 사람의 귀에 구멍을 뚫으면 그는 일평생 상전에게 소속된 사람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었다(21:6). 그러나 여기서 제사장의 귓부리에 화목제물의 피를 바른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서 그 말씀대로 철저히 순종하는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행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59) 이처럼 화목제 수양(위임식의 수양)은 소제와 더불어 드려졌다.
출29:24에서 그 전부를 아론의... 손에 주고 했는데 여기서 '준다'는 뜻의 '숨'은 '두다', '가져오다', '놓다'라는 뜻과 함께(어떤 지위에)'지명하다', '임명하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모세가 제물을 아론과 그 아들들의 손에 넘겨 주는 것은 곧 자신의 제사장직올 그들에게 이양함과 함께 정식으로 그들을 제사장에 임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흔들어서 드리라고 했는데, 이는 기본형 '누프는 '흔들다'는 뜻과 함께 '흔들어 바치다'는 의미도 갖는다. 따라서 이는 봉헌하는 제물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앞뒤로 흔드는 것을 말하며 또한 음식을 식탁 위에 차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제는 번제나 화목제 또는 소제 등과 같은 제사의 종류가 아니고, 화제나 거제(擧祭), 전제(奠祭)와 같은 제사 드리는 한 방법이다. 요제의 방식은 제사장이 제물을 높이들어 흔들었다가 내리는 것으로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 바쳤던 것을 다시금 제사장이 자신의 양식으로 되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적으로 중요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는데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성도의 양식으로 주신 사실이다(요6:27,
48-58). 한편 이러한 요제(save offering)는 치유된 문둥병자의 속건제(레 14:12, 21, 24)나 첫 열매의 곡식 단(레 23:15) 및 칠칠절때 드리는 두 떡덩이(레23:17, 20)등을 하나님께 바칠 때도 이용되었다.
이처럼 대제사장 위임식은 7일 동안 행해졌는데(35절), 이후부터 후임 대제사장 역시 이에 준하여 7일 동안 위임식을 거행해야 했다. 한편 성경에서 '7'은 '거룩'과 '완전'을 상징하는 수이다. 따라서 제사장의 위임식 날수를 7일로 정한 것은 이와 같은 '거룩한 완전'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제사장의 위임과 화목제
원래 화목제사는 공동 식사 곧 제물을 드리는 사람과 제사장 등이 그 희생 제물을 할당받아 함께 먹는 것으로 절정을 이룬다. 이때 제사장에게 돌아가야 할 몫과 제단 위에서 불사르는 부분 이외의 고기는 제사를 드리려고 제물을 가져 온 사람과 그 가족, 그리고 레위인까지 포함하는 공동의 양식으로 사용되었다(신 12:12, 18, 19). 그러나 여기서는 제사장 위임식을 위한 화목 제사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을 제외한 아론과 그의 아들들만이 식사에 참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때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고기는 하나님께 제물로 불태워 바친 것을 제외한 모든 부분이다. 이와같이 제사 후 남은 부분을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경우는 이외에도 속죄제가 있다(레 6:26).
출29:33의 속죄물은 단지 속죄용 제물(10-14절)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번제용 제물(15-18절)과 화목제용 제물(19-25절)까지도 지칭하는 말이다. 그 모두를 속죄물(贖罪物)이라 칭한 것은 통상 속죄제
로 죄를 속하지만, 언제나 화목제도 피 뿌림 의식으로 죄를 속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레1:4;3:2).
그러나 타인은 먹지 못하였다. 타인이란 '죄를 짓다'는 뜻의 어근에서 유례한 말로서 '범죄'라는 뜻과 함께 '이상하다'는 뜻도 갖고 있다. KJV는 이를 '낯선 사람'(stranger). NIV는 부정적인 부사 형태인 '아무도'(no one else)로 그리고 NEB는 '자격없는 사람(no qualified person)등으로 번역했는데, 원래 어근을 따라서 '죄인'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경우 바로 뒤이어 나오는 '성물이 됨이며'란 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전체 뜻은 '일반 백성들이 제사장 위임식의 속죄 제물을 먹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죄를 사함받지 못한 죄인이기 때문이다'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고기가 아침까지 남았으면... 불에 사를지니라고 했는데, 이처럼 제사드린 후 남은 고기는 당일에만 먹고 나머지는 모두 소각시켜야 했다. 그 이유는 무더운 팔레스틴 지방에서 고기를 남겨두면 쉽게 부패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까닭은 거룩한 의식에 사용된 거룩한 음식이 경솔하게 취급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서이다(23:18). 아론과 그 아들들의 제사장직 위임식을 칠 일 동안 계속하라는 지시이다. 그런데 '7'이란 성경에서 종종 거룩과 완전을 나타내는 숫자로 쓰인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아들들로 하여금 7일 동안 계속 위임식 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은 그들의 속죄와 헌신, 화목, 봉사 등을 거룩하고 온전케 하려 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29:36에서 이모든 일을 위하여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라고 했는데 단도 부정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부정한 것으로 간주, 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한 의식을 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깨끗케 해야 했다. 그 뜻은 '속죄하다', '회개하다'는 인데(본래 의미는 '빗나가다') 개역 성경이나 영어 성경(KJV, NIV)에서는 '깨끗하게 하다'(purify)로 번역하고 있다. 아뭏든 이를 앞 부분의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와 연결해서 직역하면 '속죄제를 지내는 동안 단을 위해 속죄하라'는 말이 된다. 즉 이는 매일 드리는 속죄제때 단을 위해서도 속죄하라는 뜻이다. 한편 레 16장에 의하면, 같은 이유에서 비단 단(壇)뿐만 아니라 성소의 모든 기구들도 속죄일에 '깨끗함'을 입는 의식을 거쳐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제사장의 위임식 기간 은 매일 상번제를 드려야 했다. 직역하면 '매일' '계속적으로'라는 뜻으로 7일간의 제사장 위임식 기간 동안 매일 드려야 하는 상번제(上燔祭)를 가리키는말이다. 한편 이스라엘 역사상 이러한 상번제는 점차 율법 준수의 핵심이 되어졌는데, 이 제사시에는 번제와 소제와 전제도 한꺼번에 드려졌다(40, 41절). 눅2:8에 나오는 목자들은 아마도 성전에서 매일 드려지는 이같은 제사에 쓰일 양을 치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유대인의 전통에 따르면, 아침에 드리는 양은 전날 밤에 지은 죄를 위한 것이고, 저녁때 드리는 양은 그날 낮 동안에 지은 죄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이렇게 정해진 시간에 드리는 제사는 아마도 나중에 시간을 정해 놓고 드리는 기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을 것이다(행 3:1).
밀가루 ... 기름 ... 포도주 - 여기서 밀가루와 기름은 소제용 제물이며(41절), 포도주는 전제용 제물이 필요했다. 전제는 일반적으로 술(포도주)을 제물위에 뿌리는 제사의 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상징한다. 이러한 전제(drink offering)는 상번제(민28:7)때에 조석으로 함께 드려졌고, 안식일 제사때(민 28:14)에도 드려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초막절 제2일과 그 이후의 각 절일들에도 드렸던 것으로 확인된다(민29:18, 21). 그러나 그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
하나님은 이제 내가 거기서... 만나리니... 거룩하게 될지라고43절에서 말씀 하신다. 하나님께서 회막 곧 지성소 안의 속죄소 위에서(25:22) 제사장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실 것인데, 이로 인해 회막이 거룩한 장소가 될 것이란 의미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구절을 하나님께서 회막 안에만 하신다거나 오직 그곳에서만 백성들을 만나신다는 한정된 의미로 해석해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무소 부재(無所不在)하신 편재적(偏在的) 속성을 지니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로 보아 하나님께서는 회막이라는 구체적 장소를 통해 당신의 백성됨과 보다 직접적인 교제를 나누시기 원하셨던 것임을 알 수 있다(25:22). 여기에 진정한 샬롬이 있는것이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여기서 '중에'라고 번역된 '베토크'는 '중앙에', '가운데'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에 거하시겠다는 뜻으로 일차적으로는 성막의 위치가 이스
라엘 진의 중앙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그러나 나아가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모든 영역 중심부분에 함께 하시겠다는 표현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계시겠다는 표현은 신, 구약을 통해 자주 나타나고 있다. (25:8;레 26:11, 12; 고후 6:16; 계 21:3).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라고 언급된 것은 문자적으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리니'이다. 이 약속은 레 26:12에서 "나는 ...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로 발전하여 이후 계속 반복되는데(렘 7:23;11:4;24:7;30:22;겔 11:20;36:28;37:27), 특히 렘 31:31-34에서는 이를 가리켜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이라고 하여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가 공고히 수립됨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언약 관계가 정식 체결된 것은 출애굽을 통해서이며, 그것이 제사장의 위임식 때에 공식화되었고, 예언자들을 통해 완전한 형태로 확인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에 의해 완전성취된 것이다.
3)고대 근동의 제사제도와 차이점
구약초기 시대부터 AD 70년 제2성전 파괴시까지 히므리 종교의 지배적 요소는 공적 및 사적인 일련의 제의와 의식은 희생제사(Sacrifices and Offerings)였다.60) 그러나 히브리의 희생제사와 이방인들의 희생제사는 상당부분에 유사성이 발견 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희생제사와 제물은 여러 가지 동기들이 있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신에게 즉 신앞에 무엇인가를 드린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렇ㄴ 제사물들을 가리키는 가장 초칭적인 히브리 명칭들, 다시말해서 (마타나:레23:38, 신16:17, 겔20:26, 31, 39)이나 (민하: 충29:41, 40:29, 레2:1)등,그리고 (코르반: 레2:1, 4:7, 12, 민31:50, 느10:35, 막7:11)등은 이러한 의미를 소유한다. 예물을 지칭하는 이러한 용어들을 볼 때 이 용어들이 결코 이스라엘에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61)
첫째는 회유적 의미의 제불을 드리는 것이다. 희생제사의 제사는 일차적으로 왕 또는 상급자에게 호의를 얻고자 할 때 그에게 선ㅅ해야 했던 것들과같은 이치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 될 수 있을 것이다(삿 3:17, 삼상 10:27, 말 1:8 참조, Plato Republic 390C:"예물은 신들과 고귀한 왕들 모두를 설득시킨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은 회유적이라 하겠다. 이러한 점은 에서 파생된 동사가 아카드에서 "탄원제시"라는 특수한 함축적 의미로 실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더욱 설명된다.
(2)공물(첫 열매와 십일조):상급자에게 드려지는 예물은 쉽사리 공물의 성격을 띄었으리라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와 가 구약에서 신하들이 군주에게 드리는 공물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시 68:18<H 68:19>에 있는 ; ;삿 3:18; 삼하 8:6 왕하 20:12; 사 39;1 등에 나오는 ). 한편 " 를 제공하다"라는 표현이 암 5:25에서는 하나님께 제물을 가져옴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고 왕상 4:22에서는 왕에 대한 공물 지불에 대하여 사용된다.
의 이러한 용법은 동족어인 아카드어 mandattu에서 그 평행적 측면이 발견된다(참조, 느 5:4의 ). 한편 우가리트에서 출토된 아카드어 문서들에서는 군주에게 돌려지는 존경의 표시를 나타낸다. 희생제사와 제사가 공물이라는 관념은 왕으로서의 신이라는 일반적 개념에 기초할 뿐 아니라 더욱 특별히 토양을 소생시키는 어떠한 것을 활성화 시키는 자는 그 소산물의 몫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고대 근동지역의 원리 - 특히 아랍에서 입증되는데-에 기초를 두고 있다. 비 등을 내려주는 자로서의 신은 이러한 대가를 당연힝장한다. 그것도 말하자면 그의 투자에 대한 분깃이며 그에게 그것을 드리지 않는 것도 불경한 행동일 뿐 아니라 횡령행위이다. 사실상 동일한 원리에 입각하여 전리품의 한 몫이 승승장구의 군대를 인도한 신에게 바쳐졌다.(삼상 22:10, 왕하 11:10).62)
신은 이러한 공물로서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처음난 숫컷( , )을 바칠 것을 주장 하였다. 비록 인간존재의 경우에서나 또한 부정한 동물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금전 또는 다른 대응물에 의하여 보tkd을 하는 규정이 주어지기는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유비적인 제물들이 메소보다미아에서 페니키아의 희생제물 목록에서 남부 아랍아 비문들에서 발견된다.63)
(3)봉헌 : 예물들은 회유적이거나 공물적인 것 외에 봉헌적인 으미로 씌였다. 다시 말해서 소원성취를 위해서 이익의 번영의 위해서 신에엑 구체적인 지불을 하겠다는 서원 또는 약속의 결과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예물로는 라는 구별된 떼어놓은 것을 드린다는 의미도 있었던 것 같다.(레27:2)
(4)감사 : 봉헌 제물은 받은 인혜를 인정하여 드리는 것으로 그것은 자연히 감사제물과 통합되는 경향을 띠고 있게 된다. 비록 후자가 이전의 어떤 약속 또는 계약을 의미하지 않는한 그 둘은 물론 형식상 구분되기는하지만 말이다. 더욱이 레 7:15 이하에서 감사제물은 제물을 드리는 자들에 의해 태워지는 식사의 범주에 속하며 어떤 것의 성공적인 결과를 기념하는 축제적 잔치에서 기원되었다고 보기도 한다.64) 그래서 제물은 감사와 함께 축제의 음식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화목제의 제사양식과 비슷한 듯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에 따르면 고대근동의 제사양식과 혹은 그의미가 상당히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방인의 제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기원과 의미가 이스라엘의 제사규례에는 있는 것이다. 첫째 무엇보다 다른 차이는 기원에 있어 이스라엘의제사는 신적(神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특별한 존재다. 그것은 한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하나님과의 교제에 두셨기 때문이다.65)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중에서 그리고 하나님께 의존할 때에만 그 존재의 바른 의미를 찾게된다. 그런데 첫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거룩한 제의 기원은 명백히 선언도니 것은 아니지만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인간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직후에 계시
되었다.66)성경은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 한분만 섬겼으며 동물제사를 드렸음을 보여주고 있다.67) 하나님께서는 죄는 오직 제물의 피를 흘림으로서만 사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창 3:21), 즉 대속의 제물만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아벨은 양을 잡아 드렸고 가인은 따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드렸으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선택하심으로 비로소 제사의 방법과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68) 아벨의 피있는 제사는 믿음으로 받아졌고(히11:4), 노아(창 8:20), 야곱(창31:54) 그리고 출애굽전까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을 알았고 실천했다(출1)25). 이러한 성경적 기원의 근거를 살펴볼 때 고대근동의 이방인들이 드렸던 제사는 아벨의 제사적 성겨보다는 가인의 성격에 가까운 것으로 그것은 계시에 의한 방법이 아닌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생가으로 신에게 회유의 의미로서 제사를 드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물론 그들 역시도 제사에 대한 기본적인 소스는 그들의 조상인 가인에게서부터 전달 되어온 것일 것이다.
C.성경적 제사의 근거
1)제사의 계시
앞서 살펴 보았듯이 히브리인들의제사는 이방인들의 것과는 기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철저하게 계시에 의해서 하나님께로부터 그 내용이나 방법이 직접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족장시대를 거쳐 이스라엘의 역사속에 가티 해온 해온 제사제도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한 후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체적으로 계시를 받으면서 확정적으로 정착된다.69)
제의는 하나님과의 교제수단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교제를 위한 속죄수단으로 더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히브리제사 제도에서 발견한다.70) 모세를 통하여 계시된 이 제의는 주전 8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기 까지 많이 변질되었다. 처음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행하시고 법률과 의무를 확대하였다. 이때의 약속은 여호와와 인간의 내적인 친밀성을 강조한 점이었으며 여호와 편에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게 미치게 하시고 이스라엘 편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요구도니 의무와 모세의 율법을 첨가하여 수행해야할 의무가 주어졌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 계약을 어길 경우 여호와께서도 버리시겠다는 조건적이고도 쌍무적인 계약체결 이었다.71) 여호와와 이스라엘간의 계
약관계는 일종의 피와 희생제사이며(출24:11, 24, 신37장) 계약을 구성하는 중요요소들이며 여호와와 백성을 결합시킨다는 의미에서 공동희생제사의 의미가 있었다. 계약적 요소로 인해 두려운 가운데 끊어지지 않고 계속 드려져야 했다(출30:58). 그리고 이스라엘이 제사의 존속을 위해서는 이방인들에게 주어지지 않은 성전이 주어졌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회막(Tabancle)으로 주어졌다가 다위시대를 거쳐 솔로몬왕 때에 성전으로 지어져 이스라엘의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의 제사와다른 계시적 요인과 성전이라는 구체적인 제의의 장소를 주신 것은 히브리제의만이 가지는 특별한 것임을 우리는 알게된다.72)
2)제사의 방법
히브리제사에서 예물은 "코르반"으로서 이는 기본 동사 '카랍' '가까이 가져가다' 혹은 '바치다'란 뜻에서 파생되었는데, 따라서 '예물'이란 인간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가지고 가서 바치는 '제물' 혹은 '선물'이란 의미이다.73) 특히 이 말은 비단 번제 뿐 아니라, 모든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드리는 제물 및 선물(막 7:11)을 의미한다. 예물은 이처럼 드리는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참 기쁨을 누리게 해 준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예물 속에는 궁극적으로 그것을 바치는 인간을 유익케 하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한편 70인역
(LXX)은 이 말을 '선물'이란 뜻의 '도론'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물은 생축 중에서 드려야 하는데 여기서 '생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헤마'는 간혹 육축으로 번역되는데(창 1:24; 6:7), 일반적으로 몸집이 큰 네발 짐승을 가리킨다. 특히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소'(牛)와 '양'(羊), 그리고 '염소'를 가리키는데 이는 14절의 '새'(鳥)와 분명 대조된다. 한편 예물을 반드시 '생축 중에서' 드려야 하는 이유는, 생축에게는 '피'가 있기 때문이고 이 피는 신약시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가장 완전하고, 실체적인 생축은 후일 베들레헴의 '외양간에서 태어나신'(눅 2:7)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레익 1:3에 딸면 예물을 하나님깨 드리는 방법으로는 번제(올라) 가 가장 많은데 그 뜻은 '피워 올리다', '올라가다'란 뜻의 기본 동사 '알라'에서유래한 말로, 곧 번제(燔祭)란 희생 제물을 불에 태워 그 냄새를 하나님께 피워 올려야 하는 제사임을 암시한다. 또한 번제는 고대의 제사법 중 가장 일반적이고 오래된 제사 형태로서, 모든 제사 중 가장 기본적이고 중심적인 제사이다. 이때 모든 희생제물은 흠없는(타밈) 것으로서 드려야한다. 신체적으로 아무런 결함이나 하자(瑕疵))가 없는 온전한 상태를 가리키는데, 이것은 번제 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쳐질 희생 제물의 가장 필수적인 요건이다. 즉 흠 없는 제물은 그 제물을 흠향하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속성과 일치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장차 신약 시대에 흠 없고 죄 없으신 몸으로 대속 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히 7:26)를 예표해야 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요구되어졌던 것이다. 유대 전승에 의하면 예물 드리는 자가
생축을 성막으로 끌고 오면 담당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기 전. 먼저 그 생축의 하자 여부를 면밀히 감별했다고 한다. 한편 바울은 '타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모모스'를 사용하여 신자들의 성화(聖火)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엡 1:4; 5:27;골 1:22). 그리고 롬 12:1에서 그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말함으로써 구약 시대의 번제 정신을 승화시키고 있다. 번제의 경우에는 화목제와 속죄제와는 달리 희생 제물로써 반드시 '수컷'(male)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속건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5:15). 이처럼 구약 시대의 제물은 대개 수컷이었고, 의식(儀式)에의 참여 역시 남성(man)위주였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수컷과 암컷' 혹은 '남성과 여성'의 성(性)차별 사상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 이유는 구약 시대, 곧 옛 언약(히 8:7)하의 모든 의식과 제물은 '인자(人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상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남성안에 여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고(창 2:21-24;엡 5:22,23), 따라서 그 효력의 범위와 영향 역시 남녀 양성(兩性)에게 모두 적용되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도록 하는데 이는 '기쁘게 하다', '받아들이게 하다'란 뜻의 '라차'에서 파생된 말로 곧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도록 제물 드리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정성껏 드려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야 말로 제물 드리는 자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모든 제사 행위는 선지자 이사야가 경고한 바 대로 단지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요, 역겨운 고기 냄새만을 피울 뿐이다(사1:11-15). 같은 맥락에서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예배와 헌금 행위도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도록'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
야 한다(요 4:24).
그리고 희생제물은 안수해야 하는데, 안수(按手)는 피차간 서로 언합하여 하나기 됨을 상징하는 행위로서 안수의 목적은 자신이 가진 그 무엇을 타인에게 전가(轉嫁)시키시 위한 것이다. 따라서 제물에 안수하는 행위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안수를 통하여 그 제물과 하나됨을 나타내는 동시에 자신의 죄를 그 동물에게 전가시킨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제물 드리는 자는 자신이 직접 피를 흘리지 않고도 자신과 연합된, 안수받은 제물의 피흘림을 통해 자신의 죄를 속함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제물 드리는 자는 자기 대신 처참히 죽어가는 제물의 모습을 통해 죄의 심각성과 속죄의 은총을 마음속 깊이 체험해야 했다. 한편 '안수할지니'에 해당하는 원어 '사마크 야도'는 '그가 자신의 손을(위에) 얹힐지니'란 의미인데 원어상 그 말 속에는 두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1) 제물을 드리는 자가 '직접' 자신의 손을 제물 위에 놓아야 한다는 점과 (2) 제물 위에 손을 얹되 '힘껏 단단히 누르면서' 얹어야 된다는 점이다. 특히 이 점에 대해 유대 랍비들의 말을 빌리면, 제물을 드리는 자는 그의 양손을 희생 제물의 양 뿔 사이에 얹고 있는 힘을 다해 힘껏 눌러야 했다고 한다.74) 그렇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께 열납되어 속죄가 될 것이라고 약속되었다. '속죄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파르'는 본래 '덮다', '가리다'란 뜻이다. 따라서 속죄가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 앞에서 제물 드리는 자의 죄가 덮어지고 가리워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구약시대에 있어 이러한 동물의 피에 의한 속죄의 효능은 극
히 일시적이고 제한적이었을 뿐, 근본적인 속죄의 효능은 가지지 못했다(히 10:1-3). 그러나 신약 시대, 모든 희생 동물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에게 이르러 이제 그 피로 말미암아 인간 속죄는 완전히 성취되고 완성되어 영원히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도말되어졌던 것이다(히 9:12; 10:10-18). 한편 본절은 번제에도 속죄제에서처럼 속죄의 효과가 나타남을 의미한다. 소제를 제외한 모든 제사가 피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죄악을 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소제도 단독적으로는 드려지지 않았고, 다른 제사와 함께 드려졌기 때문에 결국은 피와 함께 드려지는 격이 되었다(7:12,13; 9:17). 따라서 이 모든 사실은 '제사'와 '피'와 '속죄'와의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
동물의 희생제사와 관련되어 주로 사용되는 잡으라는 단어는 특히 '처참한 살해'의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백성의 속죄를 위해 흠 없는 동물들이 대신 처참하게 살륙당했다는 사실은 장차 세상 죄를 짊어지실 어린 양으로서의(요 1:29)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의 극치를 예시하여 준다(갈 3:13). 따라서 희생 제물을 드려 죄를 속함받는 자는 죽어가는 제물의 모습을 통하여 죄의 심각성을 철저히 깨닫는 동시에, 아울러 크신 속죄의 은총을 잊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가죽을 벗겨서 드려야 했다. 희생 제물의 가죽을 벗기는 이유에 대해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성결 의식의 한 행위로써 제물드리는 자의 후패한 겉모습을 완전히 제거하고 오직 진실한 내면적 부분만을 드린다는 뜻에서 가죽을 벗겼다고 볼 수 있다. 둘째, 비록 짐승을 잡아 그 피를 흘리게 했다 할지라도 그 모습은 여전히 살아있을
때의 형태를 유지하게 된다. 따라서 완전할 자기 희생을 상징하는 번제 정신에 맞도록 하나님 앞에서 그 짐승의 형태를 아주 없애버리기 위해 가죽을 벗겼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이 두 견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온전한 마음이 담긴 '전적 헌신의 제사'임을 깨달을 수 있다. 한편 이렇게 벗겨진 짐승의 가죽은제사장의 몫이 되었는데, 이는 번제 희생물의 각 부위 중 제사장에게 돌아가는 유일한 몫이었다(레 7:8).75) 그렇게 해서 제사가 정해진 법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되면, 향기로운 제사가 된다. 즉 제사 드리는 자가 정해진 번제 규례를 따라 자발적인 순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제사를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뜻이다(엡 5:2;고후 2:15;빌 4:18). 특별히 여기서 '향기로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호아흐'는 '편안한'(Commfortable), '휴식의'(restful)란 뜻이다. 즉 이것은 희생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됨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고, 이제 안정되고 평화로운 안식의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드릴 수도 있었는데 이들은 제물로서 그 비중이 동등한 단위임을 나타낸다. 그러나 암컷은 수컷보다 비중이 한 단계 아래였다(4:22-28). 제사 예물 중 비중이 높고 낮은 것을 드리는 것은 그 사람의 경제적인 사정에 따라서(12:8), 또는 죄악의 경중에 따라서(4:3-28) 드려졌으나 하나님께서는 모두 평등하게 받으셨다. 곧 하나님 앞에 '제물 없이는' 결코 설 수 없었으며, 또한 하나님께 가져온 제물은 '크든 작든' 결코 멸시되지 않았다.
번제용 희생 제물이 소나 양 혹은 염소일 경우에는 반드시 수컷이
어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성적(性的) 차별 의식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다. 구약 시대 수컷은 암컷을 대표할 뿐 아니라 암컷까지도 내포하고 있는 말로 이해하여야 한다. 나아가 보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번제 제물로써 수컷이 사용된 이유는, 암컷은 번식과 젖의 산출을 위해 보다 많은 숫자가 필요한 반면, 수컷은 적은 수만 있어도 족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빈번히 드려야 하는 희생 제물로써 수컷을 사용토록 배려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장에서 살펴 보았던 소제의 경우는 '선물' 혹은 '공물'(貢物)이란 뜻이므로 기본적으로어떤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favor)얻기 위하여 드리는 예물을 가리켰다(창32:21 ;43:15). 그러나 후에는 받은 호의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뜻하게 되었다(Kell). 한편 구약의 5대 제사 중 소제가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른 네 가지 제사와 다른 독특한 특징은 다른 4가지 제사는 동물을 희생시켜 드리는 '피 있는 제사'이나 소제만은 피 없는 '곡물제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소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번제, 화목제 등과 같은 피흘리는 제사들과 더불어 그 일부로서 함께 드려지는 소제의 경우가 있고(출 29:38,39;레23:12, 13;민 15:5-10), 또한 독자적으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 소제는 주로 피 흘리는 제사의 부속적 제사로서 특히 번제와 더불어 드려졌으나, 본장에 나타난 소제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감사와 충성올 표현할 이유를 발견했을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던 독자적인 소제에 관한 규례이다.76)
이 모든 규례를 주시면서 "여호와께서....가라사대"라는 구절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제사 규례와 같이 이하 서술되는 모든 제사 규례 역시 모세에 의해 창안된 규례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규례임을 밝히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다. 이처럼 여호와 종교의 특징은 여타 종교와는 달리 오직 위로부터 임하시는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계시(啓示)에 전적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 아놀드(Thomas Amold)는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가장 뚜렷한 구별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즉 "여타 종교가 인간이 신을 찾고자 갈구하는 종교라면, 기독교는 신께서 인간을 찾고자 갈구하는 종교이다'라고 했다.77)
이 모든 제사이 규례들은 사람들이 죄를 그릇 범하였을 때를 위하여 주신 은혜의 규례였다. 여기서 '그릇'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쉬가가'는 '길을 잃다', '실수하다', '비틀거리다', '잘못 행하다'란 뜻을 가진 '솨가그' 혹은 솨가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그릇범한 죄'란 의미 속에는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고 지은 죄,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어쩔수 없이 지은 죄, 서두르다 실수하여 지은 죄 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78) 그러나 인간의 무지나 연약함, 믿음의 부족 등의 이유로 생겨난 죄가 아닌 고범죄(姑犯罪), 즉 짐짓(고의적으로) 지은 죄, 오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지은 죄 등은 이 말 속에 포함되지 아니하는데, 따라서 이런 죄는 속죄제로 죄사함 받을 수 없었고 오직 형벌에 처해질 따름이었다.79) 한편 '그릇'이란 말은 개역 성경 다른
곳에서 '부지 중에'(22,27절;5:18)라는 말로도 번역되고 있는데, 영어성경 KJV에서는 '모르고'(through ignorance), NIV에서는 '무심결에(unintentionally)란 말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이때 쓰인 속죄 제물은, 즉 여호와께서 속죄제를 위해 바치도록 규정한 제물은 죄를 지은 자가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다음 4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는 흠 없는 수송아지였고 둘째, 이스라엘 회중 전체가 범죄한 경우에도 역시 흠 없는 수송아지였으며 셋째, 족장이 범죄한 경우에는 수송아지보다 한 등급 낮은 흠 없는 수염소였다. 그리고 넷째, 평민이 범죄한 경우에는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암양으로 속죄제물을 삼아 바치도록 하였다(레 4:4-28,29절). 단, 평민의 경우 그 힘이 암염소나 암양에 미치지못할 빼는 비둘기 두 마리를 대신 제물로 삼도록 배려하였다(5: 7-8). 그러나 만일 그 형편이 비둘기 새끼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빈자의 경우에는 고운 가루 십분 일(1/10)에바를 바치도록 하였다(5: 11-13). 그러나 이 경우는 소제 때와는 달리 기름과 유향을 섞지 않게 했고, 또한 반드시 다른 생축을 희생한 번제단 위에 함께 올려 불사르게 했다. 즉 피흘린 생축의 제물과 더불어 바치도록 했는데, 이것은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속죄제(Sin-Offering)에는 여하한 경우에도 반드시 피(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후일 신약 시대에 히브리 기자는 이 사상을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는 말로써 명쾌히 서술하고 있다.
D.신학적 접근
1)영적 의미
레위기 3장1절의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에서 여기 "화목제"란 말 (네바흐 쉘라밈)으로서, "평안제"라고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감사제를 가리킨다(시 107:22). 이것은 자원(自願)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바치는 것을 그 특색으로 한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런 감사제에 있어서도 하나님 앞에 속죄의 제물을 바치는 순서가 있다는 사실이다. 레위기 3:8 절 에 따르면 먼저 속죄제를 드린 후 드려야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을 보면 인간은 하나님께 감사할 때에는 중보자로서 희생이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할 수 있다는 것이다(롬 1:8).
또 레위기 3:2에 따르면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드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그 제사 드리는 자의 죄가 그 제물된 생축에게 전가(轉嫁)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대신 속죄를 예표한다.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라는 것은 사람이 속죄함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 계신 곳에 들어갈 수 없다. 먼저 문 앞에서 그를 대신하여 희생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고, 그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롬 5:1).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라고 했는데. "제단" 위에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제단 자체도 속죄함을 받아야 한
다. 만물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졌으니 만물도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깨끗해진다(골 1:20)는 의미이다. 레 3:3-5에서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할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단윗불 위에 있는 나무 위 번제물 위에 사를지니라고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 기록된 여러가지 "기름"은 간단히 말해서 생축의 속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비유이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바치신 감심 순종을 비유한다. 그의 순종은 피동적 순종이 아니고 능동적 순종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들도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쳐 순종하며 감사해야 된다. 다윗은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하였다(시 103:1).
"수컷이나 암컷이나" 제물들은 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1절) 양의 제물 역시 화목제로 드려지는 경우, 無欠하다면 성별이나 나이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이는 하나님 안에서 친교의 화평을 누리는 데에는 성별, 연령, 직업, 신분 등 인간의 어떤 외적 조건도 상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레 3:7에서 "만일 예물로 드리는 것이 어린 양이면" 이라고 언급하였는데, 여기 "어린 양"이란 그저 "양"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는 낱말이다(창 30:32; 레 1:10). 위의 6절에 나온 "양"이란 말은 실상 "양 떼"란 뜻이다.
이러한 모든 화목제물은 "여호와께 드리는 식물이니라" 고 하였는
데, 이것은 비유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제물이란 뜻이다.80) 또 레 3:12,13에서 "만일 예물이 염소면"이라고 했는데 "염소"도 제물로 드릴 수 있다. 여기서 "염소"는 비교적 유순한 가축으로서 맹수와 반대되는 동물이니,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이 언급되었는데 구약 시대에 "기름과 피"는 생명의 상징이었다. 생명을 신성시(神性視)하는 의미에서는 그것을 먹을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바칠수 있는 요소이다.81)
2)화목제의 특성
화목제는 '배상하다', '반환하다', '평화롭게 하다'는 동사 '솰람'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해 드리는 제사인데, 화목의 회복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화목한 사실을 감사하여 드리는 제사였다. 일명 '수은제'(酬恩祭)라고도 하는 이 화목제에는 (1) 지나간 축복에 대해 드리는 감사제 (2) 장차 받을 은혜와 축복의 조건으로 드리는 서원제 (3) 기도의 보조물로 드리는 자원제 등 세 가지가 있었다(레 3장;7:11-36). 한편 성경에서 이러한 화목제를 드린 의식의 경우로는 칠칠절때(레 23:19, 20)와 나실인의 서원이 완전히 마칠 때(민 6:17-20) 그리고 본문과 같이 제사장의 위임식 때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화목제 희생을 드린 국가적 사건으로는 암몬족을 제압한 전쟁의 종결(삼상 11:15), 기근 내지는 온역의 중단시(삼하 24:25), 국가적인 영적 부흥 때(대하 29:31-36)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각지방에서
는 온 가족을 위해 화목 제물을 잡거나(삼하 20:6) 첫 열매의 수확같은 축제때에 이 같은 화목 제물을 드렸었다(차:29-31);삼상 9:11-13, 22-24;16:4, 5). 화목제라고 쓰인 히브리어의 "샬롬"이란 말이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화해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82) 즉 완전한 관계성 유지를 위한 제사이다.
화목제는 소, 양, 염소, 그리고 암수 구별없이 드릴 수 있다는 것도 그 특징이다. 헌제자가 제물을 가져와 안수하고 짐승을 죽이면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에 뿌린다. 그리곤서 헌제자는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떳다. 그러나 번제와 다른 점은 내장에 덮힌 혹은 붙은 기름(레3:9)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의 기름과 간에 덮힌 기름(양인 경우에는 "기름진 꼬리"를 첨가)을 불살라 태운다. 마지막에 제사장과 헌제자와 그의 친구, 가족들이 함께 남은 제물을 먹는 것으로 축제는 끝난다.83) 또 다른 점은 선택적인 제사이다.84)
특별히 제사를 드린 후에 제물의 일부를 거룩한 곳에서 함께먹는 행위는(신 27:2)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첫째로, 여호와께서 식사에 등장한다고 믿고 함께 식사하므로 그와 깊은 영교의 교제를 갖는 다는 의미가 있다. 둘째로,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기쁨, 서원에 대한 성실성을 나타내며 이웃에 증거하고 이웃과 교제하는 예배정신도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목제의 의미는 기름85)을 드림으로써 헌제자는 자기 생명의 가
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콩팥과 내장은 구약에서 감정(정서)이 있는 곳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콩팥과 기름을 드리는 것은 제사 드리는 자의 가장 좋은 것과 가장 깊은 감정의 정서를 하나님께 드림을 의미할 수 있다.86)
제4장.화목제의 신약적 이해
A.구속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마 22 : 37 - 40)" 고 하심으로서 자신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화목케 하는 일을 하려고 오셨음을 나타 내셨다. 이것이 "샬롬( )"이다
1)인간의 창조와 하나님과의 교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은 창조될 때부터 위로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또 한편 수평적으로는 나 아닌 타인, 즉 모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세계는 이원화 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체계적 원리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면 사람들 특히 한국인이 속해 있는 동양에서는 오래전 부터 성과 속을 구분
하는 이원론적(dualism) 사고가 팽배했기 때문에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곧 세상을 등지고 산다는 것과 동일시 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불교에서 속세를 떠나 중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신앙을 가짐으로써 우리의 인간관계는 더 새롭고 깊고 넓어 진다는 것을 이해해야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 하도다" 하신 것처럼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사랑으로 관계를 맺어 가는 것이다. 인간의 바른 정체성은 창조성과 사랑과 하나됨에서 발견된다.87) 이 피조세계의 어떤 다른 피조물에게서도 발견되지 않는 독특한 면이 바로 이런 창조성과 사랑과 하나됨 이라는 것이다. 음악이나 미술, 그리고 문학이나 무용 등의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창조성은 요구 되는 것이며, 창조적인 예술행위도 하나님과의 관계나 인간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이러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해 주는 인간적인 이런 욕구를 비웃는다면 그것은 곧 인간의 진정한 존엄성을 간과해 버리는 셈이 된다.88)
우리는 하나님 같이 만들어졌기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며 즐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생활의 작은 부분, 곧 영적인 부분에서만 자신과 관계를 갖도록 우리를 창조하시는 않으셨다. 그분은 삶의 모든 부분, 즉 육체나 정신이나 감정이나 의지와 같은 모든 영역에서 자신과 과계를 가지고 자신의 형상을 표현 하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물론 인간과의 관계를 포함해서 말이다.
이러한 관계이론을 설명하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어떻게 해서 인간만이 이러한 속성들을 갖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이 세상에는 없다. 그것은 오직 성경안에서 주어지는 방대한 암시를 통하여 추측할 뿐인 것이다. 그 첫번째 함축된 암시는 삼위일체의 비밀이다. 관계와 커뮤니케이션의 근본원리는 분명히 자연적 세계를 넘어서 있다. 그러므로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은 인간이 고안한 어떤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커뮤니케이션의 능력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89)
이러한 진술들은 커뮤니케이션이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것이라면, 모든 의미있는 교제와 마찬가지로 인격적이고 관계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른 것으로부터 소외되었거나 "외부에" 존재하는 것처럼 소통하지 않는다. 삼위 일체의 위격들은 서로를 멀리하지 않으며, 인격적이고 관계적은 방법으로 친밀한 사이를 유지함으로써, 공통적인 신적 성격을 충분히 공유하고 계신 것이다.90) 우리는 성경에서 성자 예수님이 성부께 기도한다는 사실에서 발견한다. 예수는 동산에서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91) 라고 기도했으며,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라"92) 고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성경적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은 관계의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그 본질상 커뮤니케이션에 의해서 특정지워지는 분이라는 사실을 결론 짓게 된다.93) 또한 삼위일체의(triume) 교제의 증거는 그것이 항상 사랑을 통해서 표현된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좋은 관계의 기초이며, 따라서 모든 관계가 일어나야 하는 배경이 된다.
두번째 생각해야할 성경적 암시는 창조 교리이다. 그리스도교의 창조교리는, 하나님께서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세상이 아니고 세상 또한 하나님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언뜻보면, 이 말은 애매한 말처럼 보이고, 또 관계의 주제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반대임을 알 수 있다.94) 창조교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 피조물 사이의 관계성을 입증하고 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는 분명히 다르다. 아들은 대(代)로써 아버지에게 연결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불에서 나온 불처럼 아버지로부터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성자는 성부와 똑같은 본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피조물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한 행동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질서가 존재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확장으로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피조물은 자신의 존재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창조주에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은 그 피조물과도 관
계성을 가지고 그것을 보존하고 계시는 것이다.95)
초대교부들은 신성안에 있는 이 관계와 교제는 하나님의 창조역사의 원형(archetype) 이었음을 인정했다. 하나님의 "내적활동" 이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서 유지되는 관계성이란 말로 표현되는데 비해서 하나님의 "외적활동"은 그 이 삼중적인 내적활동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베드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중적인 외적활동을 하나님의 구속역사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96) 이라고 크리스챤들을 표현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이 관계성은 결코 범신론이나 이상주의적 용어로 묘사되어서는 안된다. 바울 사도는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께 연결되어 관계하고 있다고 증거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에게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97).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만물의 근원이시며, 그의 섭리를 통하여 만물의 중심에 존재하실 뿐만 아니라, 완성자로서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창조주의 "형상" 들이라는 사실도 놀라운 일은 아닌 것이다.98)
아울러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청지기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인간과 관계를 가지며 또 만물과 관계 즉 " "을 가지는 것
이다.
2)사탄 - 의 파괴자
그런데 우리가 고려해야 할 하나의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이 있다. 성경은 타락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선택을 했고, 그것은 곧 인간과 인간사이의 관계를 파괴시켜 첫째는 하나님과의 을 파괴 하였고 부부였던 아담과 하와가 서로 반목하게 되어 을 파괴 하였고 땅과의 도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그것은 곧 바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짐과 동시에 사탄과 악마와의 관계가 생긴 것을 말하며 모든 인간관계와 피조물과의 관계속에서도 이 "악마(Prince of the World)"가 개입하며 사망 권세를 수립해 버렸다. 따라서 자연은 사탄이 그 자신과 그의 파괴욕을 드러내는 주요한 수단이 되었으며, 그 결과를 세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많은 왜곡과 의미의 전도를 겪고 인간의 시야로부터 감추어지게 되었다. 인간의 하나님과의 교제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를 맺느냐, 맺지 않느냐 하는 인간의 선택은 의 문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즉 죄가 이 세상에서의 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리스도를 통한 죄의 극복을 거부하는 인간의 행위가 의 장애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은 인간이 자기 삶을 지배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한 사실의 종교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보다 사탄을 따르고 복종하는 편을 선택했다. 이 선택의 결과 인간은 - 자신에의
과 동료와의 , 그리고 자연과의 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 하나님과의 을 상실하게된 것이다.99)
이것을 다시 정리해 보면 첫째,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주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 100). 그들의 죄는 그들이 하나님과 나누었던 영적인 교제를 파괴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놓았고, 그 결과 우상숭배와 함께, 인간의 육체적, 물질적 삶의 영역까지 영향을 미치는 틈이 생긴 것이다.
둘째, 그 죄는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 시켰다. 인간은 더 이상 자신과 참된 관계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인에 대한 성경적 기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 너는 땅에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101)하신 선고가 그것이다. 쾌락, 친력, 부, 성, 자기추구등을 통해서 인간은 자기 삶의 방향을 자기에게 맞추었기 때문에 그는 참된 자기이해와, 자기 문명으로부터 자신을 차단 시키며 살게 되었다.
셋째,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가 파괴된 것이다.
이제 영적인 파괴는 사회전체에서 사람들과의 관계, 의 붕괴를 초래했다. 결과 노아시대에 이르러서는 모든 사회적 관계가 파괴되고 부패되어 버렸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악할 뿐임을 보시고"102) 이와 같이 죄는 파괴적 움직임, 즉 사람만이 아니라 전체사회, 심지어 인간성 전체를 삶의 원 의미와 목표 -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한 세상에서의 인간
의 과제와 역할 수행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 - 로 부터 분리시키는 동력을 만들어 내었다. 인간은 스스로 서로 교제하고 있는 사람들의 존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인 장벽까지도 허물어 내어 버린 것이다.
넷째, 죄는 인간과 자연사이의 도 파괴 해 버렸다.
인간은 자연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 받은 소우주임에도 불구하고 사탄을 섬길 것을 택했기 때문에 환경을 파괴 시키고 피조물까지 악한 세력에 봉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인간은 그 선한 물질을 가지고도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정복하고 지배하는 일에 사용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103)
이 모든 일들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 영적인 혼돈속에서 다른 대용품들을 통하여 창조성, 관계성, 연합성의 즐거움을 향유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예수그리스도 - 의 회복자.
아담이 그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전체 창조질서를 죄에 몰아 넣은 것처럼, 제 2아담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상황을 역전 시켰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요, 인간이셨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지만10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 105) 분이시므로 우리와 동질의 인간이 되셨다.106)
그래서 바울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인사에서 "....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다.107) 인간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 사회적 관계를 전도시킨 것 때문에 인간의 구속은 역사 안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인간의 과제와 인간관계의 맥락안에서 일어나야만했다. 즉 다시 말해서 인간의 파괴된 관계와 이 나타나는 곳이 삶 자체안이기 때문에 인간의 회복된 이 표현되는 곳도 삶 자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주제대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시작으로 인간 자신과의 화해, 인간과 인간사이의 화해와 인간과, 자연사이의 화해를 위해 화목제물로, 속죄양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화목케된 천국인 것이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주와 교류하고 전체 창조질서가 회복되어 새롭게 되며 의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인간간의 관계도 회복되어진 곳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아직 온것은 아니지만(계20장), 이미 그리스도와 교회안에서 시작된 108) 하나님 나라에서만이 완전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는 파괴된 관계와 이 잠재적으로 회복되는 곳, 그 원천도 교회안에서 이다.109)
파괴된 관계와 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속죄의 제사이다. 이 속죄의 희생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위에서 십자가를 지셨으며 의 기초로서의 속죄의 모든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다.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 제사장에 의해서 드려지는 모든 제사는 짐짓 죄가 생각날 때마다 반복해서 드려야 되지만 얘수께서 드린 속죄의 제사는 영단번에 드린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다시 속죄의 제사로서의 예수를 영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신 결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삶을 지배하심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에서 관계와 의 파괴를 영속화 시키고 있는 악의 권세를 쳐부셨다는 것과 또한 사람이 더 이상 죄의 멍에 아래 살지않고, 하나님과 교회의 동료 신도들과의 진정한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그것이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주적인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 ....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110) 라고 쓰고 있다. 속죄 안에서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 다시는 죄의 멍에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 이라도 또 죄를 짓게 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이 되어있다.(요일 1:9).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죄를 짓게 된다면 우리는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이 깨어졌기 때문에 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화목의 제사의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이
러한 회복과 이 일어나는 곳은 지상을 넘어선 영역이 아니라 바로 교회 안이다.111) 교회안에서 에배와 말씀을 통하여 부단히 하나님과의 교제를 증짐하며 을 유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그리스도와 관계하며 그속에 있는 사람들의 무리이다. 그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다.112) 그러므로 회복된 관계와 이 출발해야 하는 곳은 하나님에 속한 사람들의 장, 즉 교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관계와 의 방법들에 대해서 많은 암시를 가지고 있다.
B. 과 예배
1)초대교회의 예배와 제사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후 성령은 신자들의 몸안에 거하시며 예배자로 하여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올릴 수 있게 하셨다.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했던 예배에서 그 장소적 제한에 변화가 오게 되었다. 즉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에 특정 장소를 초월해서 하나님과 강한 임재를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초대 교회 교인들은 가정이나 가정교회 혹은 집회를 위한 넓은장소등에서 함께 모여 교제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다. 강한 성령의 역사는 사도들을 통하여 또 그들이 외치는 복음을 통하여 증거되어 졌다. 말씀 선포 중심의 교회와 예배가 생겨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말씀의 중심
주제이신 예수의 화목제물되심과 대제사장 되심이 십자가 사건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성령의 능력은 결국 예배 스타일에도 변화가 오게 했고 그것이 공동체의 아름다운 사랑으로 나타나서 결국 하나님을 찬미하여 전도가 잘 되게 되었다. 성령의 권능이 임하시리란 약속을 따라 선교에 열심이었고 그리스도의 몸을 견고케 하는 은사들이 나타나서 교회가 더욱 왕성해지는 역사를 경험케 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초대교회의 예배형식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회당예배의 형식을 빌려 온 것이다. 오순절이후 초대교회 신자들은 한동안 예루살렘 성전과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성전이 파괴됨으로 그 관계 끝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초대교회의 예배형식과 순서는 성전으로부터 영향받지 않고 오히려 회랑의 예배형식을 빌려 오게 되었다. 그러면 회당예배의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략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찬양과 기도와 그리고 말씀이었다.
회당예배는 회중 찬양과 함께 그 예배를 시작했는데 이는 탈무드에 "항상 먼저 찬양을 올리고 그 다음에 기도하라는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다. 회당예배시에 드리는 기도는 민수기 6:4-9, 11:13-21 그리고 민수기 15:31, 41로 구성된 쉐마가 그 핵심이었다. 그것은 낭송하는 형태로 기도문을 읽었기 때문에 반복의 효과는 있구나 형식적 외식적이 될 위험이 많았다. 포로시절부터 성전이 파괴되어진 기간동안 성전의식을 치를 수 없었던 그들이 말씀을 중심으로 모여 앉았다는 것은 획기적인 전환이었는데 말씀을 낭독하고 그 내용을 풀어주는 식으로 행해졌다.
2)예배와 제사의 개혁
그러다가 그것은 증세에 와서 변실되어 버렸다. 회당예배 순서와 형식을 빌려 간결하고도 깊은 예배가 수세기 동안 이어졌으나 중세에 이르러 그만 변질되어지고 만다. 우리가 잘아는 대로 그것은 이교도의 의식과 인본주의가 벗어 낸 커다란 실수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의 최대 쟁점은 예배문제였다는 데에서 이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만일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늘날과 같은 주일예배는 없었을 것이다. 종교개혁이 기독교에 가져다 준 유산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예배이다. 개혁가들은 중세기 카톨릭주의를 개혁하고, 주로 초대교회의 신앙과 예배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루터의 개혁은 보수적인 것이었는데, 예배를 희생제사이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예배 행위에 대하여 의로워지기 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어야 한다. 미사와 성경은 자국어로 사용되어야 한다. 기도의 부분에 있어서 회중의 참여가 더 있어야 한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 자체와 피가 된다는 화체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카톨릭 교회의 예배는 지나치게 감각에 호소하고 정교하게 미화되었고 장식과 형식주의에 얽매여 있다는 것등을 주장하며 개혁에 임했다.
칼빈의 '철저한 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바탕으로 예배형식과 내용을 형성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배였다. 예배는 주님의 몸을 적합하게 표현하는 행위이므로 그 몸의 순전함과 거룩함을 함양하고 보존케 했다. 성찬론에 있어서 '영적임재설'(Spiritual Presence)을 주장했다. 이 일은 성령의 내적 역사를 통하여 일어난다. 청교도의 '더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는데 그들은
성직자가 제의를 입는 것에 반대했으며, 성직자에 의한 면죄선언, 귓속말로 속삭여서 하는 고백, 예수의 이름에 절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성만찬을 받을 때 무릎을 끓는 것과 세례를 받을 때 성호를 긋는 것, 결혼식에 반지를 사용하는 것 등을 폐지했다. 낭독하는 형식의 설교를 선포하는 형식으로 바꾸었고 주기도문를 예전형식으로 보는 것을 반대했다. 그들은 결혼식이나 장례는 종교적인 행사가 아니라 시민의 일상적인 일로 보았으며 성자축일을 폐지하고 '사제' '보제'라는 말대신에 '목사'로 '일요일'대신에 '주의 날'이라고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경직된 것은 청교도적인 것을 너무 많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① 형식과 예전을 벗어나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의 필요에 의해 과감하게 형식과 예전을 버리고 축소시키며 그레고리안 합창과 성가대의 찬양을 축소시킨 것은 잘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너무나 밋밋하고 딱딱한 예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로버트E. 웨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가운데 거의 개혁이 일어나지 않은 분야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공예배일 것이다. 비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복음주의적인 평신도들의 거의 대부분이 공예배가 실제로 무엇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제사는 예배를 위한 준비작업이다. 진정한 예배는 속죄함 받은 다음에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바라는 수가성은 여인은 어디에 가서 예배드려야 할 것인지를 예수께 여쭈었다. 그녀는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제 어디서라도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이미 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대속적 제사가 드려질 것이었고 지금은 드려졌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3)감사의 예배와 화목제
신약교회와 예배를 이해하려면 신약에서 성전이 어떻게 이해 되는지 성전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113) 유대교에 있어 '우주'라는 추상명사는 없다. 단지 하늘과 땅이라는 하나님 창조의 전체인 양극을 사용해서 설명한다. 창조의 두 부분은 하늘과 땅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고 땅은 사람의 거처이다. 그래서 성전은 하늘과 땅, 즉 우주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기능, 다시 말해 땅에서 하늘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성전에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이 보좌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의 복사(COPY)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거처의 모조품이 지상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표현을 제일 많이 사용하신 것이다.
들어간다 라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가 장소의 뉘앙스를 가지고 있음을 시사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대문 (마 7:13, 눅 13:24)" "문 (눅 13:24)" "열쇠 (마 16:19, 23:13, 눅 11:52)" 등의 그림언어들을 쓴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집'으로 상장하는 것과 연관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흔히 쓴 '잔치'의 그림언어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런 모든 것을 감안할 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적어도 일면 하
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이 '아버지'로 '잔치'를 베풀고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이 "대문"의 '문'을 열고 그의 '집'의 '방 (요 14:2)'으로 '들어 가' 그 '잔치'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114)
예수께서는 성전을 부수고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그 죄목 (막 14:58)과 메시야 - 곧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로서 유대인의 왕이라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인식했을 뿐 아니라 그 성전을 구체적으로 자신이 세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로 보았다. 예수는 실제로 새로운 성전을 짓겠다고 한 것이다.(마16:) 13-19에 있는 예수의 교회 건설에 대한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115)
이상에서 살펴본 바 대로라면 성전이 원래 가지고 있는 의미인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집은 이제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기능은 원래 성전이 가지고 있던 기능 즉 하나님과 사람의 또 사람과 사람의 을 그대로 이어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 완성인 하나님 나라는 예수안에서 또는 예수를 통해서 실재화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종말의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역사속으로 들여온 분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려 을 완성하신 것이고 그래서 세워진 것이 교회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곧 바로 예수의 성전되심을 완성 시키는 것으로서 예수의 죽음이 새 언약을 세우는 속죄제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면 부활은 이러한 예수의 제사가 하나님의 인정하심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예표로 주신 유월절의 만찬은 화목제물로서 기쁨의 축제의 화목제물의 식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제 그리스도안에서 진정한 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했지만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심과 부활'을 선포한 것이다. 예수의 구원의 사업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대권자로 높임을 받는 '주'라는 신앙고백과 케뤼그마가 발생한 것이다. 예수 안에 이렇게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온 인류를 위해 이루어졌다는 소식이 곧 "복음( )"이다. 이 복음의 말씀 즉 이 강단에서 넘쳐날 때 만이 진정한 교회성장이 뒤따르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 볼 때 각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곧 세상 사람들에게 을 선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더 많이 보여 주는 것이된다. 아울러 교회는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산간 오지에도 세워져야 하겠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되기 위하여 대도시의 인구 밀집 지역에 더욱 깊이 뿌리 내리고 세워져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곧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을 선포하는것이기 때문이다.
4)성도의 교제와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
었느니라"(롬12:5). 교회의 이 같은 모습을 코이노니아(koinonia)라고 한다. 영어의 fellowship, 혹은 communion이라고 번역한 이 교제는 특별한 것이며 어떤 하나의 교제가 아니라 독특한 교제(the Fellowship)이다.성경에서 말하는 교제는 종적인 관계와 횡적인 관계를 다 포함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바를 다른 사람과 더불어 나누는 것(sharing)을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얻은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116) 즉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맺는 교제이며 또한 예수의 주권에 대한 공동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교제를 말한다.117) 안디옥 교회를 볼 때, (행13:103) 교회의 교제의 면을 발견할 수있다. 안디옥 교회는 구레네의 지주이며 레위족인 바나바를 비롯하여 흑인 시므온, 북아프리카의 구레네인 역시 흑인으로 추측되는 루기오, 헤롯의 친척인 귀족 마나엔, 다소 출신의 젊은 지식인 사울 등이 이 교회의 지도자들도 함께 있었다. 이들이 함께 교제하며 교회를 섬기는 일은 당시의 사회제도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종족, 인종, 배경, 교육의 장벽을 초원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교제였기 때문이다.
교회는 언제나 집합체 이상이어야 한다. 교회는 기독교적 유산과 공동관심사속에서 모인 공동체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의식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인 역활이다.118) R,리스도의 지체란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을 근본으로 한 복음전도는 인종, 언어, 사회경제적인 구분을 초월해서 반드시 모든 사람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은 진정한 교제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성경의 은 아주 포괄적인 의미로 건강과 물질생활, 종교생활, 법질서와 사회적 관계, 국제관계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것이 잘되어 가고 풍요로움속에 행복한 상태를 포함한다. 그래서 은 아예 구원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옳을 때가 많다.119)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은 첫째 하나님과의 이고 그 다음 교회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성도간의 이 구원이라고할 것이다.
제5장. 현대교회와 화목제
1.제사와 예배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인간을 만드심으로 천지창조는 인간을 위한 것임을 보이셨다. 그러나 단지 그것으로 하나님의 세상을 만드신 궁극적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을 창조하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셨다. 그들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하늘과 땅을 통일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의 발앞에 무릎꿇게 하시자는 원대한 목표가 계셨다. 이미 타락해 있던 악한 영들까지도 다스리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것이다. 그 말은 인간이 자신이 경배해야 할 대상을 바꾸었다는 말이다.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할 인간이 그분만을 경배하지 아니하고 다른 무엇을 숭상하고 숭배하며 따르기로 작정했다는 말이다. 교제의 순결성은 무너지고 인간의 하나님을 모셨던 그 자리에 악영의 미혹으로 우상과 온갖 거짓 신들을 올려 두고 그를 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모두가 다 한결같이 자신을 위한 그릇된 자아관에서부터 출발한 죄성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인간의 반역으로 인하여 총체적으로 반역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축복의 대상이었던 이 세상은 상대적으로 심판과 저주의 자리로 추락되었다.
바울사도가 고백한 대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영원한 저주 아래에서 신음하여 구속의 날만을 기다리는 기나긴 고통의 자리에 내려가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들은 본질적으로 각양의 우상으로 나타난 귀신의 왕 사탄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이 받아야 할 예배를 가로채고 있다.
이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한길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제사 밖에는 없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오래전부터 계획하시고 계시하셔서 정상적인 예배로 회복시키기 위해 일해 오셨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타락 이전에는 예배만 있었다(생활 자체가 바로 예배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과 동시에 제사제도를 주셨다. 물론 그것은 영원하고 단번에 드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제사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구약의 끝없는 계시는 제사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역설하는 애끓는 하나님의 음석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고로, 시대마다 문화마다 새롭게 제사제도의 깊은 의미를 제시해 주셨다. 참으로 기나긴 여정속에 예배는 갈보리에서 끝이 나고 동시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늘의 성소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결하셨다. 예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구약의 제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제사가 인도하는 대로 하나님의 교제권에 들어설 때 그때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맛보게 된다.
예배속으로 들어갈 때, 예배가 우리를 인도하는 목표점이 있다.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깊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한다. 쫓겨났던 에덴으로의 복귀, 잃어버렸던 창조주에 대한 경외, 계속적인 알아감과 닮아감, 결국엔 영생의 누림으로 인도하는 통로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제사의 목적이 하나님에게로 다가서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의 체험앞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노출되면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형상으로 다듬어져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배는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정상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켜 참된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칼빈이 말한 바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만이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분의 영광에 압도되고 거룩성에 대한 추구가 있게 되고 계속적인 반복과 시행착오 가운데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소유하게 되는 비법이 예배속에 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인간을 변화시킨다. 참된 종적관계가 회복된다는 말이다. 그 다음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인간관계, 즉 횡적관계를 변화시키시게 된다. 또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이 저주에서 해방되어 올바른 관계를 가지도록 통치하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 나라의 관계성' 속에서 정립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임재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자신을 더욱 그분과 일치시키는 교제의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미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셨다. 예수는 포도나무로서 농부인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드린 분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는 그분께 연합되기 위하여 단번에 제사를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해야 한다. 연합이 목적이아니라 그 연합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만나야 한다. 그 하나님을 만나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열매이다. 농부는 열매를 요구하며 나무를 심으셨다. 그에게 합당한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면 잘리워 불에 태워질 것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나무에 연합되어 같은 생명을 공유하기 시작한다면 그 나무로 인하여 우리는 열매를 우리의 노력없이 맺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와 행위의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우리 또한 그분과 함께 기쁨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와 예배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신자는 결코 더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지루하고도 긴 제사 항목과 피뿌림과 제사장은 더이상 필요없다. 이제부터 우리는 제사와 예배의 구별을 드러내어 비교하며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찬양이 설 수 있는 진정한 자리가 발견되게 될 것이다.
2.화목제와 예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예배를 교역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하나님께 대한 전 인격적인 신앙의 응답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생각하지 않고 교역자들이 주관하는 예배에 단지 피동적으로 참석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교회의 예배 사역에 있어서도 평신도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이며 교역자는 다만 예배의 재요소에 있어서도 평신도는 객체가 아니라 주체이며 교역자는 다만 예배를 인도하는 자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목사의 설교 위주의 예배에서 벗어나 전 평신도들이 예배의 재요소에 있어서 기본적인 책임을 가진 주체자로서 참여하고 사역하도록 훈련해야 할 것이다. 또한 평신도 예배 훈련은 단지 교회내에서도 공예배 사역반을 감당하도록 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세상에서 진정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그들이 삶과 예배를 연결 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지역사회와의 샬롬
교회의 질적 성장은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다는 것을 말한다. 사탄은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지배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복음의 영광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인도 모르게 교회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종국에는 사단의 궤계를 완전히 궤멸시켜야겠지만 지금 현재 사람들의 마음이 씨앗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옥토가 되도록 하는 일에도 교회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5장, 현대교회와 화목제
A.예배와 선포
1) 의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
모든 평화는 창조주 하나님 것이고(사 45:7), 하나님은 그의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주신다(민 6:26: 역상 23:25).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들과 백성의 불순종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아 이방 민족들로부터 짓밟힘을 당하고 드디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가게 되었다. 이것은 태초의 아담이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창 3:5)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낙원의 평화를 잃고 카오스와 고난의 세상으로 굴러 떨어진 것과 같다.
바벨론에 대한 예루살렘의 멸망(BC 587)을 전후로 하여 활약한 전지자들은 평화를 그들의 메시지의 중심개념으로 삼았다. 이제 유다의 죄값이 치루어졌으므로 (사 40:2),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루살렘에 회복하여 평화를 주실 것이다(렘 33:6ff). 그의 평화의 언약(사 54:10; 겔 3:25; 37:26ff)에 의거하여 그의 백성을 평화로 인도하시고(사 55:12), 그들을 위해 예루살렘에 평화를 이루실 것이다(사 54:13; 렘 29:11). 시온에 이루어질 평화와 구원은 바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이다(사 52:7). 특히 성전재건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학 2:6-9; 슥 8:9-13).120)
그러나 이 예언들은 곧장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포로기 이후의
평화의 부재속에서 선지자들은 이 기대에 종말론적 소망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종말에 시온을 높이시고 그곳에 그의 영광을 드러내시면, 세상에 모든 민족들이 그들의 우상들과 무기들을 버리고 그들의 보화를 가지고 시온에 몰려와 야웨를 섬기고 이스라엘과 함께 평화에 참여할 것이다(사 60:2 등). 그때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태초의 낙원의 평화를 회복하실 것이다(사 65:17-25; 11:1ff; 겔 34:25ff; 호 2:18ff).121)
하나님이 이 종말론적 평화의 수립에 다윗의 아들 메시야가 그 일꾼으로 활약할 것이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서 공평과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목자로서 그의 백성을 먹여 영원한 평화에 이를 것이다(사9:6ff; 11:1ff; 미5:1ff; 렘 23:5f; 겔 34:23ff; 37:24ff). 이스라엘의 왕은 원래 대내적으로는 압제자들을 꺽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등 의로운 통치를 펴고, 대외적으로는 열방들을 굴복시켜 백성에게 평화를 보장하는 자이다(시 72). 이 이스라엘의 왕에 대한 이상은 유대교에서 메시야적으로 이해된 시 2편에서도 표현되어 있다. 이 이상은 Ps. Sol.17f.와 4Ezar 12.31-34; 13.1-13, 21-50; 2Bar 40.1-3; 4QpsDanA"등의 메시야 사상에도 잘 나타나 있다 : 메시야(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은 열방을 굴복시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평화를 이룬다(cf. also Sib.or.3.653;5.108ff.417ff.;1En 46:51-53; Test,Jos.19). 일부 묵시 문화에서는 메시야 시대를 태초의 낙원의 상태의 회복으로 그리고 있기도 하다(2Bar 29:73; Test.Levi 18). 이런 맥락에서는 메시야는 평화의 왕으로서 태초의 낙원의 풍요와 평안을 회복하여 통치하는 자로
그려져 있다(cf. also.or.3.652.,;5.414ff., 431).122)
그러나 스가랴서는 메시야가 군사적 정복자로서가 아니라 겸손한 평화의 왕으로서, 어쩌면 버람받고 고난받는 자로서(12:10), 온 세상 모든 민족들 위해 평화의 통치를 이룰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9:9f). 사 53장은 주의 종-메시야가 우리 죄를 인하여 우리 죄에 대한 징벌을 대신 받고 스스로의 목숨을 대속의 제사로 바침으로써 울;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평화를 이룰 것을 예언하고 있다. '평화의 왕'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하고(사 9:5f), 그의 통치아래 태초에 낙원위 평화가 회복될 것을 예언한(사 11:6-9) 이사야서는 하나님께서 시온에 평화를 이루신다는 기쁜 소식이 다가오고 있음을 고한다(40ff). 이 소싣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이다(52:7). 카오스의 세력인 사단과 그의 사주 아래 하나님께 반역하는 인간의 통치는 혼돈과 결핍과 고난을 낳는데, 그런 아담이 시작한 시대를 끙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으로 온 세상에 태초에 올바른 질서가 서게 되고 온 세상이 창조주의 의와 사랑과 풍요의 통치아래서 평화 -구원(shalom!)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통치는 이방 모든 민족들의 세로운 빛으로 세운 그의 종(사 42:1; 49:6)을 인류에 죄에 대한 대속의 제사로 바쳐 속죄된 인류가 자신과 화해하도록 함으로써 시작된다는 것이다(사 53).123) 화목제사의 제물이요, 또한 화목제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는 궁극적으로 메시아로서 종말의 하나님나라를 이 세상에 가지고 와 영원한 을 우리에게 주실 분으로서 계시되었다. 이것이 화목제사안
에서 계시된 것이다. 처음에는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 주어졌던 화목제사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전에서 드리는 화목제사는 끝이 나고 온 인류를 위한 예수의 화목제사가 드려짐으로서 이제는 성전제사가 아닌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로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화목의 을 가져오는 예수의 메시아적 과업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났는지 살펴보자.
2)평화의 왕 예수
O. Betz가 분명히 보여주었듯이 예수는 사 52:7; 53:1(Tg); 61:1-2등에 의거하여 짜신의 메시야적 과업을 "복음 선포하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다스리심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그가 선포할 '복음'내용으로 삼았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압박자들을, 정복하고 왕으로 등극하시어 을 이를 것이다(사 52:7).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다스리심과 그것으로 인해 이루어질 구원과 평화를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단의 죄악과 고난으로서의 통치에서 벗어나(='회개')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오도록 부르는 것을 자신의 메시야적 과업으로 보았다. 더 나아가서, 예수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하고 구원과 평화를 실현하도록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은 메시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나사렛의 회당에서 자신의 메시야적 취임설교를 사 61:1ff를 인용하여서 하였고(눅 4:18f), 세례요한이 감옥게서 보낸 제자들의 질문에 사 61:1ff를 인용하여 답하였다(마 11:5=눅 7:22). 예수는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과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치며, 압박받는 자들을 해방하는 것 등-즉 /구원을 실현
하는 것을 자신의 메시야적 과업으로 보았다.124)
이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는 모든 죄악과 고난을 유발시키는 사단과 그의 졸개들인 악령들과 성전(聖戰)을 벌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세례 때 성령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고 메시야로 취임하고, (막 1:11 g. pars)의 사단의 시험을 극복함으로써(막 1:12f; 마 4:1-11=눅 4:1-13), 사단보다 강한 자로서 사단을 "묶고"사단의 왕국을 노략질하여 그곳에 갇혀 있는 자들을 구원하고 해방하게 되었다(막 3:27. pars). 예수는 자신의 귀신 쫓아내고 병고치는 사역을 이렇게 사단의 통치를 분쇄하고 그 통치의 영역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하나님의 나라의 속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병고쳐준 여인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찌어다" 5:34=눅 8:48:cf.also 눅 7:50). 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평안히 라고 번역된 단어는 으로서 70인역에서는 로 번역 되었던 그 단어이다.125) 이 단어는 구약에서 호나님과의 화목을 이야기 할 때 쓰인 그 단어요 화목제사를 의미하는 그 단어이다.
이렇게 예수 귀신 쫓아내고 병 고침은 그가 선포한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실재화이다. 그러기에 예수는 자신의 하나님 나라 설립운동에 제자들을 참여시키면서 그들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도록(막 3:14f) 그리고 병자들을 고치도록 (마 10:7f=snr 9:2)위임한 것이다(막 6:13). 이런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가정들을 방문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을 고치며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때 그들의 메시지에 회개와 믿음으로 응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을 얻게되고, 그렇지 않는 자들은 심판의 날의 멸망을 기다릴 수밖에 없게 된다(눅 10:5-12=마 마:5-15). 그러므로 교회는 복음선포와 의와 사랑의 행위를 수단으로 하여 평화를 도모하는 일을 해야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선포와 의와 사랑의 행위를 통한 평화의 도모는 하나님이 죄악과 고난과 혼돈의 세력들과 벌이는 성전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진지한 이해에서 , 우리는 경건주의 적 소극성을 탈피하여, 적극적이고 포괄적이며 거시적인 퍼스팩티브를 가지고 구체적인 평화실현의 길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왕이요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된 백성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ㄹ의 삶의 모든 dddr-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문, 국제정치등-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근거하여 그리고 화목제사에 계시된 평화의 정신을 살려서 하나님의 주권에 의존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동료인간들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인률ㄹ 위한 평화를 이루는 길임을 모든 삶들에게 설득하여야 한다. 우리의 복음선포에 의한 설득을 더욱 효과있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예(例)에 따라 비폭력적 시위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과 사단의 세력과 싸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실재화하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을 내어보낸 예수는 그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어린 양들을 보냄같이"보내었다(눅 10:3=마 10:16). 그러나 그들은 예수로부터 받은 권세로 악령들을 굴복시켰음을 돌아와 기쁨으로 보고하였고, 예수는 그 때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고 응답하였다(눅1):17-20).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지상에서 악령들과의 성전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찬탈하여 세상을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을 그의 권좌에서 굴러 떨어뜨리고 의와 생명으로 다스리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단의 나라에 갇혀 있는 인간들에게 구원, 해방, 을 의미하는 것이다.126) 그러므로 화목제사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사단으로 인하여 깨어진 을 그리스도안에서 회복되어진 을 선포하는 것이 오늘의 우리의 화목제사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즐겨 하나님나라를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초대하여 베푸시는 잔치로 비유하면서 회개와 믿음으로로 하나님 날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였다. 즉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에 순종했던 죄를 회개하여 용서받고, 창조주 하나님을 왕으로 주로 의존하고 순종하여 그의 부요함에 참여하라고 부른 것이다. 이것은 피조물의 유한성속에 갇혀 결핍으로부터 오는 온갖 고난들 속에있는 인간들에게 초월자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참여하여 / 구원/영생을 얻으라는 부름이었다.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의 대표적 예가 "탕자의 비유"(눅15장)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선포에 대한 더욱 자세한 이해가 결국 이 땅에 을 정착 시키는한 계기가 될 것이다.이 부름 , 이 잔치가 화목제사안에 있는 잔치 그것인 것이다. 이 부름 이 잔치에 초대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할 것은 "회개"아 "믿음"이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그들을 그의 백성, 곧 그의 자녀들로 삼으심과 그리하여 그들이 종말에 하나님의 무한한 붕함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을 표징하였다. 이렇게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여 죄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올바른 관계에로 회복시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 "를 이루는 일을 하였다. 이렇게 예수가 가져오는 하나님의 " "에 참옇는 자들은 종말에 하나님이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
B. 의 선포와 교회성장
이제 교회는 구약적 제사모델에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평화의 복음이라는 구조속에서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해야 한다. 이 평화를 선포하기 위하여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으며 결국 이 평화의 선포자로서 제자들을 내어 보내시는 것이다.
1)모든자들을 위한
예수는 경건한 바리새인들이나 '죄인'들인 남자들인 여자들이나, 어른들이나 모두를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용섭ㄷ고 하나님과 화해하여 하나님의 을 누리도록 하였다. 이것은 유대의 성전적 모델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죄인이아, 여자나 이방인들은 화목제사에 참석할 수 없었고 더욱이 병자와 가증한자는 결코 이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지상사역을 하는 동안 자신의 샬롬안으로 이러한 모든 삶들을 초청하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하나님과의 화목은 아무 차별이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더욱이 종말에 하나님의 초청을 마지막으로 점검할 때 원래 초대 되어진 그 백성들은 쫑겨나고 거리
와 산넘어와 여러곳에 흩어진 병자와 가나한 자들이 그 나라를 차지하게 되리라고 까지 하셨다.
또 예수는 당시 만연한 유대 민족주의-이방의 압제들과 성전(聖戰)을 벌여 그들에게 복수하고, 그들을 굴종시켜 이스라엘의 을 이루려는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였다(마11:5=눅7:22, cf. 사61:1-3). 앞서 본 바와 같이 예수는 성전(聖戰)사상을 자신의 사단의 세력과의 투쟁에만 적용하고, 유대인들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자신의 사단의 세력과 성전(聖戰)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의 혜택을 받도록 하였다. 더 나아가서 그는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온 세상의 사방에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 모아져 역대 하나님 백서의 조상들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할 것으로 약속하셨다.
이렇게 예수는 하나님 날가 온 인류에게 /구원을 가졍는 것이며, 은 이스라엘과 이방민족들간의 평화를 내포하고, 인간들로 하여금 모든 차별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상호화해케 하는 인간들간의 평화도 내포함을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평화에 참여하는 인간들은 자주 자기 주장하려는 의지를 버림으로서 이웃에게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베풀고,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고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뺨도 돌려댐으로서 인가들간의 평화를 이루어야한다. 이것이 예수의 산상수훈이다. 예수는 이렇게 죄의 본질인 자기 주장의 포기와 사랑이라는 평화의 근본원칙 제시에 집중하였으나, 구체적으
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또는 국제 정치적프로그램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오히려귀신들을 쫑아 내고 병자들을 온전케,함으로서 또 회개한 죄인들을 용서로 영접하여 그들과 잔치를 벌임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을 실증하며,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을 선포하고 약속한 예수는 자신을 대속과 새 언약을 세우는 제자로 드림으로서 이 약속을 성취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사야서의 에언대로 '평화의 왕' 메시아인 예수는 하나님의 닷리심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을 약속할 뿐만 아니라, 주의 종으로서 스스로의 목숨을 인류의 죄에 대속의 제사로 바쳐 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다.(특히 사 53:5, 10-12).127) 그리하여 그는 슥 9-13장의 예언대로 군사적 정복자 메시아가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이 입성하여(막11:1-10) 대제사장에 의해(요 11:49-52) 대속의 제사로 바쳐진 것이다(막14:21-25: 10:45, =막20:28)
이러한 예수를 하나님은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셔서 예수가 그의 나라(=통치)의 일꾼됨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죽음이 그의 /구원을 이루는 수단이었음을 확인 하였다. 이리하여,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전 생애와 사역이 하나님의 의 체현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의 대속의 죽음에 힘입어 자신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에 들어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의 결과는 이제 우리에게 교회
를 주었다. 교회는 지상에서 예수가 재림하는 날까지 화목케하는 직분을 감당해야 한다. 바울은 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평화의 하나님께서 사단을 속히 너희들의 발 아래 쳐 부숴 버릴 것이다"(롬16:20)고 하면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 인간들을 하나님께 대적하게 함으로서 그들을 죄와 죽음과 고난의 혼돈속으로 몰아넣는 사단을 오나전히 쳐부숴 태초의 샬롬을 이룰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창3:15) 그 샬롬은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안에 계심"의 상태이다(고전15:28).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ㅈ권의 찬탈자 사단의 세력을꺼고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회복하는데 쓰시는 그의 일군이다.하나님은 그를 세상에 보내시어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 까지의 - 순조을 하게 하심으로서(빌 2:6-8) 이 과업을 달성하게 하셨다. 마치 화목제 번제의 제물의 가죽이 벗겨지고 모든 뼈와 내장이 낱낱이 벗겨져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의 제물"이 되듯이 그렇게 단번에 드려진 것이다. ㄱ리하여 모든 불화의 파멸(Unheil)의 ㄱㄴ본인 자기 주장을 존재의 원칙으로 삼고 있는 사단의 세력들과 그들의 인간적 앞잡이 들인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께 최후 발악을 하고 승리를 구가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의 구가는 짧은 것이었다. 왜냐면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박힌 에수 그리스도를 부활시켜서 "영광의 주"로 자신의 우편에 않히시고 하늘의 천사들이나, 땅위의 인간들이나, 지하의 악령들이나 온 우주으ㅏ 그 tr의 모든 존재들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를 예배하도록 하신 것이다(고전 2:6-9, 빌 2:6-11).
그럼으로 교회는 이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세상에서 두가지의 사며을 가지는데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는 에배의 사명과 에수 그리스도안에서 이루어진 종말의 복음 즉 하나님의 샬롬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전도와 선교의 사명이 그것이다. 지상에 있는 교회가 이러한 두 가지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질적 숫적 성장이 있게 되는 것이다.
제6장. 결론
본 연구자는 화목제사에 관하여 신학적으로 접근하여 화목제사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어떤 상고나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Geerhardus Vos에 의해 체계화한 개혁주의 성경신학(Biblical Theology)의 원리를 따라 성경적 신학인 연구를 하여 보았다. 이 방법은 성경 계시를 역사적인 과정으로 보며, 계시역사의 다양성 속에 존재하는 성경 계시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의 통일성이 역사적인 과정속에서 부분들의 유기적인 통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전제하에서 석의적으로 어원적으로 그리고 신약에서의 확정딘 의미로서의 화목제사를 살펴보려고 노력하였다.
신약은 구약의 성취로 이해디기128) 때문에 구약제사에 있어서 구약과 신약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구약제사의 일반적 고찰을 통하여 구약제사의 일반적 관점을 시내산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생각해보기 위해 먼저 일반적인 제사의 의미를 연구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히브리적 제사가 이방인들이 그당시 드리던 희생제사나 다른 제샅도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살펴보아 그것에는 분명히다른 차이가 있음을 증명하였다. 즉 이방인들의 제사가 일견 히브리적 제사와 유사성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면에서 다른 것은 유대인들의 구약적 제사는 그 기원이 신적인 것이며 의식과 모든 절차가 모두 계시에 의해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것이 결코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신을 회유하거나 신의 노여움을 푸는 행위로서의 제사가 아니라 오직 죄에 대한 속죄는 피를흘림으로서만이 가능하다는 속죄의 교리가 전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다음 이러한 속죄의 제사를 드린 자는 이제 하나님과의 불화 관계에서 화목의 관계로 나아가 화목제사를 통해 그와 함께 더불어 마시고 음식을 나누는 축제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하지 않은 자는 결코 여호와 하나님과의 화목에 들어가지 못하며 속죄로서 죄에 대하여 정결케 된자로서만이 그와의 사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보여 준다. 이는 결국 신약의 기독론에 기초하여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과 예배에 관한 신학적 의미가 있음을 알게된다. 이로써 화목제의 신학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데에 이 논문의 의의를 가졌었는데, 본 연구는 어느 정도 그 의의에 도달했다고 보여진다.
화목제는 '배상하다', '반환하다', '평화롭게 하다'는 동사 '솰람'에서 유래한 말이요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해 드리는 제사임을 우리는이미 살펴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화목의 회복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화목한 사실을 감사하여 드리는 제사였다. 즉 홧ㄱ의회복을 위해서는 화목제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속죄제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화목제는 속죄받은 자의 감사의 제사 인 것이다. 일명 '수은제'(酬恩祭)라고도 하는 이 화목제에는 (1) 지나간 축복에 대해 드리는 감사제 (2) 장차 받을 은혜와 축복의 조건으로 드리는 서원제 (3) 기도의 보조물로 드리는 자원제 등 세 가지가 있었다(레 3장;7:11-36). 한편 성경에서 이러한 화목제를 드린 의식의 경우로는 칠칠절때(레 23:19,
20)와 나실인의 서원이 완전히 마칠 때(민 6:17-20) 제사장의 위임식 때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화목제 희생을 드린 국가적 사건으로는 암몬족을 제압한 전쟁의 종결(삼상 11:15), 기근 내지는 온역의 중단시(삼하 24:25), 국가적인 영적 부흥 때(대하 29:31-36) 등을 들 수 있다. 이밖에도 각지방에서는 온 가족을 위해 화목 제물을 잡거나(삼하 20:6) 첫 열매의 수확같은 축제때에 이 같은 화목 제물을 드렸었다(차:29-31);삼상 9:11-13, 22-24;16:4, 5). 화목제라고 쓰인 히브리어의 "샬롬"이란 말이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화해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129) 즉 완전한 관계성 유지를 위한 제사이다. 화목제는 소, 양, 염소, 그리고 암수 구별없이 드릴 수 있다는 것도 그 특징이다. 헌제자가 제물을 가져와 안수하고 짐승을 죽이면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에 뿌린다. 그리곤서 헌제자는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떳다. 그러나 번제와 다른 점은 내장에 덮힌 혹은 붙은 기름(레3:9)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의 기름과 간에 덮힌 기름(양인 경우에는 "기름진 꼬리"를 첨가)을 불살라 태운다. 마지막에 제사장과 헌제자와 그의 친구, 가족들이 함께 남은 제물을 먹는 것으로 축제는 끝난다.130) 또 다른 점은 선택적인 제사이다.131)
그런데 이 화목제가 그리스도의 사역과 선포와 무슨 4관게가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우리의 결론적인 과제 였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 사회적 관계를 전도시킨 것 때문에 인간의 구속은 역
사 안에서 하나님이 명하신 인간의 과제와 인간관계의 맥락안에서 일어나야만했다. 즉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불화,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파괴 등등 이러한 모든 관계속에 있어야 할 관계와 이 나타나는 곳이 삶 자체안이기 때문에 인간의 회복된 이 표현되는 곳도 삶 자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주제대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시작으로 인간 자신과의 화해, 인간과 인간사이의 화해와 인간과, 자연사이의 화해를 위해 화목제물로, 속죄양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화목케된 천국인 것이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주와 교류하고 전체 창조질서가 회복되어 새롭게 되며 의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인간간의 관계도 회복되어진 곳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아직 온것은 아니지만(계20장), 이미 그리스도와 교회안에서 시작된 132) 하나님 나라에서만이 완전한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로는 파괴된 관계와 이 잠재적으로 회복되는 곳, 그 원천도 교회안에서 이다.133)
파괴된 관계와 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속죄의 제사이다. 이 속죄의 희생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위에서 십자가를 지셨으며 의 기초로서의 속죄의 모든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다. 짐승으로 드려지는 제사, 제사장에 의해서 드려지는 모든 제사는 짐짓 죄가 생각날 때마다 반복해서 드려야 되지만 얘수께서 드린 속죄의 제사는 영단번에 드린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다
시 속죄의 제사로서의 예수를 영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신 결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삶을 지배하심으로써 삶의 모든 영역에서 관계와 의 파괴를 영속화 시키고 있는 악의 권세를 쳐부셨다는 것과 또한 사람이 더 이상 죄의 멍에 아래 살지않고, 하나님과 교회의 동료 신도들과의 진정한 공동체 안에서 살 수 있는 자유를 얻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그것이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우주적인 의미를 가진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 ....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134) 라고 쓰고 있다. 속죄 안에서 세상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 거듭나 다시는 죄의 멍에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 이라도 또 죄를 짓게 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죄를 지을 때마다 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우리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이 되어있다.(요일 1:9).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죄를 짓게 된다면 우리는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이 깨어졌기 때문에 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화목의 제사의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회복과 이 일어나는 곳은 지상을 넘어선 영역이 아니라 바로 교회 안이다.135) 교회안에서 에배와 말씀을 통하여 부단히 하나님
과의 교제를 증짐하며 을 유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교회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교회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그리스도와 관계하며 그속에 있는 사람들의 무리이다. 그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다.136) 그러므로 회복된 관계와 이 출발해야 하는 곳은 하나님에 속한 사람들의 장, 즉 교회라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교회는 부단히 이 샬롬을 선포하고실천하는 것으로그 사명을 삼아야한다. 이제 구약적인 제사는 더이상 필요없다 하더라도 교회는 매일 그리스도께서 세상죄를 지고 갈보리 언덕으로올라간 것같이 교회는 이 세상을 위하여 이러한 평화의 화목의 신령한 제사를 날마다 드려야한다. 신자들 역시 말이다. 그렇게 화목의 제사와 사명에 충실 할 때 세상은 그리스도안에서 소망을 가지게되며 교회는 성장을 경험하게될 것이다. 이것이 마음세기의 교회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본연구자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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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노봉린, 교회성장론의 성경적 검증,"목회와 신학' (서울:두란노서원,1997. 11월호)p.54.
2. G. Vos는 이를 씨와 나무(seed-tree)의 예로 설명한다. (G. Vos, Biblical Theology) 박형룡, 바울 신학 및 신약신학 연구, 합동신학원, pp. 1-34 참조.
3. 박윤선, 「개혁주의 소고」, 신학지남 vol. 185, pp. 14-15.
4.De Apostolische Kerk, Kampen, 1954, p. 30
5. Ibid., p. 16에서 재인용.
6.Gereformeerde Dogmatick III, p. 30.
7.C. Fritsch, 「창세기」, 문익환역(서울:총신대, 1963),p.38.
8.Robert. Brow, 「종교의 기원과 사상」, 홍치모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1963),p.121.
9.Ibid.,p12.
10.F.M Segler.「예배학」, 정진환역(서울:요단출판사, 1981),p.31.
11. Robert G. Rayburn, 「예배학」, 김달생, 강귀봉 역 (서울: 성광문화, 1982), p. 57. 갱ㄴ제단이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그곳에서 쌓는 제단제사를 말하고 (창 8:20, 12:8, 15:9∼10, 22:5∼10, 26:24∼25), 가정제단이란 족장 가족들이 드리는 제단 중심 제사를 말한다.
12. 김득룡, 「현대교회 예배학 신강」 (서울:총신대, 1985), p. 45.
13. John Bright, 「이스라엘의 역사Ⅰ」, 김윤주 역 (왜관: 분도출판사, 1977), p. 148.
14. B. W. Anderson, 「구약성서의 역사와 이해 I」, 이군호 역 (서울: 창학사, 1983), p. 51.
15. G, J, Wenham, The Book of Leviticus, Eerdmans Publishing CO. 1979, p. 49.
16. 김희보, 구약신학논고, 예수교문서선교회, 1979, p. 167.
17. Geerhardus Vos, Biblical Theology, Eerdmans Publishing CO, 1980, p. 186.
18. 김희보, 구약이스라엘사, 총신대출판사, 1981, p. 116, 번제물은 태울것이 원칙이나 가죽(레 7:8)이나 멱통과 더러운 것은 예외이다(레 1:16).
19. 출 29:38∼46, 레 1:1∼17, 민 28:3, 29:39 참조.
20. 번제물의 차이가 있는 것은 일ㄹ반 백성들의 빈부의 차이를 고려한 때문이다. 그 어느 것이나 자기의 힘이 미치는 대로 드리되 그 결과는 다가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냄새"였다(레 1:9, 13, 17).
21. Wenham, op. cit., p. 61.
22. 번제단 위에는 번제물을 태운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고, 모든 제물은 그 불로써 태우게 했다(레 6:8, 9, 13). 다른 불을 쓰면 그런 제사장은 죽임을 당했다(레 10:1, 2 민 3:4, 26:11).
23. 김희보, 구약신학논고, pp. 172∼173, 요한복음 1:29 참조.
24. 정규남, 구약개론, 개혁주의신행협회, 1985, p. 112. 번제가 죄를 용서해 주는 제사임을 레위기 14:20과 1624에서 명시하고 있다.
25. 창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쳐 번제를 드리라고 하였으며, 출 18:11, 12에서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으며, 출 24:3∼8에서는 백성이 새내산계약을 받아들인 후 모세가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는 실례가 있다.
26. C. F. Keil Maunal of Biblical Archaeology I, Edinburgh, 1887, p. 317.
27. De Vaux, Studies in O. T. Sacrifices, University of wales, 1964, p. 34.
28.De Vaux, Studies in O.T. Sacrifices, University of wales, 1964, p.34.
29.Wenham,op.cit.,p.69.
30.Samuel J. Schults, 「구약총론」송인규역(서울:생명의 말씀사, 1985).p.102.
31.Wenham은 The Book of Leviticus, p71
32.MatthewHenry, Keil, Lange, 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레위기편. 2장.
33.MatthewHenry, Keil, Lange, Ibid.
34.G. T. Manley and H. W. Oldham, Search the Scriptures, (London:IVP,1953))P.45.
35.원용국, 성막과 십게명, (서울 :성광문화사, 1982)P.88.
36. Noordtzil, Leviticus,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2, p. 248.
37, 김희보,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 빛과 소금, 1986-1. p. 31, 비둘기를 제물로 드리자는 가난하였음을 암시한다(레 5:11, 12:8, 14:22, 30 참조). 눅 2:22∼24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기를 주께 드리고" 비둘기 한쌍을 제사드리려 한 것은 그의 가정이 얼마나 가난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여기 비둘기 "한쌍"이란 것은 하나는 번제로 또 하나는 속죄제로 드리기 위함이었다(레 5:7∼10).
38. 레 10:4, 14:40, 45 24:23 참조.
39. 레위기 4:17절은 히브리 10:14절과 일치한다. 즉 "저가 한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고 했는데 여기 영원히 온전케 하셨다는 그 말은 곧 일곱 번 뿌려진 제물의 피의 효험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할 것이다(김희보, 구약신학논고, p. 185.).
40. 표준성경 주석, 레위기, 총회교육부, 1957, p. 184.
41. 박윤선, 레위기성경 주석, 영음사, 1971, p. 69.
42. R. Young, Analytical Concordance to the Bible.
43.원용국,op,cit.,p.95.
44.Ibid.,p.94.
45.강병도. 호크마주석, "레위기편"(서울: 기독지혜사, 1990), 레위기 3장.
46.Ibid.
47.Ibid.
48.Keil A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T.,Vol. I. pp.299-300
49.강병도. op. cit.,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참고.
50. 삼상 13:9, 삼하 4:25 참조.
51. Keil and Delitzsch, Pentateuch vol. I, pp. 289∼299.
52. 정규남, op. cit., p. 161.
53. 김희보, op. cit., p. 175.
54. Ibid., p. 176.
55. 감사함으로 드리는 제물은 제사드리는 그날 다 먹고(레 7:15), 만약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다음낭 날까지 먹되, 그 희생의 고기가 3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르라 한다(레 7:16, 17). 그리고 화목제를 먹는사람은 모두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레 17:20).
56.강병도. 호크마주석. '출애굽기'(서울:기독지혜사, 1990), 29장. Matthew Henry주석 재인용.
57.히 9:11- 15;10:1-14.
58.강병도 op. cit.,.
59.Ibid.
60.기독교 대백과 사전 편찬위원회편, 기독교문사. 1987. p.870.
61.Ibid. p. 871.
62.Ibid.
63.Ibid.
64.Ibid. ,p. 872.
65.C. Fritsch, 「창세기」, 문익환역(서울: 총신대, 1963), p. 38.
66.Robert. Brow, 「종교의 기원과 사상」, 홍치모역(서울:대한 기독교서회, 1963), p. 121.
67.Ibid., p. 12.
68.F. M. Segler, 「예배학」, 정진환역(서울:요단출판사, 1981),p. 31.
69,노성도, 「히브리문서 예언자들의 제의이해」, (침례신학대학 대학원, 석사논문),p. 12.
70.Ibid.
71.Peter F. Ellis,「모세오경」, 김윤수역(왜관: 분도출판사, 1983), pp. 44-45.
72.G. Von Rad, 「구약성서신학 Ⅰ」, 허혁역(왜관: 분도출판사, 1978), p. 240.
73.강병도, 레위기편, Ibid.
74.Matthew Henry. Ibid.
75.강병도, 레위기.Ibid.
76.Matthew Henry. Ibid.
77.강병도, 레위기, Ibid., 2장.
78.Keil A Delitzsch, Commentaryon the O.T.Vol . I,p.303.
79.민15:27-31; Lange,Matthew Henry,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Vol.III.p39.
80.민 28:2; 레 21:6,8,17,21-22, 22:25 참조.
81.삼하 23:16-17). 창 9:4; 레 7:23-27, 17:10-14, 19:26; 신 12:16, 23-25, 15:23; 삼상 14:33; 행 15:20,29 참조.
82.Keil, C. F. and Delitzsch F.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Ⅲ. Levitics, trans. Jams Matine (Michican: Wm. B. Eerdamans Publishing Company, 1951), p. 79.
83.정규남, 「구약개론」(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1985), pp. 162- 163.
84.Ibid., p. 161.
85.'기름'은 '가장 좋은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 -fat, fatness, the best of anything, - the bestof the wheat).
86.노성도, op. cit., p. 22.
87) Ranald Macalyly & Jecram Barrs,「Being Human : The nature of spiritual
experiemce」, 홍치모(역), (서울 : IVP, 1992). p. 24-26.
88) Ibid. 27.
89) Robert E. Webber. 「God Still Speaks」, 정장복(역)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p. 66.
90) Ibid. p. 67.
91) 요 17 : 5.
92) 요 14. 16.
93) Robert E. Webben. op. cit. p. 67.
94) Emil Brunner, The Christian Doctrine of Creation and Redemption,
trans, Oiive Wyon (London : Lutterworth Press, 1952)의 글을 위의 글에서 재인용.
95) Ibid. p. 68.
96) 벧전 1 : 2.
97) 롬 11 : 36.
98) Robert E. Webber. op. cit. p. 70
99) Ibid. p.112.
100) 창3:8.
101) 창4:12.
102) 창6:5.
103) Robert. E. Webber. op.cit. pp.115-117.
104 히1:3.
105) 요1:14.
106) A. D451년 칼게돈 신조.
107) 롬1:3-4.
108) Gerge Eldon Ladd, [The Presence of the Future , (Grand Rapids: Eerdmans , 1974)참조.
109)Robert E. Webber. op.cit. p.127.
110) 고후5:17.
111)James F, Engel, Cortem Porny Christians Comnications (Nashvillle : Thomas Nelson, 1979), p.89ff 참조.
112)Robert E. Webber, op.cit. p.128.
113) Sae Yoon. Kim, [ Jesus and Temple ] (Zondervan. 1990) pp.18.19
114)Ibid.
115) 김세윤.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와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실촌' (서울: 신학지남. 1989. 겨울호). p.20
116.Ibid.,p47.
117.Ibid.,p.79.
118.머레이 H. 라이퍼, 도시교회 목회론, 박근원 역, (서울 기독교서회.1977),P.278.
119.김세윤, 「신약에 있어서의 평화」"목회와 성령"(부산: 에페소서원,1991), p. 231.
120.김세윤, 「신약에 있어서의 평화」,op. cit.,p. 232.
121.Ibid.,p. 233.
122.Ibid.
123.Ibid.,p. 234.
124.Ibid.,p. 235.
125.I. H. Marshall, The Gospel Of Luke(Exeter: Paternoster, 1978), p. 314.
126.김세윤, op. cit., p. 236.
127.김세윤, Ibid., p. 240.
128. 박윤선, 「개혁주의 소고」, 신학지남 vol. 185, pp. 14-15.
129.Keil, C. F. and Delitzsch F.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Ⅲ. Levitics, trans. Jams Matine (Michican: Wm. B. Eerdamans Publishing Company, 1951), p. 79.
130.정규남, 「구약개론」(서울: 개혁주의 신행협회,1985), pp. 162- 163.
131.Ibid., p. 161.
132) Gerge Eldon Ladd, [The Presence of the Future , (Grand Rapids: Eerdmans , 1974)참조.
133)Robert E. Webber. op.cit. p.127.
134) 고후5:17.
135) James F, engel, [Cortem Porny Christians Comnications](Nashvillle : Thomas Nelson, 1979), p.89ff 참조.
136)Robert E. Webber, op.cit.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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