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스크랩] 장수민 목사 구속사 성경연구 - 모세에게 나타나신 주

하나님아들 2018. 9. 28. 23:17

The English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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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rd Appears to Moses
모세에게 나타나신 주

 

 

Exodus 3:5-10      5"Do not come any closer," God said. "Take off your sandals, for the place where you are standing is holy ground." 6Then he said, "I am the God of your father,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At this, Moses hid his face, because he was afraid to look at God. 7The LORD said, "I have indeed seen the misery of my people in Egypt. I have heard them crying out because of their slave drivers, and I am concerned about their suffering. 8So I have come down to rescue them from the hand of the Egyptians and to bring them up out of that land into a good and spacious land,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the home of the Canaanites, Hittites, Amorites, Perizzites, Hivites and Jebusites. 9And now the cry of the Israelites has reached me, and I have seen the way the Egyptians are oppressing them. 10So now, go. I am sending you to Pharaoh to bring my people the Israelites out of Egypt."     

take off  I. 벗다, 가버리다, 떠나다
indeed  ad,int. 정녕(丁寧)히, (강조)정말로, 실로, 참으로, 실제로, 정말, 대단히
misery  n. 고통, 불행, 비참, 빈곤
suffering  n. 우고(憂苦), 고통, 괴로움, 고생, 수난
rescue  vt,n. 건져내다, 구출하다, 구출, 구원
bring up  I. 기르다, 교육하다
oppression n. 학대(虐待), 압박, 압제, 우울, 답답함


Revelations 15:2-4      2And I saw what looked like a sea of glass mixed with fire and, standing beside the sea, those who had been victorious over the beast and his image and over the number of his name. They held harps given them by God 3and sang the song of Moses the servant of God and the song of the Lamb: "Great and marvelous are your deeds, Lord God Almighty. Just and true are your ways, King of the ages. 4Who will not fear you, O Lord, and bring glory to your name? For you alone are holy. All nations will come and worship before you, for your righteous acts have been revealed."

mix  v. 섞다, 혼합하다
beast  n. 짐승, 가축, 식용 소
sang  v. sign의 과거
hold  vt. (손에)갖고 있다, 쥐다, 잡다
marvelous a. 기이한, 불가사이한, 놀라운, 훌륭한
deed  n. 행위, 행동, 실행
reveal  vt,a,n. 나타내다, 드러내다, (숨겨져 있던 것을)보이다, (신이)계시(묵시)하다, 계시 ,묵시
take off  I. 가버리다, 떠나다, 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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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 TEXTS
Isaiah 6  Acts 7:3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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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 3:5-10   5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7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9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Revelations 15:2-4   2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3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4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50/366일차 = 344-350 개째 단어)


hold  vt. (손에)갖고 있다, 쥐다, 잡다
marvelous a. 기이한, 불가사이한, 놀라운, 훌륭한
misery  n. 고통, 불행, 비참, 빈곤
mix  v. 섞다, 혼합하다
oppression n. 학대(虐待), 압박, 압제, 우울, 답답함
reveal  vt,a,n. 나타내다, 드러내다, (숨겨져 있던 것을)보이다, (신이)계시(묵시)하다, 계시 ,묵시
sang  v. sign의 과거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성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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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5:2-4

 

   구속사의 구조를 보면, 종말(終末)이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임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속으로 가지고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래를 현재의 것이 되게 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최종적인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만 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미래적인 것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이런 의미에서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미래적인 것이 되어 성도의 소망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實際)와 실질(實質)이라는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시대의 역사 속에서 존재해 나오고 있는 실존(實存)이요 실재(實在)인 것입니다.

1. 요한계시록을 정당하게 해석하기 위한 기본적인 관점

   오늘날 요한계시록은 그 묵시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해석하기가 쉽지 않은 책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내용의 많은 부분이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차 있고, 이 또한 별로 익숙지 않은 용어들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지금의 장과 절의 구분은, 그 다소 불합리한 구조로 말미암아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도리어 문맥의 흐름을 끊어 놓고 있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의 보다 더 큰 어려움은, 미래의 일을 알아 맞추려고 하는 공상적이며 사색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데서부터 초래되지 않나 생각되어집니다. 사실 이런 태도는 의외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고,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대부분 그릇 되이 해석되어지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소위 주님의 재림 시기를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광신적인 종말론자들이 빈번히 출현하곤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상상력을 지나치게 의지한 나머지, 오직 요한계시록 하나에만 입각하여 기독교 종말론을 설정하려 합니다. 그렇지만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은, 기독교 종말론이라고 하는 거대한 유개념(類槪念)의 입장에서 볼 때, 한 가지에 불과한 종개념(種槪念) 정도의 위치만을 차지할 뿐입니다. 기독교 종말론이 정당하게 설명될 수 있으려면, 신구약 성경 전체를 총괄하는 연구가 체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학적인 정통성과 객관성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지나치게 의지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의 특정 부분을 들이대는 식의 해석 태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건전하고도 그 목적에 맞게 연구하는 자세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한 권의 책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기록한 저자의 의도를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자의 의도를 빗나가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장차 미래의 어느 때에 일어날 어떤 사건을 예고함으로 - 이것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종말의 사건일 것인데 - 이것의 시기를 알아 맞추게 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고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 미래의 사건을 기정 사실로 삼기는 하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현재의 삶을 합당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영위해 나가야 하는가를 제시하기 위하여 기록된 책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을 앞둔 구속사의 구조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들로 하여금 더더욱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서의 모습을 합당하게 유지하도록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습니다.
   사실 요한계시록도 복음의 진리를 다루는 계시임에 틀림없고, 또 이런 까닭에 해석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 사역에 입각하여 이 땅에 세워진 교회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이는 '이미, 그리고 벌써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를 그 중심으로 삼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구속사의 구조를 보면, 종말(終末)이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땅에 임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속으로 가지고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래를 현재의 것이 되게 하신 분이십니다. 다만 '최종적인 완성'이라는 측면에서만 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미래적인 것으로 남아 있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이런 의미에서만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미래적인 것이 되어 성도의 소망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實際)와 실질(實質)이라는 측면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시대의 역사 속에서 존재해 나오고 있는 실존(實存)이요 실재(實在)인 것입니다.
   참으로 미래에 되어질 일로서의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서 '지금 현재의 것'이 이미 되어버렸습니다. 장차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기업과 영광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도래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현재의 것으로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이미 성립되어 있는 이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더더욱 견고하게 지탱해 나가게 하려는 의도로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습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재림하실 때까지, 그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 성립되어 있는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켜나가라고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을 격려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한 세상이 계속해서 성도들을 핍박할 것이기 때문이며, 이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자칫잘못 낙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탈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인 완성이 아직 감추어져 있는 이 사실 때문에, 성도는 핍박을 받을 때에 세상의 힘을 너무 큰 것으로 과대히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리스도는 여전히 승리자의 자리에 앉아 계시고, 마지막 때에 모든 원수를 결박하여 지옥에 멸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승리에 함께 참여한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 이 사실을 부단히 상기시켜 줍니다. 바로 이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많은 찬양 문장들의 목적인 것입니다.

2. 어린 양의 승리를 부각시킴으로 교회를 격려함

   요한계시록 15:2-4에는 구속받은 성도들이 어린 양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 때 모세에 의해 불려진 노래를 그대로 따오고 있습니다(출 15:11과 비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수 애굽 군대를 홍해 바다에 몰살시키심으로 승리를 주셨을 때, 여호와의 권세 있는 구원 역사를 찬양하며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모세로 말미암는 이와 같은 출애굽 사건은, 장차 새 언약의 중보이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어질 구원을 모형(模型)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들어오심으로 모세의 출애굽 속에서 모형되었던 영적 출애굽의 역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사단을 패배시키신 그 승리를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모세의 노래, 곧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본 환상은 이 두 사건을 결합시켰습니다. 지금 이 노래는 사단으로 상징된 짐승을 이긴 자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 사단을 패배시키신 능력을 힘입어 성도 역시 믿음과 인내와 소망 가운데 짐승의 모든 궤계를 극복하여 이김으로 승리하였습니다(2절). 그리하여 모세의 때와 같이 어린 양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3절)라고 명시됨으로 그 구속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또 앞서 살펴본 원리를 염두에 두면, 이 환상의 목적은 쉽게 해석되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사망을 극복하고 들어가 계신 이 영광의 자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를 위하여 친히 성취하신 승리의 자리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시켜줌으로, 세상 속에서 고난 당하는 교회로 하여금 위로와 격려를 얻게 하려는 것이 이 환상의 목적인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 왕의 왕이십니다.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당신의 모든 권세를 수여하셨습니다(마 28:18). 이렇게 하신 것은, 성자의 손에 의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잘 길러지게 하시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 왕의 왕이 되셔서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그는 심지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까지 가지신 분이십니다(계 1:18). 만 왕의 왕이신 어린 양의 구속의 힘은 능히 성령의 능력으로 사단의 나라를 결박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광야의 시험을 통하여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는 승리하셨고, 사단은 그의 곁을 떠나가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 왕적 권세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단의 나라를 결박시키시고, 자기 백성을 구해내시는 데서 극치에 이르렀습니다(마 12:28). 바로 그리스도의 이 왕적 권세가 이제 선한 의도로 당신의 몸인 교회에까지 미침으로 성도들을 통치하십니다. 이를 가리켜 '신령한 구속의 통치'라고 일컫게 됩니다. 이 신령한 구속의 통치로 말미암아 성도는 세상이 가해오는 무수한 재난과 위협으로부터 든든히 보호를 받습니다.
   성도는 어떠한 대적의 위협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 능히 이깁니다. 일순간 쓰러지고 넘어지는 정도조차도 성도에게 아주 없을 수는 없겠으나, 궁극적으로 성도는 승리함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죄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힘입고, 그 이김의 능력을 공급하시기 위하여 성도에게 성령을 내주 시키시는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로 말미암아 성도는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 앞에 직면해 있는 환난과 위협과 유혹으로 말미암아 역경과 투쟁과 순결이 성도에게 요구되어지지만,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구속의 통치'를 의존함으로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는 법이 없으며,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십니다(요 6:37).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면서 성도를 구원하신 이 만 왕의 왕께서, 지금은 더욱이 살아 계신 중에 계속해서 성도를 위한 '신령한 구속의 통치권'을 행사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성도는 결코 세상에게 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것도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끊어놓지 못하며, 심지어 죽음까지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죽음조차도 성도가 얻은 구원을 영화롭게 하는 데 이바지 할 뿐입니다(롬 8:35).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어린 양의 '신령한 구속의 통치'는 성도를 궁극적인 승리의 자리에로까지 확실하게 인도해 들이는 것입니다. 여기 요한계시록에서 펼쳐진 환상의 목적이 성도로 하여금 바로 이 사실을 굳게 부여잡고 끝까지 힘을 내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신령한 구속의 통치를 의지함

   이제 실리적인 문제를 다룰 차례가 되었습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성도로 하여금 능히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대처해 나가게 하려는 데 있고, 이를 위하여 이미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그 승리를 보여주는 가운데 성도로 하여금 이를 굳게 의존하게 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승리는 이미 보장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만 왕의 왕이 되셔서 교회를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의 신령한 구속의 통치 주제는, '성도의 견인'이라고 하는 위대한 기독교 교리를 성립시킵니다. 그러면 과연 성도에게 이 교리가 작용(作用)하게 되면 어떤 일이 그에게 일어나게 됩니까? 혹은 성도가 이 교리를 자신에게 적용(適用)하려 할 때에 취해야 하는 실제적인 태도는 어떤 것입니까? 성도는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신령한 구속적 통치에 속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미리 예매(豫買)한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자리에 무사히 들어가 그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⑴ 신령한 구속의 통치로서의 성령 충만
   첫째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령한 구속의 통치에 속해지려면 항상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앞서 그리스도께서 만 왕의 왕이 되신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또한 이 성령을 성도에게 내주케 하심으로 당신을 통하여 나타난 그 능력이 성도를 통해서도 계속 발휘되게 하신다는 사실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령한 구속의 통치에 속해 있으려면, 그리하여 성도의 견인 교리가 자신에게 작용함으로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에 도달하려면, 무엇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여야 하고(롬 8:4 갈 5:16-7), 성령을 충만히 받아야 하며(엡 5:18), 그리하여 항상 성령의 기도를 힘입는 도우심 안에까지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롬 8:26-27 엡 6:18). 부정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성령을 소멸 - 제지 - 해서는 안되며(살전 5:19), 근심시켜서도 안되고(엡 4:30), 오직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바에 순종하여야 합니다(골 1:29).

   ⑵ 신령한 구속의 통치로서의 말씀 충만
   두번째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령한 통치에 속해지려면, 말씀으로 충만해 있어야 합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의 성령의 충만이 성도에게서 나타나게 되면, 그는 무엇보다도 말씀에 전인격적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원칙적으로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역사하실 때 말씀을 통하여, 말씀과 더불어 그렇게 하십니다. 이 사실은 성도가 중생하게 될 때에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살펴봄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도는 중생할 때에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선포하고 있는 복음을 이해함으로 영접하게 되면, 이를 가리켜 그가 중생한 것이라고 말하게 되는 데, 이 일은 그의 속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고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요 1:12-13 3:5 고전 12;3).
   이렇게 성령께서 사람을 중생시키시려 할 때에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신 이 원리는 계속해서 성도의 성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합니다. 따라서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무엇보다 그는 말씀에 대해 밝아지고 거기에 순종하는 능력의 진보를 눈에 띠게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며 가볍게 취급하는 성도가 성령 충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이론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백성을 궁극적인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구속의 통치는 다름 아닌 말씀의 통치입니다. 말씀 순종과 성령 충만은 같은 의미이며, 이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령한 구속의 통치이기도 합니다.

   ⑶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으로의 뚜렷한 인생 전환
   성령과 말씀으로 충만한 성도의 삶은, 그가 처음에 중생할 때에 과감하게 바꾸었던 그 인생관을 더더욱 확대시켜 나가는 형식을 띠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부정의 터 위에 건설되는 두 가지 양상의 삶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죄를 이기고 극복하는 모습이요, 다음으로 적극적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마 6:33).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편의에 따른 것이지, 피차 실제로 분리되는 영역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죄를 이긴다고 할 때 이는 옛 사람의 때에 가졌던 삶의 가치관과 방식 모두를 포기한다는 차원에서 거론하는 것이지, 어떤 윤리적으로 지적받을 만한 죄목들을 하나씩 하나씩 구체적으로 제거해 나가는 일을 가리키지는 않는 것입니다. 또 이것마저도 부차적인 것일 뿐이고, 핵심은 그의 생명력이 복음에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규정지어져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새 사람'(엡 4:22-24),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등으로 표현합니다.
   이 새 사람,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 백성다운 생명력이 자연스럽게 발휘되게 될 때,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와 생명으로 삼는 신앙 인격체가 드러나게 되고, 또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현해 나가는 삶의 모습이 성립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령한 구속적 통치도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중요하게 포착하지 못하게 되면, 기독교를 개혁하려고 하는 곳곳마다에서 도덕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오류로 빠져드는 모순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모순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혁이라는 구호와 소리만이 요란할 뿐이지, 정작 개혁주의 교회다운 실질을 이루어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bloom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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