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glish Bible ---------------------------------------------- The fruit of the Spirit; Joy 성령의 열매; 기쁨
Psalm 33:1-4 1Sing joyfully to the LORD, you righteous; it is fitting for the upright to praise him. 2Praise the LORD with the harp; make music to him on the ten-stringed lyre. 3Sing to him a new song; play skillfully, and shout for joy. 4For the word of the LORD is right and true; he is faithful in all he does.
righteous a,ad. 바른, 정의의, 공정한, 정직한 fitting a,n. 마땅한, 적당한, 어울리는, 적합 upright a. 정직한, 곧은, 곧게 선, 올바른 harp n. 하프, 수금, 거문고 자리 lyre n. 리라(손에 들고 타는 작은 수금)
Proverbs 11:10 10When the righteous prosper, the city rejoices; when the wicked perish, there are shouts of joy.
prosper vi,vt. 형통하다, 번영시키다
Habakkuk 3:17-18 17Though the fig tree does not bud and there are no grapes on the vines, though the olive crop fails and the fields produce no food, though there are no sheep in the pen and no cattle in the stalls, 18yet I will rejoice in the LORD, I will be joyful in God my Savior.
fig n. 무화과, 조금, 하찮은 것 bud n,vi,vt. 싹, 꽃봉오리, 싹트게 하다,=BUDDY crop n. 농작물, 수확물, 수확고 pen n. 우리, 축사, 우리에 넣다, 가두다 stalls n. 외양간
Romans 15:13 13May the God of hope fill you with all joy and peace *as you trust in him(in believing), so that you may overflow with hope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overflow vt. 넘치다. (강 등이) 범람하다
Philippians 4:4 4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1Peter 4:12 12Dear friends, do not be surprised at the painful trial you are suffering, as though something strange were happening to you.
surprise v. 놀라다 trial n. 시도, 시련, 시험(v. try) suffering n. 시련, 고통, 괴로움, 고생, 수난
----------------------------------------------------------------- RELATED TEXTS Psalm 28:6-9, 30:4-5 Nehemiah 8:1-12 Isaiah 61 -----------------------------------------------------------------
Psalm 33:1-4 1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2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4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Proverbs 11:10 10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Habakkuk 3:17-8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Romans 15:13 13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Philippians 4:4 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1Peter 4:12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70/366일차 =484-490 개째 단어)
fig n. 무화과, 조금, 하찮은 것 fitting a,n. 마땅한, 적당한, 어울리는, 적합 overflow vt. 넘치다, (강 등이) 범람하다 pen n. 우리, 축사, 우리에 넣다, 가두다 prosper vi,vt. 형통하다, 번영시키다 surprise v. 놀라다 trial n. 시련, 시도, 시험(v. try)
소망의 본질 -------------- 롬 15:13
성도의 소망은 실질적인 성령의 감동이며 역사이고, 이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사를 의지하는 믿음을 그 기저(基底)로 삼습니다. 성도가 이 바른 소망을 누리게 되면,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충만하게 되면, 무엇보다 그의 머리에 기독론적인 지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베푸신 긍휼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영적 지식의 증진이 있게 되고, 이미 지금 현재의 역사 속에서 새 질서의 영역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다운 자세와 태도를 합당하게 유지하고 발휘하는 일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위하여 소망의 역사를 시작하신 하나님
로마서 15:1-16은 한 문단을 이루고 있는 데 그 주제는 이방인의 구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예언해 나오신 바대로 이방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속사 전반을 통괄하는 안목으로 복음을 분석합니다. 구속사는 태초부터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의 은혜가 제공되어지기로 계획된 가운데 진행되어져 나왔습니다. 다만 시기적으로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때가 차야' 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어떻게 은혜로 구원하시는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충분히 계시(啓示)되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선택된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구약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에게만 당신을 계시하신 것은, 그들에게만 구원을 베푸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진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구속사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보여주는 계시사였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계시의 도구였고, 이에 따라 시간적으로 먼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기회를 누리기는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시사적인 구속사를 주권적으로 집행하심으로 복음의 정체성을 현시(顯示)하려 하셨습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에게 구원의 복을 베푸시며, 장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지는 구속의 원리와 관련한 계시를 더 풍성하게 내시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민족을 창설하사 계시의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무조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직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의를 소유한 자들만이 장차 도래하실 구세주의 사역에 선취적으로 참여함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상의 사실을 염두에 두고, 앞서 로마서 12-14장을 통하여 전개해 나온 '한 몸'에 대한 강조를 계속 확장시켜 나갑니다. 성도들은 마땅히 소망 중에서 함께 교회원이 된 지체들을 사랑해야 하고(12:9-13),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빛도 지지 말며, 남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다 이룰 수 있습니다(13:8-10). 무엇보다 식물로 인하여 성도들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해야 하니,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기 때문입니다(14:17). 자기의 믿음으로 형제의 양심에 부담을 지우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20-25절).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습니다(15:1). 여기에까지 이르자 바울은 생각을 좀더 넓히기 시작합니다. 로마 교회 성도들이 피차 어떠한 이유로도 갈라져서는 안되며, 서로가 서로를 받으라고 요구합니다(7절). 그는 자신의 주장을 복음의 원리에서 찾습니다. 그리스도는 할례의 수종자가 되심으로 유대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8절). 그러나 하나님은 동시에 이방인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9-12절). 여기서 긍휼은 구원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두꺼운 벽을 헐어버리셨습니다(엡 2:11-22). 그러므로 서로가 복음 안에 있는 이상에는 더 이상 구별이나 차별, 서로에 대한 판단과 비방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소망(所望)은 유대인들만의 것이 아니며, 자신의 믿음이 강하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자들만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적용되어지는 자들 모두의 것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13).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소망을 주신 사실 때문에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설명되었습니다. 만일 은혜의 관점을 주목했다면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소망을 구원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서'라는 표현이 뒤따르고, 이때에도 원어상으로는 '그'라고 하는 관사가 있어서 '믿음'의 요소가 소망의 근거요 조건인 사실이 분명하게 제시됩니다. 믿음을 생각하려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대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다음 단원에서 다룰 것입니다. 소망, 곧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 모두의 것입니다. 더 이상 이런 저런 이유로 피차 판단하고 분리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바울은 내친김에 구속사의 핵심이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 직하게 하려 하심이라"(16절)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로마서의 나머지 부분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진술됩니다.
소망의 내용으로서의 구원
이제 두번째로 소망의 내용으로 나타난 구원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차례입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소망이 우리의 것이 되는 것은 '믿음 안에서'이고, 이것은 구원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소망과 구원이 피차 동일한 의미인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면 어떠한 기쁨과 평강도 그에게 없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인생이 세상 속에서 누리는 옛 사람적인 요소들로 인하여 기뻐하고 자화자찬하는 것은, 마치 마약을 복용한 사람이 몽롱한 상태에서 스스로 만족해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약 기운이 빠지게 되면 자기의 실상은 다시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마약을 필요로 했던 자기의 현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복음 안에 속해 있지 아니한 세상 사람들이 누리고 즐기며, 때로는 그들만의 의미로 소망을 가지기도 하는 것 등등은, 죽음과 심판의 이중적 필연성이 임하게 될 때에 순식간에 허무한 것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항상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육적인 쾌락과 명예와 권력에 집착함으로 이 죽음을 잠시간 잊을 뿐인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죽음을 세상사에서 일어나는 우연한 불행이라거나 또는 늙음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가 잘못 주장하듯이 인간은 이미 죽음까지도 계획된 가운데 창조되었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이 맞이해야 하는 죽음은 명백하게 죄의 대가입니다(롬 5:12).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늙음의 현상이 오게 되었고, 아울러 이제가지의 역사 속에서 숱하게 반복되었던 온갖 질병과 불행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역모자를 처형하는 왕의 권세, 곧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엄하고 준엄한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심판을 집행하심으로 인간은 죽음이라고 하는 절벽 앞에 서게 됩니다. 물론 죽음을 단순히 인간의 사고(思考)가 정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칭 지인(知人)들은 또 한번 자기 지식에 넘어가 실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의 의미라면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심판으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며 확실합니다. 죽음은 심판의 시작에 불과할 뿐으로 본격적인 형벌을 향하여 첫 걸음을 내딛는 의미를 가질 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이 가슴 섬뜩한 선포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기심을 받지 못한 자들이 희희낙락할 수 있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이는 자기를 스스로 속이는 자들에게나 가능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마약(痲藥)에 빠져든 정신 몽롱한 상태를 벗어나 죽음 앞에서 자기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곧 인간의 모든 기를 단번에 꺽어버리는 죽음의 현실 앞에서 무슨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습니까? 반면 성도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성도에게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소망이 있습니다. 성도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에게 죽음의 문제는 이제 관념과 사변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늘 기쁨을 누리고 평안에 젖어 있습니다. 세상이 성도에게 가해오는 어떠한 호불호의 환경도 성도의 기쁨과 평강을 앗아가거나 대체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감옥에 억압되어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 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4-7)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과 평강! 이것은 오직 성도들만의 것입니다. 왜 성도들만의 것이냐 하면, 성도에게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구원의 의미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에로 결속되어져 있기 때문에 기쁨과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이요, 소망으로 충만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바울이 '기쁨과 평강을 충만케 하사'라고만 말하지 아니하고 '믿음 안에서'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소망
끝으로 성도가 소망을 소유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성도의 구원을 위한 근원이 되게 하셨고, 성도로 하여금 이 구원을 현재의 삶 속에서 누리게 하사,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케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이 충만한 능력을 성도에게 실제로 수여하는 분이십니다.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그의 속에 소망이 넘치게 됩니다. 앞서 살펴본 빌립보서 4:7에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한 부분이 나오는데, 성령님은 바로 이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게 되면 그의 속에 기쁨과 평강이 충만케 되고, 이는 소망의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넘치는 소망을 성도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는 일임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생각함에 있어서 이 소망의 요소는 흔히 간과되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소망도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역사하신 사실에 근거하여 누려지는 소망이 아닌 것은 참된 소망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참된 소망이 없는 곳에는 참된 구원 역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망, 평강, 기쁨, 믿음 등등의 요소들은 피차 구별되는 명제이긴 해도, 서로 분리되는 개념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참된 소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기쁨과 평강이 있기 마련이고, 이 기쁨과 평강은 믿음의 기반과 토대로부터 뻗어 나오게 됩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번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그들이 가진 소망의 내용이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을 봅니다. 가령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나무 밑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과일이 입 속으로 뚝뚝 떨어져서 일하지 않고도 편안하게 먹고 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천국에 들어가면 머리에 큰 면류관을 쓸 것이고, 자기의 것은 다른 이가 쓴 개털 모자와는 달리 큰 별이 수십개 박혀 있는 찬란한 금빛 면류관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합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실 때 닫힌 문을 그냥 통과하여 들어오신 것을 예를 들면서(요 20:26), 천국에서는 아무 곳이든지 마음대로 뚫고 다닐 수 있게 된다면서, 이런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상기한 예들은 모두가 헛된 소망이요, 복음과 상관없는 자칭 소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천국 개념을 이 지상 나라의 기계적인 연장선상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고, 그 초점이 자신의 영화에 집중되어져 있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소망이라고는 도무지 인정할 수 없으며, 단지 순전히 기독교적인 용어들로 채색된 자기 상상의 한 모습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그러한 자칭 소망이 불러일으켜진 동기가 순전히 육체의 정욕의 일환에 의한 것인 데서 찾아집니다. 다시 말하여 이런 모습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소망을 누리는 자들이라면 필연적으로 보여주기 마련인 '믿음 안에서의 기쁨과 평강'으로부터 분리되는 유의 것입니다. 사안의 중요한 성격상 다시 한번 강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성도에게 주신 소망은, 성도가 지금 현재 이곳에서 선취적으로 누리는 구원의 기쁨과 평강의 실질로부터 뻗어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의 소망은 실질적인 성령의 감동이며 역사이고, 이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사를 의지하는 믿음을 그 기저(基底)로 삼습니다. 성도가 이 바른 소망을 누리게 되면,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충만하게 되면, 무엇보다 그의 머리에 기독론적인 지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베푸신 긍휼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영적 지식의 증진이 있게 되고, 이미 지금 현재의 역사 속에서 새 질서의 영역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다운 자세와 태도를 합당하게 유지하고 발휘하는 일에 뜨거운 열정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쁨과 평강의 의미이고, 믿음의 의미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소망의 의미입니다. 자기의 머리 속에 스스로 만들어 내고 도취해 들어가는 자기 상상으로서의 자칭 소망은 복음의 소망과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집니다. 사람이 부흥회와 같은 곳에 참석했을 때 순간적으로 기독교적인 분위기와 감흥에 사로잡힌 가운데, 머리 속으로 온갖 좋아 보이는 자기의 꿈과 생각을 공상적으로 펼쳐나가고, 거기에 스스로 도취되어서 일순간 삼매경에 빠져들기까지 하는 이런 경우들을 가리켜 도무지 복음의 소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성도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소망을 누리게 되면, 그의 속에 진정한 기쁨과 평강이 있게 됩니다. 이 두 관계는 피차 분리되지 않으며 공통적으로 구원론적인 믿음을 그 기반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그의 속에는 뚜렷한 '믿음의 지각(知覺)', 그러니까 '구속사에 대한 활발한 이해력'이 있게 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가 간절한 소망이 되어서, 자기 자신부터가 먼저 하나님의 통치를 완전하게 받들어 나가려고 결심하고 다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의 세상이 초래하는 한계를 느낌으로 이것이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에서만큼은 완벽하게 발휘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조명하심으로 도우셔서 이 부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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