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glish Bible ----------------------- God is Love 사랑이신 하나님
Exodus 34:5-7 5Then the LORD came down in the cloud and stood there with him and proclaimed his name, the LORD. 6And he passed in front of Moses, proclaiming, "The LORD, the LORD, the compassionate and gracious God, slow to anger, abounding in love and faithfulness, maintaining love to thousands, and forgiving wickedness, rebellion and sin. 7Yet he does not leave the guilty unpunished; he punishes the children and their children for the sin of the fathers to the third and fourth generation."
proclaim vt. 선언하다, 공표하다, 나타내다, (지역 등에) 금지령을 선포하다 compassionate a,vt,ad,n. 자비, 인정 많은, 동정심 있는, 동정적인, 특별 배려에 의한, 측은히 여기다, 동정하다 gracious a. 은혜로운, 품위 있는, 정중한, 상냥한 abound vi,a,ad. ...이 많다 faithful a,n. 진실한, 신뢰할 수 있는, 정확한 forgiving a. 용서하는, 관대한 maintain vt. 유지하다, 지속하다, 주장하다 rebellion n. (과실), 모반, 반란, 폭동, 반항 unpunished a. 벌받지 않은, 처벌을 면한 guilty a. 죄를 범한, 유죄의
Psalm 33:5 5The LORD loves righteousness and justice; the earth is full of his unfailing love.
unfailing a. 틀림이 없는, 신뢰할 수 있는
John 3:16 16"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perish vi,vt. 죽다, 멸망하다, 썩어 없어지다
Romans 5:8 8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8:38-39 38For I am convinced that neither death nor life, neither angels nor demons, neither the present nor the future, nor any powers, 39neither height nor depth, nor anything else in all creation, will be able to separate us from the love of God that is in Christ Jesus our Lord.
demonstrate vt. 확증하다, 논증하다, 선전하다 convince vt,n. 확신시키다, 납득시키다
1John 4:16 16And so we know and rely on the love God has for us. 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
rely vi. 의지하다, 신뢰하다, 믿다
----------------------------------------------------------------- RELATED TEXT Psalm 36 Jeremiah 31:3-6 Zephaniah 3:16-17 1John 4:7-21 -----------------------------------------------------------------
Exodus 34:5-7 5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 6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Psalm 33:5 5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John 3:16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Romans 5:8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8:38-39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1 John 4:16 16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69/366일차 =477-483 개째 단어)
abound vi,a,ad. ...이 많다 demonstrate vt. 논증하다, 선전하다, 시위운동을하다 forgiving a. 용서하는, 관대한 gracious a. 품위 있는, 정중한, 상냥한 guilty a. 죄를 범한, 유죄의 rebellion n. 모반, 반란, 폭동, 반항 unpunished a. 벌받지 않은, 처벌을 면한
언약을 실질로 누림 ------------------------ 출 34:5-7
죄 개념이 도덕적인 성격을 전혀 띄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구속사와 관련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더 복음적입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을 때에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반드시 교회원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게 되면, 그는 교회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됩니다. 이런 까닭에 성도가 죄를 생각할 때에 다른 무엇에 앞서 교회와 관련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다시 말하여 성도가 교회를 합당하게 이루어 나가지 않는 태도 속에서 죄의 핵심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요, 곧 근본적으로 언약의 토대 위에 서 있지 아니한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
출애굽기 34:5-7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앞서 모세는 시내산에 내려오던 중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져버린 것을 보고는 대노하여 손에 들고 있던 십계명 두 돌 판을 던져 깨트려 버렸습니다. 이 십계명 두 돌 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깎아 만드신 것이고 또한 친히 글을 새겨 모세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출 31:18 32:15-19). 그런데 모세는 이것을 던져 깨트려 버렸습니다. 모세의 이와 같은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는 이와 같은 상징적인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이 깨어진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한 후 이곳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24:1-8). 이 언약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어떤 우상도 섬기지 아니하고 오직 참 구속자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40일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언약 관계를 영원토록 누리게 할 수단인 성막에 관한 식양과 또한 언약의 표징인 십계명 두 증거판을 받고 있던 그 사이에 아론을 필두로 우상숭배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32:1-6). 이에 여호와께서는 크게 노하사 모세를 급히 내려보내시면서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진멸해 버리겠다고 선포하시게 됩니다. 당황한 모세는 간절한 심령으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여호와께 용서를 구하게 되고, 급히 산을 내려왔던 것입니다(7-14절). 그런데 막상 이스라엘 진영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들의 광란스러운 우상숭배의 모습을 보고는 대노하여 십계명 돌 판을 던져 깨트려 버리게 됩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맺었던 앞서의 언약이 깨어져 버렸음을 이스라엘에 선포했습니다. 계속해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만든 금송아지를 갈아 범죄한 백성으로 하여금 마시게 하고(20절), 범죄에 주도적으로 가담한 3,000여명을 피차 처형케 함으로 여호와의 언약적 징계를 시행하며(25-29절), 다시 한번 여호와 앞에 나아가 간절한 심정으로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청하였습니다(30-35절). 이스라엘을 위하여 간구하는 모세의 필사적인 기도는 가히 메시아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과연 '구약의 구속자'로 불리울만한 면모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여호와 앞에 필사적으로 매어 달립니다. 방자한 이스라엘을 중로(中路)에 진멸해 버릴지도 모를 것이라고 선포하신 여호와의 진노는 이스라엘 온 백성을 두려움에 몰아넣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크게 슬퍼하면서 회개의 표시로 온 단장품을 제거하였습니다(33:1-6). 이와는 별도로 모세는 임시로 만든 하나님의 거처인 회막에 나아가 하나님의 용서를 간청하게 되고(7-11절), 급기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끈질긴 중보 기도를 받으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끈질긴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12-16절). 물론 그의 이와 같은 기도는 다분히 구약의 구속자다운 기도였던 것입니다. 즉 이는 앞서 32:30-33 부분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의 죄책에 대한 심판에 자신을 대속적으로 맡기려 했던 사실로부터 이미 시작된 일이었고, 그것과 연결되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와 같은 사역과 기도의 충만한 원형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세의 중보 사역을 들으시는 여호와의 응답은 특별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17-23절). 기도를 응답하신 사실에 대한 표징으로 당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는 모세의 간청을 하나님은 들으셨고, 이에 따라 모세에게 당신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이사 그 등을 보여주시게 됩니다. 이는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보고는 아무도 살 자가 없는 까닭입니다. 이때 여호와는 당신의 이름을 반포(頒布)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19절). '이름'은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리우는 대상의 인격의 어떠함을 보여줍니다. 지금 여호와는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분'으로 당신의 이름을 반포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사랑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
상기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 출애굽기 34:5-7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중보 사역을 받으심으로 당신의 이름을 '은혜와 긍휼 '로 반포하신 대로,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이에 따라 모세는 돌 판 둘을 깎아 만들어 가지고 시내산으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받게 됩니다(1-4). 깨어져 버린 두 돌 판은 다시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는 앞서 깨어져 버린 언약이 다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이번에는 그것을 담을 상자까지도 만들게 됩니다(신 10:1-5). 이렇게 해서 두번째로 시내산에 오르게 된 모세 앞에 여호와께서 현현하시게 되었는데, 이때 여호와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시면서 당신의 이름을 반포하시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5-7).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자신의 이름 안에서, 그가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였습니다(6절). 물론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는 하나님'이신 사실도 선포되었습니다(7절). 이와 같은 여호와의 이름의 새삼스러운 선포는, 모세의 심령에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자 하는 동기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있는 자비, 은혜, 인내, 인자, 진실을 포착한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즉시 여호와 앞에 엎드리어 백성들의 죄악을 사하여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8-9절). 모세의 끈질긴 중보 사역은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회복하신다는 선언을 얻어내고야 맙니다(10절). 이에 따라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이 다시 확약되었습니다(11절). 여기서 여호와께서 친히 반포하신 당신의 이름 속에 나타난 두 가지 속성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첫째로, 여호와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이 사랑은 항상 언약 안에서 발휘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랑이요, 곧 수혜자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언약의 토대 위에서 역사되어지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참 사랑인 사실을 확증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해 보기로 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어떤 극심한 범죄자들이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아무런 보응을 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악을 범해도 징계가 신속히 임하지 않는 이 사실 때문에 악인들은 더더욱 자신들의 행위를 가중하기도 합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즉각적인 집행이 뒤따르지 아니할 때에 악인들이 얼마나 담대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징벌이 실행되지 않는 이 사실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이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경우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한 사람이라도 속히 회개할 수 있게 하시려고, 용납하시고 길이 참으신다는 성경 말씀들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반대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심으로 그 악이 초래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더 이상 핑계할 수 없게 하신다는 말씀들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경우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하는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언약 개념인 것입니다. 언약 안에 속해 있는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은 진정한 것이 되어집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의 범죄를 참으실 경우, 이것은 조만간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기다리는 인내의 사랑을 지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중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를 전적으로 배제해 버리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경우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으로 언약적 징계인 것입니다. 이 언약적 징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는 그 그릇된 길을 바로잡아 의의 길로 돌이킬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언약 백성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사랑은, 갑자기 횡재하게 되어 하루아침에 무슨 돈벼락을 맞는다거나 또는 옛 사람의 성품대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진노하지 않으신다는 등등의 유아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찾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해 나오신 방법을 보면 이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범죄했을 때, 그냥 내버려두고 참으시기보다는 신속하게 개입하셔서 징계를 집행하셨습니다. 이 징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속해 있는 데서 집행되어진 것이므로, 곧 언약적 징계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상 하나님의 사랑의 발현이었던 것입니다.
언약의 기반을 떠나는 죄
두번째로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여호와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신 이 사실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의 공의성을 떠나서는 구원 개념 자체가 논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구원이란 준엄하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부터의 구원인 것이지, 아무런 상황도 설정되지 않는 진공 상태로부터 갑자기 구원이란 개념이 뚝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 이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어떤 구원의 논의도 허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생각하려 할 때에도 반드시 이것을 언약이라고 하는 근본 토대 위에 놓아야 합니다. 이 토대 위에서 전개되지 않는 일체의 논의는, 하나의 관념적인 신학적 작업으로 그칠 뿐이고, 성도의 신앙 증진에 아무런 유익을 가져오지 못합니다. 왜 이 사실을 전제하느냐 하면, 이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해 있는 성도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받아야 하는 일체의 심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으로 받으신 바이고, 이 사실이 있기 때문에 성도가 받은 구원은 실질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의 논의에서는 심판과 징계를 혼동하지 말고 엄격히 구별하기로 합니다. 성도에게는 징계는 있을지언정 심판은 없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는 징계는 언약적 징계입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언약적 징계는, 자신이 스스로 자초한 죄와 관련하여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징계의 개념을 항상 도덕적 기반 위에서 생각하는 데 있으니, 곧 인과응보 내지는 상선벌악의 차원에서 우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성도가 무슨 도덕적인 죄를 범한 사실이 있고, 이후 자신의 신변에 혼란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되면, '아! 하나님께서 나를 징계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를 생각하는 죄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죄 개념이 도덕적인 성격을 전혀 띄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는 구속사와 관련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더 복음적입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을 때에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반드시 교회원이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게 되면, 그는 교회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됩니다. 이런 까닭에 성도가 죄를 생각할 때에 다른 무엇에 앞서 교회와 관련시키는 것이 옳습니다. 다시 말하여 성도가 교회를 합당하게 이루어 나가지 않는 태도 속에서 죄의 핵심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 것이요, 곧 근본적으로 언약의 토대 위에 서 있지 아니한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죄다움(?)입니다. 성도가 교회를 이루는 삶을 태만히 하고 여러 가지 게으르고 부당한 태도로 여기에 참여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크게 짓는 것도 없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배 시간에 늦는다거나 머리로는 온갖 세상적인 생각에 사로잡힘으로 육체만이 덩그러니 그 자리에 앉아서 예배 시간을 채우는 이런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합니까? 주일날 의례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식사의 자리에서 식사 기도를 거르지 않으며, 구역 예배를 꼬박 꼬박 드리고 하는 등등의 생활은, 자신의 인생 그 자체의 목적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목표와 내용에 맞추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광야 이스라엘의 상황을 봅시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신 율법의 한 조항을 어겼다고 하는 종개념의 차원에서 해석되어질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구속사를 배반했습니다. 출애굽한 이후 여기 시내산에 머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에 자기들의 눈으로 똑똑히 목도했고, 체험했으며, 참여했던 하나님의 풍성한 구원 역사 그 전체를 부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배반한 것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근본적으로 지금까지 자기들 속에서 베풀어진 하나님의 구속사를 구원의 실질로 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의 계시가 잠시 동안 멈추어지게 되었을 때 쉽게 하나님을 부정하고 우상숭배에로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구속사를 삶의 실질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누구라도 시험의 때에 이렇게 되기 십상입니다. 여기서 구속사를 구원의 실질로 받아들인다는 말의 의미는, 성도가 교회를 이루는 삶을 구원의 실질로 누려나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죄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징계도 바르게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도덕적 타락은, 그가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구속사의 기반 위에서 건설해 나가지 않는 데서부터 초래되는 다양한 부작용들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새 언약의 근본 기조를 떠나게 되면 온갖 해로운 세상사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제 당신은 어떻습니까? 삶의 목표가 새 언약의 기반 위에서 뚜렷하게 바뀌어져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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