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스크랩] 장수민 목사 구속사 성경연구-마5:43-46-구원론적인 근거로서의 계명순종

하나님아들 2018. 9. 28. 23:09

The English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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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ruit of the Spirit : Love
성령의 열매 : 사랑

 

 

Psalm 18:1      (For the director of music. Of David the servant of the LORD. He sang to the LORD the words of this song when the LORD delivered him from the hand of all his enemies and from the hand of Saul. He said) 1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Matthew 5:43-46      43"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44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45that you may be sons of your Father in heaven. He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46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reward will you get? Are not even the tax collectors doing that?

persecute vt. 박해하다, 괴롭히다
unrighteous a. 불의한 자, 부정한, 사악한, 죄많은
reward  vt,n. 상, 이익, 보답하다, 보복하다
tax  n. 세금(tax collector=세리)
collector  n. 수집가, 채집자, 수금원, 세리


Mark 12:29-31      29"The most important one," answered Jesus, "is th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the Lord is one 30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31The second is this: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There is no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John 13:34-35      34"A new command I give you: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so you must love one another. 35By this all men will know hat you are my disciples, if you love one another."


Colossians 3:12-14      12Therefore, as God's chosen people, holy and dearly loved, clothe yourselves with compassion, kindness, humility, gentleness ad patience. 13Bear with each other and forgive whatever grievances you may have against one another. Forgive as the Lord forgave you. 14And over all these virtues put on love, which binds them all together in perfect unity.

compassion n. 긍휼, 측은히 여김,(깊은)동정 ,동정심
humility  n. 겸손, 겸허
gentleness n. 온유, 친절, 정다움, 온순
patience  a. 오래 참음, 인내, 끈기
grievance n. 혐의, 불만, 불평거리
virtue  n. 도덕적 우수성, 선량, 미덕, 고결
unity  n. 단일(성), 통일(체), 일치, 일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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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 TEXTS
Deuteronomy 6:4-6  John 14-15, 21:15-17 
1Corinthians 13  1John 4:7-21  1peter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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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alm 18:1   1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Matthew 5:43-46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Mark 12:29-31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John 13:34-35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Colossian 3:12-14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입고 13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68/366일차 = 470-476 개째 단어)


tax  n. 세금(tax collector=세리)
collector  n. 수집가, 채집자, 수금원, 세리
compassion n. 긍휼, 측은히 여김,(깊은)동정 ,동정심
humility  n. 겸손, 겸허
grievance n. 혐의, 불만, 불평거리
virtue  n. 도덕적 우수성, 선량, 미덕, 고결
unity  n. 단일(성), 통일(체), 일치, 일관성

 

 

구원론적인 근거로서의 계명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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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5:43-46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이라 함은, 율법의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은 강제적이며 다소간 포학하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계명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니, 이는 하나님게서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자애로운 은덕입니다. 이 계명은 율법의 경우와 달리 객관적이다거나 불특정 다수를 그 대상으로 삼지 아니하고, 매우 개인적이어서 다분히 친교와 교제와도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능하신 인격자가 자기의 피조물을 영원한 복락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하여 직법 말씀하시는 형태가 계명인 것입니다. 성도란 마땅히 이 계명을 순종하여야 하는 존재라고 하는 당위성을 생각하면서 삶을 능력 있게 전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1.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안타까운 자기기만

   본문은 예수님께서 당시 랍비들의 왜곡된 성경 해석을 바로잡으시기 위하여 제시하신 여섯 개의 대조들(마 5:21-48) 중의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義)가 하나님의 나라의 기본 원리부터 얼마나 멀리 이탈해버렸는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좀더 부연하자면, 예수님은 먼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고 전제하신 가운데, 이후 여섯번씩이나 구체적인 예를 드시면서 당시 유대교가 빠져 있었던 왜곡된 구원관을 비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지적은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더 낫지 못하면'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유대교의 가르침을 단호하게 부정하셨고, 이를 구원 문제와 연결시켜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덧붙이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여섯 개의 대조는 "∼너희가 들었으나.....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의 공식과도 같은 구조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약 계시가 성경의 기록으로 완성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선생들의 가르침에 의존하여 성경을 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오늘날과 같이 책이 보편화되지 못한 당시 수준 정도의 문화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일부 서기관들만이 성경을 다룰 수 있었고, 해석한 바를 전수하는 이 과정 속에서 극심한 왜곡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세월이 흐르면서 서기관들의 이 오해되고 왜곡된 교훈들은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이 되어 민간에 굳어지게 되었고, 백성들의 신앙 형태를 지도해 나가는 규범과 권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왜곡된 하나님의 말씀을 토대로 신앙이란 것을 자기 안에 건설하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는가? 아주 심각한 현상을 초래합니다. 이런 일은 자신이 진리에 좀더 가깝게 접근하지 못했다는 차원에서 단순하게 이해되어질 것이 아니고, 두렵게도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스리는 결과를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 있어서 그 모든 원천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변질시키고 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열심이란 것은, 명백하게 밝혀진 객관적 진리의 토대 위에서 이것이 전개되지 아니하게 되면 엄청난 모순의 열매나 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역시 하나의 형태를 갖는 분명한 신앙 행위인 까닭에, 또 어떤 종교이든지 그 속에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기본적인 전도(傳道)의 요소가 있어서, 이것이 그 영향을 그릇되이 미치기 때문인 것입니다.
   더욱이 여기에는 하나님을 헛되이 섬기는 자기기만(自己欺滿)의 요소도 나타나 문제는 다시금 심각해집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자신이 분명히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불안한 마음이 해소되지 않고 영적 삶에 있어서 활기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행입니다. 구원을 못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해버리는 반대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이 사람의 경우 얼마나 큰 불행이 그의 앞에 직면해 있습니까?
   놀랍게도 예수님 당시 유대교 안에는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드러났는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잘못 아는 가운데 그릇되이 추종하였던 모습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사람들로 드러났으니, 스스로 속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 6:3). 주님은 이들의 무익한 열심을 가리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고 폐함으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고 꾸짓으셨던 것이고(마 15:1-9), 의도적으로 기회를 많이 내시어 하나님의 계명의 본의를 바로잡으셨습니다.

2. 예수님의 권위

   좀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본문은 마태복음 5-7장에서 전개된 산상수훈(山上垂訓)의 큰 맥락에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마치셨을 때 어떤 반응이 나타났습니까? 청중들은 크게 놀랐으니,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7:28-29).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막 1:22 눅 4:32). 당시 서기관들이 가졌던 권위는 그들을 가르쳤던 스승들의 이름으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자기네가 속한 교파와 교단의 가르침이 그들이 의지한 권위였던 것입니다. 유대교에는 샴마이파와 힐렐파로 양분되는 두 학파가 랍비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랍비들은 이 두 현자 중 하나에 속하여 가르침을 받았고, 또한 제자들을 양성시켰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마리엘은 힐렐의 손자로 유명한 랍비의 자리에 있었고, 예수님과 동시대 인물인 바울이 바로 이 가마리엘의 손자였던 것입니다. 바울이 가마리엘의 권위를 의지했던 실례가 성경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지 랍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에 자기가 속한 스승과 학파의 권위를 크게 의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위를 의지하여 말씀을 가르치셨고, 또한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가르침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권세'라는 단어는 신에게 있는 절대적 능력과 주권을 가리릴 때 사용됩니다. 예수님은 이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권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당신의 가르침의 근거로 제시했고(5:17 7:12), 내용에 있어서도 성부의 뜻을 가르치셨으며(5:17-20 7:21),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놓으셨던 데서 나오게 되었습니다(7:22-23). 더욱이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5:22,27,32,3439,44)라는 명령법을 사용하심으로 이후에 가르치신 교훈에다 하나님의 권위를 부가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말씀을 듣게 된 자들이 크게 놀랐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자들이 무엇 때문에 놀랐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놀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 때문에 놀랐습니다. 말씀에 신적인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깊이와 특성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이 신적 권위를 가졌다는 이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 나타난 그 많은 기적과 이적들은 예수님께서 집행하셨던 이 신적 권위로부터 나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 한 마디로 온갖 귀신들을 쫓아내셨거나 혹은 많은 병자들을 고친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바입니다. 예수님은 이 권위로 각종 귀신을 쫓아내시고 온갖 질병에 걸려 시달리는 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여기서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이렇게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낳게 하신 말씀의 신적 권위, 바로 이 권위의 말씀이 지금 산상수훈으로 베풀어진 것이요,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했던 것입니다. 물론 전자의 경우 단순하게 교훈만이 베풀어진 후자의 경우와는 달리, 병자들이 낫거나 귀신이 쫓겨나가는 등등의 아주 드라마틱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을 때에 보여준 군중들의 반응들, 그러니까 '놀랐더라', '경악하였더라', '어리둥절하였다', '혼동하였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등등의 표현이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마 12:23 막 1:27 5:20 10:24 눅 4:36 11:14). 군중들이 경이로운 기적을 보게 되었을 때 엄청나게 놀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훈 선포와 기적 선포 이 두 경우의 말씀이 피차 질적으로 차이를 가진다고 보면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점은 단지 선포된 말씀이 갖는 내용의 어떠함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군중들이 크게 놀랬던 반응은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을 때도 나타났습니다(눅 4:22 마 22:22). 또한 여기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듣었던 사람들이 그 말씀 속에 나타난 신적 권세에 크게 놀라게 되었듯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에 이를 보고 놀란 사람들의 경우도 동일합니다. 귀신이 쫓겨난 광경을 보게 된 그 사실 때문에 군중들이 놀랐던 것이 아니고, 이곳의 경우처럼 말씀의 신적 권세 때문에 놀라게 되었습니다.
   신적 권위를 가지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적 창출과 복음 선포의 두 영역으로 나타난 사실과 관련하여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word)과 행위(deeds)의 두 방법으로 복음을 세상에 가져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현시(顯示)합니다. 예수님의 이적들은 메시아적 구원 행위이며, 그것들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집니다. 동일하게 예수님의 말씀 역시 메시아적 구원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너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게 되면, 그 사람은 실제적인 효과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의 설교는 가르침이기만 할뿐 아니라 구원의 선포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실 때 하신 말씀과 그의 복음 선포 때 하신 말씀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과 그 말씀이 지시하는 바의 내용은 항상 일치합니다. 말씀하신 내용대로 온전히 성취되어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메시아이시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자이시며, 곧 하나님 그분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온갖 병자를 고치시는 권세를 베풀 수 있으실 뿐아니라, 동시에 '죄를 사하는 권세'까지도 집행하십니다. 바로 이 권세로 '천국이 너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을 소유할 수 있게 하셨고, 당신의 선포를 받아들이는 자들이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를 보증하셨습니다.

3. 바로잡으신 사랑의 계명을 구원론적인 근거로 대해야 함

   이상 예수님의 말씀 선포가 갖는 신적인 권위가 구원론적으로 작용한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바로 이 권위로 이제 마지막 여섯번째의 예를 드심으로 당시 잘못 가르쳐지고 있었던 왜곡된 의(義)들 중의 하나인 '사랑의 계명'을 바로잡으시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여기서 왜곡된 계명을 바로잡으시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성도가 어떠한 태도로 대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되게 됩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성도의 순종 여부는 구원론적인 근거로 작용할 것입니다. 더욱이 주님은 지금 당시 유대교의 그릇된 의 개념을 바로잡으시는 것과 관련하여 이 말씀을 하시니, 곧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 문제의 차원에서 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본문을 봅니다. 당시 사랑의 의미를 변질시킨 옛 사람 혹은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이랬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43절). 구약에서 사랑의 계명은 레위기 19:18에 그 뿌리를 두는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본문의 구조를 보면 이 사실이 잘 나타납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8). 이 말씀을 보게 되면,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친 랍비들의 교훈이 얼마나 본문에서 크게 이탈하였는가가 잘 나타납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4절)는 것이었고, 이는 한 마디로 말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어떠한 적대감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에게 요구된 원수 사랑의 이 새로운 계명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 요구는 하나님의 뜻이요 계명인 까닭에 성도는 마땅히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런 저런 평가와 분석으로는 결단코 원수 사랑의 경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이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이것이 막혀버린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가능한 해결책이 되어지듯이, 원수를 사랑하는 이 일 역시 하나님의 명령인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비로소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삶,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여기서 하나님의 계명이라 함은, 율법의 의미가 아닙니다. 율법은 강제적이며 다소간 포학하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계명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니, 이는 하나님게서 자기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자애로운 은덕입니다. 이 계명은 율법의 경우와 달리 객관적이다거나 불특정 다수를 그 대상으로 삼지 아니하고, 매우 개인적이어서 다분히 친교와 교제와도 같은 성격을 가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능하신 인격자가 자기의 피조물을 영원한 복락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하여 직법 말씀하시는 형태가 계명인 것입니다. 성도란 마땅히 이 계명을 순종하여야 하는 존재라고 하는 당위성을 생각하면서 삶을 능력 있게 전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성도를 가리켜 새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와 같은 능력이 그의 속에 기본적으로 심겨졌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 산상수훈의 교훈 자체가 거듭난 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아무도 행치 못할 무거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신 이상주의자이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혜사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지 않은 자연인이 원수를 단순히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랑하기까지 하는 수준의 덕행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이런 일이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복음의 영역 안에서는 이런 일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고,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피차 원수 관계에 빠져드는 이런 일이 흔히 있는 일도 아니고, 있어서도 안되겠지만, 설혹 있게 될 경우라 할지라도 복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능히 극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우리에게 임한 것은, 단순히 죄책을 용서받은 의미에 불과하지 않고, 죄를 이기는 능력이 실질로 임한 의미도 수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산상수훈 전체의 교훈은 단순한 도덕률복하며 도리어 다스리고 지배하는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현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 여부는 구원론적인 근거로 작용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여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의 여부를 가볍게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구원의 증거 차원에서 살펴볼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이 자기에서 풍성하게 역사되어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bloom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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