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nglish Bible ------------------------- God is joyful 하나님은 기쁨이시라
Psalm 104:31-34 31May the glory of the LORD endure forever; may the LORD rejoice in his works 32he who looks at the earth, and it trembles, who touches the mountains, and they smoke. 33I will sing to the LORD all my life; I will sing praise to my God as long as I live. 34May my meditation be pleasing to him, as I rejoice in the LORD.
endure vt,vi. 지속하다, 견디다, 참다, 겪다, 받다, 인내하다, 지탱하다 tremble vi,vt,n. 떨(게)하다, 진동(하다,시키다), 진동 meditation n. 묵상, 명상, 심사 숙고, 명상록
Zephaniah 3:16-17 16On that day they will say to Jerusalem, "Do not fear, O Zion; do not let your hands hang limp. 17The LORD your God is with you, he is mighty to save. He will take great delight in you, he will quiet you with his love,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hang vt,vi. 늘어뜨리다, 걸(리)다, 매달(리)다 limp vi,n. 절뚝거리다, 절뚝거림
Hebrews 12:2-3 2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who for the joy set before him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despising the shame), and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throne of God. 3Consider him who endured such opposition from sinful men, so that you will not grow weary and lose heart.
fix vt,vi,n. 고정시키다, 결정하다, 고정 perfect a. 온전한, 완전한, 숙달한, 전적인 endure vt,vi. 견디다, 참다, 겪다, 받다 scorn n. 경멸(의 대상), 경멸하다 shame n. 부끄럼, 수치, 불명예, 치욕, 창피(지독)한 일, 부끄럽게 하다, 부끄러워 하게 하다, 모욕하다 throne n. 보좌, 왕좌, 옥좌, 왕위, 왕권 opposition n. 거역, 반대, 저항, 방해
----------------------------------------------------------------- RELATED TEXTS 1Chronicles 16:23-33 Psalms 21:1-7 Nehemiah 8:1-12 Isaiah 62:4-7 -----------------------------------------------------------------
Psalm 104:31-34 31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찌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찌로다 32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 33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34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Zephaniah 3:16-17 16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17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Hebrews 12:2-3 2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NIV 독해를 위한 2560 단어 정복 366일 과정 (71/366일차 =491-497 개째 단어)
abhor v. 몹시 싫어하다 ** abolish v. 폐지하다 abomination n. 증오, 혐오 ** abound v. 풍부하다 ** endure vt,vi. 지속하다, 견디다, 참다, 겪다, 받다, 인내하다, 지탱하다 hang vt,vi. 늘어뜨리다, 걸(리)다, 매달(리)다 opposition n. 거역, 반대, 저항, 방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 히 12:2-3
성도가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있으려면 소망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온갖 현혹물들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 너머에 있는 더 좋은 나라를 바라봄으로 인내를 이룰 수 있습니다(롬 8:17). 소망이 있는 사람은 유혹과 핍박으로부터 인내해 나갑니다.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사람만이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입니다(히 6:11-12).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현세로부터의 인내에서 찾아집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내를 온전히 이룸으로 성도로서의 인격을 입증할 것이 유난히 요구되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임하는 고난의 필연성
히브리서 11장은 잘 알려진대로 '믿음의 선진들'의 목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양하게 제시한 이 믿음의 선진들의 예를 들어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들 앞에 닥친 박해에 직면하여 마땅히 인내하는 가운데 믿음을 지키고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장려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12:1). 믿음의 인내가 훌륭하게 수행되려면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며 그분께 나아간 자들은 반드시 상을 받습니다(11:6). 여기서 상은 히브리서 11장 전체의 문맥이 보여주듯이 의심할 바 없이 구원(救援)을 의미하는 대응어입다. 성도들은 이미 이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수가 없습니다(10:39). 다만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려 함에 있어서 잠시간의 고난에 직면했을 뿐이고, 따라서 어느 정도 믿음의 인내가 필요할 뿐입니다(10:36). 더욱이 성도들에게 요구된 이 믿음의 인내는 '피흘리기까지 대항'하여야 하는 정도로 극심하게 힘겨운 것이 아니고(12:4), 도리어 당신의 자녀를 양육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애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징계일 뿐입니다(12:5-10). 이런 까닭에 자신이 성도인 한에는 그 믿음을 파선시킬 정도까지의 극심한 고난이 임하지는 않는 법이고, 이 사실을 알면 자기 앞에 직면한 고통을 고난으로 생각하든지, 징계로 생각하든지의 여부를 떠나서, 그와 같은 연달을 통하여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12:11-13).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출현시키는 도구로 사용된 영광 때문에 엄청난 박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앞에 주어진 구원인 '영구한 산업'을 바라보는 가운데 능히 '갇힌 자'의 편에 서야 했고,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해야' 했습니다(10:34).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극심한 고난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섭리를 주장하시는 가운데 고난의 문제를 이런 정도로까지 끌어내리셨습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12:4). 성도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어떠한 고난도 능히 극복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분명히 명심할 필요가 있는 것은, 자신이 진실한 성도인 한에는 이 고난의 문제가 일평생 뒤따를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들이 잘못 전하듯이, '근심없는 낙관주의', '만사형통하는 삶'이 복음의 본질인 것이 아닙니다. 항간에서 보여지듯이 누구든지 믿음 안에 들어오기만하면 사업이 형통하고, 모든 질병이 물러가며, 돈벼락(?)을 맞게 된다는 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받는 것은, 피차가 자기의 영혼을 망치는 종교 놀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삼천리 강산 곳곳마다에 들어앉아 있는 경건치 못한 기도원들의 경우를 보면 이런 종교 놀음의 온상 노릇을 하고 있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도심 곳곳마다에 포진해 있는 교회들의 경우도 문제가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이런 식으로 전하고 또한 받는 데서 온갖 위선과 불협화음이 나타나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 신학과 신앙의 불일치, 곧 괴리 현상의 초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성도에게 있어서 성경 지식이 도무지 생활화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가령 주일날 하루를 구별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시간으로 사용하는 것은 성도라면 누구도 예외 없이 감당해야 할 의무이자 누려야 할 특권입니다. 그러나 '사업이나 장사의 수익성과 매상 감소의 이유', 또는 '육체의 휴식'이라는 핑계 앞에 주일 성수 문제가 얼마나 가치 없게 취급되어져 버립니까? 또는 성도 노릇을 제대로 하려 할 때에 찾아오는 이런 저런 상황의 그 자그마한 박해 앞에서, 맥없이 넘어져 버리거나 아예 신앙 그 자체를 저버려버리는 비일비재한 예들이 우리 주위에서 얼마나 많이 발견되어지는지 모릅니다. 복음을 쎄일즈맨 쉽으로 전하고 받는 것이 이런 안타까운 상황들을 초래시킨 원인입니다. 이런 상태 하에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했던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딤후 2:2)의 문제는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표면적으로 성도 노릇을 하고 싶고, 교회를 유지하려 하게 되면, 위선, 무능력, 불순종, 형식주의 추구 등등의 그릇된 돌파구로 향하게 됩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성도가 받아야 하는 필연적인 고난에 대해서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진실한 복음 전도자는 이 고난의 문제를 의도적으로 숨김으로 구도자를 속이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제시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다 내보이는 가운데, 자기에게 임한 것과 같은 은혜가 구도자(求道者)에게도 베풀어져서,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주장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과 자세로 복음을 전합니다. 이것이 여기 히브리서 기자의 복음증거 방식을 통하여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이를 받아들인 자들이 들어가게 될 고난의 필연성을 감추지 않으며, 따라서 고난이 임할 때에 마땅히 인내함으로 견뎌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인내는 성도들 앞에 당한 경주입니다(12:1). 믿음의 삶은 부단한 인내를 요구하는 힘든 경주자의 삶과도 같은 것입니다(고전 9:24). 성도 앞에 있는 소망과 즐거움은 그것을 얻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서의 경주를 경주하는 일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곧 인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주에 경주를 거듭하는 것은 인내입니다. 그러나 소망의 인내이며 즐거움의 인내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라
성도는 고난에 직면하여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이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일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보이기 마련이며 부족함이 없는 신앙인다운 자격을 획득합니다(약 1:2-4). 신앙적 인내는 그 사람의 신앙을 입증하는 증거가 됩니다(롬 5:3-4). 세상의 갖 가지 핍박과 유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히 10:36). 그러나 이러한 복음의 요구는 아예 불가능한 것을 강요 하는 식의 억지와 강압이 아닙니다. 인내를 넉넉히 이룰만한 능력이 이미 성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즉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넉넉히 이 인내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성도가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있으려면 소망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온갖 현혹물들에 치우치지 아니하고, 그 너머에 있는 더 좋은 나라를 바라봄으로 인내를 이룰 수 있습니다(롬 8:17). 소망이 있는 사람은 유혹과 핍박으로부터 인내해 나갑니다.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사람만이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입니다(히 6:11-12).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현세로부터의 인내에서 찾아집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내를 온전히 이룸으로 성도로서의 인격을 입증할 것이 유난히 요구되어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도의 인내를 능력 있게 하는 방법으로 히브리서가 제시한 방법은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을 바라보라'는 것인데, 특별히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증인 중의 증인으로 나타나십니다. 성도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라면, 이것 이상으로 자신의 삶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벧전 2:21).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이십니다. 예수님이 성도의 '믿음의 근원'이 되시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런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의 믿음의 모범이시기 이전에 또한 믿음의 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처럼 따라갈 수 있는 일을 가능케 해주신 분이십니다. 그는 성도의 믿음의 근원이 되셔서, 그로 하여금 믿음으로 사는 삶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우리의 믿음을 지속시키는 데 있어서 본받아야 할 훌륭한 모범이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 그 자체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십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아갈 경우 넉넉히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나중까지 성도의 모든 믿음의 삶을 이끄시며 완성에 오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세번째로, '바라보자'라고 합니다. 이는 '눈길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항상 자신의 눈을 예수 그리스도게 고정시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의 삶의 근원이시며, 방편이시고, 최종 목표이십니다. 다른 바라볼 것이 제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우리의 눈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어쩌다가 생각나면 한번 바라보곤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항상', '쉬임없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라본다는 말의 좀더 정확한 의미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3절)는 말씀은, 2절의 '바라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좀더 구체적으로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⑴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 사역을 완성하신 후 하늘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영광을 바라보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바라보신 이 즐거움은 세상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식의 보답과 보상의 개념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본체로서 그 동등한 지위와 영광을 누리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과 희생을 통하여 제공하시게 될 그의 사랑하시는 자들의 구원을 기뻐하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하여 자신의 고생을 기꺼이 마다하지 아니하는 부모님의 즐거움과도 같은 것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구속사와 관련시켜보면, 이 즐거움은 그런 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계시하기를 기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였던 데서 얻어진 즐거움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로 예수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을 당신의 양식으로 삼기까지 하신 분이셨습니다(요 4:34). 같은 원리 안에서 성도의 삶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일을 떠나서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얻지 못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초부터 이 일을 위하여, 또한 이런 식으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광스럽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로 이 일 안에 속해 있을 때 인간으로서의 존재의의가 있으며 삶으로서의 실제적인 기쁨과 만족 또한 누릴 수 있게 됩니다(전 12:13).
⑵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은 십자가의 형벌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요 실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를 참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참는다'는 말은 '인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의 참으심 혹은 인내는 적극적인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인간 한계의 역량을 발휘하기 위하여 정신력으로 버티는 가운데 마지 못해서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이 땅에 성육신하여 들어오신 목적을 생각하시는 가운데 당당하게 감당하고 짊어지신 적극적인 인내였습니다.
⑶ 생각하라 여기서 '생각하라'는 말은 '바라보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좀더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생각하라'고 한 이 동사가 이번에는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를 거역한 이를 참으신 자'와 연결되었습니다. 이 동사는 '계산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단어입니다. 강조점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철저하게 따지고 살펴보라는 데 있는 것입니다. 대충대충 건성으로 생각하면 힘을 얻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거역한 이'까지도 참으신 분이십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사랑의 숭고함과 인내의 극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고 인내하신 정도를 넘어 오히려 원수들의 용서를 하나님께 간구하기까지 하셨습니다. 달리기에 참여하고 있는 경주자가 골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이 요구됩니다. 신앙인의 선한 싸움과 인내 앞에는 피곤과 낙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신앙을 처음 시작한 그 사실이 끝까지 신앙을 지속할 것이라는 보장까지 내포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출발하지만 도중에 많은 사람이 낙오되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갈 3:3).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함으로 급기야 복음을 떠났습니다(딤후 4:10). 이런 까닭에 성도가 행여라도 고난에 직면하게 되면 수동적으로 대처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동적인 방어에는 이미 피곤과 낙심의 요소가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신분이 어떠한 자인가를 생각하는 가운데 환난과 고난이 닥쳐오면, 도리어 더더욱 앞으로 전진해 나가야 합니다. 주 안에 있는 성도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는 법입니(고전 15:58).
말씀을 정리합니다. 복음은 성도의 고난을 요구합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구원(救援)으로서의 상(賞)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이 구원의 완성을 바라보고 현세에서의 온갖 어려움을 인내하며 능히 극복해 나갑니다. 그의 신앙의 경주는 마침내 열매를 맛볼 것이요,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구원을 상 개념으로 즐겨 묘사합니다. 고난을 대처하는 성도의 태도와 자세를 보면, 그 신앙의 정도가 나타납니다. 어떤 이는 기꺼이 순교하기까지 신앙을 지키고 인내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찾아올 때에 믿음을 저버리고 신앙을 떠나버리는 경우도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복음의 저버림이 노골적(?)인 형태를 띠지 않는 데서 자초하는 가지기만의 현상에 있습니다. 즉 어떤 성도의 경우 더 이상 신학 - 성경 - 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신앙화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사실상 그가 이미 복음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에 속하여 있어서 피상적으로 기독교인으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 개념과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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