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하고도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적 신론(3) 삼위일체 하나님 / 03. 교회사랑
2011. 11. 2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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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의미 1) 철저하고도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적 신론 우리의 하나님은 오직 삼위일체론적으로만 알 수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는 먼저 삼위일체론의 자기계시적 차원으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만 알려지고 인식될 수 있음을 전제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 자기개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사실적, 정보적 성격을 지닌 사실계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시는 인격계시이며, 그런 의미에서 철저한 자기계시이다. H. Berkhof의 말처럼 계시는 그 정의상 본질계시, 자기계시이다.[1]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계시한 것이 그에 관한 어떤 것이나 어떤 사실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며, 또 나사렛 예수와 성령 안에서 계시한 것 경륜 배후의 어떤 숨어계신 또 다른 분이 계시지 않음을 말한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기계시 속에 자신을 드러내신 바로 그 분`이시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적 계시 속에서 신적인 신비의 어떤 무엇, 혹은 한 측면, 한 조각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곧 그의 심장과 그의 깊은 본질을 알게 된다.[2] 하나님의 대상성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다.[3] 곧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비친 하나님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4]. 그러나 피조물의 공간 안에 주어진 계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러한 대상성은 이차적인 것이며, 그 이차적 대상성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일차적인 대상성'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오직 하나님의 자기인식으로부터만 가능하며, 하나님의 자기인식은 오직 삼위일체론적으로 규정된다. 곧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내적인 인식론적인 유비를 통해 비로소 가능하다. 이는 성령론적으로 표현될 뿐 아니라(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11), 기독론적으로도 규정된다(하나님의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자기인식의 거울이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어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6:46).[5] 삼위일체론의 기독론적 차원으로 우리의 하나님은 나사렛에서 성육신하시고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의 어떤 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종말론적-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자신을 정의하셨다[6] 나사렛 예수는 이스라엘 야훼의 자기개방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인격계시의 종말론적 완성과 충만이며, 감추어졌던 태초의 신비의 종말론적 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종말론적 자기정의이다(요14:9).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과 본질이 인격으로 최종적으로 해석된 분이다. 철저하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삼위일체론적 인식이다. 하나님을 그의 창조물로부터 유추하여 그를 무기원자라고 명명하기보다는 성자로부터 하나님을 명명하는 것이 가장 경건하면서도 정확한 것이다라고 아타나시우스는 말했다.[7] 또한 삼위일체론의 성령론적 차원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통해서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하나님을 신으로 정의하는 것은 불충분할 뿐 아니라 아주 위험한 것이다. 이런 일반적 신개념은 중세카톨릭에서처럼 완전한 기독교적 본유의 삼위일체론적 신비로까지 발전될 수 있는 전단계로 작용하기 보다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왜곡, 퇴색시켜 잠식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을 오직 그리고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으로만 인식, 정의할 수 있다. 이 한계를 벗어난 것은 우상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일반적인 신이 아니라 보다 한정적으로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철저하게 `한정'시켜 우리의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8]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령을 본래의 삼위일체론적 시각에서가 아니라, 일반적 유일신론적 범주에서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우리의 하나님은 종교적 πανθεον 중의 한 신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야훼, 곧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바로 그 분 외의 다른 하나님이 결코 아니다. 나사렛 예수이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 외의 하나님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발트 크렉은 삼위일체론은 우리의 신개념에 대한 일종의 공격이다고 말했다.[9]우리가 찬양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존재형이상학 위에 세워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 고안해 낸 인간의 신인 즉자적 존재로서의 신(Gott an sich)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θεος έν Χριστω, 고후 5:19), 성령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다[10]. 삼위일체 하나님은 Deus apud se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Deus erga nos)이며, 벌거벗은 신(Deus nudus) 혹은 막연하고 희미한 어떤 신(Deus vagus)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하나님(Deus incarnatus)이시다. 삼위일체론은 바로 오랫동안 서구정신에서 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교적, 존재론적, 이신론적, 범신론적 신개념에 대한 결정적인 추방이다. 헤르만 바빙크의 말대로 삼위일체론적 신론이야말로 이신론적, 범신론적 세계관에 대한 방어가 된다. [11]. 베르너 엘러트에 의하면 모든 범신론적 표상들은 이 지상적인 세계체험과 인간 자신의 상상력으로, 세계와 인간 자신의 자구책의 한 수단으로, 일종의 종교적 위로라는 등급을 매겨서 쏘아올린 지상적인 분화(分化)의 투사에 불과하며, 부족신 혹은 민족신을 숭배하는 단일신교(Henotheismus)도 윤리적 동기로서는 추천할만 하지만, 결국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종교적 자구책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삼위일체론적 신앙은 이와 정반대다. 삼위일체론은 인간 자신의 신화적 상상력, 종교적 필요, 심리적 위안, 사회적 윤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삼위일체론은 마법으로 혼령을 불려내어 꼼짝못하게 하는 외침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음에 직면하게 되고 불림을 받은 인간실존을 말한다.[12]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사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자기계시라는 작용(actio)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아멘이라는 반작용(reactio)이다[13]. 우리에게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계시형태 속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계시매개를 통해 주어진 계시는 하나의 상(象)과 비유이며,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보게 될(고전 13:12) 종말론적 계시를 미리 맛보는 것이며 미리 앞당겨져 일어난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게 될(고전15:28) 종말론적 완성의 전조(前兆)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신상을 만들어서는 안된다(출 20:4, 신5:8).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사렛 예수의 얼굴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야훼, 곧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신상 이외의 모든 선험적, 일반적, 종교적, 철학적 신상은 철저하게 분쇄되어야 한다. 제 1계명은 신학적 공리라고 칼바르트는 말한다. 오토 베버는 더 나아가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 2계명도 신학적 공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4] 출 20:4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라는 제 2계명의 금지명령은 참된 하나님의 자기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고후 4:4; 골 1:15) 외의 인간적인 일반적, 종교적 신상을 엄격히 거부하신 하나님 자신의 자유와 계시의 은폐성에 대한 대선언이다. 성령의 통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대상화 외의 인간적인 대상화에 대한 단호한 거부를 천명하신 것이다. 이 제 2 계명은 우상숭배냐 성상파괴주의냐라는 논쟁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은폐성을 지키려는 의도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이 계시와 은폐의 변증법은 계시의 절정,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이라는 반대현상 속에서 은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한 그 하나님과 같이 예수께서도 이제는 가난한 자와 작은 자, 병든 자, 고문받는 자 속에 숨어계시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마 25:31-46).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폐성은 초월적이고 지고(至高)의 절대적 신(deus absolutu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소외와 고난에 직접 참여하셔서 계시하는 하나님(deus revelatus)을 말한다(Deus absconditus sub contrario). 그것은 인간의 무력함 속의 하나님의 통치를, 인간의 가난 속의 그의 부요를, 인간의 버림받음 속의 사랑을, 인간의 죽음 속에 생명을 계시하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그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의 선포 안에서 자신을 너무도 깊이 낮추시고 비하시킨 나머지 그는 우리들의 문 앞에서 간구하는 자와 구혼자로 서 계신다.[15] 니이체의 말을 패러디하자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Deus humanus)’이시다. 삼위일체론 신학자였던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의 사랑사랑하심(디도서 3:4, πιλανθρωπία)’을 즐겨 사용했다.[16] 유신론의 신은 인간의 자유를 시기하고 억압하여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인간을 희생제물로 요구할지 모른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시기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여 인간의 자유를 위해 자신이 제한되시고 희생되시고 자신의 영광을 버림으로 우리의 영광을 위하시는 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계 자체가 영광스럽게 되어 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영광의 신(Deus gloriosus)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자신을 인간적으로 계시한 Deus humanus이시다.[17] 그러므로 우리는 마틴 루터의 말처럼 영광의 하나님을 찾으러 올라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시작한 바로 그 곳, 곧 동정녀 마리의 육체를 통하여 인간이 되신 그 낮은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18]. 지고한 천상에서가 아니라 가장 낮고 천한 깊음 속에서 출발해야 한다. 마틴 루터는 예수 밖에서 하나님은 찾고자 하는 것은 사탄이다라고 말했다.[19] 존재신비주의에 근거한 중세 카톨릭적 존재형이상학에서 추구한 바처럼 철학적 상향의 세 길(via triplex), 곧 탁월성의 길(via eminentiae), 부정의 길(via negationis), 인과법칙의 길(via causalitatis)을 통해서 하나님을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위험하다. 철학적 세 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한 길, 그것도 세계의 가장 어두운 현실로까지 내려오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겸손과 비하와 사랑의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통해서만 개념과 우상이 아닌 참된 우리의 창조자와 구속주에 도달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애써 올라가야할 길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께서 삼위일체론적으로 우리에게까지 친히 내려오신 길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적으로 우리를 만나시기에 우리도 삼위일체론적으로만 그 분을 신앙할 수 있다.[20] 칼 바르트의 말처럼 모든 지상적, 유한적, 상대적, 내재적인 것에 대한 반립으로서의 천상적, 무한적, 절대적, 초월적인 신개념, 곧 전적인 타자(Ganz Andere)에 대한 우리들의 종교적 표상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행하시고' 또한 그런 존재로 자신을 나타내신 것에 의하면 철저하게 왜곡되고 이교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21] 종교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더불어 유일신론적 종교에 속한다.[22] 몰트만의 지적처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삼위일체론을 이슬람교에서처럼 신정정치적 의미로 이해되는 엄격한 유일신론으로 퇴색시켜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위협받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강조로 선지자 중의 하나로 퇴각하게 되거나 유일한 하나님의 한 출현 형태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엄격한 유일신론은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며, 그 결과 그리스도도 하나님 없이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철저하게 그리스도를 신적으로 이해할 뿐 아니라, 하나님도 그리스도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격화 뿐 아니라 하나님개념의 그리스도화(Verchristlichung des Gottesbegriff)는 삼위일체론의 의도와 결과이다[23]. 성경에 나타난 유일신론은 결코 세계관적인 질문이 아니라, 신앙체험의 표현, 곧 실천의 유일신론[24] 또는 계시의 유일론[25]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유일신론은 지적인 사실긍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적 근본결단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유일신론은 양적인-수적인 단일성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적인 유일회성과 유일성을 의미한다[26]. 하나님은 단지 한 분(unus)이실 뿐 아니라, 유일하신 분(unicus), 곧 절대적으로 유일하신 분이시다(사 41:4; 43:10f; 44:6; 48:12; 계 1:4,8,17, 4:8; 11:17)[27]. 유대교의 유일신론은 결코 헬라철학적인 의미에 있어서 단자적 유일신론은 아니다. 우리는 유대교의 유일신론은 삼위일체론적 유일신론의 존립가능성 자체를 배제시키는 양적인 의미에서의 단자적인 유일신론이 아니라는 입장에서 구약 유대교와 기독교 삼위일체론 사이의 대화가능성은 존재한다고 본다. 또한 삼위일체론을 지극히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유일신론이나 이슬람교적 유일신론으로 퇴색시켜서는 안된다. 우리는 구약 이스라엘과 나사렛 예수 속에 자신을 계시한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엄격한 구약적, 삼위일체론적 한정내에서만 하나님을 이야기할 수 있음을 한 번 더 명심해야 하겠다.[28] 우리는 한스 요하임 크라우스가 제기한 테제, 곧 하나님의 오심의 역사에서 주어진 하나님 이름의 비밀이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필연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출발점이라는 지적을 따른다.[29] 전통적인 교의학에서의 형이상학적-수직적 삼위일체론은 보다 구약 이스라엘의 수평적인 약속의 역사의 지평을 통해 반성되어야 한다[30].초대교회의 기독론은 헬라철학의 양성론적 사고의 틀에서 성자의 영원한 신성이라는 추상적, 형이상학적 출발점으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여 갖가지 사변적이고 철학적 이해와 범주를 등장시켰다. 그러나 기독론적인 양성론 문제도 위로부터의 방법이나 아래로부터의 방법이 아니라, 구약성경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31] C. H. Ratschow의 말처럼 예수의 유대인으로서의 특정한 인성과 예수의 유대인됨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필연이었다.[32] 나사렛 예수는 인간 그 자체나 추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인류의 보편적 역사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특별한, 하나님의 언약과 오심을 통하여 규정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에 속해 있다[33]. 몰트만의 입장처럼 성부를 세계를 창조하시고, 보존, 유지, 섭리하시는 세계창조자라는 유일신론적 이해에 근접하여 그것과 구별되지 않는 전통적인 이해를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성부의 자기제한과 인내라는 보다 삼위일체론적인 시각에서 반성해야 한다.[34] 삼위일체론적 창조이해에 의하면 세계창조는 성자를 통해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이루어진 성부의 자기제한을 목적으로 한 자기결정행위이다.[35] 성부는 성자를 향한 사랑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으로 세계의 창조자가 되시기로 결정하셨고 창조하셨다. 또 성자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성부의 자기제한과 인내를 보다 진전시킨 삼위일체론적 사건으로, 성령의 강림은 성부의 자기제한과 성자의 자기외화를 완성시킨 삼위일체론적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는 고난이며, 하나님의 자기고난은 오직 삼위일체론적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창조, 성육신, 십자가, 부활 등 구속사는 모두 철저하게 삼위일체적 사건으로 파악해야 한다. 세계창조를 일반적 유일신론적 차원에서 만물의 아버지의 세계창조로만 파악하고, 성자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으로 완성한 삼위일체론적 차원을 망각해서는 안되며, 예수 그리스도 사건도 성령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진 성부의 활동이라는 철저한 삼위일체론적 사건으로 파악해야 하고, 십자가 사건도 구원론적, 대속적 의미뿐 아니라 십자가 죽음이 갖는 성부에 대한 의미, 곧 삼위일체론적 차원의 사건으로 파악해야 한다. 구원사건을 철저하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사건으로 파악하지 않을 경우 성부는 일반적 세계창조자로서의 신으로 퇴색하고, 성자의 고난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고난이 아니라 고작해야 나사렛 출신의 착한 한 청년의 인간적인 고난과 비극정도로 간주될 것이다. 나아가 성자의 성육신도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뿐 아니라, 동방신학과 같이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성육신의 구원론적 동기를 충분히 인정한다하더라도 성자의 성육신을 단지 구원론적, 기능적 차원으로 국한시키는 것에 대해서 몰트만의 입장과 같이 비판적 태도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성육신을 기능적, 구원론적 기독론차원에서 좀 더 깊이 진전시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전달의 열망의 사건으로까지 보아야 할 것이다. “성자의 성육신은 목적을 위한 수단 이상이다. 기독론은 구원론의 전제 이상이다..사랑받은 자의 곤경은 단지 사랑의 계기이지, 원인은 아니다”[36]. "성육신은 바울의 견해에 의하면 죄로 인해 조건화된 뒤늦은 사후의 사건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로고스의 성육신은 모든 창조운동의 명백한 존재론적 목표다. 이레니우스에 의하면 둘째 아담의 과제는 단지 첫째 아담의 실패에 대한 원상회복에 있기보다는 아담 이후로 어떤 누구도 이룬 적이 없는 것의 완성에 있다. 구원은 원래적 창조의 회귀만이 아니라 충만과 완성을 향한 상승이기도 하다. Berdjajew는 구원을 여덟째 날의 사역으로 불렀고 동방신학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는 구원받거나 혹은 죄 이전의 낙원상태로 회복된 것일 뿐 아니라, 발전과 새로운 영광과 완성의 시대로 나아간 것이기도 하다" [37] 또한 신플라톤적 신의 불가해성에 집착함으로 하나님을 지나치게 지고한 천상에서 자족하는 차가운 세계통치자라는 인상을 주는 것을 반성하고, 삼위일체론적 은폐성으로 이해함으로 우리의 하나님을 세계와 인간의 구원을 위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한다. 카스퍼는 하나님의 신비와 은폐성에 대한 이해는 인간인식의 역량과 한계에 대한 이론이라는 틀 속에서 전개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론적 명제가 아니라 신학적인 명제이며, 인간의 자기지식의 최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신앙고백의 첫마디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신비와 은폐성에 대해 증거하는 것은 플라톤, 플로틴, 칸트가 말하는 이데아, 일자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불가해성과는 다른 것이다.[38] 또는 군톤의 말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관계적 개념이지 절대적 개념이 아니며, 이를 인격의 타자성에 두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적으로 이해된 초월로 이해하는 어거스틴의 유산은 반성되어야 한다.[39] 나아가 칸트인식론과 같은 인간 자신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업적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정한 신학적 인식의 가능성을 평가절하하는 현대신학은 보다 더 철저하게 비판적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신비와 은폐성은 인식론적인 한계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근원적인 내용이다. 그것은 우리의 부정적인 침묵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힘찬 선포와 찬양, 경배의 목소리를 발하게 하는 신비다. 하나님의 신비와 은폐성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인간과 격리된 신의 본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영원한 구원계획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그 실현에 대한 것이다. 곧 하나님의 은폐성은 구원역사 앞이나 위나 뒤에 자리잡고 있는 신의 즉자적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말함이다. 칼빈도 성경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된 하나님 너머나, 위에나, 배후의 어떤 신적 존재를 가정, 내포하는 그런 표현이나 범주로서 하나님을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칼빈이 알았던 유일한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별적 위격들에 나타난 특정한 경륜적 현시와 유리된 어떤 본질적인 신적 속성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칼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이 신론을 구성한다. 이에 반해 Thomas Aquinas의 Summa Theologiae로 대표되는 중세 카톨릭 신학 전통에서는 De Deo Uno를 제 1부로 선행시켜 논의한 후 제 2부로 De Deo Trino를 후행시킴으로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 배후에, 이전에 어떤 유일신이 있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같이, 칼빈은 삼위일체 배후에 있는 어떤 신을 허용치 않았다.[40] 김 광식 교수는 삼위일체론에 앞서 일반적 신론을 앞세운다고 해서 반드시 이교적 유래와 형태를 갖춘 사유물이 뚫고 들어올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는 철학적 신론이 기독교적 신론의 구성적 요소인 것을 결코 피할 수 없다고 본다.[41] 그러나 기독교 신론 속에 이미 들어와 통합되어 있는 철학적 개념을 정당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그의 통합적 동기는 인정한다손치더라도 삼위일체론에 앞선 철학적이고 일반적 신론 때문에 ‘두려운’ 결과가 실제로 서구정신사, 철학사, 신학사에 초래되었다는 점은 누구보다도 서구신학자이 깊게 느낀 것이다. 우리는 철학적이고 일반적인 신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고 퇴색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서구 신학이 장구한 자신들의 신학적 전통을 깊게 반성하는 것도 우리 동양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철학적 신론이 성경적 하나님의 이미지를 흐리게 한 것이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면서도 급진적으로 신론이 삼위일체론적일 것을 요구한다. 일반적 신론은 삼위일체론 속에 지양되는 것이지 결코 앞서거나 전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명은 바로 교회다와지는 것과 같이 신학이 철학과 세계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이면서도 철저한 사명은 가장 ‘신학적이고’ ‘기독교적’인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세계는 이미 많은 신들을 가지고 있기에 그 신들을 앞세우고 관련짓기 보다는 원색적인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가장 포괄적이고 위대한 사명이다. 하나님 신비의 계시는 신플라톤주의에서와 같이 절대적으로 부정적이고 무형의 허무주의적 신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시공간의 조건 안으로까지 스스로 낮아지신 하나님의 겸손과 비하를 말함이다. 하나님의 은폐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안에서 계시된 영광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폐성을 말하는 신학은 결국 십자가의 신학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이 말한바와 같이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으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 십자가 신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며, 철저하게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 안에 참된 신학과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42] 성령을 통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신 우리의 하나님은 분명히 일반적 유신론적 틀을 통해서 증명될 수 있는 분도 아니거니와 무신론적 부인(否認)으로 추방되는 분도 아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전통적, 형이상학적, 일반적 神개념에 대한 철저한 재고(再考)를 요구한다. [43] 십자가를 회피하는 일반적, 철학적 유신론 혹은 유일신론적 범주에서는 기계적이고 무인격적인 신의 절대권능에 굴종해야만 하는 억압적, 지배적 세계관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적 지평에서 보면 하나님의 권능은 언제나 그의 고난 속에서, 그의 초월은 언제나 비하와 겸손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개혁파와 개혁파의 지배적 영향하에 있는 한국교회에서는 삼위일체론적 지평에 대한 강조가 절실하다고 하겠다. 칼빈 자신의 신학과는 달리 한국의 개혁주의 교회는 삼위일체론적 지평, 특이 성령론적 지평이 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예전, 신론적 위치, 세계관 등에서 삼위일체론적 차원이 상당히 약하다. 하나님/인간의 관계도 대부분 삼위일체론적 관계라기 보다는 대립적이고 변증법적 관계로 특징지워진다고 볼 수 있다.[44] 또한 스토아철학적 경향의 예정론과 일반적, 철학적 유일신론적 경향의 신개념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순종이 배타적으로 강조되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와 겸손과 고난에 대한 신학적 색채는 상당부분 퇴색되어있다고 보인다. 하나님의 속성도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으로만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의 무소부재성, 영원성, 지혜, 전능 등의 속성은 헬라철학의 초월성만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신개념의 영향을 깊이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한 H. Berkof의 지적처럼[45] 하나님의 속성들을 지극히 일반적이고 철학적인 유일신론 혹은 유신론의 틀 속에 맟추어 우리들의 종교적 기대와 아프리오리를 최상급화, 초월화시켜서 만들어내어서는 안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은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으로 주어진 속성이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주어진 이 하나님의 속성의 한계를 벗어나 쉽게 일반화, 철학화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권능도 일반적인 신의 절대적 전능이 아니라,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인 권능, 곧 예수 그리스도의 무능 속에서 비로소 가장 명료하게 계시된 기독론적 전능인 것이다.[46] 성경은 유명론과 후기 스콜라철학이 형이상학적 신개념을 극단화한 것처럼, 무제한적 능력과 의지로 이해되는 추상적 신의 전능개념에 대해서 결코 사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모든 것을 행하실 수 있는가에 대한 사변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 그가 실제로 행하신 것에 대해서 증거할뿐이다.[47] 하나님의 무소부재라는 속성도 신의 `일반적인 무소부재' 혹은 현존하는 `일반적인 원리'가 아니라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사건으로 `주어진' 것으로서의 무소부재,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중심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48] 하나님의 초월도 언제나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의 겸손과 비하 속에서만 한정시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헬라철학의 영향으로 교회사에서 종종 초월과 겸양의 연관은 퇴색되고 성경의 하나님은 헬라철학적 범주에 종속되어 일방적으로 초월적으로만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는 삼위일체론적 초월이해로 반성되어야 한다.[49] 히브리어적인 의미에서 초월은 유일신론적인 틀 안에서 이해된 철학적인 절대적 초월성이 아니라, 야훼의 이름, 성전,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사 속에서 구체화되고 계시되고 실현되는 것이며, 헬라어 δοξα도 일반종교적인 의미에서 지고의 찬란하고 초월적 신의 영광이기보다는 보다 삼위일체론적으로 한정된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고후 4:6), 곧 십자가의 죽음과 연관된 영광, 곧 삼위일체론적인 겸양 속에 계시된 초월이다. 같은 맥락에서 철학적으로 오해되기 쉬운 초월/내재(transcendence/immanence)를 보다 인격적인 개념으로 타자성/관계성(otherness/relation)로 대체하자는 군톤의 제안도 받아들일만 하다[50] 군톤에 의하면 하나님의 초월은 가끔씩 너무 양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어서 초월/내재의 관계는 대립적인 양자택일의 관계로 오해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성/관계성은 대립적 경쟁관계가 아니라 서로와 연관되어 서로를 보충하는 상관개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타자성은 모든 종류의 반삼위일체론적, 전삼위일체론적 범신론과 일원론에 대해서 세계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의 정당한 존재론적 구분과 거리를 유지케 하는 동시에 창조질서의 우연성과 인간 인격의 자유를 위해서 큰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께서는 타자성을 가지고 계심으로, 곧 인격적 자유와 `공간'을 자신 존재의 역동성 속에 가지고 계심으로 창조세계의 존재의 `공간'을 허용하실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원론적, 전체주의적 사회에서는 이러한 독특하고도 고유한 타자성을 무시함으로, 개인인격의 고유성을 묵살하게 된다.[51] 그러나 타자성 없는 관계가 고대 인도종교와 같이 만물이 공허한 동질성으로 환원되어버리는 범신론적, 단일론적, 전체주의적 위험이라면, 관계 없는 타자성은 이신론적, 비합리적 다원주의, 개인주의적 위험이다. 삼위일체론적 창조이해에 의하면 세계는 공허한 단일체도 어지러운 다원체도 아니다.[52] 2) 성령론의 재발견 : 오소서 거룩한 성령이여 ! (Veni Creator Spiritus Sancti) 성부는 근원이요, 성자는 중심이며 성령은 완성이다. 서방신학은 성령에 대한 기억상실이라는 비난을 종종 받는다. 종종 성부-성자-성령 대신에 성부-성자-교회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성령은 종종 미지의 하나님(Ignoto Deo) 혹은 오해된 하나님으로 이해되어 왔다.[53] 삼위일체론에 대한 기독교 미술과 성화에는 두 분과 하나의 동물, 곧 비둘기로 묘사된다[54]. 기독교 신학은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관계적이고 상호내주적인 이해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인격성의 독자성을 발전시키지는 못하고 성령을 단지 `사랑의 띠로 계시는 세번째 분(Dritten im Bunde)'로 묘사함으로 말하자면 성령을 관계적으로 사회화시키는 정도에 불과했다. 즉 성령론의 강조점은 언제나 성령의 인격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계성과 특유한 공동체성에 주어졌던 것이다.[55] 그러나 성령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신비를 계시하신다(고전 2:11).[56]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깊이 감추인 신비는 하나님의 영(성령) 외에는 알지 못한다.[57] 성령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장 깊은 본질을 드러내신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외화적 존재의 가능성과 현실이시며, 하나님의 엑스타시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넘쳐흐름이시다. 우리는 신비주의 신학과는 달리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비인격적인 에너지로서가 아니라, 성령의 내주 안에서 또 그것을 통하여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실제적인 자기수여로 이해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의 내주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벧후 1:4).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수여의 경우와는 달리 우리는 출생을 통하여, 곧 본성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선물과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곧 양자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롬 8:15, 23; 갈 4:5). 기독론적 관점에서 보면 창조는 만물보다 먼저 나신 성자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인간은 많은 형제들 중 맏아들로 나신 분과의 연합을 통해서만 비로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게 된다. 구원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에 접붙여지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 사랑의 흘러넘침이시며, 하나님의 삶에 참여함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사랑하시면서 자신을 너머 흘러 넘침은 필연적인 유출으로서가 아니라, 인격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참여와 자유롭고 은혜로우신 자기수여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외화하실 가능성을 가지신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영원으로부터 자신을 나누어주실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교부들은 성령을 향유로부터 퍼져나가는 향기로 비유했다. 또한 성령은 온누리를 비취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 그 자취를 인간이 창조세계의 피조물들의 아름다움과 충만함과 풍성함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이해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완성으로서의 성령은 또한 세계의 종말론적 완성이기도 하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시는 것은(inhabitatio spiritus sancti in corde),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만유에 가득차게 될 미래를 미리 앞당긴 것이며, 우리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산 성전이 된 것은(고전 6:13b ff) 만유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전이 될 종말론적 미래를(계 21:3) 앞당긴 것이다. 동방 교부들은 성령을 세계의 성화, 충만, 완성과 목적을 위한 종말론적 선물로 이해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시게 되는(고전 15:28) 종말론적 샬롬의 완성, 곧 인간과 세계의 신격화를 이루신다.[58] 성령은 세키나(Schechinah)와 같이 하나님의 내주을 이루신다. 구약에는 성전, 예배, 주의 날에 하나님의 임재가 이루어졌으나, 이제는 인간 자신의 몸이 성령의 성전(고전 6:13-20)이 되었고, 종말론적으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며 만물이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고향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고향에 충만하고도 영광스럽게 거하실 것이다: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라(ϊνα..θεός [τά ] πάντα έν πάσιν"(고전 15:28), 이는 만유내재신론적인 비젼, 곧 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 안에 있는 세계를 말하며 이는 성령을 통한 만물의 변화을 통해 가능하다.[59] 고전 15:28 장은 삼위일체론적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본문이다. 전통적인 서구신학은 이교적 범신론에 대한 과민한 반작용으로 지나치게 기계론적이고 초월적인 하나님/세계의 관계를 생산해 내었다. 한국교회의 경우도 구원이 지나치게 인간중심적, 개인주의적인 영혼구원에만 제한되었고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고가 빈약하다. 삼위일체론적 유신론의 원색은 퇴색되고 일반적이고 철학적인 유신론과 이신론으로 변해버렸다. 이교적인 범신론과 함께 철학적이고 유신론적인 하나님/세계의 관계규정도 비성경적인 것이다. 우리는 삼위일체론적 사고로 범신론 보다는 세계로부터의 하나님의 존재론적 거리를, 철학적 유신론과 이신론보다는 존재론적 친밀성과 관계성을 강조해야 한다. 역사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로부터 나왔으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로 돌아간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자신 밖으로 나가시는 길이시며, 동시에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께 회귀시키는 분이시다. 성령 안에서 구원론은 이제 다시금 송영으로 결론지워진다. 세계역사의 근원은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시작되며 세계역사의 목적은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창조는 과거의 닫힌 체계가 아니라 종말론적 미래를 향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완성되는 열린 체계이다.[60]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도 삼위일체론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한 착한 청년의 순교적, 영웅적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죽음, 곧 성자의 고난은 성부의 구원행동이다. 십자가는 나사렛 예수의 지상생애의 마지막 단계뿐 아니라, 성육신이 겨냥하고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사건의 의미목표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터툴리안의 말대로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Deus mortuus),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us crucifixus)이시다. 형이상학적으로 물든 중세 스콜라신학처럼 철학적 신개념으로부터 십자가를 해석할 것이 아니라, 루터의 십자가 신학처럼 십자가로부터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자기외화는 하나님의 탈신격화가 아니라, 그의 종말론적인 영광이다. 성육신과 십자가에서의 하나님의 자기외화 가능성의 초월적-신학적 조건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한 내적인 구분이다[61] 몰트만은 한걸음 더 나아가 그의 성령론적 기독론에 대한 뚜렷한 강조로 성자의 고난은 곧 성령의 고난이라는 철저한 성령론적, 삼위일체론적 관점을 부각시켰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삶-고난-십자가-부활이 모두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철저하게 성령론적 기독론의 관점을 부각시켜야 한다. 구약 이스라엘의 고난과 포로와 함께 했던 야훼의 세키나와 같은 차원에서 우리는 성령의 비하와 케노시스를 말할 수 있으며,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 한다면 고난의 성령, 십자가에 달리신 자의 성령을 말하는 십자가 성령론을 말할 수 있다.[62] 성령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내재적인 고난의 길의 초월적인 측면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동행자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은 성령의 고난의 길이다. 성령의 자기외화는 성자의 자기비하의 전제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케노시스적인 자기희생의 영이다. 하나님의 감정이입(Empathie)으로서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연약함을 위해, 고난받는 피조물을 위해 간구하시는 영이시다(롬 8장). 깊은데서 부르짓는 시편기자의 탄식(시 130:1),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울부짓는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출 3:7), 로마군의 십자가에서 울부짓는 그리스도의 탄식(막 15:34)과 같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지만 억압받는 사람들의 절규와 파괴된 자연과 인간에 의해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피조물을 향해 탄식하신다. 인간과 자연의 탄식은 곧 성령 자신의 탄식이시다. 전통적인 바울과 요한의 기독론적 성령론 뿐 아니라, 공관복음서에서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는 성령론적 기독론을 재발견해야 하며, 나아가 양자의 상호관계성에 대한 균형잡힌 접근이 시도되어야 한다. 서구신학이 대체적으로 기독론적 성령론에 치우쳤던 반면 동방신학은 갑바도기아 교부 이후로 항상 성령론적 기독론과 기독론적 성령론 사이의 상호관계성을 강조해 왔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몰트만의 제안처럼 a patre filioque로 오실 뿐 아니라 성자께서도 a patre spirituque로 오신다고 말할 수 있다.[63]. 성령의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성령의 담지자께서 성령의 파송자로, 성자의 승천에서 성령의 오심으로 변화되는 과정 사이의 이 이중적 상호관계성에서 더 나아가 보다 더 많은 삼위일체론적 관계성을 보아야 한다. 곧 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처럼 성령의 오심의 궁극적 원인은 성부에게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filioque를 삽입함으로 서구신학이 영속적으로 성령에 대한 성자의 우위를 못박고 성령을 성자에 종속시키는 일면적 기독론적 성령론에서 파생된 그리스도일원론(Christomonismus)의 위험을 성령론적 기독론으로 극복해야 한다. 또한 기독론적 성령론을 통해 열광주의적 광적인 성령운동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곧 기독론과 성령론 모두 포괄적인 삼위일체론적 전체구조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 삼위일체론적 상호관계성 속에서는 Theozentirsmus, Christozentrismus, Pneumazentriusmus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다.[64] 3) 삼위일체론적 송영 : θεοσεβεια로서의 θεολογια 삼위일체론적 세례문답의 신앙고백은 논리적 명료성이 아니라, 송영을 위한 것이었다.[65]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구원론적 동기로 채색된 송영적 뿌리와 관심을 가진다. 곧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구원행동, 곧 구원역사적 계시에 대한 송영적 답변이다. 이러한 송영적 뿌리를 망각하게 될 때 어거스틴 이후와 중세기처럼 삼위일체론은 형이상학적 논리의 신비(mysterium logicum)에 대한 이론적 언설이 되고 만다. 삼위일체론은 수도사들과 신학자들이나 몰입하는 낯선 사변이 아니다. 오히려 삼위일체론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은 지상교회의 모든 신자들의 세례문답,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례예식에서 발생한다. 곧 삼위일체론의 삶의 자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전적 찬양과 송영이다. 신학은 언제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이다(Theologie als Doxologie). 하나님은 신학적 이성에 있어서 다른 여러 문제들과 병렬되는 한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유일하고도 참된 "문제"다 ! 그것을 우리는 신비라 부른다. 신학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그 문제의 해결이나, 진보가 아니라, 모든 지식들과 질문들을 하나님의 신비로 환원하는 것이다. 신학(θεολογια)은 삼위일체론에서 비로소 완성되며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θεοσεβεια)다.[66] θεολογια의 목적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사고로 해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를 신비로 파악하는 것이다[67].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합리주의적인 방식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를 신비로 깊이 인정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깊은 것에 대한 이해는 인간의 영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전 2:11). 그렇기에 신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영적인 작업이며 성령 안에서의 작업이다. 멜랑톤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를 탐구하기보다 차라리 경배해야 하리라.[68]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 예배와 예전에 있어서 너무 저교회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한국 칼빈주의 교회의 성찬식이해는 예전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었던 칼빈의 영적인 임재설이 아니라, 합리주의적인 쯔빙글리의 상징설의 깊은 영향하에 있다. 찬송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과 찬양은 성가대의 전유물이 되었고 절대다수는 18세기 19세기의 영적 대각성 운동의 영향하에 있는 낭만적이고 개인회심과 영혼구원에 그 색채가 집중되어 있는 찬양들이다. 대중적, 통속적 복음주의의 가장 큰 약점은 소위 ‘경건한’ 개인주의일 것이다. 이제는 나 개인의 회심, 구원, 위로가 아니라, 보다 넓은 차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이 교회예전의 초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적 실존과는 무관한 3=1, 1=3이라는 피상적인 수학적, 기하학적, 논리적 사변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결코 양적인, 수적인 규정이 아니다.[69] 삼위일체론은 지고의 종교적 표현을 위해 `거룩하고', `마술적인', 심층심리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숫자 3을 고안한 것도 아니며, 특정 시기의 서구정신의 존재론적 범주를 정경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모든 면에서 인간과 세계를 모두 포괄하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신비를 지시할 뿐이다. 삼위일체론은 결코 하나의 객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객관화하는 표현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유일한 독특성 가운데 만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인격과 인격의 관계를 표현한 것이다.[70]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과 경배가 곧 신학이다. 이론적 사변에 대한 집착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세례와 성찬예식의 생동감있는 프락시스가 고대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삶의 자리이었다. 기독교회의 예전적 송영의 본래의 의도는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하여 성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삼위일체론적 신앙고백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가진 세례신앙고백과 성찬식의 송영은 세례와 성찬 속에 현재(現在)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현실, 곧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시라는 사실을 해석하고 이 구원현실을 생동감있게 표현하려는 것이었다. 경륜적 삼위일체론이 케리그마 신학과 실천적 신학의 대상이라면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송영적 신학의 내용이다. "삼위일체론은 말하자면 송영의 문법일 뿐이다”.[71] 삼위일체론은 언제나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영광을 돌릴찌어다"라는 송영,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종말론적 영광(δοξα)에 대한 송영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 종말론적 영광은 동시에 세계의 구원과 생명이 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송영과 구원론 사이의 긴장일치 안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은 세계의 구원론이다. 인간과 세계의 비밀 안에 하나님은 숨어 계신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신비는 인간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침묵의 신비가 아니라, 인간에게 말하시며 그렇기에 인간도 말할 수 있는 말하는 신비다. 하나님은 자기계시 안에서도 자신의 신비를 상실하지 않으신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폐된 신비, 곧 그의 자유와 인격의 신비를 드러내실 때만이 비로소 주어진다. 계시는 하나님의 은폐성의 계시이다![7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지만(Deus erga nos), 우리에 의한 하나님(Deus secundum nos)은 아니다.[73] 그러나 대체로 고대, 중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구원사 혹은 계시사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인식론적 혹은 본질적으로 이해하여 유한한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무한한 하나님의 본질의 신비로 이해했다. 곧 하나님의 신비를 하나님의 은폐성으로 보다는 불가해성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구체적으로 비췬 성부대신에 신플라톤철학적인 부정의 신학이 말하는 신의 불가해성이 등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는 사고의 신비가 아니라, 구원의 신비이다. 삼위일체론적 신앙고백은 하나님 신비의 계시에 대한 요약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폐성에 대한 구체적 해석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신비는 성령을 통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성부의 사랑의 신비, 곧 삼위일체론 하나님의 신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신비 중의 유일한 신비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많은 신비들이 이 유일한 신비,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분의 구원경륜이라는 신비로 요약된다. 기독교 신학의 유일한 신비는 다음의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인간의 구원이시다. 이 유일한 신비로부터 세 가지 신비가 전개된다. 곧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본질에 대한 신비, 성육신의 신비, 그리고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이 완성될 성령 안에서의 종말론적 인간구원의 신비가 그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비는 결코 비합리적인, 반이성적인 모순은 아니다. 합리주의적인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지성으로 일차원적으로 단면화시켜 버리는 것도, 혹은 신비와 지성을 이원론적으로, 반립적으로 관계규정하는 비합리주의와 신앙주의의 오류도 우리는 피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결코 반이성적이지는 않으며, 단지 초이성적일 뿐이다. 계시는 인간 이성을 억압, 약화,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이성으로 풍성하게 조명해 준다. 송영과 구원론 사이의 긴장일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인정이 결코 인간의 굴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체성에 대한 인정은 결코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제약과 억압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인간을 구원, 해방, 완성한다. 인간과 세계의 의미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는 그 아름다운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74] -------------------------------------------------------------------------------- [1]. Hendrikus Berkhof, Christelijk Geloof -een inleiding tot de geloofsleer, Uitgeverij G. F. Callenbach B. V.-Nijkerk, S. 110. [2] Ebd., S. 110. [3] K. Barth, KD II/1, S. 53. [4] H. Berkhof, a.a.O., S. 110 [5] Helmut Thielicke, Der Evangeliche Glaube, Grundzüge der Dogmatik, erster Band, S. 266. [6] Kasper, a.a.O., S. 215 [7] "It is more pious and more accurate to signify God from the Son and call him Father, than to name him from his works and call him Unoriginate(Athanasius "To know God in any precise way we must know him in accordance with his nature, as he has revealed himself - that is, in Jesus Christ his incarnate Son in whom he has communicated not just something about himself but his very Self.", T. F. Torrance, p. 6. [8]. J. Moltmann은 같은 맥락에서 말한다: "Es ist die Aufgabe christlicher Gotteslehre, mit allem Ernst und aller Konsequenz den rational verwässerten Gottesbegriff, der sich mit monotheistischen Formeln umgibt, aufzusprengen und die unbesonnenen Versuche, auf der Basis einer allgemeinen Vorstellung von Gott Begegnungen, Gespräche und Anknüpfungspunkte zu suchen, aufzugeben", J. Moltmann, Der gekreuzigten Gott - Das Kreuz Christi als Grund und Kritik christlicher Theologie, Chr. Kaiser Verlag, M nchen, 1972, S. 222ff. [9]. "Der Sinn der Trinitätslehre ist ja nicht, Gott auf einen einleuchtenden Allgemeinbegriff zu bringen, sondern wenn sie in dreifacher Weise von dem einen Gott, Vater, Sohn und Geist, redet, so ist das vielmehr ein Angriff auf unsere Gottesbegriffe. Die Trinitätslehre liefert nicht ein Erkenntnis der Natur und Geschichte oder aus der Analyse unsres Bewußstseins als zwingend erhoben werden kann, sondern sie ist eine aus der Schrift gefolgerte Erkenntnis, die ihrerseits wieder zum rechten Verstehen der Schrift anleitet.", Walter Kreck, Grundfragen der Dogmtik, Chr. Kaiser Verlag, München, 1970. S. 117. [10] Otto Weber, a.a.O., S. 388 [11]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II, J.H.KOK, Kampen, 1929, S. 299 [12]. "Es ist nicht ein bannender Anruf, sondern das menschliche "Hier" auf das Angerufensein. Es ist das Bekenntnis, daß wir vom Evangelium getroffen wurden.", Werner Elert, Der Christliche Glaube -Grundlinien der lutherischen Dogmatik, Furche-Verlag, Hamburg, 1960, S. 202. [13] Kasper, a.a.O., S. 158 [14] Otto Weber는 der dogmatische Ort der Trinitätslehre에 대한 논의에서 일반적 신론을 삼위일체론에 선행시키는 교의학적 구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일반적 신론 부분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지역이라고 주장한다: "Die 'allgemeine' Gotteslehre ist deshalb ein besonders gefahrenreiches Gebiet, weil hier seit allen Jahrhunderten eine der wichtigsten Einbruchstellen für Denkgebilde heidnischer Herkunft und Gestalt liegt", Otto Weber, Grundlagen der Dogmatik I, S. 387. [15]. "Darum kann diese Verkündigung, die den unabdingbaren Anspruch Gottes proklamiert und nicht durch uns erst verifiziert wird, dennoch nicht dekretieren und diktieren, sondern scheinbar hilflos ruft und fragt sie nach der einstimmenden Antwort des Hörers", Walter Kreck, a.a.O., S. 23. [16] Thomas F.Torrance, The Trinitarian Faith – The Evangelical Theology of the Ancient Catholic Church, T&T Clark, Edinburgh, 1993, p.74 [17]. Gerhard Ebeling, Luther : Einführung in sein Denken, J. C. B. Mohr (Paul Siebeck): Tübingen, 1981, S. 261. [18] Ebd., S. 270. [19]. "Außerhalb Jesu Gott suchen ist der Teufel" , Ebd., S. 271에서 간접인용). [20]. "Gewiß können wir nur trinitarisch glauben, weil Gott uns nur trinitarisch begegnet,.."(W. Elert, a.a.O., S. 221). [21] Karl Barth, KD IV, I, S. 203) [22]. 삼위일체론과 구약 유대교와의 관련성 문제에 있어서 요하임 크라우스의 주장을 따른다: “삼위일체론은 구약 야훼 자신의 이름계시라는 역사적 전제로부터만 시작된다”(H. J. Kraus, Reich Gottes : Reich der Freiheit, Neukirchener Verlag, 1975. S. 105-6). “야훼 자신의 이름계시는 모든 이교적인, 존재론적인, 이신론적인, 유신론적인, 범신론적인 신(神)개념의 침입을 지속적으로 분쇄하는 성(城)이다…주 예수라는 초대 기독교 신앙고백(고전 12:3)은 `야훼와 예수의 이름동일성의 비밀을 드러낸다. 이제 야훼의 이름 앞에 바쳐져야 할 우주적 경배가(사 45:23) 예수 앞에 바쳐진다(빌 2:10-11) 이것이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출발점이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기독교 삼위일체론에 대한 유대교적 유일신론의 항의는 재고(再考)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구약성경 안에서 야훼의 이름과 대리적인 현시들에서 나타난 `자기구분과 비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Schalom Ben-Chorin은 유대교적 전통을 따라 신명기 6:4를 유일신론적 고백으로 설명하지만, 이 구절의 본래적 의미는 신명기적 전승의 중앙집권적 요구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Ebd., 107) 즉 `야훼의 상이한 자기전달들(disparate Selbstmitteilungen Jahwes)'이 상이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대리적인 현시(顯示)의 다양성 안에서 일어난 야훼의 "자기구분과의 관련 속에서만 그 단일성(신 6:4)(die Einheit immer nur unter Bezug auf die Selbstunterscheidung)"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S. 107); 또한 창 1:26, 3:22, 11:7, 사 6:8은 복수형은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론은 암시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장엄 복수형(pluralis majestatis)을 나타낸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자기협의(Selbstberatung), 자기자신과의 대화를 의미하는 의도적인 복수형(pluralis deliberationis)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Kasper의 지적도 구약과 삼위일체론과의 상관성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지적이다(S. 296). [23] Moltmann, a.a.O.,S. 147 [24] Walter Kasper, a.a.O., S. 292 [25] Otto Weber, a.a.O., S. 395. [26] Kasper, a.a.O., S. 293. [27]Otto Weber는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weithin den Eindruck erweckt, als sei hier der 'Henotheismus' oder dei 'Monolatrie' noch keineswegs überwunden. Die Einheit Jahwes ist seine Einzigkeit-für Israel. Er ist der Eine, indem er für dieses eine Volk der Einzige ist"(a.a.O., S. 392); " Gottes Einheit ist seine Einzigkeit in seiner konkreten Selbst-Qualifikation und Selbst-Prädizierung...sie ist seine Einheit mit sich selbst in seiner Offenbarung. Oder mit K. Barth: sie ist seine Einheit in seinem je konkreten Herr-Sein."(Ebd., S. 396). [28] H. Berkhof, a.a.O., S. 113. 우리는 H. Berkhof의 주장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한 하나님 뿐 아니라, 구약 이스라엘의 야훼라는 구약적 뿌리라는 또 하나의 엄격한 `구약적' 한정을 두려고 한다. 이는 헬라철학적 범주에 대한 성경적, 구약적, 히브리적 뿌리에 충실하려는 노력이다. 이러한 헬라철학적 범주의 사용은 초기 기독교가 헬라철학적 시대배경 속에서 수행하고자 했던 정당한 변증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하르낙식의 탈헬라화라는 과격한 비판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한다하더라도 사실상 초기 기독교회는 구약 히브리적 뿌리를 떠나 지나치게 헬라화되었다는 H. Berkhof의 비판까지를 부인할 수는 없다고 본다(S. 114). 그러므로 탈헬라화보다는 탈히브리화가 탈삼위일체론화와 연관된다고 본다. 구약 유대교적 유일신론과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대립'은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뒤에서 언급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Hans-Joachim Kraus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Die durch die alttestamentliche Perspektive bestimmte Trinität를 말한다(Hans-Joachim Kraus, a.a.O., S. 111, 179). [29]. II.1.3 "Die Einzeichnung des Namensgeheimnisses Gottes in die Geschichte seines Kommens ist der notwendige und unumgängliche Ansatz christlicher Trinitätslehre" (Ebd., S. 105). [30] Ebd., S. 263. [31]. Kraus, IV.I Grundfragen der Christologie, S. 245-266. ; " Der Belang der Geschichte Israels für Jesus ist daher etwas anderes als volks- und entwicklungsgeschichtliches Vorher. Vielmehr ist diese Gottes-Geschichte seines Daseins Kraft, Vollmacht und Geheimnis"(Ebd., S. 90) [32]C. H. Ratschow, Der angefochtene Glaube, Anfangs- und Grundprobleme der Dogmatik, Güter Verlagshaus Gerd Mohn, 1967, S. 66; " Er zuerst ein innerjüdisches Ereignis und steht in einem nicht nur zufä lligen, sondern wesenhaften Zusammenhange mit der jüdischen Geschichte und den wichtigsten Elementen ihrer Besonderheit: Bund, Erwählung, Gesetz, Propheite, Land, Einzigkeit des Gottes Israels, messianische Erwartung". [33] O. Weber, II, a.a.O., S. 70; "Die Person Jesu gewinnt ihre Dimension aus der Heilsgeschichte. Ohne diesen Hintergrund kann man sie nicht begreifen, bleibt auch ihre metaphysischer Gehalt abstrakt und ohne Wahrheit...Der Glaube an Israel und der Glaube an den historischen Jesus gehören unmittelbar zusammen.", Mysterium Salutis - Grundriß heilsgeschichtlicher Dogmatik, 3/1 Das Christusereignis, S.41.; "Die Zentralstellung Jesu für die ganze Menschheit, die das Neue Testament behauptet, erwächst aus der Zentralstellung Jesu für Israel." Helmut Gollwitzer, Befreiung zur Solidaritä t -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 Theologie, Chr. Kaiser Verlag, 1984. S. 67-8을 보라. [34]. J. Moltmann의 입장이 헤겔철학적 도식에 근거한 것이라는 비판은 재고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수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기제한으로서의 세계창조와 같은 새로운 입장은 그 방법론적 철저성이 있다하더라도 철학적 입장이라기보다는 유대교의 카발라 전통을 동정적으로 수용한 것이기 때문이다(J. Moltmann, a.a.O., S. 125). 이러한 전통에 대한 수용은 이미 E. Brunner에게서도 발견된다고 그는 말한다: "Das heißt aber, Gott will den Raum des Seins nicht allein einnehmen, er will anderem Sein Platz schaffen. Indem er es tut, begrenzt er sich selbst....Die Kenosis, die im Kreuz Christi ihren Höhepunkt erreicht, beginnt schon mit der Schöpfung"(E. Brunner, Dogmatik II, Zürich 1950, S. 31). Schelling도 이러한 전통을 철학적으로 수용한 것을 보면 이러한 사상이 결코 헤겔철학적인 사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5]. "In diesem ewigen Bund der Trinität zur Schöpfung und zur Verherrlichung geschieht eben jene Selbstbesimmung des Vaters, des Sohnes und des Geistes, die als Selbstbeschränkung die Einräumung der Schöpfung und die Ermöglichung der Freiheit des nicht-gö ttlichen Ebenbildes Gottes in Gott ist"(Moltmann, a.a.O., S. 127). [36] J.Moltmann, a.a.O., S. 130 [37] Mysterium Salutis, III/I, S. 95-97 [38]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칸트의 인식론에 너무 강하게 영향을 받은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평가절하하는 현대신학에 대한 Colin E. Gunton의 비판은 적절한 것이다: "There lies the weakness of so much modern theology, in reducing the knowledge of God to a speaking about ourselves or our supposed experience rather than from the God made known in Christ", ibid., p. 163. [39]. "..not in the otherness of the personal, but in the platonically conceived otherness -'transcendence'-of the material or sensible and 'spiritual' or intelligible worlds"(Ibid., p. 163). [40] Butin, Revelation, Redemption, and Response - Calvi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p. 41. [41] 김 광식, 조직신학 (1), 대한기독교서회, p. 165. [42] "In Christo crucifixo est vera Theologia et cognitio Dei"(M. Luther). [43] "Es verlangt von uns ein radikales Umdenken über Gott.. Wir sprachen bereits von der Notwendigkeit, unsre Vorstellung von einem göttlichen Wesen, das nur unweltlich, überweltlich, transzendent sei, fahren zu lassen, d. h. den traditionellen metaphysischen Gottesbegriff preizugeben.", Walter Kreck, a.a.O., S. 84. [44] Butin의 주장처럼 Karl Barth와 J. Moltmann이 말한 바 삼위일체론 지평의 재발견은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그 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한 칼빈과 개혁주의의 삼위일체론적 페러다임을 새롭게 부각시켜야 한다. [45]. H. Berkhof, a.a.O., S. 136-7. [46]. 전통적인 개혁주의 교의학은 하나님의 전능을 그의 세계창조와 세계보존 행위 속에서 발견하는데 반해,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무능 속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전능이 가장 명료하게 계시되었기에, 하나님의 전능은 일반적인 절대권능이 아니라 오직 삼위일체론적이고 기독론적인 능력, '구원의 능력(Heilsmacht)'이라고 바르게 주장한다.(KD II, I, S. 587-685) 특히 S. 681-685. 그러나 J. van Genderen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무능 속에서만 하나님의 전능을 발견할 수 있다는 바르트의 주장을 비판하고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이 고백하는 바, 세계창조와 세계보존의 행위 속에서도 하나님의 전능을 주장한다. 또 십자가뿐 아니라 부활에서도 하나님의 전능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본회퍼를 비판한 Van Ruler의 주장을 인용하여, 그는 본회퍼의 주장도 비판한다(J. van Genderen, Beknopte Gereformeerde Dogmatiek ,J. H. Kok, Kampen. 1989, S. 177-178) 그러나, 바르트와 본회퍼가 하나님의 전능을 십자가의 무능에서 발견한다고해서 창조세계 속에 나타난 일반적인 하나님의 권능을 부인한 것을 결코 아니다. 바르트와 본회퍼가 시도한 것은 일반적인 신의 전능과의 차별화를 위해서 철저하고도 급진적으로 기독론적으로 사고하고 표현한 것이다. [47]. O. Weber는 지적한다: "Die Bibel ist bezeichnenderweise im Gebrauch solcher mit 'All' und 'Un' gebildeten Wörter sehr sparsam...Das Hebräische besitzt für allmächtig kein besonderes Wort. Um so nachdrücklicher redet das Alte Testament von Jahwes konkreter Macht. Es spekuliert nicht darüber, was Gott kann, sondern es bezeugt, was er tut.", a.a.O., S. 485. [48]. "Die Gegenwart Gottes in dem Menschen Jesus Christus is nicht von der 'allgemeinen' Allgegenwart Gottes her zu verstehen, sondern umgekehrt ist Gottes Annahme auch der Räumlichkeit des Geschöpfs wie seine Herrschaft über diese Räumlichkeit nur von der 'Mitte' her zu sehen, die Jesus Christus heiß t...Seine Gegenwart gleicht nicht einem Kontinuum, sondern sie ist je kontingent. Sie ist nicht Gegenbenheit, sondern Ereignis." Ebd., S. 500-501. [49]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초월은 철학적, 인식론적 초월이라기보다는 구원경륜적, 계시적 초월이라고 보아야 한다. D. Bonhoeffer도 일찍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Das 'Jenseits' Gottes ist nicht das Jenseits unseres Erlebnisvermögens ! Die erkenntnistheoretischer Transzendenz hat mit der Transzendenz Gottes nicht zu tun"(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 1958, S. 182). 그러므로 deus absconditus도 철학 인식론적 차원에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적, 구원사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Der deus absconditus ist nicht ein überweltlicher, unbekannter Gott, sondern der Liebende, der Rettende(Jes. 45, 15)(Hans-Joachim Kraus, a.a.O., S. 189). [50] Gunton, ibid.,p. 170. [51]. Ibid. p. 171 ; "To relate rightly to other people is to intend them in their otherness and particularity, to allow them room to be themselves"(p. 172). [52]. "The doctrine of creation, trinitarianly conceived, enables us to understand the world als other than God, but as the product of a free act of creation and of a continuing free relatedness"(Ibid., p. 172). [53]. Y. Congar, a.a.O., S. 328. 성부와 성자와는 달리 성령은 성경계시에서 인격적 특징들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Vladimir Lossky는 이를 성령의 인격의 Kenose로 말한다. "Der Heilige Geist hat sich nicht in dem Person-Wort 'Ich' geoffenbart, wie Jahwe im AT und Jesus im NT"(H. Mühlen, Mysterium Salutis III/2, S. 514. [54] Moltmann, a.a.O.,S. 185. [55] Moltmann, Der Geist des Lebens -eine ganzheitliche Pneumatologie, S. 282. [56]Helmut Thielicke도 Pannenberg의 계시사건에 대한 `unbefangenen Wahrnehmung)'과 `voraussetzungsfreie Hinsehen-können'을 비판하고 <hermeneutik des="des" heiligen="heiligen" geistes="Geistes">를 강하게 내세웠다: "Der einzige, der Gott analog ist, ist Gott selber. Darum ist adäquate Gotteserkenntnis nur als das Wissen zu begreifen, das Gott von sich selbst hat: als seine Selbsterkenntnis(1. Kor 2,11). Hier setzt die Hermeneutik des heiligen Geistes ein: Allein "der Geist Gottes weiß, was in Gott ist"(1. Kor 2,11b); er 'erforscht die Tiefen der Gottheit'(2,10). In diesem Geiste vollzieht sich die Selbsterkenntnis Gottes", Helmut Thielicke, Der evangelische Glaube, Grundz ge der Dogmatik III. Band, Theologie des Geistes, J. C. B. Mohr (Paul Siebeck) Tübingen, 1978, S. 15. [57]. "Denn das testimonium Spiritus Sancti besagt, da Gott selbst es ist, der die M glichkeit schafft, sich erkennen zu lassen, und sich so f r den entbirgt, der aus eigenem Verm gen keinen Zugang zu ihm findet(1 Kor 2, 9f)", Helmut Thielicke, Der Evangeliche Glaube I, S. 538. "Gott wird nur durch Gottt erkannt. Das Gelingen dieses Unternehmens und also die Wahrhaftigkeit unserer menschlichen Gotteserkenntnis besteht darin, daß unser Anschauen und Begreifen zur Teilnahme an der Wahrheit Gottes durch Gott selbst in Gnaden aufgenommen und bestimmt wird(KD II/1, S. 200) [58] Kasper, a.a.O., S. 276 [59] Moltmann, a.a.O., S. 119. [60] Ebd., S. 227 [61] Kasper.a.a.O.,S. 244. [62] Moltmann, Der Geist des Lebens, S. 75. 그는 십자가 성령론의 성경적 근거로 히브리서 9장 14절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에서 찾고 있다. 로마군병이나 죽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있어서의 진정한 능동적 주체이시다(S. 76). 또한 예수 위에 임한 성령은 마치 구약의 야훼의 세키나가 임한 것과 같으며, 예수를 고난으로 `이끈' 성령은 예수의 고난에 동행하신 분이다(Leidensgeführten Jesus)(Ebd., S. 75). [63] Ebd., S. 84. [64] "Die Wechselbeziehung zwischen Pneumatologie und Christologie muß als ein grundlegendes Prinzip der christlichen Theologie angesehen werden." Ebd., S. 85. [65] "The Trinity has more often been presented as a dogma to be believed rather than as the living focus of life and thought"라는 Gunton의 지적은 이 점에서 적절한 것이다. p. 3. [66] Thomas F. Torrance, Trinitarian perspectives- toward Doctorinal Agreement, p. 116. [67] Kasper, a.a.O. S. 26 [68] Mysteria divinitatis rectius adoraverimus, quam vestigaverimus. [69] "But this very oneness is not a mathematical oneness, as Arius and Greek theology had taught, but a oneness consisting in the inseparable relation of Father, Son and Spirist, the three hypostases.", Colin E. Gunton, ibid., p. 9. [70] H. Ott, a.a.O., S. 335. [71] Kasper, a.a.O., S. 370. "Das trinitarische Dogma wurzelt in der doxologischen Antwort des Glaubens auf Gottes geschichtliche Heilstat in Jesus Christus durch den Heiligen Geist."(RGG, VI, S. 1031). [72] Erkennen nur in Anerkenntnis der Verborgenheit Gottes ! Congar는 Offenbarung als Verschleierung(occultatio)와 kenotischen Charakter der Selbstoffenbarung und Selbstmitteilung Gottes를 말한다(Congar, a.a.O., S. 327). [73] O.Weber, a.a.O., S. 444. [74] W. Kasper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명확한 삼위일체론 근거를 요한복음 17장의 예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발견한다. 요 17장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를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도 성령을 통하여 그 영화롭게 하심에 참여하게 된다(Kasper,. a.a.O., S. 370) </hermeneutik> [출처] 철저하고도 원색적인 삼위일체론적 신론(3)|작성자 더로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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