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분의 세계 - 삼위일체론적 존재론을 시도하며 –
본고는 제가 고신대학원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번역신학에 불과하지만, 다시금 보다 소화된 글로 끊임없이 완성하기 위해 올립니다. 앞으로 저의 논문은 지속적으로 수정, 보완되면서 성장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성장비타민이 될 것입니다. New 2000, 6, 10 update !!
들어가는 말
1992년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열린 지구 정상회의(The Earth Summit)의 The Global Forum은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로부터 온 메시지를 담은 모조 바이킹선의 도착으로 개막되었다. 그 배의 이름은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지구의 여신 가이아(Gaia)였다. 후기기독교 시대, 후기유신론 시대, 후기근대주의, 후기산업사회로 특징지워지는 20세기 후반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기독교적 전통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버리고, 성령을 망각한 채 고대 원시적 동양범신론에서 빛을 발견하고자 한다. 후기기독교 시대에 사는 세속화된 현대인들은 자신의 허무주의적인 영적인 갈증과 공허를 채우기 위해, 세계와 존재의 신비와 의미를 다시 찾기 위해, 극단적 서구개인주의 속에서 소외된 자신을 구원하고 극복하려고 공동체 의식과 연대감을 구하기 위해 다시금 종교적인 차원으로 복귀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이론적, 반항적, 실천적 무신론은 현대후기에 와서는 오히려 그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으며, 다시금 종교적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간다. 그러나 현대후기를 사는 많은 현대인들, 특히 서구인들은 자신의 기독교적 전통으로 복귀하지 않고 고대 힌두교적, 동양적 범신론인 대체적 영성을 찾고 있다. 많은 현대인들과 서구인들은 성령 하나님을 버리고 고대 그리이스의 여신 가이아에게서 지구공동체의 구원을 찾고 있다. 황혼으로 기울어간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서 해지는 땅 서구는 해뜨는 새벽의 동양에서 구원의 빛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열띤 논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현대후기는 정신사적 춘추전국시대와 공백기와 같다. 현대를 삼위일체론 후기시대(nachtrinitarisch)라고도 한다(F. Buri). 그러나 현대후기는 삼위일체론후기 시대라기보다는 유신론후기 시대이다. 후기기독교 시대의 세속화로 무너진 것은 이른바 기독교적 유신론, 유일신론이었지 성경에 자신을 계시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서구인들이 극단적으로 비판하는 기독교 하나님은 자신의 장대한 교회전통에서 때로는 헬라화되고, 철학화되고, 일반화되고, 통속화된 신이었지, 원색적이고 원래적인 성경의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니었다. 물론 우리는 동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서구화되고 헬라화된 복음이 아니라, 성경적 동쪽, 곧 구약 이스라엘의 원색적 히브리적 사유로 돌아가야 하고, 또 서구의 라틴화된 복음에서 교회사적 동쪽, 곧 동방교회에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극단적인 반작용으로 고대 흰두교적 범신론적 전통으로까지 나아갈 필요는 없다. 또한 동양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파악하여 서구전통에도 진리의 요소가 있음을 간과하는 극단성도 잘못이다.
본고는 후기유신론 시대와 후기기독교 시대라는 현대후기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삼위일체론의 재발견이라는 신학적 논의에서 출발하여 삼위일체론의 철학적, 사회학적, 세계관적 함의까지를 질문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본고는 신학적으로는 신관과 세계관 사이의 상관성을, 학문적으로는 신학과 철학과 사회학과 물리학 사이의 학제적 연구를 목표한다. 본고의 핵심되는 신학적, 신앙적 확신은 현대후기의 많은 시대적 문제들과 위기들의 궁극적인 해결책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이러한 확신하에서 삼위일체론적 답변을 제시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발트 카스퍼는 현대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답변으로서 삼위일체론을 제시했고, 위르겐 몰트만은 현대 악(惡)의 문제와 신정론(神正論)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전통적인 무감정적인 신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 고난당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답변으로 제시했고, 또 데카르트적 주객도식의 이분법과 연루된 전통적 기독교 신학의 유일신론을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통해서 신학적으로 반성함으로 현대 생태계 문제에 답변하려 했다. 본고는 이들의 논의를 수용, 평가하는데서 출발하여 그 외 현대 세계관적 논의로 확장시키고자 한다. 올바른 자기이해와 세계이해를 위해서는 삼위일체론적 이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기본전제이다. 포이에르바허의 명제를 뒤집는 반명제, 곧 신관은 세계관의 투영이라고만 볼 수 없으며, 오히려 세계관이 신학의 유비적 형태로 규정된다는 명제에 본고는 기초에 있다.
I. 잊혀진 삼위일체론의 재발견
1. 삼위일체론의 신학사적 고찰
1) 잊혀진 삼위일체론 그리고 잊혀진 테오로기아(theologia)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신학의 근본질문이다. "Credo in unum Deum"은 기독교 신앙전체를 농축하고 있는 크레도의 뿌리되는 신앙고백이다. 발트 카스퍼의 말대로, 20세기 후반의 정신사적 상황에서 볼 때 하나님에 관한 질문은 가장 핵심 되는 질문임에 틀림없다. 공산주의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는 좌초되었고, 종교비판의 완성으로 주장된 인간의 자기구원의 꿈도 침몰했다. 이제 더 이상 인본주의적인 무신론이 아니라, 허무주의가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적인 부정이 아니라, 사실상의 배부른 무관심이 20세기 후반 인류의 기본적인 태도다. 하나님에 관한 질문과 함께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질문도 진부한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상실의 징후다. 과학 기술적 휴머니즘과 철저하게 세속화된 세계 속에 사는 현대인에게 성(聖)삼위일체 하나님은 잊혀졌다. Colin Gunton은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복음의 정수(精髓)를 농축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문제로 간주하는 경향을 지적했다.[1] 이제 전통적인 하나님이해에 대한 새로운 재발견이 요청된다. 서구 형이상학적인 틀 안에서 개념적으로 파악된 최고 존재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살아 계신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찬양과 경배가 요청된다. 그러나 현대신학은 아우슈비츠의 이름으로 성삼위일체께 대한 송영을 잃어버렸다는 비판을 듣는다.[2] 거룩한 삼위일체론은 전체 교의학과 실제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생활 가운데 상당히 격리되어 논의되어서 그 역할에서 있어서 미미했다[3] 칼 라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도그마로서의 삼위일체론을 아는 정도일 뿐 실제에 있어서는 유일신론자들이라고 지적했다[4].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이고 원색적이고 성경적인 삼위일체 신앙을 통속화시켜 일반적인 신개념의 범주로 퇴색시켜 이해하고 있다. 전통적 예전의 아직도 강하게 보존되어 있는 유럽교회, 그것도 카톨릭 교인들이 사실상은 유일신론자라면 삼위일체론적 차원에 대한 이해가 희박하고 빈약한 한국개신교인들은 어떠하겠는가 ?
한국교회의 경우는 특히 교회와 신학, 예배의식에 있어서 삼위일체론적 전통이 상당히 약하기에 이런 일반적 경향보다 더 문제는 심각하다. T. F. Torrance는 오랫동안 서구교회에서는 삼위일체론적 찬송이 약했다고 지적함으로 교회예식적 차원에서의 삼위일체론적 관점의 퇴색을 지적한 바 있다.[5] 서구교회는 오랜 시간의 흐름 동안 교회가 본래 가졌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에 나타난 원색적, 고전적, 에큐메니칼적 삼위일체론적 의식을 많이 상실했고 또한 동방교회와의 단절로 말미암아 이는 더 가속화되었었다. 그러나 서구교회에 비하면 한국교회는 교회전통이 얕고 동방교회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 전수받은 교회전통도 19세기말의 영적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의 지배적 영향하에 있었기에 예배의식도 보다 풍요롭고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적 예배보다는 구원론중심적이고 복음전도중심적인 Frontier Worship이 지배적이었고, 찬송, 교회교육을 비롯한 전반적인 교회생활에서 삼위일체론적 색채를 매우 약하다. 한국교회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복음전도중심적이고 구원론중심적인 차원에서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과 경배의 삼위일체론적 차원으로 보다 성숙되어져야 한다. 육체와는 분리된 영혼만의 구원, 그것도 개인주의적인 영혼구원이 아니라, 만유 안에서 만유의 주로 계시는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순례의 궁극적인 목표다. 오이코노미아와(oikonomia)는 구별되는 테오로기아(theologia), 옛 초대교부들이 사용했던 신학의 원색적인 의미를 재발견해야 한다. 신학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자기계시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이다. 현대의 신학개념은 칸트적인 불가지론의 영향 아래서 하나님에 대한 존재 자체에 대한 관심 보다는 지나치게 세계와 인간의 현실로 그 관심을 도피시키고 있다. 진보적 그룹에서는 신학을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로 변모시키고, 많은 목회자들은 신학을 실용주의적인 목회경영철학으로 격하시키고 있다. 이제 다시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으로서의 고전적인 신학이해의 회복이 요청된다. 왜냐하면 성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회는 카톨릭 교회보다도 더욱 삼위일체론적 차원과 이해가 빈약하다. 부흥회 중심의 예배형식의 강한 영향으로 교회찬송에 있어서도 개인주의적인 회심, 구원에 관한 찬송이 지나치게 많고 삼위일체에 대한 경배와 찬양이 빈약하다. 교회력에 대한 이해도 빈약하고 그렇기에 유럽교회들처럼 삼위일체에 관한 절기설교도 전무하거나 빈약하다. 또한 많은 경우 삼위일체 하나님을 양태론적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이 분리되어져 이해되고 있다. ‘오직 예수’도 ‘성령운동’도 모두 삼위일체론적 차원이라는 전체 속에서가 아니라 일면적이고 파편적인 이해로 격리되어 있다. 성부하나님은 자주 일반적인 신으로 통속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구속사적인 내적연관에 대한 이해와 강조가 빈약하다. 이는 개신교 예배, 기도 등 교회생활 전반에서 노출되고 있다. 외국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이 그저 세례식과 축도 때에만 듣는 오래된 교회 도그마로만 이해되고 있다고 비판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러한 고전적인 삼위일체론적 지평 자체를 전승받지 못했다. 선교 100주년을 지나 새천년을 맞이한 한국교회는 이제 보다 고전적이고 깊은 삼위일체론적 차원의 재발견과 회복으로 성숙되어져야 한다. 한국 개신교회의 다수라고 할 수 있는 보수적 신학과 교회 못지 않게 진보적 진영에서도 삼위일체론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아직도 빈약하다.
포이어바흐의 주장처럼 우리의 하나님을 인간의 종교적 원망의 투영이라고만 볼 수 없다. 물론 그의 지적대로 실제로는 많은 경우에서 인간의 자신의 종교적 희망을 투사시켜 일종의 신을 제작해 낸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계의 투영이 아니다. 삼위일체론은 포이어바허의 주장처럼 인간의 상호주체성, 사랑이 투사되어서 나타난 환상이 아니다. 발트 카스퍼는 삼위일체론의 본질인 포이어바허의 주장처럼 인간의 공동체적, 사회적인 본질의 투영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바르게 지적한 바 있다.[6] 오히려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우리는 세계가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생명과 존재의 유비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포이에르바흐의 명제를 뒤집는 반명제도 성립한다: "세계관은 신관의 유비이지, 신관이 세계관의 투영은 아니다".[7] 본고의 핵심되는 이 중심명제는 그 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포이에르바흐의 투사이론, 신화이론, 실증주의자들의 과도한 단순화가 빚어난 왜곡된 결과들에 고통을 받아왔지만 이제는 신학적 요인들이 철학 뿐 아니라 예술과 과학까지 다양한 인간문화의 영역들에 매우 깊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과감하게 주장해야 한다는 Colin E. Gunton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다.[8] 전통적인 성경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서구정신사에 깊이 각인되어있는지를 강조한 군톤처럼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세계관적 동인과 영향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확신한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깊게 결정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깊이 조형되고 스며든 삼위일체론적 존재론[9] 혹은 삼위일체론적 세계관 혹은 삼위일체론적 패러다임(Philip Walker Butin)을 말할 수 있다. 칼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을 신론의 한 부분으로 다루지 않고 프로레고메나에 앞서서 다룬 이유는 하인리히 오토의 말대로 삼위일체론은 근본적인 신학적 해석학이기 때문이다.[10] 또한 삼위일체론은 현대에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론적 대안이다. 군톤의 용감한 주장처럼 우리는 삼위일체론적 존재론이 현대세계의 구원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참된 인간적 사회건설을 위한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비록 교회가 부르심에 종종 실패하기도 했지만,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유비로 세워진 교회는 오늘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끊임없이 상기시킴으로 보다 인간적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11]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지음을 받은 세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양식을 닮아야 한다.
삼위일체론은 정교하게 묘사되어야 할 하나의 논리적 수수께기에 불과한가 ?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적이어서 문화적으로 종속된 신학적 사고의 반영에 불과한가 ? 아니면 남성적 이미지를 신적인 영역에까지 투사시킨 서구인의 지성적 경향의 불운한 잔재인가 ? 아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인간(세계)의 관계를 유일하게 해명할 수 있는 기독교 신학의 유일한 근거와 문법이다.[12]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혁명이다.[13]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기독교 신론의 Proprium과 Specificum이다.[14]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난 하나님의 종말론적 계시에 대한 본질적이고 규범적인 해석이다.[15]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 전체의 존폐 여부가 걸려 있는 구원신비의 본질이자 요약이다. 삼위일체론은 모든 교의의 뿌리요, 새 언약의 본질이며 하나의 철학적 투영으로서의 형이상학적 교리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가슴이다.[16] 삼위일체 하나님은 구속사의 초월적 원근거이시다. 철저한 삼위일체론적 신학에서 출발하여 삼위일체론적 존재론 혹은 세계관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17] 삼위일체론적 사고는 니케아 신앙고백 이후 헬라철학적 존재론과 그 이후의 서구정신사에 있어서 정신사적 혁명과 존재론적 혁신이었다. 모든 것이 세계화되고 시장화되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마저도 소비자가 시장에서 상품을 취사선택하는 것처럼 되어버린 현대후기의 절대화된 종교다원주의 상황 속에서 교회는 시대정신에 패배할 것이 아니라 도전해야 한다. 그것은 영원부터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대한 재발견과 갱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장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야말로 가장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답변이다. 삼위일체론은 21세기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할 수 있다. 발트 카스퍼는 삼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은 이제 더 이상 기독교 신학의 두메산골이 아니라, 신학 전체의 문법으로 재발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8] 삼위일체론은 단지 하나님 자신에 대한 보충 혹은 추가적인 발전 혹은 요약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유일한 전제이다. 에벨링의 말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지식은, 곧 삼위일체론적 지식은 일반적 신론에 첨가된 교의 한 조각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참된 지식을 비로소 결정적으로 열어주는 것이다[19]. 삼위일체론은 일반적 유신론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본질, 곧 그 분의 심장과 가슴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에서 주변적이고 부적절한 의미만을 가진다는 과거의 오해는 반성되어야 하며, 삼위일체론적 관점의 혁명적 함의을 재발견해야 한다.
2)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의 삼위일체론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교회사적으로는 주후 325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에 와서 그 결정적인 형태를 가졌다. 주후 325년의 니케아 신앙고백은 구원론적 동기에 의한 성경적, 교회적 전통에 입각한 예전적 신앙고백이었다. 그것은 소위 헬라화 과정이 아니라, 기독교 복음의 탈헬라화였다는 카스퍼의 주장은 옳은 것이다[20] 아리우스는 전통적인 헬라철학적 존재론에 제한됨으로해서 새로운 존재론적 사고, 곧 관계와 교제 안에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했던 것이다. 기독교 복음을 헬라철학적 우주론과 도덕으로 해소시켜 부당하게 헬라화시켰던 것은 아리우스였다. 삼위일체론은 전통적 그리이스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혁신, 혁명, 도전이었다. 니케아-콘슨탄티노플 신앙고백은 바로 이러한 그리이스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초대교회의 승리였던 것이다. 몰트만은 아리우스주의를 하나의 신- 하나의 로고스- 하나의 세계- 하나의 세계통치라는 유일신론적 기독교의 전형이라고 보았다.[21] 그러나 아리우스에 대항하여 보다 성경적인 구원경륜에 충실한 아타나시우스는 구원론적 동기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호모우시아를 주장함으로 삼위일체론을 변호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 의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니케아 신앙고백에서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하나님되심은 고대교회의 구원론과 신격화로서의 구원(Erlösung als Vergöttlichung des Menschen)이라는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아타나시우스가 말한 인간의 신격화는 그것이 마치 인간의 마술적-물질적 변형와 약물학적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기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의 신격화는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 하나님 아들들로 되는 지극히 성경적 입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롬 8:14-17). 신격화는 비록 그것이 헬라적 세계관과 유사하게 들릴지라도 그 원천에 있어서는 지극히 성경적인 입장이며, 그 신격화의 과정을 통해서라도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는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카스퍼는 신격화를 물질적으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2] 'Synergeia'와 함께 θεοσια(신격화)는 동방정교회의 구원론에 핵심적인 개념이다.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신격화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성육신의 목표이다. 이는 또한 인간 존재의 목적과 의미이기도 하다. 신격화로 피조물들은 부름받았다. Georgij Florovskij는 말한다: "이 개념을 존재론적 범주로 파악하려고 한다면 혼란스러울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부들은 인격적인 개념으로 이를 이해했고 인격적인 만남의 비밀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신격화는 은혜에 의한 것이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분은 보존된다. 신격화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23] 영혼주의적인 구원개념, 개인주의적인 구원개념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한국교회, 특히 동양에 있으면서도 서구적인 한국교회는 동방정교회의 신격화로 정의되는 삼위일체론적 구원개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토마스 F. 토런스에 의하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은 본질적으로 4세기의 동방교회 신학의 작품이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은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인 신앙고백이었지만 이후 헬레니즘과 헬레화된 유대교의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의해 점차 퇴색되어갔다고 한다.[24] 카스퍼는 또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 작성 이후 점차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륜적 삼위일체론으로부터 독립해 갔으며, 그리하여 구원경륜적인 측면에서는 삼위일체론은 그 기능을 상실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25] 곧 경륜적 삼위일체론을 기초하고 확고하기 위한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실제에 있어서는 점차적으로 독립해가는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비록 니케아 신앙고백이 그 동기에 있어서는 구원론적, 성경적, 신앙고백적, 예전적이었지만, 호모우시아라는 형이상학적 본체개념을 불가피하게 사용함으로 성경적인 종말론적-구원사적 사고로부터 종종 사변적으로 이탈하게 되었다. 이 과정의 직접적인 결과는 니케아 신앙고백의 의도와는 반대로 성경의 하나님이 신의 불변성, 고난불가능성, 부동성이라는 헬라철학적 개념에 강하게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3) 어거스틴의 심리적 삼위일체론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은 교회사, 특히 서구신학사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후에 논의되겠지만 De Trinitate와 Civitas Dei는 당시 고대 그리이스-로마 문화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후 중세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분명 역작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삼위일체론에는 반성되어야 할 문제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현대 신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무엇보다도 Colin E. Gunton은 갑바도기아의 세 신학자들이 말한 헬라어 υποστασισ 의 의미를 어거스틴은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26]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이 질문했던 바와 같이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존재이신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 주어-서술어 논리학의 관점에서 한 분 하나님의 삼중성이라는 명백한 논리적 괴변을 어떤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그는 질문했던 것이다. 그는 세 위격 사이의 관계를 존재론적 술어로서가 아니라 계속하여 논리적인 것으로 사용하였기에 하나님의 전포괄적인 단일성 속으로 `개별적인' 세 위격들의 존재는 흡수되어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그에 대한 동정적 비판의 입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계시에 나타난 구원경륜보다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세 위격의 관계성에 의해서 비로소 구성되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세 위격을 지지해주는 한 미지의 본질로서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했던 것이다. 어거스틴 이후 줄곧 서방신학에서는 양태론적 위험이 있어 왔던 것이다.[27] Gunton은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에 흐르는 개인주의와 지성주의를 비판한다.[28] 이후의 Richard of St. Victor와 같이 삼위일체의 본질을 역사적인 '외적인` 구원경륜에서 계시된 관계 속의 인격들에 비교하지 않고 물질과 역사를 평가절하하는 지성주의적인 신플라톤 철학의 영향아래 한 개인의 내적인 인간영혼의 삼중성(memoria, intellectus, voluntas)에서 vestigia trinitatis을[29] 발견하려함으로 강한 개인주의와 지성주의의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30] 이러한 어거스틴의 심리적 삼위일체론을 반성하고 몰트만의 주장처럼 구원역사적 삼위일체론,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강조해야 한다.[31] 또한 칼 바르트의 말처럼 창조세계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vestigia trinitatis in creatura), 삼위일체 속에서 피조물의 흔적을 발견해야 한다(vestigia creaturae in trinitate)![32] 창조세계 속에 삼위일체의 흔적이 있다면 어거스틴의 주장처럼 인간지성이 아니라, 몰트만의 표현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보다는 단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개인주의) 하나님을 일차적으로 일종의 영원하고도 초월적 지성으로 보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삶을 주로 지식의 범주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지성주의). 또한 어거스틴의 amor개념도 성육신, 십자가, 부활이라는 구체적 구원경륜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희생적인 사랑, 곧 성육신적 사랑개념 보다는 플라톤의 Symposium의 사랑개념에 영향을 받음으로 성령의 위격적 독특성을 흐리게했다.[33]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의 아킬레스근(筋)은 성령론이다(Gunton). 그에게 있어서 신약성경에서 그렇게 명백한 성령사역의 종말론적 차원이 증발되었고 상당부분 제도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서방신학의 가장 불운한 유산 중의 하나가 되었다. 구원경륜에서 성령께서는 한 개인을 하나님께 관계시키는 것 뿐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종말론적 에온을 이 시간 속에 실현시키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의 종말론에는 이 차원이 결여되어 있으며 이는 현시대 속에서의 종말론적 삶의 역동적 실현 보다는 차안/피안의 정체된 이원론적 경향이 지배하고 있다. 이는 그가 성육신과 부활교리를 중요한 교리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신플라톤철학의 영향아래 성육신과 육체부활이 그다지 큰 결정적 구성적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방의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격적인 교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이해함으로 하나의 존재론적 혁명을 가져왔다.[34] 삼위일체론적 교의는 비록 신약성경의 삼위일체론적 공식의 전개에 있어서 유대교적 Triaden과 연결되고 헬라철학적 개념에 근접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결코 기독교 신앙고백의 이탈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구원론을 위한 보호로서 당시의 주변세계의 유행하는 표상들에 깊은 변혁을 각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에게 있어서는 한 하나님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은 부수현상 혹은 이차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35] 동방의 갑바도기아 신학의 영향을 아직도 강하게 지니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와 이에 강한 영향을 받은 인격주의적 러시아 전통 종교철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인격성을 매우 깊이 강조하며 연대성과 유대성을 강조한다. Solowjew, Berdjajew에 의해 사용된 중요한 개념 Sobornost(공동체성[36]”)은 러시아 종교철학의 핵심되는 용어이다. 어거스틴 전통의 서구신학과는 달리 동방의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적 색채를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의 이러한 사상은 서구적 사상과 정서의 결정적인 착오인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법제적인 서방교회와는 달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송영의 차원을 보유하고 있는 동방교회에 대한 재발견은 단지 에큐메니칼 운동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신학과 신앙의 차원의 회복을 위해서 절실히 요청된다. 특히 동양에 속하면서도 서구교회전통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아시아 교회들은 복음의 원색을 퇴색시키면서까지 세례받지 못한 전통문화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동양적 전통에 대한 교회사적 재발견을 통해서 토착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결코 서구화될 수 없는 한국인의 멘탈리티와 정서는 동방교회의 그것과 유사하다. 인종학적, 문화적, 지리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교회사적 전통에서만큼은 이질적인 동방정교회로부터 한국교회는 복음의 ‘동쪽’ 성격에 대해서 크게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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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einrich Ott는 삼위일체론이 비그리스도인인과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이해의 어려움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이해의 어려움은 다음의 세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3=1이라는 수학적인 모순이며 둘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이 근거하고 있었던 Substanz, Wesenheit, Person, Hypostase와 같은 존재론적 개념들이 현대에 와서는 의문시되었기 때문이며, 셋째는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Ansichsein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어떤 대상을 말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Heinrich, Ott, Wirklichkeit und Glaube II, Der persönliche Gott, Vandenhoeck & Ruprecht in Gö ttingen und Zürich, 1969, S. 333.
[2]. "Die Theologen, die im Namen von Auschwitz jede Doxologie ablehnen", Helmut Thielicke, Der Evangeliche Glaube, Grundzüge der Dogmatik, Erster Band, J.C.B. Mohr(Paul Siebeck) Tübingen, 1968, S. 318. 그러나 이 표현은 삼위일체께 대한 송영의 재발견을 강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신학의 정치적-사회적 차원을 비판하는 의미로 사용되어져서는 안된다. 현대신학은 아우슈비츠의 이름으로 성(聖)삼위일체께 대한 송영을 잃어버렸다는 지적은 몰트만에게서 해결되고 있다. 그가 신학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면서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경배와 찬양, 명상과 송영을 조화롭게 강조하고자 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몰트만의 십자가의 신학은 또한 <송영의 신학(Theologie der Doxologie)>이다(J. Moltmann, Trinität und Reich Gottes - zur Gotteslehre, Chr. Kaiser, München, 1986, S. 24). 몰트만에게서 행동의 신학과 송영의 신학은 공존하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해방의 신학 없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대한 송영은 존재하지 못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송영없이는 눌린 자들의 참된 해방도 있을 수 없다. 현대의 윤리주의와 실용주의로 말미암아 삼위일체론은 사실상의 윤리적 유일신론으로 해체되었다는 몰트만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는 지적이다. 몰트만에게서 우리는 십자가 고난과 송영이, 행동의 신학과 송영의 신학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그에게서 명상적 삶(vita contemplativa)과 행동적 삶(vita activa)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것이다(S. 23).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그동안 보수신학과 민중신학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사회적 신학 사이의 불필요한 갈등이 너무 많았다. 보수적 신학은 복음의 정치적, 사회적 차원을 재발견해야 하고, 진보신학은 신학의 송영적 차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삼위일체론적 신학은 결코 ‘거룩한 도그마’를 그저 재생산해내는 교회내적인 자기제한이 아니다. 해방신학자 Leonard Boff의 경우처럼 삼위일체론은 가장 진보적인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3]. Johannes Feiner und Magnus Löhrer, Mysterium Salutis - Grundriss heilsgeschichtlicher Dogmatik, Band II, Benziger Verlag Einsiedeln Zürich Köln, 1967. I. Die Isolierung der Trinitätslehre in Frö mmigkeit und Schultheologie( S. 319)를 보라.
[4]. Mysterium Salutis II, S. 319. "Durch all das kommt es, daß der Traktat über die Heilige Dreifaltigkeit im Gefüge der ganzen Dogmatik ziemlich isoliert dasteht. Man sieht seine Funktion im Ganzen der Dogmatik nur undeutlich.[4][4]. Johannes Feiner und Magnus Löhrer, Mysterium Salutis - Grundriss heilsgeschichtlicher Dogmatik, Band II, Benziger Verlag Einsiedeln Zürich K ln, 1967. I. Die Isolierung der Trinitätslehre in Frömmigkeit und Schultheologie( S. 319)를 보라. „ Es ist eben dauernd das Dilemma zu vermeiden: Entweder ist im durchschnittlichen religiösen Bewußtsein die eingangs dieses Abschnittes beklagte Abwesenheit der Trinität zugunsten eines starren, unvermittelten bloßen Monotheismus vorhanden, oder wo man sich anstrengt, die Wahrheit de Trinit ät zu realisieren, entsteht im religiösen Bewußtsein ein Tritheismus(S, 342). 몰트만도 이런 구분은 자연신학이 계시신학을 규정하게 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에 대한 과대한 강조와 아울러 삼위성을 일체성으로 환원, 축소하게 되어 결국 삼위일체론을 추상적 유일신론으로 해소(解消)시키게 된다고 비판했다(S, 33).
[5]. Thomas F. Torrance, Trinitaraian perspectives -toward doctrinal agreement, T&T Clark Edinburgh, 1994, p. 3
[6]. Kasper, ibid., 325.
[7]. 본인의 이 중심되는 테제는 Colin E. Gunton의 다음의 입장과 같은 맥락이다: "...will suggest the falsity of at least aspects of another fashionable doctrine, that gods are simply or mainly the projection of human needs and vaulues. The evidence I shall review suggests that the opposite also happens, and that our views of what is to be human are projected from what we believe about God", p. 86.
[8]. Colin E. Gunton, The promise of trinitarian theology, T&T Clark Edinburgh, 1991, p. 100.
[9]. Colin E. Gunton의 The Promise of Trinitarian Theology는 삼위일체론적 존재론을 시도한다. "The centre is to be found in a quest for ontology.. the doctrine of Trinity is crucial to ontology", Colin E. Gunton, The Promise of Trinitarian Theology의 서론에서 인용. 또한 Robert Jenson도 말한다: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s the creation of a new ontology of 'God' on the basis of the gospel."(Gunton, p. 132에서 간접인용).
[10] Heinrich Ott, a.a.O., 335.
[11] Colin E. Gunton, p. 172-3.
[12]. Philip Walker Butin, Revelation, Redemption, and Response - Calvin's Trinitarian Understanding of the Divine-Human Relationship,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5, p. 6.
[13]. Thomas F. Torrance은 Trinitarian Perspective, Toward Doctrinal Agreement의 서론에서 말한다: "For Judaism or for Greek Philosophy, and indeed for every religion apart from Christianity, God remains ultimately unknowable, the nameless, the incomprehensible one, who cannot be known in himself or conceived in his inner life. Hence the statements they make about God, as many modern philosophers would have it, are noncognitive, involving at best only borderline conceptions of God".
[14]. K. Rahner, Der dreifaltige Gott als tranzendenter Urgrund der Heilsgeschichte, in : Mysterium Salutis II, 317-397.
[15]. Walter, Kasper, Der Gott Jesu Christi, Matthias-Grünewald-Verlag, Mainz, 1995, S. 285.
[16]. H. Bavinck, Gereformeerde Dogmatiek, Uitgave van J. H. Kok Te Kampen, 1928, S. 300. K. Barth도 Bavinck의 이 본문을 각주에서 길게 인용하고 있다(KD., I, 1, S. 318).
[17]. 이는 Colin E. Gunton의 주장이다: "Theology is a trinitarian process, from the being of God through whom we are, to the articulation of the manifold relationship in which we have our created and redeemed being..Theology is the enterprise of thought which seeks to express conceptually and as well as possible both the being of God and the implications of that being for human existence on earth"(p. 6). 특히 Gunton의 다음의 말에 깊이 동의한다: "It is part of the pathos of Western theology that it has often believed that while trinitarian theology might well be of edificatory value to those who already believe, for the outsider it is an unfortunate barrier to belief, which must therefore be facilitated by some non-trinitarian apologetic, some essentially monotheistic natural theology. My belief is the reverse: that because the theology of the Trinity has so much to teach about the nature of our world and life within it...In the light of the theology of the Trinity, everything looks different"(p. 7).
[18] Kasper, a.a.O., 9.
[19]. "Die Gotteserkenntnis, wie sie in Jesus Christus gegeben ist, betrifft also nicht ein bestimmtes zusätzliches Lehrstück zur allgemeinen Gotteserkenntnis hinzu, sondern eröffnet überhaupt erst wahre Erkenntnis Gottes und des Menschen", G. Ebeling, Luther : Einführung in sein Denken, J. C. B. Mohr (Paul Siebeck): Tübingen, 1981 S. 269).
[20] Walter Kasper, a.a. O., S. 227. Colin E. Gunton도 말한다: "The Arian objection to classical christology is that it violates sacred and tradtional ontology and divides up the being of God. Arius' definition of God, with its repeated 'alone', is essentially non-relational..By insisting, to the contrary, that God is eternally Son as well as Father, the Nicene theologians introduced a note of relationality into the being of God: God's being is defined as being in relation. To the Cappadocian theologians can be credited a further stage in the process. As a result of their attention to the character of the Holy Spirit, the intellctual revolution was consolidated. God is being in communion."(p. 8-9).
[21] Jürgen Moltmann, Trinität und Reich Gottes - zur Gotteslehre,Chr. Kaiser, München, 1986,S. 149.
[22]. Kasper, a.a.O., 229.성령론적 신격화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는 참된 하나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에 성령론적으로 참여함으로 가능하다: "Die Gottebenbildlichkeit des Menschen ist dann Teilhabe an der Gottebenbildlichkeit Christi in Gnade und Glaube. Indem er Christus nachfolgt, wird er der in Christus offenbaren Ebenbildlichkeit durch das Pneuma teilhaftig(2 Kor 3,18) und dem Bild des Sohnes gleichgestaltet(R m 8,29)..Die Gottebenbildlichkeit des Menschen zielt immer schon auf die gnadenhafte Gemeinschaft mit dem dreifaltigen Gott(Mysterium Salutis 2. S. 808).
[23]. "Sie ist diese innere Begegnung des Menschen mit Gott, in der die ganze menschliche Existenz sozusagen von göttlicher Gegenwart durchflutet wird. Die Vereinigung, zu der wir berufen sind, ist weder eine hypostatische, wie die der menschlichen Natur Christi, noch eine wesenhafte wie die der drei göttlichen Personen; es ist die Vereinigung mit Gott in seinen Energien, d.h. die Vereinigung durch die Gnade, die uns Anteil an der göttlichen Natur verleiht, ohne daß unser Wesen dadurch das Wesen Gottes würde", Karl Chistian Felmy, Orthodoxe Theologie der Gegenwart : eine Einfü hrung,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Darmstadt, 1990, S. 142.
[24]. Thomas F. Torrance, ibid., p. 2-5.
[25] Kasper, a.a.O., 318.
[26]. Colin E. Gunton, ibid., p. 29. 이는 어거스틴의 말 "Dictum est tamen tres personae non ut illud diceretur sed ne tacertur"(V.10, CF VII. 7)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침묵하지 않기 위해 세 위격이란 표현을 사용한다는 그의 말은 지나치게 불가지론적이며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이 hypostasis라는 개념을 통해 이룩한 보다 긍정적으로 건설적인 new ontology, conceptual revolution에 상당히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p. 40).
[27]. "..owe more to neoplatonic philosophy than to the triune economy, and that the outcome is, again, a view of an unknown substance supporting the three persons rather than being constituted by their relatedness. The true ontological foundations of the doctrine of the Trinity, that is to say, are to be found in the conception of a threefold mind and not in the economy of salvation"(ibid., 43).
[28] Colin E. Gunton, ibid., p. 29
[29]. Vestigium trintatis에 대한 논의들은 결코 엄밀한 의미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증명(證明)이 될 수 없고 단지 삼위일체론적 신앙고백을 전제한 후의 예시(例示)(eine das Triniätsbekenntnis voraussetzende nachträgliche Illustration)>로 봉사할 뿐이다(Kasper, a.a.O., S. 326, 332; K. Barth, KD 1/1, 352-367). 그것은 세계로부터, 특히 인간으로부터 삼위일체론을 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인간의 인식과 사랑의 모델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참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은 어거스틴에게서처럼 인간(영혼)이 아니라, 참된 하나님이자 참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Kasper, a.a.O., 333). 그러나 창조세계가 존재론적 의미에서 삼위일체론적으로 창조되고 구성되어졌다면, 세계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 그 분의 세계가 그 분을 따라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는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과 함께 그 분의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탐구를 시도하는 것이다.
[30]. "The crucial analogy for Augustine is between the inner structure of the human mind and the inner being of God, because it is in the former that the latter is made known, this side of eternity at any rate, more really than in the 'outer' economy of grace"(Gunton, ibid., p. 45).
[31] Jürgen Moltmann, a.a.O., S. 174
[32]. "Vestigia trinitatis in creatura sagte man und meinte doch vielleicht eigentlich vielmehr so etwas wie vestigia creaturae in trinitate -natürlich in der sich offenbarenden Trinität, in der Trinität, sofern sie kreatürliche Gestalt annimmt ; nicht traute man es den Dingen zu, daß ihnen die Trinität immanent sei und daß sie die Eigenschaft hätten, die Trinität widerspiegeln zu können", Karl Barth, Kirchliche Dogmatik, I/ 1, Theologischer Verlag Zürich, 1981, S. 360.
[33] Gunton, ibid., p. 50-51.
[34]. "The conceptual and ontological revolution achieved by the Cappadocians is that God is as he is made known by the Son and the Spirit: he is other -distinct- in person, to be sure, but not in being as God - for he is made known as he is"(Gunton, ibid., p. 54); "Augustinain conceptions of the Trinity is modalist in direction, if not actually modalist, in the sense that the three persons of the Trinity tend to be conceived as posterior to an underlying deitas or being of which they are, so to speak, outcrops. By contrast, the Cappadocian development, which Augustine so signally failed to appropriate, is that there is no being anterior to that of the persons. The being of God is the persons in relation to each other."(ibid., p. 74).
[35] Ibid., p. 53.
[36]. "이런 상호연대성은 세속적, 일상적 상호연대성과는 그 뜻이 사뭇 다르다. 그것은 상호간에 종속되어 있다든지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각 개인도 내적으로 자유롭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순수히 인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각 인격체들간에 자연적인 조화가 있음으로써 마치 오케스트라단이나 합창에 비유될 수 있다.", 전광식, 마르크스 이후의 철학 , p.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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