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4장 강해
Ⅰ. 들어가는 말
마태복음 24장은 종말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장은 종말에 대한 모든 예언들이 농축되어 있기에 흔히 마태복음 24장을 다 해석하면 종말론에 대해서 다 논하였다고 할 정도이다. 그뿐 아니라 본문은 다니엘서의 핵심적인 부분과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또 요한계시록과도 관계가 있다. 이 렇게 본문이 담고있는 내용의 중요성과 또 종말론에서 차지하는 본문의 위치가 큰 것에 비해 한국교회 에서는 본문이 다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또 너무 쉽게 해석되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본문을 해석할 때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이 본문이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인지 아니면 세상 종말에 관한 예언인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다니엘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특히 다니엘 9장을 예수님 초림에 관한 것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적그리스도로 볼 것인지) 이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의 많은 예언들을 종말에 있을 역사적 사건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영적으로 교회에 이루어진 사건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와도 결부되었다고 생각된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관례에서는 본문이 세상종말에 관한 예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알버트 슈바이쳐(A. Schweitzer)등의 ?임박한 종말론(the imminent eschatological sayings of Jesus)"가 대두되면서부터(Schweitzer, 1954:357ff)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문을 예루살렘 멸망을 겨냥한 임박한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보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계약신학자들 가운데 세대주의자 들의 종말론적인 사고방식을 반박하기 시작하면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가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위해 주어졌는지 아니면 세상 종말에 관한 것인지 또한 두 사건의 관계는 어떠한지를 살피며 또 우리는 세상종말에 관한 예언 들이라면 어떠한 일들을 예상하면서 준비해야 할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Ⅱ. 감람산 강화의 도입
1.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마23:29-39)
감람산 강화는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다. 주님께서는 성 전에서 일곱번에 걸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셨다. 29절에는 그들이 옛 순교당한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만약 자기들이 옛 시대에 살았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조상의 양(量)을 채우라?고 직설적으로 말씀하셨다. 즉 조상부터 하나님의 종들을 죽여 온 그 숫자를 이제 마지막 선지자까지 죽여서 채우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매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구박하리라?고 꾸짖으신다(34절) 주님의 말씀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고?는 주님 자신의 죽음을 연상하여 하신 말씀이며 회당에서 구박하는 것은 예 수님의 제자들을 유대인들이 핍박할 것에 대한 예언적인 말씀으로 볼 수 있다.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까지의 피의대가를 이제 마지막 피의 양을 채울 그 세대에게로 돌아갈 것이다.(35-36절)
37-39절은 그 앞절들과 연관되는 말씀이다. 37절에서 주님은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것을 탄식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그들의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될 것이다. 이어서 주님은 자신의 운명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39절) 여기에서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동안 보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시고 얼마 뒤에는 다시 오실 것임도 말씀하셨다. 지금은 백성들이 주님을 배척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백성들이 자신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찬송 하면서 맞이할 것이다. 이때 주님이 가신 뒤 다시 오심은 오순절날 성령강림으로 오시는 것을 의미하는 지 아니면 마지막 종말의 재림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인지를 분별해야 할 것이다.
주님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라고 말씀하셨다.(요14:18-19) 이것은 성령강림으로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임재를 의미함이 분명하다. 이 구절을 근거하여 어떤이는 마태복음 23장 39절의 주님이 오시는 것도 영적인 임재로써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루어 졌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으로 볼 때에 이것은 불가능하다. 본문은 현재 주님이 배척당하고 있음을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 결과 예루살렘성이 무너지는 형벌을 당할 것이다. 그런데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사람들이 주님을 참 메시야로 영접할 것이다.
오순절에는 이와같이 현재 배척하던 사람들이 주님 오심을 보면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환영하였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의미함이 분명하다.(Hendrickson, 1973: 8f 참조) 본문은 예루살렘 멸망과 주님의 재림이 함께 어울려져 있다.
2. 성전에 대한 제자들의 자랑과 예수님의 대답
마태복음 24장의 감람산 강화는 23장의 마지막과 연관성이 있다.(23장에서 이미 예루살렘 멸 망과 주의 임하심이 말씀되었기 때문) 본문은 성전에서 나오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성전건물을 가리켜 보이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제자들은 거대하게 자리잡고 아름다운 돌과 재료들로써 꾸며 진(눅 21:5)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에게 자랑한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 들이 어떠하니이까?(막13:1) 그러나 예수님이 보는 그 건물에 대한 견해는 제자들과 달랐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 오히려 예수 님은 제자들의 근시안적인 눈 즉 외형만 보고 그것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는 그들의 태도를 꾸짖으신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마24:2)
성전을 바라보며 자랑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는 더욱 침울해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의 마음에는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과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과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실 것에 대한 말씀으로 번민이 가득하였을 것이다. 감람산에 올라 갔지만 제자들은 제대로 기도를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조용히 주님에게 나아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질문하였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 에 이런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마24:3).
3. ?주의 임하심 (parousia)"과 ?세상 끝?
제자들의 물음은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라고 시작한다. 이런 일은 성전이 무너지는 것과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제자들은 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주님의 임하심?을 ?세상 끝?으로 이해하였고 이 때를 알 수 있는 징조를 묻는다. 제자들이 왜 ?예루살렘 멸망?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을 한꺼번에 보았는가? 제자들의 이와같은 인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당시 쿰란 문서들과 유대인의 묵시적 문학작품에서 나타나는 유대인들의 종말론적인 사상들을 이해해야 할 것이 다
1) 제자들의 이해 배경
세상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구원을 그리는 긴박한 종말론적인 사상은 당시의 쿰란공 동체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지막 세대에 살고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과 세상종말을 예언하고 있다.(Lasor, 1972: 93ff 참조 특히 ?War Scroll?(1QM)에서는 벨리알을 대장으로 하는 악의 무리들과 미가엘이 인도하는 하나님에 속한 무리들의 전쟁을 묘사 하고 있으며 이 종말적인 전쟁의 결과는 하나님의 통치가 확립됨으로써 끝이난다(1QM 17:5-8). 4QAmram(b)은 어둠의 왕자로 불리는 멜기레사와 빛의 왕자(본문이 파괴되어 그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와 싸우는 전쟁이 묘사된다. 11QMelchizedek은 ?War Schroll?에서 나타나는 미가엘의 위치에 멜기세덱을 대신하여 놓고 마지막의 전쟁과 심판을 그리고 있다.(한정건 1986: 156ff 참조).
쿰란공동체는 지상에서 악한 무리들이 선한 무리들(쿰란의 사람들 스스로를 지칭함)과 전쟁하는 역사적인 사실을 승화시켜 적군들을 벨리알과 같은 악령 세력의 종들로서 묘사하며 자신들을 도우는 영물로 서는 천사들을 채택하고 있다. 결국 종말에 있을 전쟁은 하늘세력들의 전쟁으로 연결되어 천사장이 그 들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를 이루어 줄 것을 기대한다. 쿰란공동체는 자신들이 벨리알 즉 악의 세력이 통치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1QS 2:19; CD 12:23; 1QM 14:9; 11QMel 2:4) 하나님께서 잠시동안 벨리알이 왕성하도록 허락하셨다. 어두움의 아들들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자기들의 승리를 기대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이 천사장 미가엘 혹은 멜기세덱을 보내어 그들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한다.(한정건, 1986:158) 특히 11QMel에서는 멜기세덱이 희 년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을 압제자로부터 구원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업을 돌려주며 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러 올 종말론적인 왕(왕적인 메시야)으로서 그려지고 있다.
쿰란외의 1세기 전후의 유대인 문학작품에서도 천상의 존재로서 세상을 심판할 메시야적인 묘사는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비유(Similitudes 에녹 1서 37-71), 에즈드라스 2서, 그리고 바룩 2서 등에서는 종말론적인 메시야를 ?인자(the son of man)" 또는 ?사람과 같은 이?라고 불리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의 책들에서는 ?인자?는 처음부터 계셨으며 지금은 숨겨져 있으나 앞으로 세상의 마지막에 나타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분으로 묘사된다.(Mowinckel 1955 참조) 특히 에녹 1서 37-71장에서는 ?인자?가 구름을 타고와서 악한 무리들을 심판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Vermes, 1978 참조)
그당시 제자들의 주위에는 이러한 종말적인 사상이 만연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자주 이와 비 슷한 종말적인 말씀을 해왔음을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9장 28절에 주님께서는 멜기세덱 혹은 에녹서에서의 ?인자?와 같은 심판자로 보좌에 앉으신 모습과 왕국과 승리를 자기의 백성에게 주는 것 을 묘사하고 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태복음 16장 27-28절은 가장 확실한 종말적인 말씀으로 여겨진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대로 갚으리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중에 죽기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cf 막9:1)
결론적으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종말론은 보편적이 사상이었다는 점과 또한 예수님께서도 종말적인 말씀을 해왔음을 볼 때에 제자들이 종말적인 사상에 익숙해 있었으리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도(마20:21) 그들의 종말적인 인식을 단편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하겠 다 이러한 것들이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의 멸망은 세상 끝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주의 강림?으로 연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그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만 연하고 있던 선입관념에서 나온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수 정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요청한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2) 파루시아 (Parousia, Παρουσια)
어떤 학자들은 본문에 언급된 파루시아(Parousia, Παρουσια, 주의 임하심)는 예수님의 재림이 아닌 영적인 강림(즉 오순절의 성령강림)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cf Oepke, 1986:864f; BeasleyMurray, 1954: 167f; idem, 1978:565ff; De Young, 1960:93f; France, 1971:229ff). 그들의 주장은 마태복음 24장이 전적으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어서 ?파루시아? 용어 자체가 가지 는 의미를 재림과 특별히 연관시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용어가 성경 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재림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헬라어 파루시아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presence(being there)?혹은 ?coming?의 뜻을 가졌다. 또한 그 당시에 전문적인 용어(technical term)가 사용될 때는 ?왕이나 통치자가 자기의 통치 지역에 도착하는 것?을 위해 사용된다.(Braumann, 1976:900) 신약성경에 사용되는 경우 동사형의 ?pareimi?는 ?함께있다.? 혹은(너희에게로)?가겠다.?등으로 사용된다.(고전5:3; 고후10:2, 11; 11:9; 13;2, 10; 갈4:18, 20; 요11:28; 행10:33; 24:19; 계17:8등등) 명사 ?파루시아?가 신약성경에 사용된 횟수는 총 24회로 열네번은 바울이 사용했고(고전15:23; 16:17; 고 후7:6f; 10:10f; 빌1:26; 2:12; 살전2:19; 3:13; 4:15; 5:23; 살후2:1, 8f) 마태복음 24장에서 네번 그리고 나머지는 공동서신들에 나타난다(행5:7f; 벧후1:16; 3:4, 12; 요일2:28)
이 가운데 바울이 자신과 그의 동료들에게 사용할 때는 ?함께 있다.(presence)" 혹은 ?도착(arrival)"의 의미로 사용하였다.(고전16:17; 고후7:6f; 빌1:26; 2:12) 그러나 예수에게서 파루시아가 사용되는 모든 경우에는 임박한 그의 ?강림?을 기대하면서 사용되었다.(살전2:19; 3:13; 4:15; 5:23; 살후2:1, 8; 고전5:23; 약5:7f; 벧후1:16; 3:4, 12; 요일2:28 등, Braumann, 1976:900). 서신들에서 이 용어가 사용된 모든 경우의 예수님의 ?강림?에 대한 고대는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함이 명확하다.
우리는 파루시아가 유일하게 네번 나타나는 마태복음 24장에서 과연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 용어가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재림의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 27절에 나타나 는 파루시아는 ?인자의 임함?이 골방이나 들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인자의 임함?은 29절이하에서 자세히 묘사되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절) 이러한 문맥에서 볼 때 본문 27절의 ?인자의 임함?은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함이 명확하다. 다음으로는 37절과 39절에도 파루시아가 사용되었다. 37절은 ?인자의 임함?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임을 경고하였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경고임이 분명하다. 39절이하는 ?인자의 임함?을 두사람 중에 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을 것을 예를 들어 말한다. 이것도 재림때의 현상이 분명하다.
42-44절은 갑자기 임할 인자에 대한 예가 도둑의 비유로써 계속되어진다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어느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또 45-51절의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 유도 주의 강림하실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깨어서 기다릴 것을 경고한다. 이상의 비유들은 모두 주님의 재림에 대한 교훈이 틀림없다. 따라서 마태복음 24장에 나타나는 네번의 경우 가운데 세번에서 파루시아는 예수님의 재림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한 단원에서 모든 경우에 다 그것이 주님의 재림을 의미한다면 다음에 도입된 파루시아도 재림을 의미 한 것은 당연하다.
3) ?세상 끝?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듣고는 이를 ?세상 끝?으로 이해하면서 예수님에게 그 징조에 관하여 묻는다. 어떤 학자들은 파루시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사용된 ?세상 끝?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끝으로 보지 않고 ?한 세대(구약의 세대)의 끝?으로 이해하려고 한다.(BeasleyMurray, 1954:167-169) 그들은 마태복음 24장은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거절한 죄악으로 그들에게 심판을 경고하며 오순절을 통한 성령강림을 약속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세상 끝?의 술어가 24장 안에서는 유일하게 14절에 나온다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 구절에 대해서도 보에스마 등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에 적용시키려고 애쓴다 그는 당시의 사람들은 ?온 세상?을 로마의 세계 즉 지중해 연안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각 지역의 사람들이 모였고 이들을 통하여 복음은 주후 70년 이전에 당시의 ?온 세상?으로 전파되어 본문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한다.(Boersma, 1978:79, 1078). 그리고 바울이 스페인을 방문하고자 한 것은(롬15:23, 24 이 복음이 ?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함을 이루기 위함이었고 또 이것이 이루어진 때는 약 주후 66년경이었으므로 이것으로써 마태복음 24장 14절이 성취되었다고 주장한다.(Boersma, 1978:79)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스페인까지 갔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복음이 세상 끝까지 다 증거되었다고 확인해 준 사실도 없다. 혹시 바울 자신이 스페인에 가서 복음전파의 완성을 이루려는 욕망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바울은 로마에서 마쳐야 되며 복음 전파의 완성은 앞으로의 세대들에게 넘겨주셨음이 사도행전의 끝에서 분명히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 헨드릭슨은 모든 민족과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몇 달 몇 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수백년 이 상의 오랜 기간이 걸리는 것이 사실이라는 견해를 밝힌다. 그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세상의 역사 가 끝나는 것은 복음이 온 세상으로 전파되어야함을 전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Hendrickson, 1973:854) 박윤선 박사도 이 부분을 세상의 종말로 본다. ?이것을 유대민족의 말로(예루살렘의 멸망)에 앞서 복음이 모든 나라민족들에게 전파되리라는 의미로 보는 학자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세상의 종 말에 앞서 복음이 세계 만방에 전파될 것을 가리킨 듯하다.?(박윤선, 1964:725)
마태와 누가가 그들의 복음서들을 기록한 것은 이미 오순절이 지났고 또한 주후 70년이 지난 뒤임 이 분명하다. 만약 3절의 ?주의 강림?과 ?세상 끝?이 오순절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면 복음 서 저자들이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하여 썼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들이 주님의 감람산 강화를 기록하는 목적은 이미 이루어진 것에 대한 진술보다는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한 세상 마지막의 징조를 주기위해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McNeile, 1980:344 참조) 우리들은 ?세상 끝?이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영광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고 택한 자들을 모은 것으로(24:29-31)이루어질 것임을 확신한다.
결론으로 감람산 강화는 예루살렘 멸망으로부터 시작하나 예수님의 재림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를 단순히 오순절과 주후 70년의 사건만으로 한정시키려는 시도는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마태복음 24장은 분명히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자료들도 포함하고 있겠지만 이 장의 궁극적인 목적은 주님의 재림때에 관한 징조를 주기 위함이다.
Ⅲ. 미혹에 대한 경고 (4-6절)
제자들의 마지막 때 징조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들이 미혹을 받지 말 것을 경고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와서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미혹할 것이다. 난리(전쟁, 재난 등)의 소문이 퍼질 것이나 그러나 아직은 마지막 때가 아니므로 미혹받지 말라고 하신다. 이 주님의 경고는 아이러니 컬하다.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나는 것이 말세의 징조가 되나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전쟁과 재난 등이 일어나서 사람의 마음들이 동요할 것이며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더라도 아직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고가 주어진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지금이 바로 주의 강 림하실 때라고 영으로 말로 혹은 편지로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 려워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누가 어떻게 말하여도 미혹당하지 말라고 한다.(살후2:1-3)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라?(3절) 이 불법의 사람은 거의 모든 주석가와 성경사전들이 적그리스도로 간주한다. 4절은 이 불법의 사람(적그리스도)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칭하며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경배를 받는 다 바울은 이러한 일이 ?나타나기 전에는?주의 강림이 이르지 아니할 것이니 미혹함을 받지말라고 경고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교훈과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24장 4-6절도 미혹당하지 않도록 경 고를 준다. 많은 재난들과 난리들이 일어나며 이로 말미암아 주님이 강림할 때라는 소문이 난무할 것이다. 특히 거짓 그리스도들이 나타나서 미혹하는 일들이 허다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때는 아니므 로 성도들이 미혹을 당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러한 경고를 주고 난 이후에 주님은 마지막에 대한 징조를 주심을 우리는 유의해야 할 것이다.
Ⅳ. 마지막 때의 징조 (7-14절)
1. 하늘과 땅의 큰 징조들(자연계가 주는 징조)
구약과 신약에서 나타나는 종말론의 묵시적인 묘사(apocalyptic descriptions of eschatology)에서 흔히 등장하는 것이 지진과 하늘의 징조들이다. 구약에서부터 나타나는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은 자기 백성에 대한 구원과(사29:6; 35:4; 59:40; cf 사11:11-16; 렘33:16; 욜3:16-21; 미5:7-8) 악한자들에 대한 심판의 날이다.(사2;12-21; 26:21ff; 64:1ff; 암5:18-20; 습1:7, 14; 욜2:10-11; 3:11-15; 슥3:8; 14:3 등). 그런데 이것은 빛이 없는 어두움의 날로 묘사된다.(암5:18; 욜2:2; 암8:9; 욜2:10, 31; 3:14, 15; 슥14:6f) 이 두려운 심판의 날에는 하늘에 징조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지진으로 징조를 보일 것 이다.(사2:10; 3:16; 암8:8; 슥14:4ff)
마태복음 본문은 지진이 먼저 징조로 주어지며(8절) 그리고 하늘의 징조도 말해진다 ?그날 환난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고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29-30) 계시록에도 자주 이러한 징조들이 나타난다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떨 어지는 징조와 함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의 심판이 시작될 것이다.(계6:12-17) ?번개와 음 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을 것이다.(계16:17-21; cf 11:13)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마지막 주의 날에 하늘에서 해가 어두워지는 것과 또 땅에서는 지진이 징조로 주어지며 이 두개의 징조들은 하늘과 땅에 대한 심판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2. 네가지 환난
자연이 보여주는 징조 외에 땅위의 사람들(특히 성도들)이 당하는 재난도 마지막 때의 중요한 징조로서 말해진다. 이는 곧 전쟁 기근 온역(눅 21;11)과 성도의 옥에 갇힘이다.(7-9절) 요한계시록 6장 3-11절에서도 붉은 말(전쟁), 검은 말(기근, 5-6절), 청황색 말(질병) 그리고 짐승에게 성도들이 죽임을 당하는 네가지 재앙들이 나타났다. 마태복음 본문에서 네가지 재난들 가운데 성도의 환난에 제일 큰 관심이 모아진다 8절의 ?전쟁 기근과 지진 쩔 들이 있으리니 이 는 재난의 시작이니라?(8절)라는 말씀에서 볼 때에 앞의 세가지의 것들은 제일 큰 재난인 마지막의 것을 알려주는 전초전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 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9절) 박윤선 박사는 이 재난들은 ?아직 세상 끝의 징조는 아니고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징조가 될 뿐이다. ?라고 하며 또 신자들이 핍박을 받는 것도 ?역시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징조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전쟁 기근 환난 등은 예루살렘 멸망 때에도 있었던 일들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요한계시록에서 네가지 징조가 나타나고 있으며 또 종말에 대한 많은 구절들에서 성도가 받는 환난이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관한 징조로 주는 이러한 재난들이 예루살렘 멸망 때에만 한정되고 마지막과 관계없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박윤선 박사 자신도 14절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은 세상 끝의 사건으로 본다. 한 문맥 안에서 성도의 환난은 세상 끝 의 사건이 아니고 복음이 증거되는 부분을 세상 끝의 사건으로 말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라고 생각된다.
29절이하는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하늘에서 징조가 있고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시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이것은 분명히 주님이 재림하시는 모습이다. 주님의 재림이 ?그날 환난 후 즉시?라고 묘사된 것은 ?환난?이 마지막 때에 있을 것임을 말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3. 성도의 배교
마지막 때에 성도들은 서로 미워하고 잡아 넘겨주며 배교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11절; cf 살후2:3) 교회 안에서도 불법이 성하고 사랑이 식어질 것이 예상된다.(12절) 이러한 배교의 행위는 다니엘서에서 적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사용된 안티옥커스 4세(Antiochus Epiphanes) 때의 사건에서도 잘 묘사되고 있다. 안티옥커스 4세가 이집트를 향한 2차 원정에서 로마군대의 방해로 퇴군해 오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을 때 거룩한 언약(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반하는 자들을 앞세워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단11:30) 온 유다 땅에 유대종교를 멸하려고 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적그리스도는 종교적인 활동을 한다. 그는 자존하여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 할 것이다.(살후2:4; 계13:15) 이러한 종교적인 활동은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천군천사들을 훼방하면서 이루어질 것이며(계13:6; 단7:25) 그러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종교를 방해하여 성전에 가증한 우상을 세울 것이다.(마24:15; 단9:27; 11:31; 12:11)
이러한 때 일어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교회안의 일부가 적그리스도의 앞잡이가 되는 일이다. 그들은 참 신앙인들을 잡아 세상 관원들에게 넘겨주는 일까지 할 것이다.(마24:10) 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서 어떻게 하든지 남은 성도들을 미혹하려고 애쓸 것이다.(11절) 거짓 선지자는 이 적그리스도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그에게 경배하도록 할 것이다.(계13:11-18)
4. 마지막 때에 선교의 사명
본문은 이 마지막 때에 성도들이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하는 선교의 사명을 일깨워주고 있다. 마가 복음의 기록에서는 성도들이 환난 가운데 복음을 증거해야 할 것이 특별히 명시되었다.?너희가 관장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저희에게 증거되려함이라?(막13:9하)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고 물었을 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때와 기한은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제자들이 가진 이스라엘 나라 의 회복(즉 하나님나라의 완성으로 이해됨) 그 자체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때?는 지금이 아니라 지금은 성령의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할 때임을 말씀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먼저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어야 함을 시사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능력을 입어야 함은 환난 가운데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임도 그 이유가 있다고 할 것이다. 누가복음 22장 35-38절에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전대와 의복 과 검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 제자들은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기?때문이다.(37절) 예수님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복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대접받으면서 증거될 수가 없을 것임을 지적하는 말씀으로 여겨진다 특히 ?칼을 준비?해야 되는 것은 그들에게 닥칠 환난을 예상케하는 말 씀이다. 제자들은 옥에 넘겨지고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해야 되는 사명을 부여받았 다 이러한 핍박과 복음증거의 사명은 주님 재림이 임박한 때에 절박하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 또 특히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어려움 중에서 중에서 복음증거를 위해 노력해야 함을 시사한다고 할 것이다.
Ⅴ. 대환난(15-28절)
앞절에서 세상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징조로서 4가지 재난들이 제시되었고 그 가운데 성도의 환난은 정점을 이루는 징조였다. 이제 주님은 이 마지막 징조인 성도의 환난에 대하여 15절 이하에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부가하신다
1. 대환난은 급격하게 이를 것이다.
본문은 성도들이 ?다니엘이 예언한 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거든 그 때는 이미 환난이 임박한 줄 알고 급히 도망을 가라고 한다. 지붕위에 있는 자들은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고 바로 도망쳐야 할 것이다.(17절) 밭에서 일하는 자가 겉 옷을 밭모퉁이에 두고 일을 하다가 이러한 소식을 들으면 겉 옷을 가지러 뒤를 돌이킬 겨를도 없이 즉시 도망을 가라고 한다.(18절 이는 환난이 닥치 는 속도가 급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가 화가 있을 것이다.(19절) 왜냐하면 그들이 도망하는데 크게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20절)는 것은 겨울에는 도피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며 안식일에는 유대인들이 먼 여 행을 하기에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2. 환난이 극심할 것이 예상된다.
그들이 이렇게 급하게 도피해야 할 이유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21절) 창세에서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다. 세상의 환난에서 정점을 이루는 것은 주후 70년의 사건도 큰 것이겠지만 계시록 13장 등에서 예 언된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는 환난보다 더 큰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때의 환난이 얼마나 극심한지 날이 조금만 더 지체되면 땅위에 구원얻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22절)
3. 환난의 기간은 짧을 것이다.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며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사하리라?(22절)
?날들을 감한다.?는 뜻은 환난의 기간을 제한하겠다는 뜻이다.(cf McNeile 1980:350) 성경에서는 말세론에 관한 많은 구절들이 적그리스도의 활동 기간을 정하고 있음을 밝힌다(단7:25과 12:7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단9:27과 계13:5은 ?3년 반?의 기간). ?날들을 제한하겠다.?는 것은 환난의 때를 오래 끌게 놓아두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이 구절은 이 환난의 기간을 전적으로 악의 세력들(적그리스도?)의 손에만 맡기지 않고 주님께서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택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또 주님이 재림해 오실 때에 살아서 맞이할 성도들을 남기기 위해서도 그들을 보호하시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고 할 것이다.
4. 환난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끝날 것이다.
본문은 대환난이 주님의 재림으로 끝날 것으로 말한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고?(29절) 마가복음의 기록은 더 분명히 밝힌다?그때에 그 환난 후에 해가 어두어지고...?(εν εηε ιναι ται ημεραι μετα την θλφιν)(막13:24) 이때의 정관사 την은 바로 직전에 언급된 대환난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다.
박윤선 박사는 마태복음 24장 9절의 ?그날 환난 후에?를 해석하면서 ?이것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에 하나님의 종교에 대한 유대적 주권이 없어질 것을 예언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늘에 징조가 보이는 것?은 ?복음이 세계에 전파됨을 가르킨다.?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학자의 주장을 소개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대환난을 주님의 재림과 연결시키지 않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것 이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장면은 주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 명백하 다 헨드릭슨도 이 구절은 예수님 재림 바로 직전에 일어나는 짧은 기간동안 있을 대환난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해석한다.
이 마지막 때의 환난가운데 누구든지 주님이 오실 것을 예상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성도들의 기대에 편승하여 많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그리스도가 일어나서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이 분명히 거짓 그리스도인 것이 확실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은 하늘에서의 징조와 함께 오시기 때문이 다 따라서 주님은 경고하신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 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26절) 왜냐하면 그때에 ?번개가 동편에서 나 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할?것이기 때문이다.(27절) 주님은 분명히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하늘로 좇아 오실 것이다.(행1:11)
주님의 재림은 주검이 있는 곳에 모여드는 독수리의 습성으로 비유되고 있다. ?인자의 인함도 그러 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27하-28) 여기서의 주검은 넓게는 앞에 언급된 마지막 때의 징조들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좁게는 바로 앞절들에서 언급된 성도들의 대환난으로 인한 주검을 가리킨다.고 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주님의 재림은 이와같은 대환난이 있을 때에 있을 것 임을 뜻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이러한 주검(대환난)을 향하여 독수리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임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이 주검이(대환난) 있는데도 독수리들이 오지 않는다.(주님이 재림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반면에 독수리들이 모이는데(주님이 오시는데)도 주검이 없다(대환난이 없다)는 주장에 대한 질책의 말씀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5. 대환난은 분명한 징조와 함께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15절)
마태복음 24장 15절은 감람산 강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대환난이 있으면 주님이 오실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면 이러한 대환난이 언제 시작할 것인가? 이것은 우리의 최대 관심이 아닐 수 없 다 본문은 대환난이 다니엘 예언의 성취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다니엘의 예언이 무엇을 뜻 하며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해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이미 목회와 신학 1992년 1월, 2월호를 통하여 ?다니엘서의 종말론?이라는 논문에 서 이미 다니엘서를 충분히 토론하였다.(특히 2월호를 참조할 것). 여기에서는 해당되는 부분을 간략하게 요약하겠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에 대한 예언은 다니엘서에 네번 나타난다 다니엘 8장은 수염소에게서 나타나는 한 작은 뿔의 역할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었고 이 작은 뿔은 헬라나라인 시리아 왕국에서 일어나는 안티옥커스 4세를 가리키는 예언이었다. 그가 유대에 들어가서(8:9) 하나님을 대항하며(10절) 유대인들이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지하고 성소를 헐고 망하게 하는 죄악(성소에 우상을 세우는 일)을 행할 것이다.(11-13절).
다니엘 8장의 이 묘사는 7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8장의 작은 뿔은 7장의 작은 뿔 과 비슷하고 7장의 작은 뿔은 마지막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이다.(1월호 참조). 8장의 작은 뿔은 7장의 그것과 같은 인물이 아니나 그 성격과 역할이 같이 묘사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8장의 안티 옥커스 4세는 7장의 적그리스도를 보충설명해주는 적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니엘 11장 31절에 나타나는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 이라는 예언도 안티옥커스 4세에 관한 것이었다. 다니엘 10-12장은 한 환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긴 전쟁의 역사에 대하여 말한다. 바사왕에서 시작한 이 헬라왕의 등장(알렉산더) 헬라왕국의 분열 그리고 헬라왕국들 가운데 시리아왕국에서 나타날 안티옥커스 4세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단11:2135 특히 그가 제2차 이집트 원정에서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성소를 더럽히고(31절)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금하였고 미운 물건(쥬피터 신상)을 성전에 세워 그것에 제사 드리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유대인에게 하나님 종교를 버리고 헬라 종교를 섬기도록 강요 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환난을 당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순교당하였다.
다니엘 12장 11절에도 이 구절이 나타난다. 이것은 다니엘 11장 36절로부터 시작하는 적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 속에 포함된 것으로 그가 세상을 향해 전쟁을 일으키며 거룩한 땅(유대)을 짓밟으며 성도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성전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것이다.(12:11)
필자는 앞서 다니엘 11장 35절-12장을 다루면서 11장 36절이하에 나타나는 ?이 왕?은 35절 이전에 기록된 안티옥커스 4세가 아닌 역사 속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은 사람임을 밝히 고 그는 마지막 때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임이 틀림없음을 말하였다. 11장과 12장의 같은 구절들 에서 우리는 적그리스도와 안티옥커스 4세가 거의 비슷하게 서로 대조적으로 쓰여졌음을 알게된다.
따라서 11장의 안티옥커스 4세는 12장의 적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표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논란이 되는 구절은 다니엘 9장 27절이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폭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 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다니엘 9장 27절은 종말론을 푸는데 귀중한 열쇠가 되는 구절이며 또한 해석하기에 가장 어려 운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본 구절의 해석에서 우리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서 초림의 사역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와(E. J. Young(1977), 간하배(1988), 박윤선 박사(1967)등) ?그?는 마지 막 때에 일어날 적그리스도로 보는 견해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았다.
본문을 그리스도 초림과 관계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그들의 근거는 9장 24절에서의 속죄에 대한 예언이 그리스도의 초림의 사역과 일치함에 두고 있다. 또한 27절에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에서 언약은 메시야와 관련된 술어이고 이것은 재래의 옛 언약을 다시 발효시킨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 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약제사를 폐지시키셨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란 말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거행할 때 그것은 우상숭배와 같이 가증한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박윤선 1967:470)
필자는 이미 2월호에서 다니엘 9장 27절은 예수님의 초림이 될 수 없음과 그는 적그리스도 로 볼 수밖에 없음을 논한 바가 있다. 우리는 초림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이기에 해석상 너무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앞뒤 문맥과 다니엘 9장의 주제와의 비교 또 다니엘서 다른 부분에서 같은 내용이 사용된 경우 또한 다니엘서의 전체 주제의 흐름을 살펴볼 때 우리는 이 구절이 적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만약 박윤선 박사 등의 해석대로 다니엘이 예언한 ?멸망이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예수님의 죽음 뒤에도 유대인들이 구약적 제사를 계속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면 과연 그것이 마태복음 24장 16절이하에 ?이것을 보거든 빨리 도망하라?는 환난을 알리는 긴급한 예표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제사 때문에 성도들이 도피해야하는 이유가 됨을 결코 찾을 수가 없다. 사도행전 등을 통하여 볼 때 이것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이 겉옷을 가지러 뒤를 돌이키지 않을 정도로 급히 도피한 흔적은 없다.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이 계속 제 사를 드리고 있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고 바울은 서원한 몇 사람들에게 결례를 행 하면서까지 성전에 참여하였다.(행21:17-26) 따라서 우리는 ?멸망의 가증한 것?은 적그리스 도가 거룩한 곳에 우상을 세우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다니엘이 예언한 ?멸망의 가증한?것은 안티옥커스 4세 혹은 적그리스도의 활동에 대한 예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미래의 대환난을 예언하시면서 주전 약 160년 전에 일어난 안티옥 커스 4세에 대한 기록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대환난 시작의 징표로 주신 ?멸망의 가증한 것?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있을 대환난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McNeile:384 참조)
어떤이는 예수님의 이 예언이 이중적인 실현의 견해를 가진다고 본다. 이미 그들은 로마군대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에 실현되었다고 보며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적그리스도의 활동을 가리키는 예표적인 것이라고도 한다. 헨드릭슨도 이중성취를 주장하면서 이미 주후 2세기에 제2차 유대인 반란(132년) 때에 이것이 하드리안 황제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또한 예수님이 재림하시 기 전에 대환난에서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다시 이루어질 것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이중적 성취는 매우 합리적인 해석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필자도 이 글의 앞에서 감람산 강화는 예루살렘 멸망으로 시작하여 종말로 마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따라서 이 강화의 징조들은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된 것과 동시에 종말의 것으로도 보아야 함에 동의한다. 그러나 15절을 이중성취로 봄에 있어 우리가 주의깊게 고려해 보아야 할 부분들이 있다. 헨드릭슨이 지적하는 것은 첫번째 성취를 주후 2세기에 있었던 유대인 제2차 반란(Bar Cochba 반란 주후 132-35)과 관련된 사건으로 서 하드리안 황제가 예루살렘에 세운 우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주후 70년에 있을 예루살렘 멸망 때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대환난의 징조가 될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헨드릭슨의 주장은 앞뒤의 논리가 맞지 않는다.
권성수 교수는 마태복음 24장의 내용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되었으며 어떤 것들은 재림에 관계된 것임을 분류하면서 24장 15-21절은 예루살렘 멸망과만 관련된 것으로 분류하였다.(권성수 1992. 1월 78ff) 그는 15절의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예언은 갈리구라가 자신의 상을 성전에 세우려고 한 사건 빌라도가 시저 황제상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예루살 렘성에 들어온 사건 그리고 디도 장군이 폐허가 된 성전터에 자신의 동상을 세운 것 등에서 이루어졌 다고 말한다.
갈리구라는 황제숭배사상을 강요했으며 자기의 동상을 예루살렘에도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수 리아 군대는 유대인들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그 명령을 수행하지 아니했으며 미루다가 갈리구라는 죽었다. 그리고 그는 주후 70년과는 거리가 먼 37-41년에 로마의 황제로서 실현되지도 아니한 그의 명령이 15절의 예언에서 긴급한 대환난의 징조가 되어 성도들이 급히 도망해야 했었다고 생각 하기 힘들다 빌라도의 경우를 보자 빌라도가 우상숭배의 문제로 유대인들과 마찰이 일어난 것이 두번 있었다. 빌라도 통치 초기에 예루살렘에 황제상이 그려진 초소대(밤에 군인이 보초서는대 세운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여 폐지된 일이 있었다. 다음으로는 금으로 도금한 방패를 예루살렘에 있 는 헤롯의 궁에 장식하였는데 그 방패에 ?디베리우스 황제에게 바친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것이 황제숭배의 종교적인 목적을 지닌 것이라고 하여 강하게 반발하였고 결국 가이사랴에 있는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으로 옮긴 일이 있었다. 위의 두 경우는 실제로 로마 성전에서 우상을 세운 것도 아니었으며 더군다나 빌라도는 주후 37년에 로마로 소환되어 해임되고 말았다. 따라서 빌라도의 사건들이 주후 70년의 대환난을 예고한 긴급한 상황으로 보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디도의 경우는 필자가 아직 그러한 역사적인 기록을 읽은 적이 없다. 비록 디도가 폐허된 성전에 자기의 동상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것은 예루살렘성이 멸망당한 이후이므로 그것이 성도들이 급히 도망해야 하는 멸망을 위한 징조로서 채택하기도 힘들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15절을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되어 이미 실현된 것으로 보는데는 무리함이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은 다니엘서와 본문과의 관계를 더 신중하게 고려하지 아니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물론 이중성취를 가급적 수용하려고 한다. 특히 누가복음은 우상이 세워진 것이 아닌 성이 에워싸인 것을 보는 것으로 징조가 대치되고 있다. 따라서 감람산 강화는 충분하게 예 루살렘 멸망과 연관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감람산 강화에서 주님이 예언의 초점을 어디에 놓고 있느냐를 솔직하게 보자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초점은 분명히 예루살렘 멸망이 아닌 마지 막 때의 적그리스도에 대하여 두고 있다는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절 34절은 주님 강림하시기 전에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를 하나님보 다 더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한다.요한계시록 13장 14절은 위의 두 구절들은 정통적으로 마지막 때에 일어날 적그리스도로 간주되어 왔다 다니엘서와 신약의 여러 구절들 에서 마지막 때에 있을 대환난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남으로부터 있을 것이며 그가 거룩한 곳에 우상을 세우는 것으로 대환난이 시작될 것이다. 이러한 환난은 급격히 닥칠 것이고 극심할 것이다. 그러나 짧을 것이며 예수님의 재림으로 끝날 것이다.
6. 어떻게 재림을 준비할 것인가?
주님은 이러한 환난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24:20) 이는 성도들이 이 환난을 겪는데 있어서 세밀한 부분에까지 관심을 두면서 준비할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이 환난에 대해 부정하거나 또 방관하는 태도는 이러한 세밀한 부분까지 위해서 준비하기를 원하 시는 주님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주님은 어떻게 재림을 준비할 것인지를 여러 비유들을 들어 가르치신다 첫째 무화과 나무의 비유에서는(32-36절) 때를 분별할 것을 말씀하신다 무화과 나무의 잎이 무성하면 여름이 가가이 온 줄을 알라고 하신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있을 여러 징조들이 나타나면 주님께서 올 때가 된 줄 알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날과 시간은 아무도 모르며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다. 즉 때는 분별하되 정확하게 재림의 날짜를 알 수가 없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따라서 최근에 재림의 정확한 날짜를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적이 아님이 분명하다.
노아의 때에 관한 비유에서(37-42절) 주님은 마지막 때를 어떻게 근신(謹愼)하며 경건되게 준비 하는 삶을 살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하였다. 그러나 노아의 경고대로 비가 내렸으며 그들은 심판을 당한 것이다. 이처 럼 주님의 재림도 없다고 생각하여 마음대로 방탕하면서 살지말고 준비할 것을 말씀하신다.
밭에 있는 두 사람 그리고 매를 가는 두 여자의 비유(40-42절), 도적의 비유(43-44절), 충성된 종의 비유(45-51절) 등에서는 주님의 재림이 언제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기를 교훈하시는 말씀이다. 만약 주인이 도적이 언제 올지 알았으면 깨어서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종이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알았으면 술친구와 방탕하며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올지 모르 는 주님을 깨어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Ⅵ. ?이 세대가 다 끝나기 전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마24:34)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의 재림의 때인 세상 끝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34절의 말씀에 와서는 어려움에 봉착한다. 헨드릭슨은 이 어려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세대?란 ?인류?이든지 ?모든 믿는 사 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민족?을 뜻하며 ?이 유대인들이 주님의 예언이 다 이루어질 때까 지 결코 끊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1973:867) 리더보스도 이 구절은 유대인들 이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끊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예언으로 본다.(1975:500f) 그러나 머래이(J. Murray)는 이 설을 반박한다. 만약 유대 민족을 뜻했다면 왜 ?genea? 대신 ?genos?를 사용 하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 구절은 당시 살아있는 세대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 한다.(Murray, 1977:392ff) 랜(WL Lane)은 더 나아가서 이 구절은 당시의 세대들이 이 예언들이 성취될 때에 증언들이 될 것을 말하며 이는 예루살렘 멸망을 뜻한다고 주장한다.(1975:486)
리더보스(H. Ridderbos)는 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그의 견해는 예수님께서 그 날과 시는 아무도 모르 며 예수님조차도 알 수 없으며 이것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근거에서 예수님이 실제로 그 이루어질 때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지나치게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에 이 모든 징조들을 제한시켜서는 안된다고 한다.(1973:500) 그러나 예수님께서 과연 그 종말의 때에 대하여 전혀 인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모호한 태도로 말을 했을까 과연 예수님께서 그 때가 예루살렘의 멸망의 때일 수도 있고 또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즉 자신이 확신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중적인 뜻을 함축하였을까? 그러나 감람산 강화에서 예수님이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신 것으로 볼 수가 없다. 그는 확실하게 마지막 때에 대 한 징조를 주고 있으며 어떤 특정적인 사건을 가리키면서(15절) 대환난이 어떻게 시작될 것인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때에 대한 무지(無知)가 예루살렘 멸망인지 아니면 다른 때인지 구 분이 안되게 말한 원인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킥(JM Kik)은 ?all these things?를 두 구분으로 나눈다 그는 첫 부분을 435절까지로 이 예언들은 예루살렘 멸망 때에 이루어졌으며 24장 36절-25장 46절은 주님의 재림에 관 한 예언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언들을 두 구분으로 나눌 근거를 찾기가 힘들다.
여러 학자들의 혼란된 주장들 속에서 이 구절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음의 여러가지 분명 한 사실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 감람산 강화는 예루살렘 멸망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예언적인 말씀 가운데 예 루살렘 멸망의 사건을 내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2) 감람산 강화는 ?세상 마지막 때?와 ?주의 임하심? 즉 재림에 관한 내용을 또한 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30절의 ?인자가 구름을 타고?등은 분명한 예수님의 재림을 그리고 있다.
37절이하의 노아의 때의 비유 43절이하의 도적의 비유 그 이하 25장 46절까지 모든 비유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교훈임이 명백하다.
3) 감람산 강화의 핵심에 해당하는 마지막 대환난은 다니엘이 예언한 적그리스도의 활동에서 시작되 므로 이 예언은 세상 마지막 때의 사건을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4) 우리는 여기서 ?all?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Παντα?는 항상 ?totality of individual?을 뜻한다. 할 수 없다. 마태복음 3장 5절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서편의 개개인의 모든 사람이 다 요한에게 와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7절의 ?모든 육체에게?는 성령이 모든 개개인에게 임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사도행전 3장 9절의 ?모든 백성이?에서 유대인 모두를 지칭한다고 할 수도 없을 것 이다.
이러한 예를 든다면 한정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감람산 강화의 본문에도 ?모두?를 앞에 말한 개개의 예언의 모든 것으로 생각해야 된다고만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panta?는 ?totality of individual?이라기보다는 ?the full number of measure? 혹은 ?the representative of whole?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한정건1987:306ff; 특히 로마서 11:26의 ?all Israel?에서 ?pas?의 의미를 분석한 필자의 논문을 참조할 것) 결론적으로 우리는 칼빈에서부터 시작하여 정통적으로 다수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예언의 이중적인 성취(double fullfilment)의 의견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AD 70년을 기점으로 하여 여러 재난들과 대환난이 유대인들에게 이루어졌으며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로마인)들에 의해 짓 밟히고 예루살렘이 황폐하여졌다.(비록 모든 징조들이 정확하게 문자 그대로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이 예루살렘의 황폐를 목적으로 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예루살렘이 멸망한 것과) 앞으로 마지막 때에 주님이 재림하시기 임박해서 그러한 재난과 환난들이 있을 것임을 아울러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은 둘 중 어느 것에 더 큰 비중을 두어 말씀하셨겠는가? 그것은 물론 마지막 때에 관한 것이다. 즉 예루살렘 멸망은 세상 마지막 때에 대한 그림자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지는 마지막 재림 때이다. 이것은 24장 3절에 있는 도입부문에서 제자들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 대한 징조를 물음에서 알 수 있으며 또 한 결론 부분에서(29-31절) 환난이 예수님의 재림으로 끝나고 있는 극적인 묘사로 마치고 있음을 보아서도 명백하다.
Ⅶ. 끝맺는말
본 장은 말세론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장에서 마지막 때에 대한 징조들이 주어지고 있 기 대문이다. 이러한 징조들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 등과 함께 우리에게 마지막 때를 분별할 중요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은 특히 마지막 때에 있을 대환난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이 환난이 어떠할 것이며 또 어떻게 시작하며 어떻게 마칠 것인지를 밝혀준다.
많은 학자들이 이 감람산 강화를 예루살렘 멸망(AD 70년 관한 예언이 말씀으로 축소하려고 한다. 그들은 ?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이 일을 다 이루리라?는(34절) 구절을 두고 앞의 모든 예언은 예루살렘 멸망을 말한 것으로 한정지으려고 한다. 특히 한국의 보수교단에서도 박윤선 박사를 위주로 하여 그러한 경향을 가진 것 같다. 그러나 본문은 여러 곳에서 분명 세상 마지막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는 증거들을 찾을 수 있었다.(예로, 세상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 주님이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 등).
본문을 굳이 마지막 때가 아닌 것으로 피하려는 태도는 이 본문이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4장을 마지막 때에 일어날 징조들로 승인한다면 다니엘서를 마지막 때의 역사적인 사건들로 인정해야 하며 아울러 요한계시록도 마지막 때에 있을 역사적인 사건들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피하는 쪽에서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을 역사적인 사건이 아닌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는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성의 멸망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 마지막 때의 대환난과 예수님의 재림을 가르칠 목적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재난들과 환난들을 경험했 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주님이 오실 마지막 때를 연상했어야 했고 또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AD 70년에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환난들을 회상하며 마지막 때 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본문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천재지변과 여러가지 재난(특히 4가지의 대표적 재난들)들을 그때의 증거들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마지막 때에 대한 성경의 예언들을 기피할 것이 아니라 분명한 말 씀의 해석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이 교회의 강단과 학교의 교단에서 주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본문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적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대환난에 대하여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면서 묘사하고 있 다 이 적그리스도의 활동은 다니엘서의 예언들을 확인해 줄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을 해석 하기 위한 중요한 근거를 제시한다고 하겠다. 본문이 이렇게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마지막 때에 일어 날 적그리스도와 성도들의 대환난에 대하여 교회는 더 이상 숨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본문 을 통하여 주님께서 때를 분별할 것과 어떻게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준비해야 할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 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주)
1. Jesus is here speaking about a tribulation that will characterize those days, a very brief period of dire distress that shall occur immediately before his return(Hendrickson, 1973:860)
2. But just as the pagan altar and the swine offered upon it in the very temple of Jehovah in the second century BC pointed forward to the idolatrous legions of Rome, so these in turn foreshadowed the great and final violation by the antichrist of all that is sacred It is for this reason that in verses 29-31 Jesus is able to say, Immediately after the tribulation of those days, the sun shall be darkende(Hendrickson, 1973:857)
3. 캘빈(Gilvin)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Yet what Christ said was true, that before the close of a single generation, believers would feel in reality, and by undoubted experience the truth of His predictionSo then, while our Lord heaps upon a single generation every kind of calamities, he does not by any means exempt future ages from the same kind of sufferings, but only enjoins the disciples to be prepared for enduring them all with firmness(1974: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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