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구원을 위해 진행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이미 성취되었고 인간이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모든 개인 성도 에게 적용되지만 그 영육간의 완전한 성취는 세상 종말 때에 백보좌 심판과 그후에 세워질 신천신지(新天新地)에서만 최종적으로 실 현된다. 따라서 이와 같이 구원의 최종 성취를 다루는 종말론은 교리의 말미에 놓이게 된다. 하편 종말론은 원래는 각 개인의 죽음으로 야기되는 개인 종말론과 우주 전체의 종말을 다루는 역사적 종말론으로 나뉜다. 그러나 여기서는 비교적 짧게 기술할 수 있는 개인적 종말론을 한 항목으로, 그리고 이어지는 역사적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부터 최후의 상태까지 다섯 항목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1. 개인 종말론
현재의 세상 곧 아담의 범죄의 영향으로 오염된 이 우주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이은 심판으로 완전 폐지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되는 역사 종말 외에도 인간 각 개인의 영,육이 분리됨으로 인하여 현세의 세상과는 관계를 끊게 되는 개인적 종말이 있다.
1. 육체적 죽음
1) 육체적 죽음의 정의와 필연성
(1) 육체적 죽음의 정의 -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말한다(요 19:50). 이때 육체는 그 기능이 정지된 채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별도의 지정된 곳으로 간다(전 12:7).
(2) 육체적 죽음의 필연성 - 원래의 인간에게는 눅음이 없었으나, 죄를 범함에 따라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시 90:7) 그 심판의 결과(롬 1:32; 5:16; 갈 3:13) 필연적인 죽음이 오게 되었다(창 2:17; 3:19; 롬 5:12,17; 6:23; 히 9:27; 약 1:15).
2) 성도가 겪는 죽음의 의미
성도는 믿음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롬 5;21; 8:15,16). 그러나 성도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이는, 성도로 하여금 겸손을 배우게 하며, 육적인 데서 떠나게 하며, 신령한 데 삶의 목적과 목표를 두게 한다.
3) 죽음에 대한 성도의 자세
불신자에게는 죽음이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는 징계이나, 믿는 자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연단임을 아는 성도는 자신의 한 번뿐인 인생을 봉사의 기회로 삼고(엡 5:16),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 힘쓰되(딤후 4:17), 죽음에 임박해서는 두려워 말아야 한다(살전 4:13-18). 또한 성도가 믿지 않는 자들같이 단지 육적 죽음만을 가지고 지나치게 슬퍼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며(살전 5:13-18), 오히려 부활과 영생의 상급을 바라며 상호 위로해야 한다(롬 12:15).
2. 영생(永生)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이 영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사실 인간은 영생할 존재로서 지음받았다.
1) 영생에 대한 증거
영생에는 성도가 복된 삶을 영원히 누리는 좁은 의미의 영생과 악인이 영원히 징계받는 것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영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이 경험적으로는 증명되지 않으나 많은 간접적 증거와 더불어 성경의 명확한 지지를 받는다.
(1) 역사적 논증 -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한 심오한 사상들은 인간의 영생에 대해 많은 언급을 한다.
(2) 종교적 논증 - 모든 종교는 영생을 목적으로 하는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3) 목적론적 논증 - 인간이 지닌 재능은 이 지상에서의 삶 동안에는 완전히 개발되지 못하며 이상(理想)을 실현할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도 못한다. 이는 내세의 필요성의 당위를 보여 준다.
(4) 도덕적 논증 - 이 세상에서 상벌(賞罰)이 완전히 시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 상벌이 완전히 시행될 내세(來世)가 있음에 대한 증거이다.
(5) 성경적 논증 - 인간의 이성에 의한 추론을 통해서도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생이 증명되나, 보다 명확한 증거는 절대 무오한 하나님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
① 구약 - 구약에는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창 5:24; 왕하 2:11), 족장들이 열조에게로 갔음을 말하며(창 25:8;
35:29; 49:33), 이 밖에도 영생에 대한 암시들이 있다(시 16:10,11; 사 26:19; 단 12:2,3; 욥 19:25,26).
② 신약 - 예수님(요 11:25,26), 사도바울(롬 8:18; 고후 4:17,18; 딤후 4:7,8), 히브리서 기자(히 11:19), 그리고 모든 신실한 사람이 영생을 믿
었다(마 22:23).
2) 영생에 대한 잘못된 견해
영생은 믿음으로 이를 수용하지 않는 인간에게 합리적으로 증명 되지 않는 사항이므로, 혹자들은 종종 성경의 진리에 맞서는 주장들을 말한다.
(1) 유물론(唯物論) - 진화론이나 생리적 심리학(生理的心理學) 등에 서는 인간의 영적 영역 특히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나 이를 물질적 작용으로 봄으로써 육체가 소멸할 때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주장한다.
(2) 종족적(種族的) 영생 관념 - 후손의 계속된 번식을 영생으로 보는 견해이다.
(3) 기념적(記念的) 영생 관념 - 한 인간의 업적 혹은 폐해가 후대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것을 영생으로 본다.
3. 중간기 상태(中間期 狀態)
인간이 죽어 육체가 소멸된 후 다시 육체를 입게 될 부활 때까지 그 영혼이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가에 대하여 다룬다.
1) 중간기 상태에 관한 로마 카톨릭의 견해
중간기 처소를 5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나 이는 성경적 언급을 정리 구분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 추론에 입각한 인위적 구분에 불과하다.
(1) 천국 - 교회의 영세를 받고 공덕을 쌓은 사람이 죽음과 동시에 간다.
(2) 지옥 - 영세를 받지 않은 성인(成人)과 영세를 받고도 고의로 교회법과 율법을 어긴 자가 간다.
(3) 연옥(煉獄) - 영세를 받았으나 공덕이 부족하여 천국에 미치지 못한 자가 간다. 그들은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연단을 받으며, 소정의 정화 기간(淨化期間)이 차면 천국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유족 혹은 친지의 선행과 기도로 정화 기간은 단축될 수 있다.
(4) 선조 림보(The Limbus Patrum) - ‘가장자리’라는 뜻이 있는 림보는 지옥 근처에 있다고 주장되며, 이곳은 구약 성도들의 영혼이 거하는 처소이다.
(5) 유아 림보(The Limbus Infantum) - 유아 영세를 받지 않은 유아들이 형벌이나 행복도 없이 지내는 처소이다. 선조 림보에 거하던 영혼들은 이미 천국으로 옮겨졌으나, 여기에 있는 영혼들은 영원히 그렇게 되지 못한다.
2) 중간기 상태에 관한 개신교의 견해
중간기 상태는, 역사 이래로 죽은 자들의 모든 영혼들이 그리스도에 최후의 심판 때까지 대기하는 기간 혹은 그 기간의 상태를 말한다.
(1) 인간은 죽음과 동시에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며, 그 영혼은 중긴기 처소인 ‘낙원’과 ‘음부’로 각각 들어간다(눅 16:23-25).
(2) 최종 심판은 죽음 직후 이뤄지지 않는다. 세상 끝날에 각인에 대한 최종 심판이 있다(계 20:12-15).
(3) 영생과 영벌의 장소는 세상 끝날 이뤄질 천국으로서의 신천 신지(新天新地)와 영원한 지옥이다(계 20:10). 지금의 중간기 상태는 완전한 영생과 영벌의 상태와 족히 비교될 수 없다.
(4) 중간기 상태에서는 최종 심판에 영향을 줄 회개의 기회가 일체 없다(시 6:5; 눅 16:25,26; 히 9:27).
(5) 중간기 처소인 낙원과 음부에도 각각 축복과 형벌이 있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행복과 형벌과는 비교될 수 없다(계 20:10).
3) 사후 영혼의 의식
부활함으로 재림하신 그리스도와 영적 기쁨을 나누는 그 이전 단계인 중간기 상태의 영혼이 의식을 지니고 있느냐의 문제에 대하여도 각기 다른 여러가지의 견해가 있다.
(1) 영혼 수면설(靈魂睡眠說) - 사람이 죽으면 부활 때까지 그 영혼도 무의식의 상태에 있게 된다는 견해이다.
(2) 멸절설(滅絶說) - 죽음과 동시에 죄로 인하여 영육간의 영원한 멸절에 이르게 되므로 영원히 의식이 사라진다는 주장이다.
(3) 조건적 영생설(條件的永生說) - 성도의 영혼과 달리 불신자의 영혼만은 죽음과 동시에 멸절하여 의식이 없어진다는 견해이다.
(4) 성경적 견해 - 장차 임할 천국과 지옥에서 경험할 복락과 고통에는 비교할 수 없으나 낙원과 음부에서도 이 지상의 것보다는 훨씬 큰 즐거움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의식을 소유한다(눅 16:19-31).
4) 사후 영혼의 활동에 대한 오해
죽음으로 육체에서 이탈된 영혼이 부활하기 이전까지 어떠한 체험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오해를 소개한다.
(1) 제 2시련설 - 시련을 통한 일정한 정화의 과정을 거쳐 회개의 기회를 갖게 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후에는 이 지상 생활에 대한 보상이나 형벌만이 주어지며 회개의 기회는 박탈된다.
(2) 강령설(降靈說) - 죽은 자의 영혼은 강령술 등을 통하여 이 세상 사람과 교분을 나눌 수 있다는 오해이다(욥 7:9,10; 눅 16:27-31). 물론 이러한 현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실상 그것은 눈속임이거나 악령의 역사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
앞에서 시간을 두고 각 사람에게 임하는 개인의 종말에 대한 언급이었지만, 여기서부터는 이 세상 역사 자체의 종말에 대하여 다룬다. 한편 그리스도의 재림은 우주의 대종말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종말론에서는 제일 먼저 언급된다.
1. 재림의 징조
재림의 시기는 하나님 이외에 아무도 알지 못한다(마 24:43; 벧후 3:10). 다만 그리스도께서 알려 주신 아래와 같은 징조들을 통해서
재림의 임박함을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1) 복음의 세계적 전파(傳播)
전 세계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신앙을 가질 기회를 갖는다(마 24:14).
2) 이스라엘의 회심(回心)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모든 유대인들이 주께로 돌아온다(슥 12:10; 롬 11:25,26).
3) 적그리스도의 출현(出現)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하나님에게 돌아갈 경배를 가로채며(살후 2:3,4), 거짓된 교리로 미혹하고(마 24:23), 자신들을 쫓지 않는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의 출현이 있다.
4) 대환난(大患難)
자연적 재난 뿐만 아니라 사단의 세력에 의한 인격적 박해도 있을 것이다(마 24:9-11).
5) 대배교(大背敎)
거짓 선지자(마 24:11,24) 및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마 24:5,23)과 쾌락을 사랑하는 세상 풍조(딤후 3:4)로 인하여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드물게 된다(눅 18:8).
2. 재림의 양식(樣式)
성경은 그리스도의 승귀(昇貴)의 절정인 재림이 승천시 모습 그대로일 것으로 말한다(행 1:11).
1) 인격적 재림(人格的再臨)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바로 그분이 직접 다시 오신다(히 9:28).
2) 신체적 재림(身體的再臨)
영적으로가 아니라 육체를 가진 채 오신다.
3) 가견적 재림(可見的再臨)
영광 중에(마 24:30),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오신다(계 1:7).
4) 돌발적 재림(突發的再臨)
‘생각지 않은 때’(마 24:44), ‘도적 같이’(살전 5:2; 계 16:15) 오신다.
5) 승리적 재림(勝利的再臨)
초림은 비하(卑下)의 신분으로서 이루어졌지만, 재림은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신다(살후 1:7,8).
6) 완성적 재림(完成的再臨)
신자에 대한 구원의 최종적 완성과 불신자에 대한 형벌이 중요 목적 중의 하나이다.
3. 재림의 목적
재림의 최종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재림 직후의 사건들과 관련되는 일차적 목적만을 살핀다.
1) 죽은 성도의 생명의 부활
재림시 제일 먼저 있을 사건이다(살전 4:16). 물론 이어 악인의 심판을 위한 부활도 이어진다(요 5:28,29).
2) 생존 성도의 변형
여전히 살아 있던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맞이하기에 합당한 몸으로 변형된다(고전 15:51,52).
3) 어린양의 혼인 잔치
부활하였거나 변화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기쁨의 연합을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완전한 교제의 회복이다.
4) 성도의 포상(褒賞)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수고한 성도에 대한 시상으로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딤후 4:8).
5) 악한 세력의 파멸
하나님에게 항거하던 사단을 결박하고(계 20:1,2), 그 하수인들을 영원히 멸망시키신다(살후 2:8; 계 19:19:21). 이는 완전한 하나
님의 통치를 실현키 위함이다.
3. 천년 왕국과 종말 사건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 성도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할 것’을 말한다(계 20:1-6).
하지만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 재림 및 그와 관련된 종말 사건의 순서가 달라지게 된다. 그러나 아래에서 설명한 어떠한 견해를 취한다 할지라도 결정적으로 잘못되었다거나 완전히 바른 주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하에 나오는 견해들은 성경에 부분적으로 묘사된 종말에 대한 계시들을 각자의 해석학적 입장에 따라 해석하고 또 이를 상호 연결시켜 종말 사건의 전개 순서를 구성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에 대한 충분하 계시이기는 하나 구원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다 말해 주는 계시는 아님으로 종말 사건 자체는 분명히 언급하였지만 그 세부 내용을 정확히 그리고 다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또한 해석학적 입장에 따라 세부 내용에 있어서는 다소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종말론에 있어서는 성경이 명백히 밝히고 있는 부분들, 즉 종말 사건 자체 또는 종말 시기의 불가지성 등에 대해서 이견을 가지면 분명히 이단이지만 추정 범위 안에서는 인간의 한계 및 성경 계시의 특성을 고려하여 서로 상대방의 견해를 용납하여야 할 것이다.
어쨌든 이제 천년 왕국을 중심으로 종말 사건의 전개 순서를 이해하는 데 중심이 되는 종말 사건의 전개 순서를 구성하는 데에는 주로 다음의 견해들이 있다.
1. 무천년설(Amillennianism)
성경의 ‘천년’을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전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1) 종말 사건의 순서
(1) 천년 왕국의 기간 - 이 기간 동안 사단이 결박되어 무저갱에 갇히고(계 5:10), 첫째 부활을 한 자, 즉 중생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왕노릇한다(계 5:10).
(2) 대배교, 대환난 - 천년 왕국이 끝날 무렵 성경에 묘사된 7년 환난이 일어나는데 이는 사단이 잠시 놓임으로 말미암는 결과이다(계 20:3). 이때 거짓 선지자와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성도들은 환난을 당하며 일부는 배교에 이를 것이다. 이는 아마겟돈 전쟁, 즉 곡과 마곡의 전쟁을 절정으로 끝을 맺고 사단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
(3) 재림 - 천년 왕국은 성도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마쳐진다.
(4) 대부활과 성도의 휴거 - 성도는 생명의 부활을, 불신자는 심판의 부활을 한다. 그후 성도는 신령한 몸을 입고 공중으로 휴겨(rapture)되어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살전 4:17).
(5) 대심판 - 성도가 휴거된 상태에서 부활한 악인들과 생존한 악인들은 형벌을 받아 영원한 불못에 던져진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계 20:14).
(6) 신천신치(新天新地) - 악인이 불못에 던져진 후, 이 땅은 새롭게 변화되어 신천신지가 되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여기서 영원토록 산다.
2) 무천년설(無千年說)의 의의
중생한 성도가 구속의 진리가 완전히 계시되고 그 조선이 예수의 사역으로 성취된 신약 시대에는 비록 육적으로는 아니어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적으로 왕노릇한다는 사상은, 창조, 타락, 재창조(구속)라고 하는 신, 구약의 경륜과도 맞아 떨어진다. 또한 종말 사건의 순서 구성의 각 단계가 매우 합리적이라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천년’을 상징적 기간으로, ‘첫째 부활’을 영적 부활로, ‘무저갱’을 억압 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하다는 비판도 있다.
2. 후천년설(Postmillennianism)
천년 왕국을, 복음이 전세계에 확산되고 이 세상이 살기 좋은 이상적인 세계로 변화될 복음의 황금 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며, 이러한 천년 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있다고 본다.
1) 종말 사건의 순서
(1) 선의 점진적 향상 - 복음의 확산으로 인해 세상에는 악의 영향이 점차적으로 감소된다.
(2) 천년 왕국 - 복음의 세계 전파로 인류 대부분이 신자가 되는 이상적 사회를 이룬다.
(3) 대배교, 대환난 - 천년 왕국이 끝날 즈음에 결박되었던 사단이 잠시 놓임을 받는다(계 20:3). 사단은 그 때 참신자가 되지 못한 자들을 하수인 삼아 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이를 칠년 아마겟돈 전쟁, 곡과 마곡의 전쟁으로 표현한다.
(4) 재림 - 대환난의 절정기에 재림이 있다.
(5) 대부활 - 무천년설과 동일하지만, 휴거에 대한 강조가 없다는 점에서는 상이하다.
(6) 대심판 - 악인들에 대한 공의의 심판으로 영원한 형벌이 주어진다.
(7) 신천신지 - 대심판 후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2) 후천년설(後千年說)의 의의
일반 역사와는 비교적 조화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지나친 인본주의적 사고와 낙관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 것이기에, 이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는 성경의 가르침 및 이 세상의 제반 영적 현상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3. 세대주의적 전천년설(Dispensational Premillennianism)
세대주의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7단계로 구분하고 그 마지막에 천년 왕국을 둔다. 이는 이들이 성경을 문자적 그리고 도식적으로 이해한 결과이다.
1) 종말 사건의 순서
(1) 그리스도의 공중 재림 - 가견적(可見的) 지상 재림 이전에, 성도들만을 위함이다.
(2) 성도의 부활과 변화 및 휴거 - 이미 죽은 성도는 부활하고, 살아서 재림을 맞은 성도는 변화되어 그리스도에게로 들림을 받는다.
(3) 어린양의 혼인 잔치 - 공중으로 휴거된 성도들과 그리스도가 함께 잔치를 벌인다.
(4) 복음의 재전파와 이스라엘의 회심 - 한편 지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에 대한 복음이 전파되며 이스라엘의 대서 회심이 일어난다.
(5) 대환난과 적그리스도의 출현 - 기간은 7년이다. 이때 전3년 반은 위에서 언급한 복음 전파와 이스라엘의 대회심이, 그리고 후3년 반은 적그리스도의 출현으로 인한 대환난이 강조된다.
(6)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 7년 대환난이 끝난 다음, 휴거되었던 성도들과 함께 지상으로 재림하신다. 이때 그리스도는 대환난 때 죽은 성도들을 부활시키고 아마겟돈 전쟁을 통해 적그리스도를 멸망시키고 사단을 천년간 감금한다.
(7) 천년 왕국 건설 - 성전 제사가 회복된다.
(8) 사단의 일시적 석방 - 천년 왕국 마지막 즈음에 결박되었던 사단이 잠시 풀려남으로써 혼란과 무질서가 있다.
(9) 곡과 마곡의 전쟁 - 사단의 사주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한 문자적 의미의 전쟁이 실제로 있다.
(10) 사단의 멸망 - 사단이 결국 불못에 던져지며 영원토록 이곳에 머문다.
(11) 악인의 부활과 대심판 - 성도의 부활보다 천년 늦게 부활하여 지상에서 지은 범죄에 대해 심판 받는다.
(12) 신천신지 - 악이 완전히 제거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의의로 힘입은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
2)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의의
상징과 암시가 많은 계시록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호기심은 충족시킬 수 있으나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든다는 문제점이 있다.
4. 역사적 전천년설(Historical Premillennianism)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을 구분치 않고 재림을 단회적으로 본다는 점 등에서 세대주의적 전천년설과는 다르다.
1) 종말 사건의 순서
(1) 대배교, 대환난 -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졌을 때 적그리스도 출현의 결과로 성도에게 큰 어려움이 닥친다.
(2) 재림 - 대환난의 절정에 지상 재림이 이루어진다.
(3) 죽은 성도의 부활 - 죽어 천상에서 영혼의 상태로 있었던 성도들이 그리스도 재림과 더불어 부활한다(계 20:5,6).
(4) 성도의 휴거 - 부활한 성도와 변화된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함이다(살전 4:16,17)
(5) 사단의 결박 - 그리스도에 의해 아마겟돈 전쟁에 패함으로 이렇게 된다(계 20:2,3).
(6) 천년 완국 - 죄의 근원이었던 사단이 결박된 결과, 죄가 없어지므로 이 땅에는 그리스도의 통치로 평화와 공의가 이루어진다.
(7) 곡과 마곡의 전쟁 - 천년 왕국 마지막에 사단이 잠시 풀려남으로써, 곡과 마곡을 하수인 삼아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한다(계 20:8,9).
(8) 사단의 멸망 - 사단은 다시 결박되며 영원한 유황불에 던져진다(계 20:2,3).
(9) 악인의 부활과 대심판 - 심판을 위한 부활에 이어 영원한 고통 속에 처해진다.
(10) 신천신지 - 악인의 심판과는 반대로 구원받은 자는 영원한 고통 속에 처해진다.
2) 역사적 전천년석의 의의
성경을 문자적으로 일관되게 해석했다는 특성이 장점일수도 있으나 이를 너무 일방적으로 고수한 점이 문제일수도 있다. 또한 천년 왕국에 여전히 악인이 존재하면서 성도의 통치를 받는다는 조화키 어려운 문제를 남겨준다.
4. 부활(復活)
성경에 일관되게 흐르는 사상일 뿐 아니라 이 지상의 삶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과 이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이다.
1. 부활의 성경적 증거
1) 구약의 증거
(1) 아브라함의 신앙 - 이삭의 부활을 믿었다(히 11:17-19).
(2) 죽음 묘사 - 깨어남을 전제, ‘잔다’라고 묘사한다(대하 26:23).
(3) 부활 언급 - 직접 ‘살아나고’라고 말한다(사 26:19).
2) 신약의 증거
(1) 그리스도의 증거 - 스스로를 부활과 생명으로 말씀하셨다(요 11:25,26).
(2) 바울의 증거 - 논리적으로 언급하였다(롬 8:11,23; 고전 15장.
(3) 요한의 증거 - 계시록은 부활을 회화적으로 그린다(계 20:4,5).
2. 부활의 성질
여기서는 그리스도 재림 직후 있을 성도의 생명의 부활만을 다룬다.
(1) 부활은 삼위의 사역이다(요 5:21).
(2)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증이다(고전 15:22).
(3) 육체적, 가견적 부활이다(고전 15:52).
(4) 옛 육체의 신령한 회복이다(고전 15:53).
(5) 전인류의 예외없는 부활이다(행 24:15).
5. 최후의 심판
1. 최후 심판의 성격
1) 미래적 - 부활 후에 있을, 장차 이루어질 사건이다(요 50:29; 행 24:25).
2) 유형적 - 가시적(可視的)인 사건이다(벧후 3:10)
3) 최종적 - 영원한 운명을 확정한다.
2. 최후 심판의 주체와 객체
1) 심판의 주체
하나님은 인간 구속을 위하여 낮아지셨던 그리스도를 대리자로 하여 심판하신다(마 7:23; 요 5:22; 롬 2:16; 고후 5:10; 계 19:11-16). 한편 천사는 심판의 수종자이며(마 13:41,42), 성도들은 심판의 협조자이다(고전 6:2,3).
2) 심판의 객체
사단(계 20:7-10)과 마귀들(마 25:41)및 불신자들이다(전 12:14; 마 13:36). 한편 이와 달리 성도들은 상급을 위한 심판을 받는다(고후 5:9,10).
3. 최후 심판의 근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의(義)가 심판의 표준이나 이는 대상에 따라 3가지 양태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아는 자에 대한 심판 기준이 더 엄격하다(마 11:21-24; 눅 12:28).
1) 이방인 - 양심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자연적 율법의 기준으로 심판받는다. 따라서 양심껏 살았던 사람은 지옥에 가더라도 그 형벌이 좀 가벼울 것이다.
2) 구약 시대의 유대인 - 율법
특별 계시로써 주어진 율법에 따라 심판받는다. 따라서 유대인들에 대한 심판 기준은 이방인보다 더 엄격하다고 할 수 있다.
3) 신약 성도 - 복음 및 사랑의 계명
복음 및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재해석, 즉 사랑의 계명에 따라 심판받는다. 따라서 신약 성도의 심판 기준은 구약 성도들보다 더 엄하다.
6. 최후의 상태
그리스도를 재판장으로 한 최후의 심판을 거친 이성적 피조물들이 영원토록 누릴 최후의 상태에 대한 언급이다.
1. 악인의 최후상태
1) 악인의 처소
지극한 고통이 있는 지옥이다(마 13:42; 계 20:14,15).
2) 악인의 상태
소극적으로는 신적 은총에서 끊어짐에 따른 영원한 행복에 대한 상실감(마 8:12), 적극적으로는 영육간에 미치는 모진 고통이다(계
14:10).
3) 악인의 영벌에 대한 반대 견해
사랑의 속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선 악인을 영벌하지 아니하시거나, 혹은 악인을 완전히 멸절시켜 아무런 기쁨이나 고통도 느낄 수 없는
무(無)의 상태로 만드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의인의 최후 상태
1) 의인의 처소
성도의 영혼들은 현재 낙원에서 임시로 거하지만(고후 12:2-4), 부활체(復活體)로 영원히 거할 곳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조성
될 새 하늘과 새 땅이다(계 21:1-4).
2) 의인의 상태
영원하며(계 21:3,4), 완전하며(고전 13:12; 15:49), 평화로우며(마 25:46; 계 21:3), 거룩하며, 영화로운 삶(계 7:9,10)을 살게 된다.
3. 사단의 최후 상태
1) 사단의 처소 - 악인처럼 지옥이다(계 20:10).
2) 사단의 상태 - 유황불로 영원히 고통을 당한다.
* 하나님의 결정은 절대적이시다. 계시록 21장 8절에 의하면, "두려워 하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는 유황불에 던져질 것이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단과 구원 둘 중의 하나를 택하심을 명백히 하신다. 고로 카톨릭에서 말하는 소위 "연옥"이라는 중간 층은 생각할 수 없다.
** 두려워 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자로서 창세기 3장 10절에 의하여 죄를 범한 자의 인간적 상태는 이미 두려워 하고 있다. 그러나 이사야 41장 10절에서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하여 "새하늘과 새땅"(계 21:1)을 보이시고 옛 것을 없애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복음)로 구원받음 현재의 믿음으로써 의로움을 받은 형제에게는 두려움도 수치심도 없는 구원의 상태를 의미한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값을 아직도 값없이 받아들이지 아니한 자는 분명히 둘째의 사망의 길로 던져짐을 기억하라.
종말론
[본문 해설]
종말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일방적으로 선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다 친밀한 관심은 예수그리스도의 승천 이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종말은 신앙인의 삶 속에서 또 다른 면으로 언제나 인식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종말적 신앙은 신앙인의 삶을 보다 성화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시앙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종말론이 잘못 전달 될 때 교회는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교회의 역사는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종말론은 신학적으로 상징과 신화로서 혹은 역사적 사건으로서 그리고 이미 실현된 종말로서 주장되기도 하는데,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종말적 경험이 성령 안에 있는 모든 신앙인들의 매일의 삶 속에서 체험됨으로써 신앙인의 궁극적인 지향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제 해]
시한부 종말론과 상관된 여러 사건들로 인해 한국 교계에서는 종말론을 말하는 자체가 꺼림직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종말론 없는 기독교는 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종말론은 기독교의 아주 중요한 신앙의 부분들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올바른 종말론의 확립은 올바른 기독교의 확립이라고 유추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1) 기독교의 독특성
기독교는 현재를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현재적 삶과 문화적 사명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종교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현재를 중시하는 것만큼, 그 이상으로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미래지향적인 현재적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현재적 보상보다는 내세와 다가올 세계에서의 축복을 더 중시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또한 그런 기독교의 성격이 박해의 역사 속에서도 기독교를 존속하도록 만든 원동력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2) 종말의 시작
종말은 언제 시작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지만 보통 예수그리스도가 초림한 이후 재림을 기다리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종말이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종말은 그 발생 시점을 미지수로 남긴 채 승천의 순간부터 기다려졌던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순간부터 진정한 의미에서의 종말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영접한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종말을 기대할 수 있고 나아가 이전의 삶에 종지부를 찍게 되기 때문이다.
3) 종말론의 신학적 위치
종말론은 전통적으로는 조직신학의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의 신학적인 진정한 위치는 맨 끝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임박한 종말을 고대하는 신앙이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고,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선포를 종말론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한 신학적 시도들도 상당히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그뿐 아니라 위르겜 몰트만(Jurgen Moltmann)은 종말론 조직신학의 맨 처음으로 그 위치를 바꾸면서 '희망의 신학'을 내놓아 현대신학의 큰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결국 종말론의 신앙의 전제였으며, 동시에 신학의 전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종말에 관한 상반된 해석들
1) 상징과 신화로서의 종말
종말에 관한 성서의 기록들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초대교회로부터 끊임없이 발생하던 흔한 일이었다.
종말을 기록한 성서 기록은 단지 인간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상징과 비유일 뿐이며,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사건일 수는 없다는 견해가 계속적으로 교회사 속에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계몽주의를 거쳐 현대신학의 자유주의적 학자들에게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계승되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의 도덕성을 강조하거나 혹은 아예 기독교를 윤리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갖고 있는 관점이다.
2)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종말
그러나 성서 기록의 문자적 해석과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보수주의적 입장에서는 종말을 역사적으로 발생할 구체적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종말에 관한 모든 기록들이 문자 그대로 발생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말에 관한 기록 자체를 비유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복음주의와 개혁주의의 입장인 것이다.
종말에 대한 정통적인 기독교의 흐름은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어느 한 정점의 순간에 일어날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종말론이 도덕적인 경고나 상징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긴급한 역사적 예언을 취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이미 실현된 종말
종말에 관해서 영국의 신학자 도드(C.H.Dodd)는 독특한 개념을 설정했다. 성령을 힘입어 병자가 고침을 받은 것이라면, 이미 천국이 너희 가운데 임했다는 예수의 말을 이용하여, 예수와 함께 이미 종말이 실현되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는 종말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이미 예수와 더불어 실현되었고 확대되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을 주장했다.
그러나 가장 성서적인 종말론이란 아마도 이 땅에서 천국이 확장되기 위한 노력들을 경주하면서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임재할 종말을 대비하고 기대하는 일일 것이다.
3. 종말론이 다루는 영역
1) 개인과 역사의 종말
종말론은 전우주적인 역사의 종국을 취급하며, 그 종국이 어떤 과정과 어떤 현상 속에서 이루어질 것인지를 성서의 계시들을 통해 연구해 나간다. 물론 전우주적 종국은 개인의 종말을 포함할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역사의 종말 이전에 끝을 맺는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에 관해서도 관심을 표명할 수밖에 없다. 결국 종말론은 미시적으로는 개인이 맞이하는 죽음에 관한 문제를 취급하며, 거시적으로는 역사의 종지부가 찍히는 모든 문제들을 취급한다.
2) 심판과 그 이후
동시에 종말론은 죽음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그 이후의 삶과 세계에 대해서도 취급한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기독교 신앙의 전제에 따라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신학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심판과 영생, 영벌을 종말론은 취급한다.
결론적으로 종말론은 개인적인 사후 세계와 세계적인 종말 이후까지도 그 대상으로 삼는다.
종말론은 그 시와 때를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전제하에 기피되어지거나, 혹은 독단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 각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재림을 고대하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날마다 하늘나라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자료 해설]
1. 내세 사상
1) 철학의 내세 사상
인류는 공통적으로 생의 과거·현재·미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철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즉 플라톤(platon)은 이미 영혼이 영성과 사후의 세계를 당대에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그의 이러한 사상은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 밖에 울프(Wolf)나 라이프니츠(Leibnitz) 등도 내세 사상을 여러 모로 변론키 위하여 노력했으며, 칸트(I.Kant)도 실천성의 가정으로서 영생의 원리를 주장하였다. 한편 미래의 현상에 대하여 커다란 관심을 보였던 스토아 학파는 계기적(繼起的)인 세계 순환기(worldcycles)를, 불교도는 세계 영겁(世計 永劫, world-ages) 등을 주장하였는데, 각 기관들마다 새 세계가 새로 출생, 소멸된다고 생각하였다. 그 밖에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 인도의 '시바신의 상징'도 윤회적 시간관을 말하고 있는데, 히브리인들만은 계시에 의존하여 선적 장래관(線的 將來觀)을 갖는 것이 특이하다.
2) 종교에서의 내세 사상
내세 사상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는 것이 종교이다. 이러한 종교는 과거의 미개한 종족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예를 들어 불교가 열반을, 회교가 육욕적 낙원을 각각 동경하여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3) 기독교의 내세 사상
여타의 이교적 내세관은 솔직히 막연하고 미확실하다. 반면 기독교의 내세관은 명료하고 신적 확실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자유주의 신학은 이러한 하나님의 확실한 은혜를 상실하고 말았다. 즉 영생의 복된 소식 대신 사회적 이상을 꿈꾸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신실한 말씀을 믿는 백성이라면 성경이 가르치는 내세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그것에 소망을 두고 오늘의 고난을 극복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으며(롬8:24), 오직 내세에서만 완성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13:10).
2. 교회사에 나타난 내세론
1) 초기
사도 시대부터 5세기초까지는 내세에 관한 각 요소, 즉 일정 기간의 육체적 사망, 그리스도의 재림, 영혼의 불멸,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부활, 대심판을 통한 영멸 등을 확실히 인식하고는 있었으나 그것을 교리적으로 구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첫 2세기 동안은 확실히 천년왕국을 믿게 되었으며, 1차 부활과 2차 부활을 확실하게 구별하게 되었었다.
2) 고대와 중세기
5세기 초부터 종교개혁기에 이르기까지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이 쇠퇴해졌으며, 반면 천년왕국적 견해가 성행하였고, 연옥설을 비롯한 교회의 중재, 죽은 자를 위한 미사, 관면(寬免) 등 그릇된 교리들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에 반하여 천년왕국론이 몇 분파로 등장하기는 했으나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기독교 예숙이 자주 내세론을 주제로 삼기에 이르렀다.
3) 종교개혁 이후
교회를 변혁시키기에 충분했던 종교개혁은 조잡하고 문란했던 천년왕국론을 깨끗하게 일소하였으며, 오히려 초대교회의 재림, 부활, 심판, 영생의 교리를 다시 채용하였다. 그리고 17세기의 경건주의는 천년왕국론을 다시 부활시켰고, 18,19세기에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8세기의 이성주의는 내세론을 폐물화 시키기에 충분했고 그 이후에는 재림론이 활발히 영향을 끼쳤다.
4) 현세기
현재 인류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내세론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많은 신학자들의 증언에서도 매우 잘 드러나 있다.
3. 실현되 종말론
도드(C.H.Dodd)의 실현된 종말론은 슈바이처(Schweitzer)의 연속적 종말론에 반하여 생겨난 이론이다. 원시교회의 신자들은 최후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대단히 확신에 차 있었다. 따라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역사적인 사건들은 그들을 흥분시켰으며, 이것은 곧 실망으로 이어졌다. 또한 이러한 실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소망했던 그들에게 연속적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실망중에서도 이미 임재하셨던 그리스도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실현된 종말론이었다. 결국 이것은 소망으로 작용하게 되었으며 앞으로 이루어지게 될 그리스도의 초역사적 재림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 것이다.
[본문 해설]
개인적 종말이라 함은 곧 육체를 지닌 채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의 죽음을 의미한다. 기독교는 개인적 종말에 대해 확고한 논리와 구체성을 증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육체를 지닌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불의의 사고나 질병, 혹은 수명을 다하여 자연사함으로써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은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은 곧 인간의 죄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러한 죽음의 원인이 되는 죄를 극복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개인적 종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성경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죽음은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기독교인은 죽음을 보다 초월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영원한 세계, 곧 하나님 나라에로의 입문에 해당되는 의식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제 해]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죽음 이후의 상태도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성경은 이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환난과 핍박 가운에서도 기독교가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것은, 바로 사후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 본 연구에서는 죽음과 그 이후에 대해서 잠시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신앙 경각심을 일깨우고자 한다.
1. 육체적인 죽음
1) 죽음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과 영혼의 분리가, 죽음에 대한 가장 간단하고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죽음은 육체와 영혼의 소멸이 아니라 양자간의 근본적 분리를 뜻한다.
동시에 죽음은 몸의 기능 정지와 육체의 분해를 비롯해 몸을 통해 이루어지던 영혼의 구체적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과들을 초래한다.
결국 죽음이란 인간 구조의 분리 그 자체와 그 분리가 몸과 마음에 유발시키는 결과에 대한 총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죄와 죽음의 관계
펠라기우스나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아담도 그의 범죄 여부와 상관없이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기 이전엔 죽음을 알지 못하던 영생의 존재였다. 성경은 죽음이 죄의 형벌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 인류는 전 역사를 통해서 죽음을 부자연스럽고 두려운 현상으로 간주해왔다. 죄는 깨끗하고 영원하던 인간의 생명을 더러움과 죽음으로 오염시켜 놓은 것이다.
3) 신자들은 왜 죽는가?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사함 받았고 율법에서 해방된 신자들이 왜 죽어야만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다.
왜 하나님은 신자들을 즉각 천국으로 들어올리시지 않는가? 다양한 대답 중 가장 적절한 대답은 죽음이 신자들의 성화에 궁극적인 도움이 되며 성화의 완성이 되기 때문이라는 대답이다.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육욕을 삼가고 자신을 돌아보며 내세의 소망들을 다시 한번 가다듬게 된다. 결국 신자들은 죽음이란 과정을 통해서 성화의 가장 큰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2. 불멸하는 영혼
1) 불멸의 의미
인간의 육체가 부패하는 것에 반해 인간의 영혼은 불멸한다. 원래 불멸이란 개념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적용된다. 하나님만이 본래적이고 필연적인 불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다른 모든 불멸성은 하나님의 불멸성에 종속된 것이다. 즉 인간의 영혼이나 천사 등이 소유하는 불멸성은 하나님의 의지에 종속되어 수여된다. 그러므로 불멸성은 그 개념이 단일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독교인의 불멸성은 죽음과 사망에서의 완전한 자유로움을 뜻한다. 불멸적 존재였던 타락 이전의 인간 상태에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영혼이 불멸한다는 논증
플라톤(Platon)은 육체는 분해 가능하나 영혼은 분해될 수 없는 단일체이므로 불멸한다고 생각했다. 칸트(I.Kant)는 악인이 잘되고 선인이 못되는 현세의 부조리와 불공정을 시정하기 위해서는 사후의 상벌이 필요하며, 결국 영혼은 불멸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인간 속에 영혼 불멸에 관한 보편적 관념이 심어져 있는 것을 들어 영혼 불멸을 주장하기도 한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이 형상대로 지음받았기에 불멸한다고 말한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그들이 아직 하나님 앞에서 불멸의 존재로서 살아있음을 보여 준다.
구약은 특히 사후에 대해서 죄인은 lwav(스올; 음부 지옥)에서 고통받고, 신자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의 비유들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님을 가르쳤고, 종말에 가서는 육신도 영혼의 불멸에 동참하게 될 것임을 자신의 부활을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처럼 성서는 불멸에 관한 가장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3. 중간 상태에 관하여
1) 선인과 악인의 중간 상태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이 처하게 되는 상태는 과연 어떤 것일까? 여기에는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개신교의 보편적 입장은 즉각적으로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Heidelberg Catechism )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은 신자의 영혼이 사후에 즉시 하늘로 들어올려지며, 죄인의 영혼은 즉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역사적 종말이 이루어져 영원한 천국과 지옥에 들어가기 전부터 신자와 죄인은 천국과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이 개신교의 견해이다.
2) 로마 가톨릭 설명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설명은 다르다. 완전한 영혼의 소유자들은 즉시 천국에 들어가게 되지만 완전히 정화되지 못한 영혼들은 연옥(煉獄)이란 장소에서 정화의 단계를 거쳐야만 한다. 이 연옥에서의 기간은 개개인의 형편에 따라 다른데, 경건한 사람들의 기도와 미사 그리고 선행에 따라 기간이 단축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연옥으로서 그리스도의 부활 때까지 구약의 성도들이 억류되어 있던 선조림보(Limbus Patrum)와 유아림보(Limbus Infantum)가 있다.
3) 부활 전 영혼의 의식 상태
여호와의 증인 드은 죽음 이후에 영혼이 수면 상태와 같이 된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죽음을 수면 상태에 비유할 뿐 수면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또한 불멸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인간에게 다시 주어진 선물이므로 죄인들은 여전히 가멸적 존재이며, 사후엔 그들의 의식 상태가 소멸 한다는 견해도 있다. 즉 신자들만이 조건적으로 불멸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여러 지지자들을 얻었으나 악인에 대한 영원한 형벌과 모순되는 면에 있어서 성서적 견해라고는 할 수 없다.
죽음 이후에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혹자는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 이후에는 심판만이 있다고 단호히 말하고 있다. 신자는 하늘의 복락을 누릴 것이며, 죄인은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다시 한번 확정될 것이다.
[자료 해설]
1. 죽음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
1) 무공포와 욕망
성도들에게 죽음이란 종말의 순간이 아닌 영화의 단계로 접어드는 완전한 생의 시작이다. 즉 사망의 권세에서 구출되어 영원히 주와 함께 생활하는 영생의 시작점인 것이다(롬8:11; 살전4:16,17).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하여 겁을 내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주와 함께 누리게 될 성결과 행복, 희락과 자유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생각하여 공포를 멀리해야 하며, 오히려 사도 바울 처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적극적으로 열망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후5:1,8).
2) 죽음을 위한 준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항시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한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시간이 매우 미확정적임을 알게 하는데, 따라서 각인은 죽음에 대한 슬기로운 대처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주의 강림이 어느 때인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주의 백성들은 그 시와 때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마24:44; 마25:13). 한편 죽음을 미리 묵상하여 올바로 인식하는 것도 현명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죽음이 가장 정확한 현실이며 동시에 가장 불확실한 미래임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죽음을 미리 묵상하며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해하며 고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2. 펠라기우스주의(Pelaglanism)
영국 출신의 수도사였던 펠라기우스(Pelagius)는 로마의 인기 있는 설교가였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죄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 부여받았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제자인 카일레스티우스(Caelestius)나 에클라눔의 쥴리안(Julian of Eclanum)은 그의 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는데, 후에 카일레스티우스는 원죄를 부인하는 주권자가 되었다. 그들은 원죄는 물론 아담으로부터 전가되는 원죄의 영향까지도 부인했는데, 인간의 의지는 언제나 선악을 판단할 수 있으며, 아담의 타락은 결코 개인의 의지의 절대적인 균형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 그 밖에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내적인 은혜를 부인했으며, 오히려 인간은 자유 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에게서 해방될 수 있다는 합리적인 도덕주의자가 되어버렸다.
3. 죄의 기원
1) 철학적·신학적 논의
고래(古來)로부터 인류는 각인을 영원한 비운에 빠뜨리게 한 죄의 기원에 관하여 흥미를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고심하였는데, 어떤 이는 악을 생(生)의 일부로 보고 사물의 자연적 구조에서 죄를 찾으려고 시도하였고, 어떤 이는 악이 현세에서나 선세(先世)에서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에 기원한다는 좀더 성경에 근접한 이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죄의 기원에 관한 최초의 언급은 이레나이우스(Irenaeus)에게서 발견되는데 그는 죄가 아담의 자원적 범죄에서 기원하였다고 주장하였고, 후에 영지주의자들은 이것을 오해하여 악이 불질에 내재한 것으로 여겨 물질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부정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그 밖에 오리겐(Origen)나 필로(philo)는 선세 존재의 자원적 범죄에서 죄가 기원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성주의와 진화론의 영향으로 시조의 타락의 영향은 점차 무시되었고 성경과는 무관하게 되었다.
2) 성경적 논거
성경은 죄의 기원을 인류의 시조에게 두고 있으나 아담의 죄가 외계의 영향인 바 죄의 기원을 영향자의 과거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창조 사역을 필한 어느 시점에 피조물인 천사들의 반역과 불순종이 있었으며, 이러한 특수한 쥐는 곧 시조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곧 인류에게 죄의 영향을 미칠 자의적 범죄가 낙원에서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죄의 기원은 아담에게 있음이 성경적이다.
4. 연옥(煉獄)
연옥의 교리는 로마 교회에 의한 것으로 완전히 깨끗하지 못한 자, 즉 소죄가 있거나 지상에서 형벌을 받지 않은 자가 정화를 위하여 반드시 가게 되는 처소이다. 이곳에서 영혼들은 물질적인 불을 통하여 어떤 것보다도 더욱 독특한 고통을 맛보게 되는데, 미사에 의하여 그 기간이 경감될 수도 있고, 신실한 자들의 기도 및 선행과 교황의 관면(寬免) 등으로 연옥의 고통이 감해질 수도 있다. 로마 교회는 이러한 연옥 교리를 마카비 2서 12장 42-45절에서 근거한다고 주장하는데, 외경에 기준한 것이므로 근거가 부족하다. 또한 이러한 연옥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부족한 것으로 만들거나 믿음으로 정의되지 못하고, 선행을 공로로 인정하며 교회가 죄의 형벌을 변경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성경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본문 해설]
1) 그물<saghnh : 사게네>
끝 부분을 사방으로 펼쳐 던지며 끌어 당기는 이 그물<saghnh : 사게네>는 그물 중 가장 큰 종류의 것으로 마4:18에 나오는 작은, 그물<ajmfiblstron : 암피블레스트론>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바다'는 세상이고 '각종'은 인종, 유형, 사회적, 지적 계급 등 모든 종류의 인간들을 상징적으로 말한다. 최후의 심판날에는 이 복음의 그물 속으로 모든 이들이 당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는 사람을 의인과 악인으로 구별할 수 있다.
2) 갈라내어<ajforiousi : 아포리우시>
'갈라내어'라는 원문 <ajforiousi : 아포리우시>와 '-중에서'를 뜻하는 복합 전치사 <ejk mesou : 에크 메수>의 바로 앞에 전치사 '아포' (ajpo, -으로부터)가 사용된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분리는 '의인 중에서' 악인을 끌어낸다는 의미의 '-로부터'이다. 이 악인들은 무가치한 존재들로 풀무불에 던져질 것으로 마13:30에서도 가라지가 '먼저' 거두어 단으로 묶여짐을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심판에는 먼저 악한 자들이 처리되고 의인들은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주제 해]
'E. 기번'은 '로마 제국의 흥망사'라는 책을 통하여 말하기를 '역사란, 그 거의가 인류의 범행, 우행, 복운의 등기부일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C.B. 베카리아'라는 사람은 '역사가 없는 나라의 국민은 행복하다'라고도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 인류의 역사는 결국 죄인 된 우리 인생들의 '흔적'이라는 성서의 교훈과 각 인격뿐만 아니라, 인류가 걸어오는 이 역사의 수레바퀴도 언젠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성서의 증언을 '역사적 종말론'이라고 합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역사의 종말론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서의 역사 개념(마13:24-30)
1) 하나님의 창조 활도 무대입니다
흔히 인류의 역사를 가리켜 그 주역을 '인간들'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때마다 '새 역사를 창조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의 역사관, 즉 성서가 말하는 역사의 주체는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구약성서의 열왕기나 역대기 혹은 예언서들을 우리가 읽을 때, '과학적 연대성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이 있을 줄 압니다. 성서의 역사책들은 인간의 연대와 치적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랄, 바로 역사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 결과를 말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서는 역사의 활동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그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구원 활동의 '무대'임을 교훈해 줍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을 등지고 자존하려는 인간 역사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끝없이 간섭하시고, 주관하시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야마는 하나님의 왕성하신 활동 무대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학자는 말하기를 '우리는 세계 역사의 판도가 워싱턴의 백악관이나, 혹은 크레믈린의 정책 결정에서 좌우된다고 여겨서는 어리석다. 역사 판도는 오직 교회를 증축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뜻 안에서 결정 짓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역사는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종속된 역사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같은 관점으로 성서의 역사 기술 부분을 대하십시오. 그리고 역사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명심하십시오.
2) 인간들의 죄악의 자취로 봅니다
이와 같이 성서는 역사의 주체를 하나님으로 보고, 그 하나님의 구원 활동과 그 뜻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이 세상의 역사로 봅니다. 그리고 자연히 그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배격하고, 대적 함으로써 자꾸 시행 착오만 남는 곳을 바로 역사라고 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요구를 반역한 이스라엘 민족들의 흥망사, 그리고 유일신 하나님 대신 온갖 인본 우상주의로 대적하던 고대의 국가들의 비참한 결과, 이것이 성서가 보는 인간 역사의 모습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오늘날도 인류는 공통적으로 역사에서 구원 활동을 계속하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선하게 세계를 이끌어가시려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자꾸만 외면하고 살육과 반목과 탐욕으로 분쟁하지 않습니까? 온갖 인본 우상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요구를 비웃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인간 역사는 곧 '죄악과 심판의 증거'일 뿐입니다.
2. 성서의 종말관의 발전(살전1:10)
1) 노아의 홍수(창6:17-20)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인류의 역사가 종말을 당할 것을 모형적으로 보여 준 사례입니다. 성서는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 하신 바'(벧후3:7)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2) 선민들의 심판(사9:1-7)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대해 가장 종교적인 이스라엘 민족마저 역사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이 구약성서의 요지입니다. 이제 인간의 역사는 도저히 '인간의 노력이나 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이 선지자와 예언자들의 동일한 메시지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어떤 초월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죄악으로 불든 역사를 깨뜨리시고 새롭고 온전하고 공평과 번영이 넘치는 새 역사를 창조하실 것을 내다 보았는데, 그와 같은 구약성서의 예언이 바로 '메시야적 종말관'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그 메시야 나라를 하나님의 주권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증언합니다. 물론 그 메시야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임은 당연합니다(참조; 막1:15)
3) 그리스도의 강림과 재림(마12:28; 28:31-33)
이처럼 유대 민족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물리적 힘으로 역사를 개조하심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던 이 기간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중간 기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약성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으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오신 메시야는 폭력과 무력과 권세로 악한 역사를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대속의 은혜와 사랑과 인내와 진리로 역사를 구원하시려는 분이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들이 바라던 역사 의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상충되고 대립된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인간들은 바로 그리스도 대신 '혁명가 바라바'를 원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주었습니다(참조; 막15:6-13). 이는 바로 역사의 주체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죄악 심리의 증거가 된 셈입니다. 따라서 성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류 역사의 심판의 증거물로 증언합니다(참조; 요3:35,36).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신봉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그야말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창조의 도구들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밝혀진 하나님의 주권을 경시하거나 대적하는 개인과 민족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점으로 영원한 종말을 당할 것입니다.
[자료 해설]
· 역사적 종말-심판
a.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짐(출15:18)
b. 역사의 종말은 하나님이 작정하심(마24:36)
c.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원과 멸망의 선포임(히9:28)
1. 성서의 역사 개념
a. 하나님의 역사
㉠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
① 영원 무궁히 다스리심(출15:18) ② 권세와 능력이 있으심(대하20:6) ③ 만군의 왕이심(시24:10) ④ 인간의 죄를 치심(왕하19:29) ⑤ 심판을 주관하심(시58:11)
㉡ 만물의 창조자이심
① 만물을 지으시고 복 주심(창1:28) ② 사람에게 세상 권세를 허락하심(창1:28-30) ③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남(렘51:15)
㉢ 만물의 소유자이심
① 세계의 주인이심(출19:5) ② 토지의 소유자이심(레25:23) ③ 사람은 위탁자임(대상29:14) ④ 짐승과 생축의 소유자이심(시50:10) ⑤ 은과 금의 소유자이심(학2:8)
㉣ 역사 속에 개입하심
① 온 땅을 감찰하심(대하16:9) ② 니느웨 성의 악함을 보시고 선지자를 보내심(욘4:10, 11) ③ 소돔 성을 멸하심(창18:23-32) ④ 노예 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심(출12:37) ⑤ 포로 된 유다 백성을 이끌어 내심(대하36:21,22) ⑥ 눌린 자와 갇힌 자를 해방시키심(눅1:689-75) ⑦ 죄악 된 자를 멸하심(렘14:10)
㉤ 역사의 심판자이심
①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나타내시는 역사임(출9:14-16) ② 죄인을 징계하심(삼하7:14,15)
b. 인류의 죄악 된 역사
㉠ 최초의 죄는 불순종에서 기인함(창3:6,7) ㉡ 가인이 아벨을 살해함(창4:8)
㉢ 노아 시대에 악이 관영함(창6:5) ㉣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바벨탑을 쌓음(창11:1-4)
㉤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을 원망함(출16:2,3)
㉥ 왕국 시대에 우상을 숭배함(왕상11:33) ㉦ 모든 인류가 마귀의 자식임(행13:10)
㉧ 불의와 시기, 분쟁이 가득한 역사임(롬1:29)
2. 종말론의 발전
㉠ 시대 상황
① 악이 관영함(창6:6,7) ② 강포가 충만함(창6:11)
㉡ 하나님의 작정
① 당세의 완전자 노아를 선멸하심(창6:9) ② 땅의 모든 생명을 멸하심(창6:17) ③ 노아의 족속만을 구원하심(창6:18)
㉢ 구원의 방주
① 의롭고 정결한 것만을 구별하심(창7:1-3,7) ② 홍수로부터 구원됨(창7:17,18)
㉣ 대홍수
① 사십 주야에 비가 내림(창7:12) ② 모든 물이 혼돈 상태로 돌아감(창7:11)
㉤ 홍수 후 하나님의 언약
① 땅이 마른 후 방주에서 나옴(창8:16) ② 생육과 번성을 약속하심(창8:17) ③ 노아가 정결한 짐승으로 번제를 드림(창8:20) ④ 새로운 축복을 내리심(창9:1) ⑤ 심판의 새 언약 · 물로는 심판하지 않으심(창9:16) · 무지개를 보이시어 증거로 삼으심(창9:16) ㉥ 홍수 사건의 의미
①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임(전3:17) ② 의인은 구원받음(창7:1) ③ 방주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십자가임(마26:26-28) ④ 방주에 들어오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받음(요3:16)
b. 그리스도의 심판
㉠ 구세주로 강림하신 그리스도
① 그 백성을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려 오심(눅1:68-79) ② 세상에서 복음을 전파하심(눅4:44) ③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구속하심(눅24:46,47) ④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심(행1:11)
㉡ 심판주로 재림하실 그리스도
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마16:19) ② 자기를 부인하는 자를 부인하심(눅12:9) ③ 의인과 죄인을 구별하러 오심(히9:28)
㉢ 그리스도 재림의 상징들
①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파됨(마24:14) ②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옴(롬11:11-32) ③ 그리스도의 대적자가 나타남(살후2:3,4)
[본문 해설]
인신록적 측면에서 볼 때 역사의 시작이 있었으므로 역사의 종말도 불가피하다. 또한 모든 것은 유한하므로 그 존재가 사라질 때가 있다. 그것은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므로 종말은 모든 피조물들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더욱이 죄악된 인간의 유한성은 성경의 증거를 통하여 그 종말이 뚜렷하게 기대된다. 성경은 세상의 종말을 두 번으로 이야기한다. 맨 처음의 종말은 노아의 홍수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것은 물로 인한 심판이었으며, 제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 이후의 세계는 변함없이 죄악이 관영하는 세계였다. 두번째의 종말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일관된 사상들 속에서 그리고 신약을 통해서 약속되었다. 이 최종적 종말은 불로 인한 완전한 심판과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종말은 궁극적인 새 세계를 지향할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최종적 종말의 때를 시기적으로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략적인 상황은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선포되었다. 그야말로 죄악이 관영할 때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며, 이 종말은 죄인들의 심판과 의인들의 구원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주제 해]
세계와 개인의 종말에 대한 관심은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사실 모든 학문과 종교의 일도 종말을 대비하는 데 그 주안점을 지니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 예로 천문학에서 우주의 기원을 고자 애쓰는 것도 실은 우주의 종말에 관한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또 각 개인들도 저마다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의문을 지니고 산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종말의 문제에 대해 모든 의혹을 해소했을까? 그렇지 않다. 성경을 통해 종말에 관한 진리를 믿고 있으니 그 궁금증과 의혹의 폭은 더 클 수도 있다. 그래서 그릇된 종말 사상에 편승해 자신과 사회에 큰 피해를 가져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종말 진리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난제들을 함께 알아보자.
1. 재림의 징조와 때
1)재림 진리의 중요성
재림에 관한 진리는 성경신학과 예언의 초점이라 할 수 있다. 역사와 세계의 종말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이것은 성경에 3백 번이나 언급되었고 신약에는 25절 중 한 번꼴로 재림에 관해 증거한다. 재림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생으로 진입하게 되고 모든 수고를 벗고 신천신지의 영원한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 재림을 삶의 절대적 소망과 힘의 근거로 삼고 있다.
2) 재림의 징조와 때
징조란 재림 전에 나타날 하나님 섭리의 특징과 이 세상의 현상을 말한다. 비오기 전 기상의 변화처럼 재림전 여러 가지 현상과 사건이 이 땅에 나타날 것임을 성경이 증언해 주기 때문이다. 만일 대림 징조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그 시기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그 징조로서 보편적인 도덕의 타락, 인류의 전쟁과 반목 그리고 교회의 세속화와 이스라엘 민족의 회심, 사탄 세력의 명백한 표출 등을 들고 있다. 그와 같은 일련의 징조 뒤에 재림 사건이 있게 되는데 그 날짜와 시기가 구체적이지 않다.
2. 휴거와 7년 대환란
1) 학설의 내용
휴거라는 뜻은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참된 성도들이 지상에서 공중으로 산채로 들려 올라가는 사건을 말한다. 이는 마24:40, 살전4:16, 계25:5 등 성경의 몇몇 구절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휴거설은 7년 대환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예수의 재림직전 이 땅에는 7년간의 무서운 환란과 고통이 있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고통당하지 않도록 그환란 전 또는 환란 중간에 하늘로 피신시킨다는 것이 휴거설의 요지이다.
2) 학설에 관한 성도들의 자세
첫째, 휴거와 7년 대환란설은 지상의 모든 교회가 전통적으로 신봉하고 있는 내용은 아니다. 휴거설에 관한 성경의 증언도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 단 몇 구절 있을 뿐이며, 공중으로 들림받는 '휴거'의 원뜻에 대해서도 그 해석이 다양하다. 또 이 설은 7년 대환란설과 맞물려 있어 그시기에 관해 어떤 이들은 화란 절반 기간 중, 즉 3년 반 때에 휴거된다고 주장하기도한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재림을 되풀이하신다는 모순을 갖게 된다. 성경은 주님이 반드시 이 땅에 한 번 재림하실 것을 보편적으로 증언한다. 결론적으로 이 휴거와 7년 대환란설은 모든 교회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설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이 설을 배타적으로만 대할 수는 없다. 단 한 구절이라도 성경과 주께서 증언하셨다면 사실 여부를 가리고자 연구하고 관심을 지니도록 노력해야 한다.
3. 천년왕국
1) 천년왕국설의 내용
이 천년왕국설은 계20:1-6을 근거로 한 종말학설 중 일부이다.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전천년왕국설'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이는 문자적으로 계20:6을 받아들여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천 년 동안 왕노릇 하리라는 주장이다. 즉 주님이 천년왕국 전에 재림하사 사탄을 결박시키고 첫 번째 부활된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지상왕국을 천 년 동안 건설하여 영화를 누리리라는 주장이다.
2) 천년왕국설의 문제
첫째, 과연 천 년이라는 요한 계시록의 증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상징적인 숫자가 많다. 유독 천 년이라는 가간만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견해가 있다. 그 다음 천 년이 지나면 다시 사탄이 활동하게 되고, 세상에는 전무후무한 진리에 대한 배교와 환란이 고개를 들게 된다(계20:3,7,8). 그리고 천년왕국 안에서도 계속 죽음, 즉 '사망 세력'이 잔존해 있다는 점이다(계20:5). 이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한 후에는 성도에게 슬픔과 죽음과 죄의 세력과는 관계없는 나라가 도래한다는 성경 전체의 증언과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천년왕국설을 현재 이 땅의 교회의 영광과 권세로 해석하거나, 어떤 이들은 세계 복음화로 인한 지상낙원 세계로 해석하기도 한다.
4. 연옥
연옥이란 개인의 종말 이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성화되지 못한 성도들이 훈련과 정화를 받기 위해 잠시 머무는 장소를 말한다. 이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내세관중 하나이다. 그러나 성경에 그와 같은 '반천국적인 장소'가있다는 증언은 없다. 한 번 죽은 후에는 심판이 이GT을 뿐이며, 악인은 단번에 영벌의 세계로, 의인은 영생의 세계로 간다고 단언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재림과 종말 심판 전에 성도와 불신자의 영혼이 기거하게 되는 '낙원'과 '음부'(16:22-25; 눅23:43)로 지칭되는 중간 처소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그 중간 처소는 k'연옥'과는 성질이 전혀 다른 곳이다. 낙원은 천국의 일부요, 음부도 지옥의 일부일 뿐 하나님의 종말 대심판 때까지만 머무는 임시 처소인 것이다.
이상 몇 가지 중요한 종말 진리에 대한 난해한 항목을 개괄해 보았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의 종말관은 오늘 현세의 상태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는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 안에 생활하는 자가 내일 영생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지 오늘과 다른 세계가 모순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관의 진수다. 성도에게는 다만 세계가 더 온전하게 바뀌고 완성되는 것이 종말이요 내세이다. 그러므로 여려 가지 풀 수 없는 난제가 있다 해도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어떤 삶의 자리 속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확신하는 성도에게 종말의 징조나 때나 그 후의 사건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자료 해설]
1. 재림의 징조들(전천년설의 입장)
먼저 민족이 민족을 그리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국제간의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마24:7; 막13:7; 눅21장; 계6:1,2) 이러한 전쟁은 재림의 시기가 가까울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다. 다음으로는 '난리의 소문'을 듣게 되는데(마24:6; 막13:6; 눅21:9) 계6:3,4에 보면 붉은말 탄 자로 인해 세상에서 화평이 끊어지고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셋째는 '처처에 기근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마24:7; 막 13장). 넷째는 계6:7,8에 청황색 말 탄 자가 나타나서 땅의 1/4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으로서 사람을 죽인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질병이나 온역을 가리킨다(겔14:21). 다섯째는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로 와서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인데(마23:5) 이것은 예수께서도 이미 예고한 바이다(마24:23,24;막13:5,6; 212:23). 마지막으로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고 천체가 이상해 질 것이며(벧후3:10; 계6:12-14) 이로 인해 세상은 붕괴 될 것이다. 즉 지상의 수목이 파괴되고 고기가 죽으며 강물이 쓰게 된다는 (계8:10,11) 것이다.
이러한 환란들이 모두 일어난 후에 그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보았던 것처럼 그대로 재림하실 것이다. r의 재림은 자신적이고(행1:11; 히9:28) 신체적이며(physical) 가견적이고(마24:30; 계1:7) 돌변적이며(Sudden) 영광적 승리적이고 종말적 완성적(final and completing; 마25:31 이하; 살전4:16,17)일 것이다.
2. 시한부 종말론의 오류
지난 1992년 공중재림과 휴거이야기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다미 선교회와 같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7세대를 나누고 각 세대마다의 인류 구원의 상이한 방법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 본문보다는 자신들의 교리를 우선시하는 태도요 성경에도 있지 않는 '7시 대설'은 오히려 그들이 약점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두 번씩이나 강림하게 함으로써 성경 해석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까지 된 데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지나친 문자적 해석 때문이었다.
그들은 666을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적용시킴으로써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한 의식을 한층 고양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성경적 발상이며 2세기의 몬타너스나 3세기의 이리니우스 또 1832년의 밀러주의나 1929년의 길선주 목사 사건과 같이 하나의 실패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3. 70년대의 새일교단의 종말론
이유성 목사를 교주로 창설된 새일교단은 계룡산에 자리잡고 있다. 이유성목사의 말세론은 자신이 받은 계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신비주의적 환상의 종말을 내세웠다.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는 심판때에 진노를 받지 아니하고 새 시대에 들어가는 신도는 새일 교단 신도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다림줄의 진리'의비결을 계시 받고았다고 주장하였다.그래서 이유성 자신을 '말세 비밀의 종' 혹은 '사명자'로 명하고 있다. 이유성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세의 비밀'은 말세 심판의 깊은 진리를 말하며 자신이 예언의 종임을 6가지 성구를 제시하면서 근거를 삼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성구들은 사11:1, 사41:14,25, 계7:2, 계10;7, 계11:3 등이다. 사41:25에 기록된 '해돋는 곳'을 한국이라 해석하고 통일교의 문교주나 전도관의 박교주와 상이하게 자신을 하나님이 보낸 말세의 예언자로 풀이하고 있다.
4. 80년대 애천교회의 종말론
애천교회는 대부분 통일교 원리를 표절하여 30개론이라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교주 정명석을 필두로 '신촌 5형제'에 의해 창설되었다.
정교주는 자기를 문선명 교주의 대권자로 부각시키면서 말세의 종말론적 의미를 삭제하고 새하늘과 새땅이 이 지상에 이루어지는 지상 천국론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그는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육체적 재림으로 인식하지 않고 영적 재림으로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으로 재림하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 가운데서 인물을 선택하여 그에게 영으로 재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그 중심 인물로 부상시켰다.
그는 정통 기독교의 종말 견해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서 오류가 발생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성경의 말세론은 천동설 시대의 것이므로 지동설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지동설적인 말세관을 가져야한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선포를 하였다. 바로 지동설적인 말세관은 정교주를 중심한 지상 천국론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은 대하35:18-26을 해석하면서 바벨론에게 멸망한 애굽, 갈그미스, 유다를 현세대적 쟁조에대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애굽은 통일교요, 우다는 기독교, 갈그미스는 북한이요, 바벨론이 애천교회라는 것이다. 결국은 당시 800만 기독교인들이 정교주 자신에게 굴복하게 된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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