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스크랩] 종말론

하나님아들 2012. 7. 25. 15:37

신학적으로 정의할 때 '마지막 일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개개인과 관련된 것이며 이세계도 관련된 것이다. 이것이 죽음부활이라는 말로 표현될 때 이 의미 속에서 발견되어 져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심판구원이 연결되어져야 한다.

 문자적으로는 "마지막 일들에 대한 말씀"을 의미하며, 인간의 종말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한분야이다. 전통적으로 종말론은 그리스도의 재림(파루시아),죽은 자의 부활, 영혼의 불명성,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등의 문제를 취급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대부분이 마지막 때나 영혼의 운명에 대한 공론을 일삼으려 하지 않고 칼빈(1509-1564년)처럼 "천국을 탐구하지 않은 채로 남겨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유리를 통하여 어둡게 볼수 있다는 생각으로 만족했다.

자유주의 개신교에서 종말론은 일반적을 과정이론(theories of progress)과 영혼의 불명성에 대한 형태를 취했다. 칼 바르트(1886-1968년)는 그이 후기 저작에서 부활과 재림의 상징들은 매우 심각하게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다른 한편 루돌프 불트만(1884-1976년)과 폴 틸리히(1886-1965년)는 이러한 상징들을 해석이나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요하는 신화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라인훌드 니버(1892-1971년)는 이 개념을 역사의 궁극적 의미를 믿는 것의 매우 상징적인 형식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Ⅰ. 들어가는 말

 Ⅱ. 몰트만 이전의 종말론과 역사이해

     1. 20세기 까지의 종말론적 배경

     2. O. Cullmann의 구속사적 종말론

     3. R. Bultmann의 실존론적 종말론

     4. K. Barth의 변증법적 종말론

     5. W. Pannenberg의 선취된 종말론

Ⅲ. 몰트만의 종말론

     1. 오시는 하나님

     2. 희망의 종말론

     3. 종말론과 역사

Ⅳ. 몰트만의 역사이해

     1. 역사학과 역사철학 비판

     2. 역사이해의 단서들

     3. 역사이해와 미래

     4.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

     5. 그리스도의 부활과 역사

Ⅴ. 맺는 말

 

 I. 들어가는 말

한국교회는 교파와 신학자에 따라서 종말론을 다양하게 이해하여 왔다. 이해가 다양한 만큼 한국교회는 그때 그때 목소리가 높은 쪽으로 몰리면서 신앙인들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종말론을 단순히 말세에 있을 내용을 조감도처럼 보여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한국교회에게 종말론은 말세의 비밀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종말론의 진정한 의미는 그러한 미래의 일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신앙을 소유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오늘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이루는 희망적 존재로서, 역사와 사회에 책임적인 사람으로서 살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종말에 대한 이해와 신앙에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오늘의 삶과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이 소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오늘날 종말론을 재발견하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종말적 신앙안에서 희망적인 존재로서 역사에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채찍질하는 몰트만(J.Moltmann)의 종말론과 이에 따른 역사이해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를 더욱 잘 살펴보기 위해서 우선은 몰트만 이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던 종말론과 그에 따른 역사이해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몰트만종말론을 정리한 뒤에 이 종말론적 신앙 또는 의식이 어떻게 역사를 이해케 하고 있는지를 살피려고 한다.

 

Ⅱ. 몰트만 이전의 종말론과 역사이해

1. 20세기 까지의 종말론적 배경

현대 개신교 신악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사건 중의 하나가 예수의 교훈과 초대교회의 사상권내에서 종말론의 지배적 영향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1) 19세기 신학자들은 주로 기독교와 문화를 종합시키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리츨(A.Ritschl)과 하르낙(A.Harnack)등은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안에서 사랑과 도덕적 행동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완성시켜 가는 윤리적 나라라고 보았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의 도덕적 진보와 정신적 계발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츨과 하르낙에 의해 대변된 이러한 하나님 상과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여 강력한 반발이 나타나게 된다. 바이스(J. Weiss)는 리츨이 예수의 말씀을 자세히 연구한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진화론적이고 비종말적인 사고경향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예수는 자기 시대의 중요한 정점에 서 있고, 스스로를 종말론적으로 지향된 구원을 선포하는 전파자로 확신했다고 주장한다.2)

바이스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미래 종말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데는 공헌을 하였으나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이며 결코 현재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하다. 슈바이쩌(A.Schweitzer)는 종말론적 개념들이 예수의 설교 뿐만아니라 그의 생애를 주관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27장 46절은 예수가 최후의 희망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인정하는 언어라고 한다. 이런 종말론을 철저적 종말론이라고 한다.

다드(C.H. Dodd)는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자기의 사역 속에서 이미 실현되었다고 가르쳤으며 따라서 예수의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주장한다.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이다.3)

몰트만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은 미래성을 상실당하고 있다. 자기 자신이 하나의 궁극적으로 의미있는 결단을 해야 하는 그 순간과 그 정황은 언제나 종말론적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르트(K. Barth), 틸리히(P.Thillich)등은 변증법적 종말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종말론은 현대 신학에서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제 다음으로 다른 몇몇 학자들의 입장은 몰트만의 종말론을 이해하는데 좋은 비교점을 제시하고 있다.


2. O. Cullmann의 구속사적 종말로

쿨만은 구속사의 기원을 성경을 통해 일관성 있는 구원의 발생사에서 찾고 있다.4) 그는 성경의 시간관과 역사관을 제시하면서 성경의 다양한 사상들의 종합을 시도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종말론적 이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종말론은 그가 이해하는 시간과 역사관과 깊은 연관이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역사를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관련하여 이미와 아직의 긴장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 쿨만에게는 중요하다. 이런 이해의 배후에는 윤회적이 아닌 직선적, 선상적 시간관이 놓여 있다.

“신약에서는 엄격하게 곧은 선상적 시간개념은 희랍식 원형적 시간개념이나, 구원을 저 너머에 두는 모든 형이상학과 구별되어져야만 한다.”5)

쿨만은 성경적 시간관을 제시하기 위하여 신약의 두 용어에 중심한다. “카이로스”는 고정된 내용을 담은 한정적 시점을 나타내고 “에이온”은 연장적인 시간을 나타낸다. 특히 에이온은 얼마라고 잴 수도 밝힐 수도 없는 연장시간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 경우를 “영원”이라고 한다. 쿨만은 이 영원을 플라톤식으로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시간 상태로 이해하는 것과 구분해서 ‘끝없는 시간’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영원성도 동일한 관점 아래에서 취급한다.

쿨만에게 있어서 신약신자들이 살고있는 세대는 중앙점과 끝점 사이의 긴장으로 점절되어 있다.

“신약성경 속에 있는 새로운 요소는 종말론이 아니라,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된 것’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즉 현재와 미래사이의 긴장이라고 부르는 것이 새로운 요소이다. 예수의 복음전파를 포함한 신약성경의 전체적 신학은 바로 이러한 긴장에 의해서 대별될 수 있다.”6)

이 구속사적 현재의 긴장구조에 있어서는 그리스도 중심에서 ‘이미’ 결정 내려지며, ‘이제’ 미래에 대한 기대는 이 ‘이미’에 대한 신앙에 정손되므로 ‘이미’가 ‘아직’보다 우위에 있다. 이런 시간관과 그리스도 중심적 역사관을 통해 쿨만의 종말론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적 요소와 아울러 이미 성취된 현재적 요소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 이상을 통하여서 쿨만은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라 가르치고, 심판이 이미 일어났으며 또한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3. R. Bultmann의 실존론적 종말론

몰트만의 역사이해는 종말론적이고 그리하여 그의 종말론 이해는 그의 역사이해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에게는 종말론과 역사이해가 분리된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라 “역사는 종말론 안으로 삼킨바” 되었다는 의미에서 양자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7)

몰트만은 이제 미래에 대한 신약성서의 개념들의 ‘실존론적 해석’의 필요를 느낀다. 이 실존론적 해석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몰트만은 ‘사실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을 구별해 사용하면서 예수의 구속사건이 지니는 사실성을 신화론적 표상으로 간주하고, 역사성을 실존론적 의미성으로 드러낸다.8) 몰트만은 이를 위해 ‘비신화화’라는 도구를 사용하였다.

몰트만은 신약성서 설교의 주제인 구속사건은 신화론적 세계관을 전제하였으며, 따라서 신약성서의 구속사건과 종말론은 모두 신화적이라고 한다.9) 예수의 설교에서 전제되어 있는 세계이해도 신화론적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약성서의 구속신화는 신화론적 종말론과 밀접히 관계되었음은 분명하다. 신학의 과제는 이러한 신화적인 틀에서 케리그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비신화화’ 작업이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있어서 종말론이란 종말역사를 의미하지 않고 현재를 최종의 결단시각으로 해석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종말론이란 우주적 종말이다. 재난을 동반한 역사과정의 종국이 아니라, 실존적인 결단이 요구되는 현재의 시각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런 종말론을 현재적 종말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종말론에서 볼때 기독교의 실존은 곧 종말론적 실존이다. 인간은 항상 미래에 존재해 있다. 이 때문에 ‘미래성’은 인간 현존재의 구조적 계기로서 ‘역사성’과 ‘시간성’에 속한다. ‘미래성’이란 인간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그의 현 실존에서 미래에 의해, 즉 그에게 부딪혀 오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몰트만의 종말론은 역사를 인간 실존안으로 끌어 들임으로써 역사를 잃어 버리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실존론적 종말론은 역사의 목표로서의 그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신실에 있어서 개인적 존재의 목표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실존론적 종말론은 역사 전체의 의미와 통일성에 대하여 아무런 얘기도 할 수 없다.


4. K. Barth의 변증법적 종말론

빠르트의 종말론은 그의 시간이해와 그리스도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는 영원한 시간이란 인간의 시간과 구별되면서도 인간의 시간의 근원이라고 본다.

즉, 영원한 시간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곧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의 시간성을 말한다. 이러한 전제 아래서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추상화되고 관념화된 내재적 하나님 대신 절대 타자로서의 초월적 하나님을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실현된 종말을 말하며, 인간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수직선적 종말을 말하고 있다. 이와같은 바르트의 종말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10)

첫째, 하나님과 인간, 영원과 시간 사이의 질적인 절대적 구별에서 출발하여 초월적 하나님을 강조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후기 사상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부정, 하나님과 인간과의 대립관계가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 용서와 긍정, 부정을 극복한 화해의 강조로 수정된다.

둘째, 바르트의 종말론은 ‘원역사’라는 말과 관련되어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에 대한 심판이며, 동시에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셋째, 바르트의 종말론은 구속사에 대해 비판적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 사건자체는 이러한 특수 종교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며, 구속사는 세계역사의 위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넷째, 바르트는 계시와 이성, 신앙과 이성의 절대적 대립관계를 주장하며, 계시와 신앙을 강조한다.

다섯째, 바르트의 종말론은 미래에 발생하게 될 어떤 사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종말론이란 우리가 그리스도를 직면하는 순간 순간마다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바르트로 대표되는 변증법적 종말론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장점이 있으나 종말론의 무게중심이 개인적 종말론에 기울어지고 있어서 그리스도와 역사의 참된 미래를 시간과 영원의 변증법으로 붕괴시키고 있는 문제를 갖고 있다. 또 하나는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을 세계 밖으로 몰아내며, 현 역사를 경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5. W.Pannenberg의 선취된 종말론

판넨베르크의 종말론은 한마디로 ‘선취된 종말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예수의 부활에서 역사의 종말이 현재한 것으로 보면서도 나머지 인간의 부활을 위해서 미래를 논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의 현재와 인류의 미래에서 역사의 종말을 보고 이를 ‘선취된 종말론’으로 발전시키고 있다.11)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예수의 운명안에서 역사의 마지막은 하나의 선취로서 미리 경험되어졌다. 또 예수의 지상적 선포는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예기(Antizipation)이고, 그의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은 세계 종말에 있을 죽은 자들의 부활의 선취(Prolepse)행위이다.12) 즉 우리에게는 아직 소망의 대상인 종말론적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이미 죽은자 가운데서의 부활을 통해 선취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오고 있는 모든 역사의 종말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 예수에게서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예수는 예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결정적인 자기 계시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예기된 종말이며 역사의 중간은 아니다.13)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 ‘종말’은 철저히 역사적 사건이다. 그에 대한 증명으로서 그는 종말의 선취사건인 예수의 부활이 철저히 역사적인 사건임을 지적한다. 이 개념은 그의 역사이해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실재적인 개념이다. 예수의 사건은 철저히 시간적, 공간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하면서, 이 역사적 사건이 종말에 대한 실재적인 선취라고 한다면 종말 역시도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 뒤엔 판넨베르크는 종말론과 하나님의 통치를 연관시킨다. 종말론적 구원의 중심된 내용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통치라는 것이다. 이것이 판넨베르크가 보는 종말론과 역사이해의 관계이다.

 

Ⅲ. 몰트만의 종말론

1. 오시는 하나님

몰트만에 의하면 파루시아는 예수의 길의 완성이다. 즉 그 분의 구원사역이 완성된 것을 의미한다.14)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리스도가 이 땅에 다시 오심으로서 땅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룸으로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은 이 세상 시간의 고통하는 본질을 종말에 이르게 하고 그의 영원한 나라의 영광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참된 희망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생성된 메시야 희망은 이스라엘이 고난과 역경속에 있으면서 더욱 구체화 되어 갔다. 그들은 메시야의 오심 속에서 하나님 자심의 오심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했다.15) 메시야 희망은 곧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에 관한 희망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 때를 기다리는 것이 메시야 사상이라고 할 것 같으면 메시야 사상은 곧 종말론적 사상이며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은 종말론적 의를 기다리는 것이다.

몰트만에게 있어서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장차 올 세계 구원, 곧 모든 민족들의 메시야적 평화가 실현되고 하나님의 창조가 영광의 나라로 완성됨으로써 오게되는 세계 구원을 가리친다. 몰트만에 의하면 메시야가 올 때 메시야는 두 가지를 모두 구원할 것이라고 한다. 첫째로 메시야는 파괴의 세력들을 인간으로부터 추방할 것이며, 둘째 그는 이 파괴의 세력들 자체를 파괴의 기능에서 구원하여 다시 창조자를 위하여 봉사하도록 바로 세울 것이라는 것이다.16)

이와 관련하여 몰트만은 오시는 이(Der Kommende)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17) 첫째, ‘오시는 이’라는 표현은 우선 구약에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하나의 암호로 본다. 이는 하나님의 도래에 대한 희망과 연결되어 있다. 둘째,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분이라고 한다. 셋째, 이스라엘의 메시야인 예수는 메시야의 날에 나타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넷째, 인자이신 예수는 인자의 날에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해서 그의 나라의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다섯째, 몰트만은 영광의 왕국에서 모든 사물이 새롭게 창조된다는 관점에서 창조의 중재자인 ‘영’과 ‘말씀’의 파루시아 역시 기다릴 수 있다고 본다. 창조주가 종국에 가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라고 선언한다면 창조의 말씀 역시 창조의 영 안에서 그 곳에 함께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다.18)


2. 희망의 종말론

몰트만의 종말론의 가장 큰 기여는 무엇보다도 종말론을 기독론 안으로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기독론의 모든 내용을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재조명하고 그 종말론을 희망의 종말론이 되게 하였다는 데 있다. 그의 종말론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9)

첫째, 몰트만의 종말론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밝은 소망을 비춰주고 있다.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진 희망이야말로 참 희망이며, 이 시대를 구원할 유일한 길임을 몰트만은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둘째, 몰트만은 이 희망은 배고픈 사람들, 실직자들, 병자들, 고난을 당하는 자들을 포함하는 집합개념인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할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는 불의한 자들에게 임할 대 보복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의가 이루어지는 평화의 날, 축복의 날, 기다려지는 날이라는 것이다.

셋째,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그의 부활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생애도, 그의 고난도 그리스도의 파루시아를 향한 묵시적 사역으로 본다.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속에서 이 땅의 모든 소망을 발견하며 이 부활은 바로 마지막 날의 모든 사람들이 부활할 전조라고 이해하며 그의 종말론 속에는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서 부활을 중요한 종말론적 사건으로 파악하고 있다.

3. 종말론과 역사

몰트만은 일반 역사신학자들의 신학이 종말론적 성격을 지닌 것은 사실이나 그 신은 에피파니(Epiphanie)의 신이 될 위험이 있다고 보고, 그는 희망의 종말론을 이야기 했다. 여기서는 종말은 없는 것도 아니며 역사 저편에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아니하였으나 종말의 힘이 지금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신학자들이 전체 현실을 역사로 보고 보편사를 계시로 보는 데 반해 몰트만은 역사의 본래적 범주는 미래라고 보고, 아직 아닌 현실을 역사로 보고, 약속을 계시로 파악한다.

따라서 몰트만은 종말을 역사속에 전적으로 새로운 것의 도래를 의미하는 강림(Adventus)과 미래(Futurum)로 구분하고 후자를 희망의 종말론을 위한 용어로 채택하며 이 미래를 역사 한 가군데로 끌어 들이고 있다.20)

 Ⅳ. 몰트만의 역사이해

1. 역사학과 역사철학 비판

몰트만은 역사적이라는 말과 말과 사적이라는 말을 엄격히 구별한다. 사적이해란 유비적 이해이며, 이에 따라 모든 사건은 기본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요청하는 일정한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고 하였다. 역사가는 사적 방법에 의해 역사를 탐구하며 역사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런데 변화하는 역사를 파악하려는 역사가는 그 변화속에 있는 내재적 로고스를 찾으려고 하고 그 로고스를 찾았다고 믿는 순간 역사는 파악되지만 그 역사는 이미 역사가 되기를 중지한다. 이러한 역사철학은 결국 역사를 정지시키고 멸절시킨다고 비판한다.

“역사학과 역사철학으로부터 나온 시도는 역사의 정의와 파악과 이해인 바 이들은 불가피하게 역사를 중지, 부정, 멸절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역사의 기원과 본질과 실체에 대한 주도적 질문은 역사가 만드는 구체적 운동, 변화, 위기, 혁명, 불변하는 것, 생존하는 것, 모든 세대에 타당한 것과 관계시킨다.”고 한다.21)

역사는 움직임이며 변화이다. 그런데 그것을 파악하려는 역사학과 역사철학은 결국 역사로 하여금 역사이기를 그치게 하는 시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탐구방식은 헬라적 사고에서 온 것이므로 몰트만은 이러한 역사탐구 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2. 역사이해의 단서들

몰트만은 역사이해를 위한 단서들을 그의 저서 곳곳에서 나름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첫째, 역사는 세계의 창조와 함께 시작되었다. 창조된 세계는 그 자체속에 폐쇄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미래를 위하여 열려있는 역사이다.

“태초의 창조를 시간적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하였으며, 따라서 역사와 미래에 대하여 개방되어 있는 체계로 이해하고자 시도하였다. 이제 ‘완성가운데 있는 창조’를 이해하기 위하여 시간적 창조로부터 영원한 창조로의 전이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22)

둘째, 역사는 종말론적 계시의 술어이다. 역사의 의미가 신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종말론적인 연관에 의해서 말해진다면 일반역사는 단순한 내재적 사건의 인과관계로 이해되지 않고 신의 종말론적 계시사건의 술어로서 이해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로서 일반 연대기적 문서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역으로 미래로부터 현재를 통해서 과거로 그 의미가 밝혀진다.

셋째, 역사의 본래적 범주는 미래이다. 몰트만이 바라보는 인간의 세계는 미완성의 상태이다. 따라서 미래의 관심을 지향할 수 밖에 없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미래의 완성을 향한 “도상의 존재”이다. 현재의 상태속에 있는 부정적인 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미래를 향하여 끊임없이 변화되고 건설적으로 개혁되며 추진해야 될 존재이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존재자의 기본적인 성격은 미래성에 있다. 이 미래를 향한 과정을 우리는 역사라고 부르고 그 역사의 본래적 범주를 미래라고 한다.


3. 역사이해와 미래

몰트만은 청조와 더불어 시작된 세계는 창조의 완성과 함께 종말을 이룬다고 보았다.

“시간적 창조의 완성은 인격적 종말론에서는 시간적 삶으로부터 영원한 삶으로의 전이이고, 역사적 종말론에서는 역사로부터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의 전이이며, 우주적 종말론에서는 시간적 창조로부터 영원한 신격화된 세계의 새 창조로의 전이이다.”23)

“땅위의 시간은 그의 구성적 가능성들에서 약속의 시간이다. 그의 시간의 본질은 시간의 시작이 미래였던 것처럼 미래성이다.”24)

이러한 시간성에 대한 이해에서 볼트만은 미래에 정초된 역사이해를 말하고 있다. 시간의 원천은 미래에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하면서 “회상되는 과거 - 기다려지는 미래”라는 역설적 의미로 역사의 본질을 밝히고 있다. “역사는 고난당하며 행동하는 인간의 경험들과 기다림들에 의하여 구성” 25)되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

앞에서 살핀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형식 속에 그리고 약속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역사 속에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처럼 몰트만은 ‘계시’가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약속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약속은 동시에 종말론적 개방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약속은 앞을 지시하고 앞을 향하여 인도하는 ‘열린 계시’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계시가 열려 있다고 하는 것은 계시가 인간의 세계 경험을, 자신 안에 갇힌 신성의 우주적 형상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대하여 열어 놓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시가 약속으로 이해될 때 이것은 종말론적 개방성을 얻게 된다. 그것은 미래의 목표와 하나님 나라의 성취의 약속 속에서 앞을 지시하고 앞을 향하여 인도하는 계시가 되며, 성취와 아직 아님의 긴장 속에서 현실 속의 부정과 모슨을 경험하면서 인간과 그 세계 현실을 역사적이 되게 한다.26)

몰트만은 이러한 변증법적 사고를 통해서 약속된 일치와 외화의 구별 속에 있는 인간의 모습과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 사이의 모순을 설명하는 가운데, 계시의 약속의 성격이 미래를 제시하며 세계를 역사로서 경험하게 해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약속의 회상은 하나님의 계시를 종말론적으로 미래를 향해 열어주며 인간과 세계의 현실을 역사적이 되도록 개방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서 미래적 전망과 목표의식을 지닌 역사이해는 단지 역사 이해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을 변혁시키는 정치적 해석학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그는 몰트만과 바르트의 주관성의 신학을 극복하고 세계와 역사와 인간 존재를 공히 수용하는 역사관을 수립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5. 그리스도의 부활과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은 십자가와 부활로써 완결된 것이 아니라, 아직 미래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미래는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회상함으로써 예기된다고 한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적 사실이 아니라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한다고 말한다. 부활은 그것이 소위 역사라고 하는 것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미래적 사건에게 길을 지시하여 줌으로써 역사를 열어주기 때문에 역사적이라고 한다.27) 몰트만은 이 그리스도 사건에서 약속되고 기대되는 미래의 역사를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의의 약속, 즉 십자가와 부활 속에 계시된 하나님과의 화해와 삶의 의인을 말한다.

둘째,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심으로 되는 명의 약속이다.

셋째, 신의 나라의 약속, 그것은 존재의 새로운 전체성 가운데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는 나라이다.

세계의 역사는 그 자체 “되어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있으며, 일어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의 삼투속에서 서로 안에 스며든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모든 사건 속에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모든 사건이 하나님에게 작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공동체의 영’은 ‘부활의 영’으로서의 영광의 선수금일 뿐이지, 이 영광 자체는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를 그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은 그의 나라 안에 있는 그의 영광과 세계의 새창조를 향한 도상에 있는 하나님이다.28)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기쁨은 온 우주의 구원에 대한 우주적이며 종말론적 전망들을 전개한다. 무엇을 위한 구원인가? 영원한 기쁨의 잔치 속에서 모든 피조물과 모든 창조의 사귐은 하나님에게 찬송과 찬양을 드릴 것이다. …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사람들의 찬송과 찬양은 그들 자신의 이해에 따라 우주적 예배의식과 하늘의 찬양의 작은 반향이요, 모든 다른 생물의 표현된 현존의 기쁨의 작은 반향이다.”29)

 

 Ⅴ. 맺는 말

몰트만에 따르면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을 ‘희망의 하나님’내지는 ‘미래를 존재방식으로 가지는 하나님’이시며, ‘오시는 하나님’으로 인식된다. 몰트만의 사상에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계시들은 본질적으로 약속들이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계시는 일차적으로 약속의 용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들은 어떤 사건 속에도 완전히 용해되지 않고 언제나 넘쳐나서 미래를 가리킨다. 이와같은 몰트만의 확신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은 약속의 형식 속에, 그리고 약속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역사 속에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 역사속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보고 무조건 현실의 고난을 참으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의 통해서 죄악과 고통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향하여 참된 희망으로서의 파루시아를 가져와 주시는 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오심을 기다리면서 현실 세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주님으로 말미아아서 참된 소망과 생명이 우리에게 임할 것을 믿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몰트만의 ‘희망의 종말론’이 현실세계의 사람들에게 주는 힘이 있고, 역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강한 책임의식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요소가 있다. 몰트만은 현실을 긍정도 부정도 않는다. 다만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현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희망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여기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한 것이며 그리스도에 속한 것이지만 그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 속에 침투하여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확신차게 말하고 있다.

------------------------------------------

종말론은 크게 개인적 종말론과 우주적 종말론으로 나뉜다. 즉, 개인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을 때에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종말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은 학자들마다 상당히 태도에 차이가 있다. Berkhof는 종말론을 매우 간단하게 다루고 있다. 또, Grudem은 개인적 종말론은 다루지 않고 우주적인 종말론만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그 비중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지만, 종말론이야말로 성도들에게 소망과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의 비젼으로 삼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종말론의 영역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종말을 바라보며 소망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제1부 개인적 종말론

 

1. 육체적 죽음

 

Berkhof의 육체적 죽음에 대한 가르침은 아주 간단하다. 육체적 죽음을 볼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생의 자연적 관계들이 분리되는 것"1)을 말한다. 이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원래 창조될 때부터 죽도록 만들어졌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칭해지는 신자들은 그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도리어 성화의 마지막 단계이며, 영화의 첫 단계로서 주어진 것이다.

위의 입장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죽음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대한 반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의 증인 같은 경우는 영혼의 불멸을 믿지 않는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같은 경우는 질병과 죽음의 실재에 의문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죽음에 대한 이견을 가지고 있는 단체들은 주로 이단임이 판명된다. 이단적 종파가 아닌 이상, 육체적 죽음에 대한 입장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중간 상태

 

중간 상태, 중간기란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은 후, 부활하기까지의 기간동안을 말하는 것이다. 그 기간동안 그 사람은, 또는 그의 영혼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 의견을 같이하는 경우라도,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존재한다.

 

1) 음부(스올-하데스)설

경건한 자나 악인이나 모두 죽음 이후에는 스올(히브리어), 또는 하데스(헬라어)라고 불리는 중간 지역으로 내려가 기다리게 된다는 입장이 있다. 즉, 이 동안에는 즐거움도, 슬픔도 없는 기간을 보내며 기다린다는 말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진 입장과 비슷한 입장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스올이나 하데스라는 단어가 나타나긴 하지만, 이들이 죽은 영혼이 일시적으로 거하는 어떠한 영적인 기간, 또는 장소라는 함의를 찾기는 힘들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이들을 무덤, 또는 죽음의 상태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2) 연옥, 선조림보, 유아림보

이는 로마 카톨릭의 입장이다. 죽을 때 완전히 성화된 영혼들은 즉시 천국에 올라가지만, 그렇지 못했던 자들은 연옥에서 생전에 다 받지 못했던 연단을 받고서야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연옥에서 지내는 기간은 신실한 자들의 기도와 선행에 의하여 짧아질 수도 있고,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선조림보란 구약의 성도들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연단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한 천국에 올라가지 못하고 선조 림보란 곳에서 기다리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머물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이들도 함께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유아림보란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의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유아림보에 있는 영혼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며, 영원히 형벌도 없고, 천국의 즐거움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3) 영혼수면설

영혼이 육체를 떠나 무의식의 상태에 재림시까지 머물게 된다는 입장이다. 이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가진 생각인데, 의인은 죽은 후에 수면상태에 들어갔다가 재림 때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4) 제2시련설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이 중간 상태에서 회개와 신앙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입장은 성경에서는 전혀 지지되지 않는다. 물론 엡 4:8-9, 고전 15:24-28, 빌 2:9-11, 골 1:19-20, 마 12:31-32, 벧전 3:19, 4:6 등의 근거를 제시하며 제2시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러한 구절들은 그렇게까지 설득력이 있질 않다. 오히려 불신자들의 사후상태가 고정된 것으로 말하는 구절들이 훨씬 강력하다(전 11:3, 눅 16:19-31, 요 8:21-24, 벧후 2:4-9, 유 7,13). 또한 최후심판은 지상생활에서 행한 것에 따라 결정됨을 보여주고 있다(마 7:22-23 10:32-33, 25:34-46, 눅 12:47-48, 고후 5:9-10, 갈 6:7-8, 살후 1:8, 히 9:27).

 

결국, 육체적 죽음이 이루어진 이후 그 영혼은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 유무에 따라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다. 물론 천국에 들어간 자와 지옥에 들어간 자가 완전한 복락과 완전한 저주에 처한 것이 아니다. 완전한 복락은 육체로서 다시 부활하게 되는 그 때에 이루어지게 되고, 또한 완전한 저주 역시 육체로 부활한 후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되는 것이다.

 

 

제2부 일반적(우주적) 종말론

 

전통적인 조직신학에서, 우주적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전제한다. 사실 종말론에서 재림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전통적 입장을 따르는 상황이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더아상의 이견이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종말이란 것을 단지 재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어 나가는 것을 종말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종말론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부분도, 전통적인 조직신학이 넘어야 할 한계라고 하겠다.

 

1. 재림

 

1) 재림 전의 대사건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일어난 중대한 대사건들이 언급된다. 이방인의 부르심, 이스라엘의 회심, 적 그리스도의 출현, 표적과 기사가 일어남 등이 재림 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된다.

 

2) 재림

앞에서 말한 재림의 표적들이 나타난 이후에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 가운데 오심으로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 재림은 인격적으로, 형태적으로, 가시적으로, 돌발적으로, 영광스러운 승리로서 이루어질 것이다.

 

2. 천년왕국과 부활

 

1) 천년왕국

이는 하나님 나라를 다룰 때에 1강에 걸쳐서 설명한 문제이다. 여기서는 네 가지 다른 입장이 있다는 사실만을 제시하고 넘어가도록 한다. 천년왕국에 대해서는 역사적 전천년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의 다른 입장이 존재한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받아들일 수 있는 입장은 역사적 전천년설과 무천년설이며, 무천년설의 입장이 더 많은 지지자??을 가지고 있다.

 

2) 부활

부활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가의 문제도 전통적 입장에서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구약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고 가끔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올바른 주장이 못된다. 그리스도는 출애굽기 3:6에서 이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셨던 것이다."2) 구약 역시 성도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약에서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부활을 주장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하나만 제시하면 증거로서는 충분한 것이다.

부활이 어떠한 형태로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전통적 입장은 신체적 부활이며, 의인과 악인의 동시부활을 주장한다. 즉, 이 부활은 상징적인 것도, 영적인 것도 아니라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러한 육체와 같이 육체로서 부활한다는 것이다. 다만 더욱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부활시에는 의인 뿐 아니라 악인도 함께 부활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악인의 부활을 부정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의인과 악인이 함께 일어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가르친다.

 

3) 부활의 시기

부활이 언제 있을 것인가? 전통적인 입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대주의자들은 이렇게 단순히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의인만이 부활하며,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야 악인들이 부활하게 되리라고 주장한다. 이는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무천년적 입장을 지니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러한 생각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못된다.

 

3. 최후 심판과 최후 상태

 

1) 최후 심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 후에 이루어질 일이 바로 최후의 심판이다. 심판장은 그리스도께서 되실 것이다. 천사들이 이 대사업에서 그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의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그 심판은 공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심판의 표준, 즉 법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이 될 것이다.

 

2) 최후 상태

최후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주로 악인의 상태와 의인의 상태를 나누어 생각하게 된다. 우선 악인의 경우는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형벌의 장소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실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있지만, 우리의 입장은 그것이 영적인 장소이건, 실제적 장소이건 간에, 성경이 장소적 명사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지옥이라는 형벌의 장소가 있다고 본다. 그 형벌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은총을 영원히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경험하며 살지만, 거기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은 영원할 것이다. 미래의 형벌이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적어도 성경의 계시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 형벌이 영원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의인의 경우는 새로운 창조를 경험하게 되어, 그 몸이 영원히 사는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천국에서 영원한 거처를 삼고 살게 될 것이다. 그 상급은 영원한 생명이며,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을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Berkhof는 이 천국의 복락에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편다.3) 그는 단 12:3, 고후 9:6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후 9:6은 헌물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많은 헌물을 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보답을 주시리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이러한 주장에

1. 들어가는 말.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꼴이었던 이장림 목사의 시한부 종말론이 신학적 기반이 취약한 한국 기독교계를 강타한(1992년) 이래로 종말론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여야 할 필요성이 고조되었다. 뿐만 아니라 인류 생존의 위기인 환경문제가 대두된 이래로 관습적이고 교리적인 종말론은 오히려 묵시적인 우주적 파국과 연결되어 환경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인류멸망을 계속 부채질하고 있다. 이런 필요성과 이유 때문에 우리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종말론에 대한 바른 이해가 더욱 시급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약의 종말론이 방대한 연구과제로 떠오른다. 그런데 우리의 연구대상인 신약의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 안에 담겨있는 예수의 종말론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의 종말론은 신약학계에서 200년 이상 줄곧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어왔고 또 앞으로도 되어갈 전망이다. 이러한 신약학계의 다양한 연구를 통하여 지금까지 예수의 종말론에 관한 여러 학설들이 제시되어 왔다. 이것에 관한 제학설들을 연구사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A. Ritschl은 “윤리적 종말론”을 제시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고 공동체 내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을 인도하길 원하는 목표인 최고선(最高善)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사랑에서 우러난 상호간의 행위를 통하여 실현되는 인류의 윤리적 공동체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역사적 발전을 통하여 자란다.
이 견해에 반대(反對)하여 J. Weiss는 “철저한 종말론”을 주창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엄격히 미래적이고 초(超)세상적인 크기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로서 가까운 미래에 아직 그 세대 내에서 우주적인 파국을 통하여 동터온다.


이와 같은 철저한 종말론으로부터 R. Bultmann(과 M. Dibelius)은 “현존적 종말론”(die aktuelle Eschatologie)을 발전시킨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을 묵시론에서 빌어왔고 한번도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도래에 관하여 말한 적이 없다. 그는 세례요한과 마찬가지로 임박한 최후(의 날)를 선포한 선지자였다. 불트만은 이러한 임박한 세계 전환기에 대한 신화적 선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적으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는 예수는 세상에 반대하고 하나님을 찬성하는 결정적인 결단이 자기의 말씀에 대하여 지금 제공되고 있다는 것을 이런 방법으로 둘러 말했을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입장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며, 그리고 그의 결단의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의식은 결단의 시간이 세상에서 바로 여기에 와 있다는 의식으로 나타난다.
이에 반하여 C.H. Dodd은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윤리가 아니라 능력이다. 이 나라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재앙과 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성의 영향력 있는 관철인데 예수의 오심 안에서 이미 현재적이다. C.H. Dodd의 영향을 받은 J. Jeremias는 그의 설을 수정해서 대안으로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을 예수의 비유연구를 통하여 제시한다.


불트만과 아주 유사한 입장을 취하면서 H. Conzelmann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미래적 종말론”을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에게는 그렇게 가까이 있어서 그것은 이미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없다. 관찰자가 오히려 완전히 요구되어진다. 예수는 언제라는 질문을 넘어서 버린다. 그의 부르심을 듣는 자는 즉각적인 회개이외에 더 이상 아무것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W.G. Kümmel은 위의 입장들이 적합하지 않다고 보면서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종말론”을 제시한다. 그는 예수가 그 자신의 선포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영향과 자신의 죽음 후에 그 나라의 궁극적인 실현 사이의 중간시기를 고려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와 미래적 도래를 모두 말했다고 생각한다.


H. Conzelmann과 W.G. Kümmel과는 조금 달리 E. Jüngel은 “현재에서 시작되고 있는 가까운 미래적 종말론”을 주창한다. 그는 불트만이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비유들을 인용하면서 씨앗의 비유는 그 미래적 관점으로부터 현재를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라고 한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미래적인 것으로 보게 된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통치의 미래적인 차원에서 특이한 것은 이 미래가 현재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에서 시작되고 있는 가까운 미래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미래는 장래에 올 그 무엇이 아니라 현재로 투사되고 있는 미래이다. 즉 이 미래 -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 - 는 예수를 통하여 만나게 되는 하나님 사랑의 제안을 통하여 현재로 투사된다. 신약의 종말론의 전제로서 이런 예수의 종말론은 신약의 종말론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신약의 종말론(=신약성서 기자들의 종말론)은 다른 신학적 관점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포뿐만 아니라 인자의 재림, 성령론, 기독론, 교회론, 구원론등과도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데 특별히 재림과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연결되어 있다. 신약성서의 기자들은 저마다 각기 나름대로 종말론을 그가 속해있는 시대적 상황하에서 재림을 이해하는 대로 전개하고 있다. 재림과 관련하여서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나는데 이들의 종말론을 연대기적으로 개관하면, 우선 바울은 AD 약 50년에 집필한 그러므로 그가 가장 먼저 쓴 데살로니가전서에 의하면 임박한 재림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교인들에게 생전에 도적같이 임할 “임박한 재림에 대하여 항존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권면한다(비교. 살전 4:13-5:11). 거기에 따르면 재림은 꼭 일어나며 그것도 곧 일어난다. 재림 때에 살아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보다 “결코 앞서지 못한다”(살전 4:15). 그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후에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살전 4:17). 이처럼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임박한 재림을 확언한 바울은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이것에 관하여 훨씬 더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7절에서 재림 전에 죽는 교인이 생길 것을 완전히 배제했지만 AD 54/55년에 집필한 고린도전서 15장 51절에서는 죽는 교인이 몇 명 있을 것으로 본다. 마지막에 기록한 로마서에서는 임박한 재림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바울에게서 재림이 지연되고 죽는 사람이 생기자 임박한 재림기대에 대한 표상이 처음에는 수정이 되었다가 더 나중에는 완전히 포기되었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Q저자는 AD 약 50-70년에 집필한 예수의 어록에서 재림의 지연 때문에 임박한 재림 기대를 언제 오실지 모르게 갑작스럽게 오시는 재림의 항시 기대로 변경하여 신자들의 나태해짐을 경고한다(마 24:39-51 병행 눅12:36-46). 마가는 유대 전쟁으로 인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는 상황적 시점에서 인자 예수의 재림에 대한 임박한 기대를 갖고 그의 종말론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와 기독론과 구원론과 연결하여 전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유대 전쟁과 같은 시대적 사건들은 예수의 재림에 대한 징후이나 그것의 시점은 역사의 마지막 근거이며 지배자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비밀로 머물러 있다. 마태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해하면서(비교. 마 22:1-14) 교회는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서 있다고 본다. 그는 재림의 지연 때문에 이 중간기를 사는 마태 공동체는 그 기간의 연장을 계산에 넣어야만 하지만 재림이 언제 올지 모르는 불확실성 때문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요한은 임박한 재림 지연의 문제가 더 이상 초미의 관심사가 아닌 1세기의 마지막 십년 대에 그의 복음서를 쓰면서 부활절, 오순절 그리고 재림을 다른 세개의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사건으로 본다. 이처럼 재림과 관련해서 모든 저자들의 종말론이 각각 특색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전적으로 더욱 깊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이들 중에서 마가복음서 저자와 Q문서 저자이후에 이 두문서를 사용한 누가문서(=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저자의 종말론도 이 천년이 지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신학적 반성의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그런고로 이 소고에서는 집중적으로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을 상세히 다루려고 한다.

 

2.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은 그의 나머지 신학적인 관점들, 예를 들면 구속사, 하나님의 길, 종말의 역사화 그리고 Elija-revidivus (엘리야-재생) 기독론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종말론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이러한 관점들을 차례대로 살펴보아야 한다.


1) 누가문서의 구속사.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대한 편집사적 연구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H. Conzelmann은 누가를 구속사의 신학자로 보고 그의 구속사는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재림 때까지 전개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에 의하면 이 구속사는 이 두 시점 사이를 세 단계로 나뉘어 진행한다: 이스라엘, 즉 율법과 선지자들의 시대, (미래적 구원의 선(先) 제시로써)예수의 시대, 예수의 등장과 그의 재림 사이의 시대, 즉 교회 내지는 성령의 시대. 이 세 시대들은 연속성 안에 서있고 이 시대들의 중심은 예수의 시대이다. 그러나 이 “Conzelmann적인 구속사의 세 단계 나눔은 누가에게 근본적인 ‘약속과 성취’란 두 단계 도식에 의해 수정되어져야만 한다: 이스라엘의 시대, 예수의 시대 그리고 교회의 시대가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시대와 성취의 시대가 연속된다. 구속사는 그것에 따르면 창조와 재림 사이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말론적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나누어진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시금 족장의 시대와 이스라엘 시대로 이분되고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시아의 시대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역시 이분된다. 이 이스라엘의 역사의 특징은 소수의 순종적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거기에 대한 불순종적인 이스라엘의 거역이라면, 즉 스테반의 설교에 의하면(행 7:2-53: 특히 51절 참조) 성령에 대한 거역이라면, 새 이스라엘의 역사의 특징은 성령에 의해 형성된 새 이스라엘 전 공동체의, 즉 메시아의 백성의 성령에 대한 순종이다. 그런데 누가가 묘사하는 구속사 가운데 이스라엘의 역사는 누가가 다루는 문서의 전제일 뿐이고 오로지 새 이스라엘의 역사만이 구속사의 묘사대상이 된다. 이것에 해당하게끔 누가복음이 메시아 시대를 다루고 있다면 사도행전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를 다루고 있다.
누가의 두 문서가 다루고 있는 종말론적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의 재림으로 끝난다. 이 역사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행 13:23) 다윗의 위에 앉을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으로써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한다(눅 24:21; 행 1:6)는 것이다. 이 역사는 상세하게는 부분적으로 이사야의 종말론적인 역사상에 기대어서 전개된다. 이렇게 주제를 기댈 때에 하나님의 심판으로써 이스라엘의 닫혀짐(비교. 사 6:9-13), 메시아의 탄생(비교. 사 9:1-7)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로써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미래적인 번영(비교. 사 37:31f.)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누가가 그의 두 번째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닫혀짐을 이사야서의 인용으로 구체적으로 언급하기 때문에 이 기대기의 첫 주제를 나머지 두 주제들과 관련하여 세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인들을 그들의 우상숭배와 불순종 때문에 이사야의 부름과 파송을 통하여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이 닫혀지게 했다. 그들의 닫혀짐의 기간은 한정된다(비교. 사 6:9-11). 닫혀짐의 해소는 메시아 희망과의 관련성 속에서 약속되어진다(비교. 사 29:17-19; 35:5-6). 그러나 우선은 그들의 닫혀짐에서 멸망과 추방의 하나님의 징벌이 따라온다(비교. 사 6:11-12). 이런 파멸 때에도 “구출되어져야만 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살아 남는다(비교. 사 1:7-9;6:13;10:18-23;17:4-6;30:17).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주를 진실하게 의뢰하는 자(사 10:20)들로 “하나님의 심음”이고 거룩한 씨로서 이스라엘의 그루터기(사 6:13)이다. “이때 씨의 상을 통하여 남은 자는 새 창조임을 시사한다.” 새 창조로서 남은 자는 메시아와 관계를 갖는다(사 4:2ff.). 이 메시아는 하나님의 백성 내에서 ‘남은 자’를 상징적으로 구체화한(비교. 사 8:16-18; 1:9;7:10f.;11:1ff.) 그리고 임마누엘 이름과 사 9:5을 통하여 지시되는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새로운 공동체가 의거하는 원인이다.” 이스라엘의 남아 있는 근간은 이 원인에 의해 새로이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사 37:31). 구출되어져야만 하는 남은 자로 된 이스라엘의 새롭게 된 형성은 실현될 것이고(비교. 사 37:32b) 이것은 궁극적인 언약에 해당한다. 이 이사야적인 이스라엘의 닫혀짐의 해소와 그루터기의 개화는 궁극적인 언약이기 때문에 누가에게 중요한 근본적인 “약속과 성취” 도식에 따르면 성취되어져야만 한다. 그런고로 누가가 묘사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는 대체로 이사야의 예언적 역사 상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이스라엘의 역사의 전반부인 메시아의 시대는 구속사에 있어서 “큰일”(눅 1:49)에 해당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와 더불어 시작한다. 그러나 메시아의 공적인 사역의 길은 세례요한에 의해 준비된다. 그는 참회의 설교와 죄의 용서를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물세례를 통하여 준비된 백성을 예수의 사역에로 예비한다(비교. 눅 1:17;3:1-22). 그는 예비된 백성에게 오시는 “더 강한 자”, 즉 메시아에 관한 복음을 선포한다. 그의 선포에 따르면 메시아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이 메시아의 시대에서 메시아인 예수의 공적인 사역은 세례 받고 기도할 때 그에게 성령의 임함으로 시작된다(눅 3:21-22). 성령에 충만한 예수의 사역의 과제는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함과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 이외에 이사야적인 역사 상에 따라 눈 먼 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눅 4:18-19). 이것은 이스라엘의 희망의 성취로서 닫혀짐의 해소를 의미한다. 바로 이 메시아 적인 사역으로서 눈을 떠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 즉 이스라엘의 구속을 이스라엘의 경건한 부분의 사람들이 고대하고 희망해 왔다(비교. 눅 2:25-38). 이 과제에 따라서 예수는 사역의 초기에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의 파송과제를 선포하고 이어서 고향 마을의 청중들의 닫혀진 눈과 귀를 열려고 시도하나 그들이 거부함으로 실패한다(비교. 눅 4:16-30). 이 과제의 성취는 부활절 이후에 이루어진다.


예수는 거부된 첫 시도 후에 곧 제자들을 부르고(비교. 눅 5:10-11.27) 사도들을 선택한다(비교. 눅 6:12-17). 이들은 세례요한에 의해 주께로 돌아온 많은 이스라엘인에 속하고(비교. 눅 1:16; 3:1-21) 주를 위해 예비된 이스라엘 백성의 일부를 이룬다(비교. 눅 1:17;3:21). 그러므로 사도들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에서 개화한 주를 위한 백성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인 셈이다. 열두 사도의, 즉 “하나님의 백성(역자 주;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선택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의 재건에 해당한다(비교. 행 15:16). 이것은 이스라엘의 남은 사람들과 게다가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될 것의 선(先) 조건이다(비교. 행 15:17). 예수는 선택한 열두 대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사명을 주어 파송한다(비교. 눅 9:2). 그것을 통하여 대표적으로 이미 새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이,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모아진다. 본격적인 모음은 오순절의 성령세례를 통하여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닫혀진 부분과 유대인의 지도층은 이에 반하여 그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처형한다. 그러나 예수는 부활한다. 부활한 예수가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의 닫혀진 눈(비교. 눅 24:16.31)과 열두 사도들의 이성(비교. 눅 24:45)을 열어준다. 이것으로 부활한 예수가 눈을 열어주는 그의 메시아적 과업이 대표적으로 수행된다. 그것이 종말론적인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사도들에게만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마침내 닫혀짐의 징벌이 해제되어진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그루터기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가 새 가지를 내기 시작한다. 이 새 가지는 예수의 승천 후 성령을 부어주신 후에야 번성하게 된다. 예수의 승천으로 메시아의 시대는 막을 닫게 된다.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하나님의 큰일에 해당하는 메시아의 성령세례로 충만하게 시작된다. 이 시대를 위하여 하나님의 우편으로 승천한 예수는 성령을 아버지로부터 받아서(비교. 행 2:33) 그것을 사도들에게 부어준다(비교. 행 1:26;2:14). 이 성령의 부어주심은 메시아의 성령세례에 관한 예언의 성취이자(눅 3:15f.;행 1:5) 동시에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과 세계적인 선포를 위한 궁극적인 무장이다. 이스라엘의 새 열두 지파의 재건된 대표자들의 성령무장 후에는 그들이 다스릴(비교. 눅 22:28-30)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모음(비교. 행 2장)만이 남아있게 된다. 이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이스라엘 나라”(행 1:6)의 시민은  부어준 성령과 사도적 선포를 통하여 모아진다. 이 모음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다. 그에 따라 이방인들의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 안으로의 편입이 일어난다. 이렇게 이스라엘의 그루터기에서 종말론적으로 자라난 새싹이 교회이다. 이 교회는 그러므로 구속사적인 계속성안에서 단순한 이스라엘, 즉 옛 하나님의 백성에게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경건한 남은 자에게서 발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인 그리고 동시에 구속사적인 불연속성안에서 메시아적이고 종말적인 새창조이다. 메시아의 탄생을 통하여 그리고 열두 사도의 선택을 통하여 새롭게 개화한 그리고 승천한 메시아에 의하여 부어진 성령을 통해서 인도되는 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나라의 시민을 모으는 데에 존재이유를 갖는다. 보편적인 선포를 통한 이 이스라엘의 모음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계속된다. “‘모든 것이 회복될 때까지’, 그러므로 καιροι εθνων (필자 주: 이방인들의 때)가 차기까지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회개의 설교를 들을 때까지(눅 24:47), 재림은 지연된다.” “이방인의 시간으로서 재림까지의 시간은 ... 동시에 계속되는 이방인 선교의 시대이다”.


새 이스라엘의 모음의 시대와 그와 동시에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의 재림으로 끝난다.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던 메시아는 땅위의 재앙과 창조질서의 흔들림과 혼돈으로 떨어짐처럼 보이는 하늘의 표시들 하에서 능력과 영광으로 다시 온다(비교. 눅 21:25-27). 다시 오신 예수는 주(눅 19:38;행 10:36), 구원자(눅 1:69f.;2:11;21:28), 왕(비교. 눅 19:12.15.38;23.42)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자(행 17:31;24:25)로서 그것에 해당하는 기능들을 갖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모든 것들을 회복하신다(행 3:20f.). 이것은 메시아적인 새창조에 해당한다. 그는 동시에 구속자로서 예수의 제자들을 궁극적으로 구속할 것이다(눅 21:28). 이 “구속은 여기에서 해방으로, 더 상세하게는 고난과 박해의 끝으로 이해된다”. 그는 그 외에도 심판을 행하는 전권을 가진 자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할 것이다(비교. 행 10:42). “예수의 심판자 기능은 모든 사람들에게 미친다”. 불순종하고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눅 2:34; 행 3:23). 이 재림 그리스도는 마침내 왕으로서 다윗의 위를 차지한다. 이 등극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된다. 이 때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전권에 속해있다. 그런데 재림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된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등하다(눅 22:29f.),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 없이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관하여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구속이 가까이 온 것처럼(눅 21:25-33) 하나님의 나라도 끝 사건 때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예수(그의 사역과 인격) 안에서 역사적으로 현재적이고 승천한 메시아에 의하여 주어진 성령을 통하여 구속사 안에서 역사 하는 임박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고로 궁극적으로 재림 그리스도와 함께 온다. “우선 재림은 현재적인 것이 그것의 상(像)인 나라 자체를 가지고 온다.” 그렇다면 예수는 명백하게 “이스라엘의 영원한 βασιλευς(필자 주: 왕)”이며 동시에 항상 이미 있었던 “하나님 나라의 βασιλευς”이다. 이스라엘 나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의 통치는 끝이 없다(눅 1:32f.). 그러므로 “오고 있는(필자 주: 재림으로 말미암은) 세대의 전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되고 단계적으로 성취되는 구속사의 목표이다”.

 


이 구속사의 개요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결과:
구속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에 대한 이 계획을 세상에서 성령이 주도적으로 수행한다: 성령은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계속성 안에 있는 순종하는 소수의 이스라엘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구원사의 계속성을 담보하고, 둘째로 예수 존재의 근거이며 동시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됨의 근거이며, 셋째로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예수의 사역에 함께하시사 그의 사역 안에서 사탄의 세력을 깨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인간에게 도래케 하며, 넷째로 그의 승천에 직면하여 재림 임박 기대의 대체가 아니라 예수의 승천과 관련하여 예수를 대체한 종말론적인 선물로 메시아 백성들의(교회) 존재의 근거이며 “그리스도 증언을 위한 결정적인 장비”로 메시아 백성 모음의 담지자이며 종말론적인 공동체의 일반적인 특성이고, 다섯째로 예수가 주로서 자기의 것들을 섬기듯 예수를 잉태케 한 창조주로서 예수를 섬기는 종이 된다. 이처럼 성령은 전 구속사의 영웅으로 구속사의 계속성을 보장한다. 이 구속사의 중심은, 마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중심이 예수 자신인 것처럼, 예수의 시대가 아니라 예수 자신이다. 왜냐하면 승천한 메시아가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예수는 구속사를 주도하는 성령의 주가 되어 하나님의 우편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때가 찰 때까지 구속사역을 계속하다가 왕(메시아)으로 재림하기 때문이다. 구속사의 목표는 궁극적으로 예수가 주이며 왕이며 구속자이며 동시에 심판자로 오시는 세대의 전환점인 새로운 시대(재림이후), 우주적인 완성이며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도래이다.


이 구속사는 누가문서의 전제가 되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누가문서의 대상이 되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가 문서에서 전제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족장의 시대와 이스라엘의 시대로 나누어지며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행위와 거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대비로 특징지어진다. 그 반면에 누가가 묘사한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속사에 있어서 각각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두 큰 일(비교. 눅 1:49; 행 2:11)에 해당하는 예수의 성령잉태 사건과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하여 예수(메시아)의 시대와 교회의(메시아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나누어지며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주도하는 성령에 대한 새 공동체 회원들의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누가적 구속사는 구속사의 목표를 향해 점점 고조되는 역사로 이스라엘 시대보다는 새 이스라엘 시대가, 예수의 시대보다는 종말이 역사화 된 교회의 시대가, 궁극적으로는 재림 이전보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재림 이후의 시대가, 더 높은 단계다. 그런데 구속사에 있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두 큰 일에 의해 전개되며 나누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누가에 의하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서 오시는(비교. 눅 1:68) 길과 동일시된다. 이 길을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주의 길”(την οδον του κυριου 행 18:26) 이란 용어로 표시하고 있다. 이제 주의 길 내지는 하나님의 길이 누가문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자.

2) 주의 길.


주의 길이란 용어에 대하여 E. Schweizer는 그것이 사도행전에서 매우 적게 나오고 또한 주의 길이 구약적인 언어사용법에 있어서 주께서 인간에게 명하신 품행이기 때문에 그것이 유대적 서기관에게만 어울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가설은 매우 일면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미 쿰란 공동체는 주의 길이란 용어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이 쿰란-에센인들의 공동체는 자기의 자리 매김을 “광야에로의 이주”(비교. 1QM12)로 표시했다. 그들의 광야에로의 이주는 확실히 예언자의 글인 사 40:3의 요구를 통하여 야기되어졌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전인 1QS 8:12-14에는 “만일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이 규정들에 따라 이 공동체에 연합하려고 한다면,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하라는 기록된 말씀에 따라 광야에 가서 거기서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죄인들의 거주장소로부터 떠나야만 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쿰란-에센파들은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이사야서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따른 셈이다.


세례 요한도 에센파 사람들처럼 사 40:3의 요구에 의해 자극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 사실을 그의 광야 체류, 쿰란 사원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요단강에서의  설교와 세례가 이야기해준다. 이러한 세례요한의 활동은 분명히 주의 길을, 그러므로 개연적으로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함에 해당한다. 세례요한과 사40:3 사이의 결합을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를 들면 마가복음, 어록과 누가의 특별자료 안에서 전승시켰다. 거기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하나님(특별자료와 Q: 눅 3:3f. 병행 마 3:3f.) 혹은 예수(마가와 Q: 눅 7:24f. 병행 마 11:7f.)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이처럼 쿰란인, 세례요한 그리고 기독 공동체들이 “주의 길”이란 어귀를 하나님이나 예수가 스스로 취하시는 길과 관련하여 해석하기 때문에 쉬바이쩌의 가설은 경솔한 것으로 드러난다.
“주의 길”은 그러나, W.C. Robinson이 지적한 것처럼, 누가문서에서 중요한 구성적 사실관련성 안에 서 있다. 이 관련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눅 3:4-6에 있는 사 40:3-5의 인용부터 시작하는 것이 의미 있다. 공관적 비교에 의하면 누가는 마가복음에서가 아니라 Q에서 따온 사 40:3의 인용을 다음의 두절인 사 40:5까지 확장시킨다. 이 인용의 확장은 누가의 구성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진술(비교. 눅 1:76b-77; 2:30-32; 행 28:28)인 6절 때문에 생긴다. 그래서 “주의 길”이란 어귀와 “하나님의 구원”이란 어귀가 서로 연결되게 된다. 이 이사야의 인용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주의 길”과 관계를 갖기 때문에 “주의 길”이 “하나님의 길”과 동일시된다. 거기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마가에서와는 달리 여기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길을 준비하는 자이다.
하나님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요한의 역할은 이미 눅 1:16-17에서 천사를 통해 선포되어진다. 그때 요한의 기능(비교. 눅 1:17b)은 하나님의 길이 약속된 말 3:1의 빛에서 해석되어지고 요한의 사역의 성공과 관련하여 “주 하나님”이란 자세한 규정(비교. 눅 1:16)이 말 3:1에 기대기 바로 앞에 온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 보여진다.
하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요한의 역할이 재차 Benedictus에서 울려나온다(비교. 눅 1:76b-77). 거기서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예언자로 불린다(비교. 눅 1:76a). 그의 역할이 다시금 말 3:1사 40:3-5의 의역으로 해석되어진다. “‘주’는 협의의 문맥에 따르면 자명하게 예언자가 길을 준비하는 하나님 자신이다.” 세례요한은 그러므로 Benedictus에서 자신의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비교. 눅 1:68) 하나님을 위해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이러한 세 구절들에 따르면 세례요한은 분명히 하나님의 길 예비자이고, 주의 길은 하나님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두 문서에서는 하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요한의 역할이 진기하게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의 그의 역할에 의해  겹쳐진다. 광의의 문맥들과 몇개의 진술들에 따르면 세례요한이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자도 된다. 누가적인 사항관련성에 의하면 예수는 세례요한이 예비한 (주의) 길에 들어 선다(비교. εισοδος: 행 13:24f.). 그럼으로서 예수의 공적사역이 시작된다. 예수는 하나님이 정하신(비교. 눅 22:22) 길을 마땅이 가야한다(πορευεται: 비교. 눅 13:33). 그의 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근거하고 있다. 이 길은 지리적으로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으로 통하고 사항적으로는 예수의 올리움으로 끝난다(비교. 눅 9:51;13:31-33). “예수의 올리우심은 누가의 이해에 따르면 단순히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지상으로부터의 빼앗아감 만이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부활과 승천을 포함한다.” 그것들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퇴장한다(εξοδος: 눅 9:31). 이 구성적인 사항관련성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따라 세례요한이 예비한 주의 길로 들어가서 많은 고난을 통하면서 그 길을 가고 마침내 주의 길로부터 영광에로 들어가게 된다. 예수가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아버지로 부터 성령을 받아서 사도들에게 부어 준다. 그러므로 예수의 길의 목적은 성령세례를 주는 것이 된다(비교. 눅 12:49). 성령세례는 주의 길의 전환점이다.


“주의 길”에 관한 누가적 견해는 마가의 그것과의 비교하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마가에게 있어서 “주의 길”이 예수의 세례받음으로 시작해서 그의 부활로 끝나는 예수의 길과 동일시 되는 반면에, 누가에게 있어서 주의 길은 그 반대로 예수의 길이 그의 올리워 감으로 끝남에도 불구하고 계속된다. 공동체에게 부어진 성령이 주(예수)의 길의 계속성을 보장한다. 주(예수)의 길의 계속되는 지리적인 진행은 복음서의 끝과 행전의 처음에서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눅 24:47)와 “땅끝까지”로 잘 알려진다. “구속사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예수의 길이 예루살렘을 향해 뻗어 나갔드시, 예수 증인의 길도 그처럼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땅끝까지 뻗어 나간다.” 예수의 길은 그러므로 주의 길의 진행과 관련하여 증인들의 길 앞에 놓여 있다. 또한 고난에의 그리고 고난을 통한 영광에의 길(비교. 눅 22:22;24:26)로 표시되어진 예수의 길은 (예수의 증인 내지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전형(典型)이 된다(비교. 눅 14:27;9:23). “그 길이 고난을 통하여 영광에 이른다는 것”은 예수에게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유효하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내지는 증인들)의 대표자로서 누구보다도 바울은 예수의 뒤를 따라 동일한 길을 간다(참조. 예수와 바울 사이에 있는 수많은 병행들). “바울의 길은 하나님의 인도 하에 있고(δει: 행 9:16;14:22;19:21;23:11; προχειριζομαι: 행 22:14;26:16: 비교. 10.14; αναγκαιον: 행 13:46)”, 이방인의 구원에 관하여는 예수의 길처럼 바로 그렇게 기능 한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 예비하신 구원(비교. 눅 2:30)을 의미하는 메시아이다. 그는 빛으로 역시 이방인들을 비춘다(눅 2:32a). 그는 나사렛에서 “옛 시대에 축복을 받은 비 이스라엘인에 대해(4:25ff.)” 이야기한다. 바울은 예수의 사환과 증인으로 부름 받았고(비교. 행 26:16) 주로 이방인에게 보내어지나(비교. 행 9:15;13:46;15:12;18:6;21:19;26:20), 놀라웁게도 이방인의 빛으로 지정된다(비교. 행 14:47). 바울의 파송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전향하고(비교. 행 26:18)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그들 가운데에서 발생한다(비교. 행 14:46f.;28:28).


바울은 예수의 사환과 증인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모든 민족들 앞에 준비한 구원을 이방인에게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비교. 행 28:28). 거기에 따르면 바울은 이방의 빛으로서 그들의 구원에 관해 이야기한 예수의 사역을 계승하고 그것을 완성한다. 바울의 길은 그러므로 예수의 길의 계속이다. 이 두 길은 더욱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선교적인 사역의 시작에서 바울은 주의 길을 곧게 하려고 진력하고(행 13:10), 그의 사역 끝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보내졌다”(행 28:28)고 선포한다. 바울의 전체적 선교 사역이 이 두 단락을 통하여 감싸지기 때문에 구원을 위하여 이방인에게로 통해야만 하는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 바울의 전체 길에 해당한다. 여기서 바울의 길은 예수의 길의 계속일 뿐만 아니라 한 조각 주의 길 자체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요약: 만약 누가가 주의 길에 관하여 이야기한다면, 그는 역사 속에서 그의 백성들을 찾아오는 주, 곧 하나님의 길을 의미한다. 이 길은 세례요한의 준비를 통하여, 예수의 등장을 통하여 그리고 예수의 증인들의 선교사역을 통하여 뻗어간다. 예수의 길은 그런고로 주, 곧 하나님의 길의 주요한 부분이나 전체는 아니다. 메시아인 예수의 길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령세례이고 성령세례가 주의 길의 전환점으로 예수 증인들의 길을 연다. 이 증인들의 길은 구속사의 마지막 단계인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 전체를 관통하면서 재림까지 뻗게 된다. 성령은 종말적인 은사이기 때문에 전환점인 성령세례를 통하여 전개되는 이 길은 종말이 역사화 된(실현되어 가는) 고조된 길이다. 이제 증인의 길을 통해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구속사의 마지막 시대를 특징짓는 종말의 역사화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3) 종말의 역사화.


종말의 역사화는 성령세례의 실현을 통해서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종말적 은사인 성령의 사역을 역사적으로 묘사하는 근거도 제공한다. 종말의 역사화 사상을 중심으로 해서 종말시대의 도래와 성령사역의 역사적 묘사들의 생각들로 이루어진 관련성은 사도행전의 서두(행 1-2장)에서 잘 나타난다. 종말이 역사화 되었다는 생각은 성령강림사건의 기사(행 2:1-41)에서 특히 민족목록 부분(행 2:5-13)의 구성에서 뚜렷이 반영되고, 종말적 은사인 성령의 강림을 통해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은 성령강림사건을 해석하는 요엘 인용구(행 2:17-21; 특히 17절)의 편집에서 시사되고 있고, 성령사건들을 추적해서 역사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행 1:4-8에서 편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 세 부분을 살펴 보 것는데 편의상 요엘 인용구부터 다루도록 하겠다.

(1) 요엘 3:1-5 인용구의 편집에 나타난 종말시대의 도래.

누가문서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세례요한의 예언(눅 3:16)과 그것을 새로이 언급한 예수의 예언(비교. 행 1:4-8)의 성취뿐만이 아니라 요엘 3:1-5의 성취도 된다. 그런데 누가는 그 오순절 사건을 직접 요엘 인용구로 해석한다. 그 사건의 해석을 위해 사도행전에 사용된 요엘 3:1-5 인용구는, R. Morgenthaler가 지적한대로, 몇 개의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우선 이 인용은 셉튜아진타의 요엘 본문에서 και εσται로부터 και εσται까지 선택되어졌다. 이것으로 그리고 πασα σαρξ - πας로 대체로 인용구 전체의 테두리가 형성된다. μετα ταυτα를 εν ταις εσχαταις ημεραις로 대체함을 통해서 그리고 και προφητευσουσιν의 삽입을 통해서 전체 테두리 내에서 몇 개의 병행적 테두리를 갖는 첫 번째 통일성이 생긴다. 인용구의 중간 조각의 교차 대조적인 통일성은 두 번 삽입한 μου를 통하여 완성된다. 두 번째 중간 조각의 첫 부분에서는 σημεια, ανω와 κατω의 삽입을 통하여 병행적 구조와 그것과 동시에 두 번째 병행부분에 해당하는 통일성이 형성된다. 그런고로 이 인용된 구절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셉튜아진타의 구성양식을 인공적으로 완성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런 인공적인 개선 중에서 우리의 문맥과 관련하여 보면 μετα ταυτα를 εν ταις εσχαταις ημεραις로 대체한 것이 특별히 눈에 뜨인다. 이 편집적인 대체를 통하여 요엘 인용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두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고 그들에게 예언의 은사를 주실 것”을 뜻하게 된다. 이런 편집적인 작업을 통하여 저자는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마지막 날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여기서 분명히 오순절 사건과 더불어 종말의 시대가 동터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오순절 사건과 함께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에 걸맞게 오순절에 열 두 사도에게 성령이 임한 사건은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과 동시에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모음을 위한 무장을 뜻한다. 성령강림사건으로 종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밝힌 누가는 사도행전의 서두에서 성령강림사건이 성령세례임과 동시에 이 종말적 시대에 있어서 성령사역을 역사적으로 묘사할 것을 시사한다.


b) 행 1:4-8에 나타난 성령사역의 역사적 묘사 의도.
이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모음을 위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세례요한의 예언과 부활하신 예수의 예언의 성취로 메시아의 성령세례가 된다. 누가가 자기문서에서 주동기로 전개해온 메시아의 성령세례는 오순절 성령세례기사의 앞에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도행전의 서두에서(행 1:4-5) 부활하신 분의 입을 통하여 다시 한번 다음 처럼 언급된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이 선언은 바로 앞에 있는 4절 “몇 날이 못되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약속과 밀접하게 연결됨으로써 한편으로는 오순절기사를 준비하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의 받음을 성령세례로 규정한다.  여기서 선언되고 규정된 성령세례는 사도행전의 순서와 배치를 언급하는 행 1:8에서 “성령 받음 - 예루살렘으로 부터 땅끝까지의 파송”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것으로 메시아적 성령세례는 증인사역의 전제로 분명히 그리스도 증거를 위한 파송에로 규정되어진다. 그러므로 이 메시아적 성령세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모든 민족에게로 파송함과 그것을 통한 종말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모음을 목적으로 하고 이 시대 내에 일어나는 모든 성령부어줌을 규정한다. 거기에 따라 누가는 한편으로 증인의 길의 지리적 정돈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에서, 고넬료 가정에서 그리고 에베소 제자들에게서의 성령의 발생을 묘사할 뿐만이 아니라 성령과 증인들에 의한 그리스도 증언의 확장을 묘사하고 그것의 계속적인 확장을 위한 시각을 열어 놓는다. 그러므로 누가는 여기서 “성령세례”란 주제로 기독인에게 있어서 성령의 발생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하고 “성령의 부어주심 - 땅끝까지 파송”한다는 개요로 성령의 사역을 역사적으로 묘사한다고 밝힌 셈이다.

c) 민족목록의 구성에 나타난 종말의 역사화.
성령사역의 역사적 묘사는 종말의 역사화를 전제한다. 종말의 역사화는 성령강림기사 가운데에 있는 민족목록의 구성사적인 분석에서 잘 나타난다. 이 민족목록은 문장론적인 구조분석을 통해서 보면 “동에서 서로 그리고 남에서 북으로의 방위체계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북에서 남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론 서에서 동으로 동서남북 사방의 방위체계에 의해서 통일적으로 구축되었다”. 민족목록 정돈의 원리인 이 “사방 방위”의 주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 저자가 민족순례 기사(눅 13:28-28)를 마태와 마찬가지로 ‘Q’자료에서 받아들이나 마태와는 달리 Q의 동과 서의 두 방위를 분명히 동서남북의 네 방위로 편집적으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족목록을 구성하는 사방 방위체계가 민족순례 기사의 편집적 사방 방위체계를 닮았다는 사실에서 저자가 민족목록을 구성할 때 천국잔치에로의 민족순례에 관한 기사를 기대어 민족목록을 조직적으로 배열했다는 결론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이 실마리에 따라 두 기사의 관계를 살펴보게 될 때 이런 결론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통하여 강화된다: 첫째로,  민족순례 기사의 문맥(비교. 좁은 문: 눅 13:22-27 특히 2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민족목록의 문맥(비교. 오순절 설교: 행 2:14-41)에서도 동일하게 “구원 얻다”가 다루어진다. 둘째로, 민족순례의 기사에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순례의 주체자는 편집적으로 표현된 배척 당하는 “행악자들”(눅 13:27)과는 다른 ‘어떤 불의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인 것과 비슷하게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때 몰려온 주체는 천하 모든 민족을 대변하는 각처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행 2:5)이다. 셋째로, 민족순례기사는 사도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릴 것에 관한 말씀(눅 22:29-30)과 다음과 같은 구성적인 조화를 이룬다: 동서남북 사방에서 와서 순례에 참여하는 의로운 자들은 종말적으로 사도들이 다스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된다. 오순절 기사에서도 이와 같은 구성적인 관계가 그대로 반영된다. 오순절에 성령은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 두 사도에게 임한다. 이 사도들이 성령에 충만하여 방언으로 말하자 이들 쪽으로 세상의 모든 민족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천하 각국에 살았던 유대인들이 몰려든다. 이들 중에서 3000명이 오순절 설교를 통해서 세례를 받는다. 이들이 세례를 받음은 모든 민족 중에서 종말적 이스라엘의 범례적인 모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들은 열 두 사도에 의하여 다스려질 종말적인 이스라엘 백성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오순절 기사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릴 열 두 사도와 천하 각국에서 몰려와 세례를 받은 범례적이고 종말적인 이스라엘 백성의 구성적 조화가 반영되고 있다.


이런 구성적 기대기 방법을 통하여 누가는 “모든 민족들을 대표하는 천하에 흩어져 있다가 예루살렘에 우거하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장소로 몰려옴을 종말에 동서남북 사방에서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경건한 사람들의 순례의 선취이자 시작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누가는 놀랍게도 종말을 역사화 한다”: 이미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종말적인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이며 동시에 그 나라의 시민들을 모으기 위한 궁극적인 무장이다. 이 사건은 종말적인 천국잔치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통치자인 12사도들이 다스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천국잔치에로 초대하는 첫 사건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처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행전의 첫머리에서 종말적인 은사인 성령이 강림한 사건에 관해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는 “성령세례”란 주제로 성령강림사건을 구속사적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은 종말적인 천국잔치로 구속사를 전환시키는 대망하던 메시아의 성령세례이다. 이렇게 종말이 역사화 되었기 때문에 그는 종말적인 천국잔치에로의 첫 초대를 시사하는 민족목록 기사를 천국잔치에의 순례기사에 기대어 작성한다. 그리고 “성령의 부어주심 - 땅끝까지 파송”한다는 개요로 종말적인 성령의 사역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역사적으로 묘사한다.
이렇게 구속사의 전환점인 오순절 성령강림(메시아의 성령세례)으로 부터 종말이 역사화 된(실현되어 가는) 시대는 성령과 증인의 사역이 지배해야 하는 시대일 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한 죄사함의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하는(비교. 눅 24:47ff.) 시대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중요한 전세계에 전파될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는 승천 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부어주신 성령을 통하여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를 회복하고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사역을 계속하시던 예수께서 구속사의 목적으로서 그 끝에  메시아 왕으로 재림하셔서 이루실 만유의 회복사역과 더불어 메시아 예수의 기독론적 정체성(正體性)을 밝혀준다. 거기에 따르면 메시아 예수는 재생한 엘리야이다. 이것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4) 재생한 엘리야로서의 메시아 예수.
재생한 엘리야의 과제는 말라기 3:23f.와 시락 48:10에 따르면 한편으로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회복(restitutio in integrum): 회개의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내적인 회복’과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복구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외적인 회복’이고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한 모든 것들의 회복이다. 다시 올 엘리야의 이런 과제에 기대어 누가문서에서는 일련의 예수의 과제가 제시된다.
먼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는 세례요한이 선포한다(비교. 눅 3:3). 그러나 그의 세례가 죄 사함의 효력을 발생한다고 하지만, 누가문서의 저자에게 있어서 죄사하는 권세는 오로지 예수에게만 있다(비교. 눅 5:24;7:48f.). 예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눅 5:32). 이 죄 사함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 후에도 성령의 부어주심을 통해서 계속된다. 성령을 받아서 전 세계에, 모든 민족에게 증언해야 할 내용은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다(비교. 눅 24:47f.). 그러므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예수의 사역은 재생한 엘리야의 사역인 죄로부터 멀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내적인 회복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예수의 사역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다.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예루살렘의 구속등으로 표현되고, 이스라엘 지파의 열 두 대표자의 회복 그리고 그들이 다스릴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회복등의 커다란 사항 관련성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관련성을 위하여는 먼저 누가복음의 서론부분에서 이스라엘의 구원(눅 2:25)과 예루살렘의 구속(눅 2:38)은 예수를 통해서 성취된다고 이야기된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새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와 그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은 메시아 예수의 성령세례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이 나라의 열 두 지파의 회복은 대표자들의 회복으로부터 재림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음으로 실현된다. 종말적인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의 회복과 그 회복에 해당하는 성령세례 받은 열 두 사도들이 그 나라의 열 두 지파를 다스린다는 사상과 성령사건을 통하여 이 나라의 백성들의 모음으로 실현되는 열 두 지파의 회복으로 구성되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회복이라고 하는 재생한 엘리야의 과제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누가문서에서는 재생한 엘리야의 마지막 과제로서 모든 것들의 회복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다가 재림하신 예수가 궁극적으로 관장한다(비교. 행 3:21).


이와 같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죄사함은 메시아 사역의 중요한 과제로서 죄로 말미암아 멸망당한 이스라엘 나라(내지는 백성)의 완전한 회복과 연결되면서 역사의 끝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만물을 새롭게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와 더불어 메시아가 누구인지 밝혀준다. 거기에 따르면 이 메시아 예수는 분명히 Elija-revidivus이다.
이 Elija-revidivus의 모범적 유형(Typus)은 엘리야이다. 말하자면 엘리야는 Elija-revidivus인 메시아 예수의 모범적 유형이다. 엘리야에 관한 여러 동기들이 예수와 엘리야 사이의 많은 병행을 통하여 예수의 유형이 된다: 예를 들면 예수의 (죽은 자 살리는)기적이 엘리야의 (죽은 자 살리는)기적과 동등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엘리야-예수 유형에 “‘엘리야와 엘리사’-‘예수와 제자들’의 유형”이 덧붙여진다. 이 엘리야와 엘리사-예수와 제자들의 유형도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와의 관계와 이루는 여러 병행을 통하여 밝혀진다: 예를 들면 제자의 부름들이 예수와 엘리야에게서 서로 병행하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죽은 자 살리는 치유기적들도 두 관계에서 서로 병행한다. 또한 예수의 승천과 오순절에 사도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은 엘리야의 승천과 그의 제자 엘리사의 성령충만함을 회상시켜준다. 예수와 제자들의 유형은 분명히 엘리야와 엘리사가 된다.
위와 같이 엘리야는 메시아 예수의 유형이고 예수는 재생한 엘리야가 된다. 그는 공생애 기간동안재생한 종말적 엘리야로서 일면 엘리야를 모범으로 활동하며 승천 후에는 성령세례 주심과 죄 사함을 얻게하는 회개의 전세계적 전파를 통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새 창조로서 만유를 회복하신다.

 

3.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누가문서에 나타난 종말론은 거대한 구속사의 일부인 마지막 시대에 관한 견해로 주의 길과 종말의 역사화와 Elija-revidivus 기독론과의 커다란 사항 관련성 안에 서있다. 종말론이 관계하는 그리고 창조로부터 시작해서 재림에서 완성되면서 역사 전체를 포괄하는 이 구속사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말적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누가문서의 대상(對象)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길, 즉 세례요한에 의해서 준비되고 예수가 가고 그의 제자들이 이어 가는 길의 경로다. 주 하나님의 길의 경로를 통해 엮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메시아의 시대와 새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구성되어진다. 이 두 시대의 시작점은 두개의 크신 하나님의 일로 점 찍혀진다: 성령에 의한 메시아 잉태와 메시아의 오순절 성령세례로. 성령에 의한 메시아의 잉태가 구속사를 이스라엘의 역사와 새 이스라엘의 역사로 시대적으로 이등분하면서 메시아의 시대를 연다면, 메시아의 오순절 성령세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를 메시아의 시대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나누면서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를 연다.


두 성령사건으로 이루어지는 새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종말적 역사로 볼 수 있다. 종말적 역사인 새 이스라엘의 역사도 약속과 성취 도식이 지배한다. 새 이스라엘의 역사 (뿐만이 아니라 누가문서)도 누가문서의 주동기인 성령세례에 관한 약속과 성취 도식에 의해 역시 메시아의 시대와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로 (뿐만이 아니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으로) 이등분된다. 메시아의 시대가 성령세례에 대한 약속을 다룬다면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성령세례에 대한 성취를 취급한다. 그런고로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가 메시아의 시대보다 종말론적으로 더 점증된 시대다. 이 시대는 성령세례에 관한 약속이 성취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으로 개막된다. 이 사건은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실현된 사건이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공동통치자인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열 두 대표자들을 회복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통치자인 12사도들이 다스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기 위한 천국잔치에로의 초대와 민족들의 순례가 시작되는 사건을 예표적으로 야기시킨다. 천국잔치에로의 초대와 민족들의 순례인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모음은 재림시까지 진행된다. 이러한 전세계적인 그리고 범인류적인 모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지파가 회복된다. 그러나 새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대표자들의 회복과 이스라엘 지파의 회복을 포함한 이스라엘 나라의 완전한 회복은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가  재림하셔서 왕으로 등극함으로 이루어진다. 재림한 종말적 이스라엘의 왕 메시아가 이스라엘 뿐만이 아니라 만유를 회복하신다. 만유의 회복은 새창조에 해당한다.


이와같이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구속사의 목적이며 끝인 메시아의 재림을 통하여 이루어질 이스라엘 나라와 만유의 회복을 지향하며 진행하는 종말이 실현되어 가는, 다시 말하자면 종말이 역사화 되는 시대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여는 재림은 종말이 역사화 된 시대의 끝에 일어난다. 종말이 역사화 되는 시대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찾아오시는 길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길은 전체가 종말론적인 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사건은 하나님의 큰 일인 성령사건을 통해 일어나는 종말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백성을 모으는 시대는 종말적인 시대에서 종말이 역사화되는 종말론적으로 더욱 고조된 시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누가문서 저자의 종말론은 단계적으로 종말이 역사화 되는, 종말이 실현되어 가는 구속사적 종말론이다. 이 종말론을 예수의 종말론에 관한 제학설(諸學設)들과 비교해보면 누가문서에 나타난 종말론은 J. Jeremias의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과 E. Jüngel의 현재에 시작되고 가까운 미래에 완성되는 종말론이 결합된 종말론처럼 보여진다. 거기에 따르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저자의 종말론은 과거(예수잉태)에 시작되었고 현재에 실현되어가며 미래(재림)에 완성될 종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흥미 있는 다음과 같은 구성사적으로 중요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누가문서의 저자는 그의 구속사적 종말론과 그의 문서를 전개할 때 세례요한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적 선포(눅 3:16-17)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그가 중요시하는 약속과 성취도식에 의하면 이 세례요한의 메시아에 관한 선포는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부분은 메시아에 관한 선포의 내용으로 메시아의 성령세례와 심판이다. 그는 한편으로 세례요한이 선포한 메시아의 성령세례를 누가문서 구성의 주동기로 삼아 그것의 약속을 누가복음에서 다루고 그것의 성취를 사도행전에서 추적한다. 오순절에 메시아의 성령세례는 성취된다. 다른 편으로 누가문서 저자는 메시아의 심판을 구속사의 끝인 재림 때로 미룬다. 분명히 그 저자는 세례요한이 선포한 메시아의 종말적이고 동시대적인 두 가지 사역들을 분리해서 구속사의 종말이 역사화 되는 마지막 시대의 첫 사역과 마지막 사역으로 삼는다. 그는 그 사이에 재생한 엘리야로서 메시아의 사역인 이스라엘의 회복의 단계를 삽입하여 종말적 구속사의 마지막 시대의 내용을 채운다. 이렇게 볼 때 누가문서 저자는 묵시적 종말론, 구속사, 인자의 재림 그리고 재생한 엘리야 기독론을 결합하여 그의 독특한 종말론을 만든 것이다.

대한 논거로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많다. 다니엘 12:3은 그 언어 자체가 상징적인 것인데다가 꼭 그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돌리는 것이 옳다.

 

1) Louis Berkhof, Manual of Christian Doctrine, 신복윤 역, 기독교 신학개론, (서울: 성광문화사, 1996), p. 350.

2) Ibid., p. 371.

3) Ibid., p. 380.

 

 

출처 : 주사랑
글쓴이 : 항공모함 원글보기
메모 :

'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마지막 심판  (0) 2012.07.25
[스크랩] 성경적 종말론  (0) 2012.07.25
[스크랩] 개혁주의 종말론  (0) 2012.07.25
[스크랩] 종말론  (0) 2012.07.25
[스크랩] 종말론  (0) 2012.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