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 A.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
981237, 3-3, 김주한
서 론
종말론은 흔히 3가지 입장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현재적 종말론, 다른 하나는 미래적 종말론,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미래적 종말론이 그것이다. 안토니 후크마는 이 입장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왕국의 현재적 상태, “이미”와 그리스동의 재림 시에 수립될 왕국의 완성된 상태인 “아직” 사이의 구별을 가지고 있는 현재-미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제 1 부 시작된 종말론(실현된 종말론)
일반적인 종말론 이해는 개인과 이 세상에 관한 장차 있을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기독교적 역사 이해의 지평에서 신자의 현재적 상태와 하나님의 왕구의 현재적인 면도 포함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의 종말론은 "시작된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두 가지를 다 포함해야 한다.
1.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개관
구약 전체에 종말론은 맥을 이루어 나타난다. 구약의 신자들은 비록 불 분명하기는 했지만, 가까운 장래나 먼 장래에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개입하실 것을 믿는 철저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삶을 어떤 상황 하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신앙의 삶을 살도록 이끄는 힘이었다.
구약의 종말론을 종합하면, 인류의 초창기부터 뱀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한 구속자가 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종말론적인 기대는 점점 커졌고, 이러한 기대를 담고 있는 다양한 내용의 메시지가 역사의 다양한 시기에 다양한 형태로 성취되었다. 요약하자면, 구약의 신자들은 종말론적 실재들이 미래에 성취될 것으로 보았다.
구약의 종말론은 “계시적 개념”을 살펴봄으로 개관할 수 있다.
-장차오실 메시야 : 창세기(3:15; 22:18), 삼하(7:12-13), 신명기(18:15), 시편(110:4),
스가랴(9:9-장차오실 구속자의 삼직), 이사야(7:14; 9:6; 53장), 다니엘(7:13-14)
-하나님의 나라(왕국) : 하나님은 왕이시다(단2장, 7장-나라와 구속자의 관계)
-새언약 : 예레미야 31:31-34의 새언약. 이것은 신약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다(히8:8-13; 고전11:25)
-이스라엘의 회복 : 포로시기의 회복의 메시지(렘23:2; 사11:11). 그럼에도 회복에 관한 말씀은
윤리적 측면이 강하게 반영되고 있다.
-성령의 부으심 : 성령의 부으심은 미래의 지평선 위에 일어날 종말론적 사건이다(요엘2:30-31)
-여호와의 날(주의 날) : 이 날은 구약에서 심판과 분노의 날로, 또는 구원의 날로 나타난다.
-새 하늘과 새 땅 : 주의 날이 어두운 종말론적 묘사라면 이 개념은 종말론적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소망은 항상 땅에 관한 구절과 자주 연관된다(사66:17)
2. 신약 종말론의 본질
신약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으며, 그 실체는 바로 그리스도의 오심이었다. 그러나 신약은 또한 앞으로 이루어져야 할 종말론적인 측면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신약에는 실현된 종말론(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실현되지 않은 종말론이 함께 나타나 긴장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를 학문적인 용어로 “이미-아직”이라고 표현하며, 사실상 신약의 전체 구조는 바로 이 긴장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 구약에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묘사되었던 사실들이 신약성경에는 두 단계로 인식된다. 그것은 바로 현재적 메시아의 시대와 미래의 시대이다. 신약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지금 예언자의 성취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식한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 시대가 장차 올 또 다른 시대를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였다.
- 이 두 종말론의 관계성은 현 세대의 축복들이 장차 올 더 큰 축복들에 대한 보증이며 담보물이라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이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미래에 대한 기대인 것이다.
5. 성령과 종말론
종말론에서 성령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성령은 어떤 예언적 징표들은 수반하는 “최종적 종말론적 세대가”도래할 것에 대한 길을 예 비할 것이라고 한다.
2) 성령은 장차 오실 구속자 위에 강림하며, 그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 주실 분으로 구약에 예언되어 있다.
3) 성령은 물질적 축복과 윤리적 재생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미래적 새 생활의 근원이 된다.
4) 복음서에서 예수는 성령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여러모로 연관 되어있음을 말해준다.
5) 사도행전 2장은 성령의 부으심을 진술하고 있다.
6) 바울도 구약 예언과 조화를 이루면서 성령을 특별히 종말론적 선물이며, 세 세대의 계시자로 이해한다.
성령의 종말론적 역할과 관계가 있는 구체적인 성경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1) 양자됨과 관련하여, 성령의 하시는 일은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들인 것을 확신 시켜주며 동시에 이러한 양자됨의 풍성한 부 가 그리스도 재림전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을 것도 주지시켜준다.
2) 바울이 성령을 “첫 열매”로 “보증”으로 부르는 것은 성령께서 이미 현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미래의 한 조각을 강하게 보여주는 증거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신자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성령은 신자들의 구원의 미래적 완성에 대한 보증이며 약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3)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은 동시에 종말론 것인 암시를 주는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확신시켜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기업을 최종적으로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실성을 의미해 주는 것이다.
4) 성령은 육체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능동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활이 일어 난 후에 그 부활의 육체를 지탱하고 인도하는 일을 담당한다.
6.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이 두 어휘는 예수님의 메시지와 사도 바울의 메시지에 나타나고 있으며, 이 메시지는 오늘날의 신자들의 삶과 생각에 대한 이정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제 2 부 미래 종말론
<개인적 종말론>
7. 육체의 죽음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구속의 빛 아래서 죽음을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죄에 대한 죽음”이다. 죄에 대한 죽음은 우리를 영생에 들어가게 해주며, 이는 진정하고 완전한 생의 시작으로 이해된다.
8. 영혼 불멸론
1) 성경은 “영혼 불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다.
2) 성경은 영혼이 본래 파괴될 수 없는 본체이기에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3) 성령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오리 혀 하나님과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 좋은 것임을 말해준다.
4) 인간의 미래에 관한 성경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육체의 부활”이다.
9. 중간 상태
칼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중간상태는 축복과 기대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으며, 이 축복은 잠정적이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중간 상태에 대한 사상은 최근에 와서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다.
<우주적 종말론>
10. 재림의 기대
교회를 특징짓는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생생한 기대”이다. 예수의 종말론에 대한 예언은 시기와 장소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확실성”에 있다. 재림의 때는 불확실하지만 재림은 확실하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속적이고 기쁜 기대 속에 살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나타내는 구절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재림의 강렬한 기대는 이생에 대한 책임을 증대시키고 거룩한 삶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
11. 시대의 징조들
이 용어는 재림을 가리키거나 재림을 선행하는 사건들이나 상황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이 징조들의 기본적인 방향은 미래지향적이며, 특별히 재림 사건을 둘러싼 사건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단순히 세상 끝날 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마태복음 16:3에 의하면 예수의 시대 징조에 대한 말씀은 또한 과거와 현재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약에서 묘사된 징조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 기간과 그 기간의 모든 시대를 특징짓게 된다.
시대의 징조들을 총괄적으로 다뤄보면 다음과 같다.
1) 비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대의 징조들이 미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징조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2) 시대의 징조들이란 앞으로의 역사의 종말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3) 시대의 징조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사이에 끝없는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4) 시대의 징조들은 결단을 촉구한다.
5) 시대의 징조들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림이 시간적으로가 아닌 “상황적”으로 임박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13. 재림의 본질
“전환란기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이중적 재림을 이야기한다. 처음 재림은 공중에서 휴거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7년이고, 두 번째 재림은 이 7년 후에 천년 왕국을 세우기 위한 재림이다.
그러나 이중 재림설은 몇 가지 문제가 있다.
1)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나타내기 위해 신약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로부터 두단계를 재림을 세울 수 없다(살전4:5; 고전1:7; 딤전6:14)
2) 대환란을 묘사하고 있는 신약의 구절들은 교회가 환란이 시작되기 전에 땅으로부터 들림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교회의 휴거는 대환란 이후에 오는 것으로 묘사된 다(마24:30-31; 4:14).
3) 휴거를 묘사하고 있는 중요한 신약 구절마저도 전환란기 휴거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살전 4:16-17; 고전15:51-52; 마25:6). 그리고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혼인잔치가 열릴곳은 하늘 이 아닌 ‘새 땅’이다.
4)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백성과 함께 오심과 그의 백성을 위해 오심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살전3:13; 4:14).
5) 두 단계 재림설을 주장한 어떤 학설도 대환란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쏟아짐이 될 것이라는 가르침으로부터 추론되어질 수 없다(살후1:6-8).
이러한 몇 가지 문제점과 성경의 구절은 종합해 보면 그리스도의 재림은 대환란 후에 일어나게 될 하나의 단일한 사건이며, 그때까지 여전히 살아있는 신자들은 변화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고, 그때에 모든 신자들의 휴거가 일어남을 알 수 있다(고전15:51-52).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은 신자들은 변화된 몸으로, 살아있게 될 신자들과 함께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여 구름 속에 올리어질 것이다. 공중에서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진 후에 휴거된 교회는 다시 땅으로 내려와 예수와 함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특징은 “한 인격이 오심으로”(행1:11; 3:19-21), 또한 “눈으로 보이는 오심”이라는 것, “영화로운 오심”이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14. 천년기에 관한 주요한 견해들
천년기는 4가지로 나뉜다. 그것은 우선 “무천년기설”(후크마의 입장)이고, 두 번째는 “후천년기설”이고, 세 번째는 “역사적 전천년기설”이고, 마지막은 “세대주의적 전천년기설”이다.
- 무천년기설(후크마의 입장)
: 이 설은 계시록 20:4-6의 해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본문에서 언급된 천년기를 이미 죽은 신자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20장에 언급된 사단의 결박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동안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에 끝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신자들과 불신자들의 대부활이 있을 것이며, 부활 사건 때까지 살아있었던 신자들은 변화되어 영화롭게 되고, 이 두 그룹들은 구름 속에 이끌리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올라갈 것이다. 이 모든 신자들의 휴거가 있은 후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내려오는 것을 마치고 최후의 심판을 시작하게 된다. 이 심판 후에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별에 처하게 되고 신자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
- 후천년기설
: 이 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천년기가 그리스도께서 지상적 왕위를 가지고 가현적으로 통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 천년기가 전적으로 천년간만 계속되는 것으로도 이해하지 않는다.
3) 천년기 이후에 그리스도가 재림한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무천년론자들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후천년기 설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거주민들(유대인과 이방인들을 포함한)이 복음의 전파를 통해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게 됨으로써(그리스도의 재림과 상관없이 먼저-역사적 전천년과 다름) 현세대가 점차 천년기 세대로 들어간다고 본다. 그래서 후천년론자들은 로마서 11:25-26을 해석함에 있어 그것이 유대인의 정치적 왕국이 회복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미래에 유대인 민족이 대규모로 개종할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한다. 천년기가 실체화 될 때 그리스도인의 원리들은 모든 나라와 개인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죄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지만 최저의 상태로 감소되고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인 삶이 엄청나게 개선될 것이다. 또한 영적 번영이 긴 시대가 계속될 것인데, 문자적 천년보다 더 긴 기간이 지속될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악이 최후적으로 발흥할 것이지만 이것이 교회에 큰 타격을 주지 못할 것이고, 천년왕국 후에 예수의 재림이 올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오류가 있다.
1) 후천년론자들에 의해 미래적 천년기가 황금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 구약의 예 언들은 사실상 구속받은 공동체의 최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뿐이다.
2) 마24장의 대환란, 그리고 살후 2장의 배도에 관해서 과거의 일로만 해석하려는 일반적 후천 년론적 해석은 정당화 될 수 없다.
3) 계 20:1-6은 후천년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4)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미래적 황금시대가 있다고 하는 후천년론자들의 기대는 하나님의 왕국 과 악의 세력들 간에 있는 이 세상의 긴장에 대해 올바로 다루지 못하게 된다.
- 역사적 전천년기설
: 이 설은 세계 종말 전에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재림이 먼저 있으나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라...-후천년설<재림없이 천년기로>과 다름)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천년동안 왕노릇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당시에 살아 있던 성도들이 홀연히 변화하여 공중에 올라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땅에 내려와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한다. 이후에 종말이 오고 최후 심판이 있다. 그리고 최종상태가 온다. 불신자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지내고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악이 제거된 새땅에서 영원히 지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전천년기설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1) 계 20장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지상적 천년기 통치가 있을 것이라고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하지 않는다.
2) 고전 15:23-24은 그러한 지상적 천년기 통치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분명한 증거자료도 주지 않는다.
3)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와 신자들이 아직 죄와 사망이 존재하는 땅으로 온다는 것은 그들의 영 화가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충돌한다.
4) 지상적 천년기 통치는 신약의 종말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 세대주의 전천년기설
: 이 설은 예언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이스라엘과 교회의 근본적이고도 게속적인 구별을 기본원리로 삼고 있다. 세대주의자들은 인류의 역사를 7시대로 구분하고 그 마지막 시기가 천년왕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계실 때 유대인들에게 하늘의 왕국을 제시하였으나 유대인들이 이를 배척하여 교회를 세우시 시작했다고 본다. 종말의 순서는 예수의 공중재림 후 성도의 부활과 휴거가 일어나 공중에서 7년간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다. 이 7년의 기간동안 지상에는 대환란이 있고, 이 7년후에 지상재림이 일어나 천년왕국이 시작된다.
15. 세대주의 전천년설 비판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대해서는 두가지 비판이 있어왔다. 그것은 이중적 재림(천상과 7년환란후의 지상)과 교회의 휴거(7년환란 전)에 대한 것이었다.
1) 세대주의는 성경 계시의 근본적인 통일성을 공평히 다루는데 실패하였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분리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억지이다.
3) 구약은 장차 미래의 지상적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4) 성경은 유대인들이 천년기에 그들의 땅으로 회복되어 돌아갈 것이라 가르치지 않는다.
5) 왕국의 도래가 연기되었다는 주장은 성경의 뒷받침이 결여되어 있다.
6) 교회는 괄호에 해당된다는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성경의 근거가 없다.
7) 그리스도가 다신 오신 후에도 사람들이 구원에 들어올 것이라는 기대(천상 재림과 동시에
7년 환란 후 구원)의 는 전혀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다.
8) 그들의 천년기는 계 20:4-6의 천년기가 아니다.
16. 요한 계시록 20장의 천년기
윌리엄 헨드릭슨은 계시록 주석에서 점진적인 평행법을 사용하여 계시록 전체의 내용을 일곱단원으로 나누고, 각 단원들이 평행을 이루면서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교회와 세상에 대해 어느정도 종말론적인 점진성을 진술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각 단원 마지막 부분에는 세상 끝이 왔다는 내용(각 단원의 최후의 심판이라든지, 하나님 백성의 최후 축복상태를 언급하고 있다)이 포함되어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 단원들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계시록 20-22장까지에는 그리스도의 최대 대적자인 사단에 대한 심판과 그의 비참함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천년기를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부분인 계 20:1-6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한 부분은 1-3절이고, 다른 한 부분은 4-6절이다.
- 계 20:1-3
: 이 부분은 사단의 결박을 묘사하고 있다. “사단의 결박”이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복음의 시대를 통하여 사단의 영향력이 비록 완전하게 소멸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 세력이 급격히 제한 받고 있기 때문에 사단은 모든 세상의 나라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흐름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세상 나라들이 교회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세상을 정복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 계 2:4-6
: 이 부분은 어떤 개인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통치에 들어갈 것을 묘사하고 있다. 전천년론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재림이 19장에 묘사된 것과 같이 두 장의 관계를 연대기적으로 이해하여 천년기는 그리스도의 재림 후의 사건으로 결론짓는다. 그러나 계시록의 체계와 사단의 패배와 그 최후의 파멸에 대한 묘사(최후의 심판을 말하는데, 전천년기의 그리스도의 재림은 통치를 위한 것이요 심판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심판은 천년기가 지난 후에 최종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이미 계시록 12:7-9에 분명히 명시되어 있듯이 그리스도의 초림시에 시작되었다. 또한 11-15절에 최후 심판이 천년기 이후에 있게 될 것이라는 묘사는 4-6절의 천년기 통치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일어날 사건임을 명백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천년기의 통치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가 아니라 재림 전에 일어나는 것이다(후천년기와 비교!!).
그런데 4-6절까지의 묘사 중에서 “그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노릇하리라”라는 구절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이 구절이 죽은 자들로부터의 문자적 육체적 부활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이 구절이 그리스도의 재림 후 그리스도가 땅 위에서 천년동안 왕노릇하실 것이라는 증거구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살아서 왕노릇’하는 무리들은 문맥상 이미 4절 상반 절에 묘사되고 있는 이들 즉,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그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재림 시의 사이 동안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며(무천년설), 이 사실은 누가복음 20장의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에 대한 질문 가운데서의 예수의 답변 즉, 육체와 영혼이 함께 죽는다는 개념과 잘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영혼 불멸성은 스토아 철학의 핵심이다!). 또한 요한 계시록에서 ‘살았느니라’에 해당하는 어휘가 육체의 부활을 의미하는 곳도 있지만(단 한군데뿐임!), 그 외의 의미로 쓰인 곳이 여러 군데 있음으로 이 어휘를 꼭 육체의 부활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또한 20:4와 평행을 이루고 있는 6:6-11의 의미 속에서도 이것이 더욱 확실하며, 요한의 시대적 상황까지 고려해 본다면 이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17. 육체의 부활
성경은 하나님이 육체와 영혼을 창조하셨고 그와 함께 육체의 중요성을 말해 주고 있다. 이는 그리스나 근동의 사상과는 달리 육체와 영혼의 공존성을 강조한다 하겠다. 성육신의 사건도 육체가 버려야하고 벗어나야 할 악의 감옥이 아니라 선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육체의 부활은 성경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 육체 부활의 시기
: 이 시기에 관해 전천년주의자들은 신자들의 부활(심판이 아닌 왕노릇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시)과 불신자의 부활(천년 후의 심판시)을 천년간격으로 분리한다. 그러나 이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성경구절들(요5:28-29; 계20:11-15)과 신자들이 마지막날(심판시)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일으킴을 받으리라는 성경(살전4:16; 빌3:20-21; 고전15:23), 그리고 분리된 부활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살전4:16과 고전 15:23-24과 일치하지 않는다. 부활의 시기는 이중 사중의 부활이 아닌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단회적 사건(대부활)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이 후에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한다.
- 부활의 본질
: 성경은 부활을 언급함에 있어 육체적 부활을 암시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사 26:19, 단12:2에서 육체의 부활을 말하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약 부활 교리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신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의 미래의 부활에 대한 증표와 보증이라고 한다(고전15:20; 골1:18; 롬8:29; 요14:19; 빌3:20-21).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현재의 육체와 부활체 간에 부패와 부패되지 않음, 욕됨과 영광, 약함과 강함, 자연적 육체와 영적(신령한) 육체라는 유비적 차이를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육체와 부활체와의 사이에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이 있음 또한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육체 부활의 필연성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의 현재의 육체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실 왕국의 풍요로운 축복들을 기업으로 얻을 수 없기에 반드시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 육체의 부활에 관한 모든 것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18. 최후의 심판
(16장에 후크마는 신약성경에서의 최후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결되었음을 강조한다)
최후 심판의 목적은,
1)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을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드러내기 위함
2) 각인이 받게 될 보상과 형벌을 나타냄
3)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하기 위함이다.
이 심판의 날은 엄격한 의미에서 재판이라기 보다는 ‘선고와 집행’의 날이다. 이 최후 심판의 시기는 대부활 사건 이후에 일어나는 유일한 최후 심판으로 현세대의 종말에 일어날 것이다. 또한 ‘날’의 개념 역시 현재의 날의 개념과는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천년도 아니다. 다만 이 날은 긴 기간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최후의 날에 그리스도가 재판장이 되로, 그리스도의 이러한 사역에 천사들과 성도들이 보좌하게 될 것이다. 이 날에는 천사들과 모든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이 심판은 모든 이들에게 적용되나, 믿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날이 아니요 정죄함이 없는 담대한 믿음으로 맞는 날이다. 사람이 행동으로 옮기는 모든 것의 실상은 그 삶의 마음의 근본적 방향이며 따라서 심판의 날에 참작될 것이다. 그리고 심판은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따라 진행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신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의 충만한 계시를 받은 자들은 그들이 성경 전체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따라 판단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계시를 전혀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가졌던 빛 아래서 판단 받게 될 것이다. 계시의 빛 아래 있었던 자들에 관하여는 그들이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의 완전한 의로움으로 살았는가하는 문제 즉, 예수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가 그의 영원한 향방을 결정할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최후의 심판에 있어서 행위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은 행위와 믿음간의 밀접한 관계성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공과는 마 25:31-46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행위와 공로에 의한 축복이라기 보다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준비된 선택인 것이다. 이 심판에서 신자들이 받게될 상급은 구원이 전적인 은혜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질과 상급은 비례할 것이다.
심판 날의 중요성은 세상의 역사가 무의미한 원형의 끝없는 연속이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운동이라는 점에 있다. 구원과 영원한 축복의 상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각 개인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최후 심판의 날은 최종적으로 나타낼 것이다. 심판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의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한 긴장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심판의 날은 모든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 세상 끝날에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드러낼 것이다.
19. 영원한 형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던 자들의 최종 상태에서 영원한 형벌은 그리스를 믿지 아니한 자들, 곧 불신자들과 사악한 자들의 최종상태를 말한다. 물론 보편주의나 전멸주의라는 이 영원한 형벌에 대한 교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교회사 속에 나타나지만 예수와 사도들의 가르침 속에는 이 교리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마10:28, 5:29-30,18:8-9; 막9:43).이 형벌은 영원한 것이며 끊없는 고통과 괴로움의 상태와 하나님과의 교제가 영원히 상실되는 파멸을 의미한다(살후1:7-9, 히10:28-29).
지옥이 어디인가에 대한 문제는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분명 지옥이라는 곳이 있어야함을 인정해야 한다.
영원한 형벌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20. 새로운 땅
육체 부활 후에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사역의 결정체로서 창조하실 새 땅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이 새 땅에 대한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하겠다. 그리고 장차 올 생명을 향유하는 모습과 하나님의 구속계획의 충만한 다양성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다. 이것은 또한 구약의 예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더욱 중요하다 하겠다.
새 땅에 대해 성경은 다양한 가르침을 준다. 창 1:28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그것은 에덴을 포함한 온 땅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은 이러한 권한을 박탈당했고, 땅 역시 저주를 받게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3:15에 모든 약속의 원형이 되는 ‘어머니-약속’을 주시는데 이것이 인간에게 최종적인 승리를 기대하는 원천이 된다. 이제 죄로 인한 죽음은 정복될 것이고, 인간이 죄없이 올바로 통치할 따, 그 회복된 낙원으로 인간이 돌아가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되었다. 땅이 인간과 함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약속된 승리의 한 부분으로서 이 저주와 그 밖의 죄의 결과들은 마땅히 제거되어야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 땅에 대한 기대는 이미 창3:15의 약속에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창15장과 17장의 아브라함의 언약속에서도 땅의 모든 나라들과 민족들이 그 언약에 포함되고 있음이 발견된다. 그리고 우리는 히11:9-10에서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약속된 유업의 성취로서 새 땅을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러면 새 땅이란 현재의 땅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것은 현재의 땅이 최후의 심판의 날에 완전히 소멸될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된다는 사실 속에서 이 둘의 밀접성을 발견할 수 있다(벧후3:13, 계21:1, 롬8:20-21). 각각의 성경은 현재의 우주와 동질이되 영화롭게 갱신된 우주의 창조를 말하고 장차 종말에 현재의 창조 세계가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패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보다 잘 이해가 갈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를 소멸시키시고 새로운 우주를 만드신다면 결과적으로 사탄은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와 함께 들어갈 세상은 바로 이 세상, 이 하늘, 이 땅인 것이다. 새롭게 된 세상을 가리킨다.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약속은 현재의 우리에게 풍성한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 시편37:11과 창17:8과 롬4:13과 8:19-21 등에서 땅은 세상이라는 의미로 확장되고, 이 새 땅은 인간 뿐 아니라 피조물들도 그 도래를 학수 고대하는 우주적 차원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새 땅에 대한 극적인 묘사가 계시록 21:1-4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새 땅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과 용기를 주고 절망과 좌절의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낙관적으로 살게끔 한다. 이 낙관은 추상적인 사고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세상의 모순과 악에 대한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실천 가운데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이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땅에 살면서 이미 하나님의 새 땅에 살 준비를 하고 있는 누리는 죄와 투쟁하고 선교를 전개하면서 기독교 특유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증진시키면서 이 모든 노력들이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장차 올 새 땅에서도 값진 것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확신가운데 살아야 한다.
▣ 평가 ▣
본서는 무천년적 입장에서 개혁주의 종말론을 일목요연하게 개관하고 있다. 책의 전체적인 구조를 “이미-아직”의 구조에 맞게 “시작된 종말론-미래 종말론”의 두부분으로 대분하여 서술함으로 저자 자신의 입장을 정확히 표현해 주고 있다 하겠다.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무엇보다 종말론의 민감한 부분을 잘 정리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을 언급할 수 있다. 특히 제 2 부에서 육체의 부활이라든지, 새로운 땅에 대한 주제를 여러 학파의 천년기와 연결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성경 구절을 제시함에 있어 단지 증빙의 자료로서 성경구절을 나열하는 방식이 아닌, 구절을 주석적 작업으로 접근하여 민감한 주제들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 또한 이 책의 장점이라 하겠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 자신의 입장 즉, 전천년기설을 포함하여 여러 종말론에 관한 신학적-역사적 개괄이 포함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또한 미래 종말론 부분에서 개인적인 종말론 부분을 너무 간략하게 넘어갔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개혁주의측의 입장이 그리 분명하지 못한 것 같다. 따라서 이 부분은 단지 부정적인 용어 즉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으니 언급할 필요 없다는 식의 방식으로 서술되어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이 책은 건전한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종말론 교재로 흠이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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