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성찬, 성만찬의 의미
1. 로마 가톨릭의 칠성사(七聖事)의 부당함
① 영세(領洗) ② 견진(堅振) ③ 고해(告解) ④ 성체(聖體) ⑤ 종부(終傅)=병자(病者) ⑥ 신품(神品) ⑦ 혼배(婚配)
개신교는[성경은] '세례'와 '성찬' 이 두 가지만 성례라고 믿는다. 그 이유는?
(1) 성례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셨음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2) 외적이고 가견적(可見的)이면서 내적이고 불가견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활동을 나타내는 표라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의 형태가 가시화되어야 한다. 세례에서는 물과 물로 씻음이, 그리고 성찬에서는 빵과 포도주와 이것들을 먹고 마심이 있다.)
(3)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의 교회에서 지키라고 명하신 항구적인 제도임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4) 그것을 받는 자들의 신앙이 강화되고, 강건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인친 의식임을 나타내야만 한다.
2.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은혜의 방편
이 성례들은 표지(상징)이며 인(印)이기 때문에 성례 자체가 구원의 수단은 결코 아니며, 구원의 상태를 가져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방법도 아니다.
세례란 하나님의 은혜의 보증(죄를 씻었다는)으로, 우리가 그 세례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하고, 그 은혜를 증거하며,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규례에 순종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집행함으로써 은혜와 복을 받게 되는 은혜의 한 방편이다. 성찬도 이 예식에서 표시되는 것(sign), 곧 그리스도와의 친교, 그의 몸과 피에서 생긴 효력(대속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어서 복이며 은혜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강조되는 것이어서 우리가 심정적으로 그 신실하심에 순종의 반응을 보임으로써 복된 은혜의 효력을 얻게 된다.
3. 성례와 교회의 관계
'성례의 정당한 집행'은 교회의 표지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자가 스스로 세례를 받고, 비밀리에 혹은 집에서 홀로 만찬을 가진다면 교회와 상관없는 행사가 되어서 그 성례는 무효화된다. 성례가 교회와 상관없거나, 말씀의 전파와 하나님 백성의 회중에서 분리된다면 성례로서의 기능은 끝나는 것이다.
3) 성만찬의 의미
1) 성만찬의 이름들
1. '주님의 만찬'이다.
주님의 만찬은 단순한 음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가진 식탁에서 제정해 주셨던 성례전 사건을 일겉는 말이다. 이 이름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의 모임에서 떡을 뗄 때마다 계속된 것으로 보이는데, 바울의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서 받은 것이니"라는 표현에서 이 이름의 뜻이 보다 명확해진다.
2. 성체성사(Euchrarist)이다.
이는 본래 '축복' 또는 '감사'의 원리를 내포한 것으로서 마태복음 26:26-27의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와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이 명칭은 가톨릭에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으며, 미사(Missa)의 전체예전 마지막 부분이 되는 '파견(파송)'의 뜻에 가깝게 해석하고 있다.
3. 성찬(Holy Communion)
고린도전서 10장 16절에 언급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Communion)"이란 용어를 바울이 사용한 것에 근거한다. 이는 성만찬의 본질적인 면으로서, 성만찬을 통해 주님과 참여자들 스스로가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지역, 어느 환경에서의 성만찬의 성례전일지라도 한 그리스도의 몸을 받고 동일한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한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한 몸 이룬 한 형제'라는 실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이러한 명칭이 주는 의미이다.
4.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으로서 성만찬을 이러한 이름으로 부를 때는 앞에서 언급한 명칭과는 많은 차이가 생긴다. 그것은 최후의 만찬이란 유월절 만찬(Passover Supper 또는 Passover Meal)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명칭은 성만찬을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있었던 일회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했던 그 마지막 만찬을 가리키는 것이다.
5. 희생의 봉헌(Offering of Sacrifice)으로서 성만찬의 신학적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두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을 앞두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찢기고 피가 흘리게 됨을 알리는 행위로 빵을 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니"라고 하셨고 잔을 드신 후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라고 하셨다.
따라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의 만찬은 희생제사의 음식으로써 그 의미를 갖게 되었으며, 주님 자신이 제단의 양과 같이 직접 제물로 받쳐졌다는 점에서 희생의 봉헌 또는 제물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2) 성만찬의 기원
1. 키두쉬
키두쉬(Kidush)는 랍비와 제자들이 안식일이나 명절을 종교적 차원에서 준비하기 위해서 식탁에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던 관습이었다. 때문에 예수와 제자들이 3년간의 생활 속에서도 계속 행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이라는 명칭은 이 키두쉬 행사 가운데 최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2. 유월절식사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생활이 지속되는 한 영원히 지켜야 할 민족적 절기다.
최후만찬의 거행장소는 예루살렘이었고, 최후의 만찬을 위한 장소가 소란없이 제공되었으며, 거행시간이 밤이었고, 소수의 남자들만이 모여 가족적인 분위기가 유지되었으며 음식을 상에 기댄 자세로 먹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빵을 떼기 전에 어떤 음식이 먼저 나왔으며 유월절의 독특한 특징인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일반적으로 유월절 식사순서에 있는 성경강해 순서에 빵과 포도주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 대치되었다. (눅22:7-21)
3) 성만찬의 다양한 이해
교회사적으로 성만찬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어왔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크게 네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겠다.
1. 화체설(transubstantiation)
제 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확정된 교리로서 로만 가톨릭 교회에서 채택하고 있다. 사제가 축사하는 순간에, 빵과 포도주의 형상(우유성偶有性:모양, 맛, 냄새)은 그대로이나, 질료(실체substance)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2. 공재설(共在說consubstantiation)
루터교는 빵과 그리스도의 몸, 양자가 모두 동시적으로 현존한다고 보는 공재설을 주장한다. 루터에게 있어서 화체교리는 스콜라주의의 난잡한 이론을 사용하여, 신비를 이성화 시키려는 불합리한 시도로 여겨졌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성찬에 실제적으로 현존한다는 사실이었다.
3. 영적 임재설
칼빈과 웨슬리에게서 받아들여지는 입장으로, 떡과 포도주는 하나의 상징이지만 성령을 통해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받아들이는 효력이 있다고 본다. 칼빈은 루터의 공재설을 비판하여 육체적 임재(현존)를 부인하나,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고 본다(효력설이라고도 한다). 웨슬리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육체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임재한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성만찬은 성령에 의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양식이 된다.
4. 기념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성찬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에 대한 기념일 뿐이지, 희생제사(sacrifice)가 아니었다."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대한 상징일 뿐이다. 그에게서 "이것은 내 몸이다"(마 26:26)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상징적, 비유적, 은유적으로 해석되어, 성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라는 관념이 배격된다.
4) 종교 개혁가들의 성만찬
1. 루터의 성만찬
루터의 성만찬에 대한 입장은 초기에는 화체설에 가까운 이해를 가지고 있다가 후에 쯔빙글리와의 논쟁을 거쳐 공재설(Consubstantiation)의 입장을 취하게 된다. 루터가 이야기하는 성만찬의 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성도의 교제이다.
둘째는 사죄의 은사를 말한다. 루터는 성만찬 때에 그리스도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만찬을 통해 이미 획득된 용서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따라서 성만찬 안에는 죄의 용서가 있다고 말한다.
셋째, 성만찬이 죄악 속에서 괴로워하며 비탄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힘과 위로를 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루터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신앙을 돕고 촉진시키는 표적이며 성만찬의 효과는 자체의 작용에 의해서가 아닌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2. 쯔빙글리의 성만찬
쯔빙글리는 무엇보다도 말씀에 강조를 두었고, 성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으로 그래서 그는 루터가 쓰던 성만찬의 모든 예식을 간소화했다. 이러한 쯔빙글리의 신학은 지금의 성만찬 경시풍조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3. 칼빈의 성만찬
칼빈이 1542년 제네바에서 발간한 칼빈의 예배의식
말씀의 예전 (The Liturgy of the Word)--예배의 말씀 / 죄의 고백 / 용서를 구하는 기도 / 운율시편 / 성령임재를 구하는 기도 / 성경봉독 / 설교
다락방 예전 ( The Liturgy of the Upper Room)--구제헌금 / 중보기도 / 성물준비 / 사도신경 / 봉헌기도 / 성만찬 말씀 / 권면 / 성체분할 / 분병분잔 / 성만찬 참여 / 성찬후 기도 / 시므온의 찬미 / 아론의 축도.
이 제네바 예배의식은 칼빈이 예배의 핵심적 요소를 말씀과 성만찬으로 보고 가능하면 초대교회의 예배내용을 살리려고 노력하였던 것을 보여준다. 성만찬은 먼저 집례자가 받고 그 다음 다른 교역자들과 회중의 순으로 받도록 하였으며 성만찬에 참여할 때는 성찬대(Holy Table)앞으로 나와서 무릎을 꿇거나 또는 선자세로 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예배의식은 후에 대륙지역에서는 프랑스, 스위스, 남부독일, 네덜란드, 덴마트등지의 칼빈계열교회들의 예배모범이 되어졌다.
4. 웨슬리의 성례관과 성찬
A. 성례관
"그리스도의 가시적 교회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으로서, 이 교회에서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에 따라 성례전이 정당하게 집행되어야 한다." ( 웨슬레가 1784년 미국 감리교회를 위하여 제정한 25개 신조 안에 있는 교회의 정의)
웨슬레는 성례전은 "내적인 은혜의 외적 표상이요, 그것을 받는 수단이다"고 말한다.
B. 성찬
성찬은 "성령의 모든 은총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에 전달되는 큰 통로"라고 하였다. 성도는 성찬에 자주 참여해야 하며 그 이유는 첫째,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자들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가 떡과 포도주로 강하게 되듯이, 영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뜻하는 성찬에 의해서 강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찬은 우리 영혼의 양식이다. 웨슬레에게 성찬은 현재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대속을 상징하는 표적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적용하여 확증케 하는 인증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찬에서 "주님의 성육신과 고난이 주는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동시에 성찬은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것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가질 천국 잔치에 대한 보증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성찬을 통해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서약이 된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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