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제자훈련!!

[스크랩] 영적성장을 위한 제자훈련

하나님아들 2016. 2. 5. 15:58

 

영적성장을 위한 제자훈련

 

 

1. 성령의 훈련 : 해방으로 통하는 문

훈련은 보통 일상 생활 중에 실천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훈련이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 변화는 사람이 살아가며 ㅁ는 일상의 관계에 나타나야 합니다. 모든 훈련의 기본은 기쁨입니다. 훈련의 목적은 이기심과 불안의 숨막히는 사슬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그 첫째는 철학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뿌리인 물질주의가 어찌나 깊이 배어 있는지, 내가 물리적 세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하고 심히 의심하게 됩니다. 가령, 묵상은 비록 그걸 인정한다 하더라도, 참다운 영적 세계와의 접촉이라 보지 않고 심리적 조작이라 봅니다.
두번째 어려운 점은 실천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금식, 묵상, 에배, 성찬식 등등의 훈련을 하라고 명하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하라고 일러준 곳은 거의 없습니다. 심령 훈련은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솟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마음의 태도가 기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죄는 우리 삶의 내부 구조의 일부입니다. 의지력으로는 뿌리 깊은 죄의 습관을 결코 처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의지의 힘으로 한동안 그럴듯한 겉모양을 내보일 수 있으나 언젠가는 "무익한 말"이 미끄러저 나와서 진정한 마음의 상태를 폭로해 버리는 순간이 오고 맙니다.

영의 훈련이 문을 엽니다. 속에서 필요한 변화는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내면의 일인데, 내면에서 일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받아들이는 수단으로서 영적 삶의 훈련을 주셨습니다. 훈련들은 우리를 땅 속에 심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영적인 훈련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무엇인가 일어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갈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수단입니다. 영적 삶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께서 축복할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셨습니다.
죽음의 길 : 훈련을 율볍으로 변질시키는 것
성령 훈련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풍요함을 우리의 삶으로 가져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혼을 죽이는 율법이라는 또 하나의 장치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성령의 훈련을 행할 때에 그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같은 겉모습의 의로 변질되기가 쉽습니다. 교만이 들어서는 이유는 우리가 의인이라고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불안이 들어서는 이유는 남들을 지배 못하면 어쩌나 하는 근심, 그리고 남에게 지배당하지 않을까 하는 근심 때문입니다. 훈련이 저주 아닌 축복이 되도록 영의 길을 걸으려면 남을 지배하려는 끈질긴 욕구의 짐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내면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남들을 간섭하려는 조바심을 멀리 할 수 있습니다. 성령 ㅎ련이라는 내면 세계로 들어갈 때에 우리에게는 언제나 그것을 율법으로 변질시킬 위험이 따릅니다. 하늘 나라의 권고에 기꺼이 귀 기울이기만 하면 필요한 지시를 반드시 받게 될 것입니다.

 

2. 묵상 훈련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원수는 세가지 주요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소음, 서두름, 군중이 바로 그것입니다.
묵상은 언제나 기독교 신앙의 고전이며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작업에 꼭 필요한 준비 과정이며, 기도의 부속물이었습니다. 수 세기에 걸쳐서, 기독교의 저술가들은 하나님께 귀 기울이기, 하늘과 땅의 창조주와 사귀기, 세상을 영원히 사랑하는 그분을 체험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양 종교의 묵상은 심령을 비우려는 노력입니다. 기독교의 묵상은 심령을 채우기 위해 비우려는 노력입니다. 동양의 모든 묵상 형태는 세상에서 분리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TM(Transcendental Meditation: 초월적 묵상)의 수준을 보다 높이면 영의 문제를 건드리게 되는데, 그때 그것은 다른 모든 종교와 아주 똑같은 특징을 갖추게 됩니다. 기독교의 묵상은 우리를 내면의 온전함으로 이끌어 가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데에 꼭 필요한 상태입니다. P.T. 로바크는 이렇게 썼습니다."묵상에 성공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는 오직 그 중요성을 확고히 믿고 꾸준히 실천하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것이다"
묵상은 인간 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다시 잡게 하는 수단입니다. 묵상하는 사람들이 곧 행동하는 남녀들이었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묵상이 바깥 생활의 질에 아무 변화도 주지 못한다면, 그런 묵상은 그만두어야 합니다. 가장 널리 퍼진 오해는, 묵상이 심리적 조작을 종교로 나타낸 것이라는 의견입니다. 영의 세계가 우리 내면에 있다는 것을 알고 기꺼이 찾아 나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생한 음성을 원함 : 이스라엘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 하나는 하나님께서 베푸는 신정을 계속 받지 않고 인간 왕을 모시려고 고집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소에 들어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묵상하려는 소망, 그리고 묵상을 시작케 하는 은혜를 더 큰 은혜를 기약하는 약속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묵상의 준비 : 묵상하는 법을 책에서 배울 수는 없습니다. 묵상을 통해 묵상을 배우게 됩니다. 경전을 낭송하는 데에 하루 두 변 20분씩을 쓰는 사람이 많듯이, 우리도 묵상을 위해 정해진 시간을 바쳐야 합니다. 묵상 기도는 삶의 방식입니다. 쉴새없는 활동으로 끊임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내면의 침묵의 시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없을 것입니다. 바깥 일로 지치고 찢겨 가지고서는 묵상을 준비하기 어렵습니다. 날마다 다른 곳을 찾아 다니는 것보다 일정한 곳을 정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가장 편안하고 정신이 가장 흩어지지 않는 자세를 취하는게 제일입니다. 어떤 식으로 하든지 목표는 몸과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묵상 방법-첫 걸음 : 묵상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상상력이라는 문울 통하는게 가장 쉽습니다. 우리는 그 상상력의 굉장한 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런 식으로, 늘 상상력과 감각에 호소하며 가르치셨습니다.
묵상을 배울 때에 먼저 시작하기 좋은 것 하나가 바로 꿈입니다. 르네상스의 합리주의와 함께 꿈을 좀 의심스럽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심리학의 초기 발전기에 프로이드는 꿈의 어두운 면을 주로 강조했습니다.
꿈이 내면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면 다음 세가지를 실천해 봅시다.
첫째,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우리를 가르쳐 달라고 초대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꿈을 기록해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꿈을 기록하다 보면 어떤 양식이 떠오르고, 통찰력이 생깁니다.
세번째로, 어떻게 꿈을 해석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꿈의 뜻을 발견하는 가장좋은 방법은 묻는 것입니다.

묵상 방법-몇 가지 연습 : 하루에 5분내지 10분씩 기간을 두고 시작하라고 권하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을 집중하기 위한 또 한 가지 묵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호흡을 조정하십시요. 편안하게 앉아서 천천히 숨쉬기를 의식하십시요. 그렇게 하면 몸과 긴밀해집니다. 각각의 묵상이 끝나면 감사의 진정한 표현으로 마무리를 지으십시요. 위에 든 두 가지 묵상을 몇 주일간 연습하고 나 성경에 관한 묵상을 덧붙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관한 묵상은 바퀴의 중심 같아서, 다른 모든 묵상들을 적당한 위치에 앉게 하는 중심 지점입니다. 성경 연구가 주석에 중심을 두듯이,성경 묵상은 각 귀절의 내면화와 개인화에 중심을 둡니다. 본 회퍼는 단 하나의 귀절을 가지고 1주일 내내 묵상하라고 권했습니다.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 의식 속에 끼어드는 인간의 생각과 마음 속에 움직이는 참 성령을 쉽게 구별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사건들과 정치적 억압의 속뜻을 꿰뚫어 볼 영적 의무가 있습니다. 권세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예언자적 안목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시대의 사건들을 하나님께 보이고, 이 일들의 성격을 꿰뚫어 볼 예언자적 통찰력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에 묵상이 아무 뜻 없게 여겨진다고 해서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은 훈련받아 본 적이 없는 기술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3. 기도 훈련

묵상은 우리를 내면 생활에 안내하고, 금식을 거기에 따르는 수단이지만, 우리를 인간 정신의 가장 깊고 가장 높은 작업으로 인도하는 것은 기도 훈련 바로 그것입니다. 참다운 기도는 삶의 창조요, 삶의 변화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형시키는 에에 사요하시는 간선도로입니다. 기도, 참다운 기도를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마틴 루터는 "기도 잘 한 사람이 연구 잘 한 사람이다" 라는 말을 영적인 좌우명으로 삼았고,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신다"고 말하면서 매일 두 시간을 그 거룩한 일에 바쳤으며 데이빗 브레너드의 생애에서 가장 특출한 점은 그의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방법을 알고 싶다면 폭넓게 독서하며 깊이 체험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하는 법 배우기 : 참다운 기도는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누가복음 11:1)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나의 메마른 경험에 맞추려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나의 경험을 맞추기 위해서 기도를 배우리라 결심했습니다 남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과 힘이 우리를 통해 남들에게 흐를 수 있도록 하나님과 접촉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남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려면 먼저 집중을 하고 만군의 주님의 조용한 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인생의 작은 모퉁이에서 성공하면 더 큰 문제에도 권위가 생깁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 뿐 아니라 그분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도 알게 됩니다.

기도의 작은 언덕 : 기도는 너무 복잡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묵상할 때 그러했듯이 상상력은 기도하는 일에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우리는 상상력을 사용하여 기도하기를 꺼립니다. 그러나 상상력은 신앙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줍니다. 목사가 설교하는 동안 회중 모두가 열렬히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기도를 통해 친 자녀가 변회될 수 있습니다. 기도로 시간을 너무 뺏기지 않을까 격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시간을 모두 지배한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기도와 행동은 결혼한 것입니다.

 

4. 금식 훈련

영혼의 힘이 제외되고 형식만 있는 곳에서는 늘 율법이 판치게 됩니다. 율법이 통제하는 힘을 가진 듯이 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신체는 공기나 물 없이는 잠시밖에 견딜 수 없지만 보통 40일은 먹지 않아도 굶어 죽지 않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통해 많은 훌룽한 크리스찬들이 금식을 하였고 그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금식은 물론 기독교만의 훈련은 아닙니다.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들은 그 장잠을 인정 합니다.
성경에 나온 금식 : 성경에 의하면, 금식은 영적인 목적을 위해 음식을 절제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의 금식은 언제나 영적인 목적에 중점을 둡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금식은 보통 물을 제외한 모든 음식 먹는 것을 끊는다는 뜻입니다. 음식과 물을 모두 끊는 금식, 즉 "절대금식"이라 부를 만한 예도 성경에는 여러번 나옵니다. 그것은 무시 무시한 긴박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필사적인 방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절대 금식은 예외적인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명백한 명령을 받았을 때 외에는 해선 안되며 할 때에도 3일을 넘어선 안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6세기 오를레앙에서의 2차 종교회의에서, 정기적인 금식이 의무화 되었습니다. 정기적으로나 미주 하는 금식이 어떤 이들에게 이처럼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에 대한 성경의 명령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정기적인 금식을 명령하는 율법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오늘날 금식과 비슷한 훈련이 있는데 그것은 "철야"로서 바울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나 다른 영적인 의ㅜ에 참여하기 위해 잠을 자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금식은 계명인가? :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의 힘으로 이미 그들 사이에 와 있었습니다.
금식의 목적 : 금식은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금식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실패한 것입니다. 다른 모든 훈련 이상으로 금식은 우리를 지배하는게 부엇인가를 잘 가르쳐 줍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변화되기 바라는 참다운 제자에게는 놀라운 혜택입니다. 금식은 생활에 균형을 잡도록 도와줍니다.
금식의 실제 : 금식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내요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발전 단계를 밟아야 합니다.
둘째는 섬기겠다는 내면의 태도입니다.
세째, 당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꼭 알아야 할 사람만 알게 하십시요.
장기 금식을 시작하기 전에 많이 먹어서 "저장"해 두고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건 가장 현명치 못한 일입니다. 장기 금식을 끝맺을 때에는 먼저 과일 쥬스나 채소즙을 먹어야 합니다. 금식의 신체면에 정신을 많이 뺏긴다 해도, 성경에 나오는 금식의 주안점이 영혼의 영역에 있음을 잊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5. 공부 훈련

책만 공부하는 사람은 몸 없는 혼만을 얻습니다. 마음은 변화 목표에 맞추어 감으로써 새로와 집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불안과 근심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공부 훈련을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진리를 아는 것임을 뚜렷이 밝히셨습니다.
공부란 무엇인가? : 공부는 묵상과는 다릅니다. 묵상은 경건이고 공부는 분석입니다. 묵상은 말씀을 즐기고, 공부는 그것을 해명합니다. 공부는 그 안에서 묵상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객관적인 틀을 제공해 줍니다. 공부의 주요 과제는 주어진 상황, 만남, 책 등등의 실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4단계 : 그 첫째는 반복입니다. 반복은 정신을 특정 방향으로 늘 향하도록 하는 방식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집중입니다. 집중은 정신을 한데 모읍니다. 연구 대상 쪽으로 주의의 초점을 맞춥니다. 또 한가지 단계는 숙고입니다. 공부하려면 겸손 필요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책을 성공적으로 공부하려면,
본래적 규칙 세 가지와 외래적 규칙 세 가지를 터득해야 합니다.
첫째 읽기는 책을 이해하기 입니다.
두번째 읽기는 책을 해석하기입니다.
세번째로 읽을 것은 책을 평가하기입니다.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체험, 다른 책들, 생생한 토론이라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어야 할 첫번째 책이자 가장 중요한 책은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가 성경으로 다가가는 것은 변화받고자 함이지 정보를 쌓고자 함이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함에 있어서는 해석, 즉 그게 무슨 뜻인가에 상당한 우선권을 줍니다. 신앙적으로 읽을 때에는 적용 즉 그게 나에게 무슨 뜻이 있는가에 상당한 우선권을 줍니다. 몇몇 교회가 성경 공부를 진지하게 다룰 필요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대개 어른 주일 학교는 너무나 피상적이고 경건 위주여서 성경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시간을 내는 일잉 아니라 이것이 시간을 낼 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납득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의 구조와 흐름에 주목하십시요. 어려운 대목은 적어두었다가 나중에 다시 보십시요. 생각과 인상들을 간단히 적어 두십시요. 때로는 몇몇 위대한 신앙적 고전들을 성경과 아울러 공부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러한 은둔 생활의 경험은 당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동부 훈련의 열쇠는 많은 책을 읽는 데에 있지 않고 일은 것을 실천하는 데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요.

말없는 "책"을 공부하기 : 그것은 사물, 사건, 행동의 본질을 관찰하는 일입니다. 자연을 공부하려면 먼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연을 공부하는 단계는 경건한 관찰입니다. 또한 모든 자연을 사랑할 때 그것에서 배우게 됩니다. 자연 의외에도 제도와 문화와 그들을 형성한 힘을 공부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 시대의 사건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 문화의 가치관을 알아 볼 가장 분명한 방식 중의 하나는 텔레비젼 광고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기독교 예언자가 맡은 가장 중요한 역확 중 하나는, 여러 발명품들과 힘들의 결과를 인지하여 그것들에 가치 판단을 내릴 능력입니다. 공부는 가장 진지한 노력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6. 단순화 훈련

단순성은 기쁨과 안정을 가져옵니다. 치레는 근심과 불안을 가져옵니다. 단순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져오시는 해방을 맛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적인 본질은 없으면서 생활 양식만을 단순화하려다가는 치명적인 형식주의에 빠집니다. 단순성은 내면의 집중과 통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면의 본질을 맛보면, 외적으로도 해방이 됩니다. 말이 진실되고 정직해집니다.
현대 문화는 단순성의 내적 본질과 외적 생활 양식이 둘다 결여되어 있습니다.거룩한 중심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안전하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미친듯이 물건들에 매달리게 됩니다. 우리의 문화가 지금 얼마나 휘청거리고 있는지를 알게 될 때까지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배금주의를 처리할 수도 없고, 기독교적 단순성을 바랄 수도 없습니다. 단순성이라는 성령 훈련은 잃어버린 꿈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이상입니다.
성경과 단순성 : 성경은 끊이없이 재물에 눈이 어두워 매달리면 정신적인 노예 상태에 빠진다고 과단성있게 가르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나라를 원한다면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처럼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금욕주의를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금욕주의는 소유를 배격합니다. 단순성은 올바른 눈으로 소유를 봅니다. 금욕주의는 궁핍에서만 만족을 찾습니다. 단순성은 궁핍과 풍부를 모두 만족할 줄 압니다.
단순성의 성령 훈련은 필요한 통찰력을 갖우어 줍니다. 단순성은 우리를 해방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을 선물로 받아들이도록 해 줍니다.
받침점 : 모든 훈련들 중에서 단순성은 가장 눈에 잘 띄며, 따라서 가장 타락하기 쉽습니다. 단순화 훈련의 중심점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단순화의 성령 훈련에서 오직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개인적 사회적으로 그 의를 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소유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단순성의
첫번째 마음가짐입니다. 우리 소유는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돌보심의 결과입니다. 우리 소유를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님을 아는 것이 단순성의
두번째 마음 가짐입니다. 단순성이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ㅂ고 맡길 자유를 뜻합니다. 우리 소유를 남들을 위해 쓰는 것이 단순성의 세번째 마음 가짐입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기 때문에 가진 것을 나누어 주기 보다는 움켜쥐게 됩니다.
단순성의 바깥 표현 : 단순성이 주는 해방감을 맛보고 나면 사는 방식이 무언가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첫째 물건을 살 때에는 위신에 관게없이 실용성을 보아 사십시요. 꼭 필요한 것만 사십시요. 옷이 낡아빠질 때까지 입으십시요. 옷으로 사람을 감탄시키려 하지 말고 당신의 생활로 감탄시키십시요.
둘째, 탐닉하게 되는 것을 모두 물리치십시요. 돈이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면 좀 줘 버리고 내면의 해방감을 맛보십시요.
세째, 물건들을 주어 버리는 습관을 기르십시요. 쌓아 올리지 마십시요. 쓸데 없는 물건더미들 때문에 인생이 복잡해집니다.
네째, 현대 기계 장치의 하수인들의 광고에 넘어가지 마십시요. 유익하고 탄탄한 장난감을 찾으십시요. 손수 만들어 보기도 하십시요대게, 기계 장치들은 세계의 에너지 자원을 쓸데없이 고갈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다섯째, 소유하지 않고 즐기는 법을 배우십시요. 인생의 많은 것들은 소유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습니다.
여섯째, 삼라만상을 더 깊이 감상하십시요.
일곱째, "지금 사고, 값은 나중에"라는 도식에 대해 건전한 의심을 품으십시요.
여덟째, 꾸밈이 없고 정직한 말을 하라는 예수님의 지시에 따르십시요. 꾸밈없이 말하기가 어려운 까닭은 우리가 거룩한 중심에 의거하여 살지 않고 하늘의 격려에 응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홉째, 남을 억압하게 될 일은 모두 물리치십시요.
열번째, 당신의 주요 목표에서 다른 곳으로 정신이 팔리게 하는 것을 모두 물리치십시요.

 

7. 고독 훈련

혼자 있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음과 군중속에 휩쓸립니다. 고립은 내면의 공허입니다. 고독은 내면의 충만입니다. 고독은 우선 장소가 아니라 정신과 마음의 상태입니다. 혼자 있을 자유는 사람들과 떨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경청하기 위해 간직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면의 "심령의 고독"중에 사셨습니다. 고독없이 사귐을 바라는 사람은 말과 느낌의 공허함 속에 빠집니다.
고독과 침묵 : 침묵이 없이는 고독도 없습니다. 말이 없어야 침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경청하는 행동은 꼭 필요합니다. 내면의 고독과 내면의 침묵이 서로 얽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독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침묵이 가지고 있는 변화의 능력을 깨닫고 체험해야 합니다. 훈련을 율법으로 여기는 사람은 침묵을 늘 터무니 없는 짖거리로 만들어 버립니다.훈련된 사람은, 필요할 때에 필요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매자의 제사 : 우매자의 제사란 인간 중심의 종교적인 언사들을 뜻합니다.
우리가 침묵을 잘 지키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가 아주 어쩔 줄 모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남들을 움직이고, 다루는 데에 말에 의존하는 습관이 붙어 있습니다. 혀는 우리가 가진 조종의 무기로서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침묵은 성령의 훈련 중 가장 깊숙한 것 중 하나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멈추게 하니까요. 침묵의 열매 한 가지는 우리를 의롭다함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자유입니다. 남들을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침묵은 우리를 그러한 해방으로 인도하는 주요 수단입니다. 진정한 침묵을 할 줄 알게 되어야만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영혼의 어두운 밤 : 어둠은 우리를 벌하거나 괴롭히기 위해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독을 진지하게 추구할 때, 처음에는 대개 반짝하는 성공을 맛보지만, 그 후 반드시 갑작스러운 내리막길이 따릅니다.그러면 내면적 고뇌의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그곳에서 빠져 나오라는 선의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마십시요. 실제로 "한적한 처소"에서 한 철 동안 은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십시요. 영혼의 어두운 밤을 향해 가는 우리의 여행을 끝맺기 위해 우리의 영적 스승이 하는 이 강력한 말을 되새겨 봅시다.
고독의 여러 단계 : 성령 훈련은 실천입니다. 우리가 다루는 것은 행동이지 마음의 상태만이 아닙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론을 지나 삶의 현장에 이르러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혼자 들어가 여러 날 있을 장소 하나쯤 짓는 게 어떻겠습니까? 또한 말수가 적고 실속 있는 말을 하도록 훈련하십시요. 꾸밈없는 말을 하도록 주의하십시요. 하겠다고 말했으면 그대로 실천하십시요. 일 년에 네번, 삶의 목표를 조정할 목적으로 3-4시간 동안 조용한 시간을 가지십시요. 이 일은 하루 저녁에 쉽사리 행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목표와 목적을 재평가 하십시요. 방향 전환과 목표 설정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시장 조사처럼 냉정하고 계산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하고 있으므로 거룩한 중심 되시는 분과의 교류를 통해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얼마나 더 좋은지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사람들과 더불어 진실로 살기 위해 사람들로부터 떠나 있어야 합니다. 고독의 열매는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8. 순종 훈련

종교만큼 인간을 속박하는 것은 없습니다. 또한 종교 중에도 순종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만큼 인간을 파괴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의 사절이 아닌 삶의 사절임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주의력과 분별력을 가지고 이 훈련을 수행해 나아가야 합니다. 훈련의 목적은 자유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자유지, 훈련이 아닙니다. 훈련 그 자체에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해 주고, 그리하여 우리가 찾는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의 수단으로서만 가치가 있습니다. 훈련에 집착하려는 유혹이 워낙 심하기 때문에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훈련의 이런 한계를 분명히 이해해야 하며, 영원히 그리스도를 중심에 둡시다.
순종 속의 자유 : 오직 순종만이 우리로 하여금 참다운 쟁점과 완고한 고립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니다. 순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남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우선강조하고 있습니다. 정말 중대한 것은 사람들과 더불어 있으면서 우리가 품는 존중과 경의의 마음가짐입니다. 순종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이 이웃을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시금석 : 자기 부정은 사람들이 추측하는 것처럼 자아를 잃어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부정은 자기 경멸과 같은 뜻이 아닙니다. 자기 경멸은 우리에게 아무 가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기 부정은 우리에게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선언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것을 실현시킬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자기 사랑과 자기 부정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부정이야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단 하나 확실한 길임을 여러번 밝히셨습니다. 자기 부정이란 남들에게 양보하는 자유를 뜻한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한번 명
심해야 합니다. 자기 부정 안에 거하지 못할 때 우리는 만사가 우리 뜻대로 되기를 요구합니다. 자기 부정이 곧 해방이라는 시실을 볼 수 있을 만큼, 아마 안개가 충분히 개었을 것입니다. 자기 부정은 순종 훈련의 시금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혁명적 복종 : 이 과격한 섬김의 가장 뚜럿한 상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만을 겪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일생을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길, 고난받는 조의 길은 그의 생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순종과 섬김으로 이어지는 십자가의 일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고난에 의해 승리하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십자가의 삶이란 자발적인 복종의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이란 자유로이 선택한 섬김의 삶입니다.
사도 서신이 가르치는 혁명적인 순종 : 십자가의 삶을 살라는 크리스찬에 대한 명령은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삶에 뿌리 박고 있습니다. 순종은 신약성경 전체를 뚫고 흐르는 윤리의 주제입니다. 그것은 크리스찬이면 누구나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라는 명령을 받는 이유는, 예수께서 순종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상에서의 처지 때문에 복종할 게 아니라, "주 안에서 마땅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한다면 그는 아내의 욕구를 존중하며 살 것입니다. 기꺼이 아내에게 양보하고 아내에게 순종할 것입니다. 사도 서신들은 당시의 상 하 복종하는 사회 구조를 합당하게 여기지 않고 모두 복종하라고 명령함으로써 당시의 체제를 상대화하고 깎아내렸습니다. 그들은 크리스찬들에게 새 질서의 시민으로 살아가라고 명했습니다. 이 새 질서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은 서로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순조의 한계 : 순종의 한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성령에 깊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순종하는 행동 : 순종과 섬김은 서로 도와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표현된 순종에 대해서 일곱 가지 간단히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첫번째, 순종하는 행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두번째,순종하는 행동은 성경에 대한 것입니다.
세번째, 행동은 가족을 향한 것입니다.
네번째, 행동은 이웃 사람을, 그리고 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향한 것입니다.
다섯번째, 믿음의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순종해야 할
일곱번째는 세계입니다. 순종하는 우리의 행동은 날로 무책임해져가는 세계에서 책임감 있는 시민으로 살겠다는 결단인 것입니다.
맺는 말 :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다 보면, 예수께서는 이 세상의 사고 방식과 완전히 다른 권위의 개념을 가르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영적인 권위는 동정심과 ㅣ을 함께 지닌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9. 섬김 훈련

십자가의 순종의 표상이듯이 수건은 섬김의 표상입니다. 문제는 발을 씻어 주는 사람은 가장 작은 자라는 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지 투성이의 발로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가장 작은 자라고 인정받기는 모두 싫었습니다.
섬김의 훈련에는 또한 큰 자유가 있습니다. 섬김은 우리로 하여금 발전과 권위라는 세상의 장난에 대해 "아니오!"하고 말할 수 있게 합니다. 핵심은 지도력, 또는 권위의 모든 의미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권위를 가졌다고 가르치신 적은 결코 없습니다.
독선적인 섬김, 참다운 섬김 : 독선적인 봉사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 옵니다. 독선적인 봉사는 "큰 사업"에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봉사는 작은 봉사와 큰 봉사를 거의 구별할 줄 모릅니다. 독선적인 봉사자는 외적인 보상을 요구합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노력을 보고 인정해 준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참다운 봉사는 숨겨진 채로 만족합니다. 주위의 빛과 알림을 두려워하지 않되, 그런 것들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참다운 봉사는 결과를 계산하는 욕망이 없습니다. 다만 봉사를 기뻐할 뿐입니다. 독선적인 봉사는 봉사할 대상을 뽑아내고 고릅니다. 참다운 봉사는 직분을 행하면서 차별하지 않습니다.독선적인 봉사자는 기분과 변덕에 좌우됩니다. 봉사할 "기분"이 들 때에만 봉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봉사는 하나의 생활 양식입니다. 독선적인 봉사자는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공동 사회를 파괴합니다. 끝까지 분석해 보면 그것은 개인의 영광에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반면에 참다운 봉사는 공동체를 건설합니다.
섬김과 겸손 : 나는 겸손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겸손하지 못하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모든 고전적인 성령 훈련 가운데 섬김이야말로 겸손을 성장시키는 데에 가장 좋은 것입니다. 섬김만큼 육신의 무절제한 욕망을 훈련하는 것은 없으며, 숨어서 봉사하는 것만큼 육신의 욕망을 변화시키는 것도 없습니다.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마다 우리의 교만과 자만심이 함께 못박힙니다. 이웃에게 즐거이 하는 숨은 봉사는 행동하는 감사의 기도입니다.
예 .... 그러나 : 우리는 섬기기를 선택하는 것과 종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의 차이를 알아 보아야 합니다. 종이 되기를 택할때, 우리는 누구에게 언제 봉사할 것인가를 결정할 권리를 포기합니다. 우리는 늘 쓸모있고 공격받기 쉬운 자리에 있게 됩니다.
시장에서의 섬김 : 특별한 봉사 활동을 한다는 것과 섬김 훈련 속에서 산다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봉사를 늘 사람들 보는 곳에서 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얄팍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작은 봉사들은 우리를 게으르지 않게 할 것입니다. 작은 일들을 중심 문제로 보게 될 것입니다. 때로는 봉사를 받는 것도 봉사가 됩니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도 순종과 섬김의 행위입니다. 대접하는 봉사도 있습니다. 경청하는 것도 봉사가 됩니다. 참을성 없이 부주의하게 듣는 것은 함께 하는 사람에게 모욕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듣는 일에 무감각해졌을 때, 짐묵 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지 주의해 보는 게 좋습니다. 서로 짐을 저주는 봉사도 있습니다. 끝으로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봉사가 있습니다. 가장 작은 자도 우리에게 한 마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 봉사를 우리는 감히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수건의 사명으로 손짓해 부르십니다.

 

10. 고백 훈련

골고다는 용서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큰 바램의 결과로 온 것이지 거리낌의 결과가 아닙니다. 고백 훈련은 신자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하도록 도와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주시지 않는다면 참다운 고백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죄인들의 모임이었음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조건없는 부름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용서의 권세 :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죄의 고백을 받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죄를 용서할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개인적인 고백을 통하여 죄의 끈질긴 습관에서 풀려나고, 용서를 맛본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의 이 증거를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겪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제 자매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현존과 용서하심을 우리에게 실현하기 위해서입니다. 형제 앞에서 자기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의 이로운점은 첫째, 활자화되고 규격화된 고백의 형식은 어떤 변명이나 정상 참작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두번째는 용서하는 말이 예상되며, 절대적으로 주어진다는 점입니다. 세번째는 즉, 고행이란 것이 있습니다. 고행의 목적은 죄를 죄로서 더 깊이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고백일기 : 결과는 내 사람됨을 벌겨벗겨 놓자, 내 상담역 친구에게 자우의 불꽃이 붙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준 바로 뒤 지금까지 고백 할 수 없었던 깊고 고통스러운 죄를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자유는 자유를 낳습니다.
고백하기에 대한 조언 : 훌륭한 고백을 위해서는 세가지가 필요하다. 즉 양심의 성찰, 슬픔, 그리고 죄를 멀리 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고백을 잘 하려면 "슬픔"이 필요합니다. 슬픔은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입니다. 고백할 준비를 하면서 죄에서 구조되려는 의지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정복되고 통치 받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고백은 슬픔으로 시작되지만 기쁨으로 끝납니다. 죄의 용서에는 잔치가 따릅니다. 그 결과 참으로 변화된 삶이 오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고백할 것인가를 찾아내는 것까지도 기도 훈련의 은혜로운 연습이 될 수 있습니다.
고백 받기에 대한 조언 : 먼저, 십자가 밑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죄의 무서움을 일단 알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무슨 일을 했건 나 자신이 바로 죄인의 괴수임을 알게 됩니다. 끝으로, 당신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지 그저 그들과 상담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것이 극히 중요합니다. 기도는 그 죄가 일으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것입니다. 고백 훈련은 겉치레를 없앱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한 인간성을 털어놓고 고백할 수 있는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의 용서하고 힘을 주는 은혜를 아는 교회를 세우고 계십니다.

 

11. 예배 훈련

예배란 현실을 체험하고 생명과 접촉하는 일입니다. 모여든 회중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느끼고 체험하는 일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주도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예배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흐르는 사랑의 제의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그 중심 본질은 "신령과 진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노래, 기도, 찬양, 이 모두가 예비로 인도해 갈 수 있습니다만 예배는 그들 어느 것보다도 더 이상의 것입니다. 성령께서 심령을 붙잡을 때 형식은 사소한 것이 됩니다.
우리의 예배 대상 : 우상 숭배란 눈에 보이는 경배 대상 앞에 절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예배하는 것은 그분의 됨됨이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이 행하신 일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됨됨이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하신 일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예배의 우선권 : 섬김은 예배에서 흥러 나옵니다. 예배를 않고 대신하는 섬김은 우상 숭배입니다. 활동이 경배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에배를 위한 준비 : 초대 고회 공동체의 핵심적 요소, 또 한 가지는 그들이 예배 중에 함께 "모여" 있다는 의식이었습니다.
예배의 인도자 : 진정한 예배에서 인도자는 단 한분,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즉,예수님께서 백성 가운데에 살아 계시며, 그의 모든 직책 가운데에 살아 계시며, 그의 모든 권세 안에서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사용된다면 과연 어떤 점이 사료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분이 단지 예수님뿐이라는 뜻에서입니다.
예배로 가는 길 : 예배를 성령 훈련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선 우리에게 부과된 행동과 생활의 명령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로 들어가는 첫번째 통로는, 인간 위주의 모든 활동을 멎는 일입니다. 한번이라도 그의 지도 아래 있어 보기만 하면 어떻게 우리 생활의 모든 움직임을 하나님께 뿌리 박을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성령을 통하여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실 오늘의 선생이 계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성령의 활동이 우리의 생활 방식을 지배하도록 육신의 활동을 머추는 일은 공공 지배에 영향을 미칩니다. 찬양은 우리를 예배로 인도합니다. 시편은 예배의 문학이며, 그 가장 뚜렷한 특징은 찬양입니다. 옛 계약은 소와 염소의 제사를 요구했지만 새 계약은 찬미의 제사를 요구합니다. 감정은 인간성의 합법적인 부분이며 당연히 예배에 쓰여져야 합니다. 예배에는 마음과 영뿐 아니라, 몸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는 수가 많습니다.
예배의 결과 : 거룩한 순종은 예배가 마약이 되지 않도록 지켜 줍니다.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응답하도록 섬김에의 부름을 뚜렷이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12. 인도 훈련

우리 시대에는 신성한 인도에 대한 모든 가르침에 집단면이 특히 결핍되어 있어서 인도를 공동 훈련 항목에 넣기로 하였고 그 공동면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각 개인을 풍요하고 심원하게 인도하십니다. 사람들을 격려하여 주님의 심중을 분별하고 그의 부르심을 들을 때까지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며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그러한 방법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바울의 교회 이해에 크게 이바지 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장 성숙한 사람이라도 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몇 가지 본보기들 :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하나는 높은 곳에서 오는 음성을 들으려고 공동으로 노력해 온 사람들의 본보기를 배우는 일입니다. 공동 인도의 또 하나의 본보기는 소위 "확신을 위한 모임"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사업상의 모임을 예배로 여깁니다. 세계 도처의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이 성령 원칙을 통해 사업의 결정을 내리는 일이 현실적이고 실용적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타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일치를 구합니다.
영적인 지도자 : 중세기에는 아무리 위대한 서인이라도 영적인 지도자의 도움 없이는 내면을 탐구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지도는 훌륭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전 인격에 걸친 것이며 생활 전체의 상호 관계에 관심을 갖습니다. 또한 우리 생활의 일상 경험들을 붙잡아, 그것에다가 신성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영적인 지도는 본래 자연스러운 인간 관계에서 저절로 생겨났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자기 자신을 편안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며, 스스로 내면을 탐구하는 중이어야 하며, 제나름의 투쟁과 의심을 기꺼이 털어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겸손함을 지니고, 거룩한 중심 속으로 남보다 더 깊이 들어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영적 지도의 팰오성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3. 경축 훈련

근심 걱정으로부터의 자유가 경축의 근본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탄식을 춤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경축은 인생에 힘을 준다. : 경축은 인생에 기쁨을 날라 옵니다. 그리고 기쁨은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경축은 모든 성령 훈련의 중심이 됩니다. 모든 훈련에는 느긋한 즐거움과 감사의 성격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은 에너지를 생산합니다. 기쁨은 우리를 강하게 만듭니다.
기쁨으로 가는 길 : 영적인 생활에서 참다운 기쁨을 생산하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 순종의 축복과 비길 축본은 없다고 말씀하시니까요. 기쁨은 그리스도를 순종함에서 오며 기쁨은 그리스도께 순종한 결과입니다. 순종 없는 기쁨은 공허한 모조품입니다. "주님의 기쁨"을 주입 받으려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전전하는 사람은 불쌍한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훈련들을 통해 우리의 삶에 변화를 가져 오십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변화 작업이 있기까지는 우리는 참다운 기쁨을 알지 못합니다. 경축의 가면을 쓴다면 우리 마음 속의 영은 모순에 빠지고 맙니다. 성경은 모든 처지 가운데에서 감사의 영으로 살라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만, 그것은 악의 존재를 경축하라는 명령은 아닙니다.
느긋한 경축의 기분 :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는 경축의 기분이 우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경축의 이익 : 경축의 이익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우리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우리는 가장 자유롭고 생기있고 재미있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경축은 우리에게 넓은 시야를 줍니다. 끝으로, 경축의 재미있는 특징 하나는 경축은 더 큰 경축으로 이끌어 간다는 점입니다.
경축의 실천 : 하나님의 선하심 때문에 마음은 시와 찬미와 영의 노래를 터뜨립니다. 기존의 축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나름의 것을 개발 하는 것입니다. 경축은 다른 모든 훈련들을 행하며 살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맺는 말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사심없이 남들과 더불어 살게 되고 섬김을 통해 우리는 그들에게 고마운 존재가 됩니다. 때로는 용기를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 가노라"는 사도 바울의 도전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도전이 오늘 우리의 도전입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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