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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7-6 사단의 삼위일체

하나님아들 2014. 5. 3. 12:54

6 장 사단의 삼위일체 요한계시록 12:1~13:18

. 큰 표적(12:1~6)

앞으로 있을 일을 사람들에게 예시하기 위하여 한 표적이 나타났다. 이제 12 1절부터 사도 요한은 “네가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는 요한계시록 10 11절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2 1절부터 22 21절까지의 말씀은 6 11장까지 계속되는 첫 번째 부분의 말씀을 보충해주는 예언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해서, 전반부(6~11)가 개요를 취급한 것이라면, 후반부(12~22)는 거기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을 첨가했다고 보겠다.

 

11 15절에 보면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또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 이후에도 계속될 것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그의 왕국은 세세토록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장에서 11장까지의 말씀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까지의 형편을 취급하고 있다. 반면에 12장에서 22장까지의 말씀은 전반부에 속하는 아주 중요한 요점들을 선별하여 그것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마치도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창조하신 창조의 내용을 취급하고 있고, 2장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창조하신 바로 그것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 그러므로 이것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요한계시록 6장에서 11장까지의 말씀을 창세기 1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고, 또 요한계시록 12장부터 22장까지의 내용을 창세기 2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겠다.

 

9 1절에 나오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그 별이 12 3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 큰 붉은 용과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다. 12장에서 14장까지는 상징적으로 쓰여졌고, 15장에서 16장에 언급된 사건들은 1718장에 가서 다시 상정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는 내용들을 문자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그의 심판은 결코 상징적으로 나타내지 아니하고 항상 문자적인 의미로 말씀을 하셨음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1) 혹자는 여기 나오는 여자를 마리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잘못이다. 첫째로 마리아가 12 1절에 묘사된 그런 영광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 둘째로 12 17절에 보면 이 여자는 벌써 다른 자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초태생이 아니던가? 셋째로 이와 같은 해석은 예언서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만일에 그 여자가 마리아라면 그 남자 아이는 그리스도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책은 역사책일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예언서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본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인 것이다.

그러면 그 여자는 누구인가? 먼저 대답을 듣기 전에, 다음에 나오는 몇 가지 사실들을 관찰해보기로 하자.

 

첫째로 본서에 단수로 언급된 모든 여자는 어떤 도시를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17:18 ; 21:9, 10).

둘째로 쎄이스(J. K. Seiss)가 해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달은 어두움의 세력을, 또 열 두 별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해가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또 열 두 별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달이 어두음의 세력을 뜻한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로버트 고(Robert Govett)은 해가 은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아마도 가능한 생각일 것이다. 또 그느 달을 율법으로 보았다. 그것은 용납하기가 어려운 해석이다. 그리고 열 두 별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한다는 해석은 또 그럴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달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해와 달과 별들은 모두 신자들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아마도 고린도전서 15 41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그런 해석을 시도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 41절에서 말하고 있는별과 요한계시록 12 1절에서 말하고 있는 별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후자의 경우 “열 두 별”이라는 일반적인 표현이 아닌 툭수한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여자는 이스라엘 민족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상징한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창세기 37 9~10절까지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해가 야곱을, 그리고 달이 그의 부인을, 또 열 두 별들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을 각각 상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곧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해와 달과 별들을 동시에 언급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우리는 그 여자가 이스라엘 민족의 상징인 예루살렘 도성을 의미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해 자체가 아니라 해로 옷 입었다는 것이 본문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이다. 이것은 그 여자를 이스라엘의 어머니로 규정짓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머리에 쓴 열 두 별의 면류관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3) “이 여자가 아이를 베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는 요한계시록 12 2절 말씀은 예루살렘이 해산하는 여인 같이 고통할 것이라고 예언한 선지자들의 증거와 일치한다( 26:17, 18, 6:22~25 ; 13:19~21 ; 30:6,7, 4:8~10).

(4) 미가엘 천사장이 와서 그 여자를 도와 마귀와 싸웠다(12:7). 그것은 다니엘서 12 1절 말씀에 의하면 환난 때에 미가엘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예언한 내용과 일치한다.

(5) 하나님께서 그 여자로 하여금 광야로 도피할 것을 권고하셨다(12:6, 14). 이것은 마태복음서 24 16~21절까지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 주께서 친히 유대인들을 또한 도망하도록 권고하셨던 사실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면 왜 신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되어지는가?

 

첫째로 예수께서 유다 족속의 사자이시기 때문이고( 5:5),

둘째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4:22), 셋째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곧 우리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4:26). 구약성경 가운데 뱀과 나오는 직접 대면했던 여자는 오직 한 인물 밖에 없다. 창세기의 3장에 나오는 하와가 바로 그 여자다. 그런데 신약성경 가운데서도 뱀과 약간의 충돌을 경험했던 여자가 있는데 요한계시록 12장에 나타나는 여자가 바로 그 인물이다. 이것은 성경의 통일성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그 큰 용을 옛 뱀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옛날의 그 뱀을 상기시켜주시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는 것 같다. 마찬가지로 이 여자도 그 옛날 에덴 동산에 있었던 그 여인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도 똑같이 해와 달과 별들이 나온다.  창세기 3장에 해산의 고통이 나오는가 하면 여기에도 그에 대한 아픔이 나타난다. 이렇게 두 곳의 성경말씀을 대조하며 연구해 볼 때 우리는 이 여자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 가운데서 예정된, 그리고 마지막 날에 분명히 그러한 일들을 경험하게 될 그 여자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세기 2장에 기록된 그 여자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어떤 면에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한편 에베소서 5장에 나타난 여자는 교회의 입장과 미래상을, 그리고 요한계시록 12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여자는 마지막 날에 일어날 한 단면을 계시해준다고 보겠다. 환상 가운데 나타난 이 여자의 모습에 대하여 성경은 “해를 입고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쓴 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묘사를 통해서 우리는 시대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그 여자가 해를 입었다는 말 가운데 나타나는 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사실이다. 그 여자가 해를 입었다 함은 해가 가장 밝은 빛으로 그 여자를 비취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같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시대인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그 여자가 그리스도와 또 은혜시대와 더불어 갖게 되는 어떤 관계성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둘째로 그 여자의 발 아래에 달이 있었다는 문장을 통해서 발견되는“아래”라는 말은 헬라어에 있어서 “짓밟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단순히 발 밑에 놓였다는 뜻이다. 달은 발광체가 아니고 단지 받은 빛을 다시 반사할 수 있을 뿐이다. 율법시대는 은혜시대에 있을 일들을 반영해주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성전이나 법궤, , 진설병, 제사장이 드리는 희생제물, 그리고 황소나 어린 양의 피……이 모든 것들은 다 모형에 불과하다. 여자의 발밑에 있는 달은 율법이 그여자게에 어떤 복종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그 여자가 율법시대와 같제 되는 관계성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셋째로 그 여자는 그 머리에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이 특별한 모습은 아마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열 두 지파가 형성되기까지의 족장시대를 묘사해주는 것 같다. 열 두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그 여자와 조장시대를 묘사해주는 것 같다.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그 여자와 족장시대와의 관계성을 보여준다.  위와 같은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이 여자가 은혜시대 뿐만 아니라 율법시대와 그리고 족장시대 전반에 걸쳐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중에서 물론 은혜시대와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족장시대와 율법시대 뿐만 아니라, 은혜시대의 이기는 모든 성도들을 대표적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한 붉은 용이 있어: 이것은 12 9절에 나오는 “옛 뱀”, “마귀”, “사단”과 같은 존재이다. 이 뱀은 창세기 3 1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 뱀이다. 붉은 색은 전쟁을 상징한다. 그를 가르켜 큰 붉은 용이라 함은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살인자이기 때문이다(8:44, 5:19).

 

머리가 일곱이요: 17 9절과 12절 말씀을 참고하기 바란다. 열은 열 왕으로써 그들은 대 왕의 지배를 받는다. 머리는 뿔보다 더 크며 또 그 뿔들을 활용하는 것이 바로 그 머리다. 그러므로 그 용은 소위 로마제국과 그의 하수인 분봉왕들을 통하여 끝날에 하나님의 자녀들을 크게 핍박할 것이다.

 

(4)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리라:  이 별들은 12 9절에 다시 언급되고 있는 바로 그 사자들이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삼분의 일이 마귀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용이 쫓겨나는 일은 그 남자 아이가 휴거된 후에 있게 될 것이다.

 

(5) 그러면 이 남자 아이는 누구인가? 혹자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로 보아 그것은 합당하지 못한 해석이다.

첫째로 해와 달과 별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한다는 결론이 벌써 나왔다.

둘째로 이 남자 아이는 보좌 앞으로 들림받아 갔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이스라엘 민족이 휴거될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 생각은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예언의 말씀들과 직접적으로 모순을 일으킨다.

셋째로 이 남자 아이가 어린 양의 보혈을 믿었다는 사실이다(12:11).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주를 믿게 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이론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직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이 감람산에 서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구원의 샘을 열어 그들을 구속하시겠다는 사실이다(13:1 ; 14:4 ; 12:10~14).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남자 아이를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해석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그 여자가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예루살렘에서 나신 것이 아니고 베들레헴이서 탄생하셨다.

(2) 그 남자 아이는 한 개인적인 인격이 아니라 단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12:10, 11).

(3) 그 남자 아이를 그리스도로 본다면, 그 큰 용은 헤롯에 비유될 것이다. 그러나 12 9절 말씀은 그 용이 사단 자신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4) 그 남자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보좌 앞으로 들림받아 올리워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 위에서 33년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셨고 또 장사되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그 후에야 비로소 주님은 휴거되신 것이다.

(5) 이것이 모두 환상이기 때문에 그 해산의 고통이란 말도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교회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합리적인 해석이 아니다.

 

첫째로 모든 교회가 동시에 휴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먼저 휴거되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들은 나중에 휴거될 것이다. 그러나 이 남자 아이는 한 단체로서 동시에 휴거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리도록 하겠다는 약속이 모든 교회에게 주어졌다기 보다는 오히려 이기는 자들에게만 주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2:26, 27).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승리자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셋째로 참고 인내하는 자들에게만 주와 더불어 왕노릇 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딤후2:12).

 

그렇다면 이 남자 아이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는 틀림없이 이기는 자들을 상징할 것이다.

(1) 죽도록 충성한 서머나교회 성도들의 삶은 “저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증거하는 12 11절 마지막 부분의 말씀과 아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2:10 ; 12:11).

(2) 두아디라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기는 자들에게 주신 “철장을 가지고 다스리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이는 장차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하신 12 5절 말씀과 일치하고 있다(2:26, 27 ; 12:5).

(3) 빌라델비아교회 성도들 가운데 주의 말씀을 지킨 자들에게 주신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는 말씀과 그 남자 아이를 마귀의 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으로 올려가신 내용이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다(3:10 ; 12:5).

(4) 라오디게아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리라”는 말씀이 또 “그 남자 아이가 철장을 가지고 만국을 다스리리라”는 12 5절 말씀과 의미가 상통한다(3:21 ; 12:5). 따라서 그 남자 아니는 모든 교회를 대표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 가운데 있는 이기는 자들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더 큰 타당성을 가질 것이다.

 

7장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이미 거기에 나오는 그 큰 무리와 또 여기 나오는 남자 아이 사이에 모종의 유사점이 있음을 여덟 가지로 생각해보았다. 그 남자 아이가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일부를 형성하고 잇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7장이 휴거에 대한 총괄적인 논제를 취급한 것이라면, 12장은 그 휴거에 따른 특정한 부분에 아주 구체적인 설명을 가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남자 아이와 그 여자의 관계를 좀더 깊이 관찰해보기 위해서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읽지 않으면 안된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4:26). 또 다음절 마지막 부분을 더 읽어보자. “이는 홀로 사는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4:27). 여기에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새 예루살렘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영원한 세계로 나타나도록 예비하신 그 여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여자는 창조시에 하와의 후손으로, 은혜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자로, 또 하나님이 장차 영원한 세계로 나타나도록 하실 새 예루살렘의 상징적 존재라는 것이다.

 

또 그 여자에게 많은 자녀가 있다는 말은 그 여자와 자녀를 구별시키는 의미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가 여럿으로, 또 그 여럿이 다시 하나로 되는 유기적 관계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자녀의 숫자가 증가한다는 말은 어머니가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한 어머니가 다섯 아이에서 여섯 아이로 더 많이 출산한다는 생산적 의미라기 보다는 오히려 다섯 아이가 모여 한 어머니가 된다는 신비한 뜻을 가진다고 보겠다. 각 자녀는 그가 어머니의 일부를 물려 받은 바 있는 바로 그 어머니의 한 부분인 것이다. 그들이 비록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들이 어머니 자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자녀들을 거느린 어떤 한 존재가 아니라 외관상 많은 자녀들을 거느린 듯한 단체의 전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신비한 원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2장에서 그 여자가 낳은 남자 아이도 같은 원리에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환상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성격을 띤다. 여기에서 해산한다는 말은 자녀가 나와서 어머니로부터 분리된다는 생각을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머니 안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그 여자는 한 부류의 사람들로 보여진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계획에 공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예정되었다. 그러나 인간이 책임 수행에 있어서 실패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일부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선택한 바로 그 사람들이 그 남자 아이라는 것이다. 어머니를 전체로 볼 때 그 남자 아이는 남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남자아이가 10절에서는 형제들로 불리우고 있다. 이것은 그 남자 아이가 한 개인이 아닌 다수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면서도 전체라고는 볼 수 없는 숫자일 것이다. 어머니와 비교해볼 때이 남자 아이는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에 비교할 때 숫자적으로는 소수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과 목적이 그들에게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5). 요한계시록에 보면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 세 번 나온다. 먼저 우리는 2 26절과 27절 말씀에서 그와 같은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이 말씀은 특별히 교회 중에 잇는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또 다른 하나는 19 15절에서 발견되다. “그의 입에서 이 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리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면 12 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존재는 누구인가? 만일에 그 남자 아이를 교회 중에 잇는 이기는 자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지금 이곳에 나타나셨다는 말인가? 아마도 상상을 초월하는 속단일 것이다. 물론 전혀 불가능한 생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예수님도 역시 그 이기는 자들 가운데 포함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왜 틀린 생각이라는 말인가? 그 남자 아이가 출생하자 곧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들림받아 올라갔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탄생하시어 33년간 살으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또 장사지낸지 사흘 후에 부활하시고 그 이후에 승천하셨다는 일련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 남자 아이가 그리스도를 상징할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남자 아이가 교회 중에 있는 승리자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게 되었다. 그는 교회의 일부를 대효한다.

 

그 일부란 세상에 승리한 사람들로 구성된 무리를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다. 그리스도는 최초의 승리자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승리자들이 또한 그리스도 안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6)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가매: 이것은 마태복음서 24 6~20절까지의 말씀과 또 누가복음서 21 20~24절가이의 말씀 가운데 묘사되고 있는 도피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12 1절에서는 그 여자가 하늘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12 6절에서는 광야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남자 아이를 출산 다음에 그 여자는 하늘에서 있을 곳을 잃은 것 같다. 그 여자는 아마도 땅에 있는 예루살렘 외에 다른 것을 상징하지 않을 것이다. 광야는 메마른 곳이요, 또 사람이 거할 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양육하신 것처럼 지금 그 여자를 보호하고 계신 것이다.

 

갈라디아서 4 21~31절까지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아주 좋은 대칭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하나는 천상의 예루살렘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의 예루살렘이다. 전자는 모든 신자들을 상징하며, 후자는 유대인들을 상징한다. 하나는 이스라엘로 나타나며, 다른 하나는 이스마엘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리가 실질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한 가지 생각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이삭처럼 자유로운 신분이라는 점이다.

 

.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12:7~9)

(7) 전쟁은 불가피하게 일어난다. 그러면 하늘에 그 남자 아이가 살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 용이 살고 있다는 말인가? 그 남자 아이가 용의 거처를 빼앗아버린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일어났다. 성경 가운데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 라는 뜻을 가진 이름의 소유자는 오직 미가엘 천사장 하나 밖에 없다(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미가엘을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바로 그 미가엘이 용과 더불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욥이 살던 시대에 그 용은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었다. 또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만 해도 그는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 아이가 휴거된 다음부터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을 얻지 못한 것이다.

 

(8), (9) 용이란 이름 속에서 잔인성이 내포된다. 그의 별명인 “옛 뱀, 꾀는자, 마귀, 선동자, 사단, 반대자”와 같은 다양한 이름들 가운데서 우리는 그의 속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마귀는 자기를 따르는 삼분의 일의 천사들과 더불어 하늘에서 쫓겨났으며 지금 저 무저갱의 문을 연 것이다(9:1). 그 때부터 이 세계는 암흑세계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 큰 음성(12:10~12)

(10) 하나님께서 전에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속죄사역을 베푸셨는데, 지금은 권세로 그 일을 행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 나라의 권위는 보좌를 중심으로 해서 아주 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단이 쫓겨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뜻이 공중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1260일 이후에 하나님의 왕국이 땅에 임하게 되는데 그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마태복음서 12 28절 말씀은 사단이 쫓겨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벌써 임했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11) 그 참소하던 자를 이기는 실질적인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로 어린 양의 보혈이다(참소는 항상 거짓으로 판명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혈은 우리를 위한 참된 증거물이다). 우리는 어린 양의 보혈에 의존하는 사람들이다(8:31~34). 둘째로 증거의 말씀이다. 마음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믿는 바와 일치하는 입술의 고백이 중요하다. 증거의 말씀 앞에 마귀는 무력해지고 만다. 셋째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자적 태도이다. 가장 무서운 유혹이 죽음일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태도를 취할 때 마귀는 쫓기고 만다.

 

(12) 요한계시록 13 1절에 보면 짐승(적그리스도)이 바다에서 나오는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13 11절에는 또다른 짐승(거시 선지자)이 땅으로부터 나온다고 기록되었다. 그런데 9 1절에 보면 도 별()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다고 말씀한다.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 그리고 용이 함께 지상에 나타날 때 땅과 바다는 12절에 기록된 대로 화를 받게 될 것이다. 사단은 자기의 때가 얼마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께 분내어 발악하겠지만 그 기간은 역사가들이 추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단축될 것이다. 그 환난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지만 또 한편 사단의 발악도 있을 것이다.

 

. 용의 핍박(12:13~17)

 

 

 

 

 

 

 

 

 

(13) 많은 구약 선지자들이 본절과 또 뒤이어 나오는 구절에 언급된 사건들에 대하여 예언한 바 있다. 대환난 때에 예루살렘 도성이 열방들의 공격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여자를 핍박함에 있어서 용은 단지 앞 절에 언급되어 있는 대로 크게 분노를 발할 뿐이지 더 이상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14) 그 여자가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 날개 역시 상징적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그 여자에게 초능력을 주셔서 빨리 다른 곳으로 도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출애굽 시키실 때 그는 독수리가 날개로 자기 새끼를 업음같이 그들을 업어 안전하게 인도해주셨던 것이다( 19:4, 32:11, 12). 환난 때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15) 그 뱀이 바로 사단이기 때문에 그가 사용한 물도 그 무엇을 의미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예레미야서 46 7절과 8절 말씀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그 물이 돌진하는 적군들을 상징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47:2~4, 59:19). 그 용이 여자의 뒤에서 물로 공격한 것처럼 사단은 열방의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괴롭힐 것이다.

 

(16) 땅은 글자 그대로 땅을 의미한다. 출애굽기 15 10절 말씀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이 애굽 군대를 멸하기 위하여 물을 사용하셨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또 민수기 16 30절에 보면 그가 반역자들을 삼키도록 땅의 문을 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다시 택한 백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같은 방법으로 땅을 사용하셨다고 본문은 증거한다.

 

(17) 여자의 남은 자손이란 문맥 속에는 신실한 유대인들과 아직 뒤에 남아 있는 신자들이 다 포함된다. 이 남은 자손이란 말이 오직 유대인들만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들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또 예수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문맥으로 보아 주께서 아직 당으로 재림하지도 않았고 또 유대인들이 그를 믿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3 7절에 나타나는 “성도들”이란 말도 역시 유대인들과 뒤에 남아 있는 신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12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자의 남은 자손과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 바다에서 나온 짐승(13:1~10)

바다는 지중해를 가리키고 또 그 짐승은 로마제국과 같은 왕국이나 아니면 적그리스도인 한 인격을 상징할 것이다. 만일에 그 짐승이 어떤 왕국을 상징한다면 그 바다에 대해서는 영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 짐승이 어떤 한 인격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 바다는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영적으로 설명한다면, 육지가 유대인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바다는 이방인들을 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바다에 대해서 설명하는 바로 그 원리에 따른 것이다. “네가 본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17:15). 우리는 또 다니엘 7 3절과 7절 말씀 속에서 바다가 바로 이방세계를 상징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나왔다는 말은 곧 이방세계에서 나왔다는 말과 같다.

 

(1) 한 짐승이 바다에서 나오는데: 로마제국이 희생할 것이다. 바다는 그 위치를 드러내며 짐승은 더 이상 그 본성을 감출 수 없게 된다. 열 뿔은 소 제국의 왕들이고(17:12), 일곱 머리는 그보다 더 높은 일곱 군왕들을 가리킨다(17:10). 머리가 뿔 보다 더 크고 또 그 뿔이 머리에 붙어 있기 때문에 일곱 머리는 일곱 황제들을, 그리고 열뿔은 열 명의 분봉왕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일곱 머리는 계속되는 일곱 명의 황제들을 뜻하는 반면에 열 뿔은 같은 시대에 통치권을 가진 동료 열명의 분봉왕들을 말하는 것 같다(옛날 로마제국에는 가이사 황제 칭호를 이어받은 13명의 황제들이 있었다. 그 중에 다섯 황제들이 사도 요한의 생전에 아주 비참하게 죽어갔다. 17 10절에서 언급된 “망하였다”는 말은 원래 비참한 죽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섯 번째 가이ㅏ 황제로 등극한 도미티안은 참으로 비참하게 암살되고 말았다. 일곱째 황제도 역시 살해되었다. 일곱머리에 해당하는 모든 로마 황제들이 평안하게 죽지 못했다. 그리고 열뿔은 로마에 묵종하는 모든 분봉왕들을 말한다).

 

적그리스도는 그 짐승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일곱째 머리라고 볼 수 있다. 12 3절에 보면 그의 머리에 일곱 면류관을 썼다고 했으며, 또 그 다음 장에 보면 그 머리에 열 면류관을 썼다고 증거한다(13:1). 장차 적그리스도가 희생한 로마제국에서 일어나 온 유럽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해볼 때, 12 3절에 암시하고 있는 열왕들은 아직 면류관을 쓰지 않았으며 또한 권세를 받아 쓰고 권세를 붙잡을 때 그들은 또 그 짐승에게 다시 왕권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적그리스도는 바로 그 순간에 권세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참람된 것이다(9:3 ; 26:65, 5:18 ; 10:33, 3:28, 16:21) 그들의 머리에 참란된 이름을 붙이고 다녔다는 말은 자기들을 신으로 높였다는 말과 같다. 로마제국의 첫 번째 다섯 황제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에게 신처럼 경배하도록 강요했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거한다.

 

(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니엘서 2 31~33절까지의 말씀과 또 7 3~8절까지의 말씀을 읽어야 하겠다. 그 말씀을 읽음으로써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가운데서 정금으로 된 머리 부분이 바벨론을 상징하는 사자로, 은으로 된 가슴 부분이 메데 파사를 상징하는 곰으로, 놋으로 된 배 부분이 헬라를 상징하는 표범으로, 그리고 쇠로 된 발이 로마를 상징하는 네 번째 짐승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 네 번째 짐승은 다른 짐승보다 더 힘있고 사나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 바벨론은 지독하게 전쟁을 좋아하며, 메데 파사는 야만적이고, 헬라는 사악하며, 로마는 잔인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3 2절에 나오는 그 짐승은 앞서 언급한 네 가지의 악독한 성격을 고루 가지고 있다. 사실상 열방의 모든 권세들이 집대성 되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표현한 것이 28, 그리고 그 짐승을 짐승으로 말한 것이 36번이나 된다. 하나님께서 그 짐승을 사용하여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5:6, 13:7, 1:8). 표범은 반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종종 죄와 관계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13:23). 곰과 사자는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해치는 경향이 있다(열왕기하 2 24절에 보면 곰이 42명의 아이들을 찢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다니엘서 6 22절에는 사자가 다니엘을 해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봉한 사실도 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 17절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울을 사자의 입으로부터 구하셨는데 말씀한다).

 

3 2절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그 짐승은 한 왕국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7 9절과 10, 그리고 12절에 의하면 이것이 틀림없는 왕국을 의미하고 있다. 다니엘서 7장에 언급된 사자와 곰, 그리고 표범은 모두 왕국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네 번째 나오는 짐승도 역시 왕국을 상징할것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그것이 로마제국일 것이다.

 

그러나 13 2절에 나오는 그 짐승은 한 인격을 가리킨다. 17 8~11절 사이에 기록된 “멸망했다”는 말은 비참한 죽음을 뜻한다. 사도요한이 살아있을 때까지 통치했던 사람은 바로 도미티안 황제다. 그러므로 19 20절과 또 20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짐승도 틀림없이 인격적인 한 존재를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이 아직 한 왕국을 영원한 불 못 속에 던지지 않으신 것 같다.

 

(3) 그의 머리가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의 형상이 사람의 형상과 비슷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적그리스도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용은 하나님으로 가장하며, 짐승은 그리스도로, 그리고 거짓 선지자는 성령으로 각각 위장한다.

거짓 아버지는 역시 거짓 아들에게 권세를 주며, 또 그 아들은 거짓 기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는다(살후2:9). 여기에서 거짓 기적이라 함은 그 기적들이 전혀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고 기적을 행하는 목적이 사람을 미혹하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13 2절에 보좌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한 왕국이 있음에 틀림없다. 왕국없는 보좌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용이 로마제국을 회생시켜 그것을 거짓 선지자의 손에 넘겨 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13 3절에 나오는 “그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라는 말과 또 한걸음 더 나아가서 14절에 기록된 “칼에 상하였다가”라는 표현에 주의를 기우려보자. 그리고 이것을 또 17 7,8절의 말씀과 연관지어 고찰해보자.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가 주후 96년 경이었다. 그러므로 “전에 있었다”라는 말은 주후 96년 이전을 의미할 것이고 “시방 없으나”라는 말은 요한이 본서를 기록하기까지를, 그리고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때는 장차 올 미래를 의미할 것이다. 17 9~11절까지의 말씀에 의하면,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는 것이다(하나가 지금 있다는 말은 아마도 요한의 생존시라는 사실을 감 안 할 때 도미티안 황제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 이르지 아니했다는 그 인물이 지금 벌써 이 세상에 왔는지 아니면 장차 올 것인지 두고 볼 일이다). 11절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면 일곱 영혼과 일곱 육체가 있는데 여덟이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여덟째 왕도 원래 일곱 중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그가 한번 죽었다가 장차 다시 살아날 인물임에 틀림없다. 한 능력있는 인물이 나타나서 로마를 재건할 것이고, 또 열 왕국으로 구성된 연방제국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가 살해되지만 그는 다시 회생한다. 그래서 전 세계는 그를 신처럼 받들게 될 것이다.

 

사실상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 로마 황제들 가운데 한 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있던 육체에 들어감으로써 다시 살아날 뿐이다(이것은 윤회설을 주장함이 아니다. 성경은 결코 그와 같은 윤회설을 말하지 않으며 저자 역시 그와 같은 이단적 교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월치만 니 형제는 요한계시록 17 11절 말씀을 13 14, 15절에 언급된 말씀의 빛에 의해서 설명하려고 한 듯 하다. 다시 말하면 우상은 말할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으며 또한 걸어다닐 수도 없다는 것이 일반 상직이다. 그러나 13 14,15절의 말씀을 보면 마귀가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기도 하며 또 하나님의 사람들을 대적하게 했음을 본다. 윗부분의 해석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에 입각한 이해가 요구된다 영역본 역자주).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적그리스도의 회생을 믿게 될 것이다.

 

(4) 그 용이 뒤에서 후원하기 때문에 적그리스도는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짐승이 인경이나 능력에 있어서 뛰어난 존재로 생각하며 또 그를 경배하게 될 것이다.

 

(5) 또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큰 말이란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을 뜻하며 또 참람된 말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권세를 받았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허락받았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제한적인 성격을 띤다. 42란 숫자는 7 6의 배수이다. 7이 완전을 뜻하는 숫자인 반면에 6은 사단의 수라고 볼 수 있다. 민수기에 보면 출애굽을 시작해서 가나안에 이를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렀던 정착지가 바로 42군데 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 열왕기하 2 24절에 나오는 두 마리의 곰이 죽인 아이들의 숫자도 바로 42명이다. 성경에 나오는 42라는 수는 방랑과 심판을 상징한다. 데사롤니가후서 2 9~11절까지의 말씀을 읽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42개월 동안 날뛰도록 허락하신 이유를 깨닫게 될 것이다.

 

11절에 나오는 “거짓”이란 말이 원래 헬라어에서는 그 앞에 정관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그 거짓”이라고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사단이 말한 바로 그 거짓말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6) 그 짐승이 최초로 한 일이 하나님을 훼방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인격성과 본질과 그리고 권위가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그의 장막”이란 말은 하늘을 가리킨다.

 

(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여기 나오는 성도들은 아직 휴거되지 못하고 뒤에 남아서 보호를 받고 있는 신자들과 또 하나님을 신앙하는 유대인들을 말한다. 그의 왕국은 희생된 로마제국으로 제한된 것이지만 그 짐승의 영향력만은 온 세계에 미칠 것이다.

 

(8) 본절은 아직 이 땅 위에 신자들이 남아 있음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이 여전히 거기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험에 빠지지 아니하고 보호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에 달려 있다.

 

(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 우리가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 교회들이 이 땅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 교회들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라는 문장이 붙어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표현을 여기에서 또 다시 발견하게 된다. 아마도 약간의 신자들이 아직 휴거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으라”는 평이한 권고의 말씀을 주고 있는 것 같다.

 

(10) 신자들은 십자군들이 역사적으로 그러했듯이 원수들과 대적하여 싸울 수 없다. 오직 그들은 인내할 뿐이다. 인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신앙마저 잃게 될 것이다.

 

. 땅에서 올라온 짐승(13:11~18)

(11) 이 짐승도 역시 사나운 짐승이다. 그가 땅에서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이 짐승이 다시금 생명력을 얻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음부가 바로 땅 밑에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 땅은 유대 민족으로 상징할 수도 있다. 셩경은 종종 땅을 유대 민족에 대한 상징으로서 분류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짐승은 거짓 선지자인 것이 확실하다. 그가 한 인격이라고 생각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성경이 세 번씩이나 그를 가리켜 거짓 선지자로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16:13 ; 19:20 ; 20:10).

둘째로 주께서 거짓 선지자가 나타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24:24).

셋째로 세 영물들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사단 자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적그리스도로 활동하는 짐승이고, 나머지가 거짓 선지자로 활동하는 그 짐승이다. 각자는 자기가 수행해야 될 임무를 디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짐승도 어떤 기관이나 단체가 아니라 한 개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사단이 활동할 때 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장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이 짐승이 한 인격이고 어떤 왕국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가진 두 뿔은 두 영들로 생각될 수 있다. 어린 양의 뿔이 하나님의 영을 상징했기 때문에(5:6), 그 짐승의 뿔도 어린 양의 뿔처럼 달고 나온 것이다. 13 15절에 나오는 생기를 주었다는 말은 영을 주었다는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것이 하나의 영이고 다른 영은 16 13절에서 발견된다.

 

용처럼 말하더라:  그의 말에는 거짓과 잔악함으로 차 있었다. 첫 번째 짐승이 용의 보좌에 앉아 있었던 반면에 이 짐승은 용의 말로 말했던 것이다.

 

(12) 두 번째 짐승은 첫 번째 짐승의 권세를 가지고 자기의 일을 수행해 나갔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역의 수행자가 되신 것처럼 거짓 선지자도 3인조로 구성된 마귀 왕국의 수행자로 군림한다. 그러나 13 4절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경배한데 반해 여기에서는 강제적으로 자기를 경배하도록 강요한다는 차이점을 갖고 있다.

 

첫 번째 짐승이 네로 황제와 비슷하다는 증거가 많다. 그리고 두 번째 짐승이 배반자 가룟 유다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왔다고 착각할 정도로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 사도행전 1 20절과 시편 69 25, 그리고 109 8절 말씀은 모두 유다를 지적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 20절 말씀은 바로 시편 69109편에서 인용해 왔기 때문이다. 시편 109 6절 말씀은 “대적으로 그 오른 편에 서게 하소서”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재세시에 사단은 가룟 유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3 12절 때까지는 아직 사단이 그 오른편에 서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행전 1 25절에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곳으로 갔나이다”라는 말씀을 발견한다. 다른 개인들에 대해서 성경은 항상 “자기 열족에게로 돌아갔나이다”, 혹은 “그가 음부로 내려가니라”고 말하고 있는 반면에 유다에 대해서는 그를 위해서 한 특별한 장소를 마련해두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가 제 곳으로 갔나이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 가운데 “음부의 아들”이란 말이 오직 두 번 사용되었는데 요한복음 17 12절 말씀을 보면 그것이 유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또 하나는 데살로니가후서 2 3절에서 발견되는데 그것은 적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만일에 첫 번째 짐승이 음부의 아들인 적그리스도라면 두 번째 짐승이 과거에 음부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바 있는 가룟 유다가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요한복음서 6장은 주께서 가룟유다를 지적하여 마귀라고 했음을 기록하고 있다(6:70). 그렇다면 사단의 3인조 속에 가룟 유다가 아니면 누가 가담할 수 있겠는가?

 

(13) 그가 행한 큰 이적은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두 증인들이 이 땅에 가져왔던 그 불을 대적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14), (15) 가장 밀도 높은 우상숭배 활동이 전개될 것이다.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상처의 흔적을 증거하기 위하여 도마에게 보이셨듯이 그 짐승도 칼에 상한 흔적을 사람들에게 보임으로써 자신이 다시 살아난 존재임을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생기를 준다는 말은 영을 준다는 말과 같다. 영이 들어간 다음에는 자연적으로 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 짐승은 세 가지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로 생기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로 우상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하며, 셋째로 그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하는 잔인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시편 135 15~17절까지의 말씀과 또 예레미야서 10 3절 이하에 기록된 말씀과는 상당히 다른 상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 신상이나 우상은 입을 가지고 있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또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었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서 어떤 숨결도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장차 나타날 그 짐승의 우상은 숨을 쉴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한다(13:15). 그 짐승의 우상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 짐승의 우상이 사형을 선언할 것이고, 따라서 사람들은 죽게 될 것이다. 그 우상이 사람을 죽이는 어떤 흉기나 아니면 도구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16)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이 표는 아마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인 듯하다. 그것은 사람의 신체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격상 가시적일 것임에 틀림없다. 매매를 할 때 사람들은 이 표를 보고서 분명하게 분별한다. 그러므로 표시를 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모두 사단에게 속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는 은밀하게 사단의 추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그를 따르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심령 속에 그리스도가 있을리 만무하다.

 

(17) 팔지 않을 수도 없으며 더군다나 사지 않을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 표는 아주 다양할 것인데 어떤 사람은 짐승의 이름을 가지고 다니며, 또 다른 사람은 짐승의 수를 가지고 다닐 것이다.

 

(18) 많은 사람들이 666이란 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이것의 통일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의 것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첫째로 그것은 사람의 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장소의 수가 계산되지 않았다. 둘째로 짐승의 수라고 했다. 13 1절에 보면 그 짐승은 일곱 머리를 가지고 있다고 했으며 17 9,10절의 말씀을 보면 그 일곱 머리는 일곱 산이라고 했다. 그것은 역시 일곱 왕으로 볼 수 있다. 로마 도시는 일곱 언덕 위에 세워진 유일한 도시이다. 그러므로 그 짐승도 로마제국이나 아니면 로마황제들 가운데 그 어느 한 사람을 상징할 것이다. 그러나 13 18절 말씀을 보면 그 짐승의 수를 사람의 수라고 했던 사실로 보아 그 짐승은 로마제국을 상징할 수 없고 오히려 로마 황제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이름의 수라고 했는데, 그것은 로마 황제의 이름의 수가 666임에 틀림없다. 이 세 가지 사실을 수렴해서 볼 때 우리는 그 짐승이 누그를 상징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는 알파벳이 숫자로 사용되기도 한다. 네로가이사(Nero Gaesar)를 떠나서는 역사상 이 숫자에 부합되는 인물이 아무도 없다.

Nero의 수는 306이고, Caesar의 수는 360이 된다. 성경은 항상 가이사라는 명칭과 더불어 로마 황제의 이름을 말하고 있다. 누가복음 2 1절과 3 1절에서는 우리는 가이사 아구스도와 디베료 가이사를 발견하게 된다. 네로 황제도 자기 자신을 가이사로 불렀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거한다. 히브리어 표기로 네로 가이사라는 이름이 666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음의 도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출처 : 감추어진 만나
글쓴이 : 요나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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