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딤후 3:14ㅡ17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며 그를 높이고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산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제2문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인가를 지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무슨 준칙(準則)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하는 질문에 ‘구약과 신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인가를 지도하는 유일한 준칙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제3문에 ‘성경에 제일 요긴하게 가르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무엇인가 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으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평생 동안 늘 가까이 하며 사랑하고 읽고 암송하고 묵상하여야 할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인 것입니다.
1.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보여주신 것을 우리는 계시라. 합니다. 즉 계시란 “나타내 보여준다.” 라는 뜻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인 우주와 자연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습니다.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롬 1:19ㅡ20.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이상에서 살핀 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만드신 자연계를 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자연계시라 합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죄는 죄책과 오염을 가져와 인간은 죄로 인하여 사물을 보는 눈이 흐려지고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이와 같이 죄로 인하여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원의 길도 알지 못하며 우상을 섬기며 피조물에 종노릇 하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신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과 구원의 길을 알리시기 위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 보이신 말씀이 곧 특별 계시인 성경말씀입니다. 딤후 3:15ㅡ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오직 성경을 통하여서만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알 수 있고 구원의 길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사람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를 바로 가르쳐주며 나의 정체성을 가르쳐 주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는 삶의 지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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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사람의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고 성경을 기록한 사람을 기자라 합니다. 벧후 1:20ㅡ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말씀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66권의 말씀을 기록한 기간은 약1600여년에 걸쳐 40명의 사람의 손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불어넣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기록 하였습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그러므로 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시대에 주신 말씀임과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영원불변하신 말씀입니다. 막 13:37. “깨어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이제 우리는 성경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알아 성경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3.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연계시를 통하여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본래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우둔한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계시인 성경을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성자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 온전한 삶을 살게 하는 삶의 지침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있는데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신약은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기록한 말씀입니다. 구약은 ‘약속’ 신약은 ‘성취’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한마디도 하면 즉 ‘약속과 성취’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약속과 구원’입니다. 성경의 중심인물은 예수님이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
그리고 성경의 중심 주제는 구원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구약의 예언의 중심주제는 “오실 예수님”입니다
창세기는 여인의 후손으로, 출애굽기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레위기는 희생의 제물로, 민수기는 장대에 달린 놋 뱀으로(들림을 받으신 주님) 신명기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여호수아는 구원의 주로. 사사기는 우리의 참 사사로. 룻기는 우리의 기업을 무를자(구속자)로, 사무엘 상 하 역대 상 하 열왕기 상 하는 우리의 왕으로, 에스라 느헤미야는 우리의 구원자로, 에스더는 우리의 보호자로, 욥기는 우리의 구속자로, 시편은 우리의 노래로, 잠언은 지혜로, 전도서는 창조자로, 아가는 우리의 연인으로, 이사야는 우리의 메시아로, 예레미야는 생수의 근원으로, 에스겔은 인자로, 다니엘은 뜨인 돌로, 호세아는 하늘의 신랑으로, 요엘은 치료자로, 아모스는 회복자로, 오바댜는 영원한 반석으로, 요나서는 우리의 부활과 생명으로. 미가 서는 우리의 목자로, 나훔은 환난 날의 산성으로, 하박국은 구원의 하나님으로, 스바냐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로, 학개는 만국의 보배로, 스가랴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말라기는 언약의 사자로,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주제는 오신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입니다.
마태는 약속의 메시아로, 마가는 하나님의 종으로, 누가는 인자로,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로, 사도행전은 살아계신 주로, 로마서는 우리의 의로, 고전은 우리의 주로, 고후는 우리의 만족으로, 갈라디아는 우리의 자유로, 에베소서는 우리의 머리로, 빌립보는 우리의 기쁨으로. 골로새는 우리의 생명으로, 살 전후는 우리의 다시오실 주로, 딤전 후는 우리의 참 스승으로 디도서는 우리의 본으로, 빌레몬은 우리의 주인으로, 히브리서는 보좌에 계신 중보자로, 야고보서는 우리의 모범으로, 벧전은 우리의 보배로운 머릿돌로, 벧후는 우리의 힘으로, 요한 일 이 삼은 우리의 생명과 진리로, 유다서는 보호자로, 요한 계시록은 다시오실 주와 승리의 왕으로 묘사 하고 있습니다.
구약은 모세 오경,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로 나누며 신약은 복음서, 역사서, 서신서, 계시록으로 분류합니다.
내용상으로 성경을 간단히 정리하면
창세기는 만물기원, 출애굽기 구원역사, 레위기는 제사예법, 민수기는 광야생활,
신명기는 율법재론, 여호수아 기업분배, 사사기는 사사정치, 룻기서는 신앙효행,
삼상하는 왕국건설, 열왕상하 왕국역사, 대상하는 종교역사, 에스라는 귀환재건,
느헤미아 성곽재건, 에스더는 구국기도, 욥기서는 고난인내, 시편서는 감사찬양,
잠언서는 지혜금언, 전도서는 인생철학, 아가서는 사랑노래, 이사야서 심판구원,
예레미아 포로경고, 애가서는 애국눈물, 에스겔은 영광떠남, 다니엘은 꿈의계시,
호세아는 사랑구원, 요엘서는 재앙치유, 아모스는 공의심판, 오바댜는 에돔멸망,
요나서는 회개구원, 미가서는 소망예언, 나훔서는 원수멸망, 하박국은 신앙부흥,
스바냐는 열국심판, 학개서는 성전독려, 스가랴는 미래예언, 말라기는 신앙경고.
마태복음 왕의 복음, 마가복음 종의복음, 누가복음 인자복음, 요한복음 성자복음,
사도행전 복음전파, 로마서는 믿음구원, 고린도전 십자가도, 고린도후 환난위로,
갈라디아 자유복음, 에베소서 영광의 몸, 빌립보서 기쁨감사, 골로새서 은혜생명,
빌레몬은 노예해방, 데살전은 주의 재림, 데살후는 이단경계, 디모데전 목양일념,
디모데후 고난전도, 디도서는 교회정치, 히브리서 예수우월, 야고보는 신행일치,
베드로전 고난영광, 베드로후 이단조심, 요한일서 사랑하라, 요한이삼 진리안에,
유다서는 믿음위에, 계시록은 주님재림.
창세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창1:1-3절
창세기는 주전 1450년경에 모세가 기록하였습니다. 전체 50장으로 전반부는 천지 창조에서 바벨탑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인류가 흩어져 살게 된 내용이 1장-11장까지 기록되었습니다.
12장-50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언약의 후손인 이삭, 야곱, 요셉의 생애와 그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내려가기까지의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역사는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우주 만물과 인류의 기원과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관한 기록입니다.
창세기는 천지와 만물과 인간의 창조와 창조의 목적을 밝혀 주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과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시148:3-5)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자 곧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43:7)
창세기는 기원의 책으로 1.천지의 시작: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 2.인류의 시작: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3.죄의 시작: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4.구원의 시작: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5.인종의 시작: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 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을 낳았으니”(창10:1).
6.선민의 시작: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1-2)
이와 같이 우주와 만물과 인간의 모든 시작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게 좋았더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죄가 들어오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본래의 세상이 파괴 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파괴된 세상과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가는 과정이 성경 전체의 역사입니다. 요한 계시록 21장과 22장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소개된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의 완전한 회복과 구원의 회복입니다. 창세기에서 잃어버렸던 것이 요한 계시록에서 회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시작이요 요한 계시록은 완성입니다. 이 회복과 완성을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회복시키고 재림의 때에 완성 될 것입니다.
1. 창세기에서는 천지만물이 창조되고 요한 계시록에서는 새롭게 완성이 됩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2:1).“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5).
2. 창세기에서는 사탄이 유혹을 합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사탄이 불과 유황 못에 던짐을 받게 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4).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20:10).
3. 창세기에서는 인간의 범죄로 저주가 임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다시는 저주와 밤이 없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3:17)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이 이마에 있으리라”(계22:3-4).
4. 창세기에서는 고통과 수고와 슬픔과 눈물과 죽음이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모든 눈물과 슬픔과 죽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6-19).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5. 창세기에서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성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3:23).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21:24).
6. 창세기에서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두루 도는 불 칼로 지킵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낙원에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이와 같이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한 것 보다 더 좋은 상태로 요한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 회복되고 완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에서 죄가 들어와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구원의 전 과정의 역사가 전체 성경의 역사요 구원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자기의 아들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이 약속대로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매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4:4-5).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창세기를 내용상으로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엿새 동안 만드시고 마지막 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시고 에덴에 두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이 언약을 파괴하므로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가인과 아벨이 태어나게 되었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벨 대신 셋을 주셨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하나님 앞을 떠나 하나님이 없는 세속 문화를 만들고 셋의 후손은 하나님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후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셋의 후손 가운데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데려감을 당하고 노아의 때에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자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노아에게 알리시고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예비하게 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의 식구와 모든 생물들이 방주로 들어감으로 홍수에서 구원함을 받게 됩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시며 온 땅에 흩어져 살기를 명하셨으나 사람들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케 하심으로 인류를 온 땅에 흩어져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선민 히브리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시고 이 후손으로 통하여 나라를 세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시려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소명장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창대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자 아브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 화란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에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롯과 헤어지게 됩니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동맹군과 가나안 동맹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 롯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자 아브람이 군사 318명을 데리고 야간 기습 작전으로 롯을 구출하여 돌아온 후 두려움 속에 있는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언약을 세우게 됩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다가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셔서 아브람에게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하시고 할례언약을 세우시고 소돔과 고모라가 죄가 가득하므로 유황불로 멸하시고 롯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손 이삭이 태어나게 되며 이삭에게서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지만 야곱이 언약의 계승권을 이어가는 축복을 받아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됩니다. 야곱의 아들 가운데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게 되며 그곳에서 총리가 됩니다. 그때 흉년이 들므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갔다가 요셉을 만나게 되어 가족들을 애굽으로 초청하나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며 네 후손이 다시 올라올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야곱은 가족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애굽에서 임종을 맞게 되며 요셉의 죽음으로 창세기는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우리는 창세기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출 1:8-14절
출애굽기는 주전1450년경에 모세가 기록하였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자손은 요셉의 보호아래 평화롭게 살 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죽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때부터 지금까지 애굽을 다스리던 힉소스 왕조가 무너지고 투트모스 1세가 애굽의 제 18왕조로 통치하게 됨)이 일어나 이스라엘 백성을 탄압하게 됩니다. 노예로 전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학정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하여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너 시내 산에 도착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성막을 짓는 내용이 기록된 책이 출애굽기 입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너와 네 후손으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서 그 약속을 이루시고 계심을 봅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창13:16).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창26:4).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46:3).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출1:7).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너와 네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출애굽기에서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루어가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2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창35:12)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출3:8).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다가 사백년 후에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출애굽기에서 이루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15:13-14).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사백삼십 년이 끝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출12:40-41).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출12:36).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고난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자유인이 되게 하시고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하는 말씀을 주시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불러내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하시기 위한 구원의 과정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9:1)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여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모든 초태생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 내릴 때 어린양의 피를 문 인방과 문설주에 뿌리는 유월절 제사를 드림으로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가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1-23).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2:18-19).
출애굽기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예표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유월절과 출애굽은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의 그림자이며 또한 우리의 출애굽의 그림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되셨느니라”(고전5:7)
출애굽기의 내용을 정리하여 보면
출애굽기를 크게 세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장-11장까지는 고난 받는 이스라엘 2. 12장-19장까지는 출애굽을 하여 시내 산까지의 여정이 기록되어있고 3. 20장-40장까지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율법을 받고 성막을 세우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들은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므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한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조가 등장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셈 계통의 아세아인족에 의해 세워진 힉소스 왕조는 요셉을 크게 등용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힉소스 왕조 치하의 이스라엘은 아무런 문제없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부 애굽으로부터 일어난 반 힉소스 왕조 세력은 1세기 이상 지속하던 이방 왕조인 힉소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강력한 순수 애굽 왕조를 창건하였는데 이 왕조가 곧 제18왕조입니다. 이 왕조는 이방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을 혐오하고 배척하였으며 외세가 침략하여 왔을 때 그들과 결탁하고 국가를 전복시킬 것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혹독하게 탄압하고 이스라엘 말살 정책을 펴고 산파들을 시켜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도록 명령하였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산파들의 비협조로 실패로 돌아가자 이스라엘 남아 신생아는 하수(나일강)에 던지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박해 시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레위 가문에 모세가 태어나게 됩니다. 석 달 동안을 숨겼으나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모세를 하숫가(나일강)에 버리게 되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로의 공주가 나일강에 나갔다가 모세를 발견하여 양아들로 삼게 되어 궁중에서 자라면서 사십년간 애굽의 모든 학문을 통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의 현장을 목격하고 잔인한 애굽인 감독자를 죽임으로 멀리 미디안 광야로 망명을 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이때 미디안으로 간 모세는 가정을 이루고 이드로의 양 무리를 치는 가운데 사십년의 세월이 흐르게 됩니다. 사십년이 끝나는 무렵 모세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돌아가 강팍한 바로를 상대로 열 가지 재앙이 애굽 전역에 내리는 중에 마지막 열 번째 모든 초태생이 죽임을 당하는 죽음의 재앙이 내리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명하여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고 그 밤에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심판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되리니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유월절을 지키므로 그 밤에 죽음의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만에 애굽 땅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낸 후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이 변하여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오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되었으나 애굽의 군대들은 홍해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게 하시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여 먹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한지 50일째 되던 날에 시내산에 도착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할 언약을 받게 되는데 두 돌비에 기록된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윤리와 도덕의 근본이 되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더디 내려오자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 앞에 제사를 하게 되자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진노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던져 깨뜨리고 맙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므로 언약을 깨뜨리고 만 것입니다. 다시 시내산에 오른 모세는 십계명을 받고 성막을 지을 설계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성막을 만들어 세우게 됩니다.
레위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레1:1-2절
레위기는 모세가 주전 1450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성막을 짓고 시내산에서 출발하기 전에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시내산에서 정식으로 언약을 맺으므로 이스라엘은 신정국가가 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민이 된 것입니다. 언약이 체결되었고 성막이 세워졌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 좌정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으로 여정을 계속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매일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기에 제사를 드리려면 제사 예법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성막을 짓는 부분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레위기에서는 시내산 아래서 성막을 짓고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제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법과 구원함을 받은 성도의 삶은 거룩하여야 하는 성결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레위기에서 하나님과 죄지은 사람 사이의 중보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제사장은 장차 오실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히5:1)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레1: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히4:14)
구약의 제사장은 레위 계통의 아론의 후손이어야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제사장 되심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유다지파에서 오셨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히7:11-17).
구약의 제사장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하나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는 제사장이십니다.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3-25).
구약의 제사장들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지만 예수님께서는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드렸습니다.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레16:15).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구약의 제사는 해마다 제사를 드려야 하였지만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단번에 영원한 제사로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히10: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1-14.
지상의 제사장은 하늘의 모형인 땅의 성소에 들어갔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히8:5).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 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히9:24)
구약의 제사장은 자신을 위하여 속죄제를 하나님께 드려야 했지만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레16:3-4)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히9:7).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히7:26)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히7:28).
레위기의 제사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10).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1-12).
레위기의 제사에서 우리는 대속의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레4: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려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
레위기 제사에서 우리는 전가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레1:4)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레위기에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실 예수님을 아사셀 양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무인지경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16:21-22)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레위기에서 우리는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히9:15)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언약의 말씀은 도덕법과 시민법과 의식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레위기에 기록된 말씀은 의식법을 중점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의식법은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이므로”(히10:1) 하신 말씀처럼 의식법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영적인 실재를 보이는 여러 상징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즉 성막과 성막의 모든 기구들은 영적인 하나님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의식법은 모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형이란 원형을 현재의 가견적인 형태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막은 하늘의 원형이 땅의 모형으로 표현된 것입니다.(출25:8-9.대상28:18-19) 성막과 성막의 기구들과 제물들은 예수님의 예표요 모형입니다.(히9:9-12) 의식법은 성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물을 먹음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성례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는 성찬 예식의 예표요 모형인 것입니다. 이 옛 언약 아래서의 의식법은 참 형상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속죄 사역을 완성하시므로 이제 완성 되었습니다. 종교 개혁이후 개신교회는 ‘의식’을 은혜의 본질적인 수단으로 믿는 가톨릭 교회와는 대조적으로 ‘말씀’을 은혜의 수단으로 강조하다 보니 의식이 상대적으로 약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씀과 의식을 대치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중요한 의식이라고 생각할 때 의식법을 통하여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뜻을 깊이 깨닫고 레위기의 의식법을 바로 공부하여 오늘의 예배와 잘 연관시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레위기는 두 부분으로 분류하면
1-16장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를 보여주는 제사법과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키는 불결한 것을 제거하는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17-26장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하게 살아야 함을 가르치는 성결법을 말씀하고 있으며 27장은 부록으로 기록 되었습니다. 레위기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말씀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입니다.
레위기에는 5대 제사가 있습니다.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번제로 온전한 순종과 헌신을 뜻하는 제사이며 고운가루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드리므로 희생과 봉사를 뜻하는 소제가 있습니다 .제사를 드린 후 제물을 함께 먹는 화목제로 감사의 제사이며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드리는 속죄제가 있으며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한 배상을 하는 속건제가 있습니다. 제사의 방법으로는 불에 태워서 드리는 화제, 각을 떠서 드리는 거제, 흔들어서 드리는 요제, 붓는 제사로 전제 또는 관제가 있습니다. 제사장의 성결법을 말씀하신 후 아론의 장자 나답과 차자인 아비후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의 개념을 심각하게 일깨우고 있는지를 우리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말하고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말씀하며 산모와 나병환자와 일반적인 불결에서 정결법과 속죄일의 규례를 말씀하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키는 불결을 제거하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후반부는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한 삶을 요구하시며 이웃과의 관계에서 거룩을 요구하셨고 절기를 성별되게 하여 지키라 명하셨습니다.
민수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민1:1-4절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에서 가나안 땅으로 출발 하기위하여 준비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모압평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과 모압 평지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은 대략 38년으로 출애굽한 세대 중 20세 이상인 자는 광야에서 다 죽고 나머지 세대와 광야 세대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길이 참으시는 사랑과 연단을 통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새로운 세대의 훈련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민수기는 출애굽 후 2년부터 40년까지 38년간의 광야 생활을 다루고 있습니다.
민수기라는 명칭은 민수기에 두 차례의 인구조사(민1:1-4, 26:1-4)가 시행되었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원래의 히브리어의 명칭은 1:1절의 단어인 “광야에서”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사실은 이 명칭이 이 책의 본질적인 의미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과거(출애굽)에서 미래로(가나안으로) 가는 현재의 광야 생활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약속에서 성취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는 광야 교회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서 “광야에서” 라는 명칭이 더 본질을 다루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민수기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한 하늘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신약 교회의 과거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를 다루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는 민수기의 말씀이 너무나 중요한 말씀으로 광야에서 생활하던 광야교회인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지 않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시므로 애굽의 모든 습관들을 버리게 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 훈련하신 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광야에서 훈련과 연단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함인 것을 민수기를 통하여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연단과 훈련을 통하여 순종하는 자녀가 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과 같이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시련과 연단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단련시켜 하늘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계신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한없으신 은혜와 변함없는 사랑으로 인도하심을 감사하여야 하겠습니다.
구약의 모든 성경이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듯이 민수기에서 장대에 달린 놋뱀은 장차 우리를 영원한 형벌과 저주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21:8-9).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은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시고 피흘려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1).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전10:4).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의 기록인 민수기는 영원한 가나안을 향하여 가는 우리들에게 거울이 되고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하여 놓은 것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친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민2:1-2).
출애굽을 하여 광야 생활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교회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행7:38).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안식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걷던 광야 생활은 우리가 영원한 안식을 향하여 믿음의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을 예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95:10-11).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까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영원한 하늘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영혼의 만나를 먹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우리에게 주실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맛 같았더라.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민11:7-1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요6:47-51).
민수기는 네 부분으로 그 내용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가나안 여정을 위한 준비로 1장 -10장10절까지이며, 둘째 부분은, 시내 산에서 출발하여 가데스 바네아까지로 10장11절 -12장16절까지이며, 셋째 부분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압평지에 이르기까지로13장 -21장까지이며, 넷째 부분은, 모압 평지에서 생긴 일로 22장 -36장까지입니다.
민수기는 두 차례의 인구 조사가 있습니다. 첫 번째 조사는 출애굽 후 제 이년 이월 일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중 남자로 이십 세 이상인 자를 조사하였으며(민1:1-4) 두 번째 조사는 광야생활이 끝나는 무렵에 모압 평지에서 있었습니다.(민26:1-4) 광야생활 40년 중 출애굽을 하여 가데스바네아까지 이르는 데 2년이 걸렸고, 가데스바네아에서 출발하여 세렛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이 걸렸습니다.(“가데스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신2:14-18).
인구조사를 할 때 레위 인들은 포함되지 않았으며 레위인은 증거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진을 칠 때는 성막을 중심하여 사면으로 진을 쳤으며 행진을 할 때도 성막을 중심으로 행진을 하였습니다. 출애굽한 제 이년 정월 14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행진할 때에 신호를 위하여 은 나팔을 만들라 명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행진 중에 은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하였습니다. 행진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나자 마침내 출애굽한 제 이년 이월 이십일에 구름이 증거막에서 떠오르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동안 머물러 있던 시내 산을 출발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행진하였습니다.
진행할 때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중심으로 사면에 세 지파씩 이스라엘 열 두 지파가 따랐으며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며, 구름이 떠오를 때는 행진을 하였으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란 광야에 도착하여 가나안땅으로 열 두 정탐군을 보내게 되어 40일 동안 정탐을 하고 돌아와 보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열 명의 정탐군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악평하는 불신앙의 보고를 하자 백성들이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언약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원망하였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시행하리니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 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년 간 너희가 그 죄악을 지고 광야에서 다 죽고 유아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을 돌려 광야로 들어가 세일 산을 두루 돌아 다시 가데스 바네아 오기까지 무려 38년이나 걸렸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가나안 땅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므로 머나먼 길을 돌아 다시 오기까지 너무나 긴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출애굽한지 제 40년째 되던 정월에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 그곳에서 미리암이 죽고 마실 물이 없어 원망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반석을 두 번 치는 일로 인하여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며 대제사장 아론도 호르산에서 죽게 됩니다. 백성들이 길이 험악하므로 인하여 불평하자 불뱀이 나와 백성들이 죽어가므로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자 놋뱀을 장대에 달아 불뱀에 물린 자는 바라보라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청하여 저주하여 주기를 청하자 발람이 와서 저주 대신 축복과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이르렀을 때 그 지방의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자기들의 신들에게 제사할 때 청하므로 이스라엘 남자들이 그 신들에게 절하므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진노하여 전염병이 돌게 됩니다.
전염병 후에 두 번째 인구조사를 하였으며 요셉의 자손 가운데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딸들이 아버지의 기업을 요구하므로 딸들도 아들과 같이 기업을 분배할 것을 하나님께서 명하셨습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며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일부 자손에게 요단 동편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게 되며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까지의 이동 경로와 각 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게 됩니다.
신명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신 1:1, 29:1절
신명기는 모세 오경 중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책으로 원래 히브리 원문을 따른 본서 명칭은 ‘이는 ..... 말씀이니라’입니다.(“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신1:1)그러나 헬라어 역본 70인 역은 책의 성격을 따라 ‘율법의 반복’ 혹은 ‘두 번째 율법’이란 뜻의 ‘신명기’로 의역을 하였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한글 개역 성경도 ‘신명기(申命記)’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이 뜻은 ‘계명을 밝히 설명한 책’이란 뜻입니다. 모세 오경에서 신명기의 위치와 주제를 살펴보면 창세기는 에덴동산에서 시작하여 요셉이 애굽에서 입관되는 것으로 끝은 맺고 있으며,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시내 산까지이며, 레위기는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민수기는 시내 산에서 모압 평지까지이며(민36:13), 신명기는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창세기는 인간창조와 타락과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를 선민 히브리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심과 그의 자손이 애굽으로 내려 간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시내 산에서 언약을 세우심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어떻게 구원하시는 가를 보여주고 있으며, 레위기는 범죄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 속죄함을 받으며, 구원받은 선민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규범을 기록하고 있으며,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의 연단과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가르치고 있으며, 신명기는 하나님의 율법을 신세대들에게 재론하므로 언약을 갱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모압 평지에서 광야세대와 세운 모압 언약입니다.
신29:1절에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또 그들과 세우신 언약의 말씀이 이러하니라.” 는 말씀을 보아 시내 산에서 세운 시내 산 언약을 갱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시내 산에서 언약을 세웠습니다.(출24:4-8)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므로 광야에서 38년 동안 시내 산 언약의 당사자들인 출애굽한 20세 이상인자는 다 죽고 20세 미만인 사람과 광야에서 태어난 광야세대와 맺은 언약이 모압 언약입니다.
시내 산 언약의 당사자들이 다 죽었기에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신세대와 시내 산에서 세운 언약을 갱신(更新)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언약의 갱신(更新)이란 언약의 대상이 출애굽 세대에서 광야세대로 바뀐 것을 뜻하는 것이지 언약의 내용이 새롭게 바뀐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압 평지에서 세운 모압 언약을 기업으로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다시 한번 선포하라 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11:29).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 언약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세겜 언약을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모압 언약을 세겜 언약이라고도 합니다.(수8:30-35)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십계명이 기록되어있는데 제 4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 중 출20장에서는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였고, 신5장에서는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의 창조하심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 하였고,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 하였습니다.
신명기에 나온 모압 언약 가운데에서 장차 새 언약을 세우실 것을 암시하시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6).
신명기에서는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와 같은 한 선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18:15).
신약에서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11:2-3). 하는 ‘오실 그이’는 신명기에서 약속한 ‘나와 같은 선지자’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1:45) 이 말씀 가운데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다는 것은 ‘나와 같은 선지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앉은뱅이를 고친 후 백성들 앞에서 설교하는 가운데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행3:22-24). 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즉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하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참선지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사역은 오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모세의 이스라엘 통치자로서의 왕직(신33:4)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중보자로서의 제사장직(출32:31-35)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선지자직(신34:10-12)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3대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세 직을 수행하신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신명기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세 번이나 말씀을 인용하셨으며 사도들이 구약 성경 중 가장 많이 인용한 성경으로 80회나 인용하였습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새 세대들에게 세 편의 설교 형식으로 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첫 번째 설교는 지난 40년간의 광야의 역사를 회고하는 것으로 과거를 말하고 있으며, 두 번째 설교는 하나님의 율법을 강론하면서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며, 세 번째 설교는 언약을 준수할 것을 당부하는 미래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설교 1:1-4:43절
지난 광야 사십년간의 역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왜 광야에서 사십년간 유랑생활을 하였는가를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선민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신1:31-33).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를 들으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므로 가데스바네아에서 떠나 방향을 돌려 광야로 들어가 38년 만에 세렛 시내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가데스바네아를 떠나 세렛시내를 건너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 에돔과 모압땅을 통과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으므로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정복하고 요단 동편 땅을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판에게 기업으로 분배하고 세 성읍 즉 베셀과 길르앗라못과 바산 골란을 구별하여 도피성으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가나안땅에 들어가기를 간절히 간구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허락지 아니하시고 여호수아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라 명하십시다.
두 번째 설교 4:44-26:19절
두 번째 설교는 하나님의 택한 선민으로서 거룩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재론하고 있습니다.
즉 십계명을 근간으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도덕적 의무와 의식적인 의무와 사회 질서와 정의실현을 위한 사회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설교 27:1-34:12절
세 번째 설교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한 최후의 설교로서 이스라엘의 미래의 역사에 관한 예언적 내용을 유언적 형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과 불순종 여하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30:15-20).
모세는 먼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로생활과 회복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귀환을 예언하고 모세의 마지막 고별사와 죽음과 장사로 신명기는 끝을 맺습니다.
역사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구약성경을 분류할 때 모세오경 (창세기ㅡ신명기),역사서 (여호수아ㅡ에스더 ),시가서 (욥기 ㅡ아가),선지서(이사야ㅡ말라기)로 분류합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서(마태ㅡ요한),역사서(사도행전),서신서(바울서선=롬 ㅡ 히), (공동서신 = 약 ㅡ 유다), 계시록으로 분류합니다.
역사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사사시대를 지나 왕정시대를 거처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 70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 성곽을 재건하는데 까지 의 역사를 말합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와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와 어떤 연관성이 있기에 공부를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역사서를 자세히 상고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1.구약의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사건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할 언약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 오경은 말씀을 통하여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역사서를 통하여서는 사건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모세 오경인 창세기ㅡ신명기도 천지창조에서부터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어 광야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기록된 역사입니다. 그러나 모세 오경을 역사서라 하지 않고 ‘오경’ 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모세오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목적과 언약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삶의 규범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후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셨다고 그 택하신 목적을 창18:18ㅡ19절에서 말씀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속의 목적을 이르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시내 산에서 언약을 세우시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거룩한 삶을 요구하시고 온 세계의 제사장나라가 되어 하나님의뜻을 알리는 이방의 빛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여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사 그곳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았던 삶의 기록이 곧 역사서입니다.
모세 오경은 여호와 종교의 기원을 보여주는 헌법과 같습니다. 이 모세 오경을 근거로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로 “과거 ㅡ 현재 ㅡ 미래”의 방향성을 띠고 배열이 되었습니다.
역사서는 언약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관계사를 기록하고 있기에 “과거성”을 띠고 있으며, 시가서는 언약 백성이 주를 모시고 살면서 느끼는 삶의 고난과 기쁨을 표현하는 애가와 찬양과 언약 백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담은 지혜서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의 “지금 여기서의” 삶의 체험. 즉“현재성”을 말하며, 선지서는 그 시대에 주신 말씀임과 동시에 장차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말하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들어있으므로 “미래성”을 말하고 있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서는 언약의 주이신 하나님과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과거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며, 은혜를 베푸셨는가를 배우며, 그리스도안에서 언약 백성 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이정표입니다.
그런 일은(지난역사는)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전10:6ㅡ7)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 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행13:22,36)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서를 읽으므로 사건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2.구약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영적인 이스라엘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3:27ㅡ29)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이스라엘이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우리의 영적조상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역사에서 하나님과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깨닫게 됩니다. 한 사람이나 민족의 과거의 이야기는 그 사람과 그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 때 정체성은 상실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과거 역사를 잃어버리는 “기억 상실증” 환자들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서를 공부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면서 거룩한 백성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이방의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체성을 망각하고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매 맞고 마침내는 쫓겨나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입니다. 역사를 통하여 배우지 못하면 배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역사서는 곧 우리의 역사임을 알고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세로 읽어야 하여야 합니다.
여호수아
여호수아서는 모세가 죽은 후 그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가 약속의 땅 가나안땅에 살고 있던 거민들을 다 멸하고 제비뽑아 기업을 분배한 사실은 기록한 것입니다.
본서를 크게 두 구분하면
1장ㅡ 12장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에 들어가 가나안을 점령한일
13장 ㅡ24장은 기업분배와 여호수아의 최후의 고별 권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 창15장에서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리라 하신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ㅡ 신명기는 하나님의 약속성취의 과정이요 약속의 땅에서 언약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삶의 규범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통하여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이 실현되는 구속사의 정점임과 동시에 시작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한 약속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땅은 계약의 땅이었습니다. 계약의 요구에 충실할 때만 그곳에 살며 안식을 누리나 계약을 어기면 안식을 누릴 수없으며 마침내는 그 땅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을 명심하고 살아야 하는 시작점입니다. 구약의 역사서는 오늘날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우리는 누구며,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 하는 뜻으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들어갔던 것처럼 장차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영원한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입니다.
가나안 땅은 영원한 저 천국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과 그 후손에게 약속한 가나안은 영원한 가나안 즉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하늘의 성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저 영원한 가나안의 예표요 모형입니다.(히11:8ㅡ16)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땅에 들어가 가나안땅에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과 전쟁을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거듭나고 새 사람이 되어 옛사람과의 싸움과 같습니다. 다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약간 남겨둔 그 족속에게 훗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영적인 가나안전생이 계속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칭의 와 성화의 관계입니다.
사사기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고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까지의 약 350년간의 역서의 기록입니다. 이 시대는 사사들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여기서 ‘사사’란 말은 전쟁 때에는 사령관이요 평화시기에는 통치자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여 선민으로 삼고 오직 하나님만 유일신이라는 진리를 온 세상에 증거하기위하여 제사장 나라와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다는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들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이때 하나님은 진노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인의 넘겨 압제를 받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본서에 나오는 주제는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진노, 인간의 부르짖음과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1.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여(2:11, 3:7,12, 4:1, 6:1, 10:6, 13:1)
2.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2:14, 3:8, 4:2, 6:1, 10:7. 13:1)
3.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3:9, 3:15, 4:3, 6:6, 10:10)
4.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2:16, 3:9,15)
우리는 사사기를 통하여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죄를 지을 수 있는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세상과 동화되지 않는 분리된 삶을 살며 우리의 정체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자기 백성들이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부르짖으면 외면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여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에 언약백성들을 치리한 사사들은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의로 통치하실 평화의 왕 되신 예수님의 예표요 모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사사입니다.
룻기
룻기는 사사시대에 일어난 일로 유다지방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이 흉년이 들자 가족을 데리고 모압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거주하던 10년 동안에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죽고 남아있던 가족들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 이방여인인 룻이 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가문의 기업 무를 자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오벳이며 오벳의 아들이 이새요 이새의 아들이 다윗입니다.
그러므로 룻기는 다윗가문의 기원을 보여주기 위한 글로 사사기의 부록이며 사무엘서의 서언입니다
룻기를 통하여 이방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을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며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는 기생 라합과 살몬 사이에 낳은 아들입니다.(마태1:5)
룻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효도하는 자에게 어떤 복을 내리시는 가를 보여주시는 사건적인 계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룻기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구속사적 개념은 기업 무름입니다.
기업 무름은(1)가족의 재산을 다시 회복하는 책임(레25:25,) 과
(2)가난 때문에 종으로 팔린 친족을 속량하는 책임(레25:47ㅡ55)이 있습니다.
기업 무를 자는 근족이어야 하고, 재력이 있어야 하고, 마음에 원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잃어버린 재산을 찾아주고 종으로 팔린 몸을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여 돌보는 보호자가 되어주고 옹호자가 되어주는 것이 기업 무를 자의 역할입니다.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는 우리의 기업 무를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에덴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기업을 찾아서 자녀 삼으시고, 자유를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피로 값을 지불하시고 사서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되찾아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서
원래 사무엘 상 하는 한권의 책 이였습니다. 후대에 와서 상. 하로 구분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서는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사사시대의 말기 엘리 가문의 몰락과 사무엘의 등장과 퇴장, 그리고 왕정시대가 열리며 사울이 등장과 퇴장 다윗의 등장과 왕국 확장의 역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무엘 서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언약을 세우시면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 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그 무엇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우리의 주로, 왕으로 섬겨야 합니다.
사무엘 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위하여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열왕기서
열왕기서도 역시 원래는 한 권의 책입니다. 후대에 와서 상. 하로 분류되었습니다.
열왕기서는 왕상 11장까지는 솔로몬이전으로 통일 왕국시대까지의 기록이고 12장 이후 왕하 17장까지는 분열왕국의 역사가 기록되어있으며 18장에서 25장까지는 남방유다의 멸망까지의 역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느호보암이 왕위에 올라 여로보암의 반역으로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로 나라가 나누어지게 됩니다. 북방이스라엘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세우므로 이것이 죄가 되어 북방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게 망하게 되며 남방유다 그 후 135년 후 주전 586년 바벨론에게 망하여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우리는 열왕기서의 역사를 통하여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께서 징계하신 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역대기서
역대기서도 역시 원래는 한 권의 책입니다. 후대에 상. 하로 분류되었습니다.
역대상은 1장에서 9장까지 아담에서 포로 후 예루살렘으로 귀환까지의 족보가 기록되었습니다. 10장에서 사울의 죽음이 기록되었고 11장부터 역대 하 36장은 유다의 멸망까지 유대의 종교사를 기록한 역사입니다. 열왕기서가 유다의 왕국역사라면 역대기서는 유다의 종교역사입니다 .
그러므로 다윗 왕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준비한 내용과 성전의 건축 역사가 소상히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역대기 서를 통하여 광야에서 건축한 성막이 어떻게 성전으로 변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성전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성전(그 거하시는 곳)을 얼마나 아끼사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 백성을 부지런히 권면하신 것을 역대기 서를 읽으므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역대기를 통하여 성전의 중요성과 예배의 중요성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성전이 지어져서 예배가 회복되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에스라
에스라서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레스 해방령으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인도로 주전 537년 1차로 귀환하여 성전을 건축하려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의 방해로 잠시 중단하였다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다시 성전을 건축한 내용이 1장에서 6장까지 기록이 되었습니다.
7장에서 10장까지는 1차 귀한 후 약 80년 후인 주전 458년 에스라의 인도로 2차 귀환하여 말씀운동이 일어난 신앙부흥의 역사가 기록되었습니다.
에스라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70년 후에 다시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렘 25장11ㅡ12)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시고 고치게 하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70년이 차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고레스로 하여금 해방령을 내리게 하십니다. 섬세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본서를 읽으므로 깨달아야 합니다.
에스라서에 나오는 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은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예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것처럼 우리 예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1:13ㅡ14)
느헤미야
느헤미야서는 에스라 귀환이후 14년 후인 주전 444년에 3차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곽을 재건하고 에스라와 함께 개혁정책을 추진하여 개혁을 하는 개혁운동의 역사가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바사나라 왕궁에서 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고국 이스라엘이 성전은 재건되었으나 성곽은 아직 재건되지 않아 백성들이 외세에 공격을 받고 수모를 당한다는 말을 듣고 근심함으로 얼굴이 수척하여졌습니다. 이에 왕께 허락을 받아 유다 총독으로 부임을 하여 성곽을 재건하고 신앙부흥을 일으키는 포로 후 유대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통하여 성곽이 완성되므로 약속과 구원이 성취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의 완성 자가 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의 도우심을 알 수 있으며 언약 백성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에스더
에스더서는 에스라서에 기록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인도로 1차 귀환한 후 에스라가 2차로 귀환한 그 사이 약 80년간의 간격사이에 바사(페르샤)에 남아있던 유다 민족들이 하만에게 전 민족이 멸절될 위기에서 에스더라는 믿음의 사람을 통하여 유대 민족이 구원을 받는 사건을 기록한 유대민족의 역사입니다.
본서에는 하나님이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배후에서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는 과정이나 위기의 순간에 유다 민족을 구원하여 내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본서를 통하여 깨달으며 우리를 오늘도 사단의 궤계에서 도우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며, 도우시며, 우리의 우편에 계십니다.(시 121편)
여호수아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수 1:1-4절
여호수아서는 여호수아의 이름을 따서 ‘여호수아’ 라 하였습니다.
모세오경 다음으로 여호수아에서 에스더까지의 12권을 역사서라 합니다. 여기서 역사서라 말은 이 12권의 책속에 가나안 정복에서부터 사사 시대, 통일왕국시대, 남북왕국의 분열 및 멸망 과 바벨론 포로기와 포로 후 귀환과 재건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역사가 수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 하, 열왕기 상. 하를 ‘전기 예언서’에 포함 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그 책들의 저자가 선지자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 내용이 말씀 순종에 따른 축복과 불순종에 따른 저주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하신 약속을 이루신 내용의 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부르시고 가나안땅을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13:14-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 함이니라 하시더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브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15:15-21).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3:7-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심으로 조상들과 하신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수21:43-44)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하신 약속을 여호수아서에서 성취하신 것입니다.
즉 창세기는 약속이요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약속성취의 과정이요 여호수아서는 성취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인도하여 가시는 목적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것은 가나안 안식을 주시기 위한 과정이요 최종 목적지는 가나안 안식을 주시기 위함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라는 뜻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와 안식을 주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하여 승리와 영원한 안식을 주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본서에서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에 기생 라합이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므로 죽음에서 구원 받은 것은 누구든지 예수 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방 여자인 기생 라합이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른 것은(마1:5) 이방인에게도 차별이 없이 임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예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나타난 군대장관은(수5:13-15) 하나님의 현현(顯現)으로 장차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실 예수님의 성육신을 예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안식으로 들어간 것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실 것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은 가나안 안식은 영원한 하늘 가나안 안식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라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 지라”(수23:1)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 (히4:8-11).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14:13).
여호수아서를 통하여 율법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1:2).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에 흠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지 못하는 까닭은 인간이 약하고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전쟁이 있었던 것은 우리도 구원 받은 후 영적 싸움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6:13)
여호수아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1장-12장까지는 가나안 정복의 준비와 가나안 정복, 13장-24장까지는 기업을 분배하고 여호수아의 최후의 부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가 죽자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최후에 부탁을 남기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모세가 죽자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한 것과 같이 너와 함께 하리니 너는 이 백성을 이끌고 요단을 건너가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명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먼저 정탐군 두 사람을 여리고성으로 보내어 정탐을 하게 하였습니다. 두 정탐군은 여리고성으로 들어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의 생명을 지켜준 라합에게 창문에 붉을 줄을 매달고 모든 가족이 집안에 거하면 생명을 보존하리라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너기전 스스로 성결하게 하고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요단에 들어서자 요단강이 갈라져 요단을 무사히 건너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 가운데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서 있는 곳과 또한 길갈에 열두 돌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크신 권능으로 요단을 건넜다는 역사적 증거물로 삼고자 함이요 또한 후손들에게 교육의 목적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너 여리고성 앞 길갈에 진을 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할례를 행하라 명하시므로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가 노중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적진 앞에서 할례를 행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의 자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38년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순종하는 백성으로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으며 그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부터 만나가 그쳤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왔을 때에 여호와의 군대장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리고와의 전쟁을 앞두고 친히 현현(顯現)하셔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멘 제사장들의 뒤를 따라 하루에 한번씩 여리고 성을 돌다가 제 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외치자 여리고 성이 무너졌으며 여리성이 무너지는 가운데서도 약속대로 라합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간의 범죄와 백성들의 자만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아니하고 아이성 전투에 임하므로 전투에서 실패하였습니다. 전투에서 실패한 여호수아와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기도하고 아간의 범죄를 처단하고 아이성을 점령한 후 세겜에 있는 에발산에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온 백성을 불러 모으고 그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서게 하고 그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서게 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고 언약을 세우게 됩니다. 이 언약이 세겜 언약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원방에서 온 것처럼 변장하고 와서 화친을 청하자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일로 인하여 기브온 사람들은 나무패며 물 긷는 사람으로 삼았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남부를 점령하고 또한 북부를 점령하고 지파에 따라 제비를 뽑아 기업을 분배하게 됩니다.
각 지파를 위한 기업분배가 끝나고 실로에 회막을 세우게 되며 실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적 중심지가 됩니다.
이 일이 마친 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수21:43-45). 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조상들과 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요단 동편을 기업으로 분배받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 사랑할 것을 당부하고 또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지키며 사랑할 것을 당부하는 유언을 남기고 일백 십세에 죽어 에브라임 산지에 장사되었습니다.
사사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삿2:6-10절
사사기는 여호수아가 죽고 난 후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의 약 350년간의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하면서 그 기간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사(士師)’(지도자, 재판관)들의 역할과 그 시대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가 죽자 급속히 이방문화에 동화되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가증한 죄악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치하시기 위하여 이방 민족의 손에 넘겨 압제 아래서 고난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가운데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사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이방 민족의 압제 아래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십니다. 이방 민족의 압제로부터 벗어나 사사들의 다스림을 받는 동안 평안해지자 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 신들을 섬기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 민족의 압제 아래서 고난을 받게 하십니다.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사 들을 보내어 이들을 이방 민족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자유와 평안을 주십니다. 본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교와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한 말씀으로 인간의 본성에 존재하고 있는 죄 성이 얼마나 악하며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길이 참으시는 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본서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2:11,3:7,12. 4:1,6:1,10:6.13:1) 란 말씀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2:14,3:8,4:2,6:1)란 말씀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3:9,15,4:3,6:6,10:10)란 말씀과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2:16,3:9,15,6:14) 라는 말씀의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함 ㅡ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이심 ㅡ 이스라엘 자손이 고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음 ㅡ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심 ㅡ 또 다시 이스라엘의 배반과 재 타락’ 이런 악순환의 반복으로 350년간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로 빨리 돌아오면 이방 민족의 압제 아래서 고난의 기간이 짧지만 그렇지 않으면 고난의 기간이 긴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에 순종하면 평안한 생활이 오래 지속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역사는 비단 사사 시대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전 역사에 걸쳐 반복되어지는 비극인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악순환인 것을 깨닫고 사사기를 통하여 교훈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본서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전 역사는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서에서 인간의 나약함과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3:22-23).
본서에 등장하고 있는 사사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군사적 통치자였을 뿐 아니라, 백성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하는 영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엘리와 사무엘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 제사장직, 선지자직의 세 가지 직분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들은 때로 실패하기도 하여 좌절을 맛보기도 하였으나 그러나 예표의 원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일을 다 완수하신 우리의 참 사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사사는 한시적으로 사사의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우리의 참 사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사가 되시므로 영원히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본서의 저자는 정확하게 저자를 밝히고 있는 성경적 내증이 없기에 누구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의하면 사무엘이 사무엘상. 하, 사사기, 룻기를 기록하였다고 하고 있으며 교회의 전승도 사무엘이 기록하였다고 봅니다.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여호수아가 죽은 때로부터 시작하여 왕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므로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쇠퇴로 인하여 이스라엘 공동체가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가를 후세에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사기를 통하여 하나님이 없이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큰 피해를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깨닫고 말씀을 삶의 규범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 없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사들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심을 깨닫게 하시려 함이며 하나님이 참 왕 되심을 알게 하시려고 본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아무리 범죄 하였을지라도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언제든지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주신다는 하나님의 깊으신 사랑을 깨닫게 하려고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본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첫째, 1:1-3:6절 말씀 까지는 사사시대의 정치적 영적 배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아직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하였기에 도처에 가나안 원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우상 숭배와 각종 사악한 풍습에 물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신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안팎의 이방족속들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게 됩니다.
여호수아가 생존하여 있는 동안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본 자들이 생존하여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 세대 사람도 다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풍습에 동화되어 하나님을 등지게 됩니다. 그 원인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지 아니한 결과 그들과 왕래하였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유다 자손이 자기의 기업의 경내에 있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 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 내지 못하였으며”(1:19). 베냐민 자손도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거한 여부스 사람을 쫓아 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베냐민 사람과 함께 오늘날 까지 예루살렘에 거하더라”(1:21). 므낫세 자손도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 향리의 거민들을 쫓아 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1:27). 에브라임 자손도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에브라임이 게셀에 거한 가나안 사람을 쫓아 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게셀에서 그들 중에 거하였더라”(1:29).스불론 자손도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아셀 자손과 납달리 자손도 역시 가나안 사람을 다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요 .... 그들이 너희 옆구리의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적을 본 세대들이 다 죽고 난 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하였기에 자기들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토속신인 바알을 섬기게 되며 통혼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3:7-16:31절 말씀 까지는 본서의 본론 부분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범죄와 사사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방인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기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는 지라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므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팔 년동안 섬겼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 자손들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그 땅이 사십 년간 태평하였습니다.(3:7-11)
옷니엘이 죽자 또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배반하므로 하나님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왕을 십팔 년을 섬기게 됩니다.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하나님께 베냐민 지파의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 자손들을 모압 왕을 죽이고 항복을 받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팔십 년 동안 태평하였습니다.(3:12-30)
에홋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이 또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가나안 왕 야빈이 이십 년 동안 심히 학대하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하나님께서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를 사사로 세웠습니다.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를 멸하므로 그 땅이 사십 년동안 태평하였습니다.(4:1-5:31)
이스라엘 자손이 또 악을 행하므로 미디안이 칠 년 동안 다스리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세워 이스라엘 자손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며 그 땅이 사십 년간 태평하였습니다.(6:1-8:32)
기드온이 죽은 후 기드온의 아들이 칠십 명이 있었는데 아비멜렉이 이들을 다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일부 지역을 삼년 간 다스렸으나 사사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악을 행하자 암몬이 이스라엘 자손을 십팔 년간 다스리므로 곤고가 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길르앗의 장로들이 기생의 아들 입다를 장관으로 세우고
입다가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으며 전쟁에 승리를 하고 돌아오자 자기 딸이 맨 먼저 환영을 하였으나 서원을 이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불레셋에 파시므로 불레셋이 사십 년간 다스릴 때 단 지파 가운데서 삼손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 자손을 불레셋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13:1-16:31)
셋째, 17:1-21:25절 말씀까지는 본서의 결론 부분으로 사사 시대의 도덕적 타락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과 지파와 온 지파 전체가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개인의 우상 숭배가 어떻게 한 지파 전체로 번져졌는지를 말씀하고 있으며 또한 한 마을에서 일어난 도덕적 타락이 온 지파간의 내전으로 확산 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들의 소견대로 행하는 어두움의 시대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왕 되시는 하나님은 안계시고 자신이 주인인 시대가 되었으며, 설교는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왕 되신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한 시대가 되었으며, 터가 무너진 시대로 의인이 설 곳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왕의 백성인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왕의 백성이요 왕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룻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룻 1:15-18절
룻기는 사사시대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 하였는데” 라는 1:1절의 말씀을 보아 사사들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에 흉년이 들자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한 가정이 모압 지방으로 가기 위하여 베들레헴을 떠난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이 가정이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라는 4:22절의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본서의 저자는 누구인지 분명치 않으나 유대인들의 탈무드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사무엘이 사무엘 상. 하와 룻기를 기록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이방 여인인 룻을 통하여 다윗 가문이 시작되었으며 이 다윗의 후손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가 오셨음을 생각할 때 본서를 통하여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서를 통하여 이방인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예시하여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이방 사람인 룻이 자신이 섬기던 신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김으로 복을 받아 다윗 가문의 증조모가 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 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룻기에서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기업 무를 자’로 묘사로 하고 있습니다.
룻기에는 ‘기업 무를 자’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의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2:20).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3:12).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3:13).(4:1-4)
‘기업 무를 자’라는 히브리어 ‘고엘’이란 단어는 ‘구속자’라는 의미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자기의 형제나 근족이 어려운 형편에 처하여 있을 때 그 어려운 형편에서 구하여 내고 보호하여 주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구속자’ 또는 ‘보호자’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토지를 기업으로 분배받은 후 기업으로 주신 땅을 팔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난하여 그 기업 가운데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기업을 무를 것을 명하셨습니다. “토지는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레25:23-25).
토지뿐 아니라 형제가 가난하여 종으로 팔렸을 때 형제가 값을 지불하고 속량하든지 삼촌이나 사촌이 속량하여 자유인이 되게 하라 명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은 부요하게 되고 그 곁에 사는 너희 동족은 빈한하게 됨으로 너희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에게나 그 족속에게 몸이 팔렸으면 팔린 후에 그를 속량할 수 있나니 그 형제 중 하나가 속하거나 삼촌이나 사촌이 속하거나 그 근족 중 누구든지 속할 것이요 (레25:47-49).
근족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대를 잇게 하여야 합니다.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가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신25:5-6).
친족이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친족의 죄 값을 대신 치러야 합니다.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족이 없거든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의 수양 외에 돌릴 것이니라”(민5:8).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법으로 규정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업 무를 자’가 되셔서 종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속량하여 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시면서 서언에 “나는 너희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고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의 ‘기업 무를 자’가 되셨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 무를 자’ 가 되어 주셔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입니다.
새 언약 아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와 죄의 형벌 아래 있는 우리를 구원하여 회복시켜 주시고 기업을 잇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기업 무를 자는 속전을 지불하여야 함과 같이 예수님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고 아들의 명분을 회복하게 하시고 하늘의 기업을 잇게 하신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1:3-4).
룻기는 대략 세부분으로 나누면 첫째, 룻이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옴. 둘째, 룻의 믿음과 효성. 셋째, 룻이 보아스를 만남과 하나님께 복을 받음입니다.
룻기의 내용을 정리하면 사사들이 치리하던 시대에 유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입니다. 그러나 그 땅에 흉년이 들자 엘리멜렉이 가족들을 데리고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엘리멜렉이 모압에 거주하는 동안 그곳에서 죽고
두 아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아내를 취하여 결혼을 하였는데 그 이름이 오르바와 룻입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이 그곳에 거주한지 십 년 즈음에 말론과 기룐도 죽고 이제는 나오미와 오르바와 룻 세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아 보사 베들레헴 지방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오르바와 룻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이때 오르바는 나오미와 작별 인사를 하고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룻은 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갈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15-17). 하고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는데 그 때는 보리를 추수하는 시기이었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룻은 어머니를 봉양(奉養)하기 위하여 들에 나가 보리를 벤 후 떨어진 이삭을 줍게 되는데 우연히 나오미의 친족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보아스가 사환에게 이삭을 줍는 저 여인이 누구냐고 묻자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온 여자라고 말하자 보아스가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으라고 호의를 베풀며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2:12)고 룻을 축복하였습니다.
룻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열심히 이삭을 줍고 저녁때에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자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는 우리의 근족으로 ‘기업 무를 자’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보아스의 밭에서만 이삭을 주으라 하였습니다.
한편 보아스는 성읍 장로 십 인을 청하여 나오미의 근족 가운데 기업 무를 자를 장로들 앞에 세운 후 우리의 형제 엘리멜렉의 기업을 잇게 하여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때 이 기업 무를 자가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아니하겠노라고 하자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룻과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으니 그 이름이 오벳이며 오벳은 이새를 낳았고 이새는 다윗을 낳으니 룻이 다윗의 증조모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 룻이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었을 뿐 아니라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1:5-6)
우리는 룻기를 통하여 룻은 이방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반열에 들어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소망이 없던 룻은 그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준 보아스로 인하여 슬픔의 인생이 기쁨의 인생으로 바뀌게 된 것을 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은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슬픔에서 기쁨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또한 룻의 헌신적인 삶과 효행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보아스를 통하여 보상하여 주시는 것을 룻기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사사시대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는 어둠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도 ‘추수 때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보호제도’(레19:9-10)와 ‘기업을 무를 자의 제도’(레25:23-25)와 ‘계대 결혼 제도’(신25:5-10)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사는 경건한 사람들에 의하여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고 우리도 이 시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무엘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삼상8:1-9절
여호수아가 죽은 후 약 350년간 사사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이 시대를 우리는 사사시대라 합니다.
사무엘상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선지자 사무엘의 탄생과 당시 사사로서 제사장이었던 엘리 가문의 몰락과 사무엘의 통치, 사사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과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왕의 선택과 버림당한 일,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한 일과 사울에게 박해를 받는 일,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울왕의 전사하는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원래 한권의 책이었는데 후대에 삼상과 삼하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사시대 말기 엘리 제사장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사무엘을 보내어 이스라엘 나라를 신정국가로 든든하게 세우는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던 말기에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나아와 왕을 세워주기를 간청하였습니다. 이 요청을 들은 사무엘은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 백성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 하시며 왕을 세워주라 하십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8:4-8).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울 때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의 백성으로 왕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것을 언약서에 피를 뿌려 언약을 세운 것입니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목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24:3-7).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언약 백성으로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의 지배나 다스림을 받아서도 안 되며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부패하므로 인하여 사사시대를 지나는 동안 혼란이 가중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중앙정부의 필요성을 느껴 왕을 세워줄 것을 사무엘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 왕을 세울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왕을 세우는 제도는 비록 사람들이 요구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사람들이 세운 왕이라 할지라도 그 왕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왕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백성들을 공평하게 의로 통치하므로 장차 오실 만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통치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왕이 되어 통치를 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위에 신적존재로 군림하게 되어 하나님의 창조함을 받은 사람의 본연의 자유를 속박하게 되며 하나님이 받으셔야 할 영광을 가로채기 때문입니다.(행12:21-23절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통치를 받을 우리의 왕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며 주님만이 우리의 주요 왕이십니다.(행2: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 말씀에서 ‘주’ 라는 말은 ‘왕’ ‘통치주’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도자의 지위에 오르면 항상 조심하고 왕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방 나라의 지도자와 신정국가의 지도자의 차이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5-28).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울왕은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에 급급하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으며 다윗왕은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복을 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잠들었으며...”(행13:20-22,36)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오직 왕이신 하나님만을 높이며, 섬기며 그 어떤 것에도 지배를 받지 않는 자유인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물질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까지도 원하지 않으며( 골3:5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마6: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절대군주나 지도자로 존경 받는 위치에서 벗어나 사람을 우상시 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으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돈은 물질에 불과 하며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을 내용상으로 분류하면 첫째 부분은 1장에서 7장까지로 사무엘의 출생과 엘리 가문의 몰락을 기록하고 있으며, 둘째 부분은 8장에서 31장까지로 왕정국가의 시작으로 사울왕의 통치와 다윗의 기름부음과 고난이 기록 되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사사로 있을 당시 경건한 신앙의 사람 한나가 하나님께 아들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의 기도는 응답을 받아 사무엘을 낳게 되는데 서원한 대로 평생토록 주를 섬기는 자로 살도록 하나님의 전에 바치게 됩니다. 사무엘은 어린 시절부터 성전에서 자랐는데 그때는 말씀이 희귀하고 하나님의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을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엘리 제사장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며 윤리적으로 타락한 자들로서 스스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엘리 가문에서 떠났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났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터로 메고 나갔으나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패하고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죽고 그 가문은 패망을 하고 선지자 사무엘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블레셋에 빼앗긴 법궤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심으로 다시 이스라엘 경내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사무엘이 늙으므로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의 사사를 삼았으나 그들이 이(利)를 따라 뇌물을 받고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에게도 열방과 같이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여 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왕을 세우게 되면 병역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가 부과 될 것이며 왕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라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이 사무엘의 말을 거절하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 사울을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라 하셨습니다. 사무엘은 먼저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운 후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모으고 제비를 뽑아 사울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시작되니 사무엘이 고별사에서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좇으면 좋으니라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열조를 치신 것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12:14-15,24)고 하나님이 참 왕이 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이 된 후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므로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권을 침해하였을 뿐 아니라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말았으며, 또한 자신을 위하여 갈멜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고 사무엘에게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서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라 하셨으니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곧 다윗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였으나 겁에 질린 이스라엘 군인 가운데 아무도 상대할 자가 나타나지 않자 다윗이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전쟁터에 나왔다가 이 참담한 광경을 목격하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물리치게 됩니다. 그 후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을 하였으나 사람들의 시선이 다윗에게로 향하자 다윗은 사울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고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다윗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보호하려고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여야 사울왕가가 든든히 서리라 생각하고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위기의식을 느낀 다윗은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놉으로 도망을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진설병을 먹은 것을 도엑이 사울에게 고하므로 제사장 팔십 오명이 죽는 가운데 아비아달이 다윗에게로 도망을 가게 됩니다. 다윗은 가드로 망명을 하였으나 그곳에서도 여의치 않아 미친체하여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을 하였고 또 황무지로 도망하던 중에 굴속에 숨어있는데 그 굴로 사울이 들어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해할 수없다 하여 살려 주게 됩니다. 다윗은 하길라산에서 밤중에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으로 들어가서 잠든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또 다시 살려주게 됩니다. 다시 블레셋으로 망명을 간 다윗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블레셋 장수로 출전하게 되었으나 장수들의 반대로 위기를 모면하게 되며 다윗의 근거지인 시글락이 아말렉 사람들에 의하여 불타는 아픔을 겪는 고난 중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어져가며 시편에 나오는 많은 시편이 이런 고난의 때에 기록되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변장하고 엔돌에 있는 신접한 여인에게 가서 묻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결국 사울은 길보아산 전투에서 세 아들과 함께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무엘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삼하7:8-16절
사무엘상과 사무엘하는 원래 한권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3세기 경 70인역에 사울과 다윗의 왕국 역사로 2구분하여 사무엘상. 하로 구분 한 것 같습니다. 사무엘상은 사무엘의 출생과 엘리 가문의 몰락, 그리고 사무엘의 다스림과 사울 왕의 등장과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사무엘하는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이 왕으로 올라 그의 치세 하에 이스라엘 왕국이 굳게 세워져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다윗 왕국과 그의 통치는 다른 세상나라의 통치와는 다른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하는 신정왕국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다윗 왕국과 그의 통치는 장차 도래할 영원한 메시야 왕국과 메시야의 통치를 예표하는 그림자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흠이 많은 자이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뜻을 이루시고자 다윗을 택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웠을 뿐 아니라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게 됩니다.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7:11-1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세운 언약입니다.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몸에서 날 자를 통하여 다윗의 집과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세우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 왕국은 다윗과 솔로몬의 사후에 나라가 남북 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남방 유다는 B.C.586년 예루살렘 함락으로 인하여 남북 왕국이 모두 멸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윗 왕조는 역사적으로 사백 년 이상이나 지속되었습니다.(B.C.1010년 -586년) 그러나 영원히 지속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집과 나라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언약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에서 다윗의 몸에서 날 자는 1차적으로 솔로몬과 그 자손들을 의미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계보를 통하여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으며 그 나라는 다윗의 언약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영원한 나라입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1:30-33) 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오순절 날 임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의 설교에서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29-36).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탄의 권세를 제어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으며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 그리고 우리는 그의 나라로 들어왔으며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앞으로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시라”(벧후1:10-11).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으로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으며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완성 될 것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계5:13-14)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이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이미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세우신 다윗 언약은 궁극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러 이루어졌으며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왕국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모든 왕들은 장차 이 땅에 오셔서 평화의 왕으로 통치하실 만왕의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요 예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 언약은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 나실 메시야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리라는 ‘메시야적 언약’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한하고 불완전한 다윗 왕국을 통하여 완전하고 영원한 메시야 왕국을 조명하고 예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세상 나라는 유한하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며, 세상 나라는 악이 있고 고난이 있고 눈물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며 눈물이 없는 평화의 나라가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나의 생각이나 의지나 주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고 왕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하를 대략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다윗왕의 흥왕기로 1장에서 10장까지이며 둘째부분은 다윗왕의 침체기로 11장에서 20장까지이며 셋째 부분은 결론 부분으로 21장에서 24장까지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난 후 유다나라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 때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 헤브론으로 올라가니 유다 지방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족속의 왕이 됩니다. 사울의 군장 아브넬은 다윗을 대적하여 지도력을 갖추지 못한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의 야욕을 채우게 됩니다.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 한 지파의 왕으로 7년 육 개월을 지내면서 인내하고 관용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스보셋의 군장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의 정권이 얼마남지 않음을 알고 이스보셋을 살해하고 다윗에게로 와서 아부하나 다윗은 이들을 처단하고 이스보셋의 시신을 헤브론에 장사지내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후 그의 생애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30세에 왕이 되었지만 또 다시 7년 6개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예루살렘성을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아 그곳의 이름을 다윗성(시온성)이라 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메어 올려 이제 나라가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가게 됩니다. 다윗은 왕이 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평안하자 궁궐을 짓고 그 곳에 살고 있지만 그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아직도 장막(천막)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건축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그 뜻을 나단 선지자에게 전하자 나단 선지자도 그 계획에 동의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나타나시어 다윗의 그와 같은 마음을 기쁘게 보시고 성전건축은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다윗과 언약을 세우며 놀라운 복을 약속 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은혜로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나라의 제도와 조직을 완료하고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회상하고 그의 유일한 유족인 므비보셋을 찾아 사울의 땅과 재산을 그에게 상속하게 하고 왕자의 대우로 왕의 상에서 왕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하는 은총을 베풀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앙의 사람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도 어두운 면과 불신앙적인 면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가 고난의 때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평안해지자 범죄하고 교만에 빠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 자신과 그의 가정에 어려운 일이 계속하여 일어났습니다. 다윗은 군사들이 다 전쟁터에 나가 전쟁 중인데 궁에 남아 한가하게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궁으로 불러들여 동침을 하게 되고 밧세바가 잉태를 하게 됩니다. 이 일을 은폐하기 위하여 전쟁 중에 있는 우리아를 불러들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결국 우리아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밧세바가 낳은 아이를 죽게 하시고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을 책망케 하시므로 다윗은 회개를 하였으며 밧세바와 사이에 솔로몬이 태어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여디다야 하시니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솔로몬의 출생으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다윗 자신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길에서 수모를 당하며 궁녀들은 수치를 당하고 자식들 사이에는 칼이 떠나지 않는 암울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평정이 되고 다윗이 예루살렘 궁으로 다시 돌아오자 세바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 반란도 평정하고 새롭게 조직을 정비하게 됩니다. 다윗왕 시대에 계속하여 삼년동안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매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였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여호수와가 가나안을 점령할 때 변장하고 찾아와 언약을 맺은 가나안 족속입니다. 사울 왕이 이 기브온 사람을 죽이므로 언약을 어긴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 그 원한을 호소하므로 삼년간 비가 내리지 않은 것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 비가 내렸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다윗의 감사 찬양이 나오며 다윗 왕국을 세우는데 공을 세운 장수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들은 단순히 다윗왕국을 위하여 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정국가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윗이 나라가 부강하여지고 국력이 튼튼해지자 자연히 하나님보다는 보이는 군사력을 더 의지하게 되었으며 자기 스스로 자만에 빠져 인구조사(군사력을 조사한 것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충성스러운 요압 장군이 만류하였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하게 됩니다. 다윗이 후에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행한 것을 알고 잘못을 뉘우치게 되며 하나님께서 제시하는 세 가지 재앙(삼년 기근, 석달 전쟁, 사흘 온역)중 사흘 온역을 택하게 됩니다.다윗은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사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 재앙이 멈첬습니다.
열왕기상을 어떻게 읽을것인가
왕상2:1-4절
사무엘 상 . 하는 사무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왕 통치 말년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다룬 책입니다.
사무엘 상 . 하에 이어 열왕기상 . 하는 다윗왕의 임종과 솔로몬왕의 즉위부터 시작하여 솔로몬의 사후 남 . 북 왕국의 분열과 북방 이스라엘의 멸망과 (주전722년) 남방 유다의 멸망(주전586년)까지의 약 400년간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원래 열왕기상 . 하는 한권의 책이었는데 후세에 구분된 것입니다. 열왕기상 . 하는 히브리인들의 성경 구분 방식에 의하면 여호수아 . 사사기 . 룻기 . 사무엘 상 . 하와 함께 전선지서에 속한 책입니다. 이것은 열왕기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는 ‘선지사적 관점’에서 기록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열왕기서에 나타난 이스라엘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할 때 그들의 정치적 치적이나 군사적 업적에 의하여 초점을 맞추어 기록한 것이라 아니라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관점으로 볼 때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였는가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시면서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신30:13-18).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생명을 얻고 복을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사사시대를 지나 왕정시대에 이스라엘의 열왕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는가 하는 기록이 곧 열왕기서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즉위로부터 남방유다가 멸망하기까지의 약 400년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열왕기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복을 받았느냐 불순종하여 저주를 받았느냐 하는 기사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흥망성쇠의 여부는 결코 탁월한 정치력이나, 부강한 경제력이나, 막강한 군사력이나, 외세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 여부에 달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다만 고대 시대에 있어서 왕은 그 나라의 전체를 대표하므로 왕국의 역사는 왕의 통치에 따라 좌우하게 되므로 열왕기서는 주로 열왕들의 역사로 구성되었습니다. 이처럼 열왕기서가 선민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신정사적 차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들의 활동이 크게 부각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와 엘리사 선지자와 그 외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선민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시게 됩니다. 선지자들이 선포하는 메시지는 한결같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의 여부로서 신명기의 말씀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열왕들을 판단하는 판단의 기준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아사가 그 조상 다윗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왕상15:11) 또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왕상16:30) 라는 표현으로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였는가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방 유다 왕들의 업적을 평가할 때에 유다 지파의 상징적 존재인 다윗왕의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과 말씀 순종함을 표준으로 하여 선과 악이 되었으며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왕상11:4절) 북방 이스라엘 왕들의 업적을 평가할 때는 북방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 1세의 죄악을 표준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숭배하고”(왕상16:30-3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열왕기서는 단순한 이스라엘의 민족사가 아니라 선민의 역사를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신정사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열왕들의 통치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에 따라 좌우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열왕기서는 하나님께서 삼하7:12-16절에서 다윗과 세운 언약을 어떻게 성실히 이행하셨는가를 자세히 보여주시며 왕들의 거듭되는 실패와 타락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세운 언약을 지키시며 마침내 그 후손 가운데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세상 나라는 지상에서 그 명성을 떨치며 강대국이 되었다가도 없어지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시고자 하시는 영원히 그 위(位)가 견고한 메시야 왕국을 대망케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열왕들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기에 하나님께서 세우시기도 하시며 폐하시기도 하시며 또한 그림자로 장차오실 우리의 참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 상 . 하는 그 내용상 3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 1기(주전 970년-930)는 다윗의 사후 솔로몬의 통치기로서 이시기는 통일 왕국시대로 이스라엘의 번영과 영광이 극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말년 즈음에 사치와 우상숭배로 인하여 백성들은 살기가 힘들었으며 왕국이 급속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제 2기(주전930-722)는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의 강경정책으로 인하여 통일 왕국 이스라엘이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로 분열되는 시기로부터 북방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여 포로로 잡혀가는 때까지입니다. 제 3기(주전722-586)는 남방 유다의 역사로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이 함락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때까지입니다.
이 가운데 열왕기상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부분은 1장에서 11장까지로 다윗왕의 죽음과 솔로몬의 왕위계승, 그리고 솔로몬의 통치와 그의 죽음까지로 이시기를 통일왕국시대라 합니다.
둘째 부분은 12장에서 22장까지로 솔로몬 사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의 강경정책으로 인하여 남북이 분열되어 북방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통치하는 분열 왕국시대로 남방 유다는 여호사밧왕의 죽음까지의 역사이며 북방 이스라엘은 아합왕의 죽음까지의 역사 기록입니다. 다윗 왕이 만년에 노쇠하게 되자 그의 아들 가운데 최 연장자인 아도니야가 군대장관 요압 장군과 대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를 하고 왕위 찬탈의 음모를 꾸미자 이 사실을 안 나단 선지자가 밧세바를 찾아가 다윗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솔로몬에게 양위를 할 것을 건의하게 합니다. 이에 다윗이 선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과 브나야를 불러 솔로몬을 나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내려가서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라고 명하자 대제사장 사독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도니야가 제단 뿔을 붙들므로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40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70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솔로몬은 반역 음모에 가담한 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하므로 아론의 자손 가운데( 나답.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이다말 계통의 엘리 가문의 제사장이 폐하여 지고 엘르아살 계통의 사독이 제사장이 되므로 하나님께서 엘리 가문에 하신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삼상2:27-36) 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 기브온 산당에 가서 일천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으므로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주시며 네 평생에 열왕 가운데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솔로몬은 조직을 정비하고 성전 건축을 위하여 두로왕 히람에게 청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 바다로 운반하고 온 이스라엘에 역군을 동원하여 돌을 다듬고 재목을 준비하여 출애굽한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지 사년 이월에 모리아 산에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칠년간 공사를 하여 제십 일년 팔월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성전 공사가 완성되자 언약궤를 성전으로 모시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눈이 주야로 보시옵소서 하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역대하 7:1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하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건축과 왕궁건축을 이십 년 만에 마치고 이웃나라들과 무역을 하여 부와 명성이 높아지자 스바 여왕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 그 얼굴을 보기 원하여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솔로몬은 부하게 되자 애굽에서 말들을 들여왔으며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나 되어 왕비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돌이켜 이방신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후비들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이방 신당을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노역과 세금으로 살기가 어려워지자 반역의 무리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노년층의 대신들이 감세정책을 펴고 온건하게 통치하기를 간청하였으나 젊은층의 대신들이 건의한 강경정책을 펴므로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를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여로보암은 세겜을 건축하고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세우고 또 산당을 세우고 레위 사람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제사장을 삼고 팔월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 절기와 비슷하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로서 통일왕국시대는 마감이 되고 남방유다와 북방 이스라엘로 나누어지는 분열 왕국시대가 되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이십 이년 간 통치하고 죽자 그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어 이년간 통치를 하다가 바아사가 반역을 이르켜 나답을 죽이고 왕이 되어 이십 사년간을 통치하고 죽자 그의 아들 엘라가 왕위에 올라 이년간 통치하다가 시므리가 반란을 이르켜 왕이 되었으나 칠일 만에 오므리가 군사를 이끌고 오자 시므리가 스스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죽으므로 오므리가 왕이 되어 십 이년간을 통치하고 죽으니 그의 아들 아합이 왕위에 올라 시돈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로 아내를 삼고 바알을 숭배하므로 이스라엘 나라에 삼년 육 개월 동안 가뭄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때 엘리야 선지자가 나타나 바알 선지자와 갈멜산에서 대결하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팔백 오십명을 기손 시냇가에서 죽이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을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하자 엘리야가 광야로 도망하여 낙심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떡과 물을 먹이시고 위로하심으로 새 힘을 얻고 호렙산으로 가서 사명을 받게 됩니다. 아합왕은 이십 이년간을 통치하면서 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하였으며 아람왕과의 전투에서 아람군사의 활에 맞아 전사하고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됩니다.
남방 유다는 르호보암이 십 팔년간 통치를 하고 죽자 그의 아들 아비얌(대하12:16 아비야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다)이 왕이 되어 삼년을 통치하가다 죽자 아사가 왕이 되어 사십일 년을 통치하다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위에 올라 이십 오년을 통치하다가 죽자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열왕기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왕하2:1-11
열왕기상 . 하는 원래 한권의 책이었습니다. 주전3세기경에 70인역에서 열왕기상 하로 분리하면서 다른 모든 역본들도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인 열왕들의 역사를 선지자적 관점에서 기록한 선지자적 역사서입니다. 즉 선지자들이 열왕들의 사적을 기록할 때 그들의 정치적 역량이나 군사적 뛰어남의 치적을 중심으로 하여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순종하였는가 하는 관점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저자는 예레미야라고 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열왕기상 . 하 전체를 통일 왕국시대와 분열왕국 시대, 그리고 남북 왕국의 멸망사로 분류하며 열왕기상의 중심내용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과 봉헌, 그리고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분열의 역사이며 열왕기하의 중심 내용은 성전의 파괴와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의 멸망의 역사입니다. 솔로몬 왕이 죽고 난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른 후 통일 이스라엘 왕국은 여로보암이 북방 이스라엘의 왕이 되므로 이스라엘 나라는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로 나뉘게 됩니다. 여로보암은 왕이 된 후 이십 사년간 나라를 다스리며 악을 행하다가 죽자 그의 아들 나답이 왕이 되어 이년간 나라를 다스리게 되는데 바아사가 반란을 이르켜 나답을 죽이고 왕이 되어 이십 사년간 통치를 하다가 죽고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어 이년간 통치하게 됩니다. 이때 시므리가 반란을 이르켜 왕이 되었으나 칠일 만에 오므리가 왕이 되어 오므리 왕가를 세우게 되는데 그가 곧 아합의 아버지입니다. 오므리가 십 이년을 통치하고 죽자 아합이 왕이 되는데 이 아합은 악한 왕으로 시돈 왕 엣 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들이면서 바알 우상을 섬기므로 온 나라가 바알을 섬기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아합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아하시야가 병이 들자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느냐 물으러하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이 없어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아하시야가 죽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아하시야가 노하여 오십 인을 두 번이나 엘리야에게 보냈으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사르자 세 번째 오십 부장은 겸비하여 생명을 구하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따라 아하시야에게 가서 그 죽음을 선고하게 됩니다. 아하시야가 죽자 그의 아들 요람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가 되자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 것을 명하였으나 엘리사는 끝까지 엘리야가 하늘로 부름을 받는 자리까지 따라갔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묻자 선생님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분배받을 때 장자는 두 배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갑절의 뜻은 두 배의 뜻이 아니라 엘리야의 장자로 그 후계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늘로 올라갈 때에 그의 겉옷이 내려오자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취하므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입게 되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여리고의 물 근원에 소금을 뿌림으로 좋은 물로 변하게 하는 이적을 행하였습니다.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에 젊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하자 엘리사가 이들을 저주하자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서 이들 중 사십 명을 찢어 죽였습니다. 이 사건은 깊이 생각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엘리사가 어린이들이 장난으로 조롱하는데 저주한 것이 아니라 당시 선지자를 업신여기는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 젊은 아이들로부터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 말은 엘리사의 승천을 비웃는 말로서 너도 없어져 버려라 하며 생명에 위협을 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저주를 한 것이라 봅니다. 아합이 죽은 후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자 여호람이 유다왕 여호사밧과 에돔왕에게 요청하여 함께 모압을 징벌하러 가는 도중 군사들이 먹을 물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요청하여 골짜기에서 물을 내는 이적이 일어납니다. 선지자의 생도 중에 한 사람이 신학 공부를 하다가 빚을 지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채권자가 죽은 자의 두 아들을 종으로 삼으려 하자 죽은 자의 아내가 엘리사에게 하소연하므로 적은 기름이 많은 빈병에 가득 채워진 이적이 일어나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두 아들과 생활을 하게 됩니다. 수넴에 사는 한 여인이 엘리사를 후대함으로 그에게 아들을 낳는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성장한 후 병으로 죽었을 때 엘리사가 기도하므로 다시 살리는 기적을 베풀게 됩니다. 기근의 때에 길갈에서 선지자의 생도들이 먹는 국물에 독이 든 채소로 인하여 먹지 못하게 되자 독을 제거하여 먹게 하였으며 엘리사가 보리떡 이십 개와 한 자루의 채소로 백 명의 사람이 먹는 이적을 베푸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람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나병 환자이었는데 엘리사의 소문을 듣고 엘리사에게 찾아오자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명하니 나아만이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몸을 잠그니 나병이 완치가 되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나아만이 엘리사에게로 돌아와서 예물을 드렸으나 엘리사가 받지 아니함으로 이스라엘 땅의 흙을 가지고 돌아가면서 이제부터는 다른 신에게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드리겠나이다. 약속하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예물을 드렸으나 받지 아니한 것을 본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마음에 탐심이 생겨 나아만에게 가서 거짓으로 우리 주인이 말씀하시기를 선지자의 생도 두 사람이 왔으니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을 달라 하니 나아만이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매 게하시가 그것을 자기 집에 감추고 엘리사에게 가매 엘리사가 책망하기를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을 때냐 하고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히 이르리라 고 말하자 게하시에게 나병이 발병하였습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나병환자가 된 사람이 세 사람이 있습니다. 미리암은 시기심 때문이며 (민12:1,10) 게하시는 탐욕 때문이며(왕하5:20-27) 웃시왕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대하26:16-21)
선지자의 생도들이 그들이 거할 숙소를 짓기 위하여 엘리사와 함께 요단강가에서 나무를 베다가 실수 하여 도끼가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때 엘리사 선지자가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니 도끼가 떠오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아람군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아람군의 계획을 엘리사가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전하여 아람군의 계책이 수포로 돌아가자 엘리사를 잡으려고 엘리사가 거하는 도단성을 아람 군대가 포위하였으나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사마리아로 돌려보냈으며 아람군대가 또 쳐들어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여 극심한 기근 가운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때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면 경제가 정상으로 회복 될 것이라 말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겠느냐 하며 아무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이 우리가 여기 있어도 굶어죽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 하여도 거기서도 죽을 것이니 아람군대에게 투항하자 죽이면 죽고 살려주면 살리라 하고 황혼 때에 아람군대의 진으로 가보니 아람군의 진에 식량은 그대로 두고 한 사람도 없이 철수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병환자 네 사람이 아람군대의 진영으로 갈 때 하나님께서 많은 병거 소리와 큰 군대가 몰려오는 소리로 들리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진에 도착한 나병환자들이 배불리 먹고 이 소식을 사마리아성 사람들에 알리므로 사마리아성의 경제가 정상화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아람왕이 될 것을 말하므로 하사엘이 벤하닷을 죽이고 아람 왕이 되었습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가 즉위를 하고 이스라엘 왕 요람이 병들어있는지라 문병을 갔습니다. 엘리사는 선지자의 생도 중 한 사람을 시켜서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인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아합의 집을 치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예후가 병거를 몰고 이스르엘로 가서 이스라엘 왕 요람을 죽이고 그의 시체를 나봇의 밭에 던지게 하고 유다왕 아하시야도 죽이고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시에게 이세벨을 들어 창밖으로 던지라 하여 그 시체를 개들이 먹게 하였습니다. 예후는 사마리아 성으로 가서 사마리아 성의 방백들에게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의 머리를 가져올 것을 명하매 사마리아 성에 있는 방백들이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예후에게 보냄으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던 아합 왕가는 철저하게 망하고 말았습니다. 예후는 레갑의 자손 여호나답과 손을 잡고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몰살하고 목상을 파괴하고 바알의 당을 불사르고 훼파하여 변소로 만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의 집에 행하였으니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예후가 이십 팔간을 통치하고 죽자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올라 십 칠년간 통치하다가 죽고 그의 아들 요아스가 왕이 되었습니다. 엘리사가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엘리사에게 문병을 가서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며 우니 엘리사가 요아스에게 활을 손에 잡으라 하고 손에 안수하고 창문을 열고 쏘라하였습니다. 그리고 화살을 취하여 땅을 향하여 치라 하자 세 번 치고 그치니 엘리사가 노하며 왕이 오륙 번을 쳐야 했을 것이라 하며 그리하였으면 아람을 완전히 진멸할 것이나 세 번만 쳤기에 아람을 세 번 이길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를 지금도 찾고 계시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엘리사가 죽어 장사하니 그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구한 대로 엘리야보다 더 많은 능력을 행하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도 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고난과 질병은 결코 저주가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엘리사는 죽어서도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후에라도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요아스가 십 륙년을 통치하고 죽으니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사십 일년간 통치를 하였는데 북방 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과 구별하기 위하여 여로보암 2세라 합니다. 여로보암 2세 때에 북방 이스라엘의 국력이 부강하였으나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므로 그의 아들 스가랴가 육개월간 통치하고 살룸이 스가랴를 죽이고 왕이 되므로 예후 왕가(예후, 여호아하스, 요아스, 여로보암 2세, 스라갸)는 89년만에 몰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신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 하신 약속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후 왕가가 몰락한 이후 북방 이스라엘은 계속 이어지는 반역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므로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하여 주전 722년에 망하고 맙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과 하볼 하숫가와 메대 지방에 분산 시키고 앗수르 사람들을 옮겨다가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어 살게 함으로 이들은 사마리아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결혼하여 살게 되며 사마리아인의 시조가 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인들은 앗수르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과 혼혈아들이며 혼합종교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를 애굽에서 구원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고 다른 신들은 경외하며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열왕기하 17장까지 북방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였고 18장부터는 남방의 히스기야왕 이후 시드기야왕 때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성을 함락하고 하나님의 성전과 왕궁과 귀인들의 집을 불태우고 시드기야왕의 아들들을 시드기야의 보는 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역사가 기록되었습니다. 남방 유다나라의 역사는 역대하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역대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대상 28:9절
역대상과 역대하는 원래 ‘역대기’ 라는 책으로 한권의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70인 역을 편집하면서 역대 상 . 하 두권으로 나누었습니다. 이후 모든 번역본들이 역대 상 . 하로 나누었습니다.
역대 상. 하의 저자는 누구인지는 정확히는 모르나 학사겸 제사장인 에스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열왕기서는 선지자적 입장에서 신명기적 역사적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순종하였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는 제사장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순종의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정치사라고 한다면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종교사라로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역대기를 기록할 당시(주전450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살펴보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고레스왕의 포로 귀환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1차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의 인도로 돌아왔으며, 2차로 에스라의 인도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비록 해방령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성전 제사와 율법이 확립되지 못하여 민족의 중심점과 종교의 중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본서의 저자인 에스라는 포로생활 중에 왜 하나님의 택한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으로 포로로 끌려와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를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그것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등지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성전을 더럽게 하였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에 에스라는 자신이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할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가르치기로 굳게 결심을 하고 또한 성전 제사 회복을 위하여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된 것입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에7:10). 그러나 고국에 도착하여 보니 3차로 총독 느헤미야가 귀환하여 성벽을 재건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의 상황은 하나님의 율법이 확립되지도 않았으며 성전 제사도 회복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이때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서 본서를 기록하면서 서두에 1장에서 9장까지 족보의 기록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주지시키고자하는 의도로 인류의 시조 아담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격인 야곱의 12지파의 족보를 기록하므로 하나님의 택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이 고대로부터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관계가 없는 민족들을 열거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인류의 보편적인 역사로부터 구별하여 선택된 언약 백성임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족보에서 다윗이 나왔으며 장차 메시야가 올 것을 예시하므로 메시야 대망 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는 제사장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종교사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과 제사를 중심으로 유다의 흥망사를 서술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열왕들의 영광을 부각시킨 것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다시금 하나님의 신정국가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가지 사건을 열왕기서와 역대기의 저자가 견해가 다른 것은 열왕기서의 저자는 선지자적 관점에서 역대기 서는 저자는 제사장적 관점에서 종교사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 왕에 대해서도 선지자적 관점에서 보는 것과 달리 밧세바의 사건은 생략되고 종교분야에서의 일을 더 많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에 안치하는 것과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과정과 레위인과 제사장 제도 등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또한 솔로몬에 대해서도 성전건축에 대하여 부각하면서도 열왕기서에서(왕상11:113) 지적한 우상 숭배 행위는 생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대기서는 아담에서부터 시작하여(대상1-9장) 고레스가 유대인 포로 귀환령을 내릴 때까지 (대하36:22-23)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대기는 그 내용상 3기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제 1기는 아담에서부터 다윗 왕 때까지이며, 2기는 다윗 왕 때부터 솔로몬 왕 때까지 통일 왕국시대이며, 3기는 솔로몬 사후 분열 왕국으로부터 고레스 귀환령을 내릴 때까지입니다.
그 가운데 역대상은 아담 때부터 다윗왕의 죽음까지의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역대상 1-9장까지는 아담에서부터 이스라엘 12지파의 계보가 기록 되었으며 10장에서 사울의 죽음을 기록하고 11장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헤브론으로 와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여부스 족이 점령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의 이름을 다윗성이라 명하는데 이 성이 곧 시온 성입니다. 다윗과 함께 이스라엘을 세운 용사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는 단순히 다윗 왕국을 세운 자들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세운 자들의 이름입니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고향 베들레헴을 내려다보며 옛 고향의 향수에 젖어 누가 나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게 할 수 없겠느냐고 하자 세 장수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가져왔습니다. 이와 같은 충성된 자들이 있었기에 다윗 왕국이 세워질 수 있었으며 이와 같은 충성된 자들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 되었습니다.
로마서 16장에도 바울이 로마서 마지막 부분에 열거한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수고한 일군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들 이름 앞에는 많이 수고한 누구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데 밑거름이 되기 위하여 많이 수고한 충성된 자가 되어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하겠습니다.
다윗왕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왕국을 견고히 한 후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는 일에 대해 여러 장수와 온회중과 의논을 하고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 운반하는 도중에 수레를 모는 소가 뛰놀므로 웃사가 궤를 붙들다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법궤는 엘리 제사장 때 블레셋에 빼앗긴 후 유다의 국경지대인 기럇여아림에 있은지 약10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올 때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인간의 생각과 열심이 앞서므로 인하여 실패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은 지 석 달이 지난 후 다윗은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올릴 철저한 준비를 한 가운데 다시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메어 올리게 됩니다.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족장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케 하고 내가 예비한 곳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니라”(15:12-13)는 말씀을 보아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두 번째 옮길 때는 얼마나 세심하게 준비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메어 올린 후 아삽과 그 형제를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머물러 항상 그 궤 앞에서 섬기게 하되 날마다 조석으로 번제단 위에 번제를 드리고 노래하는 자를 두어 여호와의 자비하심이 영원함을 인하여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궁전을 세우고 그 곳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여 성전 건축의 뜻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다윗을 위하여 집을 세우시겠다고 약속을 하시자 다윗은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쳐서 항복을 받고 가드와 그 주변성들을 점령하였으며 모압을 쳐서 승리하였으며 소바와 하맛과의 전쟁에서도 승리을 하여 동서 남북에 둘러있는 대적들을 다 파하므로 이스라엘은 근동지방에서 일류강국으로 위세를 떨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왕국이 규모에 있어서 강성해지자 다윗의 마음을 사단이 충동하여 이스라엘 전역에 인구조사를 실시하려 하였습니다. 이때 요압 장군이 충언을 하는데도 이를 물리치고 인구조사를 하게 되자 이일을 하나님께서 괘씸하게 여기시고 진노하심으로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깊이 뉘우치며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인구조사의 일로 인하여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이 죽어가자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악을 행한 자는 내니이다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하고 간구하자 하나님께서 사자를 명하사 오르난의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 하셨습니다. 이에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 마당을 값을 지불하고 사서 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하늘로부터 번제단위에 불이 내려와 응답하시므로 전염병이 그쳤습니다. 다윗이 솔로몬을 불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전을 건축하기를 부탁하면서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너는 전쟁에서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저는 평강의 사람이라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저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였으니 너는 삼가 성전을 잘 건축하라고 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위하여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목재와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 할 것이라 명하고 또한 이스라엘의 모든 방백들에게 솔로몬을 도우라 명하였습니다. 다윗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준비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사는가가 참 중요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레위사람들에게 직무를 부여하고 이십 사 반차의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게 하며 찬양대를 조직하여 이십 사 반차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며 성전을 수위하는 수위대도 이십 사 반차로 세워 하게 하고 군대조직과 행정 조직을 견고하게 정비 하였습니다. 다윗이 온 이스라엘 모든 방백과 천부장과 왕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를 예루살렘으로 소집하고 솔로몬을 도와 성전건축에 전력하고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또한 솔로몬에게 유언으로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그런즉 너는 삼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는 택하여 성소의 전을 건축하게 하셨으니 힘써 행할지니라”(28:9-10)고 당부하고 또 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온 회중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송축하기를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29:10-12). 하고 하나님의 찬양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아 다윗이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야 하겠습니다. 다윗은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사십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그 생을 마감하고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역대하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대하36:11-21절
바벨론 포로에서 2차로 돌아온 에스라는 조국 유다나라가 예루살렘 재건 사업은 대적들의 방해로 중단이 되어있으며 아직도 성전 예배가 회복이 되어있지 않는 암담한 현실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신정국가의 재건을 촉구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역대상에서는 선민의 계보를 밝히고 다윗을 통하여 신정국가를 확립 하는데 까지를 기록하였고 역대하에서는 솔로몬을 통한 신정국가의 구심점이 되는 성전건축의 완성과 유다 왕들의 통치사를 제사장적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서는 솔로몬의 치세(주전970-930)에서부터 시드기야의 치세(주전597-586)에 이르기까지 유다의 모든 왕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다윗과 세우신 언약(대상17:11-14)을 어떻게 신실하게 성취하여 가시는 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유다 왕들의 허물과 실수는 감추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려고 한 부분은 강조한 점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본서는 성전 건축에 관한 기사가 2-7장까지 많은 부분을 차지하며 성전제사가 중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전 건축과 성전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예표이기 때문이며 또한 성전 중심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서의 저자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귀환한 유대 백성들과 그리고 본토에 남아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은자 사상과 메시야 대망 사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나라는 바벨론이 침공하여 멸망을 당하고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 생활을 할 것과 포로기간을 70년으로 한정하신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은즉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嗤笑) 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 ..........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 그들의 행한 대로 보응하리라 하시니라” (렘25:7-14)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남은 자 사상을 예언 하였습니다. “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사10:20-22) 본서의 저자가 고레스 해방령까지 지난날의 역사를 언급한 것은 다시 한번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확립시켜 남은 자 사상을 고취시키고 하나님의 율법을 굳건하게 세우며 성전 제사가 회복되기를 열망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본서의 저자가 의도적으로 북방 이스라엘의 역사를 무시한 것을 북방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의 성전 제사를 거절하고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봅니다. 즉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서에서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히스기야, 요시야 왕의 치적에 대하여 많은 분량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도 그들이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을 중심한 정치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역대 상 . 하를 통합하는 중심주제는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자기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요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본서의 저자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발견하려 하였으며 성전은 언약 백성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영적인 연결 고리이며 성전을 통하여 소망을 갖게 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는 성전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예수님 안에서만 참 소망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본서를 두 부분으로 분류하면 첫째 부분은 1-9장까지로 솔로몬의 통치기 입니다.이 시기는 이스라엘 나라의 황금기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중앙 한 곳으로 한정되어 예배가 확립 되었으며,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의 구심점이 되어 국론을 한 곳으로 모으므로 분열을 방지하게 되어 평화가 정착 되었고 외적으로는 영토를 확장하고 무역을 통하여 국력이 튼튼한 시기 이였습니다. 둘째 부분은 10-36장까지로 열왕들의 통치기입니다. 이 시기는 솔로몬 사후 왕국이 분열되었으며 남방 유다 왕들 가운데에서 다윗 왕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라가 평안하고 안정된 시기가 있었던가 하면 북방 이스라엘 아합 왕과 같이 우상을 숭배하므로 나라가 외세의 침략을 당하여 곤경에 빠지게 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길이 참으셨으나 계속되는 우상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을 배반하자 바벨론을 들어 유다나라를 징치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라도 은혜를 베푸셔서 포로기간을 70년으로 한정하시고 때가 차매 바사왕 고레스를 들어 유다 백성들에게 귀환령을 내리게 하신 것으로 본서를 끝을 맺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역대기서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 다윗 왕은 성전 건축을 위하여 철저히 준비하고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 끝나고 솔로몬은 왕위에 올라 먼저 기브온 산당에 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솔로몬의 통치를 시작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왕기 상에서는 다윗의 만년에 왕자들 사이에 왕위 다툼을 자세히 기록하였지만 본서에서는 아도니아의 왕위 찬탈행위 같은 것은 생략하므로 다윗 왕국의 부정적인 측면을 서술하지 않으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도 열왕기서에서는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왕상3:11) 본서의 저자는 “내가 너로 치리하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11절)로 기록하므로 솔로몬이 구한 지혜는 하나님이 세우신 통치자로서 마땅히 구해야 하는 신적인 지혜를 구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왕위에 오른 후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다하고 왕위에 오른지 제 사년 이월 초이일에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성전을 건축하기를 시작 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이 곳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려 했던 산이요(창22:1) 또한 다윗이 인구조사를 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실 때 하나님께 번제를 드림으로 심판을 멈추게 했던 장소입니다 (대상21:28-22:1) 이것은 장차 참 성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어질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 지성소에 안치하고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며 기도를 하자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번제물과 제물들을 다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대하7:14-1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 내가 준 이 땅에서 뿌리를 뽑아내고 이 전이라 할지라도 버리리라 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 모든 나라가 조공을 바치며 부귀와 영화를 누리다가 죽어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됩니다. 본서는 열왕기서에 기록된 솔로몬의 만년에 타락상이 생략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죽고 아비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다가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됩니다. 아사는 왕위에 오르자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여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고 유다 모든 사람을 명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고 그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아사에게 평안을 주시어 나라가 여러 해 동안 전쟁이 없게 하시고 백성들이 평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사가 죽고 여호사밧이 왕위에 오르자 오직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자 하나님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시므로 그 나라가 견고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물을 드리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큰 실수를 하게 되는데 자기의 아들 여호람과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을 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훗날 다윗의 가문에 큰 위기가 오게 됩니다. 여호사밧 왕 때 모압과 암몬과 마온 자손들이 동맹을 맺고 유다나라를 침공하여 오자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나가면서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고 찬송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려온 암몬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들을 치게 하므로 전쟁에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온 유다 백성들이 골짜기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 하였으므로 그 후 그 골짜기이름을 브라가 골짜기( 찬송의 골짜기, 축복의 골짜기)라 불렀습니다. 여호사밧이 죽자 그 아들 여호람이 왕위에 올랐으나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고 아합의 집과 같이 행하였으니 이것은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위에 오르나 전사하자 아달랴가 아하시야의 죽음을 알고 다윗 가문의 씨를 진멸하려고 왕자들을 모두 죽이게 됩니다. 이때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사브앗이 어린 요아스를 구하여 내어 성전에서 6년 동안 숨겨 지내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리다가 제 7년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력을 얻어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위에 앉히게 됩니다. 요아스가 왕위에 올라 성전을 수리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나 여호야다가 죽자 은혜를 망각하고 제사장 사가랴를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죽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요아스는 아람군대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자 신복들이 침상에서 쳐죽이므로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었습니다. 아마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 하므로 그의 생애가 비참하게 끝을 맺으며 그의 아들 웃시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웃시야는 왕위에 있는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는 하나님이 형통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교만하여 제사장만이 분향할 수 있는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므로 하나님께서 치시므로 나병이 발하여 죽을 때까지 폐궁에 거하다고 죽고 요담과 아하스로 왕위가 이어지며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히스기야는 왕위에 오르자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키며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하나님께서 형통의 복을 주셨습니다. 이 일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하자 히스기야 왕이 선지자 이사야로 더불어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수르 군대를 멸하므로 산헤립이 도망을 가게 됩니다. 히스기야가 병이 들자 하나님께 기도하매 고쳐주셨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자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유다왕들중 가장 사악한 왕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 아몬도 사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요시야가 왕위에 오르자 성전을 수리하다 율법책을 발견하고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켰으며 종교 개혁을 시행하던 중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오는 것을 므깃도에서 저지하다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요시야 왕이 죽은 후 유다나라는 급격하게 국운이 기울어져 시드기야 왕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성이 함락을 당하고 성전은 불타고 많은 사람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에스라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스라1:1-4
에스라서는 10장까지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6장은 바벨론으로부터 1차 귀환과 성전 재건의 내용이 기록 되었습니다.
7장-10장은 바벨론으로부터 2차 귀환과 영적 부흥의 기록입니다.
본서는 에스라가 기록하였습니다. 1장-6장의 내용은 구전을 통하여 들은 것을 정리하여 기록하였을 것이고 7장-10장은 친히 자신이 행한 일을 정리하였다가 기록 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범죄하자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임하게 되어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으시고 징계의 기간을 70년으로 한정하시고 때가 차매 바벨론이 무너지고 바사 왕 고레스가 등장하여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유다 백성들에게 귀환령을 내렸습니다. 에스라는 본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알 게 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주권적으로 세상 나라의 역사를 주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지고 바사가 등장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므로 자기 백성을 정화(淨化)하기 위하여 바벨론으로 포로로 보내어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정해진 때가 되므로 바사 왕 고레스를 통하여 귀환령을 내리게 하시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고레스는 유다 백성은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귀환령과 함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을 내리며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은과 금과 기타 물건들을 도와주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귀환령이 내리자 유다 백성들 가운데 마음에 감동 받은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일어났습니다. 즉 귀환령이 내렸다고 하여 포로 생활을 하던 유다 백성들이 다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감동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돌아왔습니다. 즉 남은 자 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으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사10:20-22).고 예언하였습니다. 즉 남은 자만 돌아온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에 거주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은 약 2백만 명 이상일 것으로 봅니다. 그 가운데 마음에 감동을 받은 자만 돌아왔습니다. 바벨론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나라의 문화에 동화 되지 아니하고 고국 예루살렘을 기억하면서 여호와 유일신 사상을 버리지 아니하고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그 곳에서 태어난 자들도 있었을 것이며 그 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살던 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에스라는 본서를 통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에게 선민의 정체성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예수아와 스룹바벨의 인도로 바벨론에서 1차로 돌아온 유다 백성은 약 5만 명이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 모인 유다 백성들은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단을 만들고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돌아온 다음해 이월에 성전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건축자가 지대를 놓을 때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들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대적들이 교활한 방법을 동원하여 백성들의 성전건축의 의욕을 상실하게 하였으며 또한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성전 건축공사를 방해하도록 하였습니다. 바사 왕에게는 “이들이 지금 반역을 하기위해 성전을 건축하려하는데 성전이 건축되면 세금도 내지 않을 뿐 아니라 결국은 영토를 잃게 될 것입니다” 하고 고소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리오 왕 제 이년 성전건축 공사가 재개될 때까지 약 15년간 성전건축 공사가 중단이 되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성전건축 공사가 중단된 후 자기 일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보내어 격려하였습니다. 이에 힘을 입은 유다 백성들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다리오 왕에게 성전을 건축하게 하여 달라고 상소를 하자 다리오 왕이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를 메대도 악메다 궁에서 발견하여 다시금 성전건축공사를 시작하도록 조서가 내렸습니다. 성전건축공사를 다시 시작하여 4년 만인 다리오 왕 제 육년에 성전을 완성하여 백성들이 즐거이 하나님의 전 봉헌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월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스스로 정결하여 더러운 것을 다 버리고 칠 일 동안 무교절을 지켰습니다. 이로써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와서 성전건축을 시작한지 만 20년 만인 주전 516년에 제 2차 성전이 완공 되었습니다. 에스라 6장과 7장은 약 60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성전건축 완공이 주전 516년이고 에스라의 인도로 바벨론에서 2차로 귀환한 해가 주전 458년이기 때문입니다. 바사 왕 아닥사스다 왕(주전464년-423년)(이 아닥사스다 왕은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로서 아하수에로 왕(주전 486년-464년)은 에스더를 왕비로 삼았던 왕) 칠년에 학사겸 제사장인 에스라의 인도아래 2차로 귀환을 하게 됩니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십 육대손으로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는 기도의 사람이요 말씀의 사람이요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바벨론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 가운데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함께 가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에 에스라는 각 지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뜻이 있는 사람들을 아하와 강가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가는 길에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가 안전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에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고 말하였기에 보병과 마병으로 보호하여 달라고 간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1,450km의 멀고도 험한 여정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남자의 수만 1,773명인데 한 사람당 가족을 5인으로 계산하면 대략 어린 아이를 포함하여 9,000명이 됩니다. 에스라의 인도로 2차로 귀환한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나 하나님의 선하신 도우심을 입어 무사히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에스라는 슬픈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본토에 남아있던 자들이 이방족속과 더불어 이방결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백성의 지도자들도 이방인과 혼인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 소식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유다 민족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기에 이방민족과 결혼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지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34:15-16). 고 이방족속과의 혼인을 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는 궤사를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 버리시리라”(말2:11-12)고 이방인과 결혼한 것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성결을 욕되게 한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도 바벨론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그들과 혼인하지도 않아 그 민족에 흡수되지 않고 언약 백성의 순수성을 보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방족속과 결혼을 하고 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데 대하여 에스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에스라가 옷을 찢고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이 에스라에게로 모여 들었습니다. 에스라를 중심한 영적 각성운동은 이와 같이 말씀을 두려워한 자들과 에스라의 자각에서부터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은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심히 어두운 그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중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하겠습니다.
에스라는 먼저 하나님께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한 것은 우리 열조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아주 망하지 않고 남겨두신 것입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울타리를 주신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사오니 우리가 무슨 말을 하오리까 하고 울며 회개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로 명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저희 딸을 너희 아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유전하여 영원한 기업을 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連婚)하오리이까 그리하오면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스9:11-15). 하고울며 자복하며 기도하는 에스라에게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범하였으나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주의 법을 준행하며 살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며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고 에스라를 격려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울며 기도하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전 광장으로 삼일 내에 모이라 만일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유다 민족 공동체에서 쫓아낼 것이라 하였더니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삼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에 에스라가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 하니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기를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하고 맹세하여 그 아내들을 내어 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를 인하여 수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느헤미야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느1:1-11절
느헤미야서는 전 13장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면 1장-7장까지는 느헤미야의 귀환과 성벽 재건의 내용이 기록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8장-13장은 에스라의 영적 부흥과 느헤미야의 개혁운동이 기록되었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아마 느헤미야가 만년에 공직에서 물러난 후 지난 날의 행적을 회고하며 기록한 듯 합니다.
에스라의 인도로 2차 귀환이 있은 후 느헤미야는 포로지인 바사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으로 있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이란 왕을 독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왕이 마실 술을 미리 맛보는 역할로서 왕의 신뢰를 받는 직분으로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자입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고국의 소식이 궁금하여 고국의 형편을 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불에 탄 채로 있고 고국에 있는 자들이 큰 환난과 능욕을 당하고 있다는 너무나도 슬픈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소식을 들은 후 울면서 하나님께 먼저 나와 나의 아비집이 범죄하여 주님을 향하여 악을 행하였다고 자신의 죄와 민족의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 자기를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하여 보내게 하여 달라고 간구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한 지 4개월이 지났을 때 왕이 느헤미야에게 왜 얼굴에 수색(愁色)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고하기를 만일 왕이 허락하시면 나를 고국으로 보내 예루살렘의 성읍을 중건하게 하여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아닥사스다 왕이 허락하니 느헤미야가 왕에게 유다나라 주변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려 나를 통과하게 하고 성곽 재건에 필요한 재목을 조달하게 조서를 내려 달라 청하니 허락을 받고 왕이 군대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느헤미야와 함께 동행 하게 하여 유다 총독으로 부임을 하게 됩니다. 이때가 에스라가 바벨론 포로에서 2차 귀환한지 14년 후인 주전 444년으로 3차 귀한이 됩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성에 도착하여 아무도 모르게 밤에 예루살렘 성을 돌아보니 성벽은 다 무너졌고 성문은 불에 탔고 짐승이 지나갈 곳도 없었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귀인들을 모으고 예루살렘 성이 황무하고 성문이 무너졌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말자 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말하니 모두가 다 우리가 일어나서 힘을 합하여 성벽을 중건하자고 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모두가 일어나 구역을 분담하여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성벽공사를 하였습니다. 제사장, 레위인, 귀족, 백성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각기 거처하는 곳의 가까운 곳을 책임지고 성벽재건에 불평이나 불만이 없이 동참하였습니다. 대적 자들의 방해를 막기 위하여 절반은 일을 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를 들고 일하는 자들도 한 손으로 일을 하고 한 손에 병기를 잡고 일을 하였습니다. 성벽공사가 시작되자 산발랏과 도비야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라고 비웃고 조롱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꾀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서 요란케 하자 하고 선동하기도 하고, 사람을 보내어 느헤미야를 살해하려고 오노 평지에서 만나자고 유인하기도 하고, 사람에게 뇌물을 주어 거짓으로 예언을 하게하여 느헤미야를 유인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가 숨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큰 공사를 52일 만에 마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특히 대적 자들의 모함과 방해 속에서 이 거대한 공사를 최단 시일에 끝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힘을 합하고 마음이 하나가 되어하였기 때문이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성벽재건의 중요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예수아와 스룹바벨의 인도로 1차 귀환한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대적 자들의 방해로 15년간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독려로 성전은 완공 되었으나 성벽은 재건치 못하여 폐허가 된 상태로 이방인의 침입을 받으며 수모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70년의 포로기간이 지나면 고국으로 돌아가 열조에게 준 땅을 회복하여 다시는 이방인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며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이 예언의 야속대로 고레스 해방령을 통해 유다 백성들이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고 성전이 재건이 되었으나 아직 성벽이 재건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는 성벽이 재건되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벽재건은 중요한 것이며 성벽재건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인 것임을 느헤미야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 있어서 성벽의 유무와 튼튼함의 여부는 그 성의 주민들의 평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성에 성벽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울타리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벽 재건은 단순히 하나의 성을 쌓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성벽공사 당시 유다 백성들의 내부 사정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이었습니다. 식량난으로 가난한 자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으므로 토지를 저당 잡히고 양식을 얻었으며 부채를 갚기 위하여 자기들의 자녀들을 종으로 팔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귀족과 관리들과 부자들은 폭리를 취하여 더욱 부자가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동족인 형제를 종으로 삼지 말고 형제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 이자를 받지 말며 포도원과 집을 돌려주기로 하고 느헤미야 자신도 총독으로 재직하는 12년 동안의 봉급을 받지 않고 백성과 함께 고난을 나누기로 하는 사회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이 일에 온 유다 백성들이 동의하므로 느헤미야의 사회개혁운동은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에서 10장은 에스라를 중심으로 일어난 말씀운동에 대한 내용입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보다 약 14년
전에 바벨론에서 2차로 귀환한 후 에스라 10장의 신앙부흥운동 이후 약 10년간 그의 활동에 대하여 성경이 침묵하고 있다가 이곳에서 다시 그의 활동이 나타납니다. 아마 어느 시점에 바벨론으로 갔다고 다시 돌아왔지 않았는가 생각이 됩니다. 느헤미야도 잠시 바벨론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느13:6)
이스라엘 자손들이 칠월절기(나팔절 대 속죄일 초막절)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모였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 앞에서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새벽부터 정오까지 읽으매 모든 백성들이 귀를 기울이고 그 해석하는 바를 깨닫게 되자 모든 백성이 울며 슬퍼하였습니다. 이때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오늘은 성일이니 울지 말고 서로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여호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고 격려하였습니다. 율법책에 기록되기를 칠월 절기에 초막절을 지키라는 말씀을 보고 온 백성들이 나가서 나뭇가지를 취하여 수문 앞 광장에 초막을 치고 초막절을 지키니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국한 이후 여호수아 때로부터 시작하여 이렇게 성대하게 초막절을 지킬 때가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초막절을 성대하게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달 이십사일에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와 조상들의 죄와 허물을 자복하고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기로 인을 쳤습니다.
이방인과 결혼을 하지 않기로 서약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며 안식년을 지키며 모든 빚을 탕감하기로 하였습니다.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의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였습니다. 출30:11-16절에 보면 이십 세 이상인 자로 인구조사를 할 때 생명의 속전으로서 반 세겔씩 바쳤고 이 돈은 성막 기구를 제작하는 비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구조사가 있을 때에 드려졌으며 정기적인 성전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후대에 가서 매년 정기적으로 성전세 명목으로 반 세겔씩 내게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정기적인 성전세가 반 세겔이었습니다.(마17:24) 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는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위하여 공적 기금이 사용 되도록 허락되었지만(스6:8-10) 하나님의 성전의 관리를 위하여 이방인의 돈으로 쓰여 진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기에 백성들의 생활 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성전세를 삼분의 일 세겔씩 드리기로 자원하여
결의한 것입니다. 성전세로 드린 헌금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진설병과 상번제와 절기에 드리는 제물에 부족함이 없도록 쓰여지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진설병은 성소의 떡 상에 두 줄로 여섯 개씩 매 안식일 마다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여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였으며 물려낸 떡은 제사장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하였습니다.
상번제는 항상 드리는 소제와 번제로 매일 아침과 저녁에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만든 떡과 흠 없는 어린 수양이 그 제물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제비를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기한에 나무를 하나님의 전에 드려서 하나님의 제단에 쓰이는 나무가 부족함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 규정은 하나님의 제단에 사용되는 많은 양의 나무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포로 후기에 삼림이 황폐하여진 이유로 제단에 쓰는 나무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상번제를 드리기 위한 제단의 불은 항상 피워져 있어야 했기에 나무의 양이 엄청나게 많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단에 불이 항상 타오르게 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마음이 그곳을 향하게 하시고 헌신과 충성을 뜨겁게 타오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역사가에 의하면 유다 백성들이 나무를 성전에 드리는 날은 축제일처럼 여겼다고 합니다.
토지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와 첫 태생과 생축의 처음 난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이토록 토지의 맏물과 첫 열매뿐 아니라 모든 초태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만물의 창조주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하심이요 초태생을 바치는 것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을 때 애굽의 초태생은 죽임을 당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초태생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초태생은 하나님께 구별되이 바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장자는 속전을 허락하셨으나 짐승의 초태생은 대속이 안 되었고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물산의 십일조와 포도주와 기름을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며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고 인을 쳤습니다. 느10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할 것을 서약하고 인친 자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이와 같이 인을 치는 것은 과거의 잘못 살았던 생활에서 이제는 새로운 각오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겠다는 행위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파기된 모세의 언약을 다시금 갱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언약의 당사자인 백성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불변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실천의 다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 각성 운동이 일어나 언약의 갱신이 있은 후 예루살렘성의 안전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안으로 백성들을 이주시켜야 했습니다. 성벽은 완성되었지만 그 성벽을 수비할 사람이 없다면 그 성벽의 존재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비를 뽑아 십분 일은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게 하고 십분 구는 성밖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12장은 성벽 낙성식에 관한 기사이며 13장은 잠시 느헤미야가 페르시아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영적 각성운동을 일으키는 내용이 기록 되었습니다.
에스더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4:13-17절
에스더서를 공부하면서 먼저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북방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전 722년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하여 메대의 여러 고을로 잡혀갔습니다.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왕하17:6). 그런데 앗수르가 바벨론에게 망함으로 이 고을들이 바벨론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일부 유대인들을 수산 동편의 땅으로 강제 이주 시켰습니다. 남방 유다백성들은 주전 606년, 597년. 586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그 후 바벨론이 멸망하고 (주전539년) 바사제국이 근동 전역을 지배하게 되자 이곳으로 이주하여온 유다 백성들은 바사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바사왕 고레스가 유다 백성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귀환령을 내려 1차로 약 5만 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백성들은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에스더의 내용은 주전485년-464년까지 바사 제국을 통치하던 아하수에로 왕 때 일어난 일들의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본서의 내용은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본서에는 하나님이란 단어는 없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역사의 배후에서 언제 어디서나 선민 유다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다스리시고 계심을 알게 하려고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본서는 이방 땅에서 살고 있는 많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하므로 소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게 하기 위함으로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부림절에 대한 역사적 기원과 그 절기의 의미를 깨닫게 하려고 기록하였습니다.
유대 민족에게 부림절은 제2의 유월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림절을 통하여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으며 침체된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더욱 촉진시키고자 하는 뜻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방의 대적들이 아무리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며 함정과 올무를 놓을지라도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자기들이 놓은 그 함정과 올무에 빠지고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고난과 역경에서 건져주신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서는 우리 성도들이 어떤 역경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능히 이길 수 있다는 소망을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는 학자들 간에 모르드개 , 에스라 , 수산성에 살았던 어떤 유대인, 등 각자 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주전485년부터 465년까지 20년간 페르시아 제국을 통치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다스리던 영토는 인도(오늘날 파키스탄)에서 구스(에디오피아)까지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있는지 3년에 수산 궁에서 ( 페르시아의 수도는 수산 궁, 메대 궁, 바벨론 궁, 세 곳에 왕궁이 있었는데 수산 궁은 봄과 가을로, 겨울에는 바벨론 궁에서, 여름은 악메다 궁에서 통치하였다고 함)180일 동안의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 잔치는 그리스 원정을 앞두고 장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연회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80일 동안의 잔치를 끝낸 왕은 다시 칠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 잔치는 수산성안에 있는 평민들까지 초대하여 왕이 나라의 부와 위엄을 나타내려고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잔치 마지막 날 왕이 취흥이 돌자 내시를 명하여 왕후 와스디가 면류관을 쓰고 나오게 하여 왕후의 미모를 보이게 하려고 하였으나 왕후가 거절하자 화가 치민 왕은 왕후 와스디를 폐위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페르시아 풍습에 귀족의 부인들은 술좌석에 나타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왕은 술 취한 중에 이런 풍습을 망각하고 왕후를 불러 그 미모를 자랑하려는 허황된 마음으로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하여 대신들이 왕이 명하여 왕후를 청하여도 왕후가 오지 아니하였다는 왕후의 행위의 소문이 모든 부녀들에게 전파되면 저들이 그 남편을 멸시할 것인즉 왕께서 왕후를 폐하게 되면 전국에 있는 모든 부녀들이 귀천을 무론하고 그 남편을 존경하리이다 하고 왕에게 건의하니 왕이 이 말을 받아들여 왕후 와스디를 폐위하게 됩니다.
왕후 와스디가 페위가 된 후 새 왕비를 간택하는 일이 있게 되자 모르드개의 양녀 에스더가 뽑히게 되었습니다. 모르드개는 느부갓네살 왕 때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온 베냐민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에스더는 일찍이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모르드개가 딸처럼 양육하였던 것 같습니다.
에스더는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고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모르드개가 고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율법으로 금하고 있는 이방인과 결혼을 시키려고 하였는가 하는 문제와 민족을 말하지 말라고 숨기려 하였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가서도 그곳에서도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지키며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였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굳이 이방인 왕의 왕후로 앉히려했던 것은 자신의 어떤 정치적 야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당시에 반 유대 세력이 페르시아 제국 내에 존재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앞으로 닥쳐올 위기를 대비하기 위하여 한 것이라 생각 됩니다. 4장13-14절이 그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그러나 이 모든 과정 속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우리는 믿어야 하겠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민족과 종족을 고하지 아니한 것은 당시에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자가 많았던 것을 알았기에 왕을 만나기도 전에 중간에서 차단될 것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라 생각 됩니다. 에스더는 전국에서 뽑힌 많은 처녀들 가운데 왕이 에스더를 사랑하므로 왕의 은총을 입어 왕후가 되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를 왕후로 맞이한 후 크게 잔치를 베풀고 전국 각 도에 세금을 감면하였습니다.
그 후 아하수에로 왕은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높여 모든 대신위에 두었습니다. 하만은 그 성품이 교만하고 안하무인(眼下無人)이라 거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대궐문에 있는 모든 신하들이 하만에게 아마 신적인 경배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신적인 경배를 거절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유다인인 것을 당당히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하만은 분노가 끓어올랐습니다. 자신의 조상은 아말렉이요 모르드개는 베냐민 지파이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인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말렉 멸하기를 싫어하고 아각 왕을 사로잡아 옴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만이 곧 그 아각의 후손인 것입니다. 이제 아각의 후손인 하만이 모르드개 뿐 아니라 온 유다인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하만은 유다 민족을 멸하기로 작정하고 왕에게 고하기를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도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민보다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저희를 진멸하소서 내가 은 일만 달란트를 왕의 일을 맡은 자의 손에 부쳐 왕의 부고(府庫)에 드리리이다 하니 왕이 반지를 빼어 아각 자손 하만에게 주며 너는 너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만이 유다 민족을 멸절시키기 위한 계획이 왕의 허락을 받아 전국에 조서가 내림으로 온 유다 민족은 큰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온 유다 민족은 금식을 하며 모르드개는 이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렸습니다. 그리고 모든 유다인이 재난을 당할 때 너만 홀로 이 재난을 면하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네가 만일 잠잠하면 유다 민족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나 너와 너희 아비집은 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자신의 결심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수산에 거하는 모든 유다인이 나를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금식하며 기도한 후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였습니다. 당시 바사 왕국에는 왕의 허락이나 부름 없이 왕에게 나아가면 왕을 살해하려는 의도로 접근 하는 것으로 알고 죽음을 면하지 못하지만 왕의 손에 들고 있는 금 홀을 내어밀면 죽지 않는 왕궁의 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에스더가 금식하고 기도한 후 제 삼일에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에게 나아갔더니 왕이 보기에 심히 사랑스러워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이 홀을 들었습니다. 에스더가 홀끝을 만지니 왕이 에스더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자 왕을 위한 잔치에 하만과 함께 초대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왕의 부름도 없이 왕에게 나아갔지만 왕의 마음에 에스더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왕이 금 홀을 내어 밀어 살아남게 될 뿐 아니라 소원까지 말하라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않아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읽히게 하였습니다. 그 일기 가운데 문 지키는 두 내시가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 하려는 계획을 모르드개가 고발하여 왕이 죽음을 면하게 한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왕이 이 일로 인하여 모르드개에게 어떤 상급도 내리지 않았음을 알고 모르드개에게 존귀와 존영을 베푸는 상을 내렸습니다. 모르드개가 왕의 암살 사건을 고하였을 당시에는 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때에 보상하시는 것을 봅니다.
왕과 하만이 에스더가 초대한 잔치에 참석하여 술을 마실 때에 왕이 에스더에게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나라의 절반이라 할지라도 시행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에스더가 대답하기를 “왕이여 내가 만일 왕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내 소청대로 내 생명을 내게 주시고 내 민족을 내게 주소서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함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하고 간곡하게 고하였습니다. 이때 왕이 에스더에게 누가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냐 고 묻자 에스더가 “대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하니 왕이 노하여 모르드개를 달고자 하여 하만의 집에 세워둔 그 나무에 하만을 달게 하였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자기 집에 세워둔 나무에 자기가 달려 죽게 되었습니다. 에스더가 비로소 왕에게 자기와 모르드개와의 관계를 말하니 왕이 모르드개를 불러 하만에게서 빼앗은 반지를 모르드개에게 주었습니다. 이때 에스더가 왕의 발 앞에 엎드려 내가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고 또 왕이 나를 기쁘게 보실진대 조서를 내리시사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 왕의 각 도에 있는 유다인을 멸하려고 꾀하고 쓴 조서를 취소하소서 내가 어찌 내 민족의 화 당함을 참아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참아 보리이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왕의 반지로 인친 페르시아의 법은 변개할 수 없었지만 에스더의 간청에 왕은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하기로 된 그날에 유대인들이 모여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새로운 조서를 각 도에 공포하였습니다.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저희로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도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저희를 치려 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아하수에로 왕의 각 도에서 아달월 곧 십이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하게 하였고 이 조서 초본을 각 도에 전하고 각 민족에게 반포하고 유다인으로 예비하였다가 그 날에 대적에게 원수를 갚게 한지라 왕의 명이 심히 급하매 역졸이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고 빨리 나가고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니라”(8:11-14). 이 조서는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고자 음모를 꾀하고 내린 조서를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유다인을 음해하고 죽이려는 악한 세력을 물리치는 새로운 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만을 대신하여 모르드개가 관직에 등용이 되므로 온 수산성에 있는 유다인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니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되었습니다. 유다인의 대적들은 유다인을 제거하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죽게 되었으니 두려워하며 각도의 모든 관원과 대신들과 방백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이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여 유다인을 돕게 됩니다. 유다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 걸쳐서 성읍마다 대적들을 죽이되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 하였습니다.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규례를 세우고 매년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이 날은 유다인이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자를 구제하였습니다. 이 절기가 곧 부림절입니다. 이 후 유대인들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과 함께 부림절을 중요하게 지켰습니다.
욥기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욥23:10-12절
욥기의 저자는 욥, 엘리후, 모세, 솔로몬, 에스라, 등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르며 욥기 저자가 누구인지를 증명할 만한 분명한 자료가 발견 되지 않았기에 확실치 않습니다.
욥이 살았던 연대는 아마 아브라함이 살았던 족장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욥의 생존 기간이 200년으로 추정되는데(욥이 고난 후 140년을 살았음 42:16)이는 족장 시대의 수명과 비슷하며, 욥의 부(富)의 정도가 가축의 수로 제시 되며,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전능자’로 31회나 사용되며( 족장시대에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전능자’이었음) 출애굽의 사건이나 율법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욥이라는 한 인물을 통하여 의롭고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고난을 당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죄로 인한 징벌로서가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알게 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며 선하신 분이시기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때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언제나 신뢰하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기 위함으로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일생동안 당하는 일에 대하여 인간의 생각이나 변론이나 주장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본서의 내용의 흐름을 크게 세 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욥이 곤경에 처함 1장-2장. 욥과 세 친구와의 변론 3장-37장. 욥의 회복 38장-42장
그러나 욥의 생애를 통하여 본서를 이해하는 것이 더 유익이 되므로 네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고난 당하기전의 욥. 둘째, 고난당하는 욥. 셋째 고난에 대한 세 친구들의 견해. 넷째 욥의 회복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의 욥은 우스 땅에서 거주하고 있는 자로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큰 부자이었으며 다복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며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아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이었습니다.
또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전하고 정직한 인격의 소유자로 하나님께 인정함을 받은 자였습니다.
욥은 자녀들이 혹시나 하나님과 멀리하는 삶을 살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는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욥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만한 인격적인 결함이나 결점이 없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돈이 있으면 교만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욥은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의 존경 받는 자로서 성문에 나가면 사람들이 그 앞에서 다 일어서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을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않고 선한 사업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고아와 과부, 사회에서 소외된 자, 신체장애자, 가난한 자, 억울한 자의 보호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즉 그가 가진 재물로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욥은 재물과 땅위에 것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욥은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알고 자신은 물질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선한 사업에 물질을 사용하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욥에게 재난이 닥쳤습니다. 갑자기 하루아침에 그 많은 재산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또한 이유도 없이 그 많은 재산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욥은 아마 허탈감에 빠져있을 것입니다. 욥이 재산을 잃어버린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또 자녀들을 잃었습니다.
모든 자녀들이 맏형의 집에서 음식을 먹는데 돌풍에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한 자녀도 아닌 모든 자녀들을 한순간에 잃고 말았으니 욥은 깊은 좌절과 비통에 잠겼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욥의 가정에 크나큰 비극이 찾아온 것입니다. 욥은 건강을 잃었습니다.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욥의 고난은 장기간의 고난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 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7:3-6)
이 말씀을 보아 욥의 고난은 장기간 고난으로 인하여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곤고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단순한 고난이 아니라 욥이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가를 시험하는 시험기간인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탄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1:6-12)
이상의 말씀을 보아 욥의 고난은 욥이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하는가 하는 시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당하고 있는 욥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으므로 답답하다는 것입니다.
욥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견디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을 당할 때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재산을 잃고 자녀들을 잃고 건강을 잃고 고통 중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1:21-22)
욥은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욥의 아내가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겠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자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2:9-10)
욥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은 자기가 가는 길을 알고 계심을 믿고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말씀에서 치우치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23:10-12) 이 말씀에서 우리는 욥의 고난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고난에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연단하신 후에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확신을 가졌기에 욥은 고난 중에도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고난에 대한 욥의 친구들의 태도를 살펴보겠습니다.
욥이 고난 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왔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만 사람 소발입니다. 그들이 욥을 찾았을 때 욥의 형편이 곤고함이 심함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일주일을 곁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엘리바스가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4:3-9)
엘리바스는 욥이 당하는 고난을 죄 값이라는 것입니다.
욥이 죄가 없다면 이런 고난을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죄의 결과인 만큼 욥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 빌닷도 고난을 죄 값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8:3-4,20)
욥의 친구 소발도 고난을 죄 값으로 보았습니다.
소발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심문하시며 악한 일을 상관치 않으시는 듯 하나 다 보신 다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 가운데 가장 나이 젊은 친구인 엘리후는 욥이 당한 고난을 보고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 전능자는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사 각각 그 행위대로 얻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당하는 고난도 그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핀대로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하는 고난을 죄 값으로 받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고난은 하나님께 속한 고난인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만 아시지 명확한 답은 보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우리 자신을 뒤돌아보는 기회로 삼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겠으며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숨은 뜻이 계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그의 신앙이 살아 계신 구속자, 그 분이 이 땅에 오실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는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19:25-26)
욥은 고난을 통하여 그의 신앙이 귀로 듣는 신앙에서 눈으로 보는 신앙으로 성숙하였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보나이다”(42:5)
욥은 고난을 통과한 후 이전보다 더욱 큰 은혜와 복을 받았습니다.
시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시편 1:1-6절
시편은 전 150장이며 다섯 권의 책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시편의 제목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찬양의 책’ 70인 역에서는 ‘현악기 반주에 따라 부르는 성스러운 노래’라고 하였으며 한글 성경은 ‘시들의 책’ 이란 뜻으로 ‘시편’이라 합니다.
본서에 기록된 150편의 시들은 모세시대(주전1450년)부터 포로 후 에스라 귀환 시까지(주전450년)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저자들에 의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이 시편을 저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만을 신뢰하고 의지하였으며 탁월한 문학적 소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150편 가운데 다윗이 75편, 솔로몬이 3편, 고라자손이 11편, 아삽이 12편, 헤만이 1편, 예단이 1편 모세가 1편, 나머지 46편은 익명으로 되어있습니다. 이 가운데 고라자손과 아삽의 시는 그들이 저자인지 아니면 수집한 자 인자는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전 5권으로 구성된 본서의 수집 시기는 1권은 다윗의 사후 솔로몬에 의하여, 2권은 고라 자손에 의하여,
3권은 히스기야 시대에 아삽에 의하여 그리고 4,5권은 에스라 느헤미야에 의하여 수집되어 완성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각권의 마지막 부분은 송영(頌榮)으로 끝이 납니다. 송영이란 예배의 시작과 마지막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사람의 제일 되는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함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각권의 구조와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권은 1편ㅡ41편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것으로 창세기의 주제와 비슷합니다.
즉 인간의 복과 타락 과 그리고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피조물로서 만물의 으뜸으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했는데 교만하여 하나님과 대적하고 부인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인간은 구원을 받고 복된 자리에 이르게 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권은 42편ㅡ 72편으로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것으로 출애굽기의 주제와 비슷합니다.
즉 하나님과 구원 받은 택한 백성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왕이 되시고 다스리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3권은 73편ㅡ89편으로 하나님의 성소를 중심으로 하는 레위기의 주제와 비슷합니다.
죄 지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성소에서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하나님의 권면이 성소와 관련하여 거의 매 편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며 성소가 황폐한 상태에서 다시 재건되는 것으로 마치는데 이것은 시온에 대한 소망과 찬양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4권은 90편ㅡ106편으로 광야 생활을 다루고 있는 민수기의 주제와 비슷합니다.
민수기는 ‘광야에서’입니다. 광야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행하여 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고난과 슬픔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90편에서 인생은 땅에서 나서 영원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인생인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슬픔의 땅에서도 하늘의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올려 드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살고 있는 성도들의 거처가 되시며 그늘이 되시며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5권은 107편ㅡ 150편까지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다루고 있는 신명기와 비슷합니다.
신명기는 광야 40년이 끝나가는 무렵 모세가 약속의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광야세대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입니다.
시편 5권에서는 그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은 ‘말씀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120편ㅡ134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사모하여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것은 언약 백성들은 그들의 삶속에서나 그리고 성전에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찬송하였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하고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시편의 마지막 150편은 송영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에서 우리는 찬양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찬양의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즉 찬양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며, 찬양의 장소는 성소와 궁창이며,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능하심과 광대하심이며, 찬양의 방법은 모든 악기와 춤추어 찬양하여야 하며, 찬양하는 자는 호흡이 있는 자입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사43:21)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오 우리를 영원한 형벌과 저주에서 구원하신 구속주이시기에 우리의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구원받은 성도가 그 은혜에 보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입술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찬양이 어떤 것인 가를 바로 깨달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중에서나 번영의 때나 고난의 때나 어떤 경우에도 아무런 조건이 없이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며 참된 찬양을 드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시편은 찬양 시 외에도 감사의 기도, 간구의 시, 비탄의 시, 교훈의 시, 예언, 참회의 시 등 여러 요소들이 포함 되어 있어 특정한 한 단어로 제목을 설정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것은 영감을 받은 저자들의 신앙체험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통로라 할 수 있는 기도의 모본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기도는 때로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한탄의 형태로 표현되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언약에 기반을 둔 간구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주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란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은 시간적의 무한하시며 공간적으로 무한하심(하나님의 편재(遍在)성)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초월자로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란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서 약속에 있어서 영원불변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자와 거룩하신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의로우심과 피조물과 구별된 거룩하신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오실 메시야에 대하여 수많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의 성육신(40:6-8), 다윗의 후손으로 오심(89:3-4), 수난 받으심(22:1-31), 부활하심(16:10), 승천하시고 영원한 제사장 되심(110:1-7), 영존하심(102:25-28) 영원한 보좌(45:6-7) 통치하심(72:8-17)등이 있습니다.
신약에서 시편을 약75회 인용하였으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24:44)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시편 1편은 전체의 서언적인 시로 그리고 150편은 전체의 끝의 송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편에 악인을 저주하는 저주의 시가 있는데( 7.35,58,59,79,137,140) 이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조심하여야 합니다. 이 저주의 시는 단순히 개인의 파멸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에 초첨을 맞추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이 땅에서 악인과 불의를 제하시고 하나님의 의가 들어나는 공의가 시행되게 하옵소서 하는 기원이 담긴 시입니다.
그리고 시편에서 옛 언약 아래 있던 성도들이 하나님을 부를 때 ‘여호와’여 하며 하나님을 불렀는데 새 언약 아래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 하나님’ 또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옛 언약아래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창조주의 개념으로 불렀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6:9)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요20:17)
시편 가운데 1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의 삶과 그가 받을 복에 대하여, 또한 악인이 받을 화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8편은 다윗이 사울의 손에서 구원함을 받은 후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신뢰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입니다.
19편은 자연계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을 노래하며 죄에서 지켜 주시기를 간구하는 시입니다.
22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핍박을 받고 있을 때의 고난의 시로서 고난 받으실 메시야에 대한 예표적인 시라 하겠습니다.
23편은 성경 가운데 성도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로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를 그리고 있습니다.
32편은 다윗이 범죄한 후에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죄를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은 자의 행복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시편에는 7편의 회개의 시가 있습니다.(6,32,38,51,102,130,143)
37편은 악인은 망하고 의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을 것이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1편은 다윗이 범죄한 후 회개하는 시 가운데 대표적인 시입니다. 그는 통회하는 심령으로 사죄의 은총과 성결의 회복과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여 주기를 기도하였습니다.
73편은 악인의 번영을 보고 회의에 빠진 시인이 성소에 들어가서 악인의 종말을 본 후 오직 하나님만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84편은 시인이 성전을 사모하며 그리워하는 시로서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가 받을 세 가지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107편은 바벨론 포로에서 자유를 주시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라는 시입니다.
119편은 176절로서 시편 중 가장 긴 시이며 또 성경 중 가장 긴 장입니다.
본 119편은 말씀을 지키는 자가 받은 복과 고난을 당할 때 주는 말씀의 위안과 나그네 인생길에 노래가 되며 어두운 인생길에 빛이요 등불이 되는 말씀을 어떻게 묵상하고 사모하고 지킬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20-134편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가 갈 때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며 성전에 나아갔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46-149편을 할렐루야로 시작하는 시로서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50편을 시편의 마지막 송영입니다.
잠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잠언1:1-6절
잠언은 히브리 원전의 첫 구절인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 이라” 는 말씀 가운데 ‘솔로몬의 잠언’ 이라는 말에서 유래 하였습니다. 잠언이란 ‘속담’ ‘격언’ 뜻을 가지고 있으나 성경의 잠언은 인생의 경험을 압축하여 표현된 말이 아니라 선지자적 예언의 말씀으로 진리의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잠언의 내용 중 몇 편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솔로몬이 지은 것입니다. 그것은 1:1, 10:1, 25:1 등과 같이 새롭게 시작되는 주요 부분의 세 곳에서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로부터 지혜를 받은 왕으로서 잠언 3000개와 노래 1005편을 기록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왕상4:32)
기록 및 수집 연대는 솔로몬 재위기간 중 대부분이 쓰여졌으며 에스라 당시 편집이 완료 된 것으로 봅니다.
본서의 기록 목적은 1:2-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1.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2.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5.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하여 기록하였습니다.
잠언은 일반적인 지식이나 지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도덕이나 윤리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독자들로 하여금 인생을 살아가는데 참된 삶의 지혜를 깨달아 하나님께서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이를 실천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지혜의 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언의 말씀을 항상 읽고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본서의 내용을 구분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을 하면
첫째 부분인 1장-9장까지는 젊은이들을 위한 권고입니다.
둘째 부분인 10장-22장까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권고입니다.
셋째 부분인 23장-31장은 왕과 통치자를 위한 권고입니다.
그러나 잠언의 말씀이 어떤 특정인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말씀으로 알고 늘 가까이 하여야 하겠습니다.
잠언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9:10.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 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10:2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14:2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19:23.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23:17.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31:30.
잠언에서 우리의 계획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19:21.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20:24.
잠언에서 말한 의인과 악인의 대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4:18-19.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10:11.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받고 악인이 와서 그를 대신 하느니라. 11:8.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12:12
의인의 생각은 공직(公直)하여도 악인의 도모(圖謀)는 궤휼(詭譎)이니라. 12:5.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데 이르느니라. 13:5.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13:9.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14:32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15:3.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15:28.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18:10.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24:16.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28:1.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29:2.
잠언에서 말한 미련한 자와 지혜로운 자의 대조를 살펴보겠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10:1.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령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패망하리라. 10:8.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받느니라. 12:15.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12:16.
슬기로운 자는 지식을 감추어 두어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느니라. 12:23.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스스로 보전하느니라. 14:3.
잠언에서 말한 교만과 겸손의 대조를 살펴보겠습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11:2.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6:18.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16:19.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18:12.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29:23.
잠언에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하라고 하였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4:23.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리라. 25:28.
잠언을 통하여 우리가 혀를 어떻게 사용하여 하여야 하는 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혀는 가치가 적으니라. 10:20.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15:2.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15:4.
마음이 사특한 자는 복을 얻지 못하고 혀가 패역한 자는 재앙에 빠지느니라. 17:20.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 21:23.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25:15.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25:23.
잠언에서 우리의 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니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10:19.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어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12:6.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15:1.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15:23.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15:28.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16:24.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장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16:28.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18;17.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 사과니라. 25:11.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29:20.
전도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전도서 1:1ㅡ11절
전도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1절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는 말씀을 줄여서 ‘전도자의 말씀’이란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 ‘전도서’라는 이름은 이 말씀을 의역(意譯)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본서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1:1)이라는 말씀이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서의 기록 년대는 솔로몬의 생애 만년인 주전 935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세권의 성경을 기록하였는데 청년 시기에 아가서를 장년기에 잠언을 노년기에는 전도서를 기록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경험한 저자는 본서에서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익하다는 것과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에게 참된 생명과 영원한 가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본서에는 해 아래서의 모든 수고는 헛되고 헛되다는 허무주의와 또한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즐기라는 쾌락주의 두 가지로 상반된 인생관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허무주의와 쾌락주의의 인생관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도자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무의미함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인생 자체의 허무함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전도자는 여러 부분에서 인생을 즐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24, 3:13, 5:18, 8:15)
전도자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이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유한한 인생이 살아있는 동안 마음껏 쾌락을 즐기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현세적인 즐거움이나 쾌락이 인생의 삶의 목적이 될 때 오히려 절망과 공허만이 더해진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인생을 즐기라는 것은 인생에게 주어진 이 땅위에서의 삶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이 없는 해아래 것만 바라보고 사는 인생의 쾌락적인 삶은 공허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이 허무주의도 쾌락주의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서 서두에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로 시작하여 최후의 결론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12:13-14)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본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1장ㅡ6장에서 전도자의 고백으로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둘째 부분은 7장 ㅡ12장으로 전도자가 권고하기를 창조주( 하나님)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전반부에서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헛되다’라는 말은 ‘덧없고 무상하다.’ 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만사가 하나님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헛된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를 누리고 권세를 가지고 명예를 얻어도 그것은 잠시 누리는 물거품에 불과 한 것입니다.
또한 해 아래서는 새것이 없습니다.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추구해 보았으나 그것도 괴로운 것이며 헛되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향락을 추구하여 보았으나 이것도 역시 헛되다는 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왕위에 올라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져 보고 하고자 한 일은 다 해 보았으나 결국 그것도 무상하며 헛되다는 것입니다.
사업을 확장하고 좋은 집을 짓고 재산을 많이 가져도 이것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사업을 크게 하고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심었으며,
노비를 많이 가지고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이 하였으며,
은금과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으며,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여 보았지만 이것도 역시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무익한 것이라 고백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축재(蓄財)의 허망함을 말하면서 이것도 헛되다고 하였습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도 만족함이 없으며,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많고 소유주는 눈으로 보는 외에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소유로 만족하고자 하면 만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은 상대적인 것이요 없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녀가 많고 장수한다고 복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해 아래는 새것이 없고 하나님이 없는 부나 지혜나 명예나 장수는 다 헛되고 헛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을 허무주의에 빠져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전도서를 읽을 때 그 결론은 언제나 12장13절로 돌아가서 그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일을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는 말씀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삶 자체를 허무하다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삶의 허무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유한하며 세상에는 새것이 없는데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의 것으로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을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생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에 마치 부모 잃은 고아와 같습니다.
부모 잃은 고아가 아무리 좋은 장난감을 가지고 있어도 허전하고 불안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간들은 땅위에 것을 아무리 많이 소유하여도 만족이 없으며 참 평안과 만족이 없으며 불안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어머니의 품안에 안길 때 평안과 만족이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참된 평안과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 아래 것에 소망을 두며 살지 말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요 참된 행복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다가 해위에 있는 하늘나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전도자는 이와 같이 해 아래가 아닌 해 위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중심의 인생관을 갖고 살게 하기 위하여 해아래 하나님이 없는 인생들의 삶은 헛되고 헛되다고 한 것입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에는 참 만족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전도자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와 같이 행하신 것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며 살게 하려 하심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소망삼고 살아야 합니다.
전도자는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발을 삼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전반부에서 전도자는 해 아래서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삶은 헛된 것임을 말한 후 후반부에서는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명령을 지키며 살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전도자는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명예가 재물보다 소중함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 보다 낫고( 수고를 그치고 안식에 들어가기 때문)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 보다 낫고(인생의 삶을 생각하기 때문) 슬픔이 웃음보다 낫고(자신을 살피는 기회가 되기 때문)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 보다 낫고(책망은 참된 스승이기 때문)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낫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자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다고 말합니다.
초상집에 마음이 있다는 뜻은 인생을 깊이 생각하고 사람에게 종말이 있음을 다시 생각하기 때문이며, 연락하는 집에 있다는 뜻은 인생을 아무 의미 없이 웃고 즐기며 살아감을 말합니다.
전도자는 옛날이 오늘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과거에 집착하여 사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미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미래를 준비하고 사는 사람)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권고하기를 하나님의 하신 일을 우리가 알 수 없으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병행하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또한 모든 일에 시기와 심판이 있고 사람은 죽음을 면치 못하므로 모순과 불합리가 행하지는 세상을 관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권고 하고 있습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임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앞에서 사는 자가 잘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해아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이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사람이 아무리 애써 연구할 지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청년의 날에 마음에 기뻐하며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심판하실 줄을 알라고 권면하면서 그러므로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하였습니다. 즉 인생의 석양이 오기 전에, 밤이 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난 후 헛되고 헛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소유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헛된 인생을 산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부(富), 권세, 명예, 장수 이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 합니다. 인생은 이 세상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내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한 번 죽습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아가 2:10-14절
본서의 히브리어 성경의 명칭은 ‘노래 중의 노래’입니다. 우리말 성경의 아가(雅歌)는 의역(意譯)한 것입니다.
본서는 솔로몬이 지었습니다. “솔로몬의 아가(雅歌)라”(1:1) 기록 년대는 솔로몬의 통치 초기인 주전 970-960년으로 봅니다.
본서는 솔로몬과 사랑하는 술람미와의 단순한 사랑의 노래가 아닌 하나님과 그 택한 백성,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와의 사랑을 이야기한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을 ‘여호와 하나님의 신부’ (렘31:31-32)로 묘사 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은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신약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 (고후11:2)로 묘사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그러므로 본서는 하나님과 그의 택한 백성과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사신 신부된 교회를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로 비유적으로 그린 사랑의 노래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남편 된 그리스도와 신부된 교회의 영광스러운 연합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서를 읽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인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읽어야 하며, 또한 우리 주님 예수께서 그의 신부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깨닫고 그 사랑과 그 은혜에 보답하여야 하겠습니다.
본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그 기쁨을 노래하는 공식 시로서 전국에서 낭독되었으며, 룻기는 오순절에, 전도서는 장막절에 낭독되었습니다.
본서를 전체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얼마 떨어진 외곽지대의 언덕에 솔로몬 소유의 아름다운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이 포도원을 관리하도록 관리하는 자에게 맡겼는데 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가 바로 술람미(‘술람미’에 대해서는 ‘솔로몬의 신부’ 라는 견해와 ‘술람미’는 지명으로 ‘수넴’을 가르킨다는 견해가 있음)의 가족이었습니다. 술람미는 어머니와 오빠들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술람미는 오빠들의 미움을 받아 포도원을 지키고 가꾸는 일을 술람미가 홀로 담당 하였습니다. 무더운 여름철 뜨거운 햇빛에 피부는 검게 탔고 노동으로 인하여 손은 거칠었지만 용모는 아름다웠습니다.
어느 날 솔로몬 왕이 자기 포도원을 방문하였는데 포도원에서 일을 하고 있는 그녀를 보고 첫 눈에 반하여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에게서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그녀에게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마침내 솔로몬이 술람미에게 청혼을 하게 되며 술람미는 기쁨과 기대 속에 결혼을 준비합니다.
솔로몬왕은 자신을 옹위하는 60명의 용사와 많은 신하들을 데리고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만든 연(가마)을 타고 술람미의 집으로 찾아와서 성대하게 결혼예식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신혼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밀월(蜜月)의 기간도 잠시이고 신부가 신랑을 향한 사랑이 식어지므로 두 사람의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신부는 다시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랑을 찾아 나섰고 신랑도 신부를 찾아 나서므로 다시 사랑의 상봉을 하게 됩니다. 이후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하던 신부는 신랑 중심의 사랑으로 성숙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보다 성숙한 사랑의 회복을 위해 두 사람은 복잡한 예루살렘을 떠나 평화로운 포도원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본서는 솔로몬과 술람미 사이에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얼마나 순결하고 고결한 참 사랑인 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본서에서 솔로몬 왕이 먼저 술람미를 사랑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요일4:10)
솔로몬 왕이 술람미에게 청혼을 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한 남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인 술람미 여인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고후11:2)
술람미의 첫 사랑이 식어진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질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술람미가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랑을 찾고 찾았던 것처럼 우리도 잃어버린 첫사랑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하여 주님을 찾고 찾아야 하겠습니다.
술람미의 사랑이 자기중심적 사랑에서 신랑 중심적 사랑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 자기 중심적에서 주님 중심의 신앙으로 성숙되어져 가야 하겠습니다.
솔로몬왕과 술람미가 예루살렘을 떠나 평화로운 포도원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우리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하늘 포도원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본서를 내용 전개별로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솔로몬과 술람미와의 사랑의 노래 1:1-3:5절
본서의 서두는 술람미의 사랑의 노래와 이에 화답하는 솔로몬의 사랑의 노래입니다.
술람미는 신부된 교회를 말하며 솔로몬왕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으로서 신부된 교회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또한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신부된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향하여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다.”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 지남이라” 하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를 소원하며 주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주님 한분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된 교회를 향하여 “여인 중에 어여뿐 자야”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하시며 우리를 사랑의 눈으로 보시고 계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는 신부된 교회를 향하여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 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에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하시며 ‘일어나라 나와 함께 가자’ 하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저 천국까지 가야 하겠습니다.
신부된 교회가 신랑 되신 예수님을 꿈속에서라도 찾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성중에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가기 까지 내가 놓지 아니하였노라”
술람미가 사랑하는 이를 꿈속에서라도 만나보고 싶어서 찾고 찾았던 것처럼 신부된 우리도 신랑 되신 예수님을 꿈속에서라도 만나 볼 수 있도록 사모하여야 하겠습니다.
2. 신랑과 신부의 사랑의 절정으로 서로에 대한 찬양과 결혼 3:6-5:1절.
솔로몬이 자신을 옹위하고 있는 용사 60명과 많은 신하들을 데리고 술람미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신부된 교회를 데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갈 것에 대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입니다.
이후 신부의 아름다음에 대하여 찬양이 나옵니다. “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쪽 같구나. .....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입술에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론의 향기 같구나.”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모하면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가므로 주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여 지는 정결한 신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첫사랑의 시련과 연단 5:2-6:12절
신랑과 신부의 밀월(蜜月)의 기간이 지나고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신부는 나태함에 빠져 신랑이 찾아왔는데도 귀찮다는 핑계로 문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신랑은 문 밖에 서서 기다리며 밤이슬을 맞다가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후회를 한 신부가 밖에 나가 보았으나 신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대답이 없었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신부된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계3:20)
4. 신랑과 신부가 다시 만나 사랑이 성숙되어감 6:13-8:14절
신부는 신랑을 찾아 나서고 신랑도 신부를 찾으므로 서로 만나 재회하여 사랑이 회복되고 사랑이 더욱 성숙되어 가게 됩니다.
신랑은 신부를 향하여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 뿐이로구아” 하고 신부를 예찬하고 신부는 신랑에게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 유하자.” 하고 신부된 자신은 신랑에게 속하였음을 고백하고 평화로운 포도원으로 가서 함께 살자고 합니다.
본서는 사랑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그 무엇도 끊을 수 없습니다.(롬8:35-39)
선지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눅24:25-27, 요한5:39-40절
구약을 네 부분으로 나누면 모세 오경 (창. 출. 레. 민 .신), 역사서(수 .삿. 룻. 삼상. 삼하. 왕상. 왕하. 대상 .대하 스. 느. 에), 시가서(욥. 시. 잠. 전 .아), 선지서(사. 렘. 애. 겔. 단. 호. 욜. 암. 옵. 욘. 미. 나. 합. 습. 학. 슥. 말)로 구분을 합니다.
선지서는 모두 17권인데 그중에 5권(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 )은 대선지서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12권은 소선지서라 합니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선지서를 대선지서 소선지서로 구분하는 것은 내용의 중요성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의 분량, 즉 예언의 부피에 따라 구분한 것이며 책의 순서도 시대별로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첫째 선지자의 임무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즉 이미 모세를 통하여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금 깨닫게 하시고 경고하시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의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왕하17:13) 하신 말씀과 같이 선지자의 임무는 택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악한 길로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라고 권고하며 때로는 책망도 하고, 때로는 위로도 하고, 때로는 먼 미래에 대한 예언도 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직책은 외롭고, 고독하며 배척을 받기도 하고 수난을 받기도 하며 순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둘째로 선지자들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저희 열조의 목같이 하여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 열조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좇아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하사 본받지 말라 하신 사면 이방 사람을 본 받아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일월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노를 격발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왕하17:14-18)
이상의 말씀은 북방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였으나 거절하므로 앗스르 왕 살만에셀에게 사마리아 성이 함락되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남방 유다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입니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하나님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백발 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성을 헐며 그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 모든 귀한 기명을 훼파하고 무릇 칼에서 벗어난 자를 저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주재할 때까지 이르니라”(대하36:15-20)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며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마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다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마23:34-35)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자기의 뜻을 전하시다가 마침내 그 아들을 보내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으니라”(히1:1-2)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한 자로서 장차 오실 참 선지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요 그림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신18:15) 말씀하시며 참 선지자 되시는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너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요17:6-8)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우리의 구주 되심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하겠습니다.
셋째 선지자들이 예언한 예언의 요소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예언에는 세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그 당대에 대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말씀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권면하고 책망하고 위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시려고 하셨습니다. 사울시대에는 사무엘 선지자를, 다윗 시대에는 나단 선지자와 갓 선지자를, 아합 왕 시대에는 엘리야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에 각각 그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2) 장차 있을 일에 대한 미래적인 예언
(1)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실족과 회복, 그리고 주변 나라들의 심판.
(2) 메시야의 오심과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다시오심과 최후의 영광.
(3) 마침내 세워질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3) 오늘 우리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예언)은 그 시대에 주어진 말씀임과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계시 되어있으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활동시기와 시대적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선지자들이 활동한 시기는 바벨론 포로를 중심으로 포로 전, 포로 중, 포로 귀환 후 세 시기로 구분하겠습니다.
바벨론 포로 전 선지자 : 오바댜. 요엘. 요나.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나훔. 스바냐. 예레미야. 하박국.
바벨론 포로 중 선지자 : 다니엘. 에스겔.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선지자 : 학개. 스가랴. 말라기.
유다 나라에 대하여 예언한 선지자 : 요엘. 이사야. 미가. 스바냐. 예레미야. 하박국. 학개. 스가랴. 말라기.
바벨론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에게 예언한 선지자 : 다니엘.
유다와 바벨론에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예언한 선지자 : 에스겔.
이스라엘 나라에 대하여 예언한 선지자 : 아모스. 호세아.
에돔에 대하여 예언한 선지자 : 오바댜.
니느웨에 대하여 예언한 선지자 : 요나. 나훔.
선지서를 예언의 내용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레미아서는 바벨론 포로경고를, 애가서는 애국눈물을,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영광 떠남과 회복을,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요엘서는 재앙과 주의 날을, 아모스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오바댜서는 에돔 멸망을,
요나서는 회개구원을, 미가서는 미래의 소망 예언을, 나훔서는 니느웨의 멸망을, 하박국서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스바냐서는 열국심판을, 학개서는 성전재건독려, 스가랴서는 미래예언을, 말라기서는 신앙경고를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선지서에 나타난 오실 메시야의 예언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24:25-26) 고 말씀하시므로 성경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율법과 선지서에 이미 약속된 것이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게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2)
즉 율법 가운데 복음이 있고 선지서 가운데 복음이 있습니다. 구약 가운데 신약이 있고 신약 가운데 구약에서 약속된 복음이 나타 난 것입니다. 이사야는 우리의 메시아로, 예레미야는 생수의 근원으로, 에스겔은 인자로, 다니엘은 뜨인 돌로, 호세아는 하늘의 신랑으로, 요엘은 치료자로, 아모스는 회복자로, 오바댜는 영원한 반석으로, 요나서는 우리의 부활과 생명으로. 미가 서는 우리의 목자로, 나훔은 환난 날의 산성으로, 하박국은 구원의 하나님으로, 스바냐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로, 학개는 만국의 보배로, 스가랴는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으로, 말라기는 언약의 사자로,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사45:22절
본서의 명칭은 선지자 이사야의 이름을 따른 것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입니다.
이사야서는 그 구성에 있어서 성경을 축소한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모두 66권이듯이 이사야서도 66장이며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하듯 이사야서도 전반부 39장 후반부 27장으로 구분합니다.
구약이 죄와 심판과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신약은 구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아가 오셔서 인류 구원의 구속 사역을 마치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다가 재림주로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됩니다.
이사야서도 전반부는 죄와 심판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의의 왕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사야서를 제 5복음서라 합니다.
그것은 구약 성경 가운데 이사야서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장 많이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본서에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예언 되었습니다.(7:14절)
예수님께서 신실한 자기 백성들에게 거룩한 피할 곳이 될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8:14)
예수님께서 평강의 왕으로 오실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9:6-7)
예수님께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으로 예언 하였습니다.(11:1)
예수님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11:10)
예수님께서 이방의 빛이 되실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42:6-7)
예수님께서 구원사역을 마치시고 승귀의 신분을 가지실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52:13,빌2:6-11)
예수님께서 피 뿌리시는 제사장의 사역을 담당하실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52:14-15)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실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53장)
예수님께서 부자의 묘실에 장사될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53:9)
예수님께서 재림 하셔서 의로 통치하실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32:1)
본서에서 남은 자 사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으나 마음이 완악한 자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자 유다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으로 살려고 하는 소수의 무리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본서에는 하나님의 주권은 이스라엘의 역사만 주관하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계 모든 민족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시고 계심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멸망과 열방 나라의 심판, 택한 백성의 구원과 시온의 미래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남쪽 유다 왕국에 대하여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유다 왕국뿐 아니라 주변 나라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구원 계획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활동 시기는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다의 주변 상황은 앗수르가 신흥대국으로 등장하여 그 세력을 점점 확장해 가는 시기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방 이스라엘이 주전722년에 멸망을 당하고 남방 유다도 앗수르에 두 차례나 침공을 당하여 정치적으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웃시야 왕이 교만에 빠져 제사장을 멸시하여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함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문둥병이 발하여 폐궁에 거하다가 죽었으며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었으나 하나님의 성전을 멀리하다가 죽고 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나 바알을 섬기며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어 종교 개혁을 하였으나 백성들은 그의 개혁을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와 같은 정치적 종교적 상황 속에서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기울어져가는 유다 왕국의 장래를 바라보면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유다 백성들에게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의 우상 숭배와 영적인 타락을 회개할 것을 촉구하면서 정치와 사회 문제에 뿐 아니라 열방 나라에 대하여서도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이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참된 평안을 누리려면 택한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거룩한 삶을 살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만이 가능하다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므로 하나님께로 돌아와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 할 것을 촉구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구원뿐 아니라 온 인류의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 사상이 이사야서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그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탄생과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다시오심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자 사상과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거룩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런 구속사적 관점을 가지고 이사야서를 읽어야 합니다.
이사야서를 구조 및 내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사야서 전체를 요약하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선민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성화시키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기 백성들을 고난을 통하여 연단시키신 후 정결케 하신 후 회복시키시고 위로하시며 은총을 내리십니다.
1. 심판에 관한 예언 1-39장
(1)유다의 심판과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1-6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시켜 살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순종하며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온 세상에 전하는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포도원에 심은 극상품 포도나무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기름진 산에 포도원을 조성하여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망대를 세우고 수확을 생각하고 그 안에 술틀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포도 맺기를 바라고 기다렸는데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게 들 포도를 맺었습니다. 이것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의 자식으로 사랑하며 양육하였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만홀히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징계를 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보호의 포도원 울타리를 거두시고 담을 헐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이사야를 부르신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이사야가 본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 거룩한 천사들의 호위 가운데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였습니다.
(2)앗수르 멸망과 메시아 탄생의 예언 7-12장
앗수르가 침공하여 유다 백성들을 괴롭힐지라도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시온에 거한 나의 백성들아 앗수르 사람이 애굽을 본받아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불구(不久)에 네게는 분을 그치고 노를 옮겨 그들을 멸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 탄생을 예언하시며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올 것이며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며 또한 고난 가운데서도 남은 자는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열방의 심판과 택한 백성의 구원을 예언함. 13-27장
바벨론의 멸망과 풀려날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과 모압에 내릴 재앙과 멸망, 애굽의 멸망과 시돈과 두로에 내릴 심판,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4)에브라임과 유다에 대한 경고와 시온의 미래에 대한 예언. 28-35장
이스라엘에게 임할 심판을 말하며 애굽과 맺은 헛된 조약을 책망하고 불신앙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택하신 백성들이 받을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5) 이 부분은 히스기야 시대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삽입구입니다. 36-39장
앗수르 왕 산혜립의 유다 침공과 실패, 히스기야가 병에서 고침을 받음, 히스기야의 교만으로 인한 바벨론 포로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었습니다.
2. 회복과 위로에 관한 예언. 40-66장
(1)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을 약속하심. 40-48장
바벨론에서 고난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 하면서 포로 생활에서 구원하여 고국으로 귀환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고레스를 통하여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메시아 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2)메시아의 오심과 인류구원을 약속하심. 49-57장
메시아가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원 역사를 성취하실 것을 예언 하고 있습니다.
(3)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인 메시아왕국의 완성 과 영광. 58-66장
시온의 영광이 회복되며 영광 중에 임할 메시아의 모습과 그 나라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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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렘 2:13절
본서의 명칭은 예레미야의 이름을 따른 것입니다. ‘예레미야’란 이름의 히브리어 뜻은 ‘여호와께서 던지시다’입니다.
‘던지다’는 본서의 주된 내용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던지신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 요시야 왕 13년(주전 627년)에 예언을 시작하여 유다 나라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의 의하여 망하는 주전 586년까지 약 40년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당시 유다 나라의 주변 정세는 앗수르가 쇠약해가고 바벨론이 신흥 강대국으로 일어나는 격동의 시기이었습니다.
유다 나라의 내부 사정은 요시야 왕이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므낫세 이후 근절되지 못한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부정부패로 나라의 지도층은 깊은 죄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일반 백성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며 깊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유다 말기의 나라의 형편을 역대하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어른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여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저희를 다 붙이시매 저가 와서 그 성전에서 칼로 청년을 죽이며 청년남녀와 노인과 백발 노옹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대하36:14-17).
라고 기록하므로 당시 얼마나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부패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은 국경을 확장하여 가는 중에 유다와 애굽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유다 나라는 약소국가로서 애굽과 바벨론 둘 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였습니다. 당시 모든 유다의 군신(君臣)들은 애굽을 의지하여 바벨론의 침공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때 예레미야는 유다나라가 하나님께 범죄 하였으므로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포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바벨론에 항복하여 겸손하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이 예언으로 인하여 예레미야는 그 동족들에게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 고난을 당하며 죽음의 위협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자신에게 맡겨주신 선지자의 사명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의 심판만 예언한 것이 아니라 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하여 사용한 바벨론도 망하리라고 예언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멸망시키는 자의 마음을 일으켜 바벨론을 치고 또 나를 대적하는 자 중에 치되 내가 타국인을 바벨론에 보내어 키질하여 그 땅을 비게 하리니 재앙의 날에 그를 에워 치리로다”(렘51:1-2).
또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29:10).
본서에서 새 언약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1-33).
본서에서 오실 예수님을 다윗에게서 날 의로운 가지로 예언하였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33:14-16).
이 말씀에서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란 말씀과 “여호와 우리의”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우리의 의가 되신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확실히 이루실 것을 낮에 대한 약정과 밤에 대한 약정으로 언약하셨습니다.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렘33:20-21).
낮과 밤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설정하신 자연 법칙입니다. 그러므로 이 자연 법칙이 깨어질지언정 새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홍수 후에 노아에게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하시고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이 자연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자연 언약이 파기 될지언정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언약을 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즉 새 언약의 신실성과 신뢰성과 불변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서에서는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내어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23:3-4)
본서에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다시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말하지도, 기억하지도, 찾지도, 만들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않을 것이요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열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렘3:16-17)
이 예언은 1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의 일을 말하며 구속사적으로 성취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서에는 환상과 비유가 많이 있습니다. 이 환상과 비유만 잘 이해하여도 본서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1. 살구나무 환상 1:11-12절
이 환상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지키실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2. 북에서 기울어진 끊는 가마 환상 1:13-16절
북방 나라의 침략을 받아 큰 환난을 받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썩은 베띠의 비유 13:1-11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려 하셨으나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므로 썩은 베띠와 같이 쓸모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 포도주 병의 비유 13:12-27절
하나님께서 진노의 포도주로 채우시겠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토기장이와 진흙의 비유 18:1-17절
하나님은 인간의 운명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6.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 19:1-13절
깨어진 병과 같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깨뜨리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7. 무화과 두 광주리 환상 24:1-10절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에 있는 포로 된 자들이 회복될 것을 뜻하며 악한 무화과는 유다에 있는 자들과 애굽으로 내려간 자들이 이방 나라에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입니다.
8. 줄과 멍에의 비유 27:1-11절
바벨론에 항복하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이므로 바벨론의 통치에 순응 하라는 뜻입니다.
9. 밭을 산 예레미야 32:1-15절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지만 미래에 반드시 회복되어 기업을 차지하게 될 것을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10. 레갑 자손 35:1-19절
레갑 자손들은 선조들의 명령을 따랐는데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예레미야의 소명 과 유다에 대한 예언 2-45장
2. 이방에 대한 예언 46-51장
3. 예루살렘 함락 52장
본서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을 전하였으나 거절한 유다 백성들의 심판과 회복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생활은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기 위한 연단의 기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애가3:19-29
본서의 히브리어 명칭은 ‘어찌하여’ 라는 뜻을 가진 ‘에카’입니다.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경에서는 ‘비가(悲歌)라는 뜻을 가진 ’트레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에서 ‘슬픈 노래’라는 뜻을 가진 애가(哀歌)라는 명칭이 사용 되었습니다.
70인경 서문에는 ‘때가 이르매 이스라엘은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은 황무지가 된 후 예레미야는 슬피 울며 탄식하면서 이 애가(哀歌)를 불렀다. 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본서는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채 수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민족의 비극을 목격한 예레미야가 비탄에 잠겨 애가를 부른 것입니다.
본서를 기록한 예레미야는 단순히 예루살렘의 비극적인 멸망을 되새기려는 목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본서를 통하여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 가를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저버린 유다 백성의 죄악이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게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 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애1:8)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이제 처녀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중하도다.”(애4:6)
본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엄하게 심판 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애2:2)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함인 것입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라”(렘29:11)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도소이다”(애3:22-23)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애3:40-41)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소망하며 바라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 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24-26)
하나님의 징계를 순순히 받으며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애3:27-29)
비록 유다 나라는 멸망하였으나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애5:19)
유다의 회복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5:21)
본서는 전 5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는 저자가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바라보며 슬퍼하며 하나님께 기도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환난을 당하고 있는 백성의 편에 서서 슬퍼하기를 환난을 당하나 위로하는 자가 없고 돕는 자도 없으며 의지하던 친구도 힘이 되지 못하며 도리어 원수가 되었으며 속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빰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없고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1:2)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러한 고난도 죄의 결과임을 알고 겸비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1:5)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1:18)
선지자는 하나님께 권고하여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1:11)
선지자는 말씀을 의지하여 기도하며 또한 말씀을 굳게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1:21)
이와 같이 1장에서 살핀 대로 우리도 어떤 환난이나 고난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권고하심을 기다리는 가운데 기도하며 말씀을 굳게 붙잡고 소망을 가지고 묵묵히 고난을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2장에서는 폐허가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므로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할 것을 권고하며 자신도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을 불타 버렸고 성은 훼파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버린 폐허가 된 도성이 되어버렸습니다.
왕과 모든 방백들은 이방에 포로가 되어갔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묵시를 받지 못하고 제사장들은 천하게 되어 버림을 당하였으며 백성의 지도자들은 슬픔과 부끄러움으로 자리에 앉아 있고 어린 아이들은 굶주림 속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선지자는 이런 환란 가운데서도 이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니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적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훼파하사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너의 대적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2:17-19)
우리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고와 같이 주께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62:8)
3장은 고난 중에 낙심이 될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생각하면 소망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3:19-22)
4장에서는 지도자의 죄와 벌을 말하고 진정으로 의지하여야 할 분이 누구신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의 죄악을 말하고 헛된 도움을 바라보았던 것을 회개하며 참으로 의지해야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4:17)
5장에서는 죄로 인한 참상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과 긍휼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겔36:22-28절
본서의 명칭 ‘에스겔’은 선지자 에스겔의 이름 그대로 사용한 것인데 ‘에스겔’의 뜻은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주신다, 혹은 하나님께서 나를 격려하신다.’입니다.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로 제사장의 후손입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2차로 예루살렘을 침략한 때인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 왕과 많은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그는 바벨론 북쪽 약 200마일 떨어진 그발강 가에 유다인 들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 거주하고 있는 중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약 22년간 바벨론에 거주하고 있는 유다 인들에게 예언한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심판 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리고 미래에 있을 유다 나라의 회복과 그 때에 재건될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는 다니엘서와 함께 구약의 계시록으로서 표징과 환상이 많이 나오는 예언서로서 해석하기가 난해한 책입니다. 그러므로 본서는 다니엘서와 함께 주의 깊게 묵상하고 전통적인 해석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으로 성전과 예배를 중심으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셨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범죄하며 우상을 섬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지성소에서 떠나 성전 문지방에 이르게 됩니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겔9:3)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 동문에 이르게 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서 그룹들 위에 머무르니 그룹들이 날개를 들고 내 목전에 땅에서 올라가는데 그들이 나갈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함께 하더라 그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물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덮였더라.” (10:18-19)
하나님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 성읍 동편 산으로 떠나게 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 주의 신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신의 이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의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보는 이상이 나를 떠난지라”(11:23-24)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기 백성들을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포로 된 지역에서 고난을 통하여 깨끗하게 정화(淨化)시키신 후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시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신 후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금 성전에 가득하게 되어 그들과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회복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포로 중에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지금은 고난 가운데 있으나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권고하심으로 회복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하며 위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은 포로 중에 유다 백성들에게 꿈과 소망과 용기를 주는 선지자입니다.
에스겔서에는 미래에 대한 소망과 환상과 약속이 많이 있습니다.
포로 중에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은 당연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닫고 순순히 받아드릴 것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기 귀환이라는 거짓 희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간 동안 바벨론에 거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은 하나님의 무능이 아니고 유다 백성을 징계하여 연단하시기 위함이며 유다 나라를 친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서의 구조와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루살렘 포위 전 유다에 대한 심판 예언 1-24장.
둘째 예루살렘 포위 중 이방에 대한 심판 예언 25-32장.
셋째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 33-48장.
에스겔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온 제 오년 째가 되는 주전 593년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명을 받게 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을 알지니라”(2:3-5)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주시며 먹으라 하십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은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3:1-3)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지 아니하여도 전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의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 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의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3:7,11)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들어 천지 사이로 들어 올리시고 에스겔을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안의 광경을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는 우상이 가득하였습니다.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보니 여호와의 전문 앞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이십오 인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을 경배하더라”(8:10,16)
이와 같이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각종 우상을 숭배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성전과 예루살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파괴되어 폐허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고 유다 백성들을 열국으로 흩으시는 중에서도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열방에 흩어질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칼을 피하여 이방 중에 남아 있는 자가 있게 할지라.(6:8)
25-32장은 열방 여러 나라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25장은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으며, 26-28장은 두로와 시돈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으며, 29-32장은 애굽의 심판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33장-48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유다 백성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비유하시면서 내가 내 양을 찾아서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건져내어 본토로 데리고 가서 좋은 꼴로 먹이고 좋은 우리에 누워 있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즉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을 산지 사방에서 불러모아 고국 유다 나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 비를 내리고 그들의 멍엣목을 꺾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살리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34:25-26).
하나님께서는 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열국 중에서 모으고 고국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맑은 물로 뿌려서 정결케 하고 굳은 마음을 제하고 새 영을 그들의 속에 두고 율례와 규례를 지키게 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약속하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36:24-28).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만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36:37)
37장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니 살아 일어나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보이십니다. 하나님은 마른 뼈와 같이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시고 계시며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43-48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 삼마’ 즉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와서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였으며 성전 문지방에서 생수가 흘러나와 동으로 흘러 큰 강을 이루며 강 좌우에 각종 과일 나무에 열매가 열리며 성읍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성읍이 되는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구속사 적으로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 될 하나님 나라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단1:8-9절
본서의 명칭은 본서의 저자 다니엘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그 뜻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에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와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다는 의미가 포함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나라를 1차 침공 할 때인 주전 605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느부갓네살 왕 때부터 바사 왕 고레스 때까지 거의 70년간 이방 나라에서 관리로 일을 하였습니다.
본서는 대선지중에 그 분량은 짧지만 예언서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 속에서도 이방나라의 심판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내다보며 하나님이 역사의 주권자가 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의 동일한 시대에 예언하였던 에스겔 선지자는 제사장적 관점에서 성전과 예배의 회복에 초점을 두었다면 다니엘은 세상나라의 심판과 하나님나라의 회복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당시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을 함락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감으로 자신들이 믿는 신의 우월함을 세계에 과시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불탔겠는가 하는 고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 바벨론 군대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성전이 불탄 것은 아닙니다. 택한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등지므로 이들을 징계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방 나라를 잠시 징계의 채찍으로 삼으신 것뿐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더럽혀진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방 나라를 심판하시고 택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고국으로 데리고 가시며 또한 세상 나라는 망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질 것을 본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서는 이방나라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나라는 망하고 하나님나라는 번성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2:34-35)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2:44)
이와 같이 세상나라는 강성한 것 같지만 잠시 일뿐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계시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땅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서는 구약의 계시록으로서 앞으로 전개될 인류 역사의 흐름을 구체적이면서 상징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본서에 나타난 꿈과 환상의 상호 관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2장의 정금머리 -7장의 독수리 날개를 가진 사자 같은 짐승 - 바벨론을 상징하고 있음
2장의 은으로 된 가슴 -7장의 곰 같은 짐승 -8장의 두개의 뿔을 가진 수양- 메대 바사
2장의 놋으로 된 배와 넓적다리-7장의 네 개의 날개와 네 개의 머리를 가진 표범 같은 짐승-
8장의 하나의 큰 뿔, 네 개의 뿔, 하나의 작은 뿔을 가진 수 염소- 그리스(헬라)
2장의 철로 된 종아리 철과 진흙으로 된 발-7장의 강한 철 이를 가진 열개의 뿔과 작은 뿔을 가진 비교할 수 없는 짐승 - 로마제국과 그 이후의 열강들
2장의 뜨인 돌-7장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이 인자 같은 이 - 하나님의 왕국
본서에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왕이여 왕은 열왕의 왕이시라 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능력과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4:17).
하나님께서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에 따라 권세를 주시기도 하시고 폐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생사(生死)화복(禍福)뿐 아니라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가지고 계시는 절대 주권자이신 것입니다.
본서에서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오시는 인자 같은 이로 묘사 하고 있습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7:13)
인자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본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다니엘이 바벨론 왕궁에 등용된 배경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장
유다 왕 여호야김 삼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전기구 얼마와 유다 백성들과 왕족과 귀족과 함께 젊은 인재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는데 이때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 세 친구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들의 이름을 바벨론 식으로 개명을 하고 음식까지 바꾸며 철저히 바벨론의 문화에 동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왕이 주는 진미와 포도주로 자기들의 신앙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뜻을 정하였으며 하나님이 이들에게 지식과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을 더하게 하시므로 마침내 왕궁의 관리로 등용을 하게 됩니다.
둘째. 이방세계의 역사에 대한 예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7장
느부갓네살 왕이 꿈에 큰 신상을 보게 됩니다.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발을 치므로 신상이 부숴져 여름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큰 신상은 세상 나라요 뜨인 돌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세상 나라는 망하고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7장의 네 짐승의 환상은 2장의 금신상의 환상과 같은 것이며 3장은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 낙성 예식에 참예하여 절을 하게 합니다. 이에 다니엘의 세 친구가 거절을 하자 극렬히 타는 풀무 불에 던짐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머리털 하나 상함이 없이 구원함을 받게 됩니다. 4장은 하나님께서 느부갓네살 왕을 폐위하셨다가 다시 복권하시는 기록이며 5장은 벨사살 왕이 그 귀인 일천 명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기명으로 연회를 베풀 때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쓰게 되는데 그 내용은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 신’ 이라는 글자인데 그 뜻은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며 저울에 달려서 부족하여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이 갖겠다는 내용입니다.
6장은 다니엘을 모함한 정적들이 다니엘을 고소하고자 하나 허물을 발견하지 못하자 왕 외에는 자기 신에게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을 만들어 공포 하였습니다. 만일 이 법을 어기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 법령이 공포된 것을 알고도 자기가 평소에 한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이상에서 본대로 하나님은 세상 나라를 통치 하시며 자기 백성들을 어려움에서 구원하여 내시는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게 대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8-12장
이 부분에서는 다니엘이 환상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계시 하고 있습니다.
당시 포로 생활 가운데 실의와 좌절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래에 임할 귀환과 성전의 회복을 언급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종국적으로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8장에서는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을 통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과 알렉산더 대왕에 의한 헬라제국의 발흥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한 유대교 박해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9장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예언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70년 만에 이루어질 것을 깨달은 다니엘이 하나님께 자신의 죄와 선도들의 죄를 회개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올 것을 예언 하였습니다.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며 영원히 황무케 하되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렘25:11-13)
다니엘은 기도하는 가운데 70이레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10-12장은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집트의 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과 안티오쿠스의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도 종국적으로 이스라엘의 승리와 구원의 회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세아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호6:1-3절
본서의 명칭은 호세아의 이름을 그대로 명명한 것인데 호세아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한 시기는 주전 760년 -722년으로 여로보암2세 때부터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되던 때까지입니다.
그 당시 남 왕국 유다에서는 웃시야, 요담,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였고 이때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북 왕국은 여로보암2세 때에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솔로몬 왕 이후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타락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시대입니다.
여로보암2세가 죽은 후 북 왕국 이스라엘은 극도로 혼란과 불안정 속에 계속되는 모반으로 인하여 여섯 명의 왕 가운데 네 명의 왕이 살해되고 두 왕은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관료와 백성들은 부패와 탐욕에 젖어 있었으며 우상숭배와 영적인 무감각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호세아 선지자가 나타나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선포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전하였으나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호세아서의 중심주제는 죄 심판 구원으로 특히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총 주제는 '돌아오라 내 백성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끝내 돌아오지 않고 주전 722년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호세아서는 전14장으로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호세아가 행실이 나쁜 고멜을 아내로 삼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심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사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본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행실이 나쁜 아내와 신실한 남편 1-3장
호세아 전반부인 1-3장은 행실이 나쁜 아내인 고멜과 신실한 남편인 호세아를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행실이 나쁜 고멜을 아내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이에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실이 나쁜 고멜과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표징으로 그들의 이름을
첫째는 ‘이스르엘’(하나님이 흩으신다), 둘째는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 셋째는‘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지으라 하셨습니다.
이 이름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택한 선민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랑하며 순종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섬기며 국가의 안정을 위하여 강대국을 의지하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돌아오지 않으므로 호세아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르엘’(하나님이 흩으신다)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며 강대국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을 흩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루하마’(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제는 긍휼히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이름을 통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멜은 남편과 자녀들을 버리고 연애하는 자를 따라 가려고 합니다. 그가 떡과 물과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시로 막고 담을 쌓아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비유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디기 오셔서 사랑을 베푸시는 것을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을 통하여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으로 나갈 때 가시로 막고 담을 쌓아 길을 찾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돌아온 아내를 부드러운 말로 마음을 열게 하며 설득하여 들로 데리고 가서 포도원을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즉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며 너와 영원히 살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의 사랑이 회복되고 관계가 회복되어 영원한 언약관계로 살 것을 말씀하고 있는 소망의 말씀입니다.
고멜은 또 다시 집을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집을 나간 고멜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호세아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값을 지불하고 아내를 데리고 옵니다.
이 말씀은 호세아가 행실이 나쁜 아내를 구하여 내기 위하여 값을 지불하고 사서 온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과 저주에서 구원하여 내기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피로 값을 주고 속량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우상을 섬기며 패역한 이스라엘과 신실하신 하나님 4-14장
호세아 선지자는 후반부에서 우상을 섬기며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과 신실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은 진실이 없고 인애가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저주와 속이며 도적질함과 살인과 간음과 강포만 가득하므로 땅이 황폐할 것이며 거기 거하는 들짐승과 새가 쇠잔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탄식하며 네가 지식을 버렸으므로 나로 너를 버릴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가 왜 창조함을 받았으며 또 우리를 왜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주셨으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며 이와 같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생각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며 하나님을 알기를 원치 아니하고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며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전각을 세우며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또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교만 때문에 넘어졌음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소떼와 양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곡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6:1-3)
본문에서와 같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류를 향하여 친히 부르시고 선지자를 통하여 부르시면서 돌아오라 하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만이 살길이 있고 위로가 있고 안식이 있고 평안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 곧 불행이요 슬픔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상처가 치유가 되며 싸매 임을 받을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지금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라 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10:12)
11장 이후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돌아오라 하십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11:8) 하시며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 고 하십니다.
13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최후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고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대로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삼년간을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므로 마침내 사마리아 성이 함락을 당하여 이스라엘 사람을 살육하고 많은 사람을 앗수르로 끌고 갔습니다.
14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스라엘을 고치시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여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요엘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요엘1:1-4절
요엘 선지자는 브두엘의 아들이며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요엘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와 지역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본서의 내용으로 보아 남방 유다 왕국의 요아스 왕의 초기로 보여 집니다.
그러므로 기록 년대는 바벨론 포로 전으로 유다 왕 요아스 초기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요아스 왕은 7세에 즉위하여 40년간 유다 나라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초기에 성전을 수리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나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죽고 난후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악정을 베풀자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충언을 하자 그를 죽이고 악한 길로 가게 됩니다.
온 나라는 메뚜기 재앙과 극심한 가뭄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요엘 선지자가 예언을 한 것입니다.
본서를 기록한 목적은
1. 무서운 메뚜기 떼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으며 또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이 재앙은 단순한 자연 현상에서 오는 재앙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에는 이 재앙보다도 더 극심한 환난이 있을 것을 경고하면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며.
2. 여호와의 날은 역사적으로는 북방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침략과 남방 유다 나라를 멸망시킨 바벨론의 침략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날이란 구속사적으로는 주님의 재림 때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날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구원의 날이지만 심판을 받은 자들에게는 멸망의 날이며 무서운 진노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심판의 도구로 사용한 나라들과 주변 나라들을 국문하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시온산 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며 남은 자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여호와의 날에 있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1:1-2:17절
요엘 선지자는 온 땅을 황폐화 시킨 메뚜기 재앙과 가뭄과 기근 재앙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것을 들을지어다 땅의 모든 거민아 너희는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의 날에나 너희 열조의 날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1:3-4)
심각한 재앙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릴 소제와 전제가 끊어졌습니다.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전에 끊어졌고 여호와께 수종드는 제사장이 슬퍼하도다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니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1:9-10)
요엘 선지자는 심각한 상황을 말한 후 온 국민의 회개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즉 노인들과 자녀들 포도주를 마시는 자들 농부들 제사장들 모두가 회개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재앙은 단순한 자연의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곡할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를 입고 밤이 맞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1:13)
메뚜기 재앙과 가뭄과 기근으로 인하여
소제와 전제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끊어졌고,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처량하며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이 말랐으며,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으며 나무가 말랐으며,
사람에게서 기쁨의 소리가 끊어졌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전국민에 성회를 선포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선포하여 장로들과 이 땅 모든 거민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전으로 몰수히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1:14)
2장에서는 임박한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 같은 것이 자고 이래로 없었고 이후 세세에 없으리로다.”(2:2)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2:11)
이상의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메뚜기떼가 몰려옴을 말하고 있으며 예언적으로는 앗수르 군사가 몰려올 것을 말하고 있으며 또한 장차 임할 ‘여호와의 날’ 즉 주님의 재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의 날’은 장차 임할 주님의 최후의 심판 날인 재림의 날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다시금 회개를 촉구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주께서 혹시 마음과 뜻을 돌이키시고 그 뒤에 복을 끼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게 하지 아니하실는지 누가 알겠느냐”(2:12-14)
금식이란 생명을 연장하는 음식을 금하고 오직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옷은 찢는 행위는 내적인 큰 슬픔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형식화 되어 하나님께 형식적으로 하는 외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에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는 것입니다. 즉 형식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회개를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날에 있을 이스라엘의 구원 2:18-3:21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참으로 회개하면
자기 땅을 위하여 그 중심이 뜨거우시며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응답하시고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흡족히 주실 것입니다.
다시는 너희로 열국 중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일을 행하시므로 인하여
땅은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며
들짐승에게 먹을 것을 풍족히 줄 것이며
시온의 자녀들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하게 주실 것이며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며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2:28-29)
하나님께서는 요엘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성령을 오순절 성령 강림을 통하여 성취하였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 강림이 임하자 모든 무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조롱하면서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자 베드로가 일어나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2:16-17)
또한 그때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2:32).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도 구원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구원이 이스라엘로부터 시작하여 온 세상에 전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여호와의 날이 자기 백성을 압제하는 만국을 심판하는 날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날 곧 내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그 때에 내가 만국을 모아 데리고 여호사밧 골짜기에 내려가서 내 백성 곧 내 기업 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거기서 그들을 국문하리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열국 중에 흩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3:1-2)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 내가 전에는 그들의 피흘림당한 것을 갚아 주지 아니하였거니와 이제는 갚아 주리니 이는 나 여호와가 시온에 거함이니라”(3:20-21).
아모스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암8:11-13절
본서의 명칭은 이 책의 저자인 ‘아모스’의 이름을 그대로 명명하였는데 아모스란 이름의 뜻은 ‘짐을 짊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아모스는 예루살렘에서 남방으로 약20km지점에 있는 드고아의 목자요 농부로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북쪽 이스라엘에 가서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7:14-15)
아모스는 농부요 목자로 일상적인 생업에 종사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모스는 유다를 떠나 이스라엘로 건너가 여로보암2세 가 통치하던 우상의 중심지인 벧엘과 수도 사마리아와 및 갈릴리 등지에서 예언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하던 그 시대는 남쪽 유다 왕 웃시야와 북쪽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 때입니다.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의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의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묵시받은 말씀이라.”(1:1)
남방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은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왕들에 속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여로보암2세(주전801-760년 경 재위)는 강력한 왕으로 외적으로는 모압과 수리아 등에게 전쟁에 승리하여 옛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고(왕하14:25, 암6:14) 내적으로는 수도 사마리아와 벧엘은 화려하고 사치하였습니다. 외견상으로는 화려하고 부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하고 도덕적으로 부도덕한 상태에 빠져 있었으므로 머지않아 앗수르의 침공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내다본 아모스 선지자는 불타는 마음으로 북방 이스라엘나라로 건너가 우상 숭배와 부도덕을 책망하면서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한 계시를 받았을 때 처음에는 두려워하면서 하나님께 사죄의 은총을 구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없어서 닥쳐올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니라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3:7-8)
이스라엘에서 아모스 선지자의 예언활동은 순탄할 수 없었으며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던 벧엘의 아마샤와 대결하게 되었으며 박해를 당하여 거의 빈사 상태가 되어 이스라엘에서 추방이 되어 그의 고향으로 돌아와 죽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외롭고 고독한 길을 걸어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서의 구조와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에 대한 심판 예언 1-2장
2. 심판에 대한 3가지 설교 3-6장
3. 심판에 대한 5가지 환상 7:1-9:10
4.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약속 9:11-15
1.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에 대한 심판 예언 1:1-2:17
아모스 선지자는 먼저 이스라엘을 괴롭힌 국가들의 심판을 예언하였습니다.
다메섹(아람)은 길르앗(이스라엘)을 압박한 죄로 심판을 받으며, 가사(블레셋)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로잡아 에돔 사람들에게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으며 두로는 이스라엘과 맺은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을 잡아 에돔에 판 죄로 심판을 받으며 에돔은 형제 이스라엘을 증오하였기에 심판을 받으며 암몸과 모압은 잔인한 일을 행하였기에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모스 선지서를 읽으며 이 말씀은 구약시대의 말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나라의 백성들의 행위까지도 세심하게 살피시고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시고 심판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남을 괴롭게 한 일은 없습니까? 속인 일은 없습니까? 계약을 파한 일은 없었습니까? 남의 돈을 떼어 먹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셨다가 보응하시고 심판하십니다. 회개하여야 합니다.
또한 아모스 선지자는 유다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죄 때문에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한 삶을 살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방나라는 무지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 멸망하지만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택함을 받고 말씀을 받았기에 그 말씀대로 살아 거룩한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매를 맞습니다. 말씀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말씀을 행하는 자라야 의인입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아모스서를 부지런히 읽고 묵상하여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심판에 대한 세 가지 설교 3-6장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보응하시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였으므로 각처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비를 내리지 아니하였으나 내게로 돌아오지 않고 풍재와 깜부기 재앙을 내렸으나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전염병이 돌게 하였으나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는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너희는 하나님을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 하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가난으로 치신 하나님은 기근으로 치시고 마침내는 전염병으로 치십니다. 하나님의 매의 강도가 점점 높아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어 하나님께로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3.심판에 관한 다섯 가지 환상 7:1-9:10
하나님께서는 아모스에게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다섯 가지 환상으로 알려주셨습니다. 그중에 특히 다림줄에 대한 환상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의미 입니다. 이 말씀에 우리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4.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약속 9:11-1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메시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바댜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오바댜 1:1-4절
본서의 명칭은 이 책의 저자인 ‘오바댜’의 이름을 그대로 명명한 것입니다.
오바댜는 ‘여호와의 종’ 또는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오바댜서는 에돔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 유다나라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당할 때 그 광경을 보고 기뻐하고 바벨론과 동맹을 맺고 유다 백성을 학살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잔인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억하셨다가 마침내 에돔을 심판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유다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본서의 기록 년대는 대략 주전 586년 경으로 보여집니다.
본서는 1. 에돔과 만국의 심판 1-16절 2.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과 회복 17-21절까지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에돔은 중심에 생각하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고 중심에 교만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에돔 족속이 거주하는 곳은 사해 남동쪽 바위가 많은 산악지대로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에돔 족은 자연적인 동굴이나 인공적으로 바위를 뚫어 만든 요새에서 살았습니다. 이런 조건들은 외부로부터 적의 침입을 막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듯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더욱이 수도인 페트라는 약 3km에 걸쳐 펼쳐지는 좁은 암반계곡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아무리 많은 적이라도 적은 수의 군사력으로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돔 족은 누가 우리를 침략할 수 있겠는가 하고 중심에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에돔 족이 범했던 것처럼 중심에 교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남보다 더 가졌다든지 더 배웠다든지 아니면 건강하다든지 하면 이만하면 됐다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과신하게 되는 교만을 갖게 됩니다.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이런 에돔을 향하여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이 오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뛰어넘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끌어내리면 그만인 것이 인간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헛되도다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인간 자신들의 꾀에 속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면서 웃으시고 계실 뿐입니다.
3. 오바댜 1:5-9절까지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도적이나 강도가 들어와도 어느 정도 가지고 가면 남은 것이 있으며 포도를 따는 자가 왔을지라도 간 뒤에는 어느 정도의 표고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에돔은 철저하게 망하여 그 흔적조차 없을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뿐 만아니라 에돔과 화목하던 자들이 배신을 하게 되고 함께 음식을 먹던 자들이 함정을 파 놓는데도 결국 에돔은 지각이 없기 때문에 망하는 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 예언대로 에돔 나라는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망하게 되고 마카비 시대를 거쳐 로마에 의하여 역사상 흔적도 없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상에서 살핀 대로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하는 말씀에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망하고 있으면서도 망하는 줄을 모르는 자,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자 이것이야 말로 얼마나 불행 입니까? 그런데 우리에게 지각이 없다면, 믿음에서 떠나 있으면서 그것도 모르며,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자입니까?
마음에 깨달을 수 있는 지각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4. 오바댜 1: 10-16절에서 에돔은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망하게 될 때 다음과 같은 죄를 범하였습니다.
① 형제 유다가 재앙을 당하고 있을 때 방관하였습니다.
② 유다 자손의 패망의 날에 기뻐하였습니다.
③ 형제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습니다.
④ 더욱 더 큰 죄는 재물을 약탈하고 도망하는 자를 가로막고 남은 자를 대적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형제가 재앙을 당하고 있는데 방관하지는 않습니까? 고난 당하는 이웃을 보고 속으로 내심 기뻐하지는 않습니까? 고난 당하는 이웃 앞에서는 위로하는 척하면서도 뒤돌아 서서는 입을 벌리고 험담을 하면서 죄의 댓가로 고난을 당한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랑으로 서로 덮어주고 감싸주어야 할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상처를 받고 소외되고 따돌림을 당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깊이 우리들 스스로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5. 1: 15절에 결국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심는대로 거둡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원리는 농사의 원리만이 아니라 인생의 원리입니다.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고 긍휼을 심으면 긍휼의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에돔은 행한 대로 보응을 받아 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심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6. 1:17-21절까지는
1) 야곱 족속과 에서 족속을 비교하면서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에서 족속에는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 사로 잡혔던 이스라엘 자손의 회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사로 잡혔던 이스라엘 뭇 자손이 가나안 땅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대로 훗날 유다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고토를 회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는 역사를 살펴보며 우리는 오늘도 이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요나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요나1:1-3절
오늘은 요나서를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요나서는 극적인 요소 때문에 우리가 잘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요나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기는 대략 주전 793-753년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로 보여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요나에게 임하시어 저 원수의 나라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라는 독선적인 민족주의 때문에 하나님의 온 우주적인 사랑과 구원의 의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편견 때문에 아마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본서를 통하여 배울 교훈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회개를 기초로 하여 적용된다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유대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 모든 나라에 미친다는 구원의 보편성을 알 수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본서를 기록한 요나는 엘리야 선지자가 살려준 사렙다(사르밧) 과부의 아들로서 엘리사 선지자의 제자가 되어 그의 뒤를 이른 사람이라고 전하여 오고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와 함께 사역하였던 선지자는 아모스, 호세아 선지자이며 본서의 구성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는 요나, 기도하는 요나, 다시 소명을 받는 요나, 요나의 편견 등으로 구분하여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에게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는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를 싫어하여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도망하여 욥바 항으로 내려가 배를 타게 됩니다. 당시 앗수르는 대제국으로 이스라엘의 원수 국이었습니다. 니느웨는 그 적국의 수도로서 당시 거주하는 인구가 십이만여 명(욘 4:11절)과 거류자까지 합하면 십칠 만명 가량 거주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곳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다시스(서바나 남부, 지중해 끝)로 도망하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요나가 이런 행동을 취하였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요나가 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는가는 그의 잘못된 애국심과 배타적인 선민의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원수 나라였습니다. 따라서 요나는 그들이 죄악으로 망하기를 소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그런 편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어느 개인이나 민족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온 인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편견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욥바로 내려가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배에 오른 후에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은 잠을 자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바다에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즉 요나의 신관입니다. 즉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아마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할 줄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 밑층에 내려가 숨어 있으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줄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요나와 같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고 나의 가정이나 삶의 현장이나 직장이나 일터에서는 안 계시는 것처럼 살지는 않습니까?
요나가 다시스로 향하는 것과 배 밑층에서 자고 있는 것까지도 다 아시고 풍랑을 일으키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보시고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까지도 아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심해지자 요나는 바다에 던지우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셨다가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1: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배에 있으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시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고 멀리 떠나가던 요나도 고난을 통하여 다시 부르셨습니다. 큰 물고기를 이미 예비하신 하나님은 우리 앞길에도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신 것을 믿고 혹시 바다 속 깊은 곳과 같이 어려움에 빠질지라도 낙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게 됩니다.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요나의 모습을 생각하시면서 우리도 고난의 현장에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 임하였습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 것입니다. 결국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서 외치니 온 성이 크게 회개하고 금식하자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사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다는 내용이 3장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하시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불순종하고 거역한다면 결국 우리만 손해일 뿐입니다. 둘째로 니느웨 백성도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회개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교훈입니다. 요나서 4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요나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2장에서(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던 요나의 모습과 3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던 요나의 모습은 간 곳 없고 또 다른 요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나는 자신이 외친 말씀으로 인하여 온 니느웨성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용서함을 받자 요나는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의 교훈을 통하여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요나의 너무나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망각하고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입장에서 보았기 때문에 불평하고 실망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항상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요나의 이중적인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요나서를 통하여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진정한 나 자신의 모습에 대해 토의하여 봅시다.
미가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말씀: 미가 7:7-9
미가 선지자는 갓 지파에 속한 모레셋이라는 작은 마을 출신이며 그가 예언하던 시기는 유다의 여러 왕들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가 통치하던 주전 750-686년 이었으며 같은 시대의 선지자로는 이사야 선지자가 있습니다.
미가서의 중심 내용은 심판에 관한 내용과 희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즉 심판과 구원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살펴보면 일반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으며 귀족과 관리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수탈하고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팔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악행이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 미가 선지자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보호하고 대변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미래의 이스라엘의 회복과 소망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왕과 상류층을 대상으로 예언하였다면 미가 선지자는 서민층을 대상으로 예언하였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당시 유다의 두령들과 치리자들의 죄를 살펴보면
①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였습니다.
② 백성들의 가난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유익을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③ 뇌물을 위하여 재판을 하였습니다.(3: 11절)
④ 밭과 집을 탐하여 빼앗고 취하였습니다.(2: 2절)
이상에서 살핀 대로 당시 두령과 치리자들은 공정하게 해야 할 재판을 뇌물을 위하여 하고, 선을 세우며 악을 미워해야 할 관료 들이 도리어 악에 빠지며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해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어떠하였는지 살펴봅시다.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재물을 주면)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한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선지자들이 자기들에게 재물을 가져다주는 자에게는 평안을 선포하고 축복하지만 자기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자에게는 전쟁을, 즉 공포심과 불안을 조성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은 물질을 위하여 일하고 예언하는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선지자들의 영성을 어둡게 하여 이상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캄캄한 밤과 흑암을 만나게 하였습니다.
제사장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3:11절 말씀에 제사장들도 삯을 위하여 교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지도자들 조차도 물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인하여 어떤 벌이 임하게 됩니까?
3:12절 말씀에서 시온은 밭같이 갊을 당하고 그토록 찬란했던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성전의 산은 수풀이 우거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우상에 빠지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기 이익만 채우고 종교 지도자들조차도 물질에 눈이 어두워서 이제 도저히 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총체적으로 부패해졌습니다.
부패는 곧 멸망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아니 나는 어떻습니까? 남을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깨어 바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6:6-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년 된 송아지보다,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보다 더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의로운 삶을 살면서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의를 행한다는 뜻이며 인자를 사랑한다는 뜻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 가지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구약의 희생 제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이런 세 가지의 삶의 자세로 삶을 살면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때 그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는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 없다면 그 제사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배와 삶은 분리 된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일상의 삶도 예배자의 자세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미가 7: 7-9절에서는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오직 누구를 우러러 바라보아야 합니까?
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의 무엇이 되실 것임을 믿어야 합니까?
3)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어디에 이르게 할 것을 확신해야 합니까?
4) 우리는 마침내 하나님의 무엇을 보리라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까?
미가 7장 7-20절은 미가 선지자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 나타난 미가의 자세가 오늘을 사는 우리 성도들의 삶의 자세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직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우러러보며 구원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는 성도는 세상이나 사람을 바라보거나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 오직 주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나게 해 주실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며 내가 하나님의 의를 보리라는 믿음은 참으로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우리가 이 믿음만 소유한다면 세상이 변해도, 인심이 변해도, 환경이 변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어디에 던지신다고 하였습니까?(7: 18-20)?
주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사유하시며,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박국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하박국 3:16-19절
하박국 선지자는 레위 지파로서 성전에서 악기를 다루는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가 예언하였던 시대는 요시야 왕 말기부터 여호야김이 통치하던 때로 추정됩니다.(주전 611-598년)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할 당시는 요시야왕이 므깃도 전투에서 전사하고 잠시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가 애굽으로 납치되어가고 여호야김이 왕위에 올랐던 때입니다. 여호야김 왕은 왕위에 오르자 애굽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백성들로부터 부당한 세금을 징수하였고 덩달아 관료들은 부패하고 부자는 가난한자를 압제하므로 나라의 형편이 극히 어려운 때였습니다. 이때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유다의 죄악이 이처럼 만연(漫然)한데도 왜 그대로 보고만 계십니까? 하고 묻자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갈대아 나라(바벨론)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유다를 징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하박국 선지자는 두 번째로 질문하기를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더 불의한 갈대아 나라 (바벨론)를 사용하시어 유다를 징계하실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대답은 유다가 자신의 죄 때문에 징계를 받는 것처럼 갈대아도 종국에 가서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이런 상황 속에서라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된다고 권면하십니다. 이에 하박국은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깨달은 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온전히 즐거워하리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본서는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는 겁탈과 강포가 있고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시행되지 아니하며 악인이 의인을 짓누르는 시대였습니다. 어느 때나 항상 불의가 득세하고 악이 성행하였습니다만 유다 나라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의 사회 상황은 더욱 심했던 것 같습니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관료에 이르기까지 부정과 부패로 가난하고 선량한 백성들만 살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이때 하박국이 하나님께 질문을 한 것입니다.
“겁탈과 강포가 있고 변론과 분쟁이 있으며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시행되지 않음은 어찜이니까?
하박국의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너희는 열국(갈대아 나라)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인 갈대아 나라를 일으켜 너희 나라(유다 나라)를 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며 하나님께서는 침묵하고 계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다 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언행 심사를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다 보고 아시며, 억울함을 다 보고 아시며, 사회악과 부조리도 다 보시고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흔히 역사적으로 큰 죄악들이 해결되지 않고 역사 속으로 묻혀 버리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시고 언젠가는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갈대아 나라의 침략이 있겠다는 말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 어찌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자를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어찌하여 하나님의 택한 선민인 유다 백성을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 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 유다 백성이 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나라 바벨론보다는 덜 악하지 않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두 번째 질문을 하나님께 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듣기 위하여 홀로 성루에 앉아서 기다리고 바라며 오직 하나님의 대답만을 소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인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면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통하여서든지, 마음에 확신을 주시든지, 다른 사람을 통하여서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 응답하여 주십니다. 고요함 속에 기다려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기다리고 바라는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성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며 정녕 응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때가 있으며 거짓되지 아니하며 정녕 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인심도 변하고 문화도 변하고 환경이 변해도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하고 진실이 없는 세상에서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갈대아(바벨론)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되리라고 하였습니까?
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너도 노략을 당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벨론도 망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인류의 역사가 아무 주인이 없이 그저 돌아가는 것 같지만 인류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관자도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인류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음을 깨달은 하박국 선지자는 이제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직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
우리 신앙인은 어떤 환경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나훔서와 스바냐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말씀: 나훔 1:7절
오늘은 소선지서 중에 나훔서와 스바냐서를 함께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나훔서는 “엘고스 사람” 나훔에 의하여 기록되었습니다.
본서는 주전 621-612년경 유다 왕 요시아 왕 때이며 앗수르 멸망 직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나훔 선지자는 구약 다른 곳에 전혀 언급되지 않음으로 그의 신상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다만 유다의 선지자로 추정될 뿐입니다.
본서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의 나라 니느웨는 요나 선지자의외침을 듣고 회개하므로 심판이 연기되기는 하였으나 그 후에 다시 범죄함으로 요나 선지자 이후 150년 만인 주전 612년에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본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과 국가의 주(主)가 되실 뿐 아니라 불의한 국가와 백성은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앗수르는 주전 722년에 북방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아갔으며 남방 유다에게도 항상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는 잔인하고 악독한 앗수르를 왜 파멸시키지 않는가 하고 많은 회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훔 선지자가 나타나서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하며 죄인은 결코 사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의 멸망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한편 나훔 선지자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신실한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안식과 기쁨과 소망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거역하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 분이십니다. 니느웨성이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할 때는 내리시기로 작정하셨던 심판을 연기하셨지만 또 다시 악을 범하고 잔인해진 니느웨성을 더 이상 남겨두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잘 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상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 개인이나 나라나 민족이 살아남은 예가 없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 거역하거나 대적한 자도 보응을 당하거든 하물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복하여야 하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나훔선지는 여호와 하나님은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에게는 무서운 심판자로 나타나지만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버지 같이 선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자기를 의뢰하는 자가 환난을 당할 때 피난처요 산성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아시느니라”에서“안다”라는 말은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잘 아는 것처럼 아시고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참 좋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의지하여야 하겠습니다.
나훔서 전체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 되어 있으며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스바냐서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스바냐 3:17절을 읽겠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의 현손(히스기야가 4대조)으로 주전 627-625년경 (요시야 왕 초기)에 본서를 기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은 므낫세와 아몬의 사악한 통치가 끝나고 요시야 왕이 즉위하였으나 근 50년 동안 만연해 있던 우상 숭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습니다.(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전). 이러한 시기에 스바냐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강력하게 경고하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한편 스바냐 선지자의 예언 가운데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얻게 될 미래의 영광을 약속하기도 합니다.
이 시간은 본서의 후반부인 남은 자의 구원에 대하여 상고하기로 하겠습니다.
습3:11절“그 때에 내가 너희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 너로 나의 성산에서 다시는 교만하지 않게 할 것임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을 숭배하며 교만하게 행하다가 마침내 이방에 포로가 되어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포로생활동안에 교만하던 마음과 자랑하던 마음이 다 꺾여지고 이제는 겸손하게 됨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 그리고 자신을 자랑하는 자를 싫어하실 뿐 아니라 마침내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희 중에 남겨 두리라고 하였습니다. 돌아온 남은 자들은 곤고하고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으며 먹으나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자도 곤고하고 가난한자들이요 장차 천국에 들어갈 자도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심령이)가난하고 곤고한 자들 가운데 계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전능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잠잠히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며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실 수 있도록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시고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도록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에 남은 자로, 계시록에 나오는 이기는 자로 살아야 하겠습니다.1945년 10월 히틀러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던 교회가 해방을 맞이하자 그들은 그동안 세속화 된 신앙을 정비하면서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고백이 담긴 “슈투트가르트 선언문”을 만들어 공포하였습니다.
첫째, 더욱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하지 못한 죄를 자복합니다. 둘째, 더 진실하게 기도하지 못한 죄를 자복합니다. 셋째, 더 감사와 기쁨에 넘쳐 살지 못한 죄를 자복합니다. 넷째,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학개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말씀: 학개 1: 1-6절
오늘은 학개서를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본서는 주전 520년 다리오 왕 이년 유월 초하루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학개를 통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바벨론을 정복한 바사(페르사)의 고레스 왕은 주전 538년 유대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해방령(귀환령)을 내렸습니다. 제1차 귀환은 예수아와 스룹바벨의 인도로 약 5만의 유대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서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인의 방해로 이 성전 건축공사는 16년 동안이나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 사이에는 비관적인 풍조가 만연되고(아직 성전 건축 시기가 아니다) 대부분 영적 무기력 상태에 빠져 있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의 집짓고 살기에 바빴으며 성전 건축 공사는 방치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 때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일어나 성전 건축공사를 독려하여 그 결과 주전 516년에 성전 재건의 사역이 완성되었습니다. 특히 학개 선지자는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형통치 못한 이유를 성전건축을 중단한데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하며 성전을 건축하라고 독려하며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학개서의 핵심이 되는 주제는 여러 가지 질문 형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1.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니라.’ 혹은 ‘추억하라’ (1:5,7, 2:15,18.)
2. ‘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1:13, 2:4.)
3.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라’(2:6,12.)
이와 같은 말을 반복하여 사용하므로 당시의 상황과 주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서는 구약에서 오바댜서 다음으로 분량이 적지만 본서가 주는 교훈은 매우 중요합니다. 학개 선지자는 불순종의 결과와 순종의 결과를 명백하게 대조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기대하기 전에 먼저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서는 첫째로 책망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1-15절
학개 선지자는 성전 공사가 중단 되었는데도 자기들의 집을 짓고 꾸미기에 바쁜 백성들을 책망하면서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板璧)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1:4)”고 책망하며 또한 너희 들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원인이 바로 하나님의 전에 대한 무관심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책망을 들은 백성들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성전 재건 공사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2.격려의 말씀 2:2-9절
성전이 건축되자 옛 솔로몬의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이 2차 성전이 솔로몬 성전보다 초라하다고 느꼈습니다. 이때 학개 선지자가 이 성전의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크리라고 소망의 말씀을 전합니다.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 전의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2:7-9)”
3. 하나님의 복을 약속하심 2:10-19절
백성들에게 악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섬기기 시작할 때부터 복을 내리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너희는 오늘부터 이전을 추억하여보라 구월 이십사일 곧 여호와의 전 지대를 쌓던 날부터 추억하여보라 곡식 종자가 오히려 창고에 있느냐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석류나무, 감람나무에 열매가 맺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2:18-19)”
4. 미래에 대한 예언의 말씀 2:20-23절
미래의 어느 날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진동하고 열국을 멸망할 것이나 그 날에 내가 (하나님) 너를 (스룹바벨을)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라고 하는 말씀은 메시아가 오셔서 메시아 왕국을 세우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개서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다가 악한 무리들의 방해로 인하여 성전 건축이 중단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때에 백성들은 아직 하나님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며 성전 건축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즉 때가 아직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하고 계시는데 인간 편에서 때가 아직 아니라고 지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집을 짓기에는 바빴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우선적으로 해야 할 주의 일을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미루면서 나의 일에는 열심을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전은 건축이 중단된 채 황무해 있는데 백성들은 호화로운 장식을 한 집에 거하였습니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건축을 하다가 중단 상태에 있는 보기에도 앙상한 성전과 잘 장식된 사람들의 집을 비교해 보십시오. 이처럼 학개 선지자 당시 백성들은 성전에 대하여 무관심 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전에 대해, 주의 일에 대해, 교회 각 부서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무관심하자 하나님께서는 복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 결과 많이 뿌릴지라도 수입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입어도 따듯하지 못하며 삯을 받아도 그것은 터진 전대(돈주머니)에 넣은 것처럼 새어나가 버렸습니다.
아니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불어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학개 선지자가 나타나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 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의 말씀으로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학개 선지자의 격려에 힘입어 백성들이 일어나 힘을 모아성전을 건축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완공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기를 시작하자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스가랴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스가랴 4:1-10절
스가랴 선지자는 학개 선지자와 같은 시대에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기록 년대는 주전 520년-480년경으로 봅니다.
스가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가 기억하신다.”입니다.
스가랴는 학개와 같이 바벨론에서 태어나서 조부를 따라 귀국하여 학개 선지자 보다 2개월 후에 예언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학개 선지자에 비해 스가랴 선지자가 나이가 젊었으므로 더 오랜 기간동안 예언활동을 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스가랴서는 학개서와 같이 성전 건축 에만 국한된 예언이 아니라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와 종말론적 주제가 예언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스가랴서를 미래를 말하는 책이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한 책이라고 합니다. 본서는 구약에서 가장 많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다양하게 하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사자 (3:1), 의로운 순(3:8,6:12), 일곱 개의 눈을 가진 돌(3:9), 그의 인성(6:12), 왕인 제사장(6:13), 겸손한 왕(9:9-10), 나귀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심(9:9절), 선한 목자(9:16절), 모퉁이 돌(10:4), 은 삼십 에 배반당함(11:12-13), 찔림을 받은 자(12:10),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13:1), 버림받은 목자(13:7), 감람산에 오심(14: 3-8), 의로운 왕으로 통치(14:9-11) 등입니다
본서는 전체 14장으로 전반부는 1장-8장까지이며 후반부는 9장-14장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1-8장)는 포로 해방이전의 상황을 반영하는 환상들과 이미 성취된 과거 상황이 결합된 예언의 말씀으로 이 예언의 내용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구속의 의미를 갖게 되며 스룹바벨에 의하여 지어진 지상의 성전은 하늘의 성전을 예표하고 있으며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관을 씌우는 것은 장차 순으로 상징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전반부에 여덟 개의 환상이 나오는데 말을 탄 네 기사, 네 뿔과 네 공장(工匠), 척량(尺量)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선 대제사장 여호수아,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 날아가는 두루마리, 에바 안의 여인, 네 병거 등입니다.
여기 여덟 개의 환상은 장차 메시아 왕국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계시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남은 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여 성전공사를 이룩하게 하려는 것으로 봅니다.
당시 스룹바벨은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인하여 성전건축공사를 중단하고 자신의 힘과 능력의 미약함을 깨닫고 낙심상태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에 스가랴 선지자는 스룹바벨에게 성전 재건 공사가 그와 같은 세상적인 힘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역사로 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격려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까?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나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요일 5:4절 말씀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을,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를,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소망을 가진 자들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나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힘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내다가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성실과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8:3,7-8)
또한 하나님께서는 때가 이르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12:10)
하나님께서 간구의 심령을 부어 주셔야 간구 할 수 있고 회개의 심령을 주셔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약속의 말씀에 따라 은총과 간구의 심령을 부어 달라고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리라고 하였습니다.(13: 1절)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죄로부터 정결과 부정으로부터의 정결을 상징하는 ‘정결케 하는 물’로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뜻합니다. 죄를 범한 자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케 하는 물을 뿌림으로 정결케 되듯이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과 부정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통하여 정결케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잘 7절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개에는 더러움을 씻는 정결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 예수께서는 온 인류와 죄의 더러움을 씻는 샘이 되십니다. 이 샘에 죄 씻기를 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14:4)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14:9)
이 말씀들은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의로운 통치를 하실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라기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말라기 1: 1-3절
오늘은 소선지서의 마지막 책이요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를 함께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민족들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격려에 힘입어 주전 516년에 성전을 완성하였습니다. 그 후 에스라의 인도로 2차 귀환한 수천 명의 유대인이 합류함으로 유대인 공동체는 더욱 굳건해졌으며, 느헤미야의 귀환과 성벽 재건으로 이제 메시아 왕국의 대망을 그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선지자들이 예언한 영광스러운 왕국 건설이 이루어지지 않자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형식주의로 흘러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이 헛되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무거운 짐이 되었으며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였고 바치는 제물도 눈먼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말라기 선지자가 나타나 백성의 죄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다시금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본서의 내용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스라엘의 타락상,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마치 자녀가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를 향하여 나에게 무엇을 하여 준 것이 있느냐고 항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변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답변합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고 말씀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에서와 야곱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야곱을 사랑하고 선택했던 것처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주권적이요 선택적인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앞에 선택을 받고 사랑을 받은 것은 그들의 행함이나 의로움에 있는 것이 아니요 순전히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택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은혜 아래 사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함이나 외로움이 전혀 계산되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으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4-7)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 리는 제사를 드리되 형식적으로 드렸으며 제물을 드리되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으로 이것이 곧 주의 이름을 멸시하는 일입니다.
가령 우리가 윗사람에게 선물을 드릴 때 흠 있는 것으로 드린다면 그것은 곧 그 사람에 대한 결례요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을 모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당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흠 있는 것으로 드리면서 우리가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반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는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십니까?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하던 그때의 제사와 오늘의 예배를 연관지어 생각해 봅시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였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면서 하나님을 경히 여기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해 경시하는 태도가 만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악이 성행하며 심지어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하나님이 계시면 악인이 득세하겠는가 하고 말로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의 불신앙적인 말 한마디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을 괴로우시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계시면 왜 악이 득세할까 하는 말도 삼가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면 복을 받고 안 바치면 복을 못 받는 다는 차원을 떠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구원을 받되 조건 없는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신 은혜에 감격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예물로 십일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말을 분명히 들으시고 그 이름을 소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해 두십니다.
②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고 아들을 아끼듯이 하나님께서 아껴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③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아무리 작은 탄식 소리, 기도 소리라도 분명히 들으십니다. 그리고 결코 세상 가운데서 지쳐 그냥 넘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를 아껴 주시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다른 사람이 분별할 수 있게 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의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고 하였습
구약과 신약사이의 역사 (중간사(中間史))
성경: 요한 5:39절
오늘은 마태복음을 공부하기 전 중간사를 간략하게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와 신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과의 기간이 약 400년간의 간격이 있는데 이기간의 역사를 구약과 신약의 중간사라고 합니다.
이 중간사(中間史)에 대하여 먼저 역사를 살펴보고,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에 대해 공부하고, 신약 성경의 구성에 대해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1. 구약과 신약 사이의 중간사(中間史)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이후 신약의 첫 권인 마태복음 사이는 시기적으로 약 40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즉,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 학개, 스가랴, 말라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은 약 400년 동안 침묵하시다가 예수님께서 오시기 6개월 전에 세례요한을 보내셔서 회개를 외치고 주의 길을 예비케 하셨습니다. 이 400년간의 유대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바사 왕 고레스의 해방령에 의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1차로 예수아와 스룹바벨의 인도로, 2차로 에스라의 인도로, 3차로 느헤미야의 인도로 고국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짓고 성벽을 재건하게 됩니다.
그동안 유다 나라는 바사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사 나라가 점점 쇠퇴하여 주전 331년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망하고 유다는 그때부터 헬라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알렉산더 대제는 젊은 나이에 바사를 정복하고 헬라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는 가는 곳 마다 전쟁에 승리를 이끈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주전 323년 33세란 젊은 나이에 죽자 그의 나라는 그의 부하 장군들에 의해 4등분으로 분할됩니다. 애굽과 유대지방은 톨레미 왕국이 지배하였으나 시리아 왕국을 통치하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BC175~164)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고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이방 신상에 제사를 드리는 치욕스러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명을 내려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 일을 금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하고 어린아이에게 할례를 행하지 못하게 하며 헬라 문화에 동화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저항하여 일어난 운동인 마카비 저항운동이 성공하여 주전 164년부터 63년 로마의 폼페이 장군이 팔레스틴을 정복하므로 이때부터 유대나라는 로마의 식민지가 됩니다. 이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ㅡ 바사왕 고레스 해방령(주전537년) - 바벨론에서 귀환 - 바사가 헬라 알렉산더에게 패망(주전331년) -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헬라가 사등분으로 나누어짐 - 시리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다나라 점령(주전175-164) - 맛디디아 인도하에 마카비 저항운동 성공으로 1백년간 독립(164-63) - 예수님이 오심
이상에서 살핀 대로 유다 나라는 로마의 식민지로 정치적으로 잃어버린 나라를 회복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종교적 배경은 70인으로 구성된 공회와 (종교적인 최고기관) 바리새파 (엄격한 율법주의자들, 독선적이며, 전통을 중시하고, 형식에 치우침)와 사두개파 (내세와 부활을 부정함, 자유사상가들, 세상적 권력과 결탁함)와 엣세네파 (금욕주의 은둔파들, 경건 주의자들)와 메시야를 소망하는 남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시므온, 안나 등) 당시의 사회상은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 백성들과 로마에 결탁하여 살아가는 세리들과 형식주의에 빠진 종교 지도자들과 잃어버린 나라를 찾겠다고 요인들을 암살하는 열심당원들이 있었습니다.
2.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
구약은 옛 언약이란 뜻이고 신약은 새 언약이란 뜻입니다. 구약은 시내산에서 세운 언약이고 신약은 십자가에서 죽으심 (피 흘리심)으로 세운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시내산에서 언약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 출 24:1~8을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지키지를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렘31:31-34절을 읽고 겔36:22-28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을 약속하시면서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즉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며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옛 언약아래서는 지키지 못한 하나님의 율례를 새 언약에서는 새 영을 우리에게 주시고 새 마음을 주심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게 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예수님을 보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셨습니다. 눅 22:14~20을 읽고 히9:11-15절을 읽겠습니다.
구약은 참 형상에 대한 그림자라면, 신약은 실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히 10:1절을 읽읍시다. 구약의 모든 제사나 예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며 참 형상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법이나 제사는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있는 그림자요, 실체요 참형상인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하셨습니다. 우리 골 2:16~17절을 읽읍시다. 구약의 절기나 예법은 장래일의 그림자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은 약속이요 신약은 성취입니다. 구약에서 메시아를 보내겠다고 약속하고 예언하였는데 신약에서는 그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안에 신약이 감추어져 있고(율법 안에 복음이) 신약에서 구약이 완성되었습니다(복음 안에서 율법이 완성 됨). 이제 구약에서 약속하고 예언한 대로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갈 4:4~5절을 읽읍시다.
3. 신약 성경의 구성
신약 성경은 전체 27권으로 복음서(마태-요한) 역사서(행전) 서신서(롬-유다서) 예언서(요한계시록)로 되어있습니다.
마태복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말씀 마태 1:21-23절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12제자중 하나인 마태(9:9-13,10:2-4)에 의하여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주후60-70년경에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레위라고도 불리는 마태는 원래 로마제국을 위하여 일하는 세금 징수원(세리)이었으나 그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된 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목격자로서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이신 것을 본서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서의 신분인 왕으로 오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을 인용하면서“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또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등의 표현들(1:22,2:5,2:23,3:3,8:17,12:18-21,13:35,21:4)과 더불어 약65회가 넘게 많은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구약의 메시아적 예언들을 성취하신 다윗 왕가의 자손, 곧 유대인의 왕이심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모든 구약의 성취라는 사실을 모형론적 방법을 통하여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 보다 더 큰 이” 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성전 모형론으로 예수님 자신이 성전 보다 더 큰 분이라고 선언하심으로 성전 모형론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서의 성전 기능과 권위가 자신에게 이전 되었고 자신에 의하여 성취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요나 모형론을 통해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고 하셨으며, 솔로몬의 모형론을 통하여 “솔로몬 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하심으로 구약을 성취하신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제시 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예수님의 오심이 구약의 율법을 성취하시려고 오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려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5:17)
이러한 방식으로 마태복음은 구약과 신약, 즉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에 다리를 놓는 가교(架橋)적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바로 그 메시이시며 또한 이방인 중에서 개종한 신자들에게는 예수님은 단순히 유대인의 왕이 아닌 장차 다시 오실 만유의 심판주로서 언젠가 하늘 영광 중에 자기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들을 심판하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하고 있습니다.(16:27, 25:31-32)
누가가 기록한 예수님의 족보(눅3:23-38)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반면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를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시작을 합니다.(1:1-17)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제자들의 선교 범위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 한정하셨습니다.(10:5-6,15:24)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으나 유대인들이 왕으로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므로 이스라엘의 위치가 믿는 이방인들에 의하여 완전히 대치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 아들의 비유(21;28-32), 포도원 농부의 비유(21:33-46), 혼인잔치 비유(22:1-14)와
특히 21:4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백성의 민족적 특권이 이방 민족들에게 옮겨지게 된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는 말씀과 22:8-9절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는 말씀과 8:12절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말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또한 선교의 범위를 초기에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 한정하셨으나(10:5-6), 부활하신 이후에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28:18-20)
이것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께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셨으나 유대인 대부분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여 하나님의 초청에 불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특권을 상실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개인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에 들 수 있는 기준이 민족적 신분이 아닌 그가 이스라엘 백성이건 이방인이건 간에 하나님께 대한 회개하는 마음과 믿음의 반응이 되었습니다.(21:43) 그 예로서 칭찬 받은 백부장의 믿음과(8:5-13)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백부장(27:54)등이 있습니다.
복음서 가운데 유일하게 마태복음에만 ‘교회’라는 용어가 언급됩니다.(16:18,18:17)
‘교회’란 ‘애클레시아’로 칠십인 역에서 대개 히브리어 단어 ‘카알’을 번역하는데 사용되었는데 ‘회중’이라는 뜻으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배척하므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왕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자들로 새 이스라엘 즉 참 이스라엘인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 탄생하는 것이 곧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시려고 의도적으로 열두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본서는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왕이 소개됨 1:1-4:11절
왕의 족보, 왕의 탄생, 왕이 기름부음 받으심, 왕이 시험 받으심.
2. 왕이 왕국을 선포함 4:12-15:20절
왕의 백성의 자격, 사명, 윤리적인 삶,
왕의 선교, 교육, 치유사역, 왕의 나라의 실상 (천국에 관한 비유)
3. 왕이 거절당함 15:21-20:34절
4. 왕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심 21-27장
왕이 언약을 세우심, 잡히심, 죽으심
5. 왕이 부활하심과 왕의 지상명령(至上命令)
부활하심, 사명을 주심, 승천하심
마가복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마가복음 10:45절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일컬어 ‘사복음서’라 합니다. 특히 그 가운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같은 관점에서 쓰여졌기에 때문에 ‘공관(共觀)복음서’라고 합니다. 공관복음서는 전체구조나 내용이 아주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각 복음서는 쓰여진 대상과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순서나 내용이나 그리고 그 사용된 단어들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그 내용이 간결하게 압축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족보와 탄생에 관한 기록도 생략 되었으며 곧 바로 예수님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복음서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각 복음서가 기록된 궁극적 목적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심과 그를 믿어 영원한 생명(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서의 저자 마가는 이름이 마가(골4:10,벧전5:13) 또는 마가 요한(행12:25,15:36)으로도 나타납니다. 아마 ‘마가(로마식 이름) 요한(히브리식 이름)으로 아마 본명은 요한이고 마가는 로마식으로 개명한 것 같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며(행12:12) 그의 집은 마가의 다락방으로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셨던 곳이며 또한 초대 교회가 탄생한 곳이기도 하였으며 옥에서 나온 베드로가 찾아간 곳으로 이곳이 교회의 집회 장소로 모였기 때문일 것입니다.(행12:12)
그는 바나바의 생질(조카)로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일차 선교여행 도중에 밤빌리아 버가에서 돌아옴으로 인하여(행13:13) 이차 선교여행을 떠나려 할 때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로 인하여 불화를 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행15:36-41). 그 후 바울이 로마 옥에 갇혀있을 때 디모데에게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는 말씀을 보아 그가 주의 일에 충실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사도 베드로가 벧전 5:13절에서 “내 아들 마가”라는 지칭을 사용하므로 베드로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마가가 베드로에게 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아서 마가복음을 베드로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본서는 사복음서 중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복음서로서 예수님을 고난 받으시는 종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각 복음서 마다 예수님에 대하여 묘사하는 특징들이 있습니다. 주후64년경부터 네로 황제의 박해로 인하여 바울과 베드로 등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하면서 로마 교회는 큰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고난과 박해를 당하면서 죽음의 위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 격려하여야 할 필요성을 갖고 대략 주후65년에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기전인 주후70년 전으로 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으나 이 세상에서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드림으로 구원하러 오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죽기까지 순종의 삶을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더라도 참고 인내하면서 순종의 삶을 살면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도(弟子道)는 자기를 부인하고 고난을 당하여도 순종의 삶을 살면서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길입니다. 자기부인의 삶과 섬김과 순종의 삶이 없이는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가 없음을 본서를 통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생략되었으며 많은 이적과 기사(20회)가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치유(治癒)와 이적과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인 새 시대가 자신을 통하여 임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서는 전체 16장으로 서언(1:1-15)과 결언(16:14-20)을 잘 이해하면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언 -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하고 기록하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으로 마가복음의 주제이며 또한 마가복음의 기록 목적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이시며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이요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가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그리스도(히브리어로 메시아) 되심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 바로 마가복음의 핵심내용이요 목표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사역과 복음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지식적인 동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즉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나의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주인 되는 것을 포기하고(자기 부인) 주님을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은 바른 동기와 목적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믿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영원한 형벌과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자녀)으로 삼아 왕 되시는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하나님의 순종하는 자녀로 삼는 것입니다.
결언 -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하시고 이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은 서언과 결언 사이에 예수님의 활동하심과 그의 인격과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내용이 담겨있다 하겠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마가복음을 읽어야 합니다.
누가복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누가19:9-10절
누가복음은 비시디아 안디옥 출신으로 직업이 의사인 누가(골4:14)가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을 받아드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에 그의 동역자로서 항상 동행하였습니다.(딤후4:11) 누가는 1차적으로는 그와 친분이 있었던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갖게 하고( 눅1:1-4,행1:1-2) 2차적으로는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구주가 아닌 이방인의 구주도 되심을 알게 하기위하여 이방인에게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자신이 이방인(헬라인) 이였으며 84세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간 사람입니다.
누가는 신약성경의 저자 가운데 유일하게 이방인입니다. 또한 신약성경 저자들 중 가장 방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본서의 기록 시기는 누가의 두 번째 서신인 사도행전을 기록하기 전인 주후60-65 년 사이에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목적은 많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예수님의 생애를 탄생부터 사역, 죽으심과 부활, 승천하심까지를 잘 정리하여 예수님이 곧 온 인류의 구주가 되심을 알리기 위함인 것으로 봅니다.
누가는 본서에서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선포하고 온 인류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집에서 구원의 뿔로 오시며(1:69)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1:71)
예수님은 출생하실 때 천사들에 의하여 ‘구주’로 선포되었으며(2:11), 이방인들에게는 빛을,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3:6)
본서에서 누가는 예수님을 유대인만의 메시아로 묘사하지 않고 모든 세대의 온 인류의 구세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서 아담의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3:23-38)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어느 특수 인종을 떠나서 모든 인류에게 용서와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 이방인에게도, 그리고 신분이 높은 사람뿐만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과 버림받고 소외된 자에게도 허락되었으며, 부자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허락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유대인들의 틀을 벗어나 온 인류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이방인을 위한 복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본서는 찬송의 복음이라 할 정도로 찬송이 많이 기록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으로 5개의 찬양이 기록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 사가랴의 찬양, 천사들의 찬양, 시므온의 찬양, 마지막으로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하고 본서는 끝을 맺고 있습니다.
본서는 기도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용어는 본서에서 약50번 나오는데 비해, 마태복음은 17번, 마가복음은 12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가랴의 기도, 안나의 기도,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기도하시므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였으며,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고, 기도하신 후 제자들을 선택하셨고, 기도하시기 위하여 변화산에 올라가셨고,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마지막 생을 마치셨습니다. 이와 같이 누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기도의 생애로 묘사고 있으며 그 외 많은 사람들의 기도가 나오고 있으며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기도하셨다면 허물과 실수가 많은 우리들은 더욱 더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은 곧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하여 기도하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본서에서는 성령의 사역이 복음서 가운데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서에 성령이 17회 언급되어있는데 비하여 마태복음은 12회, 마가복음은 6회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으며,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셨고, 성령의 충만하심과 인도하심으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축출하셨고, 많은 이적을 행하셨으며,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24:49)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셨다면 우리는 더욱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주의 일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본서는 성령과 기도의 연관성을 말하면서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은 통로라 하겠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막9:29)
본서는 크게 네 구분 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의 어린 시절 1:1-4:13절
요한의 출생 예고와 예수님의 출생 예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탄생하심과 어린시절, 요한의 선포와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심, 예수님의 족보와 광야에서 시험 받으심.
2.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 4;14-9;50절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심, 많은 기적들을 행하심, 제자들을 부르시고 파송하심, 오천 명을 먹이시고 변화산에서 변형되심, 제자들에게 당부하심.
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하신 일 9:51-19:44절
제자도를 말씀하심과 70명을 파송하심, 선한 사마리아 비유와 기도에 대한 가르치심, 잃은 양과 되찾은 은전과 아들의 비유, 돈에 대한 가르침과 섬김에 대한 가르침, 한사람 사마리아인의 감사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심과 삭개오의 집에 유하심.
4.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 19:45-24:53절
성전에서 가르치심과 종말에 관한 교훈, 최후의 만찬과 감람산에서 기도하심, 잡히시고 심문 받으심과 베드로의 부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심, 부활하심과 엠마오도상에서 두 제자를 만나시고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시고 승천하심.
요한복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요한3:16-19절
요한복음은 세베대의 아들이요 야고보의 형제이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의 한 사람인 사도 요한(막3:17, 요한21:2)이 기록하였습니다. 본서를 기록한 때는 정확하지는 않고 대략 주후 90년경으로 봅니다. 기록목적으로는 본서는 복음서중에서 그 기록목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니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0-31)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첫 시작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1:3),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10:30)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육신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신 7가지 표적(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표적(2:1-11),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5:1-18),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로 오천 명을 먹이심(6:1-15), 물위로 걸으심(6:16-21),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고치심(9:1-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1-44).)과 7번 나는... 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6:48-51), 나는 세상의 빛이니(8:12), 나는 양의 문이니(10:7-10), 나는 선한 목라라(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2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15:1-7) 라는 나는 .... 이다 라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다 는 에고 에이미라는 말로서 출애굽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즉 나는 여호와다 라는 표현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 라는 표현으로 자신이 성자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중심 되는 말씀이 곧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3:16) 그리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3:36),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5:24),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6:47)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잘 설명하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영접하는 것’(1:12), ‘순종하는 것’(3:36), ‘먹는 것’(6:57), ‘듣는 것’(6:60)으로 말합니다. 즉 나의 생각과 의지대로 행하던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주로 받아드리고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의지하고 나의 왕이시오 나의 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과 연합되어 예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먹는다’ 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6:47-57)
공관복음에서는 영생을 오는 세상에서 얻는 삶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18:28-30)
요한복음에서는 영생의 현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5:24),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6:47)) 믿는 자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뜻은 영생을 죽음이후까지도 이어지는 생물학적인 생명을 영생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미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생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들은 이미 영원 속으로 들어와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심판이 사후에 일어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요한복음에서는 심판의 현재성을 말하고 있습니다.(“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3:18)
요한복음에서 주된 사상 중에 하나가 성전사상입니다. 성육신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1:14))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로 영원한 거처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구원받아야 할 온 세상 사람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유대인을 포함하여(4:22), 사마리아인(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통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알리심 4장)과 헬라인(12:20)과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10:16)과 제자들을 통하여 믿게 될 모든 사람들(17:20)이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의 구조는 1장은 서론이며 2장부터12장까지는 표적의 책이라 하고 13장부터 20장까지는 영광의 책이라 하고 21장은 마지막 사명을 맡기심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행전 1:1-8절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과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과 부활하시고, 승천하심까지를 기록하였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이를 기록하였노라”(1:1-2)
누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성령이 오심으로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이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사마리아, 안디옥을 넘어 소아시아 마게도냐, 아가야, 그리고 마침내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에까지 선포 ㅡ 확장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주권적 계획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면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성령의 행전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행전일 뿐 아니라 성령께서 일하시는 성령행전이며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므로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을 덧입기 위하여서는 기도하여야 하기에 기도행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초기 역사를 알 수 있으며 교회의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며, 가르치시며, 섬기시던 그 사역을 승천하신 후 성령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신앙 공동체인 것입니다.
어두움의 세력들이 물러가고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방언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인 것입니다.
본서 저자인 누가는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9:31) 고 하였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오늘날 그리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있는 아드리아해에 있는 유고슬라비아 영토임)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遍滿)하게 전하였노라”(롬15:18-19) 고 전하면서 로마를 거처 서바나로 가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가지고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롬15:28)
사도행전에 ‘증거’라는 말을 30회 이상 사용하므로 참된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그의 나라와 복음과 구원을 증거하는 교회이어야 하며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증인이 되라고 부르셨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28:31)고 끝을 맺음으로 그 내용이 완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함을 말씀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서신서 사이의 연결을 하여주는 바울서신의 역사적 배경이 됩니다. 만약 사도행전이 없다면 바울이 편지를 쓴 그 교회의 기원과 배경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봄으로 사도 바울의 활동과 바울 서신의 배경을 잘 이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복음서와 서신서를 연계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서의 구조와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1. 2중 구조.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중심인물을 중심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베드로의 사역 (1-12장) : 예루살렘에서 안디옥까지.
이방 지역을 중심으로 한 바울의 사역(13-28장) : 안디옥에서 로마까지.
2. 3중 구조.
이 구조는 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말씀을 근거하여 지리적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즉 예루살렘에서의 사역(1-7). 유대와 사마리아 사역(8-12장), 땅 끝까지의 사역(13:28)입니다.
본서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계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다가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오순절 날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시므로 예루살렘 교회가 크게 부흥하게 되며 큰 이적과 기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부흥과 함께 환란을 당하게 되며 스데반의 순교로 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피하여 흩어지면서 복음이 사마리아와 이방인 지역에 까지 전파되면서 허다한 무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까지는 예루살렘을 중심하여 베드로가 사역을 이끌게 됩니다.
이때 성도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을 하다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지를 방문하면서 수많은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안디옥을 중심으로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복음이 이방 세계로 확장하게 됩니다. 소아시아 지방으로 확장된 복음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거처 마침내 세계의 심방부인 로마에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됩니다.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도행전을 우리 자신들이 우리시대에서 써내려가고 있는 것임을 알고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로마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롬1:16-17절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이 끝날 무렵인 주후 57년경에 고린도에서 한번도 방문해 본 일이 없지만 잘 알고 있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로마교회는 아마 오순절 성령강림 때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던 경건한 유대인들이(행2:10)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로마교회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소수의 유대인들과 이들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다수의 이방인들로 구성된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심장부이었기에 또한 로마교회는 세계교회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해한 복음을 체계적으로 이들에게 전하고, 로마교회안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갈등 문제들(음식 문제와 절기문제, 롬14-15장)을 해결하고, 또한 그동안 안디옥 교회의 지원을 받아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선교한 사도 바울은 이제는 로마교회의 지원을 받아 서바나(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대한 변증적 목적과 또한 목회적 목적과 선교적 목적으로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롬1:8-14, 14-15장, 15:14-33)
본서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복음과 아들의 복음.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쉽게 설명하여 신앙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말하며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하여 인류를 새 창조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시고자 하시는 구원계획을 세우셨기에 하나님의 복음이라 합니다. ‘아들의 복음’이란 성자 예수님께서 새 창조될 인류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대속적 대표적 죽음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셨기에 ‘아들의 복음’이라 합니다. 본서에서는 ‘아들의 복음’을 ‘기독론적 복음’과 ‘구원론적 복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기독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 또한 복음을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의(義)라고 하여 구원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1:16-17) 본서에서 기독론적 복음과 구원론적 복음 이 둘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를 때 이것은 예수님을 초월자 하나님에게서 오신 전권대사로서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그분의 뜻을 행하려 오신 분으로 보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사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사랑만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사탄에 종노릇하며 어두움의 인생을 살던 우리들을 다시 자녀 삼으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義)이고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지킨 것이 이방인인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전체와의 관계를 위한 대표성을 띠고 있습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을 의존하며 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복 주심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인간이 언약을 파기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그럴 의무가 없었음에도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통하여 그 관계를 회복하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 된 것을 칭의(稱義)라 합니다. ‘의’(義)는 이와 같이 관계론 적이면서 또한 죄인인 우리를 예수님의 의로 인하여 의롭다고 여겨 주심으로 법정적인 뜻도 있습니다. 의(義)에는 현재적 의(義)와 미래적인 의(義)로서 마지막 심판 때 예수님과의 관계 때문에 재판장 앞에서 무죄를 선고를 받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신실한 의는 아들의 신실한 순종을 통해 성취되며 우리는 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받아들이며 예수님을 내 주인으로 모시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화답할 때 이 은혜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시는 자기의 욕망을 따라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으로 살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을 통하여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하는 수준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이 한순간에 변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그동안 하나님의 언약을 맡아온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육신적인 아브라함의 씨가 하나님의 자녀라 말하지 않고 약속의 자녀 즉 은혜로 선택을 받은 자녀만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혼탁한 시대에도 ‘남은 자’가 있었듯이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선택되어 구원을 받는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11:5) 그러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마침내 택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새 생활은 어떠하여야 하는가?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소유이니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날마다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이 공동체 안에서는 ‘사랑으로’ 받은 은사대로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삶을 살며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받아 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서로 받아 드리는 사랑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밖으로는 핍박하는 자들에게는 선으로 대하여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고전1:1-3절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 기간 동안 고린도에 1년6개월 동안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행18:11)
그 후 사도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를 경유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안부를 전하고 안디옥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3차전도 여행을 시작합니다.(행18:18-29)
3차 전도여행 기간 동안 사도바울은 에베소에 3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동안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서신을 보낸 것 같습니다.(5:9-11)
(이것을 서신1로 부르기도 합니다) 그 후 글로에의 집 사람들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접하고(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1:11)) 그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기록한 서신이 고린도 전서입니다. 우리는 고린도 전서를 이해하기 위하여 고린도교회가 처한 사회적 형편을 먼저 이해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고린도 지방은 상업적으로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고린도는 기원전 44년경 로마의 시저에 의하여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항구도시로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여 부유한 도시였으며 아가야 지역의 행정 도시로 로마의 총독이 주재하던 곳이었습니다. 무역이 왕성하고 돈이 돌며 왕래가 활발하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문화. 즉 다양한 문화가 성행하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고린도는 혼합주의가 성행하였습니다.
둘째는 헬라 이원론 사상입니다. 즉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헬라 이원론 사상이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 영향을 크게 받아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몸의 부활을 잘 납득하지 못하여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전15장에서 성도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 성(性)적으로 부도덕 하였습니다. 고린도에는 이방 신전인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성창이 있었습니다. 또한 항구도시인데다 돈과 향락이 어우러진 고린도는 자연히 성도덕이 문란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영향이 교회에까지 들어와 성적으로 문란하여 세상 사람들조차 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5-6장에서 이부분에 대하여 책망을 하면서 음행한자, 우상 숭배자, 간음 하는 자, 동성연애 하는 자, 도둑질 하는 자, 술 취한 자, 탐욕을 부리는 자, 남을 헐뜯는 자, 약탈하는 자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 다는 것입니다.
넷째 철학과 수사학이 발달하였습니다. 도시가 부유하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새로운 사상들을 접하게 되자 철학과 수사학을 추구하게 되어 고린도 사람들은 지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 하여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런 사상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교회 안에서도 여전히 세상적 가치관으로 남을 판단하고 분파를 만들어 파당을 일삼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 하면서 서로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 처한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들은 사도 바울은 하나, 하나 문제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대답하여 써보낸 서신이 고린도 전서입니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인사를 한 후(1:9) 교회의 분파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서 자신을 지지하고 따르는 무리에 대하여 경고합니다,(1:13-17)
그리고 잘못된 지혜에 대하여 지적하고 참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된 지혜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자는 육에 속한 자요 하나님의 비밀을 알지 못한 자며(2:1-15) 사역자들도 바른 진리위에 교회를 세워야 하며(3:5-15) 성도들도 성령님께 순종하는 바른 태도를 지녀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3:16-4:5) 이어서 5장에서는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성적인 타락에 대하여 책망을 하고 있으며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처럼 교회가 더러움에 변질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묵은 누룩 (세상적 가치관)을 내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6장에서는 성도들끼리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것을 책망하면서 불의한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결혼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8장에서 10장까지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고기들은 먼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기에 성도들은 먹기를 꺼려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고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었습니다. 이런 상반된 견해로 교회 안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지식으로 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라”고 말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연약한 형제를 어렵게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마땅한 권리가 있지만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그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을 9장에서 말하고 혹시라도 우상 숭배의 죄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을 10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11장에서는 예배의 형식문제(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와 성찬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서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기에 경건한 태도를 가질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12-14장은 은사 문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자신과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주신 것인데 어느 은사가 더 큰가 하고 은사를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은사는 다양한 것으로 서로 다른 은사를 무시하지 말고 사랑으로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15장에서는 교리적으로 중요한 부활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헬라 이원론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이런 헬라 이원론 사상에 젖어 몸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부활의 복음을 전한 후 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견고하여져서 흔들리지 말고 더욱 주의 일에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16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을 부탁하고 깨어 남자답게 강건하며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고후1:1-5절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를 보내고 난 후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것 같습니다.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후13:1-2) 또한 “내가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단하였노니”(고후2:1) 이 말씀을 보아 이 두 번째 방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바울사이에 근심의 방문이었던 같습니다. 그 후 바울은 다시 편지를 써서 보내고(세 번째 서신으로 눈물의 서신이라 함 그러나 없어짐) 사도 바울은 소식을 기다리던 중 디도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들었는데 그 소식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말한 대로 죄인들을 징계하였다는 기뻐할 만한 소식과(고후7:2-16) 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도여행 계획을 변덕스럽게 바꾼 것(고후1:12-24)과 거짓 교사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며 선동하고 있다는 슬픈 소식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도 바울이 쓴 서신이 바로 고린도 후서입니다. 본서는 이와 같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사도 바울 사이에 관계가 악화 되었다가 회복되는 상태에서 기록된 서신이므로 이 서신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말에 순종한 것을 격려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과 바울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고린도 교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을 반박하는 내용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아가야 지방 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안하고 환란과 고통 중에도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1:1-11)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나 이것은 우리로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함이라 고난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계신 것을 깨닫고 더욱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종한지에 대하여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1:14)고 말하며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자 하였던 계획을 변경한 것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본래의 계획은 고린도에 갔다가 마게도냐를 거쳐서 다시 고린도를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변경됨으로 인하여 바울의 적대자들이 바울이 진실치 못하다고 비난하며 사도직까지 불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방문계획을 변경한 이유는 적대자들을 직접 만나면 상처를 받을까봐 고린도교회 방문을 연기하고 대신 편지를 보낸 것을 해명하고 있는 것입니다.(1:12-2:4) 그리고 바울의 적대자들을 사랑으로 대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사도권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전도의 열매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곧 자신의 사도권을 입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 언약의 직분이 옛 언약의 직분보다 영광스러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3장) 질그릇 같이 연약함에 이 보배를 가지고 있기에 어떤 핍박이나 고난에도 낙심하지 않으며 우리의 소망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4장) 이 땅은 우리가 영주할 곳이 아니며 우리의 육의 몸을 벗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최종적인 칭의를 받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새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5장)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죄악된 세속으로부터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6장) 이런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루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7장)
8-9장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에서 마게도냐 교회들이 가난한 가운데도 자발적으로 힘에 넘치도록 풍성한 헌금을 한 예를 들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적극 동참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헌금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참된 헌금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억지가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인 10-13장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적대자들을 가리켜 이런 자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假裝)하는 자들이며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假裝) 하며 사탄의 일군도 자신을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주의 일군은 주를 위하여 얼마나 수고를 했느냐가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셋째 하늘에 올라간 영적 신비한 체험을 말하고 있는데(12:1-6) 그러나 바울은 이런 영적 체험보다 오히려 자기의 연약함(육체의 가시)(12:7-10)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내가 크게 기뻐함은 나의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으로 보아 우리의 몸의 가시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결코 하나님의 징벌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읽을 말씀 : 갈 2:20
갈라디아는 소아시아 중앙지대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같은 도시가 있는 곳으로 바울은 1차 선교여행 중에 이 지역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였고, 마침내 갈라디아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난지 얼마 후, 유대로부터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몰래 들어와 교인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완전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외에 할례와 율법 준수를 반드시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로서 할례를 행하고 음식법이나 절기를 지켜 아브라함의 계보에 속하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이들은 바울의 복음과 사도직을 공격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아 그 복음에서 할례와 율법의 의무를 제거하고 인간들이 믿기 쉬운 복음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이 보낸 자들이 아닌 사사로히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다수의 갈라디아 교인들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하는 참된 복음에서 떠나 할례와 율법 준수를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율법준수로 인하여 교인들 사이에 의견 차이와 갈등을 일으키고 사랑의 관계를 깨뜨려 서로 물고 뜯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게 되었습니다.(5:15)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확실하게 정리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을 참된 복음과 믿음 위에 서도록 권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권면의 요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포기하고 율법 종교로 되돌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구원이 율법적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본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진품과 똑같은 유사품이 더 화려한 포장과 광고로 사람을 속이는 것과 같은 일이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의 복음에 있어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감동적인 예화와 수사학적인 언어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설교와 책들 속에 얼마나 많은 유사복음이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주지 않고 이 세상의 물질적 가치에 한 눈 팔게 하고 하나님의 인정보다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복이라고 부추기는 축복이라는 가면을 쓴 번영의 복음, 자기를 부인하고 자아가 죽어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십자가의 복음을 뒤로하고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가르치며 고난 없는 부활의 영광만을 파는 할인된 가짜 거짓복음, 예수를 믿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긍정의 힘을 강조하며 부추기는 믿음과 비슷한 유사복음, 예수를 믿기만(단순한 지적인 동의) 하면 성별된 삶이 뒤따르지 않아도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다른복음이 우리주변에 얼마나 난무한지 모릅니다. 참과 거짓의 구분이 모호해진 이때 정신을 차리고 복음진리에 굳게 서서 우리의 영혼을 도적질 하려는 거짓목자들을 경계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다른 복음은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창조를 통하여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말하고(1:6-10,6:11-16) 중간 부분에서 자신의 사도 권위와 가르침을 훼손하는 대적자들의 주장에 맞서 자신의 복음의 기원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진리를 설명하고(1:11-5:1) 우리를 자유케 하는 참 복음에 합당한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5:2-6:10)말하고 있습니다.
본서의 구조 및 내용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바울의 사도권 변호(1-2장)
당시의 유대주의자들은 바울이 가르친 복음을 전복시키고 바울의 사도권을 비방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것(1:11-24)과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로부터 인정받은 것임을 천명했습니다.(2:1-10). 특히 그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는 문제에 대해 외식한 베드로를 책망한 사실을 밝히는데(2:11-21), 이것은 복음의 진리가 지닌 권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이신칭의 복음에 대한 변증(3-4장)
바울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두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갈라디아 교인들이 성령의 은혜를 입은 것이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고 믿음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3:2-14). 둘째, 인간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이루어짐을 강조합니다(3:15-18).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동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고 인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 역할을 할 뿐입니다(3:24).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상속자가 되었습니다(4:1-7).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원래의 자유를 되찾아야 합니다(4:8-20). 또한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음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 하갈을 쫓아낸 것처럼 유대주의자들을 멀리하라고 권고한 것입니다.
3. 복음의 윤리적 적용 (5-6장)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고 말하며 그 자유가 결코 육체의 기회로 삼아 다시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5:1,13,22-23)
그리고 서로 무거운짐을 나누어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을 실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 하십니다.
에베소서를 어떻게 읽을것인가
읽을 말씀: 엡1:1-14절
에베소서는 사도바울이 로마옥중에서 주후 62년 경 에베소교회에 보낸 옥중 서신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3차 선교여행기간 3년간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에베소서의 주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전반부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말하고 후반부에서 구원받은 자의 실제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엡 1:3-14절은 하나님의 객관적 중심적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체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3절의 찬송하리로다 로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위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엡 1:3-14절은 하나님의 객관적 중심적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체의 구원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지음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미하게 하려고 구속을 한 것 을 말하고 있습니다.
‘복’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주어지며 구속을 통하여 새 창조된 자들이 즉 영에 속한 자들이 받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복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ㅡ 택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죄로 인하여 죽어할 우리를 대표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새 창조 된 부활의 인격체로 살아나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부할하심과 함께 우리가 새 창조된 인격체로 부활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의로운 삶을 살아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합이란 말은 포도나무 되는 예수님에게 우리가 젖 붙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정하셨다’는 말은 ‘결정지어졌다’ 라는 운명론처럼 지금까지 소개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정하셨다’는 구원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며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되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여 구원하여 가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인격을 가진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격체로 만드셨지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구속은 죄 사함입니다. 이것은 대표성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죄 사함을 과거에는 존재론 적으로 이해하여 죄 값을 치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관계론 적으로 생각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죄 사함으로 봅니다.
‘사랑 안에서’ 하는 말은 하나님이 사랑을 보여 주심으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내가(나의 자아) 죽느냐 안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즉 옛 사람인 내가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것입니다.
엡 2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10절은 개인에게 객관적 중심적 구원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설명하고 있으며 11-22절은 공동체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 ‘너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철저한 연약한 상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관계론 적으로 생각하야 합니다.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행하여ㅡ 걸어다님을 뜻합니다. 즉 걷다입니다. 허물과 죄 가운데 ‘걸어다녔다’ 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허물과 죽었던 상태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의 조정을 받는 상태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고난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고난을 통과하면서 고난을 통하여 구속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난을 통하여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방법이 고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즉 유한하고 제한적인 인간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성경 딤후 3:16절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느니라’는 말씀이 곧 이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유한한 인생이며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인 십자가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랑의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 곧 새창조요 중생이요 구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나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그의 크신 능력을 의지하며 나를 부인하며, 포기하고, 내려놓고,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즉 고난을 통하여 새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걸어다닌 결과 ㅡ 진노의 자녀가 됨 ㅡ 이유는 욕심입니다.
사탄이 원인도 아니며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나입니다 욕심입니다 원죄도 아니고 나의 욕심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셨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욕심을 따라 살던 나를 건져낸 것입니다. 내 주장 내 욕심 내 고집대로 살던 나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골2:14절 흑암의 권세아래 있던 나를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를 받는 나라로 옮긴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리에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시고 구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근거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입니다. 이 헷쎄드가 바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자랑할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3:1-20절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 21절에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의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의도 헬라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히브리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추세입니다. 즉 바울이 로마가 헬라문화권에 있기에 헬라적 개념으로 썼을 것이라는 주장과 바울이 헬라권에 있는 로마 성도들에게 자기들의 유대적 배경의 사상을 가지고 썼다는 것입니다. 구약적 개념의 의란 언약에 충실한 것이 의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언약에 신실한 것을 의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파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파기 하지 않으시고 헷쎄드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 언약에 신실하신 것입니다
헷쎄드란 그럴만할 이유가 없는데도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보이시는 자비를 헷쎄드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럴만한 의무가 없는데도 의를 보이신 것입니다. 즉 그 언약을 지키신 것입니다. 파기 하셔도 되는데 지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헷쎄드입니다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 표현을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하여’ 라는 말은 원인이란 말입니다 근거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원인이 되고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헷쎄드에 근거한 것이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욕심대로 살던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삼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목표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우리는 무능하여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그런 우리를 살리셨고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살리셨다는 말은 우리를 중생시키셨다는 말이요 우리가 중생했다는 말은 우리가 부활하였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가 죽고 그의 부활하심과 함께 우리가 부활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지만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에 의하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부활하였고 주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도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계4장과 5장에 적용이 됩니다. 실존적으로 모든 세대에 적용이 됩니다.
아래에 속한 자가 위에 속한자로 바뀌어지는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론에 의하여 우리가 아직 몸의 부활은 이루어지지 앉았지만 내면적으로 이미 실현 된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입니다. 긴장속의 삶은 광야요 시험이요 고난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오는 여러 세대 히 1:1-2절 모든 세계 ㅡ 여기 모든 세계는 모든 세대로 번역해야 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세대를 구속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담 ㅡ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모든 세대의 구원받는 모든 자 - 모든 세대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를 인하여’ 란 은혜란 나에게 원인이 있지 않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구원의 원천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고 할 때 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즉 헷쎄드라는 말과 같습니다.
즉 엡1:3-11절의 하나님의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계획의 결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즉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내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구원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은혜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원인이 아니고 받아드리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오늘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객관적 중심적 구원을 즉 다 준비하여 놓으시고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내가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가능합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행위가 아닙니다. 하고 나의 의지로 마음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만약 이것까지도(자유의지) 부인하면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없게 됩니다.
즉 내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고 구원을 거저 주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로봇으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인격체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의 하여야 합니다. 반응 자체가 구원의 근거는 아닙니다. 반응했기에 구원을 얻었다 하면 알미니안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객관적 중심적 구원을 준비하셨고 또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에 우리가 반응한 것이므로 우리의 반응이 구원의 근거가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행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할 때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났다고 한 것을 은혜라 합니다.
그러면 행위 구원론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해서 행함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기주장과 욕심을 따라 살면서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하수인인 우리들을 그곳에서 건져내어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여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수준에 까지 이르러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삼으시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10절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새 창조된 자)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새 창조된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 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주어지며 구속을 통하여 새 창조된 자들이 즉 영에 속한 자들이 받아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복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ㅡ 택하셨다는 것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만드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죄로 인하여 죽어할 우리를 대표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새 창조 된 부활의 인격체로 살아나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부할하심과 함께 우리가 새 창조된 인격체로 부활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의로운 삶을 살아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연합이란 말은 포도나무 되는 예수님에게 우리가 젖 붙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정하셨다’는 말은 ‘결정지어졌다’ 라는 운명론처럼 지금까지 소개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정하셨다’는 구원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는 뜻이며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되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시고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여 구원하여 가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인격을 가진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격체로 만드셨지 로봇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아들로 삼으셨다는 뜻은 예수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형제로 삼으시고 예수님은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라 할 때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을 통하여 낳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칭하는 말이므로 반드시 예수 안에서 생각하여야 합니다.
지금 구원론의 패러다임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구원론이 창조- 타락 -구속- 회복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창조ㅡ 새 창조로 봅니다. 새 창조의 과정이 구속입니다.
창조ㅡ 타락ㅡ 구속 ㅡ회복으로 본다면 아담이 창조함을 받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완전하게 창조하였는데 타락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에 구속하므로 회복시키신 다는 뜻인데 그러나 아담의 상태로 회복이 된 다면 또 죄를 지를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아담은 창조함을 받을 때 완전하게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창조 ㅡ 새 창조를 염두에 두시고 세상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래야 엡 1;3-14절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산에 생명나무를 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1:31절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은 그 상태로는 완벽하게 지었다는 말이지 완성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어린이 그대로 완벽합니다. 그러나 장성하여 어른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게할더스 보스는 씨로 비유하였습니다.
씨앗은 씨앗 그대로 완전합니다. 그러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담은 새 창조 되어야 합니다. 구속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새 창조 되는 것입니다.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구속은 죄 사함입니다. 이것은 대표성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죄 사함을 과거에는 존재론 적으로 이해하여 죄 값을 치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관계론 적으로 생각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죄 사함으로 봅니다.
‘사랑 안에서’ 하는 말은 하나님이 사랑을 보여 주심으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으로 만들어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은 내가(나의 자아) 죽느냐 안 죽느냐의 문제입니다.
즉 옛 사람인 내가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죄 사함을 받았다 하는 것입니다.
엡 2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1-10절은 개인에게
11-22절은 공동체에 어떻게
1절 ‘너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허물과 죄로 ㅡ 이 말씀을 전에는 원죄로 생각하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철저한 연약한 상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관계론 적으로 생각하야 합니다.
‘살리셨도다’ 는 말은 원문에는 없습니다.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행하여ㅡ 걸어다님을 뜻합니다. 즉 걷다입니다. 허물과 죄 가운데 ‘걸어다녔다’ 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허물과 죽었던 상태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의 조정을 받는 상태아래 있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권아래서만 사탄의 활동을 허락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이원론적인 일원론이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사탄의 활동이 허락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합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구조입니다.
계시록20:1ㅡ에 사탄이 무저갱에 결박된 상태하에 놓인 것은 예수님의 부활후나 재림후가 아니라 아담이 에덴에서 타락한 이후입니다.
유다서1:6절 벧후2:4 사탄이 결박됩니다.
무저갱에 결박한다는 뜻은 어떤 장소에 가두어 둔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활동을 통제하신 다는 뜻일 것입니다.
욥의 시험은 생명을 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허락하셨습니다. 욥1:6-12절
사탄이 고난을 준다는 의미는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범위에서만 활동하고 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준 것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님이 무능한 분으로 유일신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다신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고난을 통과하면서 고난을 통하여 구속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고난을 통하여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방법이 고난입니다.
그동안 고난이 강조되지 않은 것은 칭의 중심적인 구원이 성행했기 때문입니다. 한번 구원을 얻으면 성화 없이도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 때문입니다. 즉 성화 없이도 칭의 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구원론 때문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삶이 고난의 삶인데 고난이 무시된 것은 칭의 구원론 때문이며 성경에서 지혜서가 무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지혜서는 구약에서는 욥기서요 신약에서는 야고보서입니다.
이제는 칭의와 성화가 한 구원의 양 측면이라는 구원론으로 기울어지면서 지혜서 연구가 활발하여지고 있습니다.
지혜서의 내용은 고난을 통하여 지혜롭게 만들어져가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즉 유한하고 제한적인 인간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것이 지혜입니다.
성경 딤후 3:16절에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느니라’는 말씀이 곧 이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유한한 인생이며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인 십자가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랑의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것이 곧 새창조요 중생이요 구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나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그의 크신 능력을 의지하며 나를 부인하며, 포기하고, 내려놓고,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랑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즉 고난을 통하여 새 사람으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시험이란 단어 페이라스 무스 헬라어 단어는 중립적인 단어입니다.
이 세상 풍속과 공중권세 잡은 자를 허락하시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가진 상태 가운데 살게 하셨으므로 인간은 항상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인간은 윤리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을 따라 접근하면 유혹이됩니다.
욕심을 따라 접근하면 유혹이 되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면 시련이 되기도 하고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계21:2. 21:9-11절에 보면 신부의 모습을 보석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단장(丹粧)’이란 말은 헬라어단어 ‘연단’이란 단어와 같습니다. 보석은 광석이었던 것을 다듬고 연단하여 보석이 된 것처럼 우리도 다듬고 연단하여야 정금같이 깨끗하고 순결하여 정결한 남편 되시는 그리스도 앞에 순결한 신부로 설 수 있습니다.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ㅡ 따라 가는 것 ㅡ 우리가 싸우는 실체가 무엇인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탄과의 싸움입니다.
자본주의는 무서운 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것이 사소한 실체 부부 가정 습관 등과 싸워야 합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싸움이 아니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싸움입니다.
걸어다닌 결과 ㅡ 진노의 자녀가 됨 ㅡ 이유는 욕심입니다.
사탄이 원인도 아니며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나입니다 욕심입니다 원죄도 아니고 나의 욕심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4-7절 그런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셨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욕심을 따라 살던 나를 건져낸 것입니다. 내 주장 내 욕심 내 고집대로 살던 나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골2:14절 흑암의 권세아래 있던 나를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 것입니다. 그분의 통치를 받는 나라로 옮긴 것을 구원이라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리에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쥐시고 구원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근거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큰 사랑입니다. 이 헷쎄드가 바로 우리의 구원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자랑할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3:1-20절 죄 아래 있는 인간에게 21절에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의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의도 헬라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유대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추세입니다.
즉 바울이 로마가 헬라문화권에 있기에 헬라적 개념으로 썼을 것이라는 주장과 바울이 헬라권에 있는 로마 성도들에게 자기들의 유대적 배경의 사상을 가지고 썼다는 것입니다.
구약적 개념의 의란 언약에 충실한 것이 의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언약에 신실한 것을 의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파괴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파기 하지 않으시고 헷쎄드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 언약에 신실하신 것입니다
헷쎄드란 그럴만할 이유가 없는데도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보이시는 자비를 헷쎄드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럴만한 의무가 없는데도 의를 보이신 것입니다.
즉 그 언약을 지키신 것입니다. 파기 하셔도 되는데 지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헷쎄드입니다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그 표현을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하여’ 라는 말은 원인이란 말입니다 근거라는 말입니다 구원의 원인이 되고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헷쎄드에 근거한 것이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욕심대로 살던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삼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목표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우리는 무능하여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그런 우리를 살리셨고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살리셨다는 말은 우리를 중생시키셨다는 말이요 우리가 중생했다는 말은 우리가 부활하였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구속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구속이 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형벌이 처형되는 것이요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함께 우리가 죽고 그의 부활하심과 함께 우리가 부활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계20:5절의 첫째 부활이 우리의 중생(부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대주의의 견해에 의하여 우리가 그동안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지만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에 의하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부활하였고 주님의 승천과 함께 우리도 하늘에 앉히신 것입니다. 계4장과 5장에 적용이 됩니다. 실존적으로 모든 세대에 적용이 됩니다.
아래에 속한 자가 위에 속한자로 바뀌어지는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론에 의하여 우리가 아직 몸의 부활은 이루어지지 앉았지만 내면적으로 이미 실현 된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입니다.
긴장속의 삶은 광야요 시험이요 고난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오는 여러 세대 히 1:1-2절 모든 세계 ㅡ 여기 모든 세계는 모든 세대로 번역해야 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세대를 구속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담 ㅡ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모든 세대의 구원받는 모든 자 - 모든 세대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하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혜를 인하여’ 란 은혜란 나에게 원인이 있지 않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구원의 원천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고 할 때 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즉 헷쎄드라는 말과 같습니다.
즉 엡1:3-11절의 하나님의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계획의 결과로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즉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의 역사가 있어야 내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구원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은혜라 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원인이 아니고 받아드리는 것을 믿음이라 합니다.
오늘 내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객관적 중심적 구원을 즉 다 준비하여 놓으시고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내가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가능합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행위가 아닙니다. 하고 나의 의지로 마음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만약 이것까지도(자유의지) 부인하면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가 없게 됩니다.
즉 내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믿게 하시고 구원을 거저 주어서 구원을 얻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로벗으로 만들지 않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인격체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의 하여야 합니다. 반응 자체가 구원의 근거는 아닙니다. 반응했기에 구원을 얻었다 하면 알미니안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객관적 중심적 구원을 준비하셨고 또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기에 우리가 반응한 것이므로 우리의 반응이 구원의 근거가 절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행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할 때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났다고 한 것을 은혜라 합니다.
그러면 행위로 구원론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해서 행함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기주장과 욕심을 따라 살면서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하수인인 우리들을 그곳에서 건져내어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여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수준에 까지 이르러 아들의 형상을 본받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로 삼으시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10절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새 창조된 자)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새 창조된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 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전체를 흐르는 맥을 알려면 몇 가지사상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1) 세 가지 완성입니다.
(1) 성부 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완성
창2:1ㅡ3절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 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의 창조 사역을 완성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죄가 들어옴으로 지금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시고 계십니다. 요한5:1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
(2) 성자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완성
죄로 인하여 낙원에서 추방을 당하고 평안과 안식을 잃어버린 인류를 구원하여 참된 평안과 안식을 주며 추방당하였던 낙원으로 데리고 가기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구원 사역을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며 우리의 구속을 완성하였습니다.
요한19:30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3) 성령 하나님의 구원 적용의 완성
성자 예수님께서 구속을 완성하시고 하나님나라로 올라가신 후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며, 인침의 역사를 완성하심으로 이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대단원의 막이 내리고 영원한 세계가 열리며 에덴이 회복이 됩니다.
요한계시록 21:5ㅡ6절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사역을 다 마치시고 창조의 마지막 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창조한 세상과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셨으나 우리의 시조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하여 낙원을 잃어버리게 되고 창조된 세상도 본래의 창조목적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구속은 결국 실낙원의 회복인 것으로 성경 최후의 장인 요한계시록 21ㅡ22장은 최초의 성경 창세기 1ㅡ2장에 나타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최초의 상태로 회복되는 예언입니다. 그 사이의 성경의 전권은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그 성취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사적으로 성경을 보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중심 내용은 약속과 구원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므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삶 의 규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2)세 가지 원리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언약사상과 대표원리와 전가원리를 이해하여야 구속사를 바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때 언약의 당사자는 개인이 아닌 대표성을 띠고 있으며 그 책임은 후손에게까지 전가 된다는 사상과 원리입니다
(1) 언약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만드시고 아담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의리라 하시니라”(창2:16ㅡ17) 그러나 인류의 시조 아담이 뱀(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호6: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인류에게 죽음과 불행이 온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맺은 언약을 ‘행위언약 ’ 또는 ‘생명 언약’이라 합니다. 죄로 인하여 형벌아래 있는 인류를 긍휼히 여기신 삼위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평화의 의논을 하시고 메시야를 보내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을 하시고 이것을 이루어 가시는 전 과정이 곧 성경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시기전의 언약은 옛 언약이고 예수님이 오셔서 새로 세운 언약을 새 언약이라 합니다. 이 언약을 은혜언약이라 합니다. 옛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을 시내산 언약 또는 옛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을 드시며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태26:28) 하시며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이 언약을 새 언약이라 합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고전11:25)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 이 언약 사상을 바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2) 대표 사상입니다.
언약을 세울 때에는 당사자가 있어야 합니다. 행위 언약의 당사자인 아담은 아담 개인이 아니라 온 인류의 대표로 세우셨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은혜언약, 새 언약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믿는 자의 대표가 되셨습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5:18)
(3) 전가 사상입니다.
언약을 세울 때 대표성을 띤 사람의 행동은 그 대표의 소속된 무리에게 책임이 전가됩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온 인류의 대표이기에 그 죄가 온 인류에게 전가 되어 사망이 왔으며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의 대표이기에 모든 믿는 자에게 은혜와 생명이 온 것입니다.“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6:17ㅡ18)
이 언약사상과 대표원리와 전가 원리의 맥락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구약의 제사제도도 이해 하여야 합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예표요 그림자로 참 실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피흘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에 대한 모형입니다
3)세 가지 안식입니다
성경에 세 가지 안식이 있습니다. 제 칠일 안식(창2:2)과 가나안 안식(수23:1)과 저 안식 또는 영원한 안식(히4:9ㅡ11)이 있습니다.
(1)제 칠일 안식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육일동안 창조하시되 창조의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시니라”(창2:2) 하나님께서 피곤하여 쉬신 것이 아닙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40:28) 하신 말씀을 보아 하나님이 피곤하여 쉼을 얻기 위하여 안식하신 안식이 아니라 이 안식은 일의 완성과 피조물에 대한 만족을 표시함입니다. 사람은 창조함을 받은 다음날부터 바로 안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 사람은 참된 안식을 잃어버렸습니다.
(2) 가나안 안식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에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전쟁과 기업 분배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셨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수23:1)
우리는 이 안식을 가나안 안식이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땅에 들어와 안식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안식은 참된 안식, 즉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영원한 안식
성경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는 참된 안식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 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컽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ㅡ16)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시록14:13) 이 땅위에서의 삶은 순례자의 삶입니다. 사명자의 삶입니다. 우리의 사명이 끝나는 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서 우리의 영원한 집 본향에서 편히 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안식은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이며 영원한 안식은 제 칠일 안식의 회복입니다 그때에는 에덴이 회복되어 영원한 안식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4) 세 가지 명령입니다
성경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고, 관리하라. 는 청지기적 사명, 즉 문화적 사명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사랑의 사명과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라는 선교적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위하여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문화적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7ㅡ28)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관리하고 가꾸라는 문화적 사명이요, 청지기적 사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자연을 보호하고 사랑하고 물질을 관리하는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지구를 잘 보전하여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며 의미입니다.
(2) 사랑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을 세우시면서 언약의 내용으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의 내용은 요약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29ㅡ31) 또한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사랑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사람 사람 사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나눔과 섬김으로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3) 선교적 사명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셨습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1:3)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우리들에게 대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대 사명은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선교적 사명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28:18ㅡ20절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 하셨으며, 막16:15ㅡ16절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고 하셨으며, 눅24:46ㅡ48절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고 하였으며 요20:21절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으며 사도행전1:8절“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적 사명을 지닌, 보냄을 받은 자로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사도란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좁은 의미로 열 두 사도가 있고 넓은 의미로 주님의 제자 된 우리 모두는 이 땅에 사명을 받고 온 사도들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임과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명이 끝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자들인 것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5) 잃어버린 형상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 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잃어버린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여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9ㅡ30)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4:13)라는 말씀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뜻이 무엇인가를 잘 분별하여야 하겠습니다.
6 하나님 나라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창초의 마지막 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심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과 교제하시며 함께 거하시시기 위함이며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즉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의 세력에 지배를 받은 인간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하고 자기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 하시고 경건한 노아를 통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 역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고 바벨탑을 쌓자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온 지면에 흩어져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의 자손인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바로의 학정에서 구출하여 내시면서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기 것이라’ 하시고 마침내 시내산에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리라’ 하시며 언약을 맺습니다. 그러나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고 빌라도에게 요구하면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19:15) 하고 시내산에서 맺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출19:5ㅡ6,29:45ㅡ46) 하신 언약을 파기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과 새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통하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 하심입니다.
7 구원의 이중성과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은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이미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ㅡ2) 또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ㅡ2) 그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기록된 곳도 있습니다.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10)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이미’와 ‘아직’의 이중성이 있는 것을 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미래에 받을 것이다. 하는 이중성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구원에는 세 가지 시제가 있는 것을 봅니다. 구원의 과거, 구원의 현재, 구원의 미래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 하셨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우리도 장차 부활하리라는 보증으로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악이 있고 고난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심으로 우리의 구원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이 낮은 몸이 주님의 영광의 형체와 변하게 될 것이며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빌3:20ㅡ21,고전15:42ㅡ49)) 그러므로 우리는 완성된 구원을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직’이라는 미래 시제로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속을 이루시고 승천하시면서 ‘다시오리라’는 가심과 다시오심 사이에서 약속을 믿고 사는 자들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법칙인 것을 깨닫고 우리가 하루에 세끼 밥을 먹듯이 매일 영혼의 양식인 성경을 읽으셔야 합니다.
성경을 사랑하십시오. 성경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을 읽으십시오. 성경을 암송하십시오
그리고 성경을 깊이 묵상 하고 말씀을 내 삶에 적용하십시오. 그러면 깨어있는 영성을 소유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어 주님의 형상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시119:56)
“나의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시119:54)
성경 장 명가
마태복음 (새벽부터 우리 )
족보 박사 요한 시험 팔복 구제 반석 풍랑 마태 파송 질문해
안식 비유 오천 유전 징조 변화 아이 부부 포도원 상경 왕자라
칠화 말세에 심판 기도후 고난 부활하신 메시아로다
구주 메시아 구주 메시아 왕의 왕이시니 참구주시라
마가복음
전도 안식일에 제자 비유하고 부활 오천명에 유전 사천명
변화 아이에는 예루살렘 농부 말세 예비한후 고난 부활해
성자 예수님 종이되시사 대인 속죄하니 참구주로다 :
누가복음
요한 탄생 전도 시험 마태 사복 부활 비유 변화 파송 기도 부자
회계 잔치 탕자 청직 재림 아이 나귀 농부 말세 재판 고난 부활
하나님 아들 사람되시사 대인 속죄하니 참 구주로다
요한복음
증거 이적 중생 사마리아 병자 오천 생수 진리 소경 목자와
부활 상경 사랑 평안 포도 성령 기도 심문 고난 부활 부탁해
독생자 예수 참구주시니 누구든지 믿고 영생 얻으라.
사도행전
승천 성령 사도 핍박 아나니아 집사 순교 빌립 사울 고넬료
보고 출옥 안디옥 루스드라 공회 빌립보 아덴 고린도 에베소 밀레도
상경 백성 공회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파선 로마전도해
복음 전하세 복음 전하세 성령 권능받아 복음 전하세
로마서
복음 심판 죄악 믿음 칭의얻어 장사 고난 승리 택함 받으라.
구원 이스라엘 산제사 드리니 권세 평론 도덕 문안하여라.
구주 예수님 보혈공로를 믿음으로 의를 얻으리로다.
고린도 전서
십자 전도에는 성전 충성하고 음행 송사에는 부부 제물과
사도 경계에는 성찬 은사받고 사랑 예언에는 부활 장부라
십자가 밑에 맘을 합하여 주님교회 위해 충성 합시다.
고린도 후서
위로 용서에는 편지 직분하고 새 사람과 은혜 성결 구제다
연보 겸손에는 자랑 묵시하고 범죄 회개 한후 자기 살피라
위로하시는 하나님 앞에 범죄 회개하여 구원 얻으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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