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성례전
[예배와 성례전에 관한 Q&A] / 정장복 목사(장신대 교수)
< 차례>
1. 성례전-성찬성례전 후 남은 성물의 처리는? /2
2. 성례전-성찬을 받는 바른 순서는? /3
3. 성례전-손에 흰 장갑을 반드시 끼어야 하나요? /4
4. 성례전-성찬성례전의 참여 형태는 한 가지 뿐인가요? /5
5. 성례전-침례와 세례의 뜻은 서로 차이가 있는가요? /7
6. 성례전-세례는 어느 예배에서도 가능한가요? /8
7. 성례전-성찬 성례전을 좀더 자주 거행할 수 없나요? /9
8. 예배-영상매체를 통한 예배란? /11
9. 예배-주일 예배에서 복음성가를 부를 수 있나요? /12
10. 예배-우리의 찬송가는 재고되어야 합니다 /13
11. 예배-“성가대? 찬양대?” /14
12. 예배라는 단어가 없는 우리의 구약성경 /16
13. 예배 중에 사람을 환영할 수 있나요? /17
14. 예배-특송전후에 절을 하시나요? /18
15. 예배-목사님은 왜 거기 서 계시죠? (찬양대 찬양과 목사의 위치) /20
16. 예배-찬송은 일어서서? /21
18. 예배-예배 시작에 종을 치는 관행은? /23
19. 예배-예배 인도는 장로가 맡고, 설교는 목사가 맡는다는데… ? /24
20. 예배-설교대와 인도대는 그 역할이 다른가요? /26
21. 예배-성단의 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27
22. 예배-예배 때 켜는 성단 촛불의 사연은 /28
23. 예배-예배자의 몸가짐에 담긴 의미들 /29
24. 성례전-애찬이 성만찬을 대신할 수 있나요? /31
25. 절기-교회의 절기는 셋이 아니고 여섯입니다 /32
26. 절기-부활주일이 기독교의 두 번째 큰 축일이라고요? /33
27. 예배-목사의 가운은 동복과 하복이 없습니다 /34
28. 예배-재택예배라는 새 용어는? /36
1. 성례전-성찬성례전 후 남은 성물의 처리는?
Q 저는 목사로서 성찬성례전을 집례하고 난 다음에 따르는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찬 예식을 마친 다음에 남은 성물(떡과 포도즙)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매우 난처합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을 구합니다.
이 질문은 기독교가 초창기부터 안고 있던 심각한 사안으로서 초대교회 때부터 논란이 되어 온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는 성찬성례전에 서 성물(빵과 포도즙)을 성찬상에 봉헌한 다음에 성령임재를 위한 기도(에피클레시스)를 드리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성물이 주님의 살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변화된 이 성물을 나누어 준 다음에 남은 성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는 일찍부터 많은 논란을 거쳐왔습니다. 이러한 논쟁의 해결은 어떤 신학자의 해석보다는 역사적인 문헌을 통하여 그 대답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기독교 예배의 초기에 속한 3세기에 예배를 가장 잘 기록했던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은 남은 성물의 처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몸을 지칭하는 떡에 대하여 주는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는 불신자나 쥐나 다른 짐승이 성체를 먹는 일이 없도록 유의할 것이며 (성체의) 어떤 것도 떨어뜨리거나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체는) 모든 신자가 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천시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로 주님의 보혈을 의미하는 잔에 대하여 주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잔을 축성할 때에 여러분은 그 잔으로부터 그리스도의 피를 받게 됩니다. 잔을 쏟아 이질적인 영이 그것을 핥게 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경멸한 여러분을 거슬러 분노하실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속량된 그 값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죄인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기 위하여 초대교회 때부터 성직자들은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한 때는 남은 성물을 모두 땅에 파묻기도 하였으나 짐승이나 벌레들이 먹게 된다는 것 때문에 얼마 후에 중지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남은 성물을 버릴 수 없어 성직자가 다 먹다보니 알콜 중독자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1525년 개혁 성향이 강했던 길버티 감독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새로운 안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이 16세기 트랜트 공의회에서 공인 받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성당 제단 위쪽에 걸려 있는 감실의 설치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 개혁교회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많은 개혁교회 예배신학자들은 먼저 우리의 성물에 대한 신학은 화체설이 아니기에 그렇게까지 신성시하여 모시고 그 앞에 절하는 행위는 거부합니다. 그러나 함부로 버리고 나누어 먹고 하는 것은 성찬성례전의 신성함을 절하시키는 행위라고 봅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수도원 같은 데서 만든 성찬 빵의 경우는 보관이 가능하므로 정중히 간수하였다가 필요한 대로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일반 빵이나 떡의 경우는 남은 포도즙과 함께 안수 받은 교회의 직분자들이 예배 후에 목회자와 함께 앉아 애찬을 갖는 심정으로 함께 남은 성물을 처리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때는 잡담하면서 먹는 일반 음식의 분위기가 아니라 지속된 성례전의 감정과 몸가짐을 가져야 함을 충고하고 있습니다. 남은 성물의 양이 적으면 목사 혼자서 이상과 같은 자세로 그것을 처리함도 가합니다.
성찬성례전의 존엄성은 집례자가 어떤 이해를 바탕으로 하여 준비되고 집례되어지는가에 그 성패가 좌우됩니다. 즉, 성찬예식은 그 준비와 마무리를 목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존엄함이 결정되고 은혜의 척도가 달라질 수 있기에 성물의 처리도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여기서 첨가해 두고 싶은 것은 성물로 사용된 떡은 그 양과 맛이 인간의 식욕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소량이어야 하고 맛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용될 포도주 또는 포도즙은 알콜이 없어야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희생을 재현하는 현장에서 인간의 식욕이 수반되지 않도록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성례전-성찬을 받는 바른 순서는?
Q 현재 성찬성례전에서 성물(떡과 잔)을 받는 순서는 회중, 분병 분잔위원, 집례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맞는 절차인가요? 성찬성례전을 예배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집례하는 정교회, 가톨릭, 성공회, 루터 교회들은 성물을 받는 순서를 어떻게 하고 있는가요? 성찬을 받은 몸으로 회중에게 전하는 것이 바른 순서가 아닌가요?
우리나라 개신교 중에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교단은 장로교입니다. 세계의 어느 나라를 가 보아도 한국처럼 장로교의 간판을 내건 교회가 이렇게 왕성하게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장로교는 한국에서 자생한 교단이 아닙니다. 그 역사성이 다음과 같이 확고한 교단입니다.
장로교의 창시자는 스코틀랜드의 낙스입니다. 그가 제네바에 머물고 있을 때 칼빈이 주도하고 있던 그곳의 교회를 보면서 “사도 시대 이후 이 지구상에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극찬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껏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이 생활과 종교에 대한 진정한 개혁을 보지 못했다.”라는 말을 첨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빈의 신학과 예배모범을 스코틀랜드 교회의 주축으로 삼고 개혁을 하였으며, 그곳에 세워진 장로교가 오늘 세계 모든 장로교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장로교회도 예배모범을 비롯하여 신조와 치리의 근원을 바로 스코틀랜드 교회가 주관했던 웨스트민스터 성총회에서 결정된 것들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훌륭한 개혁을 단행했던 칼빈은 성찬성례전을 매주일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에 앞서 쥬리히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진행했던 쯔빙글리에 의하여 확장된 연4회의 성찬횟수는 칼빈을 매우 분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그는 “이것은 곧 악마의 농간이다”라는 과격한 표현까지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교회란 신앙고백처럼 “말씀과 성례전이 바르게 선포되고 시행되는 곳”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성찬성례전의 집례 과정에 남다른 관심과 깊은 연구 끝에 제네바 예식서를 만들어 바른 교회의 틀을 세우는데 심혈을 기울인 바 있습니다. 특별히 성찬을 받는 순서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보이면서 정확한 질서를 지켜 줄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의 한국교회가 성찬성례전을 일 년에 한두 번으로 축소하여 시행하는 현실을 볼 때 성찬성례전의 절차에도 별로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아니한 듯합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 교회나 성공회의 신부들이 성찬 집례의 연습을 수백 번이 넘게 한 후에 서품을 받는다는 사실을 놓고 우리의 신학교육과 비교하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회중들에게 성찬에 참여하는 방법까지도 철저한 교육을 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부러운 항목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성찬의 성물(떡과 잔)을 받는 순서마저 배운 바가 없이 집례자가 원하는 대로 시행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재 우리의 분병 분잔의 순서는 대체적으로 집례 목사가 분병 분잔 위원들에게 성물을 나누어주고, 그 위원들은 그것을 바로 회중들에게 가져다줍니다. 세례교인들에게 떡과 잔을 빠짐없이 나누어주고 돌아온 분병 분잔 위원들에게 집례자가 성물을 받게 하고, 집례자 자신은 맨 마지막으로 받는 순서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칼빈의 가르침과는 전혀 상반된 순서입니다. 칼빈은 성찬성례전에서 분병 분잔의 순서를 정해 맨 먼저 집례자인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성찬을 집례하는 신분으로서 스스로 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분병 분잔 위원들이 파송을 받아 나가기 전에 먼저 성찬에 참여한 몸들로서 나누도록 하기 위하여 성찬을 받게 합니다. 그리고 그 파송받은 신분으로서 회중들을 찾아가 전해 주도록 하는 절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찬신학은 장로교(통합측)의 예식서에 최근 반영된 바 있습니다.
칼빈이 시행한 절차는 대단한 타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순서는 이미 정교회나 가톨릭 교회, 그리고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성공회나 루터 교회도 일찍부터 시행하고 있는 절차입니다. 예수님이 성찬을 제정하실 때에 사도들이 먼저 받았고, 그 성찬을 받은 사도들이 그들의 회중들에게 다시 성찬을 주었다는 순서는 칼빈이 행한 순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경적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합니다. 사도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교회도 이제는 이러한 부분까지 섬세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3. 성례전-손에 흰 장갑을 반드시 끼어야 하나요?
Q 성찬성례전을 비롯하여 교회의 각종 예식에서 우리는 흰 장갑을 끼고 있습니다. 이것
은 필수적인가요? 손에 흰 장갑을 끼는 것은 기독교 예배의 전통에 나타난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어느 문화권에서 스며든 것인가요? 손에 흰 장갑을 끼지 않고 집례하는 경우 다른 대안이 무엇인가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선교의 땀을 흘렸던 미국교회에서는 한국교회에 적지 않은 고마움을 느낀다는 소식입니다. 썩어져 가는 선교국의 신앙을 아직도 젊고 패기에 찬 피선교국 출신들이 와서 수천의 교회를 세우고 뜨거운 신앙생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혹 그들의 눈에 신기하게 보이는 것들이 한국교회에서 돌출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전혀 전해 주지 아니한 모습들이 이질감을 느낄 정도로 종종 한국교회에서 보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한국교회는 성례식을 비롯하여 결혼식에 이르기까지 「식」자만 붙은 예전이면 목사들이 한결같이 흰 장갑을 끼는 문제입니다. 특별히 손에 장갑을 낀 채 세례수에 손을 담았다가 그대로 세례를 주는 것을 비롯하여 성경이나 예식서를 펼치고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들은 참으로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부분들입니다. 여기에 제기된 문제는 이 관습이 성경을 비롯하여 기독교 예배 역사나 서구의 어느 교회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어디로부터 우리의 예전 가운데 이러한 관습이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흰 장갑이 우리의 각종 예식에 정착된 사연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없으나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들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해지던 한반도는 완벽한 농경사회였습니다. 그 때 우리의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환경에서 선교사들이 몹시 고생하던 토막이야기들이 많습니다. 몸과 마음이 가장 성결해야 할 성례전의 실체를 어떻게 보이느냐는 것은 심각한 그들의 고민이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은 우리보다 개화가 앞섰던 일본인들이 상륙하여 우리의 정치 사회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들의 사회는 지금도 신사참배를 비롯하여 조회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식전이라도 사회자나 집례자는 반드시 흰 장갑을 사용합니다. 교회는 장갑을 끼는 그 관습을 그대로 수용하여 정결한 예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개화기였던 이 무렵에 많은 인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화의 교육을 받은 바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능한 분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신학교육을 받고 돌아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목사로서 성례전과 같은 각종 예식을 집례할 때 자연스럽게 일본교회 목사들의 관습을 많이 수용했습니다. 원로 목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초기에 선교사들은 흰 장갑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한국 목사들이 흰 장갑을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묵인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비위생적인 농경사회에서 구별된 모습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원래 기독교 예배에서는 성찬성례전을 시작하기 직전에 예배 순서의 하나로 성수에 손을 씻는 순서가 있습니다. 이러한 순서는 지금도 동방교회나 가톨릭이나 성공회 예전에서 시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흰 장갑을 끼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것은 가톨릭의 특별한 의식에 성직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주교와 같은 높은 신분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사례입니다. 그 외에는 어디서도 흰 장갑을 낀 경우가 많고 더군다나 흰 장갑을 끼고 성례전을 집례하는 예는 전혀 없습니다.
생각하면 우리의 흰 장갑 사용의 관습은 순수한 일본문화의 수입이었습니다. 그것이 결코 이단적이거나 단점으로 여겨지지 아니하더라도 이제 정결한 집례의 모습을 순수한 기독교 의식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추풍고라는 예배신학자는 “예전은 문화와의 조화가 필요하나 기독교의 바른 역사와 신학을 통한 심사숙고가 없다면 그것은 혼합주의로 흐르기 쉽다"는 말을 한 바 있습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일본 문화의 비기독교적인 요소가 우리의 엄숙한 예전에 들어와 있다면 과감히 그것을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한국교회가 성숙하였기에 그 동안 의미나 유래를 모르면서 맹종하였던 관습들을 새롭게 분석하고 연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성찬성례전에 성수대를 놓고 집례자나 분쟁 분잔위원들이 그곳에 손을 적신 다음 마른 수건에 물기를 닦고 거룩한 예전을 집례한다면 더욱 신성하게 식전이 진행되리라고 확신합니다 .
4. 성례전-성찬성례전의 참여 형태는 한 가지 뿐인가요?
Q 성찬 성례전에 회중은 앉아서 분병 분잔 위원들이 가져다 준 것을 받아먹는 방법이 모두인가요? 새로운 형태를 취하면 그것은 비성경적이고 교리에 어긋난 일인가요? 동방교회나 천주교회를 비롯하여 성공회와 루터교회에서는 회중들이 나아가서 무릎을 꿇거나 서서 정중하게 두 손으로 받는데 개신교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가요?
우리의 땅에 복음을 심어준 선교사들은 봄, 가을에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례전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선교사의 순회가 있게 된 주일은 교회가 온통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성경 다음으로 소중하게 받아 전수해 왔습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의 전통이 되어 조금의 변화라도 시도하면 곧 「신신학 또는 자유신학」이라는 이름과 함께 거부반응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모국 교회를 가보면 전혀 우리와 다른 예배 환경이 펼쳐지고 있어 당황하게 됩니다. 그때마다 선교사들의 가르침을 성경의 가르침과 동일시했던 우리의 인식에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많은 것 중에 성찬성례전의 횟수와 참여의 형태를 지금껏 진리처럼 고수해 온 부끄러움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그 동안 우리는 일 년에 두 번만 성찬성례전을 거행하는 것이 지당한 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성찬의 분병 분잔 때 회중은 제자리에 앉아 있고 분병 분잔 위원들이 가져다주면 받아먹는 것만이 성경적인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개혁교회의 전통인 줄 알고 고수해 왔습니다. 이상과 같은 규범을 벗어나 성례전을 자주 행하고 분병 분잔의 형태를 새롭게 시도하면 그것을 마치 비성경적인 행위인 듯 쳐다보고 비판을 가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정관념은 매우 편협된 것이고 예배 역사의 지식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회중들이 성찬성례전에서 성물을 받는 형태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크게 세 가지가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먼저는, 극단적인 개혁자였던 쯔빙글리의 방법입니다. 그는 구교에서 행한 방법들을 거의 거부하였기에 성찬 예식의 참여 형태도 정반대의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마냥 지키고 있는 형태입니다. 즉, 앉아 있는 자리에서 가져다 준 떡과 잔을 받도록 하는 형태입니다.
둘째는, 칼빈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성찬을 회중들이 그대로 회중석에 앉아서 받는 것은 주님의 살과 보혈을 받는 데 경건성의 표현이 약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세례교인들은 모두 일어서서 경건히 받도록 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성찬대 앞으로 모두 나와서 무릎을 꿇고 받는 방법 등을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셋째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긴 성찬 테이블이나 또는 찬양대석에 사도들의 숫자처럼 12명씩 나와 앉도록 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개혁자들에 따라 성찬성례전의 집례와 수천의 형태는 다양하였습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어느 형태가 성경적이냐는 논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어떻게 하면 보다 더 성스럽게 주님의 희생을 재현하고 거기에 깊이 참여하는 형태가 될 것인가의 이론을 전개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기독교 예배의 성찬성례전 역사를 존중하고 그것을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동방교회와 가톨릭을 비롯하여 성공회나 루터교가 지키고 있는 형태를 유심히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회중들이 줄을 서서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거나 경건히 선 자세를 취하고 집례자가 입에 넣어주든지 또는 두 손으로 받든지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한다면 이제는 우리도 앉아서 가져다주는 것을 받는 형태만을 고집할 것이 아닙니다. 현대의 많은 개혁교회들이 시도한 것처럼 좀 더 다양하게 성찬성례전에 참여하는 형태들을 갖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좀더 신선하고 성스러운 성례전을 가져야 함을 그토록 강조했던 칼빈이나 낙스의 가르침도 예배의 현장에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교회로 진입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라고 보아집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전해준 단 한가지의 형태만을 가지고 고집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관습을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최근에 한국의 어느 장로교 교단의 예식서에서도 자주 성례전을 갖도록 제시하면서 그 집례와 수천의 형태를 다양화할 수 있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교회도 성숙하여 그만큼 발전의 발길을 내딛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 호흡을 함께 하는 신선한 방법의 시도가 마땅히 있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5. 성례전-침례와 세례의 뜻은 서로 차이가 있는가요?
Q 침례와 세례의 뜻은 서로 차이가 있는가요? 동일한 뜻인가요? 장로교 목사가 침례교 목사로 부임하면서 다시 세례를 받을 수 있나요? 물에 담기도록 하는 세례와 세 번 머리에 물을 얹어 적시게 하는 것 등에 관한 초대 교회의 지침서가 있는지요?
한사람이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침례교로 옮기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단 하나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장로교의 세례는 비성경적이요 진정한 세례가 될 수 없으므로 다시 자신들의 형태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몹시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동안 여기에 대한 변증을 할 수 있는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는 한 마디 의 저항이나 이론을 내놓지 못하고 세례를 다시 받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침례교로 교단을 옮긴 사연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세례는 과연 무효가 될 수 있는 것인지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과연 침례만이 진정한 세례이고 그 외의 세례 형태는 비성경적이고, 초대교회의 세례 사역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열두 사도의 교훈」이라고 일컫는 목회지침서 「디다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디다케는 초대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던 목회의 가르침들을 주후 100년경에 편집한 문헌으로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그들의 목회 현장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이 문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세례는 흐르는 물에서 주시오. 그렇지 못하면 받아 놓은 물에서 주시오. 물이 차면 따뜻이 데워서 하시오. 아니면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 번 머리 위에 물을 부으시오.
성경에서는 흐르는 생수에서 세례를 준 기록 외에는 다른 형태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러나 핍박 속에서 세례를 주어야 했던 사도들과 속사도 시대에 세례를 반드시 흐르는 생수에서 주어야 한다는 지침을 세운 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의 방법을 택하였다는 기록들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카타콤과 같은 지하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손으로 물을 떠서 머리에 붓는 형태를 취하였습니다. 박해 속에서 간신히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교회 공동체가 공개적으로 강물에서 몸을 잠그는 세례를 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교회는 강물에서 또는 물을 가득 채운 물통에 수세자를 잠기게 하는 것만 고집하면서 세례성례전을 행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하면 예배당 안에 물을 가득히 받아 놓고 물에 잠기는 침례의 경우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아니합니다. 오늘의 침례도 디다케에서 제시된 두 번째의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 계열에서는 세례의 주안점을 물에 온전히 잠기는 데 두고 있는 인상입니다. 그러나 열두 사도의 교훈에서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제시되었고, 가장 많이 사용한 바 있는 세례의 방법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부르면서 세 번 물을 머리 위에 뿌리며 적시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초대교회는 강물이나 받아 놓은 물에 잠기게 하는데 세례의 주안점을 두지 않았음을 봅니다. 오직 성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를 씻고 하나님의 자녀로 뭇 증인들 앞에서 인침을 받는 데 보다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초기교회의 세례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는 「열두 사도의 교훈」은 어느 형태의 세례가 우월하고 유일한 것인가를 가르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아니합니다. 이 문헌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세례성례전이 얼마나 진지한 준비와 과정을 거쳐 신앙고백을 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자녀로 인침을 받게 되는지에 대한 깊은 관심입니다.
이제 우리의 교회도 그 세례의 형태가 어떠했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베푼 세례를 서로가 인정하고 그 신앙이 성장하도록 돕는 데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6. 성례전-세례는 어느 예배에서도 가능한가요?
Q 우리는 1년에 두 번 성례주일에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는 일 년에 몇 차례쯤 베풀 수 있나요? 세례는 주일 낮 예배 외에 저녁 찬양예배에서도 베풀 수 있나요?
목회자들은 좀더 신선한 목회를 위하여 새로운 생각들을 정리하고 그 가능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이 신선하고 다양하여 교인들의 관심을 붙잡을 수 있다는 판단을 하면서 때로는 고민을 합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새해 첫 주일에 새로운 출발의 의미를 확산시킬 수 있는 행사로서 세례성례전을 갖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찬성례전이 없이 순수한 세례성례전만 집례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교인들로부터 어떤 반응을 가져올 것인지 궁금해 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교회는 과거에 행하지 아니했던 것이라면 아무리 조그마한 것이라도 새롭게 시도할 때는 대단한 거부감을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것을 그대로 고수하고 싶은 교인들의 보수적인 성향이 목회자를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아니합니다. 심지어 성경과 신학에 근거하여 잘못된 옛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마저 그것이 새로운 것이라면 거부반응을 종종 일으킵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어제를 답습해가는 비효과적인 관행은 이제부터 하나 하나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세례와 성찬성례전을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우리의 관행은 목회자가 부족했던 시절에 발생된 것입니다. 봄 가을 당회장의 순회에 맞추었던 단순한 관행이 굳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세례와 성만찬과의 분류는 예배신학적으로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성만찬과 세례를 얼마든지 분류하여 가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성찬성례전과 함께 학습, 유아세례, 입교문답, 세례까지 한꺼번에 갖기 위하여 두 시간을 소요하는 일은 무리입니다. 중요한 성례전을 진행하면서 회중들에게 감격을 안겨 주는 것 대신 지루함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차라리 세례성례전을 다른 주일에 갖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성찬성례전만 진지하게 거행하는 것도 의미를 더 깊게 심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성례전은 봄 가을의 성례주일만이 아니라 52주 어느 주일의 낮 또는 밤 예배시간에 베풀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성찬성례전을 수반하지 않고 세례만 주어도 성경과 신학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아니합니다. 장로교의 한 교단(통합측)에서는 교단 헌법의 예배모범에서 이러한 성례는 자주 베풀도록 오히려 독려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유아세례와 성년세례를 봄 또는 가을의 정해진 주일로 미루다가 후회 막심한 경우를 당하는 사례를 봅니다. 현대인들은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언제 어디서 이 땅을 고별할지 아무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배하는 공동체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을 구원한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고백을 남기지 못하고 떠난 경우를 생각하면, 세례란 시각을 다투는 중요한 성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봄 가을의 성례주일에 세례를 받겠다고 준비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한 생명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아 생명록에 입적됨을 교회 앞에 알리는 세례마저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남으로 주변 사람들이 가슴 아파하는 실례들이 우리의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세례는 어느 한정된 시간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년세례의 경우는 본인이 죄악된 삶을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기를 원하는 경우, 그의 신앙의 정도를 점검하고 일정한 교육을 시키고 당회의 결의를 거쳐 지체없이 세례를 주는 것이 목회자의 당연한 임무입니다. 이러한 사례는 사도행전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에디오피아의 높은 관리 내시가 빌립의 설명을 들은 뒤 진리를 깨닫고 세례받기를 원하자 빌립은 지체없이 세례를 준 바 있습니다.
세례란 교인이 된다는 단순한 단계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 일원이 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폴 틸릭은 세례는 새로운 존재로서의 탈바꿈하는 거룩한 성례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외국의 교회들은 어느 주일이든 목회자의 판단에 준비가 되어 있는 후보자라고 판단이 되면 당회의 의결을 거쳐 유아세례와 견신례와 성인세례는 어느 예배에서든지 주고 있습니다.
7. 성례전-성찬 성례전을 좀더 자주 거행할 수 없나요?
Q 한국의 장로교나 감리교 성결교들이 성례전을 일 년에 한두 번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기독교 예배에서 성례전을 일 년에 몇 차례 거행해야 적절한지요? 일 년에 한두 번 성례전을 거행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요? 여기에 대해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우리 나라가 5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살아온 동안 이룩해 놓은 종교문화는 이 민족의 사고와 심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종교적 행위 이외에도 불교와 유교와 같은 종교들과의 접촉에서 이 나라의 문화는 제의적인 문화로 정착을 하게 되었고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제의적인 민족으로 그 속성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쉽게 제의적인 행위들과 친근하게 되었고 그것들이 생활의 일부로 수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200년 전의 천주교와 100년 전의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와서 뿌리를 쉽게 내릴 수 있었던 것도 종교와 친밀성을 가지고 있는 이 민족의 심성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개신교에서 갖는 성만찬과 세례 성례전은 제의적 행위에 익숙해 있던 우리들에게는 존엄한 종교의식으로 환영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이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전이 예배에서 진행될 때마다 그 엄숙성과 그 의미의 수용은 실로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왜 우리의 한국교회가 이 성례전을 일 년에 2회로 고정하였고 더 이상의 성례전을 갖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 제기가 나오게 됩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일 년에 2회로 정하여 놓은 그 횟수가 마치 진리인양 지켜지고 있는 우리의 관행에는 분명히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이 땅의 여러 곳에 교회가 시작되었으나 성례를 집례해야 할 목사가 없던 100년 전 우리의 현실에서는 선교사들이 일년에 봄 가을로 순회를 하면서 학습과 세례를 주고 성만찬 성례전을 집례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오직 말씀만을 중심하였던 퓨리턴들이 일년에 4회로 성만찬 성례전을 제한한 쯔빙글리의 개혁사상과 접목되었기에 이 땅의 선교사들이 연 2회로 성례전을 갖는 것은 신학적으로 크게 문제 삼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성례전을 집례할 목사가 교회의 수에 비교하여 차고 넘칩니다. 그리고 신학적으로 우리는 대단한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일 년에 2회로 정착된 성례전에 대한 신학적인 검색이 없습니다. 이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그 횟수를 늘려도 좋은 것인지에 대한 교단적인 연구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성만찬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 의미는 구약적인 모든 희생 제사가 자신의 십자가 위의 대속의 죽음으로 대치되는 새로운 연약으로서 설명되었고 이 예전은 계속적으로 이어져야함을 명령하시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초대교회는 주님이 부활하셨던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 칭하고 그 날에는 어떠한 핍박과 환난이 있어도 말씀과 성만찬의 성례전을 필수적으로 그들의 예배에서 지켜왔습니다. 그리고 중세교회나 정교회나 천주교나 이 전통은 조금도 변화를 가져오지 않고 가장 존엄한 예배의 규범으로 준수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공회나 루터교회도 말씀과 성만찬 성례전을 매주일 준수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예배의 정신과 역사를 바르게 이해하는 개신교에서도 매주일 또는 매월 성만찬 성례전을 예배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성례전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후보자가 나타나면 어느 예배에서든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감리교나 성결교는 요한 웨슬리의 신학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 신부 출신으로 예배예전의 존엄성을 언제나 갖추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주일 예배에서의 성찬성례전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로교는 쯔빙글리가 아닌 칼빈의 신학사상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그 신학의 탁월함에 감동을 합니다. 그러나 기이한 현상은 칼빈의 성만찬 성례전 신학과는 거리가 먼 길을 장로교가 걷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제 우리는 밝아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으로 칼빈과 같은 위대한 개혁자들이 남긴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옷깃을 여미고 대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1년에 한두 번 성만찬에 참여하도록 한 관례는 분명히 악마의 농간이다.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은 적어도 크리스챤들이 매주 한 번은 참여할 수 있도록 거행되어져야 한다... 사탄은 사람들로 하여금 일 년에 한두 번 성만찬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도들의 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우리에게 큰 결점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8. 예배-영상매체를 통한 예배란?
Q 지성전이라는 이름으로 대형교회들이 영상매체를 통하여 예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좋은 대안은 없는지요? 영상매체를 통한 예배가 가져올 부정적인 요소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매체를 통한 예배는 간접적인 감각을 강하게 주고 있지는 아니한지요?
20세기에 인간의 사고와 시공간에 가장 심각한 파장을 일으킨 것은 바로 전자문화입니다. 이 전자문화의 등장과 함께 인간세계에는 새롭고 편리하고 유익한 일들이 밀려왔지만 반면에 잃어버린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특별히 영상매체가 등장하면서 예배당의 풍속도가 세찬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어느 큰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예배당 본당은 만원이 되어 옆방으로 교인들이 들어가서 영상 화면을 통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봉헌시간이 되자 거기서도 헌금대가 돌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그 교회를 방문한 어느 교인은 큰 소리로 “여기는 다음 예배를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대기실이 아닌가요?”하는 질문을 던져서 주위를 어색하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세계교회가 인정할 정도로 모이기를 힘쓰면서 성장을 거듭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급작스러운 성장이 영상매체를 활용하면서 적지 않은 문제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기둥 때문에 보이지 않은 사각지대에 앉아 있는 교인들의 편의를 위하여 도입된 영상매체가 이제는 본당에 들어오지 못한 교인들을 위해 주변 건물에 설치하여 거기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아예 지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역별로 또는 국가별로 위성이나 케이블 선을 연결하여 거대한 영상 모니터로 동시 중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 현장에는 예배 인도자가 형식적으로 앉아 있고 모든 것은 본당에서 진행하고 있는 그대로 따라 할뿐입니다.
이러한 것이 과연 예배학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것인가? 이러한 현상은 다른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아니할 것인가? 등의 문제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목회자의 역량에 따라 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은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합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마다 그렇게 성장할 수만 있다면 이것은 더할 나위 없도록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훌륭한 선배 목사들의 사례를 수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가 성장하여 예배당이 차고 넘치면 예배의 횟수를 늘려서 최대한 수용하고, 그래도 다 수용할 수 없다면 바로 지교회를 만들어 분립해 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입니다. 인천의 이기혁 목사 같은 분은 그가 섬기는 인천제일교회만 거구가 되는 것을 원치 않고 예배당이 차고 넘치면 제2, 제3의 교회를 계속적으로 분립해 주었던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확장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화상을 통한 예배에는 참으로 위험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구원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배란 주님의 날에 성전에 나아가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화상을 통한 예배가 합리화된다면 이제는 예배당에 나아갈 당위성이 없어집니다. 예배 현장을 중계하는 유선방송 앞에 앉아 예배 실황을 보는 것으로 예배행위를 대치하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의 예배 중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들을 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예배당에 나아와 예배하는 교인은 줄게 되고 예배당의 존재가치는 상실되고 말 것입니다.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는 영상매체의 활용이 필요하지만 존엄해야 할 예배를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느 개교회의 차원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미래를 위하여 깊이 고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한때 어느 왕성한 교회가 단순한 생각으로 출발한 것이 어느 날 거대한 역사적인 오류로 남게 될 위험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영상매체를 통한 예배가 근본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은 성찬성례전입니다. 교회는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과, 보고 참여하는 성찬성례전을 통한 말씀이 함께 병존해야 바르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영상매체만을 통한 예배의 현장에서는 세 번째의 말씀을 대치할 길이 없다는 것도 깊이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간접적인 감각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그것 또한 문제입니다
9. 예배-주일 예배에서 복음성가를 부를 수 있나요?
Q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요즈음 주일 낮 예배에서 복음성가를 찬송가보다 더 많이 부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기성세대는 공인된 찬송가를 고집하고 젊은 세대는 복음성가를 선호하는데 그 간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 낮 예배에서 박수를 치면서 복음성가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예배의 뜨거움을 자랑합니다. 반면에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만은 복음성가를 엄격히 금하면서 예배의 경건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느 길이 바른 길인지 많은 교회가 혼돈을 가져옵니다.
복음성가가 교회에 가장 활발하게 등장하던 곳은 미국교회였고, 그 시기는 1800년대 중반에 절정을 이루었던 제2차 대각성 부흥운동 때였습니다. 이때 미국은 세속주의와 도덕적 타락이 극심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교회는 17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제1차 대각성 부흥운동이 다시 일어나야 할 필요를 느끼던 때였습니다. 이 신앙 부흥운동은 뜨거운 회심의 물결을 일으켜 미 전역에 불길이 번졌습니다. 이때 평신도 부흥가 무디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여 그의 부흥전도단이 가는 곳마다 복음성가는 매우 활발하게 보급되었고 수많은 집회에서 큰 효과를 거둔 바 있습니다. 무디의 말씀 사역을 도와 찬양 사역을 담당한 사람이 유명한 생키였습니다. 그에 의하여 미국의 근대 찬송가의 보급은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사역은 찬양을 통하여 더욱 은혜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의 은혜에 찬 노래에서 입증시킨 바 있습니다.
복음성가는 그 출발부터 주로 복음전도에 주안점을 두고 성도들의 신앙성장과 친교를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자연적으로 그 가사 내용이 인간들의 심령에 호소하는 내용으로 짜여 있고 그 곡들 역시 그 시대의 노래 가락에 편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율동음악이나 재즈음악이 한때는 복음성가의 주종을 이루기도 했고, 60년대 이후부터는 팝송이나 록 뮤직의 음률이 복음성가를 지배하기도 하였습니다. 최근에는 가락이 없이 가사만을 외우는 랩뮤직을 모방하기도 합니다.
기독교가 예배 가운데서 불러온 찬송은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경배하는데 주안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교회 전통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에서는 시편을 주로 찬송가 가사로 사용하면서 하나님 중심의 찬송을 개발하였고 그것을 복원하려는 예배갱신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생각하면 우리의 찬송가는 그 가사와 곡들이 복음성가와 성격을 같이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오랜 시간 불러오는 가운데 우리들은 예배에서 불러야 할 찬송과 복음 성가와의 구분을 짓지 못한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서구교회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공인된 예배찬송과 복음성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문제성이 적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하는 자신의 마음에 와 닿은 노래는 모두 찬송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부담 없이 예배에 도입하는 실정입니다. 오히려 어떤 교회는 공인된 찬송가보다는 현대감각이 넘치는 복음성가를 더 선호하는 기현상이 속출하는 현실입니다.
매우 흥미로운 일은 복음성가를 활발하게 불렀던 오순절 교회들이 최근에는 주일 낮 예배에서 복음성가를 억제하고, 전통적인 찬송가를 부르면서 개혁교회들의 예배와 차이가 없게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시대의 배경을 달리하는 세대들에게 수세기 전의 찬송만을 불러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의 예배는 다양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서구의 교회들은 주일 저녁 찬양예배나 삼일기도회가 없어서 예배의 다양성을 실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는 예배의 기회가 많아서 주일 낮 예배는 예배의 전통성을 지키고, 찬양예배나 기타 예배에서는 현대 음악 감각을 살린 복음성가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성가를 고를 때는 인간의 정서에 주안점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과 감사가 주안점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가 지켜야 할 신학과 교리에 조명해 보는 것도 참고로 해야 합니다. 또한 복음성가의 곡이 예배의 경건성을 해치지는 않는지 섬세한 점검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분별한 복음성가의 사용은 자칫 하나님을 향하는 것보다 인간의 감정에 얽매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10. 예배-우리의 찬송가는 재고되어야 합니다
Q 유럽이나 미국교회 예배에 참석하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들이 거의 보이지 아니합니
다. 무슨 연고인지요? 미국의 장로교 찬송에 아리랑 곡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찬송에는 한국적 가락이 전혀 없습니다. 어찌된 사연인지요?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는 어느 시대 어떤 영향을 받은 찬송들인지 알고 싶습니다.
외국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이나 예배신학자들이 한국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에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교회가 예배 시간에 부른 찬송가 곡들이 매우 반갑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연인즉 자신들이 어릴 적에 부모님들이 부흥회를 다녀와서 부르던 찬송들을 한국교회가 많이 부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서구의 민요곡으로 만들어진 찬송만 부르고 한국인의 음률이 담긴 찬송은 어찌하여 개발하지 않고 있는지를 묻습니다. 이때마다 느낀 수치감은 대단한 수준의 것이었으며 우리의 찬송이 없는 현실을 몹시나 안타깝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개신교가 하나의 찬송가를 가지고 각 교회가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은 분명히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1949년부터 1960년까지, 그리고 1983년부터 오늘까지 결코 짧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교파주의가 강한 한국교회가 일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여러 교단들이 모여 찬송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서로의 전통과 주장을 수용하다가 찬송가의 본래적 방향과 내용에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른 찬송은 「찬양가」를 비롯하여 「협동찬송가」, 「복음가」, 「부흥성가」등에 수록된 복음찬송이나 부흥성가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이제는 이것만이 기독교 예배에서 불러야 하는 정상적인 예배찬송의 전부로 아는 착각속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에서 부르는 찬송의 역사는 이러합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이 있기 전까지 예배 현장에서의 노래는 훈련받은 찬양대의 독점물이었습니다. 루터는 회중이 참여하는 예배찬송의 시급성을 느껴 귀에 익숙한 그들의 곡에다가 시편을 활용하여 회중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는데, 이것이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예배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쯔빙글리와 칼빈은 예배찬송의 존엄성이 무너지고 노래가 인간 중심으로 흐름을 경계하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처럼 시편송을 단순한 음률에 넣어 악기의 도움 없이 예배찬송으로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그후 화란의 개혁교회는 독일의 루터 교회가 유럽의 전지역으로 불길처럼 번져가는 원인이 그들의 일상화된 찬송 때문이라는 판단을 하고, 자신들도 시편송의 대중화를 위하여 편곡을 하면서 보급에 힘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 감리교의 웨슬리를 비롯하여 아이삭 등이 대중을 모아놓고 복음을 전하는 부흥회와 같은 집회에서 그들에게 맞는 음악을 다량으로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의 찬송은 주로 신앙간증의 성격이 다분하였고, 스스로의 결단 또는 탄원의 내용을 대중적인 곡에 담아 보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부흥성가는 바로 미국의 1, 2차 대각성 부흥운동과 연결되어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특별히 19세기에 있었던 미국의 제2차 대각성 부흥운동의 확산과 함께 있었던 서부 개척기의 인구 이동은 회심을 목적으로 하는 집회를 성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집회에서 불렀던 음악이 주로 우리가 부르는 찬송들이었습니다.
이 부흥운동의 과정은 각 교회가 해외선교에 열을 올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여파는 세계의 복음화에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바로 그때인 1884년,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반도에도 그들이 보낸 선교사들에 의하여 복음이 상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 교회의 찬송가는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져온 복음찬송이나 부흥성가가 주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아무런 수정도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세계의 개신교는 찬송가의 갱신에 지대한 관심을 두었습니다. 모든 나라의 교회가 예배에 합당한 찬송의 개발을 서두르면서 시편을 대대적으로 찬송가에 도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교회는 악보도 없이 시편만 주로 담은 찬송가를 가지고 있으며, 미국 장로교는 1990년에 펴낸 찬송가에서 시편송이라는 항을 만들어 100편의 시편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찬송가도 우리 민족의 음률에 맞추어 기독교 예배의 찬송에 근원이 된 시편을 대폭 실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정서가 함께 움직이는 곡조를 가지고 시편을 찬송으로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예배가 세계 어느 교회에 내 놓아도 자랑스러운 수준을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후손을 위해서도 우리의 언어와 정서가 서린 예배를 정착시켜 주어야 합니다
11. 예배-“성가대? 찬양대?”
Q 지금 교회마다 ‘성가대’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찬양
대’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우리가 사용한 개역 성경에 ‘성가’ 또는 ‘성가대’라는 이름이 있는지요? 지금 많이 사용하는 성가대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하여 이렇게 유행되고 있는지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목적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면서 예배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하여 성경에서는 다양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예배하는 무리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예배를 진행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구약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음악적인 속성을 최대한 성별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려는 노력이 대단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찬양대가 정착된 과정을 잠깐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찬양대를 통하여 경배와 찬양의 행위가 결정적으로 나타난 때는 다윗 왕 때였습니다. 다윗 왕은 인간이 최상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길은 아름답고 정성어린 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성어린 찬양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울 왕 때에 못다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예배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겨오고 성전예배의 예전을 갖추었을 때에 그는 찬양대를 따로 세우게 하였습니다. 그 찬양대는 여호와의 집에서 찬송하는 일을 주로 맡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처소도 일정하게 정해 줄만큼 예배 진행의 주역들로 성별하였습니다. 이 찬양대원은 누구나 다 라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 계열의 레위 지파에서만 뽑아 거룩한 직분으로 세웠습니다. 이러한 찬양대의 전통은 로마 카톨릭에서도 소중하게 여겨 찬양대를 소년들로 조직하고 음악학교를 통하여 육성하였으며 이들로 하여금 예배를 돕도록 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독일과 미국에 와서 어른 혼성 찬양대가 시작되어 활발하게 활동을 하였고 이러한 양상은 전세계교회에 확산되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전담한 찬양대의 찬양이 최근에 와서 성가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동안 공인하여 사용한 개역성경에는 성가 또는 성가대라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1976년에 나온 공동번역에서 개역성경의 「노래하는 자」를 「성가대」로 12회에 걸쳐 번역했을 뿐입니다. 그리고는 한결같이 모두 예배에서 노래하는 일은 찬양이라 하였고 거룩한 직분을 맡았던 사람들을 찬양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 일본어의 잔재를 지적하면서 설교자의 바른 말 사용을 주창하고 있는 오소운은 한국교회가 해방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합창단을 「찬양대」로 불렀음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 출판사가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르는 것이 성가대의 이름이 시작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세이까다이’-성가대가 직수입되면서 우리가 그 동안 불렀던 찬양대라는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있습니다. 성가대가 우리의 순수한 말이 아니었음은 을유문화사의 국어사전이나 1958년 동아출판사의 우리말 사전에 「성가대」라는 항목마저 없고 오직 찬양대라는 항목만이 있다는데서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찬양대」를 “남녀 기독교 신도로 조직된 합창대”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성가대」라는 단어가 우리말 사전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1994년 민중서관의 국어사전이 처음일 정도입니다. 그 뜻도 “성가를 부르기 위하여 조직된
합창대”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자료들을 다시 정리하여 읽고 있노라면 무척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렇게 많이 번져 있는 「성가대」라는 이름은 우리가 공인하고 사용하는 성경에도 없는 명칭임이 확실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오랜 시간 찬양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찬양의 큰 몫을 담당해 왔습니다. 한글 사전은 한국말을 주로 풀이해 주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런데 「성가대」라는 단어는 우리의 사전에서도 1990년대 초까지 다루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이 「성가대」라는 말이 고정되어 있던 곳은 일본어의 「세이까다이」뿐이었습니다. 이토록 자료가 뚜렷한데도 「찬양대」를 일본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성가대」라는 명칭을 수입하여야 하는지 의문이 갑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아니합니다. 바르게 잡아야 할 이름은 시간을 늦추지 말고 바로 잡아야 우리의 후대에 부끄러운 기록을 남기지 않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성가」라는 말은 단순히 성스러운 노래를 의미합니다. 모든 종교에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노래를 성가라고 부릅니다. 그러하기에 불교도 자신들의 노래를 구분하여 부르고 싶어서 ‘찬불가’라고 이름했습니다. 그들도 그들의 노래를 ‘성가’라고 부릅니다.
참고로 우리는 순수한 우리말로 번역되었던 개역성경에서 ‘찬양’이라는 단어가 213회, ‘찬송’이라는 단어가 98회, ‘찬미’라는 단어가 14회가 등장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성가’라는 단어는 단 한번도 없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찬양을 받기 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성가를 받기를 원하신다는 우리말 표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찬양대」라는 우리 고유의 이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2. 예배라는 단어가 없는 우리의 구약성경
Q 한국에 있는 기독교의 대부분의 교단이 공인한 성경은 개역 성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의 구약에는 「예배」라는 우리말 어휘가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무슨 이유인가요? 대표적인 영어성경인 흠정역(KJV)에서는 Worship이라는 단어가 115회나 나타난 것과 비교하면 조금 이상합니다. 사연을 알고 싶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우리의 예배 생활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는지 알려주세요.
우리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한국교회가 공인한 개역 성경을 읽으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이상한 문제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문제는 다름아니라 한국교회가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 성경의 구약에서는 「예배」라는 어휘를 단 한 군데서도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신약에서만 14번 나타나는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특유한 일입니다.
사실 우리의 개역 성경이 번역상 안고 있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반 서적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번역에 있어서 나타난 원만한 오류는 그대로 묵인하면서 100년을 넘기고 있는 현실입니다. 좀더 섬세하게 살펴보면 하루 속히 정정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특별히 한문 세대가 사용하던 단어들을 한글 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휘들이 수두룩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예배」로 번역해야 할 어휘들은 대표적으로 「샤하」「아바드」「자바」 등등입니다. 이러한 단어가 우리말로 번역될 때는 ‘경배하다’‘섬기다’‘절하다’로 옮겨졌습니다. 막상 「예배」라고 번역되어야 할 단어들인데 「예배」라는 단어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있는 기이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레이투르기아」「프로스쿠네오」「세보마이」와 같은 예배를 의미한 단어들이 그대로 번역되어 14회에 걸쳐 「예배」라는 단어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오류는 참으로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예배라는 말이 우리말로 「경배하다」 「섬기다」 등으로 번역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행위의 자세와 마음가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예배라는 말은 하나님의 법규에 따라 예배하는 예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전혀 예배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구약의 법규에 따른 예전적 예배가 아닌 경우에도 충실히 「예배」로 번역했습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결과들입니다. 이 사연에 대한 대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무슨 사연이 번역의 과정에서 발생되었는지 아무런 기록도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이때마다 성경 번역위원들이 번역의 원칙과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대들이 우리말 성경을 연구하려고 할 때 내놓을 수 있는 자료를 정리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습니다.
공동번역의 경우를 볼 것 같으면, 이 성경은 1968년 신구교 학자들이 “독자들이 원문을 읽는 사람과 같은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번역을 시작하여 10년 만인 1977년에 출판된 바 있습니다. 이 성경에서는 「예배」라는 단어를 성실히 번역하였습니다. 이 성경은 「예배」라는 단어를 구약에서는 135회, 신약에서는 36회에 걸쳐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임을 알게 됩니다. 영어권에서 오랜 역사와 권위를 가지고 있는 흠정역(KJV) 성경에서는 구약에서 115회, 신약에서는 75회에 걸쳐 「예배」(Worship)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번역본들과 우리의 개역 성경을 비교할 때 「예배」에 대한 거리가 너무 동떨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동안 한국교회는 집회만 있고 예전이 담긴 예배가 없다는 평가를 세계교회로부터 듣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의 예전적 예배에 대한 이해와 관심의 결여와 교육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개역성경에 나타난 번역 문제가 그 원인제공을 하는데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대한성서공회는 필자가 제기한 이 문제를 수긍하고 인쇄를 연기해 가면서까지 구약의 예배라는 단어의 번역에 새로운 수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최근의 개역 개정판에서는 구약에 30회 가량 예배라는 단어를 긴급히 수정 번역하여 출판했다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예배를 의미한 단어는 모두 「예배」로 번역하여 예배의 정신과 실상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읽도록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13. 예배 중에 사람을 환영할 수 있나요?
Q 설교가 끝나면 예배도 다 마치는 것인지요? 지난 지역에서 연합으로 드리는 부활절 예배에서 설교 다음에 이어서 지역 인사들을 환영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그것이 바른 일이었는지요? 새 교우를 환영하고 사람을 소개할 수 있는 시간은 언제가 적절한가요?
부활주일 아침에 교파를 초월하여 드리는 예배는 감동의 극치입니다. 여기에서 부활하신 주님만을 쳐다보고 환희와 감격을 갖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지난 부활주일 아침 연합으로 드리는 예배에서 참으로 어색한 광경이 보였습니다. 예배를 집례하는 성단에 예배 순서를 맡게 되는 여러 목사들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단의 맨 앞줄에 세 분이 아무런 순서도 맡지 않은 채 예배위원들과 같이 꽃을 차고 앉아 있었습니다. 저 분들은 누구이며 무엇을 위하여 앉아 있는 분들인지 알 수가 없어 궁금하였습니다. 아직 예배가 끝나기 전인데 예배 인도자가 광고 시간을 가지면서 그 세 분들을 소개하고 환영했습니다. 그분들은 지역의 구청장과 경찰서장과 국회의원이었고 일부에서는 환영의 박수까지 치고 있었습니다. 부활주일 아침 예배 가운데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보여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설교가 끝나면 예배의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데서 발생한 것들입니다. 예배는 설교만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그의 종을 통하여 예배드리는 회중들에게 말씀을 들려주는 순서입니다. 설교가 끝난 다음에는 회중들이 하나님께 응답으로 드리는 순서가 이어집니다. 마지막 축도가 끝나기까지 갖게 되는 모든 순서는 그 순서 하나 하나가 의미를 갖고 진행되는 예배 행위입니다. 즉, 설교가 끝났어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계속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배 가운데서 기관장들을 소개하거나 방문객을 소개하고 박수를 치게 하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배를 존엄하게 생각하는 동방교회나 천주교나 성공회의 예배 시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실수입니다. 다시 한 번 개신교에서 예배를 얼마나 경시하고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 순서가 될 수 없는 광고를 예배 가운데 두고서 이것저것을 알리는 우리 한국교회의 실수는 신령과 진정으로 엄숙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정신과 질서와 분위기를 망치는 일입니다. 이러한 실수는 개혁교회가 일찍이 경계하고 있던 일입니다.
개혁교회 예배모범의 원조인 스코틀랜드 교회의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서는 첫 번째 목에서 공적 예배를 위하여 모인 회중들의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행위들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책이나 신문이나 기타의 것을 읽는 것, 옆 사람과의 대화, 특수한 인물들을 위한 경의의 표시, 조는 것, 목사를 괴롭히는 행위 등입니다.
이상의 조항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특수한 인물’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말한 특수한 인물이란 왕을 비롯한 왕가의 인물들이나 귀족, 제후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사회적 신분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현장에서는 순수한 한 인간으로 예배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신분이 아무리 높고 구별되더라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순간에는 그들을 환영하거나 높일 수 없다는 예배의 정신을 철저히 강조한 기록입니다.
예배 인도자로서는 특별하게 찾아준 사회의 지도자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나온 교우들을 환영하여 한 식구로서 맞아들이는 순서를 갖고 싶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역시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광고라는 순서를 하루속히 예배 시작 전이나 축도 후로 바꾸는 일입니다. 그래야 예배정신에 어긋나지 않고 사람을 소개하고 박수를 치는 부담을 줄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합으로 드리는 부활절 예배 가운데서 지역의 구청장, 경찰서장, 국회의원이 환영을 받고 박수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러한 행동을 일컬어 경솔하고 망령된 짓이라는 지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을 즐겁게 해주려는 어떠한 시도도 예배 가운데서는 금지되어야 합니다.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오직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의 정신입니다.
14. 예배-특송전후에 절을 하시나요?
Q 특송은 예배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나요? 특송을 시작할 때나 끝낼 때 노래하는 사람이 회중들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해야 하나요? 회중들은 특송이 끝나면 박수를 칩니다. 가능한 일인가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현장에서 아름다운 노래로 찬양을 드린다는 것은 누구나 감당할 수 없는 직책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노래를 잘 부를 수 있는 선천적인 소질이 없이는 이 직책을 감당하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반면에 선천적으로 노래를 잘할 수 있는 재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구원의 감격에 깊이 젖어 있는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서 찬양을 드린다는 것은 선별된 직책으로 예배의 역사에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출발은 다윗 왕이 레위 지파에서 찬양대원을 뽑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서 노래하는 직책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대단한 긍지와 함께 평생 그 직책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가 있는 교회들의 찬양대 구성원들 가운데 백발이 가득한 60대 찬양대원들을 보면서 평생을 통한 그들의 성스러운 충성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찬양대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기할 문제는 특송에 관한 관행의 문제점입니다. 특송은 주일예배 시간이나 찬양예배에서 많이 갖는 순서입니다. 주일예배의 특송은 일반적으로 봉헌 시간에 많이 부르고 있고, 찬양예배의 특송은 가족이나 구역원들이 나와서 찬송을 부르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특송을 맡은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를 시작하기 전후에 회중들을 향하여 겸손히 허리를 굽혀 절을 하는 모습에서 문제점을 발견합니다. 찬양대에서 성가를 부르는 경우는 회중들에게 절을 하는 일이 없는데 특송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이 정중히 인사를 하는 관습이 우리의 예배에 예사로운 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일반 합창회나 독창 발표회에서 청중에게 드리는 인사를 그대로 도입한 것에서 유래됩니다.
인사를 생활화하고 있는 우리의 사회에서 회중 앞에 섰을 때 절을 하지 않고 그대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다는 고백을 종종 듣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있는 교회에서는 특송자나 찬양대 그리고 심지어 파이프 오르가니스트까지도 회중들의 정면을 피하여 후면의 이층 발코니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회중들이 노래하는 사람들의 면모를 감상하는 것이 옳지 아니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예배에서의 특송은 결코 예배하는 인간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함이 전혀 아닙니다. 거기에 더하여 노래하는 사람을 감상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예배에서의 특송은 모인 성도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한 또 하나의 봉헌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성스러운 특송은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하여 정성을 모은 예배 행위”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우리 나라의 예배당 구조가 찬양대원이나 지휘자를 비롯하여 반주자나 특송자를 바로 쳐다볼 수밖에 없도록 설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예배 안에서 부르게 되는 특송을 받으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그분의 영광만을 위하여 드리는 봉헌의 노래와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시작과 끝에 절을 하는 행위들은 예배의 정신에 매우 부적합합니다. 회중을 향하여 절을 하고 회중을 향하여 노래를 부르는 행위가 예배의 기본정신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사람을 위한 특송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에는 특송자의 노래나 찬양대의 노래가 끝나면 박수를 치는 기현상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하나님께 박수를 드린다고 합니다. 어떤 명목의 이름을 붙이더라도 결국은 노래하는 사람의 노고와 그에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박수가 됩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의 예배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입니다. 정숙했던 우리의 예배가 많이 변질되어간 느낌이 듭니다. 주일 저녁 찬양예배나 수요기도회와 같은 시간은 자유롭게 하더라도 주일 낮 예배에서 예전적인 예배를 드릴 때는 정중한 예배가 되도록 노력함이 가당합니다.
15. 예배-목사님은 왜 거기 서 계시죠? (찬양대 찬양과 목사의 위치)
Q 예배인도자는 찬양대가 찬양하는 동안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고 서 있어야 하나요? 저희는 우리를 바라보고 서 있는 예배 인도자를 향하여 노래를 부르는 듯한 착각을 가끔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여성 찬양대원이 인도자와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어색함을 느끼는 때가 종종 있답니다.
우리의 주변에 있는 많은 종교들은 인간들의 의견을 모아서 정한 순서로 식전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드리는 예배 예전은 철저히 성경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레위기를 중심하여 주신 각종 규례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 유대교의 순서였고 그 줄기가 오늘 우리의 예배에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특정한 인간들이 창출하여 마음대로 예배를 구성하고 이어갈 수 없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의 규례를 지키기 위해 예배 인도자는 몸가짐이나 언어까지도 모두가 조심스럽게 역사와 전통에 담겨진 의미를 상실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전통을 가장 잘 간수하고 있는 정교회나 천주교회에서는 성직자들의 몸짓이나 언어나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신학교에서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성직자들은 이러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기에 예배 가운데서 행하여진 목사들의 정중하지 못한 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비록 개혁교회는 형식보다는 내용이라는 신학적 이론을 가지고 있지만 예배가 진행되는 성단에서 전화로 지시를 하고, 무엇을 깜빡 잊었는지 성단을 오르내리는 모습들은 보기에 참으로 딱하고 답답합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몸짓을 하고 손을 사용하고 소리를 지르는 광경 등은 거룩한 예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행위들입니다. 예배 인도자의 이러한 모습은 예배의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현상들입니다. 최근 한국교회의 예배 현장에 이상스러운 목사의 몸가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찬양대가 찬양을 하는 동안 바로 정면에서 목사가 마주 바라보고 서 있는 광경입니다.
설명인즉 하나님께 함께 찬양을 드리는 자세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부정적인 해석이 많습니다. 개혁가들은 일찍부터 회중이나 찬양대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할 때 아무도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찬양대 안에 들어가 함께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을 가로막고 목사가 찬양대의 찬양을 받고 있는 듯한 자세는 우리의 개혁교회 예배정신과 현실에 부합되지 않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렇게 서 있는 목사가 찬양대원들의 노래와 얼굴을 감상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찬양대원들의 눈길과 목사의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발생하는 어색함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어떤 예배 인도자는 찬양대가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찬양을 드리는데 어떻게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앉아 있을 수 있겠느냐는 반론을 폅니다. 그래서 오히려 서 있고 싶고, 서 있는 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더욱 좋을 듯 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깊이 관찰한 예배신학자들은 이 때의 예배인도자는 찬양대의 순서 다음에 이어지는 설교를 위하여 성령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임을 상기시킵니다. 그래서 예배 인도자는 곧 이어질 말씀의 선포시간을 위한 최종적인 점검과 기도를 이 시간에 드릴 수 있도록 권장합니다. 성령님이 오시어서 그의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고 감당하기 힘든 이 막중한 말씀의 운반을 책임져 달라는 절박한 기도가 이 시간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매우 타당한 충고입니다. 만일 예배 인도자가 설교를 하지 않을 경우라도 이 시간에 하나님이 찬양대의 찬양을 받아 달라는 기도와 설교자를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값진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예배의 현장에서 아무런 이해도 없이 남이 하니까 무조건 따라하는 수준이 낮은 교회가 아닙니다. 스스로 지어내고 만든 것들에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교회로 전락해서도 안됩니다. 개혁교회로서 역사와 전통이 있는 예전의 행위를 알고 따라야 하고 그 수준을 지켜야 합니다. 한국교회처럼 목사가 찬양대를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그들이 찬양을 하는 동안 서 있는 경우는 다른 나라의 교회에서 좀처럼 찾아 볼 수 없는 풍경입니다.
16. 예배-찬송은 일어서서?
Q 예배 시간에 의자를 사용하는 것은 불과 몇 세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전의 모든 예배는 서 있는 자세에서 진행되지 않았나요? 한국교회 예배는 첫 부분만 일어설 뿐 내내 앉아서 드리기에 늘 졸립니다.
예배 예전의 행위는 어떤 경우도 인간 위주로 진행될 수 없고 반드시 예배의 대상을 위주로 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평범한 상식입니다. 그러기에 예배자들이 무릎을 꿇는 것이나 앉는 것이나 서는 행위에 모두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으로서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예배는 크게 두 형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즉, 주일예배와 같은 예전의 절차와 행위를 요구하는 공적인 예배와 아무런 예배의 절차나 형식을 밟지 않고 드리는 사적인 예배입니다. 자유롭게 드리는 기도회와 같은 모임에서 모든 예배예전의 절차를 갖추려고 한다면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기타의 주변에서 자주 있게 되는 사적인 예배 행위는 중단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하기에 개신교는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를 제외하고는 주일 저녁의 찬양예배나 삼일기도회를 비롯하여 새벽기도회 또는 철야기도회 등은 공식적인 절차를 간소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 낮 예배만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세와 절차를 철저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 안에서 드리는 예전의 모든 행위는 시종일관 엄격하고 존엄하게 개혁교회 안에서 지켜온 전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관심의 대상은 예배 시간에 앉고 서는 문제입니다. 예배 역사의 전통을 가장 많이 물려받고 있는 정교회는 예배 전체를 서서 드리고, 그 중간인 천주교는 무릎을 꿇고, 서고, 앉는 예전 행위를 계속합니다. 그리고 개신교는 주로 앉아서 드리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찬송만은 언제나 다름없이 일어서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배에서 서 있는 행위는 하나님을 공경하여 마음을 가다듬는 의미를 가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한국교회가 유난히도 모든 예배를 앉아서 드리는데 으뜸간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의 모든 개혁교회가 주일예배에서의 찬송은 철저히 일어서서 부르는데 우리의 교회만은 그렇지를 않습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예배 첫 순서의 찬송 하나만 서서 부르고 그 다음의 찬송들은 모두 앉아서 부릅니다 그 이유는 서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서 다리가 아프기에 앉아서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실로 부끄러운 변명입니다. 몇 분을 서 있는 것이 육체에 부담이 된다고 편히 앉아 찬송을 부르려는 심사는 예배자들의 합당한 자세가 아닙니다. 생각하면 너무 고급스러운 발상입니다. 교회가 예배를 드리면서 오늘처럼 의자를 놓고 드리게 된 것은 그 역사가 수 세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모든 믿음의 선배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어서서 에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서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예의를 갖추어 서서 부르는 것이 상례일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존전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을 부르는 시간에 일어서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하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이것은 우리 삶의 문화와 직결된 문제입니다. 우리 실내 문화가 원래 방바닥에 앉아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방바닥에 앉았다가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의자가 없던 우리의 초기 교회에서는 가급적이면 앉아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활의 습관이 바로 예배로 이어져서 오늘과 같은 기현상을 관습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의 교회가 모두 의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불편을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세계의 개혁교회 예배 현장과 달라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주체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우리의 태만이 스며든 관습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주일 예배에서 모든 찬송은 일어서서 경건히 하나님께 드리는 자세를 회복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17. 예배-다같이 묵상기도 함으로 …
Q 우리의 예배 시작은 언제나 묵도로 시작해야 하는지요? 동일한 교단의 외국교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다같이 묵상 기도함으로…”가 있게 된 까닭은 무엇인지요? 개혁자들은 예배를 어떤 형태로 시작했는지요?
우리 한국교회는 일찍부터 예배를 시작할 때마다 첫 순서로서 “다같이 묵도(묵상기도) 함으로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순서는 한국 기독교 예배에서 너무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뿌리 깊은 관행입니다.
그러나 묵상기도라는 순서는 기독교 예배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나 종교개혁자들의 예배 순서 그리고 최근 신,구교의 어느 예배 순서를 찾아보아도 묵도라는 순서는 전혀 흔적이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예배의 시작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속사도 시대는 성경봉독으로, 3-4세기의 예배부터 집례자가 “주께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면 회중은 “또한 사제와 함께”라는 인사와 함께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동서방교회가 지금까지 사용해온 바입니다. 또한 개혁자들은 예배가 시작되면 맨 먼저 기록된 ‘참회의 기도’를 한 목소리로 드린 후 ‘용서의 확신’ 순서로 예배를 진행하였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개혁교회들은 예배 선언과 예배의 부름으로 시작을 삼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이 뚜렷하게 있는데 왜 한국교회는 머리 숙여 묵상기도를 하게 했는지 그 사연을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이 땅의 많은 종교의 예배 행위들이 먼저 머리를 숙이고 묵념하는 것은 일상화했던 것에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는 떠드는 교인들을 조용하게 하는 방편으로 묵상기도를 사용했을 가능성입니다. 다음의 1920년대에 있었던 기록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봅니다.
“남에게 방해가 되는지 유념도 주의도 없이 큰 목소리로 자기네들 일주일 간 지내오던 잡설이던지, 혹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리운 친구라도 보면 그를 따라가 앉아서 정담을 하거나...”했다는 기록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예배의 엄숙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묵상기도’를 시도했다고 봅니다.
예배를 인도했던 초기 선교사들은 이미 세계의 장로교 예배의 원조인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에서 밝힌대로 교인들이 예배당에 들어서면 십자가를 비롯한 어떤 성물이 있는 곳에도 경의를 표하거나 절하는 일이 없이 자리를 잡고 엄숙하고 품위있는 몸가짐으로 예배를 드려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예배의 엄숙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은 우리의 제의문화에 이미 자리잡고 있던 ‘묵상기도’라는 것을 예배에서 유용하게 활용하였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교인들의 의식수준과 예배에 임하는 자세는 세계의 어느 교회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예배도 이제는 더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하는 순서는 삭제하고 밝고 신선하게 시작하는 순서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아무런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습관적으로 답습하는 예배 인도자가 예배의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시작한 것이 진리인 양 고수하려는 보수성은 때로는 비성서적인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는 눈을 들어 개혁자들의 예배 현장도 연구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 시작과 세계의 개혁교회들이 예배를 시작한 형태는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예배 인도자가 오르간의 전주가 끝나면 바로 나와서 밝고 상쾌한 인상과 음정으로 “이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두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겠습니다”하는 예배 선언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 선언이 끝나면 찬양대의 응답송이 나오고 이어서 인도자가 하나님을 말씀으로 “예배의 부름(말씀)”을 장엄하게 들려줍니다. 그리고 기원을 하면 우리의 예배는 그 의미나 절차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됩니다. “다같이 묵도함으로… ”를 가지고 예배를 시작하는 관습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의 예배는 밝고 즐거운 경축의 예배 감각을 갖기가 매우 힘들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제는 우리의 예배 시작에 깊은 관심을 가질 때가 되었습니다.
18. 예배-예배 시작에 종을 치는 관행은?
Q 우리 교회 성단의 인도대에 큰 종이 놓여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의 역사에 이것은 언제부터 사용된 것인가요? 옛날에는 아주 적은 것이었는데 언제부터 큰 종이 놓이게 되었나요? 예배를 시작할 때 반드시 종을 쳐야 하는가요?
세계의 어느 개혁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려도 좀처럼 구경할 수 없는 희귀한 현상이 우리의 한국교회에서 가끔 발견됩니다. 그 때마다 사연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들을 수 있는 대답은 “그저 지금껏 계속해 온 것이기에 저도 계속합니다.”가 전부입니다.
그 희귀한 관습 중의 하나가 예배시간이 되면 인도대 위에 놓인 종을 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소리만 들리는 아주 적은 종을 사용했는데 요즈음에는 높이와 폭이 한 자는 족히 될만한 탁상용 종을 놓고 예배 시작을 알리는 교회가 여기 저기에 많이 보입니다. 그것도 황금빛 찬란하게 도색을 하고 그 위에 십자가를 세워 아주 성스러운 모습까지 갖춘 종을 만들어 보급하는 것을 봅니다.
필자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아무래도 이것은 어디선가 잘못 전래된 관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계 도처에 있는 개혁교회 예배 현장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어찌하여 우리에게만 있게 되었는지 그 사연이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기독교 예배 안에 역사성이나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관습인지를 밝혀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느꼈습니다.
예배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는 당연히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원로들을 찾아 뵙고 얻게 되는 대답은 “옛날부터 아주 적은 종을 쳐 왔는데 그 뜻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예배신학자들이 모이는 학회에 참석하는 기회에 여기에 대한 질문을 했으나 모두가 애매한 대답뿐이었습니다. 최근에 우리 나라에 와서 필자와 함께 지내면서 신학교에서 한 학기 강의를 한 바 있는 예배신학의 거장인 알렌박사도 필자와 함께 여기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이 의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하여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얻게 된 종의 유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개혁교회가 많지 않던 시절에 어느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면 그 교회에서는 종탑을 세우고 주일 낮과 저녁에 예배시간을 알리는 초종과 재종을 쳤습니다. 이러한 종소리는 한국의 교회에서도 전자 시스템을 이용하기 전까지는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사실은 주일 학교가 왕성하던 때에 주일학교 예배를 시작할 때 떠드는 어린이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연들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한국교회 예배에서 종을 사용한 것에 대한 결론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교육수준이 낮았던 초대 한국교회의 회중들이 예배시간이 임박했는데도 산만한 상태에 있을 때, 선교사들이 미국의 주일학교처럼 종을 쳐서 주의를 집중시키었던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는 추론입니다. 전화도 없던 시절 초기 교회는 서로가 아무런 소식을 나누지 못하고 한 주간을 지내다가 주일에 원근각지에서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에 참으로 반가운 만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교인들은 예배시작 전에 서로 가까운 사람들끼리 자리를 같이 하면서 안부를 비롯한 각종 사연을 나누느라 분위기가 몹시 시끄럽고 어수선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초기 교회 어떤 설교자는 이 소란한 예배 시작 분위기를 설교의 내용으로 다루기도 하여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때 선교사들이 미국의 주일학교처럼 탁상용 종을 치고 묵도를 하게 함으로 예배 분위기를 잡았다는 것이 매우 가능한 추론입니다.
생각하면 이것은 토착적 행위도 아닙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편의상 순간적으로 도입한 관행입니다. 그러한 것이 어느새 우리 예배생활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의미없는 관행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토착적 감각으로 예배의 시작을 알리려면 우리의 고유한 징을 쳐서 가슴으로부터 동참되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 더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분석하고 연구해도 단상에 종을 올려놓고 사용하는 것은 이제 중단함이 가당합니다. 우리의 회중이 100년 전 미국 교회 주일학생과 같은 의식수준을 벗어난지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19. 예배-예배 인도는 장로가 맡고, 설교는 목사가 맡는다는데… ?
Q 목사의 기본 임무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습니다. 인도와 설교의 전담은 누가 해야 하는 것인지요? 우리 교회는 언제나 설교는 목사가 하고 예배 모든 부분은 장로가 맡고 있습니다. 정상인가요?
일전에 어느 신학생이 제기한 질문입니다.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예배 인도는 장로님이, 설교는 목사님이 하시는데 그것이 바른 일인지를 물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목사님이 겨우 설교만 할 정도로 몸이 불편한지를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 교회는 어떤 목사가 부임해도 설교만 맡기고 예배 인도는 철저히 장로들의 몫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와서 좀처럼 들어보지 못한, 매우 생소한 질문이었습니다.
한국교회에 목회자가 부족했던 초기에 한 목사가 여러 교회의 당회장을 맡아 순회하던 시절은 장로가 교회를 살피고 주일 강단을 맡았던 곳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순회 차 온 목사는 설교만 맡고 기타의 예배 인도는 장로가 계속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목사가 부족하였기에 그러한 보조적인 역할이 가능하였고 시무 목사가 있는 경우 예배 인도와 설교는 목사의 당연한 직무입니다.
예배에 관하여 교단마다 거의 일치하는 점이 있다면 예배를 인도하고 성례전을 집례하고 설교하는 것은 목사의 고유한 의무요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은 교인들을 모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를 집례하는 제사장의 기능을 담당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고 해석하고 회중들의 삶에 적용해 주는 설교사역, 즉 선지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와 설교는 분리해서 수행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직무로 예배라는 행위 속에서 동시에 수행되는 성스럽고 고유한 사역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는 목사후보생들에게 예배학과 설교학을 필수로 하여 이 직분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그 내용들을 철저히 공부시킵니다. 예배의 역사를 비롯하여 예배 순서 하나 하나의 의미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가르치고 실제로 훈련을 시킵니다. 그리고 설교 사역을 위한 구체적인 연구와 함께 설교 실습을 통하여 철저한 점검을 받게 됩니다. 목사가 목회현장에 나아가 조금의 실수라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이 분야를 교육시킵니다.
매주일 이어지는 예배의 인도나 설교가 간단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목사가 그 자리에 서기까지는 실로 많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훈련과정을 거쳐 총회가 주관하는 고시에 통과되면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성례전을 바르게 이해하고 집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정확하게 운반할 것을 서약합니다.
솔직히 이러한 막중한 성직의 수행을 목사들이 매주일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감당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때가 없지 아니합니다. 틀에 짜인 예배 순서를 습관적으로 가볍게 여기는 목사가 있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는 설교 시간이 설교자의 말을 나열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진리를 전하고 있는지 혼돈케 하는 경우가 지금 발생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부족하고 모순된 현상에 대하여 평신도가 불만스러운 감정을 갖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장에서는 보다 나은 발전을 위하여 건전한 평가와 수정을 요구할 필요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도 목사가 못하니까 장로가 대신 할 수는 없습니다. 장로교의 제도는 목사 대신 교인 누구나 예배와 설교를 다 행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부족하면 위하여 기도하고 애정을 가지고 충고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긴급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결코 목사의 고유한 임무인 예배 인도와 설교를 교인이 분담하거나 대신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구조와는 다릅니다. 서로의 다른 직분에 대한 존경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부족한 목사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 향상을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울 수 있는 교인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이룩될 수 있습니다. 목사의 일을 평신도가 대행하면서 목사를 무력화시키는 교회는 건실한 내일이 보장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실리가 없습니다.
20. 예배-설교대와 인도대는 그 역할이 다른가요?
Q 우리의 교회는 성단에 설교대와 인도대와 기도대 등 세 개가 즐비하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설교대를 중앙에 세워놓고 그 곳에서 예배 인도와 설교와 기도를 합니다. 몇 개쯤 어디에 세우는 것이 적당한지요?
우리의 개신교 예배당을 들어설 때마다 많은 교인들이 혼돈과 의문을 갖게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예배당은 성단에 설교대와 인도대가 하나로 되어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설교대와 인도대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어떤 예배당은 기도대를 가운데 크게 만들어 세 개를 세워놓은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교황청의 지시에 의하여 일정한 제도 안에서 일치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교단이 만든 헌법의 정치와 교리와 예배모범 이외에는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나가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비록 총회의 결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수행의 권한은 지교회에 주어지는 것이 상례입니다. 특별히 예배당의 형태나 내부 구조에 대한 것은 거의 교단의 규제를 받지 않고 개교회가 의미를 부여하면서 건축을 하고 성단을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결과가 성단에 성구의 수와 형태들을 다양하게 이어지게 한 것입니다. 특별히 이러한 문제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목회자가 임의로 자신의 해석에 따라서 성단의 구조와 형태를 정하는 실정입니다.
성단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는 이렇습니다. 성찬성례전을 중심했던 초대교회와 중세교회는 성찬상만을 가지고 거기서 성찬성례전을 집례하면서 오랜 역사를 지내왔습니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성찬을 예배의 구심점으로 하고 있는 정교회를 비롯하여 로마 가톨릭교회나 성공회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이 말씀을 예배의 중심으로 주장하고 나설 때부터 성단의 성구들의 구조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루터와 같은 개혁자는 기존의 성찬대를 그대로 두면서 말씀의 단을 첨가하는 형태를 취했는가 하면 칼빈은 설교대를 회중들과 아주 가까운 곳에 높이 설치한 바 있습니다. 쯔빙글리나 재세례파의 경우는 성찬대를 치워버리고 설교대만을 갖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혼돈은 상당 기간 존속해 왔습니다.
1885년부터 이러한 성단의 구조에 대한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 복원운동이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개혁교회들이 주도한 바 있는 예배복원운동에서는 우선적으로 예배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예배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백성들이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받은 바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경배와 감사와 찬양과 봉헌과 참회를 드리는 데 우선적인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은총으로 내려주신 말씀과 성례와 축도를 받아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여기서부터 예배의 내용을 좀더 분명히 하고 의미를 가시적으로 보이기 위하여 성단에는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던 성찬상을 중앙에 배치하고 예배자들이 드리는 부분과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말씀의 단을 구분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드리는 부분은 적게 만들어 인도대라 이름하고, 거기서는 인도자가 서서 예배를 인도하고 기도나 찬송이나 기타 예배의 모든 부분을 이곳에서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부분은 크게 만들어 그곳에서는 성경봉독과 설교와 축도만 하도록 하는 매우 합리적인 성구들을 갖기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설교대와 인도대가 성단의 중앙에 위치하여 십자가와 성찬상을 가로막는 것은 개혁신학에 어긋난다는 점을 설파하였습니다.
이토록 합리적인 예배신학자들의 연구와 개발은 즉시 많은 개혁교회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한국교회에서도 일찍부터 정착된 바 있습니다. 최근에는 유리로 설교자나 인도자의 모습이 모두 보이도록 하는 새로운 설교대와 인도대가 등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나 인도자의 하체 부분까지 모두를 노출시키는 것은 말씀의 권위를 축소시킬뿐만 아니라, 오히려 설교자를 부자연스럽게 하고 설교대의 역사성이 단절된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21. 예배-성단의 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Q 성단에 꽃꽂이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긍정적 평가를 듣고 싶습니다. 성단에 꽃을 장식할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은 무엇인가요? 예전 색깔과 연관을 맺고 싶은데 언제 무슨 색깔을 사용해야 하나요?
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단의 아름다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장식은 이제 하나의 관례가 되어서 성단의 꽃은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어떤 교회는 회중이 설교자를 보는데 장애를 줄 정도로 꽃을 가득히 장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여기에 소요된 한 주일의 꽃값이 농어촌 교회 교역자의 한달 생활비에 버금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거룩한 성단을 아름답게 꾸며 보려고 애쓰는 성도들의 정성어린 마음은 착하고 충성된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번 보기 위하여 그 막대한 꽃을 매주일 성단에 장식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비판을 서로가 삼가는 것은 예수님의 발에 한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부으면서 경배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을 때 그것을 낭비라고 지적한 가룟 유다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유다를 책망하시고 그 향기와 정성을 받으신 예수님의 심정을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아무런 원칙과 깊은 의미를 찾지 않고 인간의 시각에만 중점을 둔다면 그것은 의외의 탈선을 일으킬 수 있고, 하나님이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오히려 가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발견한 교회들은 언제나 푸르고 싱싱한 화분을 사용하여 성단을 푸르게 하고 공간이 살아있는 인상을 주도록 노력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회는 교인들이 자신들의 가정에서 특수한 기념일이나 감사의 날을 맞이하여 꽃으로 성단을 아름답게 장식한 것을 교인들 앞에 알리기도 합니다. 예배드리는 성소의 성결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당연한 마음가짐입니다. 오염과 죄로 얼룩진 현대인들이 보다 순결하고 고운 꽃을 성단에 드리면서 그 맑고 순수함을 연모하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성스러운 예배에 보탬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굳이 막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의 의미와 함께 하지 못한 성단의 꽃꽂이는 자칫 곁길을 걷게 됩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영광을 드리는 신앙의 표현이 담겨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뿌리던 한 여인의 절박하고 감격에 찬 신앙의 표현이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성단의 꽃은 인간의 시각을 우선할 것이 아니라 교회력에 따른 예배의 의미가 담겨져야 합니다. 즉, 사순절은 수난을 표현하는 가시가 있는 장식을, 부활절은 만방에 부활의 향기를 풍기는 백합화를 장식하는 것처럼 절기에 따른 의미가 담겨져야 합니다.
셋째는, 교회력에 따른 예전색깔을 꽃꽂이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 색깔은 가지색, 흰색, 녹두색, 빨간색으로 분류하여 전 세계교회가 통일하여 사용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가지색은 대림절과 사순절에 사용되며 엄숙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흰색은 성탄절과 부활절과 삼위일체주일에 기본적으로 사용되며 그 외에 산상변모일과 왕국절에 사용되어 모든 것의 기초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녹두색은 주현절과 오순절 이후 약 6개월 동안 사용되는데 그 뜻은 복음의 확산과 교회의 성장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빨간색은 성령강림주일에 단 한번 사용합니다.
넷째는, 꽃을 봉헌하는 사람들의 경제적인 실력을 과시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검소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성단의 꽃꽂이가 필요한 시점이 바로 오늘입니다. 누구나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성단의 꽃을 장식할 수 있도록 해야 서로가 기회를 나누어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앞서서 화려한 치장을 자제할 때 이 사회가 검소해질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가 여기서부터 이루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항들이 지켜질 때 한시적으로 아름다움을 보이던 꽃은 시들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열정은 지속될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행위는 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22. 예배-예배 때 켜는 성단 촛불의 사연은
Q 어떤 교회는 주일 예배 시간에 촛대에 불을 켜고 예배를 시작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교회도 많이 있습니다. 어느 편이 좋을까요? 촛대의 불을 켜는 의식은 우리 기독교의 전통인가요? 그렇다면 언제부터인가요? 기독교 예배에서 촛대를 켜는 것은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요?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들에게서 흔히 듣게 되는 질문이 있는데 그것은 주일 예배 때 성단에 촛불을 켜놓는 것에 대한 의미와 그 타당성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는 촛불을 켜는 것이 경건한 분위기를 주기에 자신의 교회는 매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촛불을 켠다고 합니다. 반면에 어떤 목사는 마치 절간의 촛불이 연상되어서 전혀 활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이 질문 역시 우리 교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는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기독교 예배 여가에서 사용되어 온 성단의 촛불이나 등불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사용의 타당성은 어떤 것인지? 이러한 물음의 대답을 찾아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촛불이나 등불의 사용은 세 가지의 경우로 요약됩니다.
먼저는, 예배에 필요한 조명의 목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밤 집회(행 20:8)를 비롯하여 로마의 박해시절에 중요한 예배장소였던 동굴에 이르기까지 밝은 조명이 필요하여 촛불이나 등불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둘째는, 유대나 헬라 문화권에서 촛불이나 등불을 장식용이나 공기의 정화를 위하여 켜 놓는 일이 많았습니다.
셋째는, 기독교 예배를 비롯하여 각종 종교행사에서 의식의 도구로 사용된 바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활용되었던 촛불이나 등불이 우리 기독교 예배에서 사용될 때는 그 의미가 타종교 의식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습니다. 먼저 초대 기독교 안에 있던 유대계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저녁 예배의 촛불이나 등불은 한 날을 하나님의 은총 아래서 지내게 되었음을 감사하는 의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에 초점을 두고 주님의 날에 드렸던 예배에서의 촛불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두운 죽음의 세계를 물리치고 승리하심을 찬양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많은 교회가 성단에 촛대를 세워놓고 주일 예배나 부활절과 같은 특수 절기 때에 촛불을 켜는 중요한 이유는 어둠을 물리친 주님의 승리의 정신을 기리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이미 4세기에 기록된 「사도 전승」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불멸의 빛을 계시하시면서 우리를 비추셨음을 늘 상기하는 의미”가 있었음을 밝히는 데서 입증됩니다. 그리고 더욱 정확한 것은 계시록 4장 5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싼 일곱 등불이 어둠을 밝힌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는 데서 그 의미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11세기까지는 촛대나 등잔불과 같은 것은 교회가 위치한 지역에 따라 사용 여부가 각각 달랐습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성찬성례전의 존엄한 의식이나 성자 숭배 의식의 경우 활발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성단의 촛대가 정식으로 세워지도록 규정하였습니다. 동방교회는 예배드리는 사람의 기원을 담은 촛불을 수없이 바치어 마치 불상 앞에서 수많은 촛불이 타고 있는 것을 연상할 정도로 활발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공회를 비롯하여 루터 교회도 예배시에 촛불을 켜는 것이 보편화되었습니다. 개혁교회는 부활절이나 특수한 절기의 예배 외에는 아직도 촛불의 사용이 적극적이지 못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세계의 많은 개혁교회들이 예배의 의미를 빛내기 위하여 촛불의 사용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 예배 시작 전에 예배위원들이 성가대와 함께 입장할 때 맨 앞에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촛불을 켜는 불씨 대를 들고 입장하여 성단에 촛불을 켭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예배 드리기 시작하는 형태가 서서히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의 한국교회가 쉽게 이러한 촛불을 사용하지 못한 이유가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 자리잡은 불교와 같은 재래 종교의 촛불이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촛불들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도구처럼 촛불이 보여지기 때문이라는 주장에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촛불을 사용했던 시발은 불교나 조상 제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이룩된 것입니다. 오히려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음을 주는 현장에서 부활의 능력을 감당하고 부활의 주님을 찬미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타종교를 생각하면서 우리 기독교의 고유한 것까지 포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당히 우리의 의미를 가지고 우리의 것을 사용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버려서는 안될 아름다운 전통과 의식이 타종교에 대한 의식 때문에 우리의 개혁교회에서 너무 많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23. 예배-예배자의 몸가짐에 담긴 의미들
인간의 언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소리에다가 단어들을 담아 보내는 입을 통한 말의 세계입니다. 또 하나는 신체언어라는 것으로서 아무런 소리를 발하지 아니하나 그 동작과 표정과 자세를 가지고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의 언어는 우리의 예배 생활에서도 매우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어느 젊은 구도자의 질문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갖고 싶어서 교단을 초월하여 여러 교회를 방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교회는 처음부터 앉아 있는 자세를 지속하기 때문에 졸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구교나 성공회, 루터교 등은 앉고 서고 무릎을 꿇는 자세가 빈번하여 졸 겨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예배의 존엄성이 한층 더 느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예배자들의 그러한 자세가 갖는 의미들을 무엇인지를 묻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우리 개혁교회는 말씀만을 강조하면서 예배의 자세에 대한 것들을 거의 외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배 시에 취하는 자세마다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의미들이 매우 깊음을 기독교의 권위있는 예배학 사전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일어선 자세는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분을 만날 때 존경의 표시로 취하는 기본적인 몸가짐입니다. 구약에서는 에스라가 율법서를 봉독할 때 모든 회중이 일어섰음을 보여주고, 복음서에서는 기도하는 자세가 일반적으로 일어선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자세는 초대 기독교에서도 지켜졌고 지금도 기도와 복음서 봉독과 찬송 때에는 회중들이 일어서서 거룩하게 높이어 드리는 자세를 취한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무릎을 꿇는 자세는 경배와 기원과 애달픈 심정을 표현하는 자세입니다. 시편 25편에서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예배하라는 명령이 있는가 하면,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간절한 간구를 무릎을 꿇고 드려야 함(엡3:14)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몸가짐은 정교회와 천주교나 성공회 예배에서 지금도 취하는 형태입니다.
셋째로, 앉아 있는 자세는 명상과 경청의 자세입니다. 특별히 윗분의 말씀이 있을 때 정좌를 하고 시선을 집중하면서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이 자세는 예배에서 설교의 시간과 찬양대의 찬양이 있을 때와 예배를 위하여 스스로를 준비할 때 취하는 몸가짐입니다.
넷째로, 두 손을 드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의 형태와 의미가 구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할 때 손을 높이 드는 경우이고, 또 하나는 축도할 때 손을 앞을 향하여 드는 경우입니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높이 드는 것은 개인이 기도하는 가운데 참회를 표현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복 내려 주심을 선언하는 목사의 축도 때 두 손을 앞으로 드는 것은 선언하는 내용이 회중에게 전하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가 팔을 들어 하나님의 능력을 지속시켰던 것이 그 좋은 사례입니다.
우리의 기독교 예배는 초대교회부터 예배에서 갖추어야 할 몸의 자세들을 철저히 강조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예배 예전을 중요시하는 개혁교회 이외의 교단들은 여전히 이러한 자세들을 지켜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개혁교회는 예배자들이 갖추어야 할 몸가짐에 대하여 전혀 가르침이 없습니다. 어느 순서에서 앉고 일어서야 하는지 그 필요성마저 느끼지 아니합니다. 오직 앉아 있는 하나의 형태로만 지속함으로써 졸음을 가져오고 몸으로 표현한 예배자의 참여가 전혀 없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기도나 성경봉독을 맡고 성단에 올라가 앉아 있는 사람들이 두 무릎을 단정히 모으지 않고 벌리고 있거나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예배자는 내 육신의 편안함보다 하나님 앞에 경건한 자세로 공경하고 경배하는 몸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제도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대상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상식입니다.
24. 성례전-애찬이 성만찬을 대신할 수 있나요?
Q 성찬과 애찬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기독교 역사에서 애찬은 언제 있었다가 무엇 때문에 없어지게 되었는지요? 우리 교회는 야외에서 종종 전도사님들이 집례하는 애찬식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나요? 어느 교단 총회에서는 애찬을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교회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모임입니다. 이 모임에서 우선적으로 요구되어지는 것은 주님의 부탁대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인간 사랑의 실현보다는 주님의 사랑을 생활화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배를 통하여 먼저 공동체의식을 확인함으로써 사랑의 실천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식사를 아가페 식사라 이름하고 이 식사를 통하여 한 교회 식구로서 교제하였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확실한 은사의 체험으로 예언 과 방언이 예배 가운데서 행하여지는 순서를 갖고 서로가 기독교의 신비한 사랑을 공유하려는 노력을 펼친 바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도 이러한 애찬과 은사의 나눔 등이 예배 속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아니 하였습니다. 특별히 청소년들을 지도하는 안수를 받지 않은 지도자들에 의하여 애찬식이라는 것이 한때 크게 유행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애찬의 향수를 느끼면서 여름 수련회와 같은 곳에서는 그것이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식이 예배하는 공동체에서 왜 지속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제기합니다.
애찬의 현장을 살펴볼 때 그것은 성만찬 성례전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밟으면서 제정의 말씀도 성령임재 기도(에피클레시스)도 다 사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집례자가 빵을 쪼개고 잔을 주면서 서로의 입에 넣어주고 사랑의 교제를 시도합니다. 애찬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약식 성만찬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사가 참여자들에게 결코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온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의지부여를 하면서 한 형제자매 되는 그리스도의 식구로서 확인시키는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아니합니다.
원래 초대교회에는 애찬 또는 아가페 식사라고 하여 주일 저녁에 정규적으로 공동체가 함께 나누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이 식사는 단순한 식사로 끝나지 아니하고, 공동체 가운데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데까지 연장된 예배하는 공동체의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또 이러한 모임과 애찬을 통하여 주님을 중심한 삶의 실천을 보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2세기 중반부터 교회는 이 애찬과 은사의 나눔 때문에 기독교 예배에서 많은 긍정적인 요소보다도 부정적인 요소를 더 많이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겸하였던 애찬이 예배의 분위기와 정신을 퇴색시킨다는 점이 발견되고 신령한 예배의 정신을 흐트러지게 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은사의 나눔도 회중들의 관심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집중되지 못하고 신비한 경험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는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는 2세기 후반에 이르러 은사의 나눔과 애찬을 교회에서 금지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한국교회에서 청소년들의 지도를 위하여 애찬이 필요하다는 전도사들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 하더라도 사실 그 부작용은 적지 아니합니다.
먼저는, 거룩한 성만찬과의 혼돈을 가져옵니다. 그 결과 안수 받은 목사가 집례하면 성만찬 성례전이고, 안수 받지 않은 지도자가 진행하면 애찬식이 되는 모순된 결론을 갖게 됩니다.
둘째는, 성만찬 성례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이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그 새 언약에 대한 확인의 장이지만 애찬은 단순한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를 다짐하는 식사입니다. 그러나 성만찬 제정의 말씀까지 봉독하면서 이어지는 그 현장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공동체의식의 다짐은 단순한 감사의 기도와 우의를 다지는 찬송과 함께 이어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한국 장로교의 큰 줄기를 이어 온 통합측 교단은 애찬식의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과 부정적인 현상들을 보면서 연구검토한 뒤 애찬식이라는 이름으로 일체의 유사한 성만찬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결의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예배에 관하여 가지고 있었던 지대한 관심을 다시 한 번 엿보게 됩니다. 예배란 예배자들의 마음과 뜻과 정성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는 데 집중되어야 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어떠한 잡다한 순서도 원칙을 지키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기독교의 예배에서 지속시킬 수 없다는 단호한 조치였습니다. 역시 예배란 인간의 교제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5. 절기-교회의 절기는 셋이 아니고 여섯입니다
Q 우리의 교회는 부활절과 성탄절만을 지키는데 또 다른 절기가 있나요? 기독교에서 지키고 있는 교회력의 절기는 몇이나 되나요? 교회력을 지켜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의 교회는 선진국 교회들이 갖추고 있는 부분들을 많이 상실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몸집은 거구인데 머리는 너무 적고 빈약합니다.
생각하면 우리 민족이 당한 오늘의 아픔은 소유를 채우지 못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워진 소유가 너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데 있습니다. 경제도 튼튼한 터전을 다지면서 이룩된 것이 아니라 우선 가난을 넘고 보자는 긴박감에서 뛰어왔기에 허술한 부분이 많아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수치로는 선진국 대열에 근접해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50년이 뒤진다는 보도가 우리의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교통문화를 터득하기 전에 갑작스럽게 일구어진 자가용의 소유는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서구의 문화는 이 땅의 고유한 도덕률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습니다. 언제나 튼튼한 기초와 내용이 없는 화려한 외형은 필연코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한국의 교회가 교단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 찾아온 외국의 교인들은 주일 예배나 새벽기도회를 보면서 감탄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뜨거운 기도와 전도와 십일조 생활 등등 다른 나라의 교회들이 갖지 못하는 장점들을 보면서 존경의 눈길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장시간 머무는 경우, 거의 모두가 한국의 교회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예배나 절기나 행정 등등 많은 부분들에 차이가 있다는 것 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처음에 보여준 감탄사들을 서서히 거두면서 매우 어색한 눈길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그 중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교회의 절기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잡다한 성자 축일 등을 모두 없애고, 주님의 생애에 맞춘 교회력만을 주장한 이후로 교회력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였습니다. 드디어 장로교의 원조인 스코틀랜드 교회가 1940년 예배모범에 교회력을 정리하여 지키기 시작하면서 오늘의 교회력은 전세계의 교회에 빠른 속도로 확산된 바 있습니다.
그 교회력의 내용을 보면 먼저,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있습니다. 이때 주로 재림에 관한 말씀이 선포됩니다.
둘째는, 주님이 오신 성탄절입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실현되는 메시지가 있게 됩니다.
세 번째는, 주님이 오시어 공생애를 펼치신 주현절입니다. 이 기간은 전도와 선교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집중합니다.
네 번째의 절기는, 주님이 수난을 당하신 사순절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고 머리를 숙이는 메시지와 함께 금식과 같은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다섯 번째는, 우리 주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절입니다. 이 절기는 기독교의 가장 큰 경축일로서 승리와 희망의 말씀과 결단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성령님이 강림하시어 교회를 일구어 가신 오순절로 엮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절기들이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모두 지켜지지 않고 성탄절과 부활절만을 지키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교회력이 아닌 감사절을 교회력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력의 가치는 우리 신앙생활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게 하는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이 교회력은 세상의 명절처럼 그 주일만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절기가 계속되는 기간 동안 교회는 강단의 메시지를 비롯하여 각종 프로그램과 기타 신앙 생활의 내용을 주님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진행시키는 데 주안점을 둡니다.
예를 들면, 성탄절은 12월 25일부터 1월 6일(주현절) 전까지의 12일간의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12월 25일 성탄일에만 성탄에 관한 메시지와 찬송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 12일의 성탄절기동안 계속해서 주님 오심을 환영하고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교회는 성장에 걸맞는 성숙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절기마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교회라면 우리의 성장은 매우 심각한 경지에 있다는 것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이제는 세계의 개혁교회와 호흡을 함께 하는 수준을 유지해야 합니다. 전 세계의 교회에 6대 절기가 생활화되어 있는데 우리들만이 성탄절과 부활절과 감사절만을 지키는 교회가 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26. 절기-부활주일이 기독교의 두 번째 큰 축일이라고요?
Q 어느 텔레비전 방송에서 아나운서가 부활절을 기독교의 두 번째 축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맞는 말인지요? 부활절과 성탄절 중에 어느 것이 기독교의 으뜸가는 경축일인지 알고 싶습니다. 매주마다 맞게 되는 주일예배의 근거는 부활주일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요?
어느 목회자가 화가 났습니다. 사연인즉 부활주일 전야에 어느 공영TV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뉴스 시간에 했던 말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날 맞게 되는 부활주일을 기독교의 “두 번째로 중요한 축일”이라고 태연하게 방송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나운서는 성탄절을 기독교의 최대의 축일로 알고 부활절은 그 다음의 중요한 경축일로 알고 있던 관습들을 아무런 검증도 없이 느낀 대로 발표함으로써 뜻 있는 기독교인들의 마음을 무척이나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공영TV에서 무책임하게 던진 한 마디의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절의 인식을 잘못 심어주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모든 종교마다 자신들의 교주의 출생을 가장 큰 축제일로 삼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를 들면 석가탄일과 같은 날이 불교의 최대 경축일임을 아는 평범한 사람들은 기독교에서도 12월 25일 성탄일을 최대의 경축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가 신 불신을 막론하고 이 날에 송년의 분위기와 함께 들뜨기 때문입니다. 12월에 접어들기도 전에 무서운 상혼들이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려주는 것도 이러한 인식을 가져오는 데 한 몫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최대의 경축일은 12월 25일의 성탄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부활의 아침이 기독교의 최대 경축일입니다. 12월 25일을 예수님이 오신 날로 정하고 지키는 일은 그 역사성이 부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아니합니다. 실질적으로 성탄절이라는 경축일은 성경이나 초대교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354년 경 로마의 문서에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나신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서 연유할 뿐입니다.
그러나 원래는 12월 25일은 동지 이후 해가 다시 커지기 시작할 때의 “정복되지 않는 태양”이라는 이교도의 축제일이었습니다. 이 날을 로마의 기독교가 흡수한 데서 발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정교회를 비롯하여 장로교의 원조인 스코틀랜드 교회의 일부나 미국의 퓨리탄들의 일부 후예들은 이 성탄절을 아예 외면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부활절은 성경의 기록대로 주님의 부활부터 바로 이어지는 기독교 최대의 명절입니다. 지금껏 지켜온 안식일을 중심한 유대교의 전통마저 버리고 이 날에 주님의 명령대로 모여 주님의 만찬을 재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생애와 말씀을 힘있게 전하였습니다. 이러한 감격은 연 1회 단회적으로 부활의 감격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매주일 안식 후 첫날을 작은 부활주일로 지키게 되었고 그것이 주일 오전예배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이며 형태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토록 부활 사건은 기독교만이 갖는 특유한 역사적인 사실이기에 이 날 동이 트기 전에 세계의 신 구교 모두가 온통 거대한 축제의 물결을 이루면서 가장 장엄한 날로 맞이합니다. 어느 종교에서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역사적인 날이기에 기독교는 두고두고 가장 자랑스러운 축일로 지키면서 대단한 긍지를 소유합니다. 그래서 이 날은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축일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날로서 승리의 우월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신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에 재현될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부활 사건은 2천 년 전 사건의 기념이 아니라 현재적인 신앙이며, 훗날의 소망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어떤 경우도 부활절을 능가하는 절기는 기독교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제는 대중매체의 주역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처럼 성탄일을 으뜸으로 생각하면서 부활주일을 이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 때문에 살아 있는 종교입니다.
27. 예배-목사의 가운은 동복과 하복이 없습니다
Q 우리 목회자는 부활절부터 흰 가운을 입기 시작하여 늦가을에 찬바람이 불 때 검정 가운으로 바꾸어 입습니다. 예배 시에 입는 가운도 동복과 하복의 개념이 있는지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와 감리교는 예배 시의 가운을 통일하였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주님의 날 예배를 인도하는 성직자의 복장들이 차이가 심한 것을 볼 때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정교회나 천주교회나 성공회나 루터교회에서는 성직자들이 예복을 철저히 입고 예배를 드리는데, 개신교는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에 따라 복장의 차이가 많이 발생합니다. 개신교 중에서도 오순절 계열의 교회에서는 거의가 일상복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는가 하면 감리교나 장로교에서는 대부분 목사가 가운을 입고 예배를 정중히 인도합니다.
그런데 진기한 현상은 많은 목사들이 여름과 겨울에 가운의 색깔이 달라집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대체적으로 더우니까 흰 것을, 싸늘하니까 검정색을 입는다는 웃지 못할 대답을 듣습니다. 즉, 동복과 하복의 개념으로 가운을 입고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대답입니다. 성직자의 복장은 단순히 계절복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유래와 전통이 숨어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개혁자들에 따라 예배는 크게 네 줄기로 나누어 그 줄기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예배의식을 존엄하게 보존하려는 루터 계열이었습니다. 말씀과 성찬성례전을 매주일 지키는 예배의 지속이었습니다. 둘째는, 설교만을 예배에서 존속시키고 모든 예전 의식을 경시했던 쯔빙글리 계열이었습니다. 그는 예배당 안의 어떤 상상도 인정하지 않고 모두 철거시켰고, 심지어 예배용 악기들도 없애버릴 정도였습니다. 셋 째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찾아 말씀을 강조하면서도 성찬성례전의 매주일 거행을 주창하면서 예배의 존엄성을 그대로 살려 나가려고 했던 칼빈과 부처의 계열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직 말씀만을 중심하고 회심과 죄씻음을 강조하면서 성인세례만을 고집했던 재세례파입니다.
한국의 장로교는 분명히 칼빈 계열로서 그 신학과 예배와 기타의 교회생활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칼빈은 예배 때마다 당시 제네바의 법관들이 입던 검정 가운을 입고 예배를 정중히 집례하고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후 스코틀랜드 교회를 비롯하여 세계의 장로교는 나라마다 자신들의 고유한 성직자 복장을 만들어 입거나 제네바 가운을 입는 것을 하나의 전통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부활절과 성탄절만은 흰 가운을 입고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남은 주일들은 여전히 검정색 가운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각 나라의 교회는 검정색에 대한 국민적 정서가 맞지 아니하여 색깔을 달리하는 경우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는 1993년 78회 총회에서 우리의 목사와 장로 가운에 대하여 연구를 거듭하게 한 후 중요한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그 내용은 가운의 형태로 칼빈의 전통을 이어받되, 색깔은 성령님을 뜻하는 비둘기 색과 가은 밝은 색의 가운을 입되, 셔츠도 성직자 셔츠를 입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장로와 목사는 동일한 가운을 입되 목사만이 멍에를 맨 성직수행을 표시한 스톨(드림천)을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장로교는 비록 엄연한 총회의 결정이 있더라도 시행은 개교회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결정도 강제 규정이 아닌 권장사항으로 정한바 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밝아진 가운의 색깔을 선호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언제인가 한국교회의 이러한 결정은 자랑스러운 결정이 되고 우리 교회 성직자들의 고유한 복장이 되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랑스러운 결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직자의 가운이 동복과 하복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은 실로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목사가 예배인도 시에 입은 예전복은 교회력에 따른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어떤 개신교 목사들은 가운 자체를 교회력에 따라 정해진 예전 색깔로 맞추어 입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도 목사의 예전복인 가운을 동복과 하복의 개념으로 색을 달리하면서 입는 경우는 없습니다. 여름철이기에 흰 가운을 입는 것이 아니라 1990년의 경우 4월 4일 주일이 부활주일이기에 흰 가운을 입기 시작하여 그 기간이 끝나는 부활절 마지막 주일(5월 16일) 까지 흰 가운을 입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력에 따른 예전 색깔의 변화는 가능하나 계절에 따라 변하는 예전 색깔이나 하복과 동복이 없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28. 예배-재택예배라는 새 용어는?
Q 예배는 반드시 예배당에 나아가서 드려야 하나요? 집에서 볼 수 있는 인터넷이나 기타의 매체를 통한 예배는 예배가 아닌가요? 집에 앉아 드리는 소위 재택예배가 가져올 부작용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언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성되고 또 사라지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성립된 계약은 시대의 흐름에서 생성된 문화와 언어의 변화에 의한 지배를 받지 아니합니다. 주님이 심판주로 재림하실 그 날까지 이 계약은 영원불변합니다. 그러기에 이 계약을 가리켜 진리라고 이름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 진리를 따라야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시대가 몇 만년을 지나더라도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의 존전에 나아와 자신들의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 이유는 이 예배가 인간의 창작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순수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무 행위로서 수행되어야 할 항목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르러 이해할 수 없는 어휘가 등장하여 예배의 질시를 혼돈시키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배의 깊이를 모르는 신세대들에게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날 집안에 앉아서 TV나 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중계된 주일 예배를 시청함으로써 예배를 대신하려는 행위들입니다. 자신의 건강과 시간이 충분한데도 인위적인 핑계를 대고 집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소위 재택예배입니다. 재택예배의 부당성을 지적 받은 어떤 사람은 “우리의 장로 대통령도 목사들을 불러다가 재택예배를 내내 드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타당성을 청와대 안방에 두고 있습니다.
그 동안 장로 대통령이 보여준 예배의 행위는 결코 정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예배의 한 모델이 될 수 없습니다. 주일에 목사가 자신의 예배당에 모여 있는 성도들을 남에게 맡기고 대통령과 그 식구를 위하여 달려간 그 행위도 온당하지 아니합니다. 목사가 건강이 멀쩡한 장로를 주일이면 예배당으로 오게 하여 예배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강권함이 지당한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가 많이 변질된 듯합니다. 예배의 모습을 비롯하여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많은 탈선이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편하게 예배를 드리고 부담을 줄이는 신앙생활을 할 것인지에 눈을 뜨고 있을 뿐입니다. 나의 육체에 부담이 된다던가 내 물질에 손상이 온다면 가차없이 교회를 옮기고 예배도 떠나 버리는 일들이 종종 보입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시간으로 예배라는 형식만 취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가 집에 앉아 예배를 대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배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그 의미와 예배의 행위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자의 자세는 주님의 날에 하나님을 예배할 신성한 곳을 찾아가는 마음과 발길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면서 그날에 주시는 말씀을 경청하는 태도가 요구됩니다. 예배란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복수의 개념으로 드리는 것이지 결코 나 홀로 단수의 개념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예배의 첫 단계는 말씀이 선포되고 성례전이 거행되는 현장을 찾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의 마음에 맞는 목사나 신부를 불러다가 자기의 거처에서 드리는 것은 결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최근 들어 예배를 생각할 적마다 새로운 우려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컴퓨터 앞에서 인터넷이라는 첨단 전자문화를 통하여 예배를 해결하려는 무서운 시도 때문입니다. 바쁜 시대를 달리고 있는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당까지 찾아 갈 필요 없이 편한 자세로 앉아서 컴퓨터를 켜고 예배실황을 즐길 수 있는 인터넷 시스템이 아무래도 염려가 됩니다. 이러다 보면 번져 가는 재택예배의 물결이 거세질 것 같아 적지 않은 우려가 됩니다.
예배당을 찾아 예배드리는 의무를 한두 번 범하게 되면 편한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심성이 발동하여 예배당에 가지 않고도 드릴 수 있는 예배를 찾게 됩니다. 그럴 때 예배에 대한 열의는 식어지고 어느 때인가 그 믿음마저 사라지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사탄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는 데 가장 뜨거운 열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글은 교단, 교파에 따라 다를 수 있는 접근이 있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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