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오경

[스크랩] 창세기 연구

하나님아들 2014. 2. 17. 11:30

 

 

창세기 연구



1. 서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현대인들에게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와 타락의 기사에 관한 그간의 교회의 해석과 그것에 대한 믿음의 강요는 마치 심한 고문과도 같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처음 창조는 모든 면에서 완전한 상태였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세계가 죄악에 빠져 들었다는 것이 교회의 창조신학의 근간입니다.
이 말은 그것 자체로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상태로 창조된 세계에 속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현상에 대해 현대의 합리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비꼬아 말합니다.
“전능하시다는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죄없이 흠없이 잘 만들지 않고 왜 흠많게 만들었는가? 흠있게 만들고 나서 타락했느니, 죄인이니 하는 이야기는 또 무엇인가? 이것은 병주고 약주는 식의 인간을 우롱하는 처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하느님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기 위해 인간을 우롱하기 위해 있는 존재가 아닌가?”

여기에 대해서 교회는 나름대로의 여러 해석을 갖고 있지만, 대개는 하나의 논리체계와 변명을 위한 변명 이상의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율법주의와 교조주의에 빠진 종교인들은 창세기를 악의 기원이 무엇이며, 악이 어떻게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다루는 책이거나 죽음의 기원을 다루는 책으로 보려 합니다.
또 반대로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를 읽으면서 세계와 우주의 기원을 단번에 알 수 있는 해답집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성서를 어떤 무시간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나 세계관 혹은 과학적이거나 객관적인 분석의 자료로 보려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겠습니까!
창세기를 통해 악의 기원이나 죽음의 기원을 알려는 사람이나 우주와 세계의 기원을 알려는 사람들은 언뜻 보기에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의 동기는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느님이라는 어떤 완벽한 실체를 통해서 움직이고 변화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떤 기준점과 권위를 얻어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간에 창세기를 비평적으로 연구한 사람들에 의해 창세기에 대한 교회의 이러한 이해는 창세기가 원래 말하려는 의도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창조 설화는 창세기 1장과 2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시편과 욥기 그리고 제2이사야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시편과 제2이사야의 창조설화를 보면 여기에는 창조가 하느님의 일방적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공동작업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유태인 학자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창조는 한 번의 처음 창조로 완결, 완성된 상태에 이른 것이 아니라, ‘새하늘 새땅’을 이루기 위해 역사속에서 피흘리고 땀흘리는 하느님과 백성들의 공동작업 속으로 개방되어 있는 미래적 사건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역사적이고 비평적으로 연구하는 성서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대가 바뀜에 따라 창조사건을 다르게 이야기한다는 사실과 구약성서는 창조에 대한 어떤 폐쇄적, 고정불변의 결정론적 가르침이기보다는 역동적, 역사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메시아 운동을 창조활동으로서 이야기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창조사건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과 사회환경에 의해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이것을 극복 지양하려 애쓰던 자들이지, 이 사건을 무슨 학문적,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자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혀 내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구원만을 강조하고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서 일하는 창조의 역사를 구원의 역사속에서 분리시켰기 때문에 성서를 어떤 예정된 구원의 도표를 향해 순례하는 지침서로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창조와 구원은 실제로 한 동전의 양면임을 가리킵니다.
창조는 하느님의 구원행동이고 구원은 하느님의 창조행위입니다.
사실 구약성서는 하느님 혹은 인간이 참여하지 않는 중립적 바탕이 아니라 하느님이 사랑속에서 인간과 만나는 창조와 구속의 운동방향입니다.

구약성서는 어떻게 이 전위운동을 저해하는 이스라엘 중심주의가 계속 파멸되면서 이 운동이 확산되어 가고 있는가를 바벨탑이 무너진 것, 아브라함이 유랑한 것, 출애굽 사건, 선민신앙에 대한 예언자들의 수정과 이방인까지 등장하는 새로운 하느님의 역사적 지평, 그러한 ‘전(全)’ 세계사의 지평을 구체화하는 묵시문학자들의 비젼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신약성서에 오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결정적으로 유다의 민족주의, 선민주의는 파열되고 하느님의 창조와 구속의 활동이 온세상에 전위되는 것입니다.
창조란 고통이 없는 과정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고 새로운 관계가 열리는 흥분되고 또 요청적이면서도 괴로움이 가득찬 고통의 과정입니다.
창조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가슴앓이인 동시에 인간의 이에 대한 신앙고백의 과정입니다.
이제 우리는 창세기를 창세기 자체로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역사를 통한 하느님의 활동과 이 활동에 대한 인간의 신앙고백의 관점에서 보아야겠습니다.
성서는 그 쓰여진 방향성이 신앙고백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까지 신앙고백을 단순히 교회가 물려준 신앙체제 즉 신조와 교리 혹은 종교의례의 확인만으로 보아왔습니다.
성서적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고백이란 이러한 교리적 의미에 있어서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창조 행위를 공동체적 삶의 자리에서 공동체적으로 되씹어서 토해낸 의미로서의 신앙고백입니다.

창세기는 구약의 다섯책(오경) 중의 첫 번째 책입니다.
이러한 자료를 형성시킨 추진력은 이스라엘 역사의 처음을 회고한 하나의 ‘역사고백’입니다.
오경은 하나의 중심적인 핵에서 발전한 것인데, 그 핵은 에집트로부터 이스라엘인이 구원된 출애굽 사건입니다.
따라서 창세기는 출애굽이라는 하느님의 창조 혹은 구원사건에 대한 창세기가 쓰여진 시대마다 그 시대에 대해 각각 새롭게 해석된 신앙고백을(창세기에서는 세 시대가 겹친다. J기자는 주전 10세기의 솔로몬시대의 왕조의 위기속에서 출애굽 사건이라는 최초의 창조사건을 다시 고백한 것이고, E기자는 이스라엘이 이방화 되어가는 주전 9세기와 8세기에서 본 출애굽에 대한 재해석이고, P기자는 포로기에 있어서의 신앙고백이다) 나중에 포로기 이후(주전 5C기 말엽)에 경전화 과정에서 창세기라는 한권의 책으로 통합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은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창세기는 출애굽이라는 하느님의 구원 혹은 창조사건에서 출발해서 하느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그린 창세기 12-50장의 족장사를 거친 다음에 맨 마지막에야 인류와 세계에 대한 원역사인 창세기 1-11장으로 와야 합니다.
즉 성서의 순서와는 반대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본론

창세기는 성서의 내용에 있어서 첫 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존재론적, 형이상학적인 내용으로 되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역사적 경험과 상황 속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쓰여진 것이며 따라서 기록되던 당시의 상황적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P자료의 경우 B.C. 5-6세기 경에 쓰여졌으며, J자료의 경우 B.C. 10세기 경에 쓰여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는 ‘출애굽’ 사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며 신학적 정교화로서 출애굽 사건이라는 역사적 경험에 관한 깊은 성찰 없이는 기록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출애굽 사건 다음으로 창세기를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형식상 창세기는 인간과 세계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파악되는 세계 내에서의 인간존재의 ‘의미’와 인간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존재 의미를 해석하고 있으며, 해방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는 ‘자유’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자유를 인간의 <소명>으로 확정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러한 소명을 상징적인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자유’라는 일상적인 용어보다 훨씬 더 간결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의 특수한 언어 안에서 조명된 인간의 소명(vocation)은 <해방>의 역사적인 사건에 의해서 파악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창세기는 출애굽 사건에 관한 깊은 성찰에 의해서 이루어진, 그러면서도 인간의 기원과 존재론적 기획(Project)의 언어로 표현된 <자유>와 <해방>에 관한 증언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창세기가 이러한 자유와 해방이라는 적극적인 시각에서보다는 원죄니 타락이니 하는 부정적인 관심에서 그리고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에서 해석되어진 면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담하게 이러한 소극적이고 실존적인 관점을 탈피하여 적극적이고 사회적·구조적인 관점에서 창세기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을 취하고자 합니다.

창세기는 그 내용상 크게 나누어 1장부터 11장까지의 <원역사>와 12장부터 50장까지의 <족장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약간 세부적으로 보면 원역사에는 <창조> <타락> <카인의 추방> <홍수와 새창조> <바벨탑 이야기> <계보> 등이 있고, 족장사에는 <아브라함 이야기> <야곱 이야기> <요셉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물론 더 자세히 나눌 수 있으나 이 정도로 개략적인 구분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11장은 J(야훼문서)와 P(祭司文書)라는 두 개의 큰 전승의 흐름을 배경으로 조직된 글입니다.
먼저 우리는 창세기 신학의 커다란 두 흐름인 P문서와 J문서에 대해서 고찰해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1) P문서와 J문서의 비교

(1) P문서

P문서는 B.C. 550년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잡혀가 있을 때에 기록된 것으로서, P기자의 의도는 야훼신의 종교적 권위에 회의를 느끼는 데 대하여 야훼가 결코 무능한 신이 아니라 바벨론의 마르둑 신보다 위대하여 우리를 이 종살이에서 구해줄 것이라는 위기상황 속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따라서 P기자가 쓴 창세기 1장은 인간이 처해있는 상황에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는 형식이지 만물의 기원이 무엇이며 인간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밝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즉 고대의 조야한 사회환경과 비인격적인 사회구조로부터 생존을 위협당하는 인간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겪는 온갖 비참성의 궁극적인 까닭을 묻는 것입니다.

당시(B.C. 6세기경)에 하느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을 바빌론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P기자의 일관된 관심은 토지의 약속과 축복으로 주어지는 토지의 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관심은 우주의 기원에 관한 추상적인 긍정이 아니라 토지를 다시 얻는 문제였습니다.

<창조>의 개념은 단순히 새로운 토지점령과 갱신된 축복의 약속과 기대를 위한 그릇에 불과한 것입니다.
<혼돈>이란 유랑생활이라는 토지를 상실한 상황이고, 혼돈을 정리하며 운행하는 신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지와 그 모든 축복과 안정된 삶을 회복해주는 야훼의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유랑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이 혼돈과 창조를 체험한 현실과 역사적인 접촉점이 유랑생활과 토지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신화론적, 우주적 뉘앙스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결부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통치권에 대한 주장은 자기가 방금 혼돈 속에서 창조한 피조물을 통치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느님의 통치권 주장은 빈궁과 패배와 절망으로 가득찬 유랑민의 현실에 관련된 것으로, 이제는 그것을 하느님이 환희와 평화의 현실로 변혁시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8절의 다섯가지 주장들은 인류의 우월성을 긍정하고, 하느님이 이제 비옥하고도 풍성한 곳이 되기를 원하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 질서를 맡은 대행자가 되도록 인간에게 임무를 위임하면서 인류창조를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즉 이 문장의 동사 다섯은 각각 그 상반된 내용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이해할 때 가장 정확히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아라 : 더 이상 불임이 되지 마라.
·번성하라 : 더 이상 후손의 문이 닫히지 마라.
·온 땅에 퍼져라 : 더 이상 쫓겨나지 마라.
·정복하라 : 더 이상 비굴하지 마라.
·통치하라 : 더 이상 통치를 당하지 말아라.

이러한 선포는 유랑생활을 하는 백성에게는 매우 적절한 내용이었습니다.
즉 집을 잃고 정처없이 헤매며, 조국의 땅과 전통으로부터 멀리 떠나 사는 백성에게 그들의 하느님이 아직도 그들을 담당하고 계시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운명이 아직도 평안과 정복을 누리는 것이라는 긍정입니다.
이 말씀은 이처럼 희망을 상실한 역사적인 상황에 대하여 선포된 놀라운 도전인 것입니다.
혼돈의 신화적 상징이 유랑생활이라는 역사적인 경험과 결부되는 것이라면, P기자의 증언은 유랑생활의 종말과 성공적으로 가나안 땅에 돌아가는 것에 관한 선포라고 볼 수 있습니다.
P문서의 주제는 이와 같이 창조에서 해방에까지 이르고, 인류에게 선포된 축복에서 그 실현에까지 뻗쳐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토지가 하느님에게서부터 다시 주어지고 그 땅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고 그 땅을 다시 실현될 때를 P기자는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P기자는 바빌론 포로생활 속에서 유랑하며 비참하게 헤매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혼돈과 창조 및 축복의 이야기를 통하여 희망과 용기와 미래의 비젼을 보여주려 하였던 것입니다.
P의 케리그마는 토지를 상실하고 특권을 박탈당한 자들의 미래를 결정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인 온갖 격변들의 한복판에 철저히 부합되는 관련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2) J문서

J문서는 B.C. 950년경 즉 솔로몬 시대에 쓰여진 것입니다.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솔로몬의 선왕 다윗은 국가를 형성하고 동화정책을 실시하여 외국인 용병으로 근위를 조직하고 각지방의 고유한 종교예배를 허용하였으며 에집트인 율사들을 등용하였습니다.
더욱이 왕가의 배필들 중에는 이스라엘 출신이 아닌 왕녀들이 있었으며, 이들과의 결혼은 우상숭배의 가능성을 초래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통파 지도자들은 왕정의 이와 같은 동화정책을 참을 수 없어서 종교적 반란을 일으켜 불만을 표시했으나, 다윗을 계승한 솔로몬은 부왕의 동화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친히 에집트 왕녀와 결혼함으로써 에집트에 행정체제를 도입하는 동시에 왕국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페니키아의 기술공들을 고용하여 많은 토목공사를 벌였습니다.
이와같이 솔로몬의 신흥왕국은 군주체제를 갖추기 위하여 당시 열강들과 빈번한 외교관계를 맺게 되고 재빨리 열강들의 문화를 흡수, 동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솔로몬은 당시 열강들의 행정체계를 기반으로 하여 이스라엘의 국가행정을 수립하였으며 그의 왕정은 찬란한 외국문화에 도취되었습니다.
그는 외국 왕녀들과의 결혼으로 이스라엘 종교의 순수성인 <야휘즘>을 침해하였고 드디어 이교도들의 패습과 우상숭배를 초래한 첫 죄인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채택한 개방주의적 정치는 그의 왕국을 국제화하였고, 이와 때를 같이한 인문주의(지혜문학)은 이스라엘 국가와 종교로 하여금 이교도로부터 오는 우상숭배의 위험을 막을 길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드디어 솔로몬은 야훼의 성전 곁에 모압과 암몬의 우상숭배를 허락하였고 파라오 왕녀와의 결혼 이후 계속된 외국여인들과의 결혼은 그를 예루살렘에 잡신들의 성소를 짓게 하는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시대 즉 사회 각 분야에 있어서 외양적인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도, 계급분화가 심화되면서 제국분열의 첫 위기가 밀어닥치고 있던 시대에 솔로몬 왕정의 주변에서 활동하던 인물이 J기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왕조의 위기와 세속화가 판치는 시대에 자기의 메시지를 기록하였으며, 하느님의 주장과 왕권의 주장이 서로 점점 더 엇갈림으로써 나타나는 신학적인 위기 속에서 신앙이 권력의 현실에서 소외당함으로써 유발된 모든 가치의 현실적인 위기에 대처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솔로몬 시대에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의 교만에 대하여, 만약 그들에게서 모든 백성들이 자유롭고 풍성한 삶의 구원으로서 축복을 발견한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자기들의 위대함을 야훼의 축복으로 얻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여 그들을 비판하였습니다.
즉 다윗과 솔로몬의 대제국은 그 큰 백성과 크고 위대한 이름을 야훼의 축복의 결과로 깨달아야 되며 따라서 축복을 받은 자 자신이 이제는 축복으로 작용해야 하고 그가 세상의 모든 족속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만한 집권자들은 이러한 비판과 각성의 촉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승리감과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다가 위기가 심화되어 솔로몬 사후에 국가는 남북으로 분열하고 드디어 얼마 가지 않아서 바빌론 포로생활로 전락하였던 것입니다.
J기자의 의도는 토지의 약속와 후손의 약속이라는 <축복>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축복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주>의 의미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주는 부자유를 초래합니다.
저주는 비옥한 생활에서 추방시키며(창세 4, 11), 정처없이 두루 방황하도록 몰아내며, 괴로운 죽음의 공포에 빠뜨립니다(4, 13).
저주가 얼마나 철저한 인간의 좌절을 초래하며, 대지에 속박시켜 넣으며 자유인들의 공동체에서 추방되는 것인지를 이미 뱀에게 선포된 말씀이 보여주고 있습니다.(3, 14)
대지에 대하여 선포된 말씀은 가시와 엉겅퀴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며, 토박한 흉년을 초래하며, 이로써 인간에게 고통스럽고 허무한 노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3, 17)

그러나 저주는 인간에게 끝까지 행패를 부릴 수 없고 따라서 이러한 저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알려지지 않은 목표를 향해서 계속 살 수 있습니다.
저주설화의 수고와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위로하는 자가 나타납니다.
인간에게는 모든 것이 결코 그대로 남아 있지 않으며 인류는 현실적이고 거대한 변화를 맞이해 가고 있습니다.
위로와 축복은 속박에서 벗어나, 정처없는 방황과 교만, 죽음의 위협을 두려워하는 공포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생활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이해하고 협동하여 일하는 점에서 지금까지 세계의 민족들은 무능하였으나,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축복을 얻는 것이 됩니다.
축복은 죄와 형벌을 제거시키고 분쟁이 없는 공동생활을 이루어주며 삶을 위하여 강력한 물질적인 도움을 줍니다.

축복은 생명의 힘이고 생명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고 생명을 더 높은 데로 솟아오르게 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대지를 비옥하게 하는 풍요와 가축의 떼를 증가시키고, 공동체를 강력하고 인구가 많고 존경을 받게 하는 생산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축복은 (1)축복을 받은 자 자신이 축복으로 작용해야 하고, (2)그가 세상의 모든 족속들과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이스라엘과 세계 민족들간의 관계, 세계 민족들과 이스라엘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J기자의 관심은 인류 전체를 향한 것이며, 인간의 생명을 주목하고(2~3장) 인간의 가정적이고 직업적인 협동과 대결에 주목하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 안에서 거대한 인류의 나무에 돋은 모든 가지와(10장), 불안과 교만 때문에 절망적으로 불화하게 된 세상의 모든 나라들에(11, 1-9)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결국, J기자는 솔로몬 시대의 풍요와 번영을 구가하고 국제화된 시기에 이 풍요와 번영이 하느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이 풍요는 소수의 손아귀에서 독점되어서는 안되고 온 백성에게 골고루 분배되어 모두가 함께 축복을 누리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서로가 서로를 돕는 평등하고 자주적인 관계가 되기를 기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과 부를 장악한 자들은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었고, 무분별한 외국문물의 수입으로 정신을 잃고 있는 가운데 민중들의 고난과 비참은 심화되어 가면서 불만이 고조되어 결국 솔로몬 사후 남북으로 분열하여 몰락의 길을 치닫게 된 것입니다.

2) 원 역 사

(1) 창조

창세기는 세계와 인간의 창조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P기자와 J기자의 상황을 전제로 하면서 이 창조를 이해해야만 올바른 설명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이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의 모습을 보면 P기자(창세기 1장)와 J기자(창세기 2장)의 상황이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 도표를 통해 P기자와 J기자의 창조 이해에 대한 차이점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P 자료
J 자료
1. 수면으로 덮여있고(창세 1, 2)
1. 비가 안오고(2, 5)
2. 하늘이 없고 온통 물에 찬 공간
뿐이었다(1, 8)
2. 경작할 사람이 없고(2, 5)
3. 땅이 안보이고(1, 10)
3. 들에는 조목이 없고(2, 5)
4. 채소와 과수가 없었고(1, 11)
4.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고(2, 5)
5. 천지가 어두웠다(1, 2. 14-19)
5.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셨다(2, 6)
해 설
해 설
창세 1, 1 ~ 2, 4절까지는 물이 많아서 인간이나 식물이 살 수 없는 세계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기자의 상황이 바빌론 포로시대였으며 바빌론 지역의 자연 환경을 반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자의 상황이해는 팔레스틴의 자연환경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P와 J의 자연 환경의 차이로 인해서 창조 이전의 모습은 다르게 묘사될 수밖에 없었으며, 창조란 이러한 불리하고 열악한 자연 환경을 극복하는 하느님의 행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두 설화의 공통된 의도는 자연적인 한발이나 홍수에 대결하여 인간의 생명을 긍정하시는 하느님이 역사적인 인간의 반창조적 행위에 대결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즉 P기자의 경우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절망하고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려는 것이었으며, J기자의 경우 솔로몬 시대의 풍요와 번영을 소수가 독점하여 민중부문을 배제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가는 것과 외국 문물을 무분별하게 도입하여 야훼신앙과 민족 정기가 흐려지는 것을 비판·경고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의 내용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간 창조>인데,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이란 하느님의 형태적 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오한 영적인 가치 즉 인간의 <창조성>과 <자율성>을 의미합니다.
P기자의 경우 인간은 하느님의 마지막 작품이며, 하느님은 인간을 이 세상에 만들어 놓자마자 창조를 중단하였으며,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해놓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사업을 이어받아 <창조성>과 <자율성>을 발휘하여 세계를 건설해가고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형상은 착취와 권력의 남용이 아니라 모든 인간과 자연에 대한 보호와 책임을 뜻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초대하고 불러내고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개인에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공동체에 관여하셨습니다.
아담(남자)과 하와(여자)가 최소의 단위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두 나무의 이야기(생명의 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둘러싼 에덴동산의 설화를 살펴봅시다.
이 이야기는 나무의 성격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 설화는 에덴동산의 상황을 표현하고 있는 바, 첫째 거기에는 <소명>이 있었습니다.(경작하고 가꾸는 것)
둘째, 거기에는 <허락>이 있었습니다.(1가지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허락되었다)
셋째, 거기에는 <금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인간 실존의 상황을 우리는 동시에 보아야 합니다.
대체로 우리들은 이 설화를 <소명>과 <허락>의 이야기는 빼놓고 <금지>의 이야기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금지의 이야기는 소명과 허락의 이야기와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금지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 금지란 율법적인 위협이 아니라 인생에 부여된 <한계>에 대한 실존적인 인식입니다.
그러나 이 한계는 이제 <위협>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공포로 변합니다.
소명은 소홀히 되고 허락은 악용되고 그 결과 금령은 파괴되어집니다.
그들은 믿음보다 지식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지식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했던 것 이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듣고 두려워하고 벗은 것을 알고 부끄러워 숨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처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자유>를 얻었지만 <죄>의 위협 속에 갇혀 있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금령인 하느님의 신비를 우리 자신이 소유하려 할 때, 억압적인 사회제도와 위계적인 사회질서를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존 조건인 소명과 허락과 금지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일 뿐입니다.
창세기는 이와 같이 악의 실체나 나무의 실체(생명·지식)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이 처해 있는 실존의 상황 즉 소명과 허락이라는 <위탁>과 <자율> 및 금지라는 <한계>속에서 자유와 그 자유의 가능성이 잘못 방향지워질 인간 실존의 긴장성을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보장되는 것입니다.

(2) 타락

창조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P기자와 J기자는 그들이 처한 자연환경과 사회적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을 위한 의도로서 이야기들을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여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고 죄가 번식해 나가며 이러한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새롭게 구원의 약속을 펴 나가는가를 살펴봅시다.

하느님의 금지 상황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인간은 <자율>을 얻었지만 죄의 위협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죄나 타락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후가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책임 추궁에 대하여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느님와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이 파괴되었습니다.

죄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파괴로 인한 대립과 항쟁, 착취와 피착취, 억압과 피억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의 기원은 하느님 자신이나 인간의 본성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관계의 파괴>라는 인간의 이기주의와 오만에 있는 것입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의 피할 수 없는 결속, 선과 악의 결혼, 이데올로기와 비인간성의 결합, 신적인 것의 부패, 이데올로기의 부패가 우리의 현실 속에 조직적인 악을 창출하였으며, 이러한 타락이 주는 영향은 하나의 국부적인 파국만을 몰고 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 피조물 전체로 페스트처럼 확장되어 갑니다.
이러한 악의 구조화 속에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며 함께 해산의 진통을 겪는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소외, 인간의 자연파괴를 통한 자기파괴,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 성별 인종별 차별과 학대, 제국주의에 의한 약소민족의 착취 등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불의한 상황들이 바로 이를 증명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인간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 거친 땅에서 남자는 죽도록 일해야 하고 여자는 산고를 겪어야 하며 인간과 자연은 원수가 되었습니다.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도 소원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카인은 하느님께 모반하여 아우 아벨을 쳐죽이고 아벨의 피는 땅 속에서 울부짖으며, 카인은 저주를 받아 정처없이 헤메는 신세가 됩니다.
하느님에 대한 죄의 관계는 형제에 대한 살인, 형제에 대한 책임회피의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신에 대한 모반의 원인과 결과는 인간과 인간, 계급과 계급간의 폭력관계 즉 약육강식으로 나타나고 이에 따르는 무한한 한이 쌓이고 이는 강자의 저주로 응집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생존권을 박탈당한 자들에 대하여 다시금 그들의 생존권을 보호해주는 관계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카인의 이마표입니다.

(3) 바벨탑과 언어의 혼란(창세 11, 1-9)

J기자는 창조에서 바벨탑까지의 역사를 하느님과 인간과의 소외의 확대과정으로 엮어가고 있습니다.
아담의 죄(책임 전가)→카인(형제 살해)→느빌림(구조악의 출현과 범우주적 타락)→함(가나안의 음란)→바벨탑(교만, 인간의 절대화)이 그것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국제도시인 바빌론에서 구체화된 역사적 현상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고대 특히 기원전 2천년대의 바빌론은 고대 세계의 심장부요 세력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바빌론의 문화는 이웃 나라들에게까지 흘러들어 갔으며 팔레스틴에도 전해졌습니다.

<바벨>은 바빌론의 히브리어 표현으로서 그것은 ‘혼란’이라는 뜻에서 온 것입니다.
바벨탑은 당시 인류문명의 발전의 성격을 상징한 것으로서 도시와 바벨탑의 건축은 고대 중동의 치수문명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 치수문명에서는 건축기술과 대대적인 노동력의 동원과 통일적인 관리가 절대불가결하였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홍수에 대한 인류의 대응이었습니다.
탑을 하늘까지 쌓아 홍수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획일적인 단합이 필요했고 모든 백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언어가 하나였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의 언어로 즉 하나의 목표를 향한 언어로 사회와 민족을 통괄하였던 것입니다.
바벨탑은 절대화된 바벨론 군주의 상징이며, 그는 모든 백성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 동원하여 절대적인 권위와 통일된 언어(이념)으로 그의 이름과 세력을 극대화하였습니다.

야훼는 땅에 내려와 이것을 보고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인간의 언어를 혼란시켜 언어를 흩어놓았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은 오늘날 여러 민족들이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언어의 혼돈의 의의는, 통일된 바벨탑의 논리와 바벨탑이 대표하는 문명 안에는 인간과 민족들의 진정한 주체성을 상실한 절대권위에 의한 타율적이고 인위적인 총화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이 창조하신 인간사회 질서의 파괴요 혼란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의 주체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민족들이 주체적으로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게 될 때 바벨탑이 대표하는 사회질서와 그 언어는 혼란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사회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지배자의 언어와 피지배자의 언어는 그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언어가 혼돈된 것은 바빌론 사회, 나아가 인류사회의 공동체가 하느님이 창조하신 대로의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질서를 결여하고 있어서 계급간, 집단간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민족들은 분열하고 갈등하며 한 민족사회 내부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인류의 진정한 통일이란 바벨탑과 같은 절대권력체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민족간이나 계급간의 진정한 평등과 상호 주체성의 존중, 사랑 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획일화는 근본적으로 인간사회의 질서를 혼돈케하고 인간사회의 진정한 통일을 와해시킵니다.
J기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러한 설화들을 통해서 당시 솔로몬 시대의 사회를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권력가와 부자들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탑에서 살고 있었으나 백성들은 대부분 고향과 집을 떠나 새로운 대도시의 역군과 부역으로 징발되고 있었으며, 당시에 왕궁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대와 국가의 번영을 선전하였지만 백성들은 대부분이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혼란이 아니겠습니까!

3) 족장사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의 역사는 이집트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한 공동체와 이미 가나안 땅에서 생존권을 찾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던 ‘없는 자들’이 손을 잡고 압제자들과 강대한 이집트 제국에 항거한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야훼 신앙을 지녔던 본래의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기 이전에 가나안에 있던 억압당하던 계층들이 가나안의 통치자들에 대항하여 결속된 단체로서 <엘로힘 이스라엘>과, 엘로힘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탈출한 야훼 숭배자들과 결합한 단계로서 <야훼 이스라엘>이 그것입니다.

족장사는 대별하여 <아브라함 이야기> <야곱 이야기> <요셉 이야기>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 이야기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은 이스라엘 민족사의 기반을 형성해주는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향해 떠난’ 데라를 자기네 선조로 삼지 않고 ‘가나안 땅에 처음으로 정착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가나안은 상대적으로 볼 때 결코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라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척박한 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그곳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삶의 자리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가나안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되었으며, 가나안을 떠나는 것은 몰락이요 저주며 파탄이었습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것은 승리요, 영광이며 창조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 곧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살아남는 길은 안이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모험을 전제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유랑민으로 만듭니다.
그는 땅을 소유한 정착생활에서 즉 갈대아 우르에서 하느님이 약속한 미지의 땅을 향해 가라고 명령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사의 기반이 하느님과의 약속 곧 하느님과의 계약관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혈연과 지연보다는 민족형성과정에서 합비루들의 연합에 의하여 형성된 12지파 동맹체의 대안의식에 적합한 자기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가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또한 타인이나 타민족에게도 그 자신이 축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축복이 되지 않는 그 자신만의 축복의 독점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J기자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기존의 전승을 정리하면서도 한편 솔로몬 시대의 권력자와 부자들에 대한 비판을 의도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2) 야곱 이야기

야곱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족장이며 야곱이 곧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의 운명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갈등과 모순으로 점철된 민족의 전기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쌍둥이 형인 에사오와의 싸움,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 것, 하란에서의 도피생활, 처가집의 미움을 받아 도망가는 것, 귀향, 이집트 이민, 유골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는 것 등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작은 아들에 대한 선호는 약자의 선호이며 이것은 열강의 그늘에서 불안하게 생존해야 하는 약소민족 이스라엘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된 히브리인들은 어느 한 단일민족이라기 보다는 당시에 정처없이 떠돌아 다닐 수밖에 없던 유랑민들의 결속이며 이들의 하느님 야훼는 당연히 약자의 하느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 이야기는 사방의 기득권자들 틈에서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할 없는 자들, 빼앗긴 자들, 아무런 유산도 받지 못한 자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을 일목요연하게 대조해 보자면 다음과 같이 나눠 볼 수 있겠습니다.

에 사 오
야 곱
1. 큰 아들(우선권이 있음)
1. 작은 아들(우선권이 없음)
2. 아버지의 사랑을 받음(강자쪽의 지지)
2. 어머니의 사랑을 받음(약자쪽의 지지)
3. 사냥꾼이 되어 들판에 거주
(강자가 사는 양식)
3. 집안에 거주
(약자의 사는 양식)
4. 성격이 급하고 과격함
4. 성격이 차분하고 꾀가 많음
5. 에돔의 조상
5. 이스라엘의 조상
* 결국 기득권을 소유한 자임.
그 기득권은
장자권에 의하여 보장되어 있음
* 기득권이 일절 없음
기득권을 소유할 가능성마저 없음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윤리와 도덕이 있어야 하고, 율법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규범들은 ‘생존권’ 앞에서는 상대화하고 맙니다.
야곱이 에사오의 장자권을, 상대방의 어둔함을 역이용하여 빼앗은 것은 지금보다 더 잘살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생존권’을 발휘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도덕이나 율법이란 사회생활을 유지시켜주고 질서를 부여하는 불가결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교조화·화석화하여 삶의 질곡으로 작용하게 되고 불의한 사회질서 속에서 그것을 합리화하면서 대다수 민중의 삶을 짓누르게 된다면 그러한 도덕과 율법은 과감히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에 적합한 도덕과 율법을 창조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삶은 율법에 선행하고 또 귀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요셉 이야기

아브라함·야곱을 중심한 족장설화와 출애굽 사건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교량적 기능을 하고 있는 요셉 설화는 지혜문학에 속합니다.
지혜문학은 신학적·교리적 관심보다는 이상적 인간상 묘사에 대한 인간학적인 관심이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요셉 이야기는 하느님의 드러난 간섭이나 새로운 계시없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으며 하나의 긴 교훈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들의 악의를 오히려 축복으로 바꿔 놓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 갈 때에도 억울한 투옥을 당할 때에도 성급하게 그의 분노를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는 침묵을 지키지만 이 침묵은 하느님의 역사섭리에 대한 절대 신뢰에 근거해 있습니다.
인간은 단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준비하고 행동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은 그 꿈꾸는 모든 계획의 절대적 한계성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사회전기이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바라보고 어둠 속에서도 새벽을 꿈꾸며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3. 결론

지금까지 창세기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글은 창세기 주석서가 아니며 학문적인 이론서도 아닙니다.
다만 오늘을 고민하고 현실을 아파하면서 성서가 우리에게 어떤 빛을 던져주고, 현실은 성서를 어떤 관점에서 읽도록 우리에게 가르치는가를 미약하게나마 조명해 본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과 우리의 공동체, 성서가 삼위일체가 되어야만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결여될 경우 하느님의 말씀은 왜곡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서는 분명히 신앙을 권력과 관련시키는 거짓된 방향을 공격하고, 인간의 재간과 능력을 하느님의 경륜에 관련시키는 거짓된 방향을 공격하며, 버림받은 기간에 나타난 거짓된 모습의 신앙과 회의를 공격하며 거기에 저항합니다.
성서는 언제나 대결의 상태에 처해있는 바로 그것입니다.
성서는 언제나 신빙성을 얻지 못한 긍정이요, 용납을 받지 못한 저항이며, 거짓을 부인하고 참된 모습의 복음을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언제나 노력하는 시도입니다.
아멘.

 

 

 

 

출처 : 개혁하는 교회
글쓴이 : Ez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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