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개관
1. 주 제 창세기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만드신 과정과 목적, 인간의 배신, 족장들을 통한 언약의 성취 등이 기록되어 있다. 2. 저 자 : 모세(기록연대 : B.C. 1446-1406) 1) 모세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 책을 기록했다. 2) 모세는 기존의 (영감있는)문서들을 참조하여 기록했다. 3) 모세가 죽은 후 익명의 편집자가 약간의 내용을 조정하거나 삽입했다.(창 36:1-30, 창 36:31 등). 3. 구 조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1-11장으로서 창조와 타락을 다룬다. 두 번째 부분은 12-50장으로서 하나님께서 족장들을 선택하셔서 그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다룬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인 모세는 ‘톨레도트’(תודלות)라는 특이한 단어를 사용하여 이 책을 구분하였다. 이 단어는 창세기에 10번 나오는데, 각각 ‘족보, 역사, 자손, 대략, 계보, 후예, 약전, 사적’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곳은 다음과 같다. ① 2:4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② 5: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③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④ 10: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⑤ 11:10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⑥ 11:27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⑦ 25:12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후예는 이러하고 ⑧ 25:19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⑨ 36:1 에서 곧 에돔의 대략이 이러하니라 ⑩ 37:2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전통적으로 이 단어는 창세기를 구분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가 사용된 곳을 기준으로 하여 창세기를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을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앞부분은 계보 중심으로, 뒷부분은 족장들의 이름을 중심으로 구분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분이 톨레도트 중심의 구분과 크게 상이한 것은 아니다. 이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A. 창조와 타락(1:1-11:26) 1) 서론 - 창조(1:1-2:3) 2) 하늘과 땅의 계보(2:4-4:26) 3) 아담의 계보(5:1-6:8) 4) 노아의 계보(6:9-9:29) 5) 노아의 아들들의 계보(10:1-11:9) 6) 셈의 계보(11:10-32) B. 족장들의 역사(12:1-50:26) 7) 아브라함(12:1-20:18) 8) 이삭(21:1-26:35) 9) 야곱(27:1-36:43) 10) 요셉(37:1-50:26) 2. 서론 - 창조(1:1-2:3) 1. 창조기사에 대한 바른 이해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며, 과학자가 과학적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기록한 것도 아니다.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독자들에게 말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창세기의 저자는 역사의 일부분을 선택적으로 차용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그러므로 창조기사는 ‘사실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다. 그러나 과거의 사건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라고 해서 그것의 역사성이 파괴되지는 않는다. 2. 창조기사의 역사성과 기원에 대한 비평적 견해 1) 창조기사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신화일 뿐이므로 창조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2) 창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창조 방법은 진화의 과정을 따르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진화의 과정에서 넘을 수 없는 선들을 기적적으로 넘어갈 수 있게 간섭하셨다. 3) 과학과 성경은 양립할 수 없다.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는 성경뿐이며, 과학자들의 견해는 믿을 수 없는 것이다. 4) 창조는 사실이며 이것은 과학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수준은 완벽하지 못하다. 만일 과학이 완벽해 진다면 그것은 성경의 내용과 반드시 일치될 수밖에 없다. * 이중 올바른 견해는 4번째 견해이다. 3. 하나님의 창조 1) 시작의 대 선언(1절). 1절은 하나님의 창조의 행위이며, 2절 이하는 이미 창조된 우주의 완성(구속)의 과정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그 창조된 세상은 아직 공허하고 혼돈된 상태에 있다. 한편 1절에서 언급된 “창조하시니라”(바라)라는 동사는 히브리어에서 오직 하나님의 행위에만 사용된 말이다. 2) 정리(구속)이전의 상태(2절 상) 2절은 창조된 원시적 형태의 땅이 아직 정리(구속)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혼돈’, ‘공허’, ‘깊음’, ‘흑암’은 구속 이전의 모습을 가장 잘 대변하는 용어들이다. 이러한 네 가지 용어에 덧붙여 2절에는 땅이 물로 뒤덮여 있음을 말한다. 이는 사실적 진술이다. 태초에 정리되지 않은 지구는 물로 뒤덮여 있었다. 3) 정리(구속)를 위한 준비(2절 하)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있었다. “운행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는 신 32:11에서 사용되었는데, ‘독수리가 새끼 위를 배회하면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정리(구속)할 것인지를 구상하며 준비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3절부터 이런 공허하고 혼돈된 상태에 있는 세상이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가는 것을 언급한다. 즉, 창조는 이미 1절에서 이루어 졌고, 2절은 창조이후 정리(구속)되지 않은 모습을 언급하고 있으며, 3절 이하는 창조된 지구를 정리(구속)해 가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4. 구속의 구도(1:1-2:3) 1) 준비의 단계 : 분리를 통한 땅의 정리 ① 첫째 날 : 빛과 어두움을 분리하심(3-5절) ② 둘째 날 :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분리하심(6-8절) ③ 셋째 날 : 육지와 바다를 분리하심, 식물을 준비하심 (9-13절) 2) 지배자 배치의 단계 : 지배자를 두어서 다스리게 함 ① 넷째 날 : 낮과 밤의 지배자를 두심(14-19절) 넷째 날의 창조기사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3절에 이미 빛이 있었는데, 14절에서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라는 표현은 모순이다. 그러나 여기서 “있어”(동사 하야 + 전치사 러)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는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16절에서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라는 표현은 모순이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 ‘만든다’(‘아사’)라는 동사가 명사 두 개를 지니고 나타날 때 그 의미는 영어 사역동사처럼 ‘-을 -로 되게 하다’(become)로 번역해야 한다. 성경에 이런 표현이 40여 회 나오는데 모두 ‘되게 하다’(become)로 번역하였다. 16절에서 세 번째 광명체인 별은 두 번째 광명체에 이어서 접속사 ‘그리고’(and)와 함께 명사 그 자체만 나타난다. 즉, 별이 이 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해 주는 것이다. 14-16절은 하나님이 새로운 광명체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광명체에 위치와 임무를 새로 규정지어 준 것이다. ② 다섯째 날 : 물의 지배자를 두심(20-23절) 21절, “창조하시니”에는 히브리어 동사 ‘바라’가 사용되었는데, ‘바라’는 하나님의 행위에만 사용되는 말이다(‘바라’는 1:1, 21, 27에서 사용되었다). ③ 여섯째 날 : 땅의 지배자를 두심(24-25절) 3) 인간을 창조하심 : 만물의 지배자인 인간을 만드시고 다스리게 하심(26-31절). 26절의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다.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회의를 하고 있다. 인간의 창조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회의의 결과이다. * ‘하나님의 형상’의 이중적 의미 ① 인간의 통치권과 문화적 사명 (땅과의 관계, Physical likeness of God) ②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함을 의미 (하나님과의 관계, Moral likeness of God) 4)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심 : 구속의 완성(2:1-3) 하나님의 창조 사역(구속의 사역)이 이제 마쳐졌다.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의 창조가 완성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창조를 완성하신 후 창조물을 누리고 계신다. 하지만 하나님만 쉬는 것은 아니다. 모든 피조물도 함께 쉬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안식이다. 일곱째 날에 대해서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이 없다. 이 말은 일곱째 날의 무제한성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이제부터 영원히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5. 창조기사에서 ‘날’의 개념 흔히 창조기사에 나타나는 “날(히, YOM)”을 오늘날의 24시간적 하루로 생각하여 하나님의 창조는 6일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 대해서 구약학자들간에 의견이 나뉘지만 보수주의 학자들은 대체로 “날(YOM)”을 24시간적 하루로 보지 않는다. 구약학자 글리슨 아쳐는 창조기사에서 나타나는 “날(YOM)”이 24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성경 여러 곳에서 YOM은 24시간외의 의미로 사용된다(출 13:13=년, 잠 25:13=계절, 창 35:3,40:4=기간동안.period, 참 31:25=불확정적인 때, time.등). 그리고 심지어 창조기사에서도 YOM은 2:4에서 창조사역하신 그 기간을 말하는 것이지 정확한 24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고, 1:5, 16에서는 낮(YOM, 12시간)을 표현했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기사의 “날(YOM)”을 특정한 기간 혹은 창조의 구분의 표현으로서 보아야 한다. 3. 하늘과 땅의 계보(2:4-4:26) 1. 1:1-2:3과 2:4-25의 관계 1:1-2:3은 하나님 나라의 한 과정을 완벽하게 보여 준다. 그러나 2:4-25에서는 다시 앞의 것과 유사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제2의 창조가 있었음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구속의 과정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즉, 1장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창조의 순서를 기록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인간이 중심에 위치하여, 인간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인간의 외부 환경에 이르기까지(에덴동산, 나무, 강, 들, 짐승과 새들) 논리적 순서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인간이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사람을 만드심(2:5-7) 5-6절의 내용은 사람이 창조되기 전의 상태를 묘사한다. 7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다. 물론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 외에 또 다른 사람을 만들었다는 기사가 아니라 1:27절과 조화를 이루면서 보충 설명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구절이다. 7절의 목적은 인간의 구조가 ‘흙+생기=생령’이라는 사실을 밝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손길로 만들어졌음을 말하는데 있다. 본문을 근거로 하여 인간의 구조적 분석을 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7절은 인간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한편, 우리는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결합물로 이해하지 말고 오히려 전인격적 존재(whole person, 영육 통일체)로 이해해야 한다. *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일부분 요약)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은 인간에게 있어서 유일한 특성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지침계 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가르침은 기독교 인간론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27절)는 말씀은 인간의 영적, 도덕적 순결성만을 묘사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이 그 이상의 존재임을 말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이 최초에 어떠한 방향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해(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서만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포괄적 존재(the totality of his existence)로 부각시키려는 것이 그 중심 목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성경의 선언은, 인간은 그 구성 전체가 하나님을 닮았고, 하나님을 반영시키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바빙크는 말하기를,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거나 보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그 전체성(entirety)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형상’(히브리어로 첼렘과 데무트)이란 단어 속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사상은 ‘···과 같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창조시에 하나님과 닮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상은 인간은 마땅히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투영(mirror)하고, 하나님을 대표(represent)하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① 본래적 형상(The Original Image)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본래적 형상이 존재하였다. 최초의 인간 부부는 순전함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반영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삼중적 관계 속에서(대신, 대인, 대물) 순전함과 순종으로 그들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이 존재했던 단계는 아직도 죄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단계였다. 타락 이전 아담과 하와가 존재했던 원상의 상태는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② 변질된 형상(The Perverted Image)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라 변질되어 일그러져 버렸다. 구조적 측면의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존속했으나 - 인간의 재능, 재질, 역량 등은 타락으로 인해 파괴되지 않았다 - 이제 인간은 이러한 재능들을 하나님의 뜻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변한 것은 인간의 구조가 아니라 그가 그의 역할을 감당하는 방식, 다시 말해서 그가 지향해 가는 방향이 바뀌게 된 것이다. ③ 새롭게 된 형상(The Renewed Image)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변질된 그 이래로 그 형상은 갱신의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 갱신과 복원은 구속의 과정 속에서 일어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능력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하던 인간이 이제는 구속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그것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 회복은 종종 ‘거듭남’이라고 불리는 중생-이 사건은 “성령의 역사라고 정의될 수 있는 사건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그 말씀의 선포를 통해 성령께서 사람을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연합을 이루게 하시며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사 전에 영적으로 죽은 그를 다시 살리사 이제 기꺼이 복음을 믿게 하시며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다”-에서 시작된다. 그 형상의 회복은 성경에서 말하는 성화의 단계 속에서 계속되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기본적으로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주묙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형상이시기에 하나님을 더욱 닮아 간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형상의 갱신이 교회론적 측면을 갖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형상의 새로워짐은 독립된 개체로서의 개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의 성도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하시는 교회와 관계된 것이다(엡 5:26). 형상이 새롭게 되는 것은 사람 속에 역사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책임성도 포함되고 있다는 점이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나 옛 사람을 벗는 일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돌보는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지고 있는 것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신약성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단순히 찬미되어지고 관람되어지는 박물관의 진열품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따르도록 명함을 받는 살아 계신 모범 즉 그리스도라는 모범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이 형상의 새로워짐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형태의 생각과 말과 삶에 이르도록 촉구한다. 이러한 새로워짐의 중심부에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사랑하라는 사랑에의 부르심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의 새로워짐은 우리가 그 속에서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경험에 우리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강조컨대 이러한 갱신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성령의 역사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최후의 부활의 이쪽 언덕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들은 훗날 온전히 새로워지게 될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처럼 보일 것인가에 대한 약간의 힌트요 암시에 불과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④ 온전케 된 형상(The Perfected Image) 인간이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 그 완성에 이르게 된다. 형상의 이러한 종국적 완성은 그의 구속받은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절정이다. 우리가 확신하건대 그때에 우리는 완전히 그를 닮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닮는다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기독론적 인간관의 최상을 보려면 최초에 창조되었을 때의 인간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 오히려 미래에 새롭게 되어질 그 인간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영화롭게 되심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 또한 그리스도의 영화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 형상의 종국적인 완성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어질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 그 모양이 완성될 것이다. 우리가 그 형상의 미래적 완성에 대해 계속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완성된 형상이 무엇과 같을 것인가를 정확하게 그려볼 수 있다는 것이 불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확신컨대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삶과 우리의 미래의 존재 사이의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히 유사점일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3. 에덴동산의 창조와 그곳에서의 안식(2:8-17) 1) 에덴에서의 안식 4절 후반부부터 황무지가 원시상태로 변해가며 땅이 습기를 가지고 생명력 있는 모습으로 변해 간다. 이렇게 구속이 완성된 땅은 결국 에덴동산의 아름다운 땅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인간이 안식하도록 하셨다. 이 구절은 인간 창조의 목적과 궁극적 의도를 보여 준다. 2) 에덴 동산의 위치 하나님은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만드셨다. 에덴 동산의 위치는 동방의 에덴(직역하면, ‘동방으로부터’), 즉 서쪽에 있었고 강의 근원지에 있었다. 3) 에덴 동산의 요소들 계시록에 언급된 미래의 하나님 나라와 비교하여 볼 때 에덴은 미래의 하나님 나라(새 하늘과 새 땅)의 그림자인 동시에 진전되지 않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① 강 : 강은 유대에서 생명의 근원의 상징이다. 계 22:1-2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에도 생명수 강이 흐르고 있다. ② 보석 : 계 21:19에서도 그 성이 열 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고 말한다. ③ 생명나무 : 계 22:2에서도 그 성에 생명나무가 있음이 언급된다. ④ 하나님의 임재 : 계시록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에 하나님의 보좌가 내려옴으로 완성된다. 4. 하나님과 아담의 언약(생명과 사망의 언약) 에덴 동산 중앙에 특별한 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하나는 생명을 주는 나무였고 하나는 사망을 주는 나무였다. 즉, 이 두 나무는 생명과 사망의 나무였다. 하나님은 이 두 나무가 짝을 이루고 서 있는 것을 통해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이 왜 이러한 나무들을 만드시고 언약을 맺으셨는가? 그것은 인간을 얽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하여금 더 좋은 것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에덴에서의 인간은 완전했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완전함이었다. 그것도 물론 좋은 것이었으나 만약 인간이 순종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취한다면 그것은 극치의 완전함이 되는 것이다. * 종주권 언약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은 종주권 언약이다. 종주권 언약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지만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서 지시는 언약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일방적인 언약을 맺으셨지만 아담이 타락한 결과에 대해서도 역시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셨다.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5. 여자를 만드심(2:18-25) 하나님은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여겨서 돕는 배필(직역하면 ‘상응하는 조력자’)인 하와를 만드셨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살고 서로 좋아하게 되는 것은 창조질서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동성연애는 창조질서를 역행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남자의 갈비뼈(직역하면 ‘옆구리’)를 취하셔서 여자를 만드셨다. 그리고 한 몸이 되게 하셨다. 그들은 성적으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관계는 나중에 타락을 통하여 파괴되었으며, 오직 한 쌍의 남녀가 서로간에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은 결혼의 때에만 부분적으로 남아 있다. * 창조질서에서 본 남성과 여성의 관계 ①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다. 그러나 먼저 창조되었다고 해서 남자가 우월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보다 짐승들이 먼저 창조되었다고 해서 짐승이 인간보다 우월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단지 남자가 먼저 창조되었으므로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고 주관하는 것이 창조질서인 것이다.(고전 11장, 딤전 2:11 참조) ② 성의 구별은 상호 보완하는데 목적이 있다.(창 2:18) 인간은 반드시 이성을 통해서 참다운 만족과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성간의 연합은 결혼을 통해 가능하다. ③ 결혼을 통하여 둘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독자적이고 견고한, 하나님이 보증한 결합이다(막 10:8 참조). ④ 그들 서로에게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한 자연스러움이 있었다(25절). 6. 인간의 타락(3:1-24) 1) 타락의 원인과 경위 : 죄의 근원은 사단이다. 사단은 뱀의 형체를 입고 인간에게 접근하여 유혹하였는데, 뱀은 하나님이 만드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짐승이었다. 그러나 간교하다는 말이 나쁜 의미는 아니다. 문자적으로 “간교한”이라는 말보다는 “영리한”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보아진다. 간교하다는 말을 나쁜 의미로 이해하면 이미 그때 동물세계에 악이 내재해 있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1:31의 의도와는 상충될 것이다. 사단의 유혹으로 인간은 죄를 범하고 말았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었으며 선악과 자체에 죄의 성분이 함유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2) 타락후의 인간의 모습 ①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② 육체의 시각이 발달하여 흙의 것만 추구하게 되었다. “눈이 밝아 자기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7절) 아담과 하와는 몸을 감싸기 위한 치마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성기를 가리기 위한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옷을 지어 입음으로써 육체를 가꾸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③ 선악의 기준을 인간 마음대로 설정하게 되었다(22절).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과 동일한 판단 수준을 가졌다는 말이 아니라 선악의 판단 기준을 인간 스스로 설정해 버렸다는 뜻이다. 인간은 선악의 판단 기준으로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인 사고의 능력을 택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의 이성을 놓은 것이다. 3) 하나님의 저주(3:14-19) ① 사단에 대해(14-15절) : 하나님은 인간에게 와는 달리 사단에게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으시고 오직 판결만 할뿐이다. a. 배로 기고 흙을 먹을 것이다. 뱀이 이제 배로 기어다닐 것이라는 선언은 원래 뱀이 다리로 걸어다니다가 이제는 기어다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며, 마치 기어다니는 것이 현상학적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에 사용된 표현이다. “흙을 먹는다”는 표현은 실제로 뱀이 흙을 먹는 것이 아니고 낮아질 것이고 철저하게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시 72:9, 사 49:23, 애 3:29, 미 7:17 참조). b. 여자와 원수가 되고 그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될 것이다(3:15, ‘원시복음’). ② 여자에 대해(16절) : 여자가 먼저 죄를 지었으므로 여자에게 먼저 죄를 물으시고 판결하신다. a.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 b. 남편에 대한 사모함(남자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질 것이나, 남편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다. ③ 아담에 대해(17-19절) a.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b.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육체의 운명). ④ 땅에 대해(18절) :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피조물도 함께 형벌을 받게 되고, 후에 인간의 구원받을 때 피조물도 함께 구원받는 것이다. 4) 하나님의 긍휼(3:21)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인간에 대한 저주의 내용가운데도 간간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지어 입혔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의미이다. 5) 에덴에서 쫓겨남(3:22-24) 24절에 나타나는 ‘두루 도는 화염검’이란 칼처럼 생긴 불길이 계속 회전되는 상태를 뜻한다. 이러한 표현에서 죄인을 쫓아내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낙원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7. 타락한 인류의 초기 발전(4:1-26) 1) 아담과 하와가 자식을 낳음(4:1-2) 아담은 자식을 낳은 후 아마도 3:15의 약속이 당장 이루어지는 줄 알고 좋아했던 것 같다. 그는 죄의 결과를 깊이 인식하면서 빨리 여자의 후손을 낳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의 오해였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 졌다. 2) 가인과 아벨의 제사(4:2-7) ① 본문을 근거로 하여 가인과 아벨을 농경문화와 목축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농경문화는 좋아하시고 목축문화는 싫어하시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비록 그런 예가 구약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예, 렘 35:6), 여기서 문화의 대조는 전혀 부수적인 주제이다. 하나님께서는 양쪽 방식을 다 인정하신다(참조, 신 8장). ②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 중 아벨의 것만 취하셨다. 왜 그랬는가? 어떤 사람들은 가인의 제사에는 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피가 없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실격시켰다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참조, 신 26:1-11). 본 절에 명시되어 있는 모든 것은 아벨이 자기 양떼 중에서 최상의 것을 바쳤다는 것과 가인의 영은 오만 무례하였다는 것이다(5절 후반부). 신약도 또한 아벨의 생활과는 달리 가인의 생활은 자기의 제사와 모순되는 모습이었으며(요일 3:12), 아벨의 경우 그의 믿음이 제사가 열납된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증언한다(히 11:4).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삶과 일치된 믿음의 제사이다. * 7절, “죄가 문에 엎드러지느니라” : 이는 죄가 문밖에 있다가 문을 열면 안에 있는 사람을 덮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표현이다. 3) 가인의 범죄와 형벌(4:8-15)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 11절 이하에서 회개하지 않은 가인에게는 아담보다 더 날카로운 저주가 선언되었다. 가인은 땅을 잃고 유리 방황하게 될 것이고 땀을 흘려도 땅이 소출을 충분히 내어 주지 않을 것이다. 죄가 깊어 갈수록 땅은 더욱 황폐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에게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신다(15절).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다.
* 14절, “나를 만나는 자가.....” : 이미 땅에는 아담의 자손들이 어느 정도 살고 있었을 것이다. 4) 가인의 정착(4:16-24) 가인은 하나님의 ‘유리방황’하라는 명령을 거역하고 에덴동편 놋이라는 땅에 정착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다. 이 에녹이라는 말은 ‘시작하다’라는 뜻이다. 가인은 이곳에서 하나님 없이 새로 시작하려고 했던 것이다. 가인의 후예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예술과 문화와 기술을 일으켰다. 음악, 예술, 기술 등이 원래 불택자의 계보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술, 기술이 마귀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 비록 불택자의 계보에서 그런 것이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원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불택자 역시 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능력(Physical likeness)을 가지고 있으므로 문화적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5) 셋이 메시야의 계보로 선택됨(4:25-26) 아담의 계보에서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경건한 자손 셋이 등장한다. 그것은 창조된 세상이 점점 퇴폐해 가는 중에도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26절에서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아벨 이후 영적 성장을 위한 새로운 줄기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4. 아담의 계보(5:1-6:8) 1. 아담의 계보(5:1-32) 1) 성경 계보의 원리 ① 중요하지 않은 이름은 생략되었다. ② “A가 B를 낳고”의 구(phrase)는 단순히 부자관계보다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③ 저자는 구조적 조화를 맞추려고 노력했다(마 1장 참조). 2) 사람들의 장수에 관하여 노아 홍수 이전의 지구는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상태였으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금보다 장수할 수 있었다. 3) 에녹의 승천(5:21-24) 이 부분은 성경에서도 놀랍게 빛나는 한 장면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란 문구는 구약적 경건의 본질(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다. 혹자는 “하나님이 그를 데려갔다”라는 표현이 결국 죽었다는 표현이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여러 곳에서 에녹과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간 것으로 설명한다.
2. 인간의 극도의 타락(6:1-8) 1) 1-2절 : 본문은 상당히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보수 신학자들은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셋의 자손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한 당시 땅을 다스리던 통치자들이라고 다양하게 해석한다. 하지만 사람의 딸들은 가인의 후예를 가리킨다고 한결같이 주장한다. 어느 것이 정확한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으며 각각의 이론들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여러 해석. ① 셋의 자손 : 경건한 셋의 자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해석한 견해는 대부분의 보수적인 학자들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이제 경건한 자손마저 타락함으로써 온 세상이 급격히 부패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② 천사 :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라고 보는 견해는 성경의 다른 곳에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으나, 근본적으로 천사와 같은 영물들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결혼하거나 생육할 수 없다. ③ 통치자들 : 홍수 직전 세상을 다스렸던 통치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독재정치를 하므로 세상이 어지러웠으며, 또한 자신의 무절제한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기들이 보기에 아름다운 여자들을 취했다. 그들의 난잡한 생활이 폭력을 수반하였기 때문에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다.”(6:13)라고 표현하고 있다. 한편 고대의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른 예는 시편 82편 등에서 찾을 수 있다. 2) 3-4절 : 3절의 120년간이라는 표현은 노아 홍수전 유예기간이거나 아니면 짧아진 평균수명이라고 보여진다. * 네피림 - AV는 giant(거인)라고 표현. RSV, RV는 그대로 네피림이라고 표현. 3) 5-7절 : 5절의 “모든..... 항상....... 뿐임을....”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악이 외형상으로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 극도에 도달해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독보적 존재가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은 심판을 결심하셨다. 한편 모든 생명은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과 피조물을 함께 심판하실 계획이셨다.(롬 8:19-21참조) 4) 8절 : 7절에서는 과격하게 표현되었으며 8절에서는 단순하고 부드럽게 문장을 맺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과 구원의 양극단을 동시적으로 대처하시는 분이시다. 5. 노아의 계보(6:9-9:29) 1. 노아와 방주(6:9-22) 1) 9절 : “노아의 사적”은 노아의 계보와 동일한 말이며, 이는 창세기에서 새로운 단원을 시작할 때에 사용하는 특수 어법이다. 이러한 어법이 암시하는 것은 창세기가 인류의 구원을 위한 메시야의 보존된 혈통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았고 하나님과 동행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의로운 사람)의 근거가 노아의 행동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8절). 인간이 의롭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의 결과일 뿐이다. 어느 시대에나 노아와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항상 소수였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소수의 의인을 통해 역사를 움직여 나가신다. 2) 10-12절 : 이제 세상은 창조 질서의 아름다움과 반대 입장에 있었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의 원래 상태가 현저하게 파괴되었다. 3) 13-22절 :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신다. 이 방주는 은신처를 의미한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 일은 역사적 사실이며 여기에 기록된 내용도 문자 그대로 받아 들여야 한다. * 축구 경기장과 비교해 본 방주의 크기 2. 노아의 순종(7:1-16) 노아는 하나님의 명하심을 다 준행하였다. 16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는 표현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행동을 보여 준다. 3. 대 홍수(7:17-8:22) 1) 홍수의 원인 : 죄악의 관영(6:5, 11, 12, 13) 2) 홍수의 목적 ① 타락한 인류를 멸망시키기 위해서(6:7, 13, 17, 7:4, 21-23) ② 의인을 죄악에서 분리시켜 보존하기 위해서. (6:8, 19-20, 7:1-3, 7-9) 3) 홍수의 범위 구약학자 영과 글리슨 아쳐는 부분적 홍수를 말한다. 즉 홍수의 목적은 인류의 멸망이었으므로 당시 인류가 그리 넓지 않은 지역에 한정되어 살았다면 홍수지역도 한정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중요한 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4) 홍수의 과정 홍수의 과정은 창조의 과정과 정반대(역질서)이다. 이 역질서를 통해 1:2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다. ① 하늘이 열려 물이 쏟아짐 ↔ 궁창을 두어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구분함. ② 땅에서 물이 솟아 남 ↔ 물이 한 쪽으로 모여 뭍이 드러남. ③ 물이 땅에 덮이고 생물을 죽임 ↔ 땅을 정리하고 생물을 두심. 5) 7-12절 :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 물의 깊이를 판단한다. 6) 15-22절 : 홍수 이후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제사를 받으신 후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 노아 홍수의 연대기 4. 새로운 법령(9:1-7) 1) 1-2절 : 비록 하나님은 아담에게 내리신 명령을 반복하시고 있지만, 이제 인간의 통치는 제한적일 뿐이다. 2) 3-4절 : 하나님은 원래 인간에게 식물만을 먹으라고 하셨으나 이제 홍수로 땅위의 식물이 멸절하자 고기를 먹으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피는 하나님께 속한 신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3) 5-6절 : 피의 신성함에 관한 주제는 이제 더욱 깊이 다루어져 있다.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사형제도의 정당성을 또한 증명해 준다. 9:5-6 He who pours out (A) the blood of (B) man (C) by man (C') his blood (B') shall be poured out. (A') 5. 노아의 언약(9:1-17) 1) 언약의 성격 하나님의 언약은 ‘내 언약’, 즉 하나님의 개인적이고 일방적인 종주권 언약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언약은 어떤 새로운 언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언약(아담과 맺은 언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고 회복하는 것이다. 2) 언약의 요소 ① 창조질서 보존에 대한 언약 : 땅위에서 번성하고 함부로 살인하지 말 것을 명령하고 다시는 땅을 물로 심판치 않을 것을 약속하신다. ② 창조질서의 회복에 대한 언약 : 생육하고 번성하고 자연을 지배하라고 명령한다. ③ 우주적인 언약 : 이 언약은 노아와만 맺어진 언약이 아니라 모든 인류와 모든 피조물과 함께 맺어진 언약이다. 노아는 여기서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④ 영원한 언약 : 언약의 징표인 무지개가 있는 한 언약은 하나님에게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라고 하신다(12, 16절). 무지개의 증거는 하나님 자신이 영원히 언약을 기억할 것이라는 맹세의 표시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세운 언약을 비록 인간이 파기하더라도 자신이 친히 그 책임을 지실 것임을 천명하신다. 6. 노아의 실수와 셈, 함, 야벳의 운명(9:18-29) 노아는 처음으로 농사를 지은 후 포도주를 마시고 술에 취해서 그의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로 자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아들 함이 보게 되어서 죄를 지었다. 그런데 함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았는가? 어떤 이들은 함이 노아와 동성애를 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벌거벗었음을 보았다”의 히브리어 단어는 사역형이 아니므로 함이 단지 아버지의 하체(성기)를 본 것으로만 해석해야 한다. 고대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보는 것을 가정 윤리를 파괴하는 행동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아버지의 권위가 조롱받는 것으로서 해석되었다. 함은 마치 자기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여 이긴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두 형제에게 말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사소한 사건인 듯 한 것이 당시에는 커다란 사건으로 취급되었다. 노아는 가나안 인들이 셈 족속과 야벳 족속의 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함이 행한 잘못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 인들이 함과 같이 타락한 삶을 즐겼기 때문이다. 6. 노아의 아들들의 계보(10:1-11:9) 1. 민족들의 족보(10:1-32) 1) 야벳의 아들들(2-5절) 야벳은 이스라엘과는 거리가 먼 북방 민족이었다. 북방 민족들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많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예언서에서는 자주 나타났다(겔 27, 37-39장). 야벳의 아들들은 흑해와 카스피해로부터 스페인에 걸쳐 유라시아 지방에 흩어졌다. 그들은 지중해 연안과 섬에 거주하다가 점차 유럽 본토로 건너갔다. 2) 함의 아들들(6-20절) 함의 아들들은 동부와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민족들을 형성했다. 그들은 남 아라비아, 에디오피아, 이집트, 가나안, 붓 등에 거주했다. 그들은 같은 지역에 거주하던 셈족과 섞이게 되었다. 3) 셈의 아들들(21-31절) 셈족은 선택된 민족으로 남았으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속에 보존되어 왔다. ① 아람-우스, 훌, 게델, 마스 ② 아르박삿-셀라-에벨(히브리인들의 조상:에벨 →이브리→히브리)-벨렉,(욕단)-......... ③ 엘람, 앗수르, 룻 * 노아의 후예들이 분포해 있던 곳
2. 바벨탑의 건축(11:1-9) 1) 2절 : 시날이란 ‘두 강의 땅’이라는 뜻인데, 이곳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지역인 바벨론을 가리킨다. 2) 3-4절 : 두 가지 죄악 ① 그들은 하늘에 닿기를 원했다. 즉 하나님만큼 높아지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에덴에서의 뱀의 유혹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해서는 안된다. ② 인간들은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흩어지라고 명령했으나 그들은 오히려 뭉치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았다. 그들은 아마도 홍수심판에 관한 말을 듣고 높은 탑을 쌓아 다시 홍수가 와도 멸망당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3) 5-9절 : 여호와께서 강림하셔서 그들의 도전에 대해 심판하신다. 하나님이 언어를 혼잡케 하시자 그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언어 차이는 문화적, 역사적 차이가 아니라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심판의 결과이다. 그러나 신약 시대의 오순절에 있었던 언어 일치 현상(방언)은 새로운 회복을 의미한다.
4) 6절 : 여기서 “인간의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말은 인간이 극도로 타락해져서 더 이상 타락해 지면 인간이 다시 돌이켜 질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7. 셈의 계보(11:10-32) 1. 아브라함의 조상들(11:10-26) 선택받은 혈통은 이제 구 세계에서 나와 족장들의 세계로 진입한다. 10:22이하에 나와 있는 이름들 중에서 여기서는 오직 에벨의 조상만이 다시 나타나고 있으며, 이후로의 계보의 흐름은 10:25 이하에 있는 바와 같이 욕단이 아니라 벨렉에게로 간다. 그리고 그 족보는 아브라함에게까지 이른다. 즉, 여기에 기록된 족보는 아브라함의 역사적인 실존과 근원을 밝히기 위함이다. 노아의 아들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이르는 10명의 족장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셈 - 아르박삿 - 셀라 - 에셀 - 벨렉 - 르우 - 스룩 - 나홀 - 데라 - 아브라함 2. 데 라(11:27-32) 1) 데라는 아브라함, 나홀, 하란을 낳았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비록 장자가 아니지만 선택된 혈통의 주인공으로서 앞에 등장한다. 2) 데라는 우상숭배자였는데(수 24:2), 하나님은 데라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심으로 더 이상 이방종교의 영향하에 머물지 않도록 하셨고 하란에 거하게 하셨다. 아마 아브라함도 당시의 사회가 철저한 부권 체제였으므로 처음에는 이방종교인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선택된 혈통으로 남은 것이다. 8. 아브라함(12:1-20:18) 1.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심(12:1-9) 드디어 아브라함이 등장한다. 11장에서 민족들을 땅에서 흩으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12장에 와서는 그 땅을 아브라함에게 차지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람은 하란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다. 고대인에게 있어서 땅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생각했고 현실도 그러하였다. 하나님이 당시 방랑자였던 아브라함에게 주실 땅은 단지 오늘날 천국의 예표로서의 의미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현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땅이었다. 게다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땅 뿐만 아니라 후손과 복에 대한 약속이었다. 당시 부족 사회에서는 자손이 대단히 중요했다. 가문을 잇고 재산을 상속하고 힘을 기르기 위해서 후손의 번창은 필수적이었다. 또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 역시 독특한 은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세 가지 약속, 즉 땅과 후손과 복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나타난다. * 아브라함의 여정 * 세 겜 아브람은 ‘세겜’을 통과했는데 이곳은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세겜은 팔레스타인의 중앙 교차점이 되는 곳이며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사이의 대로에 위치해 있었고 후에 백성들에게 결심을 요청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기에 회집되어 축복과 저주 사이에 선택하도록 명령받았고(신 11:29-30), 여기서 여호수아는 그의 마지막 훈시를 주었으며(수 24장), 여기서 솔로몬의 왕국이 어느 날 둘로 나뉘어 지도록 결정되었던 곳이다(왕상 12장). 2. 애굽(이집트)으로 이주한 아브람(12:10-20) 기근으로 인해 아브람은 애굽에 잠간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 보지도 않고 자기의 계산에 따라 애굽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기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소개하였다. 당시 아브람은 75세가량이었으며 사래는 그보다 10년 젊은(17:17) 65세였다. 족장들의 수명은 대충 우리의 2배 정도가 되었는데 아마도 사래는 상당한 미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브람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잘 해결된다.
3. 롯과 헤어짐(13:1-18) 여기서 아브람은 뛰어난 도덕성을 가지고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도록 양보한다. 롯은 자신이 원하는 땅을 먼저 선택하여 실패했으나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실 땅을 기다렸기에 성공했다. 신앙인의 선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직 약속에 따라 믿음을 가지고 선택해야 한다. 4. 왕들의 전쟁과 멜기세덱과의 만남(14:1-24) 본문은 성경의 역사와 세계역사의 일치를 증거하는 부분이다. 본문에 언급된 사건, 지명, 인명 등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부분이다. 이 상황은 청동기 중기 시대이며 주전 이천 년대 초기이다. 즉 아브람의 역사성, 창세기의 고고학적 사실성의 증거가 되는 본문이다. 시날 주변의 왕들과 소돔 주변의 왕들이 전쟁을 한다. 이 과정에서 롯은 포로가 되고 아브람은 그를 구출한다. 그런데 아브람의 승리는 아브람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었다. 나중에 멜기세덱은 그 승리를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그것을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복으로 이해하였다(20절). 하나님은 실제로 그의 약속을 계속 지키신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도 승리의 확신을 가지는 것은 환경의 변화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고전 10:13등)으로 인한 것이다. 한편, 아브람은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그에게 십일조를 바친다. 멜기세덱은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자신의 위대한 후손인 메시야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시 110:4), 히브리서(7장) 기자는 멜기세덱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전형(type)으로 언급하면서 멜기세덱의 익명성을 강조했다. 또한 아브람은 전리품을 취하지 않으므로 소돔왕으로 부터 절대적인 독립을 유지하게 되고 자신의 소유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장을 통해 아브람의 도덕적 상태가 더욱 강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5. 하나님이 아브람과 언약을 맺는다(15:1-21). 1) 언약의 도입 : 아브람이 땅에 대한 약속의 확증을 요구하였다. 2) 언약의 준비 : 짐승을 잡음(렘 34:18이하 참조) 3) 언약의 내용 : 땅, 후손, 복 4) 언약의 확증과 성격 : 캄캄함이 임하고 횃불이 쪼갠 고기사이로 지나갔다. 지나간 것은 아브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언약의 책임을 지시겠다는 표시이다. 또한 이 언약은 죽음으로 유효해 지며 언약을 어길 시에 또한 죽음이 오게 된다는 표시이다.(히브리서 9:16-22 참조, 유언을 언약으로 바꾸어서 번역해야 함) * 출애굽 사건의 예(13-18절) 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는가? 어떤 사람들은 아브람이 언약을 맺는 가운데 실수 한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브람의 자손이 바로 가나안에 정착하지 않고 애굽에 가게 된 것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시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스라엘 자손들의 애굽 생활이 결코 저주의 기간은 아니었다. 처음에 그들은 풍족하게 생활했다. 단지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죄악이 늘어갔으므로 후기에 많은 고통을 당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켜서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셨다. * 가나안에 바로 머무르지 못한 이유 ①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에 바로 들어갈 경우 그들과 바로 동화될 위험성이 있다. 즉 이스라엘 자손에게 적절한 훈련이 필요하였다.(13절) ② 아직 가나안 인들을 쫓아낼 만큼 그들의 죄악이 심각하지 않았다(16절). 이 사실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이 침공이 아니라 심판의 차원에서 해석된다는 것을 증명한다. ③ 고고학적으로 가나안땅에 당시 기근이 심했던 것 같다. 6. 이스마엘의 출생과 하갈(16:1-16) 아브람이 하갈을 취하여 자손을 출생시키는 행동은 당시의 사회관습에서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아 들여졌으며, 아브람은 이런 식으로 15:3의 약속이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 인물(아브람, 사래, 하갈)들은 각각 거짓된 교만(4절), 거짓된 비난(5절), 거짓된 중립(6절)으로 죄성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러나 사래의 가면은 곧 벗겨지며(6하반절), 정의에 호소하는 듯한 그녀의 배후에는 증오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갈은 도망하였고 노상에서 하나님을 만났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다. 그것은 하갈의 자손이 번성하여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게 될 것이라는 복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아들의 이름은 이스마엘이 될 것이며, 그의 후손들이 동방 곧 고대의 근동 지역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하갈의 눈에 비친 하나님은 보고 있으신 하나님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보이신” 하나님이셨다. 하갈은 “당신은 보이심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관망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한편 아브람은 후에 이스마엘을 비롯하여 많은 아들을 낳았다(23:1, 25:1-2). 7. 아브람의 언약이 재확인되고 인쳐짐(17:1-27) 1) 1-3절 : 15장에서와 17장에서 두 단계로 언약이 맺어지는데, 이것은 언약의 오랜 지연으로 인해 아브람의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아브람의 99세 때에’라는 말은 전장(16장)후 13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그 사이의 사건들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것은 성경은 단지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2) 4-8절 :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그것은 원래의 두 요소들 곧 ‘아브(아버지)’와 ‘람(높은)’과 덧붙여진(아브라함) 제 3요소의 ‘하몬(다수)’의 융합이다. 즉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high father)라는 뜻이지만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a father of many nations)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시면서 자신이 확실히 아브라함의 후손들과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확인 시켜 주셨고 아브라함은 비로소 완전히 열국의 아버지, 즉 믿음의 조상이 될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3) 9-14절 : 언약의 표인 할례 제도가 제정된다. 할례는 이미 고대 근동에서 성인의 표시로 널리 행해지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할례 제도는 언약이 피(죽음)를 요구한다는 것과 양피를 베어 버림으로써 깨끗하게 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4) 15-22절 : 사래와 사라는 ‘공주’라는 똑같은 단어의 단지 구형식과 신형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명을 하는 것은 그녀를 어떤 표지물(landmark)로 세움이었고, 그녀 개인으로 본다면 그녀 자신을 약속으로 인도한 것이었다(16, 19절). 5) 17-18절 : 아브라함의 솔직한 믿음의 갈등에 대해 하나님은 결코 엄하게 책망하지 않으시고 단지 바르게 조정해 주신다. 6) 19-27절 : 이삭의 탄생이 예언되었고, 아브라함과 그 집안 식구들이 할례를 받았다. 8.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탄원함(18:1-33). 정오의 만남과 다음날 소돔에서의 밤의 장면은 어느 의미로 보나 빛과 어두움의 대조이다. 전자는 말없이 친밀하며, 약속으로 가득한 분위기이다. 더 나아가 중보기도로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사랑이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면서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러나 두 번째 장면은 온통 혼란과 파멸뿐인데, 사랑 없는 추악함과 누추함으로 장식된다. 9.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19:1-29) 1) 1-3절 : 롯이 두 천사를 대접한다. 아브라함과 만났던 나그네들은 3명이었으나 지금은 두 명뿐이다. 한 명은 하나님(성자 예수 그리스도?)이셨으며 그 분은 아브라함을 만난 후 하늘로 올라가셨고 여기 소돔성에 도착한 두 명의 천사는 소돔성을 심판하기 위해서 파송된 것이다. 영적 존재인 천사가 눈에 보이고 음식을 먹는 등의 현상은 가능하다. 롯은 당시 소돔성에서 약간의 명성만 있었던 사람으로 짐작되며 롯이 두 천사를 금방 알아 본 것은 아니고 단지 낯선 나그네 정도로 생각하고 정중히 모신 것으로 짐작된다. 2) 4-13절 : 두 천사에 대한 소돔인들의 행패가 나온다. 아마도 그들은 동성연애를 즐겼던 것 같다(“상관하리라”). 그리고 천사들은 심판을 롯에게 선언한다. 3) 14-23절 : 롯은 천사들을 위하여 자신의 딸을 바치려 했고 천사는 롯의 가족을 구출한다. 그런데 롯이 자신의 딸을 바치려 했다는 것이 결코 옳은 행위로 받아 들여 질 수는 없다. 악을 악으로 대처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체하는 롯과 그의 가족들의 태도와 그들을 구출하는 천사들의 태도는 인간의 연약성과 하나님의 구원의 절대적 자세를 보여 준다. 천사들은 소돔성 밖으로 나온 가족들을 향해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세상으로부터 나온 자는 결코 다시 애착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4) 24-29절 :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당하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다. 10. 롯과 그의 딸들-모압과 암몬의 기원(19:30-38) 1) 30-32절 : 딸들의 말에서 도덕적 부패성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롯의 딸들이 소돔 성에 있으면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곳 거민들의 죄악에 오염되었던 것 같다. 환경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2) 33-38절 : 큰딸은 모압 족속을 이루었다. 모압이라는 말은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이다. 작은딸은 아들의 이름을 ‘벤 암미’라고 지었는데 그 뜻은 ‘내 백성의 아들’ 즉 ‘같은 피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근친상간에 의해 태어난 자식을 의미한다. 11.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속이다(20:1-18). 아브라함은 그랄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그는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왕에게 자기의 부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거짓말이 전혀 터무니없는 거짓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사라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에게서 태어난 이복누이이기 때문이다(1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거짓말의 동기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므로 그의 말은 거짓말로 취급된다. 아브라함에 대해 아비멜렉은 책망한 후에 선물을 주는데 그의 선물은 아브라함에게 붙어 있는 능력에 대한 그의 존경심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필요로 하였다. 그리고 결국 아브라함의 기도로 하나님의 아비멜렉에 대한 진노가 사라졌다. 9. 이 삭(21:1-26:35) 1. 이삭의 출생과 이스마엘의 추방, 그리고 아비멜렉과의 조약(21:1-34) 이삭의 출생은 “그 말씀대로....”이루어진 것이다. 이삭의 출생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추방되고 천사가 하갈을 위로한다. 그리고 이스마엘은 바란광야에서 사냥군으로서 생활하며 성장한다. * 22-34절 : 아비멜렉과의 조약.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언약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물에 붙인 이름인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 혹은 ‘일곱의 우물’이란 뜻이다. 이 브엘세바는 그 후 성지로 취급되었다. 아브라함이 언약을 맺은 후 에셀 나무를 심은 것은 신실한 언약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침(22:1-24) 1) 3-5절 : 3절에서 아브라함이 아찜에 일찌기 일어났다는 것은 그의 민첩한 순종을 가리킨다. 5절에서 아브라함은 이삭과 함께 제사를 드린 후 ‘우리가(한글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에는 있다) 돌아오리라’고 확신에 찬 가운데 말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21:12)라는 이삭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므로 담대하게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히 11:17-19은 이삭이 부활할 것을 아브라함이 기대하고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2) 6절 :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는 것이 요 19:17에 나타나 있는 사건을 필연적으로 생각나게 하므로 이삭이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견해가 있으나 이에 대해서 그렇게 분명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3) 12절 : “내가 이제야 아노라.”라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아브라함의 헌신과 순종이 입증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의 헌신이 입증되지 않았었다. 하나님의 이러한 입증에 대한 요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믿음은 언제나 행위로 입증되는 것이다. 4) 15-19절 :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13:14이하에서 얻었던 것과 같은 확약을 받는다. 16절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맹세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 절대적으로 지켜질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5) 20-24절 : 나홀의 12자녀.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자녀들이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24:4의 아브라함이 결심을 내리는 배경이 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여기에서 의미깊은 이름들은 브두엘과 리브가이다. 3. 사라의 죽음과 막벨라 굴(23:1-20) 1) 사라가 가나안 땅에서 죽었다는 것이 굳이 표현된 이유는 사라가 블레셋 땅에서 죽지 않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죽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요셉의 유언에서도 이 사실은 명백히 나타난다(50:25). 이에 대해 칼빈은 “그들 자신이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죽음으로 인해).... 죽음의 장애물도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러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한다고 그들의 무덤이 외치고 있다.”라고 말했다. 2) 나그네인 아브라함은 본 장에서 예의를 갖추고 정중하게 작은 땅을 사서 소유할 수 있기를 요청하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영구적으로 발디딜 곳을 얻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달린 아주 민감한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죽음을 기회로 삼아서 땅을 사기 원했다. 6절의 호의를 베푸는 듯한 말은 오히려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나그네로 남아 있으라는 권유이다. 3) 아브라함이 이에 지혜롭게 한 개인의 이름을 지명하는데, 이것은 한 집단이 침입자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자산의 소유주는 고객을 환영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재치있게 활용한 것이다. 4) 10-16절 : 에브론은 아브라함의 실력있는 지위를 알았다. 11절의 제스쳐는 습관적인 가식이었을 것이며, 그가 생각하는 땅의 실제 가격은 높았으리라 생각된다(15절 참조). 4. 이삭의 신부를 선택함(24:1-67) 1) 하나님은 이삭과 관련하여 끝까지 아브라함의 믿음을 요구하셨다. 나이도 많고 안전할 만한 재물도 가지고 있는 그는 이제 부동의 자세로 약속의 다음 단계를 응시하면서 결단성 있게 행동했다. 2) 그리고 아브라함의 충성스런 종은 조용한 분별력과 경건(26절 이하)과 그의 주인에 대한 헌신과(12하반절, 14하반절, 27절) 사물을 꿰뚫어 보는 확고 부동한(33, 56절) 자세를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 환도뼈(thigh) : 엄숙한 선언을 의미. 3) 3-4절 : 오직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만 결혼하라는 명령은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일관성 있는 명령이다. 결혼의 대상자를 함부로 정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우리는 반드시 믿는 자를 결혼의 상대자로 삼아야 한다. 4) 63절 : 이삭이 들에 나가 묵상했다는 것은 아마도 자신의 결혼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5.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 민족들(25:1-34). 1) 1-4절 : 아브라함은 후처를 취하여 많은 자손들을 남겼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했다는 것이 일부다처제에 대한 성경적 기초가 될 수는 없다. 여기에 나오는 기사는 아브라함의 실수를 말해주는 것이며 아브라함의 이러한 실수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 중동에서는 끊임없는 분쟁이 있는 것이다. 2) 5-11절 : 결국 아브라함은 죽는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믿는 자가 영육간에 구원받아서 사망에 이르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적인 사망을 맞이하는 이유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2장에 근거하여 생각해 보건대 인간의 육체적 구원이 종말(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연기되어 있다는 말로써 설명될 수 있다. 3) 27-34절 : 야곱과 에서가 이삭의 아들로 태어난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판 것은 분명한 범죄이다. 그러나 야곱이 에서의 영광을 가로챈 것도 하나님 앞에서 명백하게 잘못된 것으로 판단 받는다. 그러나 본문은 야곱을 비난하지 않고,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12장은 그런 관점에 동의하며, 경박한 에서를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순례자들과 정반대의 예로 제시한다. 성경은 장자권을 쟁취하는 것보다 포기하는 것을 죄로 취급한다.
6. 이삭에게 나타나신 하나님(26:1-35) 1) 1-11절 : 이삭은 그랄로 내려가서 아비멜렉을 만난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비멜렉이란 명칭은 그것들이 바로 등과 같이 공직의 이름이었거나 되풀이 되는 가족의 이름들이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삭은 여기서 그의 부친 아브라함이 범했던 것과 같은 동일한 죄를 짓는다(12:13, 20:2). 인간은 여전히 연약하며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필요로 한다. 2) 12-22절 : 이삭이 번영했다는 것과 우물로 인한 분쟁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이삭이 번영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이다(12절). 그리고 13절 이후에 나타나는 우물이야기가 이삭의 이야기의 끝까지를 지배하는데 우물은 사막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3) 23-33절 : ‘브엘세바에서의 언약’. 여기의 언약은 아브라함과의 처음 언약을 새롭게 한 것이다(21:22이하). 언약은 세대(주체)가 바뀌면 반드시 갱신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24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자신이 ‘언약의 하나님’임을 계시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계속 유효하며 하나님은 그 언약을 잊지 않고 지키신다는 의미이다. 브엘세바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던 신성한 장소이며 이삭이 하나님께 처음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던 곳이다. 4) 34-35절 : 에서는 헷 족속 아내들을 취했으며 이것은 이방 백성과의 결혼이었으므로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또한 에서의 일부다처도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위반되는 죄악으로 에서가 육적인 쾌락주의적 생활에 빠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10. 야 곱(27:1-36:43) 1. 야곱이 복을 차지함(27:1-40) 27장은 자신의 책임을 믿음없이 육체를 따라 완수하려고 시도하는 가족 전체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 관여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잘못에 빠져있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주신 신탁(25:23), 곧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물리치고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다. 아버지의 계획에 동조한 에서는 야곱에게 맹세했던 것(25:33)을 파기하였다. 리브가와 야곱은 정당한 동기에서 제각기 믿음이나 사랑을 배제한 채 속임수로 하나님의 복을 얻으려고 했다. 결국 가족 전체가 범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허물에 대한 대가를 치루기 위해 기나긴 고난의 생애를 살아야만 했다(28-35장).
2.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감(27:41-28:9) 1) 야곱이 하란으로 떠나는 것은 결국 리브가와 야곱의 거짓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아야 한다. 이후에 야곱은 “몇 날 동안”(44절)이 아닌 “20년간”(31:28) 하란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였고, 리브가가 다시 야곱을 만났다는 기록은 더 이상 볼 수 없다(35:8, 27 참조).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만 범죄한 인간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2) 이삭은 야곱에게 가나안 사람들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고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고 명령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기 위함이었으며,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결코 근친상간의 의미는 아니었다. 3. 사닥다리 환상과 야곱의 서원(28:10-22) 1) 하나님의 계시(10-15절)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야곱이 어디를 가든지 그와 함께 하겠다고 계시하시며, 아브라함 및 이삭과 함께 체결한 언약을 야곱에게 되풀이하시면서 반드시 그 언약을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2) 야곱의 경건한 응답(16-22절) ① 여호와 앞에서 두려워 함-경외하는 마음. ② 기념으로 돌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부어 그것을 성별함. ③ 그곳을 벧엘(하나님의 집)이라 일컬어 그 사건을 기념함. ④ 처음으로 여호와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서원 형식으로 표현함(“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⑤ 십일조를 약속함.
4. 야곱과 라반의 딸들(29:1-30) 벧엘에서의 경험이후 야곱은 이제 에서로부터의 피난 생활에서 후손에 대한 약속의 성취에로 관심을 돌린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쉽게 라반을 만나고 사랑하게 된다. 역사와 사건들은 결코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개입 속에 질서있게 일어나는 것이다. 야곱은 라반에 의해 속임을 당하여 많은 세월(14년)을 고생하게 된다. 이는 야곱이 과거에 뿌렸던 씨에 대한 결과였다. 성경은 심는 대로 거둔다는 원리를 계속해서 보여 주고 있다. 5. 자손의 증가와 재산의 확장(29:31-30:43) 1) 자손의 증가(29:31-30:24) : 언약이 성취되고 있다.
2) 재산의 확장(30:25-43)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으로 가능했다. 라반은 비록 이방 신을 섬기고 있었으나 여호와께서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했다(27절). 그것은 야곱의 생활과 자신에게 일어난 결과(재산의 확장)로 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야곱은 이제 떠나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가나안의 후계자로서의 사명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특별한 섭리(초자연적 섭리)속에 야곱의 재산을 늘려 주시고 그가 떠날 수 있도록 역사하여 주셨다. 7. 라반으로부터의 도망과 하나님의 보호(31:1-55) 1) 야곱이 가나안으로 떠나려 한 이유는 첫째로 야곱의 물질적인 축복에 대한 라반과 라반의 아들들의 적대감(1-2절)이 점차 증가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하여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3절). 야곱은 자신의 떠나려는 계획을 두 부인에게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벧엘에서 하나님께 올린 서원(28:20-22)을 지켜야만 한다고 말했다. 부인들 역시 야곱의 말에 동의하고 떠날 것을 결심하였다. 2) 그리하여 야곱 일가의 도피가 이루어졌지만 라헬이 라반의 드라빔(家神像)을 훔치는 바람에 생각했던 것보다 위험스런 도피가 되고 말았다. 드라빔은 라반의 집안이 이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당시 드라빔을 갖는 것은 상속권을 갖는 것을 뜻했다(15c. B.C. Nuzi문서 참조). 아마도 야곱은 언젠가 몰래 하란으로 돌아가서 라반의 모든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고 했던 것 같다. 결국 드라빔을 찾는데 실패한 라반은 다시는 야곱을 그의 땅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조약을 체결한 후 떠나도록 허락했다. *경수(經水) : 여자의 생리현상인 월경에 대한 은유적 표현. 8. 야곱과 에서(32:1-33:17) 1) 1-2절 : 야곱은 길르앗을 떠나 길을 진행할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the angels of God), 즉 천사들을 만났다. 야곱은 그들을 “하나님의 군대”(많은 무리)라 하고 그 땅을 마하나임이라 불렀다. 이 사건을 야곱이 처음에 그 땅을 떠날 때 벧엘에서 천사들을 만났던 일(28:10-22)과 비교할 때 교훈되는 바가 많다. “하나님의 사자들”이란 표현은 구약에서 32:2과 28:11절에만 나타난다. 분명히 이 두 본문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다. 약속의 땅을 떠난 야곱에게 벧엘이라는 이름을 짓게 만든 그 사건이 이제 그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면서 마하나임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에 발생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야곱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시켰고 그의 약속의 땅에 대한 더욱 강한 믿음을 갖게 했다. 2) 3-20절 : 천사들을 봄으로써 힘을 얻은 야곱은 에돔에 있는 에서에게 사자들을 보냈다. 야곱은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였다. 야곱은 자신과 자신의 조상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하면서 기도했다. 이러한 확신과 두려움, 기도와 근심의 교차는 비록 성도라 할지라도 연약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3) 21-32절 : 야곱은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하나님과 중대한 씨름을 했다. 이 사건은 그의 생애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야곱이 처음부터 그가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중에야 상대방이 비범한 인물임을 깨달았고 축복을 기원했다. 한편,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의미가 숨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언약을 지키겠다는 것의 확증을 주시는 행위이다. 4) 에서와의 화해(33:1-17) 야곱의 걱정과는 달리 에서는 야곱에 대해 적대감보다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신 결과였다. 에서에게 적대감이 없다는 것으로 인해서 안도감을 느낀 야곱은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그가 깨달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9. 세겜에서의 비극(33:18-34:31) 1) 33:18-20 : 야곱은 세겜 땅에 장막을 쳤다. 세겜은 과거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장막을 친 곳이었다(12:6). 야곱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그 땅의 일부를 사서, 거기에 단을 쌓고(12:7), 그것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다. 그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그가 단을 쌓고 그러한 이름을 붙인 것은 주께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의 여정을 인도하셨음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2) 34:1-31 : 세겜에서 야곱의 딸 디나가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또한 이 비극은 복수심에 불타 올랐던 야곱의 아들들이 히위족속을 몰살시키는 참극을 연출하고 말았다.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야곱이 과거에 서원한 대로(28:19-22) 즉시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10. 벧엘로 다시 돌아옴(35:1-29) 야곱은 결국 벧엘로 돌아온다. 사실 야곱의 생애는 벧엘로 시작해서 벧엘로 끝나는 생애였다. 야곱이 처음 나그네 생활을 시작할 때 하나님께 복을 받은 곳이 벧엘이었는데(28:13-15), 그 후 30년간의 나그네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금 하나님의 복을 확인 받은 곳도 벧엘이었던 것이다(35:9-13). 드디어 베냐민이 출생함으로써 야곱의 가족은 완결을 보았고 이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다. 11. 에서의 후손들(36:1-43) 36장은 복잡한 내용으로 인하여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삭의 계보(25:19-35:29)가 끝나자 그의 아들들의 계보가 논의되고 있는 바, 이는 선택받은 계보(37장)로 넘어가기 전에 선택받지 않은 계보의 역사(36장)를 먼저 취급하는 관례(4장, 5장, 10:1-20, 10:21-31, 21:8-21, 22:1-18등을 참조)를 따르고 있다. 11. 요 셉(37:1-50:26) 1. 요셉이 이집트로 팔려감(37:1-36)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는 것은 택하신 가족을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관영할 때까지 그리고 가나안 땅을 소유할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외국의 지배아래 두는 것이 이미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의도(15:13-16)였기 때문이다. 본 장에는 이스라엘을 이집트로 인도해 들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님의 섭리 아래서 12형제들의 경쟁과 곤경을 통해 개시되고 있다. * 애굽으로 팔려 가는 요셉의 노정(路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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