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 성찬 세례

[스크랩] 세례와 성찬식의 의미

하나님아들 2013. 12. 2. 23:19

세례와 성찬식의 의미


 

 

세례의 의미

 

 

1. 세례의 일반적 의미

 

 1) 국어 사전적 의미

 먼저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의 국어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① '입교하려는 사람에게 주는 의식의 하나, 물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원죄 와 자범죄를 모두 사하고 성신에 의한 중생(重生), 하나님의 생명에의 참여(參與), 천국의 세사(世嗣), 의무 이행, 영적 은혜를 위하여 행하여지는 의식, 종파에 따라 다르나 대개 안수 목사가 머리에 점수(點水)하여 의식을 행함'

 ② '죄악을 씻고 새 사람이 되겠다는 표로 행하는 예수교의 의식'이라고 정의했다.

 

 2) 성경 원어적 의미

 세례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원래 성경을 기록하던 때 사용했던 용어와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에 세례 의식에 용어로는 명사로 ' '와 동사로 ' '를 사용하

고 있다. 그 용어의 원어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① '밮티스마'로 발음되는 세례의 명사로 '담금, 적심, 기독교의 세례, 에서 유래'이다

 ② '밮티죠'로 발음되는 동사의 의미는 '빠지다, 깊이 잠기다, 적시다, 가라 앉히다, 잠겨 정결케하다, 목욕하다, 물로 씻어 깨끗케 하다, 세례를 받다, 세례를 주다'

 ③ '밮티스모스'의 의미는 '1. 잠기거나 적시는 행동 2. 세례,침례(히 6:2) 3. 씻음, 목욕(막 7:4,8; 히 9:10)'

 이상의 성경 원어에서 사용된 '세례'는 일반적 의미로는 물속에 잠기는 것이며 그리고 잠기거나 목욕할 대상이 물로 가는 것이지 물이 수세자나 목욕할 대 상에게로 옮겨지는 것이 아닌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으니 세례가 결코 홍수의 침수는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적 의미로는 역사성을 입증하는 사전에 '세례'와 '침례'라는 단어로 동시에 번역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단 한 번 (밥티스마)를 받으셨는데 과연 약식 세례를 받으셨을까? 아니면 침수 세례를 받으셨을까가 궁금하게 된다.

 또한 (밥티조)에서 발전한 동사형 명사 (밥티스모스)의 번역도 '세례'와 '침례'로 동시 번역한 것으로 보아 원어적 의미의 원형식에 대한 번역이라기 보다는 사용상 의미의 용어로 이해하게 된다. 문제는 원래 '세례( )'의 영적 의미인 물 속에 장사 지냄받는 의식이라는 복음적 형식을 이해한다면 우리말 번역의 '세례(洗禮)라는 용어를 쓰건 침례(浸禮)라는 용어를 쓰건 그것을 문제 삼아 침례교(浸禮敎)에 거부감이나 장로교 전통에 대한 고집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3) 세례의 복음적 의미

 세례가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받으시고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세례 의식을 복음적 의미로 인식하고 나아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므로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

 ⑴ 세례는 회개를 전제한 복음 의식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례는 회개를 전제하는 의식이기는 하지만 속죄를 이루는 사죄권이 있는 것처럼 이해할 수는 없다. 값없이 주신 은혜로 믿고 회개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받는 복음 의식이다.

 세례( )는 행위임으로 '믿음의 의'를 마치 행위의 의로 사죄받는 것처럼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세례의 행위로 죄씻음받고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성령의 역사로 믿고 회개한 선한 양심이 세례를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 뿐이다.

 ⑵ 세례는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모범의식이다.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께서 친히 받으신 세례는 모든 의를 이루시려는 사랑의 계명 실천을 위한 모범이셨으며 또한 확실한 신앙고백의 증거였다. 우리가 세례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할 이유는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유언적 교훈 속에 포함하여 명령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마땅히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행하는 모든 일로 복을 받아야 하고 또한 주께서 본 보이신 사랑의 계명을 지켜 순종해야 할 복음이기 때문이다.

 ⑶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하는 의식이다.

 주님의 구속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성경에서 인용하기는 어렵지 않다. 성

경이 구속을 위한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속을 상징으로 의식화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찾기는 쉽지 않다.

 아래의 성경은 세례 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으심을 나타내 주는

참으로 놀라운 의식임을 계시하여 준다.

 주님은 율법을 완성하시려고 구약의 구약사적 형상인 송아지와 양의 죽음같이 십자가에 죽으심을 나타내 주는 의식으로 세례를 받으셨다. 주님이 받으신 세례가 결코 죄를 씻기 위한 세례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죄와 상관없이 받으신 세례였으니 주님이 받으신 세례는 구속의 죽으심을 의미하며 우리의 세례도 주님과 합하여 받은 세례였으니 곧 주님과 합하여 죽어진 영광스런 복음이다.

 ⑷ 세례는 예수님의 장사지냄을 의미하는 의식이다.

 세례는 주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속의 피를 다 쏟으시고 죽어 아리마데 요셉의 요청에 따라 십자가에서 내려져 세마포로 싸서 바위에 판 새 무덤에 장사되신 역사적 사실을 의미하는 복음적 의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세례는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받은 세례인 동시에

그리스도와 합하여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만 은혜가 되는 복음적 의식이다.

 ⑸ 세례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는 의식이다.

 세례의 또 다른 복음적 의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인 주님의 부활을 예표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다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주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실 때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우리도 그 안에서 함께 살게 하사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는 영광스런 복음의 의식이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도 없다.

 ⑹ 세례는 모든 의를 성취하는 의식이다.

 세례는 주님이 지상 초림의 사명인 구속적 사명을 모두 포함하여 완수하신

것을 내용으로 하며 구약의 율법적 의를 완성하시고 믿음의 의를 성취하는 칭의의 사역을 포함한 복음 의식이다.

2. 세례의 영적 의미

 구약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세례'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지는 않았으나 신약적 구약 사건 해석에서는 근거가 있으며 해석도 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의미의 세례가 구약성경에 이미 계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세례의 영적 근원에 관하여 구약 사건에 관한 신약적 해석에 대하여 연구 확인해 보자.

 

 1) 세례의 구약 계시

 노아때의 홍수 심판은 당시 세상의 관영한 죄악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으며(창 6:1-8:22) 이 때 구원받은 노아와 그 가족 8식구가 방주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건에 대하여 설명하는 사도 베드로는 홍수시의 물을 세례( )로 적용 해석하고 있으며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죄악을 씻음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죄 받은 성도의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서 받게 되는 것이 세례임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노아의 식구가 받은 세례가 죄사함 받는 것이나 사죄하는 효력과도 무관함도 발견하게 된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첫 번째 편지에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구름 아래 있던 것과 홍해 바다를 통과한 것을 세례( )로 영적 적용하면서 이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고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교회를 신약교회와 다름 없음을 영적 적용하고 있다.

 비록 구약 성경에 직접적인 세례의 용어가 쓰여지지는 않았지만 신약 성경의 기록자들은 세례의 기원이 구약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또한 노아때의 홍수 사건이나 모세 때의 홍해 사건의 공통점은 구원과 심판이라는 사실이며 따라서 신약 시대의 세례도 구원과 심판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성경의 통일성에 합치한다.

 결과적으로 아벨이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 외의 족장들이 세례를 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례가 죄사함받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들의 상징적인 의식임은 구약 성경에서도 분명히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성령 세례의 영적 적용

 세례자 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후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함으로 세례에 성령님의 사역이 관계되어서 '성령 세례'라는 용어가 계시되고 있다.

 아래의 성경은 성령과 세례와의 관계를 영적으로 적용한 예로서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받은 물세례를 전제한 내용들로서 성령 세례의 영적 상태도 물세례의 의미에 부합해야 한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주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을 예언했고(막 1:8) 주님께서도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으로 받을 세례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으며(행 1:4,5) 사도들도 마가 요한의 오순절 성령 체험을 한 후 주님의 성령 세례 예언을 깨달았으며(행 11:16)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이미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누구든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을 이루도록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였다(고전 12:13)고 기록하였다.

 

 

 

 . 성찬식의 의미

 

 

초대교회부터 매주 주의 날에 지켜졌던 성만찬은 기독교 예배의 중심이었다. 주 후 2C 경에 초대 교회교부 저스틴의 증언에 의하며 주의 날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였던 그리스도인들은 모일 때마다 성만찬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성만찬은 초기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16C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도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칼빈은 참다운 교 회는 말씀이 바로 선포되어지고, 성례전이 올바르게 집행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성만찬은 기독교가 탄생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예배의 중심적 행위로서 이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를 다시 뵙고 경험하며 주님과의 계약을 새롭게 다짐하는 예전이다. 그런데 보이는 말씀인 성만찬은 말씀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그래서 칼빈은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바르게 집행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말씀이 진실되게 선포되고, 마음으로부터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공동체가 아니라면 거기에 참된 그리스도의 성례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 예배는 초기부터 두 가지의 핵심적 부분 즉 "말씀의 예전"과 "다락방의 예전"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 러나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기독교 예전은 성만찬 중심(미사)의 예배 전통과 복음 선포(설교) 중심의 예배전통으로 나뉘게 되었다. 서로의 전통을 절대화하는 과정에서 초 대 교회예배 본질에서 어느 한 쪽을 등한시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20 세기에 이르러 예배의 갱신운동이 일어나면서 종교 개혁자들의 외침에 눈을 돌리게 되었 고, 그들이 성서와 초대교회의 원형을 회복하고자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초대 교회의 예배가 설교와 성만찬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케 되었고, 오늘의 현대 교회는 이 둘의 조화와 균형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예배에 있어 서 설교와 성만찬은 별개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 선포로서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성만찬의 교류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계획을 시도하였던 쯔 빙글리의 영향을 받아 한국교회는 그 동안 성례전 없는 예배를 시도해 왔고, 오직 말씀만 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토록 소중한 성례전을 일년에 일, 이회로 그쳐 한국 개신 교회는 어느 나라의 개신교회보다 성례전과의 접촉을 가장 멀리한 채 오 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의 한국 성결교회 예배현장에서도 성만찬이 집례되는 때에도 설교는 설교대로 하고 성만찬 예식은 별개의 예전으로 진행되어 말씀과 성찬이 전혀 연결되어지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또한 심한 경우에는 일년에 단 두 번 행해지는 성찬 예배 때에도 설교의 주제가 성찬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진행되어 도무지 회 중들이 성찬을 왜 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형식적으로 앉아 있는 경우도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회중들에게 있어서 성만찬이 곁들여진 예배의 경우는 지루하기만 하고 어색한 예배가 되어버리고 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새 천년을 맞이하여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해 나가야할 한국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모든 생활에 가장 중 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배에 있어서 적어도 주일 예배는 설교와 성만찬이 동시에 선포되 는 것이 바른 모습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먼저 성만 찬의 바른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고 기독교 대한 성결 교회의 성찬식 예전 순서와 갱신된 새로 만든 성만찬 예배 순서를 제시하고자 한다.

 

성만찬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 풀어주시는 은사의 성례전이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으로 이 구원의 은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과의 영작 교류를 베푸시며,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모든 세례 받은 자들은 성만찬 가운데서 죄 사함을 보증 받으며(마26:28),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는 것이다(요6:51-58).

이 성만찬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그 동안에 다양한 전동과 교리의 차이로 인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 왔으나, 지난 1982년에 세계교회협의회의 '신앙과 직제 위원회'에서 50년 간의 교회 일치를 위한 연구 끝에 [세례, 성만찬, 교역]이라는 소책자를 내어놓음으로써 성례전의 신학적 의미를 공동으로 고백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1. 성부께 대한 감사로서의 성만찬

항상 말씀과 성찬(떡과 포도주)을 포함하는 성만찬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또한 찬양하는 것이다. 즉 성만찬은 창조와 구원과 성화에서 완성된 모든 것에 대 하여, 인간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이제 교회와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또 하나님께서 장차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킴으로써 이룩하실 모든 것에 대하여 성부께 드리는 큰 감사인 것이다. 성만찬을 보통 '유카리스트'(Eucharist)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감사'를 뜻하는 것으로서 성찬을 받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일에 대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리는 것임을 가리킨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늘 성만찬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 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저 유명한 2세기의 순교자 저스틴의 [제1변증 서]에서 처음으로 초대교회 성만찬의 개요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 다.

"기도를 마치면 곧 우리는 서로 입맞춤으로 인사한다. 그리고 나서 빵과 포도주 섞인 물 한잔을 형제들의 인도자에게 가져간다. 그는 이것을 취하여서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주의 아버지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우리가 그로부터 이것들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기도 드린다. 인도자가 감사를 드리고 전 회중이 아멘으로 응답할 때 부제로 불리는 자들이 참석한 사람들 각자에게 신성한 빵과 포도주 섞인 물을 나눠주고 또 그들은 불참 자에게 그것을 가지고 간다"

이렇게 초대교회들은 주님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은총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렸다. 그래서 칼빈은 "주님의 만찬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라고 표현을 하였던 것이다. 결국 성만찬의 첫 번째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에 대하여 감사하는 감사의 예전인 것이다.

 

 

2.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의 성만찬

성만찬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기념, 즉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완성되었으며 아직도 온 인류를 위하여 작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생황과 그 희생에 대한 실제의 표징인 것이다.

여기서 '아남네시스'란 말은 과거의 어떤 일을 회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이 말은 "과거의 한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재현함으로써 그 사건으로 하여금 지금 여기에서 효력을 발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개신교에 의해서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단순한 기념설로서의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만찬에 적용된 바 성서에서 말하는 기념이라는 관념은 그것이 전례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서 의식으로 거행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현재적으로 효용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 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그 것은 바로 오늘 교회가 성만찬을 가질 때에 항상 그의 죽으심과 희생만을 강조하고 기념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성만찬 예배는 항상 무겁고 장례식 같은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단지 살았다 가 죽어서 기억을 남겨준 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단지 과거 안에 자리잡고 있는 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한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가 우리를 초대해 주 시고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위하여 기꺼이 당신의 식탁을 열어 주시는 메시아적 하나님 나라의 향연의 약속을 선포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즐거운 축제로서 성만찬을 행해야 할 것이다.

 

 

3. 성령 임재로서의 성만찬

성령은 성만찬에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참으로 임재하 게 하시므로 성찬재정의 말씀 가운데 포함된 약속을 성취시킨다. 성만찬에 있어서 그리스 도의 임재는 분명히 그 중심이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인 것이다. 즉 성령께서는 성만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신앙공동체에 임하게 하시고 성찬재정의 말씀 안에 포함된 모든 약속을 성취 시키는 것이다. 또한 성령은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례전적 상징이 되도 록 하시며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 를 통하여 교회는 새로운 창조의 생명과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확증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의 전체 행위는 하나의 성령 임재의 기도의 성격을 지닌다. 왜냐하면 이 렇게 성만찬은 성령의 역사 하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시대 이후 성만 찬 예전에서 성령초대의 기도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왔고 이 기도는 빵과 포도주와 공동체의 성령이 임재하기를 기원하는 기도였다. 그러므로 집례자는 성만찬 예배시에 성 령의 역할에 대한 설교를 함으로서 성만찬의 의미를 더욱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4.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교회의 생명을 양육시키는 그리스도의 성만찬 때의 교제는 곧 교회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를 의미한다. 한 장소에서 하나의 빵과 공동의 잔을 나눈다는 것을 어느 때 어느 곳에라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들의 동참자들과 하나됨을 말해 주며 그러한 효험을 가지는 것이다. 즉 성만찬의 본질중 한가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지체를 이룬 무리들이 동일한 신앙 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한 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수한 공동체 가 형성되어 진다는 것이 바로 성만찬의 독특한 면인 것이다. 성만찬의 또 하나의 명칭인 '커뮤니온 서비스'는 바로 이런 성도의 교제를 나타내주는 단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강조하고 있는 바울의 서신(고전10:16-17, 11:17-22)등에서 그 신학적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는 바로 이 성만찬 가운데서 완전히 나타나 진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발생과 계속적인 성만찬의 거행은 바로 이런 깊 은 뜻의 실현이 가져온 결과적 현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만찬 의식은 항상 전 교 회와 관계되면 전 교회는 각 지역의 성만찬 의식과 연관된다. 즉 성만찬 예전은 개 교회 를 중심한 개체적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어디서나 성만찬을 거행하는 무리들 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이다. 그래서 성만찬의식은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형 제들과 자매들로 간주되는 모든 사람들간의 화해와 참여를 요청하며 사회적, 경제적, 정 치적 삶에 있어서 적절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하나의 계속적인 도전인 것이다. 그리하 여 결국 성만찬은 삶의 모든 양상을 포괄하게 되는 것이다.

 

 

5.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마지막으로 성만찬은 창조의 종국적인 갱신으로서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대망하도록 해주며 또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즉 성만찬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축제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함을 축하하고 예상하는 축제이다.(고전11:26, 마26:29) 그러므로 성만찬은 이미 현현된 하나님 나라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열어 주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종국적 왕국의 잔치를 미리 경험케 하는 식사인 것이다. 한스 큉 은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현해 주는 귀한 예전임을 이렇게 표현 하고 있다."과거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회상과 감사의 식사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교제의 식사요 언약의 식사이다. 미래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메시아의 종말적 식사에 대한 예견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도 성만찬을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메시아의 향연의 예견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막14:25, 눅22:16-18)을 알게 되는데 진실로 성만찬은 종말의 기쁨과 영광 중에서 함께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 식사의 예표인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성만찬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 창조와 구속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제사요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며 또한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제사요 성령을 초대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성도들의 교제임을 또한 하나님 나라의 메시아적 향연이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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